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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년간 독일이 지불한 전쟁배상금은?
    [동포투데이 김현나 기자] 최근 그리스는 옛 장부를 들춰내며 독일에 2차대전 문제로 도합 1600억 유로를 배상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로 하여 원래부터 긴축정책으로 긴장상태에 있는 두 나라 관계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중국 신경보(新京報)가 22일 보도했다. 그리스의 이같은 요구에 대해 독일정부는 즉시 부정했다. 독일정부 대변인 자이베르트는 기자회견을 통해 “독일은 줄곧 나치독일이 유럽국가들에 입힌 재난을 가슴깊이 새기고 있고 이에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독일은 언녕 2차대전 피해국들에 전쟁 배상금과 보상성 배상금을 지불했다”고 밝혔다. 하다면 구경 그리스와 독일의 금전분쟁이 끝난 것인지? 또 2차대전이 종결된 후 지금까지의 70년간, 독일이 지불한 2차대전 배상금은 얼마나 되는지?   배상담판 제2차대전에서 독일이 투항한 후, 18개 전승국들은 1945년 가을 프랑스 파리에서 회의를 가지고 독일의 2차대전 배상문제를 논의했다. 회의는 각국이 자국 영토내에 있는 독일의 해외자산을 몰수할 권리가 있다고 결의하고 또 배상에서 각 국간의 분배비율을 제정했다. 그리스도 파리 배상회의에 참가했으며 분배방안 가운데서 4.35%의 물질배상과 2.7%의 기타 방식의 배상을 받기로 했다. 헌데 독일이 서쪽점령지역과 동쪽점령지역으로 나뉘고 또 세계가 냉전시대에 진입함에 따라 배상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동 서 두 지역이 부동한 배상운명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동쪽지역에서 소련은 전쟁 가운데서 손실된 기초시설과 공업설비들이 많았기 때문에 동부독일에 실물배상과 함께 그것을 소련에까지 수송해 줄 것을 요구했다. 대규모의 공장 철거이주는 3년간 지속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소련이 동쪽점령구에서 철거해 가면서 획득한 배상은 동쪽지역 모든 자본설비의 35%-45%에 달했고 강철, 화공 등 일부 관건적인 공업분야에서 동쪽점령구는 거의 모든 공업설비들이 회손되었다. 이로부터 민주독일(동부독일)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하락했다. 1953년 소련은 동독이 아직 갚지 못한 배상금 25억 7300만 달러를 지워버리고 정식으로 동독에 대한 모든 배상요구를 포기한다고 선포했다. 당시 소련은 동독으로부터 이미 도합 42억 9200만 달러(1938년 환율로 계산한 것임)를 배상받았으며 그 가운데에는 공업과 설비 철거이전도 포함됐다. 미국과 영국의 서쪽점령구에 대한 배상요구는 상대적으로 너그러웠다. 그것은 배상으로 인해 서부독일의 경제가 파괴되고 그로부터 서독이 유럽의 부담으로 전락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쌍무협정 1953년 동맥국들은 “런던채무협정”을 체결하고 독일 채무의 절반을 감면했다. 1990년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연방과 민주독일은 독일 관련 통일적인 “최종 독일문제 해결 조약”(2+4조약)을 체결, 4개 동맥국들은 이로부터 독일에서 보유하고 있던 권리와 의무를 모두 포기한다고 선포했다. 이에 앞서 1960년, 독일과 여러 전승국들은 각기 쌍무협정을 체결하고 배상을 진행해 왔다. 협정에 따르면 독일은 그리스에 도합 1억 1500만 마르크를 배상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 덴마크 등 국가에도 배상한다. 20세기 70년대에 독일은 폴란드에 14억 마르크를 배상했고 “2+4 조약” 체결(1990년) 후, 독일은 또 소련에 180억 마르크를 지불했다. 그 가운데에는 나치에 의한 강제노역에 대한 배상도 포함됐다. 법률적으로 보면 “2+4 조약”으로 동맥국들은 독일에 대한 배상요구를 포기했고 그리스정부도 이 조약을 비준했기 때문에 독일과 그리스 양국간의 2차대전 배상문제도 그때에 이미 끝난 것이다. 헌데 그리스 측은 독일이 1960년에 지불한 배상금은 최초배상금에 불과하며 나머지 배상은 1990년 동, 서 독일이 통일된 후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이 문제에서 국제사회는 보편적으로 독일을 지지하고 있다. “2+4 조약” 담판에 참가했던 유럽의회 구라더 의원은 목전 그리스가 아무리 곤경에 빠졌다 해도 지금에 와서 독일에 2차대전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형편없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민간배상 독일연방이 설립된 후 배상의 주요 대상은 정부로부터 미간의 전쟁피해자들로 전이됐으며 독일은 적극적인 배상을 통해 독일의 국제형상을 재수립하려 했다. 1948년, 이스라엘은 건국하자 독일에 배상을 요구했다. 비록 이때 독일연방도 전쟁의 페허속에서 회복되지 못했지만 당시의 총리 아데나워 정부는 적극적으로 배상에 나섰다. 1951년 9월, 아데나워 총리는 국제사회를 향해 정식으로 독일연방정부는 나치정권이 범한 죄행에 책임을 질 것이며 이스라엘과 유태인세계에 배상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1952년, 독일과 이스라엘은 “룩셈부르크조약”을 체결한다. 조약은 독일연방이 이스라엘정부에 가치가 30억 마르크에 달하는 배상을 지불하며 유태인 “배상요구연합회”에 가치가 4억 5000만 마르크의 배상을 지불해 세계 각국에서 나치의 박해를 받은 유태인들 구조에 쓰도록 하며 배상 지불기한은 12년~14년으로 규정했다. 그 후 독일은 에누리 없이 조약을 집행했고 1966년에 배상을 완성해 이스라엘 경제의 도약을 촉진했다. 이 기간, 독일은 두 가지 법률을 제정, 배상이 법에 따라 진행되도록 담보했다. 1956년에 독일은 “독일연방배상법”을 통과하고 개인배상을 연방정부와 각 주 정부에서 공동 부담토록 했으며 1957년에 연방의회는 또 “연방재산반환법”을 통과해 전쟁피해자들이 독일법정을 통해 자기재산을 돌려받는데 법률적 의거를 제공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1960년에 전쟁피해자의 개인배상은 서부독일 재정지출의 7.48%에 달했고 1965년 9월까지 심사를 거쳐 지불한 개인배상금은 182억 5000만 마르크에 달했다. 강제 노역자들에 대한 배상 배상이 진행됨에 따라 2차대전 피해자들에 대한 독일의 배상 주체는 정부만이 아니었다. 기업에서도 배상에 적극 참가했다. 2000년에 설립된 “기념, 책임과 미래” 기금회 가운데서 6500개 독일 기업이 51억 마르크를 나치에 의한 강제노역자들에게 기부했다. 그 대부분 기업들이 2차대전 후에 설립되었으며 종래로 나치 강제노역자들을 쓴 적이 없었다. 독일의 일부 유명 대기업들은 2차대전 기간 독일군에 의해 끌려온 강제노역자들을 고용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 IG법본회사는 자기의 집중영도 갖고 있었다. 지난 세기 50, 60년대 유태인 “배상요구연합회”는 유태인 노무자들을 대표해 독일 일부 대기업들을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독일 IG법본회사는 20여 개 국가로부터 끌려온 노역자들이거나 그 가족들에게 도합 2700만 마르크를 배상했고 독일 군공기업 크루프회사는 1000만 마르크를, 독일 통용전기회사는 400만 마르크를, 지멘스사에서는 500만 마르크를 배상하며 만일 부족하다면 최고 200만 마르크를 더 증가하겠다고 밝혔다. 50, 60년대 독일 대기업들의 피동적인 배상과는 달리 80년대 이후, 독일 기업들은 주동적으로 회사의 역사를 반성하고 배상했다. 1988년 독일 벤츠회사에서는 “배상요구연합회”의 요구에 따라 2000만 마르크를 2차대전 기간 벤츠회사에서 강제노역한 노무자들에게 배상했고 1988년 폭스바겐 자동차회사에서는 역사학자들에게 의뢰해 2차대전 기간 회사에서 집중영에 수감된 죄수들을 노역에 쓴 사실을 조사하게 하고 회사역사에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1991년에 “배상요구연합회”에 1200만 마르크를 지불해 나치 강제노역자들에게 배상하게 했다. 독일 70년간 640억 유로 배상 독일연방정부는 1986년 11월까지 독일이 여러 가지 전쟁배상금 도합 770억 7000만 마르크를 지불했다고 선포했다. 물론 이것으로 배상이 끝난 것은 아니다. 독일은 1990년 동서독 통일 후, 선후하여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우크라이나, 백러시아와 모스크바에 나치 강제노역자 배상기금회를 설립하고 15억 마르크를 배상했다. 1998년에는 체코에 설립한 “독일미래기금회”에서도 일부 자금을 나치 강제노역자들에게 지불했다. 그전의 배상은 주로 유태노역자들에게 지불했지만 2000년에 독일은 또 “기념, 책임과 미래” 기금회를 설립하고 주로 중동유럽국가 나치 강제노역자들에게 배상했다. 2000년 7월 17일, 독일, 미국, 이스라엘, 러시아, 폴란드, 체코, 우크라이나, 백로시아 등 동유럽 국가의 대표들이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나치 강제노역자 배상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에 따르면 독일은 2차대전 기간 나치에 의해 강제노역을 한 생존자 및 그 후대들에게 도합 100억 마르크(약 48억 달러에 해당)를 배상하기로 하고 독일 정부와 기업이 각기 50%씩 부담하기로 했다. 이것은 독일정부가 나치피해자들에게 제공하는 마지막 배상이었다. 2000년 9월 “기념, 책임과 미래” 기금회가 정식으로 배상업무를 가동, 7년간 중동유럽 지역 160만명에 달하는 2차대전 노역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했다. 2007년 6월 12일, 독일 “기념, 책임과 미래” 기금회는 총리관저에서 의식을 가지고 7년간의 나치 강제노역자 배상사업을 종결한다고 선포했다. 이로부터 독일은 끝내 2차대전의 배상을 끝냈다. 독일 메르켈 총리는 2007년에 “독일은 2차대전 후 약 640억 유로를 배상금으로 지불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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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2
  • [인터뷰] “자신의 미래 책임지는 인생 살고파요”
    ▲ 대한민국의 VJ이자, MC, 탤런트 심민(본명: 심지유)씨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대한민국은 경쟁사회이다. 경쟁은 경제·문화 및 각 분야별로 치열하다. 또한 치열한 경쟁속에 경제와 사회가 발전한다. 하다면 끝없는 경쟁과 도전속에서 어떤 인간 자세가 바람직할까? 최근 어느 한 행사에서 만난 30대 초반의 VJ이자, MC, 탤런트 심민(본명: 심지유)씨는 이를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이라 했다. 경북 구미출신으로 올해 31세인 심민씨는 대한민국의 톱스타로 될만큼 잘 나가는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2003년 한국 음악 전문채널인M.net의 VJ 선발 대회에서 금상을 획득할만큼 실력을 갖고 있었으며 방송계, 가요계와 배우계를 두루 휩쓸면서 환경에 잘 적응해 나가기도 했다. 어릴 때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자주 전학을 하면서 낯선 환경에 자주 어울리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또한 초등학교 3학년 전까지는 아주 소극적이고 목소리도 작은 그런 아이었지만 지금은 몹시 활달(자신의 평가)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한다. 2008년부터 드라맥스 “대박인상”의 주역으로 뛰다가 다시 기업행사를 사회하기도 하고 때로는 여행도 하면서 일상을 보내다가 오는 4월부터 OCN로부터 드라마 촬영 요청이 있어 최근 그 준비중이었다. 취미생활은 여행과 춤추기이고 현재 배우고 있는 외국어로는 중국어로 성조(声调)가 어렵긴 해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어 이에 흠뻑 빠져들고 있다. “갖고 싶은 것이 당연히 많지요. 하지만 30살이 되고 보니 저의 인생에 대한 책임감이 생기더라구요. 또한 앞으로 어떤 일이 들이 닥칠지도 모를 세상이니 그 상황상황마다 흔들리지 않고 유연하게 받아 들이는 성격을 키우기에 노력하고 있어요.” 한편 팬들에 한해서는 항상 가까히 다가오는 심민씨었다. 이 중 부산에서 살고 있는 장한나라고 부르는 팬과는 평상시 계속 연락이 오고 가고 하는 사이었다가 최근 전화번호가 바뀌면서 잠시 연락이 중단된 상태였다. 그러면서 몹시 장한나를 보고 싶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심민씨는 한마디 했다. “한나야~ 잘 있었어?” …… “결혼은 했는지요?…” “아직은요……” 심민씨는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타입, 자신의 앞날을 남자한테 의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앞날은 자기 자신이 책임진다는 그런 연예인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포기하고 “싱글”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거래하는 남친이 있었고 딱히 결혼을 상대로 원하는 남자라면 배울 점이 있는 자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배우로 된 것이 잘되었다 싶을 때는 엄마가 좋아하실 때이고 반대로 힘들 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에 혼란이 올 때라고 말하는 심민씨는 변신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케멜레온 같은 모습이고 유지하고 싶은 것이라면 자기 자신의 원색을 지키는 것이다. 귀엽고 활발하고 총명까지 겸하고 있는 재간둥이 연예인 심민씨 ㅡ 그녀가 경쟁이 치열하고도 생존공간이 좁은 한국사회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미래를 책임과 더불어 유망한 연예스타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 사람들
    2015-03-22
  • [인터뷰] “험상궂고 무뚝뚝”? 아니, 마음은 따뜻한 남자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한국 영화 혹은 뮤직비디오에서 늘 조폭역을 담당하며 험상궂은 형상으로 우리 앞을 다가온 배우가 있다. 바로 전라도 출신으로 하냥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또한 전라도 사투리에 애정을 느낀다는 오상훈씨이다. 달갑지는 않았으나 영화나 뮤직비디오에서 늘 조폭이나 사회 최하층 인물로 등장해서인지 이것이 결혼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오상훈씨는 “조선명정탐”, “청담동에 살아요” 등을 통해서는 새로운 이미지를 부각하기 시작하고 있다. 일전 이런 오상훈씨를 만나 무릎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아래의 것은 오상훈씨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Q : 생년월일을 말씀드린다면? - 1966년 9월 1일이다. Q : 직업은? -영화배우 겸 무술감독 Q : 취미생활을 소개한다면? - 운동이다. Q : 자신의 특기로는? -합기도 7단 Q : 어릴 때는 어떤 소년으로 자랐고 어른이 돼서는? -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경기도 안성에서 체육관을 운영하였다. Q : 배우로 된 계기를 소개한다면? -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자신의 특기인 무술을 보여줄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다. 어릴 때 이소룡과 성룡, 황비홍 그리고 이연걸 등이 우상이었다. Q : 영화배우로 데뷔는 언제었고 출연작품으로는? - 1993년 영화 싸울아비 신인공채 모집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데뷔하였다. Q : 현재 가장 갖고 싶거나 원하는 것은? - 결혼해 가정을 이루는 것 Q : 처음 촬영할 때의 기분은? - 처음엔 영화가 아주 낮설었다. 신인은 아마 다 그랬을 것이다 많이 긴장되고 NG도 많이 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추억거리이다 그 때 같이 영화에 출연했던 개그맨 서인석 형님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인연으로 지금도 서인석 형과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Q : 배우로써 항상 마음(신경)쓰고 있는 부분은? -항상 연기에 배고프다. 작은 배역은 없다고 생각한다. 작은 배우만 있을뿐이다. 지금도 항상 연기에 목마르다. 어떤 역이든 주어지면 최선을 다한다. Q : 배우를 하면서 하길 잘했다 싶을 때는? - 배우는 거울이다. 배역에 충실해서 시나리오에 맞는 그 역할을 거울처럼 똑같이 연기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완벽히 소화했을 때 비로소 배우로서의 직업에 만족한다… Q : 반대로 가장 힘들 때는? - 역시 배우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배역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난 메니저나 소속이 없어 배역이 오길 기다리는 형편이다. 물론 많은 출연을 하지 않기에 항상 배고프고 목마르다. 큰 영화든 작은 영화이든 내가 필요하다고 부르면 두말없이 달려간다. 그게 배우의 일이고 사명이다. 배우는 항상 남의 인생을 연기한다. 가끔씩 나 자신도 나를 모를 때가 많다. 배역에 심취하다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Q : 현재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는(제목, 역)? - MBC 드라마 “태양의 도시”중 소영 아빠로 출연중이다. 수많은 배신속에 그도 점점 배신자로 변해가는 역으로 출연한다. Q : 지금 가장 갖고 싶거나 원하는 것은? - 결혼해 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Q : 좋아하는 여성의 타입으로는? - 하하하… 난 늙다리 총각이다…사실 지금껏 여자 한번 변변히 사귀어보지 못했다. 얼굴이 험악하지도 않는데(사실 실제로 보면 귀엽게 생겼다)…그동안 배역이 그래서인가? 아직 여자가 없다. 전라도 고창출신인데 사투리가 심하다. 일부러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 난 내 고향 말이 정겹다. 귀여운 욕도 간간히 한다. 이왕이면 내 고향 사투라를 좋아하는 여성과 만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요즘은 진짜 결혼하고 싶다. Q : 현재 사귀고 있는 여자가 있는지? - 없다. 하긴 이전에도 없었고 …… Q :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캐릭터는? - jtbc 시트콤 “청담동에 살아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역할은 험상굳은 얼굴에 착한 캐릭터였다. 그 시트콤을 통해서 나의 연기의 폭도 많이 넓어졌다. 캐스팅해준 김석윤 감독에게 난 아직도 고맙다. 그러나 그 고마움을 아직 표현하지 못했다. 사실 난 그런 표현이 아직 서투르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 드리고 싶다. 김석윤 감독은 영화 “각시꽃 투구”의 비밀에도 날 캐스팅해주신 분이다. 고맙습니다. 김석윤 감독님… Q : 이제 해보고 싶은 배역은? - 아직 제대로 나를 알릴 수 있는 배역이 없었다. 독한 연기를 해보고 싶다. 소름이 끼치도록 오싹한 연기…그 배역에 빙의가 한번 되보고 싶다. 그리고 의리있는 건달역이나 충성스런 장군역이나… 연기는 역시 배역이 우선인가 본다. 취재후기: “대한민국은 편견이 심한 나라이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그 옛날 양반과 상놈에 대한 편견, 팔자에 대한 편견, 직업에 대한 편견 및 남녀에 대한 편견 등으로 전통적으로 이에 대한 습관이 남아있는 나라이다. 오늘 취재한 오상훈씨는 열심히 노력하고 인생에 대한 자세도 흠이 없는 남자이다. 하지만 세속을 피하진 못하고 있다. 얼굴형상 때문에 자주 검문에 걸려 주민등록증을 늘 갖고 다닌다고 한다. 결혼추구도 걸림돌이 많다. “험상궂은 얼굴”? 결코 험상궂은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터푸하고 솔직하게 생긴 얼굴”이라 함이 더 알맞겠지만 세속은 그렇지를 아니하다. 편견을 깨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오상훈씨의 인생에 새로운 전성기가 도래하기를 기원해 본다.
    • 사람들
    2015-03-22
  • [인터뷰] “남도 웃기고 나도 즐겁고…”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개그맨이란 남을 웃기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의 인생은 “웃는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웃는 인생 ㅡ 참으로 부럽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웃는 인생”으로 되기까지의 각고한 노력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다 알 수 없을 것이며 그 노력의 과정은 결코 웃어온 과정만은 아닌 것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개그맨 서인석씨의 인생을 살피어 보면 단연 그것을 알 수 있다. 일전 개그맨 서인석씨를 만나 그가 개그맨 스타강사로 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어보았다. Q 개그맨으로 된 사연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면? - 처음부터 개그맨이 될 뜻이 없었거니와 나 자신이 개그맨의 인생을 살게 되리라고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군 문선대 시절 MC를 보면서 개그맨으로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후 1988년 KBS 신인무대를 통해서 자신의 개그 재질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1989년 KBS “스타탄생(지금의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그램의 대상을, 1990년 KBS 대학 개그콘테스트의 금상을 수상하면서 KBS 공채개그맨으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Q 개그맨이 된 후에는? - KBS “유모번지”, “쇼비디오쟈키”, “명랑극장”, “한바탕 웃음으로” 등 간판 프로그램을 통해 인기몰이를 했다고 할까요? 이어 1992년 KBS 연기대상 코미디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후 SBS 개국에 즈음하여 스카웃이 되어 창사공로상을 수상했다. Q 그렇게 잘 나가다가 갑자기 개그맨 활동을 접었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연은? - 아이들의 해외유학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방송을 접었다. 그러다 현재는 NGO단체인 다문화행복센터, 해외봉사(캄보디아, 필리핀) 등을 하고 있다. Q 현재 여러 정부기관과 단체에서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고 TV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 예, 미국 스타폴리오 예술 체육대학 영화연기과 교수로 초빙받았으나 현재 고심 중에 있고, 강화군 홍보대사 및 해외봉사단장 등을 맡고 있으며. TV조선 황금펀치의 고정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 시사매체인 파프리카TV의 대표를 맡고 있다. Q 다년간 각 분야의 대상을 여러번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상들을 받으셨는지? - 이렇게 저렇게 받은 상은 많지만 주요한 상들로는 “아름다운사람들” (2013년 수상 “사회공헌” 신문사), “자랑스런 대한민국 시민 100 인 대상”(2013년 수상), “평화봉사 사회공헌상”(2013년 수상. 국회 정무위원회), “사회 공헌대상”(2015년 1월. 국회문화관광 위원회)등 이다. Q 개그맨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개그맨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드릴 말씀은? - 개그맨은 남을 웃겨야 하는 직업이지요.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늘 노력합니다. 개그맨은 은퇴가 없다고 본다. 숨이 붙어 있는 순간과 숨이 멎을 때까진 늘 웃음을 만들고 웃음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 Q 개그맨으로서 강조할 사항이 있다면? - 위의 내용과 같다고 말하고 싶다. Q 이야기하고 싶은 스토리나 꿈이 있다면? -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잘한 것이 있다면 개그맨이 된 것과 현재의 아내를 만난 것, 또 다른 나를 볼 수 있는 내 아이들이 잘 자라주었다는 점이다. Q 마지막으로 더 언급하고 싶은 말씀 있다면은? - 대한민국 5000만이 활짝 웃는 그날까지 난 계속 웃길 것이다. 난 개그맨이다.우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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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2
  • 中 충칭, 세계최고 길이 5천 미터의 연을 날린다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3월 22일 11시에서 오후 5시까지 “세계 연의 수도”산동웨이팡의 연의 달인들이 5천 미터에 달하는 연을 가지고 와서 충칭 베이베이 룽후즈타이에서 날릴 예정이라고 현지 언론 화룽망(華龍網)이 보도했다. 보도에 의하면 길이 5천 미터에 달하는 이 연은 세계기네스북에 제일 긴 연으로 인정 받았으며, 2500개의 작은 연들이 하나가 되어 “중국용”을 이루고 있고, 5천 미터 길이의 연을 날리기 위해 1000근의 연줄이 사용되었으며, 일반 자가용을 매달고 하늘로 상승할 만큼의 큰 장력을 가지고 있다. 주최측에 따르면 당일 연이 하늘로 순조롭게 오를지는 일기상황을 봐야 한다고 했다. 시민들의 축복과 소원을 담은 길이 5천 미터의 초대형 연이 매시간마다 1천 미터씩 날아오른다고 계산할 때 모든 연을 다 날릴 수 있으려면 5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외에도 25미터 - 40미터의 높고 거대한 연(문어와 고래모양 등) 여섯 개를 날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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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2
  • 제2차 재한 “지원군” 열사 유해 고국에 돌아와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3월 21일, 제2차 재한(在韩) 중국인민지원군(중국군) 열사 유해 안장식이 중국 심양 항미원조열사릉원에서 장엄히 거행되었다. 중국 신화망에 따르면 이날 68명의 재한 지원군열사 영혼들이 고국에 돌아와 안식하게 됐다. 중국 민정부, 총정치부, 심양전역부대와 “6.25” 전쟁에 참가했던 노병사들과 열사가족들, 그리고 중소학교 학생 등 각계 인사 근 400여명이 고국에 돌아오는 열사 유해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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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2
  • 푸틴 중국에서 펼치는 항전승리 기념활동 참가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3월 20일 베이징에서 있은 중국 외교부의 정례브리핑에서 중국 외교부 훙레이 대변인이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중국에서 펼쳐지는 항전승리 70주년 기념활동에 참가하게 되며 이에 중국측은 환영을 표하는 것으로 밝혔다고 신화넷이 전했다. 이 날 한 기자가 러시아측은 푸틴 대통령이 오는 9월경 중국에서 거행되는 2차대전 승리 70주년 기념활동에 참가한다고 밝혔는데 이를 증실해달라고 했다. 이에 훙레이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는 중러 양국은 2차 대전 시기 아시아와 유럽의 주요 전장이었고 파시스트와 군국주의를 전승하고 2차대전의 승리를 위해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고 수차 언급하였다. 올해 양국은 모두 해당 기념활동을 거행하는바 양국 지도자들이 모두 상대국의 기념활동에 참가하게 된다. 어제 러시아 대통령 비서청 이만노브 주임은 재차 푸틴 대통령이 중국의 항전승리 70주년 기념활동에 참가하게 된다고 표했다. 이에 우리는 환영을 표한다.” 중국의 항전승리 기념활동에 어떤 국가들이 참가하며 이 기념활동에 열병식 외 어떤 다른 활동들이 있는가 하는 기자의 물음에 훙레이는 다음과 같이 표했다. “최근 중국측은 2차 대전의 주요 참전국인 아시아 국가와 기타 나라 및 유엔 등 국제조직의 지도일군들을 초청했다. 기념활동은 기념대회, 초대회, 문예야회와 열병식 등으로 진행된다.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 등 허다한 국가들은 5년 혹은 10년에 한번씩 2차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열병식을 거행해왔다. 중국측도 여러 나라들에서 진행한 작법에 따를 것이며 열병식은 이 기념활동중의 일환으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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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2
  • “꽃이 피어야 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3월 21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제7차 한·중·일 외교장관(부장) 회의에 참가한 한국 외교장관 윤병세와 중국 외교부장 왕이(王毅),일본 외상 기시다를 회견하였다. 이 날 박근혜 대통령은 한·중·일간의 경제 상호의존 및 합작을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올해는 2차 세계대전이 결속되고 한반도의 광복이 된지 70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이는 한·중·일 3국에 모두 역사적 의의가 있는 해입니다. 때문에 역사를 정시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 그 어느 시기보다도 더욱 중요합니다. 한국 속담에 ‘봄이 있어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야 봄이라 할 수 있다’란 구절이 있습니다. 이번 3국 외교장관(부장) 회의를 계기로 3국 합작의 봄을 맞이하기를 희망합니다.” 이 자리에서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시진핑(习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따뜻한 문안을 전달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중·한 두나라 지도자들의 관심과 올바른 인솔하에 현재 중·한 관계는 신속하게 발전하면서 각 영역을 통해 중요한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중·한·일3국은 가까운 인방이기에 3국은 거대한 합작 잠재력과 발전공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요인으로 중·한·관계가 엄중한 교란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에 거행되는 3국 외교부장(장관) 회의는 쉽게 마련된 장소가 아닌만큼 이번 회의가 3국 합작의 새로운 계기로 되기를 희망하며 3개 측 모두가 역사를 정시하고 미래를 개척하는 정신으로 해당 역사문제를 타당하게 처리하여 쌍변관계와 3국합작의 발전을 위해 토대를 마련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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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2
  • 중국과 세계에 영향력을 미친 마오저둥의 예언
    “학문이 있다는것은 마치 높은 산에 올라 남보다 더 많이 더 멀리 바라볼수 있는 것과 같으며 학문이 없다는것은 마치 암흑속에서 걷는 것과 같이 한치앞을 바라보기조차 힘들다! 마오저둥” 마오저둥의 예언은 억측이 아니였다. 우연의 일치는 더구나 아니였다. 그것은 풍부한 실천경험과 연박한 지식 그리고 비범한 통찰력과 현실속에 깊이 침투해 조사하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면서 쌓은 경험적 결론이였다. 중국공산당제7차전원회의에서 마오저둥은 이같은 발언을 했다. “지휘대에 올라서서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한 영도가 아니다. 지휘대에 올라서서 수면우에 드러난 보편적인 상황들만 본다면 이 역시 진정한 영도자가 아니다. 문제가 발생하기전에 바야흐로 일어나게 될 상황들을 예견하고 멀리 내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영도자이다!” 1916년 7월 25일 예언 “앞으로 20년사이에 중국과 일본간에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 1937년 7월 7일, 로구교사변을 알리는 첫 총성이 드디여 항일전쟁의 서막을 열어제꼈고 이 한방의 총소리는 20년전 24살난 한 사범생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증명했다. 1919년 7월 21일 예언 “20년후, 프랑스인들에게 골치아픈 일이 생길 것이다!” 그로부터 20년후, 프랑스인민들앞에 크나큰 치욕이 생겼다. 히틀러는1918년에 독일이 투항을 선포한적 있는 바로 그 지점, 같은 기차, 같은 차바곤에서 프랑스가 투항서에 싸인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1919년 7월 28일 예언 “일본과 독일은 세계적인 화를 불러올 것이다!” 마오저둥은 놀랄만한 관찰력으로 일본과 독일의 관계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그는 장장 20년을 앞당겨 “추축국( 心 )”의 2대 파쑈마왕들이 한통속이 되여 세계에 위해를 끼치게 될 것을 예견했다. 제2차세계대전의 폭발이 바로 이러한 예언의 철같은 립증으로 되였다. 1933년 11월 예언 “우리는 제5차 포위토벌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장개석이 중앙쏘베트지구를 상대로 제5차 포위토벌을 발동하고 있을 때 마침 마오저둥은 정치생애의 궁지(低谷)에 처해있었다. 쏘베트구역과 홍군의 안위를 위해 마오저둥이 계략을 내놓았지만 중앙에서는 결국 마오저둥의 의견을 채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5차 포위토벌”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였던 것이다. 1934년 12월 12일 예언 “적들이 준비해둔 ‘주머니’속에 기여들어가서는 안된다! ” 마오저둥은 “주머니”전문가이다. 그는 항상 계략의 주머니를 풀어 장개석이 스스로 기여들어오도록 했었다. 그런 그가 어찌 달갑게 장개석이 풀어놓은 주머니에 기여들어간단 말인가! 류백승이 말했다. “마오저둥의 지략이 없었더라면 당시 3만홍군의 앞길은 훼멸밖에 없었을 것이다.” 1935년 5월 24일 예언 “석달개가 뚫지 못한 길, 우리가 반드시 뚫고만다!” 태평천국은 증국번(曾 藩)이 이끄는 상서군의 수하에 의해 최종패배를 당했다. 장개석은 증국번을 아주 숭배했는데 늘 증국번을 모방하기를 즐겼다. 장개석은 마오저둥이 “제2의 석달개”로 되기를 바랐지만 마오저둥은 홍군을 령솔해 겹겹한 포위를 뚫고 석달개가 뚫지 못한 길을 뚫는데 성공했다. 1935년 9월 예언 “남하하는것은 출로가 없다. 1년후 당신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마오저둥과 장국도(   )는 함께 “중국공산당제1차대표대회”에 참석한적 있는 원로이다. 이들은 장정의 길에서 회합한후 다시 두갈래로 갈라져 각기 제 갈길을 갔다. 장국도와의 분렬로 인해 마오저둥은 장개석의 포위권을 뚫고난후 일생중 가장 암흑했던 시기를 보냈다. 1936년 10월 9일, 홍군의 3대주력이 합류하고 장정은 결속되였다. 1936년 7월 15일 예언 “중국은 독립된후 대규모로 외자를 끌어들일 것이다!” 새중국이 건립된후 처음으로 끌어들인 외자는 쏘련정부에서 제공한 정보대부금 3억딸라였다. 그후 중국인들은 국제적채무를 갚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마오저둥의 영명한 예견은 후일 등소평에 의해 실현되였다. 1994년, 중국은 이미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외자를 많이 보유한 국가로 성장했다. 1938년 5월 예언 “중국의 항전은 7~8년이 소모될것이다!” 성사원의 회억에 의하면 마오저둥의 《지구전을 논함》이라는 문장이 발표되기전, 주은래는 이미 문장의 기본정신을 백숭희에게 소개했다. 백숭희는 문장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는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있어서 최고의 전략방침으로 될 것이라고 했다. 《지구전을 론함》을 두고 백숭희는 “작은 승리를 모아 큰 승리를 이끌어내고 공간을 시간으로 바꾼다.”라고 규납했다. 이는 군사위원회를 통해 전국에 널리 전파되였고 항일전쟁중의 전략적지도사상으로 되였다. 과연 8년의 간고분투끝에 일본은 종국적으로 투항을 선포했다. 1938년 10월 예언 “장백륜은 반드시 돌멩이를 들어 자신의 발등을 깔 것이다!” 2차대전전, 영국의 수상인 장백륜은 정치가의 리성과 상인의 자사자리를 내세워 전쟁미치광이 히틀러를 대처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장백륜이 들어올린 돌멩이는 쏘련인들의 머리꼭대기에 던져진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등을 내리친격이 되고말았으며 그의 정치생명도 뿌리채 뽑히우는 격이 되여버렸다. 1939년 9월 23일 예언 “루즈벨트는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가하도록 할 것이다!” 연안의 작은 움막에서 마오저둥은 2년이나 앞당겨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 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다. 이는 중국인민들이 항전에 대한 필승신념을 수립하는데 중요한 의의로 되였다. 1959년 3월 16일 예언 “우리 군의 장래 출로는 중원에 있다!” 7년후, 마오저둥은 3갈래 대군을 중원에 파견해 정권쟁탈에 나섰으며 전국적인 전쟁의 승리를 확고히 다졌다. 1942년 7월 2일 예언 “제2전쟁터가 있으면 1년내에 독일을 물리칠수 있다!” 구라파대륙이 제2의 전쟁터를 개척하기만 하면 독일을 물리치는데 1년정도의 시간이 소요 될 것이라는 마오저둥의 예언대로 제2의 전쟁터는 1944년 6월에 개척되였고 독일은 이듬해인 1945년 5월에 패배를 당했다. 1945년 8월 13일 예언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인들이 히로시마(  )에 첫 원자탄을 투척한 7일후, 마오저둥은 단언했다. “원자탄은 결코 전쟁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마오저둥의 예언은 헛된 것이 아니였다. 오늘날까지 원자탄의 습격을 받은 국가는 일본이 유일한 나라이다. 1949년 12월 9일 예언“향항문제는 협상방법으로 해결 될 것이다!” 40년대부터 마오저둥은 향항과 오문 나아가서 대만문제를 해결할데 관한 기본사로를 세우고있었다. 즉 문제의 해결에 급급해하지 않고 향항과 오문의 력사와 현상태를 충분히 존중하는 전제하에서 협상을 통해 평화공존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였다. 오늘날, 향항과 오문이 순조롭게 회귀한 것은 마오저둥의 영명한 예견을 잘 반영하고있다. 1949년 3월 예언 “일부 공산당원들은 사탕포탄앞에 무너질 것이다!” 1952년 2월 10일, 사탕포탄의 유혹을 못이긴 류청산, 장자선이 드디여 정의의 총구앞에 쓰러졌다. 이는 수십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부패를 반대하고 청렴을 창도하는 전형으로 손꼽히고있다. 1955년 1월 15일 예언 “기본립자도 분해할수 있다!” 물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는 없었지만 마오저둥은 신기하에도 20년후 물리학의 발전추세를 예측했다. 1978년, 하와이에서 거행된 “제7기 세계립자물리학토론회”에서 노벨물리상획득자는 기본립자의 이름을 “모립자”로 지을 것을 제의했다. 1956년 6월 예언 “높은 협곡은 호수에서 시작된다!( 高 出平湖)” 마오저둥은 장강삼협에 관한 전망계획을 세웠지만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는것을 보지 못한채 서거되였다. 1992년 4월 3일, 제7기인민대표대회 제5차회의에서는 절대적인 우세로 “삼협공사의안”이 통과되였다. 현재 삼협공사는 시공중에 있다. 1958년 6월 21일 예언 “원자탄, 수소탄, 대륙간유도탄은 10년내에 만들어낼수 있을것이다!” 1960년, 쏘련에서 전문가를 철수하고 설계도를 가져가자 일부 외국인들은 “중국은 20년사이에 아무런 원자탄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중국은 10년사이에 원자탄뿐만아니라 수소탄, 중성자탄까지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1958년 9월 5일 예언 “대고락이 나서면 좋은 점이 있을 것이다!” 대고락(戴高 )은 경상적으로 프랑스의 해외식민정책을 위해 변호하며 적극적으로 랭전을 추동한 장본인이다. 때문에 국제여론은 보편적으로 이같은 정치국면의 변화에 의해 구라파가 우회전할것이라고 인정했지만 마오저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대고락이 나섬으로 하여 구라파중립주의의 발전을 추동하고 구라파가 미국을 떨쳐버릴수 있다고 단언했다. 역사의 발전은 드디여 마오저둥의 이같은 예언을 실증했다. 1962년 1월 30일 예언 “중국이 세계선진국을 따라잡는데는 백여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마오저둥이 1962년 “7차인민대표대회”에서 예견했던 발전속도는 제2대 영도자가 제정한“3보(三步走)”전략과 묘한 일치를 가져왔다. 동포투데이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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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3-21
  • 경기도, 수도권 광역버스 요금 인상계획 당분간 연기
    [동포투데이]경기도의 수도권 광역버스 요금 인상계획이 당분간 연기됐다. 20일 오전 10시에 개최된 경기도 소비자정책심의위원회(위원장 김희겸 행정2부지사, 이하 위원회)는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요금 인상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하고, 경기도의 수도권 광역버스 요금 인상계획 연기 결정을 내렸다. 위원회는 이날 요금 인상 계획을 4월중 다시 심의하기로 하고 ▲서울·인천시와 함께 인상시기협의, ▲실무위원회가 종합적인 검토 자료를 준비해 위원회에 제공, ▲요금인상폭은 가계경제 부담, 버스업계 경영 어려움. 서비스개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추가 검토하겠다고 결정했다. 아울러, 버스 요금 인상 조정 이전까지 버스업계 손실 지원을 위한 도의회 차원의 예산 지원 노력을 주문했다. 앞서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소비자정책심의위원회 위원장인 김희겸 경기도 행정 2부지사를 만나 “적자누적으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버스업계의 입장도 이해하지만, 버스 요금 인상 소식이 전해진 후부터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아 고민이 많았다.”라며 “적자누적으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버스업계의 현실과, 도의회의 의견, 서민가계의 부담 등을 충분히 고려해 위원회가 인상시기 등을 포함한 심도 있는 심의를 해주길 바란다.”라고 당부했었다. 경기도는 ▲2011년 11월 이후 버스요금을 3년 4개월 동안 동결, ▲좌석제 시행에 따른 버스업체의 적자 누적 등을 이유로 버스요금 인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광역버스 요금 인상을 우선 추진한 후 일반버스 요금을 서울시, 인천시와 함께 현실화할 계획이었다. 경기도 관계자는 “버스업계의 경영상태가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요금 인상 연기 결정을 내린 것은 도민들의 의견을 좀 더 수렴하고 버스업계도 서비스 개선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도지사와 소비자정책심의위원회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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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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