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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시즌 연변팀 어떤 선수들이 출전하나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3월 2일, 2015 중국축구 갑급리그에 출전할 연변장백산 천양천팀의 선수진 명단이 출범되었다. 올해 연변천양천팀의 선수진은 도합 28명으로 본토 선수 21명에 국내 기타지구 출신의 선수 4명, 외적용병 3명으로 각각 구성되었다. 올해의 연변팀 골키퍼진과 앞의 3선 라인을 보면 골키퍼진과 미드필더진은 큰 변동이 없으나 공격라인과 수비라인이 대대적으로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올해 하태균, 스티브와 챨튼 등 3명 외적용병이 합류한 공격라인은 사상 최고의 실력으로 평가되고 있고 조우밍, 배육문 등이 합류한 수비라인 또한 지난해에 비해 실력이 한차원 향상된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현재의 연변팀을 보면 골키퍼 윤광과 지문일은 중국프로팀들 중 1류의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이 외 앞의 3선 라인을 보아도 올들어 제1집단군에 진입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갑급강등이란 비운을 지녔던 연변팀, 하지만 연변팀이 부진을 딛고 돌풍을 일으킨 사례는 많다. 1965년 을급권에서 진급한 길림성팀이 전국갑급축구 우승고지에 올랐는가 하면 1996년 강등후보로 꼽혔다가 겨우 갑A잔류에 성공했던 연변팀이 1997년에는 갑A 4강에 들어가기도 했다. 또한 2010년에도 부진을 겪던 연변팀이 김광주 감독의 지휘하에 갑급 3등에 오른적도 있다. 연변장백산천양천 축구팀이 2015 중국축구 갑급리그에서 새로운 센쇼이션을 말아올리기를 기대해 본다. 연변장백산축구팀선수명단: 감독: 박태하 코치: 왕건
    • 스포츠
    2015-03-02
  • 클래식 음악가 박소현, 바이올린 독주회 개최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비올리스트로 활동 중인 클래식 음악가 박소현이 오는 3월 7일(토) 영산 아트홀에서 귀국 독주회를 개최한다. 박소현은 그동안 수준 높은 예술성과 세련된 음악적 기교, 자신만의 영감으로 음악계의 주목을 받아왔으며 특히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자유자재로 연주하여 클래식 음악계의 멀티 플레이어로 독보적인 입지를 굳혀왔다. 박소현 독주회는 상실, 고뇌, 불안, 염원, 절망, 초월, 희망 등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행복과 불행이 반복되는 인생 여정에 작은 위로를 전한다는 의미에서다. 세부적으로는 ▲상실과 혼돈 ▲마지막 기도, 하지만 끝없는 추락과 절망 ▲슬픔의 극복, 그리고 새롭게 피어나는 희망이라는 세 가지 테마 아래 '죽음의 문턱에서', '고뇌하는 불안한 영혼', '간절한 염원과 위로의 기도', '영원과도 같은 추락과 깊은 절망', '슬픔의 수용과 초월', '피어오르는 희망과 기쁨의 서막' 등의 곡을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바이올린 독주회나 비올라 독주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환상적인 하모니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탁월한 음악적 재능으로 바이올리니스트 겸 비올리스트로 활동 중인 박소현은 부산예고 재학시절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난 후 빈 국립 음악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또한 린츠 주립 음악대학(현 브루크너 음대)에서는 바이올린 전문 연주자 석사과정을, 그라츠 국립 음악대학에서는 비올라 전문 연주자 및 비올라 교수법 학사과정을 복수전공하는 등 높은 수준의 전문 교육과정을 밟았다. 이밖에 잘츠부르크 하계 음악 학교와 ISA Wien, Kunstler Begegnung von M. Glinka, Weinheim Musikfestival, Overwart 국제 마스터 클래스, Histria Music Festival Croatia 등에 참가해 풍부한 음악적 경험을 쌓기도 했다. 박소현은 이번 바이올린 비올라 독주회 이후에도 4월 3일 영산 양재홀 기획 초청 연주회, 5월 23일 황인용의 진행으로 펼쳐지는 피아니스트 윤지은과의 카메라타홀 듀오 콘서트, 파소 앙상블 2회 정기 연주회 등의 연주 일정을 계획 중이다. 클래식 쉽게 다가서기 칼럼, 기업체 특강 등을 통해서 클래식 대중화에도 끊임없이 노력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연예·방송
    2015-03-02
  • 신입사원 절반, “금쪽 같은 첫 월급은 부모님께”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취업포털 ‘커리어’(www.career.co.kr 대표 강석린)는 입사 6개월 미만의 신입사원 246명을 대상으로 '첫 월급 사용처’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첫 월급 사용처’에 대한 물음에 응답자의 52.3%가 ‘부모님이나 지인들의 선물 구입’이라고 답했다. 다음으로는 ‘나 자신을 위한 선물’ (19.3%), ‘적금가입’ (8.8%), ‘외모관리에 투자’ (7.4%), ‘여행 경비’ (7.1%), ‘취미생활’ (3.8%), ‘기타’ (1.3%) 순이었다. ‘첫 월급을 받고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부모님’이 82.8%로 가장 많았고 ‘연인’ (5.2%), ‘친구 또는 선후배’ (4.6%), ‘형제자매’ (4.5%), ‘교수님 또는 은사님’ (2.9%) 순으로 나타났다. ‘취업 이후 자신의 어떤 부분이 가장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금전적 여유가 생겼다’가 48.9%로 가장 많았고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가 19.0%, ‘규칙적인 생활 패턴’가 13.6%, ‘외모/패션 등의 스타일이 좋아졌다’이 10.9%, ‘부모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가 4.9%, ‘기타’가 2.7% 였다. ‘신입사원으로서 10년 후를 준비하고 있는가’(복수응답가능)에 대한 물음에는 응답자의 56.36%가 ‘준비하는 것이 있다’고 답한 가운데, 준비하는 분야로는 ‘해당 직무 관련’이 34.25%로 가장 많았고 ‘토익 등 어학관련’이 19.43%, ‘재테크’가 17.14%, ‘컴퓨터 관련’이 6.71% 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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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뉴스
    • 사회
    2015-03-02
  • [김혁 칼럼] 김학철을 다시 읽다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우리앞에 한 거인이 우람하게 뻗쳐 서 있다.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은 척각의 로인, 하지만 깨끗이 늙은 강파른 얼굴에 사려 깊고 슬기가 넘치는 한쌍의 눈. 그이가 바로 중국조선족문단의 맨 들머리에 우뚝 각인된 김학철 옹의 모습이다. 어제 저녁(3월1일) 우리는 또 오랜만에 그이의 거룩한 형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SBS방송에서 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이 방영된 것이다. 스페셜은 선생이 끔찍이도 아꼈던 손녀 김서정양이 할아버지를 되돌이켜보며 그이의 려정을 따라 중국의 하북성, 한국의 밀양, 일본의 나가사키를 순례하는 과정을 통해 할아버지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면서까지도 끝까지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이였는지? 그 답을 찾는 려정을 선생의 많은 영상기록물과 더불어 보여주었다. 평생 펜으로 불의와 싸웠던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조선족 문단의 거목” 김학철의 파란많은 삶을 다시 돌이켜 본다.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SBS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북조선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본명은 홍성걸(洪性杰.).7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다니다 1932년 약관 17세에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웅지를 품고 중국으로 들어왔다. 처음 상해에서 의렬단에 가입. 무정부주의자로 탈바꿈하여 반일지하테로활동 종사했다.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 뒤주머니에 권총 한자루- 전형적인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행색으로 쿨하게 상해의 황포강변을 누볐다.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했다. 1937년 중앙육군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에 입학하였다. 제1대대 제4중대에 편입되였으며 여기서 맑스주의사상과 접촉하면서 단순한 민족주의자로부터 맑스주의자로 변신하였다. 중일전쟁으로 3년제과정을 1년간 앞당겨 미친 김학철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전신, 대장 김원봉)에 가입, 창립대원으로 제1지대 소속되었다. 창립대회 당시 주은래와 국민혁명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청장 곽말약도 참석했다. 그해에 김학철은 화북항일전장에서 분대장으로 활약, 1939년 호남성 북부일대에서 항일무장선전활동을 전개했다. 1940년 가을에는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팔로군에 참가했다. 태항산에서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의 선전간사로 일하였다. 부대의 수요에 따라 신문편집, 연극 극본, 가사집필도 하면서 문학적 끼를 선보였다. 이시기 단막극 “서광”, “승리”, “등대”등을 창작하여 무한, 류양, 태항산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1941년, 여름 김학철은 화북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분대장으로 참전, 그해 12월 12일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胡家庄)전투에서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일본군에 포로되었다. 약 5개월간 석가장의 일본총령사관 경찰서 류치장에 갇혀있다가 그후 예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라는 판정을 받고 1942년 5월 일본의 나가사끼형무소 이시하야 본소에 이송되었다. 1943년 4월 29일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 언도를 받았다. 김학철은 나가사키형무소에서 원폭피해는 요행 면할수 있었으나 감옥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단지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리유로 총상당한 왼쪽 다리를 치료받지 못하여1945년 2월 감옥에서 다리절단수술을 받았다. 김학철은 전쟁포로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인정되여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을 언도받았다. 1945년 10월 6일 정치범을 무조건 석방할데 관한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석방되었다. 해방받은 몸으로 서울로 돌아와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했으며 그 후 1년간 육속 “문학”지에 “담배국”, “신문학”에 “균렬”, “서울문학”에 “어간유정” 등 10편을 발표했다. 1946년 조선으로 건너가 “로동신문”기자, 외금강휴양소 소장, “민족군대”주필등 직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전쟁이 일자 중국으로 들어와 저명한 여류작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는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냈다. 이동안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을 중문으로 출판했다. 1952년 12월 자치주 주장 주덕해의 요청으로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련합회 준비위원회 주임으로 임명 되였으나 반년만에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맹활동했다. 1953년 9월 단편집 “새집 드는 날”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1, 2, 3부와 소설집 “고민” 중편소설 “번영”을 출간했으며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로신의 작품을 맨처음 조선문으로 번역한 작가이다. 1957년 중국 전역에서 불어친 반우파투쟁 속에서 “반동분자”로 획분되었다. 1964년부터 문제작인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했다. 1966년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폭발하자 그해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원고가 발견되면서 필화를 입어 10년 유기징역 으로 판결, 추리구(秋梨沟)감옥에서 복역했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1977년 12월에 만기석방되었다. 하지만 그 후 3년간 의연히 반혁명전과자 취급을 당하는 신세였다. 1980년 12월 연변주법원에서 “원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다”고 선포되여 1983년에 정식으로 루명을 벗었다. “20세기의 신화”는 미발표작인만큼 사회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원고의 집필 자체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변주법원에서는 원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했다. 무죄를 선고받는 공판정에서는 김학철은 “나는 일찍이 이 북간도땅에 이렇게 긴 땅굴이 있으리라군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이 “반동”이라는 무시무시한 명칭으로 불리는 땅굴은 사람이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강산이 두 세번씩 바뀌여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습니다.”고 감개에 넘쳐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1983년 김학철은 국적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고 중국국적을 가졌으며 정식으로 공직에서 리직하였다. 1989년 12월에는 49년만에 당적을 회복하였으며 항일로간부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장장 24년의 정치박해로 상처받은 몸을 추슬리고 김학철은 다시 일어섰다. 이미 65세의 나이였지만 녹쓴 펜을 닦고 만강의 열정으로 창작활동을 재개했다. 1983년 항일회상기 “항일별곡”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1985년 “김학철단편소설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86년 3월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가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간되였으며 1987년 6월에는 “김학철작품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94년에 한국 KBS로부터 “해외동포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자서전인 “최후의 분대장”이 한국의 문학과 지성사에 의해 1995년에 출간되였고 1996년과 2001년에 걸쳐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와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 한국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수백편의 수필과 잡문을 여러 신문, 잡지에 발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다권집 “김학철문집” 을 출판하면서 중국조선족문단은 물론 세계 한겨례 문단에서도 한획을 그었다. 학계는 “김학철선생의 문학은 우리가 세계문학과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큰 창구인바 이 책이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있어서의 하나의 이정표로, 영원한 고전으로 될것”이라 내다보았다.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 김학철은 85세를 일기로 연길에서 타계했다.   타계 20일전부터 자기의 병이 완치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가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진 절식을 단행,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본인의 소원대로 유체는 화장해 두만강에 뿌려졌고 일부는 우편함에 담아 동해바다로 띄워 보냈는데 우편함에는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이라고 적었다.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지켜온 생활신조를 남겼는데 바로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그것이였다. 김학철은 반일투사이며 중국조선족을 대변하는 민족작가로서 일평생 곡절많은 인생길을 걸어왔다. 식민지시대의 고난을 눈물겹도록 맛보면서 지낸 비애의 소년시절, 항일전쟁의 피와 불의 세례를 겪은 격정의 청춘시절, 일제침략자의 감옥에서의 인고의 시간, 서울, 평양, 북경, 연변에서의 지역을 넘나든 폭넓은 문필생활… 이렇게 파란많은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 드물다고 해야할것이다. 우리 문단의 지성인들이 정평하다싶이 “세상에 실로 열화 속에서 아홉 번 나보고 빙설 속에서 아홉 번 얼어보고 피못속에서 아홉 번 목욕해본” 작가가 있다면 그가 곧 김학철일 것이다. 잘 아는듯, 하지만 잘 아지 못한 김학철의 삶을 다시금 읽으며 우리의 작은 문단에 세계적인 지성들과 비견(比肩)할만한 인물이 있다는데서 큰 자호감을 머금었다. 전통의 연속과 재발견의 필요성은 지금 흔들림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환기시켜 준다. 지금 우리 조선족 공동체는 격변의 물굽이에서 미중유의 파고(波高)를 경험하고있다. 불굴의 저항의식으로 강렬한 비판정신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려던 김학철의 행보는 리뉴얼을 요구하며 고심하는 우리의 상황을 풀어갈수 있는 코드가 될 수 있고 우리 사회와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낼 수 있는 계시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김학철의 올곧은 궤적은 오늘날에도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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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2
  • 캐스팃, 방과후교실 과정 ‘EBS 스스로배움터’ 3월 본격 스타트
    [동포투데이] 스마트러닝 전문기업 캐스팃(대표 주호현)은 EBS의 교육 콘텐츠를 활용한 초.중.고 방과후교실 프로그램인 'EBS 스스로배움터' 서비스를 3월부터 본격 제공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학생들을 지도해주는 학습교사인 '학습큐레이터'를 공개모집한다고 1일 밝혔다. 학습큐레이터는 EBS 스스로배움터를 통해 학생들의 학업을 개별적으로 지도해주는 교사로, EBS 스스로배움터 웹사이트(www.ebsssro.com)를 통해 지원할 수 있다. 캐스팃의 EBS 스스로배움터 지도교사인 학습큐레이터는 학생분석에서부터 개별 학습 스케쥴 관리와 학생관리(피드백) 및 학부모상담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에게 개별 지도를 해준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일간/주간/월간 성적 변화를 관찰한 뒤 EBS 스스로배움터 학부모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학부모들과 상담을 해 교육효과를 극대화해준다. 학습큐레이터에 지원하면 큐레이터SCM이란 이력서를 작성한 뒤 캐스팃이 제공하는 큐레이터 자격이수과정과 관리자 면접 등을 거쳐 정식 학습큐레이터로 활동할 수 있다. 캐스팃은 학습큐레이터들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1차 서류합격자들을 대상으로 EBS 스스로배움터의 개요, 학습큐레이터의 역할, 강의계획 수립방법, EBS 스스로배움터 강좌소개, 큐레이터에게 필요한 소양 및 자가평가 등의 내용이 담긴 자격이수 동영상을 제공한다. 캐스팃이 제공하는 자기주도학습 프로그램인 EBS 스스로배움터는 방과후교실에 참여하는 초.중.고등학교와 학생들에게 태블릿PC를 지급한 뒤 캐스팃이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발한 진단테스트를 통해 학생들의 개인별 학업수준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1대1 맞춤형 수업을 제공하는 스마트 러닝 프로그램이다. 'EBS 스스로배움터'는 동기촉진 교습법 및 검증된 EBS의 교육 콘텐츠로 1대1 수준별 보충/심화학습을 진행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자기주도학습 습관을 양성해주고 학교교육을 보완해준다. 이를 통해 사교육비 경감 및 농어촌, 도시 저소득층 자녀들에게도 우수한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교육복지를 실현해주는 효과가 있다. 실제로 'EBS 스스로배움터'는 학생 유형에 맞게 4만원대 ~8만원대의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최소의 교육비용으로 양질의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기존 사교육비(단과반 월평균 11만원, 종합반 월평균 25만원)에 대한 학부모들의 부담을 대폭 줄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캐스팃은 이번 'EBS 스스로배움터' 사업을 위해 EBS Alliance Lab인 (주)싸이들과 콘텐츠 공급 및 스마트러인 시스템 개발계약을 체결, 베타테스트 중에 있으며, 최근 전국 총판을 통해 각 지역별 시범학교 선정작업도 끝냈다. 캐스팃의 주호현 대표는 "EBS 스스로배움터는 공신력 있는 EBS의 교육 콘텐츠를 제공하기 때문에 과도한 사교육비 문제를 해결해주고 공교육 정상화에도 기여할 것"이라며 "사회적 측면에서는 학습큐레이터 채용을 통해 경력단절자의 경제활동에 도움이 되고, 지방과 수도권 간 교육수준 차이 개선 및 사교육비 절감 등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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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2
  • 해란강가에 울려 퍼진 봄날의 함성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조선 3.1운동의 연장선 1919년, 경성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온 한반도를 휩쓸었고 그 충격파는 드디어 간도지역에까지 미쳤다.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망국의 한이 어렸던 반일열조에는 불이 확 달렸다. 그 무렵 간도지역에서는 반일계몽교육운동의 심입과 반일단체의 흥기와 더불어 반일군중운동이 점차 온양되고 있었다. 간도의 반일지사들은 울라지보스토크와 니꼴리스크 등지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와 연계를 가지고 공동으로 반일운동준비를 비밀리에 추진하고있었다. 연해주에 파견된 간도 간민회 회장 김약연 등은 그곳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성립하면서 국내외 각지에서 파견된 민족운동자와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 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2월 18일과 20일에는 국자가(연길) 장하리의 박동원의 집에서 구춘선, 김영학, 고평, 등 연변의 주요 반일지사 33인이 모여 비밀리에 회합하여 반일운동방략을 결의하였다. 이와같이 조직적인 준비를 다그치던 중 3월 7일 조선의 “3.1”운동 소식이 간도에까지 전해졌다. 이는 타향에서 망국의 설음에 떨고있는 이들로 말하면 하나의 강심제가 아닐 수 없었다. 간도의 지사들은 다시 협의를 거듭하여 용정촌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에서 “조선독립선언서발표축하회”를 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용정을 집회장소로 정한 것은 용정촌이 당시 간도의 서울 격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것도 있겠지만 더욱이 용정에 일본영사관이 자리 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영학과 배형식을 대회 집행회장과 부회장으로 추천하고 회의순서, 시위 노선 및 대회의 구호 등 문제를 세세하게 상의하였다. 날짜는 3월 13일로 정했다. "3.1"운동의 소식을 접한 용정 동명중학교의 교원 최봉익이 조선에서 "조선독립선언서"를 가져왔다. 3월 8일부터 간도의 독립운동가들은 최봉익이 갖고 온 "조선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사람들 속에 산포하였다.1919년 3월 1일, 즉 조선에서 "3.1"운동이 발생한 당날 북경주재 일본공사는 중화민국정부 외교부에 “중국정부는 일본의 ‘우방’으로서 마땅히 조치를 대어 간도 지역에서 일어날 반일운동을 제지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만일 중국측에서 이 직책을 이행하지 못하면 일본은 중국을 돕는 견지에서 간도지역에 파행할 것이다."라고 경고를 내렸다. 3월 10일 일본영사관 국자가 분관에서도 총영사의 영을 받고 용정에서 있게 될 집회문제를 가지고 연길 도윤공서 외교과와 교섭하였다. 교섭에서 일본측은 중국측에서 군경을 파견하여 이번 집회를 제지시킬 것을 요구하면서 "만일 중국측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일본은 자체로 군대를 파견하여 탄압할 것이다."라고 위협에 찬 언사를 던졌다. 원래 간도의 지방관부와 주둔군은 동병상련을 느껴 조선인들의 반일활동에 대해 방임하거나 동정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압력이 가해오자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이에 연길 도윤 장세전과 육군퇀장 맹부덕(孟富德)은 3월 12일 저녁 간도지역 조선인 반일단체지도자들을 불렀다. 그들이 천방백계로4시간 정도 권유하였으나 끝내는 설복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장세전과 맹부덕은 길림성 독군과 성장에게 처리방법에 대하여 지시를 바라는 동시에 군경들에게도 준비태세를 명령했다. 일본정부의 공갈에 맹부덕은 부대를 거느리고 용정으로 와서 일본인 상부지를 지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용정촌은 12일 저녁부터 중국 군대와 경찰, 일본영사관 경찰들의 삼엄한 경비로 무시무시한 공포의 분위기로 가득 찼다. 3.13대회의 준비처에서는 상부지 안에서 집회를 한 다음 그 길로 시위행진을 하여 일본영사관으로 쳐들어가기로 계획하였으나 지방당국의 태도가 갑자기 변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엉망으로 되었다. 준비처의 지도성원 사이에도 의견분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원 계획대로 상부지 안에서 떳떳하게 회의를 하자고 주장하였고 어떤 성원은 필요없이 모험하지 말고 안전한 곳에서 집회하자는 의견을 견지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원계획대로 아침에 개회를 선포하자고 우기고 어떤 사람은 맹부덕과 담판하자고 하였다. 결과 준비처에서 대표를 파견하여 맹부덕과 담판하느라고 시간을 자연 지체되어 정오 12시에 집회를 시작하기로 결정지었다. 역사의 종소리 드디어 1919년 3월 13일,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일 없던 하늘이 갑작스레 흐려졌고 굵은 모래알을 동반한 모진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용정거리는 수런거리는 소요와 팽만한 기운으로 늠실이기 시작했다. 간도 각지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용정의 서전(瑞甸)벌판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흰두루마기며 치마저고리를 입은 남정네들과 여인들 지어 백발 로인들과 삼척동자들도 가세하여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날 개산툰 지방의 사람들은 정동학교 교원과 학생들과 함께 12일 밤중부터 주먹밥을 만들어 가지고 80여리 밤길을 걸어 명동학교에 도착하였으며 달라자의 사람들은 새벽에 출발하여 명동학교에 도착하여 명동학교학생들과 함께 북과 나팔을 울리며 용정으로 행진 해 들어갔다. 동성용, 조양천, 차조구, 동불사, 루투구, 명월구, 장인강, 두도구, 의란구, 월청구, 위자구, 화전자, 석현, 연길 등지의 민중들도 대열을 지어 용정에 도착하였다. 간도 각 지역에서 사람들은 냇물의 지류가 강을 바라고 흘러들듯이 사면팔방에서 용정이라는 이 “간도의 서울”이자 조선인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구심점을 향해 흘러 들었다. 원래 집회의 예정지점은 상부지 밖에 예수교 부속 영신학교 앞 공지였다. 11시부터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회장에 흘러 들었다. 이때 맹부덕이 거느린 보병과 기병들이 앞을 막아 나섰다. 이리하여 집회대오는 부득불 원래의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700여 미터 되는 곳으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당시 간도보통학교 뒷쪽(지금의 용정제1유치원마당) 부근 이었다. 회장 중앙에는 "정의인도", "조선독립 만세!"라는 오장기를 세웠다. 사방에서 모여 온 3만 여명에 달했다. 당시 용정의 인구가 9,000여명밖에 안되었던 실정을 감안해 보면 그 광경은 실로 미증유의 장관이었다. 이때 천주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이 종은 당시 15세의 소년 림민호가 쳤다. 당년의 “종치기 소년” 림민호는 그 후 연변대학의 부총장을 지냈다. 그는 연변대학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민족대학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 받고 있는 민족교육자이다. 림민호선생은 그날의 감격에 대해 이렇게 더듬었다. “…나는 그해에 15살밖에 안되었고 우리 집은 바로 용정촌 천주교교회당 울안에 있었다. 이날 나는 동네의 한 친구와 함께 교회당 종루로 올라가 있었다. 용정에서 전에 없었던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대회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대회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에 나는 친구와 함께 종을 번갈아가면서 힘껏 쳤다. 그때 우리가 종을 울린것은 우리 대회의 시작을 독촉하기 위한것이였다.” 홍안소년에 의해 울려퍼진 이 종소리는 지난 세기 10년대 우리 민족투쟁사에서 가장 뜻깊은 반일집회의 개막을 이끌었다. 이 력사적인 종소리와 함께 김영학이 대회를 선포했다. 우선 "간도거류 조선민족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이 낭독되었다. "우리 조선족은 해방을 선언하노라. 지위를 선언하노라. 정의를 선언하노라. 인도주의를 선언하노라! 우리는 영광스런 력사를 지닌 민족이요, 또한 근로한 민족이 노라. 그런데 우리를 훼멸하고 타파하려는 자가 있도다. 우리 조선족은 강권의 기반하에서 신음하고 농락 된지도 어언간 여러 해 열력하였도다. 이는 부정이라 할 수도 없겠다. 위미부진한 약소인생의 자연화원이라 뉘를 원하며 뉘를 탓하리오. 그러나 지사의 눈물은 바다를 채웠고 우민의 원한은 창천에 미쳤도다. 하늘의 귀가 백성의 목소리에 향하고 하늘의 눈이 백성의 시야로 향하여 세운이 일변하고 일도가 갱신할 제 정의의 종소리는 큰 거리에 울리고 자유의 항선은 앞 나루에 닿았도다. 강국의 비행기, 잠수함은 바다 속에 침몰되고 약자의 기발은 춘풍에 나붓기누나. 오인(吾人)은 천민 속의 한 사람이오, 약자 속의 한 사람이라. 오늘 천명에 순종하고 인심에 응하여 천만 민중이 일제히 한 입 같이 자유찬가를 부르며 쌍수를 굳게 쥐고 평등의 태도로 전진하는 바이로다. 저 동양문명의 수뇌, 동양평화의 보루라고 자처하는 일제의 침략으로 하여 현 정세에 변천을 가져왔도다. 오인은 이를 회고 하야 문득 깨달음이 있으니 오인이 성의를 량찰하야 묵인 특허하리라. 민중들은 한 맘 한 뜻으로 단합 하야 침략자들이 간도 땅을 짓밟지 못하도록 할지어라. 모든 사람은 다 이런 신성한 책임이 있거늘 우리 간도의 80만 조선족 민중은 황천의 명소에 갈지 언정 인류의 평등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 바칠 바이어라." 포고문을 읽은 다음 3장공약이 발표되었다. "첫째, 오인들의 이 거동은 정의, 인도, 생존, 존엄을 위하는 요구인 즉 배타적 감정으로 광분치 말라. 둘째,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 셋째, 일체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데까지 든지 광명정대케 하라." 공약이 다 낭독되자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머리위로는 태극기가 수풀처럼 나붓겼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한 이들은 한민족의 뿌리와 력사적 소명의식을 자각하고 목청껏 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다. 만세소리는 해란강가에서 오래도록 메아리 쳤다. 이어 시위행진이 거행되었다. 시위대오 맨 앞장에 명월구에서 온 공덕흡이 "조선독립을 성원"이라는 오장기를 들고나섰고 큰 폭의 태극기를 추켜든 명동학교, 정동중학교의 교원과 학생들로 구성된 300여명의 충열대가 앞장에 섰다. 그리고 그 뒤로 각지에서 모여온 군중대오가 따라 섰다. 시위자들은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높이높이 외치면서 호호탕탕하게 상부지 안의 일본 간도총영사관을 향하였다. 시위군중들의 행동에 감화 된 일제경영학교인 간도보통학교의 200여 명 학생들도 교장과 교원들의 제지를 물리치고 학교 문을 뛰쳐나와 시위행렬에 뛰어들었다. 이에 관해 당시 "독립신문"의 생생한 기재가 있다. "3월 13일, 보통학교 왜놈교장이 반일군중대회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탐지하고 전교학생을 교실 안에 가두어 놓고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하늘땅을 울리는 '조선독립만세!'의 구호소리를 듣자마자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팔을 휘두르며 '만세'를 외치면서 유리창문을 부수고 뛰쳐나와 거리에 달려가 시위 행렬에 참가하였다. 이 광경을 본 왜놈교장은 저도 모르게 '10년 교육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되었구나.'라고 탄식하였다."("독립신문"1920년 1월 1일) 상부지 가까이에서 시위군중들과 막아서는 군경들 사이에 몸 싸움이 시작되었다. 격노한 군중들은 돌멩이를 가로막는 군경들을 향해 뿌리면서 계속 밀고 나갔다. 그 긴박감과 결연함에 왜놈들은 질겁했다. 땅! 이때 총성이 울렸다. 맨 앞장에 오장기를 들고 나섰던 기수 공덕흡이 쓰러졌다. 이날의 거사를 암묵적으로 지지했지만 일제의 강요에 못이긴 중국경찰대장 맹부덕 부대는 당황한 나머지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연이어 울렸고 앞장 선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적수공권의 시위대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흩어졌다. 혼란 속에서 주도자들은 즉시 시위대오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을 휘동하여 쓰러진 사상자들을 “제창병원”으로 호송하였다. “제창병원은 1914년 캐나다 선교사 바커(A.H.Barker)부부가 용정촌 동산(東山)에 설립한 병원으로 독립운동가의 정치적 피난처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었다. 이 병원 지하실에서 북간도의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이 인쇄되기도 했었다. 마진, 김영학, 김병흡 등 주도자들은 일부 군중들을 거느리고 여전히 상부지에 남아 사건의 시말을 열거하면서 사후대책을 대기전에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들과 더불어 구춘선, 리봉우, 고용환, 강구악, 박승필등 간부들은 국자가에 가서 중국정부는 마땅히 사상자에게 치료비와 배상금을 지불하며 사건을 조작한 자들을 엄벌할 것을 연길도윤공서에 제출하고 항의를 표시했으며 길림성 성장과 북경정부에 향해 지방군경들이 시위군중들에 대한 탄압에 항의를 표시하고 나서 정부에서 이번 사건을 책임지고 처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지방정부에서는 14일에 용정에 60여명의 군경을 증파하고 엄밀히 경계하면서 사건이 눅잦혀 질 때까지 현장을 유지하도록 명령하였다. 3월 13일에 일제와 지방군경들의 탄압으로 당장에서 희생된 사람은 10명으로서 공덕흡, 박상진, 정시익, 김태균, 김승록, 현봉률, 리균필, 박문호, 김흥식, 장학관이었다. 13일 후 17일 사이에 최익선, 현상호, 리유주, 차정룡 등 4명이 희생되었다. 이밖에 17일 후에 희생된 이들로는 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원용서, 허준언 등이었다. 13일 시위에서 남성 36명, 영성 12명 도합 48명이 부상을 입고 남성 84명, 여성 10명이 체포된 것으로 이 숫자는 1920년 1월 22일 "독립신문"에 집계되어 실렸다. 3월 17일, 용정의 각계인사들은 의사회를 조직하였다. 3천여 명의 애국청년들과 민중들이 날창과 몽둥이를 휴대하고 다시 용정에 집결하여 열사들의 시체를 메고 가두행진을 하면서 희생된 열사들을 추모하고 일제와 반동군경들의 탄압에 항의해 나섰다. 그들은 용정 제창병원 앞에 모여 발인제를 지내고 "조선독립수난자"란 현수막과 14명 수난자들의 령구를 메고 용정 동남교회에 있는 합성리 공동묘지에 가서 안장했다. 묘소에 "충렬자제공지묘"라는 묘비를 세웠다. 용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의 함성은 간도 각지는 물론 북만과 남만일대까지 울려 퍼지여훈춘, 화룡, 개산툰, 삼도구 등 북간도 각 지역에 들 불처럼 번져 5월 1일까지 30여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오늘날 학계에 의해 “해란강반의 봄우뢰”라고 지칭되고 있는 용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은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반일투지를 크게 고무해 주었고 앙양된 반일정서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간도지역 조선인민대중의 첫번째로 되는 대규모적인 반일투쟁사건이었다. 이는 조선인민대중들의 불요불굴의 반일정신과 힘을 과시하였을 뿐더러 일제의 미친듯하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다. 3.13반일시위운동은 일제와 그 사촉을 받은 중국 군경들의 총칼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지만 이 의거는 그 이듬해 1920년 용정에 있은 간도 일제은행의 15만원 탈취사건과 봉오동, 청산리투쟁으로 이어진다. 비무장 독립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바로 무장독립투쟁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반일의사능을 조성 오늘날 용정의 도심이 되어 제일유치원이 들어서 있는 그 날의 집회장소에는 “서전대야유적지(瑞甸大野遺跡地)”라고 쓰여진 기념비가 외롭게 서있다. 또 용정에서 남녘 삼합 쪽으로 미루나무가 늘어선 논둑 길을 따라 차로 5분정도 가면 큰 길곁에13기의 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광신향 합성리묘지, 3.13반일의사릉(3.13反日義士陵)이다. 이 묘역의 조성은 용정시 대외경제 문화교류협회 회장 최근갑 옹(90)의 공로와 갈라놓을 수 없다. 윤동주가 다닌 은진중학의 후배로 용정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그는 다년간 “용정 3.13”기념사업회의 회장 직을 맡고 3.13운동에서 희생 된 반일의사들의 묘지를 성역화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89년 최근갑 옹은 “3.13의사릉 수복위원회”를 설립하고 다섯 차례의 현지답사를 거쳐 1990년 4월 10일에 의사들의 묘소를 확정했다. 이어 5월에 “3,13반일 의사릉묘 수복 및 순난의사 추모식”을 장중하게 거행했다. 1994년 이 묘역은 용정시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3.13반일의사릉에는 그날 만세를 목청껏 부르다 순직한 13인 열사의 봉분이 두 줄로 안장돼 있다. 그앞에 서면 민족독립의 결연한 의지로 고결한 생명을 바쳐가며 외쳤던 영령들의 기개에 찬 함성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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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1
  • 중국 관광객 일본서 싹슬이한 “변기뚜껑” 알고보니…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최근 중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음력설 기간, 45만명에 달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일본에 가 소비했으며 물건 구입에 도합 60억 위안을 쏟아부었다. 중국인들에게 인기상품은 여전히 전기밥솥이었고 온수로 뒤를 씻는 변기뚜껑이 올해의 제일 인기상품이었다. 일본 현지의 언론은 “변기뚜껑은 거의 품절상태, 없어서 못파는 제품이었다”고 보도했다. 중국 “절강온라인”의 3월 1일 보도에 따르면 음력설 전, 중국 항주시에 사는 왕씨는 관광단에 들어 일본에 관광갔다. 친척, 친구들이 사다달라는 부탁들도 적지 않았는데 특히 온수로 뒤를 씻는 변기뚜껑 부탁이 여러 건이었다. 관광기간, 왕씨는 가이드의 안내로 오사카의 한 가전제품상점에 들어갔는데 그 큰 상점안은 중국인 관광객들로 붐비었고 가는 곳마다 중국인들은 손에 전기밥솥, 변기뚜껑, 전기치솔 등을 들고 있었다. 마치 돈을 받지 않고 주는듯 중국인들은 일본상품 구입에 열성이었다. 일본의 전압은 110볼트이고 중국은 220볼트인데 일본의 전기제품상점들에서는 전문 중국 국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기규격의 상품들도 팔고 있었다. 변기뚜껑 몇 개를 사려고 고르고 있던 왕씨는 “마쯔시다(松下)” 브랜드의 변기뚜껑 포장상자에 중문글자들이 찍혀있는 것을 발견, 자세히 보니 중문으로 생산지역이 “중국 절강성 항주시 항주경제기술개발구 송교거리 2호”라고 찍혀있었다. 왕씨네 고장이었던 것이다. “중국인들이 국경 넘어 구입한 제품이 어이없게도 자기집 문앞에서 생산한 것이었다”고 왕씨는 말한다. 알아본데 따르면 “마쯔시다” 전기화주택설비기계(항주)유한회사는 2004년에 항주 하사지역에 설립, 스마트좌변기, 전기밥솥, 세탁기 등을 생산한다. 마쯔시다 공식 서비스부처에서는 “일본에서 판매하는 이 변기뚜껑은 중국 마쯔시다공장에서 생산해 일본에 수출하는 제품으로 일본 대형 상점들에서 모두 팔고 있으며 전문 일본에 가 소비하는 중국인들을 대상하는 제품이다. 이 변기뚜껑의 생산표준은 전부 일본의 관련 표준에 따라 생산했으며 그 품질은 중국 국내에서 판매하는 동일한 브랜드 제품보다 우수하다”고 소개한다. 중국 항주에서 생산하는 변기뚜껑을 바다 건너 일본에 수출하고 결국 중국인 관광객들이 구입해 힘들게 중국에 메고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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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1
  • 광복 70주년 기념 뮤지컬 ‘덕혜옹주’, 4월 3일 개막
    [동포투데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뮤지컬 ‘덕혜옹주’가 2015년 4월 3일 부터 6월 28일까지 대학로 SH아트홀에서 막을 올린다. 우리가 잊어버린 그녀의 처절하고 따뜻한 기억,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광복 70주년 기념 뮤지컬 ‘덕혜옹주’의 기획의도는 아래와 같다. 조국과 가족의 버림에 모든 것을 잊었지만, 모든 것을 잊지 않으려는 덕혜.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시대와 가문에 휘둘린 덕혜의 남편 다케유키. 덕혜와 다케유키 사이에서 그 어느 쪽도 될 수 없는 딸 정혜. 세 인물의 고뇌와 사랑을 통해 잊고 있었던 시대의 아픔을,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가족의 문제를 따뜻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는 시대의 잘못된 이데올로기(군국주의)가 한 개인의 삶을 망가뜨리고 평범한 가정조차 꿈꾸지 못하게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이겨내려는 엄마(덕혜옹주)를 뮤지컬 ‘덕혜옹주’를 통해 보게 된다. 또한 ‘같이 살고 있지만 같이 살고 있지 않는’ 현대 사회의 가족의 문제를 ‘같이 살고 싶었지만 같이 살지 못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주기도 하며,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가치를 말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명동예술극장이 우수한 창작뮤지컬을 발굴하고 전략적 지원을 통해 추진하고 있는 창작산실 사업은(구. 창작팩토리) 고액의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는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 속에서 작품성과 흥행성을 갖춘 작품을 지원함으로써 한국 뮤지컬의 위상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다. 뮤지컬 ‘덕혜옹주’는 2012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공연예술 창작산실 대본공모 당선, 2013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공연예술 창작산실 시범공연지원 당선, 2013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공연예술 창작산실 우수작품 제작지원작으로 선정되어 공연 제작의 전 과정을 지원받았으며 같은 해 지원받았던 ‘정글라이프’, ‘미드나잇 블루’, ‘공동경비구역 JSA’과 더불어 가장 많은 관심과 기대를 모은 작품이다. 역대 선정작으로는 2008년 ‘라디오 스타’, 2009년 ‘번지점프를 하다’, ‘왕세자실종사건’, 2010년 ‘날아라, 박씨!’, ‘식구를 찾아서’, ‘영웅’, 2011년 ‘Trace U(그 남자의 비밀)’, 2012년 ‘완득이’ 등이 있다. 2013년 12월 20일 ~ 29일 대학로뮤지컬센터 공간 피꼴로 공연과 2014년 5월 2일 ~ 6월 1일 성수아트홀공연에 이어 2015년에는 대학로 SH아트홀 공연을 통해 명실상부 대한민국 창작뮤지컬의 폭발적인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할 것이다. 공연 개요 공 연 명 : 광복 70주년 기념 뮤지컬 ‘덕혜옹주’ 공연장소 : 대학로 SH아트홀 공연기간 : 2015. 04. 03(금) ~ 2015. 06. 28(일) 공연시간 : 화,목,금 오후 8시 / 수 오후 4시, 오후 8시 / 토 오후 3시, 오후 7시 / 일 오후 5시 (월 공연 없음) 관 람 료 : R석 55,000원 / S석 45,000원 관람등급 : 만 12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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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1
  • 영화“국제시장”을 보지 않은 이유
    기성세대는 물질적 성과로 자만하지 말고 國家價値 퇴보에 자괴감 느껴야 시내의 극장을 지나가며 그 김에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일부러 그 말 많은 국제시장을 안 봤다. 언론에서는 연거푸 가난 속에 나라소득을 높인 기성세대를 젊은 세대가 이해하도록 기여했다며 찬사를 늘어놓고 있지만 사회의 가치는 쌓아놓은 물질소득이 전부가 아니다.국제시장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대한민국이 건국과정에서 이룩된 기존의 민주주의 국가제도를 하나하나 무너뜨려 오늘날의 불평등사회로 바꿔오던 기간이었다. 그 세월동안 살아왔던 기성세대는 민주사회를 말아먹은 장본인들이었다. 초기의 민주사회가 불평등사회로 바뀐 것에 대해 진보라는 자들이 큰소리칠 자격이 없는 것은 그들이 그 과정의 가장 큰 협력자이었기 때문이다.대표적인 국민기회균등파괴는 중고교평준화와 한글전용이었다. 이것은 진보라는 자들이 주도하고 보수기득권은 못이기는 척 따른 것이다. 가진 것이나 배경 아무것도 없는 집안의 아이라도 오직공부만 열심히 하면 공립의 영재학교에서 길러주는 제도를 없앴다. 조선시대와 달리 국민 모두가 知的언어를 배우고 사용할 수 있었던 시대도 얼마안가 단절되고 말았다. 자기들은 윗세대가 이뤄놓은 민주제도의 혜택 속에서 당장 가진 것은 없어도 노력과 능력만 있으면 삶을 개척할 기회를 가졌지만 자기들이 누린 민주제도를 말아먹어 노력을 해도 앞길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만든 것을 기성세대들은 과연 功致辭할수 있을까. 그렇다면 모아둔 재산을 물려줄 자식에게나 할 것이지 기회를 박탈당한 다른 젊은이들 앞에서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국제시장은 민주주의 기회균등의 국가에서 국민기만적인 봉건주의 신분사회의 국가로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기에 그 괴로운 과정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연변통보 朴京範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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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1
  • 김윤진-서경덕, 삼일절 맞아 '유관순 동영상' 전 세계에 알린다
    (동영상을 기획한 서경덕 교수와 내레이션을 진행한 배우 김윤진) [동포투데이] 제96주년 3.1절을 맞아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영화 '국제시장'의 배우 김윤진이 힘을 모아 '한국인이 알아야 할 영웅 이야기' 제2탄 유관순 열사편을 유튜브에 공개했다고 밝혔다. 7분량의 이번 동영상은 유관순 열사의 일대기 및 독립정신과 3.1운동의 발발 계기 및 역사적인 의미 등을 모아 한국어(http://is.gd/iPLGUl)와 영어(http://is.gd/9bvYch)로 각각 제작했다. 이번 영상을 기획한 서 교수는 "지난해 유관순 열사의 행적이 일본 교과서에는 7종 중 4종에 서술된 반면, 한국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8종 중 1종에만 수록되는 등 우리 역사의 영웅들에 대한 관심이 점차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고 전했다. 또한 서 교수는 "올해는 세계적으로도 종전 70주년을 맞는 의미있는 해이다. 우리 유관순 열사의 활동을 통해 세계적으로도 보기힘든 '비폭력 평화운동 정신'을 국내외 네티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현재 영어 동영상은 유튜브 뿐만이 아니라 미국,프랑스,이집트,중국 등 대륙별 주요 30개국을 선정하여 각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포털 사이트 및 동영상 사이트에 동시에 올려 '3.1운동 정신'을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있는 중이다. 특히 뉴욕타임스,월스트리트저널,CNN,AP통신,로이터통신 등 전 세계 194개국 주요 언론 605개 매체의 트위터 계정에도 이번 영어 동영상을 링크하여 SNS를 활용한 전 세계 홍보도 함께 병행하고 있다. 이번 영상의 내레이션을 맡은 김윤진은 "안중근,이봉창 등 많은 독립 운동가들에 비해 여성 독립 운동가들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좀 무관심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유관순 열사의 재조명을 통해 더 많은 관심을 갖길 바란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서 교수는 독도 및 동해, 일본군 위안부, 일본 전범기, 야스쿠니 신사참배의 문제점 등을 한국어 및 영어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유튜브와 페이스북,트위터 등을 통해 전 세계에 일본 정부의 잘못을 널리 알려왔다. 한편 서 교수는 제3탄 동영상을 윤봉길 의사로 선정하여 현재 준비중이다. 특히 이번 동영상 제작에는 메가스터디가 후원했고 각종 포털사이트 및 아프리카 TV에서도 시청할 수 있다. '유관순 동영상'의 한국어 버전 캡쳐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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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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