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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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태일 시/개산툰 구월
    개산툰 구월 박태일 모아산 질러 넘다 왼쪽으로 내려 서면 화룡에서 룡정에서 너른 평강 들 타고 내린 해란강 걸음걸음 고요하다 동성진 너머 리민 너머 옥수수 키잡이로 서서 파랗게 쏘다니는 구릉 마을 집들은 산협의 가난을 풀풀 날리고 창유리 깨진 틈으로 도닥도닥 옛말 드난다 개산툰 개산툰 구월은 두만강 건너 회령 산천 어디서 오득오득 개암이나 씹는 것일까 걸어 내리고 오르는 시장 마당 지난주 건너왔을 북녘 소식은 어느 집 낮술에 비틀거리고 있을까 아는 이 친척도 없이 나는 이 골짝에 갇혔다 장대교회 붉은 십자가가 국경 철책을 바라고 선 뒹겨장 빛깔 어두운 흙길 따라 룡정으로 연길로 나가는 버스는 그치고 택시 기사 둘 버드나무 아래 버드나무 그늘인 양 빈둥거리는 너머 두만강 수척한 물빛을 숨기며 개산툰 구월은 이제 입을 다문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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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박태일 시/조양천
    조양천 박태일 마을 이층 숲 참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하양 여우가 존다 배달말 깨우친 누나와 배우는 애토끼 귀엣말 조심조심 걸음 옮긴다 마을 이층 숲 누가 들렀나 누가 한국서도 멀리 부산서 온 너구리 아저씨 여름 물골에 부들처럼 무성한 천자문 배우기 배달말 배우기 책고랑 따라 걷는다 살몃살몃 아침부터 한낮까지 동무들 와도 그만 그만 안 와도 여우는 졸음을 살대발처럼 내렸고 마을 이층 숲 계단 아래로 삼월 고슴도치 찬바람이 구른다 마주 선 소학교와 중학교 사이 전깃줄을 뛰는 참새 떼 양조장 굴뚝은 볼 부어 붉고 높아 집집 지붕 더 눌러 앉힌다 기차역 폐품장 흐린 담길은 부스럭스럭 수수 밭머리로 고개 돌리고 근들이술 두 집만 일찍 등을 밝힌 채 저녁 고양이 기다린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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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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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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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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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5)
    ■ 김철균 1 지난 세기 50연대부터 70연대까지 “연변일보”를 비롯한 연변의 조선문신문과 조선말방송들에는 “걱정도감”이란 대명사가 자주 오르군 했다. “걱정도감”이란 말 그대로 자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에 자주 참녜하는 사람을 일컫어 하는 대명사로서 농촌의 호조조, 초급사, 고급사와 인민공사에 있었는가 하면 도시의 직장과 사무실 심지어 가두의 주민위원회에도 가끔씩 있군 했다. 당시 신문과 방송들에서는 “걱정도감”이란 대명사를 흔히 정면인물에 비유했다. 예하면 농촌에서는 집체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바른 말을 하는가 하면 적극 행동하는 사람들이었고 도시의 직장 역시 기업의 이익에 손상을 주는 행위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또한 기업과 종업원들의 안전을 위해 자아희생적으로 일하는 사람 등 부류였다. 하다면 가두와 주민구역에서 가난한 가정을 돕고 동네의 화목과 치안을 위해 자기와는 별반 상관없는 일에 자주 참녜하는 사람 역시 “걱정도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순자가 바로 주민구역의 “걱정도감”이었다. 순자가 “걱정도감”처럼 자기와는 별로 상관도 없는 일에 참녜해온 차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 별의별 희한한 일도 많았다. 한족거지가 쓰레기더미를 들추면서 음식물을 찾아먹는 것을 보자 그것이 가슴아파 음식물을 비닐봉지에 싸서 쓰레기더미가 있는 주위의 벽돌담장위에 놓아주어 거지었지만 보다 깨끗한 음식을 먹게 한 일, 남들 거의 모두가 꺼려하는 한 폐결핵환자(한족)의 집을 경상적으로 방문, 그 집 음식상에 반찬이 너무 없는 것을 보자 김치와 감자 등을 갖다주었고 신흥소학교 부근에서 신수리를 하는 한 여인(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한테도 김치 등 반찬거리를 갖다준 일, 두부장사를 하는 한족부부를 도와 돈을 받아주며 도와준 동시에 역시 김치 등을 갖다준 일, 동네에서 남편이 임신한 아내를 구타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것을 말리다가 어깨까지 상하여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고생하고 있다는 일, 계모의 슬하에서 불쌍하게 자라는 아이한테 밥을 먹이고 옷도 주고했다가 그 애의 계모한테서 “별 싱거운 일에 참견한다”고 원망까지 산 일, 동네의 하수도 뚜껑이 파손되자 그것을 손수 만들어 덮어 놓은 일…이러한 일들은 한입으로 다 말할 수 없고 한두페지의 책에 다 적을수 없었다. 그렇다면 순자가 “걱정도감”으로 남들이 외면하는 일에 발벗고 나선 수많은 사연중에서 한 두 가지만 적어보기로 하자. 그것은 아마도 지난 세기 60연대 중반의 어느 여름날에 있은 일로 추정된다. 그 날 집에 갑자기 손님이 오게 되었는데 마땅히 대접할 것이 없었다. 그날은 몹시 무더웠다. 마땅히 대접할 것이 없는데다 거기에 날씨까지 찜통처럼 무더운지라 순자는 그 손님한테 냉면이라도 사다 대접하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요즘의 젊은 부부들은 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 때 그 시기는 집에 손님이 오면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오는 일 같은건 거의 여자들의 담당이었다. 거기에 순자네 가정은 특별했다. 남편이란 단위의 사업에만 신경쓰고 가정일에는 일절 참녜하지 못하게 했으니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오는 일 같은 건 더욱 어림도 없었다. 이렇게 집을 나온 순자가 국수집으로 종종걸음을 놓던 중 불현듯 길가에 쓰러져 있는 한 청년을 보게 되었다. 당시 거리로 오가던 많은 사람들은 그냥 그 청년을 보고도 지나쳤다. 시끄러운 일을 찾아할 필요가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순자만은 그럴 수 없었다. 순자가 가까히 가서 보니 술냄새는 없었고 얼굴색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술을 마시고 취해서 누운 것이 아니라 다른 원인으로 쓰러진 것이 분명했다. 그대로 그냥 방치해두었다가는 꼭 잘못될 것만 같았다. “여보시요. 이 청년이 병으로 쓰러진 것 같은데 절 좀 도와주세요. 병원에 좀 데리고 가자요.” 순자는 지나가는 행인들을 불러세우자 몇몇 청년들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순자는 다시 밀차를 밀고 가는 한 노인을 붙잡고는 사정하였다. “이 밀차를 20분 정도만 씁시다. 저 청년이 위험한 모양인데 연변병원까지만 밀차에 싣고 갑시다.” 그 노인이 밀차를 내주자 순자는 그 몇몇 청년들과 함께 그 청년을 밀차에 실어서는 연변병원으로 향했다. 연변병원에 도착한 순자는 자기의 돈으로 진찰권을 뗀 후 그 청년을 구급실에 들여보냈다. 그 청년을 구급하는 동안 순자는 구급실밖에서 그 청년의 생사 때문에 걱정하다 보니 냉면을 사려던 계획을 까맣게 잊었다… 약 한시간 뒤 그 청년이 구급을 거쳐 쇼크상태에서 깨어나자 순자는 또 그 청년한테 찐빵을 사다주고 끓인 물도 가져다주고 팔다리를 주물어주고 하면서 오랫동안 간호해주었다. “젊은이, 집이 어디에 있소? 연길이겠지?” 그 청년이 겨우 말하기 시작하자 그 청년한테서 집 주소를 알아내고는 연변병원 앞 골목을 여기저기 누비면서 겨우 그 청년의 집을 찾아낸 뒤 그 청년의 상황을 집에 알려주었다. 헌데 당시 그 청년의 어머니란 여인은 순자가 수고했다고 인사를 하기는커녕 “그앤 원래 그래요. 그앤 간질병(전간병)이 있어서 자주 그렇답니다” 라고 하며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좋은 일을 하고도 쓴 소리를 듣는판이었다. 하지만 그 시각 순자는 그런 것에는 개의치도 않았다. 원체 칭찬이나 받자고 한 일이 아니였으니까. 후에 알고보니 그 여인은 그 청년의 계모였던 것이다. 한편 그날 집에서는 냉면을 사러 간다던 순자가 몇시간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일이 생겼다고 온 동네와 냉면집으로 오가는 길손들과 물어보며 난리를 벌였다. 그러다가 길손들로부터 웬 아주머니가 청년들과 함께 길가에 쓰러진 청년을 밀차에 싣고 연변병원으로 가더라는 말을 듣고 순자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느라고 냉면을 사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순자가 지친 몸을 휘청거리며 집에 들어설 때는 저녁밥을 지을 때가 막 다가오고 있었다. …… 또 한번은 어느 해 겨울날에 있은 일로 역시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구해준 일이다. 그날은 추워도 그해 겨울중에서도 유별나게 추운 날이었다. 그날 저녁무렵 순자는 석탄을 사려고 석탄판매부에서 줄을 섰다가 너무나도 추워 옷을 더 껴입으려는 속 셈에서 집으로 발길을 향하던 중 길가에 쓰러져 있는 한 남성을 보게 되었다. (참, 남정들은 술 때문에 큰 코 친다니깐.) 순자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그 남성이 술에 취한 채 쓰러져있는 것 같아서 더욱 지나칠 수 없었다. 여름도 아니고 이 엄동설한에 얼어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추운 겨울에 바깥에서 이렇게 자면 어떻게 해요. 빨리 일어나세요.” 그 남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아주버님. 손 좀 빕시다. 저기 한 사람이 술취해 누웠는데 아무래도 얼어죽을 것만 같습니다.” 순자가 길가는 한 남정을 붙잡고 도움을 청하자 그 남정은 순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저 사람이 아주머니한테 뭔데 그럽니까?”라고 반문하고는 휭하니 가버렸다. 겨울날 저녁이라 행인들도 퍽 드물었다. 그 뒤 순자가 재차 두사람을 붙잡고 도움을 바랐으나 그들 역시 모르는체 하면서 그냥 지나가버렸다. 바로 이 때 공원다리쪽으로부터 트럭 한대가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달려왔다. 순자는 저 트럭을 세워야 하겠다고 생각하고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무작정 트럭앞을 막아나섰다. “칙 ㅡ ” 트럭은 급정거를 하더니 중년운전사가 차창을 열고 얼굴을 내보이면서 “무슨 짓이요?”라고 투명스럽게 내쏘았다. “미안합니다. 다른 일이 아니라 저기 한 사람이 술취해 길가에 누웠는데 그대로 놔두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제야 운전사는 말씨를 눅잦히며 “그렇다고 차앞을 막아서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면서 차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순자는 그 운전사와 함께 그 중년남정을 차에 싣고는 가까이에 있는 파출소로 찾아갔다. 헌데 파출소 일군들은 “술취한 사람은 파출소에서 책임질 범위가 아닙니다. 병원이나 다른 곳으로 가져가보십시요”라고 하며 받아주지를 아니했다. 그러자 트럭운전사마저 “파출소에서 받아주지 않는 주정뱅이를 내가 붙잡고 있을게 뭐요”라고 하더니 트럭을 몰고 사라져버렸다. 파출소에서 받아주지 않고 트럭운전사마저 사라져버렸지만 순자만은 그 술취한 남정을 버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의 힘으로 그 덩치가 육중한 남정을 업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를 어쩐담?…) 어찌할 방도가 나타나지 않아 궁리하던 순자는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의 보일러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이 보이자 무작정 그 보일러실로 달려갔다. “여보세요. 절 좀 도와주세요. 저기 한 사람이 술에 취해 누웠는데 얼어죽을 것 같아요.” 순자가 눈물이 글썽하여 호소하자 보일러불을 때던 2명의 노동자가 생각밖으로 아주 쉽게 호응해나섰다. “그래야지요. 우리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앞으로 어떤 일이 있겠는지 장담할수 없는게 아닙니까?! 그리고 아주머닌 참 맘씨 착한 분이군요.” 순자는 보일러실 2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술취한 장정을 밀차에 실어 보일러실로 들여가서는 따뜻한 온돌위에 눕혔다. 그날 역시 순자의 남편과 자식들은 순자가 저녁 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자 거리와 갈만한 집들을 돌아다니며 찾았다고들 한다. 그날 밤 순자는 또 그 술취한 장정이 근심되어 집에 돌아가 남편과 아들의 옷 그리고 신들 중에서 그한테 맞을 신과 옷가지들을 가져다주고 그가 숨을 고르게 쉬면서 의식을 회복한 뒤에야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보일러실의 노동자들에 따르면 그 장정은 연길시 ××기업에 다니는 노동자라고 했다. 그러자 순자는 또 수소문해가며 ××공장에 다닌다는 그 장정의 집을 찾아가서는 그의 아내한테 “남정들이 저러는데는 집 사람의 잘못도 있을 수 있으니 아무쪼록 집안에서 바가지를 긁는 일이 없도록 하라”며 여러가지로 교육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걱정도감”중에서도 순자와 같은 “걱정도감”은 없었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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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1
  • 오묘한 세계대백과(23)
    하늘을 보면 간혹 사랑스러운 처녀가 세수를 한 후 머리에 아름다운 리봉을 드리운 것 같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곧바로 무지개이다. 무지개는 흔히 여름날 비가 내린 후에 출현, 이 때 공기 중에는 많은 작은 물방울들이 생기는데 태양이 공기 중에 잔류해있는 이런 물방울들을 비추면 그 것들이 홍, 증(橙), 황, 녹, 청, 남, 자(紫) 등 일곱가지 색갈을 낸다. 아울러 태양의 정면에서 위로부터 아래로 색갈무늬가 배열되면서 아름다운 채색호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보게 되는 무지개이다. 무지개는 넓을 때가 있는가 하면 좁을 때도 있으며 환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두울 때도 있는데 그 명랑여하는 공기 중 물방울의 크기에 따라 다르다. 물방울이 클수록 무지개의 색채는 선명하고도 찬란하고 채색띠가 좁으며 물방울이 작을수록 무지개의 색채는 어둡고도 채색띠도 넓어진다. 연구에 따르면 무지개의 출현은 당시의 기후변화와 연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늘에서의 무지개의 위치를 보고 어느 하늘이 맑고 어느 하늘에서 비가 오는가를 추측할 수가 있다. 만약 동방하늘에 무지개가 있을 경우 우리가 서있는 곳은 비가 내릴 가능성이 적고 서쪽하늘에 무지개가 있을 경우 우리가 서있는 곳에 비가 내릴 가능성이 크다. 한편 만약 맑은 날 태양을 등지고 공중에 물을 뿌리거나 물보라를 날리면 얼마든지 인조무지개를 만들 수도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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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8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 (23)
    우르네스 목조교회 우르네스 목조교회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노르웨이, 지점: 송노 표르다네주 함의: 북유럽의 목질문화가 종교건축에서의 완미한 체현임 우르네스 목조교회(奥尔内斯木板教堂)는 내부의 원목기둥이 선박의 돛대와 비슷하다고 해서 “돛대교회”라고도 부른다. 이 교회당은 기원 12세기에 세워졌는데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교회당이며 지금도 내부에는 중세기의 수난당했던 예수의 목질조각상과 두개의 동으로 된 초받침대가 있다. 그리고 성당 및 포도단(布道坛), 노래와 시를 읊던 무대 및 긴의자와 벽화 등은 모두 1700여년 전의 물건들이다. 또한 교회당내의 장식은 대부분 백년송을 재료로 이용, 고풍스럽고도 우아한 것이 특점이다. 못과 나사 등을 쓰지 않은 성당 우르네스 목조교회는 3층의 목조건물로 된 건물로서 매개 층마다 모두 지붕이 있어 흡사 동방의 사원과 비슷하기도 하다. 이 건물이 기타 일반 원목건축 성당과 부동한 점이라면 이 건물은 기둥과 널판자가 시로 맞물리면서 정체를 고정시켰는데 그 어떤 못이나 나사를 쓰지 않은 것이 특점이다. 그리고 성당은 견실한 목질결구와 아름다운 자태로 평형태세를 유지하고 있어 세계종교건축물 중 하나의 걸작으로 남게 되었다. “목조성당의 여왕” 우르네스목조성당은 풍격이 소박하고 비록 수차 재건되었지만 여전히 고풍스러운 건축풍격을 잃지 않은 전형이다. 건물은 지면의 견실함과 미관을 위하여 일반 건축물에서 쓰는 기초기둥을 쓰지 않고 모두 “돛대”형식을 대체하였다. 왜냐하면 열악한 기후조건에서 견실한 “돛대”형식의 횡향들보(橫向支撑)와 종향(纵向)기둥이 건물정체의 견고성을 보장해주고 있기때문다. 때문에 이 견실한 목조건물성당은 “목조성당의 여왕”으로도 불리우게 되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9-08
  • 발렌타인데이 날 있은 일
    ■ 전영실 발렌타인데인(情人节)날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내가 시티폰가게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웬 중년남자가 손을 내밀어왔다. 올려다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아, 얼마나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인가?! 21년전의 첫사랑 남자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줄이야. “살아 있으면 이렇게 만나게 되는구만.” 그 남자도 무척 흥분된 표정이었다. 나는 24살이 되는 그 때 중매군의 소개로 그 남자를 만났었다. 훤칠한 키꼴에 얼굴도 영준하고 대졸생인 그 남자, 총명이 넘치는 그 남자의 모습에 나는 첫 눈에 마음이 끌렸다. 그 때 나는 대졸생을 무척 흠모했다. 얼마간 요해하는 과정에 그는 모름직이 나의 마음속의 우상이 되었으며 몰래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한 남자에게 그토록 마음이 끌려보기는 처음이었다. …… 그런데 얼마 뒤 결국 내가 바라지 않던 소문이 들려왔다. 바로 그 남자의 과거였다. 그 남자의 속내를 아는 분이 귀뜀해주기를 그 남자한테 약혼녀가 있는데 지금 그녀를 떼어버리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억이 막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같은 여자의 마음에서 내가 배신당한 그런 기분이었고 마음속에서는 이름할 수 없는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헤여지고 말았다. 그 남자의 인격에도 의심이 갔고 몇해동안 뒷바라지를 해준 그 시골쳐녀도 가긍스러웠고 더구나 남의 발등을 밟고 행복을 만들고는 싶지 않았다. 지금 세월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지 모르나 그 때 그 세월에는 크게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었다. 물론 헤여질 때 나의 가슴에는 여전히 그 남자에 대한 일루의 미련이 남아있었지만 말이다. 첫 사랑이란 잊을 수 없는가 보다. 그래서인지 지금 남편과 결혼하여 20여년을 살아오면서 가끔 그 남자를 떠올릴 때도 있었다. 이전에 길림에서 사업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그 시골여인과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가끔 남편과 불화가 있을적이면 그 남자와 살았다면 어떻했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하였다. 그래서 여자들은 문턱을 넘으면서도 열두가지 생각을 한다고 하는가 보다. 이렇게 잊혀지지 않던 그 남자가 그날 느닷없이 근 20여년만에 내 눈앞에 불쑥 나타난게 아닌가. 세월이 흘렀지만 총명이 넘치는 그 모습은 여전했다.. 그 남자는 유정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그 눈길을 피했지만 웬지 나의 가슴에도 잔잔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퇴근한 뒤 시간을 낼 수 있겠소?” 나는 저도 몰래 머리를 끄덕이었다. 퇴근시간까지는 한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나는 전혀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아니했다. 마치 열두마리의 토끼새끼를 품기라도 한듯 콩당콩당 심장이 뛰고 저도 모르게 이 양볼에 열이 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퇴근종이 울리기 바쁘게 그를 따라 직장대문앞에 나갔더니 택시가 진작 대기하고 있었다. “추억다방”에 도착한 후 그는 면목도 모르는 다방의 마담한테 나를 소개하며 “나의 첫 사랑이라니깐” 하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첫사랑”이란 그 표현은 어쩐지 께름적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알고도 모르는 것, 께름직했던 느낌은 순간에 눈녹듯 사라지고 다시 애틋한 정이 찰랑거렸다. 그날 우리는 서로 대방의 사업과 가정형편을 물었고 그립던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는 단 한번도 나를 잊어본적이 없다고 몇번이나 곱씹어 말하였다. 그는 신문과 잡지들에서 나의 글도 보군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렵게 살아왔었다. 그 시골처녀와 결혼을 한 뒤 그녀의 호구와 직장을 해결하느라 많은 돈을 썼고 세집도 여러번 이사를 했다고 한다. 지금의 형편도 여의치 못한듯 했다. “영실인 잘 살지? 집도 몇채 있다면서…?” 집고생은 한번도 한적 없었다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몹시 부러워했다. “우리 둘이 결혼했더면 고생 모르고 잘 살았을텐데, 우리 둘이 결혼했어야 하는건데…” 그는 자기의 혼인에 대해 김빠진 소리만 하였다. 나는 그러는 그 남자한테 연민의 정이 생겼으며 더구나 헤여질 때 “며칠 뒤면 발렌타인데이인데 그날 우리 다시 만나기요”하는 말을 들으며 이상야릇해나기도 하였다. 기다리던 발렌타인데이 날이었다. 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하루종일 소녀처럼 시티폰을 들여다 보군 했다. 아니나다를가 퇴근무렵, 시티폰이 울렸다. 시티폰을 들자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실이 나요… 지나번 약속 안잊었지?” 나는 무척 흥분되면서도 여자의 체신을 지키느라 일부러 “그만 깜박했네요. 오늘은 일이 많은데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꼭 할 말이 있다”면서 늦게까지라도 지난번 만났던 “추억다방”에서 날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오래만에 만난 첫 사랑 남자가 더구나 발렌다인데이날 나한테 꼭 할 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프로포즈? 나는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혹시 한다발의 장미꽃을 안겨주려고? 그렇지 않으면…? 다방으로 갈 무렵,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어수선하던 머리도 다시 쓰다듬었다. 젊은 색시들이 “언니 어디에 가기에 이렇게 이쁘게 하고 가요?” 하고 물을 때 “너희들만 애인이 있어 나도 축하해줄 사람이 있어”라고 하면서 갸웃거리는 처녀애들을 뒤로한채 다방으로 향하였다. 다시 찾아온 이 남자, 내곁에 있지 못했어도 잊어본적 없었던 이 남자. 내 인생에서 다가서지 못할 꿈으로만 남아있는 그 남자, 생각만 하여도 활랑거렸다. 내가 추억다방의 문을 열었을 때 기다리고 있던 그 남자는 원망의 눈길 대신 무척이나 반가워하였다. 뜻밖에 그 남자는 장미꽃을 안겨줄대신 후ㅡ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속탄이야기를 터놓자고 기어이 만나자고 했다는것이었다. 지저분한 명태껍질, 질서없이 열어제낀 빈 맥주병들 그만 마시라고 권고했지만 소용없었다. “참 저한테 꼭 할 말이 있댔잖아요? 어서 하세요.” 나는 기분을 바꾸려고 이렇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 순간, 그 남자는 나의 손을 덥석 잡는 것이 아닌가. “영실이 미안해, 영실이한테 이런 말을 하게 돼서, 집사람을 외국에 보내려는데 돈2만원 가량 모자라, 영실이 좀 도와줘. 영실한테 그만한 돈은 있잖아?”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 뜻밖의 충격에 내가 마음속에서 달포 이상 쌓아올렸던 기대와 희망의 모래성은 삽시에 무너져내렸다. 남의 이야기로만 듣던 다른 여자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여자들의 돈을 바라보고 혼인 했다던 남자들의 이야기, 여자의 돈을 꾼 뒤 바람처럼 사라졌다는 다른 남자의 이야기…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차마 세상에 그런 일이?”하며 드라마에서나 있을 일이라 비웃던 나였는데 오늘 내가 당하고 있는게 아닌가. 물론 내 앞의 첫사랑 남자가 그런 이야기속의 주인공이였던 A, B, C, D처럼 사기군은 아니라면서 자신을 위안하고는 있었지만 말끝마다 “첫사랑”이라면서 그것도 낭만으로 넘쳐야 할 발렌타인데이날에 이처럼 구구하게 돈구걸을 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한단 말인가? 가슴속에 소중이 간직해왔던 꽃병이 짤랑 하고 박산났다. 왜서 그리움과 환상의 첫사랑 여자앞에서 이런 비굴한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내 앞의 이 남자, 그리고 이야기들속 사내대장부들의 당당한 기상이 죄다 사그러졌단 말인가? 이 사내들을 이렇게 만든건 단지 그네들만의 탓이란 말인가? 그날 밤 그 남자가 많은 말을 털어놓았지만 한마디도 나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이 초라한 남자한테 마음이 흔들린 내가 더 초라해 보였다. 내 마음속의 진심을 읽어내지 못한 그 남자는 내 손목을 다시 잡으면서 말을 했다 “영실이, 왜 대답이 없소?” 나는 더욱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뜨거운 것이 양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괞찬소, 내가 말을 잘못 꺼냈구만. 이런 말 그만 두고 … 다음 오는 3.8절에 내가 영실일 기분좋게 해주겠소…” 그 남자는 이렇게 너스레를 쳤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단호히 거절하지도 못하고 그 남자에게 작별을 고했다. 나는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그 남자를 뿌리치고 혼자 걷기로 했다. 찬기운이 얼굴로 맞혀왔다. 가로등과 길 양켠의 장식등들이 명멸하는 도시의 활홀한 야경이 펼쳐졌다. 발렌다인데이밤이라 연인 혹은 애인들이 떠들썩하며 지나가고 꽃파는 남녀들이 호객을 하느라 분주했다. 식당, 노래방, 다방의 네온싸인들이 깜박거리면서 발렌타인데이를 경축하고 있었다. 밤은 점점 도가니처럼 달아올랐다. 하지만 내 가슴은 냉장고처럼 싸늘해지기만 했다. 나는 집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 내처 누구를 향해서인지도 모르고 이런 물음표를 내던졌다. 아, 저 사람들은 다 행복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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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6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5)
    ■ 김철균 “사람은 모든 것에 다 사연이 있는 법이란다. 절대 남의 험담을 할 필요가 없는 거란다. 뒤동네의 영덕이네 3형제를 보아라. 3형제중 그래도 제일 공부를 많이 하고 제일 똑똑했던 사람이 둘째인 영덕이었는데 지금의 그를 보아라……” 영덕이란 당시 30살 정도가 된 홀아비었는데 정신분열증에 걸려 한밤중에도 자주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대동강변 부벽루에 산보를 하는 이수일과 심수애는 양인이로다…”를 부르면서 희트테리를 부리군 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왜 정신분열증에 걸렸는냐 하면 그건 어렸지만 나 역시 동네사람들한테서 들은터였다. 일찍 그는 공부를 잘하여 연변제4고중(현재의 훈춘시2중)에까지 다녔었다. 동네사람들에 따르면 당시 그는 혼자 무선통신기(无线电台)를 조립하여 외부에 신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한 수재였다. 그 일로 훈춘현 공안국에 잡혀들어가 며칠간의 조사를 받았으나 원체 출신이 좋은데다 외국과의 연계같은 것이 전무였고 그냥 취미로 만든 것이 밝혀지면서 오히려 장춘의 어느 연구소에서 데려간다 어쩐다 하는 말까지 돌았었다고 한다. 헌데 그가 정신분열증에 걸렸던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고중시절 서로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은 훈춘시가지에 집을 둔 학생이었다. 당시 그 여학생도 영덕이를 몹시 좋아했으나 그녀의 부모가 한사코 반대했던 것이다. 이유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학생이기에 연애는 일찍하다는 것이었다. 헌데 그것이 진정한 이유가 아니었다. 영덕이가 농촌농민의 자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가정에서는 둘 사이를 뜯어놓으려고 연 며칠동안 딸을 가두어놓고 학교에도 못가게 하였다고 한다. 결국 영덕이는 절로 그 여학생의 곁에서 물러났다. 헌데 고민끝에 그것이 병으로 되어 결국 정신이상증에 걸렸고 나중에는 연변4고중에서 퇴학까지 하게 되었으며 병세가 점점 악화돼가기만 했다. “사람이란 너무 총명하고 머리가 좋아도 운명이 사납네라. 사람은 적당한 팔자대로 살아야 한다. 욕망은 크고 그 욕망이 실현되지는 않고 하다가는 병이란 것이 생긴단다.…” 아버지의 얘기였다. 아버지는 또 장애인으로 절망하다 물에 뛰어들어 자결한 청년의 아야기와 결혼 뒤 애를 낳을 수 없어 시집에서 쫓겨난 뒤 친정에서도 들여놓지 않자 한족 홀애비와 동거하고 있는 김옥란이란 여인의 이야기 등으로 많은 것을 들려주었다. 그 당시 이내 나이는 고작 8~9살이었던지라 아버지의 말뜻을 3분의 1가량도 터득할 수 없었던 나였다. 그저 왜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가? 김옥란이란 여성은 왜 한족홀아비와 살고 있는가? 또한 영덕이란 아저씨는 왜 정신병자가 됐는가? 물론 이 모든 것에 대해 그저 현상만 보고 생각했을뿐 그 깊이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할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내가 썩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아버지가 나한테 들려준 얘기들은 말속에 말이 있었다. 이는 아버지가남의 사연을 빌어 자기 자신이 살아오면서 심리고통을 겪어온 것을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었다. 좋게 말하면 그랬고 다른 한편으로 분석하면 그것은 변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일제시기 제대로 된 공부는 못했지만 조선으로부터 유정촌에 와서 야학을 세운 박씨네 형제로부터 시국과 사회에 대한 교육을 일정하게 받았던 아버지는 그 시대로 말하면 비교적 개방적인 청년이었다. 그러했기에 아버지는 부모(나의 조부모)들끼리 맺어준 혼인에 대해 강한 거부의식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 표현의식이란 곧바로 집을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집을 뛰쳐나가 근로봉사로 일본군이 벌여놓은 공사장에 가서 부역을 했고 광복 후에는 민주연군에 참가하여 중국내전에 투신했으며 나중엔 조선으로 나가는 “혁명투사”로 되기까지 했다. 혁명투사ㅡ 참 그럴듯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행동을 놓고 진정한 혁명가이고 애국자라고는 불러주기가 좀 그렇다. 적어도 자식인 나부터가 그렇다. …… 넷째 할아버지와 다섯째 할아버지에 의해 조선으로부터 “끌려온 뒤”에도 아버지는 각종 구실을 대서는 집을 나가 10여일씩 나돌다가 돌아오군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7년 아들인 내가 태어난 뒤부터는 일절 밖에 나돌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그 시기 아버지가 10여일씩 밖으로 나돌 때 과연 어디에 갔었겠는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 나의 엉뚱한 추측이겠으나 당시 아버지가 간 곳이 조선에 있다던 그 여인한테로 간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그럼 그 여인한테로 갔다면 왜 다시 돌아왔을까? 이것 역시 미스테리이다. 나의 판단이 맞다면 아무리 봉건적 혼인에 반기를 들고 나선 아버지었지만 윗어르신들이 건재하는한 그 어르신들의 뜻을 거슬리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로부터 연속 딸 둘을 낳다가 1957년에 아들인 내가 태어나자 다시 들떠있던 마음을 다잡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그렇게도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내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술이 얼근히 된채 동네를 돌아다니며 “우리 집에서 아들 낳았소”하며 자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나의 머리속에서도 기억이 생생하지만 아버지는 어디에서 돌배 한알이 생겨도 호주머니에 건사했다가는 몰래 나한테 주군 했었다. 그러니 내가 들떠있던 아버지의 발목을 묶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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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6
  • 윤리문화시리즈(2) 정조띠의 기원
    [동포투데이] 기원전 수백년 홈로스는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화신” 호언스타스의 아내 아브로디나가 자기의 동생과 성관계를 발생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대장쟁이가 호언스타스한테 몸에 붙는 코르셋(紧身褡- 여자의 속옷)을 만들어주에 아내한테 입히도록 했다. 그러자 호언스타스의 아내 아브로디나는 더 이상 남편밖의 남성과 성관계를 가질 수가 없었다. 하다면 이 코르셋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먼저 나온 정조띠의 형태라고 할 수 있었다. 현재 사람들은 정조띠의 발명을 십자군의 동정시기인 기원 11세기로 추측하지만 이는 실제적인 증거가 없다. 정조띠에 관한 유럽의 기재에 따르면 정조띠의 발명은 1405년 8월 28일이었다. 시인 K 지샬은 이날 정조띠에 관한 시와 함께 한장의 그림도 완성, 그는 “피렌체(佛罗伦萨) 남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무거운 철띠로서 잠그면 이런 모양이 된다”고 설명했다. 당시 그의 시에는 이딸리아의 로마, 베니스, 밀란 등 도시들에서 이런 정조띠를 만들고 있다는 단락이 있었다. 또한 다수 역사고찰자들의 증명에 따르면 이딸리아 파도바의 폭군 프랑시스크 2세(14세기 말 즉위)가 최초로 자기의 모든 부인들한테 정조띠를 착용하게 했는데 이는 시인의 기재와 맞아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 이딸리아 베니스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정조띠는 당시 프랑시스크 2세의 한 왕후가 사용하던 것이다. 그 뒤 유럽에서는 15-18세기 기간에 만들어진 정조띠는 주로 상층사회에서 유행됐고 중세기 기간에 만들어진 정조띠는 주로 부유계층에서 유행돼왔다. 그러다가 후기에 들어 정조띠는 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져 상아를 박아넣은 것이 있는가 하면 금은보석을 박아넣은 것도 있었으며 점점 화려한 장식품처럼 만들어지는 쪽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런 정조띠는 오랫동안 착용하기 불편하기 그지 없었으며 위생문제는 더욱 잘 해결할 수 없었다. 유럽 19세기 남성용 정조띠 출현 영국 빅토리아여왕시기(1836-1901년)에 들어 영국에서는 미성년 남자애들의 수음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남자애들은 밤에 잘 때에도 정조장치를 착용하도록 하였다. 당시 남자애들의 수음문제가 사회문제로 가장 현저하고도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녀자애들이 착용한 수음방지용 정조장치는 역사상의 정조띠와 대동소이(大同小异)하였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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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5
  • 한주원 칼럼 - 경찰의 함정수사 유형 소개
    ■ 한주원 함정수사는 ‘법정드라마’에서 많이 나오는 단어이다. 과연 함정수사란 무엇이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번에는 함정수사를 당했을 때, 답변 요령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함정수사는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범의유발형이다. 원래 그런 생각이 없었던 사람인데 사복경찰관이 계속 종용을 해서 덜컥 미끼를 물고 만 경우이다. 두 번째는 기회제공형으로 원래 그럴 생각이었던 사람인데 경찰이 미끼를 던졌을 때 덜컥 물고 만 경우이다. 그렇다면 실전에서 그 결과는 어떻게 작용할까. 첫 번째의 경우는 초동수사부터 검찰, 그리고 재판까지 변호인 조력을 잘 받는다면, ‘공소기각’을 넘어 무죄까지 나올 수 있다. 두번 째의 경우, 대부분 처벌이 된다. 두 사건 모두 형사처벌을 벗어나는 것은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다. 이 두가지 요건에 ‘원래 그런 사람’ 이라는 부분이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동수사부터 아무 말이나 하면 ‘자승자박’,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는 것이다. 묵비권은 나쁜 것이 아니다. 내가 법리적으로 모르고 부족하기 때문에 조력자를 내세워 진술을 하기 전까지는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은 좋다. ‘저 말 한마디가 그렇게 힘든 일인가요?’ 혹은 저렇게 말하면 앞에 있는 경찰관이 ‘친절한 태도를 뒤로하고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 것 같고, 또 그분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못하시는 건가요?’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다. 법적으로 충분히 권리를 내세울 수 있는 국민이므로 주눅이 들어서 선처만 바랄 필요는 없다. 죄가 있고 없음은 당당하게 재판부에서 받으면 된다. 미리 인정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경찰관이 연행을 하면서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고 불리한 질문에는 묵비권을 행사 할 수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변호인을 선임해서 진행하겠다고 말하고 변호인 선임을 위해서 가족들 지인과 통화를 하도록 해달라고 하면 된다. 이를 안 된다고 하는 경찰관은 없다. 그걸 막았다면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범행에 도주 우려가 없다면 긴급 연행되어도 금방 풀려난다. 긴급연행에서 진술할 필요는 없다. 나가서 변호인 선임해서 다시 조사 받으러 오겠다고 한다면 대부분 풀려난다. 따라서 법대로 차근차근 진행하면 된다. 통상 형사사건 선임료는 민사사건 선임료 보다 많이 높다. 잘 판단해서 인생에 있어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낙인 찍히지 않도록 잊지 말아야 한다. 함정수사뿐만 아니라 어떤 사건이든 정확한 증거가 없이 그저 진술 하라는 대로 묻는대로 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출처: 법률사무소 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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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4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4)
    ■ 김철균 3 학교의 과외보도원을 하면서 동시에 빈틈없는 자녀교양 역시 순자의 삶에서의 주요한 구성부분이었다. 자녀교양에 들어 순자는 우선 연박한 지식을 갖춘 인재로 되기 먼저 참된 인간이 되도록 자녀들을 교양하는데 주로 모를 박았다. 위에서도 언급되다싶이 순자는 가정 구성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공약을 제정했는데 거기에는 아무리 간고하고 어려워도 남을 도울줄 알아야 하지만 남한테 함부로 손을 내밀지는 말아야 하고 남한테서 뭔가를 받아도 꼭 받아도 될 것인지를 생각해보고 받아야 하며 주은 돈이나 물건은 주인한테 돌려주며 주인을 찾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조직에 바쳐야 한다는 등이었다. 이 일련의 공약을 순자는 자녀들을 교양할 때에도 100%로 적용하여 에누리없이 실행하였다. 그리고 자녀들은 여러명 있었지만 큰 아들 영남이에 대한 요구는 그 어느 형제에 비해서도 각별히 높았다. “영남아, 넌 이 가정의 제일 나이가 많은 자식이자 장자이기도 하다. 네가 집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가에 따라 동생들이 바르게 자라는가 아니면 기로에 들어서는가 하는 것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부모가 없을 때에는 장자인 네가 동생들을 잘 이끌어야 하기에 너의 어깨에 놓인 임무가 과중하단다.” 큰 아들 영남이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러루한 교양을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인지 영남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바자루를 쥐고 마당과 골목 등을 쓰는 것부터 그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난 후에는 학교에 다니는 영순이와 영옥이가 옷을 입고 책가방을 메는 것까지 거들어준 다음에야 문밖에 나섰으며 꼭 부모님한테 “다녀 오겠습니다”란 인사를 남기고서야 떠나군 했다. 어른을 존경하고 어른의 말씀을 명심해듣는 것 또한 순자가 자식들한테 배워준 미풍양속 중의 하나였다. 특히 애들한테 세대주인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고 아버지를 존경하도록 타일렀는데 이는 결코 봉건사상과 봉건관념이 아니라고 순자는 생각했다. 이 역시 장자인 영남이가 솔선수범으로 나서도록 순자가 교양을 시켰는데 아니나 다를가 영남이의 행동은 마치도 거울마냥 동생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아버지가 아침에 출근할 때거나 저녁에 퇴근할 때면 형제들은 어김없이 “아버지, 잘 다녀오십시오”, “아버지, 잘 다녀오셨습니까?”하고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한 자식들은 자기네 부모한테만 예의가 밝은 것이 아니라 남들한테도 마찬가지었다. 하여 동네에서는 물론 위생학교의 교원들도 순자네 가정에 올 때마다 자식교양을 참 잘한 가정이라고 부러워하군 했다. 자녀들은 공부도 잘했다. 순자는 애들한테 공부를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애들은 순자가 수학이나 조선어문같은 과목을 잘 배워주기에 순자네 집에 와서 숙제를 하고 복습하기를 좋아했는데 순자는 우선 큰 아들이 공부할 시간, 큰 딸이 공부할 시간 등을 짜놓고 짧은 시간내에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요령 등을 배워주기도 했다. 그리고 과외복습제도를 정하였고 애들의 공부가 끝나면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애들이 한 복습과 숙제를 반드시 검사하고 나서야 시름을 놓군 하였다. 결과 자녀들 모두가 반급에서의 학습성적순위가 앞자리를 차지했으며 거기에 사상품성까지 우수하니 하나같이 반장, 부반장과 학습위원 등 반급의 간부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신흥가두에 집을 둔 학생들은 한결같이 순자의 말이라면 100%로 따라주었다. 그 중에는 이전에 공부하기 싫어하고 거리에서 집단폭력에나 참가하며 말썽을 부리던 애들도 몇몇 있었는데 순자가 가두의 총 보도원을 맡자 그런 애들마저 나쁜 버릇을 고치면서 공부에 열중하였고 따라서 공부성적도 직상승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런 자식을 둔 가정의 부모들은 “총 보도원 순자선생한테 학생을 옳바르게 이끄는 비방이 있다. 부모도 어쩔 수 없이 내버려두는 애들을 저렇게 바른 길로 가게 할 수 있느냐”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편 그제날 하남가의 주정부 서쪽동네에서 함께 살던 의학원의 정규창 교수의 부인 조분단 여사는 이 곳을 지날 때마다 며칠에 한번씩 약속이라도 한듯 순자네 집에 들리군 했다. 딱히 일이 있어 들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순자네가 살아가는 모습이 궁금하여 들릴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순자네 자식들은 “큰 어머니 오셨습니까”라고 꾸벅 경례를 하면서 살갑게 굴었다. 그러면 착하고 예의가 바른 영남이네 형제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군 하였다. 특히 그 중 순자의 딸들인 영순이, 영옥이, 영애 등에 대해 더욱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고와하였는데 어쩌보면 조분단 여사가 일부러 영순이와 영옥이를 보려고 다는다는 감을 주기도 했다. 하긴 순자네가 딸 셋이 있는 반면 조분단 여사네 자식들은 몽땅 아들뿐이었다. ……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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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1
  • 윤리문화시리즈(1) 정조띠 성문화
    [동포투데이] 역사상 여자를 가두어놓고 여자의 은밀부위에 자물쇠를 잠그는 등의 잔혹성은 어떻게 보면 황당할 정도였다. 여자의 은밀부위에 자물쇠를 잠그는 것을 정조띠(贞操带)라고도 했는데 이는 유럽 중세기에 나타난 일종 극히 야만적으로 여자를 학대하는 발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추측에 따르면 여자의 정조띠는 약 12세기에 유럽에서 출현하여 17-18세기에 와서야 그것이 없어졌는바 이는 유럽이 가장 암흑하던 시기이 유행물이었다고 한다. 현재 “정조띠”란 명사가 더는 생소한 것이 아니다. 5년전 중국의 조신이라는 여성이 자신을 위하여 성침해를 방지하는 보험속옷을 “발명”하여 전매특허권을 신청하여 이에 대한 찬반논란이 거세게 일게 했다. 또한 최근 몇년간 국내외 언론에서는 부분적 남성들이 야만적인 수단으로 여성들한테 정조관념을 강요하는 사건들을 보도했고 아울러 부분적 여성들도 남성들한테 정조관념을 강요한 사건들을 보도하기도 했다. 올해초 러시아의 모 언론매체는 “현재 유럽에서 정조띠가 가끔씩 유행, 근 3만명에 달하는 남성들이 정조띠를 착용하는것으로 자신의 성충성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2001년 영국과 독일의 TV프로에서는 본국에서 나타난 정조대에 대해 한바탕 소개하기도 했다. 여성들로 하여금 함부로 외간남자와 키스를 하지 못하도록 구속하는 정조띠 현재의 책과 영화, 그리고 사극중에 사용되는 정조띠를 보면 그 기능과 인식면에서 동서양사이의 구별점이 허다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서양에서는 정조띠가 주로 남성들이 사용하는 물건으로 되고 있다. 서양에서 판매되는 정조띠중 70~80%는 남성들이 사고 있으나 그들이 아랍국가들이나 일본 등 나라에 수출하는 정조띠는 청일색으로 여성용으로 되고 있다. 또한 재미가 있는 것은 서양에서 정조띠에 대한 문장을 보면 작자의 70~80%가 남성이고 내용중 여성 혹은 동성이 정조띠를 착용한 남성에 대해 통제하고 있는 내용 역시 70~80%를 점하고 있다고 한다. 정조띠에 대한 관념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현재의 서방사회ㅡ 하다면 이젠 서방에서 당년의 남성사회ㅡ 정치적 의미로 남성이 여성을 통치하던 시대가 소실되고 새로운 여성통치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럼 그제날에도 그러했을까? 다음기에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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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1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2)
    오대산 불교성지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산서성 오대현 함의: 중국불교의 4대명산중의 으뜸 오대산은 산서성 동북부에 위치, 산중에 다섯개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는데 산정이 평탄하고도 넓어 마치 다섯개의 높은 평지가 있는듯 하여 “오대산”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오대산은 당조시기부터 불교성지로 지명받아오다가 후에 줄곧 각 조대의 황제로부터 예우(礼遇)를 받아오기 시작, 청세조순치황제(清世祖顺治)가 바로 이 산에서 출가했기 때문이다. 오대산은 현존하는 사원이 48개 곳이 되고 중이 수백명에 달한다. 오대산불교성지는 역사가 유구하고 문화가 찬란해 중화민족 문화유산의 주요한 구성부분으로 되고 있다. “조사”와 탑원사 오대산의 사원묘군 중 현통사는 규모가 제일 크고 역사가 가장 유구하여 “조사(祖寺)”로 불리운다. 현통사는 산서성 오대현 대환진북쪽에 있는데 동으로 된 전당 3개가 있고 동탑이 두개가 있으며 문전의 종루에는 만근에 달하는 동종이 걸려있다. 이 종소리는 전반 오대산이 있는 대회진내에 들린다고 한다. 그외 탑원사는 명조시기에 건설, 웅위롭고 장엄하여 오대산의 첫번째 상징으로 되는데 대표성적인 건축물은 높이가 50미터에 달하는 네팔식 큰 백탑이다. “높이 솟아있는” 보살정 보살정(菩萨顶)은 현통사 북쪽의 영취봉(灵鹫峰)우에 있는데 오대산의 5대 대선처의 하나이다. 보살정은 북위(北魏)시기에 건립, 청조황제가 오대산에 가서 배알할 때 일찍 이 보살정을 위하여 비문을 써주면서 그것을 수건할 것을 명령하였다고 한다. 보살정은 지세가 비교적 높고 문전에 108개의 돌계단이 있으며 돌계단위에는 세개의 패방(牌坊)이 있다. 그리고 산문내에는 천왕전, 보살전, 대웅보전 등 주요건물이 있고 양측에는 배전(配殿)이 있으며 뒤에는 선원과 전랑(转廊) 이 있는데 전반 묘는 규모가 방대하고 엄엄하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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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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