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9(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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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7)
    ■ 김철균 2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문영이는 늘 수심에 잠겨있던 지난날과는 달리 활달한 모습을 보이었다. 자신을 낳은 친 어머니는 없지만 자신을 더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새로운 조선족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는 영애를 비롯한 순자네 자식들의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알고 보니 순자의 딸들 역시 착하고 친절했으며 문영이를 친동생처럼 여기는 자매들이었고 점점 나날이 지나면서 오빠들 또한 모두 점잖고 유식했으며 동정심도 많은 형제들이었다. 문영이는 일요일마다 “북해상점”에 와서 순자와 어울려 때로는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때로는 상점옆에 있는 영옥이네 집에 들어가 영옥이네 아들애와 함께 놀아주기도 했다. 한편 문영이는 순자의 일을 거들어주면서 김치와 장을 담그는 재간과 기타 주방일을 배웠다. 일이란 내켜서 하는 것이라 재미있기 마련이었고 문영이는 열심히 조선족주방일을 배웠으며 얼마 안있어서는 제법 조선족 여성에 못지 않게 주방일을 척척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담근 김치도 제법 맛있다는 평가를 받아보기도 하였다. 문영이가 기뻐하며 기를 펴고 나다니자 이를 바라보는 순자의 마음 또한 흐뭇하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순자의 남편 김용환 교원도 상점에서 문영이를 만나보고는 자신도 어렵게 자라면서 공부를 해온터라 문영이에 대해 진정으로 아껴주면서 친딸처럼 대했다. 그 해 겨울방학이 되자 문영이는 연길을 떠나 돈화에 있는 아버지의 곁으로 가게 되었다. 순자의 곁에 있고 싶기도 하고 그러면 더 편하고 행복할 수도 있었지만 문영이는 가야만 했다. 방학기간만이라도 장애자인 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문영이를 돈화로 보내는 것 이는 또한 순자의 뜻이기도 했다. 문영이가 떠날 때 순자는 과자, 사탕, 과일, 술 등 먹을 것을 한아름이나 사서 문영의 가방안에 넣어 보냈다. 어쩔 수 없이 문영이를 돈화의 시골로 보내긴 했지만 이는 가슴의 살을 도려내듯 저리고 아픈 노릇이었다. 아니나 다를가 문영이가 떠난 이튿날부터 순자는 문영이에 대한 근심으로 끙끙 속을 앓으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돈화의 농촌은 이곳 연길보다 많이 더 춥겠는데 얘가 감기에라도 걸리지 않았는지?…얘 영순아, 문영이가 무사히 도착했는지 또 앓지나 않는지 전보라도 한통 쳐보려므나.” “어머니, 우리가 자랄 때는 막 굴러다니며 자라게 하더니 이번에 한족딸을 삼으니 제법 정성이 지극하구만요.” 큰 딸 영순이의 악의없는 농담에 순자는 제법 정색을 했다. “너희들 그렇게 생각하면 못쓴다. 걔는 에미가 없는 애란다. 너희들과는 달라. 너희들도 걔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 “알겠습니다. 한족딸의 어머니, 이 조선족딸들은 그 영을 받들어 따르겠나이다.” 막내 딸 영애도 한술 더 뜨며 말참견을 했다. “에끼, 이것들 너희들도 자식을 키워보면서 그것도 몰라?” 순자 역시 악의없이 딸들을 흘겨보았다. 그러면서도 순자의 뇌리속에는 문영이에 대한 근심뿐, 요즘 세월처럼 전화 한통이라도 할 수도 없었고 다만 편지를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 …… 어느 덧 음력설과 정월보름이 지나고 위생학교 울안의 백양나무에 까치가 앉아서 우는가 싶더니 개학을 앞둔 어느 날 문영이가 나타났다. “어머니!” “문영아!…” 모녀는 대뜸 한덩어리가 되었다. “어머니, 보고 싶었어요.” “문영아, 나도 그랬어. 나도 네가 보고 싶어 죽는줄 알았다.” 모녀는 다시 한덩어리가 되었다. 이윽고 문영이의 손을 잡아보는 순간 순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구, 네 이 손이 뭐냐?” 그도 그럴 것이 문영이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거웠고 손등은 얼기설기 갈라터지기까지 했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집에 가있는 동안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면서 찬물에 밥을 하고 빨래하고 하면서 무척 고생한 것이 분명했다. 순자는 문영이의 언손을 가슴속에 꼭 품어 주었다. 순자의 따뜻한 살결이 손에 닿는 순간 문영이는 뜨거운 모성애에 눈앞이 흐려났다. 아, 모성애란 바로 이런 것인가?! 순자의 가슴팍에 안긴 문영이는 7-8살이 어린애가 되고 싶었고 그대로 발버둥이질을 치며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으며 아니, 그대로 영영 떨어지고 싶지를 아니했다. 때마침 이들의 상봉을 알아주기라도 하는듯 당시 중국대륙에서 많이 유행되던 대만가요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대만영화-‘어머니 다시 한번 더 사랑해 주세요’에서의 주제곡)”가 “북해상점”의 반도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 엄마있는 아이는 보배같지요// 엄마품에 안기어 행복 끝없어라… 한편 순자와 문영이가 서로 한덩어리가 되어 있는 모습은 옆에서 지켜보는 영순이와 영애마저도 눈시울이 뜨거워나게 했다. 3 봄이 왔다. 뒤늦게 찾아오는 북국의 봄이지만 봄이 오는 것만은 분명했다. 해빛은 포근했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도 매섭지 않았으며 사람마다 봄이 좋다고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허리를 펴며 기지개를 켰다. 아니 이 시각, 자연계에 찾아오는 봄도 좋았지만 문영의 가슴에 스며드는 인생의 봄은 더욱 따뜻하고 좋았다. 봄을 맞는 마음은 순자도 마찬가지었다. 그 해는 한족딸 문영이와 인연을 맺은 뒤 맞는 봄이라서인지 더욱 즐겁기만 했다. 문영이는 자주 “북해상점”으로 찾아왔다. 또한 문영이가 오지 않으면 순자가 문영이네 기숙사로 찾아가기도 했다. 이틀만 서로 보지 못해도 그리워서 못견딜 지경이었다. 어느 덧 “3.8절”이 다가왔다. 그 날 학교에서는 오전만 수업하고 오후에는 전체 사생들을 휴식시키기로 했다. 그러자 집으로부터 용돈을 좀 넉넉히 받아쓰는 학생들은 기숙사식당의 밥은 먹지 않고 외출준비에 서둘렀다. 밖에 나가 맛있는 것도 사먹고 옷도 사입으면서 유쾌하게 “3.8절”을 쇠려고 말이다. 그러나 문영이를 비롯한 가난한 가정의 애들 몇몇은 외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외출하는 애들이 함께 나가 식사라도 한끼를 같이 하자고 했으나 일일이 거절했다. 그 애들도 집에서 보내오는 돈을 쓰기에 남을 도우면서까지 쓰기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까닭없이 남의 배려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하긴 문영이는 순자네 “북해상점”으로 찾아가 맛있는 것을 얻어먹을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늘 함께 어울리던 애들을 떼놓고 혼자 가기도 미안했고 그렇다고 그 애들을 몽땅 데리고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 때 순자가 헐레벌떡 기숙사로 찾아왔다. “문영이 있구나. 내가 좀 늦었구나. 아직 밥먹기 전이지? 오늘은 ‘3.8절’이니 상점에 가서 물만두나 빚어먹자꾸나.” “어머니, 전 괜찮아요. 기숙사식당에도 밥이 있는데요 뭘…” “얘, ‘3.8절’날에 왜 고독하게 기숙사식당에서 밥을 먹겠니? 자, 그러지 말고 함께 가자꾸나. 오후에 수업도 없다면서…” “그런데…” 문영이는 함께 기숙사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던 얘들을 돌아 보았다. 그러자 순자는 눈치를 인차 알아 차렸다. “너, 저 애들 때문에 그러는구나. 그럼 저 애들도 함께 데리고 가면 될게 아니냐?!” “어머니 정말요?…” 문영이는 기쁜 나머지 순자의 목을 끌어 안고는 볼에 입을 맞추었다. ▲북해상점서 한족딸 문영이와 장려(안경을 낀 사람 장려임)한테 일본어를 배워주는 김순자(흰위생복을 입은 사람 김순자임) 그 날 문영이와 몇몇 가난한 집의 자녀들은 “북해상점”에서 순자가 만들어준 물만두와 몇가지 맛있는 밑반찬과 볶음채를 먹으면서 “3.8절”을 기념했다. 음식을 다 먹자 천진난만한 여자애들은 자기네들이 보고들은 학교얘기와 기타 사생활을 화제에 올리며 웃고 떠들었다. 그와 중 어느 한 애가 학교과목 중 일본어가 배우기 가장 힘들다고 했다. 이에 문영이도 한마디 동조했다. “그래 나 역시 일본어가 힘들긴 마찬가지야. 선생님들이 말하기를 발음상에서 조선족들은 일본어를 배우기가 쉽대. 한족은 영어를 배우기가 쉽고 말이야.” 순자는 설겆이를 하다가 엉결에 그 애들이 주고 받는 말을 엿들었다. “얘 문영아, 일본어가 배우기 힘들다구?” “그래요, 어머니. 가장 힘든 것이 일본어예요.” “음, 그랬구나. 그럼 진작 이 엄마한테 얘기할 것이지.” “뭐예요?! 그럼 어머니가 일본어를 배워줄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그래, 안믿어?! 이래뵈두 난 해방전 일본인이 교장하는 학교에서 전문 일본말로 대화하며 공부한 사람이란 말이다. 일본어를 모른다면 아주 섭섭한 일이지.” “야 ㅡ 정말……” 여자애들은 탄성을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순자가 한 말은 결코 제 자랑을 늘여놓는 것이 아니었다. 소학교 시절의 6년간 일본의 노화교육을 받았던 그는 일본어의 회화나 문자 실력이 당시 연변 내의 웬간한 일본어 교원은 뺨칠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때로부터 순자는 상점벽에 자그마한 흑판 하나를 걸어 놓고는 문영이를 비롯한 몇몇 위생학교 학생들한테 일본어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가 순자의 일본어실력은 대단했다. 한낱 평범한 가정주부로만 여겼던 순자한테 그렇듯 놀라운 일본어 실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문영이와 기타 학생들은 모두가 깜짝 놀라면서 틈만 나면 순자한테로 찾아와서 모를 것을 물어보군 하면서 열심히 일본어를 배우군 했다. 순자의 보충교수로 문영이를 비롯한 애들의 일본어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제고돼 갔다. 문영이는 순자와 자기 자신의 인생이 함께 엉키게 된데 대해 진정으로 고마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만약 하늘에 하느님이 있다면 문영이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배려라고 인정하고 싶기도 했다. 연변위생학교ㅡ “북해상점”ㅡ 김순자어머니ㅡ그리고…만약 자신의 인생에 연변위생학교, “북해상점”과 김순자어머니가 개입되지 않았더라면 과연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되였을까 하고 문영이는 자주 반문해 보기도 했다. 한편 문영이는 조선족어머니의 사랑과 도움에 고마워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뭔가 어머니한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는 것으로 어머니가 기뻐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그것이 후날 문영이가 작가로 되는 취지가 되기도 했다. 평소에 그림그리기를 즐겼고 또 어느 정도 “미술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문영이는 조선족어머니를 노래하는 첫 스타트로 “꿈속의 어머니”란 제목으로 된 그림 한장을 그렸다. 홀로 상상해서 그렸으니 어떻게 보면 이는 창작이기도 했다. 그림속에는 술병, 간장병과 기타 상품들이 있는 가운데 새하얀 위생모자를 쓴 순자가 벽에 걸린 작은 흑판을 이용하여 학생들한테 일본어를 가르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림의 수준을 떠나 그 속에는 순자에 대한 문영이의 고마움과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4 “3.8절”이 지난 후 3일 뒤, 이른 봄이었지만 그날은 날씨가 제법 더웠다. 그 날 물건구입을 나갔던 순자는 행인들의 옷차림과 자신의 옷차림을 비교해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직도 겨울옷을 걸치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행인들 거의 모두가 가볍고도 환한 봄철 옷으로 단장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연길복무청사 냉면부의 출입문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줄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날씨가 더워오자 목에 갈증이 생기면서 냉면생각들이 난 모양이었다. 순간 순자는 또 문영이가 생각났다. 문영이를 보지 못한지도 사흘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 기숙사밥으로 끼니를 에우며 공부를 하고 있을 문영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또 알짝지큰해났다. 순자는 문영이한테 냉면 한그릇 사먹이고 싶었다. 시계를 보니 별로 늦지는 않았다. 순자는 종종걸음으로 문영이의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에는 마침 문영이가 있었고 점심밥을 먹기 전이었다. “문영아, 오늘 무척 덥구나. 나와 함께 냉면 한그릇씩 먹지 않을래?” “냉면?! 어머니 저한테 냉면 사줄래요? 오케이, 야 신난다. 오늘 냉면 먹게 됐구나!” 키만 컸지 문영이는 여전히 애나 다름이 없었다. 냉면을 먹는다고 하니 그렇게 뛸듯이 좋아하는 문영이를 보며 순자는 저런 철부지를 두고 에미가 어떻게 눈을 감았느냐 싶었다. 순간 또 가슴이 뭉클해 나며 눈물이 나왔다. 하긴 기숙사생활을 오래 하노라면 어른들도 항상 속이 출출한 법이라 이는 결코 문영이가 철부지래서만이 아니었다. 미구하여 함께 복무청사 냉면부에 들어가 사람들 속을 비집고 겨우 식탁에 마주앉은 순자와 문영이ㅡ 헌데 순자는 문영의 몫으로 냉면 한그릇만을 샀다. “어머니, 왜 한그릇만 샀어요? 어머니는요?” “기실 난 아까 나왔던 김에 한그릇 먹었다. 미안하다. 혼자서 먹다가 그만 네생각이 나서 너한테로 간거다. 어서 먹어라.” “그랬어요? 기실 전 안먹어도 괜찮은데…” 문영이는 순자의 말을 그냥 그대로 믿었다. 쫄깃쫄깃한 냉면오리와 시원한 냉면국물, 정신없이 맛있게 먹고 있는 문영이를 바라보는 순자의 마음은 흐뭇하기만 했다. 그러나 두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어머니, 울잖아요? 왜 그래요, 어머니?” “아니다. 네가 먹는 걸 보니까 흐뭇해서 그런다. 앞으로는 냉면이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이 엄마한테로 오거라.” 천진한 문영이는 오늘 어머니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렇다고 점심을 굶어가며 자기한테 냉면을 사주고 있다는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 날 문영이한테 냉면을 사먹이다 보니 순자는 손님이 가장 많이 들이닥칠 점심시간에 상점문을 닫아야만 했다. 하루 매출액이 100여위안이라 할 때 점심시간에 그 50% 이상의 매출액은 그 시간에 올려야 한다는 것은 모든 상점주인들이 다 알고 있는 상업법칙이다. 그렇게 말하면 그 날 순자는 주먹구구로 아무리 적게 계산해도 70원 정도는 적게 번 셈이었고 또한 적지 않은 단골을 다른 상점에 빼앗길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가 후에 단골로 “북해상점”에 드나들던 맥주애호가 몇몇이 그 날 점심에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섰다며 섭섭해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생필품을 사러 다니는 위생학교 교직원과 학생들과 그냥 길가다 찾아들어오는 행인손님들, 그 날 순자가 놓친 손님은 과연 얼마나 되였을까? 하지만 문영이한테 냉면을 사먹인 것에 대해 순자는 꼬물만치도 후회가 없었다. 아니, 자기가 문영이한테 등한히 대한 적이 있을가봐 항상 신경을 기울였으며 2-3일만 문영이를 보지 못해도 얘가 앓지나 않는가 하고 마음을 졸이군 했다. 그랬다. 순자가 문영이에 대한 사랑은 친 딸들에 대한 사랑 그 이상에 달했다. 이는 그 사랑을 직접 받고 있는 문영이 자신도 다는 알 수가 없었으니 타남들이야 그것을 알아줄리 더욱 만무했다. 사례로 한가지만은 꼭 적고 싶다. 그해의 여름, 큰 아들과 큰 며느리가 북경으로 출장갔다가 돌아오면서 순자한테 값진 양털적삼, 속내의와 신 등을 기념으로 사왔다. 이런 옷과 신 등은 평소에 순자가 별로 보지도 못하던 것들이었다. 좋은 옷을 보면 입고 싶어하는 것이 여성들의 천성이라고 할까? 순자도 마찬가지었다. 아들 며느리가 사다준 옷을 입어보고 신을 신어보고 하던 순자는 기쁘기 한량 없었다. “고진감래(苦尽甜来)”라고 자식들 효도에 이젠 복을 누리는가 싶었고 또한 옷이 날개라고 그 옷을 입으니 20년은 더 젊어 보이기도 했다. 순자는 그 옷을 입고 거울앞에서 이리 저리 비춰보기도 했다. 결혼한 뒤 수십년간 영감한테서는 이런 옷을 한번도 선물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자식한테서 이런 복을 받아 보다니 어쩐지 꿈만 같았다. 하지만 이는 한순간에 불과했다. 또 문영이가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 애는 지금 한창 피여나는 꽃나이인데 반반한 옷 한벌 없지 않은가?!) 순자는 아쉬운대로 입었던 새옷을 벗어 다시 포장했다. 순자는 문영이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어느 날 그가 나타나자 아들 내외한테서 선물받은 옷을 내놓았다. “어머니, 이게 뭔가요?” “너 큰 오빠네 내외가 북경에 갔다가 나한테 선물로 사온 것이다. 아마도 네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다.” 그러자 문영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뒷걸음질을 쳤다. “어머니, 전 받을 수 없어요. 어머니한테 선물한 것을 제가 어떻게 받아요.” “얘, 큰 오빠가 뭐 남이냐? 그리고 기실 그 옷들이 너무 환해서 나한테는 좀 어울리지도 않는다.” 순자는 짐짓 맘에 없는 말을 했다. 순자는 막무가내로 옷과 신 등을 문영이한테 밀어맡겼다. 기실 문영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역연했다. 그러면서도 짐짓 그 심정을 감추는 모양이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한테서 자꾸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떡해요. 전 어머니한테 아무 것도 해드린 것이 없는데…” “아직 나이도 어리고 앞날이 창창한데 앞으로 왜 기회가 없겠느냐! 그리고 이 엄마가 널 해주는 건 너한테서 뭘 보답받기 위해서가 절대 아니란다.” “어머니ㅡ” 문영이는 재차 순자의 목을 끌어 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3-23
  • 中 불고기집 주인 혼자서 8명의 “복면괴한”들을 격퇴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지난 3월 21일, 서안시 성남구에서 자영업을 하는 한 불고기집 주인이 8명의 “복면괴한”들이 난입해 일군들을 구타하자 혼자 식칼을 들고 이들과 박투, 끝내 이들 괴한들을 격퇴함과 아울러 이 중 1명을 붙잡아 경찰에 넘겨 사건해명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혼자서 8명의 괴한의 습격을 물리친 불고기집 주인은 사천사람으로 올해 46세이다. 현지 언론 “화상보”에 따르면 이 날 오전 11시 40분경, 누군가 자동차에 쓰레기를 가득 싣고와 이 불고기집 부근에 쏟아부었다. 이 가게의 영업을 방해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어 오후 1시 20분경, 얼굴복면을 한 8명의 남자가 쇠파이프 등을 들고 불고기집에 들이닥쳐서는 손에 잡히는대로 부수고 일군들을 후려치고 하였다. 이러자 불고기집 주인은 주방에 들어가 식칼 한자루를 들고 나와서는 이들 8명과 격투를 벌이었다. 동시에 몇몇 남성 복무일군들도 협조, 이들 “복면괴한”들의 습격을 물리쳤을뿐만 아니라 이 중 한명을 “나포”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 불고기집 안주인은 이 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물업관리소의 위××경리와 관련이 있다고 찍어 말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일찍 지난해 9월 이들이 불고기집 내부인터리어를 하면서 재료를 실어오게 되자 물업관리의 위××는 재료를 실은 차가 이 골목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고 2000위안을 주어서야 비로서 일이 풀렸으며 개업한 후에는 문밖에 손님상을 놓지도 못하게 하면서 극력 이들의 영업을 방해하였었다. 이 날의 사건이 있은 뒤 기자가 이 불고기집을 찾아가자 한 남자가 부상을 당한채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이 사건은 그 물업관리의 위×× 경리와 관련이 있는상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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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2015-03-23
  • 타이난 정부 몰래 장제스의 동상 철거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3월 22일 타이완 “중앙사”의 보도에 따르면 타이완 타이난 (台南)시 정부가 학교내에 있는 장제스의 동상을 철거하면서 이젠 장제스의 동상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고 밝히었다. 21일, 타이난시 교육국에서는 3명의 인원을 파견하여 시안의 14개 학교내에 있는 장제스의 동상을 철거하기 시작, 사전에 통지하지 않았기에 각 학교들에서는 철거인원이 현장에 도착해서야 비로서 해당 지시정신을 알게 되어 부랴부랴 사진을 찍어 서류에 남기기로 하였으며 이를 두고 당지의 민중들은 “몰래 철거하는 것”이라고 질책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의 “철거행동”은 북구 성공초중에 있는 동상만은 당지 구장 및 주민들의 강렬한 반대에 의해 잠시 철거를 멈추었으며 기타 학교의 철거작업은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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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3
  • 서경덕 교수, 토론토에서 '한국 문화와 역사의 중요성' 특강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전 세계를 직접 다니며 '한국 문화와 역사의 중요성'에 관한 특강을 진행해 온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21일(현지시간) 저녁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소강당에서 특강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K-lecture(강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번 특강은 세계 한인 학생회 연합회 캐나다 지부의 주최로 토론토 내 유학생 및 재외동포 약 3백여명이 참여하여 큰 성황을 이뤘다. 이에대해 서 교수는 "광복 70주년인 올해, 일본의 지속적인 역사왜곡에 맞서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대처하는 자세 및 일본 정부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지속적으로 알려 세계적인 여론을 환기시켜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강조했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독립기념관 독도학교 교장으로서 독도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의미와 해외에서 잘못 표기된 독도 및 동해에 관련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방법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고 덧붙였다. 특히 이번 특강은 미국 뉴욕, 중국 상하이, 러시아 모스크바, 브라질 상파울루, 일본 도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베트남 호치민 등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벌인 20번째 특강이라 더 의미가 깊다. 이에대해 서 교수는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본 내 주요 도시에서 일본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일본군 위안부' 특강을 준비 중이며, 분단 70년을 맞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등 분쟁지역에서도 특강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K-lecture(강연) 프로젝트'는 전 세계 주요 도시를 서 교수가 직접 다니며 현지 외국인들 및 재외동포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와 역사의 우수성'에 관한 특강을 진행하는 강연 소통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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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15-03-23
  • 3월 26일 뮤지컬 "덕혜옹주" 가족사랑 나눔의 밤 열려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광복 70주년 기념을 맞아 대학로 SH아트홀에서 4월 3일 화려한 막을 올리는 뮤지컬<덕혜옹주>는 다가오는 3월 26일에 뮤지컬<덕혜옹주>와 함께하는 가족사랑 나눔의 밤이라는 타이틀로 제작발표회를개최한다. 뮤지컬<덕혜옹주>는 2012년,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공연예술 창작산실 대본공모 당선을 비롯해 2013년도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공연예술 창작산실 시범공연지원작에 당선은 물론 우수작품 제작 지원작으로도 선정이 되어 2013년 대학로뮤지컬센터 공간 피꼴로에서 초연을 올렸으며, 작년 5월 성수아트홀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올렸다. 이번 2015년에도 기존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화려한 캐스팅과 함께 인사를 드릴 예정이다. 초연부터 '덕혜'와 '정혜'를 오가며 고 난이도의 배역을 소화해낸 배우 문혜영이 다시 한번 인사를 드리며 ,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명성황후' '오페라의 유령' 등에 출연한 윤영석 배우가 출연하여 호흡을 맞춘다. 또한 뮤지컬 첫 도전을 하는 크레용팝 ‘초아’가 정혜와 덕혜 역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캐스팅 되어 기대를 모으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많은 관심 속에 뮤지컬<덕혜옹주>는 2015년 첫 오픈을 위해 모든 출연진을 비롯한 제작관계자들이 마지막까지 힘쓰고 있으며, 다가오는 2015년 3월 26일 목요일 오후 7시에는 뮤지컬<덕혜옹주>의 첫 출발을 알리는 제작발표회에서 객석나눔행사도 진행이 되어 의미가 더한다. 본 행사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LOUNGE 1950 HOTEL에서 진행되며 사회자 뮤지컬 배우 ‘이석준’의 진행아래 뮤지컬<덕혜옹주>주연배우들이 준비한 축하공연, 연출을 비롯해 전 출연진들의 포토타임 또한 준비되어 있어 자리가 더 빛날 예정이다. 또한 , 홀트아동복지회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함께 객석나눔이라는 소중한 나눔 행사도 진행된다. 뮤지컬<덕혜옹주> 제작발표회에서 진행되는 객석나눔행사에서는 다문화가정 등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건네는 뜻을 담고있으며 , 문화는 더하고 사랑은 나누는 의미가 담긴 만큼 2015년 상반기 4월 부터 시작해 앞으로도 따뜻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많길 바란다. [공연개요]공연명: 광복 70주년 기념 뮤지컬 <덕혜옹주>공연일시: 2015. 04. 03 (금) ~ 06.28 (일)공연장소: 대학로 SH아트홀공연시간: 화,목,금 오후 8시 / 수 오후 4시, 오후 8시 / 토 오후 3시, 오후 7시 / 일 오후 5시 (월 공연없음)티켓가격: R석 55,000원 / S석 45,000원문의: 1544-1555
    • 연예·방송
    2015-03-23
  • 2015 중국축구 갑급리그 순위표(제2라운드)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3월 22일, 원정 2연승에 도전한 연변장백산팀이 중국축구 갑급리그 제2라운드 하북화하와의 경기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경기의 마지막 순간까지 골을 주고 받던 끝에 기적적으로 상대방과 2 : 2로 손잡았다
    • 스포츠
    2015-03-22
  • 나이 속인 中 축구선수 3개월 출전금지처벌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20일, 중국 축구협회에서는 전 국가청년팀 선수였던 황제이(黄洁)한테 3 개 월 간 그 어떤 축구경기에도 참전할 수 없다는 처벌결정을 내렸다. 중국 상하이 출신인 황제이 선수는 일찍 중국 U-17국가대표팀, U-19국가대표팀 및 국가올림픽팀의 선수였으며 상하이 연성, 상하이신화, 창춘아태, 상하이중방, 후베이중박 등 프로구단에서 뛰기도 했다. 최근 그는 나이를 위조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중국축구협회 처벌준칙 제65조에 의해 오는 5월 27일까지 3 개 월간 그 어떤 축구경기에도 참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 스포츠
    2015-03-22
  • 연변장백산FC 원정서 하북화하와 2 : 2 극적인 무승부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3월 22일, 원정 2연승에 도전한 연변장백산팀이 중국축구 갑급리그 제2라운드 하북화하와의 경기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경기의 마지막 순간까지 골을 주고 받던 끝에 기적적으로 상대방과 2 : 2로 손잡았다. 하북성 진황도시에서 있은 이번 경기에서 연변팀은 초반에 상대한테 많이 밀리는 모습을 보이었다. 제1라운드에서 북경이공한테 0 : 1로 홈장패전을 기록한 하북화하팀은 더이상 홈장패전은 보이어 줄 수 없다는 자세로 경기초반부터 거세게 밀고들어 왔다. 상대방의 강한 공세에 연변팀은 경기초반 3분내 연속 두번이나 상대한테 슈팅을 허락했으나 운좋게 실점을 피했으며 연속 몇차례나 되는 상대의 코너킥에도 역시 의악스럽게 크로스바(球门)을 지켜냈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연변팀은 경기 11분 경에야 겨우 첫 슈팅을 날리었으며 전반전 내내 우왕좌왕하는 실망스런 모습이었다. 후반들어 연변팀은 진세를 바꾸고 수비로부터 공격에로 전환, 공을 상대방 후방에 수송하는 기전술이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연변팀의 공방조직에는 여전히 브라질적 용병 찰튼 선수가 나섰다. 후반 13분경 연변팀은 한차례의 유효공격을 조직, 후방에서 날아온 공을 한국용병 하태균이 잡아 슈팅했고 상대방 골키퍼가 가까스로 쳐낸 공을 9번 스티브가 달려 들어가며 차넣은 것이 보기 좋게 그물에 걸렸다. 그 뒤 후반 23분경, 교체투입된 연변팀의 7번 고만국이 개인돌파에 성공했으나 최후의 공처리에서 한발 늦은 탓에 연변팀은 추가골을 터뜨릴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흘려보냈다. 경기종료가 다가옴에 따라 상대방은 동점골을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고 마침내 경기종료 3분을 앞두고 외적용병 라토비치가 동점골, 경기보충시간 3분경에는 밀아리스가 중거리포로 추가골을 터뜨리며 하북화하가 다 이기는듯 싶었다. 하지만 기적은 이 때에 나타났다. 경기종료 1분을 앞두고 연변팀의 18번 하태균 선수가 개인돌파로 동점골을 터뜨리며 재차 경기결과를 바꾸어놓았다. 중국축구 갑급리그는 오는 29일 경기가 없다가 오는 4월 4일 재개, 연변팀은 원정에서 귀주지성과 격돌하게 된다.
    • 스포츠
    2015-03-22
  • 70년간 독일이 지불한 전쟁배상금은?
    [동포투데이 김현나 기자] 최근 그리스는 옛 장부를 들춰내며 독일에 2차대전 문제로 도합 1600억 유로를 배상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로 하여 원래부터 긴축정책으로 긴장상태에 있는 두 나라 관계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중국 신경보(新京報)가 22일 보도했다. 그리스의 이같은 요구에 대해 독일정부는 즉시 부정했다. 독일정부 대변인 자이베르트는 기자회견을 통해 “독일은 줄곧 나치독일이 유럽국가들에 입힌 재난을 가슴깊이 새기고 있고 이에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독일은 언녕 2차대전 피해국들에 전쟁 배상금과 보상성 배상금을 지불했다”고 밝혔다. 하다면 구경 그리스와 독일의 금전분쟁이 끝난 것인지? 또 2차대전이 종결된 후 지금까지의 70년간, 독일이 지불한 2차대전 배상금은 얼마나 되는지?   배상담판 제2차대전에서 독일이 투항한 후, 18개 전승국들은 1945년 가을 프랑스 파리에서 회의를 가지고 독일의 2차대전 배상문제를 논의했다. 회의는 각국이 자국 영토내에 있는 독일의 해외자산을 몰수할 권리가 있다고 결의하고 또 배상에서 각 국간의 분배비율을 제정했다. 그리스도 파리 배상회의에 참가했으며 분배방안 가운데서 4.35%의 물질배상과 2.7%의 기타 방식의 배상을 받기로 했다. 헌데 독일이 서쪽점령지역과 동쪽점령지역으로 나뉘고 또 세계가 냉전시대에 진입함에 따라 배상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동 서 두 지역이 부동한 배상운명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동쪽지역에서 소련은 전쟁 가운데서 손실된 기초시설과 공업설비들이 많았기 때문에 동부독일에 실물배상과 함께 그것을 소련에까지 수송해 줄 것을 요구했다. 대규모의 공장 철거이주는 3년간 지속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소련이 동쪽점령구에서 철거해 가면서 획득한 배상은 동쪽지역 모든 자본설비의 35%-45%에 달했고 강철, 화공 등 일부 관건적인 공업분야에서 동쪽점령구는 거의 모든 공업설비들이 회손되었다. 이로부터 민주독일(동부독일)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하락했다. 1953년 소련은 동독이 아직 갚지 못한 배상금 25억 7300만 달러를 지워버리고 정식으로 동독에 대한 모든 배상요구를 포기한다고 선포했다. 당시 소련은 동독으로부터 이미 도합 42억 9200만 달러(1938년 환율로 계산한 것임)를 배상받았으며 그 가운데에는 공업과 설비 철거이전도 포함됐다. 미국과 영국의 서쪽점령구에 대한 배상요구는 상대적으로 너그러웠다. 그것은 배상으로 인해 서부독일의 경제가 파괴되고 그로부터 서독이 유럽의 부담으로 전락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쌍무협정 1953년 동맥국들은 “런던채무협정”을 체결하고 독일 채무의 절반을 감면했다. 1990년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연방과 민주독일은 독일 관련 통일적인 “최종 독일문제 해결 조약”(2+4조약)을 체결, 4개 동맥국들은 이로부터 독일에서 보유하고 있던 권리와 의무를 모두 포기한다고 선포했다. 이에 앞서 1960년, 독일과 여러 전승국들은 각기 쌍무협정을 체결하고 배상을 진행해 왔다. 협정에 따르면 독일은 그리스에 도합 1억 1500만 마르크를 배상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 덴마크 등 국가에도 배상한다. 20세기 70년대에 독일은 폴란드에 14억 마르크를 배상했고 “2+4 조약” 체결(1990년) 후, 독일은 또 소련에 180억 마르크를 지불했다. 그 가운데에는 나치에 의한 강제노역에 대한 배상도 포함됐다. 법률적으로 보면 “2+4 조약”으로 동맥국들은 독일에 대한 배상요구를 포기했고 그리스정부도 이 조약을 비준했기 때문에 독일과 그리스 양국간의 2차대전 배상문제도 그때에 이미 끝난 것이다. 헌데 그리스 측은 독일이 1960년에 지불한 배상금은 최초배상금에 불과하며 나머지 배상은 1990년 동, 서 독일이 통일된 후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이 문제에서 국제사회는 보편적으로 독일을 지지하고 있다. “2+4 조약” 담판에 참가했던 유럽의회 구라더 의원은 목전 그리스가 아무리 곤경에 빠졌다 해도 지금에 와서 독일에 2차대전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형편없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민간배상 독일연방이 설립된 후 배상의 주요 대상은 정부로부터 미간의 전쟁피해자들로 전이됐으며 독일은 적극적인 배상을 통해 독일의 국제형상을 재수립하려 했다. 1948년, 이스라엘은 건국하자 독일에 배상을 요구했다. 비록 이때 독일연방도 전쟁의 페허속에서 회복되지 못했지만 당시의 총리 아데나워 정부는 적극적으로 배상에 나섰다. 1951년 9월, 아데나워 총리는 국제사회를 향해 정식으로 독일연방정부는 나치정권이 범한 죄행에 책임을 질 것이며 이스라엘과 유태인세계에 배상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1952년, 독일과 이스라엘은 “룩셈부르크조약”을 체결한다. 조약은 독일연방이 이스라엘정부에 가치가 30억 마르크에 달하는 배상을 지불하며 유태인 “배상요구연합회”에 가치가 4억 5000만 마르크의 배상을 지불해 세계 각국에서 나치의 박해를 받은 유태인들 구조에 쓰도록 하며 배상 지불기한은 12년~14년으로 규정했다. 그 후 독일은 에누리 없이 조약을 집행했고 1966년에 배상을 완성해 이스라엘 경제의 도약을 촉진했다. 이 기간, 독일은 두 가지 법률을 제정, 배상이 법에 따라 진행되도록 담보했다. 1956년에 독일은 “독일연방배상법”을 통과하고 개인배상을 연방정부와 각 주 정부에서 공동 부담토록 했으며 1957년에 연방의회는 또 “연방재산반환법”을 통과해 전쟁피해자들이 독일법정을 통해 자기재산을 돌려받는데 법률적 의거를 제공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1960년에 전쟁피해자의 개인배상은 서부독일 재정지출의 7.48%에 달했고 1965년 9월까지 심사를 거쳐 지불한 개인배상금은 182억 5000만 마르크에 달했다. 강제 노역자들에 대한 배상 배상이 진행됨에 따라 2차대전 피해자들에 대한 독일의 배상 주체는 정부만이 아니었다. 기업에서도 배상에 적극 참가했다. 2000년에 설립된 “기념, 책임과 미래” 기금회 가운데서 6500개 독일 기업이 51억 마르크를 나치에 의한 강제노역자들에게 기부했다. 그 대부분 기업들이 2차대전 후에 설립되었으며 종래로 나치 강제노역자들을 쓴 적이 없었다. 독일의 일부 유명 대기업들은 2차대전 기간 독일군에 의해 끌려온 강제노역자들을 고용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 IG법본회사는 자기의 집중영도 갖고 있었다. 지난 세기 50, 60년대 유태인 “배상요구연합회”는 유태인 노무자들을 대표해 독일 일부 대기업들을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독일 IG법본회사는 20여 개 국가로부터 끌려온 노역자들이거나 그 가족들에게 도합 2700만 마르크를 배상했고 독일 군공기업 크루프회사는 1000만 마르크를, 독일 통용전기회사는 400만 마르크를, 지멘스사에서는 500만 마르크를 배상하며 만일 부족하다면 최고 200만 마르크를 더 증가하겠다고 밝혔다. 50, 60년대 독일 대기업들의 피동적인 배상과는 달리 80년대 이후, 독일 기업들은 주동적으로 회사의 역사를 반성하고 배상했다. 1988년 독일 벤츠회사에서는 “배상요구연합회”의 요구에 따라 2000만 마르크를 2차대전 기간 벤츠회사에서 강제노역한 노무자들에게 배상했고 1988년 폭스바겐 자동차회사에서는 역사학자들에게 의뢰해 2차대전 기간 회사에서 집중영에 수감된 죄수들을 노역에 쓴 사실을 조사하게 하고 회사역사에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1991년에 “배상요구연합회”에 1200만 마르크를 지불해 나치 강제노역자들에게 배상하게 했다. 독일 70년간 640억 유로 배상 독일연방정부는 1986년 11월까지 독일이 여러 가지 전쟁배상금 도합 770억 7000만 마르크를 지불했다고 선포했다. 물론 이것으로 배상이 끝난 것은 아니다. 독일은 1990년 동서독 통일 후, 선후하여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우크라이나, 백러시아와 모스크바에 나치 강제노역자 배상기금회를 설립하고 15억 마르크를 배상했다. 1998년에는 체코에 설립한 “독일미래기금회”에서도 일부 자금을 나치 강제노역자들에게 지불했다. 그전의 배상은 주로 유태노역자들에게 지불했지만 2000년에 독일은 또 “기념, 책임과 미래” 기금회를 설립하고 주로 중동유럽국가 나치 강제노역자들에게 배상했다. 2000년 7월 17일, 독일, 미국, 이스라엘, 러시아, 폴란드, 체코, 우크라이나, 백로시아 등 동유럽 국가의 대표들이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나치 강제노역자 배상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에 따르면 독일은 2차대전 기간 나치에 의해 강제노역을 한 생존자 및 그 후대들에게 도합 100억 마르크(약 48억 달러에 해당)를 배상하기로 하고 독일 정부와 기업이 각기 50%씩 부담하기로 했다. 이것은 독일정부가 나치피해자들에게 제공하는 마지막 배상이었다. 2000년 9월 “기념, 책임과 미래” 기금회가 정식으로 배상업무를 가동, 7년간 중동유럽 지역 160만명에 달하는 2차대전 노역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했다. 2007년 6월 12일, 독일 “기념, 책임과 미래” 기금회는 총리관저에서 의식을 가지고 7년간의 나치 강제노역자 배상사업을 종결한다고 선포했다. 이로부터 독일은 끝내 2차대전의 배상을 끝냈다. 독일 메르켈 총리는 2007년에 “독일은 2차대전 후 약 640억 유로를 배상금으로 지불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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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2
  • [인터뷰] “자신의 미래 책임지는 인생 살고파요”
    ▲ 대한민국의 VJ이자, MC, 탤런트 심민(본명: 심지유)씨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대한민국은 경쟁사회이다. 경쟁은 경제·문화 및 각 분야별로 치열하다. 또한 치열한 경쟁속에 경제와 사회가 발전한다. 하다면 끝없는 경쟁과 도전속에서 어떤 인간 자세가 바람직할까? 최근 어느 한 행사에서 만난 30대 초반의 VJ이자, MC, 탤런트 심민(본명: 심지유)씨는 이를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이라 했다. 경북 구미출신으로 올해 31세인 심민씨는 대한민국의 톱스타로 될만큼 잘 나가는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2003년 한국 음악 전문채널인M.net의 VJ 선발 대회에서 금상을 획득할만큼 실력을 갖고 있었으며 방송계, 가요계와 배우계를 두루 휩쓸면서 환경에 잘 적응해 나가기도 했다. 어릴 때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자주 전학을 하면서 낯선 환경에 자주 어울리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또한 초등학교 3학년 전까지는 아주 소극적이고 목소리도 작은 그런 아이었지만 지금은 몹시 활달(자신의 평가)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한다. 2008년부터 드라맥스 “대박인상”의 주역으로 뛰다가 다시 기업행사를 사회하기도 하고 때로는 여행도 하면서 일상을 보내다가 오는 4월부터 OCN로부터 드라마 촬영 요청이 있어 최근 그 준비중이었다. 취미생활은 여행과 춤추기이고 현재 배우고 있는 외국어로는 중국어로 성조(声调)가 어렵긴 해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어 이에 흠뻑 빠져들고 있다. “갖고 싶은 것이 당연히 많지요. 하지만 30살이 되고 보니 저의 인생에 대한 책임감이 생기더라구요. 또한 앞으로 어떤 일이 들이 닥칠지도 모를 세상이니 그 상황상황마다 흔들리지 않고 유연하게 받아 들이는 성격을 키우기에 노력하고 있어요.” 한편 팬들에 한해서는 항상 가까히 다가오는 심민씨었다. 이 중 부산에서 살고 있는 장한나라고 부르는 팬과는 평상시 계속 연락이 오고 가고 하는 사이었다가 최근 전화번호가 바뀌면서 잠시 연락이 중단된 상태였다. 그러면서 몹시 장한나를 보고 싶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심민씨는 한마디 했다. “한나야~ 잘 있었어?” …… “결혼은 했는지요?…” “아직은요……” 심민씨는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타입, 자신의 앞날을 남자한테 의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앞날은 자기 자신이 책임진다는 그런 연예인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포기하고 “싱글”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거래하는 남친이 있었고 딱히 결혼을 상대로 원하는 남자라면 배울 점이 있는 자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배우로 된 것이 잘되었다 싶을 때는 엄마가 좋아하실 때이고 반대로 힘들 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에 혼란이 올 때라고 말하는 심민씨는 변신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케멜레온 같은 모습이고 유지하고 싶은 것이라면 자기 자신의 원색을 지키는 것이다. 귀엽고 활발하고 총명까지 겸하고 있는 재간둥이 연예인 심민씨 ㅡ 그녀가 경쟁이 치열하고도 생존공간이 좁은 한국사회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미래를 책임과 더불어 유망한 연예스타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 사람들
    2015-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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