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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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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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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의 차남 장위국의 생모는 누구일까
[동포투데이] 중화민국의 대통령 장개석은 장경국과 장위국 이 두 아들을 둔 가운데, 본처가 낳은 장남 장경국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차남 장위국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네명의 부인과도 닮은 곳이 전혀 없었다. 당시 장위국의 신상에 대해 여러 가지 풍설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장개석은 송미령조차 호기심에 그한테 추궁할 정도로 대외적으로 극력 말을 아꼈다. 당시 장개석의 대답은 부인 송미령으로 하여금 분노로 인해 가출까지 강행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장위국의 생모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장개석의 대답은 왜 송미령을 이렇게 화가 나도록 했을까? 사실 장위국도 줄곧 자신의 신상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했다. 1941년 계모 송미령과 친하게 지내던 장위국은 계모의 허락을 받아 송미령의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장위국은 우연하게 송미령의 서재에서 ‘아시아의 내막’이라는 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인차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 작가 존 겐실이 쓴 이 책은 한 페이지가 한 귀퉁이로 접혀져 있었으며 장위국은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가 그 내용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는 장위국이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장위국은 놀란 나머지 이전에 들었던 소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버지와 별로 닮지 않은 생김새로 태어난 그의 신상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위국은 1916년 10월에 태어났다. 당시 장개석에게는 아들 둘뿐이었지만 작은 아들인 장위국은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 네 살이 되자 장위국은 아버지 장개석에 의해 고향인 봉화(奉化)로 보내지기 전까지 상하이 구(邱)씨와 주(朱)씨 두 집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양육됐다. 그가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 봉화에 온 뒤 장개석의 본처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成)이 번갈아가며 돌보던 중 요야성은 자식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장위국을 돌봐왔다. 장위국은 모복매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요야성을 ‘모친’이라고 불렀다. 당시 장개석의 생모인 왕부인이 생존해 있었고, 봉화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장위국을 좋아하며 극진히 잘 대해줬다. 수 십 년 후 장위국은 그 옛일을 다시 들먹이면서 계구(溪口)에 살았던 그 시간을 매우 행복하고도 즐겁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위국은 여덟 살 때 장개석에 의해 광주(廣州)로 가 황포군관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이미 진결여(陈洁如)와 결혼했기 때문에 장위국을 돌보는 사람은 진결여로 바뀌었다. 그 뒤 장위국이 11살이 되자 장개석은 송미령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모씨, 요씨와 진씨 이 세 여인 모두와 관계를 끊었다. 장개석은 진결여를 미국으로 보냈으며 장위국을 그의 신임이 두터운 오충신(吳忠信)의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오충신의 부인이 장위국의 이모로 되었다. 장위국과 송미령이 처음 만난 것은 1940년이었다. 그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위국은 스물네 살이었고, 장개석은 둘째 아들과 송미령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어색해질까 봐 어느 정도 걱정하였다. 하지만 장위국은 송미령을 만나자마자 아주 자연스럽고도 친절하게 영어로 ‘어머니’라고 불렀고, 서양식 예의에 따라 송미령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송미령은 젊은 시절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에 장위국에 대한 첫인상도 좋았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독교를 믿었고, 이후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도 그 해의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되자 장위국의 생모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송미령은 장개석한테 자꾸만 따지고 캐물었다. 그런데 줄곧 송미령에게 순종하고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대답하군 하던 장개석이었지만 이번에는 매우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송미령의 핍박에 아주 짜증스럽게 “묻지 마, 난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마디로 일축하며 내뱉었다. 그러자 이에 몹시 화가 난 송미령은 크리스마스 날 밤 집을 나와서는 홀몸으로 홍콩행을 강행했다. 그녀는 장위국과 사이가 좋았기에 당연히 그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송미령이 화가 난 것은 장개석이 자기한테 속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장개석이 직접 시간을 내 홍콩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고, 두 사람은 곧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아마 장개석도 이때 장위국의 신상을 송미령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컸다. 이후 송미령은 이 문제에 대해 더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장위국을 예전처럼 잘 대해주었다. 장위국은 송미령의 방에서 그 ‘아시아의 내막’을 보고는 계모가 자기한테 뭔가를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 후부터 장위국은 생모를 찾을 타산을 했다. 장개석은 그 몇 년 동안 손중산(孫中山)을 따르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보아 장위국은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장위국은 장개석의 권고에 의해 미국으로 연수를 보내진 틈을 타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다 준자부로라는 사람을 찾아냈다. 이 사람은 손중산이 일본에 있을 때 손중산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리고 장개석이 그 몇 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할 때, 두 사람은 왕래가 밀접했다. 장위국은 이 사람이 긍정코 자기의 출생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과연 장위국의 예상대로 야마다는 그의 생모의 이름을 말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내막’에 나오는 설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그랬다. 장위국은 확실히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야마도에 따르면 장위국의 생부의 이름은 대계도(戴季陶)로 국군의 원로 중 한 명이자 중량급 인물이었다. 당시 대계도는 장개석과 함께 손중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고, 장개석과는 동향이자 동창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나중에 대계도는 장개석 휘하의 장군으로 되기도 했다. 1913년, 일본에 있던 대계도는 급병에 걸려 현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는 시게마츠 가네코라는 간호사를 알게 되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뜨거워졌고, 대계도가 퇴원한 후 두 남녀는 동거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일찍 결혼한 몸이었고 그의 아내 뉴유항(钮有恒)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갓집 규수였기에 대계도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두려워했으며 한 번도 그녀를 화나게 한 적이 없었다. 본인은 한때 국군 고위층의 ‘3대 공처가’ 중 일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찍 대계도는 조카와 사사로운 정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란 나머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다행이도 당시 그의 부하가 재빨리 그를 구해 주었으니 말이지 큰 일이 날 뻔 했다. 한편 1916년 대계도가 손중산을 따라 귀국할 때 시게마쓰 가네코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감히 그녀를 데리고 귀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시게마쓰 가네코를 일본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시게마츠 가네코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야마다 준자부로에게 자기가 낳은 아이를 중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아이가 바로 장위국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 몇 년 간 점점 더 아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대계도는 아내에게 이 아이의 내력을 도무지 설명해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계도의 절친한 친구로서, 장개석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이 아이를 입양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계도는 즉석에서 동의했으며 이렇게 되어 생부가 아이의 의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약속 때문에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송미령이 따져 물었지만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 장위국은 이때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으로는 장개석에 대해 몹시 감탄했다. 다른 한편 생모인 시게마츠 가네코는 장위국이 다섯 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장위국은 야마다의 말을 반신반의로 믿다가 장개석의 일기를 읽어본 결과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확실히 장개석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장제스는 그를 자식처럼 여겼으며 ‘경문위무(经文纬武)’라는 좋은 뜻으로 장경국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장차 형 장경국(蒋经国)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큰 돈을 투입하여 장위국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를 외국에 유학 보내 훌륭한 군인으로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장위국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개석과 장경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이 회의나 순시하러 나갈 때면 데리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장경국이었고 정계에서 중점적으로 양성한 사람도 장경국이었으며, ‘호구병변(湖口兵变)’을 틈타서는 장위국의 수중에 있던 병권을 빼앗기도 했다. 장위국은 이때부터 의기소침해졌고, 장경국이 죽은 후에야 사람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장위국은 자신의 신상을 알고도 장개석처럼 대외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1996년에야 자기가 서술한 책에서 자신이 대계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장위국은 ‘물방울 같은 은혜도 샘솟듯한 물량으로 갚는다’는 이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장개석이 혈연관계가 없는 아버지였지만 이미 그 친아버지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장위국에게 주었다는 알고 있었다. 장위국은 언제 누가 물어도 장개석의 아들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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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갇인 1남 7녀, 그들의 운명은…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 이야기는 지난 세기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 사이에 있은 한 조선인 남자가 일본인 여성 7명과 동시에 결혼해 도합 27명의 자녀를 낳은 진실한 이야기다. 사람은 사회에서 생활함에 있어서 당연히 많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이성과 생기는 감정적 욕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아는 영장 동물이다. 더군다나 특정된 장소에서는 남녀 사이에 이런 감정이 싹트기 쉽다. 대천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형형색색의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반려자로부터 선택되고 또한 반려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경우에 따라 인간은 반려자를 선택할 수 없거나 감정적인 욕구가 없는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이성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군사적 큰 착오로 벌어진 태평양 전쟁 말기 남성 1명과 여성 7명이 태평양 가운데의 트루크 군도에 남겨지면서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기까지 이 해괴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이야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면 모든 전쟁의 근원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여러모로 미국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행을 바라고 저울질하면서 미국의 태평양 해군기지를 공격했으며 전쟁 초기에는 연전연승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미군이 일본군 약점을 연속 꿰뚫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군은 차츰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하나둘씩 빼앗겼던 섬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운데 끼인 일본군 점령 섬들은 고립되어 보급은 전혀 없었으며 어떤 경우엔 단 한 명의 병력 손실도 없이 미군은 이 섬들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당시 트루크 제도에는 일본군 병사와 조선인 부역자 및 일본군 위안부가 주둔해 있던 고립된 섬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공급 사슬을 끊자 섬에 갇혀 있던 이들은 고립되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흐르자 구원투수들에게 삶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서 구조자를 섬에 보냈을 때 갇힌 사람들은 한동안 삶의 희망을 본 듯 들뜨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짧디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일본 본토에서 보낸 구조선은 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구조선박은 섬 기슭에 사람이 보이지 아니 하자 무인도로 여기고는 재빨리 선수를 돌려 트루크 섬을 빠져나가면서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 후 조선인 부역자 김유길과 일본인 위안부 7명이 “사람을 살려요”라고 외치며 해안으로 달려 내려갔을 때는 배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희망이 깨지자 일곱 여인은 서로 얼싸안고 펑펑 울면서 땅을 쳤고 김유길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인들처럼 울고불고 할 수는 없었다. 몹시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남자로서 좀 강해야만 했다. 그는 엉겁결에 일본 여인들이 흐느끼는 것을 보고는 그녀들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어구가 없었다. 말문이 막히자 그는 다가가 그녀들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만 했다. 울음을 터뜨릴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고 사위가 잠잠해진 뒤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이들 일남 칠녀는 섬에서 두 달 넘게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구조를 기다리지도 못한 채 섬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와 과일은 거의 다 뒤졌다. 그러다가 다행히 그들이 앞날이 막막할 때 뜻밖으로 담수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삶의 빛 한 가닥 생긴 것이다. 한편 섬에서의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물고기라도 잡아서 모두가 굶어죽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평일에는 고기잡이 말고도 비교적 건장한 여자 몇 명을 데리고 사냥을 했으며 그리고 그 때면 나머지 몇몇 여자들은 나무를 찾아 불을 피우고 빨래 같은 일을 하면서 제각각 자기의 맡은 바의 일에 충실했다. 처음에 김유길과 그녀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교류는 손짓 혹은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김유길은 그녀들한테서 일본어를 배웠고 그 또한 그녀들에게 조선말을 배워주었으며 이렇게 되어 그들은 얼마 안돼 서로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섬에 갇힌 지 1년이 되는 해 봄의 어느 날, 김유길은 섬에서 일본인들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벼 종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김유길의 머릿속에서는 기발한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바로 벼농사를 한번 해보자는 결심으로 마음속으로부터 논을 풀었다. 그 해 그는 여인들을 거느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논을 풀었다. 논둑을 만들고 논에 물을 가두고…그리고 벼 모종을 논에 심자 과연 벼가 우썩우썩 벼가 잘 자랐다. 그 뒤 가을이 되자 김유길은 또 여인들과 함께 벼를 베어 거두어 들이고 타작을 했다. 타작이 끝나자 이들은 마침내 첫 햇밥을 먹어볼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유길은 점차 모든 여자들의 숭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자 김유길은 자연스럽게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연상하게 되었다. 바로 빗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집을 짓는 것. 원래 집짓기 같은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김유길은 그 실행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을 거느리고 연 며칠 나무를 찍어 와서는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씩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았으며…마침내 지붕까지 얹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집 모양새를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집은 비록 허름하고 그닥 크지도 않았지만 이 외딴 섬에 그들도 비바람을 피할 곳이 드디어 생긴 셈이었다. 여성 그 자체가 워낙 감성적인 동물이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남성을 사랑하기가 쉬운 것이다. 섬에 버려진 뒤 여자들은 몹시 절망했지만 당시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그녀들을 책임지고 그녀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환경까지 해결해줬기에 그럴만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김유길이라는 유일한 남자에게 마음을 기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갖가지 애로와 언어의 장벽까지 뚫고 나온 김유길은 일본 여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중에는 거의 감출 것도 없이 속심을 털어 놓을 때도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속된 농담도 거침없이 할 정도였다. 이렇게 한동안 어울리던 중 김유길은 자신이 그 중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몰래 그 여인한테 자기의 마음을 고백했다. 헌데 이 여자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이를 다른 여자들한테까지 자랑할 줄이야?! 이러자 이들 여자 모두가 한결같이 김유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어 김유길은 황제처럼 되어 일곱 명의 여자를 동시에 품에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정을 꾸린 뒤 이들은 아예 귀국할 생각을 접고 살림을 차리고 김유길의 아내로서의 각자의 의무를 다 하였다. 그리고 아내들은 선후하여 스물일곱 명의 자녀를 김유길한테 낳아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의 작은 가정으로부터 하나의 대가족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러간 뒤 이 35명의 대 가정은 바다에 나타난 미군 순찰함에 의해 발견되었고 오랫동안 귀국생각을 접었던 이들에게 마침내 각자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김유길은 고향으로 즉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고 그 외의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일본으로 송환됐다. 김유길은 귀국한 지 몇 년 만에 그 아내들이 그리워났다. 거기에 자녀들이 보고 싶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처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두루 수소문한 결과 그의 다섯 명의 아내는 이미 재가하여 다시 살림을 차렸고 나머지 2명만이 그래도 김유길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이미 일부일처제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특별한 예외의 경우였다. 정부도 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이렇게 죽을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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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지난번 계속)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성은 먼로, 그는 정신 질환으로 앓고 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였으며 늘 자신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인 델라에게도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매우 격렬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글래디스는 MGM 콜롬비아의 한 영화제판공장에서 스크랩 작업을 했으며 어머니 역시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로 평생 수용소 출입이 아주 잦았다고 한다. 1942년 6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제임스 아이젤 돌티와 결혼했으나 1946년 9월 13일 첫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는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2월 2일 일본 도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이 혼인신고를 한 지 274일 만에 마릴린 먼로가 이혼을 제출했고 1954년 10월 31일, 법원은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뒤이어 마릴린 먼로는 1956년 6월 29일 극작가 아서 밀러와 극비리에 결혼했고 그해 8월 메릴린 먼로는 임신했지만 곧 유산했다. 마릴린 먼로는 1957년 8월 1일 자궁외 임신으로 다시 유산했다. 1961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정식 이혼하고 말았다. 18세 때 마릴린 먼로는 기독교인이 됐다. 하지만 1956년 아서 밀러와 결혼하면서 먼로는 유대교로 전향했다.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생전에 애완견을 많이 키웠으며 그 중 마지막 한 마리는 시나트라가 선물한 몰타 개로 이름을 지어 ‘마피아(Mafia)’라고 불렀다. 1960년 8월 28일, 마릴린 먼로는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그 뒤 1961년 2월 7일 재차 뉴욕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5일에 퇴원했다. 1962년 1월, 마릴린 먼로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으며 7월 20일 자궁내막염으로 또 입원치료를 받았다. 1962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심리치료사와 6시간을 보냈다. 이는 그녀의 생에 있어서 마지막 하루가 됐다. 그 이튿날 즉 8월 5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마릴린 먼로가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무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8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식의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으로 하나 또 하나의 성감적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감동적인 연기 스타일과 죽음은 영화 팬들의 영원한 성감 적인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많은 팬들은 살아가면서 그녀의 사진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니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하얀 치마를 입고 뉴욕 거리에 있는 모습과 땅속 열기에 그녀가 걸친 치마가 나팔을 벌린 듯한 모습의 흑백사진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눈을 살짝 감은 듯 입술을 감빠는 모습, 소파 위에 하얀 다리를 드러낸 모습 등을 보노라면 사진만이 아닌 특별한 감정의 전달과 순수하고 성감적인 정국이 될 때가 많다. 공개된 사진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청순하기도 하고 털털하기도 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좀 길게 땋은 머리 태, 청바지, 리넨 스커트 등은 다양한 스타일링으로 생활 속 먼로의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먼로는 1962년 8월 5일, 자기의 거처이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 무브먼트의 거실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떠올리면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케네디 가문과 정치권의 암막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가 죽은지 수 십 년이 넘도록 그녀에 대한 공식 조사서류는 대부분 고급기밀로 분류돼 있었다. 2006년까지 FBI(미 연방수사국)는 미국 자유정보법에 따라 500쪽 분량의 먼로 관련 문건의 비밀을 해제했다. 그러자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그가 적어놓은 비밀일기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역사 전문가들은 뒤늦게 밝혀냈다. 먼로의 일기에는 먼로와 케네디 형제의 ‘베갯머리 대화’가 다수 기록돼 있었다. 1962년 8월 초, 케네디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먼로와의 모든 왕래를 끊었다. 갑작스런 격변에 직면하여 마릴린 먼로 역시 자신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8월 4일 오후 9시 반, 그녀는 절친인 시드니 길라로프에게 전화로 케네디 형제와 있었던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LA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릴린 먼로는 공교롭게도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비밀 일기’도 신비롭게 사라졌으며 LA지검 사무실 또한 마릴린 먼로가 일기를 썼다는 것과 먼로의 죽음이 모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부인했다. 2012년 5월 16일,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제 홍보 포스터가 나붙었고 현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마릴린 먼로 주연의 각종 다른 영화의 스틸 사진이 끊임없이 상영되면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유명 조각가 수어드 존슨이 만든 마릴린 먼로 조각상 ‘영원한 먼로’가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그녀는 줄곧 어떤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녀도 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먼로는 평생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여인으로서 먼로는 전심전력으로 절대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이런 100%의 사랑을 남편들은 주지 못했고 애인들은 더욱 주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36세의 마릴린 먼로는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용모를 주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지 않았다. ‘세상의 좋은 물건은 견고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구름은 쉽게 흩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마릴린 먼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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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그녀는 60년대까지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한 여배우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유혹의 여신’이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그녀의 별명은 노마 제인 모테이센(Norma Jeane Baker)으로 미국계 유대인이었으며 출생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다. 마릴린 먼로: 출생일 1926년 6월 1일, 사망일 1962년 8월 5일, 별자리 쌍둥이자리, 혈형 AB형, 키 166cm, 몸무게 53kg, 직업 프로배우, 모델, 대표작 ‘7년차 가려움’, ‘버스터미널’, ‘용놀이’, ‘열정은 불처럼’ 등 다수 주요 성과로는 제9회 영국․TV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 최우수 외국여배우상, 제14회 미국영화방송 골든글로브 영화부문-뮤직코미디부문 최우수 여주연상, 제11회 영국 영화·TV예술아카데미 영화상 최우수 여배우상, 제17회 미국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뮤직코미디 최우수 여주역상, 100년 만의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 1926년 6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본병원에서 태어난 마릴린 먼로는 당시 노마 제인 모태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한 차례의 세례 후 그녀는 이름을 노마 제인 베이커로 변경했다. 불행한 것은 그녀가 사생아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멀리 타향으로 떠났으며 먼로는 태어난 지 13일 만에 브라운다이 부부의 집에서 매주 5달러씩 내기로 하고 입양됐다. 1933년 가을, 마릴린 먼로는 어머니 글라디스 바크르에게 인계되었다. 글라디스는 1935년 6월 1일 먼로의 보호자가 됐지만 몇 개월 후인 9월 13일 먼로를 고아원에 보냈다. 이어 먼로는 1937년 11월부터 안나란 여인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고교생이던 1941년 마릴린 먼로는 어린 나이에 결혼과 함께 ‘아름다운 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결혼 후 마릴린 먼로는 올림픽 챔피언 하워드한테서 역도와 서핑을 배웠으며 1944년 5월부터는 항공기 무전기 제조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5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는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과 함께 잡지 사진을 찍었다. 그 때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은 그녀가 사진을 게재하여 미군을 고무시키기를 희망했다. 마릴린먼로는 1946년 5월 26일 ‘가족권’ 잡지 표지를 통해 처음으로 얼굴을 알렸다. 1946년 7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로 처음으로 가게 되었고 7월 26일 폭스와 첫 6개월 계약을 맺었다. 또 머리를 황금색으로 염색하면서 ‘제인 아델’이라는 예명을 붙이기도 했다. 1948년 마릴린 먼로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슈쿠다, 허!스쿠다, 하이!(It's Shukuda, Huh! It's Shukuda, Hi!)’에서 교회를 달군 여자 역을 맡았지만 그한테 차례진 대사는 한 줄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는 한 영화에서 여자아이를 연기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장면은 삭제되었다. 1949년 5월 27일, 사진작가 톰 켈리는 먼로의 누드 사진을 여러 장 촬영하여 골드 미스 드림 달력을 출판했다. 하지만 먼로는 달력에 실린 자기의 사진에 싸인을 하지 않아 50달러만 받게 되었다. 그해의 8월 15일, 먼로는 뮤지컬 영화 ‘토마호크행 티켓(Tickets to Tomahawk)’의 촬영에 참여했고 10월에는 또 범죄영화 ‘밤의 밤’ 촬영에도 참여했다. 1950년 1월 5일, 먼로는 드라마 ‘화구(火球)’의 촬영을 시작했고 4월에는 또 드라마 ‘혜성미인’에서 어느 한 주요 배역을 맡았다. 같은 해 먼로는 잡지 ‘성조기’가 선정한 ‘매력 아가씨’로 뽑히기도 했다. 1951년 4월 18일, 먼로가 출연하는 애정 코미디 영화 ‘사랑의 둥지’ 촬영이 시작되면서 그해 5월 1일, 폭스는 먼로와 6개월 계약 기간을 7년으로 연장했다. 뒤이어 먼로는 1952년 5월 7일 ‘라이프(life!)’지의 표지모델로 데뷔했으며 6월 1일에는 멜로영화 ‘신사는 미인을 사랑한다’의 주역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그해 8월 31일 라디오 생방송에 첫 출연 했고 9월 2일에는 ‘미스 아메리카 모델 쇼’에 출연했다. 1953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가 미국 연예계에 짙은 손자국과 발자국을 남겼으며 9월 13일에는 TV에 처음 등장했다. 이어 11월 5일 로렌 바이콜, 로리 캘헌과 함께 출연한 애정 코미디 영화 ‘결혼하고 싶어’가 개봉됐다. 영화에서 먼로는 어릴 때부터 백만장자와의 결혼에 목마른 성감 모델 ‘보라 드 베이워스’ 역을 맡았다. 1954년 4월 30일, 마릴린 먼로가 로버트 미첨과 함께 촬영한 서부 모험영화 ‘동으로 흐르는 강물’이 개봉했다. 이 영화에서 먼로는 팜므파탈의 바 가수 ‘카이’역을 맡았다. 먼로는 9월 1일 로맨틱 코미디 영화 ‘7년차 가려움’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로 먼로는 제9회 영국영화·텔레비전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인 외국여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5년 1월 7일, 마릴린 먼로는 밀턴 그린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 센터’의 설립을 발표하였고 1월 15일 20세기 폭스 프로덕션과의 계약은 종료됐다. 1956년 1월 4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프로덕션과 재계약을 맺고 2월 25일 할리우드에 복귀했다. 그 때로부터 그녀는 마릴린 먼로로 개명했고 이어 3월 3일에는 주연 로맨틱 코미디 영화 ‘버스터미널’에 출연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제14회 미국 영화 TV 골든글로브 영화․TV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57년 6월 13일, 마릴린 먼로가 로런스 올리버와 함께 주역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드래곤 봉황’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는 관능적이고 매력적인 쇼걸 ‘엘시 마리나’의 역을 맡았으며 이 역할로 제11회 영국영화·TV예술 아카데미상 영화상-외국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8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애정 코미디 영화 ‘열정은 불처럼’에서 마이애미 악단의 아름다운 관능의 여인 ‘수가’ 역을 맡았다. 1960년 3월 8일 먼로는 영화 ‘열정은 불처럼’으로 제17회 미국 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 부문-뮤직코미디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을 받았다. 1961년 1월 31일, 마릴린 먼로는 클라크 게이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함께 촬영한 서부 애정 영화 ‘난점 원앙보’가 개봉됐다. 1962년 3월 5일, 마릴린 먼로는 ‘세계 최고의 여배우상’을 수상했고 이어서 4월 23일에는 그녀는 주연 코미디 단편 영화 ‘멘붕’ 촬영을 시작했다. 1962년 6월 1일은 마릴린 먼로의 20세기 폭스프로덕션에서의 마지막 출근 날이자 마지막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6월 7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먼로와 계약을 종료했다. 하지만 그해의 8월 1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월급을 2배로 주기로 하고 마릴린 먼로를 다시 고용하기로 결정했으며 8월 3일, 먼로는 ‘라이프’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멘붕'의 재촬영에 동의하면서 ‘라이프’지의 표지모델이 됐다. 1999년 미국영화학회가 선정한 ‘100년 만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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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끈 역사적 변혁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약속, 그것은 역중천균(力重千钧)이다. 또한 수파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이 말한 것처럼 “중국이 ‘WTO 가입’시 약속한 대외 개방을 이행한 것은 구성원 중 가장 깊고도 광범위하였다” 그리고 진리췬(金立群)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 총재는 “‘WTO 가입’ 초기 중국이 발전 배당금을 더 많이 받았더라면 현재와 미래는 세계가 중국의 기회를 더욱 많이 공유할 것”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제18차 대회 이래 중국은 개방의 역사를 주도적으로 파악하여 대외 개방의 질적 증가속도를 높였다. FTA 시험 구역과 자유무역 항구의 범위를 끊임없이 확대하였으며 외국인 투자 진입 네거티브의 부단한 축소와 ‘일대일로(一带一路)’의 가일층 심화…세계는 중국을 집중 조명하면서 중국 발전의 ‘급행열차’와 ‘편승열차’를 함께 타기도 했다. 푸젠(福建)에서 태어난 ‘중국초(中国草)’는 초대목(草代木)으로 식용균을 재배할 수 있어 경제적 가치와 생태적 효과를 겸비했다. 중국은 이 균초 기술을 전문가 그룹과 더불어 사심 없이 세계, 특히는 저개발국과 공유하고 있다. 현재 ‘중국초’는 세계 100여 개 국가에 뿌리를 내리고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중국초’가 빈곤 지역의 발전 희망을 부풀리는가 하면 ‘중국 도로’, ‘중국 교량’과 ‘중국 열차’도 국경을 넘어 우정과 발전의 맥을 전하고 있다. 지난 12월 3일 중국-라오스 국제철도가 개통됐다. 북쪽 쿤밍(昆明)에서 출발하여 남쪽의 비엔티안에 도착하는 국제 열차이다. 전체 길이는 1035킬로미터이다. 이 ‘강철 실크로드’는 동남아 국가들에 피복되어 번영과 풍요로움을 주는 큰 통로가 됐다. 또한 중국과 아프리카 27억 대중이 손잡고 높은 수준의 중국―아프리카 운명공동체 구축을 추진하고 중국·아세안 협력도 가일층 승화돼 동아시아 경제통합을 이끌고 있다. ‘차이나 기회(中国机遇)’의 스토리가 매일 이어지면서 전 세계 우호 국가가 확대되고 개방과 공영의 굉장한 힘을 모으고 있다. 중국식 다스리기- 개방은 개혁을 추진하고 중국식 현대화의 새로운 길 개척 이는 ‘WTO 가입’의 배당금이자 개혁의 배당금이었다. 개혁은 진통이 있지만 개혁하지 않으면 긴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중국 기적’은 대외 개방과 개혁 심화를 결합한 소중한 경험을 갖고 있다. 왕원타오(王文涛) 중국 상무부장은 “WTO에 가입한 이래 중국은 개방으로 개혁과 발전을 촉진하면서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끊임없이 완전하게 추진해 시장과 사회의 역동성을 불러일으켰다”며 “개방은 체제의 문제점을 표출시키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바로 개혁의 주안점이다”라고 밝혔다. 1986년 중국이 정식으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총 협정 체결국 지위 회복신청을 낸 이래 15년이란 긴 회복기간과 ‘WTO 가입’ 협상이 있었다. 이로 하여 중국은 WTO에 미리 적응하는 시간을 벌었고 국내 경제 개혁에 방향을 제시했다. 장샹천(张向晨) 세계무역기구 사무 부총장은 “다자간 무역체제와 국내 경제체제 개혁을 통합해야 국제무역체제에서 수혜를 볼 수 있다”며 “결재기간은 15개의 영업일에서 3개의 영업일로 압축되었으며 올해 4월 하이난(海南) 해상사무 부문의 개혁으로 하이난 FTA항의 첫 외국인 독자기업인 양푸항(洋浦港) 착지가 빨라졌다”고 평가했다. 20년 동안 중국의 이러한 국내개혁 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났었으며 경제 분야의 각종 체제기제의 약점을 부단히 보충했다. 개방하면 늑대와 춤을 추는 업종이 반드시 있을 법이기에 중국은 오히려 개혁을 가속화하면서 ‘굳은 살을 헤치고 다시 태어나라’고 몰아붙이곤 했다. 자동차업계의 경우 더 많은 외국 브랜드를 유치했지만 자국 브랜드에도 기회를 주어 중국 자동차도 경쟁에서 ‘물 대포’를 맞으며 ‘보위전’을 치렀지만 그것이 ‘진급전’을 이어갈 정도로 경쟁이 커졌다. 469만 대와 5000만 대, 이는 2001년과 2020년 중국 자동차생산 판매량의 비율로 거대한 차이가 업계의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2018년 합자주율 제한이 가시화되면서 신에너지 트랙에서 중국산 자동차들이 앞지르기를 준비하고 있다. 외국인 투자 유치 네거티브 리스트 개정(负面清单) ‘감법(减法)’ 하나하나가 더 개방적인 영역을 의미했고 리스트가 적어질수록 관리 틀과 모델상의 개혁 요구는 더 높아졌다. 개방은 제도로 보장하고 개방은 제도로 확대한다는 것이 중국이 세계에 보내는 더 높은 수준의 개방 신호다. 2018년에는 중국의 첫 ‘제도적 개방’을 실시했고 2019년에는 ‘규제·관리·기준 등 제도적 개방 추진’을 명시해 중국의 개방 개혁이 국내제도 차원으로 한 단계 더 확대됐음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WTO 가입’은 중국이 시장경제를 하겠다고 전 세계에 약속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강조하고 있는 중대한 돌파구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룽융투(龙永图) 중국의 ‘WTO 가입’ 수석협상대표는 “오늘날 인민 중심으로 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길이 세계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20년간 중국은 개발도상국의 발전 수준, 발전 단계, 수용 능력에 입각하여 질서정연하게 시장 개방을 추진하였다. 또 선진국 발전 경험과 사회주의 제도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중국식 현대화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금융업에서 중국은 서방의 100년 간 경험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으며 한편으로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의 발전 경로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즉 본토와 결합해 제도 혁신을 하였고 나름대로의 세계적 금융허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중국은 반성과 함께 금융업 개혁과 개방을 자국의 절주대로 밀고 나갔다. ‘선위불가승, 이대적지가승(先为不可胜,以待敌之可胜)’이라고 ‘손자병법’의 이 구절은 소박한 진리를 말한다. 자신의 단점을 직시해 약한 부분을 공략하면 후발 강점을 살리고 결국에는 경쟁에서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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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끈 역사적 변혁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세계경제가 중국을 ‘수용’했기에 새로운 시대에 들어 중국의 더욱 폭 넓은 개방에 더욱 경탄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제18차 대표 대회 이래 중국의 대외 개방은 수동적으로부터 주동적으로 세계 경제를 이끄는 뚜렷한 특징이 나타났다. 지난 12월 1일, 중국-유럽행 열차가 충칭 단결촌에 있는 철도 중심역에서 화물을 가득 실은 채 천천히 빠져나왔다. 충칭세관이 올해 들어 감독관리를 더 한층 풀어준 2191번째 중국-유럽행 열차로 그 옛날 사막의 낙타방울이 오늘날의 ‘강철 낙타 행렬’로 된 셈이다. 10년간 중국-유럽행 열차는 이미 일대일로를 공동 건설하는 중요한 운반체가 되어 중국의 대외개방 판도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제의 세계화 과정에서도 큰 진전을 보여주고 있다. 충칭이란 이 ‘산성’은 세계에로 통했고 ‘옛 고지’는 다시 새로운 봉우리로 올라가게 되었다. FTA 실험 구역은 수차례 중국의 동서남북에 일떠섰다. 선전 경제특구의 40년 재출발, 하이난 자유무역항은 돛을 올려 항해를 시작했고 광둥, 홍콩과 마카오는 공동으로 국제 일류의 걸프 지역과 세계적인 도시 군을 건설했으며 슝안 신구(雄安新区) 천년대계와 국제소비중심도시 건설은 쾌속 궤도에 진입했다. 이렇듯 하나의 강력한 움직임이 모여 중국경제 총량을 100만 억 위안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했고 1인당 GDP는 1만 달러를 돌파하였다.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 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완전한 공업 분야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빠른 걸음으로 고품질 발전을 향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즉 신에너지차, 인공지능(AI), 디지털경제 등 분야에서 대규모의 추월을 야망하고 있다. 중국의 기회, ‘세계시장’을 개방 육성하고 세계경제를 일지춘수(一池春水)로 활성화 시켜 중국은 개방 속에서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개방 속에서 세계를 행복하게 한다. ‘중국의 기회’는 세계적인 대 변혁사였으며 4회 연속 거행된 수입품 박람회는 경전적인 주목으로 ‘이전난구(一展难求)’의 큰 인기였다. 곧 바로 세계 각국이 개방 확대와 세계화의 종심(纵深) 발전을 향해 던진 중국의 ‘신뢰표’는 중국 시장의 큰 매력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2018년, 중국은 보호무역주의 역풍에 맞서 세계 최초로 수입을 주제로 한 국가 급 수입품박람회를 상하이(上海)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무역자유화와 경제세계화를 지지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또한 2019년에 있은 제2회 수입품박람회는 신 중국 창립 70주년을 맞아 ‘더 높은 수준의 개방’이라는 시대적 강음을 전했다. 이는 중국의 개혁개방의 재출발 의지를 과시한 것이다. 그리고 2020년에 있은 제3회 수입품박람회는 전 세계 코로나19 상황의 충격에 직면하여 중국은 세계에 향해 “새로운 발전 구도는 결코 폐쇄적인 국내 순환이 아니다”라고 정중히 선언했다. 국내와 국제라는 쌍 순환 트랙을 더욱 활짝 열어놓은 셈이다. 2021년 제4회 수입품박람회의 취지는 ‘개방의 봄바람으로 세계가 따뜻하게 하자’는 대국의 드넓은 도량이었다. 중국은 인구 14억여 명과 중위소득 4억 명 이상으로 연간 약 2조5000억 달러의 수입과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시장 규모도 엄청나게 크다. 수입품박람회의 ‘로드맵’중국 시장은 ‘세계의 시장, 공유하는 시장, 우리 모두의 시장’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WTO 가입 20년, 중국은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으로 세계와 시장 기회를 확고히 공유하고 있다. -화물 부문은 전체 관세가 7.4%로 낮아지고 서비스 부문은 120개 가까이 개방돼 모두 ‘WTO 가입’ 시의 약속 수준을 웃돌았다. -중국은 120여 개국의 주요 교역 파트너로 부상해 지난 20년간 세계 경제성장에 대한 연평균 기여율이 30%에 육박했다. -세계적인 수입대국이 되어 42개 최빈 개도국의 97%에 대해서는 관세면제 혜택을 주었고 25%에 해당하는 그들의 수출을 유치하여 최빈개도국의 최대 수출시장으로 되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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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전, 생명으로 지킨 中극비문서...22일 후 세계를 진감④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번 계속) 1968년의 10월 초부터 곽영회는 핵 실험장에서 중국의 첫 열핵탄두 발사 준비작업에 참여하면서 12월 초까지 머물렀다. 그날 저녁 그는 북경으로 가는 항공편을 알아보고는 곧 비행기를 탈 목적으로 비행장으로 향했다. 당시 야간항공편을 타지 말고 다음날 아침에 출발하라는 동료의 만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곽영회는 역시 “야간항공편을 이용하면 이튿날 근무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이 곽영회는 과제 연구조 성원의 회보를 받은 후 인차 비행기에 올랐다. 5일 새벽, 곽영회가 탑승한 비행기는 북경 수도공항에 서서히 착륙하다가 지상 400미터 되는 지점에서 갑자기 균형을 잃었으며 한동안 허우적거리다가 공항에서 불과 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옥수수 밭에 추락했다. 당시 탑승한 승객과 승무원 도합 14명 중 중상자는 단 1명에 불과했다. 그 생존자는 당시 추락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곽영회가 생명의 마지막 시각에 “아, 나의 서류!”라고 소리쳤다고 회고했다. 사고 직후 구조대원들이 추락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나머지 13구의 희생자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타고 너부러져 있었지만 유독 2구의 시신은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구조대원들은 시커멓게 탄 시신 2구를 떼어내려고 애를 쓰던 중 그 2구의 시체의 가슴사이에서 뭔가를 발견하였다. 거의 멀쩡한 서류 가방이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서류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곽영회가 상급에 보고하려고 했던 그 열핵미사일 시험 데이터 자료가 있었다. 그 시신 2구의 시신은 곧 바로 곽영회와 경호원으로 확인됐다. 열사의 정신은 영생한다 곽영회가 당한 조난은 삽시에 세상을 진동하였다. 주은래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비행기는 내비게이션시스템(导航系统)에 고장이 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곽영회의 비보를 듣고 울음을 터뜨리던 전학삼은 “그냥 10초였다. 생명이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우수한 역학 연구 대가가 세상을 떠났다. 삶과 죽음, 10초였다!”며 몇 번이고 되뇌이었다. 한편 조난 소식을 접한 곽영회의 아내 이패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혼자 베란다로 나와 먼 곳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07년 이패 여사는 평생 모은 돈 60만 위안을 두 차례에 걸쳐 중국과학기술대학과 중국 과학원 역학연구소에서 설립한 ‘곽영회 장학금’에 기부했다. 들려오는 풍문에 따르면 당시 누군가 이패 여사에게 “왜 기부의식을 차리지 않느냐”고 묻자 이패 여사는 그냥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의식은 무슨 의식? 그냥 원해서 기부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1968년 12월 25일 중공중앙에서는 곽영회에게 열사 칭호를 수여했다. 그리고 12월 27일 즉 곽영회가 사망한지 22일 후, 그가 생명으로 지켜낸 중요한 자료에 따라 중국은 첫 열핵미사일 실험이 성공하여 수소폭탄의 무기화가 실현되었다. 또한 1970년 4월, 곽영회가 직접 설계한 ‘동방홍 1호(东方红一号)’ 인공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1999년 9월 18일, ‘양탄일성(两弹一星)’프로젝트에 탁월한 공헌을 한 중국 과학자 23명이 국가로부터 ‘양탄일성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23명 중 곽영회는 유일하게 핵폭탄, 미사일과 인공위성 연구개발에 모두 참여하고 이바지한 과학자이자 유일한 열사였다. 2018년 7월, 국제 소행성센터는 국제사회에 정식으로 공지를 발표하여 일련번호 212796과 212797의 소행성은 ‘곽영회성’과 ‘이패성’으로 영구 명명했다. 매번 우리가 고개를 들고 먼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항상 우리의 진로를 안내하는 것은 언제나 빛나는 그 별이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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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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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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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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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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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의 차남 장위국의 생모는 누구일까
- [동포투데이] 중화민국의 대통령 장개석은 장경국과 장위국 이 두 아들을 둔 가운데, 본처가 낳은 장남 장경국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차남 장위국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네명의 부인과도 닮은 곳이 전혀 없었다. 당시 장위국의 신상에 대해 여러 가지 풍설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장개석은 송미령조차 호기심에 그한테 추궁할 정도로 대외적으로 극력 말을 아꼈다. 당시 장개석의 대답은 부인 송미령으로 하여금 분노로 인해 가출까지 강행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장위국의 생모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장개석의 대답은 왜 송미령을 이렇게 화가 나도록 했을까? 사실 장위국도 줄곧 자신의 신상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했다. 1941년 계모 송미령과 친하게 지내던 장위국은 계모의 허락을 받아 송미령의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장위국은 우연하게 송미령의 서재에서 ‘아시아의 내막’이라는 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인차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 작가 존 겐실이 쓴 이 책은 한 페이지가 한 귀퉁이로 접혀져 있었으며 장위국은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가 그 내용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는 장위국이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장위국은 놀란 나머지 이전에 들었던 소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버지와 별로 닮지 않은 생김새로 태어난 그의 신상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위국은 1916년 10월에 태어났다. 당시 장개석에게는 아들 둘뿐이었지만 작은 아들인 장위국은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 네 살이 되자 장위국은 아버지 장개석에 의해 고향인 봉화(奉化)로 보내지기 전까지 상하이 구(邱)씨와 주(朱)씨 두 집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양육됐다. 그가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 봉화에 온 뒤 장개석의 본처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成)이 번갈아가며 돌보던 중 요야성은 자식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장위국을 돌봐왔다. 장위국은 모복매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요야성을 ‘모친’이라고 불렀다. 당시 장개석의 생모인 왕부인이 생존해 있었고, 봉화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장위국을 좋아하며 극진히 잘 대해줬다. 수 십 년 후 장위국은 그 옛일을 다시 들먹이면서 계구(溪口)에 살았던 그 시간을 매우 행복하고도 즐겁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위국은 여덟 살 때 장개석에 의해 광주(廣州)로 가 황포군관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이미 진결여(陈洁如)와 결혼했기 때문에 장위국을 돌보는 사람은 진결여로 바뀌었다. 그 뒤 장위국이 11살이 되자 장개석은 송미령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모씨, 요씨와 진씨 이 세 여인 모두와 관계를 끊었다. 장개석은 진결여를 미국으로 보냈으며 장위국을 그의 신임이 두터운 오충신(吳忠信)의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오충신의 부인이 장위국의 이모로 되었다. 장위국과 송미령이 처음 만난 것은 1940년이었다. 그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위국은 스물네 살이었고, 장개석은 둘째 아들과 송미령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어색해질까 봐 어느 정도 걱정하였다. 하지만 장위국은 송미령을 만나자마자 아주 자연스럽고도 친절하게 영어로 ‘어머니’라고 불렀고, 서양식 예의에 따라 송미령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송미령은 젊은 시절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에 장위국에 대한 첫인상도 좋았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독교를 믿었고, 이후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도 그 해의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되자 장위국의 생모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송미령은 장개석한테 자꾸만 따지고 캐물었다. 그런데 줄곧 송미령에게 순종하고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대답하군 하던 장개석이었지만 이번에는 매우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송미령의 핍박에 아주 짜증스럽게 “묻지 마, 난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마디로 일축하며 내뱉었다. 그러자 이에 몹시 화가 난 송미령은 크리스마스 날 밤 집을 나와서는 홀몸으로 홍콩행을 강행했다. 그녀는 장위국과 사이가 좋았기에 당연히 그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송미령이 화가 난 것은 장개석이 자기한테 속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장개석이 직접 시간을 내 홍콩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고, 두 사람은 곧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아마 장개석도 이때 장위국의 신상을 송미령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컸다. 이후 송미령은 이 문제에 대해 더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장위국을 예전처럼 잘 대해주었다. 장위국은 송미령의 방에서 그 ‘아시아의 내막’을 보고는 계모가 자기한테 뭔가를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 후부터 장위국은 생모를 찾을 타산을 했다. 장개석은 그 몇 년 동안 손중산(孫中山)을 따르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보아 장위국은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장위국은 장개석의 권고에 의해 미국으로 연수를 보내진 틈을 타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다 준자부로라는 사람을 찾아냈다. 이 사람은 손중산이 일본에 있을 때 손중산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리고 장개석이 그 몇 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할 때, 두 사람은 왕래가 밀접했다. 장위국은 이 사람이 긍정코 자기의 출생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과연 장위국의 예상대로 야마다는 그의 생모의 이름을 말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내막’에 나오는 설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그랬다. 장위국은 확실히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야마도에 따르면 장위국의 생부의 이름은 대계도(戴季陶)로 국군의 원로 중 한 명이자 중량급 인물이었다. 당시 대계도는 장개석과 함께 손중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고, 장개석과는 동향이자 동창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나중에 대계도는 장개석 휘하의 장군으로 되기도 했다. 1913년, 일본에 있던 대계도는 급병에 걸려 현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는 시게마츠 가네코라는 간호사를 알게 되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뜨거워졌고, 대계도가 퇴원한 후 두 남녀는 동거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일찍 결혼한 몸이었고 그의 아내 뉴유항(钮有恒)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갓집 규수였기에 대계도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두려워했으며 한 번도 그녀를 화나게 한 적이 없었다. 본인은 한때 국군 고위층의 ‘3대 공처가’ 중 일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찍 대계도는 조카와 사사로운 정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란 나머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다행이도 당시 그의 부하가 재빨리 그를 구해 주었으니 말이지 큰 일이 날 뻔 했다. 한편 1916년 대계도가 손중산을 따라 귀국할 때 시게마쓰 가네코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감히 그녀를 데리고 귀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시게마쓰 가네코를 일본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시게마츠 가네코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야마다 준자부로에게 자기가 낳은 아이를 중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아이가 바로 장위국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 몇 년 간 점점 더 아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대계도는 아내에게 이 아이의 내력을 도무지 설명해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계도의 절친한 친구로서, 장개석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이 아이를 입양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계도는 즉석에서 동의했으며 이렇게 되어 생부가 아이의 의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약속 때문에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송미령이 따져 물었지만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 장위국은 이때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으로는 장개석에 대해 몹시 감탄했다. 다른 한편 생모인 시게마츠 가네코는 장위국이 다섯 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장위국은 야마다의 말을 반신반의로 믿다가 장개석의 일기를 읽어본 결과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확실히 장개석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장제스는 그를 자식처럼 여겼으며 ‘경문위무(经文纬武)’라는 좋은 뜻으로 장경국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장차 형 장경국(蒋经国)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큰 돈을 투입하여 장위국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를 외국에 유학 보내 훌륭한 군인으로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장위국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개석과 장경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이 회의나 순시하러 나갈 때면 데리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장경국이었고 정계에서 중점적으로 양성한 사람도 장경국이었으며, ‘호구병변(湖口兵变)’을 틈타서는 장위국의 수중에 있던 병권을 빼앗기도 했다. 장위국은 이때부터 의기소침해졌고, 장경국이 죽은 후에야 사람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장위국은 자신의 신상을 알고도 장개석처럼 대외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1996년에야 자기가 서술한 책에서 자신이 대계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장위국은 ‘물방울 같은 은혜도 샘솟듯한 물량으로 갚는다’는 이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장개석이 혈연관계가 없는 아버지였지만 이미 그 친아버지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장위국에게 주었다는 알고 있었다. 장위국은 언제 누가 물어도 장개석의 아들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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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의 차남 장위국의 생모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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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갇인 1남 7녀, 그들의 운명은…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 이야기는 지난 세기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 사이에 있은 한 조선인 남자가 일본인 여성 7명과 동시에 결혼해 도합 27명의 자녀를 낳은 진실한 이야기다. 사람은 사회에서 생활함에 있어서 당연히 많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이성과 생기는 감정적 욕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아는 영장 동물이다. 더군다나 특정된 장소에서는 남녀 사이에 이런 감정이 싹트기 쉽다. 대천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형형색색의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반려자로부터 선택되고 또한 반려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경우에 따라 인간은 반려자를 선택할 수 없거나 감정적인 욕구가 없는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이성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군사적 큰 착오로 벌어진 태평양 전쟁 말기 남성 1명과 여성 7명이 태평양 가운데의 트루크 군도에 남겨지면서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기까지 이 해괴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이야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면 모든 전쟁의 근원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여러모로 미국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행을 바라고 저울질하면서 미국의 태평양 해군기지를 공격했으며 전쟁 초기에는 연전연승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미군이 일본군 약점을 연속 꿰뚫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군은 차츰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하나둘씩 빼앗겼던 섬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운데 끼인 일본군 점령 섬들은 고립되어 보급은 전혀 없었으며 어떤 경우엔 단 한 명의 병력 손실도 없이 미군은 이 섬들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당시 트루크 제도에는 일본군 병사와 조선인 부역자 및 일본군 위안부가 주둔해 있던 고립된 섬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공급 사슬을 끊자 섬에 갇혀 있던 이들은 고립되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흐르자 구원투수들에게 삶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서 구조자를 섬에 보냈을 때 갇힌 사람들은 한동안 삶의 희망을 본 듯 들뜨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짧디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일본 본토에서 보낸 구조선은 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구조선박은 섬 기슭에 사람이 보이지 아니 하자 무인도로 여기고는 재빨리 선수를 돌려 트루크 섬을 빠져나가면서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 후 조선인 부역자 김유길과 일본인 위안부 7명이 “사람을 살려요”라고 외치며 해안으로 달려 내려갔을 때는 배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희망이 깨지자 일곱 여인은 서로 얼싸안고 펑펑 울면서 땅을 쳤고 김유길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인들처럼 울고불고 할 수는 없었다. 몹시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남자로서 좀 강해야만 했다. 그는 엉겁결에 일본 여인들이 흐느끼는 것을 보고는 그녀들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어구가 없었다. 말문이 막히자 그는 다가가 그녀들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만 했다. 울음을 터뜨릴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고 사위가 잠잠해진 뒤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이들 일남 칠녀는 섬에서 두 달 넘게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구조를 기다리지도 못한 채 섬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와 과일은 거의 다 뒤졌다. 그러다가 다행히 그들이 앞날이 막막할 때 뜻밖으로 담수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삶의 빛 한 가닥 생긴 것이다. 한편 섬에서의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물고기라도 잡아서 모두가 굶어죽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평일에는 고기잡이 말고도 비교적 건장한 여자 몇 명을 데리고 사냥을 했으며 그리고 그 때면 나머지 몇몇 여자들은 나무를 찾아 불을 피우고 빨래 같은 일을 하면서 제각각 자기의 맡은 바의 일에 충실했다. 처음에 김유길과 그녀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교류는 손짓 혹은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김유길은 그녀들한테서 일본어를 배웠고 그 또한 그녀들에게 조선말을 배워주었으며 이렇게 되어 그들은 얼마 안돼 서로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섬에 갇힌 지 1년이 되는 해 봄의 어느 날, 김유길은 섬에서 일본인들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벼 종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김유길의 머릿속에서는 기발한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바로 벼농사를 한번 해보자는 결심으로 마음속으로부터 논을 풀었다. 그 해 그는 여인들을 거느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논을 풀었다. 논둑을 만들고 논에 물을 가두고…그리고 벼 모종을 논에 심자 과연 벼가 우썩우썩 벼가 잘 자랐다. 그 뒤 가을이 되자 김유길은 또 여인들과 함께 벼를 베어 거두어 들이고 타작을 했다. 타작이 끝나자 이들은 마침내 첫 햇밥을 먹어볼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유길은 점차 모든 여자들의 숭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자 김유길은 자연스럽게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연상하게 되었다. 바로 빗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집을 짓는 것. 원래 집짓기 같은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김유길은 그 실행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을 거느리고 연 며칠 나무를 찍어 와서는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씩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았으며…마침내 지붕까지 얹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집 모양새를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집은 비록 허름하고 그닥 크지도 않았지만 이 외딴 섬에 그들도 비바람을 피할 곳이 드디어 생긴 셈이었다. 여성 그 자체가 워낙 감성적인 동물이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남성을 사랑하기가 쉬운 것이다. 섬에 버려진 뒤 여자들은 몹시 절망했지만 당시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그녀들을 책임지고 그녀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환경까지 해결해줬기에 그럴만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김유길이라는 유일한 남자에게 마음을 기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갖가지 애로와 언어의 장벽까지 뚫고 나온 김유길은 일본 여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중에는 거의 감출 것도 없이 속심을 털어 놓을 때도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속된 농담도 거침없이 할 정도였다. 이렇게 한동안 어울리던 중 김유길은 자신이 그 중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몰래 그 여인한테 자기의 마음을 고백했다. 헌데 이 여자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이를 다른 여자들한테까지 자랑할 줄이야?! 이러자 이들 여자 모두가 한결같이 김유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어 김유길은 황제처럼 되어 일곱 명의 여자를 동시에 품에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정을 꾸린 뒤 이들은 아예 귀국할 생각을 접고 살림을 차리고 김유길의 아내로서의 각자의 의무를 다 하였다. 그리고 아내들은 선후하여 스물일곱 명의 자녀를 김유길한테 낳아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의 작은 가정으로부터 하나의 대가족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러간 뒤 이 35명의 대 가정은 바다에 나타난 미군 순찰함에 의해 발견되었고 오랫동안 귀국생각을 접었던 이들에게 마침내 각자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김유길은 고향으로 즉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고 그 외의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일본으로 송환됐다. 김유길은 귀국한 지 몇 년 만에 그 아내들이 그리워났다. 거기에 자녀들이 보고 싶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처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두루 수소문한 결과 그의 다섯 명의 아내는 이미 재가하여 다시 살림을 차렸고 나머지 2명만이 그래도 김유길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이미 일부일처제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특별한 예외의 경우였다. 정부도 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이렇게 죽을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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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갇인 1남 7녀, 그들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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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지난번 계속)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성은 먼로, 그는 정신 질환으로 앓고 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였으며 늘 자신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인 델라에게도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매우 격렬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글래디스는 MGM 콜롬비아의 한 영화제판공장에서 스크랩 작업을 했으며 어머니 역시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로 평생 수용소 출입이 아주 잦았다고 한다. 1942년 6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제임스 아이젤 돌티와 결혼했으나 1946년 9월 13일 첫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는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2월 2일 일본 도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이 혼인신고를 한 지 274일 만에 마릴린 먼로가 이혼을 제출했고 1954년 10월 31일, 법원은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뒤이어 마릴린 먼로는 1956년 6월 29일 극작가 아서 밀러와 극비리에 결혼했고 그해 8월 메릴린 먼로는 임신했지만 곧 유산했다. 마릴린 먼로는 1957년 8월 1일 자궁외 임신으로 다시 유산했다. 1961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정식 이혼하고 말았다. 18세 때 마릴린 먼로는 기독교인이 됐다. 하지만 1956년 아서 밀러와 결혼하면서 먼로는 유대교로 전향했다.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생전에 애완견을 많이 키웠으며 그 중 마지막 한 마리는 시나트라가 선물한 몰타 개로 이름을 지어 ‘마피아(Mafia)’라고 불렀다. 1960년 8월 28일, 마릴린 먼로는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그 뒤 1961년 2월 7일 재차 뉴욕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5일에 퇴원했다. 1962년 1월, 마릴린 먼로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으며 7월 20일 자궁내막염으로 또 입원치료를 받았다. 1962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심리치료사와 6시간을 보냈다. 이는 그녀의 생에 있어서 마지막 하루가 됐다. 그 이튿날 즉 8월 5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마릴린 먼로가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무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8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식의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으로 하나 또 하나의 성감적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감동적인 연기 스타일과 죽음은 영화 팬들의 영원한 성감 적인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많은 팬들은 살아가면서 그녀의 사진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니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하얀 치마를 입고 뉴욕 거리에 있는 모습과 땅속 열기에 그녀가 걸친 치마가 나팔을 벌린 듯한 모습의 흑백사진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눈을 살짝 감은 듯 입술을 감빠는 모습, 소파 위에 하얀 다리를 드러낸 모습 등을 보노라면 사진만이 아닌 특별한 감정의 전달과 순수하고 성감적인 정국이 될 때가 많다. 공개된 사진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청순하기도 하고 털털하기도 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좀 길게 땋은 머리 태, 청바지, 리넨 스커트 등은 다양한 스타일링으로 생활 속 먼로의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먼로는 1962년 8월 5일, 자기의 거처이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 무브먼트의 거실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떠올리면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케네디 가문과 정치권의 암막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가 죽은지 수 십 년이 넘도록 그녀에 대한 공식 조사서류는 대부분 고급기밀로 분류돼 있었다. 2006년까지 FBI(미 연방수사국)는 미국 자유정보법에 따라 500쪽 분량의 먼로 관련 문건의 비밀을 해제했다. 그러자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그가 적어놓은 비밀일기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역사 전문가들은 뒤늦게 밝혀냈다. 먼로의 일기에는 먼로와 케네디 형제의 ‘베갯머리 대화’가 다수 기록돼 있었다. 1962년 8월 초, 케네디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먼로와의 모든 왕래를 끊었다. 갑작스런 격변에 직면하여 마릴린 먼로 역시 자신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8월 4일 오후 9시 반, 그녀는 절친인 시드니 길라로프에게 전화로 케네디 형제와 있었던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LA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릴린 먼로는 공교롭게도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비밀 일기’도 신비롭게 사라졌으며 LA지검 사무실 또한 마릴린 먼로가 일기를 썼다는 것과 먼로의 죽음이 모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부인했다. 2012년 5월 16일,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제 홍보 포스터가 나붙었고 현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마릴린 먼로 주연의 각종 다른 영화의 스틸 사진이 끊임없이 상영되면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유명 조각가 수어드 존슨이 만든 마릴린 먼로 조각상 ‘영원한 먼로’가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그녀는 줄곧 어떤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녀도 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먼로는 평생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여인으로서 먼로는 전심전력으로 절대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이런 100%의 사랑을 남편들은 주지 못했고 애인들은 더욱 주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36세의 마릴린 먼로는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용모를 주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지 않았다. ‘세상의 좋은 물건은 견고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구름은 쉽게 흩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마릴린 먼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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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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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견문 시리즈( 4 ) 잊지 못할 설날의 그 추억
-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매번 음력설이 돌아 올 때마다 나의 눈앞에는 고향을 떠나 머나먼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위스키포란 곳에서 선원들의 음력설 음식을 챙겨 주느라 진땀을 빼던 20여년전의 일이 선히 떠오르군 한다. 우리 중국에서는“춘절”이라 하고 한국에서는“구정”이라고 하는 음력설은 한국인들도 각별히 중시하고 굉장히 쇠는 풍속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회사에서는 부모처자를 떠나 원항에서 파도와 싸우는 우리 마도로스 형제들이 음력설을 즐겁게 쇠라고 아프리카에 있는 대리점을 통해 인당 200딸라씩 돌아가는 음력설 특별수당금을 지급했고 선장으로부터 기관과 뎃기의 당직자 외 모든 일군들은 3 일 간 휴식하라는 지령도 내렸다. 선내는 삽시에 명절기분으로 술렁이었다. 하지만 당시 주방장이었던 나는 흥분에 앞서 더럭 겁부터 생겼다. 남들이 다 향수하는 명절 휴식일도 보장이 없는데다 우리 “코리안스타”호의 24명 선원들의 “엄마 대리”와 “아내 대리”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집만 못지 않게 음력설을 쇠게 하는 것이 당시 나한테 부여된 성스럽고도 간고한 사명이기도 했다. 그런 연고로 다른 선원들의 기분과는 반대로 나한테만은 그 음력설의 도래가 조금도 반갑지를 아니했다. 또한 더욱 안타까운 것은 돈은 있지만 그 돈으로 욕심나는 부식물을 살 수 없는것이 특이한 아프리카의 사정이었다. 음력설을 앞둔 어느 날, 통신장 겸 사무장인 이순택씨와 주방장인 나는 부식물 구입에 나섰다. 헌데 째질 정도로 가난한 아프리카인데다 음력설이라고는 달력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그 곳의 시장에서 음력설 전야라고 부식물이 풍부할리 만무했다. 거기에 수절이라고는 쓸 줄도 모르는 “연탄동네”인 아프리카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을 찾기란 실로 하늘의 별 따기와 다름이 없었다. 그날 우리는 봉고차를 타고 위스키포는 물론 와리시의 시장이란 시장은 다 돌아다녔지만 약간의 양배추, 토마토 등 야채와 오렌지, 파인내플 등 과일 외에는 설음식에 근사한 부식물은 별반 사들이지 못했다.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인 떡부류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토록 과일이 흔한 고장이었지만 그 과일 속에서 사과는 한알도 생산하지 못하기에 그것을 구하기 또한 무척 힘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 점심 때도 퍼그나 지났다. 선원들의 점심밥과 반찬은 이미 아침에 해놓았기에 “싸롱뽀이”라고 하는 주방장 조리가 그 것을 점심시간에 차려만 주면 그만이겠지만 저녁을 지을 일이 근심되었다. 그럼에도 부식물 구입은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바로 이런 찰나에 나의 눈앞은 금시 환해지는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따상하이(大上海)”란 간판을 건 중국인 술집이 우리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프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다짜고짜로 술집문을 밀고 들어갔다. “해외에서 중국인 술집을 만나니 고향의 친지를 만난 것처럼 기쁩니다. 중국사람이 이국땅에서까지 뿌리박고 장한 사업을 벌이다니 진짜 감동됩니다. 부디 하시는 일이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이렇게 잘 되지도 않는 중국어 밑천을 몽땅 털어가며 술집주인을 춰올린 뒤 찾아온 사연을 말하자 제 아무리 철석간장같은 주인이라지만 우리가 요구하는 물건을 팔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술집 “따상하이”에서 적지 않은 야채와 육류와 면류 등 부식물을 얻은 우리였으나 우리 민족의 둘도 없는 전통음식인 떡부류만은 끝내 얻지 못하고 귀선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다른 선원들은 독특한 적도부근의 풍미를 맛보려고 앞다투어 샤와하고는 외출했지만 나는 그런 사정이 못되었다. 아니, 곧 닥쳐올 음력설 때문에 잠을 자려고 에어컨까지 틀어놓고 잠을 청했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 이궁리 저궁리하며 뒤척거리던 중 나는 문득 기발한 착상이 떠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창고로 달려갔다. 나는 창고에서 얼마 안되는 찹쌀을 꺼내어 2시간 가량 물에 담근 뒤 다시 그 것을 건져 쇠절구에 넣고는 절구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쿵쿵 고향처자 떠나서 웬 말이냐 쿵쿵 사내 놈이 여자 노릇 웬 말이냐 쿵쿵 남들 자는 이 한밤에 웬 짓이냐 쿵쿵 … 내가 찧어대는 절구방아소리는 제법 노래리듬이 되어 스스로 그 무드에 젖어들고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아프리카의 새벽 하늘은 어느덧 조용히 밝아왔다. 그믐날 밤이 되었다. 눈보라가 없고 쩡쩡 갈라터지는 얼음판도 없는 특이한 아프리카의 섣달 그믐날 밤, 배갑판은 등불들로 불야성을 이루었고 그 아래에서 굉장한 파티를 벌인 선원들은 내가 만들어준 음식을 만끽하는 한편 가라오케 오디오의 음악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설을 맞는 즐거움에 젖어 들었다. 그 속에는 밥이 설었다고 나한테 밥그릇을 던지군 하던 꺾다리 기관장이 있었는가 하면 나와 통신장이 짜고 들어 부식비를 뜯어먹지 않는가 하고 늘쌍 눈을 밝히군 하던 “땅개”ㅡ 냉동사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은 단 한시도 쪽을 놓지 않았다. 아니 그 밤도 나를 괄시하고 헐뜯고 뒤조사를 하던 그들더러 설을 잘 쇠라고, 그네들의 “엄마대리”와 “아내대리”로 돼 주었다. 에어컨에서 내뿜는 냉풍도 나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식히지 못했다. 부지런히 지지고 튕기고 볶고 쪄냈으나 만들어내기 바쁘게 음식은 바닥이 났다. 거기에 아프리카 깜둥이 아가씨 10여명까지 어울려 먹어대다 보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날 밤 선원들은 술마시고 놀아대느라고 밤을 새웠고, 나 또한 그네들의 기분을 돋구어 주느라고 밤을 새웠다. 그리고 그 파티는 그 날로 끝난 것도 아니고 설날을 지나 정월 초이튿날까지 계속됐다. 그렇듯 지속되는 연속 작전에 선원들도 지쳤고 나도 지쳤다. 그네들은 먹고 마시느라고 몸에 탈이 생겼고 나는 팔다리가 물러나게 일하느라고 지쳤다. 특히 연 며칠밤을 자지 못했기에 코피가 흘렀고 하루 몇시간씩 더운 가스불 앞에서 일했기에 목과 앞가슴 부위에 좁쌀알만한 땀띠가 가득 내돋았으며 현훈증으로 걸을 때마다 두 다리가 휘청거리군 했다. 하지만 나는 기분만은 좋았다. 나 혼자의 희생으로 전반 24명한테 즐거움을 주었다는 만족감과 그 24명 또한 나를 절대 떠날 수 없다는 자호감에서 짜릿한 흥분이 잦아들기도 했다. 한편 나는 명절 때면 남자들은 먹고 마시느라고 피곤하고 여인들은 뒤시중을 드느라고 피곤하다는 그 말에 이해가 갔고 남정들의 뒤 시중에 드러난 잔등도 가리울새 없이 일하고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여인들의 내심세계도 얼마간 알리는 듯 했다. 특히 선박에서 “넘버원”으로 불리우는 기관부의 조기장까지 나의 손을 잡으며 “주방장 김상, 정말 욕봤다잉께. 그렇게 뱃놈한테는 선장이 아빠라면 주방장은 엄마라잉께”라고 전라도방언이 다분히 섞인 어조로 좋아할 때 가슴이 뭉클해나면서 좀만 더 잘해줬더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또한 이러한 위안과 믿음이 있었기에 나는 매번 선원들의 생일 때마다 그한테 찰밥에 미역국을 끓여주는 정성을 가질 수가 있었고 짧지 않은 2년여간 단 하루의 휴식일도 없이 선원들의 건강을 책임지며 열심히 일할 수가 있었다. 오늘도 나는 설음식 준비에 분주히 돌아치는 내 와이프의 거동을 절대 무심히 보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엄마와 아내와 아줌마들이 있기에 이 세상 사나이들의 행복과 즐거움과 긍지도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희생으로 남한테 행복과 즐거움을 아겨주는 것 ㅡ 이는 영원히 제창할만한 인간의 마음가짐일 것이다. 2014년 2월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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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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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견문 시리즈( 4 ) 잊지 못할 설날의 그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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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6) 행성중의 “맏형”- 목성
- 태양의 나이는 이미 50억세가된다고 한다. 이제 50억년이 더 지나면 태양의 나이는 100억세가 된다. 그 때에 가면 태양은 곧 꺼지게 될 것이며 다시더는 빛과 열을 발산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그 때 가서 그 무엇이 태양을 대신하여 우리를 위해 “봉사”할까? 이에 과학가들은 목성이 가능하게 하나의 합리한 계승자가 된다고인정하고 있다. 목성은 태양계 중에서 가장 큰 행성으로서 8대항성 중의 “맏형”으로 얼마든지 빛과 열을 발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목성이 외부에 발산하는 거대한에너지는 태양으로 받는 에너지의 11배에 달한다고도 한다. 목성핵심의 온도는 28만도에 달한다. 목성은 또한 자체로 에너지를산생하는 외 태양에서 발산하는 에너지를 저축하기도 한단다. 때문에 목성의 에너지 비축양은 갈수록 커진다. 현재 목성의 발전추세로 보면 태양계 중에서 태양의 “계승자”로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1975년 미국에서 발사한 목성탐측기가 목성외형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서 보다 시피 목성의 표면에는 하나의 색채가 선명한 큰 붉은 반점이 있는데 목성의 남반구에 위치해 있다. 이 큰 붉은 반점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부단히 이동하고 있었다. 이큰 붉은 반점은 남북의 너비가 1.4만킬로미터를 경상적으로 유지했고 동서의 길이는 고정적이 아니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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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6) 행성중의 “맏형”- 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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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 (6) 북경의 고궁
- 북경고궁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주, 소속국가: 중국, 지점: 북경의 도심 함의: 세계에서 보존되여있는 규모가 제일 크고 가장 완정하게 보존되어 있는 제왕궁전임. 북경의 고궁의 원명은 자금성이며 중국 명조와 청조에 거쳐 황궁으로 쓰이던 궁전이다. 북경의 고궁은 명조의 황제 주제정(朱棣征)이 수많은 유능한 건축공들을 불러 들여 14년에 거쳐 건설한 위대한 건축물이다. 고궁의 부지면적은 72만평방미터이고 꾸며진 방만 해도 9000여칸이나 되며 현재 세계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가장 완정하게 보존되어 있는 고대황궁 건축군으로 되고 있다. 궁전은 남북으로 통하는 중축선으로 배열되며 좌우가 대칭되고 배치도가 아주 정연하다. 1955년 고궁박물원이 성립된 후 일반 백성들은 드디어 이 웅장하고도 신비한 황제가족이 살던 궁전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고궁의 3대 전당 고궁의 건축배치는 외조(外朝)와 내정(内廷)으로 구분된다. 그 중 전반 부분은 외조이며 그것이 곧 황제가 사무를 보던 곳이다. 외조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곳은 세개의 전당으로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과 보화전(保和殿) 등으로, 이를 3대 전당이라고 한다. 태화전은 속칭으로 “금란전(金銮殿)”이라고도 하며 황제가 등극하거나 황제가 행사를 거행하는 곳이다. 전반 전당은 금빛휘황하고 장엄하고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다음 중화전은 황제가 태화전에서 행사를 거행하기 전에 휴식하거나 예의를 연습하는 곳이며 보화전은 황제가 입궁시험을 보거나 황제가 연회를 차리는 곳이기도 하다. 황제와 왕비들이 생활하던 곳 고궁의 후반 부분의 건축물은 내정이다. 내정에는 간청궁(乾清宫), 교태전(交泰殿)과 곤녕궁(坤宁宫)을 중심으로 동서 양측에 동육궁(东六宫)과 서육궁(西六宫)이 있다. 이곳은 황제와 왕비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내정의 건축은 외조의 웅위롭고 화려한 외조의 건축과는 다르다. 내정은 생활적 분위기가 농후하다. 그 중 간청궁은 황제가 잠을 자는 침궁(寝宫)이고 곤녕궁은 중국 명조시기 황후의 거처였으며 곤녕궁 뒤 울안의 어화원(御花园)은 황제가 전문 왕비들과 휴식하고 즐기는 장소로 제공되었으며 울안의 높다른 송백과 진귀한 화목 및 인조석산 등은 아주 영롱하고도 일치한 환경을 이루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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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 (6) 북경의 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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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9 )
- ■ 허길성 그리고 신혼살림을 차릴 집이 있는것도 아니였다. 부대에 돌아온 나는 여전히 산굴을 파는 설계도를 그리는데 전념하였다. 당시 나는 부대에서 정치적으로 따돌림을 당했으나 설계업무에서만은 나를 초과할 인재가 없었다. 당시 부대에는 대졸생이래야 유일하게 북경공정병학원 출신인 나 한명뿐이였다. 때문에 부대에는 나의 업무를 대체할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러다보니 나는 연변내의 모든 산굴설계를 도맡다싶이 하였다. 연길현 팔도공사에 있는 “전쟁준비총지휘부”의 산굴을 비롯하여 지신에 있는 산굴 그리고 훈춘 북산에 있는 산굴 등은 모두 나의 손에 의해 설계되군 하였다. 그리고 그 산굴중에는 땅크같은 중무기들을 저장할수 있는 산굴이 있었는가 하면 거의 모두가 자체로 전력을 생산할수 있는 그런 산굴들이였다. 이렇게 나는 2-3년간 산의 지형을 골라 산굴을 설계하고 또한 내가 설계한 도면을 들고 여러 현시를 돌아다니며 산굴의 질감독 등으로 하다보니 그야말로 정신없이 보냈다. 그러는 사이 폭풍취우와도 같던 연변의 문화대혁명도 흐지부지하게 됐고 기세드높던 전쟁준비열풍도 지나가면서 부대는 더이상 연변에서 할일이 없었던지 다시 심양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부대가 다시 심양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하자 나는 안해를 연변에 두고 떠나게 되는것이 못내 서운하였다. 당시 안해는 나와 둘째형님 등이 여러모로 힘쓴덕에 겨우 연길시병원으로 전근해왔으며 우리는 결혼뒤 몇년만에야 새살림을 차릴수 있게 되였다. 그런데 얼마 안되여 내가 심양으로 떠나게 된것이고 당분간은 안해까지 심양으로 데려갈수 없는 상황이였다. 몇년간 떨어져 살다가 겨우 합쳤는데 또 어떻게 갈라진담?!… 그렇게 뒤숭숭하게 보내던중 어느날 나한테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그날 내가 출근하자 부대수장의 호출이 있었다. 내가 수장집무실에 들어서니 수장은 쏘파에 나를 앉게 하고는 서류 한장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허길성동무, 동무는 심양에 돌아갈수 없게 됐소. 정간명단에 들었단 말이요.” 내가 서류를 보자 정간리유는 내가 일찍 북경공정병학원에 다니던중 방학기간을 리용하여 몰래 조선에 갔다 왔는데 그것이 “탈주병”이란 락인이 찍혀 나의 서류에 기입된것이였고 또 이번 문화대혁명기간에는 업무에만 전념하고 정치적 립장이 견정하지 못했다는것 등등이였다. 이른바 “탈주병”으로 된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즉 1963년 겨울방학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당시 모두들 조선에 마음대로 다녀오는지라 한번 조선에 있는 누님과 삼촌을 만나보려고 월경해 조선에 갔다오게 되였다. 그만큼 당시 연변에서는 통행증이 없이도 조선으로 이웃집 다니듯 마음대로 다니던 시기였다. 이 일은 나 혼자만 알고있었더면 당시 아무런 사달도 없었을것이였지만 학교로 돌아간 뒤 방학기간의 생활을 회보할 때 내가 그만 자랑삼아 덜컥 털어놓고 말았던것이다. 그러자 학교지도부에서는 이를 심각한 문제로 삼고 분석하던 끝에 결국 국가외교부에 문의한 뒤 나한테 “탈주병”이란 오명을 씌우고 처분과 더불어 나의 서류에 기입했던것이다. 그리고 조선에 누님을 비롯한 친척들이 있는데다 둘째형님이 “보수파”조직의 “골수분자”였고 나 또한 정치적 립장이 견정하지 못했다는 등으로 결국 나는 군복을 벗기우게 되였다. 그뒤 나한테는 연변뻐스공장에 내려가 로동단련을 받으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말이 로동단련이지 기실은 추방이였고 나의 신분은 감시를 받으며 일하는 개조대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내가 배치받은 직장은 연변뻐스공장 제조직장이였고 차례진 일종은 용접공이였다. 한편 그 시기 나를 위해준 사람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그때 도문에서 살고 있는 8촌 누님이 나의 일에 가슴이 아파한 나머지 도문시해관에 소개했었다. 그 시기 도문해관 또한 조선말과 한어말에 능통하고 조한문 글쓰기에도 유능며 당원이고 국가간부편제인 인재를 찾고 있던 상황, 그런 조건이라면 내가 매우 적합하기도 했다. 그래서 8촌 누님의 소개로 도문해관에서 연변뻐스공장에 찾아와 나를 요구하였었는데 그때 뻐스공장 지도부에서 내가 “개조대상”에 들어 있는 사람이라고 보내주지 않았던것이다. 나는 이런 사연을 썩 후에 알게 되였다. 도문에 있는 8촌 누님이 “너 왜 도문으로 오지 않는가”고 재촉해서야 비로서 그 사이 이런 일이 있는것을 알게 되였다. 5 부대에서 “추방”당해 공장에 가서 로동단련을 받게 되자 공장종업원들은 뒤에서 나를 두고 쉬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두들 나와 어울리기 싫어하고 또한 마치 나만 보면 저만치 피해가는 사람들의 거동에서 얼마든지 보아낼수 있었다. 나는 급기야 과묵한 인간으로 변해버렸다. 워낙 말이 많았던 내가 아니였으나 그런 “봉변”을 당하고보니 그 누구와도 말하기 싫어졌고 그저 죽기내기로 일하는것으로 화풀이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 집에서는 안해를 대하기가 미안했다. 또한 나같은 인간을 군인이라고 따라준 안해가 몹시 불쌍하기도 했다. 그래서였던지 나는 집으로 들어가 안해를 보기가 민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안해는 달랐다. 나의 추방생활로 그녀 역시 속이 타고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을테였지만 거의 내색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가면 계란지짐같은 색다른 반찬을 만들어서는 반주술과 함께 내앞에 차려주군 하였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나를 위안해주기 위해 애써 웃는 얼굴을 보였고 좋은 말도 많이 해주었다. “여보,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일지도 몰라요. 만약 당신이 심양으로 갔다면 우리 또 갈라져 살며 언제 합쳐서 살지 모을 일이 아닌가요? 또한 지금 당신처럼 일반 로동자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다구요…” 한편 그 당시 공장에는 나처럼 로동개조를 하는 사람 또 한명이 있었다. 그 사람인즉 “외국특무”란 루명을 쓴 차충섭이란 중년남자였다. 알고 보니 차충섭이 쓰게 된 “외국특무”란 모자도 별것이 아니였다. 문화혁명전에 그는 자동차다이야를 훔쳐갖고 조선에 갔었는데 자동차다이야를 훔친건 두만강을 건널 때 구명용으로 쓰기 위한것이였고 조선에 간 뒤에는 일이 힘들고 배가 고프고 하여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던것이다. 자동차 다이야를 훔친것 나빴다고 할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그한테 “외국특무”란 딱지까지 붙이는건 아무리 험하고 무정한 세월이라 해도 너무한것 같았다. 하긴 1960년대초에 조선에 갔다가 되돌아온 사람이 그 차충섭뿐이 아니였다. 들을라니 길림성축구팀 공격수였으며 1959년 제1회 전국운동회 축구종목에서 “최우수꼴잡이(最佳射手)”의 영예까지 받아안았던 지청룡이란 분도 조선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자 체육부문에는 취직되지 못했으며 동료들이 다 따낸 건장칭호도 받지 못한 상황이였다. 나는 나 자신의 처지는 망각한채 슬며시 차충섭이란 사람을 동정하기 시작했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제조직장의 직장장이 나타나더니 종업원들을 모여놓고 직장내외를 깨끗하게 청소부터 한 뒤에 일을 시작하라는것이였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오전 10시쯤 되였을가 할 때 상급에서 온 대표단이 우리 뻐스공장에 들이닥쳤다. 북경에서 온 참관단이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대표단같은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신세에 그들을 환영하느라 박수를 칠것도 없고 그들을 안내하며 공장소개를 할수는 더욱 없는 상황이라 그저 허리를 구부정하고 용접일에만 전념했다. 헌데 참관단 성원들이 직장에 들어와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가운데 참관단 성원중 누군가 한분이 나의 주위를 빙빙 돌며 나를 유심히 뜯어보는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이에 내가 머리를 들고보니 그 역시 어딘가 낯이 익은 사람이였다. “저, 말씀 좀 물읍시다. 5-6년전에 혹시 북경공정병학원을 다니지 않았소?” “예, 다녔습니다.” “그때 북경대학에서 동무를 데려가자고 한것을 거절한적이 있었지 않았소?” “예, 그렇습니다만 누구신데 저의 내막을 그렇게도 잘 아십니까?” “허동무 맞구만, 내가 바로 동무네들을 데려가려고 북경공정병학원을 찾아갔던 사람이우다.” “예?!…” 나는 대뜸 목석처럼 굳어지고말았다. 운명의 장난치고는 너무나도 극적이였다. “그때 당신이 기술을 배워갖고 뭔가 큰일을 할것처럼 그러더니 고작 이런 일을 하려고 우리의 제의를 거절했단 말이오?!”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 다음과 같은것을 알려주었다. “당시 북경공정병학원의 조선족학생을 선발할 때 우리가 제일 욕심냈던 사람은 바로 동무였다오. 그런데 동무가 한사코 거절하니 어쩔수 없이 밀산출신인 량희원동무를 데려갔는데 그후에 그 동무가 어떻게 되였는지나 아오? 지금은 그가 당당한 중국외교부의 조선담당 외교관이 됐다오. 어떻소?!” 그 말에 나는 더욱 큰 쇼크를 받았다. 한명은 국가외교부의 고급관원이고 한명은 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하는 “땜쟁이(용접공)”ㅡ 인생이란 참 이렇게 어처구니가 없을 때가 많았으며 우리 둘의 운명이 이렇게 뒤바뀌울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것은 당시 나한테 있어서 엄청 큰 정신적 타격으로 됐다. 6 그 참관단이 왔다가면서부터 직장의 종업원들이 나를 대하는 품이 어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착오를 범했겠지만 지식과 능력이 있는 모양구나 하는 눈치들이였다. 그리고 적지 않은 종업원들은 나를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기도 하고 가끔씩 말을 걸어오기도 하면서 사이가 좋게 지내려는 “뜻”을 전달해오기도 했다. 특히 당시 직장의 반장이였던 최경영과 량도운은 몰래 나를 도와나서기도 했다. 그들 두분은 나한테 힘들고 어지러운 일을 될수록 시키지 않았고 가끔씩 나한테 술도 사주군 했다. 그때 식당이라고 가봐야 건두부볶음채 등 두어가지 료리에 병술도 아닌 근으로 파는 소주 한근 정도면 고작이였으나 나는 그들의 진정에 늘 감사해했고 몰래 그들 두분을 존경해마지 않았다. 이렇게 직장의 종업원들 지어는 공장의 지도일군들까지 인간대접을 했고 지 어떤 사람들은 나를 선생으로 호칭했지만 그렇다고 나의 처지가 바뀌여진건 아니였다. 상급의 지시가 있었던지 나한테는 여전히 좋은 일자리가 차례지지 않았고 땜쟁이(용접공)로 일해야 하는 나의 운명은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던중 어느날 공장의 한 지도일군이 나한테 찾아와 귀속말로 다음과 같은 소식을 알려주는것이였다. “허선생, 지금 연변내에서 허선생처럼 억울하게 부대에서 정간당한 사람들로 조직되여 북경에 대표를 파견한다고 합니다. 상소하려구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조직내에 참가하자면 누구를 찾아가며 그 조직에서는 매달 인당 5원씩 거둬갖고 북경에 대표를 파견한다고 귀뜸해주기도 했다. 그의 귀뜸이 고맙긴 했으나 처음에 나는 그 말을 그닥 믿지 않았다. 그만큼 그때의 세월에 잘못된것들을 바로잡자면 아득한 일이기도 했다. 이전에 나는 책을 많이 보았던지라 중국의 력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있었다. 중국의 력사를 보면 아무리 잘못된 일이라 해도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의 세대에는 그것이 바로잡혀지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일은 그 거개가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 바로잡군 했던것이다. 이튿날은 면바로 일요일이였다. 일요일 아침 나는 집마당을 쓸려고 비자루를 쥐였지만 전혀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일을 하다말고 자주 멍하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자 집안에서 밥을 짓던 안해가 나의 거동을 보았는지 밖으로 나오며 물었다. “여보세요. 오늘 아침은 웬일이세요? 당신 꼭 무슨 고민이 있는 사람같아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요.” “아니긴 뭐가 아니예요. 그냥 말씀하세요. 혹시 아버님이 편찮으셔서 돈이 수요된다고 기별이라도 왔나요?” … 안해는 눈치가 빨랐다. 이런 안해한테 뭘 속이랴. 결국 나는 안해앞에서 모든것을 이실직고했다. “그런걸 왜 이제야 말씀해요. 돈 5원이 아니라 50원이 든다고 해도 노력해봐야 할게 아닌가요?!” 말을 마친 안해는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농짝에서 10원짜리 2장을 들고나왔다. “이 10원으로 두달치를 한꺼번에 내고 이 10원으로는 그 조직의 책임자 분과 함께 점심이라도 한끼 자시세요.” 나는 안해앞에서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저 안해의 소행이 고맙기만 할뿐이였다. 그날 나는 이른바 그 상소조직의 책임자를 만났다. 그분은 일찍 조선인민군 군관으로 조선전쟁초기에 락동강전투에까지 참가했다가 부상당했던 분이였다. 그리고 그분이 하는 일은 단지 우리 세대의 군인들이 억울하게 정간을 당한것을 바로잡기 위한것만 아니라 조선전선에서 돌아온 인민군출신 군인들이 퇴역군인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것까지 바로잡기 위한것이였다. 그분에 따르면 당시 중국인민해방군에서 퇴역한 군인들은 그 계급에 따라 해당 대우를 다 향수하지만 조선인민군에서 돌아온 퇴역군인들중에는 군관출신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 모두가 해당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농민출신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중국인민해방군에서 근무하다가 중조량국 지도자들의 협의에 의해 조선으로 나갔기에 마땅히 중국인민해방군에서 퇴역한 군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된다는것이였다. 한편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의 정간병들을 말하면서 그는 나처럼 억울하게 군복을 벗은 정간군인이 연변만도 수십명이 되였고 전국적으로 무려 70만명이나 된다고 했으며 이렇게 잘못된것은 언제건 꼭 바로잡아야 된다고 했다. 7 아니나 다를가 나의 예측처럼 억울한 일을 바로잡기란 세월이 흐르고 조대가 바뀌여야 가능할것 같았다. 우리는 여러차례 대표를 북경으로 보냈지만 번마다 바다에 돌을 던진격이였다. 하긴 우리의 대표가 북경에 있는 중앙군위를 찾아가면 어떤 군위책임자는 열정적으로 접대하면서 우리 대표가 하는 얘기를 귀담아듣기도 하고 수첩에 적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북경에 다녀올적마다 우리의 대표는 이번에는 틀림없이 해결될것이라고 장담하군 했다. 헌데 기다려보면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였다. 그럴 때마다 대표는 중앙군위의 접대책임자를 욕하면서 “사람이 앞에서는 좋은 말만 하고 뒤에 가서는 모르쇠를 놓는다”고 투덜대군 했다. 후에 알고 보니 중앙군위에서도 대부분 군인출신의 책임일군들은 조선에서 돌아온 인민군출신의 퇴역군인과 우리의 억울함을 해결해주려고 극력 노력했으나 당시는 시대가 시대였던만큼 그것이 그 반대파들과의 합의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던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대표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듣는바에 따르면 우리의 대표는 자기 개인의 돈도 적잖게 팔았다고 한다. 하긴 그때 우리 매개인이 5원씩 내는 돈으로는 근근히 왕복로비를 해결하기에도 빠듯한 판이였으니 다른 여유가 있을리 만무했다. 그리하여 그 대표는 주로 개인돈으로 동북의 특산품같은것을 사가지고 가서는 군인책임자한테 선물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나는 공장의 수요에 의해 공장내에서 뻐스를 몰고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옮기는 일에 배치되였다. 그러다가 1976년의 어느날 이외의 사고로 당하게 되였다. 동료직원이 내가 뻐스뒤에 서있는것을 모르고 뻐스를 몰고 후진하다가 벽에 기대여 서있는 나를 다치게 했다. 그때 나는 골반이 절골되여 입원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해 여름 당산지진에서 다친 부상자들이 연변에까지 쓸어나오는 통에 나는 그 부상자들한테 병원침대를 내주다보니 출원하게 되였으며 이어 전국에서 유명한 천진골과병원에 가서 약 반년간 입원치료를 한 결과 금이 갔던 뼈가 제대로 잇기였으며 쌍지팽이를 짚고 천진에 갔다가 연변으로 다시 나올 때는 걸어서 나오게 됐다. 얼마후 내가 공장에 출근하자 공장지도부에서는 나한테 접수실일군으로 배치했다. 접수실일군으로 배치받아 얼마 안있어 공장에서는 나더로 연길시정부에서 조직하는 사회주의교육공작대 일원으로 조양가두에 가서 사업하게 했다. 이른바 “개조대상”에서 출세를 한셈이였다. 나는 부대생활을 한 덕분에 한어말구사에 능했는지라 공작대사업이 적성에 맞았다. 그래서일가 원 기한이 1년이였던것을 나는 조양가두의 요청에 의해 1년 더 연장해 2년을 공작대일원으로 사업하게 되였으며 연장사업을 할 때부터 나는 공작대 대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8 내가 공작대에서 사업하는 동안에도 북경으로 파견한 우리의 대표는 여러차례 상경하면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드디여 1976년 10월 이 나라의 선량한 사람들을 지지리도 괴롭히던 “4인방”이 꺼꾸러지자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이어서 1977년에 등소평이 국내의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하면서 뭔가 바로서는듯한 느낌이였다. 또한 그것을 계기로 전국의 정세가 안정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1978년에 있은 당의 11기 3중전회와 더불어 원 공화국 주석이던 류소기동지의 명예가 회복되였다. 그뒤를 이어 군복을 벗기웠던 우리의 억울함이 시정되였는가 하면 조선인민군에서 돌아온 퇴역군인들도 패장급 군인부터 군관대우로 월급이 발급되였다. 그런데 우리한테는 다만 명예만 회복되여 간부대우를 받게 되였을뿐 군복을 다시 입을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몇년사이에 우리가 경제상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것에 대한 보상까지 요구했으나 그것까지는 락착되지 않았고 그저 지방에서 사업단위에 배치하는걸로 한단계 마무리짓고 말았다. 한편 나는 조양가두에서의 사회주의교육공작대 사업이 끝난 뒤 더는 뻐스공장으로 가지 않고 조직의 배치를 기다리게 되였다. 내가 명에을 회복하게 되자 뭐니뭐니 해도 제일 기뻐하는건 나의 안해 송금자씨였다. “전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란걸 진작 알았고 당신을 믿고 있었어요.” 그도 그럴것이 내가 로동개조를 할 때에도 안해는 언제 한번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며 나와 얼굴을 붉힌적은 더욱 없었다. 나는 안해의 그런 착한 심성이 더욱 고마웠다. 나의 명예가 회복되자 당시 나의 요구는 특장에 따라 설계원같은 단위를 가는것이 희망사항이였다. 북경공정학원때 설계를 배웠고 심양군구에 거쳐 연길에 와서도 군복을 벗기울 때까지 설계일에 종사하였으니 그 일에 파악이 있었고 또한 조용히 사업하기를 즐기는 나의 적성에도 맞았다. 그리고 그때 내 나이는 39세, 한창 일할 나이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중공연길시당위 선전부에서 나를 부른다는것이였다. 드디여 새로운 사업터가 배치되는 판이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앞으로 종사하게 될 사업터가 어디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상황이였다. 당시 설계부문으로 가는것이 나의 희망사항이였으나 다른 사업부문으로 갈 가능성도 배제할수가 없었다. 나 자신이 당원이였기에 조직에서 배치하는 사업터라면 그 사업환경 및 자신의 희망사항 등을 제쳐놓고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했다. 나는 그러한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내가 시당위 선전부에 도착하자 선전부 지도일군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더니 뒤이어 쏘파에 앉아있는 손님 한분을 소개하는것이였다. 그 손님인즉 바로 당시 연길시라지오방송국의 인사부문을 책임진 지도일군이였다. “허선생, 오래동안 고생하였다고 들었었는데 명예를 회복한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제 허선생이 할일이 많은가본데 앞으로 우리 함께 손잡고 잘해봅시다. 그리고 많이 부탁드립니다.” 이어 선전부 지도일군은 “현재 연길시라지오방송국에서 많은 인재를 수요하기에 거기에 가서 근무하면 어떻겠는가”고 나한테 제의하는것이였다. “글쎄 조직의 배치라면 무조건 복종은 하겠다만 선전보도부문에 가서 과연 제가 할일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선전부 지도일군은 이제 곧 연길시에 방송중계소가 서게 되며 방송중계소를 세우자면 설계를 전공한 인재가 특별히 많이 수요된다고 했다. 방송중계소의 설계를 한다? 설계라면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주 흔쾌히 선전부에서 내놓은 서류에 등록하고 싸인을 했다. (연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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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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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5) 지구가 형성된 수수께끼
- 지구가 형성된 수수께끼 지구는 어디에서 왔으며 또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사람들은 줄곧 탐색중에 있다. 지금 일부 과학자들은 공동으로 하나의 비교적 합리한 지구의 형성모식을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우주가 폭발한 후의 약 50억년전 태양계의 성운들이 점차 수축되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한 태양계가 형성되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갓 탄생한 지구는 격렬한 운동이 부단히 일어났으며 지진, 화산 등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런 충돌과 진감 및 태양의 강렬한 복사 아래에 지구는 무기계로부터 유기계에로의 연변을 완성하였으며 또 수십억년이 지나자 지구상에서는 생명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근근히 대체적인 륜곽에 불과하며 많은 비밀에 대해 인류는 아직도 파헤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구의 “작은 동생”- 화성 태양계는 하나의 대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 가정에는 8대 항성이 있는데 그 중 화성과 지구의 생김새가 가장 비슷하다. 하지만 화성의 크기는 지구의 7분의 1밖에 안되고 체중도 지구의 9분의 1밖에 안된다. 화성과 지구는 모두 3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제일 바깥면의 층은 “지각”이라 하고 제일 내부의 부분을 “지핵”이라 하며 중간층의 부분을 “지만”이라고 부른다. 화성은 토양중에 철함량이 비교적 높기에 화성을 홍색의 성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외 지구가 한바퀴 자전하는 시간은 23시간 56분이 걸리고 화성이 한바퀴 자전하는 시간은 24시간 37분으로서 지구와 화성의 자전시간도 비슷하다. 하지만 화성이 태양주위를 한바퀴 도는데는 속도가 늦어 687일간이 걸린다. 이는 지구 공전주기의 두배에 달한다. 때문에 화성에서의 4계절 역시 지구에 비해 한배 가량 더 길다. 1996년 8월 미국우주항공국은 대호 “ALH400”이란 화성의 운석중에서 비생물화석의 유적을 발견했다고 선포하였다. 이는 생명흔적이 이 홍색의 성구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표명한다. 과학가들은 화성이 두꺼운 얼음층에도 가능하게 생명이 있었으며 그 것들은 상당히 긴 시기를 거쳐 존재했을 수도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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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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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5) 지구가 형성된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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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5) 신백조궁
- 신백조궁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독일, 지점: 바엔주 풀쎈센성 교외 함의: 멀리서 보는 “인간선경” 신백조궁(新天鹤宫)은 “신백조성”이라고도 하는데 독일경내에사 가장 낭만적인 색채가 짙은 성곽중의 하나이다. 뮨헨 남쪽의 알프스산 부근에 위치한 이 성곽은 뭇산과 백조 호수가에 자리하고있다. 신백조궁은 19세기 시기 파바리아국왕 루드비치 2세가 부흥시 건축한 것이다. 전하는데 따르면 그는 음악가 바그너(瓦格纳)를 알게 된 후 루드비치 2세의 후반생이 바그너의 가극속의 동화세계처럼 되게 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이 신백조궁이야말로 그의 동화세계로 하여금 현실로 되게 하였다. 동화의 성곽 신백조궁은 당초 루드비치 2세의 환상에 의해 설계된 것이다. 왜냐하면 국왕의 일생이 음악가 바그너 가극의 영향을 받아 전설속의 백설공주가 사는 지방으로 생각하고 가극원의 화가와 무대설계사들한테 부탁하여 건축도안을 설계하게 했던 것이다. 환상적인 분위기와 파란 호수 등은 신백조궁으로 하여금 동화처럼 아름답고도 낭만적 색채가 짙게 하고 있다. 호화로운 왕좌전 신백조궁의 가장 휘황한 곳은 왕좌전이다. 왕좌전 내 높은 대청은 금빛휘황한 등불이 걸려있고 96개의 초가 불을 밝히면서 천정과 땅 사이에 걸려있어 국왕의 지위를 잘 말해주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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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5) 신백조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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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8)
- ■ 허길성 1 (전번기 계속) 1965년 7월 나는 꿈많고 랑만스럽던 북경공정병학원을 졸업함과 아울러 해방군 총정치부의 발령을 받고 심양군구로 배치되였다. 근무부서는 심양군구 공정병사령부였다. 그야말로 내가 배웠던것을 실제에 써먹을수 있게 되였던것이다. 그리고 당시 내가 근무하는 공정병사령부 기획실의 주요 업무는 전쟁대처용 산굴설계같은것들이였다. 그만큼 당시 동북은 산이 많았고 또 그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대이기도 했다. 나는 사령부 기획실에 출근하자 바람으로 중견으로 독립작업도 할수 있게 되였다. 기획실의 선배군인들은 나를 관심하기도 했고 믿어주기도 했다. 그들은 내가 매 한장의 설계도면을 그려낼 때마다 자기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주었고 간혹 부족하고 미비한 부분이 있어도 차근차근 가르쳐주는것으로 나를 이끌어주군 했다. 그리고 같은 부서는 아니였지만 사령부내의 여러 부서들에는 연변에서 간 군인들도 꽤나 있었는데 조선족군인도 몇명 잘되였다. 그러다보니 일요일이 되면 같이 거리구경을 가지 않으면 야외들놀이도 할수 있어 학교시절과 비교하면 생활이 다채로웠거니와 또 로임을 받으니 가끔씩 부모님한테 용돈을 보내주고도 어느 정도 여유로운 생활을 할수 있었다. 한편 고향의 부모님들은 내가 심양군구에 오게 되자 둘째형님한테 촉구하기도 하고 사처로 수소문, 결국 셋째형수님께서 한 처녀를 나한테 소개했다. 그 처녀는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 화험실에서 근무하는 송금자라는 이름을 가진 처녀였다. 송금자의 가정을 보면 부친은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의 로동자였고 어머니는 가정부녀였다. 당시 그녀는 6남매중 맏이로서 공장의 종업원대학에 졸업했으며 공장화험실에 출근하면서 공장공청단서기로 활약하고있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그 처녀와 거래를 하면서부터 가끔씩 꿈속에서 나타나군 하던 순자에 대한 련민의 정이 알게 모르게 점차 사라지는것이였다. 사람이란 새로운 사람한테 정이 들면 이전의 사람한테 남아있던 정도 그만큼 멀어지는 모양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기차표를 사려고 심양역에 갔다가 불현듯 그제날 문화학교시절의 동창생 한명을 만나게 됐다. 그날 내가 기차표를 사고 매표구에서 나와 뻐스를 타려는데 어떤 볶은 해바라기씨를 파는 한 남성이 나를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음을 감지할수 있었다. 나 또한 그가 어쩐지 낯이 익어보였다. 나는 뻐스를 타려다 말고 그 해바라기씨 장사군한테로 다가갔다. “여보세요. 해바라기씨 10전어치만 주시오.” 나는 워낙 평소에 군입질을 하는 습관이 없는지라 해바라기씨를 사서 까먹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와 말을 걸려면 해바라기씨를 사는척이라도 해야 했다. “저기 저…해방군동무 어딘가 얼굴이 익은데요?” 그는 해바라기씨를 팔 궁리는 하지 않고 나만 빤히 쳐다보는것이였다. 나는 그한테 담배 한가치를 권하며 물었다. “댁도 혹시 군대에 갔었지 않았어요?” “그랬는데…가만 있자. 어디서 봤더라? 옳지 해방군동무 혹시 무석에 있는 문화학교에 다니지 않았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손으로 무릎팍을 탁 쳤다. “그래그래 맞아요, 맞아. 그럼 우리 한 학교에 다녔구만그래.” 그랬다. 그는 무석에 있는 문화학교의 동창생이 틀림없었다. 다만 같은 반이 아니고 다른 반급이였기에 너무 익숙한 사이는 아니였을따름이였다. 헌데 그 친구를 볼라니 옷매무시나 얼굴모양새 같은것이 어딘가 말이 아니였다. 그래서 그의 생활사정을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가 그는 우리 문화학교 동창생중 운이 몹시 나쁜 친구였다. 그에 따르면 문화학교를 떠난 뒤 복건에 가서 1년간 산굴을 파다가 병을 얻게 되여 제대하게 되였는데 후에 국가보조금이 나오긴 하지만 체력로동은 거의 할수 없고 보다싶이 해바라기씨같은것을 팔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것이였다. 나는 어쩐지 그가 몹시 측은해났다. 그리고 문득 그에 비해 내가 매우 행운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나도 그들처럼 산굴이나 파는 전쟁준비공사장에나 갔더라면 어떻게 되였겠는가! 대학을 졸업하고 심양군구 공정병사령부에 배치받기는커녕 병에 거리거나 사고로 크게 다쳐 장애가 생기고 지어는 죽을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자 크나큰 공포가 온몸에 엄습해오는것 같았다. 한편 나는 혹시나 하여 순자의 행방을 아는가고 그 친구한테 물었다. 이미 약혼까지 한 마당에 아직도 그녀한테 미련이 남아있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그냥 그녀의 행방이 궁금해서 물은것뿐이였다. 그러자 그는 생각밖으로 순자의 행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동창생에 따르면 당시 나와 갈라진 후 순자는 역시 복건지구에 나가 위생병으로 근무, 그러다가 아버지인 왕륙삼정위가 힘써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인지 어쨌든 상해군의대학에 입학했다고 한다. 당시 그 동창생을 통해 순자에 대해 들은건 거기까지뿐이다. 후에 그녀가 어디에서 사업에 참가했고 어떤 남자를 만나 결혼했으며 또 자녀는 몇이나 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미지수이다. 당시 나는 그제날 나와 순자의 로맨스는 한낱 철부지 청춘남녀의 사랑유희에 불과하며 이젠 나의 앞날과 그녀의 장래를 위해서도 순자를 철저히 단념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그랬다. 그것이 우리 서로에게 보다 유리할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와 나 모두 로년에 들어선 지금에 와서 순자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가 어딘가 궁금하기도 하며 또한 순자의 로년생활이 행복하기를 기원하고 싶기도 하다. 2 1966년 중국의 대지에는 이른바 “전례없는 문화혁명”이 터졌다. 그것은 내가 심양군구에 배치받아서 1년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나의 기억을 더듬으면 문화혁명초기 동북의 여러 지방에서는 대자보를 내붙이고 반란하고 투쟁하고 마스고 부시고 했지만 심양군구만은 지방의 문화혁명에 크게 참여하지 않은것 같았으며 우리는 각자가 자신이 맡은 업무에만 열중했다. 헌데 그러던중 북경으로부터 모원신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동북에 파견돼오면서부터 국방을 지켜야 할 해방군인 우리 심양군구도 이른바 “좌파지지”란 명목을 내걸고 문화대혁명이란 거센 소용돌이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군구정치부 주임의 호출을 받게 되였다. 내가 정치부 사무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치부주임은 앉아있는 군인들한테 “이 동무가 바로 허길성이고 조선족동무요”라고 하며 소개하는것이였다. 알고 보니 그 군인들은 연변군분구에서 온 손님들로서 연변의 문화혁명에 조선족군인이 몹시 수요되기에 심양군구를 통해 조선족군인들을 물색하려던참이였다. 서로간의 인사를 나누고 그 군인들이 찾아온 의향이 밝혀지자 정치부 주임은 단도직입으로 “길성동무, 연변으로 나갈 생각은 없소”라고 묻는것이였다. “제가요?! 제가 연변에 가서 할일이 뭡니까?” “허허 할일이 많지. ‘좌파지지’사업도 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또 전쟁준비로 파게 될 산굴들을 설계하기도 해야지 왜 할일이 없겠소? 연변이란 3국변경에 위치한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대라는것을 동무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예,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달갑게 가겠습니다. 아니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허허허…명령은 아니오. 그저 동무의 의향을 물었을 따름이였소.” 기실 나는 그 무슨 “좌파지지”보다는 고향이 연변이고 거기에 약혼녀가 있으며 또 오래잖으면 결혼도 해야 하겠기에 연변에 가겠는가 하는 제의를 달갑게 접수했다. 게다가 연변에서 많은 산굴을 파게 된다고 하니 내가 배운것을 직접 현장에서 활용할수 있어 호기심이 부쩍 동하기도 했다. 헌데 그 며칠뒤 연길에 도착해 형세를 알아보니 연변의 문화대혁명은 내지보다 한발 앞서고 있었다. 이미 대자보, 대변론 단계를 지나 물리적 충돌로 향해지는 단계에도 진입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이거 잘못 오지 않았나 하며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 급기야 의심하게 되였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좌파지지”의 명목을 내걸고 연변에 나왔는데 나의 둘째형님 허길룡씨는 “좌파”들과 투쟁하는 “보황파” 조직의 일원이였고 그것도 그 조직의 “골수분자”였던것이다. 나는 아주 첩첩한 모순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번민끝에 나는 일절 정치투쟁에는 말려들지 않고 조심스럽게 눈치를 봐가며 산굴설계도를 그리고 또 산굴을 파는 현장에나 뛰기로 작심하였다. 나는 진짜로 한동안 자기가 맡은 업무에만 열중했다. 밖에서는 당시 주당위서기 겸 주장이였던 주덕해동지를 타도하느냐 아니면 보호하느냐를 두고 각 조직들의 갈등과 대립이 몹시 선명했고 부대내부에서도 밖의 사태를 두고 그 대처방안을 연구하느라고 의론이 분분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의론같은건 귀등으로 흘려보내며 그저 설계도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연구하는 작업에만 골몰했다. 하지만 어떤 일은 자기의 뜻대로 되는것이 아니였다. 특히 명령복종을 천직으로 삼는 군인으로서는 더욱 그랬다. 당시 우리 부대는 연길교 동북쪽의 하북구역(지금의 백산호텔 위치)에 주둔하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볼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금방 귀대하자 부대수장이 나를 호출한다는것이였다. 부대수장은 사무실에 들어선 나한테 앉으라는 말도 없이 나를 이상하게 눈여겨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연변대학에서 ‘8.27’조직의 모임이 있는데 허동무의 형님도 거기에 참가한다더군. 나 허동무를 생각해서 부탁하오. 허동무 자신을 위해서라도 오늘 가서 형님을 설복해 거기서 빠져나오고 또 그 조직에서 탈퇴하도록 하오. 이는 부탁이라면 부탁이지만 부대규정을 놓고 보면 명령이라고도 할수 있소.” 부대수장의 어조는 낮았지만 말그대로 명령이였고 위엄도 있었다. 그리고 나한테는 그 명령을 거절할 아무런 리유와 권리도 없었다. 하급은 상급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군사규률 때문이였다. 헌데 내가 과연 둘째형님을 설복해낼수 있을가? 그것은 형님을 설복하러 떠나는 나도 자신이 없었다. 그도그럴것이 형님은 연변일보사의 중견기자여서 이미 정치적 립장이 분명히 선데다 나 또한 그 시기 어느 조직이 원칙적이고 어느 조직이 비원칙적인가를 잘 식별할 능력을 구비하지 못했으며 도무지 뭐가뭔지 모르는 판이라 딱히 형님을 설복할 생각도 없었다. 3 부대수장의 명령을 거역할수 없어 주둔지 대문을 나온 나였으나 어떻게 둘째형님을 찾아가야 할지 방법이 잠시 신통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달통되지 않는 걸음을 걷게 되는지라 한동안 나는 그냥 기계적으로 움직이기만 했다. 그러다가 길을 건너 연변일보사를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 군복을 입은채(당시 내가 군복을 입은채로 갔더라면 그 후과는 상상할수조차 없었을것임)로 그냥 갈수가 없었고 둘째형님네 집이 생각났다. 그랬다. 형님네 집에 가서 옷을 바꿔입고 가는것이 가장 융통성이 있는 방법인것 같았다. 내가 신문사뒤에 있는 연변일보사 주택구에 가서 형님네 집의 문을 열자 마침 형수가 있었다. 형수는 나를 반겨맞았다. “형님은 어디 나갔어요?” “오늘 연변대학에서 무슨 집단모임이 있는 모양이예요. 그 량반 참 답답하우. 혁명을 혼자 하는지?…쯧쯧쯧.” 그러고보니 부대에서 입수한 정보가 맞는 모양이였다. 그도그럴것이 해방군에서의 정보수집은 그때 그 시기에도 아주 정확하고도 빨랐던것이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가 심양에서 연변으로 나올 때 부대에서는 벌써 나의 부모정황과 형제관계에 대해 손금보듯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중에는 연변일보사에서 기자로 근무하는 형님에 대한 정보도 들어있었다. “외부에서 특히 우리 부대에서도 형님에 대한 뒤조사가 심하답니다. 그러니 형수가 설복해 형님더러 그런 정치풍파에 개입하지 말도록 했으면 합니다.” “글쎄 말이우다. 헌데 그 고집을 누가 말린다우. 집안일엔 도끼등처럼 무딘 량반이 그런 일에는 왜 그리도 적극적인지…” 형수는 장판을 닦으며 푸념을 늘여놓았다. 그제야 나는 찾아온 사연을 말하고는 형님의 옷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형수는 제꺽 호응하며 “제발 생원이 좀 가서 그 량반을 설복해주우다” 라고 곱씹었다. 형수 역시 형님의 일에 대해 자못 근심되는 모양이였다. 형님의 옷을 입고나온 나는 곧추 연변대학으로 향했다. 내가 공원교 부근에 이르자 분위기는 자못 심각했다. 안전모를 쓰고 몽둥이를 든 사람들을 실은 트럭들이 가끔씩 오갔고 어느 3층집 창문에서는 누군가 아래에 삐라 뭉터기를 내리 살포하는것도 보이였다. 공원교로는 몇몇 할머니들이 건너다닐뿐 장정들은 별로 보이지도 않았다. 공원교를 건너자 걸려있는 표어들이 벌써 달랐다. “주덕해동지는 당의 우수한 아들이며 조선족의 훌륭한 간부이다!” “주덕해동지를 결사옹호한다!” “‘8.27’조직의 무산계급 혁명사령부를 목숨으로 보위하자!” …… 내가 연변대학 정문가에 이르자 대문에는 건장한 청년 4명이 버티고 서있으면서 들어가는 사람들을 검사하는것이였다. 나한테도 례외가 아니였다. “어디에서 오는 누구인데 누구를 찾아온거요?” “예, 룡정에서 오는 허길성이란 사람인데 연변일보사에 출근하는 허길룡이란 사람의 동생입니다. 오늘 형님이 연변대학에 와있다고 해서요.” “오, 허기자의 동생되는 동무로구만. 환영하오. 어서 들어가시오. 허기자는 지금 학교구락부에 있을거요.” “8.27”조직의 골수간부인 형님에 대해 그들도 잘 알고있는 모양이였다. 내가 연변대학 구락부쪽으로 다가가자 구락부안에서는 연신 구호소리가 터져나왔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 “위대한 령수 모주석 만세, 만세, 만만세!” “주덕해동지는 당의 우수한 간부이며 동지이다!” 구락부 출입문에는 또 지키는 사람 2명이 있었다. “누구를 찾소?” “연변일보에 출근하는 허길룡기자를 찾습니다. 전 그분의 동생입니다.” “그렇소? 자 그럼 여기서 기다리오. 나 들어가 확인해 보겠소.” 약 5분뒤 과연 둘째형님이 밖으로 나왔다. 형님은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주위부터 살피는것이였다. “너… 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왔니?” “형님, 사실은 우리 부대에서 형님을 설복해 ‘8.27’조직에서 나오라구 시켜서 왔소. 형님 아무래도 군대가 지지하는 조직에 참가하는것이 좋을것 같소.” “그래 군대에서 시켜서 왔구나. 그러나 넌 이곳의 일을 너무 모른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거라. 못들은것으로 하겠다. 넌 그냥 이런 일에 참견말고 네 할일에나 열심히 해라.” “그래도 형님…” “더 길게 말 말구 그냥 돌아가거라.” 나는 더 이상 형님을 설복할수 없었다. 형수의 말과 같이 형님은 고집이 셌으며 나 또한 강경하게 형님과 맞서고도 싶지 않았다. “어서 돌아가거라. 여긴 네가 오래있을 곳이 못된다. 네가 부대에서 온 사람이란걸 알면 크게 봉변을 당한다. 그리고 나한테도 좋지 않고…갈 때 조심해라.” 말을 마친 형님은 재차 주위를 살피는것이였다. 나는 형님과 길게 말을 나누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서는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저으기 긴장하여 자주 뒤를 돌아보군 했다. 마치 누군가 따라와 방망이로 뒤통수를 치는것 같은 착각이 생겨서였다. 이런 나의 긴장감은 공원교를 건너서야 비로서 풀리였다. 나는 다시 형님네 집에 들려 옷을 군복으로 갈아입은 뒤 부대로 향했다. 주둔지로 돌아온 나는 거짓회보를 하는수밖에 없었다. 즉 연변대학으로 찾아갔으나 형님이 다른 곳으로 일보러 갔기에 만나보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그랬소? 동무의 말을 믿어도 되겠소?” 부대수장은 말은 그렇게 했으나 어딘가 나를 의심하는 눈치가 다분했다. 그때를 계기로 부대수장이 나한테 거리감을 두고있는 한편 감시를 붙이고있는것이 육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4 1966년 가을, 나는 부모님의 독촉에 못이겨 장가를 가게 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신부는 개산툰 화학섬유팔프공장 화험실의 송금자였다. 우리의 결혼식은 너무나도 소박하고 단조로왔다. 문화혁명시기라 낡은 풍속을 타파하고 무산계급의 새로운 풍속을 수립한다면서 나는 양복 대신 그냥 군복차림이였고 신부 송금자는 파마머리를 하지 못했고 너울도 쓸수가 없었다. 그리고 단독으로 자동차를 쓰지 못하고 기차를 타고 개산툰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룡정으로 와야 했다. 결혼한 뒤 우리는 신혼부부였지만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안해는 개산툰으로 돌아가 친정집에서 생활하면서 공장으로 출근해야 했고 나 또한 연길로 돌아와 부대생활을 계속 해야 했다. (연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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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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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견문 시리즈 (3) 2년 730여일, 선원생활의 그 나날들
- ■ 김철균 한국사람들은배를 타는 사람들을 두고 거의 한결같이 “배놈”이라고 부른다. 육지의 친구들은 잘 모르겠지만 호화여객선이든작업선이든 여하튼 배를 1년 간이라도 타본 사람이들은 자기들이 그 무슨 으시댈만한 “배님”이 아니라아주 천한 “배놈”이란걸 곧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배놈의세계도 다층차인 것만은 사실이다. 마구루배라는 “참치선”, “채낚이선”과 “트롤선” 등 작업선을 타는 선원들의 노동강도나 환경조건을보면 하늘아래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나 싶게 그들의 생활은 힘들고 지겹고 짜증난다. 그러나 산뜻하게정복을 차려입고 각 부서에 따라 자기의 직책만 수행하는 유람선이나 상선의 근무원들을 놓고 보면 누구나 다 부러워할 정도로 턱이 높고 신사다웠다. 하지만 그들 역시 돈에 얽매여 부모처자를 떠나서 생활해야만 하는 고독하고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바다의 짠물과 해풍에 푹 절어서 육지에서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기구한 사람들, 이 모든 것은 작업선의 잡부들이나 여객선의 1등 항해사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똑같이 “배놈”이란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럼 “배놈”의 세계란 과연 어떠한 것일가? “태풍호”에 있던 나날 우리가 제일먼저 승선한 선박은 한국 선일해운주식회사의 타카뽀트라고 부르는 견인선이었다. 우리가 라틴아메리카의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항에서 구소련선박 “프리오카츄샤”호에 편승하여 포클랜드군도 해상에 도착한 것은 1991년 3월 30일 새벽녘이었다. 그러니깐우리가 3월 18일에 연길을 떠났으니 꼭 13일만이었다. 그 때까지 우리가 침대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갑자기 소련배의 엔징이 툭 꺼지더니 미구하여 갑판에서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난리가났는나 하여 급기야 갑판으로 뛰쳐 나갔더니 소련배는 이미 파도가 잔잔한 어떤 해협에 들어와 있었고 수십척을 헤아리는 대중형 선박들이 앵카(닻)을 내리우고는 사처에 정박해 있었다. 이 때 누군가 “포클랜드에 다 왔다!”하고 소리질렀다. 순간 나의 가슴은 뭉클해났다. “드디어 올 곳으로 왔으니 2년이란 고역이 곧바로 시작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머리속이 착잡해났다. 그 때 수많은큰 선박들이 정박해있는 가운데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다른 배와 자주 접선하는 작은 배 한척이 보이었는데 소련배에 함께 올랐던 한국선원들의말에 의하면 그 배는 1000톤도 될가 말가하다고 했다. 헌데 그 보잘것 없는 배에 우리가 오를 줄이야 뉘알았으랴. 그 배의 네임(이름)이 바로 “태풍호”였다. 그배는 위낙 부두에서 수만톤씩이나 되는 큰 선박들을 밀어주는데 쓰이게 만들어졌는데 한국 선일해운에서는 그 배를 개작하여 큰 선박들이 실어오는 물, 기름과 부식 그리고 탁송품같은 것을 받아서는 다른 어선에 공급하는데 써먹었다.그런대로 돈벌이는 꽤나 잘 된다고 했다. “배놈”의생활이 고되다더니 그다지도 고될 줄은 우리는 “태풍호”에 승선해서야 절감했다. 그 배의 시스템은 하루 24시간 줄곧 스템바이(대기상태)였는데일단 접선신호가 있기만 하면 밥을 먹다가도 뛰쳐 나가야 하고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야 했다. 그래도 전임선장 강××가 있을 때는 배접선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 없으니 (접선시 선수와 선미에 7~8명이면 충분했는데 그 때 태풍호에는 중국선원과 한국선원 도합 20명도넘었음) A,B조로 나뉘여 6시간씩 교대하여 작업하라고 했기에그닥 고되지는 않았다. 헌데 후임 선장 김××가 부임되어 오면서부터 배 기강을 바로 잡는다면서 무작정그 것을 다시 고쳐 다 함께 대기상태에 있게 했다. 그러다 보니 접선작업을 할라치면 무리지어 나갔지만그저 서있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반면에 한시간도 시름놓고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자골치거리는 연이어 발생하였다. 무엇보다도먼저 목욕하기가 힘든 그 것이었다. “태풍호”에는 선장방에 딸린 욕실외 욕실이라고는 하나뿐이었는데 20여명이 작업하고 들어오면 욕실앞은 줄을 서야 했다. 거기에 한국선원들이먼저 목욕을 하고 나면 또 접선신호가 울리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갑판장은 우리가 목욕을 자주 하지 않는다면서밥을 먹다가도 수절을 팽개치었고 우리가 들어있는 침실에도 냄새가 난다면서 눈알을 굴려댔다. 우리라고왜 매일 목욕하고 옷을 세탁해 입기가 싫겠는가. 헌데 환경이 도무지 그 것을 허락지 않는데는 무슨 용빼는수가 있는가. 거기에 목욕을 하지 않으면 중국되놈, 돼지같은놈들, 하다가도 또한 물을 많이 쓴다고 자주 욕실에 자물통을 잠궈놓는 것도 갑판장이었다. 하여 우리와 갑판장사이에는 이런 사소한 일로 하여 자주 언쟁이 벌어졌다. 어느날 배에서는 작업이 뜸한 틈을 타서 술파티가 있었다. 술이 몇순배돌아 모두들 얼근히 되자 우리 연변선원들 중에서 나이가 비교적 많은 양일선씨가 갑판장과 걸고 드는 것이었다. “당신들은일본사람들한테서 과학적 관리와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사람을 괴롭히는 것부터 배웠다구요.” “너, 이 자식 뭘보고 하는 소리야?” “그래 50년전에 일본 쪽바리들이 당신들을 대하던 식으로 지금 당신들이 우릴 그렇게 천대하는 것이 아닌가요?!” “너 이놈, 뭐 어쩌고 어째? 어디라고 감히 말대꾸질이냐?” 하며 갑판장이 양일선씨의 멱살을 잡고 때리려던 찰나, 갑자기 배접선신호가울렸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날밤 자정이 퍽 지난 뒤 갑자기 울리는 비상벨소리에 우리는 또 접선하는가 해서 뎃기(갑판)로 뛰쳐 나왔다. 허나 접선은 아니고 갑판의 희미한 등불아래에는 갑판장이노기등등해 서있었다. “지난 밤술 처먹은 놈들 몽땅 나왔!” 이에 우리들태반이 모두 술을 마신지라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는 멋을 모르고 나온 한국선원 박영재씨도 끼어들었다. “야 이 놈, 너도 중국 되놈이냐? 어서 침실로 들어가지 못할까?” 이어 갑판장은 양일선씨를 불러 내고는 한바탕 닦아세우는 것이었다. “야, 너 이 개새끼야! 예가 어딘줄 알고 불평 불만이야? 여기가 너희들 중국인줄 아느냐? 한국선박에서 한국사람의 술 처먹고왜 한국사람과 술주정 부리냐 말이야?” 이렇게 한동안일장훈계를 하고 난 갑판장은 우리 모두한테 두시간동안 제자리에 서있게 하는 벌을 주는 것이었다. 얼마나어이없는 일인가?! 설사 양일선씨가 한 말이 예의가 없고 과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일선씨혼자서 당해야 할 일이지 우리 중국조선족 선원 모두가 이런 기합을 당해야 하다니. 남극이 바라보이는포클랜드는 우리 연변과는 달리 해마다 이 곳의 봄일 때면 그곳은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겨울의 영하 20도를 오르 내리는 맵짠 날씨에 그것도 모두가 침대에서 겉옷만 입고 나온 몸으로 두시간동안이나기합을 당할라니 우리는 모두 동태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선원 김대학씨는 어선에 비하면 그러한 벌은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긴 어선에서는 중국선원들이 꾀를 부리거나 말썽을 일으키면 영하 30도 되는 어창에 한두시간씩 가두어 둔다고 하니까. 그 일이 있은후부터우리는 쩍하면 그와 비슷한 벌을 받군 하였다. 갑판장 먼저 밥술을 들어도 그렇고 그한테 “님”자를 붙이지않아도 그랬으며 한국사람을 조선사람이라 불러도 그랬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한계가 있고 곪으면 터지기 마련이다. 한번은 소련선박에서어선으로부터 냉동물고기를 받아싣게 되었는데 적사일군이 모자라 우리가 거기에 가서 돈벌이 삼아 작업하게 되었다. 헌데소련배에는 침실이 모자라 부득불 통로바닥에서 자야 한다기에 우리는 덮는 모포와 침대에 까는 해면자리를 가져가야 했다. 그래서 우리가 짐을 싸들고 소련선박으로 건너가려 할 때 술에 얼근히 취한 갑판장이 그것을 보더니 노발대발하는것이었다. “야, 이놈 개새끼들아! 좋은 자기의 돈벌이를 하러 가면서 왜 허락도 없이그걸 함부로 갖고 가는거야? 당장 방에 갔다두고 꺼져라.” 우리는 억이막혔다. 본선에서도 자기가 깔고 덮고 하던 것인데 그런 것마저 허락받아야 한단 말인가? 허나 빌붙는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허락없이 가져 가는 건 잘못 되었지만 소련배에 가서 어떻게 맨봉당에서 자겠느냐, 좀 봐달라 하고 사정하였다. 특히 그 때 나는 고질이었던 치질이도졌기에 더구나 찬 곳에서 잘 수가 없었다. 그랬건만 갑판장은 막무가내였다. 참는다고 봐줄 갑판장이 아니었다. 또한 잘못도 없이 계속 굽어들수도 없었다. 나중에 꺾어지고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시비는 캐고 봐야 했다. 나는 튕길듯이 후닥닥 일어나서는 선장방으로 찾아갔다. “우리가 뭐돈에 미쳐서 가는 줄 압니까?! 선박에서 배치하니 가며 또한 그 벌어오는 돈도 우리만이 가지는 것이아니고 전체 선원들이 똑같이 나누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최저한도로 잠자리 조건만은 보장해야 할 것이아닙니까? 그래 이것도 같은 동포요, 피줄이요 하며 너스레를떨던 한국사람들의 양심입니까?” 이렇게 내가이치에 맞게 따지고 들자 선장도 뜻밖인 모양이었다. “보숭, 보숭(갑판장), 방송을 듣는 즉시 선장방에 올라와 보이소.” 헌데 선장의호출을 받고 올라온 갑판장은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한사코 나눕는 것이었다. “김군, 어찌된 영문이야?” 선장은 나를무섭게 쏘아 보았다. 이 때 쏘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기관장이 차마 볼 수 없었던지 일어나며 나를두둔해 주는 것이었다. “보숭, 당신 나살이나 처먹었다는게 이렇게 시치미를 뗄 수가 있어? 당신그러는걸 나도 봤단 말이야. 그래 이 교포친구가 터무니없이 당신을 헐뜯는다고 생각해? 당신 어쩜 그럴 수가 있는가 말이여.” 기관장의 그 말 한마디에시비는 대번에 갈라졌다. 선장은 진짜 노한 것 같았다. “회사본부에서는교포선원이라 해서 절대 차별시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어. 그런 회사정신이 당신같은 사람들 때문에엉망으로 되고 있단 말이야. 앞으로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솔선수범하이소. 알겠습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역시 선장앞에서는쩔쩔매여 급신거리는 갑판장이었다. 기관장, “태풍호”같은 분위기가 험악한 선박에도 좋은 사람은 있었다. 그는이전에도 우리와 가끔씩 팔씨름도 하고 우스개도 곧 잘 했다. 특히 우리의 봉급이 250달러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자 회사에서 너무한다, 너희들이 진짜욕본다, 너희들이 영국배나 스페인배로 도망가라. 거긴 일도힘들지 않고 급여도 더 많은가 하면 인간사이의 차별도 심하지 않다. 한국사람들의 본질을 몰라서 한국선박에다 올랐느냐. 그것이 바로 잘못됐다며 늘 우리한테 깨우쳐주군 했다. 나는그 말이 어쩐지 나쁘게는 들리지는 아니했다. 좋은 사람은 기관장 한분만이 아니였다. 남몰래 사과 한알이라도 우리들 손에 쥐여주는 주방장 김진해씨, 위험한일에는 우리를 제쳐놓고 자기가 나서는 나어린 제1갑판원 설복진씨 또한 소주 한병이라도 생기면 언제나나부터 찾군 하던 뚱보총각 박영재군, 참 마음씨만은 비단같은 친구였지. 기관장한테서들을라니 갑판장 역시 그닥 독한 양반은 아니라 했다. 듣는바에 의하면 한국선박은 사관선원과 부원선원으로나누는데 해양대학같은 전업을 졸업한 선원은 사관에 속하고 그런 학력이 없이 배를 탄 선원은 부원에 속했다. 그렇다면갑판장과 조기장, 주방장은 부원선원중에서 경력이 제일 긴 선원들로 그 직에 종사하는바 나이는 많지만 (선장보다도 나많은 이들이 많음) 급별과 봉급은 사관의 3항사나 3기사와 같기에 이런 이들의 불평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쩍하면 부하들과 역정을 내군 했는데 “태풍호” 갑판장도 그런 범주에 속했다. 또한 갑판장이 우리 중국선원들과 더욱 호통을 치는데는 그럴만한 다른 사연도 있었다. 그것인즉 갑판장의부친은 6.25 당시 전라도 어느 경찰서의 경찰관이었는데 국군과 연합하여 남로당 빨치산을 토벌할시 그들의기습을 당하는 가운데서 빨치산의 날창에 찍혀 죽었다고 한다. 하여 갑판장은 어릴 적부터 모친한테서 반공선전을들을대로 들은지라 공산당에 대해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원한을 우리한테서풀어서야 될말인가. 하여 갑판장이 우격다짐으로 우리를 억누르려 하였지만 나는 나대로 그한테 굽어들지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선장이나 기관장을 찾아가 시비를 캐군 하여 도리어 그가 골탕을 먹게 하군했다. 물론 한 인간을 고자질한다는 건 그다지 광채롭지 못한 일이긴 하지만 약자가 살고 버티려면 어쩔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힘겨룸을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헌데 선일해운에서두번째로 큰 선박이라는 “코리안스타(KORAN STAR”호가 포클랜드해상에 들어오자 늘 대바른 소리를잘하던 내가 선참으로 그 배에 추천받아 승선할줄이야 뉘 알았으랴. “코리안스타”호와 그 사람들 “태풍호”에서배척받고 추방당해 다른 배로 전선한줄로만 알았던 것인데 그 “코리안스타”호가 그토록 멋지고 그 곳의 사람들 또한 그다지도 친절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못하였다. 그럼 갑판장의눈밖에 난 내가 어찌하여 제일 먼저 팔리여 그 멋진 선박에 승선하게 되였을까? 알고 보니 누가 어느배에 팔려 승선하는가는 근본 “태풍호”의 갑판장한테는 권리가 없었다. 갑판장이 다 뭔데 그런 권리까지다 있담. 순간 우리 일행중의 어떤 이들이 좋은 배에 팔리려고 갑판장한테 코밑치성을 하던 일들이 생각나(한 친구는 나의 웅담분까지 훔쳐서 갑판장한테 알랑방구를 먹였음)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진상은 이러이러했다. 이 때 “태풍호”와“코리안스타”호가 자주 접선하면서 물건을 주고 받는 사이와 우리가 “코리안스타”호에 가서 전재(转载)작업을 하는 동안에“코리안스타”호의 선장과 기관장이 몰래 우리 일행의 일거일동을 지켜봤는데 진작 누구를 받고 쓰는가 하는 의논까지 있은 모양이었다. 하다면 신장 162센치미터에 불과하고 체중도 55킬로그람 남짓한 내가 어떻게 그들의 눈에 들었을까? 듣는바에 의하면그때 “코리안스타”호에는 싸롱뽀이라고 일컫는 선원자리가 모자랐는데 직책은 주방장의 일을 거들어주는 외에도 선장,기관장의 방청소, 세탁 등을 맡아하는 것이었다. 하기에팔힘이 세고 우람진 사람보다 예의 바르고 깨끗하며 부지런한 사람이 적중했는데 거기에 내가 선정됐던 것이었다. “코리안스타”호에승선하고 보니 배도 현대화한 신조선이었거니와 우선 그 곳의 사람들이 맘에 들었으며 특히 선장이 더욱 좋았다. 한번은 선장인 정유식씨와나 사이에는 이런 대화가 오갔다. “여태껏 우리는공산권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눈도 퉁방울처럼 생기고 웃을줄도 모르며 싸움질만 일삼는 도깨비같이 생겼다고 여겨왔거든. 헌데 자네들을 보니까 군들도 역시 우리와 똑 같은 말을 하고 인정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어. 참. 사상과 이념의 차이가 무섭단 말이야.” “하긴 그렀습니다. 저희들도 이전에는 썩고 병든 남조선이요. 미제국주의가 살판치고 거지들이득실거리는 곳이란 선전을 줄곧 받아 왔거든요. 그러다 최근에야 한국이란 어떤 나라인가를 알게 되었답니다.” “그랬었는가? 그럼 피차일반이었구만. 허허허…” 후에 내가정유식선장한테 “청년생활”, “천지(연변문학 전신)” 등 연변의 간행물에 실린 작품들과 한국 “선데이서울”에 발표된 “우리는 백두산에서 아리랑을 함께 불렀다”는수필을 보여 주었더니 그 때로부터 그는 나를 다른 눈길로 봐주었으며 늘 나한테 관심조로 이렇게 말해주군 했다. “어때 할만해? 힘들고 억울하지? 힘들고 억울하면 진급해야 돼. 우리도 다 자네들처럼 힘들고 억울한 가운데서 크며 일해 오늘의 선장, 기관장으로된거야.” 한편 선장의말에 의하면 부원선원 중에서 예하면 갑판장과 기관장은 갑판원, 기관원으로부터 조타수와 조기원을 거쳐그 직에까지 이르려면 보통 10년 이상 배를 타야 하지만 싸롱뽀이는 잘만 하면 바로 주방장으로(필자는 배타서 6개월만에 주방장으로 됐음) 진급한다는 것이었다. 하기에 나는 더욱 최선을 다해 근무했는바 그것은결코 선장한테 알랑방구나 먹이려는 아첨은 아니었다. “코리안스타”호에승선하고 보니 벌써 분위기가 “태풍호”와는 판판 달랐다. 우선 스켓줄부터 “태풍호”는 주로 남미주의포클랜드 해상에서 맴도는 작은 배였지만 “코리안스타”호는 비정기선이었고 본회사의 간판선박으로서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그 어느 곳에나 갈 수 있는배였기에 알짜 자질높은 선원들만 승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장, 기관장으로부터 말단선원에 이르기까지 매일 수없이 만나도 “안녕하십니까?”, “수고들 해요”하는 인사말이 정답게 오갔으며 선원들 모두가 그 누구의 지시가 없어도 자기가 맡은 부서와 직책에따라 열심히 일하는 것이 곧 선박의 기풍이었다. 한편 선박의입출항시의 일체 작업은 군대규율에 못지 않았다. 그럴 때면 한밤중이고 가리지 않고 언제나 선장이 직접조타실에서 지휘하군 했는데 선장이 “우현 10도” 혹은 “좌현 20도”하면 제1조타수가 그것을 복창하며 키를 돌렸고 선수(船着)와 선미(船尾)의 선원들도기계를 잡은 이, 바줄을 준비하는 이들로 분공이 명확했다. 그러다가선장이 일단 “선수, 기계를 돌려 바줄을 감앗!” 하거나“선미, 바줄감기 스톱!”하면 선원들도 그것을 복창하며 긴장하게일했다. 그야말로 인간의 정도 흐르고 엄한 규율도 있는 선박다운 선박의 시스템이었는바 모든 것은 휴식이휴식답지 않고 작업이 작업같지 않은 “태풍”호와는 비교도 안되었다. 참, 같은 회사의 선박을 사이에 이런 현저한 차이가 존재하다니. 그래서“배놈”인 선원들마저 송출시면 회사나 선박을 되게 고른다고 했다. 그외 생활시스템도사람한테 편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침실마다 선원 한명씩 들어있게 되여 있고 단독 샤와실이 갖춰졌는가하면 사무용테이블, 전화, 스피카, 벽시계 등 시설에 이불도 여름용과 겨울용이 따로 있었고 거기에 에어콘까지 달리어 날씨변화에 따라 더운 공기와찬공기를 엇바꿔 보내 주었으며 비디오관람실도 사관과 부원이 따로따로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우에서도 언급했지만더 좋은것은 “코리안스타”호의 선원들이었다. 내가 혹간 직책에 따라 고급사관(선장, 기관장, 1항사,1기사 및 통신장)들의 빨래를 하거나 그들의 방을 청소해 줄라치면그들은 매달 두세번씩 10달러 정도의 팁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하다 못해 깡통맥주나 콜라같은것을몇개씩 안겨 주고야 시름을 놓군 했다. 또한 외출시 택시값은 물론 술값은 언제나 그들이 돌아가며 부담했고혹간 우리가 값을 치를라치면 그들은 매우 언잖아하면서 “자네들이 여기서 남긴 돈을 중국으로 가져가면 큰돈이 되잖아? 남겨갖고 돌아채 아파트 장만한 뒤 장사라도 하면서 잘 살아보라구, 하지만우린 이 돈을 남겨 한국으로 가봤자 아무것도 아니야. 건 그렇다치고 우리가 어떻게 급여가 적은 교포들한테이런 것까지 다 부담시키겠어?!”라고 하며 기어코 제지시키군 했다. 또한선장인 정유식씨는 다른 선박이나 선식회사 및 대리점의 손님들을 접대할 때마다 옆에서 시중을 드는 나를 소개하며 “이 친구는 연변에서 알아주는 소설가라구요. 이 친구가 배를 타는건 단지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안계를 넓히기 위해서래요”라고 극구 춰주는 것이었다. 그럴적이면한낱 애숭이문학도인 나는 무척 송구스럽기도 했지만 그 말이 그토록 싫게 들리지는 않았다. 특히 1991년 9월 3일 저녁은나의 “배놈”생활에 있어서 영원히 기념할만한 저녁이기도 했다. 그날이 바로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39주년 기념일이었는데 이전에는 그저 예사롭게 보내던 자치주생일이 그날따라웬일인지 자꾸만 뜻깊어 보이고 떠나왔던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워났다. 그래서 끝내 참지 못하고 내가 그것을정유식 선장한테 여쭈자 그는 대뜸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반색했다. “우리 한민족동포들이 중국에서까지 민족자치를 실시하며 산다니 참 장하다. 자네들이 그것을 잊지 않고 해외에서까지기념하려 하니 선장인 내가 어찌 보고만 있겠어?!” 그러고는 통신장이덕수씨한테 즉시 선원들을 모여놓고 술파티를 열라고 했다. 그날밤, 우리는 선장, 기관장, 통신장등 사람들이 부어주는 위스키를 돌아가며 받아마시고는 밤새껏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 참, 어둠이 깔린 수평선우로 흰 물갈기를 날리며 미그러져 가는 우리네 선박 “코리안스타”호, 바로 그 일망무제한 바다와 외적선박에서 자치주생일을 쇤는 우리들, 우리가저가락장단을 두드려 대며 연변노래를 부르자 한국선원들은 연변에도 진짜 좋은 노래들이 많다면서 서로 배워달라는것이였다. 하여 우리가 “고향생각”, “동동타령” 등 노래를 그들한테 배워줄수밖에 없었다. 헌데 한수도 아니고 여러수를 어떻게 배워준담? 결국나는 팩시종이에 오선보를 긋고는 거기에 악보를 적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등학교시절에 음악공부를 좀 했다는 1항사 김형훈씨는 나한테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그저 볼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뿐만아니라 나는 또 내친 김에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선원 한명을 순식간에 속사해내여 나의 그림그리는 장끼도 펴보이어 그들 모두의 인기를 모으기도했다. 다른 한편“코리안스타호”의 선원들이 거의 하나같이 좋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녀자를 억수로 밝히는데는 다른 선박의 선원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그들 역시 “배놈”이란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듯 싶었다. 1991년 5월, “코리안스타”호가 포클랜드해상을 떠날 때 선원들한테는 모두특수작업비(전재비)가1800딸라씩 지급되었는데 이제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항에 입항하면 그 돈주머니를 풀어놓을 판이었다. 아니나다를가 배가 몬테비데오항에 입항하여 수속 절차를 밟자 선원들은 저녁밥을 먹기 바쁘게 샤와를 마치고는 정해둔세뇨리따(아가씨)한테 “입항신고”하러 간다며 앞다투어 외출길에나섰다. 그도 그럴것이야명주를 뿌려놓은듯 황홀한 몬테비데오의 잠들수 없는 밤, 거리마다 네온싸인이 반짝이고 간드러진 음악이잔잔히 흘러나오는 가운데 우리는 도처에서 아가씨들을 끼고 거리를 누비는 각종 피부를 가진 “배놈”들을 볼 수 있었다. 유흥업으로놓고 말하면 우루과이도 동남아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이름난 곳이라 할수 있는 바 여자라면 오금을 못쓰는 한국선원들이 그 황홀한 세계를 지척에 두고배에서 외롭게 보낼리 만무했다. 사타구니 사이에 있는 그것이 노하여 저울대처럼 되는 판에. 배가 부두에정박해있는 사이, 그런 날은 계속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저녁, 본선의 한국선원 노주태씨가 나체쇼를 벌리는 위스키바에서 로시오라는 본지아가씨(몬테비데오에선 섹시하기로 이름난 창녀임)와 흥이 도도하게 술을 마시고있는데갑자기 웬 거친 손이 나타나 아가씨를 잡아일으켰다. 엉겁결에 쳐다보니 대만선원이었다. 이에 노주태씨 역시 술을 얼근히 잘된지라 네가 뭔데 하며 걸고 들었다. 이렇게 서로밀고 닥치고 하는 통에 그 안에 있던 한국선원과 대만선원들이 다 모여들면서 삽시에 두 파벌로 갈라졌다. 당장무리싸움이 벌어질 그 일촉일발의 시각에 마침 본선의 연변선원인 이용석씨가 조해사업에 나섰다. 알고 본즉그 로시오란 아가씨를 잡아일으킨 대만선원은 포클랜드해상에서 근무하는 채낚이(오징어낚시선)선의 선장이었는데 입항하든 안하든 그 아가씨한테 매달 미화 1000달러씩주기로 하고는 일잔 입항해서 찾아만 오면 그 아가씨가 모든 것을 제쳐놓고 그한테 “봉사”해야 한다는 “계약”까지 맺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용석씨는 본선에도 중국선원 몇명 잘 되는데 중국사람들끼리 요만한 오해 때문에 싸우기까지는 할 수는없지 않느냐고 해석해서야 대만선원들도 그 말에 동감을 표시하며 물러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 아가씨를대만선장한테 양도하는 걸로 일단은 아퀴를 짓고 참 창녀 한명 때문에 무리싸움을 할번하다니 사내대장부로서의 제일 큰 수치가 아마 그런 것이 아닌가싶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통신장 이덕수씨가 정해둔 파트너를제쳐놓고 다른 아가씨를 끼고 술을 마시다가 하마트면 두 아가씨가 맞붙어 싸우게 할번 한 일, 2기사서춘철씨가 아가씨와 함께 호텔침대에까지 올랐지만 술을 억수로 마신데서 일을 성사하지도 못한 채 잠에 곯아떨어진데서 그 아가씨가 온밤 뜬눈으로 새게한 어처구니 없는 일, 하긴 고되고 짜증난 바다생활일에 곁에 녀자가 있으면 그 스트레스를 몽땅 줄 수있기에 “배놈”들이 여자를 찾게 된다는 건 남자로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선원들의말마따나 좆빠지게 번돈을 며칠 사이에 몽땅 창녀들한테 처넣는다는건 한국선원 외에는 거의 없을 정도라니 한심하기도 했다. 빠지면 웬간한 기업도 삼킨다는 그 구멍이 어떤 구멍인데… 또한 남미의아가씨건 동남아나 심지어 아프리카아가씨건 모두가 한국선원이라면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데 그것은 결코 한국선원들이 멎져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돈을 잘 쓰니 창녀들의 사냥물로 되었을뿐이다. 또 다른 한편한국선원들도 우리 연변의 조선족들과 마찬가지로 똘똘 뭉쳐 합심이 되는데는 확실히 타국선원들보다 못했다. 싸움이벌어져도 그랬다. 무리싸움만 붙으면 한국사람들중에는 눈치를 보며 살살 피해 도망가는 이가 많았다. 그 실례로 작업선과 화물선이 많이 정박하는 몬테비데오에서는 한국선원과 대만선원들 사이에 충돌이 자주 생겼는데그럴 적마다 한국선원들의 수는 싸움이 지속됨에 따라 줄어드는 반면 대만선원들의 수는 괴상한 휘파람소리만 나면 항구구역의 골목골목에서 뛰쳐나와 점점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선원들도 자기들이 남과 1대 1로 붙으면 그 누구도 남한테 지지 않지만 일단 10대 10일 경우면 틀림없이 패한다고 승인했다. 1대 1과 10대 10의 정반대되는결과, 얼마나 묘한 비유이며 얼마나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가! “카나리아립퍼”호는 노가다배? 내가 선원으로근무하면서 제일 마지막 반년가량 탄 배는 역시 선원해운의 “카나리라립퍼(KANALIA LiPo)”호였다. 1992년 10월 23일, “코리안스타”호가네델란드 로톨담항구에서 소련인들한테 팔리자 우리는 2년이란 선박근무계약기한이 차지 않았기에 비행기로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약 40일간 늘어지게 놀다가 그해 12월 12일에 소련선박에 편승, 대서양을 항행하다가 아프리카해상에서 본회사의 “카나리아립퍼”호에 전선(转船)근무하게 됐다. 그 배의 주요한스켓줄은 라스팔마스와 아프리카를 오고 가는 것이었는데 그 배에 승선하고보니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 만든지 30년도 넘는다는 배는 외곽부터 원체 고물같아서 “똥배”란 말을 들을만 한데다 선원들 역시 꾀죄죄한 모양이 마치모두들 마약중독자(실제로 대마초나 마리화나 같은 마약복용자선원도 몇명 있었음)같은 상을 하고 있었다. 하긴 듣는바에 의하면 회사에서도 아프리카부근에서 근무하는 선박에는 선장으로부터 선원에 이르기까지 정선하지 않고 되는대로 보낸다고 말했다. 사람이란악렬한 환경에서 살다 좋은 환경으로 전환되면 몰라도 좋은 환결 즉 “코리안스타”호에서 근무하다가 “카나리아립퍼”호로 바꾸니 기분이 좋을리 만무했다. 한편 선원들모두가 게을렀다. 배가 일단 아프리카 나라들에 입항하여 기름을 받을 때면 편안하기를 기름양과 질을 체크하는당직외 모두가 처박혀 자기가 일쑤였는데 밤낮으로 연속 잠이 올리가 없었다. 그러니 선원들 모두가 먹고마실 궁리만 하였다. 얼마나 좋은 배인가! 하지만 당시의주방장인 나한테는 그것이 도리어 고역으로 되였다. 선원들은 먹고마시며 놀다가 자고 한참 실컷 잔 뒤또 먹고 마시고 해서 좋았겠으나 나만은 그 음식들을 만들어 차려주고 설거지하느라고 죽을 지경이었다. 그외아프리카란 동네는 선박으로 올라오는 부식품들이 깨끗이 포장되지 못한 건 물론 종자탓인지 모두 개량종이 아니고 토종이어서 예하면 마늘은 쥐잇빨 같았고배추 역시 시래기같은데다 흙모래가 많아 그것을 다듬노라면 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그 무슨파티까지 많으니 어찌 짜증나지 않겠는가. 특히 배가 나이지리아의 와리항이나 위스키포항 및 베네트항 같은곳에 입항할 때면 본선 선원들과 깜둥이 아가씨까지 합쳐 보통 30~40명씩 한곳에 어울려 처먹군 했는데매일밤 개나 칠면조같은 것을 잡아놓고 술파티를 벌이기에 하루 네끼씩 음식을 만들리가 일쑤였으며 나는 늘 잠이 모자라군 했다. 그 지긋지긋한 먹고 마시는 배기풍, 선원들의 부식비를 아껴 올라온부식량에 따라 계획적으로 살림살이를 해야만 하는 내가 그것을 좀 제지시키려 해도 선장부터 그토록 먹고 마시기에 악돌이고서야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선장이야기가나왔으니 말이지 그와 함께 근무하는 사이에 그야말로 울지도 웃지도 못할 에피소트들이 많기도 했다. 선박이 일단아프리카로 들어가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중국에서는 흔해빠진 두부라 할 수 있었다. 하여 배가한국선식점이 많은 라스팔마스에 입항해야 두부란 것을 맛볼 수 있었다. 한번은 라스팔마스에서 본선이 두부딱 한박스(두부란 오래동안 보관할 수 없기에)만 올렸는데선장이 지시하기를 그것을 매일 아침 한모씩 썰어 된장국에 넣으라는 것이었다. 참, 나도 필경은 인간인지라 두부가 긴장할수록 왜 고향서 모두부를 덮혀놓고 배갈을 마시던 생각이 그토록 나던지? 그래서 하루는 야밤중에 몰래 모두부 두모를 덮혀놓고는 중국선원인 양일선씨를 침실로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금방 위스키병을 터쳤는데 문득 선장이 문을 노크(선장은밤중에 속이 촐촐할적마다 주방장인 나를 찾았음)하는 것이었다. 선장이니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어 들어오게 했더니 두부를 본 선장은 대뜸 눈알부터 굴리였다. “너, 이 자식들 하긴 잘한다. 선장도 먹지 못하는 두부를 너희들이 처먹어?! 왜 시말서라도 쓰고 싶어그래, 이 놈팽이들!” 하지만 말을그렇게 해도 선장 역시 군침을 꼴깍 넘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찮아도 진작 선장님을모실 타산이었습니다”, “선장님, 술 한잔 드십시요”하고알랑방구를 먹였더니 그것을 마다할 선장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공짜라면 양재물이라도 마실 양반이 그 귀한두부안주를 물리칠손가. 선장은 연해연방 “그 두부 참 맛좋네. 자, 캪틴(선장)앞이라 주저말고어서 드이소”라고 하며 우리가 아까와서 조금씩 뜯어먹는 두부를 숟가락으로 뭉텅뭉텅 떠서는 자기 입에 처넣는 것이었다. 두부 두모는 삽시에 거덜이 났다. 그러자 선장은 또 두부를 덮혀오라고호령했다. “주방장, 아까와할 것 하나도 없어요. 내 이 캪틴이 두부 좀 먹는 걸로 어느간이 큰 놈이 감히 말해.” 선장을 놓고말할라치면 종래로 호주머니에 담배를 넣고 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누가 담배를 피우면 “그 담배한가치 주이소”라고 했다가 상대가 담배곽을 넘기면 “뭐, 한가치면 되는데” 하면서도 능청스럽게 그것을그채로 호주머니에 넣고가기가 일쑤였다. 아마 1993년 초쯤으로 기억된다. 그때 본선은 아프리카에서 오래동안 떠돌아다니다가금방 라스팔마스로 선수를 돌렸는데 당시 선내상황은 부식은 물론 술과 담배마저 거덜이 날 지경이었고 밥은 나이제리아에서 올린 밭벼쌀(알량미)로 겨우 지어먹으며 항행했다.헌데 방정맞게도 항행도중 기관실의 발전기가 고장났는데 좀처럼 수리되지 않았다. 선내는 밤마다까막나라였고 선원들은 선수와 선미에 우등불을 지펴 타선의 항행에 신호를 보내었으며 밥조차 프로팬가스로 겨우 지어먹는 형편이었다. 그러다보니 담배는 진작 꽁초까지 주어서 피우는 신세였다. 헌데 파도세찬 포클랜드바다같으면 진작 배가 파도에 뒤집혀질 상황에 처했음에도 공짜를 좋아하는 선장의 악습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하루는 내가 선원들을 골려줄 심산으로 빈 “말보로”표 담배곽을 반팔샤쯔의 웃호주머니에 넣고 갑판으로나갔더니 선원들이 욱하고 몰려들어 한가치씩만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장이 선손을 써서 갑채로 그것을채갔다. 헌데 맹랑하기로 그것은 빈갑이었다. 그통에 나는선장한테서 볼기짝 한매를 얼얼해나게 얻어맞았다.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담배가 있는 곽이든 빈곽이든 넣고 다니는건 나의 자유이고 또한 내가 뭐 선장한테 그걸 주자고나 했던가. 하지만 육지와 동떨어진 해상에서 그것도 선장이면 왕이고 법보다 주먹과 계급이 중요한 곳에 선장이 돼지라면 돼지이고선장이 죽으라면 죽는 흉내를 내야 하며 선장의 한마디면 내일이라도 보따리를 싸들고 강제귀국을 당하는 판에 억울한대로 참아야 했다. 억울한대로참고 열심히 돈벌이하다가 만기되어 귀국한 다음 내노라 하며 활개치면서 살고 싶었으니 말이다. 특히 나한테는하마터면 강제귀국을 당할 침통한 교훈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그때로부터 약 한달 전의 일이었다. 하루는 아프리카 해상에서 떠돌던 본선이 남미쪽에서 온 “사랑”호와접선했다. 그 때 나는 그 배에 친구인 최용식씨가 있기에 그한테로 건너가서 함께 술잔을 나누게 됐다. 그 때 나는 “카나리아핍퍼”호가 어떤 배란것을 알려주고 나서 주방장인 나의 고충을 토로하면서 어떤 배든 주방장끼리서로 바꾸어 갖고 근무환경을 좀 개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동석했던 나의 주방조리원 녀석이 글쎄 그 후에 모든것을 고해바칠줄이야. 그런데서 나는 본선 선원들의 흉을 봤다는 이유로 기관장과 조기장을 비롯한한국선원들한테서 실컷 얻어맞고도 주방의 국자로 조기장을 때려 얼굴에 흉터를 만들어놓은데서 선장의 제의하에 강제귀국처분을 받게 됐다. 후에 알고 보니 나의 주방조리원 녀석이 그 주방장자리와 주방장이 매달 더 받는 수당금 100달러가 탐나서 중국선원끼리 금이 가는 그 따위 짓을 했던 것이다. 괘씸한녀석, 하지만 그따위 강제귀국결정에 순순히 두손을 들 내가 아니었다. 나는 일단은사건의 전부를 써서 보관한 뒤 그날 밤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물론 그 때까지도 주방창고의 열쇠가나의 손에 있었던만큼 남몰래 사전에 숱한 라면과 빵과 과일 및 음료수따위를 침대밑에 감춰둔 뒤 그랬으니 단식은 무슨 말라빠진 단식, 그러자 과연 바빠난 것은 선장이었다. 선박이 항구에 입항하여 나를강제하선 시키려면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할텐데 내가 단식에 들어 갔으니 인명사고라도 나면 도리어 강제소환될건 선장(회사준칙에 의하면 일단 선박에서 인명사고가 나면 사고원인을 밝힌 뒤면 선장의 책임범위내의 사고라면 선장의 강제소환은 물론 몇년간의 본회사 선장자격을취소함)이었으니 말이다. 하기에 그 이튿날부터 갓 주방장으로진급한 녀석이 선장의 령을 받고 일은 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밥만은 먹어달라고 끼니마다 나의 침실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허나 거기에 넘어갈 나인가. 너 이 놈들 나를 알기를 뭘로 아는건고? 나는 방문을 기어코 열어주지를 아니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통신장, 그 다음에는 1항사…그러다가끝내 선장이 내 방문앞에 다가섰던 것이다. “여보게 김군, 이런 일에 생명까지 내걸 필요는 없잖아. 우리도 교포들이 강제귀국을당하면 어떻게 된다는걸. 다 잘 알고 있어요. 김군이나 나이 캡틴이나 모두 문화인이니까 이번 일을 없었던 걸로 치고 다시 손잡고 잘해 봅시다.” 선장까지 이렇게나오니 더는 버틸 필요가 없었다. 후에 알고 보니 회사의 압력도 있었거니와 갓 진급한 주방장 녀석의밥하는 솜씨가 영 말이 아니어서 선원들이 늘 제때에 식사하지 못했는가 하면 선밥 혹은 죽밥을 먹어 불평이 많았기에 선장도 부득불 이 중국교포선원한테두손을 든 모양이었다. 이렇게 소위단식이란 허울밑에 밀렸던 잠까지 실컷 자면서도 끝내 “승리”하여 다시 주방장자리를 되찾은 나였건만 그런 방법은 계속 취할 것이 못된다는 걸 나는잘 알고 있었다. 선장 역시자존심이 있는 인간이니 악이 나면 나중엔 무슨 짓인들 다 할 수 있겠으니 말이다. ……화제는 다시 돌아와 그렇게 해상에서 하루하루를 표류하던 중의 어느 날 본선은 근처로 항행하는 러시아 선박(그 때는 소련이 해체된 뒤)에 구조신호를 보낸 뒤 그들과 접선해서는약간의 부식을 보충받게 되었다. 접선작업이 끝나 부식을 넘겨받은 뒤 미구하여 모두들 한쉼 쉬려는데 불현듯러시아선박의 선교에는 선글라스를 낀 한 어여쁜 금발머리아가씨가 나타났다. 치마바람을 날리며 배전에 기대선그 모습, 툭 튀어 나올듯한 가슴과 둥근 히프, 첫눈에 벌써매우 성감이 짙은 여인임이 확연했다. 아, 사막의 오아시스런가. 얼마나 보고 싶었던 아가씨었더냐, 더군다나 아프리카에서는 보기 힘든젊고 아름다운 백인아가씨, 그러자 그 미끼를 놓칠 선장 강아무깨가 아니었다. 선장이 미화 100달러짜리 한장을 흔들어 보이자 그녀도 대뜸 반응을보이며 건너 오라고 손짓하는 것이었다. 헌데 전기가 없는 본선인지라 크레인(기중기)을 돌릴수 없었고 러시아 선박에서도 곯려 주느라고 그러는지그 때만은 도와주지 않았다. 선장은 자그마한 체구에 빼빼 마른 사내였는데 여러 선원들이 극구 말리는데도불구하고 배와 배틀 연결하는 바줄에 매달렸다. 하건만 에익, 세상에어디에 이런 망신이다 있담, 글쎄 술과 여자를 되게 밝히는 선장한테 팔다리힘만은 없었던지 그는 인차첨범하고 바다물속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본선의 선원들은 구명대를 던져준다 줄사다리를 드리워 준다하며 선내가 들썽하게 법석댔지만 러시아선원들은 웃음보를 터뜨리며 손벽을 쳐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느 곁에 카메라까지 들고 나온 이까지 다 있었다. 선박에서의선장은 일개 사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선박의 형상이고 존엄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장은 선박의 아버지라는설도 있다. 헌데 선박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선장이 그러할진대 그 배의 분위기를 구태어 더 설명해 무엇하랴. 그리고 선원들 거개가 여자를 좋아하듯이 말이다. 선장도 필경육욕을 가진 사내인만큼 그 예외일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선박들에서는 선장이 직접 여자들 찾아헤매는실례가 극히 적었다. 예하면 1991년 6월말 내가 승선했던 “코리안스타”호가 태국의 방콕에 입항했을 때 아가씨 60여명이배에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선장은 3층에 있는 자기의 침실에서 근본 내려오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1항사가 이쁜 여자 한명을 물색해서 보내니 선장 역시 모르는척하며그날밤을 즐겼던 것이다. 하다면 선장이란 그만한 무게가 있어야 할텐데 “카나리아립퍼”호의 선장한테서는도무지 그런 무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들이 배에 오르면 자기가 나서서 이쁜 여자를 골라 챙긴다거나아가씨와 관계할 때 쓴 콤돔을 아무곳에나 나뒹굴게 한다거나 지어는 빵과 커피를 가져다 달라는 아가씨의 심부름을 자기가 직접 한다거나 하는 행위를보면 저 사람 머리가 돌아도 크게 돌고 있다는 느낌부터 들군 했다. 특히 본선의 발전기가 고장나 기관장과그 부하들이 플래시(전지불)를 켜들고 밤낮으로 땀을 흘리며일하는 그 비상시기에 그랬으니 선장으로는 크게 실망가는 인간임에 분명했다. 글쎄 지나치게 나쁜 사람이라고는할 수 없었으나 여하튼 선장감은 아니었다. “배놈”생활의 그제날을 추억하며 배를 여러번타보노라면 참 육지에서는 도무지 믿기 힘든 희한한 일도 많이 겪게 되고 따라서 배울 것도 많으며 또한 회사별로,선박별로 제각각 자기 선박으로서의 특점이 따로 있었다. “태풍호”을 타고 보면 일이 힘든반면에 돈벌이가 좋았고 “코리안스타”호를 타고 보면 돈벌이는 그닥지 않지만 일이 신사스럽고 세계 각지를 메주밟듯 주름잡기에 안계를 넓힐 수 있었으며“카나리아립퍼”호는 돈벌이나 구경할거나 다 그닥잖지만 먹고마시고 오입질하기는 천하제일이라 할만치 좋은 배였다. 작업선 즉우리가 말하는 어선일 경우도 마찬가지라 한다. 어선이란 일단 출항만 하면 보통 반년 이상씩 부두로 입항하지않는 것이 특징이고 생활 또한 고되기가 말이 아니란다. 어선을 타는 “배놈”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손바닥에 썩살이 배겨 곰의 발처럼 두꺼워 주먹마저 쥘수 없게 된 것은 노상 그물을 당기는 작업만 하는데서 그렇게 된 것이고 그 작업의 힘든 정도를말한다면 그물을 당기느라 기운을 쓸적마다 뒤가 풀리어 방구가 절주있게 뿡뿡 하고 나온다 했다. 또한마구로배(참치선)에 승선한 선원들은 맞아대기를 하루 세끼밥먹듯 하는데 그것은 단지 선원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작업시간에 조는 선원들로 하여금 전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서란다. 그도그럴 것이 어떤 경우엔 2~3일씩 눈한번 붙히지 못하고 연속작업을들이대니 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외 침실안에 다락을 매고 한 침실에 10여명씩 처넣는 거주환경과 남새맛을 보려 해도 어쩌다 물고기를 받으러 오는 냉동운반선들이 날라줘야 가능한 식사조건 및 세상과 동떨어져사는외로운 생활,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어선을 타려 하는지? 알고보니어선을 타는 사람들의 속궁리 역시 따로 있었다. 우선 먼바다에 나가 오래있으면 여자가 없기에 돈쓸 곳이없어 돈이 모아지고(기실 일이 너무 고되기에 여자생각이 날리가 없고 그들의 제일 큰 소원은 잠이라도한번 싫컷 자보는 것임), 다음으로 한국선원들을 놓고 보면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경우엔 기본급여외에도많은 조합금(상여금)이란것이 붙는데 그 액수가 흔히 급여를초과하거나 그것의 몇배 될 때가 많기에 1~2년만 배를 타서 돈을 모으면 수수한 아파트 한채는 장만할수 있다 하니까 말이다. 헌데 중국선원들한테는 기본급여만 있고 조합금이 일절 없다고 하니 어쩐지 그것이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 같았다. 그 것마저 없으니 중국선원들은 늘 물고기가 적게 잡히기를 바랐으며혹간 많이 잡히면 몰래 도로 그것을 바다에 처넣는다고 했다. 왜 그러질 않겠는가. 고기가 많이잡혀 보았자 한국선원들한테만이 좋을 뿐이지 그것을 정선하고 포장하고 냉동하면서 이득없이 고생만 죽게 하니 말이다.그러니 중국선원들이 몸을 아끼고 말썽을 부린다는 책망만을 하지 말고 그네들한테도 일정한 조합금제도를 실시하는것이 현명하고 바람직한처사라고 보아진다. 그것은 돈을 벌려는 중국선원들의 이익에는 물론 물고기를 많이 잡아 작업효율을 올리려는회사리익과도 관계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참, 돈 때문에 인간등급을매기는 제도,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독종이 인간이고 인간사회를 속세라고 하는 걸가? 총적으로 보아유람선을 타든 화물선이나 어선을 타든간에 그 승선한 선원의 흥취와 목적이 따로 있는 것이다. 마치 육지에서의탄광일이 위험하고 힘들어서 돈버는 재미에 일하는 탄부도 그렇고 나처럼 풋돈벌이도 되지 않는 글쟁이는 그 명예와 애착 때문에 머리를 쓰고 글을 만드는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육지의그 어떤 작업보다 “배놈”의 직업은 불쌍한 것이다. 하긴 옛날 한국이 못살 때는 “배놈”들도 그야말로멋진 마도로스답게 “배님”처럼 떠받들렸고 시집오려는 처녀들이 줄을 쳤다고 했으나 지금은 영 딴 세상으로 되었다.그 “배님”이 언제부터 “배놈”으로 됐는지는 알바 없으나 목하 한국에서는 선원이라 하면 “배놈, 배놈”하며시집오자는 여자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하여 한국선원들한테는 장가 못간 남자들이 수두룩했는데 어떤 이들은아예 장가가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긴 장가들어 봤자 여자는 인차 도망갈 것이고 설사 도망가지않더라도 시름을 놓지 못하는 것이었다. 또한 “배놈”한테 시집오려는 여자가 있더라도 그 여자들의 자질과차원은 어느 정도이겠는가. 내가 승선했던 선박들에도 장가 못간 선원들이 수두룩했는데 그들 거개가 30대를 벗어난 상황이었다. 그들은 귀국할 때마다 임시여자를 데리고 몇달씩 동거하다가는 돈잎이떨어지면 또 다시 배타러 나오는데 그렇다고 배타기를 포기하고 육지에 발을 붙이려 해도 장기간의 “배놈”생활에 육지의 실정을 알지 못하기에 도무지적응할수 없었던 것이다. 개인사업을 벌려도 용두사미처럼 실패하기가 일쑤이고 많은 회사들에서도 “배놈”은쌍놈이라는 눈치를 보이며 잘 받아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선박을 비롯한 많은 선박들마다 다시는배타지 않겠다고 맹세를 30번도 더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배를 30년도 더 탔다는 해석으로 되는것이 아니겠는가. 여하튼 억울한 일이다. 아무리 “배놈”이라지만 마누라도 없이 육지를 떠나 한평생 바다생활만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배놈”은 불쌍하다. 우리 모두가밥먹을 때 농민형제들을 잊지 말듯이 물고기를 맛볼 때마다 일망무제한 바다에서 신고하는 “배놈”형제들을 다문 한번이라도 머리속에 떠올렸으면 하는마음과 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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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견문 시리즈 (3) 2년 730여일, 선원생활의 그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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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4) 태양계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 태양계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자고로 태양계의 기원에 관한 문제를 두고 사람들은 많은 가설을제기했었다. 그 중 영향력이 비교적 큰 것이 성운설(星云说)과 재변설(灾变说) 등이다. 성운설은 전반 태양계의 물질은 모두 동일한 원시성운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성운의 중심부분이 태양으로 형성됐고성운의 외곽부분이 행성으로 형성됐다고 인정하고 있다. 다음 재변설은 태양이 먼저 형성되고 후에 항성하나가 태양의 신변을 스쳐지나면서 태양의 일부분을 뜯어 냈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것이 곧 태양이받은 조력의 작용으로 표면으로부터 뿜어 나온 강한 기류가 생겼는데 그 기류가 응고된 후 행성으로 형성됐다는것이다. 목전 태양계의 탄생에 관해 다른 부획설(浮获说)도 있다. 태양이어느 한 시기에 기체먼지로 쌓인 성운을 지날 때 성운중의 물질로 태양을 태우면서 도는 성운판을 만들었으며 이 것이 점차 각개 항성과 기타의 위성들을만들었다고도 한다. 태양의 빛과 열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류를 놓고 말하면 찬란한 태양이 의심할 바 없이 전반 우주에서가장 중요한 천체에 속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태양의 질량은 약1989×1030킬로그람로서 지구의 33만여배에 달한다. 태양의 물질은 수소(71% 점함)와 헬리움(26% 점함) 등경원소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경원소를 업신 여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극도로 높은 높은 태양중심의 온도와 압력의 조건에서 격열한 핵취변반응(核聚变反应)을 진행하면서 대량의 빛과 열을 복사해 낸다. 태양은 이러한 빛과열을 산생하기 위해 초당 약 400만톤의 물질을 소모하지만 이는 전반 태양질량으로 놓고 말하면 아주작고도 미약한것이다. 빛과 열을 발산하는 외 태양은 또 평균 초당350킬로메터에 달하는 속도로 전기를 담고 있는 미립류(微粒流)를 내뿜는데 이를 태양풍이라고 한다. 태양에 자라나는 “깃털”같은 것은? 태양의 직경은 달에 비해 약 400배 가량 크며 태양과 우리의 거리 또한 우리와 달과의 거리보다 400배가멀다. 이는 기묘한 교합으로 되며 사람들로 하여금 지구에서 보는 태양과 달의 크기가 비슷해 보이게 한다. 이리하여 지구에서 일식현상이 나타날 때면 달은 완전히 태양의 “얼굴”을 가리게 된다. 그리고 평소에 태양의 빛아래 숨겨져 있던 태양의 대기층(일명: 일면)이 이 때면 그 것의 “노산의 진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일면현상은 태양의 검은 원의 주기발생에 따라 변화하기도 한다. 또한제일 마지막 시기의 일면현상은 떨기 떨기의 “깃털”처럼 태양의 양극에 나타난다. 만약 우리가 일식현상을제대로 볼 수 있다면 태양에서 자라나는 “깃털”같은 것을 볼수가 있을것이다. 2006년 미국의 연구일군들은 계산기모형 하나를 만들어놓고 전례없는정확도로 일주일간 태양에서 나타나는 일면의 활동정황을 예측, 그뒤 어느 한차례의 일식중 실제로 관측했던결과가 계산기모형으로 예측했던 결과와 매우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이 성과는 태양풍을 예측하는것과태양 그 자체를 가일층 인식함에 있어서 모두 크나큰 도움이 될것으로 분석되고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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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4) 버킹엄궁전
- 버킹엄궁전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영국, 지점: 런던 템즈강변 함의: 영국왕실의 최고상징임 18세기 초, 영국의 버킹엄공작은 템즈강변에 한채의 관저를 지었는데 후에 조지 3세가 버킹엄 공작한테서 이 관저를 사서 안해한테 선물, 그 때로부터 이 관저는 “여왕궁”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1825년, 조지 4세가 이 왕궁을 개작하였는데 그 때로부터 버킹엄궁전은 황실가족이 사는 관저로 되었다. 그리고 제일 첫 사람으로 이 궁전에 들어간 사람은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현재 버킹엄궁전은 의연히 영국왕실 성원들이 거처하는 궁전으로 이는 영국왕실이 최고 상징으로 되고 있다. 주체건축물 버킹엄궁전은 “口”자형으로 된 3층 건물로서 주체궁전은 동쪽방향으로 마주 앉았다. 왕궁의 서쪽 측면은 정면 궁전으로 그 중 가장 큰 “황실무도청”은 1850년에 건설된 것이며 전문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수건한 것으로 무도청 내에는 대형 수정등이 걸려 있다. 그리고 어좌실(御座室)내에는 당년에 국왕이 쓰던 어좌가 보존돼 있으며 사방 둘레에는 15세기 장미전쟁 때의 장면이 그려져있다. 다음 궁내 음악실의 꼭대기는 정원형으로 돼있는데 상아와 황금 장식으로 조성되었다. 버킹엄궁전의 부대건물로는 황실화랑(皇家画廊), 황가마구간과 화원으로 건설돼 있다. 그 중 화랑과 마구간은 이미 대외에 개방돼 있다. 버킹엄궁전의 광장 버킹엄궁전 정문앞의 광장중심에는 천사의 형상으로 조각된 빅토리아 여왕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또한 영국레알위병대가 보초교체를 하던장소로서 매년 4 – 9월, 레알위병대는 매일 오전 11시 30분부터12시 30분 사이에 보초교체의식을 한다. 그 외의 달에는 2일에 한번씩 하는데 매번 교체의식을 할 때면 군악과 구령소리속에서 머리에 멋진 모자를쓰고 몸에는 붉은 상의와 검은 색 바지를 입은 영국레알위병대가 각종 대렬표현을 하게 되는데 황실분위기가 아주 농후하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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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4) 버킹엄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