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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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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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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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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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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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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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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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 동년을 회억하여 ( 3 ) 할아버지편
    저자: 리락용(1946~현재) 전주리씨43세, 의안대군파 21대손 2. ‘땅과 농사는 天下之大本’이다. 농사는 天下之大本이다. 할아버지는 밭이 일체를 결정하며 밭이 없으면 설 자리도 말할 자리도 없으며 밭이 있으면 근본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였고 또 한 평생 그 밭을 위하여 분투하시였다. 할아버지는 후세에 다시는 밭이 없는 치욕을 물려 주려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아름드리 나무를 베여 내고 그 자리에 그 재료로 집을 짓고 그 주위에 밭을 개간했는데 지금 보면 그 밭 면적은 한상(垧)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아래 마을 강변을 개간하여 수전을 만들었는데 그 면적도 반상(垧)은 되는 것 같다. 이로서 그때에도 의식주 문제는 기본상 해결된 것 같다. 그 후에도 할아버지는 계속하여 유동촌 밭에 백여메터 되는 수로를 파서 장풍동 하천과 봉암동 하천을 끌어들여 수전을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않고 봉암동 하천 량쪽 황무지를 계속 개간하였으며 땅 한 뙈기라도 사들여야 마음을 놓았다. 우리 집이 전부의 주요 재산은 밭과 농기구 였다. 할아버지는 돈을 모아 밭만 사들였다. 특히 일본이 망한 후 연변 조선 사람들중 돈과 땅이 있고 공산 혁명의 형세를 아는 사람들은 헐 값으로 밭을 팔고 조선에 갔다. 이리하여 밭 값이 눅어 지자 할아버지는 형세를 모르고 땅이 눅다고 많이 샀다. 그후에 광복을 맞아 외지에서 일하던 둘째 셋째 아들들이 집이 돌아와 장풍동 집에 식구가 많아지자 번동에 밭을 사고 집을 지었다. 그리고는 둘째 숙부에게 장풍동 집과 주위의 밭을 주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할아버지 토지 구매욕은 형세를 모르고 48년 토지개혁 이후에도 계속 되였다. 하여 가을이 되면 앞마당에 낟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졌다. 할아버지는 밭을 부치기 위해 자식들이 집을 떠나 직장을 찾는 것도 반가워 하지 않았다. 45년 8.15광복후 도문철로 기관차 부사수로 일하다 일본 놈이 감방에1년2개월 갇혀 있으면서 전념병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기적같 이 살아온 둘째 숙부와 도문철도 기무단에서 일하다 광복을 맞으며 잠시 돌아온 셋째 숙부에게 정부에서 복귀 통지서를 보냈지만 할아버지는 그들을 꽁꽁 묶어두고 보내지 않았다. 만약 그때 숙부들이 복귀했다면 오늘 같은 신세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셋째 숙부가 조선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토지개혁 이후까지 밭을 사들여 아버지가 안 계시는 우리 집에 밭이 너무 많아 할아버지 혼자서 부치기에는 아주 힘들었을 것이나 할아버지가 밭에 못 나가게 하여 할아버지가 일하던 기억은 없다. 다만 넓은 앞마당에 집채 보다 더 높은 벼 낟가리 조 낟가리 콩 낟가리가 줄지어 있었던 기억만 생생하다. 남들이 낟가리는 이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우리 집 앞마당은 아주 넓었는데 봄에는 오이 고추 가지 마늘등 채소를 심어 먹고 가을이면 탈곡장으로 사용했다. 인상 깊은 것은 벼 조 콩등의 탈곡이였다. 벼 탈곡은 어른둘이 발판을 밟아 고리가 달린 원통을 돌리면서 벼를 탈곡했는데 힘들어 할 때에 한사람이 두 사이에 끼여 들어 밟아주군 했다. 호기심이 많고 작난꾸러기인 나는 어른들이 말도 듣지 않고 어른들 사이에 끼여들어 발판을 밟기도 했는데 도움은 커녕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조 탈곡은 할아버지가 얇은 철판으로 만든 가리개를 사용하였으며 어머니와 삼촌들은 자작나무를 곱게 가공하여 만든 가리개를 사용 했다. 혹시나 어떤 때에 할머니도 참여했는데 앉아서 무딘 칼로 조 이삭을 자르곤 했다. 이렇게 잘라낸 조 이삭은 마당에 펴놓고 소가 군재를 돌리며 끌고 다녔다. 어른들이 마당 복판에서 소를 몰았는데 나도 끼여 들어 소를 몰기도 했다. 군재가 끝나면 도리깨로 낟알을 철저히 털어냈다. 이미 60이 넘으셨고 중병에 계신 할아버지는 이 모든 일을 주관하셨으며 손수 다 하였다. 사랑채에는 큰 뒤주가 세 개 있었는데 널판으로 만든 뒤주에는 벼와 조, 조짚으로 만든 뒤주에는 콩을 보관했다. 벼 뒤주는 너무 높아 나는 무서워 올라 가지도 못했다. 당시4-50년대에 장풍동 골안에서 입쌀밥을 먹는다는 것은 정말 희한한 대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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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21
  • 【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2)
    ■ 김철균 순자네 친정형제들을 보면 둘째 오빠 김구준이네가 연길시 공화대대에 살고 있었고 셋째 오빠 김구완이네가 개산툰에서 살고 있었으며 남동생 김구춘이는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중 둘째 오빠 김구준이네는 한뉘 농촌에서 살다 보니 그저 마음치레나 할 줄 알았지 세상물정에 대해 아는 것이 극히 적었고 많은 거래에서 남한테 당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둘째 오빠가 사망하자 형님이 혼자서 잔밥들을 거느리고 있는 이 집의 가정형편은 점점 어렵게만 돼갔다. 그러던 중 어느 한번은 둘째 오빠네가 연길현 산골인 신광이라는 곳의 어느 한 가정으로부터 중돼지 2마리를 사왔는데 사온 이튿날부터 돼지가 왝왝 토하면서 먹지를 않더니 일주일도 되지 않아 2마리 모두 죽어버렸다. 이미 병든 돼지를 사온 것이 분명했다. 돼지 2마리의 값은 그 때의 돈으로 90위안, 가난한 농민의 가정으로 놓고 말할 때 이는 실로 떼 돈이나 마찬가지었다. “돼지 두 마리를 키워서 팔아 집살림에 보태려고 했는데 아이구 안될 놈은 앞으로 넘어져도 뒤통수를 깬다고 휴유ㅡ…” 형님의 하소연을 듣는 순자의 마음은 괴롭기 그지 없었다. “그래, 병든 돼지라는 걸 진짜 몰랐단 말이유?” “알았으면 왜 병든 돼지를 사왔겠수.” 형님은 하소연을 하면서도 원 돼지주인을 찾아갈 궁리는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럼 이제라도 원 주인한테로 찾아가 도리를 좀 따져 보기오. 아무리 팔아버린 돼지라 해도 팔아버린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돼지가 죽었는데 왜 책임이 없겠소?!” 그러자 형님은 순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다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 돼지의 주인과 시비를 캐서 이길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좌우간 가보기오. 길고 짜르고 하는 건 대 봐야 할게 아니오?!” 형님이 주저하자 순자는 조카를 불러일으켰다. 년로한 형님이 길 떠나기 불편하기에 조카와 함께 가기로 하였다. 그때는 신광이라는 곳은 연길에서 버스도 통하지 않는 산골이었다. 순자와 조카는 걸어서 길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순자네가 하루 종일 걸어서 원 돼지의 주인이 사는 신광에 도착하니 해가 져서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정맞게도 그 주인의 집을 찾아가니 어디로 외출했는지 문에는 자물통이 잠겨져 있었다. 다행히도 그 동네에 먼 친척집이 있어 순자와 조카는 그 친척집에 들어가 하루밤 지낼 수가 있었다. 원 돼지의 주인은 이튿날에 나타났다. 순자네가 찾아온 사연을 말하자 처음에 그 주인은 “돼지가 죽은 것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고 하며 하늘이 낮다 하고 길길이 뛰었다. 여자 둘이 찾아갔다고 업신여기는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조카 혼자서 찾아갔더라면 말도 못붙일 정도였다. 하지만 순자는 달랐다. 착하였지만 시비를 캘 줄 알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하게 나올줄도 아는 여인이었다. “여보시요. 여자들이라고 업신보지 마시우. 원래 병든 돼지가 아니구서야 어떻게 일주일도 되기 전에 2마리 다 죽을 수가 있수. 우리 함께 공사수의소에 가서 다시 시비를 캐봅시다.” 수의소로 가보자는 말에 그 주인은 어딘가 켕기는지 말투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번거롭게 공사수의소에 가는 일이 없이 좋도록 합의합시다. 그럼 두 분이 이 먼 곳으로 찾아온 걸 봐서 내가 그 손실의 절반을 배상해주겠수.” “안 돼요. 돼지가 이 집에서 기를 때부터 병든 것이 분명하니 2마리의 값을 몽땅 배상해야 합니다.” 순자는 딱 잘라 말하면서 그렇찮으면 그 며칠동안 돼지를 먹인 사료값과 노동공가 그리고 손실비까지 함께 계산해서 받겠다고 못을 막았다. 그 주인은 더이상 고집을 부려봤자 이 여인을 이길 수 없다고 여겼던지 180도로 태도 변화를 보이면서 그럼 그렇게 하자고 수긍하였다. 아마 순자를 도시에서 온 높은 간부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 날 순자네는 돼지 두마리의 절반 값인 40위안만을 받고 돌아섰다. 나머지 절반 값은 한 달 후에 받기로 하고 말이다. 주인이 지금 가진 돈은 이것 뿐이라고 하도 사정하니 어쩔 수 없었다. 주인의 말 그대로 그한테 진짜로 그 이상의 돈이 없을 수도 있었다. 하긴 그 때의 세월에 현금 40위안이라는 것도 도시직원의 한달 노임에 맞먹는 액수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고모, 정말 대단해요. 전 돼지값을 받아낼 궁리도 못하구 그저 속만 태웠는데 그걸 언제 다 생각했수?” 조카는 40위안을 받은 것만 해도 아주 다행으로 여기는 기색이었다. “사와서 일주일도 되지 않아 2마리가 다 죽었는데 그게 문제가 없어? 만약 수의소에 가서 시비를 캐면 원값에 손실비까지 더 받을 수도 있는 일이야.” 그 말에 조카는 순자에 대해 내심 탄복해마지 않았다. 순자는 둘째 형님네를 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발벗고 나섰다. 후에 둘째 형님네가 또 돼지새끼를 사다 기르게 되자 집의 구정물을 받아서는 거의 이틀에 한번씩 둘째 형님네 집에 보내 주었는데 어떤 날에는 공화촌까지 날라다주었고 또 어떤 날에는 연길교 부근까지 이고가노라면 마중을 오는 둘째 형님을 만나서 넘겨주기도 했다. 여하튼 옛날부터 순자는 올케라면 친언니 이상으로 따랐고 진심으로 도와 주었으며 그 마음은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마찬가지었다. 그 외 1979년 개산툰에 있는 셋째오빠 구완이의 셋째 아들 길성이가 직장에서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 순자가 길성이의 친어머니 이상으로 정성껏 간호해주어 의사와 간호원들마다 처음에는 모두 순자가 길성이의 어머니인줄로 착각하여 화제에 올랐었다. 그 때 길성이 또한 어머니를 집에 보내고 고모(순자)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하여 길성이의 어머니 역시 시누이(순자)한테는 두손 들었다고 감탄했다. 이런 일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1982년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남동생 구춘이의 딸 김순희가 출산할 때도 그랬다. 출산직전 임산부 순희는 진통을 올 때마다 고통을 호소하며 고모(순자)부터 찾군 했다. 그러면 순자는 지체없이 다가가 순희를 달래기도 하고 여기저기 주물러주기도 해주어 친 어머니인 구춘이의 부인이 더욱 감동을 받았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1973년 6월 연길시 하향지식청년 학부모대표대회에 참가한 후 남긴 기념사진) 1969년의 여름, 전 주 우수학부모대표대회가 수부도시 연길에서 열렸다. 순자는 당시 연길시 신흥가두에서 유일하게 우수학부모대표로 선발되어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가 끝난 뒤 대회 주최측에서는 우수 학부모대표들이 여러 갈래로 팀을 나누어 주내에 산재해 있는 집체호들을 순회방문하기로 결정했다. 그 때 순자가 소속된 대표팀이 방문하는 집체호로는 안도현에 있는 여러 대대의 집체호들이었다. 순자는 당시 10여일간에 거쳐 참관방문한 집체호 중 제일 마지막으로 찾은 집체호가 가장 인상에 남았다. 그 집체호가 바로 상해지식청년들이 생활하고 있는 안도현 장흥공사 서북대대의 한 집체호였다. 서북대대는 안도현 소재지에서도 30여리 떨어져 있는 험한 산골이었다. 순자네가 찾아가자 처음에 집체호 청년들은 별로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를 보아 이전에 많은 방문팀이 다녀갔어도 그들한테 별로 도움이 될 일을 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집체호 청년들이 사는 꼴은 말이 아니었다. 모주석께서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고 했으나 그들이 사는 꼴을 보는 순간, 순자는 이는 모주석의 뜻과는 다르게 번져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른지 몇해가 되는지 갈라터지고 쥐구멍이 숭숭난 굴뚝아래와 불을 때면 연기가 꽉 차는 방안 … 모든 것은 이것이 사람이 사는 집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벼알이 나무에서 달리는줄로만 알면서 자라던 도시의 철부지들이 이 두메산골에 와서 당하는 고생은 순자로 하여금 몹시 가슴이 아프게 했다. 특히 자식 2명을 농촌집체호에 보낸 어머니로서의 순자는 그 애들이 도무지 남의 자식으로만 보이지를 아니했다. “여보세요. 우리가 이 곳으로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애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애들이 사는 꼴을 좀 보세요. 가슴이 아프지 않습니까?!” 순자가 신발과 옷을 벗고 나서자 방문팀의 기타 몇몇 성원들도 동조해나섰다. 그날 대표팀은 흙을 이겨가지고 굴뚝밑과 부뚜막 그리고 구들장에 생긴 틈을 발라주었고 굴뚝에 숭숭 난 쥐구멍들도 막아주었다. 일을 마친 후 집체호의 부엌에 불을 지피자 “웅 ㅡ”하고 소리까지 내며 불길이 구들고래쪽으로 빨려 들었으며 방안 온들이 골고루 따뜻해나는 것이었다. 방문팀이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런데 집체호애들이 옷을 입고 떠날 차비를 하는 순자를 둘러쌌다. “마마(어머니), 가지 말아요. 마만, 우리의 친 어머니와 같아요. 마마, 제발 가지 말아요.” 애들은 순자를 둘러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순자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둘러보니 큰 대야에 빨래거리를 담아놓은 것도 여기 저기에 보였다. 방문팀의 다른 성원들은 떠났지만 순자는 다시 옷을 벗었다. 그날 순자는 애들의 빨래를 다해주고 이불까지 해주느라고 밤새껏 진땀을 빼야 했다. 특히 이불을 하자고 보니 바늘이 5센치미터 길이도 안되는 바늘뿐이어서 손가락끝이 심하게 닳아 뭔가에 부딫쳐도 기절할 정도로 아프기가 일쑤였다. 그 이튿날 상해지식청년들은 떠나려는 순자를 붙잡고 또 울음을 터뜨렸다. 순자는 그들한테 “후에 꼭 다시 오마”하고 열번도 더 약속을 하고서야 그들과 떨어질 수 있었다. 전날밤에 비가 내리고 이튿날 날씨가 개여서인지 날씨는 제법 쾌청하였다. 헌데 비온 뒤의 개인 날씨라 돌아오는 길에 순자는 몇번이고 뱀무리와 맞다들군 했다. 그럴 때마다 몹시 놀라면서 가슴을 붙안군 했다. 안도에서 돌아온 뒤 순자는 자주 그 상해지식청년들이 고생하던 모습이 머리속에서 맴돌면서 마음은 늘 괴롭기만 했다. 집체호에서 생활하고 있는 영남이, 영순이도 마찬가지로 고생이 막심할 것이란 생각이 들자 그 괴로움은 더해만 갔다. 순자는 자식들이 생활하고 있는 집체호들을 돌기 시작했다. 어느 한 집체호에 갈적마다 부뚜막과 굴뚝 등을 손질해주는 등으로 일손을 놓치 않았다. 물론 상해지식청년들이 살던 그 서북대대 집체호로 다시 간다던 약속을 어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1973년의 어느날 영옥이가 있는 안도현 장흥공사 장흥대대로 갈 때는 토마토 한 바구니나 이고 30리가 되는 산길을 걸어서야 집체호에 도착, 집체호의 모든 성원들이 눈물이 나도록 감동되게 하였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21
  • [연재]동년을 회억하여 (2) - 할아버지편
    저자: 리락용(1946~현재) 전주리씨43세, 의안대군파 21대손 1. 나의 동년  나는 지금도 1950년부터 있은 사건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나의 동년을 회억하려 한다. 나는 여러번 어머니와 숙부,숙모들과 옛이야기를 나눌 때 나의 기억을 말하곤 했는데 모두들 나의 또렷한 기억에 대하여 놀라고 탄복해했다. 나는 1946 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번동에 지은 새 집에서 태여 났다. 나의 행복한 동년을 쓰려면 먼저 할아버지 아버지의 걸작인 지신향의 일류의 집부터 먼저 쓰게 된다. 봉금령이 취소되자 수천수만이 조선 사람들이 연변으로 들어오며 각지에 많은 조선사람 마을이 생겨났다. 청정부는 연길 룡정으로 가는 이민들이 길목인 지금 룡정시 지신에 관리기구 화룡욕(和龙峪) 통상국을 세웠는데 내가 세상 알고 학교에 다닐 때까지 화룡욕 아문 토성이 있었다. 그후 58년 대약진 시기에 토담을 허물어 퇴비를 하면서 없어졌다. 이전에 어른들은 이곳을 和龍 아문(衙門)이라 불렀다. 이리하며 아문城 남쪽은 城南이라 하고 동쪽은 城東이라 하였으며 서쪽고래는 새풀이 많다하여 샛골이라 하였다. 성남으로 가는 첫마을은 마통새 지팡(地方)이라 하고 좀 더 올라가면 회령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라 회령촌이라 하였고 또 남으로 올라가 오른쪽 고래는 樊씨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樊洞이라 하였고 중간고래는 張豊이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張豊洞이라 하였는데 해방 후에 오래오래 풍년이 들라고 동음 글자로 바꾸어 長豊洞이라 하였고 왼쪽 고래는 오봉산아래에 있다고 五峰洞(노루막이라고도 함)이라 하였다. 서러골에 가는길과 오봉동에 가는 길어 귀에는 성이 董가라는 지주가 토성을 쌓고 살다가 해방전에 이사갔다. 지금 부르는 제일촌은 이전에 마통새(漢朝통역을 한다고 통새라 했다) 지팡(地 方 )이라 하였는데 마씨는 이 마을 지주로 높이가3- 4m되는 높은 토성을 쌓고 살았다. 해방후 그들은 청산을 맞고 살다가 심양에 이사가고 지금은 토성도 다 무너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해방후 이 마을은 성남에 올라가는 첫 마을이라 제일 촌이라 불렀다. 할아버지는 장풍동 초창기 개척자의 한분이시다. 1913년 할아버지가 이곳에 이사 올 때만 하여도 장풍동은 3-4호가 사는 인구가 적고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한 未開發 地區였으나 지주 張豊의 地畔였다. 할아버지는 큰 고모를 데리고 한 살된 아버지를 업고 조선 함경북도 회령군 벽성면에서 보리쌀 한말과 쪽바가지 하나를 허리춤에 차고 빈주먹으로 서러골령 70리 고개를 넘어 장풍동에 왔다.  당시 장풍동에는 지주 장씨 외에 조선 이민 3-4호가 금방 와서 개발하며 거주 하였다. 그중에는 유동촌과 장풍동 아래 마을에 노할아버지와 그의 큰 아들과 셋째 아들도 있었다. 30년대에 유동촌에 집들은 일본놈 토벌대가 항일 지사들이 활동 장소라 불태워 버렸다. 당시 노 할아버지는 한해 먼저 장풍동 아래 마을에 와 자리를 잡고 이듬해에 할아버지를 데려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지금 장풍동 웃 마을에 아름드리 고목을 베여 내고 그 자리에서 베여낸 재목으로 8간 집을 짓고 계속하여 주위의 고목을 채벌하며 토지를 개간하였다. 피득(언뜻) 생각하면 이 주인없는 땅은 개척만하면 다 내 땅인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성남에만 하여도 지주 넷이 있었는데 그들은 馬氏 樊氏 張氏 董氏다. 이곳의 매 한 치의 땅을 개척하면 모두 지주에게 엄청난 대가를 치려야 하였다. 이 지주들은 모두 외지에서 온 한족들로 관가에 뢰물을 먹이고 땅을 차지하고 이민들이 피와 땀으로 지주가 된 자들로 목적만 달성하면 모두 급급히 이 곳을 떠나버려 어머니가 35년에 장풍동으로 시집왔을 때는 그들은 이미 떠나간 뒤로 그후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당시 도끼와 톱 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름드리 고목을 베여 내고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던 그 로고가 어떠했겠는지는 지금 그 누구라도 조금만 생각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장풍동 윗마을 서쪽 구벅이(구벅은 구석의 함경도방언)에 팔간집을 짓고 그 집에서 근 사십년간 사셨는데 동네사람들은 그 집을 구벅이집이라 하였다. 그후 둘째 삼촌과 세째 삼촌까지 결혼하고 1945년 8.15광복에 외지에서 일하다가 돌아와보니 집 식구는 16명이나 되여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할아버지는 번동아래에 집터를 잡고 밭을 사들이고 지신구에서 제일로 자랑하는 열간 집을 지었다.  이 집은 할아버지의 자존의 걸작이었다. 직경이 50cm넘는 대들보로 받쳐진 웅장한 열간 큰 집에 남들의 살림집 못지 않는 사랑채가 있었고 앞뒤에 넓은 터전, 뒤에는 과일나무, 안밖을 백토로 칠한 새하얀 전통적 조선식 건물, 지붕은 조이짚을 량쪽을 짤라서 예였는데 특히 조이짚은 잘 썩지 않는 특점이 있어 만년 먹기라고 한다. 1954년 우리가 이사 간후 우리 집을 사다가 새로 지은 집에서는 55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이 그 짚 이영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 집들은 웃 방만 천정을 눌렀는데 우리 집은 웃방과 정주간 모두 천정을 누르고 정주간에 일본 군사용 밀페식 고급 펌프를 안장하였으며 직경이 1m넘는 무쇠 물독 그리고 펌프주위와 가마 후런은 콩크리트로 하였다. 그 때만 하여도 콩크리트는 매우 귀하였다. 이런 집은 40년 대가 아니라 5-60년대에도 보기 드물었다.  집에는 소, 수레, 벼 탈곡기, 군재, 가대기등 농기와 방아간에는 멎진 방아, 사랑채에는 베틀과 커다란 뒤주와 풍기가 있었다. 風機는 당시 일반적으로 쌀을 찧을 때 사용했는데 할아버지는 탈곡시에 사용 하였다. 집안에는 재봉기, 축음기, 매돌, 직경이 70cm가 넘는 피나무로 가공한 보기 좋은 가벼운 매판, 직경이 50cm넘는 참나무로 가공하여 만든 떡구시, 그리고 각종 크기의 함지 책상과 크고 작은 밥상, 특히 매판과 함지는 모두 피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직경이 1m넘는 나무를 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며 몇 십년을 사용하여도 트고 갈라지지 않았으니 그 건조 가공 기술도 대단하였다. 그리고 떡구시를 만든 자작나무도 직경이 50cm 넘는데 그렇게 땅땅하고 비틀게 꼬여 자란 곧은 나무를 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창문과 간문은 아주 정교하고 단단하고 맵시 좋았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목수기술이 아주 좋아 벼탈곡기 제외한 이 모든 것들을 전부 손수 만드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자기의 두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후대들을 위하여 살기 좋은 리상촌을 건설하였다.  나는 할아버지 전성기에 태여 났기에 나의 동년은 아주 행복하였다. 우리 집에는 오가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나의 친구들도 많이 왔는데 옥인이 옥봉이는 경상적으로(자주) 오고 때로는 고모사촌 춘호 장풍동에 10촌동생 옥련이도 놀러 왔다. 우리는 세감질(소꿉놀이)을 놀거나 숨박꼭질 아니면 강변 모래톱에서 혹은 뒷가 산에서 뛰놀았는데 뒷산은 돌이 많아 개간하지 못하여 초목이 자란 그다지 크지 않은 산으로 우리가 놀기에 맞춤했다. 봄이면 노란나리. 백합, 도라지꽃, 함박꽃과 이름 모를 꽃들이 많이 피였다. 그리고 고사리, 삽찌, 닥시싹, 고추나물, 우정금등 산나물도 있었다. 그 산 아래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심어 놓은 배나무, 사과배나무, 돌배나무, 질구배나무, 오얏나,무 살구나무들이 있었다. 우리 집 과일 나무는 봄에 별로 꽃들이 많이 피지 않았는데 둘째 숙부네집 과일 나무가 꽃이 필 때면 마치 집이 꽃밭에 뭍혀 있는 듯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꽃이 적게 핀 원인은 과일나무를 옮긴지 얼마 안되고 땅이 너무 슾한 원인에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한번 뒷가 산에 놀려갔다 오면 땅이 너무 질어 발이 빠질 정도였으니. 어쩌다가 형님들과 같이 뒷가 산에 가면 형님들이 싸리가지를 꺽어 백합뿌리를 캐여 왔는데 어머니가 삶아 주었다. 감자같은 맛에 달콤한 맛이 더 해져 정말 맛 좋았다. 그러나 돌밭이여서 한 뿌리 캐기에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강변 모래톱에는 할아버지가 파놓은 일 년 내내 얼지 않는 샘물이 있었으며 봄이면 할미꽃, 민들레꽃, 장미꽃외에도 이름 모를 각종 꽃들이 만발한다. 여름이면 강가의 푸른 잔디 또한 좋았다. 가을이 되면 샘물터에서 물고기를 한 소래씩 잡아다 철엽을 했다. 집에서는 셋째 삼촌이 사온 축음기도 띠우며 놀았는데 축음기판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 인상 깊은 곡은 왕서방 련서와 농부가다. 이것이 바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오매에도 그리던 리상촌의 평화롭고 오붓한 일가일 것이다.  나는 이때를 회억 할때면 이 노래가 생각 난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동산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굿 불굿 꽃대궐 차리인동네 그곳에서 살던때가 그립습니다  할아버지는 우리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분이시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총명과 지혜 근면과 의지로서 빈손으로 장풍동에 와 근40년간 고전 분투하여 우리에게 공부할 기반을 닦아 주었다. 할아버지는 밭이야 말로 인생사의 근본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토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억척같이 황무지를 개간하시였고 돈만 생기면 밭을 사들이었고 아무리 흉년이 라도 밭 한 뙈기는 사야 한다는 철칙을 가슴에 품고 있은 분이다.  벼슬길에는 자식들에게 희망을 두지 않고 다만 그 다음 항렬 즉 镛자 항렬 에서 인재가 나오리라는 족보의 명시를 굳게 믿었으며 손자들을 공부시켜 부귀와 공명을 이루려 했다. 할아버지는 공부 잘하는 손자들을 보면서 자신의 所願인 ‘進士’길이 눈앞에 보이시는 듯 자신이 벼슬한 것보다 더 기뻐하시며 손자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토지 개혁 이후 에도 더 많은 밭을 사들이었다. 이는 좀 잘못된 선택이였으나 집체 생산전까지 가정수입의 주요 원천이었다. 만약 할아버지의 근40여년이 피타는 고전분투가 없었다면 우리의 오늘은 암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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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12-10
  • [연재] 동년을 회억하여 - 머리말
    저자: 리락용(1946~현재) 전주리씨43세, 의안대군파 21대손 머리말 나는 동년을 회억하여란 제목하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숙부들에 대하여 쓰려한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별로 큰 사회적 의의가 있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천지개벽의 년대에 우리 집의 면모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기 위하여 억척같이 일하신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피타는 노력과정은 바로 연변 근대사 120 여년간에 우리민족 선배들이 연변땅에 이민하여 피땀을 흘려가며 개척하던 그 모습의 숙영이라고 생각하기에 또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력이 너무나 비장하기에 이를 우리의 후세에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였다. 그러나 당시 내가 너무 나이가 어리기에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어 유감스러운 점도 적지 않다. 시대배경: 기사년에 기근과 이민 간토(墾土)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여 나의 귀에까지 익숙한 기사년 재황과 이민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하려 한다. 기사년 재황은 전례없는 특대 재황으로 이 재황은 조선 이민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청나라때에 興京이동 伊通이남 두만강 이북 연변땅을 포함하여 동북의 동남 쪽 장백산 지구를 청나라가 흥기한 구역 성지라 봉쇄하여 인가가 없는 황량한 곳으로 200여년간 비어있었다. 1860년부터 1870년까지 11년사이에 조선북부에는 대 한재와 대 충재가 련이 어 들었다. 특히 1869년(기사년)에 함경도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등6읍에 덮쳐든 한재는 유사이래 보지못한 특대 한재였다. 이리하여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는 대폭 이민이 발단이었다. 10여년간 련속된 재해로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북도 사람들이 유일한 삶이 길이었다. 그러나 청나라와 조선 조정에서는 강안에 숱한 포막을 세워놓고 월강을 금지시키며 월강하다 잡힌 사람들을 월강죄로 마구 목을 따 버렸다. 그러나 계속 이민자들이 증가하자 조선 조정에서 월강금지령을 페하고 청정부에 월강자들에게 지권을 주며 강북으로 이주를 승인하라 요구했다. 1881년에 청 정부는 동북지방의 최후의 금단지역인 길림성 동남부의 봉산위장을 개방하고 훈춘에 招墾總國을 설치하고 이민 실변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청정부는 연변지구에 이미 다수를 차지한 조선사람을 축출할 수 없고 개간한 토지를 황무지로 만들 수도 없다고 여겨 집조를 발급하며 조선 이주민을 리용하여 연변을 개간하기로 하고 또 황무지 개간을 고무하기 위하여 초기에는 ‘훈춘 녕고탑조간(照垦)장정’을 반포하고 당해에 토지를 받은 호들이 땅세를 면제하고 소작료는 매상에 600문씩 받기로 하되 반드시 5년 후에 갚게하며 그 나머지는 한 푼도 풍기지 않기로 하였다. 그 밖에 간민들에게 부림 소를 대주고 기한을 정하여 빛을 갚게하는 등 우대정책을 실시하였다. 1885년에 봉금령이 취소되고 월강금지령이 페지되자 수 천 수 만이 조선인들이 터진 조수마냥 연변으로 밀려들어왔다. 하여 각지에 조선족마을이 생겨났다. 청나라 는 변방보위 수요로 군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족 이주민을 받아들이고 관리 기구인 월간국을 세우고 지금 龍井市 智新郷에 和龍峪(화룡욕) 통상국을 앉히고 두만강 이북 길이 700여 리 너비50여 리에 달하는 구역을 조선족 간민의 개간 구역 으로 확정하고 행정관리를 강화하였다. 이는 연변 역사와 조선족 역사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간민들은 두만강 연안으로부터 해란강이북 부르하통하이북 그리고 훈춘 이북으로 끊임없이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두만강기슭의 화룡현 숭선으로부터 연길현 광제욕에 이르는 기름진200리 땅이 전부 간민들에 의하여 개간 되였을 뿐만 아니라 해란강이북 지역과 가야하 연안도 대폭 개발되기 시작했다. 1900년에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로씨아는 동청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북에 처들어 왔고 잇달아 훈춘을 점령하고 연변지구와 조선북부지방을 강점했다. 이에 경황 질색한 연변 지방 관리들과 군관들은 길림으로 도망했다. 그 기회에 연변지구에 더 많은 이민들이 이주하였다. 청나라정부에서 황산지를 백성들에게 팔게 되자 외지에 관리들과 군벌 대 상인들은 파리떼처럼 달려들어 비옥하고 편리한 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였다. 그들은 권세를 등대고 청장(토지를 재주는)인원들에게 뢰물을 먹여 많은 황무지를 차지하였는데 어떤 자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광활한 황무지에 말뚝을 박아가면서 토지를 점유했고 또 어떤 자들은 토지개간회사라는 빈 간판을 내걸고 한 지방의 토지를 독차지했다. 이렇게 황무지를 헐 값으로 차지하여 일약 벼락 대지주로 된 지방의 관리 군벌 대 상인들을 점산호(占山戶) 라하였는데 기실은 占山虎였다. 이 기회에 외지에 한족들이 관청과 점산호들에게 뢰물을 먹이고 점산호들이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점산호들로부터 몇 백상이 황무지를 얻어 이민들게 주어 개간하여 대 지주가 되었다. 또 지방관리들의 신임을 얻은 어떤 자들은 점산호를 대신하여 조선족 간민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소작료를 받아들이며 그 중에서 어부지리를 얻어 점차 지주로 되였다 또 일부는 부유한 조선인 상인들인데 그들은 무역과정에서 강북의 넓고 비옥한 황무지와 헐한 땅값에 유혹되여 조선의 재산을 전부 팔고 남녀 노비들까지 거느리고 이주하여 일약 수 십 상의 토지를 소유 한 지주로 되였다. 봉금령이 페지로 손에 한푼 땅도 없는 조선 농민들이 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이 “주인 없는” 땅에 몰려와 개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앞에서 언급 하다 십히 외지에 한족들이 연변에 들어와 관리들에게 뢰물을 처먹이고 땅을 차지 하였다. 뢰물을 처먹은 관리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마치 자기 땅인 것처럼 저 벌판은 마씨의 땅이오 저 산골 짜기는 장씨의 땅이라 하면서 말뚝을 밖아 지역(地畔)을 정해주고 명함을 찍어주어 땅이 주인이라 하였다. 이렇게 그자들은 하루 아침에 거대한 땅을 차지한 폭팔호로 둔갑되여 적수 공권으로 고향을 버리고 생계를 찾아 온 이민들이 피땀을 빨아 먹기 시작 했다. 이 신생 지주들은 땅의 정도에 따라 6할5할4할을 정하여 이민들에게 개발권을 주었다. 례를 들어 6할이면 한상을 개간하면 60% 를 5할이면 50%를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도 이민들은 계속 이 땅을 개간했다. 이 신생지주들은 이민들에게서 받아들인 땅을 다시 이민들에게 팔아 먹고 또 다른 곳에가 이와 같은 만행을 계속 저질렀다. 어떤 곳에서는 이민들이 땅을 개간해도 자신의 땅은 한푼도 없이 모두 지주의 땅으로 되여 이민들은 자신이 개간한 땅에서 소작짓고 살아야 했다.이러한 폭발호(暴發戶)의 전형은 태양벌을 독점한 악패지주 한씨다. 해방 후 그놈은 인민들이 손에 처단되였다. 연변땅에 지주는 대 다수 이렇게 산생되였으며 성남의 마통새도 번씨도 장씨도 모두다 이러한 지주다. 이것이 연변에 조선족 지주가 아주 적은 원인의 하나다. 이렇게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버리고 이민하는 조선 사람들이 행렬은 처음에 는 기황으로 시작되였으나 그후에는 일본놈들이 착취와 압박으로 그 규모가 점점 더 크게 전국적으로 계속되였다. 함경도 사람들은 도보로 연변과 장백현 집안현 경내로, 평안도 사람들도 도보로 료녕성 동부로, 그리고 배를 타고 이민한 충청도와 전라도 사람들은 료녕성내지로, 강원도 경상도 사람들은 길림성 흑룡강 성내지에 집단 이민하고 그곳에 부락으로 정착해 살았다. 이 이민 조선 사람들은 그후 동북 항일 투쟁 최전선에서 싸우며 가송찬미할 력사의 한 페지를 썼고 또 중국 해방전쟁에서도 역시 커다란 불멸의 공적을 쌓았다. 여기서 지명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몇가지 첨가하면 이민들이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연변땅은 인연 없는 산구로 이름(지명)없는 곳이었다. 이민들이 대량 몰려 오기 시작하자 청정부는 길림성에 이민국을 설치하고 이 땅을 관리하 려고 이민국 관리 몇 명을 보냈다. 이들이 연변에 월간국을 세울 교통이 편리하 고 관리가 편리한 곳을 찾다가 ‘국자가’을 지정하고 지명을 다시 지으려고 고심하던중 한 관리가 길림성이 연장이라 연자에 길림성이 길자를 붙이여 연길이라 함이 어떠한가 하였는데 모두들 그 이름이 의미있고 신통하다 하여 연길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일설이 있다 。 그리고 연길은 그때 사방이 산으로 둘려 싸인 분지인데 바람이 불지 안는 고요한 때면 연기와 안개가 덮인 곳이라 煙集崗이라 하였는데 훈춘에 있던 招垦总局이 이곳에 오면서부터 土地局있는 거리라 하여 局子街 라 하였다가 다시 煙集을 한어의 동음자로 延吉(연길)이라 하였다는 일설도 있다. 여하튼 연길이라는 지명은 1900년 경에 지어진 이름이다. 마치 최근 烟集河를 延吉河라고 하듯이 고친것이다. 또 하나 왕청이라는 이름은 그때 왕청땅에는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왔는데 함경도의 하천들은 모두 동이나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 왕청의 하천은 모두 서쪽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왕청같이 강하천이 흐른다 하여 왕청이라 지었다 한다. 일반적으로 지역들이 특점에 따라 지은 이름이 많은데 이런 이름로는 나의 고향에 룡정 성남 성동 회령촌 장풍동 샛골등이다. 여하튼 급시에 관리들이 기발한 생각으로 지은 이름이나 민간에서 지역의 특점에 따라 지은 이름이나 모두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다. 또 이 지명들만 들어도 이 땅의 력사에는 모두 이민들이 발자취가 고스란히 새겨져있는 비장한 땅이며 이 땅의 력사는 이민들이 력사며 이 땅의 주인 역시 이 땅의 력사를 창조한 그들이였다. 그리고 하나 더 쓰면 두만강, 두만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내려 오다가 자신이 홍수시에 만들어낸 충적사 틈으로 새여 들어가 종적을 감추고 도망가 몇 십리 흐르다가 다시 돌틈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진면모를 자랑하며 700리 두만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최초의 두만강의 이름은 도망 갔다고 도망강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이 가상하지 않다고 여겨 한 선비가 음이 비슷한 두만강이라 지어 주었다 한다. 이러한 이름은 조선민족이 아닌 어떤 민족이 지을 수 없는 이름이다. 또 이러한 이야기는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지만 백년 남짓한 이민사에 깃든 이야기로 誤傳되거나 무중생유(無中生有) 가능성이 적다고 본다. 나는 이렇게 우리 조상들이 력사가 깊이 새겨져 있는 이땅의 력사를 모두 소중이 여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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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10
  • 오묘한 세계대백과(26)
    남극의 극주 남극의 극야 “극주”란 하루 24시간이 모두 낮인 것을 말하고 “극야”란 하루 24시간이 모두 밤인 것을 말한다. 지구상의 남극과 북극이 바로 아주 기이한 지방으로서 그 곳에는 극주와 극야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이는 무엇때문일까? 그것은 지구가 태양을 돌 때 몸의 한쪽면만 태양과 마주하고 돌기에 태양이 지구표면을 비출 때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3월부터 9월 사이의 한동안 태양은 줄곧 북극의 낮은 곳을 비추기에 이 때의 북극은 계속 낮이 되고 남극은 매일 밤이 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9월부터 다음해의 3월 사이에는 태양이 남극의 낮은 곳을 비추기에 이 때면 북극지구는 매일 밤이 되고 아울러 남극은 24시간 모두 낮이 될 수밖에 없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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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05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6)
    쾰른대성당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독일, 지점: 쾰른시 함의: 독일에서 제일 크고 세계에서 제일 높으며 수건시간이 가장 긴 성당임 쾰른대성당(科隆大教堂)은 역사가 유구한 나일강반의 쾰른성에 위치, 성당은 세계 종교건축사상의 3개 제일 중 하나로 독일에서 가장 큰 성당이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당으로 건축역사가 가장 긴 성당이다. 쾰른대성당의 가치는 소장품이 이름나서만이 아니라 더 유명한 것은 무게가 24톤에 달하는 대형 추시계와 10세기 시대의 황금갑삼왕감(黄金匣三龛)이 있어서이다. 6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쾰른대성당은 하나의 정교한 예술품과도 같이 신성한 빛을 뿌리고 있으며 유럽의 3대 성당 중의 하나로 꼽히우고 있다. 곡절적사연이 깃든 성당 쾰른대성당은 1248년에 낡은 성당자리에 재건한 것이다. 일찍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시대에 성당의 개조공사는 중지되었었다. 중지됐던 시간은 무려 3개 세기에 거쳤다. 그 뒤 프로이센국왕 빅토르 윌렌 4세의 추동하에 이 성당은 1880년에 드디어 준공되었으며 전후의 시간은 무려 632년이 걸렸다. 뾰족한 쌍탑 쾰른대성당의 벽체는 모두 가공된 돌로 쌓여졌으며 부지면적이 약 8000평방미터이고 외관은 웅위로우면서도 그 셈세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뾰족한 쌍탑은 정문벽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높이가 157미터에 달해 유럽에서 가장 높은 뾰족탑으로 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치 두 자루의 예리한 검이 구름속에 꽂혀 있는듯 하고 네 주위의 무수한 작은 뾰족탑들이 서로 호응하여 이 쌍탑으로 하여금 더욱 뚜렷하게 만들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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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05
  • [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1)
    ■ 김철균 3 순자 옆의 식구들은 날이 갈수록 계속 하나 둘씩 떨어져 갔다. 인류생활사에 있어서 자녀가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다가 성인이 되고 또 결혼하면서 부모와 떨어져 사는 것은 자연적인 윤리라 하지만 그 당시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인 집체호로 인해 우리 중국에 나타나 수천수만의 가정에서 자녀들이 정든 도시와 부모의 곁을 떠나 농촌으로 가야 했다. 순자의 가정도 영남이와 영순이가 떠난 뒤를 이어 1970년에는 영옥이가 떠났고 1973년에는 영애, 또 그 뒤엔 경남이까지 집체호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 용환이는 비록 돈화의 “5.7” 간부학교로부터 돌아와 명예를 회복하긴 했으나 얼마 안있어 의료대 성원으로 뽑혀 몇 달씩 내몽골과 기타 지구에 가있군 하다보니 역시 생이별이나 다름이 없었고 후에는 집체호에 내려갔던 둘째 아들 경남이까지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면서 집을 떠났다. 둘째 아들 경남이가 군에 입대하게 된데는 순자의 역할이 아주 컸다. 당시 경남이는 연길시 장백공사 동풍대대에 하향하였다. 그는 하향한 이듬해에 군에 신청했다. 둘째가 군에 신청했다는 소식을 듣자 순자는 아들이 매우 대견스럽게만 느껴졌다. 엄마의 잔등에 업혀 재롱을 부리던 때가 어제 같은데 어느 덧 성인이 되어 집체호로 내려갔고 이젠 또 군에 신청하다니 그야말로 볼수록 자랑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혹시 신체검사나 기타 심사에서 탈락하지는 않을는지 슬며시 우려되기도 했다. 기실 순자는 해방군을 몹시 흠모하였었다. 거리에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볼 때마다 내 아들도 저런 모습을 하고 나섰으면 하는 부러움을 가져본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큰 아들 영남이를 군대에 신청하게 하였었는데 뜻밖으로 당시엔 남편인 김용환이 “외국특무”란 누명을 쓰고 있었기에 그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가정출신이 좋겠다, 남편도 “외국특무”란 누명도 벗었겠다 거기에 신체까지 좋은 둘째 아들 경남이가 군에 입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집에서 안절부절하던 순자는 마침내 둘째 아들 경남이가 하향한 동풍대대를 찾아갔다. 동풍대대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을 만난 순자는 찾아온 목적을 이실직고하였다. “저는 아들 셋이나 둔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아들 셋 중 군대에 간 아들은 아직 한명도 없답니다. 큰 아들은 한시기 아버지가 ‘외국특무’란 모자를 쓰고 있어 가지 못했습니다. 이젠 걔들 아버지의 모자도 벗었으니 둘째 아들만은 꼭 군대에 보내고 싶습니다.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께서 아무쪼록 저의 아들이 신체만 합격된다면 첫 사람으로 추천해 주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에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은 순자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뭔가를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아니, 경남이는 집체호 지식청년이기에 몇년 안 있어도 노동자 모집으로 도시에 올라갈 수 있겠는데 왜 부디 군대에 보내겠다고 하는 겁니까? 군대에 가면 농촌 못지 않게 힘들고 고생스러울텐데요?!” “그것 때문이 아니랍니다. 남자대장부로 생겨서 나라를 지키는 일터에 가는 것이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그리고 고생을 겪어봐야 더욱 견강한 남아가 될 것이 아닙니까? 또 아들 셋이나 두고 그 중 한명도 군대에 보내지 못하면 제가 어떻게 당당한 어머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에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은 몹시 감동돼하면서 경남이가 평소의 표현도 출중하고 신체도 좋으니 경남이를 적극 추천하겠노라고 답복을 주는 것이었다.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과 작별한 순자는 또 장백공사 무장부에도 찾아가 무장부장한테 재삼 이상과 같은 부탁을 하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경남이가 평소에 잘해서인지 아니면 순자가 아래위로 뛰어다니며 “외교활동”을 적극 벌여서인지 그 해 겨울 경남이는 자신의 뜻대로 군대에 나가게 됐다. 그것도 일반 육군이 아닌 해군으로 입대에 성공했다. 소속부대는 광서에 있는 모 해군기지의 부대였다. 당시 중국의 남부 변경지대의 형세는 몹시 복잡했다. 1975년 베트남 북방이 남부를 해방하고 통일을 실현한 후 점차 구소련의 힘을 믿고 중국과 등지는 외교를 해오다가 1976년 9월 중국의 모택동주석이 서거하자 공공연히 중국을 반대하고 중국과 엇서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것은 당연히 변경에서의 집탈로 표현되었다. 베트남군은 쩍하면 포사격으로 중국 변경주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파괴하였는가 하면 때로는 중국 쪽으로 건너와 중국주민들의 물건을 빼앗거나 중국 주민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화교들을 탄압하고 내쫓는 행위를 감행, 한시기 양국의 변경다리로는 중국으로 들어오는 화교들로 줄을 잇기도 했다. 베트남당국은 중국의 참을 수 있는 경고를 계속 무시하면서 이러한 행위를 계속했다. 두나라 관계는 일촉일발의 전쟁분위기가 짙게 감돌았다. 바로 이럴 때 경남이가 군에 입대, 그것도 중국과 베트남 변경인 광서로 가게 되었다. 드디어 경남이가 참군한 그 이듬 해인 1979년 2월 17일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자위반격전이 개시되었다. 전하는데 따르면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자위반격전에는 운남과 광서의 변방부대가 주력으로 출동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경남이네가 소속한 해군부대도 출격한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아도 무시무시한 소식들이 자주 들려왔다. “장기간 전쟁이 세례를 받은 베트남 군대는 몹시 지독하다”느니 “부상당한 베트남의 여민병은 중국군대의 등에 업혔다가도 비수를 뽑아 중국군대의 목에 찌른다”느니 “인원상에서는 중국군대 측이 더 큰 손실을 입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수없이 나돌았다. (혹시 경남이네도 전선에 나가 베트남해군과 맞붙지는 않았는지? 또한 싸움 중 어떤 불상사라도 생기지 않았는지?……) 순자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20년간 키워오면서 남의 집 애들처럼 잘 먹이지도 잘 입히지도 못했는데 그 애가 전쟁에 참가하여 혹시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자식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는건 순자 역시 여느 어머니들과 마찬가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에 불과했다. 순자는 다시 자신의 마음을 정리했다. 모택동의 큰 아들 모안영도 전쟁터에 나가서 희생되지 않았던가. 모두들 자기 자식이 아깝다고 붙잡고 있으면 이 나라는 그래 누가 지킨단 말인가?!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니 순자는 부대에 간 아들 경남이가 자랑스럽기만 했다. 또한 혹시 그 경남이한테 어떤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자신이 아들을 부대로 보낸 것은 아주 잘된 일이라고 단정하였다. 4 순자의 막내아들 김진이는 다행히도 하향지식청년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자녀 5명이 농촌으로 하향하면 한명은 농촌으로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나라의 정책이 있었기에 그 혜택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17평방미터가 되는 작은 집에는 순자와 막내아들 김진 이렇게 모자 두 사람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식구가 단촐하면 살림을 조직하기가 보다 쉽다는건 살림살이를 해본 모든 주부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으군 하는 이치인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순자네만은 그 예외였다. 당시 순자의 남편 용환이의 노임은 55원이었는데 의료대로 외지생활을 하는 용환이한테 매달마다 얼마씩 보내고 난 뒤 나머지로 집안의 생활을 조직해야 했다. 아니, 집체호에 내려간 영남이, 영순이, 영옥이와 영애의 비누와 치약 등을 사는 생활비용도 대주어야 했다. 그것은 남편과 모든 자식들이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할 때보다 그 생활비용이 곱절 더 들었다. 생활하다 보면 돈이나 물건같은 것을 가져가는 사람은 그것이 흔히 아주 적어 눈에 차지 않고 만족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퍼주는 사람은 그것이 크게 자리나게 축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돈이나 물건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집에서 여러 곳에 지원하며 살림을 조직하는 순자로서는 적은 생활비로 여기 저기에 맞춰대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달에는 남편의 노임을 받는 날로 그것이 거덜날 때도 있었으니 그런 달에는 쌀밥 한끼를 해먹는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었고 기타 배급표로 나오는 돼지고기같은 부식품을 사먹든다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바로 이 때 신흥가두판사처와 제 9 거민 위원회에서는 순자네 가정의 생활형편을 요해한 뒤 토론을 거쳐 순자더러 연변건축공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당시 직업이 없는 가정주부가 임시일이라도 하려면 거민 위원회에서 주민들이 선거추천하고 가두판사처의 토론과 심사비준을 거쳐야 하는 일종 “빈곤부축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다만 가정이 가난해서만 여기에 뽑혀 임시일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출신토대가 좋고 사회적인 평가도 좋은 사람만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중국판 “노가다”라고 할 수 있는 건축공사장에서 임시일을 할 수 있게 된 김순자, 이는 건국전 명신여자중학교를 졸업한 순자한테 있어서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의 희롱이었다. 순자는 억울했다. 명신여자중학교때의 동창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것을 봐도 억울했고 자갈치기, 벽돌부리기와 시멘트반죽을 나르던 몸이 데친 배추잎처럼 후줄근해진채 퇴근해서는 또 뒤죽박죽이 된 집안을 거두며 저녁밥을 지을 때도 억울했다. 하지만 순자는 이러한 억울함을 단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순자는 이 모든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위생학교 기숙사의 임시공일을 할 때도 그랬고 건축공사장의 막 일을 하는 그 때도 역시 순자는 뭐든지 하면 열심히 하였다. 한편 자기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하는 순자의 정신세계는 그 곳 건축공사장에서도 체현되었다. 당시 공사장에는 순자처럼 임시공일을 하는 ×××이란 젊은 한족여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녀는 공사장 책임자한테 며칠간 휴식하련다고 말미를 맏는 것이었다. 공사장에서 말미를 맡고 며칠씩 나오지 않는 일이란 흔히 있는 것으로서 당시 순자는 그녀가 말미를 맡는 것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몸이 불편하지 않으면 가정에 무슨 일이 있나보다고 여겼을뿐이었다. 헌데 며칠 뒤에 나타난 ×××이란 여인은 얼굴색이 백지장같고 몹시 부석부석한 모습이었다. (저 여인한테 무슨 일이 있었구나…) 순자는 의심쩍은 생각이 들어 그 여인이 일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외바퀴밀차에 벽돌을 실어나르는 일을 하면서 그녀는 몹시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연했으며 현훈증을 느끼는지 외바퀴밀차를 밀다말고 자주 땅에 주저앉는 것이았다. 그리고 그닥 덥지 않은 날씨임에도 이마에서는 콩알같은 땀방울이 내돋군 하였다. “아니, 임자. 자네한테 웬 일이 있는 모양이구만.” “아니, 아무런 일도 아니예요. 괜찮아요. 언니 저한테 신경쓰지 마세요.” 그러면서도 여인은 두손으로 얼굴을 막으면서 분명 울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는 것이었다. “아니 임자, 웬 일이요? 내가 조선족이라고 거리감을 두지 말고 언니처럼 생각하오. 어서 말해보오. 대체 웬 일이요?” “언니, 기실… 기실 제가 2일전에 낙태수술을 했어요.” “뭐, 유산을 하고 일하러 나왔다고?! 쯧쯧…그 몸으로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어?! 내가 책임자한테 말할테니 집에 들어가 며칠 푹 쉬다가 나오라구.” 그러자 ×××여인은 급기야 순자의 입을 막으며 사정했다. “언니, 그러지 말아요. 기실 저의 집 생활형편이 말이 아니예요. 그러다가 책임일군이 혹시 저를 자르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 말에 순자 역시 짚이는데가 있었다. 자신 역시 가정의 생활고 때문에 건축공사장에서도 제일 힘든 임시공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오, 오죽했으면 이 몸을 갖고 일나오겠는가! 순자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기가 일하던 모래를 치는 곳에 가서 삽자루를 잡았다. 하지만 자꾸만 눈길이 ×××여인한테 돌려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얼마 안있어 순자는 다시 ×××여인한테로 다가왔다. “안되겠어. 임자 내가 하던 모래치는 일을 하라구. 내가 외바퀴밀차를 밀테니.” “?!…” ×××여인은 어안이 벙벙해했다. “뭘해? 어서 저 쪽에 가서 모래를 치라구?” 그제야 순자의 뜻을 알아차린 ×××여인은 “언니, 감사해요”라고 하면서 외바퀴밀차를 순자한테 넘겨주었다. 순자가 하던 모래를 치는 일을 하는 ×××는 자주 감동으로 어깨를 들먹이었다. 후에 몸이 완쾌되자 ×××여인은 호떡 2개를 사가지고 순자를 찾아왔다. 자기를 대신해 힘든 일을 맡아준 순자한테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순자는 그 호떡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한족 여인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임잔 참 성질이 곧은 아낙네구려. 그럼 임자가 나의 일을 대신 해준다면 나는 조선족 찰떡을 사주어야겠구만.” 순자의 농담에 ×××여인은 얼굴을 붉히면서 “언니도 참”하며 눈을 곱게 흘기었다. 한편 건축공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하는 3년간 순자는 해마다 “선진사업자”와 “민족단결모범”을 되었다. 이는 임시공들 중에서는 유일한 “선진사업자”였고 “민족단결모범”이었다. 또한 건축공사와 순자와의 계약은 더는 가두판사처의 추천과 소개를 거치지 않고 건축공사에서 직접 채용하군 하였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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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12-05
  • 저우언라이가 마지막 남긴 싸인과 말 한마디
    (위인 저우언라이는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 향년 72세로 별세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1975년 9월 20일, 병이 위독한 저우언라이(周恩来)는 부득불 병원입원 후의 4번째로 되는 대수술을 받게 되었다. 당시 저우언라이는 그 수술결과가 예측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저우언라이는 사업일군을 불러서는 1972년 6월 중앙의 비림정풍(批林整风) 회보회의에서 한 “‘몽골 언더르한 사건’에 관한 국민당의 여론날조 문제”란 보고의 녹음기록을 적은 문건을 한번 읽은 뒤 떨리는 손으로 거기에 싸인하면서 그 싸인 날짜와 환경에 대해 “1975년 9월 20일,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이라고 적었다. 이는 저우언라이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한 싸인이었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저우언라이는 가까스로 목청을 높여 한마디 맘속의 말을 하였다. “나는 당과 인민에 충성하였다! 나는 절대 투항파가 아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덩잉초우(邓颖超)는 후에 왕둥싱(汪东兴)을 통해 이 모든 것이 모우저둥(毛泽东)한테 전달되게 하였다. 1976년 1월 5일 새벽, 병원의 의료진은 병이 위독한 저우언라이한테 마지막 한차례의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저우언라의 병이 위독하다는 통지를 받은 베이징의 중앙정치국 성원 및 국무원 책임자들이 육속 병원으로 찾아와 병문안을 했다. 1월 7일, 저우언라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숨소리는 매우 미약하였고 장기간 혼미상태에 있었다. 의료진 성원과 간호일군들은 주야로 병실을 지키면서 수시로 구급준비를 했다. 그날 밤 11시경, 저우런라이는 혼미상태에서 깨어나서는 두 눈을 간신이 뜨며 신변의 우제핑 의사한테 부탁했다. “나 여기는 별문제가 없을테니 당신들은 다른 환자들을 돌보시오. 당신들은 다른 환자들한테 더욱 수요될 것이오…” 이는 저우언라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 말이었다. 중국의 부강을 위해 평생의 노력을 다 바친 총리 저우언라이는 생명의 경각에 이는 마지막 순간에도 타인의 병치료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 중국과 세계 많은 나라의 존경을 받던 세기적 위인 저우언라이는 영영 깨어날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났다. 향년 7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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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1-30
  • 【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0)
    ■ 김철균 제9회 역경의 지속 1968년 말에 접어들면서 폭풍우처럼 몰아치던 문화혁명의 기세는 한풀 꺾이는듯 싶었다. 거리에서 조직과 조직사이의 무단적 폭력투쟁은 가라 앉았고 “독재대상”이 되었던 김용환도 풀려나왔다. 사회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듯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문화혁명의 동난은 계속됐다. 김용환은 일단 구금생활에서 풀려나왔지만 얼마 안있어 돈화의 어느 한 산골로 노동개조를 가야 했다. 말로는 “5.7간부학교”라고 했으나 기실 정배살이와 다름이 없었다. 이어서 초고중을 졸업한 큰 아들 영남이와 큰 딸 영순이가 같은 날 동시에 농촌으로 내려가 집체호생활을 하게 되었다. 문화혁명은 순자네 부부와 자녀를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그 때 그 세월, 이렇게 한집식구가 흩어져사는 가정이 어찌 순자네 가정 한집뿐이었으련만 그 당시 정신상, 경제상에서 순자가 받는 압력은 여느 가정과는 비할 수도 없었다. 한가지 실례를 들고 봐도 한꺼번에 식구 3명이 집에서 나가니 적어도 이불과 요 3채씩은 있어야 했다. 당시 집에 이불이라고는 고작 3채뿐이었다. 그러면 남편과 두 자녀한테 새 이불을 해주어 보내는 것이 마땅한 도리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다른 집들에서는 자식이 농촌집체호로 간다고 하니 모두 새 이불을 해주는 바람이 일다싶이 했다. 그러다보니 연길시내의 몇몇 백화상점들에는 이불등과 이불안감 그리고 이불솜이 거덜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많은 집들에서는 자식들한테 이불을 해주어야겠는데 천표와 솜표가 없어서 긍긍 속을 앓기도 했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순자네는 천표와 솜표가 남아돌았으나 돈이 없어 새 이불 3채씩이나 할 수 없었다. 순자는 남들이나 자식들한테 새 이불을 해줄 수 있게 하기 위해 집에 있는 천표와 솜표를 몽땅 남들더러 쓰라고 줘버렸다. 이를 두고 남들이 “다문 얼마씩이라도 돈을 받고 천표와 솜표를 팔 것이지 왜 그냥 주고 말았느냐?”, “나 같으면 찢어버리거나 부억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릴지언정 남한테 그냥 공짜로 안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썩 후에 있은 일이다. 집에 있는 이불 3채는 남편과 영남, 영순이가 각각 한채씩 가지고 갔다. 그러자 집에는 이불 한채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구 누님, 집에 이불 한채도 없이 밤에 어떻게 잔다고 그러오?!” 어느 날 순자네 집에 왔던 남동생이 기가 막혀하며 혀를 끌끌 차다가 이불천과 솜을 사줄터니 천표와 솜표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순자가 하는 말이 천표와 솜표는 또 남들한테 몽땅 줬다는 것이 아닌가. 남동생은 너무 한심하여 머리를 흔들었다. “누님, 그 것까지 남들한테 줘버리면 어떡하겠다는거요? 그렇게 마음이 헐하니 가난밖에 차례지지 않는거요.” 남동생은 누나를 책망하면서도 자기의 집에 가서 천표와 솜표를 가져다서는 돈과 함께 이불감을 사라면서 순자앞에 내놓았다. 그날 순자는 반나절 눈물을 흘렸다. 남동생의 소행이 고마워서 울었고 자식과 남편한테 잘해주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울었다. 하지만 그토록 인심이 헤푼 자신을 탓하면서도 밤만 자면 또 남한테 뭔가를 주지 못해 속을 앓군 하는 순자였으니 이는 곧바로 그의 천성이었다. 2 착한 순자한테 세월은 무정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영남이가 하향한 안도현의 ××산골과 영순이가 하향한 의란공사 ××촌은 째지게 가난한 고장이었다. 죽도록 일해도 한공에 20여전밖에 가지 않는 고장이라 벌어서 집을 돕기는커녕 자립조차 할 수 없었다. 영남이와 영순이는 “돈 5원만 보내주오”, “털모자가 없어서 겨울에 일할 수가 없소”,“신이 다 판났는데 발이 시려서 일하러 다닐 수가 없소” 하며 한달이 멀다하게 찾아와서는 손을 내밀었다. 자식들뿐이 아니었다. 돈화에서 노동개조를 하는 남편 김용환도 인편에 신과 장갑을 보내달라고 부탁해왔다. 당시 집에서는 순자는 물론 영옥이, 영애와 경남이, 김진 모두가 동복과 겨울신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석탄을 절약하느라고 불을 적게 때다 보니 집이 춥기로 말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독의 물에 살얼음이 낄 지경이었다. 남편과 자식 모두가 헐벗는 판에 과연 누구부터 돌봐야 하는가? 결국 순자는 손수 자기의 손으로 손장갑 몇컬레를 만들고 아끼고 아꼈던 생활비로 겨울신과 두꺼운 양말 등을 사서는 남편한테부터 보내주었다. 왜서였던가! 당시 순자는 그저 가정의 세대주인 남편만은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뿐이었다. 남편이 건강하게 살면서 역경을 이겨내고 무사히 돌아와야 이 가정의 앞날도 운운할 수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순자는 역경일수록 힘을 낼 수 있도록 자식들한테 자신감을 주기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순자의 말마따나 경제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니 정신적으로 힘을 북돋우어주는 것이었다. 1968년 12월 19일, 순자가 큰 아들 영남이한테 쓴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내 아들 지식청년 영남아, 도시에서 살다가 농촌의 간고한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겠구나. 어머니는 농촌에서 살아보았기에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간고분투하는 뇌봉정신을 본받아야 하느니라. 영남아, “뇌봉일기”의 77페지에는 다음과 같은 몇개 구절이 씌어져있다. 가장 곤난하고 간고한 사업을 할 때에 황계광을 생각하면 온몸에 힘이 솟구치고 투지가 억세어진다. 임무를 수행할 때 구소운을 생각하면 자기한테 엄격히 요구하게 되고 규율을 잘 지키게 된다. 향수를 받게 될 때마다 베쮼동지를 생각하기만 하면 먼저 남을 돌보고 후에 자기를 생각하게 된다. …… 영남아, 이러한 영웅들의 일기를 잘 학습하여라. 영웅들이 한 말들은 흔히 평소에 사람들한테 많은 힘을 주고 살아감에 있어서의 거울이 되고 등대로 될 때가 많으니 이를 항상 명심하거라. …… 순자는 이런 편지를 큰 아들 영남이한테만 쓴 것이 아니라 선후로 집체호에 나간 영순이, 영옥이와 영애 등 모든 자녀들에게 써보냈다. 그 당시 순자는 모든 자녀들의 “거울”이였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하는 일은 모두 옳다고 여겼고 어머니의 말씀이라면 100%로 잘 따라주었다. 농촌에 내려간 자녀 3명은 비록 생활적으로는 아주 가난하게 보냈지만 농촌의 각종 활동에서 모범을 보였다. 큰 아들 영남이는 아버지한테서 배운 의학지식을 토대로 생산대 사원들의 병을 떼주기도 하여 “맨발의사”라며 큰 호평을 받았고 영순이도 아주 부지런하게 일한 결과 집체호에 나간지 얼마 안되어 생산대의 부녀대장과 총 보도원으로 되었다. 이렇듯 어머니인 순자한테서 남다른 교양을 받아서인지 영남이와 영순이는 물론 후에 집체로로 내려간 영옥이와 영애 또한 부지런하고도 착하고 남을 잘 도와주어 항상 사원들의 입에 올라 칭찬을 받군 했다. 그중 1973년에 연길시 흥안공사 대성촌의 집체호로 내려간 영애한테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번은 영애가 판난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을 본 순자는 그 것이 가슴아파 큰 결심을 내리고 새신 한컬레를 사주면서 시내로 오거나 집에 들어올 때마다 싣으라고 했다. 헌데 후에 집으로 온 영애를 보니 여전히 그 해진 신을 신고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영애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다음과 같았다. “어머니, 욕하지 말아주세요. 기실 우리 생산대에 저보다도 엄청 더 가난하게 보내는 가정이 있어요. 그래서 그집에 있는 제 또래의 친구한테 그만 그 새신을 주고 말았어요.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순간 순자는 어이가 없었다. 큰 결심을 내리고 사준 새신을 남한테 훌쩍 줘버렸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영애를 탓할 수도 없었다. 자기 자신이 자식한테 늘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자녀들한테 교양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자녀들 또한 모두 자기를 닮아 저렇게 마음이 헐하고 착한데야 어찌하랴. 한편 당시 돈이 없어 영애한테 재차 신을 사주지 못한 것으로 하여 순자는 지금까지 그 때의 일을 가슴아파하며 늘 입에 올리군 한다. 1969년의 음력설전야, 남편 김용환은 “5.7간부학교”에서 특별허가를 해주었기에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영남이와 영순이도 음력설을 쇠러 집으로 왔다. 음력설 날 아침, 순자는 돼지고기에 감자를 섞어서 볶은 채와 통채로 덥힌 두부 등을 밥상에 차려놓고 전날 줄을 서서 받아온 술도 주전자에 덥혀갖고 남편한테 내놓았다. 아내가 부어준 술을 서너잔 마시더니 남편은 급기야 낙루하는 것이었다. “내가 나쁜 놈이지 당신한테 뭐가 있다고 손을 내밀었담. 아무렴 내가 나쁜 놈이구 말구…” 그도 그럴 것이 설전날 집이라고 찾아온 영남이와 영순이가 입은 모습을 보니 남루하기가 말이 아니었다. 둘 다 판나서 솜이 삐죽히 나온 솜바지에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험하게 판난 솜신을 신고 나타났던 것이다. 억이 막힌 용환이는 말이 나가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들어보지 않았지만 그 동안 아내가 얼마나 고생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자기한테 죄가 있어서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때문에 아내와 자식 모두가 고생한다는 것을 용환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겨우 참고 참았던 모든 것이 음력설 아침 술이 몇잔 들어가자 울컥 치밀어올랐던 것이다. “여보, 미안하오. 당신한테 부담만 가득 안겨준 내가 정말 당신을 볼 면목이 없구려. 아이구 내가 못난 놈이지.” “여보, 설날인데 왜 눈물을 보이는거예요. 골란은 잠시적인 것이예요. 당신은 청백한 사람이고 앞으로 꼭 모든 것이 좋아질 날이 있을거예요.” “아버지, 저희들도 아버지를 믿어요. 아버진 훌륭하고 양심있는 인민교원이예요. 저희들도 잠시 고생하는 건 모두 참을 수 있어요.” 아들 영남이와 딸 영순이와 영옥이도 아버지를 위로했다. “그래 그래 고맙다. 이 아비는 청백하다. 훌륭하지는 못하지만 당과 국가에 미안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만하자. 자, 설날인데 우리 함께 설음식을 먹자구나. 그리고 영남아, 너도 이젠 사회로 나왔으니 어른이 되었다. 자, 이 아비가 부어주는 술 한잔 받거라.”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1-28
  • 송미령과 월키 사이에 진짜 부당관계 있었을까?
    1942년 늦여름, 당시 동맹군은 많은 전쟁터에서 저조기를 겪고 있었다. 미국의 루즈벨트는 미국인은 전쟁중에서 반드시 단결해야 한다고 여러번 강력하게 강조하였다. 그는 1940년에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된 월키 루이스를 여러 나라들을 방문시키면서 미국은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준엄한 전쟁시련을 겪고 있는 나라들에 알리려 계획하였다. 그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송미령은 어느 날 공상희의 거처에서 중국을 돕고 있는 미국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연회를 차렸다. 연회에서 월키는 송미령과 송경령의 중간에 앉았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송미령은 월키의 팔을 잡으면서 “제가 당신한테 나의 다른 한 언니를 만나게 할게요. 언니는 신경통이 있기에 오늘 연회에 오지 못했어요.” 연회도중 송미령과 월키가 자리를 뜨자 사람들은 의론이 분분했다. 연회에서 공상희는 송미령과 월키가 없어지자 매우 황당해하며 두 남녀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그 해 10월 중순, 장개석은 중국방문을 마친 월키를 위해 송별모임을 조직했다. 송별모임은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당에서 진행되었다. 이날 장개석과 송미령이 모임에 나타나자 모임의식이 시작되었고 장개석과 송미령은 특별의자에 앉았다. 축사가 끝나나 장개석과 송미령은 월키와 기타 내빈들을 접대하기 시작, 약 1시간 뒤 월키는 헨리 챈들러(당시의 수행인원)를 불렀다. 그는 몰래 헨리한테 잠시후 자기가 송미령과 함께 모임장소를 떠날테니 자신을 대신해 장개석의 곁에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월키와 송미령이 몰래 장소를 떠나자 헨리는 장개석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이것 저것 물음을 제기하면서 장개석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에 노력했다. 행사를 마치고 헨리가 거처에 돌아온 뒤 한밤중이 되자 장개석이 노기등등해 들어왔으며 자동소총을 잡은 3명의 사병이 뒤를 따랐다. 장개석은 가까스로 노기를 억제하며 헨리한테 물었다. “헨리선생, 당신 빌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요?” “전 모르는데요.” 헨리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장개석은 방안의 모든 것을 수색했다. 침대밑을 들여다 보고 옷궤도 열어본 뒤 맨 나중에 방안에서 나갔다. 월키는 새벽 4시경에야 거처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송미령과 함께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면서 이미 송미령을 미국으로 초청하였다고 자랑했다. 이에 헨리는 “바보!” 라고 월키를 꾸중한 뒤 이제 귀국하면 부인과 아들이 공항에 마중나올텐데 장부인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리면 서로 입장만 곤난하게 된다면서 또한 이제 1944년이 되면 재차 대통령 선거경쟁에 나서야 할 것이 아니냐며 충고하기도 했다. 그 이튿날 헨리와 송미령은 어느 한 비밀거처에서 만났다. 이는 이전에 그들이 자주 만나던 거처였다. 이날 헨리는 송미령한테 월키와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누가 안된다고 해요?” “바로 나요.” 이러자 송미령은 즉각 손톱을 날카롭게 살려서는 헨리의 얼굴을 긁어놓았다. 그 뒤 송미령은 미국인 클라라한테 쓴 편지에서 “당시 나는 진짜 월키 선생과 함께 워싱턴으로 가고 싶었으나 남편(장개석)이 내가 인차 미국으로 가는걸 원하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월키와 헨리가 떠나는 날, 그들은 송미령이 차린 한 자선기구에서 송미령과 작별, 이날 송미령의 사무실로 들어간 월키는 인차 문을 닫았고 헨리가 문밖에서 1시간 20분 가량 기다려서야 이들이 함께 나왔다. 이날 송미령은 이들 두사람과 함께 공항까지 갔다. 월키는 비행기에 오르기전에 송미령을 한번 포옹하면서 얼굴에 미묘한 키스자욱을 남겼다. 출처: 신화넷 김철균 편역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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