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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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 공간에 동료가 있는데 왜 못 봐!”
    22일 오후, 곤명 해경기지 3호 구장은 “훈련소음”으로 시끄러웠다. 곤명 전지훈련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선수들의 기분은 매우 들떠있다. 전호와 정영학 지도가 “빈 공간에 동료가 있는데 왜 못 봐!”, “공을 빼앗기면 멈추지 말고 강하게 압박해야지”, “패스하고 서있지 말고 움직여”, “문일아, 그럴 땐 각도를 죽여줘야지” 등 주문을 쏟아내다가 좋지 않은 플레이가 나오면 시범을 보이기도 한다. 두시간 동안 진행된 훈련 내내 선수들지간 격려는 그칠줄 몰랐다. 훈련도중 전호와 정영학 지도는 “새 시즌을 맞을 팀의 륜곽이 만들어져가는데 아직 최종적으로 외적용병영입이 확정되지 않아 걱정스럽다”며 기자에게 말한다. 전날(21일), 전지훈련 내내 “외적용병문제로 고민하느라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는 구락부 리희섭부주임이 하문으로 정상룡감독을 만나러 떠났다. 훈련분위기는 매우 좋다. 리훈 등 어린 선수들은 “쿠리바리는 그라운드에 들어서면 눈빛부터 달라집니다. 배울것이 많은 선수인것 같습니다”고 평가한다. 포지션도, 처한 현실도 제각각이지만 랭정한 프로세계에서 선수들의 따뜻한 눈빛은 통하고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자 “무한 에너지”라는것을 이제 우리 선수들은 아는것 같았다. 래일은 하루 휴식을 취하며 연길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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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2-27
  • 연변팀 올시즌 전력의 핵심--쿠리바리
    감독진 “직업도덕과 직업의식 가장 뛰여나” 올시즌 팀의 중심을 잡게 될 쿠리바리(말리적)는 10번을 달고 뛰게 된다. 연습경기때면 쿠리바리의 경기흐름을 꿰뚫는 탁월한 시야와 신들린 묘기에 모두들 엄지손가락을 내흔든다. 쿠리바리는 2011년 5월 8일 연변장백호랑이구단과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은 2011 시즌이 결속될 때까지였다. 주체육국은 올시즌 그의 잔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978년 4월 15일생인 쿠리바리는 1998/1999 시즌, 1999/2000 시즌 이집트 슈퍼리그 자마레크팀 유니폼을 입었고 200/2001 시즌 독일 분데스리가 브레보팀으로 이적해 2006/2007 시즌까지 뛰였다. 2007/2008 시즌 독일 분데스리가 먼신 그라드바흐팀에서 두개 시즌을 활약했고 2009/2010 시즌에는 독일 2부리그로 강급된 프랑크푸르트팀으로 이적해 선수생활을 했다. 지난해 쿠리바리는 위기에 처한 연변팀의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했다. 이번 동계전지훈련에서 쿠리바리를 쭉 지켜보면 연습경기에서 상대선수를 눈 깜짝할사이에 드리블로 제치는가 하면 동료선수에게 순식간에 찔러주는 송곳패스가 일품이였다. 그리고 평소 례의도 대단히 바른 선수다. 감독진은 쿠리바리에 대해 “팀에서 직업도덕과 직업의식이 가장 뛰여난 선수다. 독일 분데스리가를 뛴 선수여서 그런지 뭔가 다르다. 배울 점이 참 많은 선수다”라고 애정을 보이고있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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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2-27
  • 안순애, 정경화 제8회 대한민국통일문화제 한중교류연예상 수상
    연예저널과 소년중앙일보가 주최하고 대한민국통일문화제조직위원회, 대한민국문화예술발전진흥회, 한국연예예술인협회가 주관하는 '제8회 대한민국통일문화제'가 지난 12월 30일 서울 세종회관에서 개최되었다. 2004년부터 통일부, 한국예총과 각 지자체 등의 후원으로 연례행사로 개최해 온 이 행사는 올해도 예년과 같이 공모전과 실기전으로 나누어 문학과 미술, 무용과 대중음악부문에서 전국 청소년과 일반인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한달여간의 기간을 거쳐 시상식과 각종 문화예술 행사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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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1-15
  • 2011 중국조선족대모임 송년축제
    (송년사중에서...)회원님들과 함께 한지도 어언간8년이 되였네요. 세월이 유수 같다더니 참으로 빠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숨가쁘게 달려왔던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한 해를 떠나 보내야 하는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물론, 달려온 길 가운데 좋은 일도 있었겠지만, 우리모두에게 어렵고 힘들었던 한 해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비록 힘든 한 해였지만,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모임은 오늘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여분들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전세계 우리동포 우리회원님들과 소통하고 뭔가를 함께할 수 있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네트워크가 구축돼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장점들을 이용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오를 것입니다. 여러분들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번 송년축제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저는 한국인도 참석해도 되느냐 하는 문의를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의 모임은 조선족 한국인 구별이 없으며 모두가 평등 합니다. 글로벌시대에 한마음 한 뜻으로 함께하려는 분들이라면 언제 어디서든지 함께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중국동포를 사랑하는 많은 한국 분들이 계시는 줄 압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저는 송년축제 자리가,서로 격려하는 아름다운 자리가 되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조촐하게 마련되어 실망도 있으셨겠지요. 앞으로 하나하나 잘 개선해 나갈 것을 약속합니다. 아무쪼록, 힘들었지만 소중한 한 해를 보내고, 희망의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새해에는 여러분이 계획하는 모든것, 여러분이 소원하는 모든것이, 다 성취되는 만사형통의 복을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지구촌 방방곡곡에 살고 있는 6만4천 여명 우리회원님들의 가정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이번행사에 후원, 참석해주신 한나랑당 중앙위원회 해외동포 분과위( 이호붕 위원장님),한나랑당 중앙위원회 해외동포 분과위 부위원장겸 주식회사 “꽃피는산골” (권용구 대표님 ), 한민족신문 (전길운 대표님),주식회사 월드피닉스 정우혁 회장님, 한중신문대표, 한국문화예술원 (채규주 원장님), 한중법률신문대표 김광진 대표님, 중국노동자협회 (최경자 회장님 ), 세계 화상로령산업촉진회 부회장 겸 한국촉진회 회장,(주)탑헤드비전, (주)탑누리커뮤니티 (이은석 회장님), 세계 화상로령산업촉진회부비서장 겸 한국촉진회 부회장,(주) 탑헤드월드 (전진이 대표님),우리모두행정사 (김홍연 사장님), 하나국제 행정사 (남정애 사장님), 대한생명 (최미란 매니져님), 가수 김월녀 님, 작사가 양귀비(오경화)님, 주식회사마린수산 (정철수 사장님), 온세텔레콤 유지호과장님, 연주가 윤룡철님 그리고 참석해주신 모든님들께 진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립니다. 전체기립하여 고향의봄을 열창하는 귀빈과 참석자들송년사를 하고 있는 중국조선족지원재단(중국조선족대모임)대표축사를 하고 있는 한나라당 중앙위원회 해외동포분과위 위원장열정에 넘치는 축사를 하고 있는 한민족신문 전길운 사장님연설하고 있는 한중신문, 한국문화예술원 채규주 대표 "여자대통령"을 열창하고 있는 김월녀 가수이인창을 부르는 회원들"즐거우니 술맛도 좋네" 건배하는 회원님들건배~ 우리는 20대40대 화이팅!!즐거우니 노래도 절로 나네최고의 인기 피리 연주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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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1-14
  • [수필] 불초의 참회
    특별히 눈물이 많으셨고 겁도 많으셨던 울 엄마, 극심한 가난속에서 땀과 눈물로 오남매 자래워 시집장가 보내고 고생끝에 휘여진 등에 손자손녀들 업어 어른으로 내세운 엄마, 자리에 누워 100일동안 한마디 말씀도 못하시고 약간의 미음물로만 겨우겨우 연명하시며 이국땅에 있는 그리운 얼굴들 보기를 기다리셨다. 그렇게 하루하루 기다리다 지쳐서 간신히 잡고있던 이승의 끝자락을 맥없이 놓고 한줌의 재로 외롭게 떠나셨다.
    • 문학살롱
    2011-12-15
  • [수필] 엄마의 눈물강
    엄마의 눈물강 김애보 작사 안계린 작곡 김지협 노래 고생속에 설음많아 눈물많던 우리 엄마 오두막집 가난기워 다섯남매 키우시며 땀과 함께 쏟은 눈물 강이 되여 흘렀네 아 눈물강 엄마의 눈물강 나의 인생쪽배 띄워준 사랑의 사랑의 강이여 고생끝에 락이라 근심걱정 사라지고 만년세월 살기좋아 웃음열매 주렁진데 눈물많은 우리 엄마 옛말하며 우십니다 아 눈물강 엄마의 눈물강 나의 인생쪽배 저어갈 은혜로운 은혜로운 강이여 노래 뒤이야기 (수필) 엄마의 눈물강 김 광 룡 나의 엄마는 눈물도 많으시다. 내가 책이나 영화에서 보아온 강인하고 눈물이 없는 영웅어머니들의 형상과는 다른 겁도 많고 동정심도 많고 눈물도 많은 그런 엄마시다. 나의 엄마는 17세에 우리 김씨가문에 시집오셨다. 아버지형제는 6형제였는데 아버지는 항렬에서 셋째였다. 맏큰아버지가 일찍 목재판에서 일하다 돌아가셨기에 둘째큰아버지네 식구로부터 막내삼촌네 식구까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사는 대가정이였다. 내가 나서 자란 고향마을에서 서쪽 골안으로 한식경 들어가면 도끼봉이 장승처럼 버티고 섰고 마을동구엔 구수하가 느러지게 흐른다. 나의 엄마는 원래 목단강시내에서 괜찮게 사는 구두쟁이집의 귀한 딸로서 글도 읽으셨다. 지금도 돈계산같은 웬만한 수자계산은 일본말로 구구셈을 하시는데 나보다도 더 빠르다. 그런데 어떻게 연줄이 닿아서 나의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는데 농사일을 할줄 몰라 울었고 시집살이가 버거워 울었으며 물동이 일줄을 몰라 울음동이도 웬만히 쏟은것이 아니였다 한다.대가정에서 시부모, 시아주버님, 동서들, 시동생들 그리고 조카들과 함께 살면서 웃음도 많았고 울음도 많았으며 옛말거리도 많이 남기셨단다. 지금은 배부른 저녁식사후에 듣는 구수한 옛말로 되였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느 손주를 더 귀여워하여 몰래 감추었던 엿가락을 남모르게 주었다는둥, 또 어느 손주를 더 업어주어 동서끼리 시샘을 내게 했다는둥 하여간 식구가 많았으니 별의별 이야기들이 무지 많다. 후에 우리 집은 세간나서 이집저집 이사하며 살았는데 내가 태여난 집은 너무나 볼품없는 오두막집이였다. 나는 오남매에서 우로 형님 두분, 누님 두분아래 제일 막내이다. 엄마는 나를 낳고 우셨단다. 기뻐서 우셨는지 아니면 가난한 살림에 나를 키울 일이 막연해서 우셨는지 알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그날부터 내 인생의 쪽배를 엄마의 눈물에 띄웠던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엄마의 애간장을 무던히도 태웠었다. 두살때 나는 크게 앓은적이 있었다. 인사불성이 되여 숨이 간들간들한 나를 눕혀놓고 엄마는 돈이 없어 병원에는 못가고 밤낮 울기만 하셨단다. 그러다가 결심을 내리고 나를 둘쳐업고 먼 곳에 사는 천주교회의 의원한테로 헐금씨금 달려가 돈이 없지만 죽어가는 어린 생명을 살려줍시사 울면서 사정하셨단다. 엄마의 눈물에 하느님도 감동되였는지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났다. 그때 뜸을 떴던 허물이 지금도 내 배꼽우에 큼직하게 남아있다. 내가 네살을 잡았을 때 머리가 심하게 헐었댔는데 낮에는 장난에 빠져 그런대로 엄마가 손질해주신 돼지똥집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벌거벗고 달아다녔지만 밤이 되여 좁은 오두막집구들에 누우면 머리에서 고름이 줄줄 흘렀다. 그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지금 기억에 잘 남지 않지만 엄마는 며칠밤 주무시지 못하고 우셨단다. 후에 조선바람이 일자 아버지는 조선으로 건너갔고 돌아와서는 문화혁명바람에 밤낮 투쟁맞다보니 엄마 혼자서 우리 남매들을 키우시며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리셨는지 모른다. 그때 학교에서 한창 공부를 잘하던 맏형님이 16세 나이에 부득불 학교를 중퇴해야 했고 뒤를 이어 둘째형님도 엄마를 도와 농사일에 나섰다. 온 나라가 기아에 허덕이던 세월, 엄마의 손을 잡고 산골에 사는 맘씨고운 엄마의 친구집에 밥 얻어먹으러 다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밥그릇에 숟가락을 대면 그대로 와르르 쏟아지는 깔깔한 조밥을 볼이 미여지게 먹어대는 나를 보며 엄마는 우셨다. 그때 우리 마을에서 연길로 가려면 60전을 내고 뻐스를 탈수 있었지만 나는 그런 호사를 누릴수 없었다. 다섯살때의 일이다. 하루는 맏형님이 동네에서 자전거를 빌려 나를 자전거의 앞가름대에 달랑 앉히고 연길의 친척집으로 떠났던것이다. 형님이 자전거페달을 밟으면서 나에게 핸들을 꼭 붙잡으라 연신 당부했지만 좁고 단단한 쇠가름대에 오래동안 걸터앉았노라니 여린 엉뎅이가 몹시 배겨났고 핸들을 꼭 잡은 손은 맥이 풀렸다. 게다가 까댁까댁 졸기까지 하다가 심한 내리막을 달릴 때 그만 자전거에서 떨어지면서 왼쪽발목이 자전거바퀴에 끼워 나는 둬장길이는 거꾸로 달려 끌려갔다. 비록 고마운분들의 덕분에 제때에 치료를 받았지만 오래동안 일어서지 못하고 방바닥을 기여다녔다. 엄마는 자식을 뻐스에도 태우지 못하는 당신자신을 저주하며 그렇게 애통하게 우셨다. 밤이 되면 두 누님과 나 그리고 엄마는 한이불을 덮고 잠을 잤다. 벽에 주렁주렁 매달린 메주덩이들이 허옇게 뜨면서 냄새를 풍기는 방안에서 나와 손우의 누나가 엄마의 량켠에 누워 서로 엄마의 젖몸을 빼앗겠다고 싸우면 엄마는 누런 신문지로 도배한 천정을 가리키면서 우리와 글찾기를 하셨다. 그러다간 왜서인지 또 눈물을 흘리시군 했다. 우리 집 옆에는 작은 강이 있었는데 동네 아줌마들이 늘 그 강에서 빨래를 하였고 내또래의 조무래기들이 물장난을 쳤다. 어느 한번 이웃집 아줌마가 빨래를 하다가 불시에 강물에 엎어지자 엄마는 울음부터 터치시며 그 아줌마를 물에서 간신히 건져 집에 업어다 눕히고는 가슴을 문질러주면서 아줌마가 눈을 뜰 때까지 우시였다. 내가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았을 때다. 그때 우리 마을에는 대학생을 둔 가정이 없었는지라 우리 집에서는 사흘동안 잔치를 벌렸다. 동네분들을 모시고 친척친우들을 청하고… 엄마는 우시였다. 웃으시며 우시였다. 그후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월급으로 엄마한테 양털세타를 사드렸을 때도 엄마는 웃으며 우시였다. 밝게 우시였다. 그때 흘리던 엄마의 눈물이 오늘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몇해전의 겨울, 나는 몸건강이 좋지 못하여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 고향에 계시는 엄마는 며칠후에야 내가 병들어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락루하시다가 그만 쓰러지시였다. 뇌출혈이였다. 며칠후 먼저 퇴원한 내가 엄마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줄곧 혼미상태에 계시던 엄마는 내 부름소리에 깨여났다. 나를 알아본 엄마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리셨다. 엄마가 퇴원하던 날, 내가 엄마를 안아서 차에 모시자 엄마는 나에게 젖을 먹였던 값을 받았다면서 우시였다. 순간, 나도 눈물을 왈칵 쏟았다. 아, 이런것이 엄마의 사랑인가. 당신은 자식때문에 손이 발이 되도록 고생하셨고 속에 재가 앉도록 애태웠어도 못난 자식 어쩌다 한번 사람의 흉내를 낸것이 그렇게도 고마운지, 실로 부끄러웠다… 나의 엄마는 참 눈물도 많으시다. 기쁘나 슬프나 먼저 눈물부터 흘리신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나온 과정에 암초도 많았다. 매번 내 생명의 쪽배가 암초에 부딪쳐 가라앉으려 할 때면 엄마는 눈물로 내 생명의 쪽배를 다시 띄워주셨다. 80고령을 넘어선 엄마는 이렇게 평생 눈물에 사셨고 얼굴엔 온통 강줄기이다. 이젠 나도 뒤늦게나마 엄마께서 행복의 눈물을 흘리시게끔 엄마의 여생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 그리고 엄마의 눈물강에서 더 힘있게 인생의 노를 저으리라. 엄마, 어머님, 부디장수하십시오!
    • 문학살롱
    2011-12-14
  • 결혼사진에 맺힌 한
    오늘도 구질 구질 싸늘한 가을비가 내리는날 저는 어머님 생각을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조용이 되뇌입니다. " 어머님 하늘 나라에서 부디 평안하시고 더는 가난때문에 속끓이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며느리도 이젠 결혼 사직을 찍어주지못한 어머님의 아픈 마음을 충분이 이해할 수 있으며 더는 이 일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짓고 잘 살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요. 어머님 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보고싶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1-11-06
  • [수필]시어머니의 자식사랑
    양로원에 당도하니 호리원인듯한 아주머니 한분이 우리를 안내해주시는것이였다. 퍼그나 널직한 주방겸 활동실인듯한 방에 머리결이 하얀 노인들이 앉아서 한담을 하고 계셨다. 그 속에서 체구가 왜소한 어머님을 대뜸 알아보고 뛰여가서 부둥켜 안으면서 하고 불렀다. 예고도 없이 찾아간 나를 두고 꿈이냐 생시냐 싶은듯 라고 하시면서 원래 노화되여 잘 보이지 않은 눈을 부비고 또 부비셨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1-11-06
  • [수필]옥이할머니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온 옥이와 내가 우리 집에서 숙제를 하는데 불시에 밖에서 징소리, 꽹꽈리소리와 사람들의 웨침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우리는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옥이네 마당에 홍위병완장을 두른 사람들이 몰려와있었고 옥이 할아버지가 그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옥이 할아버지 목에는 "자위단 단장 박중삼을 타도하자!" 라고 쓴 개패가 걸려 있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1-11-06
  • [수필]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의 차이
    사람은 이 세상을 살면서 끝없이 고난과 실패, 불행과 고통을 당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 앞에서 사람마다의 마음자세가 다르다. 만약 사형이나 다름없는 암증에 걸렸다면 어떤 사람은 대번에 얼굴이 새까맣게 되면서 “난 왜 하필이면 이런 병에 걸렸단말인가? 아이구 내 팔자야.인젠 끝장이구나”하고 풀썩 주저앉지만 어떤 사람은 “ 뭐 나와 겨루어보려구 ? 난 절대 안 질거야 ” 하고 대수롭지않게 생각한다. 그래서 전자는 얼마안되여 병마의 포로가 되여 나중에는 죽고말지만 후자는 병마와 이악스레 싸워 이겨내여 기적을 만든다.
    • 문학살롱
    2011-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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