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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은 노동력 공백에 따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에 의한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사실상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021년 6월 말 기준 1,981,035명이다. 그중 서울시 구로구에 체류하고 있는 25,316명 외국인 주민 중 18,190명이 중국동포이다. 기자는 지난 4일 구로구의회 7대 후반기 부의장으로 또한 3선 의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의정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이번 제8대 의회에서도 후반기 의장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외국인 주민 민원이 발생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박동웅 의장을 만나 그동안 의정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동포 및 외국인 주민 관련 정책과 지원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박동웅 구로구의회 의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현재 시행 중에 있거나 계획 중인 중국동포 관련 사업은? A.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보육료를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동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보육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산에서는 아마 시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구로구도 내년부터 보육료 20%가량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국인 주민 자녀들을 조사해보니 약 천명 조금 넘는데 그 아이들에 대해 우선 보육료 20% 정도 지원해주고 차후에는 그냥 100% 지원하는 쪽으로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올해 최초로 이와 관련한 예산 편성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 해에 7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Q. 구민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A. 그런 분들도 있지만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로벌시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구로만, 구로구 사람들만 뭉치는 것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분들도 다 같은 한민족이고 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차별 없이 함께 사회에 흡수돼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민들에게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Q. 지역주민과 중국동포 간 소통과 화합에 대한 모범 답안이 있다면? A. 가리봉을 중심으로 구로구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구로구에는 다문화 정책과가 있는데 중국동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 일본 등 이주민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도 명예 통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또 구로구에는 봉사단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구로 4동 같은 경우는 다문화 봉사자들이 야간 순찰도 하고 있고 다문화 경노당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구로구가 소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근래 산발적으로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상에서 동포들과 구청 간에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Q. 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책은? A. 현재 구로구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분들이 중국동포들이다. 과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 동포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한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책은 정확한 수치를 갖고 하는 것이기에 다문화 정책과에서 우리 동포사회 실태 파악을 다시 해서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Q. 상호우호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문화교류 계획은? A. 한국의 수출 규모를 보면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을 앞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변과 교류(공무원 교류)를 했지만 사실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에는 여러 중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서로 간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 축제 때 해당 국가 도시의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거꾸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축제라든가 행사가 있을 때 우리 구로구에서도 문화예술단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그런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은? A. 현재로서는 일단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안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자체도 K-방역을 통해서 그냥 열심히 뛰고 있지만 우리 구로구에서도 구로구만의 어떤 방향 시스템을 잘 구축해 구로구가 코로나19에서 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돼야 구로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이다. Q. 중국동포에 대한 이해정도는? A. 한 예로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양꼬치와 고량주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젊었을 때 사실 한국에서 투자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사정 때문에 결국 못 들어간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계획 전공이다 보니 연변은 물론 선양, 광저우, 칭다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봤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는 많다고 생각하고 중국 양꼬치를 중국동포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는다고 감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Q. 중국동포에 한 말씀 부탁한다면? A.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그냥 돈을 벌고 살다가 중국으로 가면 된다는 인식보다도 역시 우리 조상의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이 잘 돼야 동포사회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한민족으로 역할을 한다면 지역주민들과 잘 화합할 수 있고 이제 동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생활할 수 있다고 본다. 구로구의장으로서 향후 그 어떤 정책이나 개인적인 꿈도 있겠지만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에 와서 잘 살고 여기에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구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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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92년 11월 18일, 김경도(진징다오·金敬道)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도도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김경도는 축구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뛰어 노는 과정에서 축구에도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다. 연변은 축구의 전반적인 환경이 다른 곳과 다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 후 첫 오락으로 축구를 한다. 이러한 축구 환경에서 많은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경도는 2003년 옌볜(延邊)의 쑹칭링(宋慶嶺) 축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 진징다오의 부모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김경도는 독립적이고 힘든 일을 잘 견디는 품성을 키웠다. 200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첫 국제대회를 치른 김경도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U-20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9년에는 U-20 대표팀 주장을 맡아 사상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소수민족 주장 자리에 올랐다. U-20 대표팀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9년 김경도는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도왔다. 김경도는 경기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니에스타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끝난 뒤 기자가 이니에스타와 연락해 상대방이 사인 유니폼을 선물한 것도 김경도를 오랫동안 기쁘게 했다고 한다. 2010년 김경도는 연변FC에 입단해 클럽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이제 막 입단한 뒤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김경도는 늘 팀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만 했다. 마침 외사촌형인 박성(퍄오청·樸成)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퍄오청은 이때로부터 김경도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국에 일하러 갔고 나는 연변FC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박성은 오래 전부터 축구를 했다. 그는 돈을 괜찮게 벌었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사주었고 체육관에 갈 수 있도록 돈도 대주었다. 그리고 내가 U-20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이 좋은 휴대폰과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그것을 다 사주었다. 나중에는 또 휴대폰과 아이패드까지 사주며 축구를 잘하라고 격려 했다” 이는 사촌형인 박성에 대한 김경도의 평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중국 슈퍼리그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김경도는 벤치에서 나와 성인 남자 국가대표팀 데뷔를 알렸다. 이번 국가 대표팀 경험으로 김경도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쟁탈하는 인기 선수로 됐다. 2013년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산둥 루넝(山東魯能)은 연봉 100만 위안, 이적료 800만 위안에 김경도를 영입했다. 하지만 루넝 합류 이후 김경도는 그렇다 할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궈안과의 첫 경기에서 비정상적인 플레이로 결국 팬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를 격려했고 그가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김경도의 플레이는 매우 어색했다. 김경도의 가장 좋은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풀백이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김경도는 팀과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와 부상 스틸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칭찬을 받았고, 팬들은 점차 그를 받아들였다. 그해 그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마가트 감독은 김경도를 완전히 재탄생시켰다. 마가트는 유명한 "악마 감독"이다. 그는 선수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요구 사항이 매우 높았다. 그는 김경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백으로 변경 시켰다. 김경도는 당시 마가트 감독이 자신에 대한 요구사항이 높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공을 빨리 잡아 다른 사람이 못 따라온다며 볼을 잡으면 상대 측면 수비수를 상대로 돌파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싱한(吳興涵)이나 류빈빈(劉彬彬) 같은 빠른 스피드 돌파가 없었다. 나중에 하오준민(蒿俊閔)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해 시즌 김경도는 윙백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루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은사 마가트 감독은 안타깝게도 팀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김경도 역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ACL 8강 1차전 서울 방문경기를 앞두고 몸에 살코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변검사 양성 판정을 받아 60일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음식에 신경을 썼던 김경도는 충격도 컸지만 선수 생활과 컨디션 유지에는 큰 힘이 됐다. 그 해 김경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11월 13일 김경도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융퍼(王永珀), 왕통(王彤), 송룡(宋龍) 등 동료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루넝도 공식 홈페지를 통해 결혼 축하와 함께 김경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김경도의 감정 또한 매우 로맨틱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를 수년간 알아왔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사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 함께하게 되었다. 2017년 김경도는 징계에서 풀려나 팀에 복귀했고 루넝은 리샤오펑(李霄鵬)감독을 영입했다. 리샤오펑이 부임한 뒤 팀은 파격적인 변신을 하지 않고 마가트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갔다. 김경도 역시 익숙한 윙백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김경도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타르델리 및 펠레와 매우 묵계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종종 도움을 주거나 득점하며 루넝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킬러가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8시즌 김경도의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고강도 달리기, 스퍼트 횟수 1위, 경기당 평균 거리 2위, 가로채기 3위, 경기당 4위라는 맹활약으로 시즌 최고 인기 본토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김경도는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됐고 리피는 물론 가오훙보(高洪波), 리톄(李鐵) 등 본토 감독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다. 다만 리피 시절에는 김경도에 대한 요해가 부족해 기술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김경도 역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리피 감독 후임으로 2021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리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2차예선 40강전 몇몇 경기에서 김경도의 활용에 신경을 썼다. 김경도는 움직임이 좋고 수비 면적이 넓으며 공격은 날카롭다. 현재 김경도는 대표팀 10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격을 갖춘 '프리 맨'이 됐다. 곧 카타르 월드컵 3차예선인 12강전이 시작된다. 12강전에서 절대 주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김경도는 계속 자신의 색깔을 살려 대표팀을 위해 몇 골을 더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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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급 중국 조선족 무용가 김성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많은 사람들이 중국 유명 무용가 김성(金星)을 알지만, 그녀의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중국 무용수 중 한 명인 김성은 25세의 나이에 벨기에 왕립 무용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1995년 이미 유명해진 김성은 군구(軍區)예술단에서 퇴직하고 북경향산병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수술 과정은 장원 감독에 의해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김성'으로 촬영되었다. 23세에 장가들어 28세에 여자로 태어난 김성은 38세에 독일인 한스와 결혼했다. 현재 54세인 그녀의 인생에는 전설로 가득 차 있다. 김성은 1967년 선양의 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남자 목욕탕에 데려가 목욕시키자 김성은 매우 불편함을 느꼈다. 이때부터 김성은 자신의 성 인식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아홉 살 때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학교 문예선전대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군구(軍區)예술단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때로부터 김성은 자신의 내면에 있던 미에 대한 향수가 늘 여성스러움을 깨닫게 되었다. 1985년 군사훈련 멘토 송소원이 제1회 전국 타오리컵(桃李杯) 무용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 그 결과 대회 경험이 전무했던 김성은 탄탄한 기반과 뛰어난 재능으로 400여명이 출전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무용 ‘목가’로 청소년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에서는 최초로 발레화 없이 발가락을 사용할 수 있는 무용수가 됐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겠다는 결심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줄곧 성별의 정체성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내가 언제 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1986년 광둥현대무용학교에서 국비유학생을 미국에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입수한 그는 무작정 광둥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2년 뒤 뉴욕으로 건너가 무용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캐롤라인과 첫 결혼을 했다. 1993년 김성은 귀국 후 중국문화부가 주최하는 전국 현대무용수련반에 초빙되어 중국 현대 무용의 창시자가 되었다. 1995년 영혼과 육체의 분열은 그에게 큰 문제를 가져왔다. 김성은 오랜 시간 고군분투하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장악하기로 했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결심 했다. 김성의 결정은 어머니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 같은 자식이라며 수술이 건강에 지장만 없으면 된다고 말했다. 1999년 김성은 개인의 이름을 딴 중국 최초의 민간 무용단인 '상해김성무용단'을 창단했다. 중국에서 국제 공연 티켓을 판매할 수 있는 곳은 '상해김성무용단'과 '중국곡예단' 두 곳뿐이다. 2004년 무용단을 이끌고 유럽 순회공연을 마친 김성은 귀국길에 독일 신사인 한스를 만났다. 한스는 독특한 동양 여성에게 깊은 매력을 느꼈다. 1년간의 소통 끝에, 그들은 결혼의 궁전에 들어갔다. 결혼 후 세 아이를 입양한 김성은 이젠 엄마와 딸, 그리고 아내가 되어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김성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회는 심리적 인내를 반복적으로 질문하고 지침을 제공하는 투명하고 보이지 않는 심리의사와 같다. 김성은 오직 실력만이 유언비어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진지하게 춤을 추고 있으며 그녀의 유럽공연 티켓은 구하기 어려울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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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환자 위해 한국어 배운 의사 선생님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최근 베이징 지슈이탄(積水潭)병원 안과 병동에 특수 백내장 환자가 입원했다. 환자는 90세 고령의 조선족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귀가 잘 안 들리지 않으며 중국어 대화도 불가능하다. 할머니는 입원하는 동안 딸에 의해 보살핌을 받아왔다. 환자의 딸은 의료진과의 소통을 돕는 '번역기'로 활용할 수 있지만, 가족은 수술실에 들어갈 수 없어 환자가 수술실에 들어간 후에는 언어 장벽이 큰 문제가 된다. 언어 부족으로 수술에 협조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 담당 의사 우이(吳怡)는 수술 전 가족들과 반복적으로 소통하며 수술 중 환자의 협조가 필요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해 환자가 수술 과정을 숙지할 수 있도록 했다. 환자의 가족들 또한 환자에게 협조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종이에 필요한 문구를 쓰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안구 수술의 경우 수술 전 소독을 하려면 환자가 눈을 감아야 하고 수술 중에는 수술 도구가 환자의 눈 안에 있기에 환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므로 유일한 방법은 언어 소통뿐이다. 고민 끝에 우이는 한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수술 중 환자의 협조가 필요할 수 있는 단어를 정리한 후 가족들에게 한국어로 번역해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어 기초가 전혀 없는 그는 발음을 중국어 병음으로 표기하고, 어구의 악센트와 멈춤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 연습한 뒤 서툰 한국어를 구사하며 환자와 소통하려 했지만 할머니는 알아듣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가족들은 억양 때문이라고 우이에게 말했다. 우이 역시 중국어 병음을 병음해 만든 음조가 원음과 크게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우이는 조선족 친구에게 연락해 '보충수업'을 부탁하며 한마디씩 공부했다. 몇 마디가 아니었지만 정확한 발음을 만들고 모두 암기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날 저녁 공부를 마친 우이는 친구들에게 각 문장의 정상 속도와 느린 버전을 녹음해 검토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수술 당일 우이는 중국어 병음으로 표기한 한국어 문구가 적힌 종이를 수술실 벽에 붙이고 친구가 녹음한 '한국어 속성 교재'를 몇 차례 복습한 뒤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간호사들은 침대차에 실려 수술실로 들어온 할머니에게 수술 침대로 옮기라고 손짓했지만 할머니는 간호사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침대차 위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술을 집도한 탕사오화(唐少華)는 우이에게 그동안 학습 성과를 시험해 보라면서 한국어로 환자와 소통하라고 했다. 우이가 환자에게 한국어로 말하자 할머니는 그녀를 쳐다봤지만 옮기지 않았다. 이에 우이는 한국어로 계속 의사소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탕샤오화는 우이에게 다시 해보라고 격려했다. 할머니가 청력이 좋지 않아 잘 못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탕샤오화의 격려에 우이는 환자의 귓가에 대고 두 번 더 큰소리로 말했고 할머니는 결국 움직여 침대차에서 수술 침대로 옮겼다. 이어진 소독과 수술 도중에도 수시로 한국어가 울려 퍼졌고 환자는 우이의 지시에 따라 긴장을 풀고 의사와 호흡을 맞춰 가면서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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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연예계 ‘조선족 왕자’ 맹서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맹서(孟瑞)는 중국 연예계에서 건강한 이미지와 연기력, 좋은 입담을 겸비한 배우 겸 가수·사회자이다. 그는 조선족이라는 점에서 ‘조선족 왕자’로 불린다. 맹서는 2007년 영화 ‘마석산 10용사’에 출연하며 연예계에 데뷔했다. 그는 선후로 드라마 ‘남좌 여우’, 웹 드라마 ‘이건 두라라가 아니야’, 사극 신화 판타지 드라마 ‘물고기 쫓는 전설’, 도시 정감 드라마 ‘10년만 기다려’, ‘힘내라 인턴’, 청춘 멜로 웹 영화 ‘불가항력 남자 하인의 비밀’, 청춘 캠퍼스 웹 드라마 ‘남북 형제’, 사극 웹드라마 ‘약선’ 등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았다. 그리고 음악 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부른 ‘갈매기’ 등 영화 주제곡은 여러 차례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맹서는 2018년 드라마 및 드라마 주제곡 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올해의 우수 드라마 OST’를 거머쥐었다. 1988년 헤이룽장성 쑤이화(蘇化)시에서 태어난 맹서는 수화 2중에 다녔다. 그 후 대학입시에서 구이저우(貴州)대학 연기학과에 1위로 합격해 구이저우대학에서 2년간 공부한 뒤 베이징(北京) 영화학원에서 연기 공부를 했다. 재학 중 ‘5월의 꽃 전국 대학생 문예공연 사회자 대회’ 우승, 구이저우성 최초 연극 전문 경연 대회 연극 부문 2등상을 받기도 했다. 베이징영화학원을 졸업한 후 맹서는 구이저우 TV방송국에 입사, 음식 프로그램의 외부 진행과 영화 종합 프로그램인 ‘추억 극장’의 진행을 맡았다. 데뷔 이후 꾸준한 노력으로 많은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었던 맹서는 TV·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와 주연, 조연들을 연기하며 천부적 재능과 근면함으로 시청자들에게 인생의 백태를 보여주며 연기 인생을 평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0%는 운명이고 70%는 노력이다. 충분히 노력해야 행운도 찾아온다. 맹서는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 나를 즐겁게 하는 동력”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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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 가수·음악 프로듀서 김지문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중화권의 많은 가수 중 편곡과 가창력을 겸비한 조선족 음악 프로듀서가 있다. 그가 바로 김지문(金志文)이다. 1982년생인 김지문은 지린(吉林)시 출신으로 지린예술학원(吉林藝術學院)을 졸업하고 현재 가수, 음악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김지문은 초·중학교 시절 학급의 문예위원으로 활동하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는 우상인 주화건·두덕위·유징칭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이 다가오자 김지문은 어머니의 뜻과 달리 지린예술학원에 진학해 노래를 배웠다. 졸업 후에는 술집에서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르면서 프로 가수에 못지않은 실력을 쌓았다는 후문이다. 김지문은 2002년부터 음악 프로듀서로 활동하면서 많은 인기 클래식을 만들었다. 2006년 그가 작곡한 원 월드 원 드림(One World One Dream)이 올림픽 노래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으며 세상에 알려졌다. 2007년 첫 싱글 앨범 '형제 소문'을 시작으로 2009년에는 두 번째 싱글 앨범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외로워’ 그리고 2010년에는 앨범 ‘도문 강 원’을 발표했다. 2012년에는 저장위성TV의 노래 오디션 프로그램 ‘중국의 고운 목소리’에서 뛰어난 가창력으로 ‘사랑에 미쳐’를 각색해 불러 전국 4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 후 2013년 선전위성TV 음악 콩쿠르 프로그램인 ‘중국음초’(中國音超)에 출연해 ‘음초가왕’(音超歌王) 칭호를 수여받은 그는 같은 해 음악선봉차트 올해의 선두 싱어송라이터상을 수상하였으며 2014년에는 앨범 ‘꿈·집’으로 제18회 중화권 차트에서 신인 음악 프로듀서상을 수상했다. 김지문은 탄탄한 편곡과 창작 능력으로 2017년 노래 ‘옛날 일은 되새길 수밖에 없다’ ‘중국 처녀’로 각각 MTV 글로벌 중화음악축제 최우수 편곡상, 베스트 10 금곡상을 수상했다. 올해에는 싱글 ‘겨울철 지린에서 눈 놀이’를 시작으로 저장위성TV 음악프로그램 ‘천혜의 목소리 시즌2’ 그리고 후베이위성TV 춘제롄환야회에 출연하는 등 왕성한 활동으로 연예계의 한 축을 담당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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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외교의 꽃' 미녀 대변인 - 화춘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외교부는 긴장하고도 엄숙하며 또한 민감한 부문이다. 이러한 부문에서 근무한다는 건 분명 영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자랑스럽기에 앞서 자아관리를 철저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기민하고도 지혜로워야 하며 웅변능력 또한 비범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여성은 바로 웬간한 남자들도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일꾼, 그것도 외교부 대변인이다.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쩍하면 넘겨짚기를 잘하는 중외 기자들 앞에서 때로는 침착하게, 때로는 날카롭고도 당당하게 또한 어떤 경우에는 상냥하고도 겸허하게 기자들 앞에 나서는 그녀 - 화춘영(华春莹)은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1970년 화춘영은 중국 강소 회안의 한 간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화춘영은 별로 간부가정의 자녀라는 우월감을 별로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기 좋아했으며 늘 얼굴에 웃음기를 담고 있는 친절하고도 예의가 바른 소녀였다. 중학교 시절, 화춘영은 학습 성적이 돌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남한테 뒤지는 편도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남자애들이 즐기는 축구운동을 좋아했으며 고중입시를 앞두고는 여학생들을 이끌고 남녀 축구 대 항전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나 할까? 선생님과 동창생들의 눈에는 조용하고도 기타 사심이 없어 보이는 화춘영 - 그한테는 조용한 가운데 강인한 일면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대학교 숙소의 ‘영춘화(迎春花)’로 불렸지만 대학교 4년간 그녀는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극소수 여학생 중의 한명이었다. 이렇게 아련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일면이 있고 또한 다른 측면으로 보면 부드럽기도 한 것이 화춘영의 과거의 주소라면 후에 외교관이 된 다음의 화춘영은 강자 앞에서는 약하지 않고 약자 앞에서는 또한 절대 강하지 않는 것이 외교부 대변인으로서의 현주소였다. 2012년 11월 19일, 당시 42세가 되는 화춘영이 중국외교부 브리핑 장소에 나타나자 장내는 삽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발머리 미녀가 외교부 대변인의 신분으로 나섰으니 말이었다. “드디어 중국에도 미녀외교관이 나타났군 그래.” “그래그래, 미녀이면서도 어딘가 카리스마가 있어” 한편 화춘영의 언변과 실력에 대해 시험대에 올려 보려는 외신 기자들도 없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한 속셈을 가졌던 외신기자들도 눈알이 동그랗게 되면서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날카롭다가도 다시 친절한 화춘영의 언어실력은 장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긴 화춘영은 외교부에 갓 입문한 햇내기가 아니라 이미 거의 20년간 외교전선에서 단련된 외교능수라는 것을 외신기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사실 화춘영이 중국 외교부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3년이었다. 외교부에 입문한 화춘영은 선후로 서 유럽사(司) 과원, 주 싱가포르 대사관 수행인원, 3등비서, 외교부 서 유럽사 3등비서, 부처장, 주 유럽연맹 사절단 2등비서, 1등비서, 참사관, 외교부 유럽사 참사관 등 직에 머물다가 2012년 강유(姜瑜)에 이어 중국 외교부 보도 사 부사장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중국외교부 대변인으로 부임, 중국외교부가 대변인 제도를 건립한 이래 모두 5명의 여성대변인이 탄생했다. 역대 중국외교부의 여성대변인들로는 각각 이금화(李金华), 범혜연(范慧娟), 장계월(章启月), 강유와 화춘영이었다. 알려진데 의하면 화춘영이 외교사업에 종사한 28년 간 유럽사 및 유럽, 아시아 지구에서 근무하면서 비교적 풍부한 외교경험과 양호한 소통능력을 키웠으며 외교부 대변인으로 되기에 매우 합당한 인선이 되었던 것이다. 화춘영은 늘 “나는 최선을 다 하여 모든 이들을 도와 적시 적이고 정확하며 또한 전면 적으로 중국의 외교정책을 요해하게 하는 동시에 나 역시 모든 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며 그리고 양호하게 합작하는 것으로 중국과 세계와의 상호 요해와 이해, 신입과 합작을 추진하기에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하군 했다고 한다. 화춘영은 진실로 그렇게 했다. 2012년 11월 16일, 화춘영은 중국외교부에서 개최한 정례브리핑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에 중국외교부의 신임대변인의 신임으로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 때 그녀는 외교부의 제 27번째 대변인이자 5 번째 여성대변이기도 했다. 당시 자기의 어깨위의 책임이 중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화춘영은 중국과 세계의 관계는 한창 심각한 조정 시기에 있으므로 중국은 세계를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하며 세계 또한 중국을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한다고 표했다. 이어 11월 19일, 화춘영은 정식으로 중국외교부의 정례 브리핑을 주최, 브리핑에서 화춘영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연임 후 첫 출국방문이 아시아태평양 지구를 선택한 것과 중국공산당 제 18 차 당 대회 이래의 중국의 외교정책 등에 관한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면서 논리성이 강한 그녀의 답변과 막힘없는 화술구사는 모든 기자들의 찬탄을 자아내면서 중국의 젊은 여 대변인의 매력과 풍격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그 이튿날 중국 홍콩의 한 매체는 당시의 정경을 두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1월 19일 오후, 외교부의 신임대변인 화춘영이 첫 브리핑을 주최, 20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화춘영은 선후로 10명에 달하는 중외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주었다. 중일관계로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지구 전략 및 향후 어떻게 매체를 대하겠는가 하는 것을 두고 경외 기자들은 불쑥불쑥 ‘도전적’이고도 민감한 문제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으나 신임대변인 화춘영은 기민하고도 자유자재로, 개방되고도 솔직하게 답했으며 난감한 문제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대범하고도 상세하게 답변하여 모든 기자들의 긍정을 받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화춘영은 웃음기가 어린 얼굴을 하고는 처음으로 발언대에 올라 기자들한테 진심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뒤로부터 중국과 외국의 매체의 기사들에는 중국외교부 대변인 화춘영이란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그 이름은 지구촌 방방곳곳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화춘영은 외교부 대변인이란 본직에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이어 2020년 1월 1일, ‘중국부녀’ 편집부로부터 ‘2019년 10대 여성인물’로 평선 되었고 2020년 9월 8일에는 전국 코로나 19 대응 선진개인 및 전국 우수 공산당원으로 선정 되기도 했다. 현재 화춘영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보도사(司) 사장직에서 근무하고 있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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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의 젊음을 과외교육에 바친 오미화 씨
[동포투데이] 오미화 교원(41세)은 조선족 교육사업에 대한 불타는 신념과 의력으로 장장 12년동안 과외교육에 몸과 마음을 이바지하고 있다. 1997년 9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사범분원 한어문(중국어)전업을 졸업한 오미화는 선후로 왕청림업국 조선족학교에서 4년, 한국에서 중국어 강사로 6년동안 활약하면서 번 돈으로 연변자치주 왕청현좋은미래과외학습센터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에 대한 일편단심과 전력투구로 풍성한 성과를 거두어 학부모와 어린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왕청현좋은미래과외학습센터 오미화 교원 과외학습센터를 설립한 첫해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중 양부모가 없는 어린이 8명, 홀부모어린이 10명, 한족 어린이 9명으로서 한족, 결손가정 어린이는 인수의 65%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 결손가정 어린이들은 친척 집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유치원에 다니고 있으며 성격이 활달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우울하고 괴벽했다. 오미화는 결손가정 어린이들에게 늘 사랑으로 어린이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하나하나 녹여주고 부모들이 외국으로 돈벌이를 가고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한 남자애는 늘 집에 가 거짓말을 하여 노인이 교원을 오해하게 하였고 노인이 간혹 어린이의 필기장을 들여다보고는 전후를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담임교원만 탓했다. 오미화는 노인과 어린이에 대한 고까운 생각보다 우선 어린이가 거짓말을 하게 된 원인부터 찾기에 노력했으며 정황을 상세히 요해한 후에는 평소보다 더 따뜻한 사랑을 몰 부었다. 차츰 우울하던 어린이는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선생님을 잘 따르고 학급활동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하루는 “우리 엄마가 한국에서 오면 꼭 선생님께 고운 옷을 사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 오미화의 마음을 울려놓기도 하였다. 오미화는 어린이들의 정황을 요해하기 위해 늘 여유시간을 이용해 어린이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린이들 특히 결손가정 어린이들의 심리를 장악하였으며 자그마한 우점이라고 보이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어주었다.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한 남자애는 주먹이 세고 남의 음식을 잘 빼앗아먹고 수업시간 규율을 지키지 않았으며 다른 애들이 벗어놓은 신을 변기에 처넣기도 했다. 하지만 이 어린이는 반급 청소와 좋은 일을 하는 습관도 있어 오미화는 이와 같은 우점을 칭찬하면서 남을 때리고 욕하는 나쁜 습관만 고치면 반장감이라고 하였더니 그 애는 신심과 용기가 생겨 나쁜 습관을 차차 고치기 시작하였다. 그 어린이가 된 감기에 걸려 학습센터에 오지 못했을 때에도 오미화는 학급 어린이들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담은 과일 구럭을 들고 찾아가 집단의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하여 이 어린이는 학습과 생활면에서 많은 진보를 가져왔으며 소학교에 입학해서는 이제껏 반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오미화의 엄마와도 같은 사랑에 받들려 많은 결손가정 어린이들이 제 궤도에 들어섰고 마음껏 배움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어린이들의 매 하나의 성적과 진보에 학부모들은 너무도 고마워 감사의 마음을 금치 못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오미화의 좋은미래강습과외학습센터는 처음의 50평방미터로부터 300평방미터로 늘어나고 어린이도 처음의 50명으로부터 지금의 150명으로 늘어났으며 교원대오도 처음의 2명으로부터 지금은 10명으로 늘어났다. 이외에도 오미화는 빈곤 어린이들의 학비는 면제해 주거나 1년에 300, 500위안씩 면제해 주어 학부모들의 뒷근심을 덜어주고 있으며 왕청현회중아동애심협회, 왕청현애심어머니협회에도 해마다 500, 1000위안씩 기부하고 있다. 오미화는“학부모들의 인정을 받을 때마다 교원 사업의 신성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고 학부모들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백배로, 천배로 되는 힘을 얻게 된다”라고 하면서 오늘도 후대 양성사업에 혼신을 다 바쳐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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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주 여성도 한국인 ㅡ 이들 위한 대변도 필요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차홍숙 ㅡ 한글로 그녀의 이름은 차홍숙, 국제결혼으로 한국으로 나오기 전엔 중국말 발음으로 그녀의 이름은 처훙수(车红淑)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면 'Hong Sook Cha(홍숙 차)' 불린다.뭐 율무차, 보리차가 있다더니 홍숙차도 있담? 이렇게 같은 사람의 이름이지만 여러 나라의 말로 부르면 달라진다. 그리고 불리기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표정도, 그 말투도 달라질 수 있다. 한 남자의 이름을 김영철이라고 하자. 이 이름은 중국에서도 같은 조선족끼리는 김영철이라고 불리지만 그 남자가 한국에 나오면 김영철이 아닌 진융저(JINYONGZHE)로 불렸었다. 이에 김영철이란 남자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와서까지 중국발음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ㅡ 한국인의 시각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문명하고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보여질지는 모르나 제3국에서 온 사람들의 시각 즉 제 3 자한테서는 한국에 대한 시각이 좀 다르다. 좀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또 한국으로 오기 전에 보던 한국과 정작 한국땅을 밟은 후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이 달라도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3 국에서 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한국말인가 하면 또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도 쌍스러운 말이 한국말이다”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서울이나 여느 대도시의 은행같은 곳에 가서 그런 곳의 직원들의 말씨를 들어보면 얼었던 마음도 다 녹아내릴 정도이다. 친절하고 예의스러우며 거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봉사성…이러한 언행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두 번 세 번 다시 찾아오고 싶어지고 그 직원이 총각이라면 사위로 삼을 생각이 들고 미스라면 며느리로 맞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반대로 한국의 노가다판이라고 하는 작업현장 즉 건설현장이나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선현장 같은 곳에 가면 <개새끼>. <씹팔 놈>…벼라별 추한 말들이 다 오간다. 은행창구의 봉사성과 작업현장에서 오가는 말투, 너무나도 모순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한편 한국은 사회적 차별이 심한 나라이다. 상하 급 사이의 차별, 남녀 사이의 차별 그리고 내국인과 외국인과의 차별, 특히 이주 여성에 대한 차별 … 차홍숙 그녀는 이런 차별을 줄이고 없애기 위한 일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이는 자신이 이주여성이어서 더욱 강했을지도 모른다. 1971년생인 차홍숙씨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할시(黑龙江省齐齐哈尔市)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97년이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수준 차이가 엄청 크게 나던 시기였고 차홍숙씨를 비롯한 많은 중국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결혼의 선망대상으로 쳐다보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으로 와서 보니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다. 한국사회는 차별이 심했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중국출신 동포라고 기시하고 업신 보고 비웃고, 또한 이주여성이 낳은 자녀까지도 이런 불행을 당하군 했다. “결혼초기에는 한국과 중국은 사회와 문화가 서로 다르기에 웬간하면 참으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려는 여성들이 많았어요. 헌데 서로 문화가 다른 차원이 아니라 너무 심하고 억지였어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들을 보면 폭언 폭행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었지요. 돈 주고 사왔으니 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남성들이 많았고 아니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든 여성,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여성 등으로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만거죠.” 하다면 중국에서 남녀평등과 <절반 하늘(半边天)>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가치관으로 인생을 영위해오던 차홍숙한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고 참고 넘어갈 것도, 그냥 보고 지나쳐 버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순 자신만을 위해 적당히 참기도 하고 적당히 반발하기도 하였으며 또 적당히 타협하면서 이른바 <이주여성 인권찾기 운동>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헌데 이렇게 나서고 보니 주변에는 이렇게 당하며 살고 있는 결혼이주 여성이 너무도 많았다. ● 70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 30대의 베트남 여성은 결혼 후 수시로 언어폭행에 시달렸으며 수시로 생활비를 바쳐야 했고 지어는 여성의 동생한테도 생활비를 강요하는 일이 생겼다. 또 겨울에는 뜨거운 물도 못쓰게 했다… ● 2007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출신 여성 쏙카(가명)는 결혼생활 3년부터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밭에서 같이 일하려고 내가 돈 주고 널 데려왔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이와 함께 캄보디아 친정에 다녀온 뒤부터 머리카락을 걸머지고 벽에 밀거나 손에 잡히는대로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울면서 말리자 남편은 밖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티브이(TV) 볼륨을 크게 높혀 놓고 쏙카를 때리기까지 했다. … 한국인 남성ㅡ 위의 첫 번째 사례로 70대로서 30대 여성을 아내로 맞았으면 오히려 감지덕지 해야 할 일이지 그런 아내를 학대하고 생활비까지 내라고 억지 부리다니?!…그럼 한국 남성은 그렇게 대단한가? 요즘 세월에 한국인 남성이 중국 조선족 여성한테 장가들자고 해보라. 턱도 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마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부분적 한국인 남성들한테는 <삼척> 경향이 아주 농후하다고 한다. 강원도의 삼척이 아니라 이런 남성들한테는 <몰라도 아는 척>, <못나도 잘난 척>, <없어도 있는 척>이라는 <삼척>을 말한다. 자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한가?! 팔이 네 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하루 열끼씩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건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고 한 것이고 눈이란 살가죽이 모자라 박아넣은 장식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조 이삭은 염글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다시 원 화제로 돌아와 이상 두 가지 사례는 전반 한국사회로 놓고 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며 결코 남의 가정의 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차홍숙씨는 자기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는 이런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충동을 가지게 됐다. 현재 차홍숙씨는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찾아가는 봉사단)원으로 활동,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관악구을 다문화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찾봉사단은 주로 중국동포와 결혼이주여성으로 구성 지역사회에서 찾아가는 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10년간의 다문화 봉사, 문화활동을 통해 차홍숙씨는 이주여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고충과 상처를 알게 됐고 그녀 역시 이주여성으로 그들과 똑같은 불행을 겪은 여성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차홍숙씨는 결혼이주 여성들도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자질향상에도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현재 60% 이상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보고 쓰고 읽을 줄은 알지만 그 뜻을 몰라요. 예하면 알림장이 오면 읽지만 내용은 몰라요.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통지서같은 것이 와도 자녀들의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애들한테 왕따당하거나 심지어 폭행당하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한테 도움을 주려고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아요. 마음을 열지 않는거죠. 어찌보면 외국인이라서 소외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한거죠. 즉 외국인이라서 가정에서도 차별받는데 사회에 나가서야 더 이를데 있냐 하는 것이죠.” 이렇게 언급한 차홍숙씨는 이주여성 즉 다문화 가정과의 1 대1의 맨토링(助言)하면서 1대 1로 그들과 대화하고 김치 등 반찬 만드는 방법같은 것을 가르쳐 주면서 끈질기게 손을 내밀면 그들도 언제가는 마음을 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고민을 해보군 한단다. “1 : 1 멘토링은 폭언, 폭행과 고부갈등 및 자녀의 진로 해결 그리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복지로 연결시켜 주는 주요한 <그린 통로>이죠. 자녀들의 진로문제 등 공지사항을 단톡방에 올리면 일부 한국인 남편들은 ‘이런데는 우린 안가도 돼, 이런데는 못사는 사람만 가는데야’하고 으스대는데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예요. 기실 자신도 최하층에서 겨우 버티며 살면서 말이죠. 일각에서는 다문화가정이란 호칭부터가 차별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리는 있지만 저의 관점은 달라요. 홍길동이면 어떻고 홍길남이면 어떻냐구요. 호칭이 바뀌지만 시선이 바뀌지 않고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차별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요즘들어 자주 이주여성이나 중국동포 출신 여성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출마 등 정치참여가 아주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차홍숙씨이다. “앞으로 철저한 선별과 검증을 거쳐 진짜로 자격이 있는 이주여성 후보들이 많이 나와 단 한 분이라도 구의원, 시의원과 더 나아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동포나 이주민 여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우리 또한 스스로가 이미지 개선에 힘써야 해야죠. 공익행사, 봉사활동에도 자주 참가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또한 동포라서 외국인이라서 깔본다는 등 소외된 감정과 차별과 무시를 받는다는 억울함이 있더라도 당당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차홍숙씨는 각 국의 문화나 생활을 체험하고 서로가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이주여성들의 시부모 혹은 친정 부모들로 주축이 된 경로당 설립과 그 활성화, 동포나 이주여성들만 끼리끼리 어울리지 말고 본토인들과도 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면서 살았으면 하는 등 이런저런 여러 가지 대안들을 내놓기도 했다. 일개의 결혼이주 여성으로부터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 단원,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 위원장으로 되기까지 처음부터 그 어떤 목적을 갖고 <욕심>을 부린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뜻하지 않던 일에 자주 맞다들게 되고 그것을 타개하면서 사노라니 오늘까지에 이른 게 아닐까? 여하튼 차홍숙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 부분적 한국인들에게 따끔한 말 몇 마디 하고 싶다. 이는 이 글의 주인공 차홍숙씨의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ㅡ 역사가 깊고 찬란한 문화도 있다. 하지만 굴욕의 역사도 많다. 특히 근대에 와서 일본한테 36년간이나 짓밟히면서도, 아들딸들이 학도병이나 정신대에 끌려가도 그걸 막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조상들이다. 광복, 그것도 대한민국 자체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그 댓가로 나라가 두 동강으로 토막 나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견으로 되고 있는 한국남성들은 떳떳해야 하지만 거들먹 거리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적어도 힘없고 나약한 여성들한테 큰 소리 치지 말고 주먹을 휘두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한국인? 그렇게 대단하고 우월한 것일가. 그제날의 굴욕의 역사는 그만 두고라도 오늘의 한국도 그렇게 행복한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집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1개 회원국 중 23위였고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꼴지였으며 한국인의 자살률은 2003년 이래로 OECD 회원국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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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은 노동력 공백에 따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에 의한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사실상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021년 6월 말 기준 1,981,035명이다. 그중 서울시 구로구에 체류하고 있는 25,316명 외국인 주민 중 18,190명이 중국동포이다. 기자는 지난 4일 구로구의회 7대 후반기 부의장으로 또한 3선 의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의정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이번 제8대 의회에서도 후반기 의장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외국인 주민 민원이 발생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박동웅 의장을 만나 그동안 의정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동포 및 외국인 주민 관련 정책과 지원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박동웅 구로구의회 의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현재 시행 중에 있거나 계획 중인 중국동포 관련 사업은? A.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보육료를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동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보육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산에서는 아마 시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구로구도 내년부터 보육료 20%가량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국인 주민 자녀들을 조사해보니 약 천명 조금 넘는데 그 아이들에 대해 우선 보육료 20% 정도 지원해주고 차후에는 그냥 100% 지원하는 쪽으로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올해 최초로 이와 관련한 예산 편성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 해에 7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Q. 구민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A. 그런 분들도 있지만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로벌시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구로만, 구로구 사람들만 뭉치는 것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분들도 다 같은 한민족이고 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차별 없이 함께 사회에 흡수돼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민들에게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Q. 지역주민과 중국동포 간 소통과 화합에 대한 모범 답안이 있다면? A. 가리봉을 중심으로 구로구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구로구에는 다문화 정책과가 있는데 중국동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 일본 등 이주민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도 명예 통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또 구로구에는 봉사단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구로 4동 같은 경우는 다문화 봉사자들이 야간 순찰도 하고 있고 다문화 경노당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구로구가 소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근래 산발적으로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상에서 동포들과 구청 간에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Q. 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책은? A. 현재 구로구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분들이 중국동포들이다. 과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 동포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한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책은 정확한 수치를 갖고 하는 것이기에 다문화 정책과에서 우리 동포사회 실태 파악을 다시 해서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Q. 상호우호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문화교류 계획은? A. 한국의 수출 규모를 보면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을 앞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변과 교류(공무원 교류)를 했지만 사실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에는 여러 중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서로 간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 축제 때 해당 국가 도시의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거꾸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축제라든가 행사가 있을 때 우리 구로구에서도 문화예술단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그런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은? A. 현재로서는 일단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안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자체도 K-방역을 통해서 그냥 열심히 뛰고 있지만 우리 구로구에서도 구로구만의 어떤 방향 시스템을 잘 구축해 구로구가 코로나19에서 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돼야 구로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이다. Q. 중국동포에 대한 이해정도는? A. 한 예로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양꼬치와 고량주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젊었을 때 사실 한국에서 투자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사정 때문에 결국 못 들어간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계획 전공이다 보니 연변은 물론 선양, 광저우, 칭다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봤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는 많다고 생각하고 중국 양꼬치를 중국동포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는다고 감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Q. 중국동포에 한 말씀 부탁한다면? A.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그냥 돈을 벌고 살다가 중국으로 가면 된다는 인식보다도 역시 우리 조상의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이 잘 돼야 동포사회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한민족으로 역할을 한다면 지역주민들과 잘 화합할 수 있고 이제 동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생활할 수 있다고 본다. 구로구의장으로서 향후 그 어떤 정책이나 개인적인 꿈도 있겠지만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에 와서 잘 살고 여기에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구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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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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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98세 “쿵푸 할머니” 온라인 돌풍
-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최근 한 지역 모임에서 무술을 시연하는 98세 중국 “쿵푸 할머니”의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44만 번 이상 조회되고 4,500개 이상의 좋아요가 쏟아지는 등 순식간에 히트를 치고 있다. “쿵푸 할머니”의 팬들은 “98세에도 걸을 수 있을까. 쿵푸가 장수의 관건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심지어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 대해 "쿵푸 정신은 늙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주목했다. 본명이 장헥셴(張鶴仙)인 “쿵푸 할머니”는 2017년에 이미 명성을 얻었지만 거의 10년 동안 고향인 저장(浙江)성 닝하이(寧海)현 장컹(張坑)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이 영상이 유튜브에 퍼지자 조카딸은 “할머니는 이제 중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하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키는 약 1.5미터이다. 그의 쿵푸 동작은 유창하고 걸음걸이는 꾸준하다. 할머니의 마을은 쿵푸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고 할머니는 5살 때 중국 남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무술 스타일인 장복싱의 6대 계승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는 매일 연습했다. 지금은 나이도 들고 힘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아직 원기 왕성하다”고 말했다. “쿵푸는 폭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평생 농부인 할머니는 이웃들과도 잘 지낸다. 막내아들인 펑은 “어머니는 항상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을 돕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3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모두 닝하이현에서 근무하고 있다. 닝하이현은 마을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다. 할머니는 남편이 사망한 2012년부터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의 삶은 평범하지만 잘 짜여져 있다. 할머니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매일 세 끼의 요리를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해산물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가끔 친구들을 찾아가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오후에는 쿵푸 연습을 한다. 장컹 마을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할머니의 집은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식료품을 사러 나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등산이 필요하다. 언덕을 오르면서 꾸준히 하는 운동이 할머니가 정력이 왕성한 원인일 수 있다. 펑은 “어머니에게 도시에서 함께 살기를 요청했지만 어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즐겼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할머니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쿵푸 할머니”는 아버지의 장복싱 스타일을 주말과 휴일에 집에 오는 손주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최근 이웃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무술 수업을 개설했다는 소식을 접한 할머니는 자원해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펑은 어머니와 가족들은 “쿵푸 정신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고 그것이 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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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98세 “쿵푸 할머니” 온라인 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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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92년 11월 18일, 김경도(진징다오·金敬道)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도도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김경도는 축구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뛰어 노는 과정에서 축구에도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다. 연변은 축구의 전반적인 환경이 다른 곳과 다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 후 첫 오락으로 축구를 한다. 이러한 축구 환경에서 많은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경도는 2003년 옌볜(延邊)의 쑹칭링(宋慶嶺) 축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 진징다오의 부모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김경도는 독립적이고 힘든 일을 잘 견디는 품성을 키웠다. 200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첫 국제대회를 치른 김경도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U-20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9년에는 U-20 대표팀 주장을 맡아 사상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소수민족 주장 자리에 올랐다. U-20 대표팀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9년 김경도는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도왔다. 김경도는 경기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니에스타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끝난 뒤 기자가 이니에스타와 연락해 상대방이 사인 유니폼을 선물한 것도 김경도를 오랫동안 기쁘게 했다고 한다. 2010년 김경도는 연변FC에 입단해 클럽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이제 막 입단한 뒤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김경도는 늘 팀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만 했다. 마침 외사촌형인 박성(퍄오청·樸成)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퍄오청은 이때로부터 김경도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국에 일하러 갔고 나는 연변FC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박성은 오래 전부터 축구를 했다. 그는 돈을 괜찮게 벌었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사주었고 체육관에 갈 수 있도록 돈도 대주었다. 그리고 내가 U-20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이 좋은 휴대폰과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그것을 다 사주었다. 나중에는 또 휴대폰과 아이패드까지 사주며 축구를 잘하라고 격려 했다” 이는 사촌형인 박성에 대한 김경도의 평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중국 슈퍼리그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김경도는 벤치에서 나와 성인 남자 국가대표팀 데뷔를 알렸다. 이번 국가 대표팀 경험으로 김경도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쟁탈하는 인기 선수로 됐다. 2013년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산둥 루넝(山東魯能)은 연봉 100만 위안, 이적료 800만 위안에 김경도를 영입했다. 하지만 루넝 합류 이후 김경도는 그렇다 할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궈안과의 첫 경기에서 비정상적인 플레이로 결국 팬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를 격려했고 그가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김경도의 플레이는 매우 어색했다. 김경도의 가장 좋은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풀백이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김경도는 팀과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와 부상 스틸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칭찬을 받았고, 팬들은 점차 그를 받아들였다. 그해 그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마가트 감독은 김경도를 완전히 재탄생시켰다. 마가트는 유명한 "악마 감독"이다. 그는 선수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요구 사항이 매우 높았다. 그는 김경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백으로 변경 시켰다. 김경도는 당시 마가트 감독이 자신에 대한 요구사항이 높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공을 빨리 잡아 다른 사람이 못 따라온다며 볼을 잡으면 상대 측면 수비수를 상대로 돌파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싱한(吳興涵)이나 류빈빈(劉彬彬) 같은 빠른 스피드 돌파가 없었다. 나중에 하오준민(蒿俊閔)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해 시즌 김경도는 윙백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루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은사 마가트 감독은 안타깝게도 팀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김경도 역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ACL 8강 1차전 서울 방문경기를 앞두고 몸에 살코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변검사 양성 판정을 받아 60일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음식에 신경을 썼던 김경도는 충격도 컸지만 선수 생활과 컨디션 유지에는 큰 힘이 됐다. 그 해 김경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11월 13일 김경도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융퍼(王永珀), 왕통(王彤), 송룡(宋龍) 등 동료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루넝도 공식 홈페지를 통해 결혼 축하와 함께 김경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김경도의 감정 또한 매우 로맨틱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를 수년간 알아왔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사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 함께하게 되었다. 2017년 김경도는 징계에서 풀려나 팀에 복귀했고 루넝은 리샤오펑(李霄鵬)감독을 영입했다. 리샤오펑이 부임한 뒤 팀은 파격적인 변신을 하지 않고 마가트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갔다. 김경도 역시 익숙한 윙백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김경도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타르델리 및 펠레와 매우 묵계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종종 도움을 주거나 득점하며 루넝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킬러가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8시즌 김경도의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고강도 달리기, 스퍼트 횟수 1위, 경기당 평균 거리 2위, 가로채기 3위, 경기당 4위라는 맹활약으로 시즌 최고 인기 본토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김경도는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됐고 리피는 물론 가오훙보(高洪波), 리톄(李鐵) 등 본토 감독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다. 다만 리피 시절에는 김경도에 대한 요해가 부족해 기술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김경도 역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리피 감독 후임으로 2021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리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2차예선 40강전 몇몇 경기에서 김경도의 활용에 신경을 썼다. 김경도는 움직임이 좋고 수비 면적이 넓으며 공격은 날카롭다. 현재 김경도는 대표팀 10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격을 갖춘 '프리 맨'이 됐다. 곧 카타르 월드컵 3차예선인 12강전이 시작된다. 12강전에서 절대 주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김경도는 계속 자신의 색깔을 살려 대표팀을 위해 몇 골을 더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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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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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급 중국 조선족 무용가 김성
-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많은 사람들이 중국 유명 무용가 김성(金星)을 알지만, 그녀의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중국 무용수 중 한 명인 김성은 25세의 나이에 벨기에 왕립 무용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1995년 이미 유명해진 김성은 군구(軍區)예술단에서 퇴직하고 북경향산병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수술 과정은 장원 감독에 의해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김성'으로 촬영되었다. 23세에 장가들어 28세에 여자로 태어난 김성은 38세에 독일인 한스와 결혼했다. 현재 54세인 그녀의 인생에는 전설로 가득 차 있다. 김성은 1967년 선양의 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남자 목욕탕에 데려가 목욕시키자 김성은 매우 불편함을 느꼈다. 이때부터 김성은 자신의 성 인식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아홉 살 때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학교 문예선전대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군구(軍區)예술단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때로부터 김성은 자신의 내면에 있던 미에 대한 향수가 늘 여성스러움을 깨닫게 되었다. 1985년 군사훈련 멘토 송소원이 제1회 전국 타오리컵(桃李杯) 무용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 그 결과 대회 경험이 전무했던 김성은 탄탄한 기반과 뛰어난 재능으로 400여명이 출전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무용 ‘목가’로 청소년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에서는 최초로 발레화 없이 발가락을 사용할 수 있는 무용수가 됐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겠다는 결심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줄곧 성별의 정체성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내가 언제 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1986년 광둥현대무용학교에서 국비유학생을 미국에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입수한 그는 무작정 광둥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2년 뒤 뉴욕으로 건너가 무용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캐롤라인과 첫 결혼을 했다. 1993년 김성은 귀국 후 중국문화부가 주최하는 전국 현대무용수련반에 초빙되어 중국 현대 무용의 창시자가 되었다. 1995년 영혼과 육체의 분열은 그에게 큰 문제를 가져왔다. 김성은 오랜 시간 고군분투하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장악하기로 했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결심 했다. 김성의 결정은 어머니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 같은 자식이라며 수술이 건강에 지장만 없으면 된다고 말했다. 1999년 김성은 개인의 이름을 딴 중국 최초의 민간 무용단인 '상해김성무용단'을 창단했다. 중국에서 국제 공연 티켓을 판매할 수 있는 곳은 '상해김성무용단'과 '중국곡예단' 두 곳뿐이다. 2004년 무용단을 이끌고 유럽 순회공연을 마친 김성은 귀국길에 독일 신사인 한스를 만났다. 한스는 독특한 동양 여성에게 깊은 매력을 느꼈다. 1년간의 소통 끝에, 그들은 결혼의 궁전에 들어갔다. 결혼 후 세 아이를 입양한 김성은 이젠 엄마와 딸, 그리고 아내가 되어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김성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회는 심리적 인내를 반복적으로 질문하고 지침을 제공하는 투명하고 보이지 않는 심리의사와 같다. 김성은 오직 실력만이 유언비어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진지하게 춤을 추고 있으며 그녀의 유럽공연 티켓은 구하기 어려울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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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급 중국 조선족 무용가 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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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유명 거사(居士)화가 탕위밍
-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유명한 화가 탕위밍(湯餘銘)은 중국 영화배우 탕웨이의 아버지이다. 탕위밍의 작품은 구하기 어렵다. 탕위밍은 1990년대부터 중국 스타일과 서양 스타일을 결합한 독특한 3 차원 작품을 제작했다. 필명은 북안산(北安山)이다. 원저우(溫州) 러칭(樂淸)출신인 그는 전문 미술가로 현재 거사 전문화가 1인자로 불리며 세계문화유산예술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은 매우 높은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화가들의 귀감이 되고 벤치마킹해 그림 애호가들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탕위밍은 '신부춘강산거도(新富春江山居圖)'에 참여했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람이고, 명리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도 가장 돋보이고 존경하는 곳이다. 일부 대가들에 비해 직업적으로 높은 프로정신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탕위밍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산수화를 그리는 데는 능숙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의 거사 회화다. 그의 작품은 불학적인 매력을 주면서도 과장되지 않은 느낌을 준다. 정직한 사람이라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자신만의 매력이 배어 있다. 탕웨이밍으로서도 딸 얘기를 할 때마다 뿌듯했다. 탕웨이는 지금의 이름값도 대단했고, 탕웨이밍에게 딸의 성장과 성취를 보여주기도 했다. 딸이 자신보다 이름값을 많이 한다고 해서 탕웨이밍이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탕위밍은 화계의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로, 회화 작품도 많은 기관에서 사랑을 받아 현재 세계문화유산예술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불교문화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고 있는 그에게 불교문화와 중국 문화유산을 칭송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할 일이다. 탕위밍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술에 대한 추구나 신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탕위밍은 회화 예술에 대해 높은 이해와 추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 역시 사람들이 존경하는 점이다. 중국 여배우인 탕웨이는 1979년 10월 7일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에서 태어났다. 2000년 중앙연극학원 연출학과 본과에 입학했다. 2007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리안 감독의 '색·계'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2010년 미니시리즈 영화 '월만 헤네시'에 출연해 중화권 영화미디어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탕웨이는 2011년 영화 '만추'로 한국백상예술대상, 한국영화평론가상, 부산영화평론가상 등 10여 개 부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13년 '베이징에서 시애틀을 만나다'는 중화권 로맨스 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우며 상하이 영화평론가상, 중국영화감독협회, 베이징대학생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2014년 탕웨이는 영화 '황금시대'에 주연으로 출연하였으며 2015년에는 영화 '블랙 코드'에 출연했다. 2016년에는 주연 멜로 영화 '베이징에서 시애틀을 만나다'가 7억 9000만 위안의 흥행 성적을 거두며 중화권 멜로 영화 흥행 기록을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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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유명 거사(居士)화가 탕위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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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주여성연합회 왕지연회장 [2014 글로벌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수상
-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한국이주여성연합회 왕지연 회장이 지난 27일(토) 오후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2014 글로벌 자랑스런한국인대상’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국제언론인클럽(GJCNEWS)과 사)GK희망공동체가 주최한 '2014 글로벌 자랑스런한국인대상 시상식'이 27일 오후 1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수상자와 연예인, 언론 관계자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시상식은 한국과 국제 분야에서 활동 중인 단체와 개인의 사회기여도와 공헌 정도를 심사해 그 노고를 격려하고 자긍심을 갖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상이 이뤄졌다. 이번 시상에서 대상을 받은 한국이주여성연합회 왕지연 회장은 중국 산동성 칭다오시 출신으로 한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슬하에 두 아이를 두고 있다. 그는 고부간의 갈등을 근면 성실과 효심으로 극복하여 안정된 가족관계를 회복한 대표적인 모범사례로 인증 받았다. 2010년 한국이주여성연합회를 결성하고 안전행정부, 지방자치단체, 사회공헌기업 등의 사회적 지원 및 공익성 지원금을 유치하여 27개 이상의 다문화가정 지원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현장 중심적 사회사업가로 거듭나고 있다. 왕지연 회장은 이날 “먼저 상을 받게 돼서 기쁘다. 앞으로 다양한 사회활동을 병행하면서 남다른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다문화 사회의 성공모델이 되어 대표적인 다문화 여성 리더가 되고 싶다"고 소감과 함께 야심찬 각오를 밝혔다. 그 외에 2014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수상자는 사)서울화교협회 이충헌회장, 새누리당 안홍준 국회의원, 함진규 국회의원 , 김동완 국회의원 , 조우성 경남 도의회부회장, 민주평화통일 신상수자문위원, 주)고천건설 윤영선대표, 새론기획 유병일대표, 뮤직라인 이나영, 사)아시아모델협회 조우상회장 ,고운우리옷 이춘섭대표, SM성형외과 이무영원장, 충남천안수퍼마켓 협동조합 변인석이사장, 주)한국문화촌 윤재웅대표, GWP코리아 지원욱본부장, 주)더엠에스 현종화대표, 주)싱크유건축디자인사무소 김종해소장, 미시즈월드내셔널디렉터 송지연대표, 주)뉴스와인 윤은섭대표, 주)정현 박영석대표, 기업은행 김종완센터장, 주)삼성공조 고호곤대표, 이건영세무회계사무소 이건영대표, 외국인자율방법연합회 차재봉회장, 한국다문화영상예술협회 오흔회장, 한국이주여성연합회 왕지연회장, 태허림 태허손외경, 개그우먼(방송인,교수) 정재윤, 한스엔터프라이즈(방송인) 안지민대표, 주)테크피아 서동범대표, 뉴시스헬스 최명규대표, 한국온라인홍보마케팅연구소(데일리연합) 김용두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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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주여성연합회 왕지연회장 [2014 글로벌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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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소리꾼 노경미, 불교 범패 음반 "깨침의 소리" 발표
-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경기명창 노경미가 불교 범패(梵唄) 음반 ‘깨침의 소리’(신나라 뮤직)를 발표했다. 음반에는 범패 ‘복청게’, ‘천수바라’, ‘도량게’, ‘다게’, ‘향수나열’, 그리고 ‘사다라니바라’ 등 총 11곡이 실려 있다. 모두 홋소리로 부른 범패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 서울시 지정 무형문화재 제21호 휘몰이잡가 이수자인 노경미는 경기소리꾼이다. 범패를 부르는 범패 소리꾼이 아니라 40년 넘는 세월 동안 민요와 잡가를 주업으로 해왔다. 그런데 그녀의 공연 무대에는 여타 경기 소리꾼들과는 다른 레퍼토리(연주곡목)가 늘 고정적으로 오른다. 하나는 범패이고, 하나는 휘몰이잡가다. 범패(梵唄)는 불가의 성악을 말한다. 범패는 말 그대로 인도 바라문(婆羅門.브라만)의 소리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부처의 소리(音)를 의미한다. 범패는 가곡, 판소리와 함께 3대 성악곡으로 분류됐다. 홋소리, 짓소리, 화청으로 구분되며, 이 가운데 화청을 제외한 홋소리와 짓소리는 전문 범패승이 아니면 좀처럼 부르기 힘든 소리라서 범패승조차도 웬만하면 축약해 부르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노경미는 화청에 더해 홋소리 범패를 공연 무대에서 선보여 왔다. 그녀의 범패가 처음부터 대중들의 눈과 귀를 잡아맨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경기소리를 듣고자 했던 많은 청중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세속과 소통하며 대중화된 화청이나 소릿조 회심곡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원곡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한테 원곡은 때론 낯섦 그 자체였다. 하지만 노경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원곡이 갖는 가치와 중요성을 관객들한테 전했고, 이런 노력이 결국 관객의 마음을 열게 했다. 그녀가 부르는 범패는 종묘제례악, 가곡, 판소리 등과 함께 ‘영산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원형 예술 보존과 창조적 계승에 대한 노경미의 남다른 열정과 고집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노경미의 범패는 종교적인 원숙미, 불교적 신비감에 더해 수십 년 이상 지켜온 경기소리꾼만이 지닌 특유의 시김새에서 나오는 음악적 정갈함과 단아함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 이유로 어쩌면 범패승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음악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범패라고 할 수 있다. 노경미의 불교음악이 여타 불교음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음악성에 더해 국보급 반주자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 때문이다. 노경미는 민요나 잡가와 달리 불교음악 연주만큼은 최고의 기량을 가진 연주자만을 고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연주자들의 소리에 그녀의 목소리를 태울 때 묘음(妙音)이 완성되고 그것이 사바(娑婆)의 대중들을 움직일 수 있다 믿고 있으며, 이러한 음악철학이 그녀의 불교음악에 내재해 있다. 이번 음반 작업에서도 그녀의 이 같은 음악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대금과 피리는 대금산조 인간문화재인 이생강 명인과 그의 아들이자 대금산조 전수교육조교인 이광훈이, 북과 태징은 김포 승가대학교 교수이자 쌍암사 주지인 성마 스님이 각각 연주했다. 또한, 장고 및 꽹과리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휘몰이잡가 인간문화재인 박상옥 명창이 반주했다. 이 밖에도 태평소에 김필홍, 장고에 이관웅, 가야금 오주영, 해금 신현석, 건반 김쥬리 등 중견급 명인들이 참여했다. 노경미가 소리꾼이 된 배경은 부친의 시조창이나 상엿소리, 할머니의 민요 가락 등을 들으며 자란 환경이 크다. 그녀는 이미 나이 20대에 대중가요 음반을 취입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20대 중반부터 김경희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박상옥 명창에게는 휘몰이잡가를 배워 이수자가 되었으며 이은주 명창에게는 경기12좌창을 사사해 경기민요 이수자로 활동하고 있다. 실기뿐 아니라 학구열도 높아 늦은 나이에 대학원을 졸업하기도 했다. 노경미의 소리는 언제 들어도 높고 시원한 발성이 인상적이며 긴 호흡으로 다이내믹을 살려 나가는 역동성이 가히 일품이다. 제25회 전주대사습놀이 민요부 장원, 전국국악경연대회 대구국악제 종합 명인부 대상, 그리고 그의 이름을 걸고 꾸준히 개최해온 개인발표회 등을 통해 그의 공력을 느낄 수 있다. <수록곡> 노경미 불교음악-깨침의 소리 No, Kyoung Mi Buddhistical Music-Enlightened Sound 범패(梵唄)와 작법무(作法舞), 회심곡(回心曲) Bumpae and Jakbeopmoo, Hoesimgok 1. 복청게(伏請偈) Bokcheonggae 03:27 소리: 노경미 2. 천수바라(千手哱囉) Cheonsubara 04:57 소리: 노경미. 북, 태징: 성마 스님. 태평소: 김필홍 3. 도량게(道場偈) Doryanggae 06:28 소리: 노경미. 북, 태징: 성마 스님. 태평소: 김필홍 4. 다게(茶偈) Dagae 06:48 소리: 노경미. 북, 태징: 성마 스님. 태평소: 김필홍 5. 향수나열(香需羅列) Hyangsunayeol 05:50 소리: 노경미 6. 사다라니바라(四陀羅尼哱囉) Sadaranibara 04:09 소리: 노경미. 북, 태징: 성마 스님. 태평소: 김필홍 7. 회심곡1(불가조) 回心曲1 (佛歌調) Hoesimgok I(Bulgajo) 09:42 소리: 노경미. 꽹과리:박상옥 8. 회심곡2(소릿조) (回心曲2) Hoesimgok II(Soritjo) 09:10 소리: 노경미. 꽹과리: 박상옥 9. 탑(塔)돌이 Tapdori 05:26 소리: 노경미. 대금, 피리: 이생강. 장고: 이관웅. 가야금:오주영. 해금: 신현석. 건반: 김쥬리 10. 산염불(山念佛) , 잦은염불(念佛) Sanyeombul, JaJeunyeombul 04:47 소리: 노경미. 피리: 이생강. 대금: 이광훈. 장고: 이관웅. 가야금: 오주영. 해금: 신현석. 건반: 김쥬리 11. 제전(祭奠) Jejeon 06:56 소리: 노경미. 장고: 박상옥 Total Time / 01:07:37 녹음 날짜: 2014년 2월 9일~2014년 10월 27일 프로필 노경미(본명 노말임) 경남 남해 출생 <사사> 이은주 선생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박상옥 선생 (서울시 지정 무형문화재 제21호 휘몰이잡가 보유자) 故 김경희 선생 (판소리 및 남도민요) 현범수 선생(선소리 산타령 제19호 이수자) 성마 스님-승가대학 교수 (불교음악 범패) 진유림. 박근식 선생 (한국무용) <수상 경력> 제25회 전주 대사습놀이 민요부 장원 전국 경서도 민요경창대회 명창부 장원 전국 국악 경연대회 대구 국악제(종합 명인부 대상) <음반> 1969년 대중가요 갈대꽃. 돌아와 주오 독집 출반(도미도 레코드) 1999년 노경미 경기민요 독집 음반 (서울 음반) 2010년 3월 고양시 타령 음반 2012년2월 노경미 휘모리잡가 완창. 변강쇠타령 (Heritage Gramophone) 2012년 2월 노경미 경기 12잡가 완창 (Heritage Gramophone) 2012년 10월 고양 아리랑 음반 2014년 11월 노경미 불교음악-깨침의 소리 (신나라뮤직) <현재>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 서울시 지정 무형문화재 제21호 휘몰이잡가 이수자 (사)고양시 국악협회 부지부장 (사)경기잡가 포럼 이사장 맑은 소리샘 국악연구소 소장 고양시 여성회관 민요. 장고 강사 고양 문화의 집 민요. 장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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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소리꾼 노경미, 불교 범패 음반 "깨침의 소리"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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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교육 전문가 이희선, 대학 교수 대상 취업 마인드 주제 발표 강연
- [동포투데이] 현직 대학 교수들이 기업교육 전문가에게 '취업 마인드 문제해결 능력 특강'을 받아 화제다. 행동훈련 전문기업 교육그룹 더필드 이희선(사진·46) 훈련본부장은 5일 수원·안산지역 학·학 컨소시엄협의회 정기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했다고 밝혔다.이 본부장은 이날 오전 라마다 프라자 수원 호텔에서 개최된 안산대학교, 장안대학교, 수원여자대학교 등 3개 대학 총장과 교수, 산학협력단, 취업 관계자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위일체 취업 마인드 문제해결 전략'의 주제발표를 했다. 이희선 훈련본부장은 "기업은 '인재가 없다'하고 학교는 '취업이 바늘구멍'이라는 기업과 대학 간 미스매치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특히 기업체 인사담당자와 HRD(인재계발) 담당자들은 대학이 기업에서 원하는 인재를 키워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대학이 기업을 너무 모른다' ▲해당 기업의 비전과 철학은 무엇인지 ▲기업의 인재상은 ▲기업의 핵심가치와 기업문화 등에 대해 기업정보를 학생들에게 제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기업은 신입사원을 채용해 회사에 이익을 낼 수 있는 '경력같은 신입사원을 원한다'"고 덧붙였다.이 본부장은 이어 ▲인성 ▲도전정신 ▲스토리▲협업(팀워크) '사위일체'를 참석한 교수들에게 주문했다. 이 본부장은 "'인성'의 구체적 사례로 학교에서 슬리퍼 등교와 보행중 흡연, 입수 보행, 교내 식당에서 배식하는 분들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의 예절과 배려, 다리를 꼬고 듣는 강의를 듣는 수강생의 태도 등에 대해 고쳐야 할점"이다, 기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고 학생들의 기초적인 인성교육을 주문했다.두번째 주제발표로 안산대학교 김성중 학생복지처 부처장은 '챌린지 취업지원 정책'에 대해 소개했다. 세번째로 장안대학교 신성수 서비스경영학과 교수는 '산학협력 및 취업 활성화- 주문식교육 운영 사례'를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수원여자대학교 고혜정 미용예술과 교수는 '창의성 산학협력 맞춤형 인력 양성'에 대해 전달했다.이희선 본부장은 15년 간 대기업을 비롯한 중견기업 300여 기업의 직원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200여 학학과 특성화고의 취업 캠프와 특강을 진행한 바 있다.한편 이 본부장은 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한 '선 취업, 후 진학'의 독특한 이력의 성공한 기업인으로 특성화고와 전문계고 취업과 진로 교육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2011 대한민국대표강사 33인'에 선정된 바 있으며, 지난 10월말 현재 1010번의 강의를 진행했다.이 본부장은 매일경제 MBN-TV 창업&취업 스페셜리스트, 한국경제TV 취업컨설턴트, 서울시교육청 지식나눔명예교사, 나비미디어 대표, 아하취업아카데미 대표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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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교육 전문가 이희선, 대학 교수 대상 취업 마인드 주제 발표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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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차이 극복한 조한 두 민족의 둥근 사랑
- [동포투데이] 지난 9월 연변팀이 중경역범과 원정경기를 치르던 시기 중경에서 한 연변 조선족 사나이와 중경 토배기출신 주란란 여성이 가정을 뭇고 생활하면서 현지에서 유명한 “한성불고기집(한성관-汉城馆)”까지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경기장에서 만난 이들 부부, 알고 보니 남편인 이국룡씨는 길림신문사에서 퇴직한 이선근 선배님의 조카벌 되는 사람이어서 취재는 더욱 쉬워졌다. 조한 두 민족이 한가정을 이루고 거기에 중경에서도 유명한 “한성불고기집”을 운영하여 중경라드오방송국 생방송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까지 됐다는 이들 부부의 스토리를 듣노라니 감동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였다. (1) 워낙 북경의 어느 한 한국회사에서 근무하던 이국룡씨가 중경의 지회사로 자리를 옮긴 것은 2002년이었다. 당시 중경에서 출근하던 이국룡씨는 문득 중경도 지난 세기 80연대의 심수와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아창업을 목적으로 회사를 정리한 뒤 자체로 당지에서 “길림신문” 부간인 “동북저널”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조선족과 한국인이 적은 그 곳에서 “동북저널”을 발행하자고 보니 몹시 힘들었다. 게다가 음식마저 입에 맞지 않아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그가 버티어낼 수 있었던 것은 친절하고 예의가 바른 중경사람들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국룡씨는 중경토배기출신의 처녀 주란란을 만나게 되었다. 어느 한 청사의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라 얼핏 눈길이 마주쳤으며 둘 다 “저 사람이야말로 나 이상속의 반려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뒤 그들 남녀는 서로 인터넷 채팅도 하고 전화연락도 자주 하면서 사랑을 무르익히다 결국 결혼에까지 골인하게 되었다. 결혼한 후 그들의 신혼생활 역시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조선족 가정에서 가무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이국룡씨가 집안일에 등한하여 아내 난란의 불평을 자주 샀다. 난란은 남편인 국룡씨한테 주로 남정들이 집안일을 하는 한족문화를 주입시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런 설득은 국룡씨한테 있어서 “소귀에 해금켜기”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언제인가 연길에 있는 시집에 와보고는 난란씨 역시 그 마음을 접었다 한다. 시어머니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팽이처럼 돌아치면서 집안일에 열중하지만 시아버지는 늘 쏘파에 앉아 안경 걸고 신문이나 보는 전통적인 조선족 가정문화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남편을 가무일에 붙잡아 매놓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란 밖에 나가 큰 일을 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임신7개월이 되자 난란은 남산만한 배때문에 더 이상 엎드려 장판을 닦는 일만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편 국룡씨한테 장판만이라도 닦아 달라고 지청구를 들이댔더니 국룡씨는 밖에 나가 서서 장판을 닦을 수 있는 밀걸레를 사왔단다. “어쩔 수 없는 남자로구나!” 난란씨는 그냥 도리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 그 뒤 이들 부부는 중경에서 한식을 위주로 하는 “천리향”이란 작으마한 음식점을 차렸다. 한국인이 차린 대형음식점에서 경리로 일하며 잘 나가던 이국룡씨가 회사를 정리하고 개인창업에 나섰던 것이다.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음식점은 이들 부부 둘이서만 운영했다. 어린애는 난란의 친정어머니가 봐주었다. 그러던 중 그 어느 해엔가 중경에서 동양 4개국 축구경기대회가 있었다. 그러자 당시 내지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기자 송청운씨가 한국기자 23명을 데리고 “천리향”으로 식사하러 왔고 그 때로부터 50평방미터도 되나마나한 이 음식점은 대뜸 소문을 놓게 되어 한국손님, 조선손님 및 중경에서 근무하는 조선족 사업가들과 유학생들이 즐겨찾는 가게로 발돋음했다. 이들 부부는 열심히 일하면서 매일마다 짭짤한 수입을 올리군 하였다. 그러나 창업의 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난란씨의 오빠가 결혼하여 어린애가 생기자 친청어머니는 계속 그들의 아이를 돌볼 수가 없었다. 이들 부부는 가게의 영업 때문에 어린 것을 머나먼 연변의 시부모한테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헌데 가게의 영업도 중요했지만 어린 것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어린 것이 보고 싶다못해 난란씨는 밤에 자다가도 꿈을 꾸면서 어린 것을 부르며 운적도 수없이 되었고 우울증 증세로 앓기까지 했다. 결국 이들 부부는 2년만에 “천리향” 음식점을 처분하고 아이가 있는 연변으로 나와 버렸다. 하지만 연변에서 이들이 할 일은 없었다. 이국룡씨가 시장조사를 한바퀴 했지만 파악있는 영업항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들 부부는 재차 중경으로 들어갔다. 다르다면 이번에는 어린 것을 데리고 들어간 것이었다. 중경에 들어간 뒤 보다 통이 크게 음식업을 벌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견지하고 있는 “한성불고기집”이였다. 이들은 원래 “천리향”음식점을 할 때의 경험을 살린 한식불고기집이었지만 중경 현지인들의 입에 맞게 음식을 개발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당지인들은 한국식불고기라 하니 그냥 체험식으로 먹어보다가는 입에 맞는다며 모두들 기뻐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밀군 하였다. (3) 이국룡씨는 축구운동을 몹시 즐긴다. 중경에 발을 어느 정도 붙이게 되자 2005년 중경에 있는 조선족 축구애호가들로 축구동아리를 무었다. 이름은 “장백호랑이 축구동아리”었다. 초기에는 몇명 안되었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장백호랑이 축구동아리”는 점점 구성원이 늘어나 현재는 28명이 된다. 이들은 주로 토요일과 일요일에 집중훈련 혹은 친선경기를 치르며 중경에서 펼쳐지는 갑급리그의 경기관람도 단체로 다닌다. 그리고 지난 9월 연변팀의 중경원정경기시엔 축구단 감독진과 선수 30여명을 “한성불고기집”에 초대하는 것으로 고향축구팀에 대한 사랑을 전달하기도 했다. 한편 축구동아리에서의 경비는 이국룡씨가 협찬할 때가 많다. 유니폼 역시 그의 협찬으로 사온다. 유니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국룡씨가 운영하는 “한성불고기집”의 직원 모두 축구유니폼을 착용한채 근무한다. 남편이 축구를 혹애하고 축구동아리까지 무은데 대해 아내인 난란이가 전적으로 지지하는건 아니다. 어떤 날에는 아침에 나갔다 한밤중에야 돌아오군 하기에 영업에 지장이 크다. 우선 남편이 없으니 가게일이 그만큼 밀리고 또 열심히 모은 돈도 자리가 나게 축나기도 했다. 또한 그것보다 더욱 걱정되는건 남편이 축구하러 가면 번마다 술에 거의 절어서 돌아온다. 남편의 건강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난란이다. 하지만 난란은 남편을 이해한다. 남편한테도 취미가 있고 사생활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을 그저 돈만 버는 “일벌레”나 “일중독자”로는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걸까? 지청구를 들이대고 바가지도 긁고 하지만 결국은 남편한테 숙어들고 남편을 지극히 아끼는 난란이다. × × × × × × 취재는 끝났다. 연변에 있으면 그냥 수수한 인생을 보낼 수도 있는 조선족남자 이국룡 ㅡ 하지만 중경이란 낯선땅에 가서 그 곳의 토배기 처녀를 만나 고생도 많았지만 이젠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멋진 삶을 수놓아가는 부러움이 큰 사나이가 됐다. 난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조선족 리국룡씨를 만나 당당한 지금은 음식점 녀보스가 되고 말이다. 조선족 이국룡과 중경의 토배기 한족 주란란의 만남은 그들의 운명이었고 100% 만점의 결합이라 할까? 취재는 끝났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스토리는 계속된다. <필자는 중국 길림신문 스포츠 전문기자 김룡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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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차이 극복한 조한 두 민족의 둥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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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정경화 대표, 재한중국동포 발전 기여로 공로상 수상
- 정경화 <동포투데이> 대표가 지난 14일(일) 오후 서울 중구 외환은행 본점 대강당에서 열린 ‘도전 골든벨! 한중 청소년 문화페스티벌’ 행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김성곤 의원으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했다. 이날 공로상은 중국동포단체인 중국조선대모임(대표 허을진)이 주최하는 행사를 맞아 새정치민주연합 세계한인민족회의 수석부의장직을 맡고 있는 김성곤 의원이 특별히 마련한 상으로 재한중국동포사회 발전에 기여한 중국동포 출신의 단체장과 기업 대표들에게 수여되었다. 중국동포 출신의 한국 귀화자인 정 대표는 현재 실시간으로 중국현지 소식을 전하는 인터넷언론 <동포투데이>를 운영하고 있으며, 바쁜 시간을 쪼개 이주여성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어 중국동포사회에서는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여성이다. 또한, 권오훈법률사무소 사무장직도 맡고 있는 정 대표는 재한중국동포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그들이 억울한 형사사건이나 임금체불, 산재재해 등 어려움에 처하면 발 벗고 현장으로 달려가 문제해결을 위해 힘을 보태고 있다. 김성곤 의원은 “800만 해외동포들 중 중국에 있는 조선족동포들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동안 일본이나 미국동포들에 비해서 조선족동포들이 소외되고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앞으로 한중 관계가 깊어질수록 조선족동포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하며 수상자들을 격려했다. 한국인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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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정경화 대표, 재한중국동포 발전 기여로 공로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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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 미스 진 박홍희, KBS 아침마당에 출연
- 길림신문 1일자 보도에 의하면 지난 8월 27일, 제 1회 미스월드코리아 중국조선족미인선발대회에서 진선미로 선발되었던 박홍희, 전려홍, 서문령 등 세명이 9월 26일 미스월드코리아 본선 대회 참가 차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에 도착한 박홍희, 전려홍, 서문령은 중국조선족 미인대표로 각종 행사에 참가하고 바쁜 일정을 보냈다. 보도에 따르면 그중 박홍희(진)는 미스월드코리아 박정아 회장과 함께 9월 30일에 방송된 한국 KBS 아침마당프로에 출연했다. 아침마당프로에서 박홍희는 사회자로부터 한국의 미스월드코리아 본선 대회에 어떤 자세로 림하는가의 물음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미스월드코리아 중국선발이 제1회인것만큼, 그리고 진의 명예를 얻은것만큼 어깨의 무게는 낮추되 민족심에 대한 마음의 무게에 중점을 두겠다. 비록 떨어져 있지만 우리 모두가 한민족이다. (미스월드코리아 본선) 합숙훈련동안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 하며 많이 배우고 경험을 쌓는것이 목표다. 그리고 입상을 떠나 우리 민족의 얼과 자태를 널리 알리고싶다.》라고 망설임 없이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말하였다. 중국조선족을 대표하는 세명을 연길에서부터 동행한 최송옥 미스월드코리아 중국지사 총괄리사의 말에 의하면 10월 1일부터 한국 강원도 평창에서 열흘간의 합숙후 11일 최종 본선에 참가하게 되며 특히 박정아 회장님의 배려로 본선 경연중 박홍희 등 세명은 그동안 남몰래 갈고 닦은 장고춤을 특별프로그램으로 공연하게 되며 대회가 끝난후 방송국 견학을 통하여 자신들의 꿈인 전문방송인의 경험을 쌓을 소중한 기회도 갖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18일 귀국할 예정이라고 한다. 미스월드코리아 한국 본선전 합숙이 시작되였다. 중국조선족을 대표하여 미스월드코리아 본선에 참여하는 우리 미녀들에게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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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 미스 진 박홍희, KBS 아침마당에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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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에 재개발에 인생을 건 녀인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불과 30여년 전까지만도 우리는 기업을 하는 사람은 잘 먹고 잘 입으며 돈을 종이장처럼 뿌리고 다니는가 하면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이 여유작작한 인생을 보낼 것이라고 인정해왔다. 정말로 그럴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점차 그런 시각을 버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벼락부자”로 된 사람이라면 돈을 마구 뿌리며 다닐지는 몰라도 우리가 보아온 많은 기업인들은 극력 아꼈고 사업이라면 밤을 패가며 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럼 오늘 소개되는 주인공 연길 카이시자양품공장 박옥련 공장장이 바로 그런 부류의 기업인이었다. 알로에와 우연하게 인연맺아 박옥련 공장장이 알로에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어릴 때 그녀는 몸에 이러저러한 질병이 많았다. 수술만 해도 6차나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수술이란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났고 삶에 짜증이 날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몸을 춰세우기 위해 좋다는 보약도 많이 써봤지만 별로 이상적이 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88년 그녀는 우연히 의학서적을 통해 알로에가 질병치료에 좋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 당시로서는 얻기 힘든 알로에 두포기를 겨우 얻어 화분통에 심고는 정성들여 키운 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복용하였더니 상상외로 지겹게 몸을 괴롭히던 질병들이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다. 알로에를 통해 되찾은 건강ㅡ 그녀는 그것을 혼자서만 향수하기엔 너무나도 아까왔다. 원체 시원시원한 성격에 통이 큰 그녀는 1996년에 4000여평방미터가 되는 땅을 사서 알로에재배기지를 세우고는 본격적으로 알로에생산에 들어갔다. 헌데 세상일이란 생각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다. 우선 열대식물로 집안의 화분통에서만 자랄 수 있던 알로에를 대면적으로 재배하니 애로사항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아무리 비닐하우스안에서 일정한 온도를 보장했으나 1년에 수개월씩 되는 과동기를 넘긴다는 것이 여간만 여러운 것이 아니었다. 1999년 겨울 한차례 내린 폭설로 그녀의 비닐하우스 전체가 그대로 내려앉았으며 몇년간 정성스레 키웠던 수많은 알로에가 하루 사이에 꽁꽁 얼어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되었다. 치명적인 좌절이었다. 실패의 정도가 아니었고 절망적이었다. 이렇듯 엄혹한 현실앞에서 웬간한 여인들 같으면 그 자리에서 기혼해넘어가지 않으면 병원에 실려갈 정도였겠으나 박옥련 여인만은 입술을 옥물었다. 다시 대규모의 알로에재배를 할만한 자금이 없으니 작은 영업길에 나섰다. 식당, 세탁소 등을 운여하면서 돈을 모으다보니 어느덧 4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 정도 계획이 잡히자 그녀는 알로에로부터 병치료효과를 본 8명의 사람들한테서 이자를 주기로 하고 100만원이란 자금을 빌려서는 알로에생산 재창업에 나섰다. 알로에의 제품화에 성공 재창업에 달라붙자 박옥련 공장장은 모든것을 깐지고도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일명 “식물의사”, “만병초”로 불리우는 알로에는 80여가지의 유효성분을 갖고 있다. 알로에의 탁월한 효능은 동서양의학계에서 모두 공인하는 사실로서 수천년래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 광범위하게 응용해온 걸로 알려지고 있다. 알로에에는 살균작용, 항궤양, 세포부활 작용, 강심, 혈액순환 촉진, 동맥경화 연화, 혈관생성 촉진, 모세혈관 확장, 내분비 안정 및 추진 작용이 있다. 그리고 뛰어난 소염작용이 있어 항암, 이상세포파괴, 피부개선, 해독작용이 있으며 신장염, 방광염, 기관지염 등도 치료될 수 있고 항알레르기 작용도 있다. 한편 알로에는 그냥 그대로 먹기가 쓰고 떫은 식물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는 하면서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때가 많다. 알로에재배에 성공하자 박옥련 공장장은 그것을 그냥 그채로 시장에 내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의 독특한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는 제품화하기로 결심, 근 4년간의 꾸준한 연구개발 끝에 국가발명특허권까지 따낸 자양제품 “카이시알로에엿”을 시장에 내놓아 폭발적인 인기를 몰아왔다. 이어 그녀는 알로에 계열제품들인 알로에사탕, 알로에캡슐, 알로에된장, 알로에간장 등 연속 개발해냈는데 그 중 알로에된장은 환자들뿐만 아니라 광범한 대중들 가정들에서도 즐겨먹은 보건품이자 식료품으로 늘 가정의 식탁에 오르군 했다. 박옥련 공장장이 개발생산해낸 알로에계열제품들이 시장에서 각광을 받아 수요자가 많아지자 “공급이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는 국면”이 나타났다. 그녀가 갖고 있는 1만 6000여평방미터에 달하는 재배기지로는 생산라인에 원료를 공급하기가 태부족이었다. 하지만 박옥련 공장장은 원재료의 질에 대해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리 원료공급이 딸려도 5년생이 되지 않는 알로에는 절대 쓰지 않았고 알로에재배에 있어서도 화학비료 대신 유기농비료를 썼고 살초제를 일절 쓰지 않고 풀도 몽땅 손으로 뽑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이 공장의 알로에계열제품에는 절대 방부제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금은보석은 녹쓸지 않아” “현재 시장에 저의 공장제품과 양식이 비슷한 모조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것에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아요. 금은보석은 녹쓸지 않는다고 소비자들은 언제나 그것의 진가를 알아볼 것이 아닌가요?! 저는 소비자들을 믿고 그저 저의 공장제품에 대해 책임지고 생산할뿐이죠.” 박옥련공장장의 말마따나 현재 세상에서 어느 제품이 인기를 몰아온다고 하면 며칠 안가 그 모조품이 생겨나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모조품이란 그것이 들통나기 마련이고 생명력도 길지 못하다는 것이 박옥련 공장장의 설명이다. 알로에계열제품만 봐도 아무리 근사하게 모방한다고 하더라도 재배기지가 없이 시장에서 파는 알로에를 마구 사들여 제품을 만든다면 그 원료의 질을 보장할 수 없는건 물론 생산라인 또한 10여년간 품들인 연길카이시자양품공장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 박옥련 공장장의 굳은 신념이었다. × × × 연길시카이시장양품공장은 1996년의 창업스타트로부터 현재까지 10여년동안의 창업과 실패와 재성공의 길을 더듬으면서 걸어왔다. 그동안 이 공장은 1만 6000평방미터의 알로에재배기지를 확보하고있으며 직원 총수의 37%가 기술인원진영으로 재배기지, 생산과 판매 등이 일체화로 된 우리 길림성에서 최고의 알로에전문기업으로 발돋음했다. 하지만 박옥련 공장장은 사업의 대성공으로 거부로 되는 것보다는 먼 후날 장백산지구 알로에제품개발의 선두자로 남고 싶다고 솔직하게 그 소망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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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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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에 재개발에 인생을 건 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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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은 노력하는 자에게 주는 “하느님”의 선물
-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연변국제무역빌딩 3층, 수많은 옷가게를 지나다가 보면 “서울토탈허창호패션”이란 글발이 유표하게 안겨온다. 그리고 아래에서 열심히 또한 까근하게 옷을 재단하는 한 남성을 볼 수 있다. 일정한 규모를 갖고 있는 옷가공회사 사장이지만 손수 손님들의 옷을 재단하면서 하루종일 가게앞을 지키는 사나이, 그가 바로 오늘 이 글의 주인공 허창호 사장이다. 어렵던 동년, 황홀했던 꿈 허창호 사장의 고향은 지금의 연길시 조양천진 팔도촌이다. 허창호가 태어나 세상물정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 그의 가정은 몹시 가난한 모습이었다. 할머니까지 모신 9명 식솔의 가정, 그리고 6형제의 막내인 허창호는 그야말로 형들이 입다가 물려준 옷을 받아입을 때가 많았다. 그 때 어린 나이에도 허창호는 어쩌다 옷을 잘 입은 사람을 보기만 하면 부럽기가 그지 없었다. (나도 언제면 저런 옷을 입어볼 수 있을까?!) 당시 어린 허창호의 가장 간절한 소망이라면 멋진 옷 한번 입어보는 것이였다고 할까?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허창호가 종이를 갖고 숱한 옷견본을 만들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런 허창호한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앞으로 어른이 되면 출중한 재단사가 되려는 꿈이 있었던 것이다. (재단사 – 멋진 사람이다. 재단사가 되어 고급옷을 직접 만들어입고 동네사람들한테도 지어드리리라!) 어릴 때 일시적 충동으로 가졌던 그 꿈, 허창호는 고중을 졸업할 때까지도 그 꿈을 머리속에 담고 있었다. 창업과 시련 1986년 고중을 졸업한 허창호는 여느 농촌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농업생산에 투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허무했다. 낮에는 삼복철 땡볕에 땅에 허리를 굽히고 기음을 매고 저녁이면 밥술이 떨이지게 바쁘게 곯아떨어져야만 하는 삶, 허창호는 그런 삶이 지겹기만 했다. 아니 그한테 남다른 꿈이 있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꿈이란 절로 이룩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그것이 명지했다. 그는 농사일이 그 힘든 나날에도 서점에 가서 복장재단기술서적을 구입해서 탐독하는 한편 짬짬의 시간을 이용해서는 각종 복장재단강습반에 참가, 당시 그처럼 복장기술을 탐닉하는 남성치고는 허창호씨가 거의 유일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뒤 그는 친구들한테서 돈 500위안을 빌려서는 용정시안에 복장점을 차렸는데 세집돈을 내고 보니 유동자금이 전혀 없어 재봉침 외 기타 설비와 부분적 원단 등은 외상으로 들여오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여성도 아니고 남성청년이 경영하는 복장점이라 처음에는 옷가공을 맡기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모두들 시작이 절반이라고 했지만 정작 복장점을 개업하고 보니 골치아픈 일이 더욱 많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적부터 품어온 꿈이 바로 복장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버티어야 했다. 한동안 마이너스경영을 하더라도 버티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허창호의 오기이기도 했다. 허창호는 자신의 이미지를 올리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사회구역 노인들한테 무료로 재단해줬고 부분적 독거노인들한테는 무상으로 옷을 지어드리기도 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고 과연 수개월이 지나니 용정시안의 멋쟁이들은 허창호의 재단기술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사회구역의 노인들도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몇몇 그의 친지들은 “그러한 기술이면 연길 가서도 얼마든지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면서 연길진출을 권장했다. 헌데 연길에로의 진출 결과, 가뜩이나 복장업토대가 박약한 허창호는 큰 좌절을 맛봐야 했다. 하긴 연길시 서시장부근의 노천가게를 운영하다가 그것이 도시관리집법대대에 의해 모든 노천가게를 철거하게 됐으니 그의 무능함도 아니요, 해당 부문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그 뒤 허창호는 잠시 개인창업을 포기하고 연길시 모 복장회사로 출근하면서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행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중한관계의 물코가 터지면서 한국손님들도 중국으로 대거 쓸어들게 되었다. 그 때 본 한국사람들이 입은 양복, 그것이 그렇게도 멋질 수가 없었다. (바로 저 것이다. 복장기술을 진정으로 배우려면 한국에 가야 한다.) 일이 될라고 그러는지 허창호의 한국행은 그렇게도 쉽게 이루어졌다. 한국에서의 나날, 그는 월생활비 20만원(한화)씩 받으면서 한 한국내 유명디자인의 제자로 일했다. 당시 한국행을 한 많은 친구들은 일당 5만원짜리 일자리를 수차 소개했지만 허창호는 번번히 거절했다. 그의 한국행이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것은 번연했다. 당시 그의 생활은 몹시 간고했다. 회사내 책상위에서 쪽잠을 자야 했고 자작음식으로 끼니마다 라면으로 대부분 에때워야 했다. 그러다보니 “무릉도원”과도 같은 서울의 야경이나 친구들과의 흥이 도도한 명승지 관광 등은 그와는 조금도 인연이 없었다. …… 서울에서의 3년생활도 어느덧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다. 1993년말의 어느 날 허창호를 제자로 삼았던 한국사장님은 자기가 쓰던 디자이너용 가위 네개와 옷 40여벌을 지을 수 있는 원단을 내놓으면서 허창호를 불렀다. “자네 열심히 잘 배웠어. 자네의 그 수준이면 중국의 그 어느 곳에 가도 밥벌이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거야.” 이에 허창호는 감격했다. 보수없이 디자이너기술을 배워준 것도 고마웠는데 그렇게 자기가 아끼던 가위와 원단까지 선물로 내놓았으니 그 은정에 더욱 목이 메였다. 동산재기 한국에서 돌아온 허창호는 일정한 준비사업을 거친 후 본격적인 복장산업에 투신, 연길백화청사에 첫 서울토탈패션을 차릴 때가 1994년이었다. “내가 연길백화에 패션가게를 차릴 때만 해도 연길시안에는 복장업회사가 100여개나 됐다. 경쟁이 치열했다. 그 뒤 기성복브랜드가 연변에 쓸어들어오면서 그 경쟁은 더욱 더 심했다. 그러면서 자금력이 약한 회사는 도태되고 자금력이 강한 회사가 살아남는 시대도 도래했다. 이는 하나의 준엄한 도전이었다.” 자금력으로 볼 때 큰 회사에 비하면 허창호는 “고래무리속의 새우”에 불과했다. 허창호는 기술과 서비스로 큰 회사들과 경쟁을 걸었다. 옷 한벌을 지어도 그것이 손님이 갖고 온 원단질에 상관없이 멋진 신식으로 지었고 바느질도 꼼꼼히 절대 옷이 따지거나 삐뚤게 박힌 곳이 없게 했다. 그리고 손님들이 패선가게의 원단을 선택하면 될수록 질좋고 고급스러운 것으로 지어드리군 했다. 한편 사회의 공익사업에도 한몫 담당하는 걸 잊지 않았다. 2002년부터 연변 주적십자회와 연변TV방송국에서 공동주최하는 “사랑으로 가는 길” 프로그램에 참여, 거기에 오르는 불쌍한 애들에게 무료로 옷을 해주군 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수백벌이 되며 가치로는 인민폐로 1여만위안에 달한다. 또한 연길시안의 “어머니협회”의 장애인여성들한테도 10여년전부터 옷을 무료로 해드리는 프로그램을 가동했으며 2008년에 들어서는 연변일보 창립 60주년을 맞으며 연변일보 종합신문 전체 직원들한테도 양복 한벌씩 해주었다. 올해는 허창호사장이 연길에 “서울토탈패션”을 세운지 21주년이 되는 해이다. 현재 국내의 복장업계는 여전히 경쟁이 치렬한 상황, 그럼 허창호사장의 “서울토탈패션”은 대체 무엇으로 승부를 거는가? “복장업계의 생존수단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설비의 인입밖에 없다.” 그렇다. 허창호 사장의 자우명은 바로 항상 새로운 기술영지를 개척하는 것, 그래서 그는 해마다 2 - 3차의 한국행을 하며 그럴 때마다 그의 “서울토탈패션”은 새로운 기술교체를 하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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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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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은 노력하는 자에게 주는 “하느님”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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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고상하면 품위 달라진다”
- “지식은 속에 있지만 말은 겉으로 드러나기마련이다. 아무리 지식보물고를 안고있어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한테 전수하기 어렵고 또한 생동하고도 형상적으로전해주지 못하면 전수받는 사람이 난해하는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든 교류에서의 언어예술의중요성이다.” 서방흥– 지난 세기 70년대 초기부터 본세기초까기 연변라지오방송의 전파를 타고 항상 우리한테 친근하게 다가오던중국조선족화술계의 거장이다. TV가 없고 기타문화시설도 극히 락후하던 그 시기 우리는 라지오를 통해 세상만사를 많이 전달받을수 있었고 아나운서의 입을 통해 그 희노애락도 감지할수 있었다. “연변인민방송국입니다.국내외뉴스입니다…” “담당에 ×××, 서방흥이였습니다.” … 당시 조선족라지오청취자들중 거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익숙한 서방흥이란 아나운서의 이름이였다. 그만큼 방송을 맡은 그의 차수가 잦았는가 하면 많은 대중들을감흥시켰던 그였다. 그럼 금일 이 지면을 통해 저명한 중국조선족화술전문가인서방흥선생의 언어세계에 들어가본다. 프로일군시대 서방흥선생의 프로필을 보면 굉장히 파격적이다. 우선 1970년대초 묵묵히 훈춘현의 한 시골에서 향선전간사로 사업하던중우연히 연변의 로아나운서의 한명이던 박홍섭선생의 눈에 들어 연변인민방송국의 마이크앞에 앉게 됐다. 도시진출이극히 어렵던 그시절, 더군다나 농촌에서 결혼까지 한 선생한테 지구급방송국의 아나운서직이란 큰 파격이아닐수 없었다. 또한 아나운서에 입문한 뒤 얼마뒤 곧바로 아나운서부 주임으로 진급, 이 역시 파격이라 할수 있었다. 이는 단지 그가 아나운서부의 유일한공산당원이라는것만은 아니였다. 남모르게, 또한 가정과 자아리익을뒤로 한채 오직 한 우물만 판 결과가 분명했다. 노력의대가는 커다란 성과로 주렁지기 마련이였다. 그뒤 몇년이 안돼 서방흥선생은 우리 연변은 물론 중국조선족화술계에서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전 성 아나운서콩클에서 련속 4년간최우수상을 획득했는가 하면 길림성 10대 최우수아나운서로 평의됐으며 그가 쓴 화술론문중 30여편이 국가급상도 받아안았다. 뿐만아니라 해외조선인화술계와 널리접촉하면서 그들이 장악한 화술기교를전수받는데도 게을리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중국조선족화술의 자아풍격을 구축, 그때로부터 중국조선족화술계는새로운 “서방흥시대”가 바야흐로 도래했다. 엘리트 리더시대 지난 세기 80년대에들어 중국조선족화술계는 서방흥이란 존재를 떠나서는 거의 화술을 론할수 없을만큼 그는 조선족화술계의 “패왕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선생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분명 자신만을 생각한것이아니였다. 언젠가는 자라나는 새일대방송인들한테 자리를 넘겨줘야 할테이고 그러자면 그들에 대한 육성사업도자신을 키울 때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것을 감안,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지금의 연변대학 예술학원), 연변사범학교, 연변영화상영발행공사 등 조선족화술을 취급하는 학교와 단위와 련계하여 새일대 조선족화술인재를 키우기에 모든 정성을몰부었다. 특히 90년대 말부터 근 10년간 연변대학 조문학부학생과 연변대학 예술학원 방송사회반(본과)학생들의 화술교육을 맡아오면서 교수대강으로부터 화술교재에 이르기까지 자체로 편찬했다. 지금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중 서방흥선생의 많은 제자들이프로 아나운서나 사회자로 활약하고있다. 그중 중앙급 아나운서 4명과주급 아나운서 사회자만 해도 10여명, 현재 연변화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있는 김계월, 서태문과 같은 이름있는 아나운서들을 비롯하여 국내 조선족화술일군들중 거의100%로라 할수 있는 방송원, 사회자들을 육성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방송원입문”, “현대화술론” 등 저서를 펴낸외 “화술강좌”, “화술교본”등을 편찬함으로써 조선족화술을 지향하는 젊은 세대들한테 새로운 “지름길”을 개척해주고 우리 사회의 표준적인 언어생활보급에 기여했다. 서방흥이 보는 화술세계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방흥선생의 화술사상에는 새로운관념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화술은 단지 프로들만이 전공하는것이 아니라는것이다. “기실 화술을 전공해서 프로가 되는 사람 몇이 되겠는가. 하지만 사회에 진출해서 언어로 남의 중용을 받을 때가 많다. 현재은행원, 판촉일군, 홍보일군 등을 모집할 때 지식도 중요하지만언어표달을 많이 본다. 즉 화술을 전공해 프로가 되는것도 좋지만 훌륭한 사회일군으로 되는것 역시 중요하다. 또한 남의 중용을 받자면 지식 먼저 언어가 남한테 감화를 주기마련이라는 생각이다.” 그 관념갱신의 첫째 행동으로 최근 10여년간 서방흥선생은 프로화술인보다는 그 육성범위를 대중화하기에 모를 박고 연변대학 조문학부학생들의 화술교육으로부터시작하여 전반 조선족사회의 화술교육에 진력하고있다. 서방흥선생은 어린이들이 “말하는 벙어리”가 되여가는것이 가픔아프다면서 그 교육을 위하여 최근 5년간 300여명의 연길시 조선어문교원들의 말하기와 읽기교육을 개시, 향후 주내 모든 교원들의 화술교육도 반드시 추진해나갈 타산이라 한다. 자라나는 새세대들의 언어교육을 위하여 10년전부터 그 중점을 연길시 10중과 연길시중앙소학교에 두고 많은학생들을 교육주고있으며 현재 그 범위를 연길실공원소학, 연길시건공소학교에까지 넓히고 학생들을 중점적으로 육성, 나아가 이를전반 연길시 학교와 사회에 보급할 타산이다. 교육을 거친 학생들중 꼬마아나운서로 활약하는 학생도 있고교육받은 학생들 모두가 말투의 변화와 읽기의 변화를 가져오고있다. 한편 지난해부터 연길시에 “학예양성원”을 개설, 소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에 이르는 조선족학생 및 사회 각 계층인사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조직하고있으며 그내용에 들어서는 바탕말 바로잡기, 랑독, 웅변, 강연, 사회자표현 등 여러가지 쟝르가 포함돼있다. 취재를 마칠무렵 서방흥선생은 이렇게 강조했다 “말은 비록 교제의 수단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 질을 높이는것이중요하다. 전자공학이 발전하면서 말이 곧바로 글로 돼나오는 시대가 도래했다.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거침없이 표준적으로 표달할수 있어야 함은 시대발전의 요구이다. 그러하기에 말은 바로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자 인격이며 품위라고 한다. 이는내가 근 3달간 한국실무능력시험교육을 주면서 더욱 절실히 느낀 점이다.그분들로 말하면 곧 말의 표현이 그들의 몸값이라고 할수도 있는것이 아닌가?! 우리의사회는 말을 표준적으로 하려 하고 또 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로 돼야 한다. 비록 아직 말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말의 흠집을 지적하면얼굴이 붉어지며 지어 반감까지 사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얼굴의 오물을 닦아주는 사람을 고맙게 생각하듯 언젠가는 크게 깨닫게 되는 날이올것이다. 우리 모두 자기로부터 시작해 자기의 매 한마지 말을진정 규범에 맞고 자연스럽고도 친절하게 표현하기에 힘다함으로써 아름다운 우리 말을 빛내여 가야 할것이다. 이렇게될 때 우리의 말은 더욱 품위있게 되여 교제의 수단만이 아닌 전반 민족의 위용을 과시하는데 이바지하게 될것이고 따라서 우리 민족 모두가 인격적으로존중받는 민족으로 될것이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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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고상하면 품위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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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조선족 역사 렌즈에 담은 산 견증자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역사는 사람이 기록하고 세상에 남기기 마련이다. 태항산 조선의용군 항일투쟁사가 고 김학철 선생에 의해 한국사회에 널리 알려졌다면 아직도 숨어있는 중국 조선족역사는 살아있는 우리가 가일층 발굴하여 밝혀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이에 대한 더욱 큰 사명감을 갖게 된다. 나와 동령의 세대마저 사라지면 중국 조선족의 부분적 역사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영영 자취를 감추게 되니 말이다.” 일전 연길시의 모 다방에서 커피잔을 기울이면서 이같은 얘기로 서두를 뗀 황범송 원로님이다. 장장 반세기 빛바랜 사진으로 중국 조선족 역사를 견증해온 저명한 조선족촬영가 황범송 ㅡ 그는 자신의 촬영인생을 주로 두가지 단계로 나눴다. 첫번째, 촬영업을 배우기 시작해서부터 불철주야로 사업하던 단계이다. 1930년 왕청현 팔과수(八棵树)촌에서 태어나 태를 묻은 황범송은 일찍 우급학교(지금의 소학교)시절에 첨단과학으로 불리우는 사진촬영과 접촉, 이에 대한 취미로 마음이 크게 동하게 됐다. 그래서 13살 되던 해에 촬영기술을 배운답시고 무작정 가출하여 목단강, 할빈 등 도회지를 돌면서 사진관 점원으로 취직하려 했으나 그것이 실패, 12월 엄동속의 유랑걸식 끝에 당시 흑룡강서 타래현의 만몽농업주식회사에서 개척단으로 농사를 하는 아버지한테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가 “8.15해방”이 되자 아버지와 함께 간난신고로 장춘을 거쳐 연길에 와서 정착, 후에 민주연군이 왕청현내의 마적을 숙청할 때 정보제공을 하면서 인생도리를 깨우치게 됐고 아버지가 일하는 연길유림상사(무역, 촬영 등을 겸영)의 주인 김몽훈의 눈에 들어 정식 촬영업에 종하하게 됐다. 그러면서 민주연군 종군기자의 신분으로 길동전선인 신개령, 로야령, 륙도하, 신참, 소구자, 강밀봉 등 많은 전투현장을 누비면서 수많은 역사적 장면을 렌즈에 담은 청년 황범송이었다. 그 후로 연길에서 열군속사진관, 복무청사 사진부 등을 경영하다가 1952년 “동북조선인민보(지금의 연변일보 전신)”에 전근되어 전업기자의 생애를 시작하면서 20대의 청년 황범송의 촬영인생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 때로부터 50여년간 그는 많은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의의가 있는 사진을 촬영, 선후로 300여차나 백두산을 오르내리면서 나무 한그루, 흘러가는 구름 한조각, 한줄기의 시내물 등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부동한 각도로 렌즈에 담았고 일찍 연변을 다녀간 팽진, 등소평, 강택민, 이붕, 양상곤, 만리 등 국가급지도자와 시하누크 등 외국수뇌자들을 촬영하여 보귀한 역사적 서류로 되게 했다. 두번째, 황범송 원로가 자기가 찍은 사진과 타인이 찍은 사진을 대량 수집정리하면서 항일투쟁, 해방전쟁 및 사회주의 건설시기에 있은 중국 조선족의 역사적 기여를 견증한 단계이다. 지난 세기 70연대초 주박물관으로 발령받은 황범송 원로는 1년간 국내의 많은 박물관과 유적지들을 순회하면서 역사적 자료를 찾는 동안 동북의 현대사에 대해 전문적으로 접촉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중국혁명에 대한 조선족인민들의 기여를 두눈으로 똑똑히 보아온 그는 이런 중요한 역사적 자료들이 박물관을 벗어나 더욱 폭넓게 알려줘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중화민국연대 및 일제와 위만주국 시대의 신문과 당시의 기존서류들을 번져가면서 주로 항일전쟁시기 조선인투사들의 활동에 대해 치중하여 수집, 심양과 무순에 있는 동북문헌보관국, 무순탄광 문헌보관국을 통해서는 19세기 말엽, 상투머리를 한 조선인 농민이 땅을 개간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항일전쟁시기 안도현 대사하에 주둔한 일본군수비대가 관동군사령부에 전보를 친 전보문 등을 얻어냈고 북경에서 생활하고 있는 주보중 장군의 부인 왕일지 여사를 연속 3차나 찾아가 장군이 생전에 쓴 70여권의 일기책 중 항일투쟁에서의 조선인 지휘관들의 성명, 직무, 전투성과 등을 밝힌 부분을 몽땅 복제했으며 관련사진 251점도 얻어냈다. 역사자료를 찾아낸 뒤 그것을 정리하는 작업도 간고했다. 그 사례로 1930년 남만에서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활동하던 양세봉 장군의 사진을 처음 찾아냈을 때 그것은 어느 한 단체사진 중에 있는 양세봉 장군의 얼굴이었는데 머리와 턱 그리고 한쪽 귀가 타인한테 가리워졌거나 선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양세봉 장군의 세상에 남긴 유일한 사진이라 황범송 원로는 그걸 꼭 잘 재현해내리라 작심했다. 그래서 장군을 본 적이 있는 노인들을 통해 그의 모습을 파악하고는 장군의 머리와 귀, 턱 그리고 옷에 이르기까지 타인의 걸로 대체하면서 수십차의 가공 끝에 드디어 양세봉 장군의 원 모습을 재현시키기에 성공, 지금 연변은 물론 한반도 남과 북 모두 역사속의 양세봉 장군을 언급할 때면 황범송 원로가 가공해 제공한 사진을 이용한다고 한다… 황범송 원로님이 반세기에 거쳐 지금까지 직접 촬영했거나 다른 경로를 통해 수집한 사진은 도합 10만여점, 그 중 현재 연변박물관에 3만여점, 주당위 서류실에 2만여점이 소장돼있고 그외 “조선족백년사화”(총 3권)에 31점, “중국조선족발자취총서”(총 7권)에 577점, 대형화책 “연변조선족자치주”에 311점, “중국연변조선족역사화책”에 149점, 중화인민공화국창립 50돐에 내놓은 “당대중국조선족화책”에 23점, “연변50년화책”에 20점 이렇게 널리 수록돼있다. “내가 주보중장군의 부인 등 중국 조선족을 잘 아는 역사인물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많은 역사적 사실과 귀중한 사진들이 영영 자취를 감췄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기력이 있을 때 아직도 볕을 보지 못한 중국 조선족의 역사적 발자취를 발굴하여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다. 이는 나를 포함한 아직도 살이있는 우리 조선족 원로들한테 부여된 일종 사명이기도 하다.” 이런 말을 남기는 황범송 원로님, 그이는 요즘도 아직 채 파헤치지 못한 조선족 역사의 발굴작업으로 스케쥴이 늘 빽빽한 상황이다. 원로님에 따르면 지금 그이는 연변촬영가협회 고문으로 활약하면서 10년전에는 “중국 연변”(합작)이란 책을 한국에서 출판했고 그 얼마 뒤엔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합작)이란 책을 출간하여 조선족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계속 발굴함과 아울러 이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한 사업에 크게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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