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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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묘한 세계 대백과 (31)
    만약 태공에서 지구를 내려다 보면 지구는 하나의 푸른 색을 띤 성구이다. 왜냐하면 지구표면의 7/10 이상이 바다무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넓고도 신비한 해양세계에는 형형색색의 해양생물들이 생활하는데 거기에는 육지에 비해 더욱 풍부한 자연자원이 있어 바다는 그야말로 하나의 푸른 보물고임에 틀림 없다. 해양에는 대량의 물자원이 축적돼 있으면서 아울러 우리에게 영양가치가 높고도 맛이 있는 물고기, 게, 등 해양식품을 공급하고 있다. 그 외 해양에는 풍부한 광산자원이 깔려 있으며 그 종류와 저축량은 아주 놀라운바 빈해의 돌광산, 해저석유, 린칼시움석(磷钙石)과 해록석 등이 아주 많아 인류의 후비자원고로 되고 있다. 현재 인류는 조석(潮汐)발전과 해수담화, 해양약업 등 산업을 진일보 발전시키고 있으며 해양은 인류를 위해 각종 생필품을 제공하고 있어 인류를 위해 사심없이 기여하는 “백보상(百宝箱)”과도 같다. 바다물의 담화와 바다물의 직접 이용은 많은 담수자원을 절약할 수 있게 한다. 바다물의 담화기술은 20세기 50연대부터 시작되였는데 목전 가장 성숙된 담화방법은 증류법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3-25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1)
    진시황릉 병마용 진시황릉 병마용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섬서성 임동현 경내 함의: 진시황릉 병마용은 세계 8대 기적임 진시황릉은 중국 역사상 제일 첫 황제인 진시황의 능묘로 기원 전 248년부터 기원전 208년에 수건한 것이다. 이 거대한 황제릉이 기타의 능묘와 가장 큰 다른 점이라면 그것은 방대한 지하군대를 갖고 있었으며 이로하여 세계 8대기적으로 된 진시황를 병마용이다. 여기의 군대는 사병과 말과 전차 등이 있는데 도자기모형으로 조성되었으므로 실물의 크기가 같았고 그것들은 순장품으로 지하황릉을 지키는 것이었다. 규모가 방대하고 기세가 당당하기로 이름있는 진시황릉 병마용이다. 지하황궁 진시황의 황릉은 설계와 수건에 있어서 흡사 진시황이 생전에 살던 궁전을 방불케 한다. 전반 능원은 두 겹의 담장으로 둘러 쌓이었는데 하나의 “回”자형을 이루며 황성과 궁성을 상징한다. 능원의 핵심은 지궁(地宮)이며 기타의 건축물은 담장, 배장갱(陪葬坑) 등으로 모두 지궁을 둘러싸고 건축되었다. “사기”에서 진시황릉의 지궁을 묘사한데 따르면 지궁의 천정에는 해와 달 그리고 별무리가 그려져 있었고 또한 인조대지가 있었는데 대지에는 산봉과 하류가 흐르기도 했다. 하류는 수은으로 만들어졌는데 반짝반짝 빛을 발산해 매우 아름답다. 지하군대 고고학자들이 발견한데 따르면 진시황릉의 병마용갱은 세 곳에 있는데 “品”자형으로 배열, 도합 8000건의 도용(陶俑)이 출토되었고 전차 100여대와 수만건의 실물병기 등 문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 중 1호갱은 “우군”으로 도용과 도자기 말이 6000건이 되었고 2호갱은 “좌군”으로 보병, 기병, 전차 등 3개 병종으로 혼합편성된 진을 이루어 이 병마용갱의 “정규군소재지”었으며 3호 갱은 무사용(武士俑), 전차, 도자기말로 지하대군을 통솔하던 지휘부였다. 이 군대의 진영은 그야말로 진나라 군대 편성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3-25
  • [연변FC 특집] 성공과 실패의 몸부림속에서
    한국용병 박순배 - 제비마냥 날랜 반도사나이 지난 5월 18일 대련만달팀과의 경기에서 결정적인 골을 냈던 오동팀의 한국적 박순배 선수가 갑A리그의 휴전기간에 잠간 사라졌다가 다시 연변오동팀 선수로 중국축구갑A시즌 제2단계의 경기에 재출전했다. 날랜 제비마냥 잔디밭 전체를 주름잡으며 수시로 상대방의 문전을 위협하는 반도사나이ㅡ 축구팬들은 그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환성을 올렸다. 올해 30살에 나는 박순배 선수가 축구생애를 시작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시절, 그 때로부터 그는 중학교,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쳐오면서 줄곧 학교축구팀 선수로 활약했고 한국에서도 인정해주는 체육최고학부였던 인천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후 부터는 할레루야, 포항스릴로스 등 실업팀과 프로팀들을 드나들면서 맹활약했었다. 그 기간 그가 넣은 골만 해도 50개가 실히 된다고 한다. 이는 중앙공격수도 아닌 미드필더 선수라고 할 때 결코 적은 골개수라 할 수 없다. 박순배 선수는 오래 전부터 중국갑A무대에 조선족 위주의 축구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막상 오고 보니 참말 기쁘다면서 같은 민족이어서 언어와 음식습관이 통하고 선수들이 친 형제처럼 뜨겁게 대해 주기에 제 집에 온듯한 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연변팀에서 원하기만 하면 다른 팀에서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연변팀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또 중국 갑A리그에 뛰어든 한국적 선수들 가운데서 자기보다 우수한 선수들이 있을테지만 경기장에서만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맞붙어 연변팀의 한몫을 맡기도 하고 자아가치도 실현할 잡도리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에 와서 볼을 차는 기분이 어떻느냐”는 물음에 박순배 선수는 관중이 많고 축구선수에 대한 대우가 좋으며 특히 경기장 잔디가 볼차기에 제격인 반면 축구계의 부정기풍, 심판원의 “검은 호르래기”에 대해서는 참 어처구니가 없다고 실토했다. 하지만 팀 전체가 똘똘 뭉쳐 강한 정신력으로 경기를 치른다면 강팀이 아니라 강팀의 할배가 와도 무섭지 않다고 했다. 박순배 선수는 이미 결혼하여 2살짜리 아들까지 있는 몸이다. 얼마전 연변축구구락부에서 아파트를 내주긴 했지만 여기에서 살림을 차릴 타산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8월경에 아내가 와서 맘에 든다고 해야 결정할 일이라고 했다. 앞으로 얼마동안이나 볼을 찰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지만 아직 체능이 별문제이기에 이제 5년은 문제없을 거라며 박순배 선수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또한 그는 그 것을 위해 술담배를 절제하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스포츠》 1998년 6월 27일 동료들이 보는 인기스타 – 고종훈 연변오동팀 하프진의 고종훈 선수라면 연변은 물론 전국의 축구팬들이 다 알아주는 유명한 인기스타이다. 전반 경기장의 공방절주에 따라 미드필더선을 통제하면서 수시로 오동팀 공격수한테 슈팅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팀의 노장 ㅡ 고종훈, 허나 선수를 떠나서 경기장밖의 인간 고종훈을 아는 이는 별반 없을 것이다 일전 그것을 파헤쳐 보려고 고종훈 선수의 몇몇 친구들을 만나보았다. 1965년 고씨가문 3남 1녀중 막내로 태어난 고종훈은 어릴 적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늘 어른들의 총애를 받군 했다. 특히 축구에 장끼가 있는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축구에 각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고종훈이 축구생애를 시작한 것은 소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그것을 계기로 늘 학교팀의 미드필더 선수로 활약한 그가 볼을 어떻게 찼는가 하는 것은 두말이면 잔소리었다. 하지만 그는 볼을 잘 찬다 하여 뽐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는 늘 친구들과 함께 강변에 나가 고기잡이도 하고 씨름도 하군 하면서 어울리군 했다. 씨름을 할라치면 당시 고종훈의 상대가 없을만큼 그는 씨름에도 장끼가 있었다. 그만큼 고종훈은 어릴 적부터 덩치와 기운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기운이 세다고 하여 약자를 업신여긴 적이 없었다. 아니 늘 약자들을 돌봐줬다고 해야 더 적절했다. 한번은 서로 한동네에서 사는 한 애가 힘을 턱대고 늘 다른 애의 먹을 것이나 연필같은 것을 빼앗아내는 것을 고종훈이 발견하게 되였다. 이에 고종훈은 그 애를 찾아가서 “너 힘으면 어디 날 한번 건드려봐라. 작은 애들과 으시대는 것도 남자냐?!” 하고 꾸짖으면서 그 애더러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했다. 용정1중을 졸업한 고종훈이 길림성청년팀에 선발돼 연길에 와서 볼을 차기 시작한 것은 1982년부터였다. 그 때로부터 전업선수로 된 고종훈은 그토록 고강도 훈련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일요일마다 집으로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한 집으로 갈 적마다 부모한테 효도하지 못해 죄송스럽다면서 바깥일이고 부엌일이고 닥치는대로 했다. 그리고 달마다 얼마 안되는 노임을 잘라서는 가난한 부모님한테 섬기군 했다. 어릴 적부터 술담배와 담을 쌓은 고종훈은 워낙 식당같은 곳으로 다니기 썩 달가와하지 않는 성미었다. 또한 웬간하면 친구들이 식당놀이를 하자고 손을 잡아 끌어도 가볍게 거절하군 했다. 허나 일단 식당으로 가기만 하면 술을 입에 대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함께 해줄뿐만 아니라 늘 자기가 값을 치르군 했다. 고종훈은 자기를 배워준 스승한테도 등한시하는 성미가 아니었다. 1985년 그는 처음으로 국가청년팀 일원으로 출국하여 세계청년축구경기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때 국가청년팀은 8강안에 드는 훌륭한 전과를 올리게 되었는데 고종훈이 직접 넣은 골을 없었지만 그가 패스하여 고홍파가 넣은 골이 많았음) 돌아온 후 고종훈은 담임교원들을 모셔 오고는 자기의 오늘이 있게 된데는 전적으로 선생님들의 덕분이라면서 술을 따라 올렸으며 그 후에도 선생님들의 곤란에 대해서는 될수록 해결해드리느라 무척 애를 써주군 했다. 친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었다. 1991년 한친구가 가옥사용증 수속을 할 때 돈이 없어 안달아하자 선뜻이 돈을 대주었고 1993년에도 한 친구가 상점을 차릴 때 자금이 딸려하자 선뜻이 자기의 돈을 선대해 주었다. 그것은 고종훈한테 그 무슨 돈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 때 그의 봉급이래야 고장 수백위안일 따름이었다. 또한 고종훈은 매번 홈장경기 때마다 돈으로 수십장의 입장권을 사군 한다. 한두번도 아니고 1년에 10차씩 그러노라면 신경질도 날 일이지만 그는 항상 “나를 믿고 그러는데 고마운 일이지”하며 시무룩히 웃어보이군 했다. 1994년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한 고종훈은 지금 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교원인 아내 김향화씨와 아들 고준익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그는 양측 부모한테 효도하는 한편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고 있다. 매번 원정경기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는 아내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한편 꼭꼭 거리쇼핑이거나 가족외식을 마련하는 것으로 그 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군 했다. 이에 아내 김향화씨 역시 남편의 사랑에 무척 감격해하면서 남편이 훈련할 때마다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자기의 마음을 표달하군 했다. 고종훈은 축구생애가 비교적 긴 사나이다. 그 비결이 첫째, 술담배와 인연이 없는 것이고 둘째, 가리는 음식이 없으며 셋째, 몸관리를 잘한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그는 몸관리에 대해 대단히 신경을 쓰는 편이다. 하여 고종훈이 경기에서 상해 치료받은 적은 있어도 병으로 아파 치료받은 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 고종훈 강하고도 무뚝뚝한 사나이 ㅡ 허나 그 속에는 인정과 후더움이 흐르는 인간이다. 하다면 우리의 매개 선수들은 인간 고종훈한테서 무엇부터 배워야 할까? 권영동 등 구술 《스포츠》 1998년 8월 10일 황동춘- 안해와 함께 려행을 하던 나날 지난 10월 26일, 올해의 갑A보존을 실현하고 비행기에 앉아 심양으로부터 대본영인 연길로 돌아오는 오동팀 선수들은 저마다 솟구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번 휴전기간에 부모와 함께 있으면서 효도하겠다는 선수, 해마다 기다림에 지친 아내를 기쁘게 해주겠다는 선수 … 순간 기창에 기대어 창밖을 주시하던 황동춘 선수도 무등 가슴이 설레이었다. 아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자신이 아내한테 너무 등한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연애시절에 다정하게 유보도 산책을 한 적도 한번 없고 결혼 후에도 매달 노임이나 갔다 주면서 집을 여관처럼 여겼던 자신, 그는 점점 머리가 뜨거워났다. (그렇게 갖고 싶어하던 아기도 못갖게 하구. 미란이 너무 너무 미안해. 이번 휴전기간에 꼭 잘해줄테야) …… 집으로 돌아온 황동춘은 널직한 집안을 혼자 지키는 아내를 정색해서 바라봤다. 이에 의아쩍어 어쩔바를 모르는 아내 안미란양. “당신 왜 이러죠? 혹시 기분잡치는 일이라도…” “아니, 당신이 너무 불쌍해서 그래. 이번 기회에 우리 한번 남방여행이나 좀 해볼까? 려행코스는 광주 ㅡ 주해 ㅡ 심천 ㅡ 대련 이렇게 정하고 말이야.” “어머나, 당신 그게 정말인가요? 아이참, 좋아라. 해가 서쪽에 뜨겠네요.” 안미란양은 기쁜 나머지 어린애처럼 퐁퐁 뜀질까지 했다. 11월 1일, 연길에서 비행기에 오른 황동춘/안미란 부부는 다시 북경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광주로 향했다. 한없이 맑고 푸른 하늘, 비행기밑으로 밀려 오고 밀려 가는 솜뭉치같은 구름떼들… “여보, 저 구름을 좀 봐요. 마치 솜을 한벌 펴놓은 것 같군요. 뛰어내려도 상할 것 같지 않군요.” “허허허… 그럼 한번 뛰어 내려 보시지.” “나쁜 사람, 왜 저만 뛰어 내리겠어요. 뛰어 내리면 함께 목을 끌어안고 뛰어 내려야죠.” 광주까지의 두시간 동안 안미란양은 쉴사이 없이 재잘거렸다. 광주에 도착하자 모든 것이 이곳 북방과는 딴 모습이었다. 길가의 화원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난 그대로였고 겨울을 모르는 사람들은 울긋 불긋한 여름옷 차림으로 상가와 공원으로 드나들었다. 아빠엄마의 손목에 끌리어 아장아장 걸어가는 애들을 볼 때마다 각별히 귀여워하는 안미란양은 광주에 가서도 마찬가지었다. “여보, 저 애를 봐요. 얼마나 기특해요.” “애가 그렇게 부러워? 우리도 아들을 낳아 나같은 축구선수로 키워볼까?” “쳇, 또 저처럼 색시가 생과부노릇을 하라구요?!” 하지만 그녀의 말속에는 조금도 악의가 담겨 있지를 아니했다. 이렇게 그들 부부는 광주, 주애와 심천에서 수많은 행복의 발자취를 남겼다. 주강의 유람선위에서, 주해의 원명원 모형 건물앞에서 심선의 해수욕장과 민속촌휴가지에서… 11월 8일, 그들 부부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대련으로 왔다. 대련의 발해명주호텔에서 투숙등록을 할 때 황동춘의 신분증을 보던 호텔 카운터의 아가씨는 황동춘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연변오동팀이 황동춘선수가 아닌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그래요? 황동춘, 얘들아, 이 분이 바로 연변에서 온 축구스타 황동춘씨란다.” 그 소리가 떨어지기 바쁘게 몰려드는 호텔홀의 소남소녀들, 싸인해 달라는 이들과 기념사진을 남기자는 이들로 하여 황동춘은 한동안 땀이 날 지경이었다. 한편 축구선수로 된 긍지로 하여 가슴이 뿌듯한 순간이기도 했다. 대련에서 그들 부부는 또 연변팀의 대련적 선수인 오영군과 그의 부친도 만났다. “동춘형, 이전엔 대련에 왔어도 경기 때문에 언제 한번 시름놓고 놀아본 적이 있었소? 이번에 잘됐소. 이 아우가 가이드로 나설테니 우리 한번 통쾌하게 놀아 보기오.” “영군동생, 그 성의가 고맙네만 이제 휴가일도 며칠 남지 않았소. 일찍 집으로 가야 하겠으니 데 폐를 끼치고 싶지 않소.” 이 말에 안미란양도 한마도 덧붙였다. “그래요. 동춘씬 아직 부모님도 찾아뵙지 못했어요. 부모님들이 얼마나 기다리겠어요. 이해하여 주세요.” “그래그래, 사람이란 아무리 잘 되어도 부모를 잊어서는 안되지” 머리를 끄덕이며 하시는 오영군 부친의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오영군의 부친은 손수 차를 몰고 그들 부부를 공항까지 실어다 주었다. 황동춘/안미란양을 실은 보잉 737비행기는 대련공항에서 치솟더니 기수를 북쪽으로 돌렸다. 10여일간의 즐거운 여행, 허나 그 것으로 아내 안미란양에 대한 황동춘의 사랑을 담기에는 너무나도 판부족이었다. 이제 언제면 이들 부부한테 또 이런 기회가 차례질까? 그것은 아마 황동춘의 2세가 태어난 후에나 봐야 할 일일 것 같다. 《스포츠》 1998년 11월 16일 오동팀 신진 김청 -고향사람들의 축복에 목메여 지난 10월 28일 오후 어슬녘의 화룡시 동성진 홍성촌 제5촌민소조 마을이다. 마가을의 땅거미는 한해 농사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선 마을에 조용히 찾아들었다. 집집의 굴뚝들에서 저녁짓는 연기가 몰몰 피어 올랐고 하룻일에 지친 남정들은 밥상에 마주 앉아 반주술을 기울리고 있었다. 바로 이 때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집집들을 누비며 떠들썩해댔다. “김청형이 돌아 왔어요.” “오동팀에서 볼을 차던 김청형이 돌아 왔어요.” …… 뭐, 김청이 돌아왔다구?! 사람들은 수저를 들다말고 김청네 집으로 찾아들었다. 김청의 형이며 촌민소조장 김호를 첫 사람으로 김청의 친구들과 농민 축구팬들 그리고 동네노인들도 몇분 잘 되었다. “얘, 김청아, 온다고 미리 알렸더면 우리가 닭이라도 잡아놓고 기다렸을게 아니야!” “이것 봐라, 우리 촌에 영웅이 나타났는데 어찌 째째하게 닭만 잡겠어? 돼지나 소라도 잡아야지 안그래?!” “그래그래 그렇지, 몇년 전에 보성촌의 김광주가 소문놓더니 지금은 우리 홍성촌의 김청이 또 소문을 놓다니. 우리 동성진은 축구인재가 나오는 고장인 모양이구려.” “글쌔 오동팀에서 경기에 제일 많이 참가한 선수가 이광호이구 그 다음엔 너 김청이더구나. 장하다 장해!” 이렇게 김청을 붙안고 반갑다고 찧고 밯고하던 사람들은 술상에 마주 앉아 술이 한순배 돌아가자 이번에는 축구화제로 넘어갔다. 오동팀이 입은 피해로부터 시작하여 홈장에서 북경국안팀을 2 : 0으로 이긴 것이 제일 통쾌하더라는둥, 오동팀은 왜 강팀하고는 약하지 않고 약팀하고는 강하지 못하냐 하는 질문공세, 그리고 고훈감독, 고종훈, 블라이마, 천학봉… 사람들은 궁금해하는 점이 많기도 했다. 또한 촌민들의 축구관람수준도 이전의 정도가 아니었다. 대련만달팀에 대하여, 한국적감독 차범근과 이장수에 관하여 사람들은 자기나름대로 평가를 했다. “참, 8.1팀은 중국에서 유일한 해방군팀인데 이번에 강급하게 되니 진짜 아쉽더라. 좀 봐주지를 않구 쯧쯧…” “뭐 아쉬울 것 있어? 축구가 발전하자면 그렇게 돼야 해. 자꾸 양보볼, 인정볼을 차니까 ‘검은 호르래기’가 나타나구, 축구팬들은 의견이 많을게 아니야. 그리고 대련, 상해, 북경이 해마다 1, 2, 3등을 하는 것도 어딘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돼 있다구.” …… 낮에 농사일에 지쳤으련만 밤을 새워가며 축구화제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 그들을 어찌 한낱 땅파는 농민으로만 보랴. 또한 김청이 짬을 타서 잠간씩 집에 다녀올 때에도 밭의 일손을 놓고 달려와 손을 잡아주던 그토록 인정많던 고향의 촌민들이었다. 그래서 그날도 그들한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김청은 어슬녁에 마을로 들어섰건만… 김청은 눈시울이 축축해나고 가슴이 뭉클했다. 고향사람들의 인정, 고향사람들의 기대ㅡ 그 시각 김청은 오직 연변팀을 위해 축구의 정상에 톺아오르는 길만이 고향사람들의 인정과 기대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다지고 또 다졌다. 《스포츠》 1998년 11월 16일 왕광위는 장담한다- 오동팀미래의 장벽 될터 연변오동팀 주전선수들가운데서 가장 신체소질이 좋은 신진선수를 꼽는다면 아마 수비진의 왕광위란 한족선수를 꼽아야 할 것이다. 신장 1.79미터, 체중 74킬로그람 거기에 용수철에 튕길듯한 순발력과 질풍같이 내달리는 플레이 그래서 고훈 감독도 그렇고 수많은 축구팬들도 그렇고 다들 그를 미래 연변팀수비진의 가장 이상적인 적임자로 꼽고 있다. 1978년 왕광위 선수는 길림성 장춘시에서 출생, 어릴 때 그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는 축구가 아니라 의사나 공정사같은 직업이었다. 그만큼 왕광위는 문화과 학습성적이 뛰어나 늘 전 교 우승으로 비범한 학습재주를 과시했다. 헌데 녀석이 이웃집 조선족 아이와 놀면서부터 축구에 재미를 붙였고 또 학교축구팀 선수로까지 선발될 줄이야. 아버지는 자식의 마음을 돌려세우려고 무등 애를 썼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더구나 학교 체육교원인 이종기(조선족)선생이 찾아와서 왕광위가 축구스타로서의 싹수가 보이니 부모들이 그의 뒤를 잘 밀어 달라고까지 청탁하자 아버지로서도 더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종기 선생의 예측은 틀림이 없었다. 왕광위는 나이 14살이었던 초중 2학년 때 과연 파격적으로 직업팀인 북경부대 축구팀 선수로 선발되었다. 북경부대 축구팀에서 그는 또 염승필(조선족) 감독의 눈에 들었다. 염승필 감독은 장춘에서 온 이 애숭이선수를 엄하면서도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어 그가 축구스타로 되는 길에서의 훌륭한 토대를 닦아 주었다. 그러던 왕광위 선수가 염승필감독의 소개로 연변축구팀으로 오게 된 것은 1995년초, 나이가 어린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한동안 잔디밭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가 김청, 천학봉 등 선수들과 함께 1팀 주전선수로 부상한 것은 지난해부터였다. 올해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고훈 감독은 원래 공격선의 선수였던 왕광위를 자주 수비선에 배치, 그것은 황경량 선수의 컨디션이 내려간 원인도 있겠지만 수비선수로서의 왕광위의 싹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가 왕광위 선수의 진보는 매우 빨랐다. 그는 수비선의 황경량 선수를 더없이 부러워하고 탄복하고 존경하며 따르는 편이었다. 그는 황경량 선수의 경험과 박투정신을 자신의 속도, 신체소질과 연령의 우세에 맞게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출중한 수비수로 자리를 굳힐 야심을 품고 밤에도 녹화테이프를 풀어놓고 황경량 선수의 대인마크술을 연구했다고 한다. 왕광위 선수는 아직 젊다. 잔디밭에서 올린 혁혁한 전과도 없고 경험과 의식 등 면에서도 아직은 부족점이 많다. 하지만 그는 전국에서도 대항력과 응집력이 제일 강하다는 연변팀에 몸을 담고 있는 한 어젠가는 김광주처럼, 황경량처럼 전국에 이름을 날릴 날이 있을 것이라고 잠담한다. 《스포츠》 1998년 9월 14일 “시련은 있어도 동요는 없다” - 연변축구팀 중추 동량 현춘호, 한송봉 선수 성명: 현춘호 1975년 10월 1일 화룡시 용문 태생 키 : 1.77미터 선수번호 : 6번 이 글에서의 주인공인 현춘호와 한송봉은 모두 한시기 시련을 겪던 선수들이다. 그 중 현춘호는 절강녹성구단에 있을 때 “가짜볼”혐의를 받아 참전권리를 박탈당하는 치욕으로 한시기 잔디밭을 떠났던 선수였다. 타향땅 설음이란 바로 현춘호 자신이 잘 알고 있던 바이다. “축구를 떠났던 나날의 생활이란 말 그대로 괴롭고 지긋지긋하던 하루하루였다. 안정하고 생활할 취미를 찾지 못했다. 장사를 해본다고 했으나 뜻대로 안됐고 술도 많이 마시었다. 아내를 괴롭히기도 했다. 다행히도 올들어 고훈 감독이 손잡아 줬기에 고맙기 그지없다. 나는 고향정이 뭔지 잘 아는 사람이다. 이제 선수생애가 몇해나 되겠는지 연변축구를 위해서 모든 힘을 바치고 싶다.” 올들어 현춘호는 세기팀의 미드필더 조직자로 활약했다. 그는 이전의 고종훈처럼 전반 경기의 공방절주를 조절하는 작용을 했다. 그한테 가장 인상깊은 경기라면 남북 8강전에서의 대 운남여강팀전이었다. 그 때 그는 키가 큰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효과적으로 공방절주를 통제, 특히 제2회합전에서는 경기초반에 상대방의 공세를 기본상 미드필더선에서 견제했으며 고훈 감독의 진공신호가 오르자 미드필더선을 중심으로 전반 공격을 조직하여 팀이 다득점을 함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새해엔 갑급팀들과 맞전을 하게 됐으니 유리한 점도 있고 불리한 점도 있다. 유리한 점이라면 내가 갑급행렬의 많은 선수들의 특점과 허점을 알고 있는 것이고 불리한 점이라면 필경 갑급권인만큼 을급팀과는 실력상 비교할 수가 없이 강하다는 점이다. 대문에 지금부터 신들메를 단단히 조이고 훈련에 땀동이를 쏟으련다. 갑급리그에서 발을 잘 붙이는데는 나의 미드필더 중추역할도 중요하다고 할 때 슬며시 어깨의 짐이 무거워난다.” 이름 : 한송붕 1982년 5월 28일 생 키 : 1.77미터 체중 : 65킬로그람 선수번호 : 8번 이 글의 다른 한 주인공인 한송봉 선수 역시 시련이 있기는 마찬가지었다. 우선 그는 부모가 다 정리실업을 당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어렵게 축구선수로 커온터였다. 부모가 힘들게 번 돈으로 축구를 전공하던 나날, 남들은 용돈 1000위안씩 갖고 전지훈련을 떠났지만 그는 단돈 100위안을 갖고 근 두달씩 객지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의지를 더욱 굳세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웬간한 시련은 그한테 동요로 될 수가 없었다. 지난해 연변팀이 갑급진출에 실패했을 때 팀의 부분적 주력들은 이적을 신청했으나 그만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연변축구가 언젠가는 꼭 갑급진출에 성공한다고 믿었으며 자기 자신 역시 돈보다는 우선 연변축구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고 느꼈던 터였다. “팀의 주력이긴 했지만 나한테도 부족점이 많았다. 속도가 빠르지 못하고 몸놀림도 영활하지 못했다. 올들어 나의 특장을 발굴하여 부족점을 미봉하리라 맘먹었다. 그래서 고훈 감독의 지도하에 중거리슈팅에 품을 많이 넣었는데 그것이 이상적으로 잘됐다.” 한송봉은 머리로 볼을 차는 선수였다. 그는 자기가 중거리슈팅에 능하다고 해서 무작정 중거리슈팅을 날리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관건경기인 남북 8강전의 대 운남여강팀과의 1회전 때 그는 자기가 날리는 프리킥을 그대로 문대에 향해 슈팅한 것이 아니라 조금 뒤에 처져있는 김청한테 살짝 패스해줬다. 자기의 앞에 여강팀 선수들이 울바자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김청 역시 그의 생각과 같았고 눈치도 빨랐다. 그가 넘겨준 공을 김청이 슈팅을 날리는 순간 ㅡ 공은 상대방 문대안에 들어가 그대로 박혔다. 상대방이 거둬낼 수 없는 결정골이었고 2회전 승리를 위해서도 유리한 토대를 닦아놓았다. 지금 한송봉선수는 명년도 갑급전을 위한 훈련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갑급팀 경기에 들어선 우리가 너무나도 경험이 없다. 단지 실력이 한차원 위이고 외적선수까지 참전한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 이런한 상황에서 현춘호 선수가 본보기이다. 그한테 갑급경기의 경험이 많으니 말이다. 그 밖에 그는 나이가 많지만 젊은 선수들에 비해 더욱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미드필더 통제를 잘하고 골도 잘 넣는다. 패스가 정확하고 실수가 적다. 연변팀에 있어서 현춘호 선수의 존재는 너무나도 행운이다. 어린 선수들한테 현춘호같은 선수가 많이 나왔으면 한다.” 기자가 명년에도 계속 주장을 맡을 수 있는가고 물었을 때 그는 주장을 맡든 맡지 않든간에 주력으로서 최선을 다 하련다고 하면서 현춘호, 김청, 천학봉과 정림국 등 선수들은 주장이 아니지만 주장 이상으로 책임감이 높은 팀의 공신들이라고 피로했다. 가정상황을 보면 한송봉은 아버지 한창훈씨와 어머니 태경애씨의 아들로서 아래로 여동생 한명이 있으며 과외취미로는 음악감상과 독서이고 성격은 비교적 침착한 편이다. 《스포츠》 2004년 12월 13일 (다음기 계속) 김철균 기자
    • 스포츠
    2015-03-25
  • 배우 한채영, 中영화 캐스팅…여명과 호흡
    배우 한채영이 중국영화<불속지객(불청객)>로 중국스크린에 첫 진출한다. 한채영은 중국영화<불속지객>에 캐스팅되어 중국 배우 여명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고 중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영화<불속지객>은 유명한 안병기 감독 작품의 공포영화로 이미 중국에서 촬영이 시작되어 현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안병기 감독의 대표작은 <분신사바>시리즈로 많은 중국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또한 <불속지객>의 두 주연 홍콩 4대 천왕 출신 여명과 다양한 중국드라마에 출연하여 중국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한채영이 처음으로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되어 어떤 케미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韩国演员韩彩英将搭档黎明出演中国电影《不速之客》,该影片已经开机。《不速之客》是韩彩英出演的第一部中国电影,同时与黎明的合作将擦出怎样的火花备受期待。 《不速之客》由拍摄恐怖题材电影著称的韩国安兵基导演执导,中国观众熟知的《笔仙》就是出自安兵基导演之手。影片讲述了某IT公司总经理郑凯,由于下属一个无法预料的失误,使得公司在经济上蒙受了重大损失,就在郑凯失意的同时偶遇一位神秘司机,同时遭遇了一系列离奇的事件,一段噩梦般的经历由此开启。 <中國網>
    • 연예·방송
    2015-03-25
  • 중국 CCTV의 섹시한 수영복장 논쟁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올해 1월 중국의 중앙텔레비전 방송국(CCTV) 의 한 프로가 7일 계획을 펴냈다. 이 방송프로는 수영을 좀 알지만 전혀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수중 발레)를 접촉해보지 못한 보통여성들을 소집해 7일간 비밀적인 내부 훈련을 한 후 한 차례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연기를 진행하게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점은 이 7일간에 수중 발레를 제대로 배워낼지는 뒤로 하고 이 중앙TV의 프로그램 연기자 노출폭이 너무도 큰데 있었다. 이 프로그램에 관련한 사이트는 심지어 공개적으로 “(신체 노출이 과분한 문제를 가지고) 두목(책임자)과 말해보니 두목이 ‘노(NO!)’,베어버리지 말라고 하기에 베어버리지 않았다!”는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해 많은 누리꾼들은 감독 관리부문은 “중앙TV가 이처럼 노출된 여성들의 프로그램도 방송하는데 무엇 때문에 후난성의 ‘우메이냥(武媚娘)’극은 자그마한 노출화면도 모두 베어버리게 했는가?“고 질문했다. “우메이냥” 즉 “우메이냥 전기(武媚娘传奇)”이란 중국 후난 위성TV(湖南卫视)가 지난해 말부터 방송한 사극 드라마로서 중국 각 TV방송국중 최고 시청기록을 창조했다. 그러나 이 드라마 연기에 참가한 판빙빙(范冰冰) 등 스타들이 극중에서 집단적으로 입은 낮은 가슴팍 복장이 문제가 되어 감독기구의 방송중지령을 받았다. 그러다가 후난 TV가 극중 가슴팍 노출이 “과분한” 화면을 정리하고 나서 올해 1월 1일부터 계속 방송을 하게 됐다. “우메이냥 전기”는 주로 고향에서의 그녀의 성장과정부터 14세에 황궁에 선정되어 들어온 후의 황궁내 권력투쟁을 묘사했다. 이전의 측천무후 극과 다른 점은 판빙빙이 연기한 무측천은 감정이야기를 더욱 많이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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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뉴스
    • 아시아
    2015-03-25
  • 독일 여객기 추락사고… 탑승자 150명 전부 조난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바르셀로나에서 독일 뒤셀도르프로 향하던 'Germanwings' 항공사 9595 라인이 프랑스 남부 바르셀로네트 시지역 근교에서 레이더망에서 사라지며 추락한 사고가 발생해 탑승자 150명이 전부 조난을 당했다. 현재 사고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사전 조사에 의하면 기내 승객 144명과 승무원 6명 총 150명이 탑승했으며 이 중에는 영아 2명과 학생 1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추락한 항공기 파편들은 헬기 2대에 의해 확인됐다. 독일 저먼윙스 항공회사 윈케르만 총 지배인은 여객기 추락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며 이 여객기는 2013년 여름에 계획대로 보수를 마쳤고 기장도 루프트한자항공과 저먼윙스에서 이미 10년간 근무하고 6천여시간의 비행경험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기내 전원이 전부 조난당했을 것이라면서 여객기가 편벽한 산간지역에 추락했기때문에 아직 지면인원이 피해를 입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플라이트어웨어 서비스 조사자료에 따르면 비행 마지막 단계에서 약 4만(12km)에서 2만 5천 피트(7.6 km)까지 급격하게 고도를 잃으면서 이번 사고가 발생했다. 이외, 현지 언론에서는 승무원이 추락전 재난 신호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스페인 정부는 이미 위기처리팀을 구성했으며 프랑스와 독일정부와 이 사고와 관련해 공동조사를 전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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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15-03-25
  • 中,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에 아베 초청 확인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중국 외교부 화춘잉 대변인은 3월 24일 가진 정례브리핑에서 중국정부가 이제 9월에 진행하는 항일전쟁승리 70주년 기념행사에 일본의 아베총리를 초청했다는데 확인해 달라는 기자의 제문에 “중국정부는 이미 여러 차례 9월에 거행하는 중국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 관련 사항들을 소개했다. 중국정부는 모든 관련 국가 지도자들과 국제기구에 초청서를 보냈다”고 답했다. 이에 앞서 3월 8일에 있은 12기 전국인대 3차 회의 기자회견에서 중국 외교부 왕이 부장은 올해는 중국인민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이 되는 해이며 당년 세계 반파쇼전쟁의 동방 주요 전역이었던 중국이 기타 국가들의 작법을 참조하여 열병식을 포함한 기념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일이라며 바로 역사를 명기하고 선렬들을 기리며 평화를 귀중히 여기고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데 그 취지를 두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중국정부는 모든 관련 국가 지도자들과 국제기구에 초청서를 보낼 것이며 그 누구든 성심으로 온다면 우리는 모두 환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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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
    2015-03-25
  • 러시아, 미국의 한국 “사드” 배치에 경고
    ▲ 자료사진: “사드” 미사일방어시스템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프랑스 에이에프피(法新社) 통신의 24일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는 24일, 한국에 탄도미사일 방어시스템 “사드”를 배치하지 말 것을 미국에 경고, 이 조치는 지역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보도에 따르면 미국정부는 한국에 “사드” 탄도미사일 방어시스템을 배치하는 것은 북한 군사도발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24일 발표한 성명에서 미국의 조치는 외계의 우려를 자아낼 뿐이라며 미국은 전 세계에 미사일방어시스템 배치를 확산할 것으로 국제안전에 훼멸성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명은 또 안전정세가 극히 복잡한 한반도지역에서 “사드” 미사일방어시스템의 배치는 동북아지역의 군비경쟁을 촉발하고 한반도 핵문제의 해결을 더욱 복잡하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프랑스 에이에프피는 또 중국은 이미 미국의 “사드” 한국 배치는 평화와 지역의 안정을 파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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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2015-03-25
  • [김혁 칼럼] 춘사(春史) 나운규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1 북간도 명동학교의 수업시간. 모두다 산수풀이에 열중하고있는데 맨 뒤에서 키득키득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수학선생이 이상하여 슬그머니 다가와 보니 맨 뒤에 앉은 학생이 책뒤에 거울을 숨겨놓고 비춰보며 벙긋벙긋 웃음을 웃고 있다. 그 모습이 한심하여 선생은 학교의 김약연교장에게 이 일을 고해바쳤다. 이에 김교장은 웃음으로 넘기며 말했다. “그 녀석이 장차 뭔가 되기는 될 거야”. 수학시간에 표정 연기에 열중하던 명동학교의 그 아이. 교장선생이 뭔가는 될 듯 하다고 “될성부른 떡잎”으로 예견한 그 아이가 바로 그후 불멸의 명화 “아리랑”을 제작한 한국영화계의 선두주자 나운규이다. 2 춘사 나운규는 1902년 10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여났다. 한말의 풍운기에 태여난 나운규는 일제의 발길에 짓밟혀가는 한반도의 북녘 끝 회령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나운규의 아버지 나형권은 구 한국군 부교(副校)로 지내다 군대가 해산당하자 집으로 돌아와 독학으로 한의학을 공부하여 한의사로 전신(轉身), 한약방을 하면서 후학들을 키웠다. 그는 아들 셋과 딸 셋 여섯 남매를 두었는 데 그중 셋째가 나운규었다. 나운규가 회령에서 신흥학교에 다니던 1915년 무렵은 개화기 신문화 류입의 한 물결인 신파극(新派劇) 운동이 한창 번져가고 있을때였다. 때때로 회령 읍내에도 이따금씩 신파극단이 찾아와 순회 공연을 했는데 나운규는 공연을 빠침없이 찾아 보며 이 신파극단에 흥미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배우들의 과장된 몸짓과 말투를 며칠씩 두고 흉내를 냈다. 나운규의 연기 재질은 아마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1916년 8월, 14살의 나운규는 윤봉춘 등 죽이 맞는 친구들과 더불어 회령 읍내 유일의 극장 만년좌에서 최초의 자작극 “2전 5리(二錢五厘)”를 공연하려했다. 공연허가 신청을 받은 일본 헌병대에서는 미성년자들이라고 집에 가서 부친의 도장을 받아 오라고 퇴짜를 놓았다. 이에 나운규는 아버지의 도장을 훔쳐 찍고 다른 허가를 받아냈다. 그런 다음 가두 선전을 한답시고 울긋불긋한 차림의 무대 분장을 하고 회령 읍내 번화가를 누비며 퍼레이드를 벌렸다. 우여곡절 끝에 연극은 막을 올렸다. 한창 신나게 공연중인데 갑자기 입구 쪽이 시끄러워지더니 나운규와 동인의 부형들이 달려 들었다. 집안 망신시키는 놈들이라며 매타작을 퍼부으니 극장 안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연극이고 뭐고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나운규 대본 연출 주연의 최초의 자작극 공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운규는 15살에 마음에도 없이 결혼한 녀인과의 사이에서 이듬해 아들 종익을 낳았고 19세가 되던 해에는 딸 행자를 낳았다. 예고도 없이 학교가던 길에 붙잡혀 말잔등에 태워져 강제로 결혼식을 올린 혼인이 싫어져 나운규는 무단 가출을 했다. 고향을 떠난 나운규가 직행한 곳은 북간도였다. 1918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있는 명동학교에 입학했다. 북간도에서의 나운규의 행적은 동인들에 의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북간도에서 나운규는 조선인들이 무은 간도국민회에 가입하였다. 북간도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을 고향인 회령으로 배달하는 책임을 맡고 한 달에 몇 번씩 두만강을 은밀히 건너곤 했다. 그러다 도판부사건(圖判部事件)이라 불리는 사건에 휘말려 든다. 도판부 사건이라는 것은 북간도에 있던 반일독립군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회령에 있던 경찰서와 수비대를 습격한 사건이다. 그 때에 나운규와 윤봉춘은 일제의 수비부대 간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과 청진 사이에 있는 무산령 터널을 폭파하고 전신, 전화 시설을 끊는 일을 맡았다. 1919년 4월 초 나운규는 지인들과 함께 북간도 한인교회로부터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격문 수천장을 두만강을 넘나들며 회령을 비롯한 여러 고을에 잠입하여 나누어 주고 거사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예정시간을 눈앞에 두고 거사는 왜경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만세를 부르며 반일 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준비를 갖추고 있던 왜경의 총칼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피를 뿌리며 죽고 부상당하고 붙잡혀갔다. 나운규의 절친 윤봉춘은 이때 붙잡혀 치안유지죄 위반이라는 죄명을 쓰고 6개월간 징역살이를 하게 되였는데 민첩한 나운규는 용케도 왜경의 추적에서 벗어났다. 그때부터 나운규의 정처없고 고달픈 방황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운규는 국자가(지금의 연길시), 두도구등지를 헤매다가 시베리아 연해주, 해삼위, 노령(露領)으로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다 겪어가며 돌다가 풍문이 가라앉고 거지꼴이 되어서 나운규는 다시 로령에 가까운 훈춘으로 건너왔다. 훈춘으로 온 운규는 친구 김용국과 함께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 소속 독립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여기서 인쇄물 운반,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던중1920년 10월, 나운규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부대가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접전해 3천 여 명을 사살하는 대첩을 거두였다는 승전보를 들었다. 또 서로군정서 사관양성소에서 생도 298명을 북간도 왕청현의 부대에서 배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운규의 가슴은 북치듯 뜨겁게 울었다. 나운규는 김용국과 함께 신흥무관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으면 광복군 소위로 임관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출발했다. 용정에서 약 200리 떨어진 명월구(明月構)에 다달았을 무렵 여로에 지친 두 사람은 다 지쳐 드러눕고 말았다. 그런 두 사람에게 나이 많은 독립군 선배는 “젊은이들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쓰고 배운 지식을 이후의 독립을 위해 쓰도록 하는 게 좋겠네”하고 타일렀다. 나운규는 선배들의 충고에 따르기로 작정하고 다시 두만강을 건너 회령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나운규는 돌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는 어린 딸 행자를 두고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 1921년 봄 중동학교 고등예비과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당시는 영화의 전성시기였다. 단성사니 장안사니 연흥사니 하는 극장들이 서울 시내 여기저기에 세워졌고 “팔딱팔딱 뛰는 활동사진”이라 불리는 영화는 숱한 젊은 남녀들을 그 마력으로 현혹시켰다. 영화에 미치기 시작한 나운규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날보다도 극장에 가서 활동사진 보는 시간이 더 많았으며 길을 가다가도 배우의 표정과 동작을 흉내 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몇 년후 영화계의 혜성으로 등장할 나운규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돌아와서는 방에 붙박혀 감상문을 쓰고 각본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에 심취되여있던 나운규에게 1922년 봄,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회령경찰서에서 파견된 형사에게 친구 윤봉춘과 함께 지명수배자로 체포되였던 것이다. 북간도에서 면목이 있는 사람 하나가 순사 시험에 응시하면서 “도판부사건”의 연루자로 나운규와 윤봉춘 등 옛동지들을 팔아 넘겼던 것이었다. 21살의 나운규는 윤봉춘과 함께 1년 6개월의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징역형을 선고받고 청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형무소에 함께 수감 된 이춘성이라는 독립운동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에게서 춘사(春史)라는 호를 지어 받았다고 한다. 감옥에서 치른 옥고는 북간도와 시베리아 벌판을 류랑하던 쓰라린 체험과 함께 그의 반일사상의 뿌리를 더욱 깊게 하였고 저항의식을 더욱 북돋아주어 훗날 그의 작품세계에도 이 극기의 고통은 여실히 반영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지칭되는 “아리랑”, “풍운아”, “사랑을 찾아서” 등이 모두가 그 소산이었다. 1923년 출감 이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였다.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대사조차 없는 가마꾼으로 출연했던 나운규는 이듬해 백남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 “심청전”에 심봉사로 출연하였다. 또 조선키네마에서 만든, 자유련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롱중조(笼中鸟)”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연기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1926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지원을 받아 자신이 오랫동안 구상하고 각본을 쓴 “아리랑”을 제작했다. 자신이 감독하면서 1인 3역의 역할을 해냈다.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영화는 1926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청사 완공 기념식이 있은 뒤 같은날 오후 5시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영화가 끝나자 객석은 온통 눈물로 얼룩졌다. 정신을 놓아버린 청년, 그의 녀동생, 그녀를 사랑하는 오빠의 친구가 친일파의 횡포에 저항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식민의 고통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안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수 이정숙은 울먹이며 아리랑을 불렀고 관객들 모두가 따라불렀다. 노래가 울려퍼지자 순경이 호각을 불어 상영을 중지시켰지만 관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라 잃은 슬픔은 한 편의 영화를 통해 그렇게 터져나왔다. 이렇게 해서 민족의 영화 “아리랑”은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상영되었다.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서울로 아리랑 구경을 가자”는 유행어까지 생겼다 영화의 주제가인 “아리랑”을 부른 가수 리정숙은 이 노래로써 하루아침에 유명해졌고 “아리랑”이라는 민요는 이때로부터 온 민족의 애창곡이 되었다. “아리랑”은 말 그대로 활동사진 영역에 머물러 있던 한국영화를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 이전까지 신파물이나 외국 번안물이 대부분이었던 시절 “아리랑”은 영화계에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였다. “아리랑”이 상영되는 곳은 “의열단 단원이 폭탄을 던진것과 같은 열기가 감돌았다”는 등의 평가는 문헌이나 증언들 속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아리랑”은 일제시대 전 시기의 문화예술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적 생산물이 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의 성공으로 조선 키네마는 계속하여 나운규에게 각색과 감독과 주연을 아울러 맡겨서 1926년에는 “풍운아”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 영화도 또한 조선 극장에서 13일 동안이나 공연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나운규의 영화 재능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1927년 나운규는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이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덕션에서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수있는 “벙어리 삼룡”을 제작하였다. “아리랑”의 성공 이후 나운규는 한국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시도를 하였다. 새로 제작하는 “아리랑 3편”을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한 발성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변사가 대신 대사를 말해주던 무성영화시대에서 벗어나 배우가 그대로 대사를 하면서 연기하는 유성영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운규의 개인적 인기와는 달리 “나운규프로덕션”은 경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영화사는 해체되었다. 1931년 나운규는 “임자 없는 나루배”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관객들의 가슴에 남을 좋은 연기를 보여주였다. 일제 강점기 배사공 부녀가 겪는 비극적 현실을 그린 영화는 “아리랑”과 함께 일제시대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이후에도 나운규는 여러 편의 영화를 자신이 감독하고 직접 출연하면서 만들어 내며 내내 한국영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오래동안의 생활고와 작업의 과로 등이 겹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약관35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 중에서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3 일전 ”2015 춘사(春史) 영화상”이 서울 한국언론진흥재단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국제시장”, “명량”, “끝까지 간다”가 각본상, 기술상, 감독상을 수상했고 하정우와 배두나가 남자 연기상과 여자 연기상을 각각 수상했다. “춘사 영화상”은 한국영화계의 선구자인 춘사 나운규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투혼을 기리고자 개최되는 영화제이다. 한국영화감독협회에서 제정, 지난 1990년 12월 24일 제1회 춘사영화예술상 시상식을 개최하면서 출범했다 만약 력사서술에 가정이 허락된다면 나운규가 빠진 일제강점기의 조선영화사는 대단히 빈약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테마는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자유로운 영화 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배우였으며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계의 선구자”였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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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5
  • 20억 뜯어낸 ‘몸캠 피싱’ 조선족 사기단 적발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최근 중국에 근거지를 둔 ‘몸캠 피싱’ 조직이 적발됐다. 경기지방경찰청(청장 김종양) 광역수사대는 국내 화상채팅 사이트에 접속한 불특정 남성들을 대상으로 음란행위를 유도하여 이를 녹화한 후, 해킹으로 입수한 휴대폰 주소록에 등록된 지인들에게 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하여 지난해 6월부터 올 2월까지 피해자 노모(36세)씨 등 763명으로부터 20억원 상당을 갈취한 조선족 사기단을 적발하였다고 24일 밝혔다. 경찰은 같은 기간 위와 같은 방법 등으로 갈취한 금원 등을 환전상(국내총책)들이 국내 조선족 동포들을 통해 위안화로 교환한 후, 중국 은행 계좌를 이용하여 중국 총책에게 직접 송금(인터넷뱅킹)하는 방법으로 총 310억원을 빼돌린 피의자 신 某(36세), 진 某(26세)씨 등 14명을 적발하여 이중 5명을 구속하고 7명을 불구속 입건하였으며, 중국으로 달아난 2명을 수배하였다. 경찰조사결과 국내총책(환전상)들은 불법수익금을 국내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을 상대로 현물 환치기를 통해 중국 총책에 송금했으며, 환치기를 통해 국외로 빼돌린 금액은 310억원 상당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몸캠피싱은 자신의 얼굴 및 나체가 드러나는 음란행위영상이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유포되기 때문에 피해를 당해도 감추기 급급하고 신고를 꺼리는 경향이 있어, 피싱조직이 범행에 이용하는 악성어플 apk파일, 메일 등을 분석하여 피해자를 특정, 피해 진술을 꺼려하는 피해자들을 일일이 설득하여 피해사실 확인한 후 수사에 착수 하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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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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