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9-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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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은 노동력 공백에 따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에 의한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사실상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021년 6월 말 기준 1,981,035명이다. 그중 서울시 구로구에 체류하고 있는 25,316명 외국인 주민 중 18,190명이 중국동포이다. 기자는 지난 4일 구로구의회 7대 후반기 부의장으로 또한 3선 의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의정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이번 제8대 의회에서도 후반기 의장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외국인 주민 민원이 발생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박동웅 의장을 만나 그동안 의정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동포 및 외국인 주민 관련 정책과 지원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박동웅 구로구의회 의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현재 시행 중에 있거나 계획 중인 중국동포 관련 사업은? A.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보육료를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동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보육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산에서는 아마 시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구로구도 내년부터 보육료 20%가량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국인 주민 자녀들을 조사해보니 약 천명 조금 넘는데 그 아이들에 대해 우선 보육료 20% 정도 지원해주고 차후에는 그냥 100% 지원하는 쪽으로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올해 최초로 이와 관련한 예산 편성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 해에 7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Q. 구민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A. 그런 분들도 있지만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로벌시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구로만, 구로구 사람들만 뭉치는 것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분들도 다 같은 한민족이고 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차별 없이 함께 사회에 흡수돼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민들에게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Q. 지역주민과 중국동포 간 소통과 화합에 대한 모범 답안이 있다면? A. 가리봉을 중심으로 구로구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구로구에는 다문화 정책과가 있는데 중국동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 일본 등 이주민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도 명예 통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또 구로구에는 봉사단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구로 4동 같은 경우는 다문화 봉사자들이 야간 순찰도 하고 있고 다문화 경노당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구로구가 소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근래 산발적으로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상에서 동포들과 구청 간에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Q. 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책은? A. 현재 구로구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분들이 중국동포들이다. 과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 동포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한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책은 정확한 수치를 갖고 하는 것이기에 다문화 정책과에서 우리 동포사회 실태 파악을 다시 해서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Q. 상호우호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문화교류 계획은? A. 한국의 수출 규모를 보면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을 앞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변과 교류(공무원 교류)를 했지만 사실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에는 여러 중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서로 간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 축제 때 해당 국가 도시의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거꾸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축제라든가 행사가 있을 때 우리 구로구에서도 문화예술단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그런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은? A. 현재로서는 일단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안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자체도 K-방역을 통해서 그냥 열심히 뛰고 있지만 우리 구로구에서도 구로구만의 어떤 방향 시스템을 잘 구축해 구로구가 코로나19에서 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돼야 구로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이다. Q. 중국동포에 대한 이해정도는? A. 한 예로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양꼬치와 고량주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젊었을 때 사실 한국에서 투자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사정 때문에 결국 못 들어간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계획 전공이다 보니 연변은 물론 선양, 광저우, 칭다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봤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는 많다고 생각하고 중국 양꼬치를 중국동포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는다고 감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Q. 중국동포에 한 말씀 부탁한다면? A.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그냥 돈을 벌고 살다가 중국으로 가면 된다는 인식보다도 역시 우리 조상의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이 잘 돼야 동포사회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한민족으로 역할을 한다면 지역주민들과 잘 화합할 수 있고 이제 동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생활할 수 있다고 본다. 구로구의장으로서 향후 그 어떤 정책이나 개인적인 꿈도 있겠지만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에 와서 잘 살고 여기에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구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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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9
  • 中, 98세 “쿵푸 할머니” 온라인 돌풍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최근 한 지역 모임에서 무술을 시연하는 98세 중국 “쿵푸 할머니”의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44만 번 이상 조회되고 4,500개 이상의 좋아요가 쏟아지는 등 순식간에 히트를 치고 있다. “쿵푸 할머니”의 팬들은 “98세에도 걸을 수 있을까. 쿵푸가 장수의 관건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심지어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 대해 "쿵푸 정신은 늙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주목했다. 본명이 장헥셴(張鶴仙)인 “쿵푸 할머니”는 2017년에 이미 명성을 얻었지만 거의 10년 동안 고향인 저장(浙江)성 닝하이(寧海)현 장컹(張坑)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이 영상이 유튜브에 퍼지자 조카딸은 “할머니는 이제 중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하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키는 약 1.5미터이다. 그의 쿵푸 동작은 유창하고 걸음걸이는 꾸준하다. 할머니의 마을은 쿵푸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고 할머니는 5살 때 중국 남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무술 스타일인 장복싱의 6대 계승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는 매일 연습했다. 지금은 나이도 들고 힘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아직 원기 왕성하다”고 말했다. “쿵푸는 폭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평생 농부인 할머니는 이웃들과도 잘 지낸다. 막내아들인 펑은 “어머니는 항상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을 돕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3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모두 닝하이현에서 근무하고 있다. 닝하이현은 마을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다. 할머니는 남편이 사망한 2012년부터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의 삶은 평범하지만 잘 짜여져 있다. 할머니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매일 세 끼의 요리를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해산물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가끔 친구들을 찾아가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오후에는 쿵푸 연습을 한다. 장컹 마을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할머니의 집은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식료품을 사러 나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등산이 필요하다. 언덕을 오르면서 꾸준히 하는 운동이 할머니가 정력이 왕성한 원인일 수 있다. 펑은 “어머니에게 도시에서 함께 살기를 요청했지만 어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즐겼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할머니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쿵푸 할머니”는 아버지의 장복싱 스타일을 주말과 휴일에 집에 오는 손주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최근 이웃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무술 수업을 개설했다는 소식을 접한 할머니는 자원해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펑은 어머니와 가족들은 “쿵푸 정신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고 그것이 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사람들
    2021-08-16
  • 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92년 11월 18일, 김경도(진징다오·金敬道)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도도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김경도는 축구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뛰어 노는 과정에서 축구에도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다. 연변은 축구의 전반적인 환경이 다른 곳과 다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 후 첫 오락으로 축구를 한다. 이러한 축구 환경에서 많은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경도는 2003년 옌볜(延邊)의 쑹칭링(宋慶嶺) 축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 진징다오의 부모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김경도는 독립적이고 힘든 일을 잘 견디는 품성을 키웠다. 200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첫 국제대회를 치른 김경도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U-20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9년에는 U-20 대표팀 주장을 맡아 사상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소수민족 주장 자리에 올랐다. U-20 대표팀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9년 김경도는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도왔다. 김경도는 경기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니에스타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끝난 뒤 기자가 이니에스타와 연락해 상대방이 사인 유니폼을 선물한 것도 김경도를 오랫동안 기쁘게 했다고 한다. 2010년 김경도는 연변FC에 입단해 클럽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이제 막 입단한 뒤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김경도는 늘 팀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만 했다. 마침 외사촌형인 박성(퍄오청·樸成)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퍄오청은 이때로부터 김경도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국에 일하러 갔고 나는 연변FC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박성은 오래 전부터 축구를 했다. 그는 돈을 괜찮게 벌었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사주었고 체육관에 갈 수 있도록 돈도 대주었다. 그리고 내가 U-20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이 좋은 휴대폰과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그것을 다 사주었다. 나중에는 또 휴대폰과 아이패드까지 사주며 축구를 잘하라고 격려 했다” 이는 사촌형인 박성에 대한 김경도의 평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중국 슈퍼리그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김경도는 벤치에서 나와 성인 남자 국가대표팀 데뷔를 알렸다. 이번 국가 대표팀 경험으로 김경도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쟁탈하는 인기 선수로 됐다. 2013년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산둥 루넝(山東魯能)은 연봉 100만 위안, 이적료 800만 위안에 김경도를 영입했다. 하지만 루넝 합류 이후 김경도는 그렇다 할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궈안과의 첫 경기에서 비정상적인 플레이로 결국 팬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를 격려했고 그가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김경도의 플레이는 매우 어색했다. 김경도의 가장 좋은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풀백이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김경도는 팀과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와 부상 스틸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칭찬을 받았고, 팬들은 점차 그를 받아들였다. 그해 그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마가트 감독은 김경도를 완전히 재탄생시켰다. 마가트는 유명한 "악마 감독"이다. 그는 선수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요구 사항이 매우 높았다. 그는 김경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백으로 변경 시켰다. 김경도는 당시 마가트 감독이 자신에 대한 요구사항이 높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공을 빨리 잡아 다른 사람이 못 따라온다며 볼을 잡으면 상대 측면 수비수를 상대로 돌파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싱한(吳興涵)이나 류빈빈(劉彬彬) 같은 빠른 스피드 돌파가 없었다. 나중에 하오준민(蒿俊閔)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해 시즌 김경도는 윙백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루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은사 마가트 감독은 안타깝게도 팀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김경도 역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ACL 8강 1차전 서울 방문경기를 앞두고 몸에 살코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변검사 양성 판정을 받아 60일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음식에 신경을 썼던 김경도는 충격도 컸지만 선수 생활과 컨디션 유지에는 큰 힘이 됐다. 그 해 김경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11월 13일 김경도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융퍼(王永珀), 왕통(王彤), 송룡(宋龍) 등 동료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루넝도 공식 홈페지를 통해 결혼 축하와 함께 김경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김경도의 감정 또한 매우 로맨틱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를 수년간 알아왔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사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 함께하게 되었다. 2017년 김경도는 징계에서 풀려나 팀에 복귀했고 루넝은 리샤오펑(李霄鵬)감독을 영입했다. 리샤오펑이 부임한 뒤 팀은 파격적인 변신을 하지 않고 마가트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갔다. 김경도 역시 익숙한 윙백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김경도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타르델리 및 펠레와 매우 묵계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종종 도움을 주거나 득점하며 루넝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킬러가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8시즌 김경도의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고강도 달리기, 스퍼트 횟수 1위, 경기당 평균 거리 2위, 가로채기 3위, 경기당 4위라는 맹활약으로 시즌 최고 인기 본토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김경도는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됐고 리피는 물론 가오훙보(高洪波), 리톄(李鐵) 등 본토 감독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다. 다만 리피 시절에는 김경도에 대한 요해가 부족해 기술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김경도 역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리피 감독 후임으로 2021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리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2차예선 40강전 몇몇 경기에서 김경도의 활용에 신경을 썼다. 김경도는 움직임이 좋고 수비 면적이 넓으며 공격은 날카롭다. 현재 김경도는 대표팀 10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격을 갖춘 '프리 맨'이 됐다. 곧 카타르 월드컵 3차예선인 12강전이 시작된다. 12강전에서 절대 주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김경도는 계속 자신의 색깔을 살려 대표팀을 위해 몇 골을 더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스포츠
    2021-07-28
  • 세계급 중국 조선족 무용가 김성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많은 사람들이 중국 유명 무용가 김성(金星)을 알지만, 그녀의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중국 무용수 중 한 명인 김성은 25세의 나이에 벨기에 왕립 무용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1995년 이미 유명해진 김성은 군구(軍區)예술단에서 퇴직하고 북경향산병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수술 과정은 장원 감독에 의해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김성'으로 촬영되었다. 23세에 장가들어 28세에 여자로 태어난 김성은 38세에 독일인 한스와 결혼했다. 현재 54세인 그녀의 인생에는 전설로 가득 차 있다. 김성은 1967년 선양의 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남자 목욕탕에 데려가 목욕시키자 김성은 매우 불편함을 느꼈다. 이때부터 김성은 자신의 성 인식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아홉 살 때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학교 문예선전대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군구(軍區)예술단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때로부터 김성은 자신의 내면에 있던 미에 대한 향수가 늘 여성스러움을 깨닫게 되었다. 1985년 군사훈련 멘토 송소원이 제1회 전국 타오리컵(桃李杯) 무용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 그 결과 대회 경험이 전무했던 김성은 탄탄한 기반과 뛰어난 재능으로 400여명이 출전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무용 ‘목가’로 청소년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에서는 최초로 발레화 없이 발가락을 사용할 수 있는 무용수가 됐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겠다는 결심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줄곧 성별의 정체성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내가 언제 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1986년 광둥현대무용학교에서 국비유학생을 미국에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입수한 그는 무작정 광둥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2년 뒤 뉴욕으로 건너가 무용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캐롤라인과 첫 결혼을 했다. 1993년 김성은 귀국 후 중국문화부가 주최하는 전국 현대무용수련반에 초빙되어 중국 현대 무용의 창시자가 되었다. 1995년 영혼과 육체의 분열은 그에게 큰 문제를 가져왔다. 김성은 오랜 시간 고군분투하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장악하기로 했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결심 했다. 김성의 결정은 어머니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 같은 자식이라며 수술이 건강에 지장만 없으면 된다고 말했다. 1999년 김성은 개인의 이름을 딴 중국 최초의 민간 무용단인 '상해김성무용단'을 창단했다. 중국에서 국제 공연 티켓을 판매할 수 있는 곳은 '상해김성무용단'과 '중국곡예단' 두 곳뿐이다. 2004년 무용단을 이끌고 유럽 순회공연을 마친 김성은 귀국길에 독일 신사인 한스를 만났다. 한스는 독특한 동양 여성에게 깊은 매력을 느꼈다. 1년간의 소통 끝에, 그들은 결혼의 궁전에 들어갔다. 결혼 후 세 아이를 입양한 김성은 이젠 엄마와 딸, 그리고 아내가 되어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김성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회는 심리적 인내를 반복적으로 질문하고 지침을 제공하는 투명하고 보이지 않는 심리의사와 같다. 김성은 오직 실력만이 유언비어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진지하게 춤을 추고 있으며 그녀의 유럽공연 티켓은 구하기 어려울정도다.
    • 사람들
    2021-07-12
  • 中 유명 거사(居士)화가 탕위밍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유명한 화가 탕위밍(湯餘銘)은 중국 영화배우 탕웨이의 아버지이다. 탕위밍의 작품은 구하기 어렵다. 탕위밍은 1990년대부터 중국 스타일과 서양 스타일을 결합한 독특한 3 차원 작품을 제작했다. 필명은 북안산(北安山)이다. 원저우(溫州) 러칭(樂淸)출신인 그는 전문 미술가로 현재 거사 전문화가 1인자로 불리며 세계문화유산예술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은 매우 높은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화가들의 귀감이 되고 벤치마킹해 그림 애호가들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탕위밍은 '신부춘강산거도(新富春江山居圖)'에 참여했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람이고, 명리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도 가장 돋보이고 존경하는 곳이다. 일부 대가들에 비해 직업적으로 높은 프로정신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탕위밍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산수화를 그리는 데는 능숙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의 거사 회화다. 그의 작품은 불학적인 매력을 주면서도 과장되지 않은 느낌을 준다. 정직한 사람이라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자신만의 매력이 배어 있다. 탕웨이밍으로서도 딸 얘기를 할 때마다 뿌듯했다. 탕웨이는 지금의 이름값도 대단했고, 탕웨이밍에게 딸의 성장과 성취를 보여주기도 했다. 딸이 자신보다 이름값을 많이 한다고 해서 탕웨이밍이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탕위밍은 화계의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로, 회화 작품도 많은 기관에서 사랑을 받아 현재 세계문화유산예술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불교문화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고 있는 그에게 불교문화와 중국 문화유산을 칭송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할 일이다. 탕위밍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술에 대한 추구나 신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탕위밍은 회화 예술에 대해 높은 이해와 추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 역시 사람들이 존경하는 점이다. 중국 여배우인 탕웨이는 1979년 10월 7일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에서 태어났다. 2000년 중앙연극학원 연출학과 본과에 입학했다. 2007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리안 감독의 '색·계'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2010년 미니시리즈 영화 '월만 헤네시'에 출연해 중화권 영화미디어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탕웨이는 2011년 영화 '만추'로 한국백상예술대상, 한국영화평론가상, 부산영화평론가상 등 10여 개 부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13년 '베이징에서 시애틀을 만나다'는 중화권 로맨스 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우며 상하이 영화평론가상, 중국영화감독협회, 베이징대학생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2014년 탕웨이는 영화 '황금시대'에 주연으로 출연하였으며 2015년에는 영화 '블랙 코드'에 출연했다. 2016년에는 주연 멜로 영화 '베이징에서 시애틀을 만나다'가 7억 9000만 위안의 흥행 성적을 거두며 중화권 멜로 영화 흥행 기록을 다시 세웠다.
    • 사람들
    20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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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수 송경철씨, 거액의 치료비로 눈물 짓는다
    [동포투데이] 항상 조선족 전통민족복장차림의 듬직한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 어깨춤이 절로 나는 구성진 가락으로 흥겹게 노래를 불러주던 가수 송경철씨가 몹쓸 병환에 모대기고있는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져 네티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지난해 7월말 송경철씨는 신장쇠약증세를 보여 선후로 연변병원, 연변제2병원, 북경신장병연구소 등 의료기관에서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 그런데 근 반년동안의 치료를 거쳤지만 병세는 도저히 호전되지 않고 점점 가중해지기만했다. 그러다가 최근 진찰결과 놀랍게도 뇨독증이란 청천벽력같은 병진단을 받게 되였다. 날이 갈수록 병세가 악화돼 일어설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송경철씨는 지난 5월6일 안해의 부축임을 받으며 휠체어에 앉아 한국성모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한국병원측 의료진의 치료방안에 따라 송경철씨는 혈액투척수술을 받으며 간신히 위험기를 넘기긴 했지만 최종 신장이식수술을 받아야만이 건강을 회복할수있는 딱한 상황이다. 그러나 치료비용과 수술비용을 다 합하면 인민페로 90만원이란 거금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 보통 가정으로 놓고 보면 90만원이란 돈은 천문학적수자와 다름이 없어 시름이 짙어지고있다. 설상가상으로 송경철씨의 안해 리영희씨마저 신장쇠약질환으로 앓고있는 장기환자이다보니 가정형편이 무척 어렵다. 지난 1년동안 송경철씨 치료비에 들어간 돈이 이미 10여만원에 달하고 치료비로 꾸어댄 10여만원도 이젠 바닥이 났다고 한다. 송경철씨와 가족은 현재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불행의 늪에 빠져 절망의 하루하루를 보내고있다. 올해 43세인 송경철씨는1991년도에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성악배우로 입단해 성악부 부장, 단장조리 등 직무를 맡아보면서 《사계절찬가》등 대형음악공연과 전국각지 공연, 조선족근로자를 위한 한국위문공연에 여러번 참가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송경철씨는 병환에 몸져눕기전에 그 어느곳에 조선족들을 위한 공연이 있다고 하면 앞장서 달려가 우렁지고 힘찬 목소리로 《보고 싶었소 듣고 싶었소》등 50여수의 민족가요를 부르며 대중들에게 힘과 신심, 희망을 불어넣어주면서 향토애와 향수를 불러일으켜주던 우리 민족의 우수한 가수이다. 연길시조선족예술단 단장 동옥선씨는 《송경철가수는 예술단의 운영과 발전에도 무척 공헌이 많은 둘도 없는 민족예술전업인재이며 누가 어려운 일에 봉착하면 가장 먼저 나서서 도움과 사랑을 주군하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였다》고 하면서 민족성악예술면에서 인재난에 허덕이는 현실에서 송경철가수의 위독한 병상황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동옥선단장은 《우리 모두 손잡고 힘을 모아 송경철가수를 꼭 병마에서 구해냈으면 좋겠다》고 사회각계에 선처를 호소하였다. 한국병원측 의료진에 따르면 송경철씨는 혈액투척이 끝난후 신장이식수술을 받게 되면 얼마든지 몸이 완쾌해질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민족예술의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몹쓸 병에 걸려 쓰러진 송경철씨,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루빨리 병마를 전승하고 대중들앞에 또다시 나서서 우리 민요가락을 흥겹게 부르는 송경철씨의 밝은 모습을 다시 볼수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다. 송경철씨 한국 연락처: 010-5596-2825 송경철씨 후원계좌번호: LIYINGJI(송경철씨부인 이영희)
    • 사람들
    2014-05-27
  • [인터뷰] 장애ㆍ비장애우가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고저
    [동포투데이 김하나 기자] 일전, 김태련 아이코리아 회장을 만난 건 서울 송파구 충민로 6길 아이코리아 본사,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함께 하는 베스트버디스 프로그램이 우리 사회에서 더욱 확산되기를 기대합니다. 장애우들이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올해 희수(喜壽)를 맞은 김태련 회장, 동그란 뿔테안경에 인자한 자태, 침착하고도 신념에 찬 말투는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국내 최초로 “발달장애”란 용어를 도입하고 “여성심리학”을 가르친 김 회장은 한국 발달심리학계의 거목이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며 40여년간 교육자로 살았다. 그런 김 회장이 정년퇴임 직후인 2002년, 한국어린이육영회(아이코리아의 전신) 회장을 맡아 운영하기 시작, 장애아동ㆍ평생교육에 대한 이론을 현장에 적용하겠다는 열정 및 “시대와 사회에 맞는 교육을 제공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기여할 것”이라는 이념을 가졌다. 김태련 회장은 천성적으로 회장실보다는 강단이 더 익숙한 “교육자”이다. 이화여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1964년, 김 회장은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전공은 발달장애심리학. 당시로선 생소한 학문이었다. 그는 국내 최초의 이화여대에 발달장애아동센터를 세우며 연구에 몰두, 이 분야의 선구자가 됐다. 강단 밖 연구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해 한국자폐학회, 한국발달심리학회, 한국여성심리학회 등에서 회장을 역임했다. 교육자로서 한길만을 걸어온 그에게 경영이 버겁진 않았을까. 그러나 김 회장은 아이코리아의 경영도 교육과 연장선에 있다고 말한다. “제가 진로를 바꿨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학생을 가르치고 여성단체ㆍ학회 등의 모임의 장(長)을 맡은 것도 한 조직을 운영한 거라 보거든요. 또 제가 대학에서 발달심리학 이론을 연구했다면 여긴 적용하는 현장이에요. 그래서 전 기업 경영자이지만 한편으론 계속 교육계에 몸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회장의 관심사는 기업의(아이코리아의) 운영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가 취임할 당시인 2002년 아이코리아는 보육교사 양성 및 재교육 등 비장애인 교육사업을 중점적으로 펼쳤다. 하지만 각종 장애와 질병을 앓는 어린이가 늘자 아예 아이코리아로 사명을 바꾸고 사업을 확장했다. 그 때가 2006년이었다. 그가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베스트버디스코리아”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친구가 돼주는 이 프로그램은 김 회장이 주도한 사업이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학부모가 “자녀보다 하루 더 사는 게 소원”이란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그는 미국 태프트대학에 장애인 독립 프로그램이 있다는 정보를 알고는 2008년 이 대학을 방문한다. 1년간 이 대학과 교류하며 국제 봉사단체인 “베스트버디스”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는 해당단체에 직접 이메일로 협약제안을 했다. 그 뒤 베스트버디스 관계자는 2010년 아이코리아가 운영하는 한국육영학교와 아동발달교육연구원을 돌아보고는 김태련 회장과 파트너십을 맺었다. 발달심리학을 전공한 회장이 이끄는 단체라는 점도 가점 요인이 됐다. 그해 아이코리아는 베스트버디스코리아를 설립, 현재 10개 학교의 150명 청소년이 참여하는 활동작품전시회와 후원음악회를 매년 열고 있다. 김태련 회장은 장애우와 비장애우들이 친구로 만나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과 추억을 담아 완성한 세라믹페인팅과 유리공예 활동사진 등 다수의 작품들로 “2013년 베스트버디스 코리아 활동작품전”을 열어 사회의 호평을 받았다. 올해로 4년째를 맞는 베스트버디스 코리아의 활동은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1대1 단짝이 돼 다양한 또래문화를 공유하며 우정을 쌓아가는 프로그램으로 현재 경기고를 비롯한 단대부고와 대원외고, 서울국제학교, 서울정애학교, 성남혜은학교, 잠신고, 정신여고, 한국육영학교 등 10개 고등학교에서 활발하게 실시되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친구로 사귀면서 서로 다름과 아픔을 배웁니다. 의외로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이 상대로부터 더 많은 걸 배워요. 장애인사업이라 학부모들이 꺼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의 인생관이 바뀌었다며 둘째 자녀도 이 프로그램에 보내겠다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거든요.” 김태련 회장과 그가 이끌고 펼치는 베스트버디스 코리아의 활동은 국제적인 긍정을 받고 있다. 지난달에 있은 2013 베스트버디스(본부) 리더십 컨퍼런스에서 베스트버디스 코리아는 전 세계 52개 회원국 중 가장 우수하게 활동한 국가에게 주는 “우수 프로그램 진행상(Best Outstanding Chapter Award)”을 수상, 지난 2011년에 이어 두 번째로 수상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알아본데 따르면 베스트버디스는 미국 J. F. 케네디 대통령의 조카 앤서니 케네디 슈라이버에 의해 1989년에 설립된 국제장애인지원 비영리단체로 현재 세계 52개국에서 이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으며 베스트버디스 코리아는 지난 2010년 (사)아이코리아에 의해 세계 47번째로 설립됐다. 최근 김태련 회장이 주력하는 사업은 “애도심리학” 프로그램이다. 장애인부모의 심리를 상담하고 치유하자는 목적에서 개설됐다. 그는 이 프로그램이 세월호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인터뷰에서 김태련 회장은 베스트버디스 코리아 활동에 한국교회의 관심과 지지를 요청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3대째 모태신앙이다. 그의 외조부는 강화도 내리교회 설립자인 윤명삼 장로이다. 신심(신앙심)이 각별한 가풍에서 태어났기에 신앙을 “삶의 중심”이라 정의한다. 그는 회사 경영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 신앙이 미친 영향이 크다고 했다. “어려울 때마다 힘을 얻었던 순간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였던 것 같아요. 회사 등 여러 일에 의논하고 응답받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던지요. 하나님이 있었기에 성장할 수 있었고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을 가진 여성 기업인들에게 삶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섬기는 리더십을 발휘하라 당부했다. “신앙은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변인들에게 ‘네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 싶다’는 사람이 먼저 되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먼저 섬기고 나누는 리더십을 갖추십시오. 21세기 리더십의 핵심은 섬김과 봉사입니다. 군림하지 않는 유연함이 시대를 앞서가는 리더를 만든다는 점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김태련 회장 소개1937년 경북 안동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 학사 및 석사 성균관대학원 심리학 박사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 이화여대 발달장애치료교육센터장 미국 UCLA대 파견교수 한국어린이교육협회, 한국자폐학회, 한국발달심리학회, 한국여성심리학회 등 학회장 역임 아이코리아 회장.
    • 사람들
    2014-05-12
  • 잔디밭의 조선족 3자매 스토리
    [동포투데이] 장어금: 1964년 연길 출생, 키 1.58m, 선수위치 미드필더, 이화련: 1966년 화룡 출생, 키 1.60m, 선수위치 미드필더, 안영실: 1964년 화룡 출생, 키 1.64m, 선수위치 수비. 이 3명의 여성이 바로 지난 세기 80년대 잔디밭에서 축구로 조선족 처녀들의 날랜 모습을 자랑하며 전국 우승을 뽐내던 원 연변 여자축구팀의 주력선수들이며 한시기 중국 여자축구팀에까지 입선됐던 잔디밭 3자매이다. 지금 이 3명의 선수 중 장어금은 가정주부로, 이화련은 상해의 모 외자기업에서, 안영실은 개인사업으로 각각 평범한 일터에서 수수한 삶을 살고 있지만, 역사는 그녀들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1980년대 초에 여자축구붐이 광활한 중국 대지에 휩쓸면서 연변에도 1982년에 여자축구팀이 설립되었다. 당시 연길시 2중에서 공부하던 장어금은 화룡에서 온 이화련, 안영실 등과 함께 연변 여자축구팀에 입선됐다. 당시 연변 여자축구팀은 길림성 축구팀 등 5개의 축구팀과 훈련장 하나를 두고 훈련했는데 늘 남성팀들에 훈련장을 양보하다 보니 언제나 날씨가 가장 더운 오후 2시에 훈련을 했기에 그 조건이 매우 간고했다. 생리가 와도 당시 그녀들은 그 어떤 내색을 내지 않고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훈련을 견지했다. 약 한 달 반의 시일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결과 40여 일 후에 펼쳐진 전국여자축구경기에서 연변 여자축구팀은 3등을 쟁취했고 이어서 그 이듬해인 1983년에는 서안에서 진행된 중국 전국여자축구경기에서 전국 우승의 영예도 만끽했다. 당시 연변 여자축구팀 선수들한테도 그들의 장기에 걸맞은 “별명”이 있었다. 예하면 장어금은 속도가 빠르고 대인방어에 능하면서 이악스러웠기에 “개고기”란 별명이 있었고 안영실은 공차단이 적중했고 장거리 패스에 능했기에 “장벽”이란 별명을, 이화연은 가동작을 잘하고 헤더 슈팅에 능했기에 “공중 능수”란 별명을 갖게 됐다. 전국 우승 후 장어금, 이화련, 안영실 등은 중국 여자축구팀에 입선하기도 했다. 한시기 연변 여자축구팀의 감독직을 맡은 적이 있던 동경춘 축구원로에 따르면 그 당시 연변 여자축구팀의 약점은 보편적으로 키가 작고 속도가 늦었으며 수비도 약했다. 하지만 팀의 풍격이 하도 이악스러웠기에 어느 팀이나 다 두려워하는 팀으로 전국적으로도 소문이 높았다. 하지만 후기에 들어 팀을 맡고 있던 방정훈 감독이 훈련지도에는 능했으나 선수들에 대한 요구가 높지 못했기에 1983년 전국 우승을 따낸 후인 1984년부터는 팀 성적이 하강 선을 긋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데는 선수(특히 농촌 처녀) 들이 너무 일찍 연애하면서 훈련과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은 데 있다고 그때의 주력이었던 장어금씨가 피로했다. 연변여자축구팀 선수 대부분이 농촌에서 온 처녀 들었기에 그들은 도시진출이 목적이었으며 일단 그것이 해결되자 최신 유행 옷, 화장품 따위에 신경을 쏟으면서 훈련에 별로 정진하지 않았다. 팀 성적은 그렇게 하강 선을 긋다가 결국 1986년에 이르러 해산되고 말았다. 현재는 연변에 없는 여자축구 하지만 역사는 한시가 휘황했던 연변의 여자축구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 사람들
    2014-05-12
  • 세계여자격투기 챔피언과 중국 조선족 여성
    [동포투데이 리포터 철민] 인간운명에 있어서 선택이란 아주 중요한 것 같다. 어제의 약자가 오늘의 강자 되고 오늘의 거지가 내일의 부자로 될 수 있는 세상, 여기서 물론 노력과 분투가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겠지만 선택 역시 노력과 분투를 토대로 하는 것이라 해야겠다. 심영희 - 태평양 건너 세계의 최강국이며 제일 부유하다는 아메리카란 나라에서 여자이종격투기 세계챔피언이 된 여인이다. 워낙 중국 연변의 일개 수수한 조선족 여인에 불과했던 그녀, 어릴 적 스포츠에 신체적 소질이 있었고 육상같은 종목에 재질을 과시한 적이 있었으나 가령 후날 여자격투기계에 투신하지 않았더라면, 여자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치고 차고 깔아뭉개는 혈투에 끈질긴 노력을 경주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오늘의 그 녀가 없었을 것이다. 심영희 – 그녀의 이름은 워낙 이영희었다. 1963년 중국 연길시 철남 동광촌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찍 8살 적부터 체육에 재질이 있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체육운동에서 남다른 싹수를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만도 연변의 스포츠 분야는 그 종목별로 아주 단조로왔던 상황, 영희가 선택한 것은 육상종목이었다. 다리가 길고 동년배들에 비해 5센치메터가량 키가 더 큰 영희로 놓고 볼 때 이는 정확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영희의 아버지는 늘 “육상은 모든 체육의 기초이므로 체육선수라면 반드시 이 관문을 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뜻을 잘 알았고 기량연마에 땀동이 쏟기를 아끼지 않았다. 결과 소학교시절에는 육상경기의 1500미터와 3000미터 달리기에서 늘 우승해 어릴 때부터 저력을 보여줬고 중학교 시절에는 배구, 농구 등 구기종목에서도 두각을 자주 나타냈다. 그녀가 무술에 취미를 느낀 것은 고중을 졸업해서부터였다. 그 때인즉 중국의 영화관과 극장가에서 무술영화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헌데 당시만 해도 연변에서 무술을 배울만한 체육관과 무술지도가 별로 없었던 상황어서 무술계에 입문하고 싶어도 생각뿐이었다. 또한 아버지를 비롯한 가정에서도 “하필이면 여자가 무슨 무술인가”고 하면서 내켜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그 생각을 접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또 몇년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던차 1986년 서울아시아게임을 계기로 중한 사이가 급기야 가까와졌다. 그러자 오래동안 품었던 영희의 꿈도 실현될 희망이 보였다. “그렇다. 남조선(한국)으로 가서 무술을 배운다.” 그래서 1988년 무작정 한국행을 한 그녀였다. 새롭고도 커다란 꿈을 갖고 한국땅에 발을 들여 놓은 이영희, 하지만 그녀를 맞은 한국사회는 이전에 그렇게도 동경하던 “무릉도원”이 아니었다. 우선 동포라고 하면서도 동족취급을 하지 않았고 인격과 대우면에서도 차별이 심했다. 우선 그녀가 취직해 일하던 음식점 주인부터가 중국조선족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같은 일을 하는 한국인보다 봉급을 적게 주는가 하면 나중엔 차일피일 미루더니 3개월치까지 체불했다. 그래서 왜 “나의 봉급만을 체불하는가”고 따졌더니 “너 불법체류신세에 뭘 따지느냐”면서 파출소로 가자며 협박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인내력은 한계에 이르렀다. “그래 가자. 파출소로 가면 무서워하는 줄 아느냐. 너 오늘 사람 잘못 선택했다. 난 여기서 안하고 중국에 가면 그만이지만 너 어떻게 되나 좀 보자.” 영희는 수많은 중국조선족이 한국땅에서 기시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그 음식점 주인을 엄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멱살을 잡자 키가 작은 음식점주인은 영희가 흔드는대로 휘친거렸다. “너 파출소로 갈래 아니면 여기 2층에서 떨어져 볼래?!” 음식점 주인여자는 영희앞에 무릎을 꿇면서 빌었다. “안돼, 오늘 파출소로 간다. 너 이제 사정하긴 이미 늦었어. 너와 나 오늘 판을 깬다. 나 보따리 싸고 강제귀국 당하고, 넌 내 봉급 지불하고 벌금까지 당해야 해.” 좀 지나치긴 했다. 하지만 영희의 거동은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많은 한국인들의 동정을 자아냈다. 그들은 “미스리의 봉급은 자기들이 조해시켜 해결해 주겠다”고 하면서 파출소행만은 극구 만류했다. 그러자 가까스로 참았던 영희의 눈물이 쏟아졌다. “저도 중국에서는 잘 나가는 여자였어요. 제가 왜 한국에 와서 저런 저질적 여자한테서 기시를 받아야 되죠?!…” 후에 영희는 그 음식점이 있는 동의 동장과 주위사람들의 도움으로 체불됐던 봉급도 다 받고는 보다 일당이 많은 건설현장으로 일자리를 옮겨 남자들도 힘들다는 “노가다판”에 뛰어 들었다 … 한국에 체류하는 2년간 그녀는 음식점과 건설현장 등을 전전긍긍하면서 막노동에 투신하는 한편 체육관을 찾아다니며 무술기능을 연마하기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의 무술계 역시 한계가 있었다. 아니 중국조선족인 영희로서는 한국정상급의 무인들과 만날 수가 없었고 혹시 만난다 해도 그들이 그녀를 받아 줄런지도 미지수였다. 그 기간 영희한테는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피곤하고 방방하던 시기였다. 당시 그녀는 하마트면 무술연마를 포기할 번하기도 했다. 1990년 마음속으로부터 일종 실망의 그림자를 지니고 귀국했던 그녀는 인차 결혼했고 그 이듬해엔 아들 김영국이를 낳으면서 일약 가정주부로 됐다. 헌데 인간이란 자기가 희망했던 것을 쉽게 포기할수 없는 법, 때마침 중국의 스포츠 격투기분야에서는 미국 권투계의 타이센이 새별로 떠올랐다. 이는 거의 사그라지던 영희의 가슴속에 새로운 욕망이 불타오르게 했다. 새로운 꿈을 찾아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미국은 가까이에 있는 한국이 아니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또한 멀리에 있는 나라이다. 비자를 받기가 힘들거니와 간다 해도 어떻게 자리를 잡는가 하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이상 그녀는 갖은 경로를 통해 끝내 미국행비자를 손에 쥐고야 말았다. 1999년 그녀가 태평양상공을 날아 넘어 미국으로 향할 때 그녀는 이미 이영희가 아닌 심영희로 탈바꿈한 뒤였다. 그리고 그 때의 그녀의 나이 36세, 여자로서 격투기프로로 되자면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였다. 심영희씨는 지꿎은 노력과 강훈련으로 나이가 많은 것을 미봉했다. 합기도외 유술과 킥복싱도 익혔고 하루 잠자는 시간은 3 ∼4기간에 불과했다. 일종 행운이랄까. 당시 그녀가 찾은 체육관은 덴젤 워싱톤, 제니퍼러그 휴이트와 마이클 타이센 등 세계정상급 스타를 탄생시킨 “할리우드 짐”이었다. 그렇듯 유명한 체육관인만큼 개인지도료도 엄청났다. 미국생활초기 미용원에서 아르바이트로 받는 800달러의 절반 이상이 그 비용으로 나갔다. 그 뒤 그녀는 월세 1500달러씩 하던 세집에서 300달러씩 하는 단칸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이를 미봉하기 위한 그녀의 훈련은 계속됐고 그러는 사이에 수년간 세월이 훌쩍 지나갔으며 그녀는 어느 덧 합기도 5단, 중국무술 5단, 검도 5단 등 무술 종합 15단에 달하는 헤비급 무인으로 발돋음했다. 그 뒤 부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4차례의 감사장을 받으면서 심영희란 이름은 미국 로스안젤레스의 한인사회에 널리 알려졌고 얼마 안돼 그녀는 로스안젤레스 웰셔 경찰서로부터 평생회원배지을 발급 받았으며 또한 미국사상 처음으로 여자경호원증을 수여받기도 했다. 심영희씨가 미국 이종격투기계에서 소문을 놓기 시작한 것은 2006년 미국 로스안젤레스를 방문한 당시 한국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의 경호를 맡아해서부터였다. 당시 로스안젤레스의 한인사회에도 한다하는 무술인들이 많았다. 특히 거의 본질적으로 중국 조선족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거나 기시부터 하는 한인사회에서 심영희씨가 한국의 유명한 정치인의 경호를 맡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녀의 무술실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만큼 심영희씨는 미국사회의 도처에서 무술시범을 보여 그 실력을 인정받은 중국무술, 합기도와 검도 등에 정통한 조선족 여중호걸이었으며 또한 5톤 짜리 자동차가 배우로 지나가도 끄떡없는 기합도 가진 그런 “철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한테는 무술시범을 하여 돈을 많이 버는 것이나 어느 한 정치인의 경호를 맡아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는 여자이종격투기계의 챔피언이 되어 이 분야를 제패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그 이듬해 4월, 그녀와 맞붙은 상대는 먼저 번 세계여자이종격투기 챔피언으로 등극했던 멕시코의 이사벨 마르테네즈였다. 당시 심영희는 이미 44세가 되는 중년층이었지만 상대는 22살이 되는 프로로는 한창 나이라 할 수 있었으며 특기 또한 발차기로 세계에서 유명했다. 심영희씨는 사전에 마르테네즈의 특기에 대해 깊히 연구했다. 몸이 날래고 특히 발차기를 잘한다는 것, 그 것을 잘 피하고 자기의 특기인 둘러 메여치기를 잘 활용해야 했다. 겨루기가 시작되자 아니나 다를가 눈깜짝할 사이에 상대의 발길이 수시로 날아왔다. 만약 그녀의 발길에 요해 부위만 맞았더라면 나의 챔피언꿈은 수포로 됐을 것이었다… 하지만 심영희는 마르테네즈의 발길을 잘 피했고 수차에 거쳐 상대를 둘러 메치기에 성공했으며 그 뒤엔 마르테네즈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팔로 상대의 목부위를 휘감아 머리를 들 수 없도록 만들었다. 심영희의 전술은 과연 효과를 봤다. 이종격투기에 있어서 밑에 깔린 측이 항상 힘을 더 빠져 버리기 마련이었다. 2회전에 거쳐 수차씩이나 심영희한테 깔려 일어나기에 실패한 마르테네즈는 3회전을 앞두고는 아예 기권해 버렸다. 믿기 어려운 기적이 이역만리 아메리카땅에서 일어났다. 중국 조선족여인이 여자이종격투기 세계챔피언이 됐다. 세계가 열광했다. 세계챔피언상과 금띠를 받는 순간 심영희는 울었다. 오, 얼마나 큰 대가로 얻어낸 챔피언 등극이었던가?! 한편 심영희씨한테 챔피언보좌를 빼앗긴 멕시코의 마르테네즈는 목과 어깨부위에 심한 타격을 입은 듯 한쪽 켠에 밀려 의사의 치료를 요청했다. 치명타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 심영희씨는 미국에서 수차의 이종격투기 경기에 참가, 지금까지 43차의 경기에서 무려 41차나 우승을 했다. 이런 공로가 인정되어 심영희씨는 미국대통령으로부터 수차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에서의 대통령상 인선 및 추천은 대통령상을 수상한 시민들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게 심영희씨의 설명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대통령상을 미국 국민만 따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 그 어느 국가의 국민도 미국대통령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심영희씨의 설명이다. 얼마전 그 심영희씨가 재차 고향행을 했다. 오바마 미국대통령상을 받은 연길 윤세미용성형병원 윤경애 원장한테 대통령상을 전해주러 왔다. 그 상 역시 심영희씨가 미국사회에 추천하여 이뤄진 것이었다. 그렇듯 세계를 놀래운 여인이었지만 필자와 만났을 때 그녀는 아주 차분한 자세였다. “2007년 저한테 당한 마르테네즈가 몇해전 또 재 도전을 해 왔어요. 두번째에도 보기 좋게 제압해 버렸죠. 어렵게 딴 챔피언띠를 다시 그녀한테 돌려줄 순 없잖아요. 이는 단지 저의 영예뿐이 아닌 우리 연변의 영예를 지키는 일이라고 해야겠죠?!” 한편 그녀는 미국 로스안젤레스에서 “유나이티드 유스 파운데이션”이란 도관도 경영, 청소년육성에 성의를 아끼지 않고있다. 그리고 무료시범과 모금활동을 통해 지역사회봉사에도 한몫 크게 기여하고있는걸로 알려지고있다. 심영희씨가 무르익히고있는 또 하나의 꿈이라면 미국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자기의 재능을 영화에 재현시키는 것, 현재 할리우드측과도 여러번 접촉이 잦았고 협상도 바야흐로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심영희 – 중국조선족이 낳은 “철의 여인” 심영희! 이제 그녀가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그날이면 심영희는 미국영화계에 발을 들여놓는 첫 중국조선족이 될 것이다.
    • 사람들
    2014-04-30
  • 서예대가 최원택 작품전 창춘서
    지난 15일, 중국 조선족 서예대가 최원택 선생의작품전이 중국 지린성 창춘시 쑹왠호텔에서 개막됐다. “필묵속에 펼쳐진 중국 꿈”을 전시하기 위해 진행된 이번 전람회에는 중국 8•1서예원 동북 분원의 주최로 최원택 서예가의 작품 200여폭이 전시됐다. 작품은 “중국 꿈”과 관련해 해석, 진술 등을 묵향으로전하면서 시대의 목소리와 함께 생활, 예술에 대한 작자의 열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람회 첫날 지린성 및 창춘시 지도자외 노간부, 창춘시 각 지역 간부, 서예애호가, 시민 등 각계 인사 수백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현시대 서예대가의 작품감상과 함께 새로운 형식으로 “중국 꿈”에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적수천석”작품으로 서예대가 반열에 중국 서예원 1급 서예가인 최원택 선생은 2011년적수천석(滴水穿石)이란 작품으로 국내외 서예계에 이름을 날렸으며당당히 중국내 서예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3년에 거쳐 완성된 “적수천석”은 예서(隶书), 해서(楷书), 전서(篆书), 초서(草书), 행서(行书) 글자체외 현재 발전하고 있는 형의서체(象意书体)로 글자를 연결해 조화를 이룬 작품으로 역대 첫 시도이기도 하다. 최원택 서예가는 “예술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화사회건설과 함께 서예작품에 여섯 가지 글자체를 모두 넣에 조화를 표달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작품 창작동기였던것이다. “조화서체(书体)”를 통해 그는 “중국내 56개 민족의 단결, 조화사회, 중국 꿈 실현”이라는염원과 “세계 5대 주 평화로운 대가정 실현”이라는 염원을 담았다. 중국과 국제의 유명 서예가들은 이 작품을 6체 합일(六体合一)의창조물이라고 절찬을 아끼지 않는다. 전람회에 전시된 또 하나의 “기적작품”은 바로 2011년기네스 기록에 등재된 “천자문”이다. 이는 세계에서 제일긴 “한자와 조선어 대조서법”작품으로 그 길이는 46미터에 달한다. 당날 많은 참가자들은 “천자문”작품을 책으로 펴낼 것을 희망했으며 몇몇 출판사 역시 출판의향을보이기도 했다. 민족에 대한 긍지 공익사업에도 적극 일찍 1942년 중국 헤이룽장성 미산현에서 태어난 최원택 선생은 어려서부터 서예를 무척 즐겼고특히 모스크바대학 졸업생이었던 큰 아버지에게서 많은 지도를 받았으며 중국 서예대학을 졸업한 뒤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재직 시 애호로 여러 전람회, 서예전에 참가해 인정을 받았지만 서예 황금기에 들어선 것은 퇴직 후였다. 미산시정부에서 사업하다 퇴직한 후 그는 아내와 함께 두 딸이 거주하고 있는 베이징으로 향한다. 수도에서생활하면서 전람회에 참가하던 그는 조선족도 중국내서예계 최고 수준에 오를수 있음을 증명하려고 결심한다. 그후 각종 전람회, 서예원을 다니면서 공력을 닦기 시작, 끈질긴노력으로 북경에 간지 6년 만에 중국내 최정상에 오르게 된다. 현 최원택 서예가는 중국 “국무원 국가(손님)선물특별제공예술가”, 중국 서예원 1급 서예가, 유엔 국제미술가 연합총회 부주석, 세계 명가서예원 부원장 등 묵직한사회직무로 활약하고 있다. 2011년 그는 중국 해협양안 서예가협회로부터 “덕예겸비 서예가”훈장을, 2012년 “당창건 90주년경축중국서예전”에서 금상 등 수두룩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의 수많은 작품은 중국주재 조선대사관과 프랑스대사관등에 수장돼 있다. 현재 중국공익사업 형상대사이기도 한 최원택 서예가는 공익사업에도 적극 참가, 대량의 작품 경매를통해 빈곤학교, 재해지역 등을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요해에 따르면 “최원택 서예전”은 장춘에 이어 오는 5월 중순 연길에서 개최하게 된다. 《길림신문》
    • 사람들
    2014-04-17
  • 영등포구청장 예비후보 박진수… “교육 강구 영등포, 살고 싶은 영등포 만들터”
    [동포투데이 서울]낙후된 영등포를 선진 영등포로 탈바꿈하기 위해 뛰는 독특한 구청장 예비후보가 있다. 6월 지방선거에서 구민의 삶의 질을 지금보다 15단계 끌어올리겠다고 큰소리치는 박진수(48, 새정치민주연합) 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지난 26일(수) 오후 1시 여의도 사무실에서 박 예비후보를 만났다. 박 씨는 풍부한 독서력에서 나오는 무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거듭나는 영등포를 창조하겠다고 역설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독창적 교육복지 박 예비후보는 교육전문가이다. 영등포구 여러 초중학교 운영위원장과 영등포교육환경개선학부모포럼 회장을 역임하며 공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성심학원 대표로서 지역사회 교육의 질을 높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이런 다양한 경험이 독창적 교육복지공약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박 씨는 구청장에 당선되면 연립주택을 임대해 기숙사형 공부방을 만들 것이라고 했다. 이곳을 주거환경이 열악한 중·고생들에게 무료로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공부환경 개선을 통해 이들의 인성을 함양시키고 학력을 신장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교육희망사다리를 나눠주겠다고 말할 때는 목에 힘이 들어갔다. 박 씨는 “우리 학생들에게 1:1 대학생 멘토를 붙일 것입니다. 멘토는 지방 출신 명문대 재학생들 중에서 엄격히 선발할 것이고요. 이들로부터 월 25만 원 정도만 받으면서 숙식과 함께 다양한 혜택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 멘토들 때문에 젊은 대학생들이 우리 지역으로 몰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지역에 생기가 돌고 경제가 활성화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독창적인 교육복지 정책이었다. 양질의 공교육, 저렴한 등록금, 차별화된 특목고와 국제학교 유치 박 예비후보는 우리 사회 저출산 고령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점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영등포구 인구가 조선족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41만 명에서 38만 명으로 감소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책을 교육전문가답게 명확히 밝혔다. 박 씨는 “여의도 소재 기존 학교 중 하나를 리모델링해 국제고로 전환시키겠습니다. 국제고 신입생 모집 시 정원의 30~40% 범위 내에서 영등포구 출신을 우선 선발하겠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부지를 선정해 조선족을 위한 초·중·고 과정의 국제학교를 유치하겠습니다. 우리 구가 입지를 추천하면 그것을 포함해 투자하겠다는 곳이 곧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희망의 영등포를 설계하면서 떠나는 영등포에서 이사를 오는 영등포로 바꾸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반값 학원, 질 높은 사교육, 경력단절여성 재취업 영등포구는 재정자립도가 서울 25개 자치구 중 5위로 상위권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미지, 대학진학률, CCTV 보급률 등 많은 부문에서 20위로 최하위권에 쳐져 있다고 했다. 영등포구 주민들은 다른 모임 장소에서 ‘영등포’ 출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꺼린다고도 했다. 그 대신 ‘여의도’나 ‘목동’ 출신이라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 예비후보는 “영등포구민이 자긍심을 갖도록 만들겠습니다. 목동이 언제부터 목동이었습니까? 영등포구는 목동과 달리 양질의 교육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사교육 특구를 조성하겠습니다. 동 단위로 반값 영어 학원을 만들겠습니다. 주민자치센터나 관공서를 활용하겠습니다. 낮에는 이곳을 경로당으로, 밤에는 학원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경쟁 입찰을 통해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우수 사교육업체에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낮에는 어르신복지, 밤에는 교육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교육의 질을 높여 학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보조교사를 채용할 것입니다. 이들이 수강생들을 엄격히 관리할 것입니다. 보조교사들은 우리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경력단절 여성들 중에서 재교육을 통해 선발할 것입니다. 또한, 교육의 질을 평가하는 전문가위원회를 구성할 것입니다. 교수학습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평가위원들이 매월 이들 반값학원들을 점검하고 심사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경쟁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박 씨는 청소년과 어른이 공존하는 어울림 공간을 통해 효의 도시 영등포를 구현하겠다고 했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영등포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영등포구민인 것을 떳떳하게 밝힐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벤처벨리 조성과 면세점 유치로 일자리 창출 여의도와 신길동 뉴타운, 구로구를 연결하는 벤처벨리를 조성하겠다고 했다. 이를 통해 신규 일자리를 확충하겠는 것이었다. 더불어 대림동에 면세점을 유치하겠다고 역설했다. 고학력 유능한 조선족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박 예비후보는 “여의도는 국제금융지구로 지정돼 있습니다. 이를 신길동 뉴타운과 구로구로 연결하는 벤처벨리 조성에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은 28만 5천여 명입니다. 그중에서 영등포구에 4만 5천여 명, 구로구에 3만 3천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 대림2동은 원주민보다 조선족 비율이 더 높습니다. 60~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중국인 대상 면세점용 빌딩을 건축해 분양하겠습니다. 그러면 조선족 고급인력들이 양질의 일터에서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범죄의 온상인 조선족 마작 노름은 발본색원할 것 박 예비후보는 “조선족들이 영등포구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마작을 일삼는 일당은 반드시 잡아들일 것입니다.”라고 강조하며 “경찰서장의 의지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꼭 뿌리를 뽑을 것입니다.”라고 단호한 결의를 밝혔다. 그러면서 박 예비후보는 한 가지 위트 있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판문점에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설치하면 남북평화를 유지하는 데 보탬이 될 것입니다. 대림동에서 마작을 일삼는 조선족들도 거기에 가서 하면 됩니다.”<한국인권신문>
    • 사람들
    2014-03-27
  • 장백현 진미림 조선족노래와 춤으로 전국 들썽
    장백조선족자치현 제일실험소학교의 진미림(한족)어린이는 일전에 있은 중앙텔레비죤 "비상 6+1"무대에 올라 전국 관중들과 대면, 민족특색이 짙은 조선족민요 "도라지"선률에 맞추어 조선족무용 "북춤"을 곱게 춤과 동시에 또 아버지 진효빈과 함께 조선족노래 "아버지의 축복"을 멋지게 불러 평심위원회와 관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평심위원이며 저명한 군인가수인 류화강는 진미림의 조선족노래와 무용표현을 보고 격동된 나머지 이렇게 평가했다. "다년간 나의 노래는 줄곧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하지만 오늘 진미림과 그의 아버지의 노래는 나를 크게 감동시켰다. 진미림은 이처럼 어린나이에 조선족노래를 잘 불렀을 뿐만아니라 춤도 아주 잘 췄다. 실로 장하다. 나라에서는 문화예술인재에 대해 아주 중시하고있다. 더욱 많은 문화예술인재를 양성하는것이 나의 직책이다. 나는 해방군예술학원과 공군정치문공단을 대표해 진미림을 나의 학생으로 받아드리련다." 무대에서 진미림어린이는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저명한 사회자 주신의 현지 취재를 받았으며 또 평심위원회의 요청으로 사회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알아본데 따르면 진미림은 얼마전에 있었던 길림성의 가무표현 총결승전에서 우승을 쟁취한후 중앙텔레비죤《비상 6+1》연출단의 면답시험과 심사 및 선발을 거쳐 마침내 중앙텔레비죤《비상 6+1》무대에 오르게 된것이다(인민넷).
    • 사람들
    2014-02-24
  • "연변 좋은사람" 화룡시 동성진 광동촌 김순철
    연변인터넷방송에 따르면 연변에는 촌민들의 치부와 고향의 번영발전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한 촌서기가 있다. 그가 바로 지난해 <연변 좋은 사람>으로 선정된 화룡시 동성진 광동촌 당지부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인 김순철이다. 1988년 광동촌의 장애인, 특수빈곤호들로 구성된 생산복리원을 경영하면서 뛰여난 관리능력을 보여준 김순철은 2004년 촌 당지부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으로 당선됐다. 당시 김순철은 촌 환경정돈부터 착수해 촌민들의 신임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2008년 김순철의 제안으로 광동촌에서는 유기쌀 전문합작사를 설립했는데 1년후 전문농장으로 승격하면서 현재 연간 생산량이 천여톤에 달해 이 촌의 기둥산업으로 됐다. 이 촌에서는 관광업도 적극 발전시켰는데 지난해만 연인수로 7만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이 촌을 찾았다. 관광수입까지 더해 지난해 이 촌 농민 일인당 순수입은 만 위안에 달했다. 이 마을의 김남수 농민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순철 주임이 주택과 도로건설, 녹화조성과 빈곤퇴치 등 촌민들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많이 하면서 숱한 고생을 했다. 김서기가 한 일에 대해서 모든 촌민들이 인정한다."고 말했다. 작년부터 김순철 주임은 또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일반 유기쌀보다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수 있는 새 품종 무공해쌀 개발에 진력하고 있다. 김순철 주임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기술을 가져와 실험을 했다. 지난해 4헥타르 재배했는데 없어서 못 팔았다. 잔류농약이 없다는 인증을 관련부문으로부터 받았고 킬로당 30 위안에서 40 위안씩 팔수 있다. 앞으로 40에서 50헥타르 정도 재배할 예정인데 이렇게 된다면 일인당 수입을 2만 위안까지 올릴수 있을 것 같다."고 소개했다.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항상 불타는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촌민들을 위해 일 해온 사나이, 광동촌을 일류의 새농촌으로 건설하기 위한 길에서 그의 도전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 사람들
    2014-02-18
  • 고려인 돕는 활동 15년 넘게 펼쳐 온『너머』대표 김승력 씨
    [인터뷰=동포세계신문 김용필 편집국장]경기도 안산시 선부동 ‘땟골’은 고려인촌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집주인을 빼고는 세들어 사는 사람이 거의 다 고려인 동포라고 하다. 안산시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5천여명, 그 중 땟골에 2천명 가까이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대부분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온 사람들이고,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온 사람도 있다. 올해는 고려인 이주 150주년이 되는 해, 한국언론도 고려인을 조명하는 기사를 내고, 국회에서도 고려인을 위한 지원특별법 제정 문제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심지어 지난해 12월 27일엔 국회에서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사업회 발족을 위한 세미나도 개최하는 등 관심이 무척 높아지고 있다. 이런 관심을 이끌어내는데 있어 지난 15여년간 현장에서 활동한 동포활동가인 김승력(46)씨를 빼놓을 수가 없다. 김승력씨는 1997년 10월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가서 13년간 고려인 지원활동을 펼치고, 2010년 한국에 와서는 한국에 온 고려인을 돕는데 모든 것을 다 바쳐 활동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기자는 지난 1월 3일 오후 안산시 선부동 땟골을 찾아갔다. 안산시 선부동은 중국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원곡동과 바로 인접한 지역이다. 안산역과 가까운 원곡동은 다문화특구지역으로 지정될만큼 외국인 밀집거주지역으로 많이 알려진 곳이지만, 선부동은 외진 곳으로 겉으로 많이 드러나지 않은 곳이다. 고려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땟골’이라는 이름과 함께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마 김승력씨가 2011년 11월 처음 이곳에 와서 고려인을 위한 한글야학 교실을 열고, 임금체불, 산업재해 등 고충상담을 해주는 별별상담소를 열게 되면서 외부에 고려인촌의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 온 고려인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한국말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조선족동포들은 한국어 소통이 문제가 없기 때문에 쉽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고, 어려움을 겪게 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도 많고, 한국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지만, 고려인 동포들은 한국말을 할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한국인도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고려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찾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김승력씨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쉬운 일이 아닐텐데 어떻게 해서 고려인을 돕는 일을 하게 되었는지 들어보았다. 그는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다녔다. 20대 청년시절 그는 문학도 꿈을 키워갔고, 사회주의, 민족, 통일, 민주주의 등 문제를 놓고 고민도 많이 하게 되면서, ND계열, 즉 레닌주의에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학생운동에 참여를 하였다고 한다.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된 후 러시아 사회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고, 또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그는 1997년 10월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고리끼문학관 대학원 과정에 입학하였다. 마침 우수리스크대학 사범대학에서 한국어강사로 활동을 하게 되어 학비 면제에 약간의 생활비도 보조받으며 생활을 하였다. 1999년 5월경 한국의 민간단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재외동포사업부에서 고려인 생활실태조사를 하는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고려인 사역은 본격화 되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고려인 학생들을 만나지만 고려인 생활 내면을 알기는 어려웠죠, 우리민족서로돕기 의뢰로 고려인 실태조사를 하면서, 고려인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어요.” 우수리스크에서 생활하는 고려인들은 군인들이 사용하고 떠난 군막사에서 생활할 정도로 아주 어려웠다고 한다. “전기도 끊어지고 물도 안들어오고, 유리창은 깨어져 있고, 거의 피난민과 같은 생활이었죠. 100가구, 200가구 … 엄청나게 많은데, 연해주는 엄청나게 추운 곳이잖아요. 이분들을 어떻게 도울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재외동포사업부는 명칭을 동북아평화연대로 별도 단체를 만들어 지원활동을 펼쳐갔다. 김승력씨도 참여를 하였다. 그리고 2010년 10월까지 꼭 13년 동안 러시아에 살면서 고려인 돕기 활동을 펼쳐왔다. 그런데, 한국에 나와 다시 러시아로 들어가려고 하였지만, 러시아비자가 나오지 않아 못들어가고 한국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김승력씨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도 러시아 비자를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러시아정부측에서 한국인들이 러시아땅에 들어와 고려인들을 한데 모아 집단을 이루게 하고 지원활동을 펼치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하고 내린 조치로 보고 있다. “그 바람에 러시아에 모든 것을 두고 몸만 한국에 남게 되었죠, 어떻게 보면 오히려 잘 되었다. 이참에 다른 일을 하자, 이렇게 생각을 하였어요.” 러시아에서 13년간 고려인을 도와 온 그의 사역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김승력씨는 러시아에 다시 못들어가게 되자, 강화도의 한적한 시골에 집까지 마련해 두고 그곳에서 글을 쓰며 보낼 참이었는데, 사업을 하는 고려인 친구의 통역을 도와주기 위해 안산에 와보게 되고는 한국에서 생활하는 고려인 동포들이 러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렵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고려인을 돕는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쩔수 없는 제 인생의 운명이라 생각했습니다.”김승력씨는 말한다. 그는 제일 먼저 고려인 동포들의 상황에 맞춰 땟골에 한글야학 교실을 열고, 상담소를 열고, 여기서 거의 생활하다시피 보내고 있다. 그가 만들어가는 공동체 이름은 『너머』이다. “국경 너머, 차별 너머”를 함축한 뜻이라고 한다. 또 상담소 이름도 별별상담소이다. “임금체불. 의료문제, 일자리 문제 등 별별 상담을 다 하다보니 별별상담소라고 정했는데, 또 생각해보니 동포들에게 희망을 주는 별 같은 공간이 되게 해야겠다 생각해 별별상담소라고 이름짓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어떻게 유지해 나가느냐고 묻자. “일반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금을 내주어 유지해 가고 있다”고 말한다. 고려인 150주년을 맞이하여, 안산시에서도 고려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국회 내에서도 고려인종합지원센터 설립 등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런 말들이 나오면 으레 여기 저기서 생색을 내며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15년 넘게 청춘을 바쳐가며 고려인 동포 지원활동을 해온 김승력씨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 사람들
    2014-01-29
  • 조선족 민요가수 변영화 "스타킹" 전율시켜
    조선족 가수 변영화 씨가 18일 오후 방송된 SBS 예능프로그램 "놀라운 대회 스타킹"(이하 스타킹)에 출연해 놀라운 가창력을 자랑하며 멋진 무대를 보여줬다. 1월 18일 방송된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이하 "스타킹")에서는 조선족 민요가수 변영화가 출연해 새타령을 불렀다. 변영화는 자신만의 독특한 음색으로 새타령을 불렀으며 특히 고음 부분을 깔끔하게 처리해 MC들과 게스트들을 전율케 했다. 변영화 무대가 끝난 후 강호동과 게스트들은 소름끼친다는 감상평을 남겼다. 특히 리정은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느냐"라며 변영화 노래실력에 놀라움을 표했다. 김종민과 레인보우 재경이 변영화 고음을 따라했으나 변영화만큼의 실력을 보이지 못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날 변영화 씨는 "스타킹"에 출연한 것에 대해 "많이 떨린다. 중국 친구들과 지인들은 "스타킹"을 굉장히 좋아한다. 강호동 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영광"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종민 씨도 성격이 좋은 걸로 유명하다"라고 강조해 웃음을 자아냈다. 변영화 씨는 중국무대에서 조선민족 민요를 널리 알리고 있다. 변영화 씨는 민요를 부르게 된 것에 대해 "11살 때부터 연변대학 예술학원에 입학해서 남도민요를 시작했다"라며 "할아버지, 할머니가 경상도 분이셨다. 할머니가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면 민요를 해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다"라고 설명했다. <중국 중앙방송>
    • 사람들
    201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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