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5-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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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농촌여성 마린훙의 치부(致富) 스토리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올해 26살인 마린훙(马林红)의 집은 간수성 린샤 회족자치주 둥향족 자치현 다수향 난양와촌(甘肃省临夏回族自治州东乡族自治县大树乡南阳洼村)에 있다. 난양와촌 탈빈 부축 공장에 출근하는 마린훙은 연속 수개월 간 최우수 노동자로 되었고 월급은 달마다 6000위안 상하로 오르내렸다. 또한 그녀는 일명 보통 노동자로부터 일약 직장의 주관 책임자로 되었다. 이는 마린훙 그녀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성과였다. “예전에는 그냥 집에서 밭을 가꾸고 집안을 거두고, 밥 하고 아이를 돌보고 수입이 없었으며 뭘 좀 사려고 해도 두 손 벌리고 남편한테 돈을 달라고 해야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어요. 주관 책임자로서 전 전용자루를 생산하는 외에도 일상의 출근과 제품수량 통계 등을 책임지고 있으며 돈을 벌어서는 저의 화장품을 사고 아이와 집안 식구들에게 많은 선물을 사주기도 해요…” 둥향족 자치현은 일찍 중국 극빈 지역의 하나였다. 2019년 8월, 농촌빈곤 여성들의 취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랴오닝 팡다그룹(辽宁方大集团)과 현지의 상업무역회사는 합자하여 다수향 난양와촌에 탈빈 부축 공장을 설립, 주요 업무는 전용자루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촌간부들의 설복으로 마린훙이 시험 삼아 온 곳이 이 탈빈 부축 공장이었던 것이다. 마린훙이 일을 해보니 전용자루를 만드는 것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얼마 안 되어 일에 미립이 트면서 매일 40-50개의 전용자루를 생산, 매 한 자루에 6위안씩 계산하니 하루 수백 위안씩 벌 수 있었다. 마린훙에 따르면 그녀는 매일 근무시간 외에도 직장에서 집이 멀지 않으니 가끔씩 집에 다녀오며 아이와 집사람들을 돌볼 수도 있다. 마린훙과 마찬가지로 탈빈 공장에서 근무하는 여성 중 월수입이 6000위안에 달하는 여성이 적지 않았다. 집계에 따르면 랴오닝다팡그룹이 둥샹족 자치현에 투입한 자금은 누적 5.5억 위안, 낙착된 탈빈산업 항목은 27개이다. 활성화되어 운영되고 있는 공장은 31개로 취업인원은 9700여 명이나 된다. 탈빈 공장에서 근무하는 농촌여성들은 훈련을 통하여 점차 일터의 숙련공으로 되었으며 성과급 중심의 급여 시스템에서 많은 농촌여성들이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고 있다. 마린훙은 현재 저축한 예금이 3만 위안, 이제 계속 돈을 벌어서는 올해 내로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따낼 계획이며 그리고 차를 장만할 돈이 모아지면 자가용을 구입해서는 아이와 집식구들과 함께 여행을 갈 것이라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中 '외교의 꽃' 미녀 대변인 - 화춘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외교부는 긴장하고도 엄숙하며 또한 민감한 부문이다. 이러한 부문에서 근무한다는 건 분명 영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자랑스럽기에 앞서 자아관리를 철저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기민하고도 지혜로워야 하며 웅변능력 또한 비범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여성은 바로 웬간한 남자들도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일꾼, 그것도 외교부 대변인이다.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쩍하면 넘겨짚기를 잘하는 중외 기자들 앞에서 때로는 침착하게, 때로는 날카롭고도 당당하게 또한 어떤 경우에는 상냥하고도 겸허하게 기자들 앞에 나서는 그녀 - 화춘영(华春莹)은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1970년 화춘영은 중국 강소 회안의 한 간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화춘영은 별로 간부가정의 자녀라는 우월감을 별로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기 좋아했으며 늘 얼굴에 웃음기를 담고 있는 친절하고도 예의가 바른 소녀였다. 중학교 시절, 화춘영은 학습 성적이 돌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남한테 뒤지는 편도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남자애들이 즐기는 축구운동을 좋아했으며 고중입시를 앞두고는 여학생들을 이끌고 남녀 축구 대 항전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나 할까? 선생님과 동창생들의 눈에는 조용하고도 기타 사심이 없어 보이는 화춘영 - 그한테는 조용한 가운데 강인한 일면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대학교 숙소의 ‘영춘화(迎春花)’로 불렸지만 대학교 4년간 그녀는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극소수 여학생 중의 한명이었다. 이렇게 아련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일면이 있고 또한 다른 측면으로 보면 부드럽기도 한 것이 화춘영의 과거의 주소라면 후에 외교관이 된 다음의 화춘영은 강자 앞에서는 약하지 않고 약자 앞에서는 또한 절대 강하지 않는 것이 외교부 대변인으로서의 현주소였다. 2012년 11월 19일, 당시 42세가 되는 화춘영이 중국외교부 브리핑 장소에 나타나자 장내는 삽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발머리 미녀가 외교부 대변인의 신분으로 나섰으니 말이었다. “드디어 중국에도 미녀외교관이 나타났군 그래.” “그래그래, 미녀이면서도 어딘가 카리스마가 있어” 한편 화춘영의 언변과 실력에 대해 시험대에 올려 보려는 외신 기자들도 없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한 속셈을 가졌던 외신기자들도 눈알이 동그랗게 되면서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날카롭다가도 다시 친절한 화춘영의 언어실력은 장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긴 화춘영은 외교부에 갓 입문한 햇내기가 아니라 이미 거의 20년간 외교전선에서 단련된 외교능수라는 것을 외신기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사실 화춘영이 중국 외교부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3년이었다. 외교부에 입문한 화춘영은 선후로 서 유럽사(司) 과원, 주 싱가포르 대사관 수행인원, 3등비서, 외교부 서 유럽사 3등비서, 부처장, 주 유럽연맹 사절단 2등비서, 1등비서, 참사관, 외교부 유럽사 참사관 등 직에 머물다가 2012년 강유(姜瑜)에 이어 중국 외교부 보도 사 부사장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중국외교부 대변인으로 부임, 중국외교부가 대변인 제도를 건립한 이래 모두 5명의 여성대변인이 탄생했다. 역대 중국외교부의 여성대변인들로는 각각 이금화(李金华), 범혜연(范慧娟), 장계월(章启月), 강유와 화춘영이었다. 알려진데 의하면 화춘영이 외교사업에 종사한 28년 간 유럽사 및 유럽, 아시아 지구에서 근무하면서 비교적 풍부한 외교경험과 양호한 소통능력을 키웠으며 외교부 대변인으로 되기에 매우 합당한 인선이 되었던 것이다. 화춘영은 늘 “나는 최선을 다 하여 모든 이들을 도와 적시 적이고 정확하며 또한 전면 적으로 중국의 외교정책을 요해하게 하는 동시에 나 역시 모든 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며 그리고 양호하게 합작하는 것으로 중국과 세계와의 상호 요해와 이해, 신입과 합작을 추진하기에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하군 했다고 한다. 화춘영은 진실로 그렇게 했다. 2012년 11월 16일, 화춘영은 중국외교부에서 개최한 정례브리핑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에 중국외교부의 신임대변인의 신임으로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 때 그녀는 외교부의 제 27번째 대변인이자 5 번째 여성대변이기도 했다. 당시 자기의 어깨위의 책임이 중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화춘영은 중국과 세계의 관계는 한창 심각한 조정 시기에 있으므로 중국은 세계를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하며 세계 또한 중국을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한다고 표했다. 이어 11월 19일, 화춘영은 정식으로 중국외교부의 정례 브리핑을 주최, 브리핑에서 화춘영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연임 후 첫 출국방문이 아시아태평양 지구를 선택한 것과 중국공산당 제 18 차 당 대회 이래의 중국의 외교정책 등에 관한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면서 논리성이 강한 그녀의 답변과 막힘없는 화술구사는 모든 기자들의 찬탄을 자아내면서 중국의 젊은 여 대변인의 매력과 풍격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그 이튿날 중국 홍콩의 한 매체는 당시의 정경을 두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1월 19일 오후, 외교부의 신임대변인 화춘영이 첫 브리핑을 주최, 20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화춘영은 선후로 10명에 달하는 중외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주었다. 중일관계로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지구 전략 및 향후 어떻게 매체를 대하겠는가 하는 것을 두고 경외 기자들은 불쑥불쑥 ‘도전적’이고도 민감한 문제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으나 신임대변인 화춘영은 기민하고도 자유자재로, 개방되고도 솔직하게 답했으며 난감한 문제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대범하고도 상세하게 답변하여 모든 기자들의 긍정을 받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화춘영은 웃음기가 어린 얼굴을 하고는 처음으로 발언대에 올라 기자들한테 진심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뒤로부터 중국과 외국의 매체의 기사들에는 중국외교부 대변인 화춘영이란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그 이름은 지구촌 방방곳곳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화춘영은 외교부 대변인이란 본직에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이어 2020년 1월 1일, ‘중국부녀’ 편집부로부터 ‘2019년 10대 여성인물’로 평선 되었고 2020년 9월 8일에는 전국 코로나 19 대응 선진개인 및 전국 우수 공산당원으로 선정 되기도 했다. 현재 화춘영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보도사(司) 사장직에서 근무하고 있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中 성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의 조선족 원로가수 방초선

▲전설의 조선족 원로가수 방초선. [동포투데이] ‘처녀의 노래’, ‘사과배 따는 처녀’, ‘베 짜기 노래’,‘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붉은 해 변강 비추네’ 등 명곡을 불러 이름을 떨친 원로가수 방초선 선생은 지난 70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국가 1급 성악가인 방초선 선생은 연변에서 북경, 전국, 나아가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높은 실력을 인정받았다. 국무원에서 수여하는 “정부 특별예술가”칭호를 받은 방초선 선생은 “중국 예술가 사전”과 “중외 여성 명인 사전” 등 사전에 약력이 수록될 만큼 전문가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1932년 조선 김책시에서 출생한 방초선은 여덟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길림성 왕청현으로 이주했다. 마을의 꾀꼴새로 불리던 그는 일본유학을 다녀온 아버지로부터 많은 외국 노래를 배우고 불러 늘 마을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15살 나이의 방초선은 길동군분구 문공단의 선전대원으로 성장하였다. 1949년 연변가무단 전신인 연변문공단이 세워지면서 방초선은 연변문공단에 전근하여 독창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초선은 연변가무단에서 화려한 데뷔를 했다. 1957년, 방초선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세계청년연환축제 음악콩쿠르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삐어난 목청과 춤사위로 방초선은 ‘처녀의 노래’로 수백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은상을 받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 후 방초선 선생은 공장, 광산, 병영, 향촌 그리고 변방의 방방곡곡에 무수한 발자국을 남겼고 열정과 희망을 안고 북경 최고 음악학부에서 성악공부를 계속하였다. 방초선 선생의 음악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분을 말하면 인생 동반자인 남편 왕개평 선생이다. 1975년 방초선 선생은 연변가무단의 저명한 성악가인 남편 왕개평과 함께 중앙방송예술단에 전근되어 독창 가수와 성악교원으로 활동 분야를 넓혀갔다. 이 기간 방초선 선생은 북경, 연길 등 지역에서 개인 독창음악회를 가졌고 성악가인 남편 왕개평과 함께 북경, 상해, 남경, 중경, 연길, 카나다, 미국, 일본, 한국 등 국내외를 순회하면서 80차의 음악회를 개최했다. 많은 사람들은 방초선 선생을 보고 선천적으로 좋은 목청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그는 한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며 목소리 가꾸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방초선 선생은 음악은 자신 인생의 전부라고 말한다. 무대위에서 빛났던 그의 70여 년의 예술 생애를 돌이켜보면 실로 수많은 아름다운 멜로디들이 그의 고운 목청을 타고 ‘명곡’으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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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⑳ 삼국시대 가장 걸출한 정치가 조조Ⅲ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조조의 이중성격 조조가 원소와 생사결단의 전투를 벌이기 전에 먼저 여포를 사로잡았고 원술을 격파하였고 장수를 항복시켰다. 여포는 이각과 곽사한테 궁에서 쫓겨난 후 원술에게 의탁했다가 여의치 않아 이리저리 유랑신세가 되어 마지막에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다가 조조에게 잡혔다. 원술은 손견에게서 한 왕조의 전국옥새를 얻고 천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인하며 건안 2년(197)에 공공연히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 금기를 어긴 원술은 천하의 공공의 적이 되었고 손책마저 등을 돌렸다. 한때 그의 부하로 있었던 여포마저 원술이 보낸 사자를 허도로 압송했다. 조조는 아예 군사를 일으켜 원술을 격파했다. 물러설 곳조차 없었던 원술은 2년 동안 허덕이다가 죽었다. 원술이 죽고 난 다섯 달 뒤 장수가 투항했고 죽기 반 년 전에 여포가 조조에게 붙잡혔다. 건안 5년(200) 관도대전을 통해 북방지역을 통일하는 쾌거를 맛본 조조는 남방으로 눈길을 돌렸고 결국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세력에 밀려 천하가 삼분되는 태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조조는 이 남정북전(南征北戰) 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한 없이 넓은 대인의 도량을 보여주기도 했고 때로는 소인의 옹졸한 모습을 보여 주어 그에 대한 평가는 정말 복잡하고 다양하다. 필심(畢諶)이라는 효자가 있었다. 그의 모친과 동생 및 처자식이 장막에게 억류되자 조조가 그에게 말한다. “자당 어른이 장막에게 있으니 그대는 거기로 가는 편이 좋겠소.” 필심이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은 딴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고 말하자 조조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게 필심은 인사도 않은 채 몸을 돌려 조조를 배반하고 장막에게 몸을 맡긴다. 후일 필심이 포로가 되자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이번에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조는 너무나 뜻밖에도 “효도를 다하는 사람이 어찌 충성을 다 할 수 없겠는가?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찾아 헤매던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필심의 죄를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가서 노국상(魯國相)을 맡게 한다. 필심은 효심 덕분에 조조가 살려주었다면 자신을 배반했던 사람조차 다시 기용했다. 위종(魏種)은 원래 조조가 신임했던 사람이다. 장막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버리고 장막을 따라갔지만 조조는 자신 있게 말한다. “위종만은 나를 배반할 리가 없다.” 하지만 위종마저 장막을 따라서 달아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화가 난 조조는 이를 간다. “좋아! 위종! 하늘 끝까지 도망쳐 봐라. 내가 널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나 막상 위종이 포로가 되자 조조는 의외로 크게 한숨을 쉬며 “위종은 인재로다!”라고 하고는 그를 하내태수로 임명한다. 진림(陳琳)이란 사람은 문장력이 뛰어난 대가였다. 진림은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부하로 있으면서 원소를 대신해 격문(檄文)을 지어 조조에게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심한 역설을 퍼부었다. 나중에 원소가 전쟁에서 패하자 진림은 포로가 되었다. 조조는 괘씸해서 진림을 죽일 수도 있었는데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욕을 할 때 나를 욕하는 건 괜찮지만 어떻게 나의 조상 삼대까지 욕을 하는가?” 진림은 사죄하면서 “시위를 화살에 얹으면 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그대로 그를 사공군모좨주(司空軍謀祭酒)로 임명했다. 조조는 또 어릴 적 친구이자 자신을 주목으로 만든 진궁과의 우정을 저버리지 않았다. 진궁은 조조와 어릴 적 친구였고 성인이 된 후에도 사이가 좋았다. 조조가 연주목이 되었던 것도 진궁의 공로가 컸다. 그런데 조조가 명사 변양(邊讓)을 죽이자 장막, 진궁 등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한번 돌아선 진궁은 끝까지 여포를 도와 조조를 치다가 포로가 된 다음에도 투항하려 들지 않았다. 조조가 말했다. “공대(公臺, 진궁의 자)! 자네가 죽는 것은 괜찮지만 자네의 노모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진궁이 길게 탄식하면서 대답했다. “내가 듣기로는 효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남의 부모를 해치지 않는다고 하니 노모가 죽고 사는 것은 모두가 그대에게 달렸소.” 조조가 다시 물었다. “자네의 처자식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진궁이 다시 대답했다. “듣기에 인정(仁政)을 베푸는 자는 남의 후손을 끊지 않는다고 하니 처자식이 죽고 사는 문제도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세.” 진궁은 말을 마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들고 형장으로 향했다. 조조는 눈물로 그를 배웅하였고 그의 노모와 처자식을 돌보았다. 조조는 이렇듯 넓은 도량으로 ‘죄인’들을 관대하게 대했던데 비해 때로는 짜개바지 친구이자 자신의 패업에 공이 컸던 책사마저 죽인 일도 있었다. 허유는 원소의 핵심참모로 역할 하다가 관도대전을 눈앞에 두고 조조에게 의탁해서 관도대전을 승리로 이끈 일등 공신이다. 그런데 허유는 늘 조조를 공경하지도 공손한 태도로 대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깎아내려 조조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려 죽임을 당했다. 조조의 아명은 아만(阿瞞)이다. 허유는 조조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만, 내가 없었다면 그대는 기주를 얻지도 못했을 걸.”라고 말하는데도 조조는 겉으로는 웃으면서 “그래, 그대 말이 맞소.”라고 개의치 않는 태도를 보였다. 후일 조조가 업성을 함락하자 허유는 사람들 앞에서 “이 녀석은 내가 아니었다면 이 문을 들어 가 보지도 못했을 걸.”라고 떠벌렸다. 화가 난 조조는 더는 참지 못하고 허유를 죽였다. 허유의 죽음 자신이 자초한 것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명사들이 조조를 높이 대하지 않고 심지어 하찮게 보았다는 이유로 죽인 결과 그 파장이 컸고 후폭풍이 심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던 변양의 죽음이 바로 그랬다. 변양은 당시 내로라하는 지식인으로서 세상이 알아주는 명사였다. 전반 선비사회도 그랬거니와 더욱이 명사들은 환관가문 출신인 조조를 마뜩찮게 여겼다. 변양도 같은 입장을 갖고 조조를 함부로 대했다. 변양의 생각은 내가 이렇게 해도 조조가 감히 유지를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당시 도량이 넓은 정치가가 아니었다. 개인의 희로애락 감정에 휘둘리는 한 인간이었다. 당연히 변양의 불손한 태도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패국상이던 원충(袁忠), 패국 사람 환소(桓邵)도 조조를 경멸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조조가 이 세 사람을 죽인 것은 속 좁은 처사였고 이로 인하여 인격이 크게 손상되었다. 조조의 이와 같은 이중성격에 대해 이중텐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이 바로 조조였다. 그는 역사상 성격이 가장 복잡하고 이미지가 가장 다양한 사람일 것이다. 총명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어리석기 짝이 없으며 간사하고 교활하면서도 솔직하고 진실하며 활달하고 큰 아량을 지녔으면서도 이런저런 의심이 너무나 많고 도량이 넓고 크면서도 한 없이 좁았다. 그야말로 대인의 풍모와 소인의 얼굴을 가졌으며 영웅의 기개와 아녀자의 감정을 가졌고 염라대왕의 성깔과 부처님의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었다.” 조조의 유재시거(唯才是擧) 건안 5년(200)년까지 조조의 최대 라이벌은 원소였으며 세력으로 따지면 원소가 조조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 왜 조조가 승리하고 원소가 실패하였을까? 그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용인술이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원소의 용인술을 살펴보자. 원소의 부하로 있다가 조조에게 의탁하여 핵심참모로 역할 한 순욱이 원소를 이렇게 평가했다. “평범한 호걸이라서 사람을 모을 줄은 알지만 쓸 줄은 모른다. 겉으로는 관대하고 고상하며 도량이 있어서 기쁘거나 슬픈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남을 시기하여 해치는 경우가 많았다.” 진수의 <삼국지>에 기록된 대목이니 믿어도 좋을듯하다. 순욱이 이렇게 말한 데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원소의 수하에는 많은 인재들이 있었다. 안량과 문추는 용맹하였고 전풍과 허유는 지모가 있었으며 저수와 곽도는 꾀가 많았고 심배와 봉기(逢紀)는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조를 늘 못마땅하게 여겨왔던 공융은 조조가 원소의 적수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순욱은 공융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전풍은 고집이 세서 윗사람을 거스르고 허유는 탐욕스러워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며 심배는 독단적이어서 계획성이 없고 봉기는 무모하여 자신의 판단만으로 행동한다.”고 순욱은 말했다. 순욱의 지적이 맞을 수는 있지만 이것이 원소의 패배의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결정적인 이유는 원소가 이들의 갖고 있는 장단점을 적당히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사람이라면 누구든 결점과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리더가 이들을 잘 관리하고 등용하여 각자의 장점을 잘 발휘하게끔 한다면 패배할 리가 없다. 그러나 원소는 부하를 부리는 기준이 오로지 자신의 개인적인 사사로운 호오(好惡)였다. 원소의 호오 기준은 아주 간단했다. 아첨을 하거나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을 중용하고 이의를 제기하면 곧 배척했다. 전풍이 이의를 제기하자 그를 감옥에 처넣었고 저수가 이의를 제기하자 그를 배척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인데 리더인 원소가 능력 있는 부하를 시기하고 질투하니 부하들 간에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헐뜯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결국 그 조직이 망할 수밖에 없다. 관건은 리더가 나서 적당히 이쪽저쪽 모두 보살피며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데 원소 자체가 그런 인간이니 수습이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원소는 형제 원술과 철전지 원수가 되었고 원소의 DNA를 물려받은 그의 두 아들도 철전지 원수가 되어 치고 박고 난리도 아니었다. 조조는 원소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조조와 원소의 생사결전인 관도대전을 앞두고 조조의 부하들이 은근히 걱정이 심각했다. 원소의 군사가 조조의 군사 10배나 되니 그들의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때 조조가 말했다.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소. 그자는 야심은 크지만 지혜가 적고 화는 잘 내지만 담력은 작으며 질투가 심하고 각박하며 인간미가 없소. 그의 집단은 병사의 수는 많으나 지휘부서가 명확하지 않고 장수들은 거만하고 정치적인 명령이 일관적이지 못하오. 따라서 원소는 지역적 기반이 넓고 양식이 많으나 결국 우리에게 고스란히 물자를 제공해줄 사람에 불과하오.” 원소에 비해 조조의 용인술은 어떻게 달랐을까? 원소는 사람을 잘 모으지만 쓸 줄 모르는데 비해 조조는 사람도 잘 모으고 잘 쓰기로 유명했다. 조조가 인재를 모으는 원칙은 모두 아시다시피 그 유명한 문구인 ‘유재시거(唯才是擧, 무릇 인재라면 모두 받아들이고 등용한다는 뜻)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유능한 인재라면 반드시 흠결 없이 도덕적일 필요는 없다. 흠결이 있더라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등용한다. 과거 원수라도 오늘날 나의 대업에 보탬이 된다면 과거를 묻지 않고 받아들이고 등용한다. 얼마나 도량이 넓은 용인술인가! 조조의 이와 같은 포용력이 강한 용인술 덕분에 심지어 적지에서조차 조조에게 의탁한 인재가 많았다. 실로 해납백천(海納百川)과 같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중텐 교수는 조조의 해납백천 기적에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첫째 명분과 실리의 관계 명분도 있고 실리도 챙기게 된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세상에는 명분도 좋고 실리도 챙길 수 있는 일은 매우 드물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경치도 좋고 그늘도 좋고 방석도 좋은 명당이 어디 있으랴! 조조는 출신의 비천(환관가문 자제) 때문에 정치자본이 매우 부족하다는 트라우마를 안고 있어 자신에게 도움만 된다면 누구든지 수용했다. 그 사람이 사기꾼이든 협잡꾼이든 명성이 있든 허영만 있든 따지지 않았다. 조조는 총명하게도 모든 사람이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적당히 넘어가 준다면 문제 삼지 않았다. 조조가 천자를 맞이하여 허도에 돌아오자 선비들이 몰려왔다. 그 중에 공융이란 명사가 있었는데 그는 노골적으로 조국과 황제 폐하가 걱정되어 왔을 뿐이지 당신(조조)이 좋아서 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조조는 개의치 않고 받아주었다. 한편 조조는 명성이 높은 사람이 반드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명성보다 능력을 우선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조조의 정실부인을 맞이하는데 있어서 명분보다 실리를 챙겼다는 사실이다. 유부인이 일찍 죽고 정부인이 정실로 있다가 친정에 돌아간 후 다시는 귀가하지 않아 이혼했다. 정실부인 자리가 비게 되자 변부인을 정실로 맞았다. 그런데 변부인은 기생출신이다. 당시는 송∙명∙청 시대처럼 정조를 강구하지는 않았지만 기생출신 여인을 첩으로 삼는 일만해도 시빗거리가 될 수 있는 일인데 더욱이 정실부인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굉장히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하물며 조조가 변부인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할 때 이미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명분보다 실리를 챙겼다. 결과 변부인은 훌륭한 부인 역할을 담당해 내어 조조의 창업에 기여했다. 둘째 덕성과 재주의 관계 건안 15년(201), 건안 19년(214), 건안 22년(217)에 차례로 <구현령(求賢令)을 반포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천하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재가 시급한 때이므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할 뿐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을 찾기 위해 너무 많이 따질 수는 없소. 만약 도덕적인 품성이 나무랄 데 없고 모든 면이 완전무결한 사람만을 요구한다면 제환공이 어떻게 패업을 이룩할 수 있었겠소. 또 한고조가 어떻게 대한(大漢)을 세울 수 있었겠소.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고 병법을 사용하는 재주를 가진 인재라면 설령 좋지 않은 명성이 있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행동을 한다 해도 심지어 어질지 못하고 불효자라 하더라도 추천만 한다면 나는 어떻게든 쓰겠노라.” 이 <구현령>에 대해 선비들은 조조가 유교의 이념을 위배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고 심지어 조조를 망나니 나쁜 놈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했으며 후세 선비들도 조조를 공격할 때 이 <구현령>을 들고 나와 공격무기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당시는 난세이다. 난세에는 즉각적인 효과가 매우 필요했다. 즉각적인 효과를 얻으려면 명성이요, 도덕이요 다 따진다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중국말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오이냉채도 식는다.’ 모르긴 몰라도 조조가 아마 이 속담을 진리로 삼았지 않았을까! 셋째 청렴과 탐욕의 관계 조조는 청렴한 관리를 중용하되 사소한 욕심은 눈감아 주기도 했다. 조조의 동향인인 정배(丁裵)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작은 이익을 탐내기 좋아했다. 어느 날 직권을 남용하여 자기 집의 야윈 소를 관아의 살진 소와 바꿨다가 파직됐다. 조조가 그를 보고 물었다. “문후! 그대의 관인(官印)은 어디로 간 것이오?” 정배도 슬쩍 웃으며 말했다. “가져다가 떡을 바꿔 먹었소이다.” 조조는 파안대소하고 고개를 돌려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모개가 여러 차례 정배를 중벌로 다스리라고 했지만 나는 정배가 쥐도 잘 잡고 물건도 곧잘 훔치는 고양이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놔두면 쓸모가 있을 것이다.” 이중텐 교수는 “이 일이 과연 사실이라면 아마 중국 최초의 ‘고양이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넷째 항복과 배신의 관계 조조의 밑에 다섯 명의 대장이 있었는데 세 사람이 적진 출신이었다. 장료는 여포의 부장이었고 장합은 원소의 부장이었고 서황은 양봉의 부장이었다. 여포를 두고 쓰려고 했지만 유비가 죽이라고 해서 죽였다. 모신들 중 허유는 원소의 진영에서, 괴월은 유포의 진영에서, 진림도 원소의 진영에서, 투항해왔다. 왕수는 원소의 장남 원담의 모신이었다. 원담이 죽자 왕수는 대성통곡하며 원담의 시신을 거두게 해달라고 청했다. 조조는 허락하였고 왕수는 돌아와서 계속 조조의 모신으로 활약했다. 다섯째 대소의 관계 장수는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인 원수인데도 흔쾌히 받아주었고 필심은 거짓으로 조조를 속였으나 조는 개의치 않고 효심이 충심으로 변할 것이라 믿고 관용을 베푼다. 진군이 곽가를 여러 차례 고발하지만 조조는 눈감아주고 더욱 신임하고 중용했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얻는 전략이다. 조조의 생애에 핵심 모사와 중요한 모사 및 조조를 받들어 모신 신하가 102명이나 된다고 한다. 여섯 명만 더 많았더라면 ‘양산박’을 이룰 뻔했다.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이 통계수치로 조조의 용인술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中, 2020 GDP 백강도시 랭킹 출범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최근 중국은 2020년 GDP 백강도시 랭킹을 출범했다. 보도에 따르면 2020년 중국 국내 생산총액(GDP)은 101조 5986억 위안으로 전년 대비 2.3% 증가, 아울러 2020년 생산총액(GDP) 30강 도시 랭킹도 이미 공개됐다. 집계에 따르면 2020년 중국 국내에서 GDP가 3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는 상하이(上海)와 베이징(北京) 2개였고 GDP가 2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는 상하이와 베이징 외 선전(深圳), 광저우(广州), 충칭(重庆)과 수저우(苏州) 등 6개였으며 GDP가 1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는 23개였다. 2020년 중국 GDP 총량 30강 도시 랭킹에서 보면 랭킹 앞 10위에 오른 도시는 각각 상하이, 베이징, 선전, 광저우, 충칭, 수저우, 청두(成都), 항저우, 우한(武汉)과 난징(南京)이었으며 이 중 베이징, 상하이, 선전과 광저우는 랭킹 4위에 올랐다. ● GDP 총량 30강 도시 중에는 1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가 23개, 수저우는 여섯 번째로 2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로 되었고 둥관(东莞)은 1만억 위안, 둥관에 이어 산둥 옌타이(山东烟台)와 장수 창저우(江苏常州)는 지난해 GDP가 7800여 억 위안이다. ● 2020년 랭킹 10위권 도시 중 난징이 텐진을 제치고 처음으로 10위 안에 들었고 항저우는 우한(武汉)을 제치고 한 단계 올라섰다. 여기서 우한은 2020년에 코로나19로부터 강타를 크게 당한 도시였지만 이런 성과는 진짜 쉽지 않은 것이다. ● 2020년 들어 6개 도시가 1만억 위안 행렬에 새로 가담, 총 수는 23개로 증가했으며 이 중 6개 도시의 GDP가 2만억 위안을 초과했다. 증가속도를 보면 시안(西安)이 30개 도시 중 1순위에 올랐으며 그 성적이 매우 돌출했다. ● 100강 명단 중 도시 변화는 별로 크지 않았다. 윈난의 취징(云南曲靖), 푸젠의 룽옌(福建龙岩), 쓰촨의 이빈(四川宜宾) 등 3개 도시가 신규 진입했고 이 중 취징이 100대 도시 중 가장 빠른 6.6%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 100위권 밖으로 밀려난 도시로는 허난의 자오쭤(河南焦作), 네이멍구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와 바오터우(包头)였다. 이 중 자오쭤의 GDP는 전년 동기 대비 20.6% 하락, 2019년의 96위에서 2020년의 135위로 밀려났으며 하락 순위 폭은 39개 단계였다. ● 난징(南京), 허페이(合肥), 청두(成都), 창사(长沙) 등 몇몇 성 수부도시는 GDP 성장률이 4%에 달했거나 넘었다. ● 최근 몇 년간 중국에서는 지역경제가 갈수록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23개 GDP ‘1만억 위안’ 도시 중 8개 도시가 장강 삼각주 에 있으며 주강 삼각 주 9개 도시 중 8개 도시가 100강 내에 들어갔다. ● 다른 각도에서 보면 중서부 도시의 경제 회복세가 비교적 뚜렷했고 연해 지역은 2020년에 발생한 코로나19 영향 때문에 대외무역 방면에서 심각한 영향를 받았다. 2019년과 비교해 보면 구이저우(贵州)와 윈난(云南)은 도시 순위가 내려가지 않은 반면, 후난의 장자제(湖南张家界)는 한 단계 하락하는 데 그쳤다. ● 30강 도시 중 상하이, 베이징, 충칭(重庆), 텐진(天津) 등 4대 직할시를 포함됐고 광저우, 청두, 항저우(杭州), 우한(武汉), 난징, 창사, 정저우(郑州), 제난(济南), 허페이, 시안(西安)과 푸저우(福州) 등 11개 성 수부도시가 들어갔으며 이외 선전(深圳), 닝바오(宁波), 칭다오(青岛)와 다롄(大连) 등 4개 도시 및 쑤저우(苏州), 우시(无锡), 푸산(佛山), 취안저우(泉州), 난퉁(南通), 둥관(东莞), 옌타이(烟台), 창저우(常州), 쉬저우(徐州), 탕산(唐山)과 원저우(温州) 등 11개의 일반 도시도 들어 있다. ● 100강 도시 중 90% 이상의 도시가 경제성장이 플러스로 돌아섰고 저장 저우산(浙江舟山)의 성장속도는 전국을 선도해 2020년 GDP 성장률은 12.0%로 나타났으며 2019년에도 성장속도 상위 20대 도시 중 절반가량이 광시(广西)와 윈난(雲南)에서 나왔다. ‘14.5’ 계획요강 '14.5' 계획요강을 통해 보면 국가 경제발전의 중점은 도시군(城市群)과 도시권(都市圈)을 발전시키는 것, 집적적인 효과가 있는 도시 군과 도시권을 경제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GDP 100강 도시 중 앞자리 도시권 GDP가 1만억 위안이 되는 도시의 경제 총량은 전국 GDP 총량의 38%를 차지했다. 그리고 핵심 도시군 중 장강 삼각주 지대는 100대 도시 중 20석을 차지했고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지구는 주강 삼각주였다. 그러니 국가 급 도시군이 경제지형의 한 축으로 떠오르고 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4.5’ 계획 요강에서 제시된 도시군과 도시권의 발전은 도시군을 일체화로 발전시켜 전면적인 횡(横)과 종(纵) 2개 부류의 도시화 전략구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 중 베이징(北京) 텐진(天津)과 허베이, 장강 삼각주, 주강 삼각주, 청두(成都)와 충칭(重庆) 등의 도시군을 최적화하여 더욱 승격시키고 산둥반도(山东半岛), 광둥(广东), 푸젠(福建)과 저장(浙江)의 연해, 중원, 관중평원, 북부만 등 도시군을 발전 장대시키며 또한 하얼빈(哈尔滨)과 창춘(长春), 랴오중남(辽中南), 산시 중부(山西中部), 구이저우 중부(黔中), 윈난 중부(滇中), 네이멍구의 훅호트(呼和浩特), 바오터우(包头), 어얼둬쓰(鄂尔多斯)와 산시의 위린(陕西榆林) 그리고 란저우(兰州), 시닝(西宁) 및 닝샤의 연황성(宁夏沿黄城) 도시군 또한 텐산(天山) 북쪽의 도시군 등을 부축하여 성장하게 한다는 것이다. 도시경제의 회복이 가속화되면 중국 경제의 빠른 성장에 중요한 활력소로 될 것은 사실이다. 21개의 실험실 데이터 통계에 따르면 지난 3월 31일까지 2020년 경제성장 상황을 밝힌 319개 도시 중 292개 도시의 GDP는 플러스 성장이었고 225개 도시의 성장 속도는 전국 평균의 증가속도(2.3%)를 추월하였다. 지구급 도시 경제실력 아주 막강하게 발전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선전 등 1선 도시와 각 성 수부도시 외 적지 않은 지구급 도시의 경제실력이 아주 막강하게 발전하였다. 최근 출범한 2020년 지구급 GDP 10강 도시를 보면 그 전부가 동부 연해지구에서 출현, 이 중 북방지구에서는 옌타이(烟台), 쉬저우(徐州)와 탕산(唐山)이었고 남방지구에서는 각각 수저우(苏州), 우시(无锡), 푸산(佛山), 췐저우(泉州), 난퉁(南通), 둥관(东莞)과 창저우(常州)였다. 그리고 이 앞자리 10위까지의 지구급 도시 중 장수성(江苏省) 내의 도시가 절반을 차지했다. 다음 2020년 수저우의 전 시 과학기술 진보기여율은 66.5%, 고신기술 기업 신청수는 사상 최고를 기록하였고 고신기술기업은 9772개소에 이르러 4대 1선 도시 수준에 접근, 전국의 5위에 올라 많은 1선 도시보다 월등하게 앞서고 있었다. 그리고 2020년 수저우에서 실현한 일반 공공 예산수입은 2303억 위안으로 전년보다 3.7% 증가하면서 처음으로 전국 대중도시 중 4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은 것은 수저우 산하의 몇 개 현급 시의 기여와 갈라 놓을 수 없다. 2020년 쿤산(昆山), 장자강(张家港)과 창수(常熟) 등은 모두 전국 100강 현의 앞자리를 차지, 이 중 쿤산시는 중국의 종합실력 100강 현 순위 중 연속 10여 년간 앞자리에 올라 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발전 중 서로 부동한 도시는 반드시 산업 구조와 방향에서 자신의 특별한 위치를 확정한 필요가 있겠다. 그러자면 발달 도시군을 바싹 따라잡을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자신의 자원과 지역 특성 그리고 원래의 산업기틀에 근거해야 하며 보다 우세한 분야를 적극 선택하여 그 발전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반면에 강성 성 수부도시의 부상에 대하여 보면 중국 경제가 구조전환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한 후 성 수부도시들의 과학기술, 의료와 문화 등 방면에서의 우세가 날로 뚜렷해지고 있다. 한편 최근 몇 년 동안 궤도 교통건설을 통해 성 수부도시 중심의 도시권을 적극 건설하였으며 성 수부 도시 또한 자원요소를 결집하여 주변지역을 발전시키는 능력도 극대화됐다. 다른 한편 경제증장 외 인구의 증장 또한 도시 발전에 영향을 주는 활력의 중요한 인소의 하나로 되고 있다. 목전 중국에서 GDP 10강 도시 중 유독 난징만이 인구가 1000만 명이 안되고 있다. 만약 도시구역의 장기거주 인구로 계산해보면 상하이, 베이징, 광저우, 선전, 충칭은 슈퍼 대도시에 속하고 청두, 항저우, 우한, 난징 등은 특대 도시에 속했으며수저우 도시구역만이 장기거주 인구가 500만 뿐이다.

미녀라면 사족 못쓰는 난세의 영웅 ‘조조’

●김수희 조조(155~220년)는 미녀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위인이여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출신성분도 가리지 않았다. 창기든 유부녀든 눈에 들기만 하면 방법을 대여 손에 넣고야 말았다. 후일 조비를 낳아 황후가 된 변부인은 창기출신이였지만 그녀의 미모에 반한 조조는 그녀의 신분이 천하다고 해서 꺼리지 않고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두부인의 경우는 더욱 한심했다. 그녀는 남편이 멀쩡히 두 눈을 편히 뜨고 살아있는 유부녀였다. 류비가 조조와 함께 하비성에서 여포를 포위했을 때의 일이였다. 하루는 관우가 조조를 찾아왔다. 조조는 느닷없이 찾아온 관우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관우는 조조를 보고 낮은 소리로 부탁했다. “여포의 부장 중에 진의록이라는 자가 있는데 이제 우리가 이겨 성이 함락되면 그의 처를 나에게 주십시오.” “허허, 이제보니 운장도 어지간히 여색을 밝히는구려. 그러지요.” 조조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데 성이 곧 함락되려고 하자 관우가 몇 번 더 찾아와서 “진의록의 처를 꼭 나한테 줘야 합니다”라고 다짐을 받았다. 조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진의록의 처가 어떤 미인이기에 저 관우라는 사내를 이토록 애태우게 했을까? 여포가 항복하고 성이 함락되자 조조는 장난삼아 먼저 진의록의 처를 데려오게 했다. 보니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처였고 관우가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의 뛰어난 미모에 반한 조조는 다른 것을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진의록의 처라고 하지만 미인은 전리품이니까 승자가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 비록 관우가 먼저 탐내서 달라고 했지만 내 마음을 설례이게 한 미인을 어찌 그에게 내줄 수 있겠는가? 먼저 차지한게 임자지! 그래서 조조는 그녀를 첩으로 삼았다. 후일 조조의 비빈이 된 두부인이 바로 그녀였다. 조조는 두부인을 꽤나 사랑했었던 것 같다. 두 씨가 조조의 첩이 되였을 때 이미 진의록과의 사이에서 낳은 진랑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조조는 진랑을 아들처럼 궁에서 키우며 심히 예뻐했다. 매번 손님들을 맞을 때마다 무릎에 앉히고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세상에 나처럼 의붓자식을 친아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한편 연모했던 여인을 빼앗긴 관우는 깊은 원한을 품었다. 후일 관우가 조조의 후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에게 심복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세상에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아간 사람의 밑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관우는 간적 조조를 도모해 중원을 되찾고 한나라 황실을 회복하겠다고 거창한 구호를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았다. 조조는 미녀를 좋아한 덕분에 무려 25명이나 되는 아들과 6명의 딸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평생의 원한을 사기도 하고 목숨을 잃을 번하기도 했다. 진의록의 처 두부인을 빼앗았다가 관우에게 한을 품게 했던 일도 조조에게 교훈이 되지 않았다. 장제가 죽자 과부된 추 씨를 슬쩍 취했다가 거의 죽을 번했던 적도 있었다. 표기장군 장제는 홍농에 주둔하고 있을 때 사졸들이 굶주려서 남쪽의 성을 공격하던 중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장제의 부인 추 씨는 장제의 조카인 장수에게 의지했다. 조조가 남정할 때에 군대가 육수에 이르자 장수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그때 과부 추 씨를 본 조조는 첫눈에 반하여 그날 밤으로 그녀를 품었다. 조조가 자신의 숙모를 건드린 것을 알게 된 장수는 치욕을 느끼고 조조에게 원한을 품었다. 조조는 그것을 알고 몰래 장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책이 새어나가 장수가 조조를 엄습하였다. 장수는 조조가 추 씨에게 빠져 음탕한 놀이를 하는 틈을 타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그 싸움에서 전위가 조조를 지키다가 죽고 조조는 뒷문으로 달아났다. 도망칠 때 조조의 조카 조안민이 란도질 당해 죽었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도 조조를 구하자마자 장수의 군사들의 손에 죽고말았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은 유부인의 소생 이였다. 그러나 유부인이 일찍 죽었기에 정실부인인 정부인이 조앙을 맡아 키웠다. 자식이 없었던 정부인은 조앙을 친자식처럼 정성껏 키웠다. 정부인은 조조가 장수의 숙모와 염문을 뿌렸다가 조앙을 죽게 하고 홀로 살아 돌아온 것에 몹시 분개했다. 그녀는 조조를 볼 때마다 늘 이렇게 바가지를 긁곤 했다. “내 아들을 데려가 죽이고는 혼자 살아 돌아오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조조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그런 잔소리에 견딜 수 없었던 조조는 정부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정부인이 기가 좀 꺾이면 다시 데려올 생각이었다. 정부인은 조조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조조가 직접 정부인의 친정집으로 찾아갔을 때 정부인은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었다. 조조는 정부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달랬다. “나를 좀 보아서 함께 집에 돌아갑시다!” 정부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조조는 발길을 돌려 나가다가 문지방에 서서 다시 말을 걸었다. “정말로 헤여지자는것이요?” 아무 대답이 없자 조조는 하는 수 없이 관계를 끊었다. 정부인은 여생을 길쌈을 해서 자급했다. 조조는 정부인을 쫓은 것이 끝내 마음에 걸렸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병이 깊어져 스스로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되였을 때 조조는 깊이 탄식했다. “내가 평생에 뜻대로 살았지만 크게 마음에 빚진 일이 없었다. 다만 내가 죽어서 저 세상에 가서 맏아들 조앙을 만났을 때 그 애가 ‘저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내가 장차 뭐라 대답해야 할까?!” 조조는 처음부터 반역을 꿈꾸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한나라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꿈은 자신이 죽었을 때 묘비명에 “한나라 고 정서장군(征西将军) 조후지묘(曹侯之墓)”라고 쓰이기를 소망했다. 단지 시대가 그를 한나라를 빼앗은 역적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돌아오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새로운 여론이 일어났다. 조조는 이미 큰 공을 이뤘으니 이제 2선으로 후퇴해야 한다고…그동안 조조의 위력과 업적에 눌려 잠잠하던 한나라황실과 문벌이 높은 조정대신들의 합작품 이였다. 헌제는 조조의 공적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3개의 현을 식읍으로 내려주었고 문벌이 높은 조정대신들은 패전으로 한 날개가 꺾인 조조에게 이제 할만큼 했으니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가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자신의 뜻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밝혔다. “만약 국가에 내가 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들이 황제를 칭할지, 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왕을 칭할지 모른다. 제군들은 내가 곧 병권을 넘겨주고 국사를 맡아 다스리는 일에서 물러나 무평후국(武平侯國)으로 귀향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째서인가? 진실로 내가 병권을 놓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당할것이 두렵기때문이다. 또 내 몸이 패망하는 즉시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것이므로 허명을 사모하여 실질적인 화를 부르는 것을 옳다고 할수 없으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차라리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지 못하게 하겠다”라는 조조의 입장이 잘 표현되어있다. 조조가 주공과 같은 성현처럼 후세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기를 원했었더라면 이때 조정의 의론에 따라 군국의 대권을 반납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조가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그 자신과 가족의 생명안전을 결코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또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조조가 아니더라도 다른 실력자가 결국은 한나라를 패망시키고 황제의 지위를 빼앗았을 것이다. 한나라는 이미 스스로 멸망한 상태였기 때문이였다. 한나라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국가안정보장과 질서유지에 철저히 실패함으로써 백성들의 생존자체를 위협에 빠뜨렸다. 조조에게 국가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 것은 이러한 혼란상황을 극복하려고 동분서주한 결과였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조가 어떻게 권력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갈 수 있단말인가? 이런 이유로 조조는 희대의 “악당”이요 “역적”이 되였다. 그러나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한나라의 황실을 부흥하겠다고 해야만 정의의 편이라고 할 수 있을가? “삼국연의”에서는 조조를 역적이라고 욕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조조를 영웅이라고 재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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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문재인 정권의 주공?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민주당과 청와대는 4.7보궐선거 참패의 데미지가 치명적이다. 순간 된 매를 맞아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있을 때 순발력이 있는 80여 명의 여당 초선의원들이 데미지를 안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조목조목 짚어서 반성문을 냈다. 그런데 바닥까지 추락한 당을 추슬러보려는 순수한 동기로 출발한 초선의원들의 반성이 외려 자신들이 큰 데미지를 입게 생겼다. 조국사태 때문이다. 문재인 열렬 지지자, 이른바 강성 문파들이 조국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초선의원들을 향해 막말에 상욕까지 해가며 당을 떠나라고 협박하고 심지어 적을 대하듯 다섯 명을 지칭하여 ‘오적(五賊)’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고 있다. 하루 수백 통에 달하는 메시지 발신자와 내용을 일일이 확인할 순 없지만 육두문자나 성희롱은 부지기수고, 심한 경우 가정사나 가족의 장애까지 들먹이며 악담을 퍼붓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진 의원은 “역사적으로 강성 지지자들이 이렇게까지 한 경우는 없었다."며 "꼬리가, 아니 깃털이 몸통을 흔들게 되면서 당이 선거 이후에도 반성할 기회를 잃게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하여 여당 내에서 쓴 소리 잘하는 조응천 의원이 4월 13일 의미심장하고 심사숙고할 만한 발언을 했다. “조국사태는 보수 탄핵 같이 장기적으로 진보의 발목 잡을 아킬레스건이 될 것이다.” 진보진영의 이러한 혼란스런 ‘추태’를 지켜보던 2030젊은이들이 ‘왜 조국이 그토록 중요한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왜 조국이 문재인 정권에게 있어서 그토록 중요한 인물인지? 이에 관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답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흘러온 유교적인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에서 문제점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진영의 강성지지자들의 종교가 아닌 종교적인 신앙 심리에서 찾으려 한다. 유교적인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이란 선비 중에서 뛰어난 자를 고위관료로 등용하는 인재중용시스템이다. 동양역사에서 언제부터 유교적인 현인정치시스템이 시작되었나? 주나라 때 선비가 하나의 계급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함에 따라 시작되었고, 주공 이후 특히 춘추시대에 이르러 각 제후국들은 선비를 중용하는 바람이 불었고 이때부터 선비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했다. 선비를 ‘사(士)’라고 하는데 ‘사’는 주나라 천자, 제후, 대부, 사, 서민 등 다섯 계급 중에서 아래로 두 번째에 속했다. 서민은 백성이니 ‘사’는 엘리트층에서 말단 계급이었다. ‘사’는 비록 계급은 낮은 편이지만 취직에 있어서 유동성이 강해 대부에게 중용되거나 제후국에서 각 부처의 장·차관은 물론 재상자리까지 쉽게 오르는 등 하루아침에 벼락출세할 수 있었다. 유가의 이상인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는 선비가 공부를 통해 수양을 닦아서 대부를 도와 제가를 하고, 제후를 도와 나라를 다스리고, 천자를 도와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는 뜻이다. 『한비자』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강대한 초나라 한 선비가 쇠약한연(燕)나라가 걱정되어 연의 재상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한참 편지를 진지하게 쓰고 있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하인에게 촛불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선비는 잠시 집중을 잃었는지 그만 편지에 ‘거촉(擧燭)’이란 두 글자를 써넣었다. 편지를 받아 본 연나라 재상은 ‘거촉’의 의미를 진지하게 연구한 끝에 자기 나름대로 ‘어두운 세력을 몰아내고 현인을 등용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였고 이를 왕에게 보고했다. 연나라 왕은 과연 현인을 등용했고 그 결과는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한비자는 이 이야기를 본래의 뜻을 떠난 오해의 사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한편으로는 당시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이 활발했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의도로 생겨났고 전해온 것이 아닌가 싶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각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려고 선비를 애지중지 받들었으며 선비 중 뛰어난 현인들은 왕을 우습게 여길 정도로 높은 대우와 예우를 받았다. 전국시대에는 이런 기류가 더욱 농후해졌다. 유가는 명사, 도가는 은사, 법가는 모사라고 정리한다면 전국시대 말기, 유가의 명사인 현인들과 도가의 은사들은 찬밥신세였고 간혹 그들을 중용한 나라들은 실패하여 법가의 모사들을 중용한 진나라에게 모두 먹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법가를 중용하여 천하통일이라는 위대한 대업을 이뤄냈고 천년만년 영원하리라던 진나라는 2세를 넘기지 못하고 15년 만에 홀딱 망해버렸다. 중국 23개 왕조역사에서 가장 단명이었다. 진의 뒤를 이은 한고조 유방은 천신만고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법가의 설계도에 따라 군·현제를 실시하자니 단명인 진나라 전철을 밟을 것 같고, 그렇다고 유가의 패턴으로 이뤄졌던 주나라 봉건제로 다시 돌아갈 순 없지 않느냐? 결국 수도권인 경기지역은 군·현제를, 각 지방은 제후를 세우는 봉건제를 실시하였고 통치무기는 유가도 아니고 법가도 아닌 속박이 없이 스스로 그렇게 맡겨서 돌아가게 하는 도가의 무위자연론이었다. 백성들이 자유로운 세상을 만나 신나게 일한 덕분에 곡식이 곳간에 넘쳐났고 서로 다툼이 없는 태평성세를 맞았던 것이다. 화무십일홍이라더니 한나라 초기 좋았던 세상이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는 너무 느슨한 통치는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느슨해져 기강이 문란하고 국가는 강력한 힘을 가질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전반 사회기강이 바로 서고 나라가 힘을 갖게 할 수 있을까? 이때 눈치 구단인 동중서(董仲舒)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한 무제를 찾아가 역사를 바꾸는 거대한 흥정을 한다. “유가를 다시 살리고 선비(유생)들을 관료로 전면 등용하십시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고 유씨 왕조는 오랫동안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OK!” 한 무제는 동중서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유생을 관료사회에 전면 배치한다. 선비들이 살판났다. 한 무제는 관료로 써먹을 유생을 배출하는 태학을 세운다. 후한에 이르면 유교가 뿌리를 내려 낙양의 태학 학생은 3만 명에 달했고, 태학의 건물도 여러 번 증축되어 말기에는 24동에 1,850개의 교실을 갖게 되었다. 아마 요즘 지구촌의 지식분야의 최대 상징인 하버드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였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지방에서도 각각 사숙이 만들어져 이름 있는 학자를 스승으로 하는 동문의 학생들이 배출되었다. 동중서와 한 무제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흥정에 의해 선비를 관료로 전면 등용하는 유교적인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이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진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때에 중앙 귀족 자제에게 경학, 문학 따위를 가르치던 국립 교육 기관을 설치하였다. 고려 인종 때에 국자감을 설치하여 고급 벼슬아치의 자제들에게 유가 경전인 사서오경을 가르쳤다. 1308년에 성균감을 성균관으로 바꾼 최고 국립교육기관에서 역시 유학교육이 중점이었고 고려 말기에 이르러 정몽주와 정도전 같은 뛰어난 학자를 배출하여 정계를 흔드는 거목으로 역할 한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있어서 선비 현인정치 모델이었고 중국 주나라 주공에 비견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 후 조선조 500년 동안 선비가 관료사회에 등용되는 유교적인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이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같은 유교문화권에 속한다. 유교적인 현인정치가 똑 같이 근대시기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폐지한데 비해 한국은 아직도 유교적인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을 그대로 시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서 교수와 변호사가 고위관료로 직행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현시대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현재도 진행형인 조국사태의 논란에 대해 말하자면 조국의 정체성은 문재인의 뒤를 이어 노무현의 유업을 계승하는 사명을 지닌 인물이다. 노무현의 숙원사업이었던 검찰개혁을 문재인이 바통을 이어받아 역시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로 추진하려고 했는데 이 역사적인 사명을 완수할 인물로서 바로 조국이 선택받았던 것이다. ‘검찰개혁의 대명사’ 이것이 조국에게 붙여진 ‘오사모(烏紗帽)’이다. 조국의 이 ‘오사모’는 조국이 선비 중 으뜸의 현인이라는 의미를 강력하게 지니고 있다. 문재인 정권에게 그렇고 강성 문파들에게도 그렇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재인 정권과 강성 문파들은 조국을 주나라의 치국시스템을 창안해낸 주공처럼 대한민국 검찰역사를 바꿀 인물로 강력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굳게 믿었던 ‘현인 조국’이 가족이 탈탈 털리는 사태가 벌어지자 문재인 정권과 강성 문파들은 도무지 견뎌 낼 수가 없어 분노에 가득 차 펄쩍 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성 문파들은 서초거리에서 데모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장장 1년이란 시간을 끌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국사태는 문재인 정권에게 있어서 현인 중 현인으로서 마치 주공에 버금가는 조국이 아니면 검찰개혁을 완수할 수 없을 것처럼 국민에게 비쳐졌기 때문에 오늘 날까지도 여전히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현대사에서 ‘두 대통령 종교’가 생겨났는데 하나는 ‘박정희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노무현 종교’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것은 ‘박정희 종교’ 덕분이고 박근혜가 탄핵되자 광화문에 나선 이른바 태극기 부대가 바로 ‘박정희 종교’ 독실한 신도들이다. ‘박정희 종교’와 대척점에 있는 것이 바로 ‘노무현 종교’인데 그 신도들이 현재 강성문파들이다. 이들은 노무현이 사라지고 문재인은 곧 5년 임기를 마치면 정계를 은퇴할 것이니 조국을 정신지주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누구든 조국을 건드리면 마치 자기네 조상을 욕보이는 것처럼 간주하고 도저히 용납 못하고 곧 공격적인 행동에 나선다.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조국사태 같은 정치파문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유교적인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을 폐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 제2, 제3의 조국사태가 벌어질 것이며 사회는 내편 네편 가르기로 크게 혼란에 빠져들 것이다. 한편 조국과 같은 선비를 고위관료로 중용하는 유교적인 현인정치 인사시스템이 대한민국 발전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는 폐단에 관해서 다음호에 논의를 이어가려고 한다.

중·미 경쟁 속 한국 외교의 헤지(对冲) 노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2일, 중국 신화통신은 중미 경쟁 속 한국 외교의 헤지 노선(履冰外交:韩国在中美竞争之下的对冲路线)’란 제목으로 된 다롄 외국어학원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이며 동북아 연구센터 연구원인 루핑(吕平)의 기고문을 실었다. 다음은 기고문 전문이다. '달걀 세 개 위에서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은 미묘한 구도에서 재롱을 부릴 수 있는 춤꾼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이는 현재 한반도의 지도자들을 놓고 볼 때 해당 지역의 권력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해야 힘의 여유도 생긴다는 말로 되고 있다. 근대 한반도 역사상 강대국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며 자국의 기본권을 유지한 사람은 아마도 민비가 아니었던가 생각하게 된다. 민비는 먼저 일본에 달라붙었다가 후에는 청 왕조에 의거했으며 청일 전쟁 후에는 또 러시아와 비밀리에 접촉했다. 결국 일본의 비위를 건드리는 길을 선택해 비참하게 죽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는 각국과 모두 사이좋게 보내려면 그만큼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100여 년래 한반도는 줄곧 대국 경쟁 사이에 있었다. 처음에는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고 전쟁 후에는 각자의 점령군에 의해 민족이 분열되었으며 후에는 한국이 일본과 수교하며 ‘화해’는 했었지만 일본한테 당한 민족의 쓰라림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냉전 결속 전후를 계기로 한국의 국제 활무대는 전례 없는 진전을 가져왔다. 구소련과 중국과의 수교를 통하여 한국은 동북아 지역에서 ‘가교’ 역할을 하면서 무역 왕래로 영토가 협소하고 인구 규모가 제한적인 불리한 조건을 돌려세웠다. 또한 유럽연합, 미국과 중국 등 글로벌 3대 경제체계와 선후로 자유무역 협정를 맺으면서 일약 세계 10대 경제 체 반열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 뒤 중국과 미국 간의 경제구도가 형성되면서 한국이 갖고 있던 기존의 활무대가 크게 위축 받게 되었고 그만큼 국제 환경도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2020년의 미국 대선은 한국 각계로 하여금 한숨 돌리게 만들었고 바이든의 당선은 ‘트럼프 드림’의 종말을 의미했다. 지난 4년래 트럼프는 선후로 한미 자유무역 협정를 수정했고 주한미군의 방위비 비율을 크게 높이려고 시도하는 등 의제로 한국으로 하여금 난감하게 하였으며 북한과 대화하는 것 외에는 미국과 한국이 호흡을 함께 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정부와 마주할 때의 난감 정도는 설명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총체적으로 볼 때 현재 한국 국내는 바이든의 집정에 대해 아주 정면적인 태도이다. 대체적으로 오바마 정부 때의 동맹과 규칙을 중시하고 다자주의로 글로벌 문제를 해결하려는 외교 노선을 실행하던 과거로 다시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물론 바이든 행정부가 집권 후 신속하게 동맹관계를 수복하는 목적은 급속도로 굴기하는 중국을 겨냥하는 것이 틀림없으며 이는 한국 외교에 새로운 난 제 거리로 되고 있다. 일찍 미국 대선 기간 바이든은 의도적으로 많은 전 오바마 행정부 성원들을 선거인단에 가입시켰으며 아울러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의 요구를 무시하고 파트너를 쥐어짜는 것에 대한 비난을 통해 미국 내 건제파 엘리트(建制派精英)들과 연대함으로써 집권 후 대중 포위망을 빠르게 완성할 수 있는 전략적 포석을 마련했다. 국무장관 브린켄, 국방부 장관 오스틴, 국가안보보좌관 설리번은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미국, 일본, 인도와 호주 등 4개국 체제를 구축하여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에 압력을 가하기로 했으며 유럽연합(EU)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추진하여 EU에 대한 투자협정 발효를 연기할 것을 요구하는 '5안(眼)연맹'의 활동을 활발히 벌여 눈길을 끌었다. 아울러 이 활동의 진척 중 한국은 미국의 전략포치에서 중요한 작용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우선 미국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국과 선진국 사이의 연계를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통신기술 협력 분야에서 그랬다. 한국은 세계에서 5G 통신, 조선 등 산업에서 중국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공업화 실체로써 미국에 얼마든지 중국제 ‘대체’ 상품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중국의 제조업과 큰 연관을 맺고 있으면서도 미국의 동맹이기도 한 한국은 미국의 엘리트들이 보기에 중국과 한국의 산업협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으로 자신의 기량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동북아 대륙에서 미국의 유일한 동맹으로 황해 일대에서 미군과 필요한 협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이 중국과 북한을 근접 압박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존재이다. 이를 위해 한국의 전략적 역할이 바이든 정부를 위해 ‘재발견’이 될 수 있었다. 이로써 외교 및 국방장관의 ‘2+2’ 회담을 계기로 미국의 새 정부가 한국과의 고위급 접촉이 급물살을 타면서 표류하던 한·미·일 3각 협력체제 복원까지 전개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한편 한국으로 놓고 말하면 ‘사드 사건’의 충격은 완전히 가셔지지 않았다. 한국은 미국과의 공조를 강화해 주변국과 대국(大國) 사이의 게임 카드를 늘려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한국이 완전히 미국 편에 기운다면 중한 간 금방 회복되기 시작한 신뢰 회복에 영향을 미쳐 양국 경제협력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것도 불 보듯 뻔한 것이다. 한 시기 한국은 미국을 위해 ‘화중 취편(火中取栗)’를 시도했으나 결국 돌아온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사드 추가 배치 비용 및 기타 방위비 인상 등 ‘협박’을 해온 것이다. 이를 감안해 현재 문재인 정부는 중국, 미국과의 공조를 동시에 강화하는 ‘헤지(对冲)’ 노선으로 중미의 전략 경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이를 위해 얼마 전 정의용 한국 외교장관이 샤먼(厦门)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 양국의 코로나19 시대의 전방위 협력을 모색했고 이에 앞서 서훈 한국 국가안보실장이 워싱턴에서 설리번 미 국가 안보보좌관을 만나 한미일 공조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한국 스스로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차원에서 보면 중미와의 관계를 융통성 있게 잘 처리하는 것은 양강(兩强)의 경쟁 불확실성을 피할 수 있는 기본 전제이겠으나 이는 마치 살얼음 위에서 안전 통로를 찾는 것처럼 난이도가 크다. 첫째로 ‘헤지’ 노선의 외교는 관련 당사국들이 오랫동안 중립에 가까운 외교적 입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방관하겠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고 또 과연 한국 국내에서 이 노선이 장기적으로 관철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외교의 흐름은 일관되게 여야 간 논란의 대상이었고 특히 ‘이데올로기(意识形态)’에 대한 한국 보수 세력의 편견과 중국에 대한 불신감으로 이는 사드 사태 이후 한국 민간이 중국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한 것과도 서로 결합된 것이다. 현재 문재인 정부의 대중국 우호적 입장을 이끌어낼 민심의 기반은 아직 더 다져져야 한다. 이번에 여권이 서울과 부산 시장 보궐선거에서 패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이른바 ‘사대주의’, ‘종북 외교’에 대한 보수 세력의 비난 목소리가 커질 가능성이 높아져 한국 정부의 대중국 우호 유지가 보다 어려워진 상황이다. 둘째로 한국에 대한 바이든 정부의 ‘우호적’ 자세가 장기적으로 유지될지도 불확실한 것이다. 미국 민주당 정부가 동맹 시스템을 재가동한 것은 중국에 대한 규제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동맹의 역량을 총동원하려는 의도로도 보이며 한국이 대중국 정책에 있어서 미국과 ‘상향적’ 입장을 보이지 않으면 미국 선의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 집권 기간에도 강제의 방식으로 한국에 향해 무조건 미국과 가까이 다가오기를 촉구하고 한일 정보 공유 등의 문제에 대해 협정을 타결시켰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은 각종 협력 체제를 재개하면서 시종 동맹국의 대중국 규제 참여가 제공될 수 있는 ‘자원 지원’을 명확히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미국에 유익한 일만 해주고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행운스러운 것은 중국은 한국 정부의 기본 외교노선을 총체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문재인 대통령 집권 기간 중한 관계 회복을 추진하였고 한반도 평화구축에 기여한 점도 고무적이다. 중국은 한국을 비롯한 중소국가들이 대국의 경쟁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심리도 이해하며 각국의 독자적 외교노선을 인정하고 있다. 하다면 한국 측도 중한 양국의 우호의 토대를 다지고 이해와 신뢰를 증진해 코로나19 시대에 양국이 함께 협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데 힘써주기를 바랄 뿐이다.

문재인 정부에 ‘주공’이 없다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도시 서울과 부산 두 곳 시장 자리가 불미스럽게 성추행 사건에 의해 공백이 되어 보궐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여당이 당헌·당규까지 바꿔가면서 후보를 내는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4.7보궐선거가 끝났다. 선거결과는 보수당의 압승, 진보당의 참패였다. ‘한 집은 환락, 다른 한 집은 울상(一家歡樂, 一家愁)이다. 환락을 맞은 야당은 잔칫집이고 울상에 빠진 여당은 초상집 분위기이다. 선거활동 막바지에 이르러 여당이 질 것이라는 짐작은 있었지만 미세한 표차가 아닌 격차가 너무 큰 패배여서 천만의 촛불로 탄생된 정권, 180석 국회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 여당이 받아든 성적표라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매번 선거가 끝나면 다음번의 선거를 위해 승리와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기 마련이다. 야당이 자기네가 잘해서라기보다 문재인 정권이 하도 잘못해서 어부지리를 얻은 결과라는 견해에는 일치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문재인 장권이 뭘 잘못했나? 1년 내내 지루하게 질질 끌어온 조국 사태와 추·윤 갈등, 시장경제와 엇박자 소지가 다분한 잘못된 부동산 정책, 공정해야 한다는 의미로 호칭된 공무원 LH직원들의 투기사태에 플러스 이 정권의 특유한 내로남불 등등이 여당 참패 원인 메뉴에 등장한다. 십분 맞는 얘기다. 그런데 ‘치표불치본(治表不治本)’란 말이 있듯이 이러한 참패 원인 메뉴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지나지 않아 정녕 환골탈태하려면 문제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 모든 병은 병인(病因)을 치료하지 않고 증상만 치료한다면 그때그때 증상 억제 효과만 있을 뿐 완치가 안 된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초기부터 첫 단추를 잘못 꿰서 삐걱하기 시작했고 4년을 맞은 현재 이 시점에 이르러 바닥까지 추락하게 된 그 병원인 ‘첫 단추’에 대한 분석은 이번 선거 참패 메뉴에 오르지 않고 있어 아무리 반성하고 머리를 조아려도 획기적인 변화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대저 그 병인인 ‘첫 단추’가 무엇이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재인 정부에 ‘주공’이 없었다는 것이 그 병인으로 지목하는 ‘첫 단추’이다. 주공은 강태공, 소공 석(奭)과 함께 주나라를 창건한 공신이다. 주나라 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주공(周公), 혹은 주공단(周公旦)으로 일컬어진다. 주 문공(文公)으로도 불리며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 봉해져 제후국 노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무왕을 도와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를 멸망시키고, 동이(東夷)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무왕이 죽은 뒤에는 어린 조카 성왕(희송)을 도와 주 왕조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여기서 잠깐 주(周)가 어떻게 상(商)을 멸망시켰는지? 그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상나라는 하나라에 이어 600여 년을 지속한 두 번째 왕조였다. 중국문자 갑골문이 그 시기에 생겨났고, 제례문화가 발달했으며, 수공업이 발달했고, 따라서 장사가 활성화 되어 나라 이름을 상업이란 ‘상(商)’으로 불렀고, 지금도 중국에서 장사에 종사하는 사람을 ‘상인(商人)이라 하는 것은 상나라 국호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토록 잘나가던 상나라가 3천 년 전 마지막 왕인 주(紂)에 이르러 몰락했다. 주왕(紂王)에게는 달기(妲己)라는 미녀 애첩이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주왕은 애첩 달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술이 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지었다고 한다. 제사 철이 되면 수일동안 밤낮 없이 연이어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발가벗고 쫓고 쫓기는 춤을 연출하면서 질펀하게 놀았다. 장야의 음(長夜之飮)이 하도 즐거워서 상나라 관료들이 날이 가는 줄 몰라 오늘이 몇 월 며칠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주왕이 주지육림에 나라 재정을 거덜 내는 바람에 강대했던 상나라가 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전설은 믿을 바가 못 된다. 중국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라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도 왕비 말희(妺姬)한테 빠져 주지육림 때문에 망했다고 하고, 서주(西周)는 유왕(幽王)이 좀처럼 웃지 않는 애첩 포사(褒姒)를 웃기려고 거짓 봉화와 봉수를 올려 군사와 제후들을 놀라게 하여 웃겼다고 한다. 결국 서주가 망한 것은 포사 때문이었다고 하니 중국역사는 나라가 망하면 여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관습이 생겨났다. 주는 본래 상에 속하는 하나의 작은 ‘제후국’이었다. 상나라 주왕(紂王)의 신하였던 주무왕(周武王)이 상나라 토벌에 나설 때 군사들에게 달기를 겨냥하여 ‘암탉이 울면 천하가 망하는데 지금 상이 그렇다.’라고 호소했다. ‘여자의 목소리가 크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이것은 주무왕이 상을 토벌하는데 있어서 명분(사실상 핑계)일 뿐 상나라는 이미 기울어 구제 못할 지경에 이르러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주왕이 하도 민심을 잃어 주왕의 장수들이 주무왕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두 손 들어 열렬하게 맞이하면서 칼을 자기네 주군을 향해 겨누었기 때문에 소국이 대국을 무너뜨리는데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주나라는 너무 쉽게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식은 죽 먹기로 정권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너무 쉽게 얻으면 너무 쉽게 잃는다.’는 속담이 있다. 무엇이든 너무 쉽게 얻었으면 너무 쉽게 잃지 않을까, 마땅히 걱정해야 한다. 『주역』에 64괘가 있는데 마지막 괘가 끝났다는 의미인 기결(旣決)인 것이 아니라 제 63괘가 기결이고 마지막 제64괘를 미결(未決)로 남겨두었다. ‘끝난 게 끝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주공은 이『주역』의 원리를 빠삭하게 터득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상나라를 뒤엎고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는 승리의 과실에 기쁨으로 도취되어 정신없이 축배를 들 때 주공만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 쉬면서 천하를 걱정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주공의 근심을 기우(杞憂, 이 말은 주공 이후에 생겨난 것이지만 여기서 문맥상 사용했다는 점 밝혀둔다)라 비웃었으나 주공만은 아주 진지했다. 무슨 일에 부딪히면 앉아서 한숨만 쉬면 해결되나? 행동에 나서야 한다. 주공은 팔을 걷어 부치고 행동에 나섰다. “천하를 다스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자.” 이것이 주공의 마인드였다. 정치적으로 왕실 친인척과 나라 창건에 공이 큰, 예를 들어 강태공 같은 사람 및 전쟁에 공이 큰 장수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제후를 세우는 이른바 ‘봉토건국’인 봉건제(封建制)를 시행하였고, 경제적으로 공유지와 사유지를 분명하게 나눠 경작하는 분봉제(分封制)를 실시하였으며, 사회적으로 예악제(禮樂制)를 마련하여 전반 사회 질서를 바로 잡았고 문화를 활성화시켰다. 그는 또 상나라가 수공업을 비롯한 상업중심이었다면 주나라를 농업중심 사회로 바꿔놓았고, 상나라가 귀신숭배문화가 중심이었다면 주나라를 성인숭배문화로 전환시켰다. 공자가 가장 숭배해마지않던 주공이 창안한 이러한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이 무려 3천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왔으니 중국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평가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나에게 가끔 ‘중국국가는 왜 싸움에 돌격하는 멜로디인 전투곡인가?’ 묻는다. 나는 앞서 말한『주역』제63괘와 제64괘의 원리로 설명한다. 1949년 새로운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와의 투쟁이 끝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모택동 주석께서 지나치게 과거와의 투쟁을 강조한 탓에 무리하게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는 등 부작용도 있긴 했지만 정권초기에는 반드시 주공처럼 심각한 걱정과 근심에 빠져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정권을 오래 유지할 수가 있다. 이쯤해서 눈치 빠른 독자께서는 아래에 무슨 얘기를 이어가려고 하는지 알아차릴 것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자 당시 나는 주나라가 떠올랐고 주공이 떠올랐다. 왜냐? 문재인 정권은 주나라가 너무 쉽게 정권을 잡은 것과 아주 흡사하게 촛불혁명에 의해 너무 쉽게 얻었다는 것이 양자가 심통하게 닮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데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어수선한 분위기에 탄생된 문재인 정부에 주공 같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안해내는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것을 혹시나 해서 바랐건만 역시나 이 정부에는 ‘주공’이 없었고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도 없었다. 이 정부에는 ‘주공’ 같은 인물도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은 고사하고 모두 승리에 도취되어 축배를 드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문재인 정권 초기 여당 대표의 입에서 나온 ‘20년 장기 집권설’은 ‘주공’이 없는 풍토에서 이젠 자신들의 천하가 된 세상이 ‘영원하리라’는 한심한 착각에 빠진 결과가 아닐까? 00역사학자가 유시민의 ‘알릴레오’ 유튜브에 출연하여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 탄핵으로 보수가 완전히 괴멸된 줄 알았다.” 이런 인식은 당시 보편적인 사회 분위기였으니 정권 일선에 앞장선 ‘어르신들’이야 더 승리에 도취되어 앉아 죽을 써도 20년은 쉽게 가지 않겠느냐는 착각에 빠질 만도 했을 것이다. ‘새로운 술은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한다.’ 민초들도 다 아는 아주 간단한 도리이자 기본 상식이다. 유감스럽게도 너무 쉽게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는 이 간단한 도리이자 기본 상식마저 유념하지 않았다. 기나긴 역사흐름에서 4년이란 시간은 별이 반짝거리는 순간보다 더 짧다. 진보당은 먼 미래를 지향하려면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주공’이 나오고 새로운 치국 패러다임을 창안해낸다면 앞으로 정권 잡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큰 도움, 아니 결정적인 요소로 될 것이지만 이번 선거에서 보여주었던 상대방을 쓰레기 취급이나 하고 자신들을 정의의 천사로 여기는 망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마인드로는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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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외국인정책 전문가 간담회 개최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박범계 법무부장관이 외국인 정책 전문가들과 만나 외국인 정책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법무부는 6일 학회(김태환 한국이민정책학회장, 윤인진 한국이민학회장, 최승범 한국이민행정학회장) 전문가들과 함께 현(現) 외국인정책을 성찰하고 미래세대를 위해 고민해야 할 정책들을 검토·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밝혔다. 이날 전문가들은 ▲외국인정책에 대한 국민 공감대 형성▲부처 간 데이터망 연계, 이민·통합기금 설치 등 인프라 강화▲ 외국인정책 총괄 기구 신설▲결혼이민자 이외 모든 이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외국인정책 추진을 건의했다. 박 장관은 한국 사회는 이주민과 공존 할 수 밖에 없는 시대에 이르렀고,국민과 외국인이 서로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포용과 공존의 사회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에 공감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국민 공감과 국민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다양한 분야의 의견과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이민정책 간담회 및 포럼등을 통하여 우리 사회가 당면한 이민정책의 현실과 정책적 과제를 함께 고민하고 국민이 공감하는 미래 지향적 이민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법무부, 전자여행허가제(K-ETA) 내달 3일부터 시범 운영

[동포투데이] 법무부는 한국에 무사증으로 입국이 가능했던 국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출발 전 미리 여행 허가를 받는 대한민국 전자여행허가제도(K-ETA)를 다음 달 3일부터 시행할 예정이라고 29일 밝혔다. K-ETA는 미국의 ESTA 제도와 같이 한국에 무사증으로 입국이 가능한 112개 국가의 국민을 대상으로 출발 전에 개인 및 여행 관련 정보를 입력한 뒤 여행허가를 받도록 하는 제도다. 대상은 무사증 한국 입국이 가능했던 112개 국가 국민이다. 다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 종료 시까지는 미국·영국 등 4월 현재 무사증 입국이 가능한 국가(21개) 국민 및 무사증 입국이 잠정 정지된 국가(91개) 국민 중 ‘기업인 등 우선 입국 대상자’를 대상으로 우선 시행한다. 우선 입국 대상자는 기존의 재외공관을 통환 사증 발급과 K-ETA 신청을 병행해야 한다. 가족 단위나 단체 여행객은 대표자가 최대 30명까지 신청할 수 있다. K-ETA 허가 여부는 신청인 메일로 자동 통보된다. 수수료는 1인당 1만 원 상당이며 한 번 허가를 받으면 2년간 유효하다. 유효 기간 내 반복 사용도 가능하고, 입국신고서 작성도 면제된다. 법무부는 4개월 간 시범 운영 후 오는 9월 1일부터 K-ETA를 본격 시행할 예정이다. 시범 운영 기간 동안 K-ETA 신청은 의무가 아니며 수수료가 면제 및 2년 유효의 K-ETA 허가서 발급 등 혜택이 제공된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K-ETA 허가를 받은 경우 사전 신청 정보를 기반으로 입국신고서 제출을 생략하고, 도착 전에 신속심사 대상과 정밀심사 대상으로 분류해 대상에 따른 맞춤형 심사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며 “출입국자의 약 52%를 차지하는 무사증입국 외국인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가능해져 안전한 국경관리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법무부, 외국인 계절근로 제도 대폭 개선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법무부는 농․어업 분야 구인난 해결을 위하여 지자체 등 의견을 반영한 계절근로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였다. 법무부는 올해 37개 지자체에서 신청한 4,631명의 계절근로자를 전원 승인 배정하였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여전히 신규 입국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어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들이 계절근로에 보다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코로나19로 인하여 출국하지 못하고 있는 모든 외국인 ▲미얀마 현지 정세 불안으로 특별체류 허가 조치를 받은 미얀마인 ▲방문취업 자격 동포와 가족 ▲취업이 허용되지 않는 동반 체류자격 외국인까지 확대 하였다고 29일 밝혔다. 법무부에 따르면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외국인근로자가 취업기간이 만료되었음에도 코로나19로 인하여 자국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60일 이상 계절근로 취업활동에 종사하면 향후 고용허가제를 통해 다시 국내에 입국하기 위한 한국어 능력시험 응시 시 가점을 부여하고 국내에서 숙련기능 인력으로 체류자격 변경 시 계절근로 종사 기간에 따라 가점을 부여하도록 하였다. 이외에도 방문취업 자격 동포가 국내에서 국가공인기술 자격증을 취득하면 출국 후 해외에서 재외동포(F-4) 체류자격을 받아 입국하여야 했으나 60일 이상 계절근로 취업활동에 종사하면 출국하지 않고 국내에서 재외동포 자격으로 변경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다음 계절근로자를 해외에서 초청시 해당 외국 지자체의 귀국보증서도 가능하도록 하고 결혼이민자의 친척을 계절근로자로 초청할 경우에는 귀국보증서 제출 의무를 면제하였다. 법무부는 올해 전반기에 계절근로자를 신청하지 못해 추가 배정을 요청한 횡성 서천군 등 13개 지자체, 703명 계절근로자에 대해서도 신속히 심사 후 5월에 승인 배정하여 적시에 계절근로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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