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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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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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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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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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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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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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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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5)
    ■ 김철균 “사람은 모든 것에 다 사연이 있는 법이란다. 절대 남의 험담을 할 필요가 없는 거란다. 뒤동네의 영덕이네 3형제를 보아라. 3형제중 그래도 제일 공부를 많이 하고 제일 똑똑했던 사람이 둘째인 영덕이었는데 지금의 그를 보아라……” 영덕이란 당시 30살 정도가 된 홀아비었는데 정신분열증에 걸려 한밤중에도 자주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대동강변 부벽루에 산보를 하는 이수일과 심수애는 양인이로다…”를 부르면서 희트테리를 부리군 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왜 정신분열증에 걸렸는냐 하면 그건 어렸지만 나 역시 동네사람들한테서 들은터였다. 일찍 그는 공부를 잘하여 연변제4고중(현재의 훈춘시2중)에까지 다녔었다. 동네사람들에 따르면 당시 그는 혼자 무선통신기(无线电台)를 조립하여 외부에 신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한 수재였다. 그 일로 훈춘현 공안국에 잡혀들어가 며칠간의 조사를 받았으나 원체 출신이 좋은데다 외국과의 연계같은 것이 전무였고 그냥 취미로 만든 것이 밝혀지면서 오히려 장춘의 어느 연구소에서 데려간다 어쩐다 하는 말까지 돌았었다고 한다. 헌데 그가 정신분열증에 걸렸던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고중시절 서로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은 훈춘시가지에 집을 둔 학생이었다. 당시 그 여학생도 영덕이를 몹시 좋아했으나 그녀의 부모가 한사코 반대했던 것이다. 이유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학생이기에 연애는 일찍하다는 것이었다. 헌데 그것이 진정한 이유가 아니었다. 영덕이가 농촌농민의 자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가정에서는 둘 사이를 뜯어놓으려고 연 며칠동안 딸을 가두어놓고 학교에도 못가게 하였다고 한다. 결국 영덕이는 절로 그 여학생의 곁에서 물러났다. 헌데 고민끝에 그것이 병으로 되어 결국 정신이상증에 걸렸고 나중에는 연변4고중에서 퇴학까지 하게 되었으며 병세가 점점 악화돼가기만 했다. “사람이란 너무 총명하고 머리가 좋아도 운명이 사납네라. 사람은 적당한 팔자대로 살아야 한다. 욕망은 크고 그 욕망이 실현되지는 않고 하다가는 병이란 것이 생긴단다.…” 아버지의 얘기였다. 아버지는 또 장애인으로 절망하다 물에 뛰어들어 자결한 청년의 아야기와 결혼 뒤 애를 낳을 수 없어 시집에서 쫓겨난 뒤 친정에서도 들여놓지 않자 한족 홀애비와 동거하고 있는 김옥란이란 여인의 이야기 등으로 많은 것을 들려주었다. 그 당시 이내 나이는 고작 8~9살이었던지라 아버지의 말뜻을 3분의 1가량도 터득할 수 없었던 나였다. 그저 왜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가? 김옥란이란 여성은 왜 한족홀아비와 살고 있는가? 또한 영덕이란 아저씨는 왜 정신병자가 됐는가? 물론 이 모든 것에 대해 그저 현상만 보고 생각했을뿐 그 깊이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할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내가 썩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아버지가 나한테 들려준 얘기들은 말속에 말이 있었다. 이는 아버지가남의 사연을 빌어 자기 자신이 살아오면서 심리고통을 겪어온 것을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었다. 좋게 말하면 그랬고 다른 한편으로 분석하면 그것은 변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일제시기 제대로 된 공부는 못했지만 조선으로부터 유정촌에 와서 야학을 세운 박씨네 형제로부터 시국과 사회에 대한 교육을 일정하게 받았던 아버지는 그 시대로 말하면 비교적 개방적인 청년이었다. 그러했기에 아버지는 부모(나의 조부모)들끼리 맺어준 혼인에 대해 강한 거부의식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 표현의식이란 곧바로 집을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집을 뛰쳐나가 근로봉사로 일본군이 벌여놓은 공사장에 가서 부역을 했고 광복 후에는 민주연군에 참가하여 중국내전에 투신했으며 나중엔 조선으로 나가는 “혁명투사”로 되기까지 했다. 혁명투사ㅡ 참 그럴듯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행동을 놓고 진정한 혁명가이고 애국자라고는 불러주기가 좀 그렇다. 적어도 자식인 나부터가 그렇다. …… 넷째 할아버지와 다섯째 할아버지에 의해 조선으로부터 “끌려온 뒤”에도 아버지는 각종 구실을 대서는 집을 나가 10여일씩 나돌다가 돌아오군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7년 아들인 내가 태어난 뒤부터는 일절 밖에 나돌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그 시기 아버지가 10여일씩 밖으로 나돌 때 과연 어디에 갔었겠는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 나의 엉뚱한 추측이겠으나 당시 아버지가 간 곳이 조선에 있다던 그 여인한테로 간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그럼 그 여인한테로 갔다면 왜 다시 돌아왔을까? 이것 역시 미스테리이다. 나의 판단이 맞다면 아무리 봉건적 혼인에 반기를 들고 나선 아버지었지만 윗어르신들이 건재하는한 그 어르신들의 뜻을 거슬리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로부터 연속 딸 둘을 낳다가 1957년에 아들인 내가 태어나자 다시 들떠있던 마음을 다잡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그렇게도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내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술이 얼근히 된채 동네를 돌아다니며 “우리 집에서 아들 낳았소”하며 자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나의 머리속에서도 기억이 생생하지만 아버지는 어디에서 돌배 한알이 생겨도 호주머니에 건사했다가는 몰래 나한테 주군 했었다. 그러니 내가 들떠있던 아버지의 발목을 묶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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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6
  • 윤리문화시리즈(2) 정조띠의 기원
    [동포투데이] 기원전 수백년 홈로스는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화신” 호언스타스의 아내 아브로디나가 자기의 동생과 성관계를 발생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대장쟁이가 호언스타스한테 몸에 붙는 코르셋(紧身褡- 여자의 속옷)을 만들어주에 아내한테 입히도록 했다. 그러자 호언스타스의 아내 아브로디나는 더 이상 남편밖의 남성과 성관계를 가질 수가 없었다. 하다면 이 코르셋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먼저 나온 정조띠의 형태라고 할 수 있었다. 현재 사람들은 정조띠의 발명을 십자군의 동정시기인 기원 11세기로 추측하지만 이는 실제적인 증거가 없다. 정조띠에 관한 유럽의 기재에 따르면 정조띠의 발명은 1405년 8월 28일이었다. 시인 K 지샬은 이날 정조띠에 관한 시와 함께 한장의 그림도 완성, 그는 “피렌체(佛罗伦萨) 남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무거운 철띠로서 잠그면 이런 모양이 된다”고 설명했다. 당시 그의 시에는 이딸리아의 로마, 베니스, 밀란 등 도시들에서 이런 정조띠를 만들고 있다는 단락이 있었다. 또한 다수 역사고찰자들의 증명에 따르면 이딸리아 파도바의 폭군 프랑시스크 2세(14세기 말 즉위)가 최초로 자기의 모든 부인들한테 정조띠를 착용하게 했는데 이는 시인의 기재와 맞아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 이딸리아 베니스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정조띠는 당시 프랑시스크 2세의 한 왕후가 사용하던 것이다. 그 뒤 유럽에서는 15-18세기 기간에 만들어진 정조띠는 주로 상층사회에서 유행됐고 중세기 기간에 만들어진 정조띠는 주로 부유계층에서 유행돼왔다. 그러다가 후기에 들어 정조띠는 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져 상아를 박아넣은 것이 있는가 하면 금은보석을 박아넣은 것도 있었으며 점점 화려한 장식품처럼 만들어지는 쪽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런 정조띠는 오랫동안 착용하기 불편하기 그지 없었으며 위생문제는 더욱 잘 해결할 수 없었다. 유럽 19세기 남성용 정조띠 출현 영국 빅토리아여왕시기(1836-1901년)에 들어 영국에서는 미성년 남자애들의 수음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남자애들은 밤에 잘 때에도 정조장치를 착용하도록 하였다. 당시 남자애들의 수음문제가 사회문제로 가장 현저하고도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녀자애들이 착용한 수음방지용 정조장치는 역사상의 정조띠와 대동소이(大同小异)하였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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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5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4)
    ■ 김철균 3 학교의 과외보도원을 하면서 동시에 빈틈없는 자녀교양 역시 순자의 삶에서의 주요한 구성부분이었다. 자녀교양에 들어 순자는 우선 연박한 지식을 갖춘 인재로 되기 먼저 참된 인간이 되도록 자녀들을 교양하는데 주로 모를 박았다. 위에서도 언급되다싶이 순자는 가정 구성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공약을 제정했는데 거기에는 아무리 간고하고 어려워도 남을 도울줄 알아야 하지만 남한테 함부로 손을 내밀지는 말아야 하고 남한테서 뭔가를 받아도 꼭 받아도 될 것인지를 생각해보고 받아야 하며 주은 돈이나 물건은 주인한테 돌려주며 주인을 찾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조직에 바쳐야 한다는 등이었다. 이 일련의 공약을 순자는 자녀들을 교양할 때에도 100%로 적용하여 에누리없이 실행하였다. 그리고 자녀들은 여러명 있었지만 큰 아들 영남이에 대한 요구는 그 어느 형제에 비해서도 각별히 높았다. “영남아, 넌 이 가정의 제일 나이가 많은 자식이자 장자이기도 하다. 네가 집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가에 따라 동생들이 바르게 자라는가 아니면 기로에 들어서는가 하는 것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부모가 없을 때에는 장자인 네가 동생들을 잘 이끌어야 하기에 너의 어깨에 놓인 임무가 과중하단다.” 큰 아들 영남이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러루한 교양을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인지 영남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바자루를 쥐고 마당과 골목 등을 쓰는 것부터 그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난 후에는 학교에 다니는 영순이와 영옥이가 옷을 입고 책가방을 메는 것까지 거들어준 다음에야 문밖에 나섰으며 꼭 부모님한테 “다녀 오겠습니다”란 인사를 남기고서야 떠나군 했다. 어른을 존경하고 어른의 말씀을 명심해듣는 것 또한 순자가 자식들한테 배워준 미풍양속 중의 하나였다. 특히 애들한테 세대주인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고 아버지를 존경하도록 타일렀는데 이는 결코 봉건사상과 봉건관념이 아니라고 순자는 생각했다. 이 역시 장자인 영남이가 솔선수범으로 나서도록 순자가 교양을 시켰는데 아니나 다를가 영남이의 행동은 마치도 거울마냥 동생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아버지가 아침에 출근할 때거나 저녁에 퇴근할 때면 형제들은 어김없이 “아버지, 잘 다녀오십시오”, “아버지, 잘 다녀오셨습니까?”하고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한 자식들은 자기네 부모한테만 예의가 밝은 것이 아니라 남들한테도 마찬가지었다. 하여 동네에서는 물론 위생학교의 교원들도 순자네 가정에 올 때마다 자식교양을 참 잘한 가정이라고 부러워하군 했다. 자녀들은 공부도 잘했다. 순자는 애들한테 공부를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애들은 순자가 수학이나 조선어문같은 과목을 잘 배워주기에 순자네 집에 와서 숙제를 하고 복습하기를 좋아했는데 순자는 우선 큰 아들이 공부할 시간, 큰 딸이 공부할 시간 등을 짜놓고 짧은 시간내에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요령 등을 배워주기도 했다. 그리고 과외복습제도를 정하였고 애들의 공부가 끝나면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애들이 한 복습과 숙제를 반드시 검사하고 나서야 시름을 놓군 하였다. 결과 자녀들 모두가 반급에서의 학습성적순위가 앞자리를 차지했으며 거기에 사상품성까지 우수하니 하나같이 반장, 부반장과 학습위원 등 반급의 간부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신흥가두에 집을 둔 학생들은 한결같이 순자의 말이라면 100%로 따라주었다. 그 중에는 이전에 공부하기 싫어하고 거리에서 집단폭력에나 참가하며 말썽을 부리던 애들도 몇몇 있었는데 순자가 가두의 총 보도원을 맡자 그런 애들마저 나쁜 버릇을 고치면서 공부에 열중하였고 따라서 공부성적도 직상승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런 자식을 둔 가정의 부모들은 “총 보도원 순자선생한테 학생을 옳바르게 이끄는 비방이 있다. 부모도 어쩔 수 없이 내버려두는 애들을 저렇게 바른 길로 가게 할 수 있느냐”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편 그제날 하남가의 주정부 서쪽동네에서 함께 살던 의학원의 정규창 교수의 부인 조분단 여사는 이 곳을 지날 때마다 며칠에 한번씩 약속이라도 한듯 순자네 집에 들리군 했다. 딱히 일이 있어 들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순자네가 살아가는 모습이 궁금하여 들릴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순자네 자식들은 “큰 어머니 오셨습니까”라고 꾸벅 경례를 하면서 살갑게 굴었다. 그러면 착하고 예의가 바른 영남이네 형제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군 하였다. 특히 그 중 순자의 딸들인 영순이, 영옥이, 영애 등에 대해 더욱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고와하였는데 어쩌보면 조분단 여사가 일부러 영순이와 영옥이를 보려고 다는다는 감을 주기도 했다. 하긴 순자네가 딸 셋이 있는 반면 조분단 여사네 자식들은 몽땅 아들뿐이었다. ……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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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1
  • 윤리문화시리즈(1) 정조띠 성문화
    [동포투데이] 역사상 여자를 가두어놓고 여자의 은밀부위에 자물쇠를 잠그는 등의 잔혹성은 어떻게 보면 황당할 정도였다. 여자의 은밀부위에 자물쇠를 잠그는 것을 정조띠(贞操带)라고도 했는데 이는 유럽 중세기에 나타난 일종 극히 야만적으로 여자를 학대하는 발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추측에 따르면 여자의 정조띠는 약 12세기에 유럽에서 출현하여 17-18세기에 와서야 그것이 없어졌는바 이는 유럽이 가장 암흑하던 시기이 유행물이었다고 한다. 현재 “정조띠”란 명사가 더는 생소한 것이 아니다. 5년전 중국의 조신이라는 여성이 자신을 위하여 성침해를 방지하는 보험속옷을 “발명”하여 전매특허권을 신청하여 이에 대한 찬반논란이 거세게 일게 했다. 또한 최근 몇년간 국내외 언론에서는 부분적 남성들이 야만적인 수단으로 여성들한테 정조관념을 강요하는 사건들을 보도했고 아울러 부분적 여성들도 남성들한테 정조관념을 강요한 사건들을 보도하기도 했다. 올해초 러시아의 모 언론매체는 “현재 유럽에서 정조띠가 가끔씩 유행, 근 3만명에 달하는 남성들이 정조띠를 착용하는것으로 자신의 성충성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2001년 영국과 독일의 TV프로에서는 본국에서 나타난 정조대에 대해 한바탕 소개하기도 했다. 여성들로 하여금 함부로 외간남자와 키스를 하지 못하도록 구속하는 정조띠 현재의 책과 영화, 그리고 사극중에 사용되는 정조띠를 보면 그 기능과 인식면에서 동서양사이의 구별점이 허다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서양에서는 정조띠가 주로 남성들이 사용하는 물건으로 되고 있다. 서양에서 판매되는 정조띠중 70~80%는 남성들이 사고 있으나 그들이 아랍국가들이나 일본 등 나라에 수출하는 정조띠는 청일색으로 여성용으로 되고 있다. 또한 재미가 있는 것은 서양에서 정조띠에 대한 문장을 보면 작자의 70~80%가 남성이고 내용중 여성 혹은 동성이 정조띠를 착용한 남성에 대해 통제하고 있는 내용 역시 70~80%를 점하고 있다고 한다. 정조띠에 대한 관념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현재의 서방사회ㅡ 하다면 이젠 서방에서 당년의 남성사회ㅡ 정치적 의미로 남성이 여성을 통치하던 시대가 소실되고 새로운 여성통치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럼 그제날에도 그러했을까? 다음기에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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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1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2)
    오대산 불교성지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산서성 오대현 함의: 중국불교의 4대명산중의 으뜸 오대산은 산서성 동북부에 위치, 산중에 다섯개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는데 산정이 평탄하고도 넓어 마치 다섯개의 높은 평지가 있는듯 하여 “오대산”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오대산은 당조시기부터 불교성지로 지명받아오다가 후에 줄곧 각 조대의 황제로부터 예우(礼遇)를 받아오기 시작, 청세조순치황제(清世祖顺治)가 바로 이 산에서 출가했기 때문이다. 오대산은 현존하는 사원이 48개 곳이 되고 중이 수백명에 달한다. 오대산불교성지는 역사가 유구하고 문화가 찬란해 중화민족 문화유산의 주요한 구성부분으로 되고 있다. “조사”와 탑원사 오대산의 사원묘군 중 현통사는 규모가 제일 크고 역사가 가장 유구하여 “조사(祖寺)”로 불리운다. 현통사는 산서성 오대현 대환진북쪽에 있는데 동으로 된 전당 3개가 있고 동탑이 두개가 있으며 문전의 종루에는 만근에 달하는 동종이 걸려있다. 이 종소리는 전반 오대산이 있는 대회진내에 들린다고 한다. 그외 탑원사는 명조시기에 건설, 웅위롭고 장엄하여 오대산의 첫번째 상징으로 되는데 대표성적인 건축물은 높이가 50미터에 달하는 네팔식 큰 백탑이다. “높이 솟아있는” 보살정 보살정(菩萨顶)은 현통사 북쪽의 영취봉(灵鹫峰)우에 있는데 오대산의 5대 대선처의 하나이다. 보살정은 북위(北魏)시기에 건립, 청조황제가 오대산에 가서 배알할 때 일찍 이 보살정을 위하여 비문을 써주면서 그것을 수건할 것을 명령하였다고 한다. 보살정은 지세가 비교적 높고 문전에 108개의 돌계단이 있으며 돌계단위에는 세개의 패방(牌坊)이 있다. 그리고 산문내에는 천왕전, 보살전, 대웅보전 등 주요건물이 있고 양측에는 배전(配殿)이 있으며 뒤에는 선원과 전랑(转廊) 이 있는데 전반 묘는 규모가 방대하고 엄엄하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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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30
  • 오묘한 세계대백과(22) 안개의 형성
    안개의 형성 어떤 날에는 우리가 집문을 나서게 되면 외부의 거의 모든 것을 볼 수 없을 때가 있다. 사위는 자욱한 안개로 뒤덮여 길가의 행인들은 걷는 한편 길을 더듬게 되고 자동차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한마리의 소마냥 천천히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럼 이는 무엇때문일까? 안개는 공중에서 낮게 떠다니는 작은 물방울들이 서로 결합되면서 생기는것이다. 공기 중에는 늘 일정한 수중기가 떠다니고 있으며 기온이 높을수록 그것이 더욱 많아진다. 그리고 공기가 수증기를 집어삼킨 뒤 남은 수증기는 곧 허다한 작은 물방울로 되며 이런 물방울이 많아지면서 안개로 형성된다고 한다. 젖빛안개가 천지를 뒤덮으면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어찌할 방법이 없다. 그러다가 오직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면 공기 중의 작은 물방울들도 증발되면서 안개는 소실되어 오간데가 없게 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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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30
  • 오묘한 세계대백과(21)사계절의 교체
    봄이 되면 백화가 만발하고 기후가 따뜻해지며 여름이면 태양이 불볕같아 작은 새들마저 더운 나머지 숨도 바로 쉬지 못한다. 그러다 가을이면 대지가 쌀쌀해지면서 낙엽이 흩날리고 겨울이 되면 날씨가 혹독하게 추워지면서 나무들이 앙상한가 하면 대지가 백설세계로 변한다. 사계절은 이렇게 부단히 순환하며 한 해가 가면 또 새로운 한해가 다가온다. 하다면 그대는 사계절은 무엇때문에 교체되면서 출현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 기실 사계절의 교체는 주요하게 지구가 태양주위를 공전하는 결과인 것이다. 지구는 운동하기 좋아하는 “아이”마냥 태양 주위를 쉼없이 돌고 돌며 한바퀴를 다 돌면 1년이 된다.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 때면 곧게 서있는 것이 아니라 기우뚱하고 선 채 쉼없이 서쪽으로부터 동쪽을 향하여 공전한다. 때문에 태양이 지구표면상에 직사하는 빛도 변화가 생겨 지구의 남반구와 북반구에서 받는 태양열량 역시 부단히 변화하면서 사계절이 윤번으로 생기는 것이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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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22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 (20) 법륭사
    법륭사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일본, 지점: 나라현(奈良) 의의: 일본 불교문화시대의 종교문화보물고임 법륭사는 기원 607년에 건립, 선덕태자가 세운 불교의 목조결구로 된 사원이며 현재세계서 보존력사가 가장 길고 가장 큰 목조건물이랍니다. 법륭사의 부지면적은 18.7만제곱미터로 동쪽과 서쪽의 두개 사원으로 분류, 서쪽 사원은금당(金堂)과 오중탑(五重塔)을 보존하고 있으며 동쪽사원은 유몽전(有梦殿)으로 돼있다. 법륭사에는 소장품이 수없이 많은바 일본의 건축, 조각과 그림 등 방면의 걸작들이 다수를 차지하며 이는 일본문화와 종교유산의 중요한 조성부분으로 되고 있다. 금당과 오중탑 법륭사의 서쪽 사원에 있는금당은 기원 620년에 건립, 정체의 평면은 정방형과 흡사하며내부에는 정전(正殿)과 배불당(拜佛堂) 이 있다. 배불당의내부벽에는 석카모니상과 여래상이 모셔져 있다. 다음 금당옆의 오중탑은 일본의 3대 명탑중의 하나로서 높이가 31.5미터에 달하며 사람들한테 일종하늘로 날애치는듯한 감을 준다. 그리고 탑의 최하층에는 나량(奈良)시대의 초기에 만들어진 조각상군이 있는데 나랑시대의 조각예술이 고봉에 올랐음을 말해준다. 신비한 유몽전 유몽전은 동쪽 사원의 중심에세워진 건물로서 기원 739년에 세워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팔각형 건축물이다. 전당중앙에는 화강암으로 구건된 팔각형 불단이 있는데 거기에는 제작이 정밀한 구세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전하는데 따르면 당시 선덕태자는사람들의 애대를 받았는바 그가 법륭사를 세운 것은 일찍 꿈 속에서 한 신선을 만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후세사람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 “유몽전”을 세운 것이라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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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22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13 )
    ■ 김철균 위에서 언급되다싶이 과외보도원이란 보수가 없는 “직업”이었다. 아니, 순자로 놓고 말하면 과외보도원을 맡으면서 자주 집의 물건을 학교에 가져다 바치면서까지 학교를 위해 일하다 보니 항상 밑지는 “거래”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었다. 그렇다면 순자네 가정형편이 월등해서인가? 절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미 여러번 언급되었지만 의지가지 없는 고아인 김용환한테로 시집을 왔고 또 몇년간 군정대학에서 공부하는 남편의 뒤바라지를 하였으며 거기에 영남이와 영순이를 연연생으로 낳은데다 그 아래로 영옥이와 영애 이렇게 자녀들이 육속 생기다보니 생활이 펴일 사이가 없었다. 그것도 남편 한명의 노임에 매달려 살다보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여유가 있어서만이 남을 돕는 것이 아니다”란 순자의 좌우명은 학교의 과외보도원생활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학교의 물통 밑창이 구멍나면 집의 물통을 가져가고 비자루, 쓰레기통, 물걸레와 심지어 학교벽보란을 만들 때 쓰이는 널판자까지도 집의 것을 가져가군 했다. 그 중 비자루는 시골에서 친정아버지가 만들어 해마다 몇개씩 보내준 것인데 그것을 순자가 다시 학교로 가져갔던 것이었다. 한편 순자가 이렇게 할 수 있는데는 남편 김용환의 이해와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만큼 남편 용환이는 순자가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그대로 믿고 밀어줄 위인이었다. 그것은 용환이한테 있어서 순자는 항상 “은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교원직업을 단연히 포기하고 자기와의 결혼을 선택한 여인 ㅡ 아내가 교원직업을 버리고 자기한테로 시집온 뒤 어떤 대가를 치렀다는 것은 남편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안해가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의 과외보도원 사업을 맡겠다고 할 때 웬간한 남정들같으면 그것을 극력 반대하면서 “집에서 애들이나 잘 키우라”고 호령할만도 했으련만 용환이는 오히려 적극 지지해나섰다. 건국전의 중학교를 졸업한 순자의 지식과 재능이 그대로 썩는 것이 아까워서라고 할까? 아니면 그토록 사랑하던 교원의 꿈을 과외보도원이라는 무보수근무에 의해서라도 펼쳐보게 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여하튼 김용환은 아내 순자의 과외보도원 사업을 적극 밀어주는 것을 아주 마땅한 일로 간주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과외보도원인 순자를 자주 불렀다. 반급에 그 어떤 문제라도 생기면 순자가 가서 곧잘 해결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순자의 말이 설득력이 강해서인지 학생들은 그의 말을 곧잘 듣군 했다. 학생들을 교양함에 있어서 순자는 절대 강압적이 아니었다. 실제 행동으로 학생들을 감화시켰다. 예하면 반급의 유리창을 닦을 일이라도 있으면 언제 한번 어느 어느 학생이 창문턱에 올라가서 닦으라고 시킨 것이 아니라 번마다 솔선수범하군 했다. 특히 순자가 신흥소학교의 과외보도원으로 된 뒤 수개월이 지나자 둘째 아들 경남이가 생겼는데 아이를 업고 학교활동에 참가할 때가 자주 있었다. 어린 경남이를 업고 바닦을 쓸고 유리창문을 닦군 하는 순자를 보노라면 교원은 물론 학생들 모두가 탄복해마지 않았다. “순자선생님이 있으면 저는 모든 것이 든든해요. 어쩌면 큰 소리 한번 치지 않고 학생들이 잘 따라주게 하는지요? … 전 매일마다 순자선생님이 몰래 기다려지게 되는군요.” 이는 당시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 이 두 학교 거의 모든 담임교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었다. 순자는 또 매번 중앙소학교의 영남이네 반급 혹은 신흥소학교의 영순이네 반급에 들려도 절대 자기 자식한테 먼저 눈길을 쏠리는 법이 없었다. 전 반급의 모든 학생들이 옷은 단정하게 입었는지? 정신면모는 밝은지 하는 것부터 둘러보고 나서야 담임교원한테 반급의 이것 저것 다른 것을 묻군 했는데 언제 한번 “저의 집 애가 어떤가”고 묻는 것이 아니라 “전 반급의 성적이 어떤가?”, “요즘 앓는 애는 없는가?”, “학생들이 위생을 지키는 방면에는 어떤 부족점들이 있는가?” 등등이었다. 한편 당시 순자는 큰 아들 영남이네 반급의 담임교원이 병으로 교단에 오를 수 없게 되자 학교지도부의 허락을 맡고 몇차례 교단에 오르기도 했다. 결과 교수안을 작성한 실력이나 교수하는 능력이 비범하여 학교의 모든 교직원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어서 교원들과 교장선생님 등은 순자가 건국전에 용정의 명신여자중학교를 졸업한 수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일반 “교원이 턱없이 부족한 요즘 세월에 저런 분이 우리 학교 교원으로 돼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하면서 몹시 아쉬워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그렇게도 교원의 꿈을 갖고 있으면서도 교원이 되어보려고 이곳 저곳 해당부문을 찾아다니며 노력해보지 않은 순자였다. 학력과 능력에 거기에 남편 등이 해당부문에 줄을 놓아 손을 써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닐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순자와 남편 김용환의 처사 ㅡ 이는 지금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있을뿐이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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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21
  • 해외견문 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7)사 향 심
    ■ 김철균 여기는 대서양바다의 명주로 불리우는 스페인땅 ㅡ 카나리아군도의 라스팔마스, 지금 이 시각, 밤하늘에 휘여청 걸려있는 저 달은 젖빛안개속에 잠겨있는 이 항구도시를 밝게 비워주고 있다. 이 시각 저 밝은 달은 머나먼 내 고향의 산천도 비춰주고 있겠지? 아니 아닐거야 지금쯤 고향은 한창 바야흐로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맞고 있을거야. 세계의 동방, 제일 먼저 아침해를 맞는다는 내 고향, 오, 고향이 그립구나. 나는 지금 뎃기란간에 기대선채 그 옛날 어느 한 실향민이 두만강을 건너면서 불렀다는 그 노래, “고향하늘”을 조용히 부르면서 그 구절마다를 음미해본다. 푸른 산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새파란 고향하늘 정다운 하늘 그 언제나 고향집이 그리울 때면 저 산 너머 하늘만 바라봅니다 …… 지도에서는 점으로밖에 표시할 수 없는 내고향, 그 곳은 머나먼 차이나 연변의 훈춘이라는 곳이다. 너무나도 철없던 그 시절, 나의 고향에는 때아닌 문화혁명이란 폭풍이 불어와 나의 부모의 목숨을 앗아갔다. “외국스파이”란 누명을 쓰고 매맞아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가 “내가 어쩌면 이렇게 죽을 수 있느냐. 하늘이 굽어본다”며 넋두리하시다가 숨을 거두던 모습, 매를 못이겨 서슬푸른 훈춘강물에 몸을 날린 어머니의 처철한 그 모습, 이한 모든 것들은 어린 나의 동심에도 문학이라는 불씨를 심어주었다. 나는 이악스레 달라붙었다. 나는 쉑스피어, 발자크, 푸쉬킨, 루쉰(魯迅)을 알게 되었고 그네들과 함께 울고 웃고 하였다. 행복도 잠시나마 다가왔었다. 나는 한 이쁘장한 아가씨와 사귀다가 결혼을 했고 미구하여 건실한 아들애까지 보게 되었다. 또한 관계부문에서는 나의 재능을 봐주어 모 라지디방송의 임시 편집원자리까지 알선해주었다. 나는 무등 기뻤다. 비록 국가봉급을 타지 못하고 순 원고료로 살아야만 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였지만 나는 열심히 일했다. 그러노라면 꼭 언젠가는 하느님을 감동시켜 편제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밝은 앞날도 도래하리라 굳게 믿는터였다. 아내 역시 궂은 일, 마른 일 가리지 않고 나의 뒤바라지를 잘해주었다. 헌데 그런 호시절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대졸생 한명이 편집부로 배치받아오자 나는 부득불 그 자리를 양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갖은 노력과 희생을 다해가면서 쌓았던 탑이 순간새에 무너지자 나의 실망은 이루다 형언할 수 없었다. 한편 그토록 하늘처럼 받들어 믿어마지 않던 내가 생활의 평형을 잃고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자 아내의 마음도 뒤따라 평형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것이었다. “재간없는 골방샌님, 돈 못버는 남자, 아내와 가정도 이끌지 못하는 바보, 아니 당신같은 남정을 믿고 섬기는 내가 더욱 바보야…” 이렇게 매일 바가지를 긁어대던 아내의 짜증섞인 잔소리도 종국에는 멎었다. 아내는 갔다. 저 세상으로 간 것이 아니라 나와 어린 것을 버리고 외간사내한테 가서 붙었다. 그날 저녁, 그날도 오늘 이 밤처럼 달은 밝았다. 바로 그 밝은 달빛아래에서 웬 사내한테 거의 매달리다싶이 붙어가는 아내를 보는 순간, 나의 두눈에서는 화염이 활활 타올랐다. “너 이년, 게 섰거라. 너 어쩜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늘이 굽어본다.” 이지를 잃고 완전히 미쳐버린 나는 아내한테 사정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하지만 그 보응으로 그 이튿날 저녁, 불의의 습격을 들이댄 아내의 친척들한테 나는 또한 죽도록 얻어터졌다. 직업과 아내마저 빼앗긴 버림받은 사나이- 그런 상황에 그렇게도 건실하던 아들애는 어쩔라고 그토록 앓던지. 어린 것이 있는 것마저 귀찮았다. 하기에 애타고 분통할 때마다 나는 야성이 발작하여 자주 죄없는 어린것한테 화풀이를 해댔다. 그러다가도 이성을 되찾게 되면 그 어린 것이 하도나 불쌍하여 그것을 붙안고 통곡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또한 오기도 생겼다. 그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어린 것을 잘 키우고 싶었고 나도 살고 싶었다. 아니 이를 깨물고라도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내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나는 탄광으로 갔다. 이전에는 사람이 무슨 할 것이 없어 하늘 두층을 쓰고 사는 탄광일을 하느냐고 하찮게 보아오던 탄광ㅡ 그런 곳으로 이번에는 내가 찾아갔다. 일을 좀 시켜달라고, 살길도 마련해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신체가 약골인 나를 보더니 그 어느 탄부도 나와 함게 같은 막장에서 일하려 하지 않았다. 다행이도 탄광주인이 나를 봐주어 석탄운송차가 오면 석탄을 실어주는 일을 나한테 맡겼다. 허나 며칠 안가서 운전사들이 자주 주인한테 불평을 토하는 것이 눈에 띄였다. 하긴 남들이 한시간 정도면 다 싣는 석탄을 나의 힘으로서는 두시간도 모자랐으니 말이다. 남한테 신세를 지는 것도 한두번이지 그냥 주인을 욕보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일도 며칠 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고 말았다. 온갖 버림을 받으면서도 살겠다고 발버둥질을 친 내가 한심할 정도로 가증스러웠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 모두가 더없이 소중한 것들이었다. 세상이 넓어도 이 내몸 하나를 건사할 곳이 없던 그 세월, 만신창이 된 나를 용납해준 이는 그래도 연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철준형이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철준형 역시 애매하게 오쟁이를 지고 이혼한 몸이였다. 그 뒤로 두 홀애비가 같지 않은 두 어린 것을 거느리고 사는 특이한 가정이 산생하였다. 철준형은 부엌에서 손풍구를 돌리고 내가 부뚜막에 쭈크리고 앉아 쌀을 이는 그 장면, 우리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마주보며 허구프게 웃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헌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경제난이었다. 철준형 혼자의 봉급으로 세방값도 물고 사람 넷의 호구도 해야 했으니 철준형이 자주 여기저기로부터 돈을 꿔 들이대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무리 철면피한 인간인들 이런 형국에 어찌 계속 눌러앉아 있으랴. “형, 난 가오. 예서 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 하지만 나는 가야 하오. 나 때문에 형까지 망하게는 할 수가 없소. 부디 안녕.” 이런 메모를 남긴 나는 어린 것을 이끌고 그 집을 나왔다. 버스터미널로 온 뒤 버스표를 사고 나자 나의 호주머니에는 단돈 1위안 45푼밖에 남지 않았다. 이렇게 훈춘행버스에 오르려고 줄을 서던 찰나, 갑자기 철준형이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로 나의 뺨을 두번이나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이 못난 놈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렴 입에 풀칠이야 하겠는냐. 가자, 어서 말들어!” 그날 밤, 나와 철준형은 둘 다 배갈 한병씩 굽냈다. 그러고는 울었다. 철준형은 나를 때린 것이 가슴 아프다고 울었고 나 또한 그의 소행이 고마워서 울었다. … 그러던 내가 철준형을 포함한 몇몇 형씨들의 도움으로 해외노무송출일군이 되어 고향을 떠난 것은 1991년 3월 18일이었다. 라스팔마스에서는 4-5미터씩 되는 선인장을 쉽게 볼 수 있다 달빛밝은 라스팔마스의 이 밤, 이 세상이 작다하게 주름잡고 다니는 대형선박의 마도로스가 된 오늘 나는 세계에서 유명한 네델란드의 로테르담항구에도 입항해보았고 지난 세기 80연대 초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가렬한 해상전을 벌이던 남미주의 포클랜드군도에도 가보았으며 “연탄동네”라고 불리는 아프리카의 원시부락에도 다녀보았다. 특히 아버지가 생전에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다는 한국의 울산에도 입항해서는 옛 조상의 산천에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저 세상에 간 고인한테 얼마만한 위안이라도 드렸다. 그러면서 나는 영영 귀국하지 않고 이곳 라스팔마스에 아주 정착해버릴 생각도 자주 해보았다. 이는 실현될 수 없는 호언장담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얼마전 입항시에도 라스팔마스 “호텔강촌”의 이횡권 사장님은 나한테 이렇게 귀띔해줬다. “김군, 김군같은 문화인은 사회에 대한 적응이 빠르니까 고향에 대한 미련같은 건 아예 싹 버리고 이 곳에 발을 붙이소. 이곳에서는 능력과 재간이 있는대로 써주니까 중국처럼 국가공무원이요. 농민이요 하고 영원한 탈을 씌우는 일이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것이요.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보이소.” 또한 이횡권 사장님의 부인이며 한국순복음교회 라스팔마스지부의 전도사인 유혁선 여사는 “아저씨, 하느님을 믿으세요. 하느님은 공정하시고 세상의 모든 불행한 이들한테 복음을 준대요. 지는 죄는 용서해주고 불쌍한 사람은 구해준대요. 믿음을 가지세요, 아저씨”라고 하며 나까지 자기와 같은 열광적인 기독교신자로 키우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는 “호텔강촌”에서 접대원으로 일하는 콜롬비아 아가씨 수산나의 화끈한 사랑도 받았다. 사랑에는 국경도 민족도 없다는데 이혼까지 한 내가 수산나의 사랑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 역시 그녀를 깊이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오빠, 난 무서워. 오빠가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기 마련이 아니야? 너무 정들가봐 무섭고 와이프가 있는 오빠를 붙잡고 있기도 무서워…” 만날적마다 이렇게 고충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떨구는 수산나, 여자의 눈물앞에선 모든것이 약해지기 마련이랄가. 나 역시 그 낯선땅에 정착해보려고 여러번 고민도 해보았다. 하지만 나한테는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할 더욱 큰 이유가 있었다. 떠나올 때 8살밖에 되지 않은 나의 아들애, 항상 4촌형이 입던 헐렁한 옷을 물려입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이 아빠를 쳐다보며 뭔가 바라는듯하던 아들애, 그 애의 모습이 하냥 주마등처럼 스쳐지나면서 서양의 아무리 황홀한 세계도 나의 몸을 오랫동안 끄당지는 못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이횡권 사장님의 진정과, 울며 매달리는 수산나를 떼여놓고 돌아설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지만 나는 기어코 돌아가야만 한다. 한편 고향도 그제날의 고향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한국의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신동아” 등 간행물에 소개되는 나의 고향은 지금 한창 두만강하류의 개발로 북적인다고 한다. 그러면 고향도 가난의 묵은 때를 벗겨버리고 새로운 동북아의 “금삼각지대”로 거듭날 날도 멀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더욱 돌아가야 한다. 내 아들과 함께라면 두번 다시 가난이 들이닥치고 두번 다시 버림받아도 달갑겠다. 푸른산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새파란 고향하늘 정다운 하늘 다정한 동무들과 시내가에서 버들피리 불며불며 놀았습니다 ……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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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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