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20(수)
 


● 철 민

 

 

지난 8일, 2020 도쿄 올림픽이 17일간의 열전 끝에 그 긴장하고도 화려하던 순간 순간의 막을 내렸다. 올림픽은 막을 내렸지만 그 여운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38매, 은메달 32매와 동메달 18매(미국은 금메달 39매, 은메달 41매와 동메달 33매로 종합 1위)를 획득해 종합 2위에 놓이면서 금메달에서는 스포츠 강국인 미국과 단 1매의 차이로 거의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종합 2위, 이는 중국 선수단 총체 실력의 합리적인 반영인가 아니면 실력 이상의 반영인가 또한 반대로 실력 이하의 반영인가? 필자가 인정하건 대 이는 자로 잰 듯이 정확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적으로는 중국 선수단 총체 실력의 합리적이고도 정확한 반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는 스포츠 실력의 향상은 국력 향상의 축소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가 스포츠 실력의 향상은 국력 향상의 축소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 그 여러 가지 요소 중 역사적인 요소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하지 아니 할 수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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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올림픽 출전 역사 대사기


중국이 제일 먼저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1932년 7월(현대 올림픽의 기원은 1896년임)이다. 당시 중국 대표단은 도합 6명의 대표단 성원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 10 회 올림픽에 파견, 당시 선수로는 류창춘(刘长春) 단 1명뿐이었다. 류창춘은 올림픽에서 원래 3개 종목의 육상 단거리 경기에 참가하려고 했지만 여로의 피로 때문에 400미터 종목은 포기하고 100미터와 200미터에만 참가하여 각각 5등과 6등을 하였으며 결승에 오르지도 못했다. 초라했다. 인구 4억 명에 달하는 대국인 중국은 스포츠에서도 서방세계와는 아주 까마득하게 거리가 먼 후진국이었고 말 그대로 ‘동아병부(東亞病夫)’였다.

 

그 뒤 새 중국이 창립되어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1952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개최된 제 15회 올림픽이었다. 당시 중국은 비교적 늦게 올림픽 참가 초청을 받았다. 중국은 40명에 달하는 대표단을 파견하였지만 헬싱키에 도착했을 때는 올림픽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오직 우촨위(吴传玉)만이 100미터 배영 경기에 참가했다.  경기 성적은 1932년의 로스앤젤레스에서의 결과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한편 그 당시 국제올림픽 위원회의 많은 인사들이 ‘두개 중국’론을 주장하면서 새 중국과 타이완(台湾) 모두 올림픽에 참가하게 하려고 하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성명을 발표하여 1956년 호주 멜버른에서 개최되는 제 16 회 올림픽 참가를 거절하였으며 1958년 8월 19일에는 성명을 발표하여 아예 국제올림픽 위원회에서 퇴출해 버렸다.


이어 중국은 그 뒤 1960년 8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있은 17회 올림픽, 1964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있은 18 회 올림픽, 1968년 10월 멕시코 멕시코 시티에서 있은 19회 올림픽, 1972년 8월 독일 뮌헨에서 있은 20회 올림픽과 1976년 7월 캐나나 몬트리올에서 있은 21회 올림픽에 불참하였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각종 월드컵이나 선수권에 참여하는 것으로 스포츠의 종합실력 향상에 여러 모로 노력을 쏟았으며 멀지 않은 장래에 기어코 올림픽에 복귀하려는 ‘야망’을 불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스포츠의 종합 실력은 오직 올림픽에서만이 체현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중국은 너무 서두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점진적으로 스포츠 실력을 쌓아 가기만 했다. 이렇듯 중국 정부와 중국인민들은 먼 앞날을 내다보며 장기 타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1979년 11월 26일,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중국 올림픽위원회의 합법적 권리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타이완은 오직 중국 타이베이 올림픽위원회(台北奥委会)의 명의로 올림픽 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 몇 달 뒤 중국은 처음으로 13회 동계올림픽에 참가했다.


1980년 7월, 구소련 모쓰크바에서 22회 올림픽이 개최되게 되자 중국은 참가하기로 하고 만단의 준비를 갖추었다. 헌데 세상 풍운을 예측할 수 없다고 각종 원인에 의해 중국은 올림픽 정신과 국가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모쓰크바 올림픽에도 불참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올림픽 선수단은 1980년 4월 24일 국가올림픽위원회가 발부한 공고에 따라 모쓰크바 올림픽 참여를 포기하였다.


1984년 7월 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컬리시엄에서 있은 23회 올림픽 개막식에는 중국 선수단이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간판을 든 소녀의 뒤에서 진붉은 오성홍기를 추켜들고 입장했다.


이 대회에서 중국은 도합 225명에 달하는 선수단을 파견했다. 축구, 필드 하키 볼, 복싱, 승마와 현대 5종을 포함한 16개 종목에 참가하였으며 7월 29일, 푸라두 사격장에서 울린 중국 선수 쉬하이펑(许海峰)이 울린 총소리가 중국 올림픽 사상의 금메달 ‘0의 돌파’를 실현했다. 즉 이 금메달은 1932년 중국이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이래의 첫 금메달이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중국은 도합 금메달 15매, 은메달 8매와 동메달 9매를 따내 종합 4위에 올랐으며 ‘동아병부’란 오명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당시 스포츠 강국 미국의 벽은 높았다. 이 대회에서 미국은 도합 금메달 83매, 은메달 61매와 동메달 30매를 차지하며 금메달 수량 상 종합 2위인 루마니아(금메달 20매)보다 63매나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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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올림픽 대회에서의 중국의 굴기는 우연한 것이 아니란 것은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사실로 입증되었다. 물론 자그마한 굴곡은 있었지만 올림픽에서 중국의 상승세는 지속되었다. 1984년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이후 올림픽 대회에서 중국의 메달 획득 상황은 다음과 같다.


1988년 9월, 한국 서울에서 개최된 24획 서울 올림픽 당시 중국은 301명의 선수단을 파견,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5매, 은메달 11매와 동메달 12매를 획득하면서 종합 8위를 기록했다.


1992년 7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25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16매, 은메달 22매와 동메달 16매로 종합 4위를 차지했다.


1996년 7월 미국 애틀란타에서 개최된 26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16매, 은메달 22매와 동메달 12매를 따내면서 종합 4위에 올랐다.


2000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27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28매, 은메달 16매와 동메달 15매를 획득, 종합 3위를 차지하면서 순위 한 단계 끌어올렸다.


2004년 8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된 28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32매, 은메달 17매와 동메달 14매를 따내면서 종합 2위를 차지했고 순위를 재차 한 단계 끌어 올렸으며 미국의 버금으로 세계 스포츠 분야에서 강자로 군림하였다.


2008년 8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된 29회 올림픽, 중국은 일개 스포츠 후진국인 ‘동아병부’로부터 마침내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행사인 올림픽을 주최하는 동방의 ‘거성’으로 떠올랐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580여 명의 선수단을 선 보였고 중국 올림픽 사상 참여한 종목도 가장 구전하였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중국은 도합 금메달 51매, 은메달 21매와 동메달 28매를 따냈으며 금메달 순위에서는 스포츠 강국 미국을 따돌리고 첫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중국의 스포츠 종합실력이 미국을 능가했다는 설명은 아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미국은 금메달 36매, 은메달 38매, 동메달 36매 도합 110매로 여전히 중국의 100매의 메달 총수보다 많았다. 그리고 중국은 자국에서 개최한 올림픽이다 보니 천시, 지리와 인화 등 우세가 있었으며 진정으로 미국이란 높은 벽을 뛰어 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또한 그 뒤에 있은 몇 차례의 올림픽에서도 충분히 나타났다.


2012년 7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30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38매, 은메달 31매와 동메달 22매를 획득하면서 미국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했다.


2016년 8월,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에서 개최된 31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26매, 은메달 18매와 동메달 26매를 따내면서 미국과 영국에 이어 종합 3위에 머물며 몇 회에 거쳐 지켜오던 2위 자리를 영국에 넘겨주었다. 


스포츠란 항상 변화무쌍한 법, 올림픽 역시 그 법칙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실력적으로 강하기만 하면 남한테 뒤지는 건 잠시적인 것, 이번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32회 올림픽에서 중국은 종합 2위 자리를 되찾아 왔을 뿐만 아니라 올림픽 폐막의 전날인 7일까지 만도 금메달 개수에서는 1위를 지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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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발전과 스포츠 실력 향상은 정비례 관계?


주지하다 싶이 개혁개방을 실시한 지난 40여 년래 중국은 세계를 놀라게 하는 경제적 발전을 거듭하였다. 데이터에 따르면 개혁개방이 되던 1978년 중국의 GDP는 3679억 위안으로 세계 10위에 있었으나 1년 전인 2020년에는 100만억 위안을 돌파했다.  40여 년 간 271.8배 증장하면서 미국의 버금으로 세계 2위 자리를 확고하게 굳혔다. 


구체적으로 보면 2000년 10만억 위안을 돌파하면서 이탈리아를 초과해 세계 6위를 점했고 2006년에는 20만 억 위안을 돌파하면서 영국을 초과해 세계 4위에 올랐다.  2007년에는 독일을 초과하면서 세계 3위가 되었다. 그리고 2010년에는 40만 억 위안을 돌파하면서 일본을 추월하면서 세계 2위를 차지했다. 그럼 중국의 GDP가 언제 미국을 따라잡거나 혹은 추월하는가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시간적 문제만 남았다.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해 미국의 GDP는 20.94만억 달러였고 중국의 GDP는 14.71만억 달러였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GDP가 세계 경제에서 점하는 비율은 각각 24.7170%와 17.3811%이다.


그럼 이처럼 비약적으로 발전한 중국 경제와 중국의 스포츠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거듭 말하지만 필자의 주장이라면 이 양자의 관계는 정비례로 발전한 관계라는 것이다. 주지하다 싶이 중국 경제는 새 중국이 창립된 후에서 아주 오랫동안 낙후한 상태에 있었다. 적어도 중국공산당 11중 3차 전원회의가 열린 뒤인 지난 세기 70년대 말까지만도 ‘먹고 입는 문제’마저 해결하지 못한 빈곤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1980연대 초기부터 농촌에서는 호도거리를 실시하고 대외적으로는 개혁개방으로 시장경제의 초급단계에 들어가면서 경제 분야에서는 초보적으로 생기발랄한 현상이 출현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1984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23회 올림픽에서 중국은 금메달 ‘0의 돌파’를 시작으로 올림픽 폐막할 때까지 금메달 15매, 은메달 8매와 동메달 9매를 따내면서 종합 4위에 올랐으며 스포츠에서의 ‘동아병부’란 오명을 깨끗이 벗어 내쳤다.


아쉬운 것은 중국은 1956년에 있은 16회 올림픽부터 22회 올림픽까지 연속 7회의 올림픽에 불참하였기에 그 기간 동안의 중국의 종합 스포츠 실력에 대해 가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탁구와 체조 외에는 금메달 사냥에 성공할 종목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중국은 비록 낙후했지만 스포츠에서의 탁구와 체조에서만은 내노라 할 수 있었던 만은 사실이었다. 탁구와 체조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아무리 개도국이고 후진국이라 해도 자국의 특성에 따른 스포츠 종목은 가끔씩 있었다. 예하면 중국이 탁구와 체조를 내세울 수 있었다면 아프리카의 케냐 등 국가와 중남미의 자메이카 등 국가는 육상이 ‘명품 종목’이라 할 수 있었으며 남미의 브라질,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등 국가는 축구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다시 본 화제로 돌아와 1984년 7월의 로스앤젤레스의 올림픽을 계기로 중국의 종합 스포츠는 굴기하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즉 그 위에 있은 1988년의 서울 올림픽, 1992년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6년의 애틀란타 올림픽, 2000년의 시드니 올림픽, 2004년의 아테네 올림픽, 2008년의 베이징 올림픽, 2012년의 런던 올림픽 그리고 2016년의 리우 올림픽과 올해의 2020 도쿄 올림픽 등 올림픽에서 보면 중국은 스포츠 분야에서의 강한 굴기를 보였다. 이 10회에 걸친 올림픽에서 중국이 차지한 가장 낮은 종합 성적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의 8위였고 가장 좋았던 성적은 2008년의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금메달 1위였으며 해외 출전 사상 가장 좋은 성적은 2012년의 런던 올림픽(금메달 38매, 은메달 31매와 동메달 22매)과 이번 도쿄 올림픽(금메달 38매, 은메달 32매, 동메달 18매)에서의 종합 2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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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국 연변출신인 필자로서는 중국 연변의 경제 발전 및 스포츠의 발전과 중국 국가적 차원의 경제 발전 및 스포츠의 발전을 비교하면서 분석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연변은 중국에서 2개의 ‘축구의 고향’ 중의 하나이다. 즉 남방에서는 메이현(梅县)이었고 북방에서는 연변이다. 특히 지난 세기 50년대 주로 연변 조선족들로 구성된 지린성(吉林省) 축구팀은 중국 내 4개 강팀 중의 일원이었고 당시 중국의 모든 축구 전업 팀에는 조선족 선수가 없는 팀이 거의 없었다.  중국 국가 임업팀에는 일색으로 조선족 선수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연변은 또한 스케이팅과 아이스하키를 비롯한 동계 스포츠 방면에서도 유명한 곳이다. 동계스포츠라고 하면 중국에서는 흔히 헤이룽장성(黑龙江省)과 지린성에서 인재가 많이 나왔으며 지린성의 선수 거개는 연변적이었다고 한다. 이외 여자축구와 여자배구 역시 연변은 전국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 이 중 일찍 지난 세기 80년대에 연변 여자축구가 중국 국내 리그에서 우승(남자축구는 1965년 지린성팀의 이름으로 우승)을 한 적도 있다. 스포츠뿐이 아니다. 연변은 일찍 ‘축구의 고향’과 더불어 ‘사과배의 고향’과 ‘가무의 고향’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가 지나간 일이다. 지금 연변에서 여자배구, 여자축구와 동계 스포츠는 뀅 구워먹은 자리가 됐고 남자 프로축구도 자취를 감췄다. 뿐만 아니라 현재 연변의 사과배는 풍년이 들어도 그 판로가 막혀 창고에서 썩어나는 현상이 비일비재이고 연변의 자랑이던 연변가무 역시 지린시가무단과의 경쟁에서 ‘1위 자리(지린성을 대표하는 가무단은 원래의 연변가무단으로부터 지린시가무단으로 넘어갔음)’를 내주어야만 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장시기 기간의 인구 감소와 내지와는 점점 뒤 처져지는 경제상황 등등이다. 그럼 연변스포츠, 사과배와 가무의 진로가 암울하고 심지어 부진하는 현상을 놓고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가? 필자의 조심스러운 분석이라면 아쉽고 안타깝지만 어떻게 보면 이는 중국 내지의 스포츠와 기타의 모든 것이 전반에 거쳐 돌파성적으로 발전했다는 증거로도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연변의 상황에 가슴 아파하기도 해야겠지만 한편으로는 국가와 기타 국내 많은 지방의 거족적인 발전에 기뻐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한테는 민족과 국가가 모두 중요하기 때문이다.


2030년의 분수령 - 중국의 국력과 스포츠 실력 라인은?


(에필로그)


세계의 많은 예언가들은 이제 2030년이 되면 중국 경제가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고 진작 추정했다. 필자가 중국인이라서 이 추정이 맞는다고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태껏 지나온 과정을 놓고 볼 때 이는 완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과 미국 사이에 GDP 차이는 분명 존재하나 구매력에서는 중국이 이미 미국을 추월한 상황이다. 그럼 경제발전과 스포츠 실력 향상이 정비례가 된다는 필자의 주장이 맞는다면 2030년 그 때에 가서 중국의 스포츠 역시 미국을 추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올해에 개최된 도쿄 올림픽에서 어느 정도 증실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동포투데이 논설위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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