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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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스트리아, 22일부터 다시 전국 봉쇄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현지 시간으로 19일, 오스트리아 정부는 오는 22일부터 전국 주민에 대해 코로나19 확산을 억제하기 위한 ‘봉쇄령’을 실시하는 한편 2022년 2월부터 백신 접종 의무화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외신에 따르면 최근 유럽 지역에서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이미 지난 15일부터 코로나19 백신 미 접종자에 대한 ‘봉쇄령’을 내렸지만 전문가들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연방정부는 19일 주지사들과의 협의 끝에 추가 ‘봉쇄령’를 발령했다. 봉쇄령에는 오는 22일부터 10일간 전국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봉쇄 조치를 실시한 후 상황에 따라 10일 더 연장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또한 늦어도 20일 후에는 백신 미 접종자에 한해서만 ‘봉쇄령’을 적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백신 2차 접종자에 한해서 4개월 후 제3차 접종까지 권장하는 한편 사업장을 포함한 모든 밀폐 공간에서 FFP2 표준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며 될수록 재택근무를 해야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2022년 2월 1일부터 전 국민을 대상으로 백신 접종 의무화를 실시하며 미 접종자는 상응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스트리아가 전국적인 ‘봉쇄령’을 발령한 것은 코로나19 발생 이후 이번이 네 번째이며 유럽연합(EU)에서 처음으로 백신 접종 의무화를 실시하는 나라로 된다. 한편 19일 오스트리아 보건부에 따르면 19일 0시까지 신규 확진자가 15809명 발생해 코로나19 사태 이래 하루 최다를 기록했다. 오스트리아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100만 명 이상이고 누적 사망자는 1만1951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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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1
  • 창장 간류 세계 최대 청정에너지 회랑으로 도약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 CCTV 보도에 따르면 세계 2위 수력발전소인 바이허탄 수력발전소 4호기가 지난 19일 전력망에 공식 연결되면서 발전에 들어갔다. 이는 이미 생산에 투입된 바이허탄의 6번째 발전소이며, 싼샤 그룹이 창장 간류에 건설하여 생산에 들어간 100번째 수력 터빈 발전기이다. 이는 창장(長江) 간류가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청정에너지 회랑으로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싼샤그룹은 창장(長江) 간류(幹流)에 싼샤(三峽) 공사를 필두로 하는 6기의 계단식 발전소를 건설하고, 110대를 설치하도록 설계하였다. 총 설치용량은 7169만5000kW이다. 6개의 계단식 발전소는 화중화동지역과 쓰촨(四川), 윈난(云南), 광둥(广东) 등 지역의 전력난을 해소하고 서부에서 국가적인 중대전략이 실시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레이밍산(雷明山) 싼샤(三峽)그룹 회장은 "창장간류는 이미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청정에너지 회랑으로 되었으며 창장간류100대의 발전기는 모두 가동 조건을 갖추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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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1
  • 라싸시, 살기 좋은 생태 도시 조성으로 행복감 높인다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벽수가 푸른 하늘을 담고 있고 따뜻한 태양이 유람객을 비추는 중국 티베트의 라싸 시내에 위치한 린징 공원(林琼公园)은 시민들이 레저를 즐기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이 공원을 만든 후부터 우리는 산책하러 자주 와요.” 시민 칸도는 평소처럼 저녁식사 후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에서 내려와 산책을 즐긴다. 그의 기억으로는 이전에 라싸에는 도시 공원은 적었고 산책하고 싶어도 갈 곳이 별로 없었다. “이곳은 워낙 쪽방 촌이었는데 이렇듯 아름답게 변모될 줄 몰랐어요. 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나무가 얼마나 많은지 봐요.” 깔깔거리면서 한 칸도의 말이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라싸 시내에는 린징공원 같은 도시 녹지가 많아지면서 대중의 행복감도 높아지고 있다. 린징공원의 성공적인 조성은 라싸 도심의 냇가 복원 및 생태계 보존 사업의 추진에 힘입은 바가 크다. 2019년 이래 라싸시에서는 중심지 냇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도시의 기능과 활력을 북돋우었으며 수자원 계통과 도시의 관계를 최적화하였다. 라싸시 주택 및 도시향촌 건설국 가오젠훙 부국장(高建红副局长)은 공원, 녹지, 냇가, 경관, 도로와 레저 등 기능을 결합해 관할구역 내 부대시설 건설을 총괄적으로 기획하여 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친수·레저의 새로운 장을 제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고 설명했다. 가오젠훙에 따르면 다섯 갈래의 냇가 루트(渠道)가 동서를 가로지르고 남북을 종단, 라싸 시내를 돌면서 냇가 자원을 활성화시켰으며 냇가 자원과 관련 시설이 서로 연결되어 중복 투입과 자원 낭비를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녹지에 물을 주고 도시의 습도를 높일 수 있게 됐다. 또한 진정으로 대중에게 녹음과 경지를 환원하면서 도시의 품위를 높였다. 이 프로젝트가 완공된 후 도시 물줄기들이 서로 연결되어 ‘라싸의 폐’인 라루습지(拉鲁湿地)의 물량이 보충되고 습지의 수역 면적과 식생이 회복되었다. 또한 습지 생태다양성이 보호되면서 겨울이 되면 철새들이 날아와 월동하여 라싸시에 아름다운 풍경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겨울철마다 철새를 보러 오는 것ㅡ 이는 라싸 시민들의 겨울 한 계절의 즐거움이다. 한 도시의 녹색성장은 단순히 건물을 짓고 나무를 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도시의 자연적 성장을 정치, 경제, 문화와 사회 및 생태문명 건설 등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라싸시는 최근 몇 년 간 도시 공간 배치에서 길을 따라 확장하던 전통적인 방식을 바꾸어 새로운 녹지 생태 분리랑을 통하여 내부는 또 몇 개의 공원 구역, 사회구역 공원, 지역 공원으로 구분하여 도시 특유의 공간체계를 형성, 마치 도시가 자연 속에서 약동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고 있다. 또한 종각루캉 건강테마공원, 약왕산 법치테마공원, 빈허 친수테마공원 등으로 라싸는 ‘생태 라싸의 구축’을 목표로 도시 원림 건설을 가속화하고 도시와 농촌이 일체되는 생태 장벽 구조를 형성하였다. “주민들의 사업과 삶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15분간의 편민 봉사를 배치했고 과학 혁신원, 법치선전원을 비롯한 고품질의 작업공간과 생활공간을 만들어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고 생활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멋진 장면’을 만들어 냈다”며 라싸시 원림국 관계자는 설명했다. 도시의 품위와 이미지를 보여줌에 있어서 공중화장실은 중요한 고리가 됐다. 덩젠화(邓建花) 환경미화원은 라싸 강변의 공중화장실을 관리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는 경기장이나 주차장이 있어 평소 오가는 사람이 많았는데 현재 공중화장실이 생기면서 훨씬 편리해졌다. 나는 환경미화원으로 일한 지도 10년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라싸의 공중화장실은 점점 더 높고도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높고도 커진다’는 건 이 공중화장실이 이동이 가능한 친환경적인 것에 속하는 것을 가리키며 상하수도가 연결되어 전통 공중화장실에서도 수세식 설치가 가능한 장점을 효과적으로 결합한 것을 설명한다. 이동식 공중화장실의 빠른 시공, 친환경, 에너지 절약, 이동 가능 등의 장점을 결합했으며 장애인 화장실과 장애인 전용 비탈길도 함께 설계돼 있다. 라싸시 환경위생국 부국장 장보(江波)는 “올해 우리는 도시 환경보호에서의 대중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던 화장실 문제에서 편리한 수세식 화장실을 주로 냇물 공원 연선과 빈허 공원 내 상가 밀집지역 및 학교 인근에 설치하여 주로 공원놀이와 산책을 하는 주민, 상인과 아이들 그리고 학부모들의 애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였으며 공중화장실 외관은 티베트식 특색을 잘 살려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물 환경을 종합적으로 관리하고 녹지를 새로 건설하는 혁신도시의 공간 배치에 이어 ‘작은 화장실 대혁명’에 이르기까지 라싸시가 살기 좋은 생태도시를 만들어 대중의 행복감을 높인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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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1
  •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주, 홍수 비상사태 선포
    [동포투데이 김현나 기자] 현지 시간으로 17일, 외신에 따르면 당일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는 연일 폭우로 인한 홍수 피해와 산사태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보도에 따르면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는 연일 되는 악천 기후로 1명이 숨지고 최소 3명이 실종됐으며 1만8000명가량이 긴급 대피했다. 당일, 존 호건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지사는 “수일 내에 사망자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사진(신화사)은 지난 18일(현지 시간)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 애버츠퍼드에서 촬영된 홍수에 잠긴 농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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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1
  • 中, 23개 도시 세계 어린이날 기념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20일 총 23개의 중국 도시들이 세계 어린이날을 맞아 만리장성의 한 부분을 포함한 상징적인 건물들과 기념물들을 파란색으로 밝혔다. 당일 신화통신에 따르면 유니세프가 주최한 이 기념행사는 COVID-19로 인해 생중계되었으며, 어린이들의 건강, 교육, 보호, 참여를 위해 사회 전체가 단결할 것을 요구했다. 주중 유니세프(UNICEF) 대표 신시아 매카프리는 "세계 어린이의 날에 우리는 하나가 되어 아동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다. 행사 생중계 기간 유니세프는 2명의 새로운 청소년 창도자를 발표했다. 20세의 자오천은 줄곧 아동과청소년의 디지털 접근을, 19세의 위신웨이는 청소년의 정신건강 증진을 호소했다. 유니세프와 신화통신은 각각의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인터랙티브 기능을 공동 출시하여 어린이들의 목소리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열망을 증폭시켰다. 세계 어린이날은 1989년 11월 20일 아동권리협약이 채택을 기념하여 제정되었다. 중국은 1992년에 이 조약을 비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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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1
  •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무정장군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전번 계속) 남침 작전 기간의 장군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고 무정은 포병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정식으로 중장 계급장을 달게 됐다.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무정은 민족 보위성 부상(국방부 부부장 격) 겸 인민군 포병사령관을 맡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7월 원래의 계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김일성은 김광협의 뒤를 이어 무정을 2군단장으로 임명하고 중국 홍군 명장의 지혜와 기백을 떨칠 것을 희망했다. 인민군 2군단장을 맡은 무정은 국지적 포위, 우회와 퇴로 차단 등을 결합하면서 소백산을 지키는 미 8집단군을 격퇴하였으며 7월 말 경에 이르러서는 김천-상주-예천-안동-영덕까지 내려가 낙동강 강행도하를 준비했다. 한편 김일성은 미군 병력이 낙동강 방어권을 형성하고 미 본토로부터 육속 증원군을 부산에 보내는 것을 알게 되면서 충주 남쪽 수안보에 위치한 전선총사령부로 이동해 조선 광복 5주년 기념일인 8월 15일 전으로 부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무정은 한 달 가까이 미군들과 겨루면서 인민군과 미군의 실력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8월 공세’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김일성은 자신의 고집(실제로는 배수진을 친다는 의미도 있다)을 내세우며 무정을 인민군 동부전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6개 사단을 맡겨 ‘8월 공세’의 주공격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즉 김천 북쪽으로부터 영덕으로 전개하면서 대구, 영천과 포항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제15사단: 선산 부근에서 강을 강행 도하한 후 유학산을 거쳐 대구로 진격한다. 13사단: 낙동리 부근에서 강을 도하하여 다부동을 거쳐 대구로 진격한다. 1사단: 신속하게 군위를 점령하고 13사단과의 좌익 배합으로 대구로 진격한다. 8사단: 신속하게 의성의 적을 격파하고 영천으로 진군하여 경주나 대구로 진군할 준비를 한다. 12사단: 태백산맥을 가로질러 포항까지 신속하게 밀고 나가 연일이나 경주를 거쳐 부산으로 진격할 준비를 한다. 5사단: 신속하게 영덕 탈취 후 포항으로 진격하고 이후 12사단과 함께 부산을 향해 진격할 준비를 한다. 무정은 또 제766 유격대에 울진을 출발하여 안강리교(안강리 동면 형산강에 놓인 다리)와 청도 도로를 파괴하도록 명령했다. 1950년 8월 5일부터 1950년 8월 24일까지 계속된 전투로 인민군은 영덕과 군위, 왜관을 점령했다. 그리고 한시기 인민군의 포탄은 대구 시내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12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 1만여 명을 포항에서 포위하기에는 성공했지만 해상봉쇄를 하기에는 실패했다. 12사단은 한국군 3사단의 1만여 명을 포항에서 포위했지만 해상을 봉쇄하지 못한 탓에 한국군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총적으로 인민군은 약간의 승리는 있었지만 산악지대에서의 작전과 유엔군의 공습으로 후방 보급이 크게 파괴되었다. 또한 동부 전선의 인민군 부대들은 8월 12일 이후 쌀 한 톨도 보급 받지 못했고 현지에서는 보급품을 전혀 징수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8월 15일과 16일 이후로는 전반 부대가 움직일 능력이 없음에도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무리한 작전을 강행해야 할 때도 있었다. 한편 무정이 기대했던 제766 유격대는 청도터널을 파괴해 연합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명령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제766 유격대장은 “여러 갈래로 분산 침투해도 전투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남조선군 경계망을 뚫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규 부대로 돌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유격전에 능한 이 부대는 안강리 지대에서 생소한 정규 작전을 수행하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기 마련이었다. 이에 몹시 분노했지만 어쩔 방법이 없게 된 무정은 유격대를 해체하고 12사단과 병합했다. 하지만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인민군에서는 ‘잔학한 괴멸적 전술’이라고 불렀음)과 병력의 반격이 끊이지 않았고 뒷심이 결핍한 인민군은 부득불 낙동강 우측 대안으로 후퇴해야 했다. ‘8월 공세’가 선승후패(先胜后败)하자 인민군은 앞으로 더 진격하려고 ‘9월 공세’를 준비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 당시 전선의 상황은 이미 유엔군과 한국군에 유리하게 역전되었다. 인민군 병력이 공세를 펴기 어려운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요행 외에는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다. 이는 그야말로 도박꾼의 올인이었다. 이번에도 무정의 부대는 여전히 주 공격을 담당했다. 당시 주 공격을 앞두고 무정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제3공격군단(1사단, 3사단, 13사단, 105 기갑사단 주력)은 미 제1 기병사단과 남조선 1사단 방어망을 뚫고 대구를 점령한다. 제4공격군단(8사단, 15사단, 17 기갑여단)은 남조선 6사단과 8사단의 방어망을 돌파하고 하양과 영천을 점령한 뒤 대구나 경주를 향해 진격한다. 제5공격군단(5사단, 12사단)은 남조선 수도사단과 제3사단 방어망을 뚫고 포항동과 연일비행장을 점령하고 경주 일대에서 부산으로 진격할 준비를 한다. 9월 2일 밤, 무정 지휘사령부의 대대적인 야간공격이 시작되어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으며 특히 제12사단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한국군 수도사단과 5사단을 잇달아 격파하였고 유엔군의 동부전선에는 약 12킬로미터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9월 5일까지 미 1기병사단과 한국 3사단도 잇따라 패하면서 포항동이 점령당했고 8일엔 인민군이 영천도 점령했으며 미 제8군 사령부와 한국군 사령부는 모두 대구에서 부산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그 시각 서부전선의 인민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무정은 사방에서 밀려오는 유엔군과 한국군의 반격을 막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바로 그럴 즈음,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인천상륙이 성공되면서 남쪽에 있는 인민군한테는 큰 재앙이 들이 닥쳤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으로 인민군은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만 했다. 후퇴 명령을 받자마자 유격전의 전략을 잘 알고 있던 무정은 각 사단의 퇴로를 마련한 뒤 모든 무전 연락을 끊었다. 결국 미군은 물론 평양의 김일성도 그가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알 수 없게 됐다. 평양의 김일성은 화가 나서 안절부절을 못했지만 무정의 안동 사령부는 별로 큰 장애가 없이 원주를 거쳐 38선 이북의 김화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무정이 거느리는 몇 개 사단 중 13사단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순조롭게 북쪽으로 돌아감과 아울러 대부분의 골간 장병들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필요한 행동에 평양은 오랫동안 그의 소식이 끊겼기 때문에 극도로 화가 나 있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무정과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소식에 소련 고문들은 공개적으로 무정의 개인주의 성향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무정은 평양을 사수하라는 김일성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무정의 수하에는 만 명도 안 되는 예비사단 2개뿐이었고 무정 또한 포위섬멸되거나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는 정부가 북으로 철수하자 비교적 가벼운 저항만 하고는 부대를 이끌고 철수를 했다. 이어 유엔군이 공수부대를 파견하여 그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고 또한 무정 부대의 철수가 늦어지면서 마지막 1개 연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기실 당시 무정이 평양을 포기하고 유생역량을 보존한 것은 정확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수도를 쉽게 포기한 것은 그의 명성에 큰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다른 작은 정절에 있어서 무정이 임명한 한 관원이 정상적인 행정심사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 등으로 무정은 예비군단인 7군단의 군단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말았다. 이는 군인에게는 특히 수 십 년 간 전장을 누빈 군인 무정한테는 큰 실망을 의미했다. 이어 1950년 12월 21일부터 23일까지 있은 조선노동당 2기 3중 전회에서 무정은 ‘전쟁 중에 저지른 엄중한 과오’로 강력한 처벌을 받았다. 이는 무정의 개성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불평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처벌이었다. 그리고 이는 정치와 전투장의 이중적 실정으로 인해 이런 비극적 결말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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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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