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2-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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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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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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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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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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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8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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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2-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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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3)
    곡부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산동성 서남부의의: 동방의 성지임 곡부는 중국의 역사문화의 명승도시로 지금까지 5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황제와 공자가 여기서 탄생했고 염황도 여기를 서울로 정했다고 한다. 곡부는 유규한 역사문명과 찬란한 동방 고대문화로 중외에 알려진 외 중국의 기나긴 역사 중 사람들의 마음속의 성지이고 명승도시로 서양인사들은 곡부를 “동방의 예루살림”이라고 부른다. 1998년 곡부의 공자묘, 공자부, 공자림은 유엔 교육과학문화조직의 “세계문화재명록”에 들어갔다. 공자묘 곡부의 공자묘는 기원전 478년에 수건, 공자가 사망한 이듬해에 섰다. 공자묘는 거대한 궁전식 건축물로서 북경의 고궁 및 하북성 승덕의 피서산장과 더불어 중국의 3대 고대건축군에 속한다. 공자묘는 남북의 길이가 800m, 부지면적이 13만제곱미터이며 주요 건축물로는 대성전, 규문각(奎文阁), 행단(杏坛), 비정(碑亭) 등이 있는데 배치가 엄숙하고 자세가 웅위롭다. 그 중 대성전은 공자묘의 주체건물로서 대성전 내에는 높이가 303미터에 달하는 공자의 조각상 및 황제의 어필친서가 소장돼 있다. 공자부와 공자림 공자부의 원명은 연성공자부(衍圣孔府)으로 1038년에 세워졌으며 북경고궁의 귀족부의 버금으로 “천하제일의 집”으로 불리우고 있다. 공자부의 배치는 중국전통의 전당후침(前堂后寢)제로 앞은 관아이고 뒤울안이 주택이 있다. 공자림은 공자와 기타 가족성원의 묘지로 세계에서 지속 연대가 가장 오래고 보존이 가장 완벽하며 규모도 가장 방대한 종족묘지군으로 공자의 묘가 공자림의 중심에 위치, 묘앞에는 큰 비석이 서있고 거기에는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圣文宣王墓)”라고 씌여져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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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02
  • [기획]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 (4)
    ◐ 김철균 그 이튿날 아침, 박정일 선생은 국도호텔 근처에 있는 “할머니순대국집”에 가서 순대국이나 한그릇씩 하자고 했다. 전날 저녁에 호텔에서 먹은 서양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였다. 순대국은 일인분에 한화로 5000원씩이었다. 그릇에는 돼지머리고기도 적지 않게 담겨져 있었고 맛도 별맛이었다. 중국에 있을 때 들어오던 “한국의 순대국은 맛이 없다”는 것과는 딴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연길에서도 두사람이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려 하면 인민폐 50원 정도는 거의 소비하는 것과 비교해볼 때 크게 비싼 것도 아니었다. 그외 한국에서는 식당에서 식사를 해도 커피가 무료로 공급, 이는 커피에 거의 인이 박힐 정도로 좋아하는 나한테 있어서 아주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14회 세계한인언론인 대회 만찬회. 이 날부터 제14회 세계한인언론인대회는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이날 대회의 첫 순서는 한국 한글학회 김승곤 회장으로부터 한글의 세계화에 관한 특강을 들었다. 특강에서 김승곤 회장은 우리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강조하여 지적하면서 그 비교로 한국인은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한글을 거의 소화해 낼 수 있지만 중국인들은 한문을 익히기에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했으며 또한 현재 “그루마”가 일본어로 기재되고 있지만 이는 기실 한국어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굴러다니는 말”이라는 뜻에서 “그루마”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는 몰라도 아주 그럴듯한 주장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어 한국선거관리위 일군으로부터 한국 중앙선거관리위 재외동포선거에 관한 특강이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필자와 박정일 선생은 마이동풍으로 듣는둥 마는 둥 했다. 한국에서 지방선거나 대통령 대선을 한다고 해도 우리한테는 선거권리가 없기에 아무런 관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날 점심시간은 한국시간으로 12시부터 13시까지 딱 1시간이었다. 빽빽한 스켓쥴이었다. ↑사진 : 한국프레스센터 앞에서 필자 그리고 오후에는 역시 특강으로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 사업내용 공지가 있었다. 사업내용 공지발표는 마라톤식으로 아주 오랜시간동안 진행이 되었다. 하긴 그 동안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에서 퇴출당했던 부분적 회원사 대표들이 회의장에 진입해 항의를 제출하는 등 계획외 일이 발생하기도 하여 지체된 것도 사실이었다. 뒤이어 우리는 버스를 이용하여 한국 프레스센터로 이동하여 그 곳에서 제14회 세계한인언론인 대회 개회식을 가졌으며 동시에 한국 연합뉴스 사장님이 베푼 연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개회식은 몇몇 고위 인사들의 축하발언이 있는 뒤 2015년도의 사업계획발표가 있었다. 이는 요란하고도 규모가 엄청난 중국의 개회식과는 달리 조용했으며 축하공연으로 몇명의 클래식 가수들의 공연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연회에서 우리는 그제야 한 식탁에 앉은 사람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건배를 부르며 의사소통을 하는 시간을 주로 가질 수 있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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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국소식
    2015-05-31
  • [장편실화]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1)
    ■김철균 결혼한 뒤 문영이는 극력 “친정 어머니”인 순자한테 손을 내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무리 순자어머니가 무던하고 둘 사이가 극진하다지만 필경은 생모가 아닌 “양어머니”었고 거기에 민족도 다른 조선족 어머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외국에서는 만 18세만 되면 친 자식들도 부모의 도움에서 벗어나 자립한다는데 결혼할 때까지 “친정어머니”의 신세를 크게 지고 보니 심리적 부담과 압력이 생겼던 것이다. 하물며 순자어머니도 이젠 년로하기 시작한 몸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순자가 문영이의 효도를 어느 정도 받아들었더라면 그녀의 이러한 심리적 부담도 좀 가벼워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영이가 간혹 용돈이라도 드리면 순자는 도리어 크게 성을 내기가 일쑤였고 돈 대신 부식품이나 보건품을 사갈 때면 마지 못해 그것을 받더라도 돌아올 때에는 그 가치보다 몇배에 달하는 돈을 억지로 넣어주는 순자였다. 문영이는 심정이 착잡했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이어온 “모녀의 정”을 끊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양심이 도무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채찍질했다. 결혼 뒤 얼마 안되어 문영이는 임신하게 되었다. 임신 역시 여인한테 있어서는 결혼에 못지 않는 희사로서 자신이 드디어 어머니로 된다는 자부심으로 들뜨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영이는 임신사실을 일부러 순자한테 알리지 않았다. 알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알리면 또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올 “친정어머니”였겠으니 말이었다. 이렇듯 기쁜 일을 순자어머니한테 알릴 수 없는 문영이는 자주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문영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갔다. 이와 더불어 누가 돈화로 다녀오거나 편지를 쓸 때마다 순자는 “넌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손주를 안아 보고 싶구나” 하며 독촉이 불같았다. 또한 “너 어릴 때 고생하며 자라 혹시 냉병에라도 걸린거 아니냐? 의사인 네가 알아서 잘 처사하겠지만 그래도 이 엄마는 시름을 놓을 수 없단다”하고 염려하며 여러 모로 문영이한테 탐문하는 순자였다. 알리지 않으면 불효 같았고 알리면 어머니한테 부담을 끼치는 것 같아 문영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문영이가 이렇게 모순속에서 모대기고 있을 때 한 단위에서 근무하는 창범이가 일보러 연길로 갔다가 “문영이가 임신이고 벌써 몇 개월째 잡고 있다”고 순자한테 전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순자는 그 말을 들은 이튿날로 돈화로 올라왔다. 문영이를 만나자 순자는 제법 크게 성을 냈다. “내가 널 낳지 않았다고 네가 그러는 게 아니다. 이런 일을 알리지 않은 것도 역시 불효란다. 그리고 딸자식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 것을 보는 것도 부모로서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단다.” 문영이는 한동안 대답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저 쿨적거리며 울뿐이었다. 그러자 순자는 다시 문영이를 끌어 안으며 위안했다. “문영아, 네 맘을 몰라서가 아니다. 네가 나한테 부담을 준다고 그러겠지. 하지만 이제 너도 자식을 낳아 키워보면 알겠지만 부모란 자식이 결혼해도 여전히 어린애처럼 여겨지기 마련이고 늘 걱정하기 마련이란다.” “알겠어요. 어머니, 다신 안그 럴게요.” 순자는 문영이를 이끌고 임신부와 태아의 건강상태를 병원검진을 통해 확실하게 알아 보고서야 시름을 놓으며 연길로 돌아갔다. 이듬해 1월말 문영이의 출산날자가 다가오자 순자는 갓난아기의 기저귀, 아기이불, 아기옷과 닭, 토마트 같은 영양식품 그리고 문영의 옷들을 사들고 재차 돈화행을 하였다. 그 당시에도 순자네 가정생활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여의치 않아 순자는 서시장매대에 친구가 있는 셋째딸 영애의 담보로 이러한 물건들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출산을 앞둔 문영이는 몸이 몹시 부어 있었다. 그리고 남편외 옆에서 크게 돌봐주는 이도 없었다. 그것 역시 순자로서는 무척 가슴아픈 일이었다. 문영이가 가슴이 저려 나도록 불쌍했다. “문영아, 몸이 무거울수록 가벼운 운동을 하여야 몸을 풀 때 힘들지 않고 순리롭단다.” 순자는 매일 아침마다 문영이를 데리고 보행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 살다보면 별의별 희한한 일을 다 겪어보게 된다. 순자가 바로 그랬다. 어느 하루였다. 그날도 순자가 문영이와 함께 돈화역 부근에서 산보삼아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있는데 짠지와 김치를 팔던 몇몇 조선족 아낙네들이 순자네 “모녀”를 보고 중얼대는 것이 순자의 귀에 들려왔다. “저 로친네가 딸이 쉽게 해산하라고 저렇게 매일 걷게 한다우다.” “글쎄, 딸이라지만 좀 이상한 것 아니우? 딸은 한족이고 저 할머니는 조선말을 하는데 혹시 저 할머니가 한족 영감한테 재가해 사는 거나 아이우?” “그러게 말이웨다. 그래서 나도 별로 이상스럽다 여겼다니까.” 그 아낙네들의 수군대는 소리에 순자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순자는 못들은걸로 그냥 지나치려다가 다리쉼도 할겸 그 아낙네들한테 돌아서며 한마디 했다. “왜, 저 애가 한족이니 내가 한족영감을 해서 함께 살림을 하는 것 같수?” “글쎄 그럼 그게 아니란 말입니까?” “저 애가 한족이고 내 딸인건 맞지만 내가 한족영감한테 재가한건 아니우다. 몇년전 저 애가 연변위생학교에 다닐 때부터 내가 양딸로 삼았던 애 올시다.” 그러면서 순자는 그들한테 문영이가 자라온 이왕지사와 자기의 양딸로 된 자초지종 등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장사군아낙네들은 “그랬구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한족양딸의 출산을 돕기 위해 연길에서 돈화로 찾아온 순자의 소행에 못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문영이한테는 또 “너 정말 복이 있는 아이니 앞으로 이 조선족 어머니한테 잘해주라”고 부탁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문영이네 부부와 함께 붕곤이를 안고서 며칠 후 문영이는 돈화시 부유보건원에서 출산했다. 순산으로 아들을 낳았다. 너부죽한 얼굴에 아주 건실한 아들애었다. 문영이가 출산했다고 하자 그 이튿날로 순자의 남편 용환 영감도 너무도 기뻐 어쩔바를 몰라하며 한달음에 돈화로 찾아왔다. 장인어른이 오자 문영의 남편은 이 때라 하고 아기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아니, 자네 교원사업을 한다는 사람이 애 이름을 지을줄 몰라서 나한테 지어 달라고 하나?” “아닙니다. 애들의 이름은 한대를 거슬어 올라가 할아버지가 지으면 좋다고 해서요.” “어허, 이 사람아! 그러면 친 할아버지가 지어야지 나 이 외할아버지가 무슨 자격이 있는가?!” “그래도 일자무식인 저의 부친보다도 학식이 높은 장인어른이 지으면 더 멋지게 지을 것이 아닙니까?” 이 말에 용환 영감은 슬며시 흐뭇해하며 아주 흥미가 동해하였다. 하지만 이에 순자가 견결히 반대였다. “영감 무슨 망녕이시우? 멀쩡한 바깥사돈을 두고 왜 령감이 외손군의 이름을 짓는다구 그러우?!” 그렇게 되여 결국 후날 문영이의 시아버지가 아기의 이름을 짓게 되었다. 아기의 이름은 바로 심붕곤(沈鹏坤)으로 지어졌다. 한편 실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 일이 생겼다. 해산한 이튿날 진통이 어느 정도 가셔지고 혼자서 변소출입도 하게 된 문영이가 아기를 누워서 쌔근쌔근 잠들어있는 아기를 보면서 머리를 이리저리 갸우뚱거리더니 불현듯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 이리 와봐요.” “왜 그러느냐?”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아기를 와봐요. 이 애가 어쩐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뭐라구?! 아기가 나를 닮다니. 소웃다 꾸러기가 터지겠다.” 하지만 아기의 얼굴을 뜯어보니 이마와 눈부위며가 어쩐지 순자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용환 영감도 아기를 뜯어보더니 “하하하”하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게 웬일이요? 아기는 분명 문영가 낳았는데 당신을 닮다니?! 이상한 일이 아니요?” 이에 문영이네 부부와 순자네 내외는 물론 사돈내외까지 이상하다는듯 어안이 벙벙하던 중 불현듯 문영이가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질렀다. “아, 맞아요. 임산부가 누구를 생각하면 아기는 흔히 그를 닮는다고 했거든요. 제가 임신 때 내내 어머니를 생각했기에 아기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어 보니 이는 아주 그럴듯했다. 이 때 문영의 신랑 심엽군도 맞장구를 치면서 “그리고 임산부가 누구를 미워하면 또 그를 닮을 확률이 크다”면서 한마디 참견했다. 이어 문영의 신랑은 언젠가 돈화의 한집에서 며느리가 임신 중에 벌름코인 시동생을 몹시 미워했는데 후에 아기를 낳고보니 아기가 글쎄 벌름코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시동생은 남자여서 벌름코래도 괜찮았으나 그 아기는 여자애여서 참 꼴불견이었다고 덧붙였다. 이 말에 일동은 재차 폭소를 터뜨렸다. ↑온 가족이 문영의 아들 붕곤이를 놓고 담소하고 있다 다른 한편 문영이가 아들을 낳자 영순이를 비롯한 딸들은 “같은 값에 분홍치마라고 딸을 낳았더면 더 좋았을텐데”하고 좀 서운해하였다. 그러자 순자는 딸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너희들이 뭘 알아서 그러느냐?! 만약 외래 침략자들이 쳐들어 오면 그래도 남자들이 나가서 그걸 막지 치마를 두른 너희들이 막겠느냐? 지금 젊은이들은 진짜 하나를 알고 둘은 모른단 말이다. 그래 집안에 남자가 없어봐라. 집안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 집도 너희들 아버지가 계셨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도 오늘같은 날이 없다 없어. 난 문영이가 아들을 낳은 것이 아주 자랑스럽다.” 이는 결코 문영이가 낳은 아들애가 순자 자신을 많이 닮았다고 해서 하는 유치스러운 항변이 아니었다. 순자가 남자를 잘 받들어야 가정과 사회가 안정하고 태평하다는 것도 결코 봉건사상에서 나오는 이론은 아니었다. “남자가 밖에서 잘 벌어들이고 여자가 집안일을 하는 가정은 말썽이 없이 화목하지만 여자가 밖에서 벌고 남자가 집에서 노는 가정은 하루 건너 말썽과 싸움이 생기기 마련이다”, “마누라가 남정을 존경하지 않으면 자식들도 따라서 예의범절이 엉망이 되기 쉬우며 그런 가정은 망나니 가정이다”, “우리 집도 아버지란 든든한 존재가 있으니 이 어미도 시름을 놓고 가정운영과 사회봉사에 뛰어들 수 있었다”는 등 논법은 어디까지나 생활이치에 맞는 언사였지 봉건사상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면서 순자는 항일전쟁시기 여자 유격대장이 출현하고 문화혁명 때 “무쇠처녀”가 등장해 메를 휘두르는 등 모습은 중국여성이 강하다는 것을 설명할뿐이지 결코 정상적인 인륜법칙은 아니라고 했다. 또한 반대로 남자가 해해거리며 상점이나 식당의 접대원을 한다면 그보다 더 이상의 꼴불견은 없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순자한테 남존녀비사상이 농후한 것도 아니었다. 3명의 되는 아들들한테는 여자들이란 남편을 믿고 사는만큼 항상 색시한테 잘해주고 색시들이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웬간해서는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당부하던 순자였다. 다만 요즘 세월처럼 여자애들을 더 이뻐하고 또 어딘가 모르게 여자애들이 더 우쭐렁거리는 기풍에 어딘가 못마땅해하는 순자였지 여자를 하대해서는 더욱 아니었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5-24
  • [기획]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3)
    ■ 김철균 2015년 4월 27일, 제14회 한인언론인대회을 앞두고 한국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국도호텔 세미나실에서 대회의 성공적인 진행을 위한 간담회가 있었다. 오후 4시(한국 시간)가 되어 간담회가 시작되자 나는 저으기 긴장이 되었다. 이런 국제급 회의는 처음 참가하기 때문이었다. 국제급 회의란 2~3개 국가만 모이어 세미나 등을 열어도 국제급 회의라고 할 수 있다. 하다면 프랑스, 스페인,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랄리아, 터키, 필리핀, 태국, 중국 등 10여개 국가의 언론인들이 모인 회의는 말그대로 차원이 높고도 쟁쟁한 문필가들로 모인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이 날 나는 “중국 연변종합신문 김철균”이라고 씌어진 명찰을 목에 걸고는 대회안내원이 지정한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순간 가슴이 몰래 콩볶듯 뛰기 시작했다. 간담회는 먼저 본 연합회 신임회장인 장마리아 여사의 인사말부터 시작이 되었다. 장마리아 여사는 “여러분들을 위해 봉사하게 될 장마리아”라고 자아소개를 하고 나서 자신은 위기와 도전에 처한 세계한인언론인을 이끌고 변화와 개혁을 위해 이 연합회의 회장직을 맡게 되었노라고 밝히었다. 헌데 이럴 변이라고야! 뒤이어 간담회 사회자가 중국에서 온 신입회원이라면서 나를 지명하여 자아소개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이구 하느님 맙소사! 이는 진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단에 나가 마이크를 잡으니 다리가 후둘후둘 떨리어 났고 목소리가 잘 나가지 않았으며 짧게나마 준비했던 인사말조차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약 10여초 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는 회의 장소를 한 바퀴 휙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중국 연변에서 온 김철균이라 합니다. 저는 이런 회의에 처음으로 참가하게 된 신참입니다. 금일 여러분들을 뵙게 되어 기쁘고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떼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별로 긴장해 나지 않았고 뒤말이 절로 이어졌다. 그 때 아마 내가 우리 연변 종합신문에 대한 소개 및 나 자신의 프로필 등에 대해 장황설을 늘여 놓은 것으로 기억된다. 나의 자아소개에 이어 역시 동행한 박정일 선생의 자아소개가 있었으며 그 뒤로 차례로 기타 나라에서 온 언론인들의 자아소개가 있었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우리 외 기타 나라에서 온 언론인들의 발언은 자아소개 외에도 가끔씩 유머와 해학적인 말, 그리고 주재국의 풍토습관 소개 등이 있어 무척 활발하였다. 예하면 멋진 모습을 보이려고 가발을 쓰고 오다가 공항에서 걸렸다는둥, 오지 않으려 하다가 완도에 가서 전복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식욕을 주체할 수 없어 카자흐스탄으로부터 달려왔다는둥 이러한 발언은 장내의 웃음거리를 던져주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스페인에서 왔다는 언론인 김성환씨는 스페인 투우사들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여 여러 사람들의 흥미를 돋구기도 했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5-24
  • 30세 이상 여성에 둘째출산 먼저 허락해야 (2)
    더 늦으면 낳을 기회가 없어져 평생의 유감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기실 올해초에 있는 중국의 “양회”의 개막전야에 전국 21개소의 고등학교 및 과학연구기구의 39명 인구학자들이 연명으로 “둘째자녀 정책을 전면 개방하고 공민의 생육제한을 취소하자”는 건의서를 작성해 해당 부문에 교부하였다. 건의서는 “단독 2자녀 정책의 실행 1년을 돌이켜 보면 둘째 자녀의 출산신청을 한 부부가 현저하게 적으므로 이 정책 역시 생육율 상승에 극히 제한을 주고 있다고” 써있었다. 건의서는 또 생육제한을 취소하면 가능하게 나타날 출생인구의 증가는 생육정책의 성과이 모험이 아니라고 지적, 현재 새로 증가되는 인구수는 외동자녀 가정이 적어지는 것으로 가정이나 사회에 모두 좋은 일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러면서 새로운 정책에 대한 많은 부부들의 냉담한 반응는 향후 한동안 중국인구의 급증현상이 절대 없을 것임을 증명한다고 지넉하였다. 이 건의서를 작성한 중국인민대학 인구발전연구센터의 고보창 교수는 “목전 인구의 증폭기는 이미 지났다. 제6차 인구보편조사를 금자탑으로 중국인구는 위축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20세 이하의 인구군이 대폭으로 감소하고 있는 것이 가장 뚜렷한 증거로 되고 있다. 집계에 따르면 현재 중국에서 0~14세의 인구가 2.2억명으로 근근히 전국 인구의 16%를 차지하는바 제5차 전국인구보편조사시기에 비해 6.29%가 하강되었다”고 밝혔다. 이렇게 말하면 중국의 소년인구가 이전의 4분의 1에서 이젠 6분의 1로 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는 아주 엄중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단독 2자녀정책 과도기 되어야 전국인대 대표이며 중산기념중학교 교장 가우림은 전국 “양회”기간에 둘째자녀정책을 전면 개방해야 한다는 제의안을 내놓았다. 그는 이를 주장하면서 “니난 1년간 전국적으로 단독 2자녀 정책에 부합되는 가정 1000만여세대중 실제적으로 둘째를 출산한 가정은 겨우 47만 세대의 가정으로서 실제적으로 단독 2자녀나 쌍독 2자녀나 별로 큰 차이가 없었으며 중국은 여전히 출생율이 현저하게 낮은 국가에 속해 있다”라고 분석하였다. 한편 그는 “생육권은 반드시 공정해야 하며 돈많은 사람들이 벌금하며 많이 낳거나 돈이 없는 사람들이 적게 낳는 형상이 있어서는 안되며 아울러 돈이 없는 부류 사람들을 극도로 통제한 결과 우리 나라는 앞당겨 노령화를 초래했다” 주장하였다. 가우림은 또한 “단독 2자녀 정책을 실행한 후의 생육수요로부터 볼 때 이 정책은 이미 중국이 처한 인구위기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으며 더욱 엄중한 것은 현재 많은 가정의 부부들이 쌍독 2자녀 정책을 실행해도 여전이 한명의 자녀만 낳는 문제로서 인구결구가 이제 곧 기형적인 ‹조롱박형으로 되어 가기에 단독 2자녀 정책은 반드시 과도기형식으로만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가우림은 현재 국가 위생계획생육위가 질질 끌면서 단독 2자녀 정책을 전면 개방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면서 절충방안을 내놓았다. 그것인즉 30세 이상의 여성들에게 먼저 두자녀정책을 전면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우림은 “이런 여성들이 이제 더 나이를 먹으면 생육적령기를 놓치어 평생의 한을 남기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도시의 인구관념 이미 개변됐다 최근 광동성 사회과학원 사회학 및 인구학 연구소 소장 정재정은 “둘째자녀 정책”을 전면 개방해야 한다면서 이 정책의 개방으로 인한 생육고조가 올 우려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젊은 일대들은 생육관념이 많이 변해 있다. 이들은 자식을 가치관으로 보는 새로운 관념이 수립되어 있기에 더는 자식이 많으면 복이 많다는 것을 신봉하지 않는다. 아울러 자녀의 질을 추구하고 수량을 추구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러한 생육관념으로 보아 새 일대들한테서 생육률이 높지 않을 수밖에 없다.” 하다면 “둘째자녀 정책”을 전면 개방할 경우 농촌의 생육율은 어느 정도일까? 이를 두고 정재정은 “농촌의 생육율은 좀 높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지난 세기 60~70년대와 같은 고봉기는 올 수 없다. 농촌의 생육관념도 많이 개변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농촌도 점차 도시화로 되여가고 있고 농촌의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에 들어와 일자리를 찾으면서 그들의 견식도 많아지면서 생활에 대한 추구도 달라지고 있기 마련이다”라고 분석하였다. 한편 정재정에 따르면 국내성비의 차이와 향후의 노동력 잠재력을 놓고 분석해도 이젠 마땅히 “둘째자녀 정책”을 전면 개방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이제 16년 뒤가 되면 중국의 노동력 인구가 지금의 9억명에서 8억명으로 줄 것이라고 추정했다. (끝)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5-24
  • 중국 도시들의 공동 난제 주차의 어려움(4)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최근 몇년간 북경, 광주, 심천 등 대도시들에서는 주차비를 높이는 것으로 교통체증을 종합적으로 다스리고 있다. 지난해 6월 남경에서는 주차비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출범, 핵심구역의 간선도로변의 주차자리는 소형차일 경우 오전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12시간의 주차비용을 232원으로 만들었다. 심수에서는 올해부터 도로 주변의 임시주차자리 주차비용을 받기 시작, 사업일인 경우 1류 구역은 시간당 10위안씩이었고 수금시간은 오전 7시 30분부터 저녁 9시까지었다. 한편 이러한 조치 또한 많은 운전자들의 질의를 받고 있는 상황으로 이들은 한결같이 “받아내는 주차비용은 어디에 쓰이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주차관리 기업 또한 한결같이 이는 일군을 모집하고 양성하고 또한 이들의 복장, 이들을 관리하고 세금을 바치고 한다고 답변하고 있다. 현재 북경에는 전문 주차관리만 하는 기업이 600여개가 있으며 비전문적인 기업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헤아릴 수 없다. 그 외 정부 부문에 등록하지 않은 “주차자리”와 “주차장” 또한 도처에서 볼 수 있어 주차시장의 대혼란을 조성하고 있다. 그럼 수금표준을 어떻게 정하면 합리한가? 이를 두고 정주시 공안국 교통경찰지대의 부지대장 사근관은 “차별화한 수금표준은 두가지가 체현돼야 한다”면서 부동한 구역과 부동한 시간에 따른 수금표준이 별도로 나와야 하며 또한 도로변을 점한 수금은 차운전자가 일을 마친 뒤 빨리 떠나게 해야 하지 변상적으로 시간을 늘여 수금액수를 높여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광주시 정협위원인 조지위는 도로변을 점하면서 경영하는 것은 공공자원을 농단하는 것이기에 주차비표준은 정부가 제정하고 가격구성 원가와 수금한 돈의 사용처 등을 반드시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5-21
  • 일본 신풍(神风)특공대 모두 자원으로 죽음 선택했는가?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지난 5월 13일, 2차 세계대전시기의 일본육군항공병 특공대기지의 소재지었던 미나미 큐슈시와 일본 “지식전람회관”은 재차 보도브리핑을 열고 약 1.4만건의 “신풍(神风)” 특공대원들의 유서를 세계무형문화재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들의 이유는 “단순히 전쟁의 참혹성을 세계에 알리어 이러한 비극이 재차 발생하는 것을 피면하려는데 있다” 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극이 재차 발생하는 것을 피하려는데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이 초래된 근원이 바로 일본 자체에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신풍”특공대도 천황을 호위할 수 없어 일본에서 “신풍”이란 단어가 기원된 것은 중국 원나라의 원세조가 일본을 침략할 때 생겨난 것이다. 1274년과 1281년 중국의 원나라 군대는 두차례에 거쳐 일본에 대한 동정을 시작했으나 번마다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 때문에 원나라 함대가 큰 손실을 보았으며 두차례의 동정은 패배로 막을 내렸다. 이러자 당시 일본은 해상에서 불어친 “신풍”으로 인해 원나라 군대를 물리친 것으로 간주, 전쟁 때마다 “신풍”으로 명명한 특공대를 전쟁의 최전방에 내세우군 하였다. 이는 자살공격으로 상대방의 목표를 파괴하는 전술로서 일찍 일러전쟁 시기에도 일정한 효과를 본 것으로 기재되고 있다. 2차 대전시기인 1944년에 이르러 전쟁의 국세는 일본에 대단히 불리하게 되었다. 특히 태평양 해상전에서 일본 해군은 연속 패배를 거듭했다. 1942년 5월의 산호해 해상전에서 일본해군이 자체로 발동한 해상전에서 첫 좌절을 당한 이래 그해 6월에 있은 해상전과 1943년의 미드웨이(中途岛) 해상전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1943년 10월의 산타 크루스 해상전에서는 미소한 승리를 거두었으나 항공병의 원기가 크게 상했다. 그리고 11월에 있은 미드웨이 제도 해상전에서 대패하면서 그 때로부터 동맹군은 전략적 반공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1944년 10월 17일, 갓 임명된 일본 제1 항공함대 사령관 오니시 다키시로 중장은 급급히 필리핀으로 향발하여 일락서산의 운명을 만구하려고 시도했다. 다키시로는 일본제국의 골수군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심복으로 역시 진주항 기습의 핵심인물이기도 했다. 전 전선에 거쳐 일본이 전면 붕괴되는 위기앞에서 다키시로는 미약한 역량을 최대의 효율을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은 전투기로 편성된 특공대를 조직, 매 전투기마다 250kg의 폭탄을 싣고 적의 항공모함과 충돌하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주지하다 싶이 합격된 비행사는 그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모두 아주 아껴야 할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자살식 공격으로 비행사를 소모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게 했다. 거기에는 두가지 큰 원인이 있었다. 하나는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줄곧 유효적으로 비행사들을 구조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즉 해상비행임무를 집행할 때 일단 비행기가 손실보면 비행사는 거의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당시 허다한 비행사들은 일단 임무집행에 나갔다가 회항이 불가능하게 되면 모두 자살성적인 출돌작전으로 죽음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었다고 한다. 한편 회항으로 기지에 돌아올 수 없는 일본군 항공병들의 소모속도는 보충속도 시간을 크게 초과, 2차대전 후기 일본군내에는 합격된 비행사들이 매우 모자랐다. 특히 미드웨이 제도 해상전중 많은 일본군 폭격기는 목표를 제대로 명중하지 못하였으며 미군이 필리핀을 진공할 때 일본군 항공병들은 거의 반격의 힘조차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일본전통의 “무사도”정신의 자살성적인 기습도 미군에게 주는 영향은 아주 미약하였다. 하긴 전쟁초기 이런 동방식의 인원소모의 전술앞에서 미군도 속수무책이었지만 일본군의 효율은 실제상 아주 낮았으며 명중율은 10%도 되지 않았다. 선택권리가 없는 “옥쇄” 일본군의 자살성적인 기습의 효율이 낮은 것은 이런 특공인원들의 자질과 심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훈련시간이 아주 짧아 필요한 공중전 기술을 장악하지 못했기에 미국항공모함과의 “공동훼멸”의 목적에 이룰 수 없었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어떤 특공대원들은 자원희생을 내비치었지만 기타 많은 대원들은 이런 죽음에 대해 원하지 않아 자살성 기습의 효과가 제대로 체현될 수 없었다. 일본학자 카타키 토시로는 역사사료를 찾고 특공대원 행존자들을 방문하는 등으로 3권에 달하는 “육군특별공격대”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이 저서에 따르면 일본군이 생산하는 폭탄은 투하할 수 없고 전문 항공모함이거나 군함과 부딫칠 때 폭발하는 자살성무기었다. 때문에 이는 비행사로 하여금 희생될 의무만 있게 했다. 하지만 당시 특공대의 지휘관을 맡은적이 있는 육군대위 이와모토 익신은 이렇게 주기 싫은 나머지 비밀리에 비행기 내부구조를 고쳐 폭탄투하장치를 가설, 비교적 순리롭게 회항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또 사사키 토모치 오장에 따르면 그가 자살성적인 비행집행을 피해 회항했을 때 그한테 차례진 것은 “군사령부는 그대가 이미 적함과 부딪치는 것으로 이미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고 보고하였다. 이제 그대는 진정으로 적함과 부딪치기를 바란다”고 하는 “안위”였다. 이는 일본군부의 숨겨진 진상을 남김없이 말해주고 있다. 당시 일본군은 이른바 천황의 명예을 위하여 허다한 “신분특공대”의 조직건립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들은 “천황페하는 자기의 몸으로 적의 함정과 부딪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었댜”면서 많은 특공대원들이 비행기를 몰고 미군함선에 부딪치는 것을 자신의 개인행위라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기실 당시 일본천황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현재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당시 일본항공병 “신풍특공대”를 “천황한테 충직한 용사”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일본 “아사히신문”의 주필 와타나베 츠네오에 따르면 당시 이들 “신풍특공대” 대원들은 자원해서 용감하게 전선에 나갔고 또한 죽기 전에 “천황페하 만세!”를 부른 것이 아니라 기실은 매 특공대원마다 모두 몹시 망설이었으며 지어 어떤 대원들은 땅에 주저 앉으면서 일어나지도 못했기에 헌병들한테 떠밀려 전투기에 올랐다고 한다. “옥쇄” 영광? 아니면 수치? 현재 유엔의 과학교육문헌 기구에서는 이미 전쟁을 반성하고 평화를 호소하는 것을 무형문화재로 등록시키기로 하였다. 예하면 2차대전 시기, 세계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뽈스까의 “집중영” 등이다. 일본에서는 “무라야마의 담화”가 발표된 1년 뒤에 히로시마 원폭사건을 유엔 과학교육문헌 기구에 신청하여 세계무형문화재로 등록시켰고 현재 한국에서는 “종군위안부”를 세계무형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베 신조 정권이 출범한 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세력들은 부단히 가짜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침략전쟁을 미화시키고 있다. 이들은 지난날의 침략전쟁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를 무형문화재로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특공대”, “옥쇄” 등을 미화시키는 언론을 퍼뜨리면서 군국주의 분자들을 춰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이른바 일본의 “지식전람회관”을 참관한 사람들 역시 이와 비슷한 인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지식전람회관”이야말로 평화의 기치를 내건 군국주의 찬양하는 전형으로 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특공대원”들은 시대의 영웅으로 부각하고 있으며 침략전쟁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공대원”들의 “사적”으로 침략전쟁을 미화시키려는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신풍특공대”의 역사에 대해 기록할 수는 있다. 하지만 주제는 명확해야 하는바 이런 특공대원들의 유물과 유언을 주제로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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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9
  • 충격 ! 70여만종의 약 최저가 공장가격의 5~6배? (5)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의료보험에 참가한 인원이 외지에서 치료를 받게 되면 흔히 “자비부담 부분”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최근 한 환자가 무한병원에 입원한 후 근근히 비의료보험 목록내에 있는 항생소로 치료를 받은 결과 자비부담이 7000여위안에 달했다. 요해에 따르면 이런 약을 사용할 때 의사들은 이런 약이 의료보험목록에 들지 않은다는 것을 환자한테 알려주지 않고 있다. 특히 의료보험 부문으로부터 관리압력을 비교적 크게 받는 병원일 수록 이런 “현금환자”를 통해 병원재정의 평형을 잡고 있으며 유명한 병원일수록 주요 환자의 내원이 전국 각지에서 오는“현금환자”로 되고 있다. 일개의 병원이라 할 때 의료 도덕상 마땅히 환자한테 어떤 약은 의료보험 결재범위에 속하고 어떤 약은 자비부담인가를 알려 주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의 상황을 보면 어떤 병원에서는 알려주고 있지만 어떤 병원에서는 알려주지 않거나 자세히 알려 주지 않고 있으며 특히 외지에서 온“현금환자”에 한해서는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정책상의 결재범위와 실제상의 결재상황 현재 중국은 기본상 사람마다 의료보험에 참가하고 있다. 이는 역사상의 거대한 진보이다. 하지만 의료보험에 참가한 인원이 병을 보이는 것이 자기의 돈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 결재비율상에서 자비부담 비율이 너무 높은 것이 가장 큰 폐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내 2014년 모 성에서 한 3등 갑급병원의 집계에 따르면 농촌합작의료보험에 참가한 환자의 자비치료 비율은 57.93%, 도시진 종업원의 자비치료 비율은 36.48%었으며 성급도시 종업원의 자비치료 비율은 24.54었였다. 이로 보아 기층의 환자일 수록 자비치료 비율이 높았고 성급도시 종업원의 자비치료 비율 역시 정책상에서 규정한 결재비율보다 훨씬 낮았다. 그리고 병원등급이 높을 수록 결재받는 비율이 낮았으며 이는 외지치료에서의“원칙”으로 되고 있었다. 호북성의 경우 농촌의료합작 보험에 든 농민들을 사례로 든다면 향진 병원에서 치료할 때 800위안 이하면 그 전부의 치료비를 결재 받을 수 있으나 800위안 이상이면 85%를 결재받을 수 있었으며 만약 외지치료로 성급 의료기구에서 치료를 받으면 그 결재비율이 근근히 45~50%에 불과했다. 한편 등급이 높은 병원일수록 약물사용량은 상대적으로 적고 여러 가지 검사환절이 많으며 이 중 어떤 환절에 들어서는 결재받지 못할 부분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외지의 환자일 수록 부동한 지역의 정책 및 의료비용상의 차이로 환자의 부담이 가중되는 경우도 많았다. 동일한 수술 현저한 가격차이 동일한 수술이지만 어떤 병원은 수술비가 4만위안이 들지만 어떤 병원은 1만위안이 들고 수술 후 어떤 병원에서는 도뇨관과 인류관(导尿和引流管)를 사용하지만 어떤 병원에서는 사용하지 않으며 사용하는 병원들마다 그 가격대가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어떤 병원에서는 비용이 적게 들게 하면서도 환자의 동통이 적게 하는가 하면 어떤 병원에서는 비용은 비용대로 받아내면서도 환자가 동통으로 몸부림치게 한다. 병원의 치료비는 탄성이 강한바 이를 놓고 전문가들은 의료부문들에서 병종에 따라 가격대를 정해 고액의 비용에 한해서는 환자가 그 전부를 부담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환자로 하여금 돈을 적게 쓰고도 이상적인 치료효과를 보게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적지 않은 사람들은 현행의 약품구입체계를 두고 새로운 약품종이 나올 때마다 가격농단이 생겨 약값 인하에 불리하게 되기에 의료보험기구와 의료기구 및 의약회사가 공동으로 개혁을 진행하여 병보이기 힘든 상황 및 병원치료비가 높은 현상에 대처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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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4
  • 오묘한 세계대백과 (33)
    호수위로 기차가 달린다? 이런 희한한 현상을 볼까? 이는 확실히 존재하는 일이다. 중국 청해성에는 한 찰한염호가 있다. 이곳은 일찍 한 수역이 넓은 함수호었다. 후에 기후가 건조해짐에 따라 많은 물이 증기로 변하여 날아가 버렸고 호면이 갈수록 작아지다가 나중에는 염호로 변한 것이다. 이 염호의 표면에는 두꺼운 소금층이 있다. 마치 겨울의 호수에 얼음이 언 것과도 같다. 그런데 이 소금층은 얼음에 비해 훨씬 더 견고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30-50cm 두께의 소금층은 평방미터터당 1600kg의 무게를 받아낼 수 있는바 완전히 자동차와 기차가 누르는 무게를 받아낼 수 있다고 한다. 중국 청장도로의 31킬로미터의 구간이 바로 이 찰한염호위에 수건되었고 심지어 32킬로메터의 철도 역시 이 찰한염호위에 부설되어 있다. 가령 자동차와 기차가 이 찰한염호위로 오가는 정경을 보게 되면 아마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찰한염호우의 도로로면 혹은 철도가 파손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연구에 따르면 도로로면 혹은 철도 옆의 소금층에 구멍을 뚫고 호수물이 흘러나와 부단히 파손된 부분에 들어가게 하는데 수분이 증발하면 나머지 소금이 파손된 부분을 고르롭게 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방법은 재료를 절약하고도 효과가 있는 것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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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3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2)
    바빌론유적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이라크, 지점: 바그다드 동남부의의: 바비론문화의 상징임 바빌론유적(巴比伦古城)은 세계 저명한 옛성유적과 인류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약 기원전 1800년과 기원전 600년 사이에 수건, 바빌론과 신바빌론 등 두개의 강한 왕국이 선후로 수건에 참여하였다. 기원전 539년, 페르샤인들이 바빌론성을 점령하면서 이 성은 점차 그제날의 휘황을 잃어갔다. 후에 바빌론성이 사막화가 되면서 도시주민들은 분분히 떠나갔고 사막에는 그제날 휘황했던 바빌론성만이 남았다가 사막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지난 20세기 초엽에 이 “명주”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 다시 볕을 보게 되었다. 공중화원 바빌론의 공중화원은 “현원(悬怨)”으로도 불리며 고대 세계 7대 건축기적 중의 하나이다. 기재에 따르면 이 공중화원은 신바빌론국왕 네자르 (尼撒) 2세가 그의 왕기를 위해 수건한 것이다. 전반 건물은 높이가 25메터로 제형고지의 지세에 근거하여 한층한층의 계단을 만들었으며 매층의 계단마다 모두 작은 화원으로 돼있다. 그리고 화원과 화원 사이에는 작은 집까지 있다. 전반 화원은 공중에 걸려있는듯 하다고 하여 이 화원의 이름을 “공중화원”이라고 불리우게 된 것이다.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통천탑 통천탑은 전설이 아니라 바빌론성에 진짜 존재했던 것으로서 바빌론성의 또 다른 하나의 건축기적이다. 통천탑은 일찍 손상이 된 적이 있었으나 신바빌론왕국이 건립된 후 국왕 네브카드네자르 신(新) 바빌로니아왕 2세가 영을 내려 다시 통천탑을 재건하게 하였다. 재건된 이 통천탑은 습지에 세워졌으며 도합 7층으로 아주 신비한 장소였다. 전한는데 따르면 이 방대한 공사를 진행할 때 벽돌만 해도 5800만장이 들었다고 한다. 이로보아 당년의 통천탑의 웅위롭고 장려함을 쉽게 알 수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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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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