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9-28(목)

사람들
Home >  사람들

실시간뉴스
  • [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은 노동력 공백에 따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에 의한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사실상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021년 6월 말 기준 1,981,035명이다. 그중 서울시 구로구에 체류하고 있는 25,316명 외국인 주민 중 18,190명이 중국동포이다. 기자는 지난 4일 구로구의회 7대 후반기 부의장으로 또한 3선 의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의정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이번 제8대 의회에서도 후반기 의장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외국인 주민 민원이 발생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박동웅 의장을 만나 그동안 의정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동포 및 외국인 주민 관련 정책과 지원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박동웅 구로구의회 의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현재 시행 중에 있거나 계획 중인 중국동포 관련 사업은? A.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보육료를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동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보육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산에서는 아마 시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구로구도 내년부터 보육료 20%가량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국인 주민 자녀들을 조사해보니 약 천명 조금 넘는데 그 아이들에 대해 우선 보육료 20% 정도 지원해주고 차후에는 그냥 100% 지원하는 쪽으로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올해 최초로 이와 관련한 예산 편성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 해에 7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Q. 구민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A. 그런 분들도 있지만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로벌시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구로만, 구로구 사람들만 뭉치는 것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분들도 다 같은 한민족이고 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차별 없이 함께 사회에 흡수돼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민들에게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Q. 지역주민과 중국동포 간 소통과 화합에 대한 모범 답안이 있다면? A. 가리봉을 중심으로 구로구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구로구에는 다문화 정책과가 있는데 중국동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 일본 등 이주민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도 명예 통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또 구로구에는 봉사단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구로 4동 같은 경우는 다문화 봉사자들이 야간 순찰도 하고 있고 다문화 경노당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구로구가 소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근래 산발적으로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상에서 동포들과 구청 간에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Q. 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책은? A. 현재 구로구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분들이 중국동포들이다. 과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 동포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한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책은 정확한 수치를 갖고 하는 것이기에 다문화 정책과에서 우리 동포사회 실태 파악을 다시 해서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Q. 상호우호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문화교류 계획은? A. 한국의 수출 규모를 보면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을 앞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변과 교류(공무원 교류)를 했지만 사실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에는 여러 중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서로 간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 축제 때 해당 국가 도시의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거꾸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축제라든가 행사가 있을 때 우리 구로구에서도 문화예술단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그런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은? A. 현재로서는 일단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안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자체도 K-방역을 통해서 그냥 열심히 뛰고 있지만 우리 구로구에서도 구로구만의 어떤 방향 시스템을 잘 구축해 구로구가 코로나19에서 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돼야 구로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이다. Q. 중국동포에 대한 이해정도는? A. 한 예로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양꼬치와 고량주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젊었을 때 사실 한국에서 투자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사정 때문에 결국 못 들어간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계획 전공이다 보니 연변은 물론 선양, 광저우, 칭다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봤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는 많다고 생각하고 중국 양꼬치를 중국동포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는다고 감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Q. 중국동포에 한 말씀 부탁한다면? A.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그냥 돈을 벌고 살다가 중국으로 가면 된다는 인식보다도 역시 우리 조상의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이 잘 돼야 동포사회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한민족으로 역할을 한다면 지역주민들과 잘 화합할 수 있고 이제 동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생활할 수 있다고 본다. 구로구의장으로서 향후 그 어떤 정책이나 개인적인 꿈도 있겠지만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에 와서 잘 살고 여기에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구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 사람들
    2021-09-09
  • 中, 98세 “쿵푸 할머니” 온라인 돌풍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최근 한 지역 모임에서 무술을 시연하는 98세 중국 “쿵푸 할머니”의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44만 번 이상 조회되고 4,500개 이상의 좋아요가 쏟아지는 등 순식간에 히트를 치고 있다. “쿵푸 할머니”의 팬들은 “98세에도 걸을 수 있을까. 쿵푸가 장수의 관건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심지어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 대해 "쿵푸 정신은 늙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주목했다. 본명이 장헥셴(張鶴仙)인 “쿵푸 할머니”는 2017년에 이미 명성을 얻었지만 거의 10년 동안 고향인 저장(浙江)성 닝하이(寧海)현 장컹(張坑)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이 영상이 유튜브에 퍼지자 조카딸은 “할머니는 이제 중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하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키는 약 1.5미터이다. 그의 쿵푸 동작은 유창하고 걸음걸이는 꾸준하다. 할머니의 마을은 쿵푸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고 할머니는 5살 때 중국 남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무술 스타일인 장복싱의 6대 계승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는 매일 연습했다. 지금은 나이도 들고 힘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아직 원기 왕성하다”고 말했다. “쿵푸는 폭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평생 농부인 할머니는 이웃들과도 잘 지낸다. 막내아들인 펑은 “어머니는 항상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을 돕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3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모두 닝하이현에서 근무하고 있다. 닝하이현은 마을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다. 할머니는 남편이 사망한 2012년부터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의 삶은 평범하지만 잘 짜여져 있다. 할머니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매일 세 끼의 요리를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해산물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가끔 친구들을 찾아가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오후에는 쿵푸 연습을 한다. 장컹 마을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할머니의 집은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식료품을 사러 나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등산이 필요하다. 언덕을 오르면서 꾸준히 하는 운동이 할머니가 정력이 왕성한 원인일 수 있다. 펑은 “어머니에게 도시에서 함께 살기를 요청했지만 어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즐겼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할머니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쿵푸 할머니”는 아버지의 장복싱 스타일을 주말과 휴일에 집에 오는 손주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최근 이웃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무술 수업을 개설했다는 소식을 접한 할머니는 자원해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펑은 어머니와 가족들은 “쿵푸 정신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고 그것이 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사람들
    2021-08-16
  • 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92년 11월 18일, 김경도(진징다오·金敬道)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도도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김경도는 축구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뛰어 노는 과정에서 축구에도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다. 연변은 축구의 전반적인 환경이 다른 곳과 다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 후 첫 오락으로 축구를 한다. 이러한 축구 환경에서 많은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경도는 2003년 옌볜(延邊)의 쑹칭링(宋慶嶺) 축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 진징다오의 부모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김경도는 독립적이고 힘든 일을 잘 견디는 품성을 키웠다. 200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첫 국제대회를 치른 김경도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U-20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9년에는 U-20 대표팀 주장을 맡아 사상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소수민족 주장 자리에 올랐다. U-20 대표팀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9년 김경도는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도왔다. 김경도는 경기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니에스타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끝난 뒤 기자가 이니에스타와 연락해 상대방이 사인 유니폼을 선물한 것도 김경도를 오랫동안 기쁘게 했다고 한다. 2010년 김경도는 연변FC에 입단해 클럽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이제 막 입단한 뒤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김경도는 늘 팀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만 했다. 마침 외사촌형인 박성(퍄오청·樸成)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퍄오청은 이때로부터 김경도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국에 일하러 갔고 나는 연변FC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박성은 오래 전부터 축구를 했다. 그는 돈을 괜찮게 벌었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사주었고 체육관에 갈 수 있도록 돈도 대주었다. 그리고 내가 U-20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이 좋은 휴대폰과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그것을 다 사주었다. 나중에는 또 휴대폰과 아이패드까지 사주며 축구를 잘하라고 격려 했다” 이는 사촌형인 박성에 대한 김경도의 평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중국 슈퍼리그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김경도는 벤치에서 나와 성인 남자 국가대표팀 데뷔를 알렸다. 이번 국가 대표팀 경험으로 김경도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쟁탈하는 인기 선수로 됐다. 2013년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산둥 루넝(山東魯能)은 연봉 100만 위안, 이적료 800만 위안에 김경도를 영입했다. 하지만 루넝 합류 이후 김경도는 그렇다 할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궈안과의 첫 경기에서 비정상적인 플레이로 결국 팬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를 격려했고 그가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김경도의 플레이는 매우 어색했다. 김경도의 가장 좋은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풀백이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김경도는 팀과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와 부상 스틸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칭찬을 받았고, 팬들은 점차 그를 받아들였다. 그해 그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마가트 감독은 김경도를 완전히 재탄생시켰다. 마가트는 유명한 "악마 감독"이다. 그는 선수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요구 사항이 매우 높았다. 그는 김경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백으로 변경 시켰다. 김경도는 당시 마가트 감독이 자신에 대한 요구사항이 높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공을 빨리 잡아 다른 사람이 못 따라온다며 볼을 잡으면 상대 측면 수비수를 상대로 돌파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싱한(吳興涵)이나 류빈빈(劉彬彬) 같은 빠른 스피드 돌파가 없었다. 나중에 하오준민(蒿俊閔)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해 시즌 김경도는 윙백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루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은사 마가트 감독은 안타깝게도 팀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김경도 역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ACL 8강 1차전 서울 방문경기를 앞두고 몸에 살코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변검사 양성 판정을 받아 60일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음식에 신경을 썼던 김경도는 충격도 컸지만 선수 생활과 컨디션 유지에는 큰 힘이 됐다. 그 해 김경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11월 13일 김경도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융퍼(王永珀), 왕통(王彤), 송룡(宋龍) 등 동료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루넝도 공식 홈페지를 통해 결혼 축하와 함께 김경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김경도의 감정 또한 매우 로맨틱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를 수년간 알아왔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사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 함께하게 되었다. 2017년 김경도는 징계에서 풀려나 팀에 복귀했고 루넝은 리샤오펑(李霄鵬)감독을 영입했다. 리샤오펑이 부임한 뒤 팀은 파격적인 변신을 하지 않고 마가트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갔다. 김경도 역시 익숙한 윙백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김경도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타르델리 및 펠레와 매우 묵계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종종 도움을 주거나 득점하며 루넝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킬러가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8시즌 김경도의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고강도 달리기, 스퍼트 횟수 1위, 경기당 평균 거리 2위, 가로채기 3위, 경기당 4위라는 맹활약으로 시즌 최고 인기 본토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김경도는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됐고 리피는 물론 가오훙보(高洪波), 리톄(李鐵) 등 본토 감독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다. 다만 리피 시절에는 김경도에 대한 요해가 부족해 기술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김경도 역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리피 감독 후임으로 2021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리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2차예선 40강전 몇몇 경기에서 김경도의 활용에 신경을 썼다. 김경도는 움직임이 좋고 수비 면적이 넓으며 공격은 날카롭다. 현재 김경도는 대표팀 10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격을 갖춘 '프리 맨'이 됐다. 곧 카타르 월드컵 3차예선인 12강전이 시작된다. 12강전에서 절대 주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김경도는 계속 자신의 색깔을 살려 대표팀을 위해 몇 골을 더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스포츠
    2021-07-28
  • 세계급 중국 조선족 무용가 김성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많은 사람들이 중국 유명 무용가 김성(金星)을 알지만, 그녀의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중국 무용수 중 한 명인 김성은 25세의 나이에 벨기에 왕립 무용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1995년 이미 유명해진 김성은 군구(軍區)예술단에서 퇴직하고 북경향산병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수술 과정은 장원 감독에 의해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김성'으로 촬영되었다. 23세에 장가들어 28세에 여자로 태어난 김성은 38세에 독일인 한스와 결혼했다. 현재 54세인 그녀의 인생에는 전설로 가득 차 있다. 김성은 1967년 선양의 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남자 목욕탕에 데려가 목욕시키자 김성은 매우 불편함을 느꼈다. 이때부터 김성은 자신의 성 인식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아홉 살 때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학교 문예선전대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군구(軍區)예술단의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때로부터 김성은 자신의 내면에 있던 미에 대한 향수가 늘 여성스러움을 깨닫게 되었다. 1985년 군사훈련 멘토 송소원이 제1회 전국 타오리컵(桃李杯) 무용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 그 결과 대회 경험이 전무했던 김성은 탄탄한 기반과 뛰어난 재능으로 400여명이 출전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무용 ‘목가’로 청소년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에서는 최초로 발레화 없이 발가락을 사용할 수 있는 무용수가 됐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겠다는 결심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줄곧 성별의 정체성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내가 언제 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1986년 광둥현대무용학교에서 국비유학생을 미국에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입수한 그는 무작정 광둥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2년 뒤 뉴욕으로 건너가 무용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캐롤라인과 첫 결혼을 했다. 1993년 김성은 귀국 후 중국문화부가 주최하는 전국 현대무용수련반에 초빙되어 중국 현대 무용의 창시자가 되었다. 1995년 영혼과 육체의 분열은 그에게 큰 문제를 가져왔다. 김성은 오랜 시간 고군분투하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장악하기로 했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결심 했다. 김성의 결정은 어머니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 같은 자식이라며 수술이 건강에 지장만 없으면 된다고 말했다. 1999년 김성은 개인의 이름을 딴 중국 최초의 민간 무용단인 '상해김성무용단'을 창단했다. 중국에서 국제 공연 티켓을 판매할 수 있는 곳은 '상해김성무용단'과 '중국곡예단' 두 곳뿐이다. 2004년 무용단을 이끌고 유럽 순회공연을 마친 김성은 귀국길에 독일 신사인 한스를 만났다. 한스는 독특한 동양 여성에게 깊은 매력을 느꼈다. 1년간의 소통 끝에, 그들은 결혼의 궁전에 들어갔다. 결혼 후 세 아이를 입양한 김성은 이젠 엄마와 딸, 그리고 아내가 되어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김성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회는 심리적 인내를 반복적으로 질문하고 지침을 제공하는 투명하고 보이지 않는 심리의사와 같다. 김성은 오직 실력만이 유언비어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진지하게 춤을 추고 있으며 그녀의 유럽공연 티켓은 구하기 어려울정도다.
    • 사람들
    2021-07-12
  • 中 유명 거사(居士)화가 탕위밍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유명한 화가 탕위밍(湯餘銘)은 중국 영화배우 탕웨이의 아버지이다. 탕위밍의 작품은 구하기 어렵다. 탕위밍은 1990년대부터 중국 스타일과 서양 스타일을 결합한 독특한 3 차원 작품을 제작했다. 필명은 북안산(北安山)이다. 원저우(溫州) 러칭(樂淸)출신인 그는 전문 미술가로 현재 거사 전문화가 1인자로 불리며 세계문화유산예술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은 매우 높은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화가들의 귀감이 되고 벤치마킹해 그림 애호가들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탕위밍은 '신부춘강산거도(新富春江山居圖)'에 참여했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람이고, 명리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도 가장 돋보이고 존경하는 곳이다. 일부 대가들에 비해 직업적으로 높은 프로정신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탕위밍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산수화를 그리는 데는 능숙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의 거사 회화다. 그의 작품은 불학적인 매력을 주면서도 과장되지 않은 느낌을 준다. 정직한 사람이라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자신만의 매력이 배어 있다. 탕웨이밍으로서도 딸 얘기를 할 때마다 뿌듯했다. 탕웨이는 지금의 이름값도 대단했고, 탕웨이밍에게 딸의 성장과 성취를 보여주기도 했다. 딸이 자신보다 이름값을 많이 한다고 해서 탕웨이밍이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탕위밍은 화계의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로, 회화 작품도 많은 기관에서 사랑을 받아 현재 세계문화유산예술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불교문화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고 있는 그에게 불교문화와 중국 문화유산을 칭송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할 일이다. 탕위밍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술에 대한 추구나 신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탕위밍은 회화 예술에 대해 높은 이해와 추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 역시 사람들이 존경하는 점이다. 중국 여배우인 탕웨이는 1979년 10월 7일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에서 태어났다. 2000년 중앙연극학원 연출학과 본과에 입학했다. 2007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리안 감독의 '색·계'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2010년 미니시리즈 영화 '월만 헤네시'에 출연해 중화권 영화미디어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탕웨이는 2011년 영화 '만추'로 한국백상예술대상, 한국영화평론가상, 부산영화평론가상 등 10여 개 부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13년 '베이징에서 시애틀을 만나다'는 중화권 로맨스 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우며 상하이 영화평론가상, 중국영화감독협회, 베이징대학생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2014년 탕웨이는 영화 '황금시대'에 주연으로 출연하였으며 2015년에는 영화 '블랙 코드'에 출연했다. 2016년에는 주연 멜로 영화 '베이징에서 시애틀을 만나다'가 7억 9000만 위안의 흥행 성적을 거두며 중화권 멜로 영화 흥행 기록을 다시 세웠다.
    • 사람들
    2021-07-01

실시간 사람들 기사

  • 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 찾기에 나선 조선족 유학생
    ▲ 젊음과 열정으로 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찾기에 나선 재한조선족유학생 권진명 [동포투데이] 20대의 젊음과 열정이 느껴지는 그녀, 청년공동체 ‘세움’의 부대표로 활약하고 있으며 시각디자인이라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전공으로 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찾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권진명(27세)씨를 만나보았다. Q 시각디자인에 대한 간단한 소개한다면? ― 전공은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다. 흔히 시각디자인이라고 하는데 중국어로는 視覺傳達라고 한다. 디자인을 한다고 하면 주위에서는 인테리어 디자인이나 패션 디자인 쪽으로 많이들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제일 친한 친구들도 도대체 내가 무슨 디자인을 하는지 잘 모른다. 친구들은 컴퓨터 작업이나 명함, 상표 만드는 일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한다. “가끔 무료로 명함이나 로고를 만들어달라는 지인들의 ‘일감부탁’이 많이 들어오고 있죠.” (웃음) 그만큼 시각디자인이라는 전공이 중국의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다. 실은 우리의 생활 곳곳에 다 있는 것이여서 얼마든지 보고 느낄 수 있는 거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을 하는 것이다. 평면디자인, 그래픽 디자인보다 폭이 훨씬 넓은데,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이쁘게 만들거나 장식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담아 소통하고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에 있다. 다양한 미디어와 다양한 방식의 디자인을 활용하여 리서치, 기획, 스케치, 디자인의 순서로 완성된다. 추상적인 예술작품일 수도 있고 스토리텔링의 방식으로 내용을 더욱 쉽게 사람들한테 전달하기 위한 디자인이라고 보면 된다. Q 그림과 다른 점이라면? ― 그림은 작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데 치중점을 둔다면, 시각디자인은 타인과의 소통에 중점을 둔다. 소통과 공감을 목적으로 하는 디자인이다. Q 졸업작품으로 조선족 관련 소재의 작품을 준비를 했다고 들었는데 그 과정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기존의 재한조선족들에 대한 영상이나 댓글, 논문을 찾아봤다. 그러면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첫 번째는 재한조선족에 관한 영상들을 보면 주로 몇가지가 있다. 1, 현 재한조선족의 생활을 담은 다큐멘터리. 2, .조선족 범죄사기 비판 영상. 3, 조선족에 관한 편견을 버리자는 캠페인 영상. 그 외에도 많은데 대다수 동정심 유발이나 심각하게 다룬 내용들이 많다. 두 번째는 조선족 관련 논문들을 보면, 그래도 민족성, 정체성, 한 민족 통일성, 재한조선족의 현황 등을 다룬 내용들이 대다수다. 자료수집을 위하여 이것 저것 많이 찾아보면서 한국인들이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이라는 것에 놀랐다. 한국인들에게 영상을 만들어서 보여주고 싶다. 조선족의 역사와, 조선족들이 어떤 좋은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많이 홍보하고 싶다. 작품으로 이런 걸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기존에 나왔던 논문식의 장황하고 엄숙한 거 말고, 다른 걸로 표현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개인의 가족사를 풀어놓고 우리 민족 역사를 더 쉽게 공감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조선족은 중국현대사와 조선의 현대사가 결합된 민족이다. 중국의 근현대사를 몸소 체험한 민족이다. 그래서 이런 설정을 해보았다. 나의 가족과 친구의 가족을 인물 설정을 해서 비교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의 베이징 올림픽과 한국의 88올림픽을 비교하는 방식. 나의 증조할아버지와 친구의 증조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같은 곳이다. 나와 친구는 각자 자신의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또 하나의 역사고리를 갖고 있다. 이런 것을 그래픽, 사진, 동영상, 등 전시를 통해 대조적인 시각으로 보여준다. Q 앞으로의 계획은? ― 세 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하나는 전공에 더 열중해야겠다. 너무 힘들어서 디자인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몸에 배어있다는 걸 느꼈다. 한국이나 중국 어느 한 곳에 매여있지 않고 글로벌한 시각과 마인드로 발전하고 싶다. 두 번째 목표는 ‘세움’ 공동체의 일에 더욱 정력을 기울이고 싶다. ‘세움’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더 흥미로운 일들을 하고 싶다. 예를 들면 세움동아리도 만들고 다양한 활동, 행사를 조직하고 싶다. 청년들이 맴버여서 신선한 아이디어뱅크라고 할 수 있다. 더욱 많은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는, 그런 단체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세 번째 꿈은, 나를 통해 주위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싶다. 고향에 가서, 고향을 위해서도 뭔가를 하고 싶다. 자그마한 변화일지라도 그것이 언젠가는 나비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의 마감에 그녀는 청년공동체 세움에 대해 특별히 홍보를 했다. “청년공동체 세움의 취지는 사람을 세우고 문화를 세우는 것입니다. 청년들에게 플랫폼과 네트워크를 하는 공동체죠. 기성세대의 것을 본받되, 청년들 스스로가 나서서 청년들의 힘을 합쳐서 세계적인 평화를 이룩하자는 글로벌한 마인드의 단체입니다.” 자체로 하는 행사도 있고 사단법인 동북아평화연대와 같이 하는 것도 있는데 중국조기유학생들, 각 대학교 중국유학생들에게 맨토링을 하고 있고 문화특강을 개최해 글짓기 특강을 하고 있다. 청년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며 인재 영입도 열심히 하고 있다. 운영진에는 북경, 상해, 서울, 서주, 남창 등 여러곳의 청년들이 있는데 위챗 회의를 통해서 소통을 하고 운영방침을 토론한다. 이제는 청년들이 주체가 되어서 나설 시기이다. 전 세계 청년들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싶다. /곽미란
    • 사람들
    2016-12-06
  • 세계로 향한 중국 대륙의 조선족 오페라 여왕 김만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김만(金曼)-그녀는 중국의 저명한 표현예술가이자 “오페라 여왕”으로 등극한 조선족 여가수이다. 그녀는 노래를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천부적인 재능과 자신의 피 타는 노력으로 중국 오페라무대에서 제3대의 “강누나(중국의 여혁명가 강설금)”역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여 중국 오페라 계를 들썽하게 하였으며 제10기 중국 전국 정치협상회 위원, 전국 정협 과학·교육·문화·위생·체육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현재 김만은 중국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원 원장으로 중국 오페라분야에서의 인재양성 및 수준급 작품창작을 위해 모든 심혈을 아끼지 않고 있다. 김만- 그녀야말로 중국오페라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는 예술사업가임에 분명하다. 꿈의 스타트는 고향의 산간벽지서 어릴 때의 김만은 흑룡강성 소흥안령(小兴安岭)의 평정산(平顶山)하의 아름다운 산간벽지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그 곳의 모든 것은 황홀하기만 했다. 푸른 산정을 맴도는 흰구름, 돌돌 흐르는 시내물과 울창한 임해- 모든 것은 그녀로 하여금 절로 흥얼거리게 하였으며 때로는 목청껏 외치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도 김만은 성악가로 될 수 있는 자기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소녀의 첫 꿈 역시 가수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저는 아주 수수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의 기억에 따르면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기에 전 장차 커서 의사로 되려는 생각을 많이 가졌지요. 그러다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전 세계명작 ‛잔 다르크(1412년 1월 6일 ~ 1431년 5월 30일),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란 책을 읽고 나라를 지키는 혁명가로 될 꿈을 가졌으며 또한 과학가로 될 이상도 가졌었지만 예술가로 될 생각은 없었죠. 하지만 노래와 춤은 역시 저와 연분이 있은 모양이었고 운명은 결국 저로 하여금 예술의 길을 선택하게 하였죠. 현재 저는 제가 예술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이 중국의 오페라사업에 투신한 것에 대해 행운으로 느끼고 있어요.” 오페라 무대에서의 “강누나”- 김만 1981년 김만은 중국인민해방군 공군정치부 문공단 시험에 합격되어 자신의 예술생애를 시작하였다. 한편 이 해에 그녀는 베이징 수도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가요의 벗 음악회”에서 저명한 조선족 작곡가 김봉호가 작곡한 가요 ‛금실 북과 은실 북(金梭和银梭)’을 불러 일거에 중국 음악계에서의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또한 중국의 유명한 오페라 “강누나”에서의 주인공으로 되는 행운을 지니게 되었다. 1981년- 예술계에 갓 입문한 김만은 첫 스타트부터 중국 국내의 유명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있었다. “1984년 공군정치부 문공단에서 제3차로 오페라 ‛강누나’을 무대에 올릴 때 전 재차 주인공으로 선택받게 되었죠. 당시 시간이 긴장하고 임무가 막중하였기에 전 20여 일간이나 두문불출하고 주인공이 맡은 노래와 극본대사를 익히기 위해 연습을 하고 또 하군 하였어요.” 그 20여 일이 지난 뒤 김만은 재차 ‛강누나’역을 성공적으로 맡아하였으며 1981년의 공연에 비해 더욱 성숙성을 보여 주기도 했다. 또한 이 성과로 하여 1991년 중국 희곡계의 최고상인 제9회 매화상을 받아 안기도 하였다. 한편 이 오페라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김만은 늘 격정에 넘치군 했다. 그만큼 오페라 ‛강누나’가 그녀한테 주는 영향은 아주 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 오페라의 매 인물과 내용에 대한 감수가 깊어질 수록 전 무대에서의 강설금에 대해 끈끈한 정을 느끼군 했어요. 강설금은 견정하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 혁명가인 한편 온화하고 위대한 어머니기도 했어요. 그의 매력은 늘 저를 감화시키군 했으며 그의 정신은 늘 저를 고무하기도 했었죠.” 무대를 떠나 단연히 “하해” 오페라 ‛강누나’에서의 성공은 김만한테 예술생애에서의 크나큰 영예를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도전을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녀 김만은 단연히 “하해”의 길을 선택했다. “90년대 초기 전 공군정치부 문공단을 떠나 ‛하해(下海)’를 결심했어요. 제가 무대를 떠난 건 예술과 작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저의 예술생애에서 한번 중국오페라의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기 위해서였어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절 미쳤다고 했어요. 공군정치부 문공단은 저의 큰 밥그릇과 같은데 그곳을 떠나 어떻게 살 수 있느냐 말이었어요. ‛하해’- 그것으로 하여 확실히 저의 위치가 180도로 달라졌어요. 공군문공단에서의 저는 스타였으나 그 곳을 떠나니 일반인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저는 꿈을 위해 악전고투하기 시작했어요. 음식점을 차려보기도 하고 부동산업계에 투신하기도 했으며 또한 국외의 대형그룹과 손잡고 일을 벌여 보기도 했었죠. 이 과정에 그야말로 인생의 희노애락이 많았었요.” 중국 대륙의 고풍격예술 전승인으로 2000년에 이르러 김만은 자신의 자금을 털어 문화산업회사를 차림과 동시에 오페라 “강누나”를 개편하여 한차원 업그레드화하였다. 한국의 뮤지컬과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었다. 이는 합창, 중창, 독창을 음악주체로 하였고 부드럽고도 소박한 무드속에서 “강누나”에 대한 예술적 형상을 부각하는 것이었다. 김만은 뮤지컬의 형식과 오페라 “강누나”의 기질을 아주 유기적으로 잘 배합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미 무대에 올렸던 작품을 재현한다는 자체가 실패작이라고 하면서 많은 질의를 던졌어요. 하지만 저는 우선 ‛강누나’란 오페라에 대해 아주 깊은 감정을 갖고 있었거든요. 다음으로 전 중국오페라의 발전과 변혁을 위해 형식을 창신하고 내용을 잘 짜면 역시 상상밖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하였어요. 이전에 공군정치부 문공단에서 공연할 때면 대부분 티켓을 선물하였지만 저희들 문화산업회사에서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티켓을 판매하였죠. 그리고 전통오페라는 배우와 악사가 많았고 게다가 무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원가가 들어갔지만 뮤지컬 형식으로 작품을 만드니 원가가 적게 들었어요. 또한 전 적지 않은 생기발랄한 젊은 오페라 배우들을 육성하기도 하였으며 2년간 10여 만위안의 투자로 근 100회의 공연을 할 수 있었으며 원가를 뽑고도 얼마간의 이윤을 올리기도 했어요. 이는 당시로서는 진짜 쉽지 않은 일이었죠. 후에 우리는 이런 모식으로 또 ‛당의 딸’이란 뮤지컬 형식의 작품 등 여러 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아주 좋은 사회적 효과를 보았었요.” 김만- 그녀가 시장경제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낸 독특한 무대는 사회 각 계의 뜨거운 찬양을 받았으며 많은 매스컴들에서는 김만을 “대륙에서 선참으로 고풍격의 문화산업을 창출해낸 사람”이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본분 지키며 중국오페라 발전시킨다 뮤지컬 형식의 무대작품을 성공시킨 동시에 김만은 적지 않은 우수한 오페라 배우들을 육성시켰으며 그들은 모두가 각 오페라 극단의 기둥배우로 성장하였다. 그 과정은 험난하고도 힘들었다. “문화산업회사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훈련할 때 저는 그들 모두가 성악기초가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면서 한달 동안 정도 훈련시키면 모두 무대에 오를 수 있으리라 여겼어요. 하지만 실제로 실천에 들어가니 애로사항이 많았어요. 학원생이 많은데다 그들의 수준차이가 컸으며 많은 학원생들은 클래식 창법으로 중국노래를 부를 때 발음이 똑똑하지 못한 폐단이 있었으며 또한 표현상에서도 팔다리가 조화가 되지 못했죠. 오페라란 복잡한 예술이기에 완벽한 산업고리가 있어야 해요. 오페라에는 큰 부분으로 이론연구, 음악창작, 극본개편 및 배우선택, 연출, 무대미술, 조명 등이 따라가야 하고 또한 작은 부분으로는 관리, 녹음, 악보출판, 음향제품 발행, 선전판촉 등이 있어야 하며 매 고리마다 동시에 움직여야 해요. 헌데 이전에 중국 국내에는 오페라 배우를 전문 육성하는 전업이 없었거든요. 이는 저로 하여금 오페라 학원을 세워 중국식 클래식 창법과 중국식 오페라를 발전시킬 야망을 가지게 되었어요.” 김만의 생각과 베이징대학의 발전계획은 교묘하게도 일치하였다.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친 뒤 2006년 중국 베이징대학 학술위원회에서는 김만이 교부한 오페라연구학원 건립방안을 통과시켰으며 5년 뒤인 2010년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이 드디어 고고성을 울렸다. “우리가 이 학원을 세운 목적은 첫째 광범한 범위로부터 오페라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고 둘째 중국오페라의 획기적은 발전을 가져오자는 것이었어요. 인재육성을 위하여 우리는 장일민(蒋一民), 대옥강(戴玉强) 등 국내외 우수한 성악가들을 교사로 초빙하였으며 우선 오페라 및 뮤지컬학부, 오페라사론연구학부, 오페라제작 및 관리 학부 등 3개 전업을 설치하였어요. 앞으로 우리는 계속하여 오페라창작, 연출, 무대미술 및 기술, 지휘 등 학부를 증설하여 비교적 완벽한 오페라 과학 및 교수과학연구 체계를 세울 타산이예요. 베이징대학의 우월한 학술환경하에서 우리는 이미 육속 ‛칭춘의노래(青春之歌)’, ‛전학삼(钱学森)’, ‛왕선(王选)’ , ‛송경령(宋庆龄) 등 작품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렸으며 올해 내로 이탈리아 로마에서 대형원형오페라 ‛무측천(武则天)’을 공연할 계획이에요,”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 원장 직을 맡은 김만의 중임은 무겁고 압력은 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어떤 방면의 인재든 다 수요해요. 우리의 연구학원은 창립된지 금방 10년밖에 안되며 아직 성장기에 있어요. 때문에 사회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발전도 거듭해야 하는 두 가지 부담이 얹혀 있어요. 하지만 멀지 않는 장래에 베이징대학 오페라 학원은 부단히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대학의 영예를 빛내일 것이고 중국 오페라 계에는 긍정코 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출현할 것이며 중국오페라 또한 언젠가는 꼭 세계정상에 오를 것이예요.” 그렇다! 조선족 여원장 김만의 꿈 역시 언젠가는 꼭 현실로 도래할 것이다.
    • 사람들
    2016-09-11
  • 평생을 민간무용과 함께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가야하반에 자리 잡은 연변주 왕청현에는 평생을 민간무용과 함께 아무런 보수도 없이 오로지 조선족 무용에 대한 사랑과 집념으로 천부적인 장끼를 서슴없이 발휘하여 조선족 무용을 계승, 발전시켜 왕청은 물론 연변에서 '민간무용가' 로 인정받는 여성이 있다. 그가 바로 올해 71세에 나는 김춘복씨이다. 책임감과 사명감을 안고 김춘복씨는 1946년 왕청진 삼합촌의 김씨네 가문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1953년에 왕청 2교를 졸업하고 1963년에 왕청 2중을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와 민간문예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치원에 다닐 때 그는 민간무용 연출인 어머니의 등에 업혀 야학실에 다니면서 무용을 직접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민간무용에 대해 심후한 감정과 애착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 소학교를 다니면서 반급에서 줄곧 문예위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고향에 돌아온 후 유치원 교양원으로 사업하면서 합창, 아동무용, 동화극을 창작해 어린이들에게 배워 주었다. 그리고 여유 시간이면 사그라져 가는 조선족 무용을 살리기 위해 문예공연대를 설립하고 수십차의 문예공연을 조직, 현성내 각 기업, 사업단위와 중소학교들에 조선족 무용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왕청현의 군중문화예술이 다시 활기를 띠게 하였다. 생활속에서 무용소재를 모색 1964년, 촌유치원과 촌문예대가 설립되면서부터 그녀는 안무를 담당하고 무용창작을 본격적으로 해나갔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사소한 장면도 그냥 지나치는 습관이 없고 늘 머리속에 춤을 생각하고 살았다. 어미제비가 먹이를 물어다 새끼제비에게 먹이는 장면을 보면 제비춤이 생각났고 남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허투루 볼 때가 없이 그 속에서 알맹이를 배워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언제나 동집게 같은 예리한 감각으로 작품의 령혼을 포착하면서 연변 특색이 짙은 무용을 창작해 대중들과 호흡을 나누었다. 대중의 반응을 피부로 느끼기 위해 그는 공연 때마다 무대 뒤에 숨어 관람석을 관찰하면서 관람자들의 표정과 박수를 통해 자기의 작품에 대한 인정을 스스로 느끼군 하였다. 하기에 53년 동안의 무용창작에 대한 스토리를 이야기할 때면 그녀는 목이 꽉 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야무지게 펼쳐 나갈 수 있은 것은 그녀만의 신조 외에도 2006년에 한국에서 "전통공연문화학교"의 조선족무용기본공반에 입학해 한해에 학비 80만원씩 내면서 고급반까지 졸업할 수 있도록 그를 대신해 밥을 짓고 옷을 씻는 등 전부의 가무 일을 전담해준 남편 정창도씨가 그녀의 예술 생애에 가장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었다고 한다. ▲ 왕청현 노년상모춤예술단 김춘복씨의 인생스토리 사심없는 노력은 사회의 인정을 53년 동안의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창작한 무용 "장화꽃", "숲속의 아침", "장백산아래 우리집", "슬기로운 우리민족", "붉은해 변강비추네" 등 민족특색이 짙은 100여가지 무용들은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인정을 받았다. 김춘복씨의 사심 없는 노력은 각급 정부와 사회의 호평도 받았다. 칠순을 넘긴 김춘복씨는 취득한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도 왕청현노년상모춤예술단에서 조선족 문화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 보람찬 사업에 온갖 심혈을 몰부어 가면서 노후를 보람 있고 아름답게 수놓아가고 있다.
    • 사람들
    2016-09-06
  • 평생을 함께 살자 … 한 부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류풍습관절염으로 생활을 자립할수 없는 안해 유형숙씨 (60세)에 대한 남편 리희태(63세)의 헌신적인 사랑은 우리 주위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셔주고 원근 사람들에게 수없는 감동을 주고 있다. ▲ 풍습관절염으로 생활을 자립할수 없는 유형숙씨 (60세)와 남편 리희태씨(63세) 길림성 연변자치주 왕청진 쟈피구촌에 살고있는 리희태의 안해 유형숙은 꽃보다 아름다운 나이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서 즐기는 신혼생활은 깨알이 쏟아지고 행복이 넘쳤을 것이다. 두분도 역시 더이상 바랄것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만 같았다고 한다. 세상의 풍운조화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그런 생활을 2년 밖에 하지 못했다.유형숙은 왕청현병원의 간호사로 사업하다 1986년 1월에 류풍습관절염으로 하신 신경이 마비되면서 근육이 굳어져 버려 대소변은 물론 모든것을 남편의 손에 의지해야 했다. 공비로 치료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자비로 내는 치료비가 엄청나 모아 두었던 저금이 거덜이 나고 빚이 산더미처럼 늘어만 갔다. 하지만 이런 역경속에서도 안해를 살리려는 책임감과 안해의 병이 꼭 나으리라는 남편의 신심은 꺾을 수 없었다. 안해의 병을 하루빨리 치료하기 위해 리희태는 안해를 업고 현병원은 물론 심양,안산,길림, 돈화,한국월툰병원 등 용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 다니며 병을 보였다.가는 곳마다 리희태는 쪽걸상에 앉아 새우잠을 자면서 병시중을 들었다. 욕창이 생길가봐 안해가 아침마다 일어나기 바쁘게 더운물로 안해를 목욕시켰고 반시간에 한번씩 돌려 눕혔으며 허리에 베개를 받쳐 주었다. 안해의 두 다리 근육을 풀어 감각을 되찾게 하기 위해 남편은 매일같이 안마를 해 주었다. 의무일군이였던 안해의 병이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고 죽는 날까지 완치가 불가능하다 해도 안해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다면 남편은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하였으며 어떤 방법이든지 불사할 각오였다. 안해의 병치료에 돈푼이 될만한 가정기물까지 다 팔아도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지만 힘든 내색없이 늘 밝게 웃는 남편이였다. 이렇게 안해의 병치료에 집 세채와 가정기물을 몽땅 밀어 넣고 세방살이를 하게 되자 1990년에 리희태는 처제의 도움으로 안해를 장모님과 나어린 딸애에게 맡겨놓고 단연히 한국으로 떠났다.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안해의 병을 치료하려는 일념으로 힘 드는줄 모르고 억척스레 일했다. 낮에는 일을 하느라 생각할 새가 없었지만 저녁에 자리에 누우면 안해가 걱정되고 딸애가 보고 싶어 눈물은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이렇게 6년동안 돈을 벌고 고향에 돌아온 리희태는 안해의 병시중을 들면서 뇌출혈로 쓰러진 장모를 자기집에 모셔다 여섯달 동안이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효성을 다해 장모가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이 미소를 짓고 하늘 나라로 가게 하고 처가집 조카 둘을 자기집에 데려다 6년동안 공부시키며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했다. 안해가 병상에 누운지 옹근 31년이 되던 2015년 1월의 어느날 점심때였다.밑반찬을 만들어 밥상을 갖추려고 하는데 자기 눈을 못 믿을 정도로 뜻밖에 안해가 조심조심 벽을 짚고 위생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기적같은 이 광경을 본 남편은 너무도 좋아 환성을 올렸다. “31년동안 내등에 업혀 다니던 당신이 드디여 자기절로 위생실에 가는걸 보게 되였소. 여보, 용기를 내줘서 정말 고맙소. 이제 내가 조금만 더 시중들면 당신이 일어날수도 있을거요.” 남들앞에서 종래로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남편이였지만 이 순간만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비록 병석에 누워있는 안해였지만 남편에게는 큰 힘이 되여주었다. “결혼할 때 우리는 검은머리 백발이 되도록 사랑하자고 언약을 맺었고 둘 중에 누군가 불구가 되더라고 서로를 버리지 말고 마지막까지 돌보면서 함께 살자고 약속했습니다. 안해가 앉은뱅이라고 버릴수는 없었습니다. 부부로 맺어진 이상 안해는 내 몸이고 내살과 같습니다. 죽는날까지 내가 안해의 손발이 되여서 지켜주고 싶습니다. 내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 그는 안해의 간병을 하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딸한테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아버지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 행여나 딸에게 상처가 될가봐 리희태는 힘들 때면 딸이 잠든 후에 밖에 나가서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딸 추연이도 돈을 벌어 어머니 병치료에 보태 주려는 일념으로 열심히 공부해 장춘외국어어학원 독일어 학과를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현재는 상해독일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아버지를 여러모로 돕고 있다. 경제생활이 급속히 발전하는 오늘날 외국나들이,연해도시 진출로 결혼도 쉽게 하고 이혼도 식은죽 먹기로 하면서 가족의 의미와 부부의 소중한 인연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이 부부의 사랑이 메아리처럼 울려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사람들
    2016-09-02
  • [인터뷰] 재일조선족여성회 전정선 회장을 만나다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일본에서 활약하는 한 재일조선족여성단체가 있다. 바로 2008년2월 10일에 설립되어 지난해 일반사단법인 등록까지 마친 재일조선족여성회(이사장 전정선)이다. 일본사회를 보다 알고 조선족들 사이의 교류를 넓히며 재일조선족 여성들의 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하는데 취지를 두고, 주체가 되어 일본사회에서의 취직·사업·육아·친목 등에서의 고민과 난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이다. ‘작은 샘물이 바다를 이루듯이 우리의 소중한 참여가 힘이 됩니다.’ 2008년 이래 해마다 여성들의 지혜와 힘을 모아 다양한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예하면 설립된 당해에 어린이들에게는 우리말 배우기, 동화 들려주기, 종이접기와 같은 재능을 가르쳐 주고 어머니들에게는 김치 교실, 무용 교실, 꽂꽂이 교실, 등 활동을 조직했고, 2009년에는 온천여행, 민족무용 배우기, 초청강사 강연회, 실내스포츠 교실, 일본전통복장 교실, 배구활동, 요리 교실, 어린이 우리말, 중국어 교실 등 활동을, 2010년에는 어린이 우리말 교실을 정기적으로 운영했다. 2014년 11월 29일에는 일본국제홍백노래콩쿠르 "제4회 국제홍백가요제"에 참가하여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4가지 언어로 노래를 불러 장관상을 받아 일본사회에서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지난해 10월 18일 오후, 도쿄올림픽기념 국제청소년센터에서 열린 일본 국제 홍백가요제에서 이 여성회 샘물어린이학교 조선족어린이들은 중국노래 ‘말리화’(茉莉花)와 한국노래 ‘참 좋은 말’을 불러 최우수 장관상까지 받았다. 또한 2015년 2월 1일에는 다년간 키워 온 어린이 우리말 교실을 샘물어린이학교로 개명하여 개학식을 가졌다. 도쿄주변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족을 대상으로 한국어·중국어 배워주기, 동요/동화 들려주기 종이접기, 그림그리기,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작년 8월달에 제1회 재일조선족운동회에서 여성회에서는 문화문예공연무대를 주최했으며 샘물한글학교 어린이합창, 여성들의 민족무용 부채춤이 주목받았다. 어린이들은 단체노력상도 받았다. 재일조선족여성회는 다년간 재일조선족각단체들과의 융합과 협력, 협조로 조선족사회의 일원으로 많은 역활을 해왔다. 작년에 2개반급으로부터 금년부터는 소학2학년반, 소학1학년반, 유아반등 세개 반급으로 한국어 중국어, 음악, 영어등 기타 교실을그림 그리기·색종이 접기·카드놀이·음악교실 등을 운영하면서 일본에서 출생한 조선족어린이들에게 전통문화 민족언어 교육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4~12살 되는 130여명의 어린이들을 상대로 13여명의 교직원들이 봉사하고 있다. 전 회장은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신으로 일찍 연길시 정부와 상해에서 사업하다가 199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한동안 세계한인무역협회 치바지회 사무국장으로 몸담고 있으면서 일본사회에서의 적응과 취직, 가정육아 등에 관련해 재일조선족 여성들과 상담을 하면서 함께 이러한 난제를 풀어갈 수 있는 단체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결국 조선족 여성의 일본 내 정착· 취업·출산·육아 등을 서로 돕자는 목적으로 이 여성회를 만들었다. 또한 일본에는 10만 여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지만 조선족에 대해 전혀 요해가 없는 많은 일본인들은 조선족을 북한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조선족을 일본사회에 알리려는 결심을 가져 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이 앞으로 재일조선족들에게 어떠한 긍정적 영향과 도움을 주게 될 것으로 전망하는가” 하는 물음에 전 회장은 “동포애와 민족공동체 의식 함량, 우리 글과 문화의 전파, 조선족들 간의 교류와 일본사회에서의 적응· 취직·사업·육아·친목 등에서 고민과 난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며 확신있게 대답했다. ▲선생님과 함께 종이 접기를 하고 있는 샘물한글학교 어린이들 한편 올해에는 자녀교육강좌, 도자기체험, 여성사업가 초청세미나, 다성식품에서 민족음식체험 요리교실, 재일조선족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농활체험교실, 재일조선족들과 함께하는 샘물한글학교 운동회, 동경한국교육원 선생님들을 모시고 전통예의 문화교육 한복입기 체험교실, 동경에서 열리는 홍백가요전 출연, 어린이들 작품발표회 등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전 회장, 동시에 이러 저러한 애로사항도 많다고 토로했다.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활동장소를 마련하는 것으로, 정부 그리고 단체와 지성인 그리고 기업인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전 회장은 "자녀가 현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자신이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또한 중국인인지 그 정체성 혼돈을 겪는 때가 많아요. 우리말이나 중국어를 배우지 못해 중국에서 조부모가 오셔도 의사소통도 안되고 낯설어하는 경우를 종종 보군 하기도 하구요. 중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일본의 대학·대학원으로 유학 온 경우가 대부분인 재일조선족은 고학력 지식인이 많지만 3개 언어와 문화를 아는 이런 균형 감각을 자녀가 이어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안타까운 심경을 밝혔다. 이어 "재작년부터 지난해 일본 내 외국인을 대상으로 도쿄에서 열린 국제홍백노래자랑에 여성회 후원으로 조선족어린이 합창단이 등단해 최우수상인 관광청 장관상, 파퍼먼스상을 받는 쾌거를 올린 적이 있다"면서 "이 어린이들이 한국어·중국어·일본어·영어 등 유일하게 4개 언어로 노래해 큰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수상 후 인사말을 일본말로 밖에 표현하지 못해 부끄러웠다"고 그 고충을 털어놓았다. 전 회장은 "부모와 달리 일본 사회에 동화돼 가는 자녀를 위해서는 고국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는 일이 중요하다"며 "재외동포재단 등 고국(한국)의 기관에서 시행하는 재외동포 차세대 모국연수에 재일조선족 2세도 참여하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전 회장은 “여성회는 재일조선족 여성들이 헌신적인 봉사정신으로 만들어 진 것이므로 계속 초심을 잃지 않고 여성회와 샘물어린이학교를 위해 헌신해 주기 바란다”고 강조하면서 “여성회가 재일조선족 여성들의 친목도모와 생활, 그리고 현재의 어린이들이 우리 글과 문화 교육으로 글로벌 인재로 육성하는데 한 몫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전 회장은 또 “다년간 많은 지지와 도움을 주신 지성인 기업인들과 트팀 없이 참모 역할을 해 온 현 JTC일본어학교장 (50년 경력대학 교수), 아세아경제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 조선족연구학회 고문이며 전임회장, 東アジア経済経営学会 회장직을 맡고 있는 남편에게도 진심으로 되는 감사 드린다”덧 붙였다.
    • 사람들
    2016-08-06
  • [인터뷰] 오계근 전 홍콩한국토요학교장
    [동포투데이] 자녀를 둔 재외동포들의 가장 큰 고민은 자녀 교육이 아닐까 싶다. 자녀들이 속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대로 정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정체성도 잃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외동포 2세의 한국어(국어)와 한국의 역사(국사) 교육을 담당하는 홍콩한국토요학교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지난 20일 홍콩한국국제학교 강당에서 있었던 졸업식에서 “꿈이 있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큰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길 바란다.”고 학생들을 향해 진심 어린 조언을 하던 오계근 전 홍콩한국토요학교장, 지난 2년간 토요학교를 운영해온 그를 만나 토요학교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들어봤다. ▲ 2015학년도 한국토요학교 졸업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오계근 전 토요학교장 ― 임기를 마친 소감을 말씀해 주신다면. ▲ 2년 동안 토요학교장으로 봉사한 시간은 제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한인 2세들을 교육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봉사하려 노력했고 큰 보람을 갖고 짐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특히, 메르스(MERS) 사태 당시 학부모와 학생들의 감염 예방을 위해 한 달간 교사들과 학교 정문에서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감열 및 소독 활동을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 토요학교장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 2년 전 토요학교장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고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광이지만 과연 그 임무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당시 주위에서 토요학교장은 명예직이고 장차 한인회의 리더가 되기 위해 거치는 통과의례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고, 어느 분은 매주 출근할 필요는 없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만 나가서 결재만 하면 된다고 조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일부 교사들도 토요학교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현장에서 수고하는 교사들을 대변하기보다는 개인적 명예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실제로 운영을 해 보니 토요학교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습니다. 40 여 명의 교사와 600여 명 학생의 관리자, 학부모와 교사 간 문제 발생 시 조정자의 역할, 한국 국제학교 관계자들과의 협조체제 및 학교 시설물의 관리자 그리고 KIS의 이사 및 운영위원 등 할 일이 많은 자리입니다. 따라서 매주 토요일 오전 동안 정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재임 시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일을 말씀해 주신다면. ▲ 교사 풀(Pool)제를 도입한 것을 첫 번째로 꼽고 싶습니다. 토요학교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사 채용이 순조롭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한인회 홈페이지, 한인 소식지 등에 상시 모집공고를 내서 지원자를 모집하고 1차 서류심사, 2차 면접 및 시강을 통해 평가 후 교사로 선발했습니다. 특히, 시강 결과를 선발 기준에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은 교육의 질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차를 거쳐 선발된 교사들을 결원이 생길 시 우선 배정하고 대기 교사들은 정교사의 결강 시 대강을 통해 경험을 쌓게 하고 결원 시 채용하는 제도입니다. 두 번째, 교사의 고용계약서 작성 시기를 조정했습니다. 관례상 매년 3월에 작성하던 고용계약서를 1월 말부터 2월 중순(졸업식 전)까지 마무리해 교사들이 새 학년도 수업준비에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3월부터 1년간 근무할 수 있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계약을 진행했으며, 채용 확정된 신임 교사의 경우 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을 실시하고, 학기 시작 한 달 전에 교재 연구 및 수업 준비를 차질 없이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세 번째, 출석률 향상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의 경우 재학 중인 학교 행사나 기타 특별활동 참가 등으로 인해 결석하는 학생이 많은 편입니다. 대응책으로 졸업 기준에 출석률(중등부의 경우 1/3 이상 출석)을 반영시켜 출석에 대한 의무감을 심어줬습니다. 결석하는 학생들이 많으면 열심히 다니는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출석률 관리 강화에 특별히 신경을 쎴습니다. 부모님의 관심이 학생의 출석률 향상에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토요학교 ‘운영규칙안’ 설계를 마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관리되어 오던 제반 규정을 종합해 ‘홍콩 한국 토요학교 운영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토요학교의 기본 골격과 교육방침 그리고 교사들 근무지침 및 학생들의 상벌 규정까지 담고 있습니다. 임기 내에 마무리하려 했으나 정관 개정 문제, 한인회장 선거 등 한인회 제반 업무에 밀려 마무리를 짓지 못해 못내 아쉽습니다. 후임 교장이 조속한 시일 내에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 주셨으면 합니다. ― 문제점이나 개선할 점이 있다면. ▲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봅니다. 토요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고 자발적으로 출석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교사와 학교 관계자들이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재임 시 교사들에게 단순히 지식의 전달자가 아닌 인성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라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성을 갖추기 위해 모국어 교육과 함께 한국 역사 교육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국제학교에서 수학하는 학생들의 경우 세계사와 함께 한국 역사를 가르치면 더욱 이해를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교사들 간의 화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래 근무한 교사들의 경험과 새로 들어오는 교사들의 참신함이 잘 어우러져야 토요학교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교육 현장에 기득권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열린 마음과 사랑으로 학생들을 대해야 학생들도 토요학교에 애정이 생길 것이고, 교사들이 끈끈한 팀워크로 일할 때 학생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쳐 면학 분위기 향상에도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 한인회 및 한인 사회에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 ▲ 홍콩한국토요학교는 1960년 개설 이래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글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제 작은 의미의 학원이 아닌 학교로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학교로서 독립성을 갖고 운영될 수 있도록 관심은 가져 주시되 지나친 간섭은 지양했으면 합니다. 토요학교 교사는 1주일에 한 번 수업하지만 내실 있는 지도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2세 교육을 담당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하시는 교사들이 보람을 갖고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셨으면 합니다. 49대 한인회 회장단에서도 교사들에게 진심 어린 격려와 지원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사람들
    2016-03-07
  • 중국 뷰티프로그램 , MC가 한국인이라고?
    [동포투데이] 한중 2개국어MC로 한국과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임정은이 최근 ‘K-뷰티’ 전도사로 활약 중이다. 중국 상하이 SiTV에서 방송하는 신개념 뷰티 버라이어티 <시상가인(時尙佳人)>의 메인MC로 활동하고 있는 것. <시상가인>은 중국과 아시아 각국에 K-뷰티를 비롯한 알짜배기 한류 정보를 전하는 신개념 뷰티 프로그램으로, 한류스타를 직접 담당했던 뷰티 전문가들이 평소 쉽게 알 수 없었던 K-뷰티의 비법을 소개해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시상가인>은 상하이 SiTV, 베이징TV와 옌볜TV 등 중국 방송 뿐만아니라 태국 TVK, 미얀마 TV 등에도 방송되고 있어, ‘K-뷰티’를 아시아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시상가인>을 진행하는 임정은은 현재 한중 2개국어MC로 한국과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시상가인’을 비롯해서, 중국 최대 인터넷기업 텐센트와 한국 칸타라글로벌이 개최하는 생방송 한류콘서트 <텐센트케이팝라이브(Tencent K-POP LIve)>, 한류스타 인터뷰 프로그램인 <한위쑤디 인터뷰>, KTV의 여행정보 프로그램 <핫플레이스 코리아> 등을 진행하고 있고, tbs eFM의 중국어 프로그램 <서울생활가유참>에 매주 한국인 게스트로 출연해 입담을 뽐내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빅뱅, 소녀시대, 에이핑크, 포미닛, 씨스타, 비스트 등의 스타 아이돌과 한 무대에서 선 임정은은 2016년에도 자신을 설레게 하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나고 싶다면서, 올해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중 통역학과 2학년을 시작하는만큼, 진행과 통역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 사람들
    2016-02-17
  • 홍진기 이사장의 창조적 사회가치 사랑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홍진기 회장은 지난8월 (사)경기도사회적경제협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사회적기업의 규모와 영향력을 좀 더 키워가기 위한 선택이다. (사)경기도사회적경제협회는 21개 지부로 운영되며 150개 회원사가 있다. 홍진기 회장은 회원가입에 대해 자발적인 참여가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사)경기도사회적경제협회는 설립된 지 2년 남짓 되었지만 이미 경기도 사회적기업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려면 “기업들이 협회에 회원사가 되면 혜택도 있고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있다는 점 등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 내 대기업들도 사회공헌기금 등을 활용해 사회적기업의 제품을 구입해서 명절상품 등으로 지급한다면 지역기업들과도 상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가치를 끌어내는 윈윈의 창조적 활동이라고 그는 믿는다. 더불어 함께 만들어 가는 공공의 이익 홍진기 회장은 “경기도 내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대표로 구성된 경기도사회적경제협의회는 사회적기업의 협력과 상생을 도모하며 무엇보다 사회적기업들의 이윤창출을 위한 실질적인 역할에 힘쓰는 단체이기에 지역 내 기업들도 사회적기업과의 상생을 위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라 전했다. 이미 (사)경기도사회적경제협회는 4개 사단 군부대와 MOU를 체결하였고, 지난12월2일에는 경희대학교 테크노 경영대학원 사회적경제경영전공개설 협약을 체결하였다. 군부대 기지 내 매점에 사회적경제 관련기업의 제품을 납품할 수 있도록 계약을 체결하였고 명문 전문경영대학원에 사회적경제기업 CEO및 사회적경제 활동가를 위하여 사회적경제 경영전공과정을 만들기로 체결한 것이다. 이 계획 속에는 사회적경제 조직이 좀 더 자생력 있는 조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홍진기 회장의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다. 또한 사회적경제 관계기업에 연관이 있는 조직이라면 꼭 협회 회원이 아니어도 함께 품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소신도 전했다. 그의 뚝심 있는 행보가 기대된다. 새롭고 쓰는 인생 2막의 기대 홍회장은 이제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의 보물을 찾아가고 있다. 개척의 의지로 도전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가슴 뜨거운 인생을 달려 온 주인공이 개인의 발전을 뛰어넘어 기업의 성장을 촉구하는 든든한 동행이 되어 준 리더로서다, 홍회장의 인생2막을 펼치는 멋진 이야기를 들어 보자. 홍진기 회장이 사회적기업의 성장에 깊은 관심과 참여를 하게 된 것은 6년 전 그가 30년간 몸담았던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하면서부터다. 중소기업지원센터에서 진행한 CEO교육과정을 3개월 정도 배우게 된 홍진기 회장은 사회적기업과 관련해 더 전문적인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한신대학교에서 MBA과정도 밟고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도 다녀왔단다. “조금만 도와주면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경제기업이 많습니다. 단순히 감투만 쓰는 명예직이 아니라 사명감을 가지고 이들 기업을 위해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함께 교육을 받았던 50여 명의 대표들은 사조직처럼 모임을 만들었고 일부는 지정 사회적기업으로 성장도 했다. 이들 사회적경제 기업들은 경기도 내 유망기업 1위에서 8위 안에 들 정도로 경쟁력을 지니면서 경기도 내에서도 기업CEO협의회에 대한 신뢰를 보였다. 어려움에 처한 기업들이 경기도에서 인지도 높은 지정 사회적기업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뿌듯하면서도 보람을 느낀다며 이 협회에서의 사회적경제 기업조직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보였다. 홍진기 회장이 향 후 31개 경기도 시군구 지부장 등 경기도를 통합하는 사회적경제네트웍 중요함사회적기업의 든든한 파트너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직장생활을 토대로 쌓인 삶의 연륜과 내공의 힘이다. 우선한 사회적가치 창조에 주력 홍진기회장은 문제를 풀어 가는데 있어 필요한 몇 가지를 말한다. 우선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반해 활동하는 비율은 30~40%에 그치고 있습니다.”라며 안타까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선진국에서는 협동조합에서 출발한 조직들이 사회적기업이 되고 마을기업으로 발전해 가는데 우리나라는 사회적관계 기업들이 정부주도하에서 관리되다보니 짧은 시간에 양적인 성장은 했지만 질적인 향상은 부족한 실정입니다.” 홍회장은 협동조합의 활성화를 위해 정부도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협회는 경기도와 유기적인 관계 형성, 도로부터 자금 수혜의 방안을 요청하고 따복공동체와도 함께 사회적 가치 실현에 많은 일들을 수행하려고 한다. “사회적기업이 출범한 지 7~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초창기 때 만들어진 관련 법률과 제도는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이다보니 사회적기업의 현실적 목소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홍진기 회장은 사회적기업의 성장에 장애물이 되고 있는 제도 개선을 위해서도 협회내에 연구원 제도를 두어 협회 차원에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융자 수혜의 적정성등 이다. 현재 사회적기업이 되면 정부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사회적기업 전 단계인 예비적기업의 경우 5천만 원까지 융자지원이 가능하고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으면 1억 원까지 융자를 받을 수 있다. 사회적기업이 5~6년 정도 기업운영을 하는 상황에서 1억원의 금액은 적다. 3~ 억원까지 융자규모를 늘리도록 제도 개선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적기업들도 제법 안정성과 규모를 갖춘 기업들이 많아진 것은 정부와 중소기업청의 도움과 협동화 사업의 시너지 효과도 있지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참여한 사회적 기업가인 리더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수고의 결과라고 밝혔다.
    • 사람들
    2016-01-05
  • 한중 외교 가교 역할, 진정한 문화 외교관 김선녀 씨
    [동포투데이] 서울시 중구 무교동과 경기 안산시 고잔동에 위치한 소망여행사 (대표 김선녀) 가 중국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로 성장시키며 여행업계에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004년 3월 외국인투자개인사업체를 설립한 그녀는 중국 국적의 장점을 살려 중국 특화 여행이라는 아이템으로 성실하고 신뢰받는 여행 상품을 개발하며 한국과 중국의 외교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고 있어 화제를 모아오고 있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여행업에 뛰어든지 11년째.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세월이지만 믿음과 신뢰만큼은 변치 않으며 소망 여행사를 그동안 키워왔다. <월간한국인>에서는 그녀가 생각하는 코리안 드림과 여행사의 어려움에서부터 보람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중국문화를 보급하고자 설립한 슈퍼차이나문화연구소에 이르기까지 삶에 대해 다양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노력과 땀으로 일궈낸 코리안 드림 “저도 다른 동포들처럼 처음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행을 선택했습니다. 뇌졸중으로 많이 아프셨던 어머니의 병치료를 마음껏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한국인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면 시간당 4~5천밖에 안되였지만 한국에서는 2만5천~3만정도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대박의 꿈을 안고 통역했던 회사의 초청으로 한국행을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치 않더군요. 연변 사투리를 사정없이 쓰던 저에게 아이를 믿고 맡길 부모는 없었습니다. 일자리 광고지를 매일 뒤지며 점점 마음은 조급해졌습니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당시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주인 언니가 충무로에 있는 지인을 소개해주어서 중국어를 처음으로 가르칠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고 맡겨주었던다는것만도 고마웠던 그녀는 수업을 10~20분씩 더 가르쳐주었고, 중국에서오는 팩스가 있으면 무료로 번역해드리기도 했다. 그녀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성실성은 주위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중국어 강사는 물론이고 통역, 중국시장조사등 중국 전문가로 자리를 점차 굳혀가는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비자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다. 3개월에 한번씩 중국에 다녀와야만 했던 단기비자는 그녀가 하는 일에서 연속성을 잃게 했다. “오랫동안 체류하고자 불법체류의 생각도 든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걸리고 돌아가더라도 정직하고 정도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힘들더라도 3개월에 한번씩 다녀야 하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면서 더욱 열심히 뛰었던 거 같습니다. 결국 한국에서 신뢰와 믿음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면서 지인들의 도움으로 외국인투자비자를 발급받게 되었고 지금의 여행사를 설립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직과 성실, 그리고 노력으로 일궈낸 성공 - 맞춤형 나만의 여행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묵묵히 견뎌내며 당당히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은 제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더군요. 코리아 드림을 꿈꾸는 수많은 동포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살아가면 꼭 귀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한국인들과의 일자리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특화된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라는 것. 이것이 김선녀 대표가 강조하는 시크릿 노하우이다. 중국과 한국을 잘 알고 있는 중국동포였기에 한국 경쟁 여행사보다 알찬 견적으로 “맞춤형” 나만의 여행상품을 만들 수 있었다. 고객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소망여행사는 가격경쟁을 해서 싸고 품질이 떨어지는 여행상품이 아닌 맞춤식상품으로 고객들을 만났다. 여행사는 크지 않지만 고객들은 최고의 VIP로 모시는 서비스를 구현하고 있다. 쇼핑센터와 옵션이 없는 편안한 일정과 출발전 여행지 안내 서비스, 여행중 사용하는 일상 중국어 제공, 3년이내 새롭게 건설된 호텔을 사용해서 포근한 잠자리 제공, 신차를 사용해서 안전한 차량으로 걱정없이 여행을 즐기게 하는 등 고객의 니즈에 부합하는 차별화된 상품을 제시해 오고 있다. 최근에는 아카데미, 워크숍 등 기업 CEO 들을 위한 맞춤 현장 견학 프로그램 등 한중 문화에 익숙한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고객만족은 소망의 성장의 밑거름이 되며 거미줄처럼 지인소개가 끊이질 않고 있다. 처음 낯설고 막막하기만 했던 한국생활에서 어느덧 안정을 찾고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김선녀 대표. 처음 기회를 주었던 모든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이제는 누군가에 감사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소감을 밝혔다. 김선녀 브랜드 가치 창조, 슈퍼차이나문화연구소 설립 소중한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여행사가 자신만이 브랜드를 갖고 오늘처럼 성장했다고 생각한 김 대표는 나눔의 크기를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으면 더 빨리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재능기부를 하기 시작했다. 지역아동센터, 자원봉사협의회등을 통해서 각단체에서 중국문화특강을 무료로 해주기 시작했다. 그런 나눔을 통해서 그녀는 중국문화특강의 중요성을 깊게 깨치고 올해 1월에 슈퍼차이나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김 대표는 “여행을 통해서 한국인들이 중국문화를 현장으로 느끼고 경험한다면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특강은 경험을 통해서 현실에 직접 응용할 수 있는 좋은 점”이라고 말한다. “나의 사랑, 대한민국” 그녀가 하는 강연은 많은 편견과 아픔을 극복하고 한국생활에 정착하고 성공한 사례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을 주고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감동으로 이어져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뿐만아니라 “중국인의 상술“, ”중국인의 직업관“, ”중국진출 성공프로세스“ 등 주제로 기업체 , 대학교 , 법원공무원교육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기있는 강의를 진행하면서 한중문화교류에 외교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는 법무부 지정 한중동포신문 자문위원,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소울림 총동문회부회장등 여러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동포에 대한 편견을 하나하나 없애고 있다. 그녀의 노력은 카네기최고기업인상, 재한동포문인협회 문화상,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표창상, 중국동포타운신문 칼럼 우수상 등 좋은결과로 이어졌다. 늘 바쁘게 하루를 쪼개살고 있는 김선녀 대표. 그녀는 적자생존(适者生存 )이라는 성어를 좋아했다. 적응하기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그녀는 한국정책재단(이사장-임태희)에서 운영하고 있는 소울림아카데미 (원장-잡코리아 창시자 김승남)로 수료를 했고, 카네기 최고경영자 과정, 소비자정보대학, HK여행작가아카데미, 이주민방송 라디오제작교육을 수료했으며, 지금은 한양대 창조경제 고위경영자 과정을 수료중이다. “맞춤식”여행사상품으로 고객들이 웃을수 있도록 만족을 주었다면 지금은 중국동포로서 김선녀란 이름 석자의 브랜드를 만들어 오는데 최선을 다해오고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김선녀 대표에 대한 한줄 정의는 무엇일까? 바로 한국과 중국을 모두 잘 아는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다들 입을 모은다. 대한민국을 너무도 사랑하는 김 선녀 대표. 편견과 차별을 넘어 앞으로 그녀가 꿈꾸는 미래는 아름답고 행복하다. 그 행복한 동행을 <월간한국인>에서도 함께 응원해 본다.
    • 사람들
    2015-12-11
  • “조선족 가수 김미아입니다”
    [동포투데이] “올해는 왕년에 비해 여러번 고향을 찾게 되네요. 얼마전 훈춘 방천에서도 공연이 있었구요. 나이가 들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깊어지는듯 해요. 어디에 가든지 고향만큼 좋은 곳은 없다는 생각이 더욱 들구요.” 중국조선족교향음악회 참가차 고향땅을 다시 밟게 된 김미아씨, 음악회 참가는 마치 고향의 어머니를 보러 오는 기분이다. 음악회에서 김미아씨는 “등대”와 “겨울의 홰불”을 불렀다. “등대”가 어떤 년령층에게나 힘을 주고 희망을 줄수 있는 노래이기에 고향인민들이 힘든 일이 있어도 꿋꿋이 이겨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고 “겨울의 홰불”은 다함께 대박 나자는 희망에서 선곡했다고 설명했다. 김미아씨가 전국에 이름을 날린 것은 “성광대도”에서 우승하면서부터다. 음악을 좋아하다보니 더 큰 꿈을 실현하고 싶어 무작정 상경했고 지금까지 북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요즘 들어 “겨울의 홰불”은 원곡자 비상(费翔)보다도 김미아씨의 버전이 많이 들려진다. 2012년 CCTV음력설야회무대에서 김미아씨는 “겨울의 홰불”로 팝가수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몇분 안되는 무대였지만 그 무대에 오르기 위한 경쟁은 치렬했다. 2012년이 CCTV 음력설야회 30회가 되는 해였기에 그동안 불리워진 대표곡들을 선정해 부르는 부분이 마련되였는데 “겨울의 홰불”도 그중의 한곡으로 선정되었다. 원곡자 비상을 초청했지만 그는 감독팀에 김미아씨를 추천했다. 그렇다고 절대 쉽게 오를수 있는 무대는 아니였다. 당시 중국가요계에서도 나노라 하는 쟁쟁한 가수들이 앞다투어 이 곡을 부르겠다고 나섰다.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지만 그가운데서 최종 김미아씨가 발탁됐다. “원곡자앞에서 어떻게 부르냐?”는 의문도 많이 받은것으로 알려진다. “무대는 요만한데 가수는 이만큼이나 있어요. 그래서 항상 남보다 더 노력하고 남들이 할수 없는 것을 내가 해야만 그 사람의 앞에 설수 있거든요. 무슨 일이든 하루만에 완성될 수 없어요. 또 내가 노력한만큼 그것이 결과로 보여지지요. 그래서 한발작을 내디뎌도 착실히 하려고 노력하고있어요. 지금까지 견지해온 원칙이기도 하죠.” 김미아씨는 항상 “조선족가수 김미아”로 활동하는 것을 견지하고 있다. 중국가요계에서 활동하다보니 비록 민족가요를 부르는 기회가 적지만 “모두로 하여금 내가 조선족인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내가 민족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언제든지 고향에서 부르면 다른 공연이 있어도 달려오게 되였다고 덧붙인다. 요즘 김미아씨는 신곡을 준비하느라 바삐 보낸다. 다음달말쯤이면 선보일 예정인데 기대해도 좋을듯하다면서 완벽하든 완벽하지 못하든 항상 리해하고 지지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 사람들
    2015-11-2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