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연변국제무역빌딩 3층, 수많은 옷가게를 지나다가 보면 “서울토탈허창호패션”이란 글발이 유표하게 안겨온다. 그리고 아래에서 열심히 또한 까근하게 옷을 재단하는 한 남성을 볼 수 있다.
 
일정한 규모를 갖고 있는 옷가공회사 사장이지만 손수 손님들의 옷을 재단하면서 하루종일 가게앞을 지키는 사나이, 그가 바로 오늘 이 글의 주인공 허창호 사장이다.
 
어렵던 동년, 황홀했던 꿈
 
허창호 사장의 고향은 지금의 연길시 조양천진 팔도촌이다. 허창호가 태어나 세상물정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 그의 가정은 몹시 가난한 모습이었다. 할머니까지 모신 9명 식솔의 가정, 그리고 6형제의 막내인 허창호는 그야말로 형들이 입다가 물려준 옷을 받아입을 때가 많았다. 그 때 어린 나이에도 허창호는 어쩌다 옷을 잘 입은 사람을 보기만 하면 부럽기가 그지 없었다.
 
(나도 언제면 저런 옷을 입어볼 수 있을까?!)
 
당시 어린 허창호의 가장 간절한 소망이라면 멋진 옷 한번 입어보는 것이였다고 할까?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허창호가 종이를 갖고 숱한 옷견본을 만들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런 허창호한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앞으로 어른이 되면 출중한 재단사가 되려는 꿈이 있었던 것이다.
 
(재단사 – 멋진 사람이다. 재단사가 되어 고급옷을 직접 만들어입고 동네사람들한테도 지어드리리라!)
 
어릴 때 일시적 충동으로 가졌던 그 꿈, 허창호는 고중을 졸업할 때까지도 그 꿈을 머리속에 담고 있었다.
 
창업과 시련
 
1986년 고중을 졸업한 허창호는 여느 농촌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농업생산에 투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허무했다. 낮에는 삼복철 땡볕에 땅에 허리를 굽히고 기음을 매고 저녁이면 밥술이 떨이지게 바쁘게 곯아떨어져야만 하는 삶, 허창호는 그런 삶이 지겹기만 했다.
 
아니 그한테 남다른 꿈이 있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꿈이란 절로 이룩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그것이 명지했다. 그는 농사일이 그 힘든 나날에도 서점에 가서 복장재단기술서적을 구입해서 탐독하는 한편 짬짬의 시간을 이용해서는 각종 복장재단강습반에 참가, 당시 그처럼 복장기술을 탐닉하는 남성치고는 허창호씨가 거의 유일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뒤 그는 친구들한테서 돈 500위안을 빌려서는 용정시안에 복장점을 차렸는데 세집돈을 내고 보니 유동자금이 전혀 없어 재봉침 외 기타 설비와 부분적 원단 등은 외상으로 들여오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여성도 아니고 남성청년이 경영하는 복장점이라 처음에는 옷가공을 맡기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모두들 시작이 절반이라고 했지만 정작 복장점을 개업하고 보니 골치아픈 일이 더욱 많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적부터 품어온 꿈이 바로 복장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버티어야 했다. 한동안 마이너스경영을 하더라도 버티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허창호의 오기이기도 했다.
 
허창호는 자신의 이미지를 올리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사회구역 노인들한테 무료로 재단해줬고 부분적 독거노인들한테는 무상으로 옷을 지어드리기도 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고 과연 수개월이 지나니 용정시안의 멋쟁이들은 허창호의 재단기술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사회구역의 노인들도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몇몇 그의 친지들은 “그러한 기술이면 연길 가서도 얼마든지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면서 연길진출을 권장했다.
 
헌데 연길에로의 진출 결과, 가뜩이나 복장업토대가 박약한 허창호는 큰 좌절을 맛봐야 했다.
 
하긴 연길시 서시장부근의 노천가게를 운영하다가 그것이 도시관리집법대대에 의해 모든 노천가게를 철거하게 됐으니 그의 무능함도 아니요, 해당 부문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그 뒤 허창호는 잠시 개인창업을 포기하고 연길시 모 복장회사로 출근하면서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행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중한관계의 물코가 터지면서 한국손님들도 중국으로 대거 쓸어들게 되었다. 그 때 본  한국사람들이 입은 양복, 그것이 그렇게도 멋질 수가 없었다.
 
(바로 저 것이다. 복장기술을 진정으로 배우려면 한국에 가야 한다.)
일이 될라고 그러는지 허창호의 한국행은 그렇게도 쉽게 이루어졌다.
 
한국에서의 나날, 그는 월생활비 20만원(한화)씩 받으면서 한 한국내 유명디자인의 제자로 일했다.
 
당시 한국행을 한 많은 친구들은 일당 5만원짜리 일자리를 수차 소개했지만 허창호는 번번히 거절했다. 그의 한국행이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것은 번연했다.
 
당시 그의 생활은 몹시 간고했다. 회사내 책상위에서 쪽잠을 자야 했고 자작음식으로 끼니마다 라면으로 대부분 에때워야 했다. 그러다보니 “무릉도원”과도 같은 서울의 야경이나 친구들과의 흥이 도도한 명승지 관광 등은 그와는 조금도 인연이 없었다.
 ……
서울에서의 3년생활도 어느덧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다.
 
1993년말의 어느 날 허창호를 제자로 삼았던 한국사장님은 자기가 쓰던 디자이너용 가위 네개와 옷 40여벌을 지을 수 있는 원단을 내놓으면서 허창호를 불렀다.
 
“자네 열심히 잘 배웠어. 자네의 그 수준이면 중국의 그 어느 곳에 가도 밥벌이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거야.”
 
이에 허창호는 감격했다. 보수없이 디자이너기술을 배워준 것도 고마웠는데 그렇게 자기가 아끼던 가위와 원단까지 선물로 내놓았으니 그 은정에 더욱 목이 메였다.
 
동산재기
 
한국에서 돌아온 허창호는 일정한 준비사업을 거친 후 본격적인 복장산업에 투신, 연길백화청사에 첫 서울토탈패션을 차릴 때가 1994년이었다.
 
“내가 연길백화에 패션가게를 차릴 때만 해도 연길시안에는 복장업회사가 100여개나 됐다. 경쟁이 치열했다. 그 뒤 기성복브랜드가 연변에 쓸어들어오면서 그 경쟁은 더욱 더 심했다. 그러면서 자금력이 약한 회사는 도태되고 자금력이 강한 회사가 살아남는 시대도 도래했다. 이는 하나의 준엄한 도전이었다.”
 
자금력으로 볼 때 큰 회사에 비하면 허창호는 “고래무리속의 새우”에 불과했다. 허창호는 기술과 서비스로 큰 회사들과 경쟁을 걸었다.
 
옷 한벌을 지어도 그것이 손님이 갖고 온 원단질에 상관없이 멋진 신식으로 지었고 바느질도 꼼꼼히 절대 옷이 따지거나 삐뚤게 박힌 곳이 없게 했다. 그리고 손님들이 패선가게의 원단을 선택하면 될수록 질좋고 고급스러운 것으로 지어드리군 했다.
 
한편 사회의 공익사업에도 한몫 담당하는 걸 잊지 않았다. 2002년부터 연변 주적십자회와 연변TV방송국에서 공동주최하는 “사랑으로 가는 길” 프로그램에 참여, 거기에 오르는 불쌍한 애들에게 무료로 옷을 해주군 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수백벌이 되며 가치로는 인민폐로 1여만위안에 달한다. 또한 연길시안의   “어머니협회”의 장애인여성들한테도 10여년전부터 옷을 무료로 해드리는 프로그램을 가동했으며 2008년에 들어서는 연변일보 창립 60주년을 맞으며 연변일보 종합신문 전체 직원들한테도 양복 한벌씩 해주었다.
 
올해는 허창호사장이 연길에 “서울토탈패션”을 세운지 21주년이 되는 해이다.
 
현재 국내의 복장업계는 여전히 경쟁이 치렬한 상황, 그럼 허창호사장의 “서울토탈패션”은 대체 무엇으로 승부를 거는가?
 
“복장업계의 생존수단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설비의 인입밖에 없다.”
 
그렇다. 허창호 사장의 자우명은 바로 항상 새로운 기술영지를 개척하는 것, 그래서 그는 해마다 2 - 3차의 한국행을 하며 그럴 때마다 그의 “서울토탈패션”은 새로운 기술교체를 하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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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은 노력하는 자에게 주는 “하느님”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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