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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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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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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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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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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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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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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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견문 시리즈(1) 대서양의 진주 - 라스팔마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남아프리카공화국 항구도시 더반에서 출항해 희망봉기슭을 에돌아 북쪽으로 계속 항행하노라면 대서양 바다의 진주로 불리우는 카나리아군도의 라스팔마스를 거치게 된다. 라스팔마스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유럽땅이지만 위도가 아프리카주와 가까이에 있고 또한 대서양난류의 영향으로 사시장철 꽃이 필수 있는가 하면 눈내리는 날을 거의 볼 수 없는 것이 이 곳이 특징이다. 한편 라스팔마스는 대서양에서 조업하는 수많은 작업선과 이 곳을 지나는 원양화물선들이 반드시 거치게 되는 관문으로서 한국선원들은 이를 두고 “제2의 부산”이라고 친절히 불러주기도 한다. 라스팔마스 –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바다에서 해가 뜨고 바다에서 해가 지는 곳, 아열대기후의 영향으로 사시절 따스한 날씨가 계속되고 야자수가 우거진 거리를 벗어나면 곧 해안선과 해수욕장이 펼쳐지며 무역선이 드나드는 항구에 들어서면 낭만과 로맨스가 엮어지는 청춘의 도시이다. 1990연대초 내가 승선했던 선박 “코리안스타”호의 스켓쥴이 라스팔마스와 아프리카 및 유럽 쪽이 비교적 많은 까닭에 우리는 그 곳에 자주 입항했고 인상 또한 꽤나 깊었다. 본선이 라스팔마스항에 처음 입항한 것은 1991년 6월초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배가 부두에 대이기 전 그닥 멀지 않는 해상에서 보는 라스팔마스는 한폭의 화려한 수채화를 방불케 했다. 노란색, 분홍색, 새하얀 색의 건물들은 산기슭과 산꼭대기까지 올리뻗으며 지은데서 일종 입체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저 멀리 해수욕장에는 수많은 남녀들이 한데 어울려 노니는 것이 보이었다. 그 때 본선은 라스팔마스항 빤따랑부두에 정박하였다. 그날 저녁 우리 일행이 아무런 상육수속도 없이 항구입구를 벗어나자 곧바로 시내가 펼쳐졌는데 이럴 변이라구야. “대서양상회”, “민족촌식당”, “무궁화 백화점” 등 수많은 우리 글 간판들이 유표하게 한눈에 안겨와 진짜 한국의 어느 한 항구도시에 오지 않았나 하는 착각을 줄 지경이었다. 일명 “코리아타운”이라고도 하는 이 거리에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가 숱한 한국선원들이 활개치며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어느 상가의 스피카에서는 한국가수 설운도의 “떠나가는 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등대불이 깜빡깜빡 배길따라 춤을 추는 밤/ 쌍고동을 울리며 가는 배 현해탄을 떠나가는 배// 자갈집아줌마가 손흔드는 밤/ 내 친구 다시 돌아 손 흔드는 밤// 정이 들었어 정이 들었어 눈물지으며 떠나가는 배/ 또 만나요 또 만납시다 손흔드며 떠나는 형제… 뒤이어 우리가 들어선 곳은 대서양상회였다. “아이구, ‘코리안스타’호의 아저씨들이군요. 어서 오세요.” 주인아줌마는 본선의 한국선원들을 잘 아는 듯 했다. 이어 우리가 차탁에 둘러앉자 그녀는 우리한테 커피와 맥주 중 요구대로 공급했는데 돈 한푼 받지 않았다. 대서양상회에서 우리 일행은 많은 선박에서의 생필품과 도서 등을 사고는 그 아줌마와 굳바이를 했다. 거기서 나오자 날은 이미 어두워져 거리는 황홀한 등불들로 오색영롱했다. 우리는 그 길로 택시에 앉아 싼타까따리나 공원광장으로 향발, 그 곳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시계초침이 8시 3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그 때의 공원광장은 이미 숱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로천에 식탁을 둘러놓고 술을 마시며 여가수의 팝송을 듣는 손님들과 맨봉당에 돛자리를 펴고 앉아서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 신자들, 또한 현지처와 함께 배회하는 선원들로 밤분위기는 짙어만 갔다. 그날 밤 우리는 싼따까리나 공원광장에서 자정까지 술을 마시며 팝송과 쏘프라노 가수의 노래를 흠상하다가 귀선했다. 2 그 이튿날 오후 1항사가 식당안에 있는 공고란에 뭔가 써내려 갔다. 그 것을 읽어본즉. 금일 저녁 갑판 및 기관 부서당직자와 전체 선원들은 단체행동을 할 것이오니 식사 후 선원마다 샤와들 마치고는 외출복 차림으로 대기하여 주십시오. 1항사 6월 ×일 나는 그 집단행동이란 것에 대해 몹시 궁금했다. 1항사한테 물어봤으나 그가 가보면 알 것 아니냐면서 알려주지 않았다. 혹시 교회같은 곳에 가려는 것은 아닌지? 그러다가 뒤 따라온 통신장한테 물어봤더니 오늘밤은 좀 자극적인 곳을 찾을 것이니 가보면 끝내줄 것이라 했다. 저녁식사 후 내가 주방장 함께 부랴부랴 설걷이를 마친 뒤 샤와하고 외출복차림으로 나가보니 진작 버스 한대가 대기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둘이 오르자 마자 버스는 “부르릉”하고 시동을 걸었다. 버스가 당도한 곳은 싼타까따리나쪽에 있는 호텔강촌의 한식관, 거기서 우리는 또 띠를 풀어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모두들 저녁식사 뒤라 입맛이 별반 당기지 않으련만 그곳의 불고기와 참치사시미 그리고 깍두기 등은 어찌도 맛있게 만들었던지 주방장조수인 나는 진짜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음식을 파한 뒤 우리는 또 버스에 앉아 진정한 목적지인 무에그랑데쪽의 소극장으로 갔다. 거기에 도착하자 번쩍번쩍하는 네온싸인속에 여자나체광고가 유난히도 안겨왔다. 티켓은 인당 2000페스타(20불), 좌석에 앉자 요구에 따라 콜라나 맥주 한깡통씩 차례졌다. 듣는 바에 따르면 그 외 더 요구하면 한 깡통에 또 1000페스타씩 받는다기에 우리는 될수록 깡통맥주 하나를 갖고 조금씩 입에 대는 시늉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대는 여느 극장의 무대와는 달리 원탁형으로 꾸며졌는데 출연자들의 탈의실, 휴식실외 3면에 관중들이 앉기로 되어 있었으며 그 곳에서의 촬영은 일절 엄금이었다. 공연이 시작됐다. 첫 종목은 10여쌍의 남녀가 나와서 추는 스페인 민속춤이었고 그 다음의 것은 스프라노가수의 독창이었다. 특히 그 쏘프라노가수의 두번째의 노래는 어딘가 듣던 곡이었다. 자세히 생각을 더듬은즉 그 것이 유명한 “선구자”가 아닌가.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이는 일종 한국선원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종목임에 틀림없었다. 비록 스페인어로 번역했지만 가사중 “일송정”, “해랑강”, “선구자” 이 세 단어만은 음역한 것으로서 그 것이 같은 곡에 다른 가사를 붙인 것이 아니란 것을 인차 알 수 있었다. 참, 그 옛날 간도의 용정에서 불려졌다는 그 “선구자”의 노래, 그 것을 오늘 대양 건너 그 스페인땅에서 듣노라니 자못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한국선원들의 자극적인 것이란게 고작 이 것인가? 양대가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격이 아닌가? 하지만 그 것은 착각이었다. 몇 종목의 춤노래가 끝난 뒤 무대가 차츰 어두워지더니 드디어 알몸으로 실 한오리 걸치지 않은 아가씨가 무대에 나타났다. 금발머리에 곡선미가 뚜렷한 체형, 뭘 발랐는지 그 흰 피부는 왜 그리도 윤기나는지?… 뒤이어 검은 협객복장을 한 사나이 한명이 숱한 칼을 철사끈에 꿰매들고 나타나서는 그 알몸아가씨를 널판자가 대인 벽에 세우는 것이었다. 또 시중군 한명이 나와 사나이의 눈에 검은 천을 두르는 것이었다. 아니 저 아가씨를 과녁으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천사같은 아가씨를 향해 칼을 뿌리다니. 소름이 꽉 끼쳤다. 그러건 말건 그 사나이는 아가씨를 향해 칼 재주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첫 칼은 머리위에 꽂히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칼은 목 양측에 박히고 그 다음의 칼들은 양측 겨드랑이밑과 허리양쪽켠 그리고 양쪽다리 사이로 면바로 실수없이 가 박히었다. 그 아슬아슬한 종목이 막을 닫자 그 다음은 웬 한국아가씨가 역시 알몸으로 서커스표현을 했고 뒤이어 아까 그 칼앞에 섰던 아가씨가 또 나와 갖가지 해괴망칙한 기교를 피워냈다. 그 것은 주로 그녀의 성기를 이용하여 표현하는 기교였다. 그 걸로 맥주병 뚜껑을 따는가 하면 거기에 전등알을 밀어넣어 불이 반짝하고 켜지게도 했으며 또 거기에 노끈 한오리가 달려 있었는데 글쎄 그 것을 당기니 그 노끈을 따라 숱한 대못, 가위, 면도날 등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 그녀는 어떤 둥근 탁자같은데 눕는 것이었다. 그러자 누군가 나와 그녀의 성기속에 닭알 하나를 밀어 넣었는데 이윽해서 그녀가 소리를 지를 적마다 닭알 하나씩 빠져 나오더니 나중에 한바구니가 꼴똑 차는 것이었다… 공연의 마지막 종목은 두 남녀의 사랑을 제재로 한 무지컬이었다. 그 슈제트는 다음과 같았다. 남편있는 한 여인이 몰래 군사내와 사랑을 속삭인다. 하루는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그녀는 그 사내를 집으로 끌어 들이기고는 벌고 벗고 섹스파티를 벌인다. 그런데 그 시각 남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니 사내는 옷장 뒤에 숨는다. 남편이 들어오자 바람으로 옷을 벗으며 안해한테 덮쳐 들었고 이에 그녀는 거의 순종적으로 몸을 맡긴다. 다음 순간 옷장 뒤에 서서 둘의 섹스장면을 보는 사내는 불타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뛰쳐나와 도전을 건다. 둘은 칼 한자루씩 나누어 갖고 격투를 벌인다. 치열한 맞칼질 중 군사내가 점점 수세에 처하여 지게 될 무렵, 여인은 도리어 어떤 물건으로 남편의 머리를 까부신다. 쓰러져 죽는 남편과 깜짝 놀라 서있는 군사내, 마침내 엄연한 현실앞에서 그 남녀는 한차례의 격열하게 포옹을 한 뒤 함께 그 곳에서 탈출한다. …… 옛날의 강제혼인같은 것에 반항하여 참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을 담은 무지컬 같았는데 섹스장면같은 것은 직접 남녀가 어울려하는 것으로서 관중을 많이 끌기 마련이었다. 이로보아 전반 라스팔마스의 문화산업이란 것도 고상한 것과 방탕한 것이 “동거”하는 혼합체라고 해야 하겠다. 그외 라스팔마스에 대한 깊은 인상이라면 1992년 4월에 있은 등대탑해수욕장 견문이었다. 라스팔마스는 워낙 따스한 곳이었지만 본선선원들이 1박 2일을 목적으로 남쪽 등대탑쪽으로 갈수록 날씨는 점점 무더워났다. 듣는 말에 따르면 라스팔마스 도심과 등대탑쪽과의 기온차이는 10도 좌우라 했다. 그 것은 일명 라체해수욕장이라는 그 곳이 폭이 수백미터, 길이 20여리나 되는 백사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해수욕장으로 되었고 숱한 관광객들이 모여들기 마련이었는데 그 거개가 서부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이었다. 우리는 에이젠트가 알선해 준 호텔에서 행장을 푼 뒤 인차 수영복을 갈아입고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가 그 때는 이미 숱한 벌거벗은 남녀들로 해수욕장은 그 매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태양산밑의 둥근탁자에 앉아 커피나 음료를 마시는 나체의 남녀들, 자기의 성기를 활짝 드러낸 채 모래밭에 반듯이 누워 있는 아가씨들, 또한 나체의 몸으로 남녀가 뒤섞여 배구, 탁구, 배드민톤 등을 치는 이들도 있고 숱한 사람들이 둘러보는 가운데 백일하에 섹스쇼를 벌이는 곳도 있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서양인들은 타인의 성기에 대하여 그저 사람한테 달린 입, 코, 눈이나 귀처럼 생각하면서 음욕과 대상으로는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었으나 우리가 여인들의 나체를 갑자기 보니 왜 사타구니에 있는 그 것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던지? 또한 섹스쇼같은 것을 벌이는 곳이 보이면 우리는 서로 더욱 잘 보려고 우르르 몰켜들기가 일쑤였고 서로 밀치면서 목을 빼들고 발굽치를 쳐들군 했다. 순간 나는 우리 연변에도 이런 나체해수욕장이나 나체쇼를 벌이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번 굴려 보았다. 보나마나 수습못할 치안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소위 성해방에 대해서도 그랬다. 서양에서는 부부가 서로 성해방을 해도 별문제였지만 중국사회에서는 벌써 관념상 자신은 성해방하려 하나 자기의 안해나 남편이 성해방하는 것은 용서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서양사회의 성해방은 흔히 부부사이의 만족되지 못한 부분을 타인을 통하여 향수하는 의식형태였지만 우리의 성해방은 부부일방에 대한 직접적인 배반으로 표현되며 그 뒤에는 치고 박고하는 싸움과 가정파산, 죄없는 고아의 출현 등 사회의 골치거리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나체해수욕장을 거닐노라니 우습고도 재미나는 일도 가끔씩 생기군 했다. 글쎄 한번은 웬 서양인부부 비슷한 남녀가 다가오더니 그중 여인이 우리 일행중 한 선원의 남근을 가르키며 웃으면서 뭐라고 씨벌이는것이었다. 그것은 요렇게 작은 물건이 남자구실을 어떻게 할 수 있으며 여자한테 만족줄 수 있느냐 하는 모양, 헌데 그 뒤를 이어 그의 그 것이 급기야 발딱하며 버섯모양의 대가리를 쳐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이에 재미있다고 더욱 깔깔대며 웃어대는 여인과 한쪽 켠에 물러서서 흥미있게 구경하는 그 사내, 하긴 그 사내의 물건과 우리의 것을 비교해 볼라니 그 싸이즈가 확실히 먹음직한 가지와 고추의 차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외 성기도 성기라겠지만 우리의 몸과는 달리 그들은 팔다리와 배꼽아래뿐 아니라 가슴팍까지 온통 털로 뒤덮여 있는 것이 우리보다는 퍽 사나이다와 보이기도 했다. 내가 만약 여인이라 해도 그런 품에 한번 안겨봤으면 하는 충동을 느낄만 했다. 그날 저녁, 선장은 우리한테 그 누구건 오늘밤 아가씨를 꼬셔 오기만 하면 섹스화대는 자기가 부담하겠노라고 했다. 그러자 선원들은 좋아서 득의양양해했다. 그도 그럴것이 낮에 나체해수욕장에서 본 여인들중 이쁘고 섹시한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대낮이었으니 그렇지 밤이라면 몇번이고 아가씨를 골라잡고 덮쳐들었을 선원들이었다. 헌데 이 곳에서만은 선원들이 착각해도 크게 착각했다. 우리가 나이트클럽으로 간 뒤 선원들이 혼자있거나 순 아가씨들로 군체를 이룬 좌석에 찾아가서 꼬셨으나 극상해서 함께 촬영하거나 물마시는 것까지는 응했으나 섹스요청에는 한결같이 거부해 나섰다. 특히 2항사의 말은 좀 속되었던지 독일에서 왔다는 한 아가씨는 마시던 맥주를 그대로 2항사의 얼굴에 확 치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여기로 모여든 여인들 중 섹스를 목적으로 한 여인은 기본상 없는듯 싶었다. 이 것으로 우리의 선원들은 처음으로 이렇듯 훌륭한 곳에서 가장 고독한 밤을 보내게 되었다. 4 1992년 10월 네덜란드의 로톨담에서 본선 “코리안스타”호가 러시아인들한테 팔린 뒤 중국 조선족선원 4명은 또 다시 항공편으로 라스팔마스에 날아와 대기하면서 재 승선을 기다리게 되었으며 그 수십일간의 체류로 라스팔마스에 대해 더욱 고찰할 수가 있었다. 우선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수천명의 한국인들에 대한 삶의 실태였다. 라스팔마스에 도착하자 그 곳의 이탈만대리점에서는 우리의 식사를 호텔강촌의 한식관에 배치하였다. 하여 오래간만에 팔자가 늘어져 하루 세끼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시내구경이나 하며 놀아 대는데 하루는 호텔강촌의 이횡권 사장님이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뜻인즉 일당 3000페스타(30불)씩 줄테니 한식관 주방장 조수로 일할 수 없느냐는것, 이에 선박의 주방장출신인 내가 마다할 것이 아니었다. 헌데 육지에서의 그 일이 해상선박에서의 주방일보다 곱절 힘들고도 피곤할 줄이야. 그때 우리는 오전 9시가 좀 넘어 출근해서는 주방과 식당청소를 한 뒤 10시부터 정식 근무를 시작했는데 내가 맡은 분야는 마늘껍질을 발라내고 야채를 다듬고 고기를 썰어놓는 등 진짜 주방장이 요리를 하는데 있어서의 시중군이었다. 그러다가 일단 손님들이 들이닥치면 주방장의 요구에 따라 일하는 외에도 요리를 나르고 그릇을 씻기도 했으며 또한 그런 일도 없으면 하다 못해 유리를 닦거나 냉장고안의 얼음까기 등 일손을 놓을 사이가 없었다. 이렇게 자정까지 맴돌아치다 보면 온몸이 해나른해 나기가 일쑤였으며 노동시간도 보통 15시간 좌우씩 되었다. 이는 일이 없으면 트럼프나 화토치기를 하는 연변의 음식점실태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는바 그 돈이 진짜 뼈돈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그 곳의 주방장은 자기의 요리기술을 남한테 배워주기를 극력 꺼렸다. 이는 일종 경쟁사회에서의 자아생존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요리를 하노라면 알게 모르게 주방조리수한테만은 그 솜씨를 보여주기 마련인바 주방장은 나를 부려먹기 위해서도 칼질하는 법을 배워주고 고기, 야채와 양념은 각각 얼마씩이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으며 나 또한 그 것을 머리속에 기억하고는 후에 수첩에 적어두군 했다. 하여 나는 안속을 챙겨 각종 찌개, 불고기, 무침, 김치, 젓갈, 짠지 등을 만드는 법을 익혔으며 웬간한 한식에서의 한식요리 수십가지는 만들 수 있는 자신감도 갖게 됐다. 한편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한국인 거개가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그것이 아마 그들이 그 생소한 땅에 깊이 뿌리를 박을 수 있는 비결인듯 싶어졌다. 다음으로 라스팔마스 현지인들에 대한 인상이다. 19세기의 한시기 영국이 세계 각 지역에 식민지를 두고 있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워졌다면 스페인 역시 그의 버금으로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을 강점한 적이 있었기에 그 곳들에서 수탈한 재물로 본토를 살지게 했으며 그 밑천으로 스페인 사람들은 20세기 말엽에 들어서까지도 여유있는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 중 나라의 복리사업이 아주 잘돼가고 있다는 인상을 크게 주었다. 그 실례들로는 일하기 싫어 빈둥거리는 사람한테도 매달 실업수당을 발급했고 범죄자에 대한 사형제도가 진작 취소됐는가 하면 범죄자한테도 매주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휴가를 주어 집식구들과 모이게 했으며 일한만큼의 봉급까지 지불하는 상황이었다. 라스팔마스에서 우리는 한국으로부터 그 곳에 와서 식당일을 하는 박영애라고 부르는 아줌마를 알게 됐는데 그녀의 남편은 살인죄로 당지 교화소에 수용되여 있는터였다. 그 때 그녀는 남편이 맡아준 세집에 들어 일하러 다니면서 1주일에 한번씩 남편을 집에서 맞군 했는데 그것이 감동돼서인지 “스페인사람들은 한국사람보다 억수로 너그러요” 라고 자랑하군 했다. 사회가 이렇게 되자면 우선 국민들의 문명정도가 따라가야 하는 법이란 것이 가장 큰 인상이었다. 우리가 볼 때 그 곳 사람들은 진짜 문명스러웠는바 예하면 택시기사는 거리에서 근본 경적을 울리는 법이 없었고 일단 우리가 거리를 건너려 하면 택시를 세워놓고 먼저 건너가라는 손시늉부터 했으며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 역시 우리가 뭘 좀 물으면 열심히 가르쳐 줬는가 하면 그래도 안되면 꼭 한국인이나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붙여 주고야 지나가는 것이었다. 당지의 한국인들의 소개에 의하면 그들은 옛날부터 잘 살았기에 돈에 대한 집념이 옛날 못살던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처럼 강하지 않았으며, 인간이란 금전과 함께 인간자질 및 지식수준까지 함께 같은 차원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관념이라 했다. 그렇기에 이전에도 본선이 입항할 적마다 숱한 교회의 집사들 (한국인 집사 포함)이 찾아와 우리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도 돈은 물론 음료수 한모금 마시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외 현지인과는 달리 그 땅에 사는 외국인들 사이에는 경쟁이 심했다. 20여년 전에는 한국인들이 내노라 하고 우쭐거렸지만 그 때는 라스팔마스에 무리로 쓸어드는 인도인들한테 큰 도전을 받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머리가 좋고 부지런한 반면 노인과 아이들만은 장사에 내몰지 않았지만 당시의 인도인들은 이 두 부류까지 동원되는가 하면 여인들은 드러내놓고 매음을 했으며 또한 라스팔마스로 들어오는 한국물건은 모두 비싼 것들이어서 가격상 벌써 값싼 인도물건한테 우세를 빼앗기고 있었다. 이렇듯 경쟁과 도전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축복할만한 것은 라스팔마스란 이 낯선거리에도 “차이나 연변술집”이란 레스토랑이 선 그 것이었다. 이름그대로 이 식당의 마담은 연변 화룡의 여성이었는데 길림성대외경제합자회사 특파원의 신분으로 그 곳에서 일을 보는 한편 장사도 하고 있는 터였다. 이 술집의 출현으로 우리는 기쁘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했다. 기쁘다는 것은 이 식당을 발판으로 더 많은 연변의 조선족들이 그 곳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근심스럽다는 것은 그 치열한 경쟁속에서의 이 식당의 운명때문에서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부질없는 근심으로, 그 식당이 인젠 식당만이 아닌 종합서비스센터로 부상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5 라스팔마스에 체류하고 있으면서 나는 늘 그 생소한 땅에서 우리의 고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꿈마다 그리워 가닿게 되는 고향, 허나 고향은 그 곳 라스팔마스에 비해 확실히 뒤떨어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럼 경제적으로 따라잡기는 아직도 기나긴 시간이 수요되는 것, 하다면 목하 할 수 있는 것이란 사상해방과 관념갱신부터일 것이라 느껴졌다. 외국인과 우리와의 사상 및 관념차이, 하지만 그 것도 일조일석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난제인 것이다. 그 때 연변에서 갓 출국한 선원들한테서 들을라니 연변도 인젠 개방돼서 양고기산적집이나 다른 식당들에서도 아가씨동반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아가씨동반이라니 그 뜻을 알만하기도 했다. 참, 양고기산적 몇개나 요리를 몇접시 놓고 아가씨를 붙혀 주다니, 그것이 아가씨장사이지 어떻게 음식업이라 하겠는가. 따라서 어떤 곳에서는 아가씨맛을 먼저 본 뒤에야 음식맛을 본다고 하니 정직하고 점잖은 사람은 시름놓고 들어 갈만한 음식점이 없어지고 공연히 남의 오해를 받기가 일쑤인 것이다. 왜냐하면 라스팔마스의 싼따까따리나, 무에그랑데 등 거리는 정부에서 정해놓은 사창가로서 아가씨들이 공개적으로 남자들한테 감겨드는가 하면 정기적으로 종합검진을 하고 건강증이 있어야 손님을 접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 연변은 도대체 어디가 “매음굴”이고 누가 창녀인가를 도무지 가릴 수가 없겠으니 말이다. 한편 매음녀들한테서 생계유지같은 것은 아득한 옛말로 되어 매음치부로 되고 있어 점차 금전관념이 정조관념을 대체하는 바람이 일 수밖에 없으며 그 뒤에는 살인, 협잡 등 범죄가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다음으로 수입과 지출이 정비례되지 못하는 연변의 사회실정이다.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현지인들을 볼 때 그들은 확실히 돈이 많은 반면 한심한 깍쟁이들이었다. 우리가 한국사람을 서울깍쟁이라고들 했지만 외국인들에 비하면 한국사람은 그래도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근성이 조금은 남아있는 듯 했다. 술집같은 곳에 가면 한국인들은 그래도 불고기에 소주라도 마시지만 라스팔마스의 현지인들은 흔히 맥주 두 깡통에 땅콩 한접시면 2~3시간씩 앉아 면담하군 했는데 처음에 우리는 그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차츰 날이 감에 따라 우리는 그들의 작법에 대해 인정하게 되었는바 배불리 먹고 술주정하는 것보다 조용히 앉아 일처리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일어서는 것이 퍼그나 신사스러웠다. 하다면 그들한테 돈이 없어서일가? 그 것이 절대 아니었다. 이는 라스팔마스뿐 아니라 유럽인들 거개가 그런 것 같았다. 네덜란드의 로톨담 항구에서 있은 일이다. 그 때 본선은 꾸바에서 싣고 온 밀감을 하역하게 됐는데 게으른 흑인인부들이 말썽만 일으키면서 일을 하지 않아 작업이 계획보다 얼마동안 더 늦어질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러자 안달아난 선장은 인부들을 바꿔줄 것을 강력히 항구측에 요구했다. 허나 항구측에서는 인건비가 싼 흑인인부들을 바꾸기 아쉬워 본선 선장과 1항사를 식당에 청하는 것으로 아퀴를 지으려 했다. 그런데 만포식하고 돌아올 줄 알았던 두 분은 맥주 두깡통씩만 마셨다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주인측에서 맥주 한컵을 갖고 두 시간씩 끌어 대는 통에 아무리 손님측이라고 해도 그렇지 도무지 마구 마실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하다면 이런 일처리가 중국에서는 통할 수가 있을까? 당시 금방 출국한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동북아 금삼각지인 훈춘개방바람에 사람마다 통이 커져 이전에는 순두부집이나 양고기산적이면 고작이던 것이 인젠 중식이요, 양식이요 하면서 하루에 수백원 혹은 수천원씩 탕진한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나 손님한테 아가씨를 붙여줘야 제일 성의있는 것으로 인정받는다니?! 헌데 그러자면 매일같이 그만한 돈이 있어야 할텐데 그렇게 돈이 많을 수 있을까? 그럴리 만무하다. 그러면 남을 협잡하기 마련, 사업을 위해 협잡하면 몰라도 술먹고 즐기기 위해 인격을 팔면서 협잡이고 그 협잡도 못하면 또 외상으로 된단다. 그러면 그 외상 때문에 피해 다니고 얻어 터지며 싸울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라스팔마스의 현지인들한테는 술 때문에 외상이란 있을 수 없거니와 술 때문에, 외상때문에 싸우는 일은 더욱 있을 수 없었다. 라스팔마스에서 술먹고 주정하고 싸우는 건 거의 모두가 우리 동양인들이었는데 현지인들은 그들을 온역 피하 듯 피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현지인 택시기사를 칼로 찍어 죽인 한 연변선원이 법정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 피해자의 아내가 하는 말이 “저 동양야만인들한테서 무슨 보상금을 받겠는가. 다만 저 놈들더러 이 섬에 상육하지 못하게 하라”고 절규했다 한다. 그러니 동양인의 이미지가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라스팔마스를 떠날 때만 해도 그 곳에는 배에서 도망친 연변의 젊은이들이 10여명씩 줄쳐 다니며 거리를 휩쓰는 걸 볼 수 있었다. 일자리도 돈도 없는 그들이 매일 매일을 어떻게 보낼까? 그 뒤에는 분명 절도와 강탈같은 범죄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우리 연변인들은 어디가나 표가 난다”고 자랑같이 말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랑거리인가? 조선, 한국이나 러시아에 가서도 꼭 말썽과 골치거리를 만드는 연변사람들의 이미지, 뒤떨어진 사회에서의 저질교육과 낮은 인간자질 등 이 모든 것이 대양건너 대륙 지나 저 유럽땅에까지 루가 미치고 있으니 연변의 젊은이들여, 정신차릴 때가 왔는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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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4-03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5 )
    ■ 허길성 (전번기 계속) 강소성 무석에 있는 중국인민해방군 문화학교는 중등전문학교수준으로 중앙군위의 직속학교였다. 당시 해방군대오내에는 문맹이 거의 90% 정도로 급은 높으나 문화에 들어서는 까막눈인 군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부대간부내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가 바로 이 학교였고 우리가 바로 이 학교 제1기 학생으로 모집됐다. 내가 이 학교 인사처에 등록하고보니 그때 모집된 학원생은 도합 1000명 가량였다. 들을라니 그 1000명중 시험에 합격되여 선발된 학생은 얼마 안되고 거개가 추천받아서 온 “로병학생”들이였다. 그렇다고 할 때 그중 심양군구에서 시험에 합격되여 입학한 나의 문화수준은 전 학교의 앞자리를 차지할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개학하여 한동안 지나 서로가 익숙해지자 우리는 서로 무랍없이 말을 나누었고 때로는 악의없는 롱담도 꺼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홀연중 나는 어쩐 지 학생들의 많은 시선이 나한테로 집중되는것을 육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 1000명의 학생중 조선족은 유독 나 혼자뿐이라서 그런줄로만 생각했다. 헌데 딱히 그런것만은 아닌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학생들은 나의 젊음과 나의 모양새에 관심이 있는것이 확연하게 알렸다. 당시 많은 학생들은 늘 나를 “멋진 총각(帅小子)”이라고 놀려주고 있었으며 특히 녀학생들이 더했다. 아니 녀학원생들은 나를 놀려주는것이 아니라 은근한 관심을 두고있는것이 분명했다. 이는 그녀들의 눈길만 보아도 보아낼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반에서 6명밖에 안되는 녀학생중 “왕순자”란 이름을 발견했다. 아니 그래 한족들한테도 순자란 이름이 있단 말인가? “쑈왕, 쑈왕의 이름이 어쩐지 우리 조선족의 이름같구만.”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내가 이렇게 묻자 왕순자는 제법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전 워낙 조선인이였거든요. 아주 어릴 때 중국으로 건너왔어요. 헌데 왜 그걸 묻죠.” “그럼 어찌되여 성은 왕씨인거요?” 내가 캐묻자 순자는 갑자기 정색해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입을 여는 순자의 눈은 축축히 젖어나기 시작했다. 일찍 순자는 조선에서 태여났었다. 자신을 낳아준 자애로운 조선인부모도 있었다. 그리고 순자의 어린 시절은 매우 행복했었다. 세상에 부러운것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어린 시절 순자는 유치원에도 다녔고 또한 인민학교(중국의 소학교에 해당)에도 붙게 됐다. 헌데 그렇게 평화롭고 행복하던 나날은 1950년 6월 25일에 터진 남북의 내전으로 더 이상 지속될수가 없었다. 전쟁초기 조선인민군은 파죽지세로 전쟁발발 3일만에 한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한달여만에 한국군을 락동강 이남까지 밀어붙이면서 조선통일이 눈앞에 대두한듯 했으나 미국이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과 더불어 전세는 역전되였고 전쟁의 불길은 중조변경지대인 압록강변까지 다가오게 됐다. 뒤이어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했고 조선땅은 중조 군대와 인민을 일방으로 하고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16개국 군대가 참전한 이른바 유엔군을 일방으로 하는 격렬한 전쟁터로 되였고 조선반도는 세계 여러개 나라의 군대들한테 전쟁터를 제공하는 셈이 됐다. … 1951년의 어느날 조선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함흥시는 미공군 B-29 비행기의 융단식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짙은 연기가 솟구치고 커다란 건물들마저 땅에 주저앉으면서 화염속에 휩싸이였다. 미군의 대형폭격기들은 함흥시교의 작은 초가마을마저 지나쳐버리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불타는 집앞에서 6살되는 한 녀자애가 울면서 아빠와 엄마를 부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때마침 불끄러 달려온 한 지원군장군과 지원군전사들, 장군은 우선 우는 아이부터 껴안았다. 그러자 녀자애는 손을 들어 어느 한곳을 가르켰다. 지원군장군이 바라보니 거기에는 30대로 돼보이는 남녀가 피못속에 쓰러져있었다. 장군은 인차 옷을 벗어 녀자애한테 씌워주고는 기타 전사들과 함께 인차 불끄기에 달라붙었다. 불을 다 끄고 주둔지로 돌아가려던 장군은 발길을 옮기다 말고 그때까지도 울고있는 녀자애를 뒤돌아보았다. 어린애들 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였다. 장군은 다시 다가가 녀자애를 둘쳐업고는 군부대로 향했다… 그때 폭격에 부모를 잃고 울던 녀자애, 그가 바로 순자였다. 그뒤 장군은 부대병영에서 그 조선녀자애를 키우다가 조선정전이 조인되고 전쟁이 끝나 귀국하게 되자 김씨였던 김순자의 성을 아예 왕씨로 고쳤으며 정식으로 조선정부의 동의를 거쳐 순자를 입양해 중국으로 데려오기에까지 이르게 됐다. 순자의 양아버지가 된 지원군장군, 그 장군인즉 바로 1960년대초 상해경비사령부의 정위 겸 부사령원이였던 왕륙생(王六生)이였다. … 그 사연을 알게 된 뒤부터 나는 어쩐지 순자한테 동정이 갔으며 그녀가 여느 녀학생과는 어딘가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얼마 안돼 나와 왕순자는 자연스레 친한 사이로 됐다. 우리 둘중 누가 먼저 사귀자고 손을 내미는 등 이러한 거동은 없었다. 그저 둘 모두 스스로가 서로 상대방에 대해 호감을 가진것 같았다. 한편 20대 초반의 나한테 있어서 이성의 출현은 복잡한 모순으로 머리가 복잡하게 뒤엉키게 했다. 나는 동북 연변의 가난한 나의 가정을 생각, 가정을 위해서도 그렇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너무 일찍 이성과 접근하면 앞날을 망칠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였다. 꼭 열심히 공부하여 보다 출세한 뒤에야 이성과 앞날의 가정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한편 순자가 너무 좋았다. 가정환경도 우월했지만 그녀의 활달한 성격과 노상 실웃음이 담겨있는 그녀의 얼굴이 더욱 좋았다. 순자는 비교적 개방적이였다. 언젠가 얘기를 통해 상해사람들이 개방적이라는것은 알았지만 내 자신이 직접 느껴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였다. 나와 순자는 주로 주말(일요일)을 리용해 들놀이와 산책 등으로 데이트를 즐기군 했다. 당시 우리는 학교 학생인데다 군인이였던만큼 교정내의 련애는 학교제도상으로 금지였다. 하지만 학교지도부에서는 순자가 상해경비구의 왕륙생정위의 딸이라는것을 잘 아는지라 그저 너무 공개적으로 사귀면 기타 학생들한테 영향이 나쁘니 좀 자제라라고 일깨워주는것에 그쳤으며 우리의 관계를 두고 거의 묵인하는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순자는 교정내에서만은 나와 만나는것을 극력 자제했으며 설사 만나더라도 그냥 살짝 웃어주는것에 그치였다. 하지만 일단 교정을 벗어나기만 하면 꺼리낌없이 나와 팔을 끼군 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주 나의 얼굴을 건드리며 깔깔대기도 했으며 주위를 살피다가는 깜쪽같이 나의 얼굴에 뽀뽀해주기도 했다. 그렇 때마다 나는 와들짝 놀라면서 얼굴이 달아오르군 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그냥 싫은것은 아니였다. 2 나와 왕순자가 사귄지도 어느덧 2개월이 넘었다. 그 기간 나와 순자는 시간만 있으면 학교뒤의 공원을 찾아가거나 거리쇼핑으로 이른바 청춘의 랑만을 즐겼다. 특히 거리에 나서면 거의 모든 소비는 순자의 몫이였다. 학생이다보니 순자한테는 큰돈은 없었지만 상해경비구 왕정위같은 부모를 두었기에 용돈만은 거의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쓸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과일같은 먹거리나 식당에서의 간단한 식사 등은 그녀가 전담당하였으며 또한 나한테 양말이나 기타 생필품을 사줄 때도 많았다. 나는 그것이 부담스러웠다. 사내대장부로 생겨 늘 녀자의 신세를 지자고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순자한테 화장품이나 기타 생필품을 사서 선물하기에는 나의 주머니사정이 너무 여의치가 않았다. 당시 내가 받는 수당은 겨우 6원뿐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와 순자 사이 또한 그때까지 량가부모의 허락이 떨어진것도 아니여서 모든것이 확실해진것이 아니라 더욱 그랬다. 그러던 어느 주말이 되자 불현듯 순자는 일요일날 상해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놀러가자고 나한테 제의했다. 아버지인 왕정위가 나를 한번 만나보자고 한다는거였다. 그러니 순자가 진작 집에 가서 나에 대한 얘기를 했고 그녀의 아버지 왕륙생정위 역시 나를 사위감으로 한번 점검해 보려는것임에 분명했다. 순자의 제의에 나는 웬간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너무나도 준비가 없었던것이다. “아니, 이거 너무 이른거 아니야?!” “뭐가 이른가요. 남들 같으면 량가부모들 만남(상견례)의 장소가 마련될수도 있을법한데요.” “그래도…” 나는 뒤말을 흐렸다. 솔직히 말해 그 시각 순자네 집으로 가보고 싶지 않은것은 아니였다. 그리고 의지가지없는 고아인 순자를 친딸처럼 키워준 그녀의 부모님의 덕성에 깊이 감동을 받으면서 그분들을 만나보고 싶었던것도 사실이였다. 하지만 나는 반면에 자신이 순자부모님들의 눈에 들지 못할가봐 은근히 두려웠다. 그때까지 나 역시 혼사가 이뤄지자면 두 가정의 경제 및 사회적 지위 등이 엇비슷해야 된다고 부모님으로부터 많이 들어왔던터였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립장에처하고 말았다. 그날밤 잠자리에 들었으나 나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도무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담? 아무리 생각해도 묘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순자의 제의를 들어주자니 그녀 부모님의 눈에 들지 못할가봐 두려웠고 가지 않자고 하니 너무나도 적극적인 순자의 제의를 거절하기도 아쉬웠다. 특히 순자의 부모가 나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그녀가 받을 상처를 생각해 보아도 가슴이 아팠다. 결국 나는 지금 그녀의 집으로 가는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순간, 나는 이러한 경우엔 일을 뒤로 미루는것이 가장 림기응변적인 방법이란 생각을 고안해냈다. 그 림기응변적인 방법이란 바로 이튿날 거리에 나가 맛있는걸 사준다며 순자를 구슬려서는 상해에 있는 순자네 집방문을 후일로 미루는것이였다. 나는 오직 그 방법만이 순자를 설득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헌데 이튿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노크소리가 나더니 왕순자가 숙소에 들어섰다. 지난밤 내가 이리저리 고민하며 생각을 굴리다보니 새벽녁에야 잠에 들었고 아침에는 종전처럼 기상할수가 없었다. 하긴 일요일이였으니까 늦잠을 자도 별문제였다. 숙소에 들어선 순자는 야단을 쳤다. “아직도 기상하지 않았어요. 빨리빨리 일어나 출발차비를 해요.” 순자의 뒤로는 웬 젊은 군인이 뒤따랐다. 순자의 말에 따르면 그 군인은 왕륙생정위의 운전사였으며 왕정위가 우리를 데려오라고 찦차까지 보내왔다는것이였다. 아니, 이럴수가?! 왕정위가 찦차까지 보내오다니. 나는 차마 행사를 뒤로 미루자는 말을 입밖에 내번지지 못하고 순자에 뜻에 따를수밖에 없었다. 미구하여 우리가 차에 오르자 군용찦차는 “부르릉” 하고 시동이 걸리더니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운전수오빠, 이 총각 어때요. 잘 생겼나요? 이 총각은 동북에서 온 조선족이래요.” 차안에서 순자는 쉴새없이 종알댔다. 그럴 때마다 운전사는 “예 아가씨”하며 순자한테 깎듯이 례의를 갖췄다. 오전 10쯤 되자 나와 순자를 앉힌 찦차는 상해경비사령부에서 멀지 않은 왕륙생정위네 집에 도착했다. 왕정위네 집은 중국고대풍격이 독특한 단독주택이였다. 여러개의 방이 딸려있었고 그때 세월에는 흔치 않은 수세식 단독위생실도 있었다. 나를 보자 순자의 어머니 왕부인은 유난히 수다를 떨면서 이것저것 묻는것도 많았다. 왕부인은 귀족마느님같은 틀이 전혀 없었고 전형적인 현모량처임에 틀림없었다. 순자네가정은 내가 오기전에 그토록 우려했던것과는 거의 180도로 다른 분위기였다. 왕부인의 모습에서 순자를 입양딸로 대하는 티가 전혀 없었고 순자 또한 어머니의 목에 매달리며 키스세례를 퍼붓는 등으로 천진란만한것으로 보아 그들 모녀사이는 끔찍하기도 했다. 한참뒤 왕정위가 헛기침을 해서야 왕부인의 수다가 멈췄다. 왕정위 역시 굵직한 려송연을 몇모금 빨더니 천천히 나한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왕사령원은 나한테 부모는 뭘하는 사람들이고 형제는 몇명 있으며 공부는 어디까지 했느냐 등등으로 묻는것은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가정생활형편에 대해서만은 일절 묻지도 않았다. 나는 공손히 사실 그대로 대답을 올렸다. 일찍 세살때 아버지의 지게에 앉아 두만강을 건너 간도땅에 정착하던것부터 농민가정출신이며 가정이 가난하다는것에 이르기까지 빼놓지 않고 일일이 말씀올렸다. 나중에 왕정위는 “가정이 가난하다는건 그닥 중요하지 않는거지”하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미구하여 점심식사가 마련됐다. 료리는 왕정위의 전화 한통으로 몇그릇 인차 배달됐고 거기의 왕부인이 손수 몇가지 더 보충했다. 그러자 식탁은 제법 근사한 연회상처럼 푸짐했다. 왕정위는 집무방으로 들어가더니 서랍같은것을 열고는 술 한병을 들고나왔다. “나는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는다네. 주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실수할가봐여서이네. 그러니 자네도 군인생활을 하면서 술을 입데 대지 않는것이 좋을듯 싶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구. 마시자구. 그리고 오늘만은 취해도 괜찮아…” 내가 술병을 들고 왕정위한테 술을 따르려고 하자 왕정위는 손을 내젓더니 순자더로 술병을 쥐게 하고는 먼저 자기와 부인한테 그리고 나한테까지 차례로 따르게 했다. 술이 몇순배 돌자 왕정위는 순자의 래력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순자한테서 이미 들어서 알고있는 사연이였지만 왕정위한테서 직접 들으니 어딘가 감수가 달랐다. 그리고 낯모를 조선의 고아를 친딸처럼 키우고있는 왕정위 내외의 인격에 재차 탄복이 가면서 머리가 숙여졌다. 왕정위는 주량이 큰 모양이였다. 거의 10잔을 굽내고도 끄떡없었다. 아마 조선의 고아를 키워 이젠 사위감까지 만나게 되니 몹시 흥분된것 같았다. 술을 마시면서 왕정위는 사위감으로 진작 조선족청년을 선택할 생각을 했고 순자의 친부모를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취중진담이라고 왕정위의 말은 진담인것 같았다. 점심식사를 마치자 왕부인의 제의하에 모두가 시내쇼핑을 떠났다. 집을 나서면서 왕부인은 “평소 령감은 거의 마누라와 함께 쇼핑을 다니는 법이 없었는데 오늘 함께 나선걸 보면 몹시 기쁜 모양”이라고 또 수다를 늘여놓기 시작했다. … 상해거리는 번화했다. 거리마다 량측엔 고층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섰고 길에는 궤도전차가 달렸으며 알록달록한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마치 꽃물결이 흐르듯 움직이고 있었다. 실로 국내최대의 도시였고 “동방의 빠리”란 칭호를 가지기에 손색이 없는 도시였다. 백화점을 돌면서 왕부인은 특별히 내가 입을만한 양복 한세트와 흰와이셔츠, 양말 등을 사는것이였다. 내가 사절하려고 하자 순자가 툭 치면서 눈을 깜빡하는것이였다. 어머니가 마음이 내켜서 사는것이니 사절하는것도 례의가 아니라는 뜻이였다. 왕부인은 양복을 내밀며 나더로 입어보라고 했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입어보는 양복이였다. 내가 양복을 입고 거울앞에 서자 나 자신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거울안에는 아주 훤칠한 총각이 름름한 차림으로 서있는게 아닌가?! 그날밤 왕정위네 내외 그리고 나와 순자는 상해 국제호텔의 무도장으로 갔다. 당시 나는 무관인 왕륙삼정위가 군사통솔력같은것은 출중해도 음악이나 댄스같은 예술방면에는 문외한인줄 알았었다. 헌데 나의 이런 생각은 편견이고 착각이였다. 낮에 집에 있을 때도 왕정위는 흥이 날 때마다 고전경극의 곡조 한마디씩 흥얼거리기도 했고 저녁에 무도장에 가서 나의 춤실력을 보자고 제의한것도 왕륙삼정위였다. 상해 국제호텔의 무도장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오색령롱한 네온싸인이 반짝이는가운데 무대우에서 미모의 녀가수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청춘원무곡” 등 가요를 불렀고 무대아래에서는 양복을 받쳐입은 신사들과 치포나 원피스를 착복한 녀사들이 서로를 부둥켜안은채 빙빙 돌아갔으며 그런 남녀의 얼굴들은 모두 랑만에 찬 모습들이였다. 처음에 나는 춤판에 끼여들지 않고 한쪽켠에 조용히 앉아있었고 순자도 나의 곁에 붙어앉아 다른 남녀들의 춤을 구경만 했다. “너희들도 추며 한바퀴 돌지그래?” 왕부인이 한마디 했다. 그러자 순자는 기다렸다는듯이 일어나서는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기실 나는 무도를 모르는것이 아니였다. 당시 국내의 많은 대학교와 중등전문학교에서도 무도를 보급하고 있는 상황이라 우리 문화학교도 례외가 아니였다. 또한 나는 학교에서 무도같은 경연이 있을 때마다 춤을 가장 잘 추는 학생에 속하군 했다. 헌데 그렇듯 화려하고 눈부신 무도장에는 처음 들어와보는지라 한동안 어리둥절하기도 했거니와 그런 장소에서 잘난체 하고 싶지도 않았다. 순자의 청에 나는 마지 못해 일어나는척 하며 상대방(순자)한테 머리를 숙여 례의를 표하고는 그녀와 마주섰다. 정작 춤판에 끼여들고 보니 흥겨운 음악에 어느 정도 신났다. 학교에서 출 때에 비해서는 곱절 흥이 났다. 우리가 춤판에 나서자 갑자기 많은 춤군들의 시선이 삽시에 나와 순자한테 쏠리였다. 그도그럴것이 춤군들은 대부분이 중로년들이고 젊은 남녀는 유독 순자와 나뿐이였으니말이다. 나와 순자가 홀안을 빙빙 돌려 함께 탱고를 추는것을 보고 기타 춤군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곳 무도장에는 처음 온 총각같은데 멀쑥하게 잘 생겼군그래.” “저 상해경비사령부 왕정위의 사위감으로 보이는데 아마 대학생인 모양이지?” 남들이 부러운 눈길로 나와 순자가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신분을 추측하자 왕부인은 “내딸이 사귀고있는 군인이래요. 그리고 동북에서 온 조선인이예요” 라고 하며 자랑했다. 그 시기, 상해를 비롯한 내지의 많은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우리 중국조선족을 조선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때를 계기로 나와 순자는 상해를 갈 때마다 그녀의 부모와 함께 가끔씩 그곳의 무도장을 찾군 했다. 그리고 시간의 지속됨에 따라 왕륙삼정위네 내외간과 가깝게 보내는 몇몇 무도장동료들과도 비교적 익숙한 사이가 됐다… 3 그날 순자네 집에 다녀온 뒤부터 우리의 관계는 급진전을 가져왔다. 따라서 내가 상해에 있는 왕륙삼정위네 집으로 가는 차수도 무척 잦아졌다. 내가 갈적마다 왕정위네 가정에서는 맛갈스런 음식을 식탁에 올렸고 또 그럴 때마다 순자는 제일 맛있는 료리를 집어서는 부친 먼저 항상 나의 입에 넣어주군 했다. 그러면 왕정위 또한 “이 계집애야, 아비보다 이 친구가 먼저냐”하며 악의 없는 롱작을 걸기도 했다. 순자의 아버지 왕륙삼정위는 나한테 대단히 흡족한 모습이였고 가끔씩 나를 “남자애들이 외지에서 생활하자면 필요한것이 많을것”이라며 부인한테 나를 많이 관심해줄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당시 나는 경제적으로도 왕정위네 가정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그 당시 내가 학교에서 받는 수당은 인민페로 고작 6원이였다. 그래서 순자는 흔히 나와 롱작을 걸 때마다 “류쾌이챈(六块钱)”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고 나중에는 아예 그 “류콰이챈”이 나의 대명사로 되기도 했다. 그러나 “류콰이챈”인 내가 왕부인의 관심으로 양복외에도 와이셔츠와 고급내복 등이 여러벌씩 갖추었고 보고 싶은 책도 사볼수 있었다. 한편 왕륙삼정위는 나와 순자가 졸업하면 상해경비구의 문화교원으로 배치할 타산까지 하고있었다. 그때 당시 왕정위가 나서면 나와 순자를 상해경비구의 문화교원으로 배치하는건 그야말로 식은죽먹기나 다름없었다. 관건은 내가 왕륙삼정위의 사위로 되는 돼야 하는것, 나로 놓고 보면 왕륙삼정위의 사위로 되는것이야말로 인생성공을 가져오는 지름길이라는것이 당시 나의 생각이였다. 아니, 왕륙삼정위란 사회배경보다도 나한테는 천진하고 거짓이 없는 순자가 더욱 좋은것도 사실이였다. 나와 순자의 관계가 이 정도로 진척되자 나는 부모님한테 모든것을 털어놓을 때가 되였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봉건관념이 비교적 농후한 부모님께서 순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여줄수 있을가? 순간, 나의 뇌리속에는 불현듯 당시 연변일보사에서 근무하는 길룡형님이 떠올랐다. 길룡형님을 놓고말하면 지난 세기 50년대초 룡정고중을 졸업하자 지원군에 탄원했었다. 1951년말 길룡형님은 지원군 모부의 비서 겸 통영으로 선발되여 조선으로 나가던중안동(지금의 단동)까지 갔다가 갑자기 중국에 있는 유일한 조선문신문사인 연변일보사에서 길룡형님같은 인재를 더욱 수요한다기에 조직의 수요에 의해 다시 귀로에 올라 연변일보사 편집기자로 근무하게 됐던것이다. 길룡형님은 그때만 해도 우리 형제중 공부를 가장 많이 한사람으로서 현대사물을 가장 잘 접수할수 있는 지식인이였다. 하여 나는 우선 길룡형님한테 편지로 알려 내가 한족(기실은 조선족이였음에도)인 왕순자와 사귀는것에 대해 부모님께 해석하게 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생각되자 나는 지체없이 필을 들어 길룡형님한테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형님: 안녕하십니까? 막내동생 길성입니다. 룡정에 계시는 부모님께서는 별고없이 무사하겠지요? 그리고 형님네 가정과 기타 형제들 가정도 별일 없을줄로 믿습니다. 저는 현재 건강한 몸으로 중앙군위 문화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정서상에서도 아주 유쾌히 잘 보내고 있답니다. 고향에 비해 이곳의 다른 점이라면 이곳은 매우 무덥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금일 제가 펜을 든것은 다름이 아니라 최근들어 저의 생활에 변화가 생겨서입니다. 변화란 별것이 아니라 저한테녀자친구 한명이 생겨서입니다. 녀자친구가 생겼다는건 아주 정상적인 얘기지만 그 녀자친구가 한족이라는것입니다. 그러니 현대문명을 가장 잘 접수하는 형님께서 부모님을 잘 설복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녀자친구 또한 진짜 한족은 아니랍니다. 원래 조선에서 태여났는데 전쟁때 폭격에 조선인부모님을 잃은 고아였으며 당시 한 지원군장군이 그녀를 데려다 키우다가 귀국시 그를 중국으로 입양했던거랍니다. 그 녀자친구의 이름은 원래 김순자였는데 지금은 왕순자로 고친것뿐입니다. 그러니 그 녀자친구의 진짜 혈통은 우리와 같은 민족임에 틀림없습니다. 형님, 부모님께서 제발 오해하지 말도록 부모님을 잘 설복해 주길만을 부탁하는바입니다. 만약 부모님께서 오해하지 않고 허락만 한다면 오는 겨울방학기간에 그 녀자친구와 함께 고향나들이를 할가 하기도 합니다. 그때가면 부모님 그리고 형님을 포함한 형제들도 그 녀자친구에 대해 보다 료해할것이고 또한 맘에 들어도 하실겁니다. 그럼 오늘 간단히 이만큼 적어보내면서 아무튼 고향에 계시는 늙으신 부모님과 여러 형제들의 건강할것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무석에서 동생 길성 올림 1961년 8월 ×일 내가 편지를 부친 뒤 약 20일이 지나 과연 둘째형님한테서 답장이 왔다. 형님은 편지에서 부모님은 내가 선택한 일은 일절 시름을 놓을수 있다고 말씀하셨을뿐만 아니라 아주 기뻐들 하고 있으며 또한 몹시 궁금해하시면서 녀자친구의 사진을 보고 싶어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내가 근심하고 우려했던 일들은 모두 순조롭게 잘 풀린 셈이였다. 우선 왕순자의 부모님께서 나를 못마땅해할가봐 우려했던것이 상상외로 그분들은 아주 대공무사한 분들이였고 순자가 한족집에서 자란 녀자애라고 꺼릴가봐 우려했었는데 생각밖으로 나의 부모 역시 나를 믿어주어 량가어른들한테 한없이 고맙기만 했다. 나는 인차 순자를 찾아가 집에서 온 편지를 읽어주고는 부모님한테 부쳐줄 사진을 함께 찍자고 했다. 이에 순자 역시 기뻐하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느 일요일을 택하여 사진 여러장을 찍었다. 시내의 사진관에서 찍기도 하고 우리가 늘 찾아가군 하던 학교뒤 공원의 아름드리 홰나무밑에서도 찍었다. 그러고는 이 아름드리 홰나무가 우리의 사랑을 견증하는 나무로 돼달라고 몇번이고 기원했다. (연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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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2
  • 신비한 세계 대백과 (2) 우주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가?
    우주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가? 망망한 우주는 끝없이 펼쳐져 사람들한테 무한한 가상을 하게 한다. 처음에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이라고 여겼다가 후에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인정하였다. 근대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류의 시야도 갈수록 넓어졌으며 우주의 모양도 복잡해졌다. 과학가 아인슈타인은 우주는 둥근 “구”라고 인정하였다. 후에 부분적 과학가들은 계산을 통하여 우주는 하나의 “기점”에서 분출된 뒤 부단히 팽창하여 극한에 도달하였다가 후에 다시 점차 축소되면서 “기점”으로 돌아왔으며 다시 분출되었다가 축소되는 맥동형의 우주라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또 어떤 과학자들은 자연계물질의 기본운동방식은 모두 곡선원환 운동을 하며 이런 나선운동형태의 우주모형이 가능하게 더욱 진실한 우주결구를 체현할 것이라고 인정하기도 하였다. 돌고도는 은하계 은하계는 적어도 2000억개의 항성으로 조성된 항성계통으로서 중간이 두텁고 옆변이 엷은 평반형태(平盘状态)이며 중앙의 핵구가 은하계의 핵이고 원판부분이 은판으로 외곽은 더욱 희소한 성계물질로 되어 있는데 이를 은운(银晕)이라고 한다. 은판의 직경은 약 8만광년이 되고 중앙의 두께는 1만광년이 되며 옆변의 두께는 3000-6000광년이 된다. 이 거대한 은하계는 천천히 움직이는데 항성과 기타 별들이 운집된 지역에 나선식 밀집구가 형성, 우리는 이를 선비(旋臂)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와 은핵은 약 2만 5000광년전 한갈래 선비의 거리로 예측되고 있다. 또한 태양계는 매초 220킬로미터의 속도로 은핵주위를 돌고 있는데 한바퀴를 도는데 약 2.5억년이란 시간이 소요된다. 현재 인류는 고분변율의 망원경을 통해 은하계 밖의 성계를 볼 수 있지만 은하계의 구체적 모양은 볼 수가 없다. 이는 우리 자신이 은하계 속에 있으며 또한 수많은 항성들이 인류의 시선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은하계의 전경을 보자면 반드시 은하계 밖으로 나가야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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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2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 (2) 밀란 대성당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이탈리아의 밀란 대성당은 유럽의 중세기 중 가장 큰 천주교 성당으로 길이가 168미터이고 너비가 59미터이며 웅위로운 대청은 4개 줄의 기둥으로 분류, 4만명이 들어가 종교활동을 거행할 수도 있는 곳이다. 이 성당은 기나긴 수건사를 갖고 있는데 처음에 1386년에 착공하였다가 500년 후에야 비로서 준공되었다. 이 성당은 전부 벽돌로 지어졌으며 겉면에 백색대리석을 붙여 “대리석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역사가 유구한 밀란 대성당은 “밀란의 상징”이란 명칭을 갖고 있으며 “밀란의 정신중구”로 불리기도 한다. 수림같은 뾰족탑 밀란 대성당의 특점의 하나는 그 뾰족한 수림을 이루는 특수한 외형이다. 성당외부의 궁형문, 벽기둥, 창문 등 곳곳에 모두 뾰족탑이 있는데 도합 135개에 달한다. 그리고 매개 뾰족탑에는 모두 신의 조각상이 있다. 이런 조각들은 마치 수호신마냥 불철주야로 이 신성한 대성당을 지켜주고 있다. 예리한 탑들이 밀집되어 마치 상공을 무찌르는듯한 정경은 사람들한테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겨준다. 천자백태의 조각상 수림을 이루는 뾰족탑외 밀란 대성당에는 또 다른 특별한 곳이 있다. 그것인즉 수많은 장식조각들이다. 즉 성당 지붕의 뾰족탑마다에 135개의 성인과 성녀의 조각상이 있다. 그리고 성당내의 벽, 기둥, 복도, 감실 등에는 도합 4400개의 백옥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그중 가장 높은 곳에 모셔져 있는 성모마리아의 도금조각상은 높이가 4.2미터로서 지면에서부터의 높이는 무려 103미터에 달한다. 이런 천자백태의 조각상들은 이 성당으로 하여금 더욱 화려하고도 장중하게 하고 있다. <밀란 대성당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이탈리아, 지점: 밀란시 의의: 밀란의 정신중구(中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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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2
  • 신비한 세계 대백과 (1) 우주기원의 비밀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매번 맑은 날의 밤 친구가 하늘을 쳐다 보면 흔히 “우리의 이 세계는 어디에서 왔을가?”하고 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 이는 자고로 인류가 가장 흥취를 갖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일종 “폭발이론”으로 보면 우주의 기원은 그 공간이거나 시간적으로 모두 그 어떠한 척도가 없지만 우주의 모든 물질은 그 “기점”이란 것을 갖고 있는것만은 사실이다. 적어도 약 120- 150억년전에 그 “기점”이 바로 한차례의 대폭발 중 뿜겨져 나온 대량의 물질입자와 에너지를 갖고 있으며 바로 그 것으로 우주가 탄생한것이다. 그리고 그 높은 성능을 가진 입자들이 서로 결합되어 원자 및 분자로 된 뒤 다시 서로 흡인하고 융합되면서 점점 더 큰 덩어리가 되어 점차 성계를 이루었고 항성과 행성 등을 만들기도 했다. 후에 또한 지구란 성체에서 우주를 탐측하는 인류도 조용히 탄생한것이다. 1922년 구소련의 과학자 뽈드만은 수학적 분석을 통하여 우주의 기원을 “대폭발”이란 가설을 제기하였다. 그 뒤 많은 과학가들은 관측, 계산, 실험 등을 통하여 우주에서는 진짜 “대폭발”이 발생했었다는것을 증명했다. 2006년의 노벨물리상을 받은 미국의 물리학자 요한과 조지 스무터는 일찍 “우주의 대폭발은 절대 신화가 아닌 진짜었다”고 세계에 선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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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31
  • [문명기적 시리즈] 세계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들 ( 1 )
    스코트랜드의 수부 에든버러성은 역사가 유구하고 풍경이 아름다워 “북방의 아테네”란 칭호를 받고 있다. 웅장한 에든버러성은 곧바로 애든버러시 중심가의 산정에 위치, 에든버러성은 독특한 풍격과 수많은 역사고적과 더부러 유구한 문화전통을 갖고 있으며 유럽문화의 분위기가 가장 농후한 성의 하나로 되고 있다. 화산이 폭발한 산정에 우뚝 솟은 에든버러성은 1000년의 역사를 겪어 내려오면서 스코트랜드의 만고풍상을 견증하고 있으며 현재 “스코트랜드의 정신적인 성”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게 되고 있다. 높이 우뚝 솟은 막리트성당 1130년 국왕 대위 1세가 이 성당을 세웠다. 지금 이 성당은 에드버러성의 건축군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내려온 12세기의 건축물로 되고 있다. 성당은 벽체의 한쪽이 채색유리로 되여 있으며 거기에는 대위 1세의 어머니 마르그레테(玛格丽特)의 화상이 그려져 있다. 현재 이 건축물은 여전히 스코트랜드 사람들이 혼례와 기타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옛성을 보위한 영웅조각들 에드버러성 정문의 좌우 양측에는 2개의 스코트랜드 민족영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좌측은 윌리엄 월레스(威廉 . 华莱士)의 조각상이다. 일찍 700여 년전 그는 스코트랜드의 독립을 위하여 군대를 인솔하여 잉글랜드와 싸웠으며 여러번 혁혁한 공로를 세운 영웅이다. 다음 좌측은 스코트랜드의 재건영웅 블루스, 역사에서 나오는 “로버트 1세”의 조각상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국가를 재정비하여 여러 차례의 전역중 강적을 물리치면서 스코트랜드의 독립을 수호하였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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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31
  • [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4 )
    ■ 허길성 (전번기 계속)청산으로 갈 때 우리는 련대가 왜 그곳으로 가는지? 가서는 뭘하는지 등에 대해 역시 알수가 없었다. 허국선련장 또한 그저 상급의 지시에 따를뿐이지 상세한것은 알지 못하는것 같았다. 당시 전사들 사이에서는 변경지구의 병력증강을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었고 농업생산을 지원하러 간다는 말도 있었지만 상급에서 왜 우리 련대더러 청산으로 가게 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알수가 없었다. 헌데 우리 련이 농업생산을 지원하러 갈것이란 말을 한 전사의 추측이 맞아떨어지기라도 한듯 우리가 청산에 도착하자 그곳의 농민들이 구호를 웨치고 북을 치면서 열정적으로 맞아주는것이였다. 그리고 붉은 천으로 된 프랑카드에는 “농업생산을 지원하러 온 해방군동무들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글발까지 새겨져있었다. 화룡 청산에 도착한 련대는 이튿날부터 농업생산지원에 나섰다 아니나다를가 우리 련대는 청산으로 가자바람으로 이튿날부터 농업생산로동에 투입됐다. 그때 마침 농민들이 밭갈이를 시작했는데 소가 없자 우리 전사들이 농기구를 끌면서 밭을 갈아번지였다. 당시 한심한 두메산골인 청산은 전형적인 빈곤마을이였다. 우에서 언급하다싶이 부림소가 적어 밭을 인력으로 갈아번지는 그런 한심한 상황이였고 농민들이 먹는 주식도 일색으로 수수밥이나 조밥 그리고 옥수수죽 등 잡곡이였다. 농민들의 소개에 따르면 이밥은 귀한 손님이 오거나 음력설기간에 한두끼씩 먹어볼뿐이라고 했다. 촌민들의 차림새도 도시는 물론 도시와 린접된 농촌마을의 사람들과 비해도 많이 람루했다. 우리가 갈 때는 이미 4월 중순이 지나 날씨가 화창해지기 시작했지만 그때까지도 너덜너덜한 솜옷을 입은 주민들이 많았으며 녀인들은 흔히 크고 훌렁한 옷을 입은이들이 태반이였다. 입을만한 자기의 옷이 마땅치가 않아 남편의 옷을 입고 다니는것이 분명했다. 풋돈깨나 생기면 우선 남정네와 학교에 다니는 자식부터 챙겨주다보니 항상 축에 빠지는것이 아낙네들이였다. 그리고 5월달에 접어드니 아예 맨발로 다니는 애들도 많았으며 그런 애들은 맨발로 버들방천이고 산이고 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처로 쏘다녀도 발이 상하지 않는것이 이상한 일이였다. 하지만 청산 역시 사람사는 곳이라 인정미가 돌았다. 아니 청산마을의 인정미는 버덕마을보다는 한결 더 후했으며 차고넘치였다. 마을사람들은 가끔씩 메돼지나 노루같은것을 잡으면 집에서 혼자 먹는 법이라고는 없었다. 그들은 야생동물을 잡을 때마다 그런것들을 삶아놓고는 동네잔치를 벌이기도 하고 한편 우리한테까지 맛보라고 날라오기도 했다. 그외 우리한테 하다 못해 김치나 된장을 가져오는 가정들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조선족임을 알게 되자 농민들은 나를 각별히 좋아했다. 농민들은 집에 색다른 음식같은것이나 있으면 곧잘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3대규률과 8항주의” 때문에 번마다 그들의 성의를 사절하군 했다. 그러던중 한번은 마을에서 “요지부동”이라고 불리우는 황령감이 두부를 앗아놓고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아무리 사절해도 막무가내였다. 내가 “인민의 군대는 인민의 바늘 하나 실 한오리라도 다치지 말아야 한다”는 3대규률과 8항주의의 한구절을 알려주면서 사절했으나 로인은 오히려 “인민의 군대가 인민과 멀리 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하면서 말그대로 “요지부동”이였다. 나중에 로인은 련장을 찾아가 “귀한 손님을 집에 모시는것은 우리 조선민족의 미풍량속”이라고 하면서 화를 내기까지 했다. 그러자 련장마저 아주 두손을 들면서 마지 못해 나더러 황령감네 집에 가서 한끼 식사하고오라고 하면서 돈 2원을 내놓는것이였다. 뜻인즉 백성의 집에 가서 밥술을 들되 값을 꼭 치르라는것이였다. 이에 나는 혼자서는 절대 안간다고 잡아뗐다. 그러자 련장 역시 별수 없이 나와 동행하는수밖에 없었다. 그날 “요지부동”인 황령감네 집에 가서 두부를 먹으면서 볼라니 황령감한테는 당장 머리를 얹어야 할 딸이 둘씩이나 있었다. 황령감은 술 한잔 얼근하게 되자 점차 말이 많아졌다. “젊은이 들라구, 사내대장부란 술 몇잔씩은 해야 사내답다구.” … “자, 젊은이 몇살인가? 정혼은 했는가?” 한편 황령감의 마누라 심씨는 술상쪽으로 자꾸 다가앉으면서 나한테 자꾸 뭔가를 캐묻는것이였다. 그럴 때마다 황령감은 “아낙네가 뭘 안다구 남정네들의 일에 자꾸 끼여들어. 저리 썩 비키지 못할가!”라고 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그때뿐이지 몇분이 안지나 심씨는 재차 술상쪽으로 다가앉는것을 수없이 반복했다. 련장은 조선말을 알아듣지 못해 한마디도 말참견을 하지 않았으나 분위기를 통해 뭔가를 알아차렸는지 그저 나와 황령감을 번갈아보며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는 황령감이 술잔을 쳐들 때마다 따라 마실뿐이였다. 음식을 해놓고 나를 청한건 황령감뿐이 아니였다. 그후에 볼라니 음식을 해놓고 나를 청하는 가정을 보면 거개가 시집을 가야 할 딸이 1 – 2명씩 있는 가정들이였다. 그외 마을의 처녀들도 “책을 빌려보자”는둥, “한어말노래를 배워달라”는둥 하면서 각종 구실을 대가며 병영으로 찾아오군 했다. 그녀들은 그냥 빈손으로 오는것이 아니였다. 집에서 재배하는 살구나 앵두같은것을 따오기도 했고 어떤 처녀들은 담배쌈지 혹은 하다못해 손수건이라도 선물로 들고오군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도 이성세계에 대해 나는 아주 까막눈이나 다름이 없었다. 가령 그때 이성에 대해 어섯눈이라도 떴더라면 과연 후에 내가 어떻게 되였을가? 6 련대가 청산으로 들어간지도 몇개월이 잘되게 흘러갔다. 그동안 우리는 농민들을 도와 밭김을 매고 여름철의 소추수도 하면서 비가 내리는 날외엔 거의 휴식하는 날이 없이 팽이처럼 돌아쳤다. 밭일이 없을 때면 하다 못해 마을길을 닦거나 탈곡장을 수건하는 등으로 오히려 일을 찾아하군 했다. 어느덧 가을이 왔다. 황금의 가을, 누렇게 익어가는 조밭과 옥수수밭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설레이였다. 거기에 우리의 땀방울과 정성이 스며있었으니 말이다. 헌데 가을이 되여 알알이 염근 곡식들을 수확할 무렵이 되자 난데 없는 “불청객”들이 농민들이 애써 지어놓은 밭들에 기여들어 “토벌”을 감행할줄이야. 바로 메돼지들이였다. 그것들이 특히 옥수수밭에 기여든다 하면 하루밤새에 밭 전체를 결단내기가 쉽상이였다. 그러자 농민들은 총을 가진 군인들이 메돼지들을 잡거나 쫓아주었으면 했다. “간밤에도 옥수수밭에 메돼지들이 기여들었수. 어떡헌다우? 애써 지어놓은 농사를 그눔들때문에 망쳐먹게 됐구려.” “나한테 총 한자루만 있어두 그눔들이 얼씬하지 못하게 혼빵내주련만 쯧쯧…” 이는 분명 우리 군인들 특히는 조선족군인인 나더러 들으라는 얘기였다. 결국 나는 농민들의 리익을 위하여 메돼지나 곰을 잡자고 련장한테 청시하게 됐고 허국선련장 또한 진작 그 타산을 하고있었다. 련장이 사단본부에 청시하여 얼마 뒤 과연 사단본부로부터 그 메돼지들을 잡기 위해 총기를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때로부터 우리는 밤마다 농민들의 밭을 순회하거나 간혹씩 밭에 포진하고 있으면서 곡식을 지켰다. 그러면서 우리는 될수록 메돼지무리를 쫓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한두마리씩 잡아서는 농민들과 함께 근사한 생활개선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였다. 그날따라 하늘공중에 달이 떠있었기에 그닥 어둠지 않았으며 옥수수밭속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기 알맞춤했다. 그날밤 우리는 산비탈에 있는 옥수수밭에 포진하고 있으면서 메돼지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이 밭은 전날밤에도 메돼지들한테 “소탕”당한 밭이였다. 자정이 되였을가 말가 할 때였다. 문득 옥수수밭에서 바스락바스락 하는 소리가 가끔씩 났다. 야밤중이 아니고 낮이라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소리였다. 메돼지가 내려오면 무리를 지어다니기에 그 소리가 요란했으나 가끔씩 나는 소리이고 또 그 소리가 요란하지 않은것으로 보아 메돼지 무리는 아닌듯 싶었다. 옥수수밭머리에 있는 한 웅덩이에 엎드린 나는 숨소리조차 죽이고 앞을 주시했다. 아니나다를가 미구하여 옥수수밭속으로부터 한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 덩치가 몹시 컸다. 대략 200킬로그람 정도는 될것 같았다. 그리고 한마리인것으로 보면 메돼지는 같지 않았고 움직이는 모양을 보아서는 어쩐지 곰이 같았다. 덩치가 큰 그 검은 물체는 옥수수밭에서 뚱기적거리며 나오더니 웬 냄새를 맡았는지 문득 멈춰서더니 몸을 일으키면서 주위를 살피는것이였다. 그 거동을 보아 곰이 분명했다. 바로 이때라고 판단한 나는 지체할세라 침착하게 목표물을 겨냥하고는 한방 갈겼다. 곰은 몸을 움칫했다. 총알에 맞은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치명적이 아닌것 같았다. 이어 나는 재차 한방 갈기려고 방아쇠를 당겼다. 헌데 이번에는 불발탄이였다. 곰은 나를 인차 발견했고 나한테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나는 재빨리 장탄하고는 세번째 탄알을 날렸다. 아뿔사 이번에는 헛방으로 곰을 명중하지 못했다. 뒤이어 곰은 나한테 덮쳐들었다. 순간 나는 잽싸게 피했으나 웅덩이안이라 곰을 뿌리치지 못했다. 나는 총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전우들을 보고는 곰한테 깔렸으며 그뒤의 일은 생각나지 않았다…… 얼마후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이였으며 나의 얼굴과 오른쪽팔에는 붕대로 수없이 감겨져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순간 심한 동통이 느껴졌다. “그대로 누워있어. 이만해도 다행이야. 하마트면 큰일날번 했다구.” 허국선련장이였다. 련장의 말에 따르면 나의 첫발의 총소리가 나자 다른 곳에서 포진하고있던 전우들이 달려왔고 전우들은 자동보총으로 나를 깔고앉은 곰한테 련발 사격을 들이대 곰을 잡았다는것이였다. 나의 상처는 그닥 중하지 않았다. 곰한테 여러곳이 핧키고 긁히였지만 외상만 생겼을뿐 뼈가 상하거나 팔다리가 부러진건 아니였다. 7 병원에서 며칠간 치료를 받자 나의 상처는 재빨리 아물기 시작했다. 외상치료라 매일 소염제를 바르고 일정하게 처치를 하니 상처자국에는 새살이 돋아나기도 했다. 10여일이 되자 병원생활에 갑갑해진 나는 며칠만 더 입원해있으면서 완쾌될 때까지 치료하라는 의사의 만류도 마다하고 기어코 퇴원하겠다고 했다. 내가 퇴원하여 련대로 귀환하자 련장은 “너 정신이 있느냐”며 한바탕 훈계하더니 이번에는 한달간의 휴가를 줄테니까 룡정에 있는 집에 가서 푹 휴식하라는것이였다. 집으로 가게 된다고 하자 나는 뛸듯이 기뻤다. 어린애도 아니고 20대가 된 성인이 되였건만 집이란 항상 그립고 가고싶은 곳이였다. 집으로 보내준다고 하니 왜 그렇게도 기쁘고 좋았던지. 나는 “알겠습니다” 라고 하며 차렷 자세로 련장한테 거수경례를 붙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부모님이 반겨준건 두말할것 없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부모님한테 곰한테 다쳤다는 실말을 하지 않았다. 상처는 그냥 훈련하다가 다친것이라고 둘러댔다. 집은 그냥 옛모습 그대로였다. 하나도 변한것이 없었다. 집안이 크게 변했다면 나는 다소 생소할수도 있었겠지만 몇년전까지 나의 손때가 묻어있던 그대로 있으니 어딘가 더 정이 갔고 좋기만 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나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님한테는 례의를 갖춰 깍듯이 대했으며 내가 요행 집으로 왔다고 일을 시키지 않았으나 가끔씩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거들어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집에서 있자니 어딘가 갑갑증이 났다. 왜서였을가? 아마도 오래동안 부대생활을 하며 긴장하게 보내여 그렇게 된것 같았다. 또한 집에 온지도 며칠 안되여 이번에는 어쩐지 부대생활이 그리워졌고 전우들도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내가 많이 어른스러워졌다고 대견해했고 어머니는 나한테 맛갈스러운 음식을 해주느라 닭을 잡기도 하고 하루 건너 떡방아를 찧군 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부대에서 전보가 날아왔다. “중대사연, 부대 속귀!” 한달간 휴가를 준다더니 왜 며칠도 안되여 부대에 속히 귀환하라는걸가? 부대가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걸가 아니면 부대가 또 긴급전쟁준비상태에 진입하는걸가? 나보다 더 초조하고 불안해하는건 부모님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보문을 들고있는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는 내외간이 서로 무슨 말을 할듯 하다가는 다시 입을 봉하는것이였다. “별일 없을겁니다. 부대가 다른곳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새로운 임무가 내려왔으나 그렇겠지요 뭐. 부대란 항상 그렇답니다.” 내가 이렇게 안심시켰으나 불안해하는 부모님의 얼굴모습은 여전했다. 그리고 내가 떠나자 부모님은 큰길가까지 바래주며 오래동안 손을 저었다. 그 모습은 어쩐지 내가 부대를 떠날 때보다 더 진지한것 같았다… 이튿날 내가 부대로 귀환되자 어디로 이동하려는 분위기가 아니였다. 병영은 여전히 조용했다. 오히려 전우들은 한달간 집에서 놀기로 한 내가 나타나자 놀라하는 모습이였다. 전우들은 내가 이렇게 빨리 귀대하리라고는 상상밖인 모양이였다. 그들도 부대에서 집으로 간 나한테 전보문을 날린것을 모르고있는것이 분명했다. 얼마후 련장이 집무실로 나를 불렀다. 허국선련장은 인차 말하지 않고 흐뭇해하는 얼굴로 한동안 나를 응시하는것이였다. 나는 그것이 더 궁금해났다. “련장동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내가 다그쳐 물었으나 련장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뿐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것이였다. “자, 급해말구 물이나 한컵 마셔.” 내가 련장이 내미는 고뿌를 받아쥔 뒤에야 련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사단본부에서 장병들의 문화시험을 치기로 했는데 우리 련대에서는 널 추천하기로 했다구. 아무리 올리 훓고 내리 훓고 해도 너밖에 없었어. 요즘 며칠 잘 준비해갖고 시험을 잘 치라구. 우리 련대를 위해 영예를 빛내라구…” “뭐라구 제가요?!” 이는 아주 상상밖이였다. 평소에 내가 공부에 열심한건 사실이였으나 그렇다고 계통적으로 배운것도 아니고 또한 내 스스로 나의 수준을 가늠할수 없었다. 하지만 련장은 막무가내로 나의 등을 떠밀었다. … 며칠뒤 나는 련대를 떠나 교하에 있는 사단본부로 향했다. 사단본부에 도착하니 문화시험을 치는 장병은 모두 26명이였다. 그러니 사단 산하의 각 련대에서 선발돼온 아주 쟁쟁한 장병들이라 할수 있었다. 나는 어쩐지 슬며시 속이 떨려나기 시작했다. 시험은 간단한 수학시험과 한어문으로 된 작문짓기였으며 그중 작문의 제목은 “련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모자라는 화식비를 보충하는가”였다. 첫시험은 수학이였다. 내가 시험지를 들여다보니 생각밖으로 아주 쉬운 문제들이였다. 초중을 졸업한 나였던지라 그런것쯤을 풀어내는것은 식은죽 먹기라 할수 있었다. 나는 정한 시간이 되기 전에 선참으로 수학시험지를 바쳤다. 만점에 자신이 있었던것이다. 이어서 작문시험이 시작됐다. 수학시험은 자신이 있었지만 작문에 들어서만은 파악이 없었다. 그것도 조선문이 아닌 한어문으로 된 작문이였으니 더욱 그랬다. 나는 학교시절에 별로 작문에 중시하지 않았던 자신이 어느 정도 후회되였다. 그리고 부대에 온 뒤 책은 그런대로 많이 보군 했지만 한어문으로 된 문장은 단 한편도 써보지 못했으니 진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험지를 백지상태로 바칠수는 없었다. 이내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았던것이다. 한참 궁리하던끝에 나는 련대의 일상생활을 적어보기로 했다. 그러자 문득 나의 뇌리속에는 련대에서 자체로 돼지치고 남새를 재배하는것으로 부식을 보충하던 일들이 떠올랐다. 당시 우리 련대에 지급되는 부식비는 전사당 한끼에 13전씩이였고 하루 39전이였는데 이는 그때의 그 시기에도 많이 부족한 상황이였다. 그래서 련대에서는 련장 허국선의 인솔하에 키우던 돼지를 잡아서는 화식에 보태고 재배한 남새로 시장에서 사오는 남새를 대체하면서 련대의 화식을 개선하는 한편 화식비도 절약했다. 그리고 계획적으로 식단을 짠데서 전사들이 배불리 먹게 하고도 남아서 버리는 밥이나 채소가 거의 없도록 했다. 나는 이것을 작문소재로 하고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생각나는것을 써넣다보니 쓸것이 많기도 했다. 요구대로 다 써서 정한 시간내에 바쳤으나 서두와 결말 등의 순서가 잘 맞지 않은것 같았고 어쩐지 문장의 심도 역시 깊은것 같지 못했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뭐 문필가가 되겠나 아니면 대학에라도 가겠나. 그저 사단본부에서 우리의 수준을 검사해보려는 뜻일거야.” 그후 련대에 돌아온 나는 련대일상에 복종하느라 신경쓰다보니 시험성적이 어떻게 됐을가 하는것은 념두에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나름대로 계속 책을 읽고 한어글쓰기련습도 하면서 자질제고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헌데 며칠 안되여 천만 뜻밖으로 사단본부에서 통지가 왔다. 내가 이번 시험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을 냈기에 전 사적으로 2명을 선발해 강소성 무석에 있는 해방군문화학교에 추천됐다는것이였다. 알아본 결과 이번 시험에서 나는 수학 만점에 작문짓기가 76점을 맞았던것이였다. 그렇듯 당시 힘들고 고달프고 또한 곰한테 핧기우기도 하는 부대생활속에서도 나의 모든것은 비교적 잘 풀리는 셈이였다. 물론 나의 노력과 동반되는 결과이기는 했지만. (연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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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3-31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3 )
    ■ 허길성 (전번기 계속)1950년대말 대만으로 쫓겨갔던 장개석의 국민당군대가 대륙의 복건과 광동 지구에서 자주 도발을 감행하면서 “대륙수복”을 떠들어대기도 하고 한국의 비행장을 리용하여 대륙의 동북지구에도 비행기를 파견하여 간첩을 락하시키는가 하면 백성들을 미혹시키는 전단지도 살포하군 하였다. 그러자 이에 대비해 인민해방군에서도 대륙의 전략적요충지마다 주요 병력들을 배치했는데 우리 부대 역시 중앙군위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였던것이다. 교하에서 집합한 우리 부대는 고사포장비들을 인계받은 뒤 인차 진지를 구축하고는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종목은 여러가지였다. 경보소리와 함께 진지에 진입하기, 정해진 시간내에 전투태세를 갖추기와 목표의 고도와 속도에 따라 그 목표를 조준하기 등으로 그중 일단 어느 한 종목의 훈련을 시작하면 눈을 감고도 척척 해낼수 있을 정도로 숙련될 때까지 10차례고 20차례고 반복하군 했다. 당시 교하에는 우리 136사단의 본부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별의별 병종부대가 다 있었다. 례하면 포병부대, 고사포병부대, 땅크병부대, 자동차운수병부대 등이였다. 그 몇가지 병종부대중 나는 자동차운수병부대가 제일 부러웠다. 왜냐하면 다른 병종의 기술을 배워서는 제대후 써먹을수 없겠으나 자동차운수병부대만은 제대후에도 계속 자동차를 몰수 있겠으니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사람의 일이란 묘할 때가 많다. 어떤 일은 아무리 기회를 노리며 노력해도 헛수고일 때가 많지만 어떤 일은 크게 품을 들이지 않아도 척척 풀릴 때가 많은법이다. 내가 바로 그랬다. 당시 대포와 고사포 등 부대는 포를 끌고다니기 위해서도 부대에 자동차가 있어야 했던만큼 이런 부대의 사병들은 반드시 자동차운전기술을 배워야 했으니 이는 나를 놓고볼 때 큰 행운일수밖에 없었다. 자동차를 배운다고 하니 기쁜중 근심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나같은 시골뜨내기가 이전에 자동차를 구경은 했어도 언제 운전대 한번 잡아본적도 없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우리 고사포병부대 장병들을 둘러보니 그 거개가 나같은 농촌출신이였고 도시출신은 별반 없었다. 그리고 자동차운전면허가 있는 사병 또한 그 무슨 큰 학교를 나왔거나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였다. 순간 나는 려순앞바다 소평도에서 한어글을 배우던 나날들이 떠올랐고 열심히 하면 꼭 배워낼수 있다는 자신심이 생겼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달라붙자 시작이 절반이라고 난제가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우리는 자동차리론교재를 외우는 한편 진짜 자동차가 아닌 모형자동차에 올라 조작훈련을 했는데 훈련초반에는 모두가 자동차운전기술을 익히는것이 엇비슷하였지만 날이 갈수록 내가 다른 사병들보다 앞서는것이 알리기 시작했고 그 차이 또한 날이 갈수록 점점 뚜렷해졌다. 알고보니 내가 그 무슨 남보다 뛰여나게 총명해서가 아니였고 훈련시간을 더 잡아먹어서도 아니였다. 그것인즉 내가 평소에 글공부에 중시했기에 남들보다 교재내용을 더 빨리 더 정확하게 터득할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결국 나는 자동차운전면허시험끝에 함께 시험을 친 사병들중 제일 첫진으로 합격되여 자동차운전면허증을 취득하게 되였는데 나의 리론시험성적은 전 사적으로도 앞자리를 차지했다. 1959년 부대에는 또 새로운 명령이 중앙군위로부터 떨어졌다. 우리 46군에서 자동차운수련을 새로 내오는데 각 사단으로부터 가장 우수한 운전사 2명씩 선발하게 된다는것이였다. 중앙군위의 명령에 따르면 그해 중국인민해방군이 서장으로 진군하면서 후근운수가 아주 간고하기에 각 군구에서 운수부대를 조직해 서장진군부대의 후근을 책임진다는것이였다. 당시 우리 전반 심양군구에서는 몇개 련대가 조직되였는지는 잘 알수 없었으나 우리 46군에서는 한개 련대가 조직됐으며 우리 사단에서 선발된 2명의 운전사중 바로 내가 있었다. 그해봄 우리는 청해성 고려장족자치주에 집결됐다. 당시 운수련대는 도합 45대의 자동차에 매 차량마다 전사 6명씩 배치되였다. 당시 우리가 몰게 된 자동차는 구쏘련제 가스차였는데 차가 낡아 자주 고장이 생기는데다 힘도 휴발유차에 비해 많이 못했으며 거기에 그때는 청장도로가 닦이지 않아 길이 엉망이여서 청해성 고려장족자치주에서 서장 동료장족자치주까지 다녀오자면 한달이란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것이였다. 1959년 4월초, 우리는 청해성 고려장족자치주에서 출발, 매인당 20일씩 먹을 식량(주로 빵이나 과자 등)을 준비했다. 당시 매차량마다 운전사가 2명씩이였고 자동차우에는 기관총 1정을 걸어놓고 4명의 전사가 비상사태에 대처할 준비를 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당시 서장으로 가는 곳에는 토비들이 득실댔는데 토비들은 자동차같은것이 지나가는것을 보면 곧잘 기습하군 하였기 때문이였다. 우리는 자동차가 산굽이를 돌 때와 부락으로 들어갈 때면 흔히 기관총 20여발씩 쏘군 했다. 그리고 우리의 자동차 45대가 기본상 동시에 움직이였다. 산사태같은것이 발생하여 길이 막히거나 자동차가 물웅덩이같은 곳에 빠질 때면 공동히 힘을 합쳐 돌사태를 제거하거나 물웅덩이에서 차를 구조하군 하였다. 또한 우리의 차 45대가 거대한 행렬을 지어 움직이면 토비들도 감히 달려들지 못하기도 했다. 한편 우리의 자동차행렬은 될수록 부락에 들어가지 않고 허허벌판에서 식사를 할 때가 많았다. 그것이 그래도 안전하였고 백성들한테 신세를 지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의 상황을 놓고보면 서장의 부락들에서 가족만 마을에 있고 남정이 산에 들어가 토비노릇을 하는 가정이 많았다. 그리고 그 당시 서장의 백성들은 공산당 및 중앙정부와 인민해방군의 민족정책이나 “3대규률 8항주의” 등에 대해 거의 100% 정도로 모르다보니 우리에 대해 항상 경계하는 모습이였다. 아마 그들은 우리를 당지의 무장토비나 기타 다른 군벌로 여기는 모양이였다. 때문에 장정들은 우리가 지나가면 돌멩이같은것을 들고 달려들 태세를 보였고 부녀자나 기타 로약자들은 우리를 보면 도망가거나 숨어버리기가 일쑤였다. 한편 그들은 우리가 해방군이라는것을 쉽게 식별할수 있었으나 우리는 마을백성들중 누가 토비이고 누가 선량한 평민인가 하는것을 전혀 알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서장으로 들어가는 첫진의 운수차대중 서장의 장족부락에서 토비들의 기습을 당한 사례가 자주 있었으며 전사들이 희생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도 우리 운수부대는 이미 먼저 간 차대의 교훈을 들은지라 그 대비책을 면밀히 하였다. 그 대비책인즉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될수록 마을에 들어가 숙영하지 않았고 차가 굽인돌이를 돌 경우에는 백배의 경계심으로 그 어떤 사태에도 대처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기관총소사를 하는것으로 우리의 힘을 과시하군 하였다. 때문에 몇차례에 거쳐 청해 고려에서 서장의 동료로 오가면서 단 한차례도 토비들한테서 기습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돌사태와 질병 등으로 우리 운수차대의 270명 장병들중 6명이나 이러저러한 사고로 희생되였다. 그도그럴것이 청해에서 떠날 때는 모두 신체검사를 하고 각종 예방주사같은것을 맞았으나 15일 이상씩 목욕 한번 못하고 더운물 한번 마시지 못하면서 불철주야로 달리다보니 아무리 억대우같은 사나이도 견디기가 힘들었던것이다. 이렇게 1년간 우리는 청해와 서장 사이를 5차례 오가면서 중앙군위에서 맡겨준 운수임무를 원만하게 완수했는데 한번씩 갔다가 올 때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1년간의 시일이 지나 원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쉴수가 있었다. 하지만 부대생활이란 항상 변수가 생기는법, 언제 또 어떤 일이 발생하고 또 어떤 명령이 떨어지고 하는것은 그 누구도 알수 없었으며 경우에 따라 생명도 바칠수 있을 각오가 있어야 부대생활을 할수 있었던것이다. 만약 이런 각오가 없다면 그런 군인은 군인자격이 없으며 군인생활을 잘할수 없을것이 분명했다. 임무를 마치고 교하의 사단본부로 돌아오니 나의 체중은 10킬로그람이나 줄었다. 서장에서 교하로 돌아오자 사단에서는 표창대회를 열고 서장으로 갔던 동료와 나를 크게 표창했고 우리 2명에게 한달간의 휴가를 주면서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당시 나의 신체는 진짜 휴식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곧 음력설이 닥쳐오는 때인지라 집생각이 간절한것도 사실이였다. 헌데 세상일이란 참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나온 말인것 같았다. 바로 내가 교하 – 조양천행 렬차표를 사놓고 짐을 꾸리고 있을 때 갑자기 부대에는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다. 사단내의 모든 장병들은 일률로 부대를 떠날수 없으며 이미 휴가로 집에 갔던 장병들도 몽땅 부대에 복귀해야 한다는 명령이였다. 또 뭔가 일이 터진 모양이였다. 아니나다를가 바로 음력설날 저녁 우리 부대에는 이동명령이 하달, 무작정 기차에 고사포 등 중장비를 싣고 이동한다는것이였다. 역시 어디로 가는지 뭘하러 가는지 일절 알려주지 않았다. 때인즉 음력설기간이라 산악지구인 교하의 날씨는 몹시 맵짰고 바람도 세찼다. 하지만 부대의 움직임은 명령과 더불어 매우 신속하였다. 자정이 지나 새벽 1시가 좀 넘었을 무렵 우리는 교하역에서 모든 장비를 상역한 후 화물차에 올랐다. 우리가 화물차에 오르자 미구하여 기차는 기적을 길게 뽑으며 출발했다. 기차가 출발하자 차바람에 더욱 추워났다. 하지만 전사들의 관심사는 추운날씨가 아니였다. 바로 어디에 가며 그곳에 어떤 사태가 발생했는가 하는것이였다. 공교롭게도 기차가 달리는 방향은 동쪽인것 같았다. 그러자 전우들이 나름대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동쪽으로 가는걸 보니 틀림없이 조선쪽이야.” “그래 아무래도 이상한걸 조선에서 또 전쟁이 터진게 아니야?” “그 가능성이 크다구. 어쩐지 기차에 오를 때부터 예감이 이상하다 했는데…” …… 헌데 이튿날 날이 밝을 무렵 기차가 조양천역에서 멈춰서더니 모두가 내리게 하는것이였고 이어서 함께 싣고왔던 고사포와 같은 중장비까지 하역하는것이였다. 조선으로 나가자면 도문쪽으로 계속 가야 할텐데 조양천에서 내리게 하는걸 봐서는 조선으로 가는것은 아닌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의 생각에도 나는 조선으로 나간다면 틀림없이 전쟁이란것만은 분명히 알고있었다. 조양천에서 하차한 부대는 각 련대별로 그 일대에 고사포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개 련대는 삼봉동에 구축하고 한개 련대는 광석촌에 구축했으며 우리 련대는 인평촌에 있는 논에 고사포진지를 만들었다. 우리가 진지를 구축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얼마전 한국을 거쳐 날아온 국민당군 비행기 한대가 우리 나라 상공에 날아들었다. 당시 해방군 레이다부대에서는 이를 발견하고 즉시 교하에 있는 사단본부에 전달했으며 사단본부에서는 각 고사포부대들에 즉시 전쟁상태에 진입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국민당군 비행기는 연길쪽 상공으로 날아왔고 마침 연길 공원뒤산에 우리 군 고사포부대가 있었다. 헌데 고사포를 군용트럭뒤에 달고 이동하자고 하니 차고에 있던 트럭마다 기름이 얼어 시동을 걸수가 없었다. 당시 고사포부대 장병들은 그저 하늘로 날아지나는 적기를 바라볼뿐 속수무책이였다고 한다. 하기에 그 교훈을 살려 이번에 사단본부에서는 연변의 곳곳에 고사포부대를 증가시킨 한편 직접 진지를 구축하여 대기시키기로 했던것이다. 한편 진지를 다 구축하자 련장인 허국선은 전 련대의 사병들을 집합시킨 뒤 부대가 조양천에 오게 된 목적에 대해 알려주는것이였다. “지금 미제국주의와 대만의 장개석군대는 우리 동북변경지구에 수차 비행기를 파견하여 삐라를 뿌리기도 하고 간첩도 투하시키군 하고있다. 얼마전에도 국민당 비행기 한대가 개산툰지구에 날아와 삐라를 뿌리고갔고 조양천과 연길의 상공에도 나타났었다. 우리 부대의 임무는 이제 적기가 나타나는족족 그것들을 격추시키는것이다. 알았는가?” “알았습니다.” 임무는 분명해졌다. 이제 국민당 비행기가 나타나면 우리는 그 적기를 향해 일제히 고사포로 대공사격을 할것이고 적기 또한 우리한테 폭탄을 투하하거나 기관총소사를 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면 사상자가 날수도 있는것이다. 이는 전쟁이였다. 틀림없는 전쟁이였다. 준비가 빈틈없어야 하고 장병 모두가 희생될 각오도 돼있어야 했다. 이렇게 전시준비단계에 들어가자 부대의 규률은 더욱 엄격해졌다. 우리는 밤과 낮이 따로 없이 교대별로 진지를 지키면서 하늘을 응시했고 잠을 자도 옷을 입은채로 자야 했으며 통신병은 교대별로 무전기옆을 지키면서 레이다부대에서 보내오는 메시지를 기록하군 했다. 일단 적정이 나타나면 즉시 전투에 돌입할 태세가 다 되였다. 그러다보니 나는 집이 있는 룡정이 멀지 않았지만 좀처럼 갈수가 없었다. 또한 내가 근무하던 태양향도 마찬가지로 놀러갈수가 없었다. 헌데 우리의 고사포병부대가 조양천지구에 포진하자 적기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우리가 오기전에는 그놈들이 자주 나타났다고 했었는데 왜 우리 고사포부대가 오자 깜쪽같이 “꼬리”를 사리는것일가? 당시 나를 놓고 보면 전쟁이란것이 어딘가 무서운건 사실이였다. 솔직하게 말해 세상에 누가 전쟁이 무섭지 않을 사람이 있으며 누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하기를 원하겠는가?! 하지만 한편 한번 통쾌하게 전쟁에 투신해보고싶은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남자라면 특히 군에 입대했다면 싸움 한번 해보는것이야말로 진정한 군인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였다. 그럼에도 적기가 나타나지 않다니? 이는 당시 모순된 나의 심정이기도 했다. 후에 들은 소문에 따르면 우리가 포진한 뒤 대만의 국민당군 비행기는 조양천지구를 피해 훈춘쪽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럼 적들이 어떻게 조양천에 해방군 고사포병부대가 포진하고있다는것을 알아냈단 말인가?! 틀림없이 적기가 투하한 첩자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자기들 본부에 무전을 날린것이 분명했다. 다른 한편 그렇듯 전시준비단계에 있으면서도 나는 한어공부를 계속했다. 당시 나는 책을 모를 글자가 있으면 곧잘 기타 한족전우들한테 물었고 글자를 익히는 동시에 군복안속의 흰천에 새로 배운 그 글자를 적어두군 했다. 당시 우리는 조선에서 지원군들이 입던 군복을 물려받아 입었는데 군복의 안속은 흰천으로 박은것이였기에 거기에 글을 쓰기가 알맞춤했다. 왜냐하면 당시 종이도 귀했지만 종이에 적으면 쉽게 찢어지거나 잃어버릴수가 있었기에 그래도 쉽고도 오래동안 보관하려면 군복의 안속이 최고였다. 또한 아무 때건 글자가 잘 떠오르지 않으면 인차 군복을 벗어 다시 볼수도 있어 좋았다. 이렇게 오래동안 매일 몇글자씩 적은것이 얼마 안되여 군복안속은 한문글자로 수백자에 이를 정도였다. 당시 내가 어떻게 열정스레 군복 안속에 한어글을 적었던지 많은 전우들은 나를 리해하지 못했다. 지어 어떤 전사들은 나를 “정신환자”라고 놀려주기도 했으며 나중에 한입 건너 두입 건너 “정신환자”란 이 말은 허국선련장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였다. 어느날 련장이 나를 불렀다. “허길성, 너 옷 한번 벗어봐라.” 내가 옷을 벗어 넘겨주자 련장은 옷속을 한참동안이나 까근히 뜯어보더니 다시 나한테 물었다. “너 왜 옷속에 글자를 써놓는거냐?” “옛 련장동지, 전 지금 한어글자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제가 조선족이기에 한어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야 기타 전우들의 문화수준을 따라갈수 있을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러자 련장은 너털웃음을 웃더니 다시 정색해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길성, 너 정신환자인것이 아니라 아주 훌륭한 전사로구나. 너희들 조선족들한테 정말 탄복한다. 정말 끌질기고도 결심이 크단 말이다. 나도 이곳 조선족지구에 와서 조선말을 좀 배우고싶었으나 좀처럼 되지 않는구나.” 그것을 계기로 련장은 나에 대한 시선을 달리했다. 기실 련장은 지원군 고사포병부대에서 근무한적이 있는 로병으로서 일자무식인 문맹이였지만 지식을 아주 중하게 여기고 지식인을 존중하는 군인이였다. 거기에 거기에 허국선련장은 성격도 활달하고 시원시원하였다. 그 일이 있은 뒤 허국선련장은 늘 몰래 나를 지켜보기도 하고 자주 말도 걸어오면서 나를 무척 아끼고 관심하는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고사포진지를 구축한지도 몇개월이 잘되였다. 하지만 적기는 여전히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땅이 녹으면서 농민들이 논갈이를 할 계절이 다가오자 우리는 논에서 철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전쟁을 하지 않고 철수하게 되니 일단 안심되였다. 그도그럴것이 전쟁터에서 아무리 용맹을 떨치던 군인도 결코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으리라. 진지에서 철수한 뒤 삼봉동과 광석에 포진했던 련대는 다시 교하에 있는 사단본부로 돌아가고 우리 련대는 화룡의 청산으로 가게 됐다. 우리 련대에 다른 임무가 떨어졌던것이다. 청산으로 갈 때 나는 이미 부패장으로 진급했었다. (연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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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3-29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2 )
    장편실화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허길성 (전번기 계속) 연길현 태양향공소합작사는 단층벽돌집인 작은 건물이였다. 그러니 룡정이나연길같은 도회지의 백화점과는 근본 비교도 안되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다. 우선 해볕이 쨍쨍 내리 쬐는 삼복철이나 눈보라가 쌩쌩 몰아치는 엄동철의 야외가 아닌 실내에서 근무하니 좋았고또한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출퇴근을 하니 어느 정도 신나기도 했다 그리고 로임이 27원이였으니그닥 적은편도 아니였다. 또한 나는 “첫술에 배부를수 없다”는 도리도 잘 알고 있었다. (이 공소합작사를 발판으로 삼자. 그리고 앞으로 더 훌륭한 직업을 찾아 나의 멋진 꿈을 실현하는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이내 인생의 새로운 리정비로 되는 날이다.) 공소합작사는 웃음도 많고 재미있는 장소였다. 당시 농촌공소합작사는 촌민들이 물건을 사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농한기마다 촌민들이 모여서 잡담을 늘여놓는 “구락부”이기도했다. 촌민들은 소금이나 미역같은것을 산 후에도 인차 집으로 돌아가는것이 아니라 한두시간씩 잡담을 하면서“뉘집 며느리가 발이 큰것”과 “뉘집 남정이 밤일을 잘하지 못해 마누라가 바람났댜”는 등 얻어들은 소리를 다 털어놓고서야 자리를 뜨군 했다. 특히 수다를 떠는데는 아낙네들이 더했다. 그네들한테는 우물집 마누라의방구소리마저 모두 “화제거리”였고 어느 남정의 걸음걸이조차 “흥미거리”였다. 그네들에 따르면 일터에서 우스개를 하노라면 힘든줄도 시간이 가는줄도 모른다고했다. 그러니 그네들이 일터에서 늘여놓던 수다습관이 공소합작사에까지 와서 그대로 이어지는건 너무나도당연했다. 그리고 어딘가 좀 황당하고 야하기도 했지만 그네들의 입방아는 들어 줄만하기도 했다. 그런대로 재미있었던것이다. 아낙네들은 또 나를 “화제거리”로 삼는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총각은 룡정에서 왔다지? 어느월급쟁이 가정의 아드님이겠구만. 아이유 생긴것도 잘 생겨라. 내가 10살만 여렸어두 이 총각 꽉 잡고 놓아주지 않겠구만.” “에구에구, 이 펑버짐한 아낙네야. 메주덩어리처럼 생겨갔구 욕심은 꽤 큰가베. 어떻게 임자한테 다 차례지겠다구그래. 이 총각은 우리 집 사위감이야.” 나의 진짜신분을 모르는 아낙네들은 아마 내가 룡정의 어느 높은 간부의아들쯤으로 아는 모양이였다. 그리고 딸을 둔 아낙네들은 롱담속에 어느 정도의 진담도 섞여있는것 같기도했다. 홀로 합작사에 나타났을 때는 아낙네들속에서 걸죽한 롱담을 할 때와는 달리 내앞에서 짐짓 진지한모습이였고 어조 또한 정색했다. “총각, 혼자 생활하자니 적적하고고생스럽겠구만. 그리고 집이 그립기도 하구 말이요. 그럴때면 허물말고 우리 집에도 자주 다니오. 자식 키워본 부모의 마음이란 다 마찬가지라우.” “빨래할것이랑 있으면 혼자 씻지 말고 우리 집에 보내오. 우리 집 앞에 개울이 있고 또 길다란 빨래줄까지 있어 씻으면 금방 마른다오.” …… 당시 그네들이 나한테 건네는 말은 대체로 이러한것들이였다. 그리고 태양촌의 처녀들 또한 그 거동들이 이상했다. 크림이나 손수건 또는 손거울 하나를 사도 다른 점원들은 제쳐놓고 수집음을 보이며 꼭 나한테 말을 건네면서 사군했다. 그러고는 항상 눈에 실웃음을 지어보이며 자리를 뜨군 했다. 또한당시 밤에 조양천에서 영화를 돌린다 하면 나는 마을청년들의 무리속에 끼여들어 도보로 영화구경을 다녀오군 했는데 그때에도 나의 주위에는 처녀애들몇몇이 따라다니군 했다. 그애들은 항상 몸에 먹거리를 갖고오면서 나를 보면 곧잘 내놓군 하기도 했다. 나의 동갑내기거나 나보다 조금 어린 처녀애들의 그러한 거동, 당시에는잘 몰랐으나 후에 곰곰히 생각해 보니 어딘가 짐작이 갔다. 한편 그 시기 나는 이성적으로 크게 눈을 뜨지 못한지라 그런 유혹에는별로 끌리지 않았다. 하긴 혼자 객지에서 생활하면서 밥해먹고 빨래까지 하면서 출근하자고 보니 불편하고도귀찮을 때가 많았다. 그리하여 마을에서 허씨성을 가진 두 녀성분과 일부러 친했는데 다름 아닌 허금자, 허정희 녀성이였다. 당시 나는 이 두 녀성분을 이성이 아닌 누님으로생각했고 나보다 나이가 이상인 그분들 역시 같은 허씨인 나를 남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두 허씨녀성은 집에 맛있는 음식이 있을 때마다 나를 청해 먹이였고 나의 숙소를 찾아와 청소를 해줄뿐만 아니라 자주 나의 빨래까지 씻어주군 하였다. 헌데 그런 나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그 일을 계속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약 1년뒤 전 연길현적으로종업원정간사업이 시작되면서 미성년인 내가 첫부류로 정간일군대상으로 됐다. 만 18세가 되지 않은데다 기타 학력이나 조건에서도 내가 공소합작사 직원으로서의 조건이 미숙했기 때문이였다. 나는 별로 공소합작사 주임한테 지청구를 들이대지 않았다. 너무나도 쉽게 찾은 직업이라 앞으로도 직업찾기란 식은죽 먹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내가 떠난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특히 40-50대의 아낙네들과 몇몇 처녀애들이 그랬다. 아낙네들은 삶은 닭알같은것을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고 어떤 처녀애들은 수첩이나 손수건같은것을 선물로 주면서앞으로 서로 편지를 주고 받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너무나도 쉽게 얻은 직업이자 한편 너무나도 짧았던 태양향공소합작사에서의생활, 하지만 그것은 나의 일생에서 아주 즐겁고도 소중한 추억의 한페지로 남아 있게 되였고 나는 오래도록그곳의 사람들, 특히 허씨성을 가진 허금자와 허정희 녀성을 잊을수가 없었다. 룡정으로 돌아온 뒤 나의 생활위치는 다시 원점으로 되였다. 나는 소박했으나 즐거웠던 태양향공소합작사에서의 나날들을 잊을수가 없었다. 나는다시 직업을 찾기로 했다. 그뒤 역시 현로동국마당에서 “앉아버티기” 결과 나한테는 석현제지공장에서나무껍질을 벗기는 일이 차례졌다. 헌데 희망반, 기대반으로 부푸는가슴안고 달려간 직장이였으나 태양향에서의 랑만적인 생활과는 완전히 딴판이였다. 작업장소는 야외였고 한아름씩되는 원목을 굴리며 껍질을 벗기노라니 무척 힘에 부쳤다. 그리고 직원들 또한 모두 말없이 수걱수걱 일만하는 그런 분위기였으며 대부분 한족들이라 말이 잘 통하지도 않았다. 한달이란 날자를 채우고보니 월급은 18원, 그것으로 다음달의 식권을 사고 또 기타 비누, 치약 등으로 사고 나니 남는 돈이 별반 없었다. 나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시일이지속됨에 따라 여름철에는 고온에 더위를 만날 지경이였고 겨울에는 추운 나머지 손발이 시리여 견딜수가 없었으며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작업은 계속해야했다. 그리고 힘들수록 집생각이 간절했다. 가난했지만 그래도어머니가 끓여주는 된장국이 좋았고 따뜻한 집안의 가마목 온돌이 좋았다. 게다가 이 직업은 앞날이 더욱걱정이였다. 땅을 파먹고 사는 농부보다 나은것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곳에서 계속 막로동을 하다가는 나의 꿈을 실현하기는커녕 변변한 처녀한테 장가도 갈것 같지 못했다. 결국 석현제지공장에서 나는 1년밖에견지하지 못하고 역시 보따리를 싸게 됐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모든것이 허무했다.팔자 한번 고쳐보려고 부모의 슬하를 떠나 타향살이를 했건만 한번은 정간당하고 또 한번은 스스로 직업을 포기하면서 허궁에 나앉게 되였다. 고중진학마저 팽개치고 사회를 나온 나 자신이 한심했다. 사회로 나오면하늘의 별이라도 딸것 같았지만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것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회는 내가 설자리가없었다. 나는 세상을 너무나도 몰랐던것이였다. 그러자 아버지는또 “싸리나무에 싸리난다고”를 념불외우듯 했다. 이에 나는 반발심이 생겼다. 아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이내 운명에 도전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것인즉 때마침 군대모집이 있는지라 군에 입대하여 마지막으로 승부를 겨루는것이였다. 헌데 그것도 그렇게 쉽지 않았다. 내가무장부에 가서 군입대를 신청하자 무장부일군들은 우리 형제중 이미 한명(셋째형)이 군에 갔다는 리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 어떡한단 말인가?! 사정하고 떼질쓰고 “앉아버티기”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장부는 로동국과는 달랐다. “앉아버티기”가 통하지 않았던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무장부로 찾아가도 누구 하나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고 나 역시 매일같이 하던 말만 곱씹자니나 스스로도 멋적었고 얼굴이 뜨거워났다. 계속 지청구를 들이댈수도 없고 그렇다고 포기할수도 없는 갈림길에서헤매고있던중 때마침 부대에 간 셋째형인 허응산한테서 편지가 왔다. 부대근무기가 만기되여 오래지 않아곧 제대된다는것이였다. 그러자 나는 곧바로 형님한테서 온 편지를 갖고 재차 현무장부로 찾아갔고 이어서 신체검사 및 기타의심사에서 순조롭게 통과되여 군대로 갈수 있게 되였다. 군대생활의 시작 1 1957년 나의 군대생활은 료녕성 려순에서 시작되였다. 당시 앞가슴에 붉은 꽃을 단 우리 신병들을 태운렬차가 대련역에 들어서자 나는 눈앞의 황홀한 광경에 어안이 벙벙하도록 놀랐다. 도시는 호화건물이 숲을이루듯이 들어서고 량켠에 가로수가 쫙 늘어선 거리는 넓고도 깨끗했다. 그제껏 연변내도 별로 벗어나보지못한 나로서는 대도시의 화려함에 오래동안 매혹됐다. 대련에 이른 우리 신병들은 인차 시교에 있는 한 병영에 배치되였고 이튿날부터 3개월에 달한다는 신병훈련에 돌입했다. 신병훈련은 대렬맞추기, 포복전진, 수류탄던지기, 날창찌르기등이였다. 힘들었지만 나는 초충시절에 이런 훈련을 많이 해본지라 인차 적응될수 있었다. 특히 우리 연변에서 간 신병들이 돌출하여 훈련도중 칭찬이 자자했다. 반면에내지의 사천이나 운남 등지에서 온 신병들은 총을 제대로 잡을줄마저 몰라 늘 교관한테 훈계를 당하거나 기타 신병들의 웃음거리로 되군 했다. 우리한테 힘든것은 훈련보다는 한어말구사가 미흡한것이였다. 룡정에서 살면서 한족애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던것이 못내 후회되였다. 언어장애는 내지에서 온 신병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족이였지만 그들은 표준말구사에는 엉망이였다. 외마디말이라도 번질줄아는 우리 조선족 신병들보다도 한참은 뒤떨진 상황이였다. 그리고 군규률을 지키는 면에서도 우리 조선족신병들은모범이였다. 특히 나는 이전에 영화에서 보아왔던 팔로군처럼 아침 일찍 기상하고 그뒤엔 병영의 마당을쓸기도 하고 취사원을 도와 물을 긷고 채소를 다듬고 하면서 자아형상을 높이기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러자반장은 물론 취사병에 이르기까지 나를 좋아하면서 가끔씩 나한테 한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한마디를 배우면 열번씩 외우면서 한어말배우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힘든 훈련생활이였지만 나는 저녁시간마다한두시간씩 자습하며 전우들한테서 배운 말을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머리속에서 소화시키군 했다. 신병훈련이 끝나는 날 교관은 신병내의 조선족병사들을 표창했다. “지난 국내해방전쟁시기 인민해방군중에서 제4야전군의 장병들이 가장 용맹했다. 당시 제4야전군에는 조선족장병들이 많았다. 그들은 소문난 흑산저격전, 천진해방전투와 남창해방전투 및 유명한 해남도 도하작전중에서 그 용맹과 슬기로움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조선족전사들의 우수성은 이번의 신병훈련에서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모든신병들은 조선족전사들의 자각성과 모범성을 따라배워야 한다.” …… 신병훈련이 끝난 후 부대는 곧바로 이동됐다. 우리는 각각 군용트럭에 올라앉아 어디론가 향했다. 물론 우리는 어디로이동하고 뭘하러 가는지조차 몰랐다. 인솔하는 군관이 우리한테 알려주지 않았거니와 우리 역시 알려고 하지도않았다. 물론 알 권리도 없었다. 약 한시간뒤 우리를 실은 군용트럭은 바다가의 항구에 이르렀다. 바다를 보는 순간 나는 막 탄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눈뿌리가 모자라도록일망무제한 바다의 수평선 그리고 날아예는 갈매기와 가끔씩 오가는 선박의 쌍고동소리 – 모든것이 그림같았고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하던 화려한 정경들이였다. 항구에서 부대는 어느 한 중형전함에 올랐다. 전함에 올라보는것 역시 나로서는 처음이였다. 나는 전함의 모든것이신기했다. 전함에 탑재된 함포와 기타 전투장비 그리고 기타의 함내시설들… 하지만 이러한것들을 오래동안둘러볼수 없었다. 인차 집합명령이 떨어졌고 이어 우리는 갑판우에 모인채 노래를 부르며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미구하여 전함은 머리를 돌리더니 항구를 떠났다. 뒤이어 전함이 몹시 흔들리더니 여기저기서 꽥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다경험이 적거나 전혀 없는 전사들이 멀미를 하는것이였다. 나 역시속이 메쓱거리는것을 애써 참으려 했지만 나중에는 전함의 란간쪽으로 달려가며 “왝”하며 먹었던것을 바다물에 몽땅 토해버렸다. 전함의 항행은 다행히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후 전함은 약 200메터 가량 상거한 섬을 앞에 두고 닻을 내렸고부대는 여러개의 진영으로 나뉘여 바줄사다리를 타고 전함에서 내려서는 다시 뽀트에 올라 앞에 보이는 섬으로 향했다. 앞에 보이는 외딴섬 그 섬인즉 바로 려순앞바다의 소평도였다. 소평도에 상륙한 부대는 본격적인 땅굴파기작업에 돌입했다. 2 소평도에서 우리는 약 1년간순 땅굴만 파는것으로 나날을 보냈다. 당시 소평도는 려순앞바다의 전초기지이자 중국 동해의 중요한 바다요충지대였으며한척의 대형항공모함과도 같은 존재였다. 전략적으로 볼 때 만약 적들이 일본이나 한국쪽으로부터 중국본토에대한 상륙을 시도한다고 하면 이 섬을 반드시 공략해야 했고 우리 중국으로 놓고 보면 이 섬을 지켜내는가 못내는가에 따라서 적들의 상륙을 저지하는성공여하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부대지휘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섬을 효과적으로 지켜내려면 지면에 있는방어시설도 중요하지만 유사시에 따르는 갱도의 방어시설 역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것이였다. 부대지휘관은조선전쟁때 인천 앞바다의 월미도의 사례를 들면서 1950년 9월월미도를 지키던 조선인민군 해안포병련대에 갱도시설만 충분했더라면 그렇게는 하루 아침새에 점령당하지 않았을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현재의 소평도 갱도시설은 원자탄의 폭격을 당해도 끄떡없는 그런 견고한 시설로 될것이라고 했다. … 섬에 오른 이튿날부터 부대는 작업조를 구성하고는 3교대별로 작업속도를 다그쳤다. 이 작업을 다그치는걸로 보아 당시국제정세의 복잡성도 어느 정도 알수 있었다. 력사적으로 보면 제2차세계대전후 미국은 일본 오끼나와에 군사기지를 갖고 있었고 조선전쟁 당시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기지가 전쟁에서의 절대적인 공중우세와 해상우세를 차지했었다. 그러니 일본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기지가 중국의 동해쪽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셈이였으며 거기에 미국이 일본을재무장시킬 경우 그 위협은 더욱 컸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장개석의 대만이 있고 북쪽에 있는 중국의 우방이던쏘련도 그때로부터 중국과의 관계가 파렬되기 시작했기에 형세가 긴장할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우리 중국은전쟁준비를 다그쳐야 했다. 따라서 후근부문에서는 소평도 갱도파기공사에 대한 모든 물자공급을 아끼지 않았다. 폭파약도 넉넉했고 운수도구도 구전했다. 바위돌과 싱갱이질을 하는 힘든 작업이였으므로 몸은 항상 고되였다. 그만큼 후근부문의 부식공급도 잘되였다. 신병훈련을 할 때는 수수밥에채소가 위주였고 육류는 매주 1 – 2차 정도나 맛볼수 있었으나 여기로 온후엔 끼니마다 이밥이였고 돼지고기나닭고기같은 육류가 매일 공급되였으며 어느 정도 질릴 지경이였다. 좀 참기 어려운것은 외딴 섬이라 구경거리가 적고 단조롭고도 적적한 생활환경이랄가. 하지만 다른 장병들한테는 어떠했을지는 모르나 나한테는 그런 환경이 오히려 다행이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한어공부도 여유롭게 할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편 단조로운 생활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큰 변화가 일게 했다. 당시 나의 생활은 일하고 잠을 자는것 외에는 주로 책을 읽으며 한문을 배우는것이였는데 일이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나는 매일 잠자기전에 한두시간씩 한어문책을 읽는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책을 읽다가 그것을 얼굴에가리우지 않으면 그대로 손에서 땅에 떨어뜨린채 곯아떨어질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렇게 몇달간 지나자 나는 혼자 스스로도 자신이 진보하는것이 뚜렷하게알리는것 같았다. 그때로부터 나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자신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단지 글공부뿐 아니라 다른 뭔가도 결심을 내리고 시작하면 될것 같은 자신심이였다. 그 때문이였을가 나는 아무리 힘든 작업도 힘들고 무섭지를 아니했다. 나는뭐든지 최선을 다했다. 글공부는 물론 일을 할라치면 몸을 내번지고 했다. 또한 전우들의 생명안전을 위해 수차 위험제거를 하기도 하여 3등공 1차 세우기도 했다. 군대에 갔다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군인이람 명령에 복종하는것을 천직으로삼아야 했다. 례하면 부대가 이동해도 어디로 가는가, 왜가는가, 가서는 그 어떤 일에 종사하는가 등등에 대해서는 일절 캐물을수가 없다. 그것은 소평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평도에서의 땅굴파기작업도 1년남짓이 되여가던 어느날 부대에서는 갑자기 집합명령이 떨어졌다. 교대별로 일하던 군인들도, 잠을 자던 군인들과 취사칸에서 밥을 짓던 군인들도 모두 작으마한 군영마당에 모였다. “상급의 명령에 의해 우리 부대는 곧 이동한다. 부대는 각 련급을 단위로 움직이며 작업도구들은 몽땅 남겨두고 이불짐과 개인의 생활필수품만 챙겨 가지고 이동한다…” 우리는 역시 섬으로 나올 때처럼 뽀트를 타고는 대기하고 있는 전함에 올라탔으며다시 륙지로 향했다. 이어 부대는 한밤중에 차창도 없는 화물차바곤에 앉아 어디론가 향했다. 이튿날 부대가 도착한 곳은 길림성의 교하역이였다. 교하에 도착한 나는 기타 전우들과 함께 중국인민해방군 제46군 136사단 고사포부대의 전사로 되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3-25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1 )
    ■ 허길성 나의 고향은 조선 함경북도 길주군 갑산동이다. 그러니 나는 조선에서 태여난 셈이고 우리 가정은 조선에서 건너온 월강이주민으로 된 가정이라고 할수 있었다. 두만강을 건너올 당시 우리 가정을 놓고 말하면 조상으로는 할아버지 허윤갑, 할머니 김금심, 아버지 허창준 그리고 어머니 김순녀 등 분들이 계셨고 형제들로는 큰형 허길봉, 둘째형 허길룡, 셋째형 허응산이 있었으며 누님들로는 큰누님 허월금, 둘째누님 허월순 등이 있었다. 우리 가정은 양천허씨였고 나는 양천허씨네 19대 후손이였다. 후에 내가 아버지한테서 들어서 알게 된 일이지만 형제중 막내인 나는 세살적에 아버지의 지게에 앉아 두만강을 건넜으며 만주로 이주해온 뒤 우리 가정은 당시 연길현 화전자(지금의 룡정시 석정향 중성촌)에 정착해서는 농사를 지으면서 10여명 식구들의 호구를 했다고 한다. 화전자에서의 정착생활, 그것을 첫 스타트로 70여성상의 이내 인생은 시작됐다. 바로 그 화전자로부터 잔뼈를 굵게 만들면서 나는 중국대륙의 방방곡곡에 발자욱을 남기였으며 파란만장한 세월과 더불어 오늘 이때까지 인생의 희로애락도 겪어오게 되였다고 할수 있다. 부모형제와 어린 시절의 나 내가 어릴 때 부모님한테서 들어서 알게 되였지만 양천허씨인 우리의 조상들은 성격이 곧고도 뼈대가 있는 어른들이라고 했다. 조선이 “량반”이요, “상놈”이요 하며 사람의 신분을 분별할 때도 나의 조상들은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늘 “량반”이란 신분으로 살아 왔으며 또 그만큼 품위를 지키며 살아온 나의 조상들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증조부시대만 하더라도 땅마지기나 좀 있었고 할아버지 허윤갑옹 역시 서당같은 곳에 다니면서 천자문 따위를 외우기도 하는 어딘가 지체 높은 량반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난구제는 나라도 할수 없다”고 했건만 할아버지 허윤갑옹이 성인으로 되면서 자주 가난한 백성들한테 쌀도 퍼주고 하다보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다가 어느덧 가정이 아주 째지게 가난한 정도에 이르게 됐고 나중에는 두만강을 건너는 이주민대렬에까지 합류하게 되였다고 한다.우리 가정이 이렇게 가난에 못이겨 두만강을 건너 만주땅에 정착하게 되였는데 그때가 내가 바로 세살적인 1942년이였다. 두만강을 건너 지난 20세기초 강도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이 된 뒤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이더욱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만주로 건너온 가정들치고 사연이 없는 가정은 없었을것이다. 남편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한테 쫓기게 되자 하루밤새에 만주로 도망쳐온 가정이 있는가 하면 지리한 가난을 못이겨 살길을 찾아 이 땅으로 건너온 가정들도 많았으니 우리 가정은 그 후자에 속한다고 할수 있었다. 특히 당시 우리 가정은 아버지의 앞세대로 웃어른들이 계시고 거기에 자식들이 많았으며 집안로력이 적다 보니 이른바 가난하다는 많은 가정들중에서도 제일 가난한 가정에 속했다. (만주는 기름진 땅이 사처에 널려있다. 하다 못해 산언덕에 뙈기밭을 일구고 화전농사를 하면서 부지런히 일만 하면 삶은 감자라도 하루 세끼 먹을수 있어 크게 배고픈 고생은 없을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에서 만주로 건너오는 대부분 이민족들이 품고 있는 한가닥 삶의 희망이였다. 이렇듯 실날같은 한가닥 희망이 있었기에 당시 우리 가정은 조선에서 일본학교를 다닌적이 있는 큰형 허길봉씨가 계획하고 주도하에 두만강을 건너게 되였다고 한다. 나의 부친 허창준로인은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면서 땅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그런 부지런하고 착하고도 순직한 농부였다. 부친한테서 들은 얘기지만 조선에서 건너온 뒤 우리 가정에서는 친척인 허운걸가정의 땅을 소작맡기도 하고 또한 어느 한 산기슭의 땅을 개간하기도 하면서 농사를 지었었다. 그때 부친은 낮에는 밭에 나가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하고 저녁에는 밀린 집안일을 하면서 밤늦게야 잠자리에 들군 했다. 즉 계절에 따라 봄에는 농기구를 수리하고 여름이면 모기불을 피워놓고 삼대를 발랐으며 가을이면 산에서 따거나 캐온 산열매와 버섯 및 약재 등을 말리우는 일에 신경을 썼다. 그리고 겨울이면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는 일에 허리펼 사이가 없이 보내군 했다. 한 가정의 대들보를 떠멘 아버지, 아버지의 손에서는 일감이 떠날 사이가 없었다. 또한 생각하는것도 일에 관한것이였다. 당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한테는 아버지의 모습이 퍼그나 측은해보였다. 어찌보면 아버지의 인새은 일만을 위하여 사는 인생을 방불케 했다. 당시 아버지는 나이가 어린 셋째형과 나를 제외하고는 맏형과 룡정고중에 다니는 둘째형을 자주 일터에 내몰기도 했다. “맏이야, 둘째야 어서 일어들 나거라. 식전에 나가 소꼴을 베와야 할것이 아니냐?” …… “해가 하늘공중에 걸렸다. 땅을 파먹을 팔자들이 잠이 이렇게 많고서야 뭘 해먹는다더냐.”아버지가 이렇게 호통칠 때마다 맏형은 그래도 잠기가 가득한 두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군 했지만 둘째형은 늘 아버지의 호통을 마이동풍으로 여기면서 계속 꿈나라에 빠져있기가 일쑤였다. 그러면 아버지가 둘째형이 뒤집어쓴 이불을 와락 벗기면서 재차 호통치군 했다. “이눔자식, 싸리긁에서 싸리가 난다구 땅 파먹는 농부의 자식이 과거급제라도 한다더냐?!” 이러면 둘째형은 투덜거리면서도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따라하군 했다. 사실 둘째형이 잠이 많은건 아니였다. 자정이 넘도록 등잔불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다 보니 잠이 모자랄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맏형은 아버지의 말씀에 잘 따라주군 하는데 왜 둘째형은 그러지 못하는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오히려 뒤에서 자주 투덜대군 하는 둘째형이 어딘가 아니꼽게 생각되기도 했다. 썩 후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후에야 나는 이전에 둘째형한테는 다른 꿈이 있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고 맏형은 왜 아버지의 말을 고분고분하고 잘 들었는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터득이 갔다. 기실 맏형한테 꿈이 없는건 아니였다. 조선에 있을 때 일본인학교에서 공부를 했다는 맏형한테 왜 꿈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맏형이라는 리유때문에 그 꿈을 키울수가 없었고 가정에 억매이게 됐던것이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정중임을 떠멜 의무가 있었던 모양이였다. 큰형으로 말하면 일본인소학교를 다녔기에 어느 정도의 지식수양을 갖고 있었고 또한 손재간이 있어 목수일에도 출중했다. 그래서 늘 동네집 집짓기의 “기술일군”으로 불리워다녔으며 어느 해엔가 화룡의 아동저수지를 건설할 때에는 기술골간으로 요청받아 갔다가 정식로동자로 편제를 가지기도 했다. 그 당시 큰형님의 로임은 50여원, 적은 로임은 아니였으나 큰형님은 그 로임으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지 못하고 가정 전반을 돌보아야 했다. 결국 큰 형님은 가정의 맏이라는 중임때문에 로동자로 된것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이는 큰형님으로 놓고 볼 때 자신의 손해는 물론 두고 두고 자식들한테도 빚진 마음으로 살게 됐다.……그러던 우리 가정에 경사가 난건 그 몇년후였다. 오래동안 아버지의 말씀을 귀등으로 흘려보내고 자주 투덜거리기도 하던 둘째형이 글쎄 룡정고중을 졸업하고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했다가 다시 나라의 수요로 연길에 있는 연변일보사 기자로 배치받게 됐던것이다. 실로 “개천에서 룡이 난셈”이였다. 이에 따라 우리 가정은 1952년 화전자로부터 룡정 시가지로 이주하게 되였다.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며 농사만 고집하던 아버지의 성격도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변화를 가져온것일가? 아니면 둘째아들이 출세함에 따라 막내인 나에 대해서도 그 어떤 기대감이 생겼던것일가?… 2 룡정에 온 뒤 나의 인생에도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만 점차 나이가 들면서 세상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해서만이 아니였다. 도시주민들의 생활과 농촌주민들 사이의 생활차이 및 보이지 않는장벽ㅡ 그것은 나의 어린 정신세계에도 사고거리가 생기게 하였으며 “나는 왜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게 부유한 가정이 아닌 빈곤한 농부의 아들로 태여 났는가”고 가끔씩 불평을 부릴줄도 알게 하였다. 거기에 고중을 졸업하고 연변일보사에 출근하는 둘째형은 자주 세상얘기같은것을 들려주며 사람은 결국 머리속에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일깨워주군 했기에 나의 모든 의식이 빨리 튼것도 사실이였다. 한편 룡정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신문기자로 근무하는 둘째형한테 가정일부담이 덜어진 동시에 막내인 내가 이전에 둘째형이 맡아하던 일거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 여름이면 논김을 매고 소꼴을 베오고 또한 겨울이 되면 가마니를 짜고하면서 1년 사시절 일단 집에만 돌아오면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팽이처럼 바삐 맴돌아치기가 일쑤였다. 일을 함에 있어서 나와 둘째형이 다른 점이 있다면 둘째형은 늘 투덜거리는가 하면 일을 해도 늘쩡늘쩡 했고 또한 일을 한 뒤끝이 깨끗하지 못한 반면 나는 일손이 잽싸고도 뒤끝이 깨끗했으며 둘째형처럼 투덜거리지도 않았다. 가마니를 짜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당시 나는 하루에 가마니 20개 이상씩 짰다. 그 당시 가마니 하나에 50전씩 했으니까 내가 하루에 10원씩 번 셈이였다. 지난 세기 50년대초기로 말하면 일당 10원이란 수입은 도시주민들조차 바라볼수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물론 겨울철에만 있는 부업이였고 그 가마니들을 팔아버리는것도 골치거리였지만)였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일만 하면 부모님으로부터 늘 칭찬을 받군 했다. 특히 아버지는 자주 “아들 넷중에서 날 닮은 아들은 그래도 막내인것 같다”면서 푸념을 늘여놓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이렇게 부모님으로부터 늘 칭찬을 받는 나였건만 집에 돌아와 일에 시달리는것이 그닥 좋은것은 아니였다. 그리고 그 칭찬이 별로 반갑지도 않았다. 그건 결코 힘들어만이 아니였다. 다른 도시주민가정의 자식들과 비교가 돼서였다. 매번 도시가정의 자식과 만나고나면 나는 늘 어깨가 처지기 마련이였다. 그리고 창피를 당하는 일도 가끔씩 생기군 했다. 한번은 소꼴을 베여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데 같은 반에 다니는 남학생 한명이 자전거를 타고 휙하고 나의 곁을 지나가더니 휘파람을 쌕쌕 불어댔다. 나에 대한 말없는 무시였다. 그애를 놓고 말하면 웃학급에서 다니다가 늘 락제를 하여 아래 학급으로 내려앉아 나와 한반에 다니는 학생이였다. 하지만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부모덕에 좋은 옷 입고 자전거까지 타고 다니며 우쭐대는 그런 애였다. 그애는 자전거를 타고 저 멀리까지 가버렸으나 그애가 남긴 휘파람소리는 계속 나의 귀전에서 울리는것만 같았고 그애가 계속 나를 비웃고 무시하는것만 같았다. 순간 나는 너무나도 분통이 터진 나머지 메였던 꼴단을 길에 내동댕이쳤다. 꼴단은 땅에 떨어지면서 대뜸 터져버렸고 이러저리 되는대로 흩어졌다. 한편 다시 나의 모양새를 내려다보는 순간 스스로도 나 자신이 비참했고 억이 막히지 않을수 없었다. 무릎까지 걷어올린 바지와 다리에 흙범벅이였고 검정고무신은 구멍이 뚫려 엄지발가락이 툭 튀여나오기도 한 나의 옷매무새는 말그대로 그제날 지주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는 “마당쇠”나 다름없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왼손에 쥐였던 낫을 저만치 던져버리면서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운명을 한탄하는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이런 나를 진정으로 동정하는 애들도 있었다. 특히 녀자애들이 그랬다. 동정심은 녀자애들의 “전매특허”라고나 할가? 그시기 공부라 하면 반급에서 늘 3등안에 드는 한 녀자애가 있었는데 그애는 자주 나한테 먹을것을 주기도 하고 학용품도 사주기도 했다.“길성아, 참 너 공부할라, 집에서 부모를 도와 일을 할랴 몹시 힘들겠구나.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그애의 말과 하는 행실이 고맙긴 했지만 이는 사내애인 나로 놓고볼 때 몹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였고 지어는 비참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였던지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애가 내밀어주는 사탕이나 얼음과자 등을 받지도 않고 휑하니 돌아져 버려 그애를 울린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리고 당시 그애가 왜 나한테 집요하게 접근했었는지에 대해 나한테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진정 나의 처지가 불쌍해 동정한것인지 아니면 다른 그 무슨 목적이 있었던지?…다른 한편 그때로부터 나는 둘째형인 허길룡에 대해 어딘가 인식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둘째형은 꼭 무슨 사상이란것이 있는것 같기도 하고 또한 그로서의 인생이 따로 있는것 같기도 했다. 룡정에 온 뒤 길룡형은 나한테 늘 아버지를 존중하고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지만 자기의 앞길은 자기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진 부지런하고 고지식하고 좋은분이셔. 그리고 불쌍하기도 해. 하지만 우리가 아버지가 시키는대로만 한다면 평생 아버지와 같은 농부로 될수밖에 없단다.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해서 꼭 아버지와 같은 인생이 되라는 법은 없는거야. 나 그래서 가끔씩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기도 했단다.”둘째형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일리가 있었다. 나는 점차 고생은 나의 세대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그때로부터 둘째형은 점차 나의 우상으로 되기 시작했다. 3 나는 1956년에 초중을 졸업했다. 당시 내 나이는 17살이였다. 나는 고중진학을 스스로 포기했다. 가정에서도 내가 고중에 진학하는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문에 “수재” 한명만 있으면 족하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가문에서 나까지 고중에 가면 뒤바라지를 하기 힘든것도 사실이였다. 또한 당시 셋째형은 해방군에 입대한 상황이여서 생산로동에 참가하는 자식은 유독 맏형뿐이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내가 초중을 졸업하자 아버지는 내가 농사일에 종사할것을 원했다. “얘 막내야, 네가 고중진학을 포기했으니 하는 말이지만 사람은 팔자대로 살아야 하느니라. 둘째형은 일하기 싫어하고 공부를 좋아했으니까 신문기자로 됐지만 넌 달라. 넌 고중진학을 포기했고 농사일에도 어딘가 미립이 있으니 이 애비를 따라 농사일이나 열심히 했으면 좋겠구나.”하지만 나는 죽어도 농사일만은 싫었다. 나는 노루꼬리만한 월급을 타더라도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둘째형처럼 깨끗한 옷을 입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그런 직장으로 출근하고 싶었던것이다. 내가 한사코 우기자 아버지도 딱히 막지는 않았다. “중학교를 겨우 나온 눔이 출세를 어떻게 한다고 저러는건지?…” 아버지는 “후-”하고 긴 한숨을 내쉬였다. 그러건말건 나는 월급쟁이로 되려는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월급쟁이 일자리는 절로 굴러오는것이 아니였다. 가문의 팔촌내에 나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자사업에 종사하는 둘째형이 있었지만 그 역시 성격이 곧은 사람이라 누구한테 “뒤문거래”로 청들줄 몰랐으며 거기에 둘째형은 시종 내가 고중진학을 포기한것을 반대하고 있던터였다. 별수 없이 나는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직업을 찾는수밖에 없었다. 인맥을 리용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나같은 농부의 아들한테 인맥이 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였다. 그러던중 누군가 현로동국에 가서 “앉아버티기”를 하면 직업을 찾을수 있다고 귀뜸했다. “통나무에 낫걸기”처럼 모험적인 일이였지만 일루의 희망을 품고 그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결국 나는 이 소문을 들은 이튿날부터 현로동국 마당에서 “앉아버티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첫날은 많은 사람들이 로동국대문을 수없이 드나들면서도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아마 나를 관내에서 나온 구걸군으로 아는 모양이였다. 하다 못해 누구라도 말을 걸어오기만 해도 그 사람의 바지가랭이를 붙잡고 떼질써 보련만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데야 어쩔수 없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이면 사람들이 부랴부랴 출근했다가는 점심때가 되면 몇명씩 나와 퇴근했고 오후에는 다시 출근했다가 해질녘이면 또 점심때처럼 퇴근했다. 한편 “앉아버티기”를 하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였다. 삼복염천에 물 한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여기저기를 뛰여 다니지도 못하면서 꼼짝 않고 앉아있자고 하니 그것도 고된 노릇이였다. 때로는 졸음이 오기도 하고 때로는 눈앞이 새까맣게 되면서 현훈증도 일군 했다. 내가 혹시 잘못 선택하지나 않았는가. 어느 정도 후회되기도 했다. 3일째 되던 날 그날도 가끔씩 나를 얼핏 내려다 보군 하는 사람은 있었으나 여전히 나와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되자 나는 오늘까지만 견지하다가 여전히 가망이 없으면 다음날부터는 포기하리라 작심했다. 그러던 오전 퇴근시간이 되자 낡은 군복을 입은 한 40대 남성이 문으로 나오더니 나를 보면서 곧바로 대문을 나서려다가 다시 나한테로 다가오는것이였다. “얘, 어디에서 온 애인데 매일 여기에서 앉아있는냐? 밥 빌어먹으러 다니는 애는 아닌것 같구…” “맞아요 아저씨, 전 비렁뱅이가 아니예요. 전 일자리를 얻으려고 찾아왔어요.” “뭐 일자리? 너 죄꼬만 놈이 무슨 일을 할수 있겠다고 이러는거냐?” “죄꼬맣다니요?! 전 지금 17살인데요. 얼마든지 일할수 있어요. 집에서도 매일 김매고 소꼴 베고 또 가마니도 짜군 했는데요.” “17살?! 아직 성인도 안되는 놈이 일자리 찾겠다니 안된다. 만 18살 이하한테는 국가에서 일자리를 배치해 주지 않는단다. 그러니 집에 돌아가 김도 매고 가마니도 짜면서 몇년 더 기다려야겠구나.” “싫어요. 이젠 농촌일엔 신물이 나요. 진짜 이젠 농촌일이라면 지긋지긋해나요.”나의 말에 그 남성분의 얼굴은 어딘가 심각해지는 모습이였다.“농촌이 지긋지긋해? 너 정치적으로 아주 락후한 애로구나. 죄꼬만 놈이 농촌을 꺼리다니…”순간 나는 하마트면 “아차”하고 소리를 지를번 했다. 높은 간부앞에서 하지 말아야 할 소리를 했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3일간의 노력이 그 한마디로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고 한탄했다. 어린 생각에도 나의 실수를 알아챘기 때문이였다. 헌데 이상하게도 그 남성분은 “나를 따라 들어오너라”라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나의 가정과 나 본인의 래력에 대해 물으면서 서류를 작성하는것이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도 알려주었다. “너 착하고 총명한 애 같은데 앞으로 농촌이 나쁘단 말을 하면 못쓴단다. 조심하거라. 그리고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2일후에 다시 와서 나를 찾으려므나.” 보아하니 그 남성분은 매우 좋은 사람 같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나는 그분한테 90도로 경례하고는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나오면서 돌아보니 그 남성분은 창문을 통해 내가 로동국 대문을 나가는것을 지켜 보는것 같았다.그날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집으로 돌아왔고 돌아온 뒤 부모님한테 일절 함구무언했다. 어떻게 결정이 내려질지 몰라서였다. 2일후 내가 다시 로동국으로 찾아가자 그 남성분은 “너 정말 운이 좋은 애로구나”라고 하더니 나한테 쪽지를 적어주며 연길현 태양향공소합작사로 찾아가라고 했다.나는 기뻐라 하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와서는 어머니한테 래일 돈벌러가니 이불짐을 싸달라고 했다. “어머니, 제가 직업을 찾았습니다. 공소합작사의 판매원이 됐어요.”내가 소리치며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더니 한동안이 지나서야 나의 얼굴을 다시 빤히 쳐다보며 “우리 막내 다 자랐구나. 어느새 키도 이 에미보다 많이 컸구말이다…”라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는것이였다. 어머니는 너무 기특해하면서도 가슴이 아프던지 나의 이불짐을 싸주며 자꾸 눈물을 훔치였다. “에그에그, 네가 다 돈벌러가다니. 집을 떠나면 다 고생이네라. 부디 몸 조심하거라.” 그 이튿날 나는 룡정에서 기차를 타고 조양천에 도착했다. 조양천까지는 기차로 왔기에 힘들지 않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조양천으로부터는 이불짐을 메고 30리길을 걸어 태양향까지 가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첫직업을 찾게 되였다고 생각되니 힘든줄 몰랐다. 아니, 흥겨운 나머지 저도 몰래 휘파람까지 불었다. (장차 꼭 출세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리라. 그리고 이전에 으쓱하며 나를 깔보던 애들한테 내가 잘된 모습을 보여주리라.) (연재 1) (주: 본 작품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음으로 무단전재 재배포를 금합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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