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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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태일 시/개산툰 구월
    개산툰 구월 박태일 모아산 질러 넘다 왼쪽으로 내려 서면 화룡에서 룡정에서 너른 평강 들 타고 내린 해란강 걸음걸음 고요하다 동성진 너머 리민 너머 옥수수 키잡이로 서서 파랗게 쏘다니는 구릉 마을 집들은 산협의 가난을 풀풀 날리고 창유리 깨진 틈으로 도닥도닥 옛말 드난다 개산툰 개산툰 구월은 두만강 건너 회령 산천 어디서 오득오득 개암이나 씹는 것일까 걸어 내리고 오르는 시장 마당 지난주 건너왔을 북녘 소식은 어느 집 낮술에 비틀거리고 있을까 아는 이 친척도 없이 나는 이 골짝에 갇혔다 장대교회 붉은 십자가가 국경 철책을 바라고 선 뒹겨장 빛깔 어두운 흙길 따라 룡정으로 연길로 나가는 버스는 그치고 택시 기사 둘 버드나무 아래 버드나무 그늘인 양 빈둥거리는 너머 두만강 수척한 물빛을 숨기며 개산툰 구월은 이제 입을 다문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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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박태일 시/조양천
    조양천 박태일 마을 이층 숲 참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하양 여우가 존다 배달말 깨우친 누나와 배우는 애토끼 귀엣말 조심조심 걸음 옮긴다 마을 이층 숲 누가 들렀나 누가 한국서도 멀리 부산서 온 너구리 아저씨 여름 물골에 부들처럼 무성한 천자문 배우기 배달말 배우기 책고랑 따라 걷는다 살몃살몃 아침부터 한낮까지 동무들 와도 그만 그만 안 와도 여우는 졸음을 살대발처럼 내렸고 마을 이층 숲 계단 아래로 삼월 고슴도치 찬바람이 구른다 마주 선 소학교와 중학교 사이 전깃줄을 뛰는 참새 떼 양조장 굴뚝은 볼 부어 붉고 높아 집집 지붕 더 눌러 앉힌다 기차역 폐품장 흐린 담길은 부스럭스럭 수수 밭머리로 고개 돌리고 근들이술 두 집만 일찍 등을 밝힌 채 저녁 고양이 기다린다. 박태일의 시집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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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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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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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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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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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3)
    ■ 김철균 1 순자가 가두 적십자회 주임,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의 총보도원, 연변건축공사 선진사업자 등 일련의 희로애락을 거쳐오는 사이 춘하추동과 더불어 세월은 빨리도 흘렀다. 그 사이 “소근장 따라 배우기”, “자본주의 꼬리 자르기”, “우경번안풍 반격” 등 정치선풍을 일으키며 이 나라 백성들을 지지리도 괴롭히던 “4인 무리”가 마침내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면서 많은 노간부들과 지식분자들은 이전에 맡았던 당과 국가의 주요한 직무를 회복하였고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순자의 가정도 마찬가지었다. 남편 김용환 선생이 모든 직무를 회복하고 연변 위생학교의 중견일군으로 입지를 굳혔는가 하면 노동자 모집에 합격되어 안도에 있는 삼림경영국에서 투시실 의사로 근무하던 큰 아들 김영남이가 연변의학원 통신학부 시험에 합격되어 노임을 받으며 공부하는 대학생이 되었고 해방군에 입대했던 둘째 아들 경남이는 건강한 몸으로 그것도 더욱 성숙된 채 제대했으며 딸들인 영순이, 영옥이와 영애도 선후로 노동자 모집에 합격돼 연길시내에서 직장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쯤 되면 순자는 한시름 덜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자는 자녀들이 장성할수록 그들에 대한 요구를 더욱 높였다. 얼마 뒤 큰 아들 영남이가 결혼하게 되자 순자는 아들한테 가정과 동네간의 화목을 위한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다. “곤란이 있을 때면 항상 아내를 먼저 생각해 주고 특히 그 어떤 일이든 아내가 힘들어할 때 혼자서 하게 하지 말고 함께 받들어서 하라”고 타일렀으며 “결혼하면 이웃이 있기 마련이기에 이웃과의 관계를 잘 처리하며 김치라도 나눠어 먹으면서 화목하게 지내며 사노라면 한족들과 이웃으로 살 수도 있는 법, 서로 재미있게 보내면서 민족단결에도 유의하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이어서 큰 딸 영순이가 약혼하여 오래지 않아 결혼하게 되자 또 “넌 남편의 생모가 없는 가정의 맏 며느리이다. 그러니 뭐니 뭐니 해도 먼저 남편의 계모한테 잘해주어라. 남의 말을 열마디 듣고 너 자신은 한두마디만 해야 한다”는 등으로 수십종목에 달하는 주의사항을 적어주었으며 또한 인생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생활십계명”과 어렸을 때 외국인들이 꾸린 성당을 다니며 배운 “말 한마디”란 명구들도 적어주기도 했다. 그 “부부생활십계명”이란 명구는 다음과 같다. 부부생활 십계명 1. 부부 두사람이 동시에 화를 내지 마세요. 2. 집에 불이 났을 경우 외에는 부부 사이에 절대 고함을 지르지 마세요. 3. 눈이 있어도 상대방의 흠을 보지 말며 입이 있어도 상대방의 실수를 말하지 마세요. 4. 아내와 남편은 서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세요. 5. 상내방의 아픈 곳을 긁지 마세요. 6. 분을 품고 침실에 들어가지 마세요. 7. 결심한 걸 결코 단념하지 마세요. 8. 처음의 사랑을 잊지 마세요. 9. 모든 것을 숨기지 마세요. 10. 서로의 잘못을 감싸주고 부족한 사랑으로 채워주도록 노력하세요. 이러한 어구들을 보면 지난 세기 70년연대말과 80년대 초기까지만 해도 크게 시대와 떨어진 봉건예의사상이 짙은 어구라는 평가를 받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순자의 이러한 타이름에 영남이와 영순이는 그 마디 마디를 명심해 가슴속에 아로 새겼으며 앞으로 결혼생활에서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겠노라고 수십번도 더 맹세했다. 결혼을 앞둔 자식들에 대한 교육은 영남이와 영순이한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아래로 영옥이, 영애, 경남이와 김진 이렇게 내려가며 모두 순자로부터 이러한 교육을 받은 뒤에야 결혼하게 되었다. 순자는 이렇게 큰 딸은 시어머니가 계모인 가정의 맏며느리로 시집보냈고 둘째 딸은 아들만 6형제인 가정에 시집보냈으며 후날 셋째딸 영애는 신랑이 비록 셋째었으나 큰 시형은 북경에서 사업하고 둘째 시형은 장춘에서 사업하는 가정에 시집갔으니 역시 신랑이 맏 아들 노릇을 하는 가정이었다. 이런 가정에 시집을 가면 고생할 수도 있다는 도리를 모르는 순자가 아니었으나 일처리를 잘 하면 더욱 받들리며 살 수 있고 그만큼 복도 차례진다는 것이 순자의 철리였다. 그리고 딸들이 그렇게 잘 처사하리라고 순자는 믿고 있는 터였다. 한편 순자의 딸들이 이렇게 부담이 많은 가정에 시집갔는가 하면 아들 3형제 역시 그랬다. 큰 아들 영남이는 아들이 없는 가정에 장가를 들었고, 둘째 아들 경남이는 가정의 맏 사위로 장가를 들었으며 막내 아들 김진 또한 둘째 사위로 장가들었으나 처가집의 큰 처형이 장애인이다보니 역시 맏 사위 노릇을 해야 하는 사정이었다. 이러고 보니 순자의 자식 6남매는 모두 처가집이나 시집의 큰 중임을 떼메게 되었는데 당시의 말대로 하면 순자는 그야말로 “남의 좋은 노릇을 해준 셈”이었다. 2 자식들의 부부를 대함에 있어서 순자는 확실히 아들보다는 사위를, 딸보다는 며느리를 더 끔찍하게 사랑하고 생각해주었다. 그것은 셋째 딸 영애, 둘째 아들 경남이와 셋째 아들 김진이가 결혼하면서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맏아들 영남이와 딸 영순이가 25살을 넘게 되자 순자는 집에 돼지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는 돼지를 키워팔아 생활비로 보태자는 타산도 있었지만 다른 사연도 있었다. 당시 돼지를 치면 배급에 돼지사료몫으로 옥수수를 더 주었기에 그 옥수수나마 식량에 보내여 며느리와 사위들이 들어오면 배를 곯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더 큰 목적이였다. 이렇게 돼지를 키우면서 배급으로 옥수수를 더 타서 식량에 보태서일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자네는 옥수수밥이나마 더 이상 식구들이 배를 곯는 날이 없었다. “딸보다 며느리를 더 아껴주어야 하고, 아들보다 사위를 더 아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그들 부모한테는 귀한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들과 딸들을 결혼시키면서부터 제정한 순자의 좌우명이었다. 순자는 말을 이렇게 하였을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상에서 힘들고 무거운 일은 흔히 아들과 딸들한테 시켰고 애로에 봉착하게 되면 아들이나 딸보다 며느리나 사위를 먼저 돌보군 하였으며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며느리나 사위한테 먼저 먹이군 했다. 1989년 겨울의 어느날에 있은 일이다. 이 날 큰 딸 영순이는 오전 내내 거리를 돌면서 일을 보다가 점심시간이 좀 지나자 밥 한술 얻어먹으려고 친정집에 들렸다. 헌데 원체 모든 자식들한테 단 한번도 인색하지 않던 어머니가 그 날만은 밥이 없다면서 딸더러 집에 가서 먹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딸 영순이가 둘러보니 집에는 덮개를 꼭 덮은 음식그릇이 하나 있었다. 영순이가 그 덮개를 열어보니 밥은 아니었으나 아주 맛있어보이는 오그랑 팥죽이었다. 며느리한테 남겨놓은 것이 분명하였다. 어머니의 심사를 모르는 영순이가 아니였으나 짐짓 어머니를 떠보려고 한마디 했다. “어머니, 여기에 오그랑 팥죽이 한 그릇이 있네요. 야, 맛있겠다. 밥 대신 먹으면 좋겠구만요.” 그러자 순자는 급기야 부엌에서 올라오며 영순의 손에 있는 죽그릇을 빼앗아냈다. “안된다. 셋째 며느리가 오면 한번 더 먹이려고 그런다.” 기실 영순이도 올케한테 남겨놓은 그 오그랑 팥죽을 먹을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그래서 슬쩍 건드려본 것인데 진짜 성을 내는 어머니, 그야말로 못말릴 어머니었다. 이렇듯 고부지간에 화목하려면 우선 시어머니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가 순자의 며느리 3명 모두가 시어머니를 친정어머니 이상으로 존경하고 따른다. 거기엔 역시 딸보다도 며느리를 더 아끼고 사랑하는 순자의 마음과 솔선수범이 따라준 결과라 해야겠다. 1980년 셋째 딸 영애가 결혼했다. 당시 순자는 셋째 딸의 결혼시 첫날 이불과 이불장 및 첫날옷과 같은 기본적인것만 해주었을뿐 남들처럼 요란하게 잘해주지 못했다. 더군나나 첫날 이불과 요는 제일 싸구려천으로 해주어 그것이 후일 두고 두고 속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비용도 모자랐다. 예단감을 갖추고 결혼식날의 부식을 구입하고… 돈이 들 일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가정에는 돈이 나올 구멍이 없지만 결혼식은 치러야 했다. 그러자 결혼 당사자인 영애가 단위의 “호조금(互助金)”에서 100원 정도 앞당겨 꺼내서 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애의 한달로임은 겨우 35원이었다. 그러니 영애가 그 100원을 갚으려면 일전 한푼 쓰지 않고 두달 노임을 몽땅 밀어넣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영애가 결혼할 때 친척과 이웃 그리고 영애네 단위의 직원들로부터 들어온 축의금(부조돈)은 수백원에 달했지만 결혼식 때의 비용을 제하고 나니 남은 돈은 약 160원 정도였다. 모두가 1원, 2원 많아야 5원, 10원씩 들어온 축의금이였다. 순리대로 하면 영애의 결혼 후 순자는 그 축의금 160원을 그대로 영애한테 주어 빚부터 갚게 해야 했다. 하지만 순자는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다. 생각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셋째 딸 영애가 진 빚은 천천히 갚아도 된다는 타산에서였다. 아니 영애의 빚을 갚는 것도 급했지만 더 급히 처리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영애의 결혼식이 끝나고 친척들 거개가 집으로 돌아가고 집안식구들만 남게 되자 순자는 큰 며느리 금봉이를 헛간으로 불러냈다. 순자는 보자기에 꽁꽁 싼 돈뭉치를 내놓았다. 그 돈은 영애가 결혼하면서 친척과 친구 그리고 영애 단위의 직원들로부터 받은 축의금이었는데 도합 160원이였다. 원래 받은 축의금은 1원짜리, 2원짜리, 5원짜리 심지어 50전짜리와 20전짜리도 있었지만 순자가 어느 결에 몽땅 10원짜리로 바꾸었던 것이다. “자네 시누이 셋씩이나 시집보내느라고 정말 수고가 많았네. 가정에서 뭐니 뭐니 해도 큰 며느리가 제일 고생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네. 그러니 자 이걸 받게. 160원인데 많지 못하네. 자네 가정의 수요대로 자전거를 사든, 재봉침을 사든 여하튼 큰 가정기물 하나를 갖추게나. 이 시어미가 진작부터 자네 가정에 뭔가 해주고 싶었었다네.” 금봉이는 깜짝 놀랐다. “아니 어머님, 제가 어떻게 이 돈을 받을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무슨 고생을 했다구 이래요?” 큰 며느리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는게 아닐세. 내가 줄만하니까 주는 걸세. 그리고 이 시엄마가 주는 성의를 무작정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순자는 망설이는 큰 며느리한테 마구 돈뭉치를 밀어맡겼다. 결혼하느라고 빚을 낸 영애한테는 매우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시누이 셋씩이나 시집보내느라고 고생한 맏 며느리가 그만큼 더욱 불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엉결에 시어머니로부터 돈뭉치를 받고난 큰 며느리 금봉이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있었다. 무슨 감투끈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뒤 큰며느리 허금봉은 그때의 일을 자주 입에 올리면서 참으로 못말릴 시어머니라고 두고두고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3 1980연대는 순자네 가정에 있어서 “번창하는 연대”였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간고한 “기아기(饥饿期)”을 넘어 온집식구가 배불리 먹기 시작했고 자식들 모두가 성가하여 손군들이 육속 태여나기 시작하기도 했다. 형제가 많아 거기에 딸린 며느리나 사위들이 여럿이 되다 보면 집안말썽도 가끔씩 생길만도 하지만 순자네 가정만은 말썽은커녕 모든 자식들이 모일 때마다 항상 웃음과 노래 소리가 넘쳐나 동네의 부러움을 사군 했다. 특히 명절 때면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집이었고 모여서 음식을 해먹거나 잠자리 등 모든 것이 불편했지만 어른과 어른 사이, 어른과 아이들 사이 그리고 아이와 아이들 사이에 한마디의 불평이 없이 서로 양보하고 돌보며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대 가정이 이렇듯 화목하고 아기자기하게 지낼 수 있는데는 작으마한 모순이라도 생길 수 있는 화근을 미리미리 막아버리는 순자의 숨은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른다. 즉 며느리나 사위를 자기가 낳은 자식보다 더 아끼고 사랑한 것 다시 말하면 자식들한테 덕을 쌓은 결과이기도 했다. 한편 가정범위가 커지니 크고 작은 일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손군들이 앓거나 하는 가정내부의 일들이 생기는 건 물론 멀리로는 며느리나 사위쪽 가정에 바라지 않던 일도 가끔씩 생겨나군 하였다. 사돈쪽에서 그 무슨 불행이 생길 때마다 순자는 한번도 남의 일처럼 등한시하지 않았다. 1987년 겨울의 어느 날, 돈화에 사는 둘째 며느리 제갈영애의 친정어머니가 갑자기 병이 위독하다는 기별이 왔다. 빈혈이 심해 수혈도 해야 한다고 했다. 순자는 그 기별을 받은 그길로 남편이 출근하는 연변위생학교로 종달음쳐갔다. “여보, 둘째네 장모가 병이 도졌는데 몹시 위독하다는구만요. 당신이 어떻게 좀 방도를 강구하시우.” “그래?! 어떻게 위독하기에? 아니 알겠소. 그럼 나 인차 퇴근할테니 당신은 알릴만한 사람은 다 알리구려.” 그 날 순자는 큰 아들과 큰 사위 그리고 작은 아들까지 집에 모이게 했다. 큰 사위 최태호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봉고차 한대를 몰고 달려왔다. 미구하여 남편이 금방 퇴근한 연변병원 소화내과의 배봉욱 주임의사을 동행시켰다. 배봉욱 주임의사의 가방안에는 얼음으로 포장한 혈액까지 들어있었다. 일행은 밤도와 돈화로 향했다. 약 4시간 뒤 돈화에 도착한 일행은 즉시 경남의 장모를 살려내는 긴장한 구급치료에 달라붙었다. 점적주사를 놓는 한편 동시에 수혈을 시작했으며 배봉욱 주임의사는 환자의 심장맥박, 혈압 등을 수시로 체크하면서 환자가 이외의 반응을 보일 때마다 긴급조치를 취하군 하였다. 병원의 구급실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손발이 척척 맞아돌아갔고 환자의 상태를 관찰하는 배봉욱 주임의사와 김용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대돋았다… 긴장한 구급과 더불어 수혈이 끝나자 얼마 뒤 백지장같던 환자의 얼굴에는 차츰 피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몇 시간의 구급끝에 환자가 위험에서 벗어나자 어느 덧 새벽이 되었다. 일행은 좀 휴식하다가 아침밥을 드시고 떠나라는 경남이와 제갈영애의 만류도 마다하고 눈 한번 붙이지 못한 채 귀로에 올라야 했다. 낮에 또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친정어머니가 완쾌한 모습을 보인 뒤 연길로 돌아온 둘째 며느리 제갈영애는 순자앞에서 오래도록 감격으로 어깨를 들먹이였다. “어머니, 어머니의 은공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가 아니었더면 저의 친정어머니가 어떻게 되었겠어요?! 정말이지 어머니의 그 정성이 저의 친정어머니를 구해냈어요.” 그리고 병이 완쾌되자 둘째 며느리 제갈영애의 친정어머니는 큰 사돈인 김순자네 내외와 그 자녀들한테까지 크게 한턱 내겠다고 했다 한다. 그뿐이 아니다. 셋째 며느리 정선희의 친정아버지가 중풍에 걸리자 순자는 사돈이 입원한 날부터 위문을 다니기 시작, 장장 20년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며칠에 한번씩 문안을 다니는것이 일과중의 하나였다. 그 사이 순자 역시 노년기에 접어들었고 누구한테 짝지지 않게 건강하던 몸이 나중에는 지팽이를 짚고 다니는 파파할머니로 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돈의 건강에 대한 관심은 그 사돈이 사망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며느리와 사위들을 아껴주고 지어는 사돈집의 일에까지 참여하는 순자였건만 자기의 몸에 등한시할 때가 많았다. 일찍 지난 세기 80연대 작은 아들 김진이가 결혼하고 거기에 둘째 아들 경남이네가 집이 파가이주되어 임시로 들어와 있다 보니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집은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식사는 교대별로 했고 남편은 학교 사무실에 가서 자야 했으며 순자는 현관에 넢판자를 펴고 쪽잠을 자야 했다. 심지어 온집식구가 몽땅 모여 함께 북적일 때면 순자는 손에 쥐었던 대야를 놓을 자리가 없어 아예 머리위에 이고 있었다고 하니 그 때의 그 광경이야말로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방안에 콩나물시루처럼 식구가 빼곡히 들어와 있었다는 비유가 딱 들어맞았다. 당시 순자는 저녁에 현관에서 자다가도 새벽이 되면 다시 살며시 들어와 며느리들을 깨울세라 아침밥을 지었고 그 뒤 며느리가 식사할 때면 손주녀석 둘씩 업고 밖에 나가 달래면서 며느리가 제때에 밥을 먹고 출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다 가도 며느리나 사위들 중 누가 앓기라도 하면 모든것을 제쳐놓고 거기에 모든 정성을 쏟는 순자였다. 이렇듯 가정에서 순자가 모범을 보이기에 가정성원들 사이가 화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자네 가정의 화목함을 두고 당시 많은 사람들은 부러워하면서도 왜 그렇듯 화목할수 있었는가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순자를 찾아와서는 “며느리를 잘못 맞아와 부산해죽겠소”, “아들도 장가를 가더니 남이 돼가오”, “손자손녀를 키워주어도 차례지는 것이란 그저 그렇소”하며 불평을 부리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아주 설득력이 있게 그런 사람들을 감화시키군 했다. “가정관계도 대괄호, 중괄호, 소괄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우다. 대괄호 【 】가 로인들이 있을 위치라면 중괄호{ }는 젊은이들이 있을 위치이고 소괄호 ﹝﹞는 손군들이 있을 위치라우. 그런데 노인들은 자기들이 있어야 할 대괄호안에 있지 않고 자꾸 중괄호안이거나 소괄호안에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니까 인간위치 관계가 혼돈이 생기면서 망썽이 생기는 법이 아니겠수?!” 순자의 이론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할아버지{ 아들 ﹝손자, 손녀﹞ 며느리 }할머니】 이는 어찌보면 소괄호안의 문제부터 풀이하는 수학법칙과도 같았다. 즉 소괄호풀이부터 시작하여 중괄호와 대괄호의 문제를 풀이하는 법칙 말이다. 이렇게 보면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아들과 며느리가 있는 중괄호안에 들어가려고 해도 어긋나거니와 손자와 손녀가 있는 소괄호안에 들어가 손자나 손녀들과 똑같은 배려를 요구하면 더욱 안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순자의 솔선수범이 전반 가정의 화목을 촉진시켰다고 해도 실로 과언이 아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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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0
  • 민국일화 - 귀족후손들과 양공주들의 풍류사
    한 나라로 놓고 말하면 조대의 개방정도에 따라 섭외혼인의 수량과 활약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중국의 당조시기, 허다한 본토 여자들이 해외에 정착했고 동시에 역시 수많은 요염한 양공주들이 당조의 남자들과 짝을 맺아 인륜사를 창조, 이는 당시 당조의 일종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었다. 당조 이후 중국은 점점 대내외적으로 봉쇄정책을 실시하면서 이러한 풍경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양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시각은 부동한 두가지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즉 전자는 오만하고 후자는 공포감에 시달리는 것 등이었다. 청나라의 도광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크고 작은 관원들은 마치 서양인들을 보면 마치 “온역”을 피하듯 멀리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서양인을 별로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청조말기와 민국초기에 와서 이러한 현상이 개변되면서 중국은 다시 얼굴을 해외로 돌리고 서양인들과의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하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중국남자와 서양여자, 서양남자와 중국여자들 사이의 혼인현상도 종종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때에 와서야 사람들은 인간의 정감이란 민족과 종족을 떠나 세계의 그 어느 곳에도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른바 귀족후손들이 섭외혼인에서도 선도작용을 했다. 육정상(陆征祥), 장백리(蒋百里), 호적(胡适), 부걸(溥杰), 장위국(蒋经国)…그들은 청조말기부터 민국초기 사이의 풍류남아들로서 이들 모두는 출신이 우월했고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대담히 전통과 문화의 장벽을 허물고는 한명, 또 한명의 이국소녀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육정상과 벨지크 여인 페더 베르트 1895년 러시아 상테페테르부르그 차르궁정의 무도회에서 아주 뜻하지 않던 일이 발생했다. 러시아 주재 청정부 대사관의 통역관 육정상이 양복을 입고 숙련된 프랑스어로 신사숙녀들 속에서 통역을 담당해 인기를 끌었다. 그의 세련된 예의, 서방남성한테서 볼 수 있는 풍도와, 동방남성한테서 볼 수 있는 우아함에 많은 숙녀들이 가슴을 부둥켜안군 했다. 이 중에는 벨지크 숙녀 페더 베르트도 있었다. 페더 베르트는 벨지크의 한 장군의 손녀였다. 베르트의 부친은 벨지크 국왕의 시종무관이고 육군대령이었다. 당시 베르트는 러시아 주재 벨지크 대사관에 거주하는 친척 로크의 집에 머물고 있었으며 친척관계를 통하여 경상적으로 궁정 연회 및 무도회에 드나들군 하였다. 그녀는 말씨가 친절하고 자태가 아름다워 늘 사교계의 화제로 되군 하였다. 얼마 뒤 육정상과 베르트는 서로 사랑하기 시작, 당시 육정상은 24세였고 베르트는 40세였다. 1899년 2월 12일, 상테 페테르부르크의 성카리나 대성당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거행, 천주교 교부 라클랑르가 주례를 섰다. 그 뒤 27년간의 결혼생활에서 이들 남녀는 결혼선언을 완벽하게 이행하였다. 결혼후 이들은 비록 서로 끈끈히 사랑했지만 세속은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고 각종 적의적인 유언비어들이 난무하였다. 그러자 남편의 압력을 덜어주기 위하여 낭만적이고 떠들기를 좋아하던 베르트는 늘 집안에 들어박혀 있으면서 외출을 삼가하였다. 러시아 생활의 8년간 육정상은 4등 통역관으로부터 2등 참사관으로 되었다. 그가 순리롭게 출세할 수 있은데는 역시 베르트의 공로가 아주 컸다. 이들은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면서 27년간을 함께 생활, 1926년 베르트가 사망할 때까지 줄곧 결혼시의 언약을 잘 이행해왔다. 베르트가 사망한 이듬해 육정상은 스위스주재 중화민국 공사관의 직무에서 사퇴하고는 벨지크로 이민하였다.    호적과 미스 에디스 윌리엄스의 사랑 중국 신문화운동의 기수로서 호적은 일생동안 사랑과 도덕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호적은 자신의 전족부인 강동수와 함께 정이 없는 부부로 “백년해로”했지만 그 역시 “남자로서는 모두가 범할 수 있는 착오”를 범했다. 이 중 하나는 그와 이종사촌 여동생 조성영간의 혼외연이었고 다른 하나는 장장 반세기에 달하는 그와 미국연인 월리엄스와의 플라톤 사랑이었다. 호적과 월리엄스가 서로 알기 시작한 것은 1914년이었다. 당시 월리엄스의 부친은 미국 예일대학과 코넬대학의 지질학 및 고생물학 교수였고 당시 월리엄스는 뉴욕의 한 예술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 때 월리엄스는 귀가해 휴가를 보내던 중 처음으로 호적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월리엄스의 평범하지 않고 명랑한 성격은 호적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그로 하여금 비상한 용기로 전문 월리엄스를 방문하도록 하였다. “서양부호”의 딸 월리엄스는 호적보다 6살 연상이었다. 그 때 월리엄스의 고결한 인품과 풍부한 학식 등은 호적으로 하여금 그녀를 사모하게 하였다. 아울러 호적의 넘쳐나는 재능 또한 월리엄스로 하여금 “인생지기를 얻은듯한 쾌락”을 가지도록 하였다. 또한 유능인과 유능인의 만남은 마음속에 가졌던 모든 방선이 무너지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들 남녀의 내왕은 호적의 부모로부터 강한 반대의 벽에 부딪쳤다. 원래부터 호적의 미국생활을 반대해온 부모는 기어코 호적으로 하여금 억지로 미국으로부터 돌아오게 하였고 귀국하자 바람으로 강동수와 결혼하도록 강요하였다. 어찌보면 호적 역시 흉금이 넓은 군자였다. 그는 종래로 강동수와의 혼약을 월리엄스한테 숨기지 않았으며 지어 강동수의 사진을 월리엄스한테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서신거래로 맘에 들지 않는 강동수와의 결혼에 대해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월리엄스의 조언을 요청하기도 했다. 비록 자신의 미혼녀에 대해 만족해하지 않았지만 호적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앞에서 자기 자신은 봉건세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결국 강동수와 결혼할 수밖에 없노라고 고백했다. 이에 월리엄스는 조금도 호적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호적의 고충을 이해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지지하고 달갑게 호적의 “학술상의 반려”로 되어 주었다. 그리고 월리엄스는 종신토록 출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현미와 항미려의 로맨스 소현미(邵洵美)라고 하면 현재의 중국 문학권에서는 아는 사람이 별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세기 30~40연대의 중국문단에서 그는 명성이 아주 대단하던 사람으로 일찍 수차 노신(鲁迅)으로부터 풍자와 공격을 받았었다. 당시 노신으로부터 비판을 받은 사람들을 놓고 보면 모두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소현미는 출신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조부는 일찍 청조시기 대만의 제2임 순무관 소우겸이었고 외조부는 만청시대의 제1 관상으로 “중국의 상부(中国商父)”로 불렸던 성선회었다. 이러한 출신은 그로 하여금 부잣집 도련님으로 될 확율이 아주 높게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인생을 옳바르게 인식하고 남들이 먹고 마시고 창기 놀음을 할 때 문학의 길에 들어서서 시를 쓰고 서점과 잡지사를 만들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수립했다. 한편 그의 인생에서 전기적인 색채로 보면 미국 여작가 항미려와 한단락의 연애사가 있은 그 것이었다. 항미려의 원명은 에밀리 하은으로, 1905년 미국 중서부의 생루이 주에서 태어났으며 소현미보다는 한살 위었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독립성이 강했고 위스콘신 대학 광야금공업공정학부를 졸업한 뒤 이 학교의 첫 광야금공업공정부야 학위를 딴 졸업생으로 되었다. 에밀리 하은은 자기의 전업에 대해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오직 종래로 여학생을 모집하지 않는 이 학부에 도전해보았을 따름이었다. 졸업 후 에밀리는 자신이의 성격이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5시에 퇴근하는 생활”에 적합하지 않음을 깨닫고는 직업을 포기, 아프리카 콩고의 열대우림에서 생활하면서 미국 뉴욕의 한 간행물에 글을 보내는 작가로 되었다. 1935년 에밀리는 중국 상해로 향하는 윤선에 올랐다. 상해에서 그녀는 재빨리 싸롱과 나이트클럽 등 밤무대의 총아로 되었다. 이 시기 에밀리는 이름을 항미려로 바꾸었고 소현미와 한단락의 로맨스를 엮기도 하였다. 하지만 레온사인의 황홀함 역시 그녀한테는 원시삼림의 유혹보다는 크지 못했다. 그녀 즉 항미려- 에밀리가 상해를 떠나기로 했던 그 시각, 소현미와 에밀리의 사랑도 막을 내렸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역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1-05
  • 장개석의 투항 유도하려 했던 모택동의 “실수”?
    1950년 5월 16일, 국민당군이 주산(舟山)에서 철거한 뒤 장개석한테는 금문도와 마조군도에 대한 수비문제가 골치거리로 나섰다. 당시 이 2개의 섬도를 사수하느냐 아이면 포기하느냐를 두고 국민당군 내부에서는 논쟁이 가시화되었다. 장개석과 국민당의 고위층은 확실한 계획을 잡지 못하였고 이 2개 섬의 백성들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다. 바로 이 때 모택동과 중공은 이미 대만을 해방할 결심을 확정하였다. 중공중앙에서는 1950년의 해방군 임무를 해남도, 대만과 서장을 해방하고 이 경내의 국민당 잔여세력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명백히 규정하였다. 하지만 당시 외계에서 알지 못하고 있은 것은 모택동은 일을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바로 그 것이었다. 아울러 모택동은 장개석에서 회생의 길을 마련해 주려고 했었다. 당시 해방군이 한창 전쟁준비를 진행하고 있을 때 모택동은 적당한 인물을 파견하여 장개석과 접촉함과 동시에 평화담판의 가능성을 탐색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 때 모택동이 선택한 인물은 장치중 장군이었다. 장치중 장군은 원 국민당의 고위관원으로서 육군 2급 상장이었고 선후로 호남과 신강 등 2개 성의 성주석이었으며 장개석의 위원장 비서실 주임까지 한적이 있었기에 장개석과 사인관계가 아주 밀접했다. 한편 그와 중공과의 관계 또한 양호하였는바 일찍 국민당을 대표하여 국공 양당간의 담판에도 수차례 참가하였었다. 1950년 3월 11일, 모택동은 화남지구에서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장치중한테 “대만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데 관한 장치중 선생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선생이 대만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매주 적합하고 중요할 것 같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고심히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생각밖의 효과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썼다. 그 뒤 3월 20일, 모택동은 재차 장치중한테 전보를 보내어 한번 만나 구체적으로 연구해보자고 제의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엽검영한테 지시하여 장치중의 경호사업을 잘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뒤 장치중이 북경으로 오자 모택동은 직접 중앙군위의 모 책임자를 배치하여 장치중의 경호사업을 책임지게 하였으며 한편 장치중과 회담하면서 일단 대만이 평화적으로 해방될 수만 있다면 장개석의 인신안전은 물론 기타의 정치와 행정분야에서도 출로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려 주었다. 그러자 장치중은 모택동의 계획에 좇아 장개석한테 마지막 회생의 기회를 줄수 있는 내용을 편지에 담아 정성들여 썼으며 홍콩의 한 유명인사를 통해 편지가 대만의 장개석한테 전해지도록 부탁하였다. 헌데 이 편지가 장개석의 손에 들어간 것은 수개월 뒤인 7월 19일이었다. 국민당군이 주산군도에서 철수한 뒤 장개석과 대만의 군민들은 의연히 중공측에서 평화담판의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크나큰 공포와 긴장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후에 원 국민당군의 장령이었던 주굉도는 장개석이 이 편지를 받았을 때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1957년 7월 27일, 이 날은 한반도 내전이 발발한지 1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장개석은 연회를 차려 국민당군의 여러 원로들을 청해서는 한국전에 개입할 뜻을 전달하였다. 연회도중 국민당 장령인 하응흠이 돌연히 장치중이 3월 16일에 쓴 편지가 7월 19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공개하였다. 하응흠은 “67페이지에 달하는 이 편지는 참모총장 주치유를 통해 장개석한테 전달되었다가 19일 다시 나한테 보내졌다”면서 장개석은 당장에서 중공의 제의를 거절하였다고 밝히었다. 그러면서 하응흠은 장치중의 편지내용을 공개,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았다. 국민당은 10여년간 “공산비적토벌”에 나왔지만 정치의 부패로 필연적인 실패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현재 국공간의 힘을 비교해볼 때 인민해방군은 긍정코 대만을 해방할 수 있으며 아울러 국민당은 대만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대만은 필연코 국민당의 무덤으로 될 수밖에 없다. 장치중은 편지에서 또 만약 위원장께서 원한다면 자기 자신이 홍콩에서 만날 수가 있으며 이 편지는 모택동의 동의하에 작성한 것이라고 밝혔다. …… 하응흠의 보고가 끝나자 진성, 장군, 오충신 등은 모두 이는 대만공격 전야에 있게 되는 중공의 상투적인 정치공세라고 하는 한편 장치중을 혁명의 배반자라고 하면서 마땅히 제재하여야 한다고 흥분해하였다. 주굉도는 그 때의 정경을 회상하면서 장개석이 당시 사적으로 편지를 처리하지 않고 하응흠더러 공개장소에서 읽게 한 것은 자신이 복국중임(复国重任) 을 짊어졌기에 자신이 중공한테 머리를 돌린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지 그한테 평화담판의 생각이 없은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였다. 한편 장개석이 모택동의 평화담판제의를 거절한 것은 다른 두가지 방면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한반도전쟁이 발발하고 대만을 돕지 않던 미국정부의 태도가 크게 전변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개석 본인이 장치중과의 개인감정에서 크게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장치중으로 놓고 말하면 1949년 북평에서 있은 국공양당간의 평화담판시 북평에 간지 얼마 안되어 공산당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국민당내에서 공산당에 투항한 장령중의 일원으로 되어 장개석한테는 가장 큰 수치이기도 했다. 한편 장치중이 쓴 편지가 4월이나 5월에 대만에 도착했더라면 역사는 혹시 다르게 씌여질 수도 있었는바 이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해방군은 주산군도와 해남도를 해방한 후 즉시 대만에 대한 공격준비를 다그쳤다. 당시 해방군은 화남 각지에 30개에 달하는 군용비행장을 수건하여 400대의 전투기가 이미 비행장에 진입했으며 복주, 하문, 산두 등 항구에 대량의 등륙정 및 기타 군함을 배치해 놓고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장개석 등 국민당 수뇌부는 7월경에 이르러 대만해협의 풍랑이 적게 일 때 중공의 수십만 대군이 해협을 건너오면서 공격을 개시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5월말의 대만은 완전히 미국의 “제28호 특별명령”에서 지적한 것처럼 “모두들 이 섬이 곧 함몰되고 중화민국이 섬도에서 기타 지구와 마찬가지로 쉽게 공략된다”고들 했다. 한편 5월 27일, 대북의 “중앙일보”는 사론을 발표하여 대만이 이미 전례없는 위기가 도래하였다고 승인, “중앙일보”의 이사장 동현광 역시 “중국이 이미 이 지경에 도달했으니 오직 의지상의 기적만이 이를 만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와중 오직 장개석만이 매우 견정했다. 당시 장개석은 “만약 대만을 지키지 못해도 나는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미 “살신성인(杀身成仁)”의 각오를 가졌다고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만약 당시와 같은 사태가 재차 벌어져 모택동이 장치중이 아닌 다른 사람한테 위탁해 “살신성인”이 지경에 이른 장개석에게 편지를 쓰고 또한 한반도 전쟁같은 “대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결과의 역사는 긍정코 다시 씌어질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28
  • 1949년 겨울 북경의 ‘금창(禁娼)운동’ 내막
    중국의 민국초기 사창업은 규모화를 형성하기 시작, 가장 번창하던 1917년 북경에 등록된 기방은 도합 391개에, 기생 3500명에 달했으며 암암리에 사창업에 종사하는 기생은 적어도 7000명이 되었다고 한다. 항전시기 북평의 매 250명의 여성중 1명은 기생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1) 북평이 해방된 후 사회는 복잡하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비록 기방들에 대해 즉각적인 차압을 강행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의 치안을 정돈하면서 기방들을 관제범위내에 넣었고 각 공안분국과 파출소들에서는 경상적으로 기방의 표객(嫖客)들을 검사하고 나쁜 분자들을 추적하군 하였다. 당시 기방은 흔히 국민당 특무들이 숨어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분간 차압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북경시 공안국에서는 사회치안을 수호하는 각도에서 기방들에 대해 약간의 잠정규정을 정해놓고 관제하고 있었다. 당시 북경시 정부의 규정에는 해당 공안국과 파출소에서는 우선 각 기방들에 대해 등록하고 각종 방식으로 해결방식을 탐색하군 하였다. 한편 어떤 공안분국에서는 표객들의 기방으로 드나드는 것을 제한하기 위하여 “표객검사” 도장을 만들어서는 파출소들에 발급, 표객이 발견되면 우선 교육을 하였으며 나중에는 표객의 신분증과 영수증에 도장을 찍군 하였다. 한번은 50세 가량의 한 남성이 기방에 들어왔다가 파출소 일군들한테 잡히게 되었는데 그한테는 그 어떤 증건도 없었다. 그러자 파출소 경찰은 그 남성의 와이셔츠에 “표객검사”란 도장을 찍어보내였다. 그 뒤 기방마다 “도장일군이 왔다”고 하면 모든 표객들은 도망가군 하였으며 기방은 썰렁하기 그지 없었으며 어떤 업주들은 문을 닫고 폐업하였고 적지 않은 기생들은 기타 지구의 기생방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암암리에 몸을 팔며 생계를 유지하군 하였다. (2) 1949년 5월, 북경의 사회치안은 혼란현상이 기본상 청리되었다. 그러자 북경시 정부에서는 회의를 열고 전문 기생들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였다. 당시 북경시 시장이었던 엽검영은 “기방에 대한 처리는 반드시 먼저 사람을 파견하여 정황을 요해한 후 처리방침을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5월 23일, 북경시에서는 민정국, 공안국과 부련회 등 기관의 일군들로 구성된 사업조가 조사사업에 착수, 전 시 200여개의 크고 작은 기방의 기생들을 대상으로 공안국과 민정국에서 각각 조사자료를 작성, 기방의 역사, 분포상황, 등급, 시설, 영업상황 및 기생들의 종류, 내원, 생활상황과 윤락원인 등을 시정부와 중앙공안부에 바치었다. 한편 민정부문에서는 기생들을 집합시킬 장소를 선택하고는 일부 생필품을 구전하게 갖추어놓았으며 시부련회 간부가 직접 각 부문으로부터 뽑아온 간부들에게 정책선전 훈련을 시켰고 위생국의 의사를 초청해 성병방지지식강좌를 조직했다. 또한 기업국에서는 수용된 기생들이 해야 할 일, 즉 털실옷 뜨기 등 일거리를 마련하군 하였다. 10월 15일, 북경시위와 북경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공안국, 민정국, 부련회 등 부분에서는 “기방 봉폐행동 총지휘부”를 내왔으며 시공안국 국장 나서경이 총지휘를 맡았다. (3) 행동시간: 1949년 11월 21일 오후 6시 책임부문: 북경시 공안총국 총지휘: 나서경 행동방식:3명씩 1개 소조로 배비, 1명의 여간부 5개 내지 10개의 기방 조사기록. 조사대상: 주인, 마담 및 대리인, 기생, 심부름꾼 등 행동을 통일하기 위하여 오후 6시를 행동시간으로 규정, 집합시켜 회의를 여는 방식으로 주인, 마담을 집중시키고 오후 8시에 기생과 심부름꾼 등을 집중관제에 들어간다. 행동지휘부는 기방 분포상황에 따라 도합 5개의 소지휘부로 설치, 기방이 비교적 집중된 5개 지역에 각각 설치하였고 행동소조는 27개로 구성되었으며 도합 81명으로 매 소조마다 3명씩이었다. 그리고 매 소조마다 1명의 성격이 드세고 사업능력이 비교적 강한 여간부와 정책선전수준이 뛰어난 과장급 이상의 간부를 두었다. 행동소조의 임무는 지정된 기방에 도착하여 북경시 각계대표회의의 결의를 선포한 뒤 기생들을 집중시키고 심부름꾼과 마담 및 표객을 해산시키고 기방 재산을 차압하는 것 등등이었다. 이 날 어느 한 행동소조가 소상루(潇湘樓)에 도착하자 한 심부름꾼이 문어구에 앉아 안쪽에 대고 소리쳤다. “기방검사단이 왔다. 손님이 있든 없든 모두 자기의 문어구에서 검사를 받으라!” 그러자 일부 요염하게 생긴 기생들이 엉덩이를 휘두르며 자기의 문앞에 나타났다. “기방검사단이 아니야, 우리는 너희들 기방을 차압하러 온 사람들이다.” 행동조 조장이 웨쳤다. 이어 머리에 철갑모를 쓰고 몸에 녹색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총에 장탄한채 기방의 문어구에 버티고 서자 그제야 도고하던 기방의 주인과 심부름꾼 등은 사태의 엄중성을 느꼈던지 행동조장의 말에 고분고분해지기 시작했다. 몇시간 뒤 기생들을 가득 실은 자동차들이 전문밖, 숭문문밖, 서교백방자와 동교로부터 한가담과 백순골목에 자리잡은 8개의 부녀노동교양소에 도착하였다. 이 곳에서 기생들은 각각 여러 뜨락에 배치되어 학습하는 한편 노동개조를 하게 되었다. (4) 1949년 11월 23일, 북경내 기방들이 차압된지 3일 후 북경의 8대 골목중의 하나인 한가담(韩家潭)의 대문에는 “북경시 부녀생산교양원”이란 간판이 걸리었으며 역시 철갑모를 쓴 공안총대의 전사가 총을 쥐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1949년 11월 29일, 북경대학병원 성병방치소 등 6개 의료부문의 57명의 의료일군들이 육속 부녀생산교양원에 파견되어 기생들에 대해 신체검사를 하고 성병에 걸린 기생들에 한해서는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교양원에서는 기생출신의 여성들의 출로문제를 두고 아주 심중하게 처리하였다. 이 교양원에서 개조를 마치고 나가는 여성들에게는 아래와 같은 수속을 밟아주었다. 첫째, 정부의 증명신을 발급, 증명서가 있는 본인은 정당 직업이 있는 주민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둘째, 생활보장을 해주는 기초상 몇가지 보증을 하게 하였는바 그것들로는 교양원에서 나간 뒤 노동이거나 가무에 종사하고 더는 창녀생활에 종사하지 않는 것, 정부의 혼인법에 따라 혼인하되 변상적인 매매혼인행위가 있어서는 안되며 결혼시 반드시 위생부문을 통해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 등등이었다. 한단계의 학습과 개조를 통하여 도합 1077명 여성들이 교양원에서 나가게 되었다. 헌데 대부분 여성들은 집이 없기에 자원하여 교양원에 남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교양원에서는 그들에게 82대에 달하는 직포기, 양말편직기 등을 사줌과 아울러 그녀들을 위해 신생 편직물공장을 차려 주었다. 한편 교양원에서는 북경에 있는 희곡인원들을 초청하여 그녀들을 도와 일부 소형연극을 자체로 창작해 출연하게 하였다. 이 중 연극 “천년 빙하의 해동(千年冰河开了冻)”은 금교라는 여자가 기방에 팔려가 기생으로 전락되었다가 해방을 받는 내용을 주선율로 낡은 사회 창기제도의 잔혹성과 암흑성을 폭로하였다. 교양원에서는 또 특별히 극단을 조직, 한단계의 연습을 거쳐 1950년 춘절이후 이 극단에서 출연한 연극 “천년 빙하의 해동” 북경성내에서 대 환영을 받았는바 1일주일간 출연하는 동안 극장안은 번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27
  • [연재] 동년을 회억하여 ( 3 ) 할아버지편
    저자: 리락용(1946~현재) 전주리씨43세, 의안대군파 21대손 2. ‘땅과 농사는 天下之大本’이다. 농사는 天下之大本이다. 할아버지는 밭이 일체를 결정하며 밭이 없으면 설 자리도 말할 자리도 없으며 밭이 있으면 근본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였고 또 한 평생 그 밭을 위하여 분투하시였다. 할아버지는 후세에 다시는 밭이 없는 치욕을 물려 주려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아름드리 나무를 베여 내고 그 자리에 그 재료로 집을 짓고 그 주위에 밭을 개간했는데 지금 보면 그 밭 면적은 한상(垧)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아래 마을 강변을 개간하여 수전을 만들었는데 그 면적도 반상(垧)은 되는 것 같다. 이로서 그때에도 의식주 문제는 기본상 해결된 것 같다. 그 후에도 할아버지는 계속하여 유동촌 밭에 백여메터 되는 수로를 파서 장풍동 하천과 봉암동 하천을 끌어들여 수전을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않고 봉암동 하천 량쪽 황무지를 계속 개간하였으며 땅 한 뙈기라도 사들여야 마음을 놓았다. 우리 집이 전부의 주요 재산은 밭과 농기구 였다. 할아버지는 돈을 모아 밭만 사들였다. 특히 일본이 망한 후 연변 조선 사람들중 돈과 땅이 있고 공산 혁명의 형세를 아는 사람들은 헐 값으로 밭을 팔고 조선에 갔다. 이리하여 밭 값이 눅어 지자 할아버지는 형세를 모르고 땅이 눅다고 많이 샀다. 그후에 광복을 맞아 외지에서 일하던 둘째 셋째 아들들이 집이 돌아와 장풍동 집에 식구가 많아지자 번동에 밭을 사고 집을 지었다. 그리고는 둘째 숙부에게 장풍동 집과 주위의 밭을 주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할아버지 토지 구매욕은 형세를 모르고 48년 토지개혁 이후에도 계속 되였다. 하여 가을이 되면 앞마당에 낟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졌다. 할아버지는 밭을 부치기 위해 자식들이 집을 떠나 직장을 찾는 것도 반가워 하지 않았다. 45년 8.15광복후 도문철로 기관차 부사수로 일하다 일본 놈이 감방에1년2개월 갇혀 있으면서 전념병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기적같 이 살아온 둘째 숙부와 도문철도 기무단에서 일하다 광복을 맞으며 잠시 돌아온 셋째 숙부에게 정부에서 복귀 통지서를 보냈지만 할아버지는 그들을 꽁꽁 묶어두고 보내지 않았다. 만약 그때 숙부들이 복귀했다면 오늘 같은 신세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셋째 숙부가 조선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토지개혁 이후까지 밭을 사들여 아버지가 안 계시는 우리 집에 밭이 너무 많아 할아버지 혼자서 부치기에는 아주 힘들었을 것이나 할아버지가 밭에 못 나가게 하여 할아버지가 일하던 기억은 없다. 다만 넓은 앞마당에 집채 보다 더 높은 벼 낟가리 조 낟가리 콩 낟가리가 줄지어 있었던 기억만 생생하다. 남들이 낟가리는 이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우리 집 앞마당은 아주 넓었는데 봄에는 오이 고추 가지 마늘등 채소를 심어 먹고 가을이면 탈곡장으로 사용했다. 인상 깊은 것은 벼 조 콩등의 탈곡이였다. 벼 탈곡은 어른둘이 발판을 밟아 고리가 달린 원통을 돌리면서 벼를 탈곡했는데 힘들어 할 때에 한사람이 두 사이에 끼여 들어 밟아주군 했다. 호기심이 많고 작난꾸러기인 나는 어른들이 말도 듣지 않고 어른들 사이에 끼여들어 발판을 밟기도 했는데 도움은 커녕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조 탈곡은 할아버지가 얇은 철판으로 만든 가리개를 사용하였으며 어머니와 삼촌들은 자작나무를 곱게 가공하여 만든 가리개를 사용 했다. 혹시나 어떤 때에 할머니도 참여했는데 앉아서 무딘 칼로 조 이삭을 자르곤 했다. 이렇게 잘라낸 조 이삭은 마당에 펴놓고 소가 군재를 돌리며 끌고 다녔다. 어른들이 마당 복판에서 소를 몰았는데 나도 끼여 들어 소를 몰기도 했다. 군재가 끝나면 도리깨로 낟알을 철저히 털어냈다. 이미 60이 넘으셨고 중병에 계신 할아버지는 이 모든 일을 주관하셨으며 손수 다 하였다. 사랑채에는 큰 뒤주가 세 개 있었는데 널판으로 만든 뒤주에는 벼와 조, 조짚으로 만든 뒤주에는 콩을 보관했다. 벼 뒤주는 너무 높아 나는 무서워 올라 가지도 못했다. 당시4-50년대에 장풍동 골안에서 입쌀밥을 먹는다는 것은 정말 희한한 대사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21
  • 【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2)
    ■ 김철균 순자네 친정형제들을 보면 둘째 오빠 김구준이네가 연길시 공화대대에 살고 있었고 셋째 오빠 김구완이네가 개산툰에서 살고 있었으며 남동생 김구춘이는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중 둘째 오빠 김구준이네는 한뉘 농촌에서 살다 보니 그저 마음치레나 할 줄 알았지 세상물정에 대해 아는 것이 극히 적었고 많은 거래에서 남한테 당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둘째 오빠가 사망하자 형님이 혼자서 잔밥들을 거느리고 있는 이 집의 가정형편은 점점 어렵게만 돼갔다. 그러던 중 어느 한번은 둘째 오빠네가 연길현 산골인 신광이라는 곳의 어느 한 가정으로부터 중돼지 2마리를 사왔는데 사온 이튿날부터 돼지가 왝왝 토하면서 먹지를 않더니 일주일도 되지 않아 2마리 모두 죽어버렸다. 이미 병든 돼지를 사온 것이 분명했다. 돼지 2마리의 값은 그 때의 돈으로 90위안, 가난한 농민의 가정으로 놓고 말할 때 이는 실로 떼 돈이나 마찬가지었다. “돼지 두 마리를 키워서 팔아 집살림에 보태려고 했는데 아이구 안될 놈은 앞으로 넘어져도 뒤통수를 깬다고 휴유ㅡ…” 형님의 하소연을 듣는 순자의 마음은 괴롭기 그지 없었다. “그래, 병든 돼지라는 걸 진짜 몰랐단 말이유?” “알았으면 왜 병든 돼지를 사왔겠수.” 형님은 하소연을 하면서도 원 돼지주인을 찾아갈 궁리는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럼 이제라도 원 주인한테로 찾아가 도리를 좀 따져 보기오. 아무리 팔아버린 돼지라 해도 팔아버린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돼지가 죽었는데 왜 책임이 없겠소?!” 그러자 형님은 순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다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 돼지의 주인과 시비를 캐서 이길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좌우간 가보기오. 길고 짜르고 하는 건 대 봐야 할게 아니오?!” 형님이 주저하자 순자는 조카를 불러일으켰다. 년로한 형님이 길 떠나기 불편하기에 조카와 함께 가기로 하였다. 그때는 신광이라는 곳은 연길에서 버스도 통하지 않는 산골이었다. 순자와 조카는 걸어서 길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순자네가 하루 종일 걸어서 원 돼지의 주인이 사는 신광에 도착하니 해가 져서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정맞게도 그 주인의 집을 찾아가니 어디로 외출했는지 문에는 자물통이 잠겨져 있었다. 다행히도 그 동네에 먼 친척집이 있어 순자와 조카는 그 친척집에 들어가 하루밤 지낼 수가 있었다. 원 돼지의 주인은 이튿날에 나타났다. 순자네가 찾아온 사연을 말하자 처음에 그 주인은 “돼지가 죽은 것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고 하며 하늘이 낮다 하고 길길이 뛰었다. 여자 둘이 찾아갔다고 업신여기는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조카 혼자서 찾아갔더라면 말도 못붙일 정도였다. 하지만 순자는 달랐다. 착하였지만 시비를 캘 줄 알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하게 나올줄도 아는 여인이었다. “여보시요. 여자들이라고 업신보지 마시우. 원래 병든 돼지가 아니구서야 어떻게 일주일도 되기 전에 2마리 다 죽을 수가 있수. 우리 함께 공사수의소에 가서 다시 시비를 캐봅시다.” 수의소로 가보자는 말에 그 주인은 어딘가 켕기는지 말투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번거롭게 공사수의소에 가는 일이 없이 좋도록 합의합시다. 그럼 두 분이 이 먼 곳으로 찾아온 걸 봐서 내가 그 손실의 절반을 배상해주겠수.” “안 돼요. 돼지가 이 집에서 기를 때부터 병든 것이 분명하니 2마리의 값을 몽땅 배상해야 합니다.” 순자는 딱 잘라 말하면서 그렇찮으면 그 며칠동안 돼지를 먹인 사료값과 노동공가 그리고 손실비까지 함께 계산해서 받겠다고 못을 막았다. 그 주인은 더이상 고집을 부려봤자 이 여인을 이길 수 없다고 여겼던지 180도로 태도 변화를 보이면서 그럼 그렇게 하자고 수긍하였다. 아마 순자를 도시에서 온 높은 간부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 날 순자네는 돼지 두마리의 절반 값인 40위안만을 받고 돌아섰다. 나머지 절반 값은 한 달 후에 받기로 하고 말이다. 주인이 지금 가진 돈은 이것 뿐이라고 하도 사정하니 어쩔 수 없었다. 주인의 말 그대로 그한테 진짜로 그 이상의 돈이 없을 수도 있었다. 하긴 그 때의 세월에 현금 40위안이라는 것도 도시직원의 한달 노임에 맞먹는 액수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고모, 정말 대단해요. 전 돼지값을 받아낼 궁리도 못하구 그저 속만 태웠는데 그걸 언제 다 생각했수?” 조카는 40위안을 받은 것만 해도 아주 다행으로 여기는 기색이었다. “사와서 일주일도 되지 않아 2마리가 다 죽었는데 그게 문제가 없어? 만약 수의소에 가서 시비를 캐면 원값에 손실비까지 더 받을 수도 있는 일이야.” 그 말에 조카는 순자에 대해 내심 탄복해마지 않았다. 순자는 둘째 형님네를 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발벗고 나섰다. 후에 둘째 형님네가 또 돼지새끼를 사다 기르게 되자 집의 구정물을 받아서는 거의 이틀에 한번씩 둘째 형님네 집에 보내 주었는데 어떤 날에는 공화촌까지 날라다주었고 또 어떤 날에는 연길교 부근까지 이고가노라면 마중을 오는 둘째 형님을 만나서 넘겨주기도 했다. 여하튼 옛날부터 순자는 올케라면 친언니 이상으로 따랐고 진심으로 도와 주었으며 그 마음은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마찬가지었다. 그 외 1979년 개산툰에 있는 셋째오빠 구완이의 셋째 아들 길성이가 직장에서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 순자가 길성이의 친어머니 이상으로 정성껏 간호해주어 의사와 간호원들마다 처음에는 모두 순자가 길성이의 어머니인줄로 착각하여 화제에 올랐었다. 그 때 길성이 또한 어머니를 집에 보내고 고모(순자)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하여 길성이의 어머니 역시 시누이(순자)한테는 두손 들었다고 감탄했다. 이런 일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1982년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남동생 구춘이의 딸 김순희가 출산할 때도 그랬다. 출산직전 임산부 순희는 진통을 올 때마다 고통을 호소하며 고모(순자)부터 찾군 했다. 그러면 순자는 지체없이 다가가 순희를 달래기도 하고 여기저기 주물러주기도 해주어 친 어머니인 구춘이의 부인이 더욱 감동을 받았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1973년 6월 연길시 하향지식청년 학부모대표대회에 참가한 후 남긴 기념사진) 1969년의 여름, 전 주 우수학부모대표대회가 수부도시 연길에서 열렸다. 순자는 당시 연길시 신흥가두에서 유일하게 우수학부모대표로 선발되어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가 끝난 뒤 대회 주최측에서는 우수 학부모대표들이 여러 갈래로 팀을 나누어 주내에 산재해 있는 집체호들을 순회방문하기로 결정했다. 그 때 순자가 소속된 대표팀이 방문하는 집체호로는 안도현에 있는 여러 대대의 집체호들이었다. 순자는 당시 10여일간에 거쳐 참관방문한 집체호 중 제일 마지막으로 찾은 집체호가 가장 인상에 남았다. 그 집체호가 바로 상해지식청년들이 생활하고 있는 안도현 장흥공사 서북대대의 한 집체호였다. 서북대대는 안도현 소재지에서도 30여리 떨어져 있는 험한 산골이었다. 순자네가 찾아가자 처음에 집체호 청년들은 별로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를 보아 이전에 많은 방문팀이 다녀갔어도 그들한테 별로 도움이 될 일을 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집체호 청년들이 사는 꼴은 말이 아니었다. 모주석께서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고 했으나 그들이 사는 꼴을 보는 순간, 순자는 이는 모주석의 뜻과는 다르게 번져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른지 몇해가 되는지 갈라터지고 쥐구멍이 숭숭난 굴뚝아래와 불을 때면 연기가 꽉 차는 방안 … 모든 것은 이것이 사람이 사는 집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벼알이 나무에서 달리는줄로만 알면서 자라던 도시의 철부지들이 이 두메산골에 와서 당하는 고생은 순자로 하여금 몹시 가슴이 아프게 했다. 특히 자식 2명을 농촌집체호에 보낸 어머니로서의 순자는 그 애들이 도무지 남의 자식으로만 보이지를 아니했다. “여보세요. 우리가 이 곳으로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애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애들이 사는 꼴을 좀 보세요. 가슴이 아프지 않습니까?!” 순자가 신발과 옷을 벗고 나서자 방문팀의 기타 몇몇 성원들도 동조해나섰다. 그날 대표팀은 흙을 이겨가지고 굴뚝밑과 부뚜막 그리고 구들장에 생긴 틈을 발라주었고 굴뚝에 숭숭 난 쥐구멍들도 막아주었다. 일을 마친 후 집체호의 부엌에 불을 지피자 “웅 ㅡ”하고 소리까지 내며 불길이 구들고래쪽으로 빨려 들었으며 방안 온들이 골고루 따뜻해나는 것이었다. 방문팀이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런데 집체호애들이 옷을 입고 떠날 차비를 하는 순자를 둘러쌌다. “마마(어머니), 가지 말아요. 마만, 우리의 친 어머니와 같아요. 마마, 제발 가지 말아요.” 애들은 순자를 둘러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순자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둘러보니 큰 대야에 빨래거리를 담아놓은 것도 여기 저기에 보였다. 방문팀의 다른 성원들은 떠났지만 순자는 다시 옷을 벗었다. 그날 순자는 애들의 빨래를 다해주고 이불까지 해주느라고 밤새껏 진땀을 빼야 했다. 특히 이불을 하자고 보니 바늘이 5센치미터 길이도 안되는 바늘뿐이어서 손가락끝이 심하게 닳아 뭔가에 부딫쳐도 기절할 정도로 아프기가 일쑤였다. 그 이튿날 상해지식청년들은 떠나려는 순자를 붙잡고 또 울음을 터뜨렸다. 순자는 그들한테 “후에 꼭 다시 오마”하고 열번도 더 약속을 하고서야 그들과 떨어질 수 있었다. 전날밤에 비가 내리고 이튿날 날씨가 개여서인지 날씨는 제법 쾌청하였다. 헌데 비온 뒤의 개인 날씨라 돌아오는 길에 순자는 몇번이고 뱀무리와 맞다들군 했다. 그럴 때마다 몹시 놀라면서 가슴을 붙안군 했다. 안도에서 돌아온 뒤 순자는 자주 그 상해지식청년들이 고생하던 모습이 머리속에서 맴돌면서 마음은 늘 괴롭기만 했다. 집체호에서 생활하고 있는 영남이, 영순이도 마찬가지로 고생이 막심할 것이란 생각이 들자 그 괴로움은 더해만 갔다. 순자는 자식들이 생활하고 있는 집체호들을 돌기 시작했다. 어느 한 집체호에 갈적마다 부뚜막과 굴뚝 등을 손질해주는 등으로 일손을 놓치 않았다. 물론 상해지식청년들이 살던 그 서북대대 집체호로 다시 간다던 약속을 어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1973년의 어느날 영옥이가 있는 안도현 장흥공사 장흥대대로 갈 때는 토마토 한 바구니나 이고 30리가 되는 산길을 걸어서야 집체호에 도착, 집체호의 모든 성원들이 눈물이 나도록 감동되게 하였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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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21
  • [연재]동년을 회억하여 (2) - 할아버지편
    저자: 리락용(1946~현재) 전주리씨43세, 의안대군파 21대손 1. 나의 동년  나는 지금도 1950년부터 있은 사건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나의 동년을 회억하려 한다. 나는 여러번 어머니와 숙부,숙모들과 옛이야기를 나눌 때 나의 기억을 말하곤 했는데 모두들 나의 또렷한 기억에 대하여 놀라고 탄복해했다. 나는 1946 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번동에 지은 새 집에서 태여 났다. 나의 행복한 동년을 쓰려면 먼저 할아버지 아버지의 걸작인 지신향의 일류의 집부터 먼저 쓰게 된다. 봉금령이 취소되자 수천수만이 조선 사람들이 연변으로 들어오며 각지에 많은 조선사람 마을이 생겨났다. 청정부는 연길 룡정으로 가는 이민들이 길목인 지금 룡정시 지신에 관리기구 화룡욕(和龙峪) 통상국을 세웠는데 내가 세상 알고 학교에 다닐 때까지 화룡욕 아문 토성이 있었다. 그후 58년 대약진 시기에 토담을 허물어 퇴비를 하면서 없어졌다. 이전에 어른들은 이곳을 和龍 아문(衙門)이라 불렀다. 이리하며 아문城 남쪽은 城南이라 하고 동쪽은 城東이라 하였으며 서쪽고래는 새풀이 많다하여 샛골이라 하였다. 성남으로 가는 첫마을은 마통새 지팡(地方)이라 하고 좀 더 올라가면 회령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라 회령촌이라 하였고 또 남으로 올라가 오른쪽 고래는 樊씨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樊洞이라 하였고 중간고래는 張豊이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張豊洞이라 하였는데 해방 후에 오래오래 풍년이 들라고 동음 글자로 바꾸어 長豊洞이라 하였고 왼쪽 고래는 오봉산아래에 있다고 五峰洞(노루막이라고도 함)이라 하였다. 서러골에 가는길과 오봉동에 가는 길어 귀에는 성이 董가라는 지주가 토성을 쌓고 살다가 해방전에 이사갔다. 지금 부르는 제일촌은 이전에 마통새(漢朝통역을 한다고 통새라 했다) 지팡(地 方 )이라 하였는데 마씨는 이 마을 지주로 높이가3- 4m되는 높은 토성을 쌓고 살았다. 해방후 그들은 청산을 맞고 살다가 심양에 이사가고 지금은 토성도 다 무너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해방후 이 마을은 성남에 올라가는 첫 마을이라 제일 촌이라 불렀다. 할아버지는 장풍동 초창기 개척자의 한분이시다. 1913년 할아버지가 이곳에 이사 올 때만 하여도 장풍동은 3-4호가 사는 인구가 적고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한 未開發 地區였으나 지주 張豊의 地畔였다. 할아버지는 큰 고모를 데리고 한 살된 아버지를 업고 조선 함경북도 회령군 벽성면에서 보리쌀 한말과 쪽바가지 하나를 허리춤에 차고 빈주먹으로 서러골령 70리 고개를 넘어 장풍동에 왔다.  당시 장풍동에는 지주 장씨 외에 조선 이민 3-4호가 금방 와서 개발하며 거주 하였다. 그중에는 유동촌과 장풍동 아래 마을에 노할아버지와 그의 큰 아들과 셋째 아들도 있었다. 30년대에 유동촌에 집들은 일본놈 토벌대가 항일 지사들이 활동 장소라 불태워 버렸다. 당시 노 할아버지는 한해 먼저 장풍동 아래 마을에 와 자리를 잡고 이듬해에 할아버지를 데려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지금 장풍동 웃 마을에 아름드리 고목을 베여 내고 그 자리에서 베여낸 재목으로 8간 집을 짓고 계속하여 주위의 고목을 채벌하며 토지를 개간하였다. 피득(언뜻) 생각하면 이 주인없는 땅은 개척만하면 다 내 땅인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성남에만 하여도 지주 넷이 있었는데 그들은 馬氏 樊氏 張氏 董氏다. 이곳의 매 한 치의 땅을 개척하면 모두 지주에게 엄청난 대가를 치려야 하였다. 이 지주들은 모두 외지에서 온 한족들로 관가에 뢰물을 먹이고 땅을 차지하고 이민들이 피와 땀으로 지주가 된 자들로 목적만 달성하면 모두 급급히 이 곳을 떠나버려 어머니가 35년에 장풍동으로 시집왔을 때는 그들은 이미 떠나간 뒤로 그후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당시 도끼와 톱 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름드리 고목을 베여 내고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던 그 로고가 어떠했겠는지는 지금 그 누구라도 조금만 생각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장풍동 윗마을 서쪽 구벅이(구벅은 구석의 함경도방언)에 팔간집을 짓고 그 집에서 근 사십년간 사셨는데 동네사람들은 그 집을 구벅이집이라 하였다. 그후 둘째 삼촌과 세째 삼촌까지 결혼하고 1945년 8.15광복에 외지에서 일하다가 돌아와보니 집 식구는 16명이나 되여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할아버지는 번동아래에 집터를 잡고 밭을 사들이고 지신구에서 제일로 자랑하는 열간 집을 지었다.  이 집은 할아버지의 자존의 걸작이었다. 직경이 50cm넘는 대들보로 받쳐진 웅장한 열간 큰 집에 남들의 살림집 못지 않는 사랑채가 있었고 앞뒤에 넓은 터전, 뒤에는 과일나무, 안밖을 백토로 칠한 새하얀 전통적 조선식 건물, 지붕은 조이짚을 량쪽을 짤라서 예였는데 특히 조이짚은 잘 썩지 않는 특점이 있어 만년 먹기라고 한다. 1954년 우리가 이사 간후 우리 집을 사다가 새로 지은 집에서는 55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이 그 짚 이영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 집들은 웃 방만 천정을 눌렀는데 우리 집은 웃방과 정주간 모두 천정을 누르고 정주간에 일본 군사용 밀페식 고급 펌프를 안장하였으며 직경이 1m넘는 무쇠 물독 그리고 펌프주위와 가마 후런은 콩크리트로 하였다. 그 때만 하여도 콩크리트는 매우 귀하였다. 이런 집은 40년 대가 아니라 5-60년대에도 보기 드물었다.  집에는 소, 수레, 벼 탈곡기, 군재, 가대기등 농기와 방아간에는 멎진 방아, 사랑채에는 베틀과 커다란 뒤주와 풍기가 있었다. 風機는 당시 일반적으로 쌀을 찧을 때 사용했는데 할아버지는 탈곡시에 사용 하였다. 집안에는 재봉기, 축음기, 매돌, 직경이 70cm가 넘는 피나무로 가공한 보기 좋은 가벼운 매판, 직경이 50cm넘는 참나무로 가공하여 만든 떡구시, 그리고 각종 크기의 함지 책상과 크고 작은 밥상, 특히 매판과 함지는 모두 피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직경이 1m넘는 나무를 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며 몇 십년을 사용하여도 트고 갈라지지 않았으니 그 건조 가공 기술도 대단하였다. 그리고 떡구시를 만든 자작나무도 직경이 50cm 넘는데 그렇게 땅땅하고 비틀게 꼬여 자란 곧은 나무를 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창문과 간문은 아주 정교하고 단단하고 맵시 좋았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목수기술이 아주 좋아 벼탈곡기 제외한 이 모든 것들을 전부 손수 만드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자기의 두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후대들을 위하여 살기 좋은 리상촌을 건설하였다.  나는 할아버지 전성기에 태여 났기에 나의 동년은 아주 행복하였다. 우리 집에는 오가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나의 친구들도 많이 왔는데 옥인이 옥봉이는 경상적으로(자주) 오고 때로는 고모사촌 춘호 장풍동에 10촌동생 옥련이도 놀러 왔다. 우리는 세감질(소꿉놀이)을 놀거나 숨박꼭질 아니면 강변 모래톱에서 혹은 뒷가 산에서 뛰놀았는데 뒷산은 돌이 많아 개간하지 못하여 초목이 자란 그다지 크지 않은 산으로 우리가 놀기에 맞춤했다. 봄이면 노란나리. 백합, 도라지꽃, 함박꽃과 이름 모를 꽃들이 많이 피였다. 그리고 고사리, 삽찌, 닥시싹, 고추나물, 우정금등 산나물도 있었다. 그 산 아래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심어 놓은 배나무, 사과배나무, 돌배나무, 질구배나무, 오얏나,무 살구나무들이 있었다. 우리 집 과일 나무는 봄에 별로 꽃들이 많이 피지 않았는데 둘째 숙부네집 과일 나무가 꽃이 필 때면 마치 집이 꽃밭에 뭍혀 있는 듯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꽃이 적게 핀 원인은 과일나무를 옮긴지 얼마 안되고 땅이 너무 슾한 원인에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한번 뒷가 산에 놀려갔다 오면 땅이 너무 질어 발이 빠질 정도였으니. 어쩌다가 형님들과 같이 뒷가 산에 가면 형님들이 싸리가지를 꺽어 백합뿌리를 캐여 왔는데 어머니가 삶아 주었다. 감자같은 맛에 달콤한 맛이 더 해져 정말 맛 좋았다. 그러나 돌밭이여서 한 뿌리 캐기에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강변 모래톱에는 할아버지가 파놓은 일 년 내내 얼지 않는 샘물이 있었으며 봄이면 할미꽃, 민들레꽃, 장미꽃외에도 이름 모를 각종 꽃들이 만발한다. 여름이면 강가의 푸른 잔디 또한 좋았다. 가을이 되면 샘물터에서 물고기를 한 소래씩 잡아다 철엽을 했다. 집에서는 셋째 삼촌이 사온 축음기도 띠우며 놀았는데 축음기판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 인상 깊은 곡은 왕서방 련서와 농부가다. 이것이 바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오매에도 그리던 리상촌의 평화롭고 오붓한 일가일 것이다.  나는 이때를 회억 할때면 이 노래가 생각 난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동산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굿 불굿 꽃대궐 차리인동네 그곳에서 살던때가 그립습니다  할아버지는 우리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분이시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총명과 지혜 근면과 의지로서 빈손으로 장풍동에 와 근40년간 고전 분투하여 우리에게 공부할 기반을 닦아 주었다. 할아버지는 밭이야 말로 인생사의 근본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토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억척같이 황무지를 개간하시였고 돈만 생기면 밭을 사들이었고 아무리 흉년이 라도 밭 한 뙈기는 사야 한다는 철칙을 가슴에 품고 있은 분이다.  벼슬길에는 자식들에게 희망을 두지 않고 다만 그 다음 항렬 즉 镛자 항렬 에서 인재가 나오리라는 족보의 명시를 굳게 믿었으며 손자들을 공부시켜 부귀와 공명을 이루려 했다. 할아버지는 공부 잘하는 손자들을 보면서 자신의 所願인 ‘進士’길이 눈앞에 보이시는 듯 자신이 벼슬한 것보다 더 기뻐하시며 손자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토지 개혁 이후 에도 더 많은 밭을 사들이었다. 이는 좀 잘못된 선택이였으나 집체 생산전까지 가정수입의 주요 원천이었다. 만약 할아버지의 근40여년이 피타는 고전분투가 없었다면 우리의 오늘은 암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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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10
  • [연재] 동년을 회억하여 - 머리말
    저자: 리락용(1946~현재) 전주리씨43세, 의안대군파 21대손 머리말 나는 동년을 회억하여란 제목하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숙부들에 대하여 쓰려한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별로 큰 사회적 의의가 있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천지개벽의 년대에 우리 집의 면모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기 위하여 억척같이 일하신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피타는 노력과정은 바로 연변 근대사 120 여년간에 우리민족 선배들이 연변땅에 이민하여 피땀을 흘려가며 개척하던 그 모습의 숙영이라고 생각하기에 또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력이 너무나 비장하기에 이를 우리의 후세에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였다. 그러나 당시 내가 너무 나이가 어리기에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어 유감스러운 점도 적지 않다. 시대배경: 기사년에 기근과 이민 간토(墾土)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여 나의 귀에까지 익숙한 기사년 재황과 이민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하려 한다. 기사년 재황은 전례없는 특대 재황으로 이 재황은 조선 이민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청나라때에 興京이동 伊通이남 두만강 이북 연변땅을 포함하여 동북의 동남 쪽 장백산 지구를 청나라가 흥기한 구역 성지라 봉쇄하여 인가가 없는 황량한 곳으로 200여년간 비어있었다. 1860년부터 1870년까지 11년사이에 조선북부에는 대 한재와 대 충재가 련이 어 들었다. 특히 1869년(기사년)에 함경도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등6읍에 덮쳐든 한재는 유사이래 보지못한 특대 한재였다. 이리하여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는 대폭 이민이 발단이었다. 10여년간 련속된 재해로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북도 사람들이 유일한 삶이 길이었다. 그러나 청나라와 조선 조정에서는 강안에 숱한 포막을 세워놓고 월강을 금지시키며 월강하다 잡힌 사람들을 월강죄로 마구 목을 따 버렸다. 그러나 계속 이민자들이 증가하자 조선 조정에서 월강금지령을 페하고 청정부에 월강자들에게 지권을 주며 강북으로 이주를 승인하라 요구했다. 1881년에 청 정부는 동북지방의 최후의 금단지역인 길림성 동남부의 봉산위장을 개방하고 훈춘에 招墾總國을 설치하고 이민 실변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청정부는 연변지구에 이미 다수를 차지한 조선사람을 축출할 수 없고 개간한 토지를 황무지로 만들 수도 없다고 여겨 집조를 발급하며 조선 이주민을 리용하여 연변을 개간하기로 하고 또 황무지 개간을 고무하기 위하여 초기에는 ‘훈춘 녕고탑조간(照垦)장정’을 반포하고 당해에 토지를 받은 호들이 땅세를 면제하고 소작료는 매상에 600문씩 받기로 하되 반드시 5년 후에 갚게하며 그 나머지는 한 푼도 풍기지 않기로 하였다. 그 밖에 간민들에게 부림 소를 대주고 기한을 정하여 빛을 갚게하는 등 우대정책을 실시하였다. 1885년에 봉금령이 취소되고 월강금지령이 페지되자 수 천 수 만이 조선인들이 터진 조수마냥 연변으로 밀려들어왔다. 하여 각지에 조선족마을이 생겨났다. 청나라 는 변방보위 수요로 군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족 이주민을 받아들이고 관리 기구인 월간국을 세우고 지금 龍井市 智新郷에 和龍峪(화룡욕) 통상국을 앉히고 두만강 이북 길이 700여 리 너비50여 리에 달하는 구역을 조선족 간민의 개간 구역 으로 확정하고 행정관리를 강화하였다. 이는 연변 역사와 조선족 역사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간민들은 두만강 연안으로부터 해란강이북 부르하통하이북 그리고 훈춘 이북으로 끊임없이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두만강기슭의 화룡현 숭선으로부터 연길현 광제욕에 이르는 기름진200리 땅이 전부 간민들에 의하여 개간 되였을 뿐만 아니라 해란강이북 지역과 가야하 연안도 대폭 개발되기 시작했다. 1900년에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로씨아는 동청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북에 처들어 왔고 잇달아 훈춘을 점령하고 연변지구와 조선북부지방을 강점했다. 이에 경황 질색한 연변 지방 관리들과 군관들은 길림으로 도망했다. 그 기회에 연변지구에 더 많은 이민들이 이주하였다. 청나라정부에서 황산지를 백성들에게 팔게 되자 외지에 관리들과 군벌 대 상인들은 파리떼처럼 달려들어 비옥하고 편리한 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였다. 그들은 권세를 등대고 청장(토지를 재주는)인원들에게 뢰물을 먹여 많은 황무지를 차지하였는데 어떤 자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광활한 황무지에 말뚝을 박아가면서 토지를 점유했고 또 어떤 자들은 토지개간회사라는 빈 간판을 내걸고 한 지방의 토지를 독차지했다. 이렇게 황무지를 헐 값으로 차지하여 일약 벼락 대지주로 된 지방의 관리 군벌 대 상인들을 점산호(占山戶) 라하였는데 기실은 占山虎였다. 이 기회에 외지에 한족들이 관청과 점산호들에게 뢰물을 먹이고 점산호들이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점산호들로부터 몇 백상이 황무지를 얻어 이민들게 주어 개간하여 대 지주가 되었다. 또 지방관리들의 신임을 얻은 어떤 자들은 점산호를 대신하여 조선족 간민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소작료를 받아들이며 그 중에서 어부지리를 얻어 점차 지주로 되였다 또 일부는 부유한 조선인 상인들인데 그들은 무역과정에서 강북의 넓고 비옥한 황무지와 헐한 땅값에 유혹되여 조선의 재산을 전부 팔고 남녀 노비들까지 거느리고 이주하여 일약 수 십 상의 토지를 소유 한 지주로 되였다. 봉금령이 페지로 손에 한푼 땅도 없는 조선 농민들이 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이 “주인 없는” 땅에 몰려와 개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앞에서 언급 하다 십히 외지에 한족들이 연변에 들어와 관리들에게 뢰물을 처먹이고 땅을 차지 하였다. 뢰물을 처먹은 관리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마치 자기 땅인 것처럼 저 벌판은 마씨의 땅이오 저 산골 짜기는 장씨의 땅이라 하면서 말뚝을 밖아 지역(地畔)을 정해주고 명함을 찍어주어 땅이 주인이라 하였다. 이렇게 그자들은 하루 아침에 거대한 땅을 차지한 폭팔호로 둔갑되여 적수 공권으로 고향을 버리고 생계를 찾아 온 이민들이 피땀을 빨아 먹기 시작 했다. 이 신생 지주들은 땅의 정도에 따라 6할5할4할을 정하여 이민들에게 개발권을 주었다. 례를 들어 6할이면 한상을 개간하면 60% 를 5할이면 50%를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도 이민들은 계속 이 땅을 개간했다. 이 신생지주들은 이민들에게서 받아들인 땅을 다시 이민들에게 팔아 먹고 또 다른 곳에가 이와 같은 만행을 계속 저질렀다. 어떤 곳에서는 이민들이 땅을 개간해도 자신의 땅은 한푼도 없이 모두 지주의 땅으로 되여 이민들은 자신이 개간한 땅에서 소작짓고 살아야 했다.이러한 폭발호(暴發戶)의 전형은 태양벌을 독점한 악패지주 한씨다. 해방 후 그놈은 인민들이 손에 처단되였다. 연변땅에 지주는 대 다수 이렇게 산생되였으며 성남의 마통새도 번씨도 장씨도 모두다 이러한 지주다. 이것이 연변에 조선족 지주가 아주 적은 원인의 하나다. 이렇게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버리고 이민하는 조선 사람들이 행렬은 처음에 는 기황으로 시작되였으나 그후에는 일본놈들이 착취와 압박으로 그 규모가 점점 더 크게 전국적으로 계속되였다. 함경도 사람들은 도보로 연변과 장백현 집안현 경내로, 평안도 사람들도 도보로 료녕성 동부로, 그리고 배를 타고 이민한 충청도와 전라도 사람들은 료녕성내지로, 강원도 경상도 사람들은 길림성 흑룡강 성내지에 집단 이민하고 그곳에 부락으로 정착해 살았다. 이 이민 조선 사람들은 그후 동북 항일 투쟁 최전선에서 싸우며 가송찬미할 력사의 한 페지를 썼고 또 중국 해방전쟁에서도 역시 커다란 불멸의 공적을 쌓았다. 여기서 지명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몇가지 첨가하면 이민들이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연변땅은 인연 없는 산구로 이름(지명)없는 곳이었다. 이민들이 대량 몰려 오기 시작하자 청정부는 길림성에 이민국을 설치하고 이 땅을 관리하 려고 이민국 관리 몇 명을 보냈다. 이들이 연변에 월간국을 세울 교통이 편리하 고 관리가 편리한 곳을 찾다가 ‘국자가’을 지정하고 지명을 다시 지으려고 고심하던중 한 관리가 길림성이 연장이라 연자에 길림성이 길자를 붙이여 연길이라 함이 어떠한가 하였는데 모두들 그 이름이 의미있고 신통하다 하여 연길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일설이 있다 。 그리고 연길은 그때 사방이 산으로 둘려 싸인 분지인데 바람이 불지 안는 고요한 때면 연기와 안개가 덮인 곳이라 煙集崗이라 하였는데 훈춘에 있던 招垦总局이 이곳에 오면서부터 土地局있는 거리라 하여 局子街 라 하였다가 다시 煙集을 한어의 동음자로 延吉(연길)이라 하였다는 일설도 있다. 여하튼 연길이라는 지명은 1900년 경에 지어진 이름이다. 마치 최근 烟集河를 延吉河라고 하듯이 고친것이다. 또 하나 왕청이라는 이름은 그때 왕청땅에는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왔는데 함경도의 하천들은 모두 동이나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 왕청의 하천은 모두 서쪽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왕청같이 강하천이 흐른다 하여 왕청이라 지었다 한다. 일반적으로 지역들이 특점에 따라 지은 이름이 많은데 이런 이름로는 나의 고향에 룡정 성남 성동 회령촌 장풍동 샛골등이다. 여하튼 급시에 관리들이 기발한 생각으로 지은 이름이나 민간에서 지역의 특점에 따라 지은 이름이나 모두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다. 또 이 지명들만 들어도 이 땅의 력사에는 모두 이민들이 발자취가 고스란히 새겨져있는 비장한 땅이며 이 땅의 력사는 이민들이 력사며 이 땅의 주인 역시 이 땅의 력사를 창조한 그들이였다. 그리고 하나 더 쓰면 두만강, 두만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내려 오다가 자신이 홍수시에 만들어낸 충적사 틈으로 새여 들어가 종적을 감추고 도망가 몇 십리 흐르다가 다시 돌틈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진면모를 자랑하며 700리 두만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최초의 두만강의 이름은 도망 갔다고 도망강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이 가상하지 않다고 여겨 한 선비가 음이 비슷한 두만강이라 지어 주었다 한다. 이러한 이름은 조선민족이 아닌 어떤 민족이 지을 수 없는 이름이다. 또 이러한 이야기는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지만 백년 남짓한 이민사에 깃든 이야기로 誤傳되거나 무중생유(無中生有) 가능성이 적다고 본다. 나는 이렇게 우리 조상들이 력사가 깊이 새겨져 있는 이땅의 력사를 모두 소중이 여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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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10
  • 오묘한 세계대백과(26)
    남극의 극주 남극의 극야 “극주”란 하루 24시간이 모두 낮인 것을 말하고 “극야”란 하루 24시간이 모두 밤인 것을 말한다. 지구상의 남극과 북극이 바로 아주 기이한 지방으로서 그 곳에는 극주와 극야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이는 무엇때문일까? 그것은 지구가 태양을 돌 때 몸의 한쪽면만 태양과 마주하고 돌기에 태양이 지구표면을 비출 때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3월부터 9월 사이의 한동안 태양은 줄곧 북극의 낮은 곳을 비추기에 이 때의 북극은 계속 낮이 되고 남극은 매일 밤이 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9월부터 다음해의 3월 사이에는 태양이 남극의 낮은 곳을 비추기에 이 때면 북극지구는 매일 밤이 되고 아울러 남극은 24시간 모두 낮이 될 수밖에 없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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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05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6)
    쾰른대성당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독일, 지점: 쾰른시 함의: 독일에서 제일 크고 세계에서 제일 높으며 수건시간이 가장 긴 성당임 쾰른대성당(科隆大教堂)은 역사가 유구한 나일강반의 쾰른성에 위치, 성당은 세계 종교건축사상의 3개 제일 중 하나로 독일에서 가장 큰 성당이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당으로 건축역사가 가장 긴 성당이다. 쾰른대성당의 가치는 소장품이 이름나서만이 아니라 더 유명한 것은 무게가 24톤에 달하는 대형 추시계와 10세기 시대의 황금갑삼왕감(黄金匣三龛)이 있어서이다. 6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쾰른대성당은 하나의 정교한 예술품과도 같이 신성한 빛을 뿌리고 있으며 유럽의 3대 성당 중의 하나로 꼽히우고 있다. 곡절적사연이 깃든 성당 쾰른대성당은 1248년에 낡은 성당자리에 재건한 것이다. 일찍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시대에 성당의 개조공사는 중지되었었다. 중지됐던 시간은 무려 3개 세기에 거쳤다. 그 뒤 프로이센국왕 빅토르 윌렌 4세의 추동하에 이 성당은 1880년에 드디어 준공되었으며 전후의 시간은 무려 632년이 걸렸다. 뾰족한 쌍탑 쾰른대성당의 벽체는 모두 가공된 돌로 쌓여졌으며 부지면적이 약 8000평방미터이고 외관은 웅위로우면서도 그 셈세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뾰족한 쌍탑은 정문벽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높이가 157미터에 달해 유럽에서 가장 높은 뾰족탑으로 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치 두 자루의 예리한 검이 구름속에 꽂혀 있는듯 하고 네 주위의 무수한 작은 뾰족탑들이 서로 호응하여 이 쌍탑으로 하여금 더욱 뚜렷하게 만들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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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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