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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네갈 중부에서 버스 전복 사고로 13명 사망
    [동포투데이] 세네갈 중부 지역에서 26일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해 최소 13명이 사망했다. 세네갈 통신사는 이날 19시쯤 카플린 중부 지역 1번 국도를 달리던 버스가 전복돼 최소 13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구조대원들이 현장에 출동해 구조에 나섰고, 부상자들은 인근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있다. 또 다른 매체는 사고의 원인이 차량 펑크일 수 있다고 보도했다. 2023년 1월, 세네갈에서 42명과 2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두 건의 심각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세네갈 정부는 그 후에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22개의 조치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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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24-04-27
  • 탄자니아, 계속되는 폭우로 155명 사망
    [동포투데이] 최근 동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폭우가 쏟아져 홍수, 산사태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있다. 탄자니아 최대 도시 다르에스살람 북쪽 키도니 지역에서는 현지 인프라가 많이 파손돼 주민들의 정상적인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다르에스살람 북부 키논도니 지역에서는 폭우의 영향으로 여러 도로가 침수돼 주민들이 물을 헤치고 이동해야 했고, 극심한 교통체증이 빚어지기도 했다. 마잘리와 탄자니아 총리는 25일 탄자니아에서 4월부터 계속된 폭우로 인해 155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탄자니아의 14개 주에서 약 2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1만 채 이상의 가옥이 파손되었다. 홍수 피해를 입은 대부분의 학교는 문을 닫았다. 마잘리와는 정부가 추가 재난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탄자니아 기상청은 엘니뇨 현상으로 인해 폭우가 5월까지 계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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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24-04-27
  • 中 외교부, 중·미 5가지 합의에 도달
    [동포투데이] 양타오(杨涛) 중국 외교부 북미ㆍ오세아니아 담당 국장이 2024년 4월 26일 밤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과 관련해 언론에 브리핑했다. 양타오는 중미 양측이 포괄적인 의견 교환을 바탕으로 다섯 가지 합의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양타오는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의 이번 중국 방문이 미중 양국 정상의 샌프란시스코 회동 합의를 이행하고 대화를 유지하며 이견을 통제하고 협력을 추진하며 국제 문제 조율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이라고 지적했다. 양타오에 따르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6일 오후 블링컨을 만나 중미 관계에 대한 고위급 차원의 권위 있는 입장을 밝히고 지도 의견을 제시했다. 같은 날 왕이 외교부장 블링컨과 5시간 30분 동안 회담을 갖고 중미 관계와 국제 및 지역 문제에 대해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의견을 교환하며 전략적 인식, 대만, 무역, 과학기술, 남중국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및 기타 중국의 핵심 관심사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왕샤오홍 국무위원 겸 공안부장도 블링컨을 만나 미중 마약단속 협력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25일에는 천지닝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가 블링컨과 회담을 갖고 상하이와 미국 간 교류협력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양타오는 블링컨의 방중 기간 양측이 포괄적인 의견 교환을 바탕으로 다섯 가지 합의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첫째, 양국 정상의 인도에 따라 중국과 미국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안정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 회담 이후 중국과 미국의 다양한 분야에서의 대화와 협력이 이루어진 긍정적인 진전을 인정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양국 정상이 합의한 중요한 합의의 이행을 가속화하기로 하였다. 둘째, 양국은 고위급 교류와 각급 접촉을 유지하고, 외교·경제·금융·통상 등 분야에서 복원·신설된 협의체 역할을 지속하며, 양군의 교류를 지속하고, 미·중 마약·기변·인공지능 협력을 더욱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셋째, 미·중 인공지능 정부 간 대화 첫 회의 개최, 미·중 관계 지도원칙 협의 지속 추진, 미·중 아시아태평양 실무협의, 미·중 해양·영사 협의 재개, 미·중 마약단속반 고위급 회담 개최, 중국의 류전민(刘振民) 기후변화 특사 방미 환영 등이다. 넷째, 양국은 양국 간 인적교류를 확대하고 상대국 유학생을 환영하며, 5월 중국 시안(西安)에서 개최되는 제14차 미‧중 관광 고위급 대화를 잘 운영하기로 했다. 다섯째, 양 측은 국제 지역 이슈에 대해 협의를 유지하고, 양 측 특사는 소통을 강화하기로 합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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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마크롱 “유럽 멸망할 수도” 경고
    [동포투데이]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5일 “유럽 대륙이 미국의 속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거듭 강조하며 더욱 강력하고 통합된 유럽 국방체제 구축을 촉구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마크롱은 이날 연설에서 “유럽은 멸종 위험에 직면해 있지만 그 위험에 맞설 능력이 없다"라고 경고했다. 마크롱은 유럽의 사이버 보안 역량 강화, EU와 영국 간의 국방 관계 강화, 고위 군인 훈련을 목표로 하는 유럽 사관학교 창설 등을 촉구했다. 마크롱은 또 “방위산업이 없으면 국방도 없다”며 “유럽은 수십 년 동안 투자가 부족했다”며 “유럽인들이 유럽산 군사 장비 구매를 우선시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마크롱은 특히 “유럽은 결코 미국의 속국이 되지 않을 것이며 세계의 모든 지역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마크롱은 오랫동안 유럽의 '전략적 자주성'을 주장하며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미국의 추종자'가 되라는 압박을 이겨내 왔고, 유럽이 직면한 '거대한 리스크'는 유럽 구축의 전략적 자주성을 저해하는 '자신만의 위기'에 빠지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그는 유럽이 국방 등의 분야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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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6
  • 국제에너지기구 “향후 10년간 전기차 수요 계속 증가할 것”
    [동포투데이]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3일 전망 보고서를 통해 향후 10년간 전 세계 전기차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해 "2024년 판매량은 1700만 대로 전 세계 자동차 판매량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기차 수요 급증은 글로벌 자동차 산업을 재편하고 도로교통 분야의 석유 소비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으로 기대된다. '2024년 글로벌 전기차 전망'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2024년 중국 전기차 판매량이 중국 내 자동차 판매량의 약 45%인 1,000만 대 수준으로 증가하고, 미국과 유럽에서 전기차 판매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9분의 1, 4분의 1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파티흐 비롤(Fatih Birol) 국제에너지기구(IEA, International Energy Agency) 사무총장은 "글로벌 전기차 혁명은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새로운 성장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라고 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전기차 판매량은 35% 급증해 약 1400만 대를 기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전기차 산업은 올해도 강력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베트남, 태국 등 신흥 시장에서도 전기차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보고서는 중국이 전기차 제조와 판매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중국에서 판매된 전기차 중 60% 이상이 대등한 성능의 전통차보다 가성비가 뛰어나다. 보고서는 또 전기차 판매에 맞춰 공공 충전시설의 가용성을 확보하는 것이 성장 모멘텀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2022년 대비 2023년 전 세계에 설치될 공공 충전기는 40% 증가했다. 하지만 각국 정부가 약속한 전기차 도입 수준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충전 네트워크가 향후 10년 동안 몇 배 더 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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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4
  • 미, 이스라엘 군부대 첫 제재 예정... 네타냐후 “최선 다해 반격”
    [동포투데이] 최근 다수의 미국 언론은 미국 정부가 서안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의 인권을 침해한 이스라엘 방위군 산하 '예후다 대대'를 제재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이 이스라엘군에 제재를 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소식에 이스라엘의 모든 정파는 21일(현지시간) 만장일치로 반대했다. 일부 언론은 이로 인해 미국과 이스라엘 관계가 더욱 긴장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21일 두 명의 미국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미국은 이르면 22일 제재를 발표할 것이라고 AP 통신이 전했다. 미국 관리들은 어떤 이스라엘 군이 제재를 받게 될지 확인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정부와 언론은 대체로 '예후다 대대'로 지목했다. '예후다 대대'는 서안지구에 영구 주둔하는 이스라엘의 초정통파 유대인과 종교적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남성 보병대대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현지 군 수비대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인권을 침해했다는 비난을 여러 차례 받아왔다. AP 통신과 파이낸셜 타임스는 미국 정부가 이스라엘군에 대해 제재를 취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전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정치권 전반에 걸쳐 이스라엘인들은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21일 이스라엘 군에 대한 어떠한 제재에도 "모든 힘을 다해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이스라엘 군에 부과한 제재를 "매우 터무니없다"며 "도덕적으로 낮은 수준"이라고 비난했다. 이스라엘 정부의 극우 강경파인 베잘렐 스모트리치 재무장관은 미국 정부가 "완전히 미쳤다"고 말했고,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 장관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제재를 부과하도록 압박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스라엘 전시 내각의 일원인 베니 간츠는 앤서니 블링컨 미 국무 장관에게 결정을 재고하도록 설득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블링컨이 21일 성명에서 간츠와의 대화를 확인했지만 제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좌파 성향의 야이르 라피드 전 이스라엘 총리조차도 문제의 근원은 군대가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의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스라엘군은 제재와 관련해 구체적인 상황은 당분간 알지 못하지만 '예후다 대대'가 제재를 받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결과를 평가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파이낸셜 타임스에 따르면 미 국무부는 한동안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 조치를 검토해왔다. 블링컨은 19일 "수일 내에 예상할 수 있다"며 제재 조치를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측의 제재는 1990년대 연방정부가 '심각한 인권침해'를 저지른 외국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중단하도록 한 법률에 따른 것이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지난 19일 서안지구의 이스라엘 정착민에 대한 일련의 제재를 발표했다. '예후다 대대'는 수년 동안 인권 침해 혐의를 받아왔다. 가장 주목할 만한 최근 사건은 2022년 미국과 팔레스타인 이중 국적을 가진 80대 노인 오마르 아사드가 '예후다 대대'의 한 검문소에서 장시간 구타당하고 감금된 후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미국 측의 강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우려에 따라 이스라엘군은 조사를 실시했지만 장교 3명에게만 징계를 내렸고 그 누구에게도 형사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예후다 대대'는 요르단강 서안에서 철수하여 이스라엘 북부에 배치되었다. 이 대대는 지난해 10월 발발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에서 이스라엘 남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의 접경지역에 파견돼 전투를 벌였다. AP통신은 미국 측의 제재가 충돌이 일어나기 전에 평가된 것이지 이번 충돌에서 '예후다 대대'의 행동을 겨냥한 것은 아니라고 전했다. 하지만 이번 충돌로 미국과 이스라엘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만큼 이 제재는 양국 간 긴장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이 요르단강 서안에서의 이스라엘의 행동을 양국의 심화되는 갈등의 하나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후다 대대'에 대한 미국의 제재는 무기, 군용 차량 및 기타 장비의 공급과 민간 재단의 재정 지원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이는 이스라엘군과 이스라엘의 "독립적인" 사법 수사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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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4
  • 외신 “미, 우크라이나에 군사고문단 추가 파견 검토”
    [동포투데이] 팻 라이더 미 국방부 대변인이 20일 미국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우크라이나 주재 자국 대사관에 군사고문단을 추가로 파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21일 러시아투데이(RT)가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군인들은 주로 물류, 미국 무기 인도 감시, 무기 유지 보수 지원 등 "비전투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다. 폴리티코는 미 하원이 2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에 대한 610억 달러 규모의 지원 법안을 통과시켰고, 미 국방부는 지원 패키지에 "방공 및 포병 능력 등"이 포함될 것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라이더 대변인은 "작전 보안과 병력 보호를 위한 이유"로 키이우에 얼마나 많은 군사 고문단을 파견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이 문제에 정통한 인사들은 폴리티코에 그 수가 최대 60명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라이더 대변인은 새 군사고문들이 미국 대사관 국방협력실에서 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폴리티코는 우크라이나가 작년 여름 역공에 실패하고 최근 외국산 탄약 공급 감소로 피해를 입은 이후 전장에서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최근 "전장 상황이 러시아에 약간 유리하게 바뀌기 시작했다"며 "우크라이나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라고 인정했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새 군사 고문단은 여름에 전투가 격화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새로 전달된 장비로 우크라이나 돕는 임무를 맡고 있다. 폴리티코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와 싸우기 위해 미군을 우크라이나에 파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모스크바는 미국과 다른 나토 회원국을 분쟁의 실제 참여자로 간주한다고 경고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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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우크라이나
    2024-04-23
  • 인도네시아서 열차와 버스 충돌...5명 사망, 15명 부상
    [동포투데이] 인도네시아 남수마트라주에서 21일 열차와 버스가 충돌해 5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다쳤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현지 철도 관계자 아자리는 도로와 철도의 교차로에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열차와 버스가 거의 동시에 교차로에 진입했고 기관사가 제동을 시도했지만 짧은 거리와 관성으로 인해 두 차량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버스는 약 50m가량 끌려갔고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일부가 차량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아자리는 "1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4명이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으며 15명이 부상을 입었다"라고 밝혔다. 그는 사망자 모두 버스 승객이었고 부상자들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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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선박 침몰 사망자 62명으로 증가
    [동포투데이] 토마스 지마스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민방위국장은 언론에 지난 19일 수도 방기의 인근 하천에서 발생한 선박 침몰 사고로 사망자가 62명으로 늘었다고 확인했다. 목격자와 잠수부들은 20일 저녁 침몰선에서 멀지 않은 수역에서 여성 3명과 어린이 1명 등 4구의 시신이 추가로 인양됐다고 전했다. 지마스는 20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희생자 58구의 시신이 인양됐다며 "물속에 얼마나 많은 시신이 남아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방기 인근 우방기 강에서 19일 오후 침몰 사고가 발생했다. 소식통은 침몰 선박에는 300명 이상의 승객이 타고 있었으며 심각한 과적 상태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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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中 주요도시 82개 중 절반 침몰 중...큰 재난 유발할 수도
    [동포투데이] 19일에 발표된 전국 위성 데이터 연구에 따르면, 중국 주요 도시의 거의 절반이 "보통에서 심각한" 수준의 침하를 겪고 있으며, 특히 해수면이 상승함에 따라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홍수 위험에 처해있다. 과학 학술지 사이언에 발표된 논문의 저자는 중국 도시 토지의 45%가 연간 3mm 이상의 속도로 가라앉고 있으며, 도시 토지의 16%가 연간 10mm 이상의 속도로 가라앉고 있음을 발견했다. 특히 지하수위 하락과 건축 환경의 무게로 인해 발생한다. 화남사범대 오주루이가 이끄는 연구팀은 중국의 도시 인구가 이미 9억 명을 넘어선 상황에서 "중국의 땅이 조금만 가라앉아도 도시 생활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침강으로 인해 중국은 이미 연간 75억 위안(10억 4천만 달러) 이상의 비용을 지출하고 있으며, 해안 토지의 거의 4분의 1이 다음 세기 내에 실제로 해수면보다 낮아져 수억 명의 사람들이 더 큰 홍수 위험에 처하게 될 수 있다.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교의 기후변화 연구 틴달 센터의 로버트 니콜스는 "이는 확실히 중국에게 한두 곳이 아닌 전국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며 세계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축소판이라고 말했다. 인구 1500만 명이 넘는 북방 도시 톈진은 피해가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로 꼽혔다. 조사관들은 지난해 '돌발적인 지질재해'로 주민 3000명이 대피한 것을 수자원 고갈과 지열정 건설 탓으로 돌렸다. 중국의 오래된 석탄 생산 지역 중 많은 곳에서도 과잉 채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으며, 당국은 종종 땅을 보강하기 위해 무너져가는 광산에 콘크리트를 주입해야 했다. 문제는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월에 발표된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약 630만 평방 킬로미터의 토지가 위험에 처해 있다. 인도네시아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 중 하나이며, 현재 수도 자카르타의 대부분이 해수면보 아래에 있다. 니콜스는 취약한 도시들이 1970년대 지하수 채굴이 금지되기 전 약 5m(16피트) 침하된 도쿄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침하 완화를 매우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적응과 제방 건설에 대해서만 논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싱가포르의 2022년 연구에 따르면 이 문제를 겪고 있는 44개 주요 해안 도시 중 30개가 아시아에 있다. 중국의 지반 문제는 지하수면의 붕괴뿐만 아니라 건축물의 무게와도 연관되어 있어 이것이 다면적인 문제임을 보여준다. 지구 기후 변화가 심화되고 해수면이 상승함에 따라 이 문제는 더욱 시급한 문제가 될 것이다. 중국과 같이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의 경우, 이는 훨씬 더 큰 재난을 유발하여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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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
    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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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3-12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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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3-08-25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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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2-08-28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2-08-20
  • 서방의 전략 목표는 러시아 경제를 파괴하는 것
    ● 포고시안(아르메니아 정치경제전략연구센터장) 최근 러-우 충돌로 국제 언론과 정치인, 전문가들의 관심이 높다. 러-우 전쟁을 정확히 평가하려면 충돌의 근원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1991년 냉전 종식 이후 세계가 '미국의 절대 패권' 시대로 접어들면서 많은 전문가들은 '단극시대'라고 불렀다. 미국은 국제관계의 규칙을 자기식대로 제정하고, 다른 나라들이 이를 지키도록 할 충분한 자원과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규칙 위에 군림하고 다른 나라들에 국제법과 규칙을 지키라고 요구하면서 자신들은 이를 어기고 있다. 1999년 미국의 세르비아 폭격과 2003년 이라크 침공과 점령 등이 대표적이다. EU와 NATO 확대를 통해 동유럽에서 미국의 전략은 그대로 추진됐다. 2007년에는 이 지역의 거의 모든 구 사회주의 국가와 구소련 발트해 연안공화국이 EU와 NATO의 일부가 됐다. 그러나 1990년대의 혼란 이후 러시아의 경제와 인구는 타격을 입었다. 동시에, 자유민주주의가 다른 형태의 정부보다 우월하다는 서구의 주장은 전 세계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실제로 단극 세계의 종말을 알린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였다. 일반적으로 세계질서의 변화는 수십 년이 걸리므로 새로운 질서의 최종 윤곽은 2030년대 중반까지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미국의 외교정책으로 촉발된 세계 불안 속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서방의 대결 구도로 떠올랐다.중요한 전략적 위치와 넓은 육지 면적, 막대한 경제잠재력을 갖춘 우크라이나를 호시탐탐 러시아에 맞서는 전진기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크라이나 문제의 근원이다. 2014년 친서방 세력이 야누코비치 당시 대통령을 무너뜨리고 새 지도부가 들어서자 돈바스 지역, 특히 도네츠크와 루간스크는 반정부 시위를 시작했고 크림은 러시아에 국민투표로 합류했다. 사태의 전개는 러우 대전을 격화시켰고,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긴장 완화를 위해 러시아·우크라이나·독일·프랑스는 민스크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폴로셴코 전 대통령과 제렌스키 현 대통령도 민스크 협약를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이 협약의 이행을 둘러싼 협상이 진행되는 시점에 우크라이나 군 재편과 군비 수송, 교관 파견을 지지했다. 그들은 또한 우크라이나가 NATO 회원국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러시아는 미국의 영향, 특히 NATO 가입 이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국익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2021년 12월 중순 미국과 나토에 나토를 향해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고 러시아 국경에 무기체계를 배치하지 않도록 하는 합의 초안을 보냈다. 미국과 NATO가 일축하자 러시아는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특별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러-우 전쟁은 중대한 지정학적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 중반부터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는 유럽 연합의 미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유럽 전략 자치' 이념을 전파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와의 안보 협력을 심화시켜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24일 이후 유럽은 미국의 러시아 제재를 지지했다.미국, 유럽연합, 영국과 그 동맹국들은 러시아에 대해 전례 없는 경제적 압력을 가했다. 그들의 성명은 서방의 전략적 목표가 러시아 경제를 파괴하고 양측의 대결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임을 더욱 시사한다. 경제발전 없이는 어느 나라도 살 수 없다. 서방이 러시아 경제를 무너뜨리는 것은 이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러시아에 친서방 정부를 세워 EU와 NATO의 추가 확장을 위한 길을 터주는 것이다. 사실 서방의 대(對)러시아 경제전을 보면 미국 주도의 서방이 어떻게 상대국가를 무너뜨렸는지 알 수 있다. ※본문은 동포투데이 주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2-03-19
  • 장개석의 차남 장위국의 생모는 누구일까
    [동포투데이] 중화민국의 대통령 장개석은 장경국과 장위국 이 두 아들을 둔 가운데, 본처가 낳은 장남 장경국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차남 장위국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네명의 부인과도 닮은 곳이 전혀 없었다. 당시 장위국의 신상에 대해 여러 가지 풍설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장개석은 송미령조차 호기심에 그한테 추궁할 정도로 대외적으로 극력 말을 아꼈다. 당시 장개석의 대답은 부인 송미령으로 하여금 분노로 인해 가출까지 강행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장위국의 생모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장개석의 대답은 왜 송미령을 이렇게 화가 나도록 했을까? 사실 장위국도 줄곧 자신의 신상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했다. 1941년 계모 송미령과 친하게 지내던 장위국은 계모의 허락을 받아 송미령의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장위국은 우연하게 송미령의 서재에서 ‘아시아의 내막’이라는 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인차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 작가 존 겐실이 쓴 이 책은 한 페이지가 한 귀퉁이로 접혀져 있었으며 장위국은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가 그 내용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는 장위국이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장위국은 놀란 나머지 이전에 들었던 소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버지와 별로 닮지 않은 생김새로 태어난 그의 신상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위국은 1916년 10월에 태어났다. 당시 장개석에게는 아들 둘뿐이었지만 작은 아들인 장위국은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 네 살이 되자 장위국은 아버지 장개석에 의해 고향인 봉화(奉化)로 보내지기 전까지 상하이 구(邱)씨와 주(朱)씨 두 집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양육됐다. 그가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 봉화에 온 뒤 장개석의 본처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成)이 번갈아가며 돌보던 중 요야성은 자식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장위국을 돌봐왔다. 장위국은 모복매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요야성을 ‘모친’이라고 불렀다. 당시 장개석의 생모인 왕부인이 생존해 있었고, 봉화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장위국을 좋아하며 극진히 잘 대해줬다. 수 십 년 후 장위국은 그 옛일을 다시 들먹이면서 계구(溪口)에 살았던 그 시간을 매우 행복하고도 즐겁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위국은 여덟 살 때 장개석에 의해 광주(廣州)로 가 황포군관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이미 진결여(陈洁如)와 결혼했기 때문에 장위국을 돌보는 사람은 진결여로 바뀌었다. 그 뒤 장위국이 11살이 되자 장개석은 송미령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모씨, 요씨와 진씨 이 세 여인 모두와 관계를 끊었다. 장개석은 진결여를 미국으로 보냈으며 장위국을 그의 신임이 두터운 오충신(吳忠信)의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오충신의 부인이 장위국의 이모로 되었다. 장위국과 송미령이 처음 만난 것은 1940년이었다. 그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위국은 스물네 살이었고, 장개석은 둘째 아들과 송미령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어색해질까 봐 어느 정도 걱정하였다. 하지만 장위국은 송미령을 만나자마자 아주 자연스럽고도 친절하게 영어로 ‘어머니’라고 불렀고, 서양식 예의에 따라 송미령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송미령은 젊은 시절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에 장위국에 대한 첫인상도 좋았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독교를 믿었고, 이후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도 그 해의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되자 장위국의 생모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송미령은 장개석한테 자꾸만 따지고 캐물었다. 그런데 줄곧 송미령에게 순종하고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대답하군 하던 장개석이었지만 이번에는 매우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송미령의 핍박에 아주 짜증스럽게 “묻지 마, 난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마디로 일축하며 내뱉었다. 그러자 이에 몹시 화가 난 송미령은 크리스마스 날 밤 집을 나와서는 홀몸으로 홍콩행을 강행했다. 그녀는 장위국과 사이가 좋았기에 당연히 그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송미령이 화가 난 것은 장개석이 자기한테 속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장개석이 직접 시간을 내 홍콩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고, 두 사람은 곧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아마 장개석도 이때 장위국의 신상을 송미령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컸다. 이후 송미령은 이 문제에 대해 더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장위국을 예전처럼 잘 대해주었다. 장위국은 송미령의 방에서 그 ‘아시아의 내막’을 보고는 계모가 자기한테 뭔가를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 후부터 장위국은 생모를 찾을 타산을 했다. 장개석은 그 몇 년 동안 손중산(孫中山)을 따르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보아 장위국은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장위국은 장개석의 권고에 의해 미국으로 연수를 보내진 틈을 타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다 준자부로라는 사람을 찾아냈다. 이 사람은 손중산이 일본에 있을 때 손중산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리고 장개석이 그 몇 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할 때, 두 사람은 왕래가 밀접했다. 장위국은 이 사람이 긍정코 자기의 출생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과연 장위국의 예상대로 야마다는 그의 생모의 이름을 말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내막’에 나오는 설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그랬다. 장위국은 확실히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야마도에 따르면 장위국의 생부의 이름은 대계도(戴季陶)로 국군의 원로 중 한 명이자 중량급 인물이었다. 당시 대계도는 장개석과 함께 손중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고, 장개석과는 동향이자 동창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나중에 대계도는 장개석 휘하의 장군으로 되기도 했다. 1913년, 일본에 있던 대계도는 급병에 걸려 현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는 시게마츠 가네코라는 간호사를 알게 되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뜨거워졌고, 대계도가 퇴원한 후 두 남녀는 동거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일찍 결혼한 몸이었고 그의 아내 뉴유항(钮有恒)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갓집 규수였기에 대계도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두려워했으며 한 번도 그녀를 화나게 한 적이 없었다. 본인은 한때 국군 고위층의 ‘3대 공처가’ 중 일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찍 대계도는 조카와 사사로운 정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란 나머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다행이도 당시 그의 부하가 재빨리 그를 구해 주었으니 말이지 큰 일이 날 뻔 했다. 한편 1916년 대계도가 손중산을 따라 귀국할 때 시게마쓰 가네코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감히 그녀를 데리고 귀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시게마쓰 가네코를 일본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시게마츠 가네코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야마다 준자부로에게 자기가 낳은 아이를 중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아이가 바로 장위국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 몇 년 간 점점 더 아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대계도는 아내에게 이 아이의 내력을 도무지 설명해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계도의 절친한 친구로서, 장개석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이 아이를 입양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계도는 즉석에서 동의했으며 이렇게 되어 생부가 아이의 의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약속 때문에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송미령이 따져 물었지만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 장위국은 이때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으로는 장개석에 대해 몹시 감탄했다. 다른 한편 생모인 시게마츠 가네코는 장위국이 다섯 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장위국은 야마다의 말을 반신반의로 믿다가 장개석의 일기를 읽어본 결과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확실히 장개석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장제스는 그를 자식처럼 여겼으며 ‘경문위무(经文纬武)’라는 좋은 뜻으로 장경국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장차 형 장경국(蒋经国)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큰 돈을 투입하여 장위국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를 외국에 유학 보내 훌륭한 군인으로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장위국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개석과 장경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이 회의나 순시하러 나갈 때면 데리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장경국이었고 정계에서 중점적으로 양성한 사람도 장경국이었으며, ‘호구병변(湖口兵变)’을 틈타서는 장위국의 수중에 있던 병권을 빼앗기도 했다. 장위국은 이때부터 의기소침해졌고, 장경국이 죽은 후에야 사람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장위국은 자신의 신상을 알고도 장개석처럼 대외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1996년에야 자기가 서술한 책에서 자신이 대계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장위국은 ‘물방울 같은 은혜도 샘솟듯한 물량으로 갚는다’는 이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장개석이 혈연관계가 없는 아버지였지만 이미 그 친아버지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장위국에게 주었다는 알고 있었다. 장위국은 언제 누가 물어도 장개석의 아들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2-02-03
  • 트럼프의 가장 무자비한 적은 옛 부하들이다
    ● 쉬리판( 중국 칼럼니스트) 미국 대법원은 19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국가기록원(NSC)의 하원 특별위원회 문서 이관을 저지하려다 낸 소송을 기각하기로 결정했다. 민주당이 주도한 의회 소란 사건 수사에 따른 중대한 진전이자 트럼프의 '중대 실패'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든 정부의 여론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면서 트럼프의 2024년 대선 재출마설이 떠돌고 있다. 최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딕 모리스 전 선임고문은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24년 미국 대선에서 재대결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미국 정치권은 모리스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옛 부하 30여명도 트럼프의 부활을 우려해 이번 주 콘퍼런스콜을 열고 전 보스를 저지할 방안을 논의 했다고 비즈니스 인사이더닷컴이 CNN을 인용해 보도했다. CNN에 따르면 이날 '저지' 콘퍼런스콜에 참석한 트럼프 행정부 전 관리는 존 켈리 전 국토안보장관, 스칼라 무치 전 백악관 통신담당관, 멜라니아 전 백악관 공보비서, 그리샴 대변인, 그리핀 전 공보담당관 등 30여 명이다. CNN의 잭 태퍼 앵커는 이번 콘퍼런스콜을 발의·진행한 사람이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관리이자 국토안보부 비서실장을 지낸 마일스 테일러라고 전했다.테일러의 위상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미국 정가에서 그의 평판은 낮지 않다. 2018년 뉴욕타임스가 '나는 트럼프 행정부 내 저항운동의 일부'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을 때도 트럼프는 주변의 '내부고발자'를 잡아내겠다고 맹세한 바 있다. 테일러가 이 글의 저자라고 한다. 그리샴 전 백악관 공보비서관은 이런 '옛 부하'들로 구성된 반(反)트럼프 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외부에 알렸다. 그는 6일 CNN에 "트럼프를 저지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뭔가를 할"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가졌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들 옛 부하들이 트럼프를 저지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테일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콘퍼런스콜 참가자들이 트럼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왔다"며 "트럼프의 재정 지지자가 누구인지 파악한 뒤 2022년 중간선거와 2024년 총선에서 트럼프 후보를 이길 방법을 파악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라고 말했다. 테일러의 말대로 이 조직은 적어도 2024년까지는 트럼프와 맞설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이 조직의 이름이 무엇인지, 회원이 몇 명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미 드러난 콘퍼런스콜 명단을 보면 참석자 다수가 트럼프와 원한이 있다. 존 켈리는 전 백악관 국토안보 막료장으로 원래 트럼프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그가 군에서 국토안보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것이다.백악관 막료장 자리에서 존 켈리는 트럼프가 배넌을 해고하는 데 일조했다.스칼라무치 전 백악관 통신담당관도 존 켈리의 손을 거쳐 경질됐다.이들은 이제 반(反)트럼프 진영에 서 있다. 2018년 유명 기자 밥 우드워드의 책 '두려움: 백악관의 트럼프'는 존 켈리가 트럼프를 '백치'라고 비난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2019년 존 켈리가 퇴임 후에도 트럼프를 "역사는 물론 미국의 기본적인 상황까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여러 차례 비난했다. 트럼프는 자신이 한 일 중 일부는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스칼라 무치 전 백악관 통신담당관은 백악관 홍보국장으로 부임한 지 2주가 채 되지 않아 해고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사적인 원한' 때문에 트럼프를 반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그리핀 전 공보담당관은 공화당이 국회의사당 폭동에 대한 책임을지지 않으려는 데 대해 "당이 도덕이 훼손되었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트럼프의 옛 부하였던 이들은 트럼프 시절의 백악관 권력 운용 상황, 정치·비즈니스 관련 정도를 알고 있으며, 트럼프의 정신 상태도 잘 알고 있다.앞으로 이들은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 같은 책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폭로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들의 '폭탄'이 반드시 트럼프를 다치게 할 필요는 없다. 1월 15일 트럼프는 애리조나주 피닉스 시골마을 트럼프읍피렌체에서 2022년 첫 유세 집회를 열었다.그는 연설에서 "올해 우리는 하원을 탈환하고 상원을 탈환하며 미국을 탈환할 것"이라며 "우리 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좋고, 강해질 것이다. 전에 없던 방식으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집회 현장에서도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 2024'라는 문구가 새겨진 깃발을 열광적으로 흔들었다. 이 낯익은 장면에서 우리는 미국 극우 정치세력과 현실 상황, 바이든 정부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여전히 트럼프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다. 트럼프 옛 부하였던 사람들이 나서서 옛 보스를 저지하겠다고 공언하고 뉴욕 법무장관의 부동산회사 사기 수사 등 관련 조치가 이어지고 있고, 대법원조차 트럼프 편에 서지 않고 있지만, 미국 정치환경이 '당신이 죽고 내가 산다'는 방향으로 계속 분열되는 흐름 속에서 트럼프의 정치적 에너지가 바닥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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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25
  • 무인도에 갇인 1남 7녀, 그들의 운명은…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 이야기는 지난 세기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 사이에 있은 한 조선인 남자가 일본인 여성 7명과 동시에 결혼해 도합 27명의 자녀를 낳은 진실한 이야기다. 사람은 사회에서 생활함에 있어서 당연히 많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이성과 생기는 감정적 욕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아는 영장 동물이다. 더군다나 특정된 장소에서는 남녀 사이에 이런 감정이 싹트기 쉽다. 대천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형형색색의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반려자로부터 선택되고 또한 반려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경우에 따라 인간은 반려자를 선택할 수 없거나 감정적인 욕구가 없는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이성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군사적 큰 착오로 벌어진 태평양 전쟁 말기 남성 1명과 여성 7명이 태평양 가운데의 트루크 군도에 남겨지면서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기까지 이 해괴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이야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면 모든 전쟁의 근원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여러모로 미국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행을 바라고 저울질하면서 미국의 태평양 해군기지를 공격했으며 전쟁 초기에는 연전연승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미군이 일본군 약점을 연속 꿰뚫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군은 차츰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하나둘씩 빼앗겼던 섬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운데 끼인 일본군 점령 섬들은 고립되어 보급은 전혀 없었으며 어떤 경우엔 단 한 명의 병력 손실도 없이 미군은 이 섬들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당시 트루크 제도에는 일본군 병사와 조선인 부역자 및 일본군 위안부가 주둔해 있던 고립된 섬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공급 사슬을 끊자 섬에 갇혀 있던 이들은 고립되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흐르자 구원투수들에게 삶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서 구조자를 섬에 보냈을 때 갇힌 사람들은 한동안 삶의 희망을 본 듯 들뜨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짧디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일본 본토에서 보낸 구조선은 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구조선박은 섬 기슭에 사람이 보이지 아니 하자 무인도로 여기고는 재빨리 선수를 돌려 트루크 섬을 빠져나가면서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 후 조선인 부역자 김유길과 일본인 위안부 7명이 “사람을 살려요”라고 외치며 해안으로 달려 내려갔을 때는 배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희망이 깨지자 일곱 여인은 서로 얼싸안고 펑펑 울면서 땅을 쳤고 김유길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인들처럼 울고불고 할 수는 없었다. 몹시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남자로서 좀 강해야만 했다. 그는 엉겁결에 일본 여인들이 흐느끼는 것을 보고는 그녀들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어구가 없었다. 말문이 막히자 그는 다가가 그녀들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만 했다. 울음을 터뜨릴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고 사위가 잠잠해진 뒤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이들 일남 칠녀는 섬에서 두 달 넘게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구조를 기다리지도 못한 채 섬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와 과일은 거의 다 뒤졌다. 그러다가 다행히 그들이 앞날이 막막할 때 뜻밖으로 담수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삶의 빛 한 가닥 생긴 것이다. 한편 섬에서의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물고기라도 잡아서 모두가 굶어죽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평일에는 고기잡이 말고도 비교적 건장한 여자 몇 명을 데리고 사냥을 했으며 그리고 그 때면 나머지 몇몇 여자들은 나무를 찾아 불을 피우고 빨래 같은 일을 하면서 제각각 자기의 맡은 바의 일에 충실했다. 처음에 김유길과 그녀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교류는 손짓 혹은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김유길은 그녀들한테서 일본어를 배웠고 그 또한 그녀들에게 조선말을 배워주었으며 이렇게 되어 그들은 얼마 안돼 서로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섬에 갇힌 지 1년이 되는 해 봄의 어느 날, 김유길은 섬에서 일본인들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벼 종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김유길의 머릿속에서는 기발한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바로 벼농사를 한번 해보자는 결심으로 마음속으로부터 논을 풀었다. 그 해 그는 여인들을 거느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논을 풀었다. 논둑을 만들고 논에 물을 가두고…그리고 벼 모종을 논에 심자 과연 벼가 우썩우썩 벼가 잘 자랐다. 그 뒤 가을이 되자 김유길은 또 여인들과 함께 벼를 베어 거두어 들이고 타작을 했다. 타작이 끝나자 이들은 마침내 첫 햇밥을 먹어볼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유길은 점차 모든 여자들의 숭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자 김유길은 자연스럽게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연상하게 되었다. 바로 빗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집을 짓는 것. 원래 집짓기 같은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김유길은 그 실행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을 거느리고 연 며칠 나무를 찍어 와서는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씩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았으며…마침내 지붕까지 얹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집 모양새를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집은 비록 허름하고 그닥 크지도 않았지만 이 외딴 섬에 그들도 비바람을 피할 곳이 드디어 생긴 셈이었다. 여성 그 자체가 워낙 감성적인 동물이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남성을 사랑하기가 쉬운 것이다. 섬에 버려진 뒤 여자들은 몹시 절망했지만 당시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그녀들을 책임지고 그녀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환경까지 해결해줬기에 그럴만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김유길이라는 유일한 남자에게 마음을 기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갖가지 애로와 언어의 장벽까지 뚫고 나온 김유길은 일본 여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중에는 거의 감출 것도 없이 속심을 털어 놓을 때도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속된 농담도 거침없이 할 정도였다. 이렇게 한동안 어울리던 중 김유길은 자신이 그 중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몰래 그 여인한테 자기의 마음을 고백했다. 헌데 이 여자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이를 다른 여자들한테까지 자랑할 줄이야?! 이러자 이들 여자 모두가 한결같이 김유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어 김유길은 황제처럼 되어 일곱 명의 여자를 동시에 품에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정을 꾸린 뒤 이들은 아예 귀국할 생각을 접고 살림을 차리고 김유길의 아내로서의 각자의 의무를 다 하였다. 그리고 아내들은 선후하여 스물일곱 명의 자녀를 김유길한테 낳아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의 작은 가정으로부터 하나의 대가족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러간 뒤 이 35명의 대 가정은 바다에 나타난 미군 순찰함에 의해 발견되었고 오랫동안 귀국생각을 접었던 이들에게 마침내 각자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김유길은 고향으로 즉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고 그 외의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일본으로 송환됐다. 김유길은 귀국한 지 몇 년 만에 그 아내들이 그리워났다. 거기에 자녀들이 보고 싶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처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두루 수소문한 결과 그의 다섯 명의 아내는 이미 재가하여 다시 살림을 차렸고 나머지 2명만이 그래도 김유길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이미 일부일처제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특별한 예외의 경우였다. 정부도 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이렇게 죽을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2-01-12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지난번 계속)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성은 먼로, 그는 정신 질환으로 앓고 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였으며 늘 자신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인 델라에게도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매우 격렬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글래디스는 MGM 콜롬비아의 한 영화제판공장에서 스크랩 작업을 했으며 어머니 역시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로 평생 수용소 출입이 아주 잦았다고 한다. 1942년 6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제임스 아이젤 돌티와 결혼했으나 1946년 9월 13일 첫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는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2월 2일 일본 도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이 혼인신고를 한 지 274일 만에 마릴린 먼로가 이혼을 제출했고 1954년 10월 31일, 법원은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뒤이어 마릴린 먼로는 1956년 6월 29일 극작가 아서 밀러와 극비리에 결혼했고 그해 8월 메릴린 먼로는 임신했지만 곧 유산했다. 마릴린 먼로는 1957년 8월 1일 자궁외 임신으로 다시 유산했다. 1961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정식 이혼하고 말았다. 18세 때 마릴린 먼로는 기독교인이 됐다. 하지만 1956년 아서 밀러와 결혼하면서 먼로는 유대교로 전향했다.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생전에 애완견을 많이 키웠으며 그 중 마지막 한 마리는 시나트라가 선물한 몰타 개로 이름을 지어 ‘마피아(Mafia)’라고 불렀다. 1960년 8월 28일, 마릴린 먼로는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그 뒤 1961년 2월 7일 재차 뉴욕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5일에 퇴원했다. 1962년 1월, 마릴린 먼로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으며 7월 20일 자궁내막염으로 또 입원치료를 받았다. 1962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심리치료사와 6시간을 보냈다. 이는 그녀의 생에 있어서 마지막 하루가 됐다. 그 이튿날 즉 8월 5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마릴린 먼로가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무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8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식의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으로 하나 또 하나의 성감적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감동적인 연기 스타일과 죽음은 영화 팬들의 영원한 성감 적인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많은 팬들은 살아가면서 그녀의 사진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니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하얀 치마를 입고 뉴욕 거리에 있는 모습과 땅속 열기에 그녀가 걸친 치마가 나팔을 벌린 듯한 모습의 흑백사진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눈을 살짝 감은 듯 입술을 감빠는 모습, 소파 위에 하얀 다리를 드러낸 모습 등을 보노라면 사진만이 아닌 특별한 감정의 전달과 순수하고 성감적인 정국이 될 때가 많다. 공개된 사진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청순하기도 하고 털털하기도 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좀 길게 땋은 머리 태, 청바지, 리넨 스커트 등은 다양한 스타일링으로 생활 속 먼로의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먼로는 1962년 8월 5일, 자기의 거처이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 무브먼트의 거실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떠올리면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케네디 가문과 정치권의 암막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가 죽은지 수 십 년이 넘도록 그녀에 대한 공식 조사서류는 대부분 고급기밀로 분류돼 있었다. 2006년까지 FBI(미 연방수사국)는 미국 자유정보법에 따라 500쪽 분량의 먼로 관련 문건의 비밀을 해제했다. 그러자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그가 적어놓은 비밀일기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역사 전문가들은 뒤늦게 밝혀냈다. 먼로의 일기에는 먼로와 케네디 형제의 ‘베갯머리 대화’가 다수 기록돼 있었다. 1962년 8월 초, 케네디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먼로와의 모든 왕래를 끊었다. 갑작스런 격변에 직면하여 마릴린 먼로 역시 자신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8월 4일 오후 9시 반, 그녀는 절친인 시드니 길라로프에게 전화로 케네디 형제와 있었던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LA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릴린 먼로는 공교롭게도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비밀 일기’도 신비롭게 사라졌으며 LA지검 사무실 또한 마릴린 먼로가 일기를 썼다는 것과 먼로의 죽음이 모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부인했다. 2012년 5월 16일,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제 홍보 포스터가 나붙었고 현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마릴린 먼로 주연의 각종 다른 영화의 스틸 사진이 끊임없이 상영되면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유명 조각가 수어드 존슨이 만든 마릴린 먼로 조각상 ‘영원한 먼로’가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그녀는 줄곧 어떤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녀도 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먼로는 평생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여인으로서 먼로는 전심전력으로 절대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이런 100%의 사랑을 남편들은 주지 못했고 애인들은 더욱 주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36세의 마릴린 먼로는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용모를 주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지 않았다. ‘세상의 좋은 물건은 견고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구름은 쉽게 흩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마릴린 먼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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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1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그녀는 60년대까지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한 여배우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유혹의 여신’이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그녀의 별명은 노마 제인 모테이센(Norma Jeane Baker)으로 미국계 유대인이었으며 출생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다. 마릴린 먼로: 출생일 1926년 6월 1일, 사망일 1962년 8월 5일, 별자리 쌍둥이자리, 혈형 AB형, 키 166cm, 몸무게 53kg, 직업 프로배우, 모델, 대표작 ‘7년차 가려움’, ‘버스터미널’, ‘용놀이’, ‘열정은 불처럼’ 등 다수 주요 성과로는 제9회 영국․TV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 최우수 외국여배우상, 제14회 미국영화방송 골든글로브 영화부문-뮤직코미디부문 최우수 여주연상, 제11회 영국 영화·TV예술아카데미 영화상 최우수 여배우상, 제17회 미국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뮤직코미디 최우수 여주역상, 100년 만의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 1926년 6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본병원에서 태어난 마릴린 먼로는 당시 노마 제인 모태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한 차례의 세례 후 그녀는 이름을 노마 제인 베이커로 변경했다. 불행한 것은 그녀가 사생아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멀리 타향으로 떠났으며 먼로는 태어난 지 13일 만에 브라운다이 부부의 집에서 매주 5달러씩 내기로 하고 입양됐다. 1933년 가을, 마릴린 먼로는 어머니 글라디스 바크르에게 인계되었다. 글라디스는 1935년 6월 1일 먼로의 보호자가 됐지만 몇 개월 후인 9월 13일 먼로를 고아원에 보냈다. 이어 먼로는 1937년 11월부터 안나란 여인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고교생이던 1941년 마릴린 먼로는 어린 나이에 결혼과 함께 ‘아름다운 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결혼 후 마릴린 먼로는 올림픽 챔피언 하워드한테서 역도와 서핑을 배웠으며 1944년 5월부터는 항공기 무전기 제조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5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는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과 함께 잡지 사진을 찍었다. 그 때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은 그녀가 사진을 게재하여 미군을 고무시키기를 희망했다. 마릴린먼로는 1946년 5월 26일 ‘가족권’ 잡지 표지를 통해 처음으로 얼굴을 알렸다. 1946년 7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로 처음으로 가게 되었고 7월 26일 폭스와 첫 6개월 계약을 맺었다. 또 머리를 황금색으로 염색하면서 ‘제인 아델’이라는 예명을 붙이기도 했다. 1948년 마릴린 먼로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슈쿠다, 허!스쿠다, 하이!(It's Shukuda, Huh! It's Shukuda, Hi!)’에서 교회를 달군 여자 역을 맡았지만 그한테 차례진 대사는 한 줄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는 한 영화에서 여자아이를 연기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장면은 삭제되었다. 1949년 5월 27일, 사진작가 톰 켈리는 먼로의 누드 사진을 여러 장 촬영하여 골드 미스 드림 달력을 출판했다. 하지만 먼로는 달력에 실린 자기의 사진에 싸인을 하지 않아 50달러만 받게 되었다. 그해의 8월 15일, 먼로는 뮤지컬 영화 ‘토마호크행 티켓(Tickets to Tomahawk)’의 촬영에 참여했고 10월에는 또 범죄영화 ‘밤의 밤’ 촬영에도 참여했다. 1950년 1월 5일, 먼로는 드라마 ‘화구(火球)’의 촬영을 시작했고 4월에는 또 드라마 ‘혜성미인’에서 어느 한 주요 배역을 맡았다. 같은 해 먼로는 잡지 ‘성조기’가 선정한 ‘매력 아가씨’로 뽑히기도 했다. 1951년 4월 18일, 먼로가 출연하는 애정 코미디 영화 ‘사랑의 둥지’ 촬영이 시작되면서 그해 5월 1일, 폭스는 먼로와 6개월 계약 기간을 7년으로 연장했다. 뒤이어 먼로는 1952년 5월 7일 ‘라이프(life!)’지의 표지모델로 데뷔했으며 6월 1일에는 멜로영화 ‘신사는 미인을 사랑한다’의 주역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그해 8월 31일 라디오 생방송에 첫 출연 했고 9월 2일에는 ‘미스 아메리카 모델 쇼’에 출연했다. 1953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가 미국 연예계에 짙은 손자국과 발자국을 남겼으며 9월 13일에는 TV에 처음 등장했다. 이어 11월 5일 로렌 바이콜, 로리 캘헌과 함께 출연한 애정 코미디 영화 ‘결혼하고 싶어’가 개봉됐다. 영화에서 먼로는 어릴 때부터 백만장자와의 결혼에 목마른 성감 모델 ‘보라 드 베이워스’ 역을 맡았다. 1954년 4월 30일, 마릴린 먼로가 로버트 미첨과 함께 촬영한 서부 모험영화 ‘동으로 흐르는 강물’이 개봉했다. 이 영화에서 먼로는 팜므파탈의 바 가수 ‘카이’역을 맡았다. 먼로는 9월 1일 로맨틱 코미디 영화 ‘7년차 가려움’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로 먼로는 제9회 영국영화·텔레비전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인 외국여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5년 1월 7일, 마릴린 먼로는 밀턴 그린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 센터’의 설립을 발표하였고 1월 15일 20세기 폭스 프로덕션과의 계약은 종료됐다. 1956년 1월 4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프로덕션과 재계약을 맺고 2월 25일 할리우드에 복귀했다. 그 때로부터 그녀는 마릴린 먼로로 개명했고 이어 3월 3일에는 주연 로맨틱 코미디 영화 ‘버스터미널’에 출연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제14회 미국 영화 TV 골든글로브 영화․TV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57년 6월 13일, 마릴린 먼로가 로런스 올리버와 함께 주역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드래곤 봉황’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는 관능적이고 매력적인 쇼걸 ‘엘시 마리나’의 역을 맡았으며 이 역할로 제11회 영국영화·TV예술 아카데미상 영화상-외국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8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애정 코미디 영화 ‘열정은 불처럼’에서 마이애미 악단의 아름다운 관능의 여인 ‘수가’ 역을 맡았다. 1960년 3월 8일 먼로는 영화 ‘열정은 불처럼’으로 제17회 미국 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 부문-뮤직코미디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을 받았다. 1961년 1월 31일, 마릴린 먼로는 클라크 게이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함께 촬영한 서부 애정 영화 ‘난점 원앙보’가 개봉됐다. 1962년 3월 5일, 마릴린 먼로는 ‘세계 최고의 여배우상’을 수상했고 이어서 4월 23일에는 그녀는 주연 코미디 단편 영화 ‘멘붕’ 촬영을 시작했다. 1962년 6월 1일은 마릴린 먼로의 20세기 폭스프로덕션에서의 마지막 출근 날이자 마지막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6월 7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먼로와 계약을 종료했다. 하지만 그해의 8월 1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월급을 2배로 주기로 하고 마릴린 먼로를 다시 고용하기로 결정했으며 8월 3일, 먼로는 ‘라이프’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멘붕'의 재촬영에 동의하면서 ‘라이프’지의 표지모델이 됐다. 1999년 미국영화학회가 선정한 ‘100년 만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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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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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우쉰·황레이·탕웨이, 드라마타운 행사 참석
    [동포투데이] 일부 네티즌이 SNS에 공유한 장시 후이창 드라마타운 개막식 영상과 사진에는 행사에 참가한 황레이(黄磊), 저우쉰(周迅), 탕웨이(汤唯) 등 모습이 담겼다. 황레이는 검은색 슈트 차림으로 등장했고,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어 산뜻해 보였다. 저우쉰은 프린트된 레깅스에 블랙 재킷과 네이비 컬러의 와이드 팬츠를 매치해 동양적이면서도 클래식한 멋을 뽐냈다. 탕웨이는 검은색 이너에 말차녹색 재킷과 카키색 바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캐주얼한 모습을 연출했다. 황레이, 저우쉰, 탕웨이 등이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많은 팬들이 와서 쪼그려 앉아 기다렸고, 이들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이들 또한 팬들의 호명에 일일이 화답하며 팬들을 즐겁게 했다. 저우쉰이 등장했을 때, 그녀는 마침 동료와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팬들의 호명에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탕웨이는 무대에 등장하자 팬들에게 직접 손을 흔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행사 기간 동안 황레이, 저우쉰, 탕웨이는 주최 측의 안내하에 행사장을 방문하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많은 참석자들은 저우쉰과 탕웨이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저우쉰이 정말 말랐지만 매우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탕웨이는 마른 체형이지만 키가 170cm가 넘는 큰 키가 눈에 띄고 기질도 좋아 보였고 웃으면 목춘풍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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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7
  • 제80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개막
    [동포투데이] 제80회 베니스 국제영화제가 30일 저녁 이탈리아 물의 도시 베니스에서 개막했다. 총 23편의 영화가 본선에 진출해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놓고 경쟁을 펼친다. '라라랜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데이미언 샤젤은 이번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아 8명의 다른 심사위원들과 함께 올해 황금사자상 등 주요 대상을 누가 차지할지 결정하게 된다. 개막식에서 이탈리아 여성 감독 릴리아나 카바니가 평생공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탈리아 에도아르도 데 안젤리스 감독의 '코만단테'가 영화제 개막작으로 이날 밤 세계 최초 개봉됐다. 이번 영화제는 9월 9일 폐막하며, 수상자는 폐막식에서 발표된다. 이탈리아 베니스 국제영화제는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 독일 베를린 국제영화제와 함께 유럽 3대 국제영화제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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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1
  • 탕웨이, 제16회 아시안필름어워즈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3일, 펑황망에 따르면 12일, 홍콩에서 열린 제16회 아시안필름어워즈 시상식에서 중국 배우 탕웨이(汤唯)가 ‘헤어질 결심’으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나 허리 부상으로 참석하지 못해 박해일이 대신 수상했다. 한편 량차오웨이(梁朝偉)가 ‘바람이 다시 불 때’로 우수 주연상과 함께 아시아영화 공헌 영예 대상도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아내 류자링(刘嘉玲)이 남편에게 직접 상을 수여했다는 점이다. 다음 일본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브로커’로 우수 감독상을 받았다. 이번 심사단은 장이머우(张艺谋)가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이에 앞서 탕웨이는 제27회 춘사영화상, 2022년 한국 부일영화상, 제4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제43회 청룡영화상, 제42회 황금 촬영상, 제9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등의 7개 ‘여우수주연상’을 연속 수상했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멜로 영화로 탕웨이, 고경표, 박해일, 유태오, 이정현, 박용우가 주역을 맡았으며 올해에 있은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단숨에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헤어질 결심’은 '아가씨' 이후로 6년 만에 나온 박찬욱의 11번째 장편 영화. 산에서 벌어진 변사 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가 사망자의 아내와 만난 후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박찬욱 감독은 탕웨이가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이유에 대해 “영화 ‘색계’를 보고 함께 일하고 싶었으며 탕웨이는 우리가 만들고 싶은 캐릭터였다”고 밝혔다. 한편 탕웨이의 차기작은 AI를 소재로 한 한국 영화 ‘원더랜드’로, 탕웨이는 ‘만추’에 이어 두 번째로 김태용과 호흡을 맞췄으며 공유, 박보검, 수지, 정유미, 최우식 등이 주연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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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3
  • 전통여성의 소박한 형상을 스크린에 올린 中 영화배우-백양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민국시기인 1947년에 제작된 영화 ‘동으로 흐르는 봄 물결(一江春水向东流)’은 문화혁명 시기 상영이 금지되었다가 70년대 말 재방영이 되자 이 영화를 두 번 이상을 본 관람객은 기수부지였으며 심지어 다섯 번 이상 본 이들도 적지 않았다. 40년대에 제작된 영화, 그것도 흑백영화가 왜 이다지도 관객들의 마음을사로잡았을까? 그것은 간단했다. 영화에서의 여주인공의 연기력 때문이다. 그 여주인공의 이름은 백양이다. 백양(白杨-1920년 4월 22일~1996년 9월 18)일)의 본명은 양성방(杨成芳)으로 본적은 중국 호남성 멱라(汨罗)시 고륜향(古仑乡)이며 출생지는 북경이다. 백양의 기억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당시 백양의 부모는 중남경녀(重男轻女)의 봉건의식이 매우 농후하였기에 여아이로 태어난 백양은 부모로부터 가정과 남자에 순종하는 사상을 진절머리가 나도록 주입받았다. 한편 백양은 어릴 적부터 유모에 의해 시골로 끌려가 생활하면서 신물이 나도록 가난과 고난을 겪었다. 1931년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자 더 이상 어머니처럼은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백양은 연화영업공사(联华影业公司)가 북평에 설립한 배우양성소를 찾아갔으며 거기에서 무성영화 ‘고궁신원(故宫新怨)’에서 여자아이의 역을 맡으면서 영화계에 데뷔했다. 영화회사가 해체되자 백양은 극단 ‘보리바(苞莉芭)’에 가담해 연극 ‘난종(乱钟)’, ‘전우’ 등에 출연했으나 얼마 후 이 극단은 강제 해산됐다. 1934년 백양은 선후로 중국여행극단과 중국무대협회 등 극단에 입사했다가 1936년 다시 상해의 스타필름회사 제2 지사가 설립되자 홍심(洪深) 소개로 계약을 맺고 첫 영화 ‘십자거리(十字街头)’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영화에서 백양은 사랑스럽고도 지독한 여직원 양지영(杨芝瑛) 역을 맡았다. 백양은 또 1937년 가족영화 ‘사천금(四千金)’에 출연하였고 같은 해에는 장석천(张石川) 감독이 연출하는 ‘사회의 꽃(社会之花)’에 출연하기도 했다. 1937년 ‘7.7’사변 발발 이후 백양과 진백진(陈白尘), 심부(沈浮) 등은 영화극단을 결성해 항일구국을 알리는 공연을 펼치기로 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자오단(赵丹) 등과 함께 영화 ‘중화의 아들딸(中华儿女)’에 출연했으며 1940년에는 손유 감독의 영화 ‘창공 만리’에도 선보였다. 또한 같은 해 도금(陶金)과 합작하여 항일영화 ‘청년중국’에서 주역을 맡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백양의 영화배우 생애에도 전성기가 찾아왔다. 1946년 백양은 영화 ‘팔천리 길운과 달(八千里路云和月)’, 1947년에는 영화 ‘동으로 흐르는도도한 물결’에서 주역를 맡는 등 말 그대로 그녀의 영화배우 생애에는 전성기가 찾아왔다. 1949년 새로운 공화국이 탄생하자 백양은 여전히 변함없이 영화배우 생활에 충실하면서 많은 영화에 출연하였다. 1950년엔 ‘단결하여 내일에로(团结起来到明天)’, 1956년에는 중국의 첫 칼라 영화 ‘축복’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1960년에는 전쟁영화 ‘동매(冬梅)’에서 주역을 맡았다. 이 외에도 해방 후 백양이 출연한 영화들로는 ‘평화를 위하여(为了和平1955년)’, ‘김옥희(金玉姬-1960년)’, ‘봄빛 찬란한 세상(春满人间)-1959년’ 등 여러 편이 있으며 그가 출연한 드라마로는 중국의 저명한 여성 지도자 송경령의 생애를 부각한 ‘인간세상에 뿌려지는 건 모두 사랑(1989년-洒向人间都是爱)’이 유일했으며 이 드라마의 출연으로 백양은 중국 방송․영화TV드라마 부문의 영예 배우상을 받았다. 백양의 예술풍격은 소박하고 아름다우며 자연스러우면서도 동양 여성의 자태 표현에 능숙하다. 특히 그녀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여성의 모습을 잘 형상화했다. 백양은 자신이 가진 여성스러움과 배역을 절묘하게 결합해 관객들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부여함으로써 항상 사랑과 존경을 받아왔다. 그가 연기하는 모습의 하나하나가 관객들에게 인정받았으며 맘속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깊고도 다각적인 연기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출연하게 되는 인물에 대한 깊은 연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세계 영화 탄생 100주년, 중국 영화 탄생 90주년을 맞아 백양은 중국 국가 문화부로부터 중국 영화 세기 상, 여배우상을 수여받았다. 1996년 9월 18일, 백양은 향년 76세로 별세했다. 백양의 임종은 남편 장군초(蒋君超), 아들 장효송(蒋晓松)과 딸 장효신(蒋晓真) 그리고 언니 양말(杨沫)이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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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8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지난번 계속)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성은 먼로, 그는 정신 질환으로 앓고 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였으며 늘 자신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인 델라에게도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매우 격렬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글래디스는 MGM 콜롬비아의 한 영화제판공장에서 스크랩 작업을 했으며 어머니 역시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로 평생 수용소 출입이 아주 잦았다고 한다. 1942년 6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제임스 아이젤 돌티와 결혼했으나 1946년 9월 13일 첫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는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2월 2일 일본 도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이 혼인신고를 한 지 274일 만에 마릴린 먼로가 이혼을 제출했고 1954년 10월 31일, 법원은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뒤이어 마릴린 먼로는 1956년 6월 29일 극작가 아서 밀러와 극비리에 결혼했고 그해 8월 메릴린 먼로는 임신했지만 곧 유산했다. 마릴린 먼로는 1957년 8월 1일 자궁외 임신으로 다시 유산했다. 1961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정식 이혼하고 말았다. 18세 때 마릴린 먼로는 기독교인이 됐다. 하지만 1956년 아서 밀러와 결혼하면서 먼로는 유대교로 전향했다.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생전에 애완견을 많이 키웠으며 그 중 마지막 한 마리는 시나트라가 선물한 몰타 개로 이름을 지어 ‘마피아(Mafia)’라고 불렀다. 1960년 8월 28일, 마릴린 먼로는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그 뒤 1961년 2월 7일 재차 뉴욕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5일에 퇴원했다. 1962년 1월, 마릴린 먼로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으며 7월 20일 자궁내막염으로 또 입원치료를 받았다. 1962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심리치료사와 6시간을 보냈다. 이는 그녀의 생에 있어서 마지막 하루가 됐다. 그 이튿날 즉 8월 5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마릴린 먼로가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무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8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식의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으로 하나 또 하나의 성감적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감동적인 연기 스타일과 죽음은 영화 팬들의 영원한 성감 적인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많은 팬들은 살아가면서 그녀의 사진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니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하얀 치마를 입고 뉴욕 거리에 있는 모습과 땅속 열기에 그녀가 걸친 치마가 나팔을 벌린 듯한 모습의 흑백사진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눈을 살짝 감은 듯 입술을 감빠는 모습, 소파 위에 하얀 다리를 드러낸 모습 등을 보노라면 사진만이 아닌 특별한 감정의 전달과 순수하고 성감적인 정국이 될 때가 많다. 공개된 사진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청순하기도 하고 털털하기도 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좀 길게 땋은 머리 태, 청바지, 리넨 스커트 등은 다양한 스타일링으로 생활 속 먼로의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먼로는 1962년 8월 5일, 자기의 거처이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 무브먼트의 거실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떠올리면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케네디 가문과 정치권의 암막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가 죽은지 수 십 년이 넘도록 그녀에 대한 공식 조사서류는 대부분 고급기밀로 분류돼 있었다. 2006년까지 FBI(미 연방수사국)는 미국 자유정보법에 따라 500쪽 분량의 먼로 관련 문건의 비밀을 해제했다. 그러자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그가 적어놓은 비밀일기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역사 전문가들은 뒤늦게 밝혀냈다. 먼로의 일기에는 먼로와 케네디 형제의 ‘베갯머리 대화’가 다수 기록돼 있었다. 1962년 8월 초, 케네디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먼로와의 모든 왕래를 끊었다. 갑작스런 격변에 직면하여 마릴린 먼로 역시 자신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8월 4일 오후 9시 반, 그녀는 절친인 시드니 길라로프에게 전화로 케네디 형제와 있었던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LA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릴린 먼로는 공교롭게도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비밀 일기’도 신비롭게 사라졌으며 LA지검 사무실 또한 마릴린 먼로가 일기를 썼다는 것과 먼로의 죽음이 모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부인했다. 2012년 5월 16일,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제 홍보 포스터가 나붙었고 현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마릴린 먼로 주연의 각종 다른 영화의 스틸 사진이 끊임없이 상영되면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유명 조각가 수어드 존슨이 만든 마릴린 먼로 조각상 ‘영원한 먼로’가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그녀는 줄곧 어떤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녀도 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먼로는 평생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여인으로서 먼로는 전심전력으로 절대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이런 100%의 사랑을 남편들은 주지 못했고 애인들은 더욱 주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36세의 마릴린 먼로는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용모를 주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지 않았다. ‘세상의 좋은 물건은 견고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구름은 쉽게 흩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마릴린 먼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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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1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그녀는 60년대까지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한 여배우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유혹의 여신’이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그녀의 별명은 노마 제인 모테이센(Norma Jeane Baker)으로 미국계 유대인이었으며 출생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다. 마릴린 먼로: 출생일 1926년 6월 1일, 사망일 1962년 8월 5일, 별자리 쌍둥이자리, 혈형 AB형, 키 166cm, 몸무게 53kg, 직업 프로배우, 모델, 대표작 ‘7년차 가려움’, ‘버스터미널’, ‘용놀이’, ‘열정은 불처럼’ 등 다수 주요 성과로는 제9회 영국․TV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 최우수 외국여배우상, 제14회 미국영화방송 골든글로브 영화부문-뮤직코미디부문 최우수 여주연상, 제11회 영국 영화·TV예술아카데미 영화상 최우수 여배우상, 제17회 미국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뮤직코미디 최우수 여주역상, 100년 만의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 1926년 6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본병원에서 태어난 마릴린 먼로는 당시 노마 제인 모태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한 차례의 세례 후 그녀는 이름을 노마 제인 베이커로 변경했다. 불행한 것은 그녀가 사생아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멀리 타향으로 떠났으며 먼로는 태어난 지 13일 만에 브라운다이 부부의 집에서 매주 5달러씩 내기로 하고 입양됐다. 1933년 가을, 마릴린 먼로는 어머니 글라디스 바크르에게 인계되었다. 글라디스는 1935년 6월 1일 먼로의 보호자가 됐지만 몇 개월 후인 9월 13일 먼로를 고아원에 보냈다. 이어 먼로는 1937년 11월부터 안나란 여인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고교생이던 1941년 마릴린 먼로는 어린 나이에 결혼과 함께 ‘아름다운 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결혼 후 마릴린 먼로는 올림픽 챔피언 하워드한테서 역도와 서핑을 배웠으며 1944년 5월부터는 항공기 무전기 제조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5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는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과 함께 잡지 사진을 찍었다. 그 때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은 그녀가 사진을 게재하여 미군을 고무시키기를 희망했다. 마릴린먼로는 1946년 5월 26일 ‘가족권’ 잡지 표지를 통해 처음으로 얼굴을 알렸다. 1946년 7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로 처음으로 가게 되었고 7월 26일 폭스와 첫 6개월 계약을 맺었다. 또 머리를 황금색으로 염색하면서 ‘제인 아델’이라는 예명을 붙이기도 했다. 1948년 마릴린 먼로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슈쿠다, 허!스쿠다, 하이!(It's Shukuda, Huh! It's Shukuda, Hi!)’에서 교회를 달군 여자 역을 맡았지만 그한테 차례진 대사는 한 줄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는 한 영화에서 여자아이를 연기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장면은 삭제되었다. 1949년 5월 27일, 사진작가 톰 켈리는 먼로의 누드 사진을 여러 장 촬영하여 골드 미스 드림 달력을 출판했다. 하지만 먼로는 달력에 실린 자기의 사진에 싸인을 하지 않아 50달러만 받게 되었다. 그해의 8월 15일, 먼로는 뮤지컬 영화 ‘토마호크행 티켓(Tickets to Tomahawk)’의 촬영에 참여했고 10월에는 또 범죄영화 ‘밤의 밤’ 촬영에도 참여했다. 1950년 1월 5일, 먼로는 드라마 ‘화구(火球)’의 촬영을 시작했고 4월에는 또 드라마 ‘혜성미인’에서 어느 한 주요 배역을 맡았다. 같은 해 먼로는 잡지 ‘성조기’가 선정한 ‘매력 아가씨’로 뽑히기도 했다. 1951년 4월 18일, 먼로가 출연하는 애정 코미디 영화 ‘사랑의 둥지’ 촬영이 시작되면서 그해 5월 1일, 폭스는 먼로와 6개월 계약 기간을 7년으로 연장했다. 뒤이어 먼로는 1952년 5월 7일 ‘라이프(life!)’지의 표지모델로 데뷔했으며 6월 1일에는 멜로영화 ‘신사는 미인을 사랑한다’의 주역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그해 8월 31일 라디오 생방송에 첫 출연 했고 9월 2일에는 ‘미스 아메리카 모델 쇼’에 출연했다. 1953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가 미국 연예계에 짙은 손자국과 발자국을 남겼으며 9월 13일에는 TV에 처음 등장했다. 이어 11월 5일 로렌 바이콜, 로리 캘헌과 함께 출연한 애정 코미디 영화 ‘결혼하고 싶어’가 개봉됐다. 영화에서 먼로는 어릴 때부터 백만장자와의 결혼에 목마른 성감 모델 ‘보라 드 베이워스’ 역을 맡았다. 1954년 4월 30일, 마릴린 먼로가 로버트 미첨과 함께 촬영한 서부 모험영화 ‘동으로 흐르는 강물’이 개봉했다. 이 영화에서 먼로는 팜므파탈의 바 가수 ‘카이’역을 맡았다. 먼로는 9월 1일 로맨틱 코미디 영화 ‘7년차 가려움’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로 먼로는 제9회 영국영화·텔레비전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인 외국여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5년 1월 7일, 마릴린 먼로는 밀턴 그린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 센터’의 설립을 발표하였고 1월 15일 20세기 폭스 프로덕션과의 계약은 종료됐다. 1956년 1월 4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프로덕션과 재계약을 맺고 2월 25일 할리우드에 복귀했다. 그 때로부터 그녀는 마릴린 먼로로 개명했고 이어 3월 3일에는 주연 로맨틱 코미디 영화 ‘버스터미널’에 출연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제14회 미국 영화 TV 골든글로브 영화․TV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57년 6월 13일, 마릴린 먼로가 로런스 올리버와 함께 주역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드래곤 봉황’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는 관능적이고 매력적인 쇼걸 ‘엘시 마리나’의 역을 맡았으며 이 역할로 제11회 영국영화·TV예술 아카데미상 영화상-외국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8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애정 코미디 영화 ‘열정은 불처럼’에서 마이애미 악단의 아름다운 관능의 여인 ‘수가’ 역을 맡았다. 1960년 3월 8일 먼로는 영화 ‘열정은 불처럼’으로 제17회 미국 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 부문-뮤직코미디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을 받았다. 1961년 1월 31일, 마릴린 먼로는 클라크 게이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함께 촬영한 서부 애정 영화 ‘난점 원앙보’가 개봉됐다. 1962년 3월 5일, 마릴린 먼로는 ‘세계 최고의 여배우상’을 수상했고 이어서 4월 23일에는 그녀는 주연 코미디 단편 영화 ‘멘붕’ 촬영을 시작했다. 1962년 6월 1일은 마릴린 먼로의 20세기 폭스프로덕션에서의 마지막 출근 날이자 마지막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6월 7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먼로와 계약을 종료했다. 하지만 그해의 8월 1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월급을 2배로 주기로 하고 마릴린 먼로를 다시 고용하기로 결정했으며 8월 3일, 먼로는 ‘라이프’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멘붕'의 재촬영에 동의하면서 ‘라이프’지의 표지모델이 됐다. 1999년 미국영화학회가 선정한 ‘100년 만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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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9
  • 中, 영화 ‘장진호’ 국경일 하루 관객 4억명 돌파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 9월 30일 중국에서 개봉 첫날에 관객 2억을 돌파한 영화 ‘장진호’ 국경일 하루 4억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개봉 이후 파죽지세의 흥행으로 치닫고 있다. ‘장진호’는 제작 규모, 투자 규모, 촬영 기간, 출연진과 스태프 수 모두 중국 영화 역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영화 준비 기간은 2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초기 단계에는 7,000명 이상이, 후반에는 12,000명이 영화에 참여하였으며 100,000명 이상의 엑스트라가 동원됐다. 10월 1일 20시 35분 현재 ‘장진호’와 ‘나와 나의 아버지 세대’ 등 2부의 영화에 힘입어 국경절 첫날 티켓 판매액은 이미 6억 위안을 돌파하였으며 국경절 첫날 티켓 판매는 역대 3위에 올랐다. ‘장진호’는 2일 만에 누적 흥행 6억 위안을 기록 중이며 또 다른 국경절 연휴 기간의 새 영화 ‘나와 나의 아버지 세대’는 개봉 2일 만에 누적 티켓 판매액 2억6000만 원을 돌파했다. ‘장진호’는 6.25 전쟁 기간인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24일까지 북한 장진호 지역에서 중국군 제9병단과 미 제10사가 직접 대결한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군 제9병단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무기 장비가 세계 일류이고 전공이 혁혁한 미 10사와 직접 교전하였던 곳으로 당시 미군 1개 사를 골탕 먹이면서 이 미군 정예부대는 역대 최장기 퇴진을 경험하게 됐다. 한편 2021년 상반기 중국 영화 매출은 30억1200만 위안으로 전년 동기 대비 553.23% 증가했고, 순이익은 3억500만 위안의 흑자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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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2

스포츠 검색결과

  • 2021년 중국 스포츠 10대 뉴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8일, 신화사는 2021년 중국 스포츠 10대 뉴스를 선정(뉴스발생 시간순서에 따름)하여 보도했다. 1. 시진핑, 베이징 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 기획 시찰 지난 1월 18일부터 20일까지 베이징(北京)과 허베이(河北) 시찰에 나선 시진핑(习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베이징 2022년 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 사업보고회를 주재하며 주요 담화를 발표했다. 시진핑의 중요한 연설 정신의 지도하에 2021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패럴림픽 준비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주제 구호 발표, 메달 공개, 테스트 활동이 질서정연하게 추진되고 있으며 베이징 동계올림픽 성화 역시 고대 올림픽 그리스 아테네에서 채집하는 데 성공했다. 2. 중국축구의 고행길 중국 슈퍼리그 챔피언 장쑤축구클럽(江苏足球俱乐部江蘇)이 올해 2월 28일 소속 구단 운영을 중단했다. 시즌 전야에 탈퇴하거나 해체되는 각급 클럽도 많았다. 중국 축구가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본선 진출이 사실상 무산되었다. 중국 국가축구팀은 리샤오펑(李霄鹏)이 리톄(李铁)의 뒤를 이어 감독을 맡았다. 어려움에도 중국 축구는 발전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2023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중국 아시안컵 대회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으며 발표 휘장과 경기이념(단결, 공유, 열정, 탁월-团结、共享、激情、卓越)도 발표되었다. 그리고 프로구단이 구단명 비기업화 개혁도 완료했다. 3. 중미 ‘핑퐁외교’ 50주년 4월 24일, 중미 ‘핑퐁외교’ 50주년 기념행사가 베이징에서 거행되었다. 중미 ‘’핑퐁외교 체험자 등 400여명이 온·오프라인으로 행사에 참석했다. 그리고 11월 하순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도 중미 선수들이 팀을 이뤄 혼합복식에 출전해 ‘핑퐁외교’ 50주년을 기념했다. 4. 광둥, CBA ‘11관왕’ 차지 5월 1일 2020-2021 중국남자프로농구(CBA) 결승 3차전에서 광둥팀(广东队)은 랴오닝팀(辽宁队)을 꺾고 11차 CBA 우승보좌에 올랐다. 5. 중국 국가체육총국 ‘로드스포츠 경기 안전관리 강화사업에 관한 통지’ 발부 6월 2일, 국가체육총국은 ‘로드스포츠 경기 안전관리 강화사업에 관한 통지(关于加强路跑赛事安全管理工作的通知)’를 발부하여 ‘안전위험방지방안, 응급처치방안, 발생방지방안 및 경기조직방안’을 잘 실천하여 대회 개최 시기, 종목 설치, 대회 규모에 대한 적합성 여부 등을 성급 주관부문 및 중국육상협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6. 중국선수단 도쿄올림픽, 패럴림픽 빛내 7월 23일부터 8일까지 제32회 하계올림픽이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38매, 은메달 32매와 동메달 18매를 따냈다. 이중 금메달 수는 국외 올림픽참가 최고 기록과 타이틀을 이루었다. 그리고 8월 24일부터 9월 5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16회 도쿄 하계 패럴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96매, 은메달 60매와 동메달 51매 등 총 207개의 메달을 획득해 5회 연속 패럴림픽 금메달 1위와 메달수 1위를 차지했다. 7. ‘전민 건강 계획(2021-2025년)’과 ‘<14.5> 체육 발전 계획’ 등 문서 발부 8월 3일, 중국 국무원이 발간한 ‘전 국민 건강 계획(2021-2025년)’이 대외에 공포되고 10월 25일, 국가 체육총국이 ‘<14.5> 체육발전계획이 발표하여 향후 한 시기 국민 건강의 더 높은 수준의 발전을 촉진하며 국민의 건강과 건강 욕구를 충족시키고, ‘14,5’ 스포츠 개혁과 발전 및 스포츠 강국 건설 등 사업에 대해 배치하였다. 8. 제14회 전국운동회 및 제11회 장애인 운동회 산시서 거행 9월 15일부터 27일까지 제14회 중국 전국운동회가 산시(陕西)성에서 열렸다. 이번 전국운동회는 코로나19 방역 배경에서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35개 경기종목과 19개 대중경기 종목이 설치되었고 1만2000여 명의 선수와 1만여 명의 대중 선수가 참가하였다. 그리고 10월 22일부터 29일까지는 전국 제11회 장애인운동회 및 제8회 특수올림픽이 열렸다. 9. 전국인대서 체육법 개정 초안 첫 심의요청 10월 19일, 체육법 개정안이 제13차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제31차 회의에서 심의가 요청되어 매년 8월 8일을 국가체육제로 제정하기로 했다. 이번 수정은 체육 강국과 건강 중국의 국가 전략을 실현하고 체육사업의 두드러진 문제해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체육법 확보와 체육사업 개혁을 함께 추진해 스포츠 관련 분야의 조율을 잘하는 등이 포함되었다. 10. 저우관위, 중국 최초로 F1 정식 드라이버로 등극 11월 16일 알파로미오 팀 중국 드라이버 저우관위(周冠宇)가 정식 본팀에 가맹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저우관위는 2022시즌 포뮬러원(F1) 챔피언십에 정식 레이서로 출전할 예정이며 중국 최초의 F1 정식 드라이버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 스포츠
    2021-12-29
  • 베이징 동계올림픽 성화 환영식 성대히 거행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일, 신화통신에 따르면 당일 오전 올림픽타워에서 열린 베이징 동계올림픽 성화 영접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행사는 우선 그리스에서 열린 베이징 동계올림픽 성화 채집과 인수인계식을 영상으로 감상하며 기대와 함께 진행됐다. 이어 베이징 동계올림픽 성화가 행사장에 장엄하게 들어섰으며 곧 바로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 성화대는 중국 전통의 청동 예기인 존(尊)에서 영감을 받아 상운 무늬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 눈꽃으로 변하는 ‘쌍오지성(双奥之城)’의 정신적 계승을 상징하는 것으로 붉은 리본이 하늘하늘 날리며 위로 둘러져 있어 횃불 디자인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붉은 색과 은빛으로 어우러진 색채는 전통과 현대, 과학기술과 격정의 조화를 상징했다. 베이징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는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성화 전시와 성화 봉송 릴레이 계획을 발표했다. 글로벌 코로나19 대응의 큰 배경에서 베이징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는 ‘간결하고 안전하며 멋진 동계올림픽’이라는 대회의 개최 요구에 따라 공공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전통 성화 봉송 릴레이와 성화 전시 행사를 결합해 베이징 동계올림픽 성화 봉송 릴레이를 새로 만들 계획이다. 성화 봉송 릴레이는 ‘빙설과의 약속을 맞이하여 아름다운 미래를 향하여’라는 주제로 ‘건강·기쁨·활력’을 슬로건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전시를 늘려 성화 전시, 전통 성화 봉송, 인터넷 봉송 등 3개 부문으로 나눠 진행되며 올림픽의 성화가 베이징에 도착하면 동계올림픽 성화 봉송이이 열릴 예정이다. 이외 먼저 동계올림픽 성화 봉송 릴레이 주제 전시와 연계해 올림픽타워에 전시하는 동시에 빙설에 대한 참여를 독려하고 동계올림픽 유치를 지원할 방침이다. 장젠둥(张建东) 베이징 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 집행부주석은 “2022년 2월 2일부터 4일까지 베이징, 옌칭(延庆), 장자커커우(张家口) 등 3개 지구에서 전통 성화 봉송 행사를 열고 성화 봉송에는 약 1200명의 주자가 참여하며 전달 코스는 빙설문화, 역사문화, 장성문화에 입각하여 연도의 자연풍광, 인문적 특색 및 도시적 모습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베이징 지구의 성화 봉송 릴레이는 ‘쌍오지성’의 독특한 매력을, 연경 지구는 ‘가장 아름다운 동계올림픽 도시’의 새로운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게 되며 장자커우 지구는 아시아 겨울여행의 여행지를 조성한 풍성한 성과를 중점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이외에도 베이징 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는 각종 인터넷 애플리케이션, 가상현실 기술을 활용한 성화 봉송 인터넷 홍보 활동을 전개할 예정이다.
    • 스포츠
    2021-10-21
  • 베이징 동계올림픽 성화 그리스서 점화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8일, 베이징 동계올림픽 성화 점화식이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고대 올림피아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성화 점화식은 2000여 년이 된 헤라 신전 유적 앞에서 올림픽 성화가 점화되어 다시 한번 베이징에서 타오르게 된 것이다. 점화식에서는 그리스의 최고 여배우 조지우가 처음으로 성화 봉송을 받았고 이어 그리스 알파인스키 선수 얀스 안토니우가 이어받아 18일 두 번째 성화 봉송 주자인 전 중국 쇼트트랙 선수 리자쥔(李佳军)에게 전달하였다. 이로써 베이징 동계올림픽의 장거리의 성화봉송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 스포츠
    2021-10-19
  • 중국 선수단 도쿄 올림픽 총 결산④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 8월 7일,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베이징(北京)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로부터 ‘연강독조(烟江独钓)'라는 제목으로 된 중국화 한 점을 선물받았다. 올림픽을 응원하기 위해 중국 예술가가 창작한 것으로 고요하고 먼 동양의 정취를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여전히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바흐는 “올림픽의 의미는 전 세계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베이징 타임(北京时间)’에 표지대 세운다 도쿄를 지나면 올림픽은 ‘베이징 타임’에 들어간다. 지난 7월 21일 도쿄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베이징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는 총회에 동계올림픽 개최 계획의 최신 진전을 보고, 세계를 위해 간약하고 안전하고도 멋진 올림픽을 치르겠다는 것을 표명했다. ‘100년 투톱’의 목표가 교차하는 역사적 위치에 선 베이징의 2022년 동계올림픽과 동계 패럴림픽 좌표가 독특하여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13년 전의 8월 8일은 베이징 올림픽이 개막된 날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매년 8월 8일이 ‘전민 건강의 날’로 정해졌다. 이는 베이징 올림픽이 중국에 남긴 가장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었다. 현재 중국 전 국민 건강의 공공 인프라가 나날이 완벽해지고 있으며 전민 건강활동이 활발히 발전하고 있다. ‘국민 자질을 제고하여 전민 건강을 실천한다’는 이념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경상적으로 스포츠 활동에 참가하는 비율이 37.2%에 달했다. 베이징 올림픽이 심은 이 씨앗은 이제 중화의 땅에 잎이 무성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도쿄는 금메달에 대한 완벽한 릴레이를 지켜봤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아쉬움을 남긴 적이 있는 중국 선수단의 사격 선수 두리의 도쿄방문은 다섯 번 째 올림픽 관련 방문으로 되지만 코치로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 21살의 제자 장창훙(张常鸿)이 이번에 새내기의 모습으로 올림픽 데뷔무대에서 세계기록을 깨트리며 금메달을 따내는 것을 보고 그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중국은 올림픽과 손잡고 점차 올림픽 개혁을 추진하고 이끄는 실천자로 거듭나고 있다. 중국은 동계올림픽 배당금과 함께 더 많은 중국의 경험, 중국의 지혜와 중국의 방안은 올림픽 운동과 인류의 운명공동체 구축에 많은 본보기를 제공할 것이다. 베이징 톈안먼(天安门)에서 창안제(长安街)를 따라 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은 서우강(首钢)그룹의 공장구역이 있던 옛터이다. 이 오래된 옛터는 당시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곳에는 올림픽 스키점프 경기장 ‘수이징세(水晶鞋)’가 들어서고, 베이징 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도 이곳에 사무터전을 닦았으며 여러 동계 종목의 국자호(国字号) 팀들도 이곳에 새 기지를 만들었다. 이 곳은 또한 바흐가 여러 차례 극찬한 ‘베이징 스탠더드(北京标准)’로 소문난 곳이다. 바흐는 또 “베이징은 준비작업이 효율적이며 ‘올림픽 2020의 의정(奥林匹克2020议程)’하에서 될 수록이면 절약하고 있다”면서 “올림픽 정신을 계승하고 선수 경험을 존중하며 따라서 베이징이 ‘올림픽 2020 의정’의 새로운 벤치마킹(标杆)에 나설 것으로 자신한다”고 했다. 도쿄에는 특수한 중국단체인 베이징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도쿄올림픽 관찰원 실무단이 있다. 왕둥궈(王同国) 실무단 사무총장 겸 베이징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스포츠대회 서비스부 의료 위생처 부처장은 “이번에 많은 보귀한 재료를 얻었으며 이 재료들은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기획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크리스 펜 국제올림픽위원회 관찰원 담당자는 “베이징 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에 뭔가 참고할 만한 경험을 전달하고 싶다”면서 “우리는 베이징 동계올림픽과 동계 패럴림픽 기간에 관찰원 종목을 다시 만들기를 기대하고 있다. 베이징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개최하는 데 좀 더 지혜가 있다고 믿는다. 다른 조직위에도 더 많은 경험을 전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바흐는 올림픽 정신을 계승하여 새로운 장을 쓸 것과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계속 이어 달라고 당부했다. 이제 반년 후 중국은 세계 각지의 동계 스포츠 건아들을 향해 팔을 벌릴 것이다. (끝)
    • 스포츠
    2021-08-18
  • 스포츠 실력 향상은 국력 향상의 축소판
    ● 철 민 지난 8일, 2020 도쿄 올림픽이 17일간의 열전 끝에 그 긴장하고도 화려하던 순간 순간의 막을 내렸다. 올림픽은 막을 내렸지만 그 여운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38매, 은메달 32매와 동메달 18매(미국은 금메달 39매, 은메달 41매와 동메달 33매로 종합 1위)를 획득해 종합 2위에 놓이면서 금메달에서는 스포츠 강국인 미국과 단 1매의 차이로 거의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종합 2위, 이는 중국 선수단 총체 실력의 합리적인 반영인가 아니면 실력 이상의 반영인가 또한 반대로 실력 이하의 반영인가? 필자가 인정하건 대 이는 자로 잰 듯이 정확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적으로는 중국 선수단 총체 실력의 합리적이고도 정확한 반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는 스포츠 실력의 향상은 국력 향상의 축소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가 스포츠 실력의 향상은 국력 향상의 축소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 그 여러 가지 요소 중 역사적인 요소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하지 아니 할 수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중국의 올림픽 출전 역사 대사기 중국이 제일 먼저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1932년 7월(현대 올림픽의 기원은 1896년임)이다. 당시 중국 대표단은 도합 6명의 대표단 성원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 10 회 올림픽에 파견, 당시 선수로는 류창춘(刘长春) 단 1명뿐이었다. 류창춘은 올림픽에서 원래 3개 종목의 육상 단거리 경기에 참가하려고 했지만 여로의 피로 때문에 400미터 종목은 포기하고 100미터와 200미터에만 참가하여 각각 5등과 6등을 하였으며 결승에 오르지도 못했다. 초라했다. 인구 4억 명에 달하는 대국인 중국은 스포츠에서도 서방세계와는 아주 까마득하게 거리가 먼 후진국이었고 말 그대로 ‘동아병부(東亞病夫)’였다. 그 뒤 새 중국이 창립되어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1952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개최된 제 15회 올림픽이었다. 당시 중국은 비교적 늦게 올림픽 참가 초청을 받았다. 중국은 40명에 달하는 대표단을 파견하였지만 헬싱키에 도착했을 때는 올림픽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오직 우촨위(吴传玉)만이 100미터 배영 경기에 참가했다. 경기 성적은 1932년의 로스앤젤레스에서의 결과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한편 그 당시 국제올림픽 위원회의 많은 인사들이 ‘두개 중국’론을 주장하면서 새 중국과 타이완(台湾) 모두 올림픽에 참가하게 하려고 하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성명을 발표하여 1956년 호주 멜버른에서 개최되는 제 16 회 올림픽 참가를 거절하였으며 1958년 8월 19일에는 성명을 발표하여 아예 국제올림픽 위원회에서 퇴출해 버렸다. 이어 중국은 그 뒤 1960년 8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있은 17회 올림픽, 1964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있은 18 회 올림픽, 1968년 10월 멕시코 멕시코 시티에서 있은 19회 올림픽, 1972년 8월 독일 뮌헨에서 있은 20회 올림픽과 1976년 7월 캐나나 몬트리올에서 있은 21회 올림픽에 불참하였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각종 월드컵이나 선수권에 참여하는 것으로 스포츠의 종합실력 향상에 여러 모로 노력을 쏟았으며 멀지 않은 장래에 기어코 올림픽에 복귀하려는 ‘야망’을 불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스포츠의 종합 실력은 오직 올림픽에서만이 체현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중국은 너무 서두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점진적으로 스포츠 실력을 쌓아 가기만 했다. 이렇듯 중국 정부와 중국인민들은 먼 앞날을 내다보며 장기 타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1979년 11월 26일,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중국 올림픽위원회의 합법적 권리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타이완은 오직 중국 타이베이 올림픽위원회(台北奥委会)의 명의로 올림픽 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 몇 달 뒤 중국은 처음으로 13회 동계올림픽에 참가했다. 1980년 7월, 구소련 모쓰크바에서 22회 올림픽이 개최되게 되자 중국은 참가하기로 하고 만단의 준비를 갖추었다. 헌데 세상 풍운을 예측할 수 없다고 각종 원인에 의해 중국은 올림픽 정신과 국가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모쓰크바 올림픽에도 불참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올림픽 선수단은 1980년 4월 24일 국가올림픽위원회가 발부한 공고에 따라 모쓰크바 올림픽 참여를 포기하였다. 1984년 7월 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컬리시엄에서 있은 23회 올림픽 개막식에는 중국 선수단이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간판을 든 소녀의 뒤에서 진붉은 오성홍기를 추켜들고 입장했다. 이 대회에서 중국은 도합 225명에 달하는 선수단을 파견했다. 축구, 필드 하키 볼, 복싱, 승마와 현대 5종을 포함한 16개 종목에 참가하였으며 7월 29일, 푸라두 사격장에서 울린 중국 선수 쉬하이펑(许海峰)이 울린 총소리가 중국 올림픽 사상의 금메달 ‘0의 돌파’를 실현했다. 즉 이 금메달은 1932년 중국이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이래의 첫 금메달이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중국은 도합 금메달 15매, 은메달 8매와 동메달 9매를 따내 종합 4위에 올랐으며 ‘동아병부’란 오명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당시 스포츠 강국 미국의 벽은 높았다. 이 대회에서 미국은 도합 금메달 83매, 은메달 61매와 동메달 30매를 차지하며 금메달 수량 상 종합 2위인 루마니아(금메달 20매)보다 63매나 더 많았다. 한편 올림픽 대회에서의 중국의 굴기는 우연한 것이 아니란 것은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사실로 입증되었다. 물론 자그마한 굴곡은 있었지만 올림픽에서 중국의 상승세는 지속되었다. 1984년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이후 올림픽 대회에서 중국의 메달 획득 상황은 다음과 같다. 1988년 9월, 한국 서울에서 개최된 24획 서울 올림픽 당시 중국은 301명의 선수단을 파견,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5매, 은메달 11매와 동메달 12매를 획득하면서 종합 8위를 기록했다. 1992년 7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25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16매, 은메달 22매와 동메달 16매로 종합 4위를 차지했다. 1996년 7월 미국 애틀란타에서 개최된 26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16매, 은메달 22매와 동메달 12매를 따내면서 종합 4위에 올랐다. 2000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27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28매, 은메달 16매와 동메달 15매를 획득, 종합 3위를 차지하면서 순위 한 단계 끌어올렸다. 2004년 8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된 28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32매, 은메달 17매와 동메달 14매를 따내면서 종합 2위를 차지했고 순위를 재차 한 단계 끌어 올렸으며 미국의 버금으로 세계 스포츠 분야에서 강자로 군림하였다. 2008년 8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된 29회 올림픽, 중국은 일개 스포츠 후진국인 ‘동아병부’로부터 마침내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행사인 올림픽을 주최하는 동방의 ‘거성’으로 떠올랐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580여 명의 선수단을 선 보였고 중국 올림픽 사상 참여한 종목도 가장 구전하였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중국은 도합 금메달 51매, 은메달 21매와 동메달 28매를 따냈으며 금메달 순위에서는 스포츠 강국 미국을 따돌리고 첫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중국의 스포츠 종합실력이 미국을 능가했다는 설명은 아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미국은 금메달 36매, 은메달 38매, 동메달 36매 도합 110매로 여전히 중국의 100매의 메달 총수보다 많았다. 그리고 중국은 자국에서 개최한 올림픽이다 보니 천시, 지리와 인화 등 우세가 있었으며 진정으로 미국이란 높은 벽을 뛰어 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또한 그 뒤에 있은 몇 차례의 올림픽에서도 충분히 나타났다. 2012년 7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30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38매, 은메달 31매와 동메달 22매를 획득하면서 미국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했다. 2016년 8월,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에서 개최된 31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26매, 은메달 18매와 동메달 26매를 따내면서 미국과 영국에 이어 종합 3위에 머물며 몇 회에 거쳐 지켜오던 2위 자리를 영국에 넘겨주었다. 스포츠란 항상 변화무쌍한 법, 올림픽 역시 그 법칙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실력적으로 강하기만 하면 남한테 뒤지는 건 잠시적인 것, 이번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32회 올림픽에서 중국은 종합 2위 자리를 되찾아 왔을 뿐만 아니라 올림픽 폐막의 전날인 7일까지 만도 금메달 개수에서는 1위를 지키기도 했다. 경제 발전과 스포츠 실력 향상은 정비례 관계? 주지하다 싶이 개혁개방을 실시한 지난 40여 년래 중국은 세계를 놀라게 하는 경제적 발전을 거듭하였다. 데이터에 따르면 개혁개방이 되던 1978년 중국의 GDP는 3679억 위안으로 세계 10위에 있었으나 1년 전인 2020년에는 100만억 위안을 돌파했다. 40여 년 간 271.8배 증장하면서 미국의 버금으로 세계 2위 자리를 확고하게 굳혔다. 구체적으로 보면 2000년 10만억 위안을 돌파하면서 이탈리아를 초과해 세계 6위를 점했고 2006년에는 20만 억 위안을 돌파하면서 영국을 초과해 세계 4위에 올랐다. 2007년에는 독일을 초과하면서 세계 3위가 되었다. 그리고 2010년에는 40만 억 위안을 돌파하면서 일본을 추월하면서 세계 2위를 차지했다. 그럼 중국의 GDP가 언제 미국을 따라잡거나 혹은 추월하는가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시간적 문제만 남았다.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해 미국의 GDP는 20.94만억 달러였고 중국의 GDP는 14.71만억 달러였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GDP가 세계 경제에서 점하는 비율은 각각 24.7170%와 17.3811%이다. 그럼 이처럼 비약적으로 발전한 중국 경제와 중국의 스포츠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거듭 말하지만 필자의 주장이라면 이 양자의 관계는 정비례로 발전한 관계라는 것이다. 주지하다 싶이 중국 경제는 새 중국이 창립된 후에서 아주 오랫동안 낙후한 상태에 있었다. 적어도 중국공산당 11중 3차 전원회의가 열린 뒤인 지난 세기 70년대 말까지만도 ‘먹고 입는 문제’마저 해결하지 못한 빈곤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1980연대 초기부터 농촌에서는 호도거리를 실시하고 대외적으로는 개혁개방으로 시장경제의 초급단계에 들어가면서 경제 분야에서는 초보적으로 생기발랄한 현상이 출현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1984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23회 올림픽에서 중국은 금메달 ‘0의 돌파’를 시작으로 올림픽 폐막할 때까지 금메달 15매, 은메달 8매와 동메달 9매를 따내면서 종합 4위에 올랐으며 스포츠에서의 ‘동아병부’란 오명을 깨끗이 벗어 내쳤다. 아쉬운 것은 중국은 1956년에 있은 16회 올림픽부터 22회 올림픽까지 연속 7회의 올림픽에 불참하였기에 그 기간 동안의 중국의 종합 스포츠 실력에 대해 가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탁구와 체조 외에는 금메달 사냥에 성공할 종목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중국은 비록 낙후했지만 스포츠에서의 탁구와 체조에서만은 내노라 할 수 있었던 만은 사실이었다. 탁구와 체조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아무리 개도국이고 후진국이라 해도 자국의 특성에 따른 스포츠 종목은 가끔씩 있었다. 예하면 중국이 탁구와 체조를 내세울 수 있었다면 아프리카의 케냐 등 국가와 중남미의 자메이카 등 국가는 육상이 ‘명품 종목’이라 할 수 있었으며 남미의 브라질,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등 국가는 축구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다시 본 화제로 돌아와 1984년 7월의 로스앤젤레스의 올림픽을 계기로 중국의 종합 스포츠는 굴기하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즉 그 위에 있은 1988년의 서울 올림픽, 1992년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6년의 애틀란타 올림픽, 2000년의 시드니 올림픽, 2004년의 아테네 올림픽, 2008년의 베이징 올림픽, 2012년의 런던 올림픽 그리고 2016년의 리우 올림픽과 올해의 2020 도쿄 올림픽 등 올림픽에서 보면 중국은 스포츠 분야에서의 강한 굴기를 보였다. 이 10회에 걸친 올림픽에서 중국이 차지한 가장 낮은 종합 성적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의 8위였고 가장 좋았던 성적은 2008년의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금메달 1위였으며 해외 출전 사상 가장 좋은 성적은 2012년의 런던 올림픽(금메달 38매, 은메달 31매와 동메달 22매)과 이번 도쿄 올림픽(금메달 38매, 은메달 32매, 동메달 18매)에서의 종합 2위였다. 한편 중국 연변출신인 필자로서는 중국 연변의 경제 발전 및 스포츠의 발전과 중국 국가적 차원의 경제 발전 및 스포츠의 발전을 비교하면서 분석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연변은 중국에서 2개의 ‘축구의 고향’ 중의 하나이다. 즉 남방에서는 메이현(梅县)이었고 북방에서는 연변이다. 특히 지난 세기 50년대 주로 연변 조선족들로 구성된 지린성(吉林省) 축구팀은 중국 내 4개 강팀 중의 일원이었고 당시 중국의 모든 축구 전업 팀에는 조선족 선수가 없는 팀이 거의 없었다. 중국 국가 임업팀에는 일색으로 조선족 선수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연변은 또한 스케이팅과 아이스하키를 비롯한 동계 스포츠 방면에서도 유명한 곳이다. 동계스포츠라고 하면 중국에서는 흔히 헤이룽장성(黑龙江省)과 지린성에서 인재가 많이 나왔으며 지린성의 선수 거개는 연변적이었다고 한다. 이외 여자축구와 여자배구 역시 연변은 전국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 이 중 일찍 지난 세기 80년대에 연변 여자축구가 중국 국내 리그에서 우승(남자축구는 1965년 지린성팀의 이름으로 우승)을 한 적도 있다. 스포츠뿐이 아니다. 연변은 일찍 ‘축구의 고향’과 더불어 ‘사과배의 고향’과 ‘가무의 고향’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가 지나간 일이다. 지금 연변에서 여자배구, 여자축구와 동계 스포츠는 뀅 구워먹은 자리가 됐고 남자 프로축구도 자취를 감췄다. 뿐만 아니라 현재 연변의 사과배는 풍년이 들어도 그 판로가 막혀 창고에서 썩어나는 현상이 비일비재이고 연변의 자랑이던 연변가무 역시 지린시가무단과의 경쟁에서 ‘1위 자리(지린성을 대표하는 가무단은 원래의 연변가무단으로부터 지린시가무단으로 넘어갔음)’를 내주어야만 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장시기 기간의 인구 감소와 내지와는 점점 뒤 처져지는 경제상황 등등이다. 그럼 연변스포츠, 사과배와 가무의 진로가 암울하고 심지어 부진하는 현상을 놓고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가? 필자의 조심스러운 분석이라면 아쉽고 안타깝지만 어떻게 보면 이는 중국 내지의 스포츠와 기타의 모든 것이 전반에 거쳐 돌파성적으로 발전했다는 증거로도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연변의 상황에 가슴 아파하기도 해야겠지만 한편으로는 국가와 기타 국내 많은 지방의 거족적인 발전에 기뻐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한테는 민족과 국가가 모두 중요하기 때문이다. 2030년의 분수령 - 중국의 국력과 스포츠 실력 라인은? (에필로그) 세계의 많은 예언가들은 이제 2030년이 되면 중국 경제가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고 진작 추정했다. 필자가 중국인이라서 이 추정이 맞는다고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태껏 지나온 과정을 놓고 볼 때 이는 완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과 미국 사이에 GDP 차이는 분명 존재하나 구매력에서는 중국이 이미 미국을 추월한 상황이다. 그럼 경제발전과 스포츠 실력 향상이 정비례가 된다는 필자의 주장이 맞는다면 2030년 그 때에 가서 중국의 스포츠 역시 미국을 추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올해에 개최된 도쿄 올림픽에서 어느 정도 증실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동포투데이 논설위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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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1-08-17
  • 중국 선수단 도쿄 올림픽 총 결산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합계가 6킬로그램이나 뒤졌을 때 실리군은 깜짝 놀랄 정도로 큰 반전을 이루었다. ‘후회를 남기기 싫다’는 50km 경보 선수 볜퉁다(边通达) 바늘 세 개를 갖고 4시간 가까이 달렸으며10여 번 찌르면서 정신을 가다듬었고 32세의 천룽(谌龙)은 비록 배드민턴 남자 단식 타이틀 방어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발에 생긴 피가 섞인 물집은 사람들에게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 ‘중국의 용’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27세의 왕순(汪顺) 개인 최고기록을 1초16이나 끌어올려 중국 남자선수 혼영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이렇듯 중화의 체육건아들이 보여준 끈질긴 투혼과 선전의 정신은 감동적이었고 경기장 안팎에서 전하는 자신감 여유도 눈에 띄었다. 중국 선수단은 하나의 젊은 대오였다. 선수 431명의 평균 나이는 25.4세, 이 중 70%에 가까운 293명은 첫 올림픽 출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번 여름, 올림픽 건아들이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는 것은 성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욱이 세계무대에 선 이들은 자신의 빛과 자신감, 솔직함, 유머 그리고 개성와 패션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개성 있는 표현과 멋진 언어금구가 많아 중국 선수들이 표현에 서투르던 모습이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는 확 바뀌었으며 이들의 다원적인 개인 이미지도 운동선수 집단의 또 다른 면을 대중에게 보여주었다. 이번 도쿄 올림픽의 첫 금메달을 거머쥔 양첸(杨倩)은 경기를 마친 뒤 옆집 여동생과 흡사하게 네일아트 비법을 공유, 성적도 챙기고 생활도 사랑하는 챔피언이 인간적인 사랑을 받으며 올여름 네티즌들이 추구하는 스타가 됐다. 여자역도 최대급 챔피언이 된 리원원(李雯雯)은 바닥에서 잘 때의 동영상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여유 있게 우승을 차지한 뒤 그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경기장을 내려온 이 헤라클레스(大力士)가 순식간에 ‘리틀 원(小雯雯)’이 됐다. 그는 또 “모든 뚱뚱한 여자라면 누구나 꿈이 있다”고 외쳐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개성의 아름다움은 자신감에서 비롯되며 여러 가지 세부사항 속에서 존재한다. 중톈스(钟天使)와 바오산쥐(鲍珊菊)는 이번에 봉황 투구를 쓰고 경기장에 나섰다. 그것은 봉황의 열반을 의미하며 그도 그럴 것이 그녀들은 확실히 해냈던 것이다. ‘00후’가 평행봉 위에서 ‘캥거루 손사래’를 쳤을 뿐 아니라 이는 경기장에 있던 미국인 코치들도 흉내를 내도록 했다. 한편 IOC 위원들은 류양(刘洋)이 링 위에서 목을 돌리는 동작을 포착하고는 “어떻게 링 위에서 경기를 하면서 이렇게 쿨 하게 보일 수 있느냐”며 감탄을 연발하기도 했다. 여기서 더 쿨 한 사람은 37세의 뤼샤오쥔(吕小军)이었다. 해내외로부터 피트니스권의 ‘신’으로 추앙받던 그는 우승 직후 “그대들은 잘못 부르지 않았다”며 자신감으로 부르짖었다. 자신감은 스포츠에 대한 더 깊은 이해 그리고 승부에 대한 태연하게 대처 등에서 비롯된다. 네 번이나 올림픽 출전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우징위(吴静钰)는 5년 전처럼 울지 않았다. 이 ‘엄마’급 선수는 담담하게 웃었으며 “그것은 시간의 힘”이라고 했다. 그녀, 우징위는 여한이 전혀 없다고 했다. 수영장에서 몇몇 작은 꽃들은 비록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지만 여전히 기뻐하며 자신의 올림픽 데뷔전에 890점을 주었다. 미래가 그들만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왕젠자허(王简嘉禾)의 말처럼 “우리는 운동하러 온 것이다. 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던 것이고 못 땄으면 돌아가서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배드민턴 코트에서 허빙자오(何冰娇)의 라이벌이 경기 중 부상을 당해 퇴장하자 길게 싸우지 않고도 이긴 이 소녀는 경기 후 눈물을 흘리며 할 수만 있었다면 상대와 끝까지 잘 싸우고 싶었다”며 멋 적게 이긴 경기에 대해 약간 불만을 토로했다. 배드민턴 여자복식에서 중국의 ‘판천(凡尘)’조는 결승전에서 졌지만 그들은 상대를 어루만져주는 자세로 나왔다. 경기 후 발표회에서 자이판(贾一凡)이 경기 과정의 ‘단락’을 이야기하기 시작, 이에 상대도 박수를 치면서 “‘판천’을 믿어 달라. 이제 ‘판천’은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은 중국 선수들 개개인의 내심 바라는 마음이었고 그들이 항상 노력하는 방향이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경기장이 있고 승패에 관계없이 언제나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세대의 국민 우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계속)
    • 스포츠
    2021-08-16
  • 중국 선수단 도쿄 올림픽 총 결산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육상과 수영이라는 두 가지 기초 종목이 도쿄올림픽에 너무 많은 것을 기여했다. 수빙텐(苏炳添) 100m 준결승에서 9초83로 천하를 놀라게 했고 공리자오(巩立姣)와 류스잉(刘诗颖)이 차례로 ‘건곤일척(乾坤一掷)’이 되어 승리를 결정지었다. 그리고 장위페이(张雨霏)가 ‘접후(蝶后)’가 되었으며 왕순(汪顺)이라는 ‘앞세대 천리마(老骥)가 마침내 왕으로 군림했다. 또한 기록 돌파와 서프라이즈(惊喜)가 더욱 많은 종목에서 펼쳐졌다. 중국 선수단은 30개 큰 종목과 225개 세부 종목에 참가, 국외 세부 종목 중 가장 많은 종목에 투신하였으며 이 중 조정 여자 4인용 스컬(双桨)과 트램펄린(蹦床)의 여자 개인 종목에서 모두 13년 만에 금메달을 따냈다. 그리고 쑨이원(孙一文)이 중국 펜싱 사상 첫 여자 에페(重剑) 경기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여자 3인 농구에서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선수단 감독들의 눈에는 국가 보장과 치밀한 준비 그리고 사전의 적응 등을 성공의 열쇠로 꼽는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도 “이번에도 비전통적 강점 중 중국이 잘했다. 중국 올림픽위원회가 선수육성과 기타 준비에서 뛰어난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4년 전 장위페이가 추이덩룽(崔登荣) 수하로 갈 당시 두 사람은 성격이 너무 달라 ‘화성과 지구에 충돌하는 것’처럼 마찰을 빚었다. 추이덩룽이 그린 ‘3년 올림픽 우승’ 청사진에 대해 처음에 장위페이는 전혀 믿지도 않았고 잘 협력하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3년 여간 성격, 기술과 심리 등 난제를 극복한 이들 사제(师徒)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았고 추이덩룽은 ‘100m로 200m를 추진하는 것’으로 자신감을 높이게 하는 한편 장위페이를 올림픽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강력한 종목인 접영에서 금메달 1매와 은메달 1매는 물론 여자 자유형 4X200m 릴레이에서 동료들과 함께 장위페이는 세계기록도 깨뜨리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이런 ‘장위페이’의 배후에는 ‘추이덩룽’같은 인물이 한 명씩 심지어는 여러 명의 ‘추이덩룽’이 포진, 그리고 이들 모두의 배후에는 또한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중국배드민턴협회 장쥔(张军) 주석은 “올림픽이 1년 연기되면 조국이란 든든한 후원자가 있어 기지에서 정상적으로 훈련할 수 있어 컨디션을 잘 유지하고 올림픽 시뮬레이션(模拟赛)도 몇 번 할 수 있었다. 이는 다른 팀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좋은 성적 뒤에는 방역과 반 도핑이라는 두 개 전장에서의 완벽한 활약이 있었다. 중국 역도 선수 팀이 경기 중 미끄럼 방지용 파우더(防滑粉)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역도 팀에 따르면 이것은 팀에서 정한 많은 방역 세부사항 중의 하나라고 한다. 중국역도협회 주석 저우진창(周进强)은 도쿄 올림픽 참가 한 달 전에 중국은 3000여 자에 이르는 ‘참가자 방역, 출국, 응급 방안’을 만들어 출정의 전 과정을 담았다. 역도 팀은 전체 중국 선수단의 축소판이다. 경기 전 중국 선수단이 제안한 코로나19 전파 방지 대책, 도핑 사건 및 경기 풍격과 경기 규율에서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7일까지 완벽한 답안을 작성했다. 중국 선수단은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 4개 종목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합계로 금메달 38매 획득에 성공했다. 물론 경기장에서 이길 때도 있고 패할 때도 있는 법, 중국 선수단에서도 눈물과 서운함과 아쉬움이 있었다. 중국 여자 축구는 3전 2패 1무로조별 리그에서 탈락했고 유력했던 우승 후보였던 중국 여자 배구 역시 8강에 실패하는 사상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으며 중국 태권도 팀은 동메달 1 매만 따내는 데 그쳤다. 중국에서는 매 올림픽을 마칠 때마다 금메달이 장부에 기록되는 역사가 있다. 게다가 중국 선수단은 아직 큰 종목에서 더 이상의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다. 승패를 떠나 중국 선수들의 풍채는 도쿄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겼다. 지난 2일, 중국 여자배구팀 감독 랑핑(郎平)은 중국 여자배구의 도쿄 올림픽에서의 최종전에서 선수들에게 “선수들 중에 아직 젊은 사람이 많다. 3년 후에는 파리 올림픽이다. 오늘 다시 출항하는 것으로 간주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중국 여자배구가 조별 리그에서 고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엄연한 현실 앞에서도 중국 여자배구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2019년 월드컵 우승 이후 중국 여자배구는 코로나19의 발생 기간 앞뒤를 합쳐 약 1년 반에 달하는 비공개 훈련을 거쳤다. 랑핑은 최근 9년간 중국 여자배구 팀을 이끌면서 맞닥뜨린 가장 큰 도전 중 하나가 바로 수준 높은 경기 여건이 부족한 상황에서의 장기적인 집중훈련으로 꼽았다. 중국 여자배구를 포함한 중국 선수단의 각 팀은 모두 폐쇄적인 훈련에서 시간을 보냈다. 실로 “올림픽을 위해 모든 사람이 열심히 노력한 점은 이번 결과에 관계없이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랑핑이 말한 바와 같았다. 3연패 후 중국 여자배구는 2연승을 달렸다. 이러자 랑핑은 선수들에게“사람들이 우리 여자배구에 요구하는 것은 매번 우승하고 매번 이겨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여자배구팀을 좋아하는 투혼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렇다. 바로 이런 정신이 모든 중국 선수들이 공유하는 속성이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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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2
  • 중국 선수단 도쿄 올림픽 총 결산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무려 17일의 여정을 거쳐 지난 8일 도쿄 올림픽은 마침내 그 정채롭던 막이 내렸다. 도쿄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38매, 은메달 32매, 동메달 18매를 따내면서 미국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했다. 7일까지만도 금메달 총수에서 미국에 앞서 1위를 지키던 것이 8일 하루 사이에 금메달 사냥에 실패해 미국에 1위 자리를 내 준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지만 중국 선수단의 금메달 수는 2012년 런던 올림픽과 맞먹으며 역대 해외 올림픽 참가 사상 최고 성적과 동률을 이뤘으며 메달로는 해외 올림픽 출전 사상 최고기록을 작성했다. 그리고 결과보다는 경기 내용에서는 많은 새로운 기적들이 창조되어 14억 중국 인민을 기쁘게 했으며 인민은 그것에 만족하게 된다. 수빙텐(苏炳添) 9초83! 준결승 1위! 새로운 아시아 기록! 아시아 선수 최초로 9초90대 진입! 남자 100m 준결승에서 총소리가 울리기 전, 수빙텐은 두 손을 합장하고 엄지손가락과 검지 손 가락으로 ‘1cm’를 나타냈고 경기 후에는 “조금만 더 잘했더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소병첨이 어느 정도 진보했는가? 이는 도쿄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의 활약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불과 한 달 전 선수단은 도쿄에서 중국의 올림픽 성적이 수년간 계속 하락하는 추세를 억제하면서 금메달과 메달 랭킹을 1위로 올릴 것을 제안했다. 중국은 도쿄 올림픽 폐막 하루 전인 7일만도 금메달 38매, 은메달 31매, 동메달 18매로 1위를 지켰다. 금메달 총수는 런던올림픽 역대 해외 출전사상의 최고 타이기록을 작성했다. 5년간의 와신상담고 악전고투 끝에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올림픽 준비와 훈련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또한 도쿄 올림픽이 1년 연기된 데 따른 여러 가지 변수를 극복하면서 중국 체육인들은 사명을 걸고 분투하는 정신으로 완강하게 박투하고 용감하게 경쟁하는 훌륭한 전통을 살려 나라를 위해 영예를 떨쳤고 올림픽을 위해 빛을 발산하면서 뛰어난 성적표를 냈다. 경기장 밖에서는 또 중국 선수단이 방역과 반 도핑 영역에서 모두 완벽한 답안을 내 놓았다. 중국선수들은 자신감, 솔직함과 유머 그리고 개성과 패션에 이르기까지 경기장 안팎에서 높은 품위를 보여줬으며 보다 개방적이고도 포용적인 중국의 모습을 세계에 보여주면서 반년 뒤 올림픽이 ‘베이징 타임’으로 접어들 것이라는 세계의 기대가 커지게 했다. 전 세계가 다시 오륜기 아래에 모여들 것이며 베이징 동계 올림픽은 인류의 운명공동체 이념 실천에 중국의 경험 그리고 중국의 지혜와 중국의 방안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도쿄 올림픽 첫 경기에서 중국 선수단의 양첸(杨倩)이 첫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2000년 여름 태어난 닝바오(宁波)의 처녀는 예선부터 결승전 마지막 총알까지 앞서든 뒤지든 시종일관 밝고 단호한 눈빛이었다. 이는 그녀의 손에서 안정감 있는 공기소총과도 같았다. 그녀의 계몽코치인 누리화(虞利华)는 “양첸은 어린 시절부터 큰 심장을 갖고 있었다”면서 “집중력, 자신감과 배짱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녀는 사격을 배운 지 11년 만에 올림픽 시상대에 올랐다. 중국 선수단의 올림픽 첫 금메달은 9년 만이다. ‘첫 스타트의 순항’은 분명 좋은 징조였다, 양첸의 차분한 플레이는 중국 선수단의 도쿄 매직쇼로 되게 했다. 7월 24일부터 8월 8일 도쿄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16일 동안 중국 선수단은 단 3일 외에는 매일 금메달 사냥에 성공했다. 중국이 해외 올림픽 참가 사상 처음 있은 일이다. 중국 선수단은 다이빙, 역도, 탁구, 사격, 체조, 배드민턴의 6대 강점 종목으로 선수단의 기본 진영을 구성, 도쿄에서 이 6대 강점 종목만 금메달 27매를 획득해 리우 올림픽 금메달 26매를 이미 넘어섰다. 도쿄에서 중국 선수단의 다이빙, 역도, 탁구 세 가지 종목은 모두 ‘드림팀’ 호칭에 손색이 없었다. 중국 선수단은 이상 세 가지 종목 중 단 금메달 1매만 빼앗겼을 뿐 이 세 가지 종목에서 각각 금메달 7매, 은메달 7매와 동베달 4매를 수확하는 데 성공했다. 세 드림팀의 실력은 모두 류궈량(刘国梁) 중국탁구협회 회장이 국가탁구를 평가한 그대로였다. 그것인 즉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우며 영원히 자랑스러운 팀’으로 도쿄에서 팀의 얼을 지켰다. 리우 올림픽에서 부진했던 사격과 체조 역시 도쿄에서는 각각 금메달 4매와 은메달 3매를 따내는 쾌거를 이뤘으며 경기 전 심각한 상황으로 평가받았던 배드민턴은 5개 종목이 모두 결승에 올라 금메달 2매를 따냈다. 다음 11매의 메달로 올림픽 출전 사상 최다 메달기록을 세운 중국 사격팀은 금메달 4매 뒤에 모두 ‘00후’ 세대가 있었다. 중국 국가체육총국 사격양궁관리센터 주임 량순은 “옛날부터 영웅은 어릴 때부터 나타난다고 우리가 젊은이들을 잘 키우면 중국 사격 종목에서 막중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평가했다. 3일 쩌우징위안(邹敬园)이 남자 평행봉에서 우승할 때 꾸안첸첸(管晨辰)과 탕시징(唐茜靖)은 여자 평행봉에서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휩쓸었다. 이를 두고 중국 국가체육총국 체조스포츠관리센터의 무중이(缪仲一)는 격정에 넘쳐 “도쿄올림픽에서 우리는 부활전(翻身仗)을 치렀으며 우리가 이겼다. 우리는 완전히 한번 뒤집으면서 이겼다”고 부르짖었다.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회고하면 당시 중국 체조는 리우 올림픽에서 무득점에 그치며 강팀다운 면모를 회복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무중이와 중국 체조팀은 무거운 압력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주력 진영이 장기간 격리상황에 있으면서 경기가 뜸해졌기에 리듬 파악과 컨디션 조절은 유례없는 중대한 난제와 도전에 직면해 있어 도쿄에서 이 같은 성적을 거두기는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계속)
    • 스포츠
    2021-08-09
  • 중국 여자배구-이제 파리 올림픽에서 다시 보자!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6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중국 여자배구-이제 파리 올림픽에서 다시 보자!’란 제목으로 된 글을 실었다. 신화통신은 글에서 이제 중국 여자배구 선수들의 도쿄행은 끝났으며 앞으로 전국 축구팬들의 축복 하에 중국 여자배구는 또 다시 눈부신 여정을 밟을 것이라 믿는다고 전했다. 통신에 따르면 지난 4일, 도쿄 올림픽 일정을 마친 중국 여자배구팀이 조용히 귀국했다. 감독 랑핑(郎平)은 마침내 천근같은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게 되었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선수들 또한 모처럼 휴식을 취할 수가 있게 되었다. 중국 여자배구가 도쿄로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들의 올림픽 방문 기간이 이렇게 짧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스포츠란 항상 예측불허로 가득 차 있는 법이다. 우리가 잘 아는 중국 여자배구팀도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아쉬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팀 전체가 부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 8강 진출이 완전히 무산된 상황에서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에 연속 3-0으로 승리하며 팬들로 하여금 그 낯익은 중국 여자배구팀을 다시 보게 했다. 이별의 순간, 감독 랑핑은 많은 회포가 갈마들었다. “2013년 팀을 넘겨 받을 때 팀은 상대적으로 스럼프에 빠져 있었다. 그 뒤 여러 해 동안의 굴곡을 겪으면서 모두들 많이 진보하고 성장했으며 성숙됐다. 우리는 올림픽과 월드컵을 모두 제패했고 세계선수권에서도 메달을 땄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노력에 정비례되며 얻은 것이 있었지만 이번만은 몹시 안쓰럽게 됐다.” 랑핑 감독이 두 번째로 중국 여자 배구대표팀에 합류한 뒤부터 시종 단결된 대가족과 같았다. 랑핑은 자애로운 어머니이자 엄한 스승이었다. 그는 팀 전체를 이끌고 공동한 목표를 향해 공동으로 노력해 왔던 것이다. 지난 7월 19일 ‘여자배구 내 사랑(ID welovevolley)’으로 명명된 방송 코너에서 팬들은 “중국 여자배구팀은 5년을 기다렸고 우리도 5년을 기다렸다. 5년의 시간, 우리는 그대들과 함께 상심하기도 하고 그대들과 함께 웃기도 한다. 우리는 그대들이 무사히 돌아오시길 바라지만 더 늦게 돌아오시길 바란다. 랑핑 감독이 있으면 중국 여자배구의 복이자 우리 팬에게도 복이 된다. 승패를 넘어 진심으로 힘내라! 중국 여자배구여, 영원히 너를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남기며 격려했다. 랑핑 감독뿐만 아니라 선수들도 여성 배구 팬들의 행복의 근원이었다. 대회 때마다 펄펄 날며 우승과 MVP(최우수선수상)를 거머쥔 주팅(朱婷)과 리우올림픽에서 사활을 건 류샤오퉁(刘晓彤)은 축구팬들로부터 중국 여자배구의 ‘복장(福将)’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 뒤에는 오른손 손목 인대가 파열돼 올림픽 준비를 위해 수술이 불가능하며 오직 보수적으로 치료할 수밖에 없다는 보통사람들의 상상할 수도 없는 주팅의 힘든 노력이 있었고 옌니(颜妮)는 어깨부터 허벅지까지 테이프를 붙이는 것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올림픽 여정이 반쯤 지날 때까지 견지하였다. 그리고 장창닝(张常宁)은 남모를 부상을 안고 이를 악물고 팀의 세계선수권 동메달 획득을 도왔는데…. 2020년 코로나19로 올림픽이 연기된 이후 중국 여자배구의 긴 폐쇄훈련은 말할 것도 없고 감독과 선수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흘린 땀이 때로는 보상을 받지는 못하지만 박투와 노력의 의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여자배구의 정신은 결코 승패로 정의되지 않는 것으로 중국 여자배구는 언제나 ‘조국 지상과 단결 협력하고 완강하게 박투하며 영원히 패하지 않는다’는 정신을 시종 버리지 않았다. “경기장에서 일로순풍 할 수 없는가 하면 당신의 생활도 항상 순탄할 리는 없는 것이다. 안 좋을 때는 한 사람, 한 팀에 대한 시련이 더 그렇다. 나는 경기에서는 져도 사람이 져서는 안 되며 적어도 분투하려는 열망은 있어야 한다고 늘 선수들에게 말하면서 모두가 우리 여자 배구팀에 요구하는 것은 매번 우승하고 매번 이기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박투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여자배구가 도쿄에서 탈락했을 때 많은 팬들은 이들을 책망하기보다는 가족처럼 마음이 아파했고 아울러 너그럽게 격려해 주었다. 40여 년 동안 중국 여자배구가 바닥에서 분발하여 다시 태어나자 사람들은 이 팀의 불요불굴에 감동하였다. 이들은 “그대들은 정상에 올랐을 때도 이름을 알리지 않았고 슬럼프에 빠졌을 때에도 굴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정상까지 함께 하고 싶으며 여자배구 정신도 세대교체 역시 부추기면서 삶에 대한 ‘복장’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했다. 중국의 한 매체가 제작한 중국 여자배구 축하 영상이 ‘중국의 많은 도시 대형 스크린에서 방영돼 행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이와 더불어 현재 ‘전민복(全民福)이 여자배구팀을 축복한다’는 공모전을 열어 중국 여자 배구팀을 응원하고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 스포츠
    2021-08-08
  • 中 첫 귀화 육상 선수, 도쿄 올림픽서 개인 최고 기록 달성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5일, 중국 올림픽위원회에 따르면 4일 오전 도쿄 올림픽 육상 여자 7개 종목에서 100m 허들과 높이뛰기 두 종목이 모두 펼쳐진 가운데 중국 최초의 귀화 육상 선수인 정니나리(郑妮娜力)가 100m 허들에서 개인 최고 기록인 96점을 기록했고 높이뛰기에서는 외할머니의 세계기록인 1m80에 3cm 앞선 978점을 기록했다. 귀화 선수인 정니나리는 지난 4월 12일에야 중국 대표로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고 6월 스페인 올라운드 챌린지에서 정니나리는 승점 6358점으로 여자 7종목에서 개인 최고기록을 세우며 중국 신기록을 세웠다. 귀화 전 캐나다 여자 7종목 1인자였다. 어린 나이에 육상 훈련을 시작한 정니나리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대학의 여자 7종목 경기를 전능 소화하였으며 여자 7종목 경기 U-20 세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8년에는 캐나다 대표로 영연방대회에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한 적도 있었다. 정니나리의 외할머니 정펑룽(郑凤荣)은 중국의 유명한 높이뛰기 선수로 일찍 제1회 전국체전 여자 높이뛰기 경기에서 우승하였고 1957년에는 세계기록을 세웠으며 1965년에는 전국체전에서 7종 경기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중국이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기에 정펑룽의 올림픽 꿈은 이뤄질 수 없었다. 정니나리는 “중국 대표로 되어 올림픽에 나가 외할머니의 꿈을 이루겠다”고 했다. 정니나리는 또 어머니의 고향인 중국에 대한 애정으로 2018년 귀화를 신청했다. 2019년 6월 12일부터 귀화 절차를 밟기 시작한 정니나리는 더 이상 캐나다 대표팀에서 뛰지 않았다. 정니나리는 ‘尽心尽力’란 한자 네 글자를 몸에 새기고 올림픽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고 싶었던 것이다.
    • 스포츠
    2021-08-06

포토뉴스 검색결과

  • [월드컵 2차 예선]중국, 싱가포르에 4-1 대승
    [동포투데이] 이반코비치 감독이 이끈 중국은 26일 톈진 올림픽센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C조 조별리그 4차전 싱가포르와 홈경기에서 우레이(21',85), 페르난둬(65'페널티), 웨이시하오(90')의 골에 힘입어 4-1로 대승을 거뒀다.(사진출처 : 차이나데일리)
    • 스포츠
    2024-03-27
  • 저우쉰·황레이·탕웨이, 드라마타운 행사 참석
    [동포투데이] 일부 네티즌이 SNS에 공유한 장시 후이창 드라마타운 개막식 영상과 사진에는 행사에 참가한 황레이(黄磊), 저우쉰(周迅), 탕웨이(汤唯) 등 모습이 담겼다. 황레이는 검은색 슈트 차림으로 등장했고,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어 산뜻해 보였다. 저우쉰은 프린트된 레깅스에 블랙 재킷과 네이비 컬러의 와이드 팬츠를 매치해 동양적이면서도 클래식한 멋을 뽐냈다. 탕웨이는 검은색 이너에 말차녹색 재킷과 카키색 바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캐주얼한 모습을 연출했다. 황레이, 저우쉰, 탕웨이 등이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많은 팬들이 와서 쪼그려 앉아 기다렸고, 이들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이들 또한 팬들의 호명에 일일이 화답하며 팬들을 즐겁게 했다. 저우쉰이 등장했을 때, 그녀는 마침 동료와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팬들의 호명에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탕웨이는 무대에 등장하자 팬들에게 직접 손을 흔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행사 기간 동안 황레이, 저우쉰, 탕웨이는 주최 측의 안내하에 행사장을 방문하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많은 참석자들은 저우쉰과 탕웨이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저우쉰이 정말 말랐지만 매우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탕웨이는 마른 체형이지만 키가 170cm가 넘는 큰 키가 눈에 띄고 기질도 좋아 보였고 웃으면 목춘풍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고 한다.
    • 연예·방송
    2024-01-07
  • 신화통신 선정 '2023 세계 10대 스포츠 선수'
    [동포투데이] 신화통신이 '2023 세계 10대 스포츠 선수'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 막스 베르스타펜(네덜란드, 男 26세, 스포츠카) 2023시즌 포뮬러원 챔피언십(F1)이 마무리되는 아부다비 그랑프리에서 레드불 레이싱팀의 베르스타펜이 폴포지션을 잡고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그는 올해 22개 대회에서 21차례 포디움에 오르며 19개 대회에서 우승하며 F1 시즌 승률 기록을 갈아치웠다. 앞서 지난 10월 카타르 그랑프리에서는 올해의 드라이버 종합 우승을 일찌감치 차지한 바 있은 베르스타펜이다, 이번 우승은 그의 3회 연속이다. 사진은 지난 3월 5일, 레드불 레이싱의 네덜란드 선수인 막스 베르스타펜이 세계 포뮬러 원 챔피언십(F1) 바레인 그랑프리 본선에서 우승을 자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2. 아이타나 본마티, (스페인, 女 25세, 축구) 본마티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열린 여자월드컵에서 팀메이트들과 함께 미드필드 핵심으로 활약하면서 팀의 사상 첫 우승컵을 안았고, 개인적으로는 이번 월드컵에서 골든글로브를 수상했다. 지난 10월에 열린 2023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여자 골든글로브 수상이 유력하게 점쳐졌다. 사진은 지난 8월 20일 스페인 대표팀 아이타나 본마티가 2023년 여자축구 월드컵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이다. 3. 니콜라 요키치(세르비아, 男 28세, 농구) 2022∼2023시즌 메이저리그(NBA)에서 덴버 너기츠를 창단 첫 종합 우승컵으로 이끈 세르비아 출신의 미드필더 요키치는 파이널 MVP에 개인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시즌 MVP로 3연속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시즌 평균 24.5점, 11.8개의 리바운드, 9.8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정상을 지켰다. 지난 6월 12일, 덴버 너기츠의 니콜라 요키치(전좌)가 2022-2023 시즌 NBA 파이널 MVP로 선정(사진)되었다. 4. 시몬 바일스(미국, 女 26세, 체조) 미국 체조선수 바일스가 심리적 문제로 도쿄올림픽에서 리타이어하는 파란을 겪은 뒤 2023년 화려하게 돌아왔다. 지난 8월, 그는 전미선수권대회에서 사상 8번째로 여자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10월 체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4년 만에 종합 금메달을 목에 걸며 세계선수권대회 종합 6관왕에 올랐다. 이로써 26세의 바일스는 체조 역사상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가장 많은 메달(34개)을 획득한 선수가 됐다. 사진은 지난 10월 8일, 미국 선수 사이먼 바일스가 2023년 체조 세계선수권 평균대 시상에 나서는 모습이다. 5. 미카엘라 시플린(미국, 女 28세, 스키) 2022-2023 눈시즌에는 미국의 스키선수 시플린이 알파인스키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쾰른플라츠에서 열린 예선에서 여자 그랜드슬램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83승으로 월드컵 최다 여자 알파인스키 선수가 되었고, 시즌이 끝날 무렵에는 이를 88경기로 경신하며 스웨덴 남자선수 스텐마르크의 86경기를 제치고 월드컵 역사상 최다 우승을 차지하였다. 사진은 미국 선수 미카엘라 시플린이 2023년 1월 4일 자그레브 알파인 스키 월드컵 여자 회전 경기에서의 모습이다. 6. 켈빈 킵툼(케냐, 男 24세, 육상) 2023년 시카고 마라톤에서 킵탐은 2시간 0분 35초로 완주하며 남자 마라톤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고, 공식 경기에서 2시간 1분을 돌파한 최초의 마라톤 선수가 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우승 기록은 케냐 명인 킵초그가 세운 2시간 1분 9초의 전 세계 기록을 34초나 뛰어넘었다. 사진은 지난 4월 23일 케냐의 캘빈 킵툼이 런던 마라톤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이다. 7. 케일리 맥커운 (호주, 女 22세, 수영) 호주의 명장맥커운이 후쿠오카 수영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50, 100m, 200m 배영 우승을 석권하면서 중국의친하이양(覃海洋)과 함께 같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관왕에 올랐다. 월드컵 시리즈에서 여자 배영 금메달 9개를 석권하고 부다페스트에서는 50m와 100m 배영 결승에서 두 차례 세계 기록을 경신하면서 여자 50m, 100m, 200m 배영 세계 기록을 모두 석권하였으며, 지난 10월에는 세계수영연맹 올해의 여자 수영 선수로 선정되었다. 사진은 지난 7월 29일 호주 선수 맥커운이 후쿠오카 수영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200m 배영 결승에서 우승을 자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8. 페이스 킵예곤(케냐, 女 29세, 육상) 지난 6월, 두 번의 IAA 다이아몬드 리그에서 킵예곤은 여자 1,500m와 여자 5,000m 세계 기록을 연이어 경신했고, 7월에는 비올림픽 여자 1마일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 5,000m 세계 기록은 지난 9월에 에티오피아가 경신했지만 킵예곤이 1년 동안 세 번이나 세계 기록을 깬 것은 아직 보기 드문 일이다. 지난 8월 부다페스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1500m와 5000m 두 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그는 현재 세계주니어챔피언, 세계챔피언, 올림픽챔피언, 세계기록 보유자 타이틀을 모두 보유한 선수이다. 사진은 지난 8월 22일, 케냐의 페이스킵예곤이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1500m 결승에서 우승을 자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9.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 男 36세, 테니스) 조코비치는 2023년 네 번째 US오픈 우승 이후 통산 24번째 그랜드슬램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23관왕인 세리나 윌리엄스를 제치고 오픈 1위 독주 시대를 열었다. 연말에는 남자프로테니스협회(ATP) 2023년 종별 결선에서 7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페더러와 통산 6번의 종별 결선 우승 기록을 깨기도 했다. 2023년 4대 메이저 대회에서 조코비치는 그중 3개의 우승컵을 거머쥐면서 윔블던 결승에서는 후발주자인 알칼라스에게만 졌다. 그가 호주 오픈에서 우승한 것은 이 경기에서 10관왕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사진은 지난 6월 11일, 세르비아 선수 노바크 조코비치가 2023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시상식에서의 모습이다. 10. 친하이양(중국, 男 24세, 수영) 지난 7월에 열린 후쿠오카 수영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친하이양(覃海洋)이 남자 50, 100m, 200m 평영 3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사상 최초로 같은 대회에서 평영 3개 종목 금메달을 석권하며 남자 200m 평영 세계기록을 깼다. 2023년에는 청두대학생운동회에서 그는 철물을 따내고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MVP를 수상하면서 수영 월드컵에서 월드컵 올해의 종합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사진은 지난 10월 23일, 중국 선수 친하이양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2023년 세계수영연맹 최우수 남자 선수로 선정된 날의 모습이다.
    • 스포츠
    2023-12-31
  • 2023 미스 유니버스, 미녀들의 민족 의상 쇼
    산살바도르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에서 각국의 미녀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민족 의상 쇼.(AP 사진/모이세스 카스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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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23-11-22
  • 76.8m! 中 대륙서 가장 높은 나무 '부탄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티베트 모퉈(墨脱)현 베이벵背崩향 거린(格林)촌에서 76.8m 높이의 부탄송 한 그루가 발견됐다. '부탄송'으로 불리는 이 나무는 윈난 가오리공산(高黎贡山)에 있던 72m의 독삼나무의 높이 기록을 갈아치우며 중국 대륙에서 가장 높은 나무로 되었다. '부탄송'은 해발 1400~2500m의 산지우림과 아열대 기후 지역으로 수열조건이 우수하고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동부 히말라야에만 분포하는 수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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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2

동영상뉴스 검색결과

  • 하늘을 나는 중국 자동차, 광저우 도심 상공 횡단
    [동포투데이] 3월 8일 샤오펑후이톈 비행 자동차 여행자 X2가 도심 '티안더 광장-광저우 타워' 지역에서 저고도 비행을 성공적으로 완료하여 향후 도심 항공 모빌리티 및 저고도 관광과 같은 저고도 경제 응용 시나리오의 포괄적인 보급을 위한 경험을 제공했다. 이번 비행에서 여행자 X2는 광저우 톈허구의 티안더 광장 A급 오피스 단지에서 수직으로 이륙해 자율주행 모드로 랜드마크인 광저우타워 방향으로 비행하며 광둥성 박물관, 화청 광장, 하이신아시안게임공원 등 광저우의 랜드마크를 횡단했다. 이 비행경로는 향후 도심 항공 교통뿐만 아니라 관상 가치가 높은 저고도 투어 루트로도 활용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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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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