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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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 팬덤 건드리지 마! 中 축구협회장·대표팀 감독, 중기위에 고발당해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중국 축구대표팀은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6전 1승 2무 3패 승점 5점으로 조 5위에 그쳐 본선 진출이 사실상 무산됐다. 4명의 브라질 귀화 선수가 소속돼 있는데도 이 같은 성적을 내자 천수위안(陳術源) 중국축구협회장과 리톄(李鐵) 축구대표팀 감독을 중앙기율검사위원회에 고발하는 등 팬들의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축구협회장으로서 천수위안은 1년 동안 국가대표팀 업무에 무게중심을 두었고, 몇 차례 대표팀을 따라 서아시아로 출정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최종예선에서 대표팀의 성적은 팬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귀화 선수 4명으로 역대 최강 라인업을 구축하고도 6라운드 만에 일찌감치 본선행 티켓을 놓친데 대해 팬들은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천수위안의 경우 이러한 결과는 분명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축구협회는 올해 월드컵 예선을 위해 슈퍼리그를 연기까지 하면서 대표팀에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 고소장에는 직권남용과 편파적인 선수 선발, 프로 리그 관리 엉망이 국유자산 대거 유출 초래 등 문제가 제기됐다. 폭풍의 중심에 있는 리톄 역시 고발을 피할 수 없었다. 고소장에 따르면 리톄의 현장 스케쥴링 능력은 월드컵 예선과 같은 경기 수준과 맞지 않으며 그 외에도 기자회견에서 했던 발언도 팬들의 불만을 크게 자아내고 있다. 또한 리톄의 연봉이 800만 위안이라는 보도를 접한 팬들은 그의 연봉 비리 의혹을 제기하며 천수위안의 국가 자산 낭비를 지목했다. 고소장은 또 리톄의 귀화 선수 활용 문제에 대해 재조명했고 편파적 선수기용으로 팀을 이끌었다고 지적했다.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중국축구협회는 리톄와 5년 계약을 하고 그를 집중 육성할 계획이었다. 이번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뒀지만 리 감독이 흔들리진 않았다. 그러나 호주와의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나온 발언 때문에 축구협회가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 스포츠
    2021-11-19
  •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무정장군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전번 계속) 조선의용군 창설 사업 무정은 또 다시 과로로 인해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고질인 위장염이 재발한 것이다. 이러자 사령부에서는 재차 그에게 휴식을 명령했다. 건강이 회복될 즈음 무정은 또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됐다. 대일 작전을 모색하기 위해 연안에 찾아온 조선인 청년들을 집중시켜 조선의용군 건군 작업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는 토지혁명시기에 살아남은 조선혁명가 10여 명을 골간으로 하고 연안에 찾아온 조선청년들 그리고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조선청년 및 동북에서 활동하다가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에서 군사를 배운 후 연안으로 온 조선청년들까지 모두 합류시켜 철저한 훈련을 실시했다. 이런 조선인 청년들은 1939년에 이르러 팔로군 전방사령부가 있는 진동남(晋东南)에 이르러 팔로군과 함께 항일전쟁에 투신했다. 조선인 스스로의 혁명 역량으로 날로 장대해졌다. 1941년 1월 10일 무정은 조선독립동맹의 전신인 화북 조선청년연합회 회장을 맡았고 그해 6월에는 중경 국민당 계열이던 조선의용대 일부가 화북의 항일근거지로 귀화했으며 무정은 이들을 조선의용대 화북 지대로 편성해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1941년 8월, 산서성 동욕에 있는 팔로군 본부에 조선의용대 간부훈련반이 설치되었고 무정은 교장으로 부임되었다. 그는 항일 무장투쟁에 종사하는 군사간부를 전문적으로 양성했다. 이어 진동남 항일근거지에 조선청년간부학교와 조선무장선전대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26일에 열린 동방 각 민족 반파시스트 대회에서 무정의 초상은 외국 항일 지도자들과 함께 모택동 초상화와 나란히 걸렸다. 국제 사학자들은 이때 무정이 팔로군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중국 문헌의 한 기록에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다. 연안의 대생산 시기 남니만 개발에 관한 자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941년 1월 말부터 2월 초 사이 중앙군사위원회 직속 포병 퇀장인 무정은 2개 영을 거느리고 남니만으로 진군해 반년쯤 걸려 덤불숲에 폭 6미터가 되는 도로를 닦았으며 이후 남니만의 식량, 부식물과 공업제품은 모두 이 도로를 거쳐 끊임없이 항일 전선으로 운송되었다. 이렇게 무정 퇀장은 두 개 영을 이끌고 식량이 부족하고 집도 없는 등 상상할 수도 없는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개간한 황무지에 씨앗을 뿌렸다. 이어 얼마 되지 않아 왕진이 359여단을 이끌고 남니만으로 들어가면서 황무지를 개간하는 부대가 신속하게 확대되었다. 그 후 또 많은 부대와 구정부와 중앙군사위원회 등이 남니만에 잇따라 진출하면서 개황열기가 전례없이 형성되었다.……” 당시 무정은 이미 조선 반일세력의 지도자 일원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중국 공산당과 팔로군에서 그의 위상은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평범한 공산당원과 팔로군 장령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조선의용군 창설임무를 무정에게 맡겼다. 그 이유는 광범위한 국제항일통일전선의 시범으로 국민당 정부가 지배하는 지역으로부터 더욱 많은 조선인을 데려오기 위한 것으로 풀이됐으며 또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로 선전할 때도 일본어에 능한 조선인들의 우세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조선문제 전문가인 스마루는 어느 한 저서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주은래는 중조 관계의 미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또 무정의 전설적인 이미지는 광범위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민당의 통제 하에 있던 조선의용대 조직원 89%가 낙양(洛阳)과 중경 등지로부터 태항산(太行山)으로 옮겨왔으며 이들은 화북지대의 각 분대에 편성되어 기로예(冀鲁豫), 진찰기(晋察冀), 태항산(太行山) 등지로 이동하여 유격전과 일본군 와해 투쟁을 전개하고 항일근거지 기층정권의 건설활동에 참여한 것 등은 이를 여실하게 증명하였다…” 장군의 위망 날이 갈수록 높아져 무정과 화북 조선청년연합회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조선의 유명한 독립운동 지도자 김두봉도 중경에서 태행산으로 직행하였고 멀리 조선 국내에 있던 여운형도 자신의 연락책 김명시(무정의 연인)를 서울에서 연안으로 보내 무정을 만나게 했으며 함께 합동건국 문제를 논의하게 했다. 실제로 무정의 이름은 소련의 크렘린궁까지 전해졌다. 1941년 7월, 스탈린은 비행기를 연안으로 파견하여 무정을 소련으로 인수하려고 했다고 한다. 무정의 비범한 포병기술을 높이 평가하면서 소련의 포병부대를 지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반년 전에 있었던 ‘완남사변(皖南事变)’을 염두에 두면서 장개석이 이번 무정의 소련 행을 가로막거나 말썽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무정을 소련으로 보내지 않았다. 비록 무정의 소련행은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스탈린의 항공기 파견은 국내외에서 무정의 명성을 더 한층 크게 높였다. 1942년 7월 11일, 화북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결성됐다. 화북 조선독립동맹 중앙 집행위원이자 의용군 사령관이었던 무정은 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특히 의용군을 구성함에 있어서는 기념비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 뒤 무정은 팔로군 포병 퇀장을 그만두고 조선의용군의 훈련과 지휘에 전념하였다. 그는 자신이 언젠가는 조선의용군들로 조국 광복을 이끌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당시 의용군 장병들 속에서는 조선은 일본한테 얼마간 더 점령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무정은 조선의 독립이 멀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성심성의로 대원들을 이끌었다. 특히 무정은 독립 이후의 조선은 모든 애국당파가 연합하여 집권하는 국가이기를 원했다. 이는 당시만 해도 중국공산당의 연합정부 구상이 무정한테 영향을 미친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당시 무정의 생각은 연안의 조선공산당 출신 중 좌파인 최창익 등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조선독립동맹의 정치적 권력은 주로 좌파들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무정은 군사만 담당) 이들과 무정의 견해는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이는 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유감스럽게 했다. 1945년 8월에 이르러 일제의 멸망은 분명해졌고 무정은 소련이 꼭 조선을 장악하리라는 것을 예견했다. 이때 그는 황하 둔치에서 희생된 양림을 더욱 그리게 되었다. 양림은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하였으며 의지가 굳세고 지혜가 넘치는 애국자였다. 무정은 양림이 살아 있었더라면 소련인들과의 관계를 잘 관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에 앞서 무정의 건의로 조선혁명 군정학교 전원은 1월 말부터 태행산을 출발해 2000리를 행군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의 3차 봉쇄선을 넘어 4월 7일 연안에 도착했다.(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11-19
  • EU, 벨라루스에 대한 새 제재 추진, 국경 난민 위기 고조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현지 시간으로 16일,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최근유럽연합(EU) 회원국 외교장관들은 벨라루스 접경지역 난민 문제를 집중 논의하고 벨라루스에 대한 추가 제재에 동의했다. 하지만 같은 날 벨라루스 루카셴코 대통령은 폴란드와의 국경에 체류 중인 난민 송환에 주력하고 있다며 만약 EU가 벨라루스에 추가 제재를 가할 경우 이에 반제재로 돌입 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현재 많은 분석가들은 “서방 국가들이 벨라루스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 제재를 가했다”면서 “추가 제재는 자칫 서방과 벨라루스의 긴장 및 난민 위기를 고조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EU, 벨라루스에 더 많은 제재 준비 보렐리 EU 외교·안보정책 관계자는 15일 “벨라루스에 대한 새로운 제재는 개인과 실체를 겨냥할 것이며 구체적인 조치는 며칠 후 발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미국도 EU를 협조해 벨라루스에 제재를 가하겠다고 표명했다. 제재 대상에는 난민 수송 항공사, 여행사 등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보도에 따르면 벨라루스와 이웃 나라의 난민 위기는 지난 8월부터 불거졌다. 당시 중동에서 온 난민 다수가 독일 등 서구 국가로 진출하기 위해 벨라루스를 거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등 인접국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난민이 끊임없이 증가함에 따라 현지 정세는 날로 긴장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EU는 벨라루스가 EU 국경에 난민을 수송하고 불법 입국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벨라루스는 이를 부인하면서 서방의 제재로 난민 물결을 통제할 수 없게 됐다고 반박했다. 미국과 유럽의 서방 국가들은 지금까지 이미 벨라루스에 대해 여러 차례 제재를 해왔다. 이 중 EU는 작년 8월에 있은 ‘벨라루스 대통령 선거의 부정 행위’를 이유로 166명의 개인과 15개의 기업에 대한 네 차례의 제재를 실시했다. 제재 내용은 주로 여행금지령과 자산동결이었다. 또 지난 5월 라이언에어 사건 후 EU는 6월 벨라루스 항공기의 모든 EU 영공 통과와 EU 공항 진입을 금지하고 맞춤형 경제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EU 목적 달성하기 어려울 듯 EU가 제재를 통해 벨라루스를 압박하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인사들도 적지 않다. EU 안보연구소 정치학 전문가 클라라 포트라는 “제재를 가하면 특정국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맞지 않는다”고 했다. 벨라루스 언론에 따르면 벨라루스는 이미 여러 차례 제재를 받았지만 국내총생산은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3% 증가했고 대외 무역 흑자가 20억 달러를 초과했다. 그리고 최근 루카셴코 대통령은 “EU가 새로운 제재를 확대하면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가스 수송을 차단할 수 있다”고 강경하게 맞서기도 했다. 한편 ‘EU 리포터’ 뉴스 사이트의 루이스 오거는 서방의 제재가 벨라루스 관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며 벨라루스는 러시아에 더 많이 다가 설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로 벨라루스는 최근 러시아와의 연락을 강화했고 루카셴코는 9일 난민 위기와 관련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하기도 했다. 양국은 또 군사 협력 차원에서 러시아 전략 폭격기 두 대가 지난 10일 벨라루스 공군과 더불어 벨라루스 상공에서 순찰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폴란드와 일부 서방 국가들은 이번 난민 위기를 다루면서 러시아에 화살을 돌리면서 벨라루스와 함께 러시아를 이번 위기의 배후로 지목했다. 이에 러시아 측은 난민 위기의 근본 원인은 서방 국가가 난민 본적지를 파괴한 데 있다며 러시아와 벨라루스 두 나라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이외 서방의 동시다발적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대한 압박은 양국을 더욱 가깝게 만들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EU, 내부 모순 뚜렷이 노출 이번 난민 위기에서 일선에 있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EU를 뒷받침하고 있지만 EU와의 갈등은 위기 수습 과정에서 불거졌다. 양국은 ‘장벽 구축’으로 난민들의 입경을 제한하려고 했지만 EU는 정치 및 인도적인 이유로 장기간 장벽 구축에 대한 자금 지원을 거부해 왔으며 최근에는 외부 압박에 밀려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다. 또 폴란드는 국경 난민 처리에 있어서 EU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폴란드 정부는 벨라루스와의 국경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유럽 언론에 따르면 폴크스바겐은 독일의 국경보호지원 제안을 여러 차례 거절했다. 기자들은 물론 바르샤바에 본부를 둔 유럽 국경관리국 직원들도 국경지대에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국경지대에 대한 유럽인권법원의 지원 요청을 무시한 것이다. EU 관련 규정에 따르면 EU회원국들은 유럽 국경관리국과 긴밀히 협조해 난민 송환 관련 결정을 공동으로 이행해야 했지만 위르바 요한손 EU 집행위원은 폴란드 접경지역을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지난 11일과 15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및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 각각 통화를 가졌으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15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했다. 그리고 에마뉘엘 마크이 벨라루스 외무장관은 14일 보렐리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와 통화했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는 이번 난민 위기를 조정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고 벨라루스 측도 조속한 사태 해결을 희망했다. 하지만 EU의 추가 제재에 관한 최근의 결정으로 양국 관계가 더욱 긴장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게다가 국경 정세를 완화하기 위해 EU가 이웃국가들에 실효성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워 이런 외교적 노력이 단기간에 결실을 맺을 수 없다는게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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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9
  • 러시아, 핵추진 쇄빙선 ‘시베리아호’ 해상시험 개시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현지 시간으로 16일, 러시아 연합조선그룹 산하 발트해 조선소는 “러시아 22220형 핵추진 쇄빙선 ‘시베리아호'가 당일 선착장을 떠나 핀란드만으로 이동해 해상시험을 실시하게 된다”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시베리아호’는 3주 동안 기계와 설비 가동 상황과 GPS와 통신시스템 기능을 점검하게 된다. ‘시베리아호'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동력을 가진 쇄빙선으로 북방 해상로의 수송 잠재력 개발이 주 업무이다. ‘시베리아호’는 발트해 조선소에서 건조된 두 번째 22220형 핵추진 쇄빙선으로 올해 말 인도될 예정이다. 이에 앞서 러시아 최초 핵추진 쇄빙선 ‘북극호’는 길이 173.3m, 폭 34m, 배수량 3만3500t으로 두께 3m의 얼음을 깰 수 있다. ‘북극호’는 2020년 10월에 인도돼 현재 취역 중이다. ‘북극’호와 ‘시베리아’호를 제외하고 현재 러시아는 ‘우랄호’, ‘야쿠르트호’와 ‘추크치호’ 등 3척의 핵추진 쇄빙선이 건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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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9
  • 中 슈퍼 ‘보조배터리’ 안후이 양수발전소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사진은 일전 촬영된 중국 안후이 샹수이젠(安徽响水涧) 양수발전소 상저수지와 하저수지(신화사 드론 촬영)이다. 안후이(安徽)성 우후(無湖)시 이장(宜江)구 아교진(亞橋鎭)에 위치한 이 발전소는 총 설치용량 100만kW에 1기 용량 25만kW의 역방향 펌프인 수력발전기 4대를 장착하였으며 상저수지, 하저수지, 송수계통, 지하공장, 지상개폐소 등으로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전기에너지를 저장하기 어렵기에 이 양수발전소는 충전 역할을 한다. 즉 전력이 남아돌 때 양수발전소는 전기를 이용해 물을 퍼 올려 높은 곳에 저장하고 전력이 부족할 때는 다시 물을 방류해 전기를 생산해 전력 수요를 충족시킨다. 이 양수발전소는 피크제어, 밸리 필 회로, 주파수 변조, 에너지 저장, 예비력 등 다중 기능을 갖추고 있어 전력시스템의 안전하고도 안정적인 경제운전을 보장하는 동시에 신에너지 전력소비를 증대시켜 에너지 구조조정을 촉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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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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