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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마스, 이스라엘 휴전 제안에 동의할 듯
    [동포투데이] 이슬람 저항 운동(하마스)이 수감자 교환과 휴전 협정에 대한 이스라엘의 최근 제안에 대해 향후 48시간 이내에 응답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이 채널 12 TV를 인용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 측은 27일 압바스 카말 이집트 정보국장이 이끄는 이집트 대표단을 통해 하마스 측에 최신 제안과 조건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채널 12 TV는 보도에서 출처나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27일 저녁(현지 시간) 카츠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채널 12 TV와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슬람 저항 운동(하마스)이 수감자 교환에 합의하면 이스라엘 측은 라파에 대한 군사 작전을 보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집트는 현지시간으로 26일 중단된 가자지구 휴전협상을 재개하고 가자지구 남부 도시 라파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상공격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스라엘 관리들은 이번 회담이 이스라엘군이 라파를 공격하기 전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하마스는 27일 휴전 제안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식 답변을 받았고, 이를 검토한 뒤 중재자 측에 의견을 전달하겠다고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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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24-04-30
  • 나토 사무총장, 나토 정상회의에 우크라이나 대통령 초청
    [동포투데이] 옌스 스톨텐베르크 나토 사무총장은 29일 키이우에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한 후 젤렌스키 대통령을 올해 7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의에 초청했다고 우크린포름이 이날 보도했다.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스톨텐베르그 총장은 나토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보 지원을 강화하고 군인을 훈련시키는 계획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나토의 "장기적이고 예측 가능한" 지원을 보장하기 위해 개별 나토 국가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나토 공동의 우크라이나 지원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는 스톨텐베르크 사무총장과 나토가 자금을 지원하는 우크라이나 국방을 위한 특별 기금 설립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 계획에 따르면 나토는 5년 이내에 이 기금에 1,000억 유로를 지원할 예정이다. 젤렌스키는 또한 며칠 전 미국이 발표 한 새로운 군사 원조가 우크라이나에 도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9일 스톨텐베르그는 사전 발표 없이 키예프를 깜짝 방문했다. 우크라이나 위기가 고조된 이후 스톨텐베르그의 우크라이나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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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우크라이나
    2024-04-30
  • 바이든, '인기 없는 대통령' 등극, 트럼프는 여론조사 선두
    [동포투데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여러 건의 형사 재판에 직면해 있지만 CNN 최신 여론조사에서 트럼프가 49%의 지지율로 조 바이든 현 대통령의 지지율 43%를 안정적으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갤럽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39% 미만으로 떨어져 갤럽 여론조사에서 최하위를 기록했고, 지난 70년 동안 가장 인기 없는 미국 대통령이 됐다. CNN의 최신 여론조사에 따르면 바이든의 지지율은 1월의 45%에서 43%로 하락했으며, 등록 유권자의 61%가 지금까지 바이든의 대통령직 수행이 실패했다고 답해 3명 중 2명이 그의 행정부 성과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가 퇴임하기 전인 2022년 1월의 여론조사 데이터를 살펴보면, 그해 55%가 트럼프의 임기가 실패했다고 답한 반면, 최근의 여론조사에서는 44%만이 트럼프의 임기가 실패했다고 답했다. 현재 트럼프의 차기 대선 지지율은 49%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주요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이 지난주 금요일에 발표한 또 다른 새로운 여론조사에 따르면 2024년 1분기 바이든의 지지율은 38.7%로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같은 기간 지지율 41.8%보다 3% 포인트 낮았고, 닉슨(53.7%), 카터(47.7%), 오바마(45.9%) 전 대통령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갤럽이 과거 실시한 모든 대통령 여론조사에서 바이든의 지지율은 취임 39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지면서 지난 70년 동안 가장 인기 없는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바이든의 라이벌인 도널드 트럼프는 재임 당시 46.8%의 지지율을 기록했었다. 바이든은 1945년 갤럽이 조사를 시작한 이후 13분기 역대 대통령 중 최악의 성적을 거뒀다. 갤럽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13분기에 행정부 만족도가 50% 이하로 떨어진 카터, 부시, 오바마, 트럼프 등 전직 대통령 4명 중 오바마만 재선에 성공해 바이든의 재선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4년 전 트럼프의 재선 도전 실패가 2021년 1월 미 의회 폭동 사태로 이어진 이후 나온 여론조사로, 당시 유권자의 55%가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실패를 꼽았다. 뉴욕타임스는 CNN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많은 유권자들의 기억이 잊혀지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논평했다. 트럼프는 현재 여러건의 형사 제판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최근 CNN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는 49%의 지지율로 현직 대통령인 조 바이든의 43%를 꾸준히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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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美 리더십에 대한 글로벌 불만족도 상승
    [동포투데이] 미국 여론조사업체 갤럽이 최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3일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리더십에 대한 전 세계 평균 불만족도는 2023년 36%에 달해 2022년 33%보다 높았다. 보고서는 2023년 우크라이나, 핀란드, 인도, 케냐, 우간다 등 국가에서 미국의 리더십 만족도가 급락해 2022년보다 최소 10%포인트 감소했다고 밝혔다. 2023년 미국 리더십에 대한 전 세계 평균 만족도는 41%로 2022년과 동일하다. 이번 여론조사는 130개 이상 나라의 15세 이상 사람들의 표본으로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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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8
  • 캄보디아 서부서 탄약고 폭발...군인 20명 사망
    [동포투데이] 캄보디아 홍마나이 총리가 27일, SNS에 올린 글에서 캄보디아 서부의 한 탄약고에서 화재·폭발 사고가 발생해 20명의 군인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폭발로 인해 사무실 건물 한 채와 막사 여러 채가 파괴되고 인근 주택 25채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홍마나이는 캄보디아 왕실을 대표하여 사망자와 부상자 가족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 장례식과 조의금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크메르타임스에 따르면 사고 직후 당국은 긴급 구조와 조사에 나섰고 현장 상황은 이날 오후 5시쯤 통제됐다. 한편 이날 현지 경찰은 기자들과 만나 사고 원인은 조사 중이며 피해 규모는 아직 집계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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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8
  • 세네갈 중부에서 버스 전복 사고로 13명 사망
    [동포투데이] 세네갈 중부 지역에서 26일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해 최소 13명이 사망했다. 세네갈 통신사는 이날 19시쯤 카플린 중부 지역 1번 국도를 달리던 버스가 전복돼 최소 13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구조대원들이 현장에 출동해 구조에 나섰고, 부상자들은 인근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있다. 또 다른 매체는 사고의 원인이 차량 펑크일 수 있다고 보도했다. 2023년 1월, 세네갈에서 42명과 2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두 건의 심각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세네갈 정부는 그 후에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22개의 조치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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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24-04-27
  • 탄자니아, 계속되는 폭우로 155명 사망
    [동포투데이] 최근 동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폭우가 쏟아져 홍수, 산사태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있다. 탄자니아 최대 도시 다르에스살람 북쪽 키도니 지역에서는 현지 인프라가 많이 파손돼 주민들의 정상적인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다르에스살람 북부 키논도니 지역에서는 폭우의 영향으로 여러 도로가 침수돼 주민들이 물을 헤치고 이동해야 했고, 극심한 교통체증이 빚어지기도 했다. 마잘리와 탄자니아 총리는 25일 탄자니아에서 4월부터 계속된 폭우로 인해 155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탄자니아의 14개 주에서 약 2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1만 채 이상의 가옥이 파손되었다. 홍수 피해를 입은 대부분의 학교는 문을 닫았다. 마잘리와는 정부가 추가 재난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탄자니아 기상청은 엘니뇨 현상으로 인해 폭우가 5월까지 계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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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24-04-27
  • 中 외교부, 중·미 5가지 합의에 도달
    [동포투데이] 양타오(杨涛) 중국 외교부 북미ㆍ오세아니아 담당 국장이 2024년 4월 26일 밤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과 관련해 언론에 브리핑했다. 양타오는 중미 양측이 포괄적인 의견 교환을 바탕으로 다섯 가지 합의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양타오는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의 이번 중국 방문이 미중 양국 정상의 샌프란시스코 회동 합의를 이행하고 대화를 유지하며 이견을 통제하고 협력을 추진하며 국제 문제 조율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이라고 지적했다. 양타오에 따르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6일 오후 블링컨을 만나 중미 관계에 대한 고위급 차원의 권위 있는 입장을 밝히고 지도 의견을 제시했다. 같은 날 왕이 외교부장 블링컨과 5시간 30분 동안 회담을 갖고 중미 관계와 국제 및 지역 문제에 대해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의견을 교환하며 전략적 인식, 대만, 무역, 과학기술, 남중국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및 기타 중국의 핵심 관심사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왕샤오홍 국무위원 겸 공안부장도 블링컨을 만나 미중 마약단속 협력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25일에는 천지닝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가 블링컨과 회담을 갖고 상하이와 미국 간 교류협력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양타오는 블링컨의 방중 기간 양측이 포괄적인 의견 교환을 바탕으로 다섯 가지 합의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첫째, 양국 정상의 인도에 따라 중국과 미국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안정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 회담 이후 중국과 미국의 다양한 분야에서의 대화와 협력이 이루어진 긍정적인 진전을 인정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양국 정상이 합의한 중요한 합의의 이행을 가속화하기로 하였다. 둘째, 양국은 고위급 교류와 각급 접촉을 유지하고, 외교·경제·금융·통상 등 분야에서 복원·신설된 협의체 역할을 지속하며, 양군의 교류를 지속하고, 미·중 마약·기변·인공지능 협력을 더욱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셋째, 미·중 인공지능 정부 간 대화 첫 회의 개최, 미·중 관계 지도원칙 협의 지속 추진, 미·중 아시아태평양 실무협의, 미·중 해양·영사 협의 재개, 미·중 마약단속반 고위급 회담 개최, 중국의 류전민(刘振民) 기후변화 특사 방미 환영 등이다. 넷째, 양국은 양국 간 인적교류를 확대하고 상대국 유학생을 환영하며, 5월 중국 시안(西安)에서 개최되는 제14차 미‧중 관광 고위급 대화를 잘 운영하기로 했다. 다섯째, 양 측은 국제 지역 이슈에 대해 협의를 유지하고, 양 측 특사는 소통을 강화하기로 합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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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마크롱 “유럽 멸망할 수도” 경고
    [동포투데이]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5일 “유럽 대륙이 미국의 속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거듭 강조하며 더욱 강력하고 통합된 유럽 국방체제 구축을 촉구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마크롱은 이날 연설에서 “유럽은 멸종 위험에 직면해 있지만 그 위험에 맞설 능력이 없다"라고 경고했다. 마크롱은 유럽의 사이버 보안 역량 강화, EU와 영국 간의 국방 관계 강화, 고위 군인 훈련을 목표로 하는 유럽 사관학교 창설 등을 촉구했다. 마크롱은 또 “방위산업이 없으면 국방도 없다”며 “유럽은 수십 년 동안 투자가 부족했다”며 “유럽인들이 유럽산 군사 장비 구매를 우선시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마크롱은 특히 “유럽은 결코 미국의 속국이 되지 않을 것이며 세계의 모든 지역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마크롱은 오랫동안 유럽의 '전략적 자주성'을 주장하며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미국의 추종자'가 되라는 압박을 이겨내 왔고, 유럽이 직면한 '거대한 리스크'는 유럽 구축의 전략적 자주성을 저해하는 '자신만의 위기'에 빠지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그는 유럽이 국방 등의 분야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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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2024-04-26
  • 국제에너지기구 “향후 10년간 전기차 수요 계속 증가할 것”
    [동포투데이]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3일 전망 보고서를 통해 향후 10년간 전 세계 전기차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해 "2024년 판매량은 1700만 대로 전 세계 자동차 판매량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기차 수요 급증은 글로벌 자동차 산업을 재편하고 도로교통 분야의 석유 소비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으로 기대된다. '2024년 글로벌 전기차 전망'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2024년 중국 전기차 판매량이 중국 내 자동차 판매량의 약 45%인 1,000만 대 수준으로 증가하고, 미국과 유럽에서 전기차 판매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9분의 1, 4분의 1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파티흐 비롤(Fatih Birol) 국제에너지기구(IEA, International Energy Agency) 사무총장은 "글로벌 전기차 혁명은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새로운 성장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라고 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전기차 판매량은 35% 급증해 약 1400만 대를 기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전기차 산업은 올해도 강력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베트남, 태국 등 신흥 시장에서도 전기차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보고서는 중국이 전기차 제조와 판매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중국에서 판매된 전기차 중 60% 이상이 대등한 성능의 전통차보다 가성비가 뛰어나다. 보고서는 또 전기차 판매에 맞춰 공공 충전시설의 가용성을 확보하는 것이 성장 모멘텀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2022년 대비 2023년 전 세계에 설치될 공공 충전기는 40% 증가했다. 하지만 각국 정부가 약속한 전기차 도입 수준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충전 네트워크가 향후 10년 동안 몇 배 더 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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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
    2024-04-24

오피니언 검색결과

  • 中, 30여 년간 산속에서 숨어 지내다 숨진 女매국노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이 근 현대에 들어서면서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일본 침략자들이 중국 전체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31년 9.18사변이 발발한 후부터 일본군은 동북 3성을 교두보로 전반 중국 영토를 향해 침략 확장에 나섰다. 이러자 위기에 처한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지사들이 끊임없이 용솟음쳐 나왔다. 그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생명의 최후 순간까지 일제와 싸웠다. 하지만 일본군의 위협과 회유에 의한 매국노들도 적지않다. 이들 매국노들은 자신의 생명과 이익을 위해 조국과 동포를 팔아 먹었으며 결과는 아주 수치스러운 끝장을 보기도 했다. 당시 중국 내의 매국노는 적지 않았다. 크게는 위 국민정부를 세운 왕정위(汪精卫)였고 작게는 보통의 촌락의 악질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라와 민족의 역적들이었다. 그들은 보기도 구차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동포와 형제의 목숨을 마구 팔아 먹었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동맹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이들 매국노들은 그 대부분이 응분의 처벌을 받았다. 그중 한 미모의 여 매국노가 있었다. 그녀의 경력은 비교적 기구했다. 한 사냥꾼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산속에 숨어 살았다가 숨졌으니 말이다. 중국 동북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 장기(张琦)는 당시의 동북 군벌 장작림(张作霖)의 가문과 약간의 연계가 있었다가 장작림이 일본군에 의해 음해된 후 이는 그녀의 가정에까지 영향을 미쳐 명문가도 살기가 어렵게 됐다. 그렇게 되자 장기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친구였던 장경혜(张景惠)를 찾아가게 되었다. 장경혜는 자기를 찾아온 그녀를 잘 대해 주었다.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연인으로 되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장경혜는 일본군의 앞잡이로 되었다. 그러나 장기는 장경혜의 선택에 반대하지 않았다. 반면 장경혜의 권유에 꺼리낌 없이 일본군 진영에 가담하였으며 결국 매국노가 되고 말았다. 일본군이 동북을 점령한 10여 년 동안 일본군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그녀는 처음에는 어딘가 양심가책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그 횟수가 잦아짐에 따라 매국 매족의 일에 익숙해졌다. 그 댓가로 장경혜와 장기 두 사람 모두 일본군 밑에서 상금도 조금씩 받았고 근사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본군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그들은 정부와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장경혜는 일본군이 중국 대륙에서 철수 한 뒤 현지 정부에 의해 나포되었지만 장기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당시 그녀가 어디로 도망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장기는 자신이 그동안 한 짓거리들은 하늘이 천인공노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자기의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자신은 곧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고민 중 그녀는 다른 도시로는 도망가지 않고 황량하고 인적기가 드문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현지 정부와 주민들은 그녀의 행방을 한참 동안 추적했만 결국은 실패하고 그녀에 대한 수색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때로부터 30년이 흐른 뒤의 어느 날 산속으로 사냥하려고 들어온 한 사냥꾼이 장기의 거처를 발견하였지만 그 때는 그녀가 이미 죽은 뒤였다. 장기는 산속의 어느 한 동굴 내에 있는 헐망한 침대에서 죽었다. 신고를 받은 현지 공안은 즉각 산속에 있는 그 동굴로 찾아갔으며 장기의 죽음을 확인한 뒤 현장에서 발견된 그녀의 유품들을 정리했다. 장기의 유물 중에는 일본군을 위해 일했던 당시의 정경을 담은 사진과 함께 장기 자신이 직접 쓴 일기도 적지 않았다. 그것들을 보노라면 당시 그녀는 말 그대로 의기양양했고 대단했다. 그가 쓴 일기에 담긴 내용에는 허무맹랑한 대목도 여러 곳이 있었다. 원래 집안 형편이 넉넉했던 장기는 의지가 나약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장경혜한테 찾아가 의탁했고 또한 그와 함께 일본인 대오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기에는 정의적 심판이 두려워 산속의 깊은 곳에 숨어 있어야 했던 선택에 대한 뉘우침을 전달했다. 30년이라는 긴나긴 세월을 혼자 보내야 했고 음식과 옷가지 등의 부족은 그닥 힘들게 하지 않았지만 정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것은 끝없는 외로움과 얘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감옥 생활이 무서웠기에 그녀는 깊은 산속에서 홀로 지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녀한테 있어서 당시의 선택은 확실히 그녀를 후회하게 했다. 그것은 장기, 그녀의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으며 이는 결코 감옥생활보다 편한 것은 아니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12-01
  • 中, 유엔 평화수호 행동의 관건역량으로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은 30년 넘게 유엔 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하면서 유엔 평화 유지부대의 핵심 역량으로 됐으며 말리, 콩고 등 임무 수행 지역에서도 그랬고 갑작스런 코로나19 사태 시에도 중국의 평화유지군은 ‘대국의 담당역할과 세계 평화 수호’란 초심과 사명감을 안고 실제 행동으로 전란 충돌 지역의 인민들에게 평화와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본 ‘동포투데이’는 오늘부터 세 번에 나누어 중국 UN 평화유지군의 사적을 시리즈로 싣는다. 중국의 첫 아브예이 평화유지 헬기 분대 ● 주즈친(褚志勤) ‘평화 수리개’의 재 출정 2019년 8월 20일의 아침, 궂은비가 내리는 날씨도 출정 열기를 식히지 못했다. “푸른 헬멧 수리개, 사명 수행, 나는 나의 사명을 저버리지 않고 조국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쟁쟁한 다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는 일-76 항공수송기에 탑승한 뒤 배웅 나온 수장과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으며 모두들 오랫동안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중국인민해방군 제82집단군 모 육군항공여단으로 구성된 중국의 제3진 다르푸르와 행 헬기 분대의 140명 장병들은 평화를 위하여 만리 원정에 올랐다. 우리는 2년여 동안 다르푸르와 압예이에서 평화유지 임무를 수행하면서 수단 정부의 교체와 코로나19의 확산 등을 겪었으며 새로운 지구에 대한 개척 임무의 시련과 도전으로 2회 연속 전체 장병이 유엔으로부터 평화영예훈장을 수상했다. 평화유지란 곧 전쟁터이며 비행기에 올라 이륙하면 곧 전쟁터에 투신하는 것이다. 평화유지부대의 임무지역 수송은 국내 여느 공군 비행훈련과는 달랐다. 기상, 고도와 환경 등을 고려하는 것 외 무장력 회피, 극한 날씨 대비 및 돌발 상황 대처 등 문제도 안고 있다. 2019년 10월 17일, 자링가이에서 중상을 입은 이집트 평화유지 경찰을 데리러 가던 중 우리 비행조는 산악지대의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큰 비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비구름이 형성되기 전에 회항할 수 있도록 임무진행을 앞당겨 실행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 우리가 중상자를 인계받아 수속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자 아니나 다를까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검은 구름이 몰려오면서 항로 앞쪽과 옆쪽의 멀지 않은 곳에서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회항인가? 아니면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가? 자링가이로 돌아오면 응급처치가 지연되고 비행을 계속하면 또 어느 정도의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생명이고 임무는 명령이었다. 나는 신속하게 조수석에앉은 사병한테 기상 레이더를 켜고 항로 전방의 구름 양상을 알아내라고 명령했다. 그 뒤 우리는 좁은 구름 사이로 통과할 수 있는 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부랴부랴 항선 바꾸기 계산에 들어갔다. 당시 남쪽으로는 비행금지구역이 있었고 북쪽으로는 미라산이 있었다. 나는 조수석 사병의 도움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항선을 수정하는 한편 구름 사이로 상황을 살피면서 무전기로 항선 바꾸는 정보를 주고받았다. 미구하여 헬리콥터가 하늘의 구름 사이로 더듬거리며 비행하던 중 갑자기 구름이 모였다 사라졌다 하면서 순식간에 강한 소낙비를 내리 쏟았으며 바람에 빗방울이 헬리콥터 창문을 때리면서 앞을 거의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즉시 조수더러 기계룸에 들어가 계기마다를 관찰하게 하였으며 그와 함께 헬기 상태를 협동으로 통제했다. 15분 뒤 마침내 헬기가 구름을 뚫고 나가자 파시르 공항이 내려다보였다. 이어서 우리는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었고 이어서 중상자를 무사히 우리를 기다리는 의료진에 인계했다. 그 후 무사히 구급차에 실려 가는 중상자를 보며 구급요원이 우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순간 우리 또한 비가 멎고 하늘이 개인 뒤의 따뜻함을 느꼈다. 다르푸르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기간 동안 우리 헬기 분대는 잇달아 비행을 재개하여 임무 지점을 개척하였으며 그 항로는 총 3598km에 달한다. 그리고 전용기를 이용한 요원 수송, 긴급의료 후송, 낯선 지역에 대한 답사, 여객화물의 배달 등 임무를 90여 회 수행했고 요원 1195명과 화물 40여 톤에 달해 유엔 ․ 아프리카연합으로부터 각종 평화유지 활동을 수행한 ‘벤치마킹 팀(标杆团队)’으로 평가받았으며 전체 장병은 2020년 10월 ‘유엔 평화영예훈장’을 수여받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2559호 결의에 따라 유엔·아프리카연합은 2020년 12월 31일 당지에서의 임무수행을 종료했으며 이로써 UAE는 수단 다르푸르 지역에서 13년간 지속된 평화유지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바로 이때 우리는 또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제자리에서 중국의 첫 번째 아브예이 평화유지 헬기 분대를 뽑아 즉각 새로운 임무구역을 개척하라는 것이다. 유엔은 현지에서 군사력 대국끼리 사이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평화유지군을 설립했다. 소식을 들은 후 우리 모두가 잇달아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자원하여 새로운 임무지구로 가서 평화유지 임무를 계속 수행하겠다는 것이었다. 붉은 손도장을 찍은 작전 청원장이 손에 건네졌을 때 나는 그날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시 나의 눈앞에는 전화기가 있었고 뒤에서는 조국이 밀어주고 있었다. 새로 구성된 임무분대 86명 장병들이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결의에 우리는 서로서로가 감동했다. 행장을 정비한 우리는 다시 출정하여 새로운 지역으로 떠났다. 이적기간은 폭염우기여서 우리 모두는 함께 건량을 먹으면서 파시르에서의 철거를 완료했다. 그 뒤 100일간 우리는 천리를 넘나들고 지혜를 모아 난관을 돌파하면서 공중회전, 공중수송과 육지운송의 세 가지 방식을 사용, 마침내 86명의 인원, 헬기 2대, 장비 40대, 컨테이너 86개가 아비에이에 도착했다. 이어 우리는 그 어떤 조정도 할 겨를이 없이 바로 새로운 임무구역 건설에 투입되었다. 75명의 당원들은 적극적으로 임무를 받아서는 집을 짓고 길을 닦았으며 다시 파이프라인(管架线)을 매설하고 캠프를 치면서 준비근무를 하였다. 즉 맑은 날의 땀과 비 오는 날의 진흙탕으로 우리는 악전고투를 했던 것이다. 결국 도착 직후에 있은 장비 검증에서 높은 표준으로 1차적으로 통과되었다. 2021년 8월, 분대 장병들이 출정한지 꼭 2주년이 되는 해에 우리 분대 전체 장병들은 재차 유엔 평화영예훈장을 받게 되었다. 중국군이 31년간 유엔 평화유지 활동에 참가하면서 이처럼 순환, 철거와 전속의 재배치를 어느 한 평화유지 부대 항공 분대에 동시에 맡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86명 장병들이 2개 임무수행 구역을 돌면서 ‘평화영예훈장’을 연속 2번이나 받았다. 총적으로 우리는 2년간 3차에 달하는 최장 기간의 해외 평화유지 임무를 수행하는 기록을 세우면서 아브예이 지역의 첫 중국 평화유지 세력으로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임무 구역이 성공적으로 개척되어 중국이 유엔 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지역 범위를 넓혔으며 해외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을 효과적으로 검증하였다. 나는 이러한 큰 행동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평화유지의 담당은 평화의 유전자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중국의 이름으로 세계 평화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영예를 걸고 감히 총과 탄우를 뚫고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중국 공산당의 100년 행정에서 세세대대로 전해 내려온 분투정신이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고 아프리카에서의 고난과 기쁨, 피와 땀과 수확으로 되어 우리 평생의 재부와 추억으로 될 것이었으며 가슴에 달린 당 휘장과 빛나는 ‘평화 영예의 훈장’으로 되었던 것이다. (작자는 중국의 첫 번째 아브예이 평화유지 헬기 분대장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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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8
  •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무정장군⑥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전번 계속) 장군의 죽음 평양에서 후퇴한 후 무정이 이끄는 조선인민군 제7군단이 압록강 연안의 만포진에 주둔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무정은 팔로군 시절 부하였던 부상 장교 1명을 데리고 군단 의무소를 찾았다. 무정은 군의관을 보자 일손이 바쁜 그에게 데리고 온 부상 장교부터 돌보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군의관은 단도직입적으로 무정에게 “부상자가 매우 많기에 지금은 안 된다. 그리고 군단장의 옛 부하도 예외가 없이 반드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내뱉었다. 사실 군의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조는 매우 오만했다. 규정을 지키더라도 겸손하게 말했으면 모를까? 처분받은 군단장이라고 군의관마저 무시한다고 느낀 무정은 참을 수가 없었다. 분이 상투밑까지 오른 무정은 권총을 꺼내들더니 겁에 질려 사시나무 떨 듯 하는 군의관을 한방에 쏴죽이고 말았다. 아무리 군단장이라 해도 이는 엄중한 과오였다. 아니, 군단장의 신분으로 말하면 더욱 엄중한 규율 위반이었다. 그리고 이는 가뜩이나 무정을 못 마땅해 하는 김일성한테 그를 숙청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무정은 곧바로 군단 지휘권 해제에 이어 군에서 제명되고 말았다. 얼마 후 무정은 홍군 장정 때의 지병인 위궤양이 발작했다. 이러자 중국군을 지휘하던 팽덕회는 무정을 중국 동북의 최고로 꼽히는 병원으로 후송하도록 하여 또 한번 무정한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무정이 루마니아인이 장춘에 개원한 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시간적으로 이미 늦었다. 무정 역시 자기가 건강을 회복할 가망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무정의 마지막 소원은 그의 고국 조선에서 생을 마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 1952년 10월 조선으로 다시 호송된 무정은 얼마 뒤 어느 한 평범한 군부대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향년 47세였다. 무정이 운명하자 당시 조선 정부는 형식적으로나마 그를 위해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인물 평가 솔직함과 용기로 유명한 무정은 성격이 불같고 용감했으며 또한 끈질기게 헌신하는 혁명가이자 걸출한 지휘관이었다. 인민군의 장성 중에서 무정은 단호하고도 의욕적이었으며 또한 재능이 탁월했다. 특히 그는 포병분야에 정통했었다. 그것을 밑천으로 무정은 인민군 제1진 포병부대 지휘원들을 양성했으며 인민군 창설자 중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장에서의 무정의 용맹함과 우수한 포병 기술에 비해 그의 정치능력은 오히려 2류 정치인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전쟁에서의 표현을 볼 때 남반부에서의 인민군 실패를 그가 떠안는 것은 매우 불공정한 일이었다. 무정은 김일성과 더불어 전기적 색채를 띤 군사영웅이었다. 인물과 인물을 비교하는 건 아니지만 혁명생애에서의 무정은 시간적으로 보나 경력 혹은 자격적으로 보나 김일성보다는 차원이 높고 경력 또한 쟁쟁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국으로 입국한 무정은 직위적으로는 김일성보다 낮을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당시 김일성이 소련이란 강대국을 등에 업지 않고 직접 중국 동북으로부터 귀국했고 무정 또한 중국공산당이라는 뒷심이 없이 중국 화북으로부터 귀국했더라면 김일성이 전반 북조선을 장악 통제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을 것이고 한반도 북쪽의 현대사는 아마 다르게 씌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45년 당시 조선으로 귀국할 때 김일성의 빨치산 직계부대는 200여명인 반면 무정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부대는 수천 명으로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부대였다. 하긴 그렇건 말건 그들 두 사람 중 김일성은 유명한 항일 빨치산의 지도자였고 무정은 중공군 소속 조선의용군의 지도자였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무정은 군사에서는 비범한 재능을 갖추고 있었으나 정치적 두뇌적으로는 김일성에 비해 한 수 아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한편 중국공산당 군대의 포병과 조선의용군을 이끌었던 무정은 중국과 조선에서 모두 전설적인 군사적 성취를 이뤄냈다. 그는 줄곧 신비로운 인물이어서 역사학자들은 무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와 그의 조선의용군은 많은 이들의 큰 기대를 받았었다. 그런데 그가 조선의 정치무대에 반짝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진 것이 마치 떨어지는 별찌와도 같았다. 무정은 1946년 북조선공산당의 2인자로 선출됐지만 그의 정치적 지위는 빠르게 추락했다. 새로 건립된 나라에서 그는 순수한 군사적 직책만 남게 됐고 그 남은 군인생애도 1950년대에 있은 6.25전쟁으로 명예와는 인연도 없이 결속됐다. 에필로그 무정 개인에 대한 자료는 여전히 적은 상황이다. 1994년 중국 연변인민출판사가 ‘무정장군전(武亭将军传)’을 펴냈지만 발행 부수는 연변 지역에만 한정돼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은 최고지도자 외 다른 인물을 거의 선전하지 않기에 무정이란 인물이 알려질 리 만무했고 한국 또한 그가 공산주의자란 신분 때문에 유보하다가 2000년대 초에 와서야 교과서에 무정은 포병 전문가라고만 간단히 소개했다. 하지만 이는 차라리 그가 직업 혁명가라고 소개하기보다는 많은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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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8
  •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무정장군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전번 계속) 남침 작전 기간의 장군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고 무정은 포병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정식으로 중장 계급장을 달게 됐다.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무정은 민족 보위성 부상(국방부 부부장 격) 겸 인민군 포병사령관을 맡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7월 원래의 계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김일성은 김광협의 뒤를 이어 무정을 2군단장으로 임명하고 중국 홍군 명장의 지혜와 기백을 떨칠 것을 희망했다. 인민군 2군단장을 맡은 무정은 국지적 포위, 우회와 퇴로 차단 등을 결합하면서 소백산을 지키는 미 8집단군을 격퇴하였으며 7월 말 경에 이르러서는 김천-상주-예천-안동-영덕까지 내려가 낙동강 강행도하를 준비했다. 한편 김일성은 미군 병력이 낙동강 방어권을 형성하고 미 본토로부터 육속 증원군을 부산에 보내는 것을 알게 되면서 충주 남쪽 수안보에 위치한 전선총사령부로 이동해 조선 광복 5주년 기념일인 8월 15일 전으로 부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무정은 한 달 가까이 미군들과 겨루면서 인민군과 미군의 실력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8월 공세’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김일성은 자신의 고집(실제로는 배수진을 친다는 의미도 있다)을 내세우며 무정을 인민군 동부전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6개 사단을 맡겨 ‘8월 공세’의 주공격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즉 김천 북쪽으로부터 영덕으로 전개하면서 대구, 영천과 포항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제15사단: 선산 부근에서 강을 강행 도하한 후 유학산을 거쳐 대구로 진격한다. 13사단: 낙동리 부근에서 강을 도하하여 다부동을 거쳐 대구로 진격한다. 1사단: 신속하게 군위를 점령하고 13사단과의 좌익 배합으로 대구로 진격한다. 8사단: 신속하게 의성의 적을 격파하고 영천으로 진군하여 경주나 대구로 진군할 준비를 한다. 12사단: 태백산맥을 가로질러 포항까지 신속하게 밀고 나가 연일이나 경주를 거쳐 부산으로 진격할 준비를 한다. 5사단: 신속하게 영덕 탈취 후 포항으로 진격하고 이후 12사단과 함께 부산을 향해 진격할 준비를 한다. 무정은 또 제766 유격대에 울진을 출발하여 안강리교(안강리 동면 형산강에 놓인 다리)와 청도 도로를 파괴하도록 명령했다. 1950년 8월 5일부터 1950년 8월 24일까지 계속된 전투로 인민군은 영덕과 군위, 왜관을 점령했다. 그리고 한시기 인민군의 포탄은 대구 시내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12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 1만여 명을 포항에서 포위하기에는 성공했지만 해상봉쇄를 하기에는 실패했다. 12사단은 한국군 3사단의 1만여 명을 포항에서 포위했지만 해상을 봉쇄하지 못한 탓에 한국군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총적으로 인민군은 약간의 승리는 있었지만 산악지대에서의 작전과 유엔군의 공습으로 후방 보급이 크게 파괴되었다. 또한 동부 전선의 인민군 부대들은 8월 12일 이후 쌀 한 톨도 보급 받지 못했고 현지에서는 보급품을 전혀 징수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8월 15일과 16일 이후로는 전반 부대가 움직일 능력이 없음에도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무리한 작전을 강행해야 할 때도 있었다. 한편 무정이 기대했던 제766 유격대는 청도터널을 파괴해 연합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명령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제766 유격대장은 “여러 갈래로 분산 침투해도 전투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남조선군 경계망을 뚫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규 부대로 돌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유격전에 능한 이 부대는 안강리 지대에서 생소한 정규 작전을 수행하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기 마련이었다. 이에 몹시 분노했지만 어쩔 방법이 없게 된 무정은 유격대를 해체하고 12사단과 병합했다. 하지만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인민군에서는 ‘잔학한 괴멸적 전술’이라고 불렀음)과 병력의 반격이 끊이지 않았고 뒷심이 결핍한 인민군은 부득불 낙동강 우측 대안으로 후퇴해야 했다. ‘8월 공세’가 선승후패(先胜后败)하자 인민군은 앞으로 더 진격하려고 ‘9월 공세’를 준비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 당시 전선의 상황은 이미 유엔군과 한국군에 유리하게 역전되었다. 인민군 병력이 공세를 펴기 어려운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요행 외에는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다. 이는 그야말로 도박꾼의 올인이었다. 이번에도 무정의 부대는 여전히 주 공격을 담당했다. 당시 주 공격을 앞두고 무정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제3공격군단(1사단, 3사단, 13사단, 105 기갑사단 주력)은 미 제1 기병사단과 남조선 1사단 방어망을 뚫고 대구를 점령한다. 제4공격군단(8사단, 15사단, 17 기갑여단)은 남조선 6사단과 8사단의 방어망을 돌파하고 하양과 영천을 점령한 뒤 대구나 경주를 향해 진격한다. 제5공격군단(5사단, 12사단)은 남조선 수도사단과 제3사단 방어망을 뚫고 포항동과 연일비행장을 점령하고 경주 일대에서 부산으로 진격할 준비를 한다. 9월 2일 밤, 무정 지휘사령부의 대대적인 야간공격이 시작되어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으며 특히 제12사단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한국군 수도사단과 5사단을 잇달아 격파하였고 유엔군의 동부전선에는 약 12킬로미터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9월 5일까지 미 1기병사단과 한국 3사단도 잇따라 패하면서 포항동이 점령당했고 8일엔 인민군이 영천도 점령했으며 미 제8군 사령부와 한국군 사령부는 모두 대구에서 부산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그 시각 서부전선의 인민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무정은 사방에서 밀려오는 유엔군과 한국군의 반격을 막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바로 그럴 즈음,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인천상륙이 성공되면서 남쪽에 있는 인민군한테는 큰 재앙이 들이 닥쳤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으로 인민군은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만 했다. 후퇴 명령을 받자마자 유격전의 전략을 잘 알고 있던 무정은 각 사단의 퇴로를 마련한 뒤 모든 무전 연락을 끊었다. 결국 미군은 물론 평양의 김일성도 그가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알 수 없게 됐다. 평양의 김일성은 화가 나서 안절부절을 못했지만 무정의 안동 사령부는 별로 큰 장애가 없이 원주를 거쳐 38선 이북의 김화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무정이 거느리는 몇 개 사단 중 13사단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순조롭게 북쪽으로 돌아감과 아울러 대부분의 골간 장병들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필요한 행동에 평양은 오랫동안 그의 소식이 끊겼기 때문에 극도로 화가 나 있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무정과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소식에 소련 고문들은 공개적으로 무정의 개인주의 성향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무정은 평양을 사수하라는 김일성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무정의 수하에는 만 명도 안 되는 예비사단 2개뿐이었고 무정 또한 포위섬멸되거나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는 정부가 북으로 철수하자 비교적 가벼운 저항만 하고는 부대를 이끌고 철수를 했다. 이어 유엔군이 공수부대를 파견하여 그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고 또한 무정 부대의 철수가 늦어지면서 마지막 1개 연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기실 당시 무정이 평양을 포기하고 유생역량을 보존한 것은 정확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수도를 쉽게 포기한 것은 그의 명성에 큰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다른 작은 정절에 있어서 무정이 임명한 한 관원이 정상적인 행정심사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 등으로 무정은 예비군단인 7군단의 군단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말았다. 이는 군인에게는 특히 수 십 년 간 전장을 누빈 군인 무정한테는 큰 실망을 의미했다. 이어 1950년 12월 21일부터 23일까지 있은 조선노동당 2기 3중 전회에서 무정은 ‘전쟁 중에 저지른 엄중한 과오’로 강력한 처벌을 받았다. 이는 무정의 개성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불평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처벌이었다. 그리고 이는 정치와 전투장의 이중적 실정으로 인해 이런 비극적 결말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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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1
  •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무정장군④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전번 계속) 장군의 귀국 1945년 12월의 어느 추운 날, 낡은 증기기관차 한 대가 70여 명의 승객을 싣고 평양역으로 들어섰다. 당시 이 승객들 중에는 무정, 최창익 한빈 등 연안출신 조선독립동맹 간부들이 있었다. 그들을 맞는 평양역에는 격앙된 음악도, 휘날리는 깃발도, 귀국하는 혁명가들을 환영하는 열띤 인파도 없었다. 몇 명의 접대인원들만이 이들을 영접하기 위해 열차에 올라왔을 뿐이다. 그들은 긴 인사도 없이 무정 일행을 역에 대기 중이던 트럭에 서둘러 태우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조선에 진출한 소련 홍군은 조선의용군이 ‘비무장 차림’을 약속할 때까지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고 한 시기 조선의용군의 조선입국을 막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군대나 정당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만 입국이 가능하게 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소련군이 그들의 입국을 막았기에 대부분 조선의용군 주력은 중국 동북 각지에 남아 중국의 내전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조선의용군이 조선으로 입국하는 데는 기나긴 여정도 있었다. 이에 앞서 1945년 8월 11일, 팔로군 사령부는 무정이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빠르게 북상하여 소련 홍군과 손잡고 조선광복을 이룩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사흘 만에 항복 선언을 하면서 조선의용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조국을 해방시킬 기회를 잃게 하였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지 이틀 만에 무정은 태항산(조선의용군의 주 근거지)에서 장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연안으로 돌아와 귀국 준비에 착수했다. 하지만 귀국 준비라고는 하였으나 구체적인 귀국 계획이 거의 없었다. 다만 어디에 집중하여 조선으로 돌아갈지에 대해 토론했을 뿐이다. 1945년 9월 5일, 조선의용군 300명 선봉대는 연안에서 출발했고 이어 여성과 어린이까지 동북에 도착하면서 대오는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60여 일간의 고생 끝에 심양에 도착했을 때는 1945년 11월 초였다. 심양에 도착한 대오는 간부들만 병영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주민 집들에 분산돼 휴식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7일 조선의용군은 한 조선인학교의 운동장에서 조선의용군 군인대회를 열고 소련군과 교섭한 결과를 모두에게 알렸다. 소련홍군과의 교섭 결과 소수의 간부만 귀국이 허용되고 나머지는 중공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7개 지대(실제 4개)로 편성됐다. 제1지대는 남만에서 창설됐고 지휘관은 김웅, 방호산과 최인이 맡았다. 북만에 창설된 제3지대는 이상조, 주덕해가 지휘관을 맡았으며 연변에 창설된 제5지대는 이익성과 박일우가 지휘관을 맡았다. 그리고 제7지대는 길림에 창설됐으며 지휘관은 박훈일과 최명이 맡았다. 이후 이들 대부분은 개인 신분이나 작은 규모로 조선으로 나가게 됐다. 한편 귀국 간부단은 1945년 11월 20일 중조 접경도시 안동(지금의 단동)에 도착했으나 조선입국 허가를 받지 못했다. 무정이 소련군에 입국허가를 신청하자 무장을 해제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열흘 뒤 이들이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도착하자 소련군은 열차를 배치하여 그들을 평양으로 보냈다. 이들은 평양역에서 트럭에 실려 태평양 여관으로 옮겨져 임시 자리를 잡았다. 이때 조선독립동맹 지도자들은 매우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그들은 평양의 정치적 분위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군대가 없었다. 그들은 자기의 조국에서조차 타국에서 떠도는 나그네처럼 소련 사람들의 배치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누구누구는 속속 보직을 받아 여관을 떠났지만 나머지 대다수는 여전히 여관에 남아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김일성이 소련 대령과 함께 여관을 찾아왔다. 김일성은 최창익 등과 회담하였다. 김일성은 미군이 남조선에 진주했으며 그들은 남조선을 떠날 생각이 없어 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한편 그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배치할지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다가 1946년 1월 마지막 귀국자가 이 여관을 떠났다. 심하게 배척된 장군 무정은 조선인들에게는 영웅이었지만 소련 사람들이 보기엔 얄미운 놈이었다. 소련은 무정과 그의 조선의용군에냉담했으며 군인이 아닌 문인이 조선의 지도자로 활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굳이 군인이더라도 소련군이 잘 아는 김일성을 선호했다. 무정의 귀국에 앞서 1945년 10월 28일 신설된 북조선 5도의 행정 선거에서 무정은 2인자로 행정국 부위원장(1인자는 민족주의자 조만식이었음)으로 선출됐다. 무정은 1946년 4월까지 이 직책을 맡았고 그 달 있은 선거에서 곧 바로 밀려났다. 또한 무정과 함께 귀국한 저명학자 김두봉은 북조선 인민위원회 1인자로 ‘선거’됐고 김일성은 2인자로 선출됐다. 이어 무정은 인민보안간부학교 포병 교무장으로 파견됐다가 1948년 제2인민보안간부학교 교무장으로 임명됐다. (주): 인민보안간부학교는 조선의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학교일 뿐만 아니라 당시 공개되지 않았던 조선인민군 사령부였기에 무정의 교무장 직책은 사실상 인민군 포병사령관이다. 그 당시 무정은 정치투쟁에서 기교가 부족했거나 더 정확하게는 권력 다툼에 아주 서툴렀다. 무정은 아주 강직한 사람이라 일찍 연안에 있을 때에도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는 다른 지도자들과 충돌하는 바람에 다수의 독립동맹 간부들과 많은 불화를 겪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다. 이렇게 되자 결국 중공중앙은 조선독립동맹의 내부투쟁을 피하기 위해 무정더러 조선의용군을 전담하게 하는 동시에 비교적 상냥한 김두봉에게 독립동맹의 정치위원을 맡겼다. 그러던 무정이 조선에서 2인자로 등극했지만 또 광범위한 비난을 받았다. 즉 중국에서 온 간부들은 비교적 중요한 자리에 배치하고 국내 출신이나 빨치산 출신 간부들을 배척했다는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 부수상 모두 자신의 정치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 사이에 낀 무정은 더욱 실의에 빠졌다. 1946년 간부회의에서 무정의 참았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그는 자신의 옷자락을 와락 잡아당기며 놀란 관중들을 향해 그들에게 자신의 몸에 있는 총탄 흔적을 보여 주었다. “내 몸의 이 상처의 흔적 좀 보라구. 내가 조선을 위해 지불한 대가라구. 당신들은 지금 왜 다른 한 사람(김일성 지칭)만 찬미하는 거여?!” 무정의 이런 감정적 발로는 후에 그의 정치 인생에 막대한 악영향을 줄 것은 분명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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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0
  •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무정장군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전번 계속) 조선의용군 창설 사업 무정은 또 다시 과로로 인해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고질인 위장염이 재발한 것이다. 이러자 사령부에서는 재차 그에게 휴식을 명령했다. 건강이 회복될 즈음 무정은 또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됐다. 대일 작전을 모색하기 위해 연안에 찾아온 조선인 청년들을 집중시켜 조선의용군 건군 작업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는 토지혁명시기에 살아남은 조선혁명가 10여 명을 골간으로 하고 연안에 찾아온 조선청년들 그리고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조선청년 및 동북에서 활동하다가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에서 군사를 배운 후 연안으로 온 조선청년들까지 모두 합류시켜 철저한 훈련을 실시했다. 이런 조선인 청년들은 1939년에 이르러 팔로군 전방사령부가 있는 진동남(晋东南)에 이르러 팔로군과 함께 항일전쟁에 투신했다. 조선인 스스로의 혁명 역량으로 날로 장대해졌다. 1941년 1월 10일 무정은 조선독립동맹의 전신인 화북 조선청년연합회 회장을 맡았고 그해 6월에는 중경 국민당 계열이던 조선의용대 일부가 화북의 항일근거지로 귀화했으며 무정은 이들을 조선의용대 화북 지대로 편성해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1941년 8월, 산서성 동욕에 있는 팔로군 본부에 조선의용대 간부훈련반이 설치되었고 무정은 교장으로 부임되었다. 그는 항일 무장투쟁에 종사하는 군사간부를 전문적으로 양성했다. 이어 진동남 항일근거지에 조선청년간부학교와 조선무장선전대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26일에 열린 동방 각 민족 반파시스트 대회에서 무정의 초상은 외국 항일 지도자들과 함께 모택동 초상화와 나란히 걸렸다. 국제 사학자들은 이때 무정이 팔로군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중국 문헌의 한 기록에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다. 연안의 대생산 시기 남니만 개발에 관한 자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941년 1월 말부터 2월 초 사이 중앙군사위원회 직속 포병 퇀장인 무정은 2개 영을 거느리고 남니만으로 진군해 반년쯤 걸려 덤불숲에 폭 6미터가 되는 도로를 닦았으며 이후 남니만의 식량, 부식물과 공업제품은 모두 이 도로를 거쳐 끊임없이 항일 전선으로 운송되었다. 이렇게 무정 퇀장은 두 개 영을 이끌고 식량이 부족하고 집도 없는 등 상상할 수도 없는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개간한 황무지에 씨앗을 뿌렸다. 이어 얼마 되지 않아 왕진이 359여단을 이끌고 남니만으로 들어가면서 황무지를 개간하는 부대가 신속하게 확대되었다. 그 후 또 많은 부대와 구정부와 중앙군사위원회 등이 남니만에 잇따라 진출하면서 개황열기가 전례없이 형성되었다.……” 당시 무정은 이미 조선 반일세력의 지도자 일원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중국 공산당과 팔로군에서 그의 위상은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평범한 공산당원과 팔로군 장령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조선의용군 창설임무를 무정에게 맡겼다. 그 이유는 광범위한 국제항일통일전선의 시범으로 국민당 정부가 지배하는 지역으로부터 더욱 많은 조선인을 데려오기 위한 것으로 풀이됐으며 또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로 선전할 때도 일본어에 능한 조선인들의 우세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조선문제 전문가인 스마루는 어느 한 저서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주은래는 중조 관계의 미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또 무정의 전설적인 이미지는 광범위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민당의 통제 하에 있던 조선의용대 조직원 89%가 낙양(洛阳)과 중경 등지로부터 태항산(太行山)으로 옮겨왔으며 이들은 화북지대의 각 분대에 편성되어 기로예(冀鲁豫), 진찰기(晋察冀), 태항산(太行山) 등지로 이동하여 유격전과 일본군 와해 투쟁을 전개하고 항일근거지 기층정권의 건설활동에 참여한 것 등은 이를 여실하게 증명하였다…” 장군의 위망 날이 갈수록 높아져 무정과 화북 조선청년연합회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조선의 유명한 독립운동 지도자 김두봉도 중경에서 태행산으로 직행하였고 멀리 조선 국내에 있던 여운형도 자신의 연락책 김명시(무정의 연인)를 서울에서 연안으로 보내 무정을 만나게 했으며 함께 합동건국 문제를 논의하게 했다. 실제로 무정의 이름은 소련의 크렘린궁까지 전해졌다. 1941년 7월, 스탈린은 비행기를 연안으로 파견하여 무정을 소련으로 인수하려고 했다고 한다. 무정의 비범한 포병기술을 높이 평가하면서 소련의 포병부대를 지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반년 전에 있었던 ‘완남사변(皖南事变)’을 염두에 두면서 장개석이 이번 무정의 소련 행을 가로막거나 말썽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무정을 소련으로 보내지 않았다. 비록 무정의 소련행은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스탈린의 항공기 파견은 국내외에서 무정의 명성을 더 한층 크게 높였다. 1942년 7월 11일, 화북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결성됐다. 화북 조선독립동맹 중앙 집행위원이자 의용군 사령관이었던 무정은 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특히 의용군을 구성함에 있어서는 기념비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 뒤 무정은 팔로군 포병 퇀장을 그만두고 조선의용군의 훈련과 지휘에 전념하였다. 그는 자신이 언젠가는 조선의용군들로 조국 광복을 이끌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당시 의용군 장병들 속에서는 조선은 일본한테 얼마간 더 점령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무정은 조선의 독립이 멀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성심성의로 대원들을 이끌었다. 특히 무정은 독립 이후의 조선은 모든 애국당파가 연합하여 집권하는 국가이기를 원했다. 이는 당시만 해도 중국공산당의 연합정부 구상이 무정한테 영향을 미친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당시 무정의 생각은 연안의 조선공산당 출신 중 좌파인 최창익 등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조선독립동맹의 정치적 권력은 주로 좌파들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무정은 군사만 담당) 이들과 무정의 견해는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이는 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유감스럽게 했다. 1945년 8월에 이르러 일제의 멸망은 분명해졌고 무정은 소련이 꼭 조선을 장악하리라는 것을 예견했다. 이때 그는 황하 둔치에서 희생된 양림을 더욱 그리게 되었다. 양림은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하였으며 의지가 굳세고 지혜가 넘치는 애국자였다. 무정은 양림이 살아 있었더라면 소련인들과의 관계를 잘 관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에 앞서 무정의 건의로 조선혁명 군정학교 전원은 1월 말부터 태행산을 출발해 2000리를 행군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의 3차 봉쇄선을 넘어 4월 7일 연안에 도착했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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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1-11-19
  •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무정장군②
    [동포투데이] (전번 계속) 포병 전문가로 된 장군 중국 노농홍군 제3군단은 1930년 7월 31일 호남성 평강에서 군단 산포련을 창설했다. 당시의 포병이었던 한 노병은 무정이 이 해 말 포병련에 있었다고 회상한다. 무정은 소련에서 포병 기술을 배워 귀국해 포병 교관으로 있다가 제3련(第三連) 연장(連長)으로 되었다. 1931년 5월, 강서피두에서 중국 노농홍군 중앙군사위 포병퇀이 창설, 초대 퇀장이 실직행위가 있었기에 파면되고 대신 그해 6월에 무정은 이 포병퇀 제2임 퇀장으로 임명됐다. 홍군 시기에 전공이 혁혁한 무정은 승진이 빨랐고 급기야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에 들어가기도 했다. 당시 아무런 정치적 배경이 없는 외국인이었던 무정으로서는 파격적인 승진이 아닐 수 없었다. 1930년 12월부터 1934년 10월까지 장개석은 다섯 차례에 거쳐 서금의 홍군을 포위토벌했다. 특히 5차의 포위토벌로중국 공산당의 소비에트 지역 대부분을 장개석 군대가 점령하고 장악했다. 이렇게 수세에 몰리자 중국 공산당 중앙과 중국 노농홍군은 강서성 서금에서 가까운 안전지대로 근거지를 옮기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2만 5000리 장정이다. 1934년 10월 14일에 출발하여 1936년 12월 12일에 섬서성 연안에 도착한 기나긴 대행군이었다. 장정 기간 동안 무정은 중앙군사위원회 직속 포병부대 지휘관으로 공격할 때나 후방 차단 때나 항상 전형적인 화력지원 임무를 맡았다. 한 노홍군이 쓴 ‘나원발 회고록(罗元发回忆录)’에서 무정의 업무 성격을 언급한 기록이 있었다. “11월 하순 중앙군사위원회는 4개 종대로 나뉘어 신안(新安)과 전주(全州) 사이에서 상강을 건너 적의 4차 봉쇄선을 뚫기로 했다. 이는 대장정 시작 이래 가장 긴장되고 치열했던 전투였다. 우리 5사단은 팽덕회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밤낮 급행군으로 하루 100여 리씩 줄달음치면서 상강나루터를 먼저 점령했다. 사단장은 “좀 있으면 무정 동지가 군사위원회 종대와 제3야전지대의 사령관이 되어 포병영, 공병영, 운수 제1대대 그리고 부속병원을 포함한 기술병종을 지휘하게 될 것이다”라고 전해왔다. 후에 무정은 홍군 제3군단 포병영 영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정 시기 무정의 중요한 역할 장정 도중 무정의 중요한 역할에 관해서는 ‘장정: 전대미문의 이야기(长征:前所未闻的故事)’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팽덕회의 옥중 진술에 따르면 그때 사람들은 점점 더 두 홍군 군단 간의 충돌을 몹시 걱정했다. 특히 팽덕회는 홍군 제1군단과 연락이 끊길까 봐 걱정했다. 안내자가 없었기에 홍군 제1군단은 아계의 근처에서 발이 묶였다고 하며 그 당시 무전의 비밀번호가 바뀌었기 때문에 팽덕회는 홍군 제1군단과 연락할 수 없었다. 그는 새 비밀번호를 만들어 믿을 만한 조선인 장교인 무정에게 건네는 한편 나침반을 하나 주면서 임표와 섭영진에게 연락하게 하였다. 섭영진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홍군 제1군단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으며 그가 받은 유일한 전보는 그 자리에서 대기하라는 것뿐이었다. 당시 무정은 팽덕회의 두터운 신임을 갖고 있었다. 중국 노농홍군의 대장정은 하루도 쉼없이 장개석 군대와 크고 작은 50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이뤄낸 기아와 고난의 행군이었다. 장정이 시작됐을 때 홍군에는 조선인 혁명가 30여 명이 있었지만 섬북에 도착했을 때는 오로지 무정과 양림 두 사람만 남았고 그 양림 또한 얼마 후에 있은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이 이를 잘 설명했다. 그렇게 되어 무정은 장정 결속시의 유일한 조선인 생존자였다고 할 수 있었다. 후에 무정은 한 지인에게 이렇게 당시의 고통된 심정을 토로하였다고 한다. “장정 결속한 후인 1936년 2월, 홍군이 황하를 건너게 되었으며 그 때 양림은 황하강행도하 돌격대장으로 선발되었다. 이는 일종 결사대의 임무였다. 당시 돌격대는 강을 도하하여 개펄에 진지를 구축하였으나 양림은 적탄에 명중되었다. 그때의 의료 여건으로는 그의 생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양림은 하루 종일 진통을 참아내다가 끝내는 숨을 거두었다.” 한편 양림의 희생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정의 생명을 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양림이 희생된 후 팽덕회는 “너무 많은 외국국적 혁명가들이 중국의 혁명사업을 위해 희생됐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계속 중국에서 희생되게 한다면 누가 그들 조국의 혁명을 위해 싸울 것인가. 우리는 이미 죽은 그 동지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는 없으나 더 이상 외국동지들의 생명을 소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팽덕회의 호소에 중앙 군사위원회에서는 무정에게 학습연구를 하라는 휴식 명령을 내렸고 당시 무정 또한 위장병 악화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던 터였다. 이렇게 팽덕회는 사실상 무정의 목숨을 구했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평생 친구이자 동지로 되었다. 1936년 무정은 홍군대학에서 전략학과 당 사업 연구를 진행했다. 그 후 무정은 홍군대학을 다니면서 학습하는 한편 군관학교에서 강의까지 했다. 홍군대학을 졸업한 후 무정은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으로 임명되었다가 1937년 말 팔로군 포병부대 재편 임무를 받고 팔로군 본부 포병처 주임으로 임명되어 팔로군의 포병부대를 창설했으며 1938년 초 팔로군 본부 포병퇀장에 오르면서 팔로군 포병부대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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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1-11-14
  •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무정장군①
    [동포투데이] 편집자의 말: 무정ㅡ그는 분명 그의 정치적 생애와 이념을 떠나 우리 민족이 낳은 출중한 군사가였다. 또한 무정은 이용만 되고 나중엔 버림받은 비운의 장군이기도 하다. 무정(武亭, 1905~1952)의 본명은 김무정(金武亭)이며 중국과 북한(조선) 군부의 고급 장령이다. 그는 1905년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어나 1925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중국 노농홍군과 함께 유명한 2만 5000리 장정에 참가한 많지 않은 조선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 중국인민 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포병 퇀장으로 팔로군 포병 창시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어릴 때 무정은 가정 경제상황이 어려웠기 때문에 서울에서 공부를 할 때 주로 근공 검학을 하였다. 1919년, 조선에서는 일제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는 유명한 ‘3.1’ 운동이 폭발하였고 당시 무정은 그 애국적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이는 그의 혁명 생애의 계기로 되었다. 그 뒤 무정은 당시 조선에서는 가장 훌륭한 학교인 경성 중앙고등학교에 입학, 바로 이 학교에서 무정은 당시 조선의 유명한 민족 지도자 여운형 선생을 알게 되었으며 여운형 선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어 그는 혁명에 투신하기 위하여 1923년 경성 중앙고등학교에서 퇴학하고는 그해 3월 18세의 어린 나이에 조국광복의 꿈을 안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으며 동북을 거쳐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렇게 건너간 압록강, 그 때 무정은 자기가 그 역사가 유구한 땅에서 20여 년 간 거처하게 될 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 그는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을 창건한 저명한 조선의 독립운동가인 이동휘가 세운 문화대학에 입학해 한어를 배우다가 그 이듬 해 북방군관학교(동북강무당이라고도 했음)에서 포병이론을 배우게 됐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학생이었던 당시 무정은 중국의 북방 군벌들 사이에 벌어진 남구전쟁(南口之战)에 참가하였으며 얼마 뒤 천진을 점령하는 전쟁에서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졸업 후 그는 포병 상위로 되었으며 얼마 후엔 또 그의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포병 중령으로 되었다. 1925년, 무정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당원 수가 1000명도 안 되는 작은 당이었다. 하지만 여운형의 영향을 받은 무정한테 있어서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은 그한테 있어서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얼마 뒤 무정은 군벌부대에서의 모든 직함을 버리고 제1차 중국 국내혁명과 북벌전쟁에 참가했다. 1927년, 장개석은 공산당을 진압하면서 무정에 대해서도 체포령을 내렸으며 무정은 핍박에 의해 지하투쟁에 투입해야만 했다. 지하 활동을 하면서 무정은 장개석에 대한 원한이 뼈 속까지 파고들게 하였다. 당시 무정은 국민당군에 의해 누차 현상 수배 대상으로 되었으며 한구로 자리를 옮겨 지하활동을 계속 하던 중 얼마 후 무창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무렵, 무창에서는 만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면서 장개석의 백색테러 정책을 규탄하는 한편 무정을 포함한 정치범들을 석방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거기에 당시 무창 법원의 판사 중 그의 동지들이 있는 등 배경으로 무정은 감옥에서 탈출하였고 중공중앙의 소재지 상하이로 갈 수 있었다. 무정은 상해에서 다시 공산당 내의 정치사업을 시작했다. 1929년 그는 지휘자의 일원으로 상해 노동자 폭동에 참가했다. 당시 무정은 비록 외국인이었지만 그의 군사재능을 인정받아 폭동 지휘부의 총지휘로 추천되기도 했다. 후에 폭동이 진압되면서 무정은 영국인들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그해 10월 10일에 2개 월 형에 언도(이 상징적인 판결은 무정한테 있어서 매우 의미심장했음)되었다. 석방된 후 그는 홍콩에 도착했다. 이후 내륙을 돌며 제2차 국내혁명(즉 토지혁명)에 참여했다. 제2차 중국 국내혁명 중 무정은 팽덕회 장군의 휘하에 있다가 홍군이 호남 악주(岳州)를 함락하면서 75밀리 야포와 산포를 노획하는 바람에 무정은 자기의 재능을 발휘할 일이 생겼다. ‘팽덕회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씌어져 있다. “악주를 점령하였지만 영국, 미국과 일본의 함정이 기승을 부리며 함포사격으로 성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이러자 우리는 은밀하게 포를 설치(당시 포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나와 조선 동지 무정뿐이었음)했다. 미구하여 적함이 다가오자 우리는 수 십 발의 포탄으로 대응 사격을 했고 그 중 10발 이상 적함을 맞혔다. 이러자 적함은 더 이상 해안에 함포사격을 하지 못했다…” 이는 중국 홍군 신분으로 무정이 최초로 벌인 전투경력으로 간략하게 기록돼 있지만 전과는 분명 화려했다.(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11-13
  • 미국은 핵잠수함 충돌 사고 세계에 해명해야
    ●러수이(乐水·중국) 언론에 따르면 지난 10월 초 남중국해에서 미 해군의 핵잠수함 ‘코네티컷호’가 잠항하던 중 미확인 물체를 들이받아 잠수함이 파손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런데 미국은 충돌사고 발생 한 달이 넘도록 구체적인 내용을 숨기면서 국제사회에 정확한 사고 경위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자오리젠(赵立坚)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미국 핵잠수함의 임무 수행과 충돌, 충돌 원인, 방사능 유출 우려 등에 대해 미국 측에 4가지 질문을 날렸고 미 해군 제7함대는 국제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지난 1일 간단한 사고조사 성명을 발표했다. 미 해군 7함대는 핵잠수함은 남중국 해상에서 ‘미지의 해저산맥’을 들이받았다고 설명하면서도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방사능 유출에 대해서는 여전히 말을 아끼고 있다. 이런 기류는 최근 들어 미군의 남중국해 출입과 중국의 영해 주권침해 문제를 국제 이슈로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중국은 남중국해 제도와 그 인근 해역에 대해 명백한 주권을 갖고 있으며 중국인들이 남중국해에서 활동한 지도 2000년이 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최근 몇 년 간 역사적 사실과 남중국해 영토에 관한 중국의 주권성명을 무시한 채 ‘자유항행’이라는 구실을 내세우면서 항공모함과 전투기를 남중국해 해역에 자주 출동시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군 ‘라슨함’, ‘매케인함’ 등 구축함이 중국 난사(南沙)와 시사(西沙)군도 12해리 수역에 여러 차례 진입했고 바이든 취임 이후 미군의 남중국해 군사작전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거의 2배 이상으로 그 강도와 빈도가 높았다. 올해 들어 11월 1일까지 미국의 4개 항모타격전단과 2개 양륙경비대가 차례로 남해로 이동해 총 11회에 거쳐 남중국해에 진출했고 또 5척의 구축함이 중국 시사군도 영해와 남중국해 군도 12해리 인근 수역에 5차례나 진입했다. ‘국제해양법공약’에는 한 나라의 영해 기선인 12해리 이내 해역을 그 나라의 영해범위로 규정하고 영해 내에서 주권을 갖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미 군함의 이 같은 움직임은 중국의 영해주권에 대한 강력한 도발이자 남중국해 해역에 대한 안보태세 훼손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이 남중국해에서 내세우는 ‘자유항행’은 더 억지스럽다. ‘자유항행’이란 원래 국제법이 규정한 각국의 공해 상에서의 자유항행과 월선권이었지만 미국은 개념을 바꿔치기를 했다. 미국이 개념을 바꿔 ‘자유항행’을 명분으로 촉각을 중국 영해에 들이미는 것은 국제법에 대한 경멸이자 중국의 주권과 법률에 대한 무시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영해 및 접속구법’은 중국 영해에 들어오는 외국 선박에 대해 명확한 요구를 하고 있다. 그중 제6조에서는 “외국 군용선박의 중화인민공화국 영해 진입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제7조에서는 “외국 잠수함과 다른 잠수기가 중화인민공화국 영해를 통과할 때면 반드시 해상에서 항해하고 깃발을 전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핵잠수함의 충돌 사고가 발생한 곳은 중국 영해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미군은 왜 중국에 사전 허락을 요청하지도 않고 깃발을 달고 항해하지도 않았을까?! 이는 미국이 중국에 꼭 알려야 할 문제이다. 법적인 문제 외에도 이번 사태로 인한 방사능 누출도 무시할 수 없다.핵잠수함 방사능 누출 사고는 전 세계에서 많이 발생한다. 1987년 구소련의 핵잠수함 ‘공청단호’가 사고를 당해 바렌츠해 해저에 침몰됐으며 당시 원자로에서 흘러나온 방사능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주변의 바닷물을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다. 또 2008년 영국 레알 해군의 핵잠수함 ‘트라팔가호’가 방사능 유출사고로 280l가 넘는 액체들이 바닷물에 방출됐다. 미국의 주장대로 ‘코네티컷호’가 미지의 해저산맥을 들이받았다면 똑같은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나아가 주변 어업생산과 해양항해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게 된다. 보도에 따르면 충돌 발생 후 미군은 이미 파견되었으며 WC-135w 핵 정찰기가 남중국해로 나가 정찰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국은 미국에 핵 감시 결과 발표를 요구해 남중국해 주변국에 해명을 촉구할 이유가 더 큰 것이다. 잠잠하던 남중국해가 미국이라는 ‘훼방꾼’의 개입으로 시끌벅적 들끓고 있다. ‘코네티컷호’의 충돌사고는 결코 우연이 아니며 미국이 수년간 ‘자유 항행’을 구실로 남중국해에서 바람을 일으킨 필연적인 악과이다. 미국이 ‘자유 항행’의 지지자라고 자부해온 이상 핵잠수함 충돌사고의 실체를 만천하에 밝혀야 할 때이다. 그리고 각국의 선박들에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한 것처럼 피하고 덮으려고만 하지 말고 각국 선박들이 안전하게 남중국해를 항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1-11-11
  • 송애령은 왜 동생 송자문의 장례식 참석 거부했을까?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송요여(宋耀如)가 죽은 후 송자문(1894-1971)은 점차 송씨 가족의 리더가 되었다. 그의 존재감은 송씨 가족의 삼자매만큼 은 영향력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송씨 가족의 장남인 송자문은 온 가족에게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1912 년 그는 공부를 더 하라는 아버지에 의해 미국 하버드 대학교로 유학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출중한 재능을 가진 송자문의 성적은 항상 최고였으며 마침내 그는 목표를 달성하면서 하버드 대학교로부터 석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다시 미국 콜럼비아 대학교에서는 박사 학위까지 따냈다. 졸업 후 송자문은 어느 한 은행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주로 중국 사업가에게 송금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이 일에서 그는 많은 중국 사업가들을 만났으며 이를 계기로 그는 중국에서 미래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1917 년 송자문은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가정에서는 타인한테 위탁하여 그로 하여금 한야평회사(汉冶萍公司)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회사의 총지배인은 성선회(盛宣怀)의 아들이었으며 그는 송자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그는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성선회의 아들 성택이(盛泽丞)는 송자문을 일곱 번째 여동생 성애희(盛爱颐)의 영어교사로 초대했다. 둘은 점차 감정의 포로로 되었다. 이에 성애희의 어머니는 이 일을 알고 송자문의 지위가 애녀 성애희의 짝으로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23년 송자문은 정식으로 한야평 회사에서 사직하고 손중산(손문) 선생한테로 가려고 했다. 떠나기 전 송자문은 성애희한테 함께 남하하자고 했으나 성애희는 집과 어머니 곁을 떠나기를 꺼려하다가 마침내 송자문을 따라 도망가는 것을 거부했다.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했다. 손중산한테 가담한 후 송자문은 큰 책임을 맡았다. 재무부 장관 뿐만 아니라 중앙은행 총재와 광주은행(广州银行) 총재를 역임했으며 재무 관리를 조직하는 정부의 돈가방이 되었다. 당시 북벌전쟁의 연속적인 승리로 인해 장개석은 점차 군사력과 정치적 권력을 장악했으며 송자문의 누이 송애령은 가족의 장기 이익을 위해 장개석한테 접근하려고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원래 장개석과는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던 송자문은 후에 장개석의 캠프를 위해 철저하게 헌신했으며 이어 남경 국민당 정부를 위해 일했다. 중국에서 전면적인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물질적 지원을 얻기 위해 송자문은 두 번째 누나 송경령과함께 1938년 6월 홍콩에서 ‘중국보위동맹’ 설립했다. 그러나 1941년 5월, 장개석의 압력으로 송자문은 동맹의 직무에서 사임해야 했다. 같은 해 12월, 그는 정부의 외무부 장관으로 되었으며 1943년, 송자문은 담판을 통해 외국열강들이 중국에서의 치외 법제권을 되찾았으며 1945 년에는 중국의 수석 대표로 유엔 총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송자문은 소련과의 ‘중소우호동맹조약’에 서명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참여 없이 얄타협정에 서명하는 것으로 중국의 주권과 영토 완정을 심각하게 위반했다. 이에 송자문은 처음에는 미국 대통령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가 거절당했고 후에는 스탈린한테 제기했으나 소련 역시 일본을 패망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들어주지 않았으며 남경 정부는 결국 쓰라린 굴욕을 씹어 삼켜야 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장개석은 공산당과 내전을 벌였다. 송자문은 군사 지출을 늘리고 국고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금 외환 시장을 개설하고 많은 양의 금을 팔아 대량 자금을 유치할 대신 황금폭란을 일으켜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 1947년 3월, 수많은 규탄속에서 송자문은 직위에서 물러났으며 그해 10월 다시 장개석의 신뢰를 받아 광동으로 가서 내전을 위한 자금을 모으게 했다. 1949년 4월, 인민해방군이 남경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송자문은 낙담하여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향발했다. 그 이후로 그는 해외 망명생활을 시작했으며 1년 후에는 국민당에서 제명되었다. 미국에서 송자문의 생활 조건은 상당히 우월했지만 때때로 외국에서의 고독과 슬픔은 여전히 마음을 괴롭히군 했다. 그는 부모님의 마지막 유언인 “내가 죽으면 상해에 묻고 자식들은 될수록 한 많이 나의 곁에 있어다오”란 말을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12월 11일은 아버지의 생일임을 송자문은 항상 기억했다. 그래서 1958년의 아버지의 생일날 아내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송자문은 항공편으로 홍콩으로 날아갔으며 홍콩 도착 후 오랫동안 북녁하늘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더 이상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1963년 2월, 장개석은 그를 대만에 초청했다. 이러자 송자문은 가족 모임을 가지고 가족 구성원들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장녀 송경희와 차녀 송만희는 아버지가 대만에 가는 걸 단호하게 반대했으며 오직 막내 딸 송서희만이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아버지가 가고 싶다면 지금 가세요. 아버지가 나이가 점점 많아지기에 앞으로 대만으로 갈 기회가 점점 적을 터이니 가서 대만을 유람하면서 옛 친구들을 만나보기도 하세요”라고 위안해주었다. 이 말은 송자문의 마음을 약하게 했다. 그 뒤 송자문과 그의 아내는 대만행 항공기에 올랐다. 송자문 내외가 대만에 도착하자 장개석은 곧 바로 송자문을 회견하면서 대륙 본토를 공격 할 계획을 밝혔으며 아울러 이 계획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송자문은 즉시 장개석의 뜻을 알고는 두 딸이 자기의 대만행을 반대하던 일을 떠올리면서 장개석과의 회담에는 그냥 의도적으로 중얼거렸다. 15일 후 송자문 내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그 뒤 정치에 대한 얘기는 일절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1년 송자문은 77세의 나이로 미국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의 장례식은 특히 쓸쓸해 보였다. 송애령은 남편 공상희가 죽었기에 송자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송자문이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한 둘째 누나 송경령은 슬픔을 참을 수 없어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했으나 전세기를 대여할 수가 없어 그번 행차가 실패했다. 그리고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은 둘째 언니가 송자문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은 뒤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형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해야 했다. 사실 그녀는 항공기를 오랫동안 하와이에 준비 해놓고 송자문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곳으로 갈 준비를 한 다음 장례식 전야에 몰래 뉴욕으로 향발했으나 도중에 수차 장개석으로부터 “대륙 공산당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전보를 받고 도중에 귀항했으며 결국 송미령은 대만으로 돌아왔고 친인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10-24

연예·방송 검색결과

  • 저우쉰·황레이·탕웨이, 드라마타운 행사 참석
    [동포투데이] 일부 네티즌이 SNS에 공유한 장시 후이창 드라마타운 개막식 영상과 사진에는 행사에 참가한 황레이(黄磊), 저우쉰(周迅), 탕웨이(汤唯) 등 모습이 담겼다. 황레이는 검은색 슈트 차림으로 등장했고,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어 산뜻해 보였다. 저우쉰은 프린트된 레깅스에 블랙 재킷과 네이비 컬러의 와이드 팬츠를 매치해 동양적이면서도 클래식한 멋을 뽐냈다. 탕웨이는 검은색 이너에 말차녹색 재킷과 카키색 바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캐주얼한 모습을 연출했다. 황레이, 저우쉰, 탕웨이 등이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많은 팬들이 와서 쪼그려 앉아 기다렸고, 이들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이들 또한 팬들의 호명에 일일이 화답하며 팬들을 즐겁게 했다. 저우쉰이 등장했을 때, 그녀는 마침 동료와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팬들의 호명에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탕웨이는 무대에 등장하자 팬들에게 직접 손을 흔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행사 기간 동안 황레이, 저우쉰, 탕웨이는 주최 측의 안내하에 행사장을 방문하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많은 참석자들은 저우쉰과 탕웨이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저우쉰이 정말 말랐지만 매우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탕웨이는 마른 체형이지만 키가 170cm가 넘는 큰 키가 눈에 띄고 기질도 좋아 보였고 웃으면 목춘풍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고 한다.
    • 연예·방송
    2024-01-07
  • 제80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개막
    [동포투데이] 제80회 베니스 국제영화제가 30일 저녁 이탈리아 물의 도시 베니스에서 개막했다. 총 23편의 영화가 본선에 진출해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놓고 경쟁을 펼친다. '라라랜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데이미언 샤젤은 이번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아 8명의 다른 심사위원들과 함께 올해 황금사자상 등 주요 대상을 누가 차지할지 결정하게 된다. 개막식에서 이탈리아 여성 감독 릴리아나 카바니가 평생공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탈리아 에도아르도 데 안젤리스 감독의 '코만단테'가 영화제 개막작으로 이날 밤 세계 최초 개봉됐다. 이번 영화제는 9월 9일 폐막하며, 수상자는 폐막식에서 발표된다. 이탈리아 베니스 국제영화제는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 독일 베를린 국제영화제와 함께 유럽 3대 국제영화제로 꼽힌다.
    • 연예·방송
    2023-09-01
  • 탕웨이, 제16회 아시안필름어워즈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3일, 펑황망에 따르면 12일, 홍콩에서 열린 제16회 아시안필름어워즈 시상식에서 중국 배우 탕웨이(汤唯)가 ‘헤어질 결심’으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나 허리 부상으로 참석하지 못해 박해일이 대신 수상했다. 한편 량차오웨이(梁朝偉)가 ‘바람이 다시 불 때’로 우수 주연상과 함께 아시아영화 공헌 영예 대상도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아내 류자링(刘嘉玲)이 남편에게 직접 상을 수여했다는 점이다. 다음 일본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브로커’로 우수 감독상을 받았다. 이번 심사단은 장이머우(张艺谋)가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이에 앞서 탕웨이는 제27회 춘사영화상, 2022년 한국 부일영화상, 제4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제43회 청룡영화상, 제42회 황금 촬영상, 제9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등의 7개 ‘여우수주연상’을 연속 수상했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멜로 영화로 탕웨이, 고경표, 박해일, 유태오, 이정현, 박용우가 주역을 맡았으며 올해에 있은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단숨에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헤어질 결심’은 '아가씨' 이후로 6년 만에 나온 박찬욱의 11번째 장편 영화. 산에서 벌어진 변사 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가 사망자의 아내와 만난 후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박찬욱 감독은 탕웨이가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이유에 대해 “영화 ‘색계’를 보고 함께 일하고 싶었으며 탕웨이는 우리가 만들고 싶은 캐릭터였다”고 밝혔다. 한편 탕웨이의 차기작은 AI를 소재로 한 한국 영화 ‘원더랜드’로, 탕웨이는 ‘만추’에 이어 두 번째로 김태용과 호흡을 맞췄으며 공유, 박보검, 수지, 정유미, 최우식 등이 주연을 맡았다.
    • 연예·방송
    2023-03-13
  • 전통여성의 소박한 형상을 스크린에 올린 中 영화배우-백양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민국시기인 1947년에 제작된 영화 ‘동으로 흐르는 봄 물결(一江春水向东流)’은 문화혁명 시기 상영이 금지되었다가 70년대 말 재방영이 되자 이 영화를 두 번 이상을 본 관람객은 기수부지였으며 심지어 다섯 번 이상 본 이들도 적지 않았다. 40년대에 제작된 영화, 그것도 흑백영화가 왜 이다지도 관객들의 마음을사로잡았을까? 그것은 간단했다. 영화에서의 여주인공의 연기력 때문이다. 그 여주인공의 이름은 백양이다. 백양(白杨-1920년 4월 22일~1996년 9월 18)일)의 본명은 양성방(杨成芳)으로 본적은 중국 호남성 멱라(汨罗)시 고륜향(古仑乡)이며 출생지는 북경이다. 백양의 기억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당시 백양의 부모는 중남경녀(重男轻女)의 봉건의식이 매우 농후하였기에 여아이로 태어난 백양은 부모로부터 가정과 남자에 순종하는 사상을 진절머리가 나도록 주입받았다. 한편 백양은 어릴 적부터 유모에 의해 시골로 끌려가 생활하면서 신물이 나도록 가난과 고난을 겪었다. 1931년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자 더 이상 어머니처럼은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백양은 연화영업공사(联华影业公司)가 북평에 설립한 배우양성소를 찾아갔으며 거기에서 무성영화 ‘고궁신원(故宫新怨)’에서 여자아이의 역을 맡으면서 영화계에 데뷔했다. 영화회사가 해체되자 백양은 극단 ‘보리바(苞莉芭)’에 가담해 연극 ‘난종(乱钟)’, ‘전우’ 등에 출연했으나 얼마 후 이 극단은 강제 해산됐다. 1934년 백양은 선후로 중국여행극단과 중국무대협회 등 극단에 입사했다가 1936년 다시 상해의 스타필름회사 제2 지사가 설립되자 홍심(洪深) 소개로 계약을 맺고 첫 영화 ‘십자거리(十字街头)’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영화에서 백양은 사랑스럽고도 지독한 여직원 양지영(杨芝瑛) 역을 맡았다. 백양은 또 1937년 가족영화 ‘사천금(四千金)’에 출연하였고 같은 해에는 장석천(张石川) 감독이 연출하는 ‘사회의 꽃(社会之花)’에 출연하기도 했다. 1937년 ‘7.7’사변 발발 이후 백양과 진백진(陈白尘), 심부(沈浮) 등은 영화극단을 결성해 항일구국을 알리는 공연을 펼치기로 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자오단(赵丹) 등과 함께 영화 ‘중화의 아들딸(中华儿女)’에 출연했으며 1940년에는 손유 감독의 영화 ‘창공 만리’에도 선보였다. 또한 같은 해 도금(陶金)과 합작하여 항일영화 ‘청년중국’에서 주역을 맡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백양의 영화배우 생애에도 전성기가 찾아왔다. 1946년 백양은 영화 ‘팔천리 길운과 달(八千里路云和月)’, 1947년에는 영화 ‘동으로 흐르는도도한 물결’에서 주역를 맡는 등 말 그대로 그녀의 영화배우 생애에는 전성기가 찾아왔다. 1949년 새로운 공화국이 탄생하자 백양은 여전히 변함없이 영화배우 생활에 충실하면서 많은 영화에 출연하였다. 1950년엔 ‘단결하여 내일에로(团结起来到明天)’, 1956년에는 중국의 첫 칼라 영화 ‘축복’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1960년에는 전쟁영화 ‘동매(冬梅)’에서 주역을 맡았다. 이 외에도 해방 후 백양이 출연한 영화들로는 ‘평화를 위하여(为了和平1955년)’, ‘김옥희(金玉姬-1960년)’, ‘봄빛 찬란한 세상(春满人间)-1959년’ 등 여러 편이 있으며 그가 출연한 드라마로는 중국의 저명한 여성 지도자 송경령의 생애를 부각한 ‘인간세상에 뿌려지는 건 모두 사랑(1989년-洒向人间都是爱)’이 유일했으며 이 드라마의 출연으로 백양은 중국 방송․영화TV드라마 부문의 영예 배우상을 받았다. 백양의 예술풍격은 소박하고 아름다우며 자연스러우면서도 동양 여성의 자태 표현에 능숙하다. 특히 그녀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여성의 모습을 잘 형상화했다. 백양은 자신이 가진 여성스러움과 배역을 절묘하게 결합해 관객들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부여함으로써 항상 사랑과 존경을 받아왔다. 그가 연기하는 모습의 하나하나가 관객들에게 인정받았으며 맘속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깊고도 다각적인 연기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출연하게 되는 인물에 대한 깊은 연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세계 영화 탄생 100주년, 중국 영화 탄생 90주년을 맞아 백양은 중국 국가 문화부로부터 중국 영화 세기 상, 여배우상을 수여받았다. 1996년 9월 18일, 백양은 향년 76세로 별세했다. 백양의 임종은 남편 장군초(蒋君超), 아들 장효송(蒋晓松)과 딸 장효신(蒋晓真) 그리고 언니 양말(杨沫)이 지켜보았다.
    • 연예·방송
    2022-02-28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지난번 계속)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성은 먼로, 그는 정신 질환으로 앓고 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였으며 늘 자신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인 델라에게도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매우 격렬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글래디스는 MGM 콜롬비아의 한 영화제판공장에서 스크랩 작업을 했으며 어머니 역시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로 평생 수용소 출입이 아주 잦았다고 한다. 1942년 6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제임스 아이젤 돌티와 결혼했으나 1946년 9월 13일 첫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는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2월 2일 일본 도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이 혼인신고를 한 지 274일 만에 마릴린 먼로가 이혼을 제출했고 1954년 10월 31일, 법원은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뒤이어 마릴린 먼로는 1956년 6월 29일 극작가 아서 밀러와 극비리에 결혼했고 그해 8월 메릴린 먼로는 임신했지만 곧 유산했다. 마릴린 먼로는 1957년 8월 1일 자궁외 임신으로 다시 유산했다. 1961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정식 이혼하고 말았다. 18세 때 마릴린 먼로는 기독교인이 됐다. 하지만 1956년 아서 밀러와 결혼하면서 먼로는 유대교로 전향했다.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생전에 애완견을 많이 키웠으며 그 중 마지막 한 마리는 시나트라가 선물한 몰타 개로 이름을 지어 ‘마피아(Mafia)’라고 불렀다. 1960년 8월 28일, 마릴린 먼로는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그 뒤 1961년 2월 7일 재차 뉴욕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5일에 퇴원했다. 1962년 1월, 마릴린 먼로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으며 7월 20일 자궁내막염으로 또 입원치료를 받았다. 1962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심리치료사와 6시간을 보냈다. 이는 그녀의 생에 있어서 마지막 하루가 됐다. 그 이튿날 즉 8월 5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마릴린 먼로가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무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8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식의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으로 하나 또 하나의 성감적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감동적인 연기 스타일과 죽음은 영화 팬들의 영원한 성감 적인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많은 팬들은 살아가면서 그녀의 사진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니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하얀 치마를 입고 뉴욕 거리에 있는 모습과 땅속 열기에 그녀가 걸친 치마가 나팔을 벌린 듯한 모습의 흑백사진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눈을 살짝 감은 듯 입술을 감빠는 모습, 소파 위에 하얀 다리를 드러낸 모습 등을 보노라면 사진만이 아닌 특별한 감정의 전달과 순수하고 성감적인 정국이 될 때가 많다. 공개된 사진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청순하기도 하고 털털하기도 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좀 길게 땋은 머리 태, 청바지, 리넨 스커트 등은 다양한 스타일링으로 생활 속 먼로의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먼로는 1962년 8월 5일, 자기의 거처이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 무브먼트의 거실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떠올리면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케네디 가문과 정치권의 암막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가 죽은지 수 십 년이 넘도록 그녀에 대한 공식 조사서류는 대부분 고급기밀로 분류돼 있었다. 2006년까지 FBI(미 연방수사국)는 미국 자유정보법에 따라 500쪽 분량의 먼로 관련 문건의 비밀을 해제했다. 그러자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그가 적어놓은 비밀일기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역사 전문가들은 뒤늦게 밝혀냈다. 먼로의 일기에는 먼로와 케네디 형제의 ‘베갯머리 대화’가 다수 기록돼 있었다. 1962년 8월 초, 케네디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먼로와의 모든 왕래를 끊었다. 갑작스런 격변에 직면하여 마릴린 먼로 역시 자신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8월 4일 오후 9시 반, 그녀는 절친인 시드니 길라로프에게 전화로 케네디 형제와 있었던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LA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릴린 먼로는 공교롭게도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비밀 일기’도 신비롭게 사라졌으며 LA지검 사무실 또한 마릴린 먼로가 일기를 썼다는 것과 먼로의 죽음이 모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부인했다. 2012년 5월 16일,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제 홍보 포스터가 나붙었고 현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마릴린 먼로 주연의 각종 다른 영화의 스틸 사진이 끊임없이 상영되면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유명 조각가 수어드 존슨이 만든 마릴린 먼로 조각상 ‘영원한 먼로’가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그녀는 줄곧 어떤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녀도 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먼로는 평생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여인으로서 먼로는 전심전력으로 절대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이런 100%의 사랑을 남편들은 주지 못했고 애인들은 더욱 주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36세의 마릴린 먼로는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용모를 주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지 않았다. ‘세상의 좋은 물건은 견고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구름은 쉽게 흩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마릴린 먼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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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2-01-01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그녀는 60년대까지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한 여배우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유혹의 여신’이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그녀의 별명은 노마 제인 모테이센(Norma Jeane Baker)으로 미국계 유대인이었으며 출생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다. 마릴린 먼로: 출생일 1926년 6월 1일, 사망일 1962년 8월 5일, 별자리 쌍둥이자리, 혈형 AB형, 키 166cm, 몸무게 53kg, 직업 프로배우, 모델, 대표작 ‘7년차 가려움’, ‘버스터미널’, ‘용놀이’, ‘열정은 불처럼’ 등 다수 주요 성과로는 제9회 영국․TV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 최우수 외국여배우상, 제14회 미국영화방송 골든글로브 영화부문-뮤직코미디부문 최우수 여주연상, 제11회 영국 영화·TV예술아카데미 영화상 최우수 여배우상, 제17회 미국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뮤직코미디 최우수 여주역상, 100년 만의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 1926년 6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본병원에서 태어난 마릴린 먼로는 당시 노마 제인 모태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한 차례의 세례 후 그녀는 이름을 노마 제인 베이커로 변경했다. 불행한 것은 그녀가 사생아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멀리 타향으로 떠났으며 먼로는 태어난 지 13일 만에 브라운다이 부부의 집에서 매주 5달러씩 내기로 하고 입양됐다. 1933년 가을, 마릴린 먼로는 어머니 글라디스 바크르에게 인계되었다. 글라디스는 1935년 6월 1일 먼로의 보호자가 됐지만 몇 개월 후인 9월 13일 먼로를 고아원에 보냈다. 이어 먼로는 1937년 11월부터 안나란 여인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고교생이던 1941년 마릴린 먼로는 어린 나이에 결혼과 함께 ‘아름다운 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결혼 후 마릴린 먼로는 올림픽 챔피언 하워드한테서 역도와 서핑을 배웠으며 1944년 5월부터는 항공기 무전기 제조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5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는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과 함께 잡지 사진을 찍었다. 그 때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은 그녀가 사진을 게재하여 미군을 고무시키기를 희망했다. 마릴린먼로는 1946년 5월 26일 ‘가족권’ 잡지 표지를 통해 처음으로 얼굴을 알렸다. 1946년 7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로 처음으로 가게 되었고 7월 26일 폭스와 첫 6개월 계약을 맺었다. 또 머리를 황금색으로 염색하면서 ‘제인 아델’이라는 예명을 붙이기도 했다. 1948년 마릴린 먼로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슈쿠다, 허!스쿠다, 하이!(It's Shukuda, Huh! It's Shukuda, Hi!)’에서 교회를 달군 여자 역을 맡았지만 그한테 차례진 대사는 한 줄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는 한 영화에서 여자아이를 연기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장면은 삭제되었다. 1949년 5월 27일, 사진작가 톰 켈리는 먼로의 누드 사진을 여러 장 촬영하여 골드 미스 드림 달력을 출판했다. 하지만 먼로는 달력에 실린 자기의 사진에 싸인을 하지 않아 50달러만 받게 되었다. 그해의 8월 15일, 먼로는 뮤지컬 영화 ‘토마호크행 티켓(Tickets to Tomahawk)’의 촬영에 참여했고 10월에는 또 범죄영화 ‘밤의 밤’ 촬영에도 참여했다. 1950년 1월 5일, 먼로는 드라마 ‘화구(火球)’의 촬영을 시작했고 4월에는 또 드라마 ‘혜성미인’에서 어느 한 주요 배역을 맡았다. 같은 해 먼로는 잡지 ‘성조기’가 선정한 ‘매력 아가씨’로 뽑히기도 했다. 1951년 4월 18일, 먼로가 출연하는 애정 코미디 영화 ‘사랑의 둥지’ 촬영이 시작되면서 그해 5월 1일, 폭스는 먼로와 6개월 계약 기간을 7년으로 연장했다. 뒤이어 먼로는 1952년 5월 7일 ‘라이프(life!)’지의 표지모델로 데뷔했으며 6월 1일에는 멜로영화 ‘신사는 미인을 사랑한다’의 주역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그해 8월 31일 라디오 생방송에 첫 출연 했고 9월 2일에는 ‘미스 아메리카 모델 쇼’에 출연했다. 1953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가 미국 연예계에 짙은 손자국과 발자국을 남겼으며 9월 13일에는 TV에 처음 등장했다. 이어 11월 5일 로렌 바이콜, 로리 캘헌과 함께 출연한 애정 코미디 영화 ‘결혼하고 싶어’가 개봉됐다. 영화에서 먼로는 어릴 때부터 백만장자와의 결혼에 목마른 성감 모델 ‘보라 드 베이워스’ 역을 맡았다. 1954년 4월 30일, 마릴린 먼로가 로버트 미첨과 함께 촬영한 서부 모험영화 ‘동으로 흐르는 강물’이 개봉했다. 이 영화에서 먼로는 팜므파탈의 바 가수 ‘카이’역을 맡았다. 먼로는 9월 1일 로맨틱 코미디 영화 ‘7년차 가려움’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로 먼로는 제9회 영국영화·텔레비전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인 외국여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5년 1월 7일, 마릴린 먼로는 밀턴 그린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 센터’의 설립을 발표하였고 1월 15일 20세기 폭스 프로덕션과의 계약은 종료됐다. 1956년 1월 4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프로덕션과 재계약을 맺고 2월 25일 할리우드에 복귀했다. 그 때로부터 그녀는 마릴린 먼로로 개명했고 이어 3월 3일에는 주연 로맨틱 코미디 영화 ‘버스터미널’에 출연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제14회 미국 영화 TV 골든글로브 영화․TV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57년 6월 13일, 마릴린 먼로가 로런스 올리버와 함께 주역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드래곤 봉황’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는 관능적이고 매력적인 쇼걸 ‘엘시 마리나’의 역을 맡았으며 이 역할로 제11회 영국영화·TV예술 아카데미상 영화상-외국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8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애정 코미디 영화 ‘열정은 불처럼’에서 마이애미 악단의 아름다운 관능의 여인 ‘수가’ 역을 맡았다. 1960년 3월 8일 먼로는 영화 ‘열정은 불처럼’으로 제17회 미국 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 부문-뮤직코미디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을 받았다. 1961년 1월 31일, 마릴린 먼로는 클라크 게이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함께 촬영한 서부 애정 영화 ‘난점 원앙보’가 개봉됐다. 1962년 3월 5일, 마릴린 먼로는 ‘세계 최고의 여배우상’을 수상했고 이어서 4월 23일에는 그녀는 주연 코미디 단편 영화 ‘멘붕’ 촬영을 시작했다. 1962년 6월 1일은 마릴린 먼로의 20세기 폭스프로덕션에서의 마지막 출근 날이자 마지막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6월 7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먼로와 계약을 종료했다. 하지만 그해의 8월 1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월급을 2배로 주기로 하고 마릴린 먼로를 다시 고용하기로 결정했으며 8월 3일, 먼로는 ‘라이프’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멘붕'의 재촬영에 동의하면서 ‘라이프’지의 표지모델이 됐다. 1999년 미국영화학회가 선정한 ‘100년 만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에 올랐다.
    • 연예·방송
    2021-12-29
  • 中, 영화 ‘장진호’ 국경일 하루 관객 4억명 돌파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 9월 30일 중국에서 개봉 첫날에 관객 2억을 돌파한 영화 ‘장진호’ 국경일 하루 4억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개봉 이후 파죽지세의 흥행으로 치닫고 있다. ‘장진호’는 제작 규모, 투자 규모, 촬영 기간, 출연진과 스태프 수 모두 중국 영화 역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영화 준비 기간은 2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초기 단계에는 7,000명 이상이, 후반에는 12,000명이 영화에 참여하였으며 100,000명 이상의 엑스트라가 동원됐다. 10월 1일 20시 35분 현재 ‘장진호’와 ‘나와 나의 아버지 세대’ 등 2부의 영화에 힘입어 국경절 첫날 티켓 판매액은 이미 6억 위안을 돌파하였으며 국경절 첫날 티켓 판매는 역대 3위에 올랐다. ‘장진호’는 2일 만에 누적 흥행 6억 위안을 기록 중이며 또 다른 국경절 연휴 기간의 새 영화 ‘나와 나의 아버지 세대’는 개봉 2일 만에 누적 티켓 판매액 2억6000만 원을 돌파했다. ‘장진호’는 6.25 전쟁 기간인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24일까지 북한 장진호 지역에서 중국군 제9병단과 미 제10사가 직접 대결한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군 제9병단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무기 장비가 세계 일류이고 전공이 혁혁한 미 10사와 직접 교전하였던 곳으로 당시 미군 1개 사를 골탕 먹이면서 이 미군 정예부대는 역대 최장기 퇴진을 경험하게 됐다. 한편 2021년 상반기 중국 영화 매출은 30억1200만 위안으로 전년 동기 대비 553.23% 증가했고, 순이익은 3억500만 위안의 흑자로 돌아섰다.
    • 연예·방송
    2021-10-02

스포츠 검색결과

  • 中, ‘축구의 고향’ 연변의 축구 주말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최근 중국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70주년을 맞으면서 ‘축구의 고향’인 연변의 축구를 널리 소개하는 분위기다. 6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연변은 중국 북방의 ‘축구의 고향’으로 연변축구는 여러 해 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시민축구, 청소년축구 등이 널리 보급되었고 상당한 수의 축구 전문 인력을 육성 하였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는 266개의 축구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민간축구협회 7개, 축구클럽 98개를 설립했다. 최근 연변은 자치주 설립 70주년을 맞으며 중국 국가체육총국과 중국축구협회로부터 ‘전국 축구발전 중점지구’로 선정됐다.
    • 스포츠
    2022-09-06
  • 中 여자배구, 3-0으로 호주 꺽고 준결승 진출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7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2022년 여자배구 아시안컵 8강전에서 중국 여자배구대표팀은 3 :0으로 호주를 완승하고 4강에 진출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세계랭킹 59위인 호주 여자배구를 상대하는 중국은 전술과 경험에서 큰 우위를 점했다. 1세트 초반 중국은 5 : 0으로 순조롭게 출발했다. 이어지는 경기에서 호주가 수비 불안으로 실수를 거듭하면서 실점을 거듭하자 중국은 승세를 이어가며 25 : 13으로 1세트를 마무리했다. 이후 2세트와 3세트에서 중국의 공격에 호주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며 주저 앉았다. 중국은 각각 25 : 8로 2세트와 3세트에서 연속 승리하며 결국 3 : 0으로 상대를 완파하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이날 베트남은 중국 타이베이를 3 : 2로 꺾고 4강 티켓을 거머쥐었다.
    • 스포츠
    2022-08-28
  • 中 여자배구, 필리핀 꺾고 1경기 앞당겨 아시안컵 8강 진출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23일 열린 2022년 여자배구 아시안컵 3차전에서 중국 여자배구팀은 3 : 0으로 개최국 필리핀을 꺾고 1경기 앞당겨 8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이번 경기에서 중국 여자배구팀은 앞선 두 경기 선발 라인업 그대로 주공격수 좡위산(庄宇珊)과 우명제(吴梦洁), 부공격수 후밍위안(胡铭媛), 차오팅팅(曹婷婷), 저우예퉁(周页彤), 2전달에 쑨하이핑(孙海平), 자유인 쉬자난(许嘉楠)을 투입하였다. 필리핀 여자배구는 이번 아시안컵에서 평균 연령이 가장 많고 평균 키가 가장 작은 팀으로, 젊고 키가 큰 중국 여자배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다. 1세트 초반에는 중국의 공격성공률이 높지 않아 승점차를 좁히지 못하고 8:7로 첫 테크니컬 타임아웃에 들어갔다. 이후 이후 중국 대표팀의 키 우위가 차츰 드러났고 좡위산은 1세트 막판들어 여러 차례 네트 앞 스파이크를 날렸고 중국은 25 :16으로 1세트를 끝냈다. 2세트에 들어 필리핀은 카를로스의 공격적인 플레이에 힘입어 여러 차례 공격을 들이댔고 중국은 세트피스 실책이 많아 서로 점수가 번갈아 올랐다. 중국은 막판의 블로킹을 여러 차례 성공시키며 25 : 22로 가까스로 이겼다. 3세트에서 중국은 네트 앞에서 드리블이 결정적이지 않았고 리턴볼의 퀄리티도 높지않아 한때 8 : 12로 뒤지기도 했다. 서스펜션 조정 후 중국은 18점까지 추격했다. 이어서 장위산과 우멍제 등의 막판 연속 득점에 힘입어 중국은 25 : 20으로 이겼다. 이로써 중국은 3전 전승으로 8강 진출을 일찌감치 확정지었다. 중국 여자배구는 오는 25일 조의 마지막 상대인 이란과 맞붙게 된다. 한편 이날 나머지 두 경기에서 중국 타이베(台北)는 3 : 2로 호주를 이기며 조별리그 첫 승을 거뒀고 베트남은 3 : 0으로 이란을 꺾고 중국 여자배구에 이어 A조 2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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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4
  • 中 여자배구 대표팀,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자 명단 발표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5일, 중국배구협회는 2022년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할 중국 여자배구 22명 선수 명단을 발표했다.    출전 선수 명단에 따르면 주공격수는 진예(金烨), 왕윈루(王云蕗), 왕이주(王艺竹), 리잉잉(李盈莹), 우멍제(吴梦洁), 왕이판(王逸凡), 중후이(仲慧) 등 7명이고, 부공격수로는 웬신웨(袁心玥), 양한위(杨涵玉), 고이(高意), 왕위안위안(王媛媛)과 정이신(郑益昕)이 선발됐으며 접전 포지션에서는 궁샹위(龚翔宇), 천페이옌(陈佩妍), 먀오이웬(缪伊雯)과 두칭칭(杜清清)이, 세 번째 포지션에서는 디아오린위(刁琳宇), 딩샤(丁霞)와 위자루이(郁佳睿) 등 3명이 뽑혔다. 이 밖에 자유인으로는 왕웨이이(王唯漪), 예비비이페이판(倪非凡)과 왕멍제(王梦洁) 등 3명이 선정됐다. 차이빈(蔡斌) 중국 여자배구대표팀 감독은 주팅(朱婷)과 장창닝(张常宁)이 도쿄 올림픽 이후 수술을 했고 수술 후 회복에 적극적이라고 밝히면서 이들의 회복과 대표팀의 세계선수권대회 준비 일정에 따라 이번 대회에 출전할 수는 없지만 대표팀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고 말했다. 한편 대표팀을 따라 세계 여자배구 리그에 출전하지 않았던 왕멍제는 다시 팀에 합류했다. 차이빈 감독은 왕멍제이의 현재 몸 상태는 양호하며 대회 경험이 풍부하다고 밝혔다.    세계여자배구리그를 마치고 귀국한 중국 여자배구대표팀은 이제 곧바로 세계선수권대회 준비에 들어가게 된다.    차이빈 감독은 세계선수권대회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만큼 리그에서 드러난 문제를 잘 해결해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따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2022년 여자배구 세계선수권대회는 오는 9월 23일부터 10월 15일까지 네덜란드와 폴란드에서 열리며 중국 여자배구대표팀은 브라질, 일본,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체코와 함께 D조에 속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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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7
  • 역사를 쓰다! 중국선수,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멀리뛰기 금메달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22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16일(현지 시간) 미국 오리건주 유진에서 열렸다.중국의 왕가남이 8m36의 기록으로 남자 멀리뛰기 금메달을 따낸 것은 중국 육상팀이 이번 세계선수권에서 거둔 첫 금메달이자 중국 선수가 남자 멀리뛰기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왕가남의 금메달은 의외의 기쁨이었다. 예선에서 7.98m로 결승에 오른 왕가남은 결승 전 초반 3위 안에 들지 못했지만 마지막 점프에서 8.36m의 용맹을 발휘해 단숨에 1위로 올라섰다. 이후 출전한 선수 중 이를 뛰어넘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고 도쿄 올림픽 챔피언인 그리스의 밀티아디스 텐토글루도 8.2m에 그쳐 왕가남이 남자 멀리뛰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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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8
  • 中,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첫 금메달… 다이빙 남자 더블 3m 스프링보드 우승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6일 밤, 제19회 국제수영연맹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다이빙 남자 더블 3m 스프링보드 종목에서 우승이 가려졌다. 년초부터 호흡을 맞춰온 중국의 차오옌-왕중웬(曹缘/王宗源)이 459.18점으로 이번 대회 첫 다이빙 금메달을 따냈다. 왕중웬은 지난해 도쿄 올림픽에서 세스창(谢思埸)과 짝을 이뤄 이 종목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차오옌은 도쿄 올림픽 남자 싱글 10m 플랫폼에서 개인 통산 세 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차오옌의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3m 보드에서 나왔고 도쿄 올림픽에서 차오옌이 상당 기간 판을 두드려온 만큼 왕중웬과 호흡을 맞추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훈련을 통해 충분히 호흡을 맞췄다. 이들은 1, 2위 독일을 9점 차로 따돌렸다. 첫 번째 프리킥이 끝나고 영국이 독일을 제치고 2위로 올라섰지만 중국도 15.3점으로 리드를 더 넓혔다. 중국의 네 번째 동작인 407C(안쪽으로 3바퀴 반 정도 젖혀 안는 것)가 예선에서는 약간 부족했만 결승에서 89.76점의 높은 점수를 얻어 선두 자리를 굳건히 했다. 마지막 2라운드에서는 세트피스 난이도와 더 높은 영국의 활약이 차오옌/왕중웬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중국은 마지막 점프인 세트피스 난이도가 가장 높은 109C(앞쪽으로 네 바퀴 반을 공중으로 넘기는 것)에서 차오옌이 막판 슬레이트 비운을 놓치는 바람에 79.80점을 얻는 데 그쳤지만 다행히 앞선 점수 차이가 커지면서 7.47점 차이로 우승했다.(사진/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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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7
  • 에일린 구, 2022 글로벌 앰배서더 선정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최근 에일린 구는 2022년도 글로벌 앰배서더로 선정 되었다. 최근 아시아소사이어티 남부 캘리포니아주센터는 에일린 구를 2022 글로벌 앰배서더로 선정했다. 여성으로는 처음이다. 앞서 농구선수 야오밍, 코비도 글로벌 앰배서더로 선정된 바 있다. 빙설 스포츠는 기후와 장소 등의 제약으로 인해 중국 내 보급률이 높지 않다. 하지만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열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빙설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에일린 구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2매와 은메달 1개를 따낸 후 많은 중국인들이 스키에 관심을 갖게 했다. 에일린 구는 중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다. 그동안 올림픽위원회는 에일린 구와 메시, 샤오웨이 등 스포츠 스타들을 한자리에 모은 포스터를 내놓았다. 에일린 구가 나름대로 노력한 덕에 동계스포츠를 축구, 농구, 테니스와 비교할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하다. 에일린 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스키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에일린 구는 경기장에서의 좋은 성적 뿐만 아니라 경기장 밖에서도 꾸준히 연습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또한 다양한 스포츠 종목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스포츠 보급과 진흥에 전념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스포츠의 매력을 느끼고 스포츠 활동에 매진하게 하고 있다. 야오밍, 류샹(刘翔)과 리나(李娜) 등 스포츠인들이 은퇴 후 중국 스포츠에는 이처럼 국제적 영향력을 갖춘 스포츠 스타가 필요했는데 이제 에일린 구가 이 조건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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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4
  • 국제탁구연맹 세계랭킹 경신…中 천멍, 여자 단식 세계 1위 복귀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현지시간으로 22일, 국제탁구연맹은 최근(지난 주말) 세계프로탁구연맹(WTT) 싱가포르 그랜드슬램에서 우승한 중국의 천멍(陈梦)이 8주 만에 탁구 여자단식 세계 랭킹 1위에 복귀했다고 발표했다. 천멍은 WTT 싱가포르 그랜드슬램 챔피언 포인트 2000점으로 세계 1위에 복귀했다. 그리고 팀 동료인 쑨잉사(孙颖莎)는 세계 랭킹 2위에 올랐다. 또 다른 중국 국가대표인 왕만위(王曼昱)는여자단식 결승 진출로 일본의 이토 미마코토를 제치고 3위를 차지했다.    다음, 푸에르토리코 아드리아나 디아스는 비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여자 단식 톱10에 이름을 올렸고 여자단식 8강에 진출한 오스트리아의 보르카노바는 승점 350점을 받아 13위로 뛰어오르며 현재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남자 선수로는 중국의 판쩐둥(樊振东)이 2위 마룽보다 3794점 앞서면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에 앞서 세계 랭킹 5위였던 량징쿤(梁靖崑)은 남자 단식 4강에 올라 생애 최고 순위를 경신하며 브라질의 칼 데라노를 제치고 3위에 올랐다.     다음 슬로베니아의 명장 요치크도 개인 통산 최고 순위를 경신하며 11위에 올랐고 50위 안에 든 일본의 차세대 주자 우타다 유키야는 남자 단식 4강에 올라 20단계 상승한 29위에 올랐다.    또한 중국 왕추친-쑨잉사(王楚钦/孙颖)는 혼합복식 우승으로 세계 2위에 오르면서 승점은 1위인 중국 타이베이 린윈유-정이징(林昀儒/郑怡静)과 근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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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4
  • 2022년 베이징 동계패럴림픽 성황리에 폐막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3일 밤, 시진핑(习近平) 등 중국 당과 정부의 지도자들과 국제패럴림픽위원회 파슨스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2022년 베이징 동계패럴림픽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성황리에 폐막됐다. 베이징 동계패럴림픽은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폐막된 이후 중국이 개최한 또 하나의 세계 정상급의 대형 행사로서 뛰어난 조직력과 완벽한 시설 그리고 최고로 되는 인성화 서비스로 선수·코치와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지난 9일 동안 46개국(지역)의 600명에 가까운 장애인 선수들이 열정과 용기를 누리며 자강불식 낙관론을 펼쳤다. 그 중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18개를 포함한 메달 총수 61개로 1위를 차지하며 동계패럴림픽 출전 이래 최고 성적을 냈다.    국립경기장은 이별을 아쉬워하는 애틋한 정으로 가득했다. 폐막식을 앞두고 ‘평화-운명공동체’의 취주악에 맞춰 시진핑과 부인 펑리위안(彭丽媛) 여사, 그리고 파슨스 등이 단상에 올라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자 장내에 우렁찬 박수가 터졌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폐막식 오프닝 공연은 ‘하이빔 아워(高光时刻)’으로 시작되었다. 경기장 중앙의 대형 스크린에는 장애인과 예술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축제를 펼쳤다.  그 뒤 모두 기립한 가운데 웅장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소리와 더불어 오성홍기가 게양되었다.    새로 선출된 국제패럴림픽위원회 선수위원회 위원 2명이 경기장 한가운데로 나와 베이징 동계패럴림픽 자원봉사자 대표 6명에게 헌화를 하며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순간 대형 스크린에는 자원봉사자들이 열정적이고 섬기는 감동적인 모습이 안겨왔다.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고 장애인과 건전인 배우가 함께 하는 사랑의 감화는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는다. 장애인 첼로 연주자가 국제패럴림픽위원회 회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국제패럴림픽위원회 회기가 서서히 내렸다.     다음 순간,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기 전달식이 있었다. 베이징시 천지닝(陈吉宁) 시장은 국제패럴림픽위원회기를 흔들어 파슨스 국제패럴림픽위원회 위원장에게 넘겼고 파슨스는 차기 패럴림픽 개최 도시인 이탈리아 밀라노시 스칼부초 부시장과 코르티나 단페초시 게디나 시장에게 맡겼다.    이어 이탈리아 국가가 울려 퍼지고 이탈리아 국기를 게양되었으며스크린에는 차기 동계올림픽 개최 도시 단편 ‘우리는 빛이다’가 방영됐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조직위 차이치(蔡奇)주석이 축사를 했다. 그는 축사에서 잊을 수 없는 9일 동안 세계 각지에서 모여온 선수들이 패럴림픽의 꿈을 강한 의지로 실현하는 등 낙천적이고 진취적인 인생자세, 평등하고 자강적인 생명의 존엄성, 끈질긴 정신력을 보여주면서 동계패럴림픽의 독특한 매력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고 밝혔다. 또한 패럴림픽 대가족 성원들이 단결하여 협력하여 전 세계에 훌륭한 패럴림픽을 보여주었다고 언급했다.    이어 파슨스 위원장은 축사를 통해 “베이징 동계패럴림픽은 놀랍고 안전하고도 훌륭했으며 이는 앞으로 동계패럴림픽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중국이 동계패럴림픽 강국이 된 것을 축하하며 베이징 동계올림픽조직위와 중국 동계패럴림픽위, 그리고 중국 정부와 중국 국민 모두에게 감사를 표하고 4년 뒤 밀라노-코르티나 단페초에서 다시 만나자고 호소했다.    이어 수많은 장애인들의 행복한 모습를 담은 영상이 마지막 고별의 순간을 열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둘 담긴 화면에서 재현됐다. ‘눈꽃’의 감동적인 선율 속에서 ‘대설화(大雪花)’를 형상화한 베이징 동계패럴림픽의 메인 횃불이 서서히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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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4
  • 中 스키어들, 스노보드 종목서 금메달 2매 추가하며 경기 마무리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1일, 윈딩(云顶) 스키공원에서 있은 스노보드 경기종목에서 중국 선수단의 우중웨이(武中伟)·쑨치(孙奇) 선수가 마지막 2매의 금메달을 따내면서 베이징 동계패럴림픽 스노보드 경기가 전부 마무리됐다. 4개의 세부 종목으로 진행된 이날 경기에서 중국 선수들은 금메달 2매, 은메달 2매와 동메달 2매를 따냈다. 이날 중국 선수들은 4개 뱅크드 슬라럼 종목에서 모두 2개로 나뉘어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퍼스트 스케이팅의 4개 종목에서는 모두 중국 선수가 1위를 차지했다. 우중웨이는 1분11초92로 2위보다 0.16초 앞선 기록으로 남자 뱅크드 슬라럼 SB-LL1급 1차전을 통과했다. 2위인 네덜란드의 크리스 포스는 0.02초 앞당기는 데 그쳤으며 중국의 우중웨이는 막판 스케이팅에 총력을 기울이며 1분10초85로 자신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논란 없이 우승을 차지했다. 우중웨이가 우승한 직후 팀 동료 쑨치는 남자 뱅크드 슬라럼 SB-LL2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날 금메달 2매 획득을 끝으로 중국 동계패럴림픽 스노보드팀은 금메달 3매, 은메달 3매와, 동메달 4매를 기록했다. 앞서 남자 장애물 추적 UL급에서 금메달을 딴 지리자아(纪立家)는 경사로 UL급에서 은메달을, 주융강(朱永钢)은 3위를 차지했으며 금메달은 프랑스의 막심 몬타지오니가 차지했다.
    • 스포츠
    2022-03-13

포토뉴스 검색결과

  • [월드컵 2차 예선]중국, 싱가포르에 4-1 대승
    [동포투데이] 이반코비치 감독이 이끈 중국은 26일 톈진 올림픽센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C조 조별리그 4차전 싱가포르와 홈경기에서 우레이(21',85), 페르난둬(65'페널티), 웨이시하오(90')의 골에 힘입어 4-1로 대승을 거뒀다.(사진출처 : 차이나데일리)
    • 스포츠
    2024-03-27
  • 저우쉰·황레이·탕웨이, 드라마타운 행사 참석
    [동포투데이] 일부 네티즌이 SNS에 공유한 장시 후이창 드라마타운 개막식 영상과 사진에는 행사에 참가한 황레이(黄磊), 저우쉰(周迅), 탕웨이(汤唯) 등 모습이 담겼다. 황레이는 검은색 슈트 차림으로 등장했고,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어 산뜻해 보였다. 저우쉰은 프린트된 레깅스에 블랙 재킷과 네이비 컬러의 와이드 팬츠를 매치해 동양적이면서도 클래식한 멋을 뽐냈다. 탕웨이는 검은색 이너에 말차녹색 재킷과 카키색 바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캐주얼한 모습을 연출했다. 황레이, 저우쉰, 탕웨이 등이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많은 팬들이 와서 쪼그려 앉아 기다렸고, 이들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이들 또한 팬들의 호명에 일일이 화답하며 팬들을 즐겁게 했다. 저우쉰이 등장했을 때, 그녀는 마침 동료와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팬들의 호명에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탕웨이는 무대에 등장하자 팬들에게 직접 손을 흔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행사 기간 동안 황레이, 저우쉰, 탕웨이는 주최 측의 안내하에 행사장을 방문하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많은 참석자들은 저우쉰과 탕웨이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저우쉰이 정말 말랐지만 매우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탕웨이는 마른 체형이지만 키가 170cm가 넘는 큰 키가 눈에 띄고 기질도 좋아 보였고 웃으면 목춘풍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고 한다.
    • 연예·방송
    2024-01-07
  • 신화통신 선정 '2023 세계 10대 스포츠 선수'
    [동포투데이] 신화통신이 '2023 세계 10대 스포츠 선수'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 막스 베르스타펜(네덜란드, 男 26세, 스포츠카) 2023시즌 포뮬러원 챔피언십(F1)이 마무리되는 아부다비 그랑프리에서 레드불 레이싱팀의 베르스타펜이 폴포지션을 잡고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그는 올해 22개 대회에서 21차례 포디움에 오르며 19개 대회에서 우승하며 F1 시즌 승률 기록을 갈아치웠다. 앞서 지난 10월 카타르 그랑프리에서는 올해의 드라이버 종합 우승을 일찌감치 차지한 바 있은 베르스타펜이다, 이번 우승은 그의 3회 연속이다. 사진은 지난 3월 5일, 레드불 레이싱의 네덜란드 선수인 막스 베르스타펜이 세계 포뮬러 원 챔피언십(F1) 바레인 그랑프리 본선에서 우승을 자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2. 아이타나 본마티, (스페인, 女 25세, 축구) 본마티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열린 여자월드컵에서 팀메이트들과 함께 미드필드 핵심으로 활약하면서 팀의 사상 첫 우승컵을 안았고, 개인적으로는 이번 월드컵에서 골든글로브를 수상했다. 지난 10월에 열린 2023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여자 골든글로브 수상이 유력하게 점쳐졌다. 사진은 지난 8월 20일 스페인 대표팀 아이타나 본마티가 2023년 여자축구 월드컵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이다. 3. 니콜라 요키치(세르비아, 男 28세, 농구) 2022∼2023시즌 메이저리그(NBA)에서 덴버 너기츠를 창단 첫 종합 우승컵으로 이끈 세르비아 출신의 미드필더 요키치는 파이널 MVP에 개인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시즌 MVP로 3연속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시즌 평균 24.5점, 11.8개의 리바운드, 9.8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정상을 지켰다. 지난 6월 12일, 덴버 너기츠의 니콜라 요키치(전좌)가 2022-2023 시즌 NBA 파이널 MVP로 선정(사진)되었다. 4. 시몬 바일스(미국, 女 26세, 체조) 미국 체조선수 바일스가 심리적 문제로 도쿄올림픽에서 리타이어하는 파란을 겪은 뒤 2023년 화려하게 돌아왔다. 지난 8월, 그는 전미선수권대회에서 사상 8번째로 여자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10월 체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4년 만에 종합 금메달을 목에 걸며 세계선수권대회 종합 6관왕에 올랐다. 이로써 26세의 바일스는 체조 역사상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가장 많은 메달(34개)을 획득한 선수가 됐다. 사진은 지난 10월 8일, 미국 선수 사이먼 바일스가 2023년 체조 세계선수권 평균대 시상에 나서는 모습이다. 5. 미카엘라 시플린(미국, 女 28세, 스키) 2022-2023 눈시즌에는 미국의 스키선수 시플린이 알파인스키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쾰른플라츠에서 열린 예선에서 여자 그랜드슬램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83승으로 월드컵 최다 여자 알파인스키 선수가 되었고, 시즌이 끝날 무렵에는 이를 88경기로 경신하며 스웨덴 남자선수 스텐마르크의 86경기를 제치고 월드컵 역사상 최다 우승을 차지하였다. 사진은 미국 선수 미카엘라 시플린이 2023년 1월 4일 자그레브 알파인 스키 월드컵 여자 회전 경기에서의 모습이다. 6. 켈빈 킵툼(케냐, 男 24세, 육상) 2023년 시카고 마라톤에서 킵탐은 2시간 0분 35초로 완주하며 남자 마라톤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고, 공식 경기에서 2시간 1분을 돌파한 최초의 마라톤 선수가 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우승 기록은 케냐 명인 킵초그가 세운 2시간 1분 9초의 전 세계 기록을 34초나 뛰어넘었다. 사진은 지난 4월 23일 케냐의 캘빈 킵툼이 런던 마라톤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이다. 7. 케일리 맥커운 (호주, 女 22세, 수영) 호주의 명장맥커운이 후쿠오카 수영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50, 100m, 200m 배영 우승을 석권하면서 중국의친하이양(覃海洋)과 함께 같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관왕에 올랐다. 월드컵 시리즈에서 여자 배영 금메달 9개를 석권하고 부다페스트에서는 50m와 100m 배영 결승에서 두 차례 세계 기록을 경신하면서 여자 50m, 100m, 200m 배영 세계 기록을 모두 석권하였으며, 지난 10월에는 세계수영연맹 올해의 여자 수영 선수로 선정되었다. 사진은 지난 7월 29일 호주 선수 맥커운이 후쿠오카 수영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200m 배영 결승에서 우승을 자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8. 페이스 킵예곤(케냐, 女 29세, 육상) 지난 6월, 두 번의 IAA 다이아몬드 리그에서 킵예곤은 여자 1,500m와 여자 5,000m 세계 기록을 연이어 경신했고, 7월에는 비올림픽 여자 1마일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 5,000m 세계 기록은 지난 9월에 에티오피아가 경신했지만 킵예곤이 1년 동안 세 번이나 세계 기록을 깬 것은 아직 보기 드문 일이다. 지난 8월 부다페스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1500m와 5000m 두 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그는 현재 세계주니어챔피언, 세계챔피언, 올림픽챔피언, 세계기록 보유자 타이틀을 모두 보유한 선수이다. 사진은 지난 8월 22일, 케냐의 페이스킵예곤이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1500m 결승에서 우승을 자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9.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 男 36세, 테니스) 조코비치는 2023년 네 번째 US오픈 우승 이후 통산 24번째 그랜드슬램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23관왕인 세리나 윌리엄스를 제치고 오픈 1위 독주 시대를 열었다. 연말에는 남자프로테니스협회(ATP) 2023년 종별 결선에서 7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페더러와 통산 6번의 종별 결선 우승 기록을 깨기도 했다. 2023년 4대 메이저 대회에서 조코비치는 그중 3개의 우승컵을 거머쥐면서 윔블던 결승에서는 후발주자인 알칼라스에게만 졌다. 그가 호주 오픈에서 우승한 것은 이 경기에서 10관왕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사진은 지난 6월 11일, 세르비아 선수 노바크 조코비치가 2023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시상식에서의 모습이다. 10. 친하이양(중국, 男 24세, 수영) 지난 7월에 열린 후쿠오카 수영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친하이양(覃海洋)이 남자 50, 100m, 200m 평영 3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사상 최초로 같은 대회에서 평영 3개 종목 금메달을 석권하며 남자 200m 평영 세계기록을 깼다. 2023년에는 청두대학생운동회에서 그는 철물을 따내고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MVP를 수상하면서 수영 월드컵에서 월드컵 올해의 종합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사진은 지난 10월 23일, 중국 선수 친하이양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2023년 세계수영연맹 최우수 남자 선수로 선정된 날의 모습이다.
    • 스포츠
    2023-12-31
  • 2023 미스 유니버스, 미녀들의 민족 의상 쇼
    산살바도르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에서 각국의 미녀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민족 의상 쇼.(AP 사진/모이세스 카스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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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23-11-22
  • 76.8m! 中 대륙서 가장 높은 나무 '부탄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티베트 모퉈(墨脱)현 베이벵背崩향 거린(格林)촌에서 76.8m 높이의 부탄송 한 그루가 발견됐다. '부탄송'으로 불리는 이 나무는 윈난 가오리공산(高黎贡山)에 있던 72m의 독삼나무의 높이 기록을 갈아치우며 중국 대륙에서 가장 높은 나무로 되었다. '부탄송'은 해발 1400~2500m의 산지우림과 아열대 기후 지역으로 수열조건이 우수하고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동부 히말라야에만 분포하는 수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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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2

동영상뉴스 검색결과

  • 하늘을 나는 중국 자동차, 광저우 도심 상공 횡단
    [동포투데이] 3월 8일 샤오펑후이톈 비행 자동차 여행자 X2가 도심 '티안더 광장-광저우 타워' 지역에서 저고도 비행을 성공적으로 완료하여 향후 도심 항공 모빌리티 및 저고도 관광과 같은 저고도 경제 응용 시나리오의 포괄적인 보급을 위한 경험을 제공했다. 이번 비행에서 여행자 X2는 광저우 톈허구의 티안더 광장 A급 오피스 단지에서 수직으로 이륙해 자율주행 모드로 랜드마크인 광저우타워 방향으로 비행하며 광둥성 박물관, 화청 광장, 하이신아시안게임공원 등 광저우의 랜드마크를 횡단했다. 이 비행경로는 향후 도심 항공 교통뿐만 아니라 관상 가치가 높은 저고도 투어 루트로도 활용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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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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