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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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무정장군④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전번 계속) 장군의 귀국 1945년 12월의 어느 추운 날, 낡은 증기기관차 한 대가 70여 명의 승객을 싣고 평양역으로 들어섰다. 당시 이 승객들 중에는 무정, 최창익 한빈 등 연안출신 조선독립동맹 간부들이 있었다. 그들을 맞는 평양역에는 격앙된 음악도, 휘날리는 깃발도, 귀국하는 혁명가들을 환영하는 열띤 인파도 없었다. 몇 명의 접대인원들만이 이들을 영접하기 위해 열차에 올라왔을 뿐이다. 그들은 긴 인사도 없이 무정 일행을 역에 대기 중이던 트럭에 서둘러 태우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조선에 진출한 소련 홍군은 조선의용군이 ‘비무장 차림’을 약속할 때까지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고 한 시기 조선의용군의 조선입국을 막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군대나 정당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만 입국이 가능하게 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소련군이 그들의 입국을 막았기에 대부분 조선의용군 주력은 중국 동북 각지에 남아 중국의 내전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조선의용군이 조선으로 입국하는 데는 기나긴 여정도 있었다. 이에 앞서 1945년 8월 11일, 팔로군 사령부는 무정이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빠르게 북상하여 소련 홍군과 손잡고 조선광복을 이룩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사흘 만에 항복 선언을 하면서 조선의용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조국을 해방시킬 기회를 잃게 하였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지 이틀 만에 무정은 태항산(조선의용군의 주 근거지)에서 장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연안으로 돌아와 귀국 준비에 착수했다. 하지만 귀국 준비라고는 하였으나 구체적인 귀국 계획이 거의 없었다. 다만 어디에 집중하여 조선으로 돌아갈지에 대해 토론했을 뿐이다. 1945년 9월 5일, 조선의용군 300명 선봉대는 연안에서 출발했고 이어 여성과 어린이까지 동북에 도착하면서 대오는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60여 일간의 고생 끝에 심양에 도착했을 때는 1945년 11월 초였다. 심양에 도착한 대오는 간부들만 병영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주민 집들에 분산돼 휴식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7일 조선의용군은 한 조선인학교의 운동장에서 조선의용군 군인대회를 열고 소련군과 교섭한 결과를 모두에게 알렸다. 소련홍군과의 교섭 결과 소수의 간부만 귀국이 허용되고 나머지는 중공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7개 지대(실제 4개)로 편성됐다. 제1지대는 남만에서 창설됐고 지휘관은 김웅, 방호산과 최인이 맡았다. 북만에 창설된 제3지대는 이상조, 주덕해가 지휘관을 맡았으며 연변에 창설된 제5지대는 이익성과 박일우가 지휘관을 맡았다. 그리고 제7지대는 길림에 창설됐으며 지휘관은 박훈일과 최명이 맡았다. 이후 이들 대부분은 개인 신분이나 작은 규모로 조선으로 나가게 됐다. 한편 귀국 간부단은 1945년 11월 20일 중조 접경도시 안동(지금의 단동)에 도착했으나 조선입국 허가를 받지 못했다. 무정이 소련군에 입국허가를 신청하자 무장을 해제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열흘 뒤 이들이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도착하자 소련군은 열차를 배치하여 그들을 평양으로 보냈다. 이들은 평양역에서 트럭에 실려 태평양 여관으로 옮겨져 임시 자리를 잡았다. 이때 조선독립동맹 지도자들은 매우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그들은 평양의 정치적 분위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군대가 없었다. 그들은 자기의 조국에서조차 타국에서 떠도는 나그네처럼 소련 사람들의 배치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누구누구는 속속 보직을 받아 여관을 떠났지만 나머지 대다수는 여전히 여관에 남아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김일성이 소련 대령과 함께 여관을 찾아왔다. 김일성은 최창익 등과 회담하였다. 김일성은 미군이 남조선에 진주했으며 그들은 남조선을 떠날 생각이 없어 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한편 그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배치할지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다가 1946년 1월 마지막 귀국자가 이 여관을 떠났다. 심하게 배척된 장군 무정은 조선인들에게는 영웅이었지만 소련 사람들이 보기엔 얄미운 놈이었다. 소련은 무정과 그의 조선의용군에냉담했으며 군인이 아닌 문인이 조선의 지도자로 활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굳이 군인이더라도 소련군이 잘 아는 김일성을 선호했다. 무정의 귀국에 앞서 1945년 10월 28일 신설된 북조선 5도의 행정 선거에서 무정은 2인자로 행정국 부위원장(1인자는 민족주의자 조만식이었음)으로 선출됐다. 무정은 1946년 4월까지 이 직책을 맡았고 그 달 있은 선거에서 곧 바로 밀려났다. 또한 무정과 함께 귀국한 저명학자 김두봉은 북조선 인민위원회 1인자로 ‘선거’됐고 김일성은 2인자로 선출됐다. 이어 무정은 인민보안간부학교 포병 교무장으로 파견됐다가 1948년 제2인민보안간부학교 교무장으로 임명됐다. (주): 인민보안간부학교는 조선의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학교일 뿐만 아니라 당시 공개되지 않았던 조선인민군 사령부였기에 무정의 교무장 직책은 사실상 인민군 포병사령관이다. 그 당시 무정은 정치투쟁에서 기교가 부족했거나 더 정확하게는 권력 다툼에 아주 서툴렀다. 무정은 아주 강직한 사람이라 일찍 연안에 있을 때에도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는 다른 지도자들과 충돌하는 바람에 다수의 독립동맹 간부들과 많은 불화를 겪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다. 이렇게 되자 결국 중공중앙은 조선독립동맹의 내부투쟁을 피하기 위해 무정더러 조선의용군을 전담하게 하는 동시에 비교적 상냥한 김두봉에게 독립동맹의 정치위원을 맡겼다. 그러던 무정이 조선에서 2인자로 등극했지만 또 광범위한 비난을 받았다. 즉 중국에서 온 간부들은 비교적 중요한 자리에 배치하고 국내 출신이나 빨치산 출신 간부들을 배척했다는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 부수상 모두 자신의 정치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 사이에 낀 무정은 더욱 실의에 빠졌다. 1946년 간부회의에서 무정의 참았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그는 자신의 옷자락을 와락 잡아당기며 놀란 관중들을 향해 그들에게 자신의 몸에 있는 총탄 흔적을 보여 주었다. “내 몸의 이 상처의 흔적 좀 보라구. 내가 조선을 위해 지불한 대가라구. 당신들은 지금 왜 다른 한 사람(김일성 지칭)만 찬미하는 거여?!” 무정의 이런 감정적 발로는 후에 그의 정치 인생에 막대한 악영향을 줄 것은 분명했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11-20
  • 사우디 주축 다국적 연합군, 예멘 후티 무장세력 200명 사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8일(현지 시간), 아덴에서의 외신에 따르면 당일 예멘 언론은 다국적 연합군의 성명을 인용해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다국적 연합군이 지난 24시간 동안 예멘 중부 마리브주에서의 군사작전으로 최소 200명의 예멘 후티 무장세력을 사살했다고 보도했다. 언론은 다국적 연합군 전투기들이 지난 24시간 동안 마리브주에 있는 후티 무장의 목표물을 35차례 공습하여 최소 200명의 후티 무장세력을 사살하고 24대의 군용차량을 파괴했다고 전했다. 언론은 또 지난 2월, 다국적 영합군은 말리브주에서 후티 무장에 대한 공세를 시작한 이래 2만7000명 이상의 후티 무장세력을 사살했으며 10월 중순 후에는 거의 매일 몇 십 명 이상의 후티 무장세력을 사살해 왔다고 발표하였다. 마리브주는 예멘의 석유 주산지이자 다국적 연합군 지휘부가 있는 곳이다. 지난 2월 이후 이 주에서 맹공을 퍼부은 후티군은 현재 이 주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으며 2014년 9월 후티 무장은 예멘 수도 사나를 탈취한 뒤 예멘 남부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우디를 주축으로 하는 다국적 연합군은 후티 무장 세력에 대해 ‘단호한 폭풍’이란 작전명으로 군사공세를 개시했다. 2018년 12월 유엔의 중재로 예멘 정부와 후티 무장은 휴전, 포로 교환 등 의제에 합의했지만 얼마 안돼 서로 상대방이 휴전협의를 파괴하였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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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뉴스
    • 중동·아프리카
    2021-11-20
  • 英, 인플레이션 수준 최근 10년 새 최고치 기록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현지 시간으로 17일, 영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에너지와 연료 가격 상승의 영향으로 지난 10월 영국의 소비자가격지수(CPI)가 지난해 동기 대비 4.2% 올라 2011년 11월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CPI는 인플레이션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 영국의 경우 지난 9월의 CPI는 전년 동월 대비 3.1% 상승했고 10월의 CPI는 예상보다 더 많이 올랐다. 그랜트 피츠너 영국 국가통계국 수석 경제학자는 이 같은 상승폭을 초래한 주요 요인은 전기와 가스 가격 인상에 따른 가계의 에너지 비용 증가, 중고차, 연유 가격의 인상, 식당과 호텔 가격의 인상 등이라고 밝혔다. 피츠너는 또 “공장의 생산 원자재 가격 인상도 인플레 수준을 끌어올린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이외 영국 국가통계국은 지난해 10월을 전후로 ‘도시 봉쇄’ 등 코로나19방역 조치의 영향으로 일부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급락’했으며 최근 CPI가 전년 동기 대비 급등한 것도 지난해 같은 기간의 저조치와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영국 주택가격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9월 영국의 집값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11.8% 올라 인플레이션 우려를 키웠다. 영국 AJ벨의 대니 휴슨 금융분석가는 “고소득, 낮은 실업률과 함께 물가도 높은 상황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하면서 “스태그플레이션(滞胀)을 정말 걱정해야 하지만… 소비자들은 지금 당장 인플레이션이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렸다고 해서 반드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영국 금융시장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이 12월 기준금리를 0.1%로 기록적인 저점에서 0.25%로 올릴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영국 중앙은행은 오는 12월 16일에 있을 회의 기간에 금리 인상을 결정할 것으로 보이며 그렇게 되면 영국 중앙은행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처음으로 금리 인상을 결정하는 주요 경제권 중앙은행으로 된다. 한편 이 전망에 따라 지난 17일 파운드화 가치는 달러와 유로화에 대비해 일제히 상승했고 이 가운데서 파운드화는 유로화에 대비해 21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면에 유니레버, 레저시, 영미담배 등 수출기업의 주식은 1% 가까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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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뉴스
    • 유럽
    2021-11-20
  • 푸틴,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 초청 수락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19일, 러시아 위성통신에 따르면 당일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 공보비서관은 브리핑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베이징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해 달라는 중국 측의 초청을 받았으며 협의가 마무리되는 대로 이를 공식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페스코프는 러시아 대통령이 이번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참가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고 나서 “푸틴 대통령은 이미 베이징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해 달라는 중국 측의 요청을 받았으며 모든 세부 사항을 협의한 후 중국 파트너들과 함께 이 방문 계획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오는 2022년 2월 4일에 개막한다. 17일(현지시간), “푸틴 대통령, 베이징 동계올림픽 대회는 당신을 환영합니다!”라는 제목의 기고한 글을 실은 러시아 일간 ‘르네상스’ 인터넷판은 “최근 몇 년 동안 러중 양국 정상의 올림픽 상호 방문은 이미 전통이 되었는바 푸틴 대통령의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 출석은 러중 친선의 역동성을 재차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면서 “베이징 동계올림픽 보이콧을 외치며 비열한 정치 쇼를 벌이는 서방 정치인들에게도 따귀를 날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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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뉴스
    • 중동·아프리카
    2021-11-20
  •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 한·일 학생 온라인 국제교육교류 프로그램 운영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코로나19 상황이 2년째 계속되지만,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 학생들은 온라인 국제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미래 역량을 키우고 있다. 베트남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교장 신선호)는 19일 양교 초등 전교어린이회 임원들간의 온라인 공동수업을 실시하여 일본 오사카 금강 인터내셔널소중고등학교와의 학생 교류를 시작하였다. 이번 교류는 호치민시 최분도 이사장과 오사카 최윤 이사장간의 재외동포교육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체결된 양교의 교류협력 협정서에 근거하여 운영되었다. 오사카와 호치민시는 약 4000km 떨어져 있고, 2시간의 시간차가 있지만, 두 학교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두 학교 학생들간의 만남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온라인 공동수업에 참여하여 각자의 학교 생활과 학교가 위치한 호치민과 오사카에 대하여 미리 준비한 자료를 활용하여 서로 설명하고 의견을 나눴다. 공동수업 후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 전교어린이회에서는 메타버스(로블록스)에 조성된 온라인 학교 캠퍼스에 오사카금강인터내셔널 소학교 학생회 임원들을 초청하여 학교 곳곳을 함께 탐방하며 생생하게 학교 공간과 학생 생활에 대하여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교어린이회 문유찬 회장은 “타국에 있는 학생들과의 만남이 무척이나 설렜고, 메타버스에 지어진 우리학교 캠퍼스에서 우리학교와 호치민시를 소개한 것이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오사카금강인터네셔널 소학교 손록희 학생회장은 “다른 나라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학교 학생들의 생활이 궁금했는데 오늘 자세히 알 수 있었고, 앞으로도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 학생들과 계속 교류를 이어나가고 싶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신선호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장은 “대면 교류가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국제교류 프로그램을 운영해준 학생회와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하며, “위기를 기회로 삼아 지속 가능한 국제교육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가겠다.”라고 운영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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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외동포
    202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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