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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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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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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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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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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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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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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인계” 실패로 죽음을 맞은 여간첩- 정평여
    정평여는 중국 절강성 난계의 사람으로 1918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 정월(郑钺)은 정치이념이 강한 사람으로 일찍 일본의 한 정법대학에서 유학하였다. 일본시절 정월은 손문(孙中山) 선생을 따라 혁명의 길에 들어서면서 동맹회에 가입하하였다. 정평여의 어머니는 정월이 동경유학시 알게된 일본 명문가정의 규수로 일본이름은 키무라와 나코(木村花子)였다. 당시 키무라 나코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시달림을 받고 있는 중국을 동정하였으며 이에 반항하여 혁명에 나선 정월을 적극 도와주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에로 치달아올랐고 결혼에 올인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결혼 후 키무라 나코는 남편을 따라 중국에 정착, 이름을 중국식 이름인 정화군 (郑华君) 으로 고치었다. 그들은 선후로 자녀 2남 3녀를 보았는데 정평여는 둘째딸이었다. 정평여는 어릴적부터 총명하고도 착했으며 또한 일본인 어머니한테서 일본어를 배운데서 놀라운 일본어구사 능력도 갖고 있었다. 중국의 항일전쟁이 전면 폭발 이후 정평여는 단연히 항일구국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상해가 일본에 의해 함락된 후 정평여는 그녀 자신의 우월한 조건(양호한 사회관계 및 탁월한 일본어 구사능력)에 의해 상해에서 국민당 군통의 항일지하정보원으로 되었다. 당시 그녀는 갓 19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뻤고 품위가 높았으며 상해의 유명한 미녀이기도 했다. 당시 상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화보는 “양우(良友)”였는데 1937년 7월, “양우” 130기의 표지에는 정평여의 사진이 실리었다. 그 때 그녀는 특수신분이었던만큼 그냥 “정여사”로 소개되었을뿐 그의 진짜 이름이나 기타 내막은 언급되지 않았다. 1937년 8월 13일, “송호항전(淞沪抗战ㅡ상해보위전)”이 폭발하고 그해 11월 11일 중국군이 상해에서 철거하면서 상해가 함락된다. 2007년에 개봉된 영화 “색계(色·戒)”는 많은 역사적 화폭으로 당시 상해의 모습을 반영, 영화의 여주인공 왕가지의 원형이 바로 정평여었고 남주인공 역선생의 원형은 곧바로 왕정위의 특공본부 주임었던 정묵촌었다. 당시 정평여는 매우 우수한 정보원이었다. 그녀는 모친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일본군 고위급 관원들 주위를 배회, 드디어 고노에 후미마로(このえ ふみまろㅡ近卫文磨)가 상해에 파견한 회담대표 하야미즈(早水リサㅡ早水亲重)와 접근하는데 성공, 그와의 관계를 이용해 또한 고노에 후미마로의 두 아들 및 화중파견군 부총참모장 이마이 다케오(いまいぶふ)의 부인과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당시 군통국에서 그녀한테 맡긴 임무는 일본 수상 후미마로의 아들 고노에 후미타카를 납치하는 것이었다. “후미다카를 납치한다고 해서 일본 수상이 중국침략을 포기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그녀는 이런 생각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조직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노에 후미타카는 정평여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의 몸매를 내걸고 얼마든지 후미타카를 제거할 수 있었다. 헌데 얼마 뒤 군통에서는 그 위험한 “유희”를 그만둘 것을 재차 명령, 후미타카는 자신도 모르게 중일정치의 희생품이 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 정평요는 왕정위(汪精卫)가 곧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중요한 정보를 장악, 무전기로 중경에 전달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민정부는 이에 대해 근본 중시하지 않았었다. 후에 왕정위가 진짜로 중경과 이탈하고 일본에 투항해서야 국민정부는 정평여의 활약을 인정하면서 그녀를 적극 기용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군통에서는 한간 정묵촌을 처단할데 대한 임무를 정평여한테 맡겼다. 일제통치시기 왕정위 정권은 당시의 상해 치스펠로(极司菲尔路-지금의 만항도로) 76번지에 특공본부를 설치, 주임은 원 군통국 제3처 처장이었던 정묵촌이었다. 당시 정묵촌과 리사군 등 일당들이 왕정위와 함께 일본에 투항했던 것이다. 군통에서는 항전을 포기하고 일제에 투항한 정묵촌을 처단하기로 결정, 행동계획은 상해에 잠입해있는 진립부(陈立夫)의 결의형제 진보화에게 명령하여 정묵촌이 호색한이란 점에 비추어 “미인계”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정묵촌은 소문 그대로 “색중아귀(色中饿鬼)”였다. 그는 어느 한 공공장소에서 정평여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당시 양장차림의 정평여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소녀와도 같았다. 그녀는 정묵촌한테 달라붙어 수시로 응석을 부리면서 자주 만나는 시간을 가졌으며 정묵촌으로 하여금 그녀한테 푹 빠져들게 하였다. 그러자 군통에서는 시기가 성숙됐다고 판단, 행동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제1차 행동은 정평여가 정묵촌을 집에 초대하는 것으로, 행동대원들이 정평여의 집부근에 대기하고 있다가 정묵촌을 저격하는 것이었다. 헌데 그날 교활한 정묵촌은 차를 몰고 정평여의 집근처까지 왔다가 다시 무슨 낌새를 챘던지 방향을 되돌린데서 그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군통에서는 상해의 책임자를 장서경(张瑞京)으로 바꾸어 제2차 “정묵촌저격계획”을 짰다. 그 계획은 정평여가 쇼핑을 이유로 시베리아피혁상점에서 정묵촌을 만나게 하고는 그 기회에 제거하는 것이었다. 헌데 바로 이 때 장서경이 왕정위 특공본부의 리사군한테 체포되어 “정묵촌저격계획”까지 불어버리었다. 이에 리사군은 비밀보장을 위해 우선 장서경을 보호했고 군통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자 원 계획대로 행동하다가 오히려 정묵촌 특무들한테 걸려들어 계획은 또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 정평여는 신분이 탄로되어 체포되었는데 이는 당시 상해의 최대의 뉴스로 되었다. 1940년 정평여는 왕정위의 특공대원들에 의해 비밀리에 상해 호중산로의 어느 한 공지에서 처형되었는데 그 때 그녀의 나이는 23세였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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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06
  • 오묘한 세계대백과(24)기이한 눈
    평소에 우리가 보는 눈은 모두 흰색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첩첩백설”이라고 하며 눈이라고 하면 당연히 흰색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헌데 기실 눈은 단지 흰색뿐이 아니라 기타의 색갈도 있다. 중국 서장의 자위, 독일의 하이델베르그와 남극 등 지방에는 일찍 붉은색의 눈이 내린적이 있고 중국 내몽골에는 노란색의 눈이 내린 적이 있으며 북빙양의 어느 한 섬에는 록색의 눈도 내린적이 있었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탈리아 토로타이와 스웨덴의 남부에는 검은색의 눈마저 내렸다고 한다. 이로보아 우리의 앞에 펼쳐진 것은 그야말로 오색찬연한 눈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 그 채색눈은 또한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그것은 눈에 일부 색채가 있는 물질이 섞였기 때문이다. 예하면 색채를 가진 조류, 검은 색의 작은 벌레거나 석탄부스레기 등이 섞이면 눈을 곧바로 상응한 색갈로 변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것은 색채가 있는 눈만이 아니라 더욱 기이한것은 “육월비설(六月飞雪)”라는 보기드문 현상도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육월비설”은 대규모의 화산폭발로 조성된 것이다. 즉 화산폭발시에 산생하는 수백만톤에 달하는 화산재가 대기층에 올라가 곳곳에 날리면서 몇달간씩 태양을 가리우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면 낮에는 태양의 빛을 볼 수가 없고 밤에는 별을 볼 수 없으며 그리고 허다한 지방에는 날씨가 추워지면서 여름에도 눈이 내린다. 연구에 따르면 기원 537년 중국에서 발생한 한차례 여름에 내린 눈은 곧바로 기네아동남부에서 발생한 한차례의 화산폭발로 조성된 것이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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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01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4)
    보로부두르유적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인도네시아, 지점: 괄바도중부 함의: 보로문교의 유적은 고대동방의 4대 기적의 하나임 보드보르(婆罗浮屠)는 “천불탑(千佛塔)”으로 그 뜻은 “구릉상의 불교사당”으로 풀이된다. 보로보그성지는 인공으로 쌓아올린 작은 산언덕에 솟아있는데 화산암으로 건축된 흑회색건물이다. 이 건물은 기원 8-9세기 경에 싸란드라(萨兰德拉)국왕이 남겨놓은 역사유적이다. 로드보르불탑은 공사량이 방대하고 웅위롭고 장엄하여 중국의 장성, 애급의 피라미드와 캄보디아의 씨엠립굴과 더불어 “고대동방의 4대 기적”의 하나로 불리우게 되었다. 보드보르불탑 1000여년전 싸란드라 국왕은 석가모니를 숭배하던 나머지 10만명의 노예를 고용하여 10여년의 세월을 거쳐 이 보드보르불탑을 세웠다. 불교에서는 천지를 삼계로 나누는데 밑으로부터 위를 위욕계(为欲界) 그리고 색계(色界)와 무색계(无色界)로 나눈다. 보드보르불탑의 설계가 바로 이런 사상을 체현했는바 토대대표의 욕계, 5층 방형평대 및 부조회랑(浮雕回廊) 대표의 색계와 3층 원형대 대표의 무색계로 나누었다. 살아 숨쉬는듯한 부조각들 보드보르의 부조(浮雕)예술은 극히 걸출하다. 장장 2500미터의 탑기초위에는 도합 2500폭의 부조각이 있는데 하나하나를 이어놓으면 4000미터의 길이가 된다. 그 중 어떤 부조각은 불교역사에 근원이 있고 어떤 것은 신화이야기와 종교의식을 갖고 있으며 어떤 것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습성을 기록하기도 했고 또 어떤 조각들은 꽃과 새 그리고 열대과일의 조형이다. 이런 예술걸작들을 두고 후세사람들은 “돌우의 사시(史词)”라고 일렀다고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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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01
  • 윤리문화시리즈(4) 여성의 정도띠
    [동포투데이] 정조띠를 둘러싸고 벌어진 유럽의 많은 전통적인 이야기 특히 이런 이야기중의 의식 등은 아직도 여전히 생명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유럽에서는 부분적으로 일부 여성들이 정조띠를 착용하고 혼례식에 참가해서는 신혼의 밤에 그 정조띠 키를 신랑한테 주는 것으로 자신의 일종 신조와 헌신정신을 표한다. 2003년초 한 영문대학생이 인터넷을 통해 “자아단속(自我约束)”이란 토론을 벌였는데 한 여대생은 자신은 기꺼히 정조띠를 착용할것이며 미래의 혼례식에서 그 정조띠이 키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한테 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조띠를 착용하고 있는 한 싱글여성은 이렇게 쓰기도 했다. “현재 나는 계속하여 정조띠를 착용하고 있다. 그것은 나한테 한 안정된 남자가 나타나기까지이다. 결혼전 이 남자는 내가 계속 정조띠를 착용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여야 한다. 결혼전에 그가 정조띠의 키를 요구해서는 절대 안된다. 신혼의 밤 그가 나를 정조띠에서 해방시켜줄 것을 바랄뿐이다. 그때면 나는 기꺼히 정조띠를 착용하고 그를 기다릴 것이다. 이는 나의 달콤한 꿈이다.” 현시대에 유행되고 있는 정조띠 현시대의 정조띠는 그제날 유럽에서 호언스타스의 아내 아브로디나가 착용하던 그 불수강 정조띠의 양식이 주류로 유행되고 있다. 이 정조띠는 허리위치에 둘러가며 보호띠가 있고 불수강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내부와 변두리는 인체에 해가 없는 연한고무로 되어있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허리띠보호부분은 각 회사의 제품마다 독특하지만 보통 납작하고 원형으로 되어있으며 될수록 의복밖에 노출되지 않도록 만들어지고 있다. 키의 내구결구는 매우 정밀한바 특수제작된 키에 의해서만 열리도록 되어있다. 여성의 정면에는 구멍이 있어 여성들은 정조띠를 착용한 상황에서도 배설하고 샤와할 수 있다고 한다. 한편 오늘까지도 정조띠의 속박을 통해 인간은 물질 및 정신적인 압박을 감수하게 되는바 이는 정조띠 착용자들한테 더욱 많은 성적인 상상을 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일종 특수한 흥분상태에 빠져있게도 한다. 정조띠는 권력의 성감화로 인간의 성관계중 항상 제한적인 학대와 폭력의 환상이 겯들게 된다. 그리고 성학대의 활동중 권력의 관계도 개방되는바 주인이 노예로 변할 수도 있고 노예가 주인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 법이다. 이는 현실생활에서 권력에 대해 맛보지 못하고 권력에 대해 과도하게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특히 흡인력이 강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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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01
  • 재조명해보는 임표의 “9.13사변”
    중공의 9차 당대회 이후 중국 국내의 형세는 안정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은 결속지을 때가 되었다”고 표했고 9차대회 이후 중앙의 문화혁명소조를 취소하기로 결정됐다. 하지만 당시 임표가 그루빠를 형성해갖고 공산당과 나라의 더욱 큰 권리를 갖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모택동도 생각밖이었다. 당시 두가지 사건이 임표 그루빠의 정치적 야심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하나는 임표가 이른바 “임부주석의 1호 명령”을 발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주석 자리설치에 관한 것이었다. 1969년 10월 10일, 소주에 있던 임표는 북경에 있는 군위판사조 조장이며 총참모장인 황영생에게 즉시 “전쟁준비를 강화하여 적의 돌연적인 기습을 방지할데 관한 긴급지시”를 각 군구에 발부할 것과 “정예한 작전지휘진을 조직하여 즉시 전시지휘위치에 들어갈 것”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군위판사조가 “임부주석의 명령(1호 명령)”의 명의로 그 날 저녁 각 군구에 전화로 전달되었고 각 군구는 즉시 긴급임전상태에 돌입하였다. 임표는 이미 하달한 명령을 “전화기록”의 형식으로 모택동한테 보고하였다. 모택동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전의 보고도 없이 임표가 제멋대로 이런 군사명령을 내려 각 대군구가 하루밤 사이에 임전상태에 들어가게 한 것은 극히 엄중하고도 비상적인 사건이며 매우 위험한 신호이기도 했다. 이에 모택동은 임표에 대해 다시 보게 되었고 강렬한 반응을 나타내면서 경각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당시 모택동은 임표의 “1호 명령”은 일종 목적성이 있는 시탐성 행동으로 모택동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며 다가오는 한차례의 폭풍우를 예견했던 것이다. 1970년 3월 8일, 모택동은 당중앙에 제4기 전국인대를 개최할 것과 헌법수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면서 국가주석을 두지 않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모택동이 처음으로 국가주석 자리의 설치여하에 대해 내놓은 의견이었으며 이 의견이 전달된 후 모두 일치하게 동의하였다. 그러자 소주에 있던 임표는 엽군한테 “임부주석은 국가주석을 두는데 찬성한다”는 의견을 황영승과 오법헌한테 전달하게 하였다. 그 뒤 국가주석 자리의 설치여하를 놓고 임표는 늘 반상적인 태도를 보이었으며 완고하게 모택동과는 반대의견을 내놓군 하였다. 이는 뚜렷하게 당내 부동한 의견의 정상적인 쟁론범위를 벗어났는바 거기에는 필연코 남한테 공개하지 못할 목적이 있었다. 특히 엽군(임표의 부인)은 도처에서 임표의 진정한 면모를 보이며 여론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공개적으로 “만약 국가주석을 두지 않는다면 임표는 어디에 부임시키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가주석자리의 설치여하에 관한 쟁론은 9기 2중 전회에서도 계속 되었다. 8월 23일, 9기 2중 전회가 개막되었다. 이날 회의개시를 앞두고 임표는 갑자기 모택동과 기타 상무위원들한테 발언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원래 개막식에서는 모택동이나 임표 모두 발언하지 않기로 되어있었다. 임표의 제안은 돌연습격이나 다름이 없었다. 임표는 서면으로 준비한 자료를 갖고 한시간도 더 넘게 발언하였는데 주요하게 헌법수개의 문제상에서 모택동의 영도지위에 대하여 논하였다. 동시에 사전에 있은 임표와 엽군의 포치에 따라 진백달과 오법헌이 국가주석 자리를 설치할데 관한 헌법수개조문을 만들어가지고 회의에서 크게 떠들어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모택동이 이미 예견하고 있던 것이었다. 회의에서 모택동은 임표일당의 반상적인 현상에 대해 즉시 제지시키면서 “국가주석 자리설치 문제에 대해서는 더는 논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누가 국가주석이 되고 싶으면 그더로 되라고 하시오. 어쨌든 나는 국가주석자리가 탐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모택동은 임표에게도 “권고하건대 당신도 국가주석에 오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일침을 놓았다. 당시 모택동은 임표에게 직격탄을 날리지 않고 진백달을 비판하는 운동을 벌이는 것으로 임표가 반성하게 하도록 하기로 하였다. 이는 자신이 직접 선정한 후계자였던만큼 임표에 대해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보호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1971년 8월 15일, 모택동은 북경을 떠나 남하하였다. 모택동은 중남, 화동 등 성시를 순회하면서 각지의 책임자들과 다각도로 담화하였다. “이번에 노산회의에서 그들은 지하활동을 하면서 돌연습격을 들이대고 계획 있고 조직이 있으며 강령까지 만들어놓고 행동하고 있다. 임부주석을 보호하긴 해야겠지만 그 역시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그래도 임표가 반성하기를 기다렸다. 9월 5일과 6일, 북대하에 있던 임표와 엽군은 모택동의 남방순회담화의 내용을 탐지해 듣고는 드디어 군사쿠테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7일, 임표의 아들 임립과는 “연합함대”에 “1급전시령” 지령을 내렸고 8일 임표는 친필로 “임립과 동지는 즉시 주우치 동지가 전달하는 명령대로 실행하라”는 명령서에 싸인하였다. 그 뒤 하지만 그 음모가 탄로되자 임표는 남하하여 광주에 중앙을 따로 세우고 분열을 꾀했으나 이 역시 실패하자 황망히 비행기에 앉아 외국으로 도주하다가 몽고의 언더르한에 추락하여 분신쇄골이 되었다. 임표가 외국도주 도중 추락해 죽자 모택동은 그저 한마디를 했다고 한다. “하늘은 비를 쏟으려 하고 여자는 출가하려 하니 어쩔 수 없구려.” (신화사 자료 발췌)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9-28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6)
    ■ 김철균 2 지금 60여세가 되는 중장년 분들은 거의 모두가 알다싶이 지난 세기 60연대 초반 우리 중국과 구 소련은 그 혈맹관계가 깨여짐에 따라 두 나라 사이에 긴장국세가 조성되었다. 당시 구 소련은 중국에 있는 모든 전문가들을 철거시킴과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말기 붉은 군대의 동북진출과 중국의 “6.25”참전 시기에 진 구 소련의 빚을 짧은 기간내에 갚으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또한 구 소련전문가들의 철수로 많은 공장들이 가동을 멈춘데다 거기에 3년간의 자연재해까지 들이닥쳤다. 구 소련의 압력앞에서 모든 중국인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난관을 이겨내기로 하였다. 사람들은 콩깍지를 매돌에 갈아먹고 풀뿌리와 산에 있는 피나무 껍질을 발라서 먹기도 했다. 그리고 도처에서 굶어죽은 사람이 나타났다… 경제난은 연변도 마찬가지었으며 식구가 많고 남편 혼자의 노임에 의거해 살아가는 순자네 가정은 더욱 생활압력이 컸다. 어느 날 남편 김용환이 영양실조로 강연도중 갑자기 교단에서 쓰러졌고 순자 또한 연이은 기아와 지나친 생활압력으로 몇번이고 몸져눕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내가 쓰러지면 저 것(자식들)들은 누가 키우나”하며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군 했다. 그 때 순자네가 유일하게 의거할 수 있는 식품내원은 봄에는 각종 들나물과 산나물, 여름에는 버섯 등이었고 가을에는 콩깍지, 배추잎사귀 등이었다. 그것을 장만해서는 허기진 배를 달래군 하였다. 특히 늦가을 소영진에 있는 배추걷이가 끝난 밭으로 배추잎사귀를 주으러 갈 때에는 흔히 큰 딸 영순이와 함께 다녔는데 주어온 배추잎사귀와 배추뿌리 등에 옥수수가루라도 조금 넣어 푸대죽같은 것을 끓여놓으면 그것이 소화도 잘되고 다른 음식탈도 생기지 않아 당시에는 “상등식품”에 속했다. 순자는 그렇게 힘들게 주어온 배추잎과 배추뿌리 등을 운신하기 힘들어하는 노인들 가정과 잔식구들이 많은 가정에 보내주군 했다. 그러자 그러는 어머니에 대해 큰 딸인 영순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우리 집 식구들도 지금 굶고 있어요. 저도 지금 배고프고 힘들어죽겠어요. 전 힘들지만 어머니가 하도 불쌍하여 따라 다닌거예요.” “그래? 너한텐 참 안됐구나. 네가 학교에 다니면서 배추잎 주으러 다니자니 많이 고달프겠구나. 하지만 어쩌겠니? 우린 그래도 굶어죽을 지경은 아니란다. 저 앞집 ×× 노인네 집을 보아라. 그 집은 우리가 돌봐주지 않으면 진짜 굶어죽을 수도 있단다. 그리고 이 어머니는 이 동네 적십자회 주임이란다. 이런 신분으로 내가 어찌 굶어서 쓰러져가는 노인들을 보고도 못본체 할 수 있겠니?” 이 말에 영순이는 말없기 고개를 끄덕이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너무나도 이치에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고난의 연대, 거리의 행인들도 생기가 없고 밤을 자고 나면 “어느 동네의 아무개가 굶어죽었소”하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려오군 하던 시대였다. 기아가 온역처럼 이 세상의 모든 가정을 기습하는 시대였고 도처에서 도둑이 살판치군 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바로 이렇듯 살벌한 시대에 웬간한 덕성이 없이는 이웃들을 도와줄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영순이도 어느 정도 알리는듯한 모양이었다. 하긴 교육자인 아버지와 역시 높은 교육자질을 소유한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는 영순이네 형제들은 그렇듯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먹을 것 따위를 놓고 다툰적이 한번도 없었다. 자기의 배가 고플수록 더 배가 고프겠다고 생각되는 형제를 돌보군 하였다. 그리고 그렇듯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집이 바로 순자네 집이기도 했다. 한번은 순자가 밭에서 한근 가량의 콩알을 주어왔다. 순자는 그것을 솥에 볶아서는 술잔에 담아 학교에 가는 영남이와 영순이의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초기가 들면 한두알이라도 먹으면서 그것으로 초기를 말리라고 말이었다. 헌데 애들이 학교로 간 뒤 설겆이를 마치고 볼라니 영남이와 영순이는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던 볶은 콩을 도로 꺼내여 사발에 담아놓았던 것이다. 저희들보다 어린 동생들을 생각해서 내놓은 것이 분명했다. 나이에 비해 너무나도 일찍 어른답게 처사하는 자식들, 금방 먹고도 돌아 앉으면 배고플 정도로 한창 먹을 나이었던 영남이와 영순이었다. 그것 때문에 순자는 도리어 눈물이 나왔다. 한편 남편 용환이도 자신이 고아출신이어서인지 아니면 남을 적극 도와주고 베풀어주는 아내한테서 계발을 받아서인지 남을 돕는 일에는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늘 위생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을 집으로 데려와 푸대죽이나마 한끼 배불리 먹게 했는가 하면 집에서 어쩌다 쑥떡같은 것이라도 하면 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을 외우군 했다. 그러면 눈치가 빠른 순자는 말없이 챙겨두었다가 남편이 출근할 때면 한보자기씩 쥐어보내군 했다. 이렇게 어쩌다 만드는 쑥떡같은 것도 기숙사학생들한테와 이웃집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 보내고 나면 순자는 힘들게 만들고도 때를 거른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3 3년간 지속되던 “고난의 나날”도 나아지기 시작하면서 배고픔에 등이 휘던 사람들도 차츰 허리를 펴게 됐다. 3년간의 “대식품(당시 사람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 등을 식품으로 대용한다고 하여 이렇게 불렀음)시대”에 굶어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국가통계국의 해당 집계에 따르면 그 3년간 중국에서는 무려 2000여만명이 굶어죽었다고 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독일한테 살해당한 구 소련의 희생자수와 맞먹는 수자였다. 대가는 침통했다. 당시 6억에 달하는 중국인구 중 2000여만명이란 아사자(饿死者)가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많은 수자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는 웬간한 한개 나라의 인구와 맞먹는 수자였다. 하지만 중국인민은 악전고투하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전통미풍을 발양하면서 묵묵히 이 고비를 넘겼다. 경제는 점차 회복추세를 보이었고 인민들의 생활 또한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한편 순자는 이렇듯 3년간의 심한 시련의 고비를 넘으면서도 다 민족국가인 중국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인민들 전체가 더욱 똘똘 뭉치고 있는 것을 보고 당중앙과 모주석 대단함을 다시 한번 절감하였다. 중국인민들이 그렇듯 심한 기아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폭동 한번 일으키지 않으면서 참고 견딜 수 있은데는 우리 나라의 사회주의제도가 극소수의 지주와 자본가의 이익을 도모하는 제도가 아닌 광범한 대중의 이익을 첫자리에 놓고 있는 우월한 제도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어느 한 신문에서 “주은래 총리가 세수수건을 2년간 사용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그렇듯 나라의 위대한 총리도 3년간의 고난의 세월에는 백성들과 똑같은 간고소박한 생활을 하였다는 대목을 읽고는 감동된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었다. 동시에 사람은 없을수록 남과 나눠가질줄 알고 내가 한끼를 덜 먹거나 하루 적게 먹으면서 조금이라도 남겨 남을 돕는다면 타인의 생명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3년간의 “대식품시대”를 통해 또한번 체험하게 되었으며 삶의 진가란 간고할 때일수록 더욱 빛을 발산할 수 있다는 철리도 터득하게 되었다. …… 우리 나라가 안정적 궤도에 들어서서 융성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1963년 3월 5일, “인민일보”는 1면 톱면에 모택동이 쓴 “뢰봉동지를 따라배우자”란 제사를 실었다. 그러자 중국인민해방군 심양군구에서 나타난 뢰봉의 사적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센세이숀을 일으키면서 뢰봉을 따라배우는 일대 열조가 일어났다. 당시 연길시 신흥가두의 “뢰봉따라배우기활동”에서는 항상 순자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순자는 거의 적십자회의 주임인데다 보도소조 소조장으로 경상적으로 신문을 읽고 방송을 들었기에 장악한 지식과 이론이 풍부하였으며 번마다 “뢰봉 따라배우기 적극분자 대오”속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순자는 실제적으로 “뢰봉 따라배우기 활동”에서 솔선수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집안에서는 남편이 본직사업에서 성과를 올리는 일군으로 입지를 굳히도록 정성껏 섬기었는가 하면 자식들한테는 “항상 학습성적이 우수하고 모든 활동에 적극적인 학생과 비교하고 생활상에서는 어렵고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교양했기에 자식들 모두가 학교에 가서는 뢰봉 따라배우기 우수학생으로 되기도 했다. 또한 동네에서는 어느 집에 석탄이 떨어지면 석탄을 지원하고 어느 집 밥상의 반찬이 변변치 않으면 김치쪼각이라도 가져다주군 하면서 동네의 화목을 도모했다. 특히 조선족김치를 좋아하는 한족들 가정에 가서 손수 시범을 보이면서 김치를 담그는 요령을 배워주어 한족들은 한결같이 “순자아주머니야말로 우리 거민구역의 조선족 뢰봉”이라고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실로 본보기의 힘은 무궁무진했다. 뢰봉을 따라배우는 활동 중에서 순자는 항상 자기의 언행을 뢰봉과 비교해보면서 날이 갈수록 자신에 대한 요구조건을 높이었다. 그 중 1965년 5월 1일에 순자가 한 행동은 그야말로 모든이들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했다. 그것은 순자인 자기 자신도 믿기 어려운 초인간적인 것이었다. 그 날 연길시에서는 “5.1절”을 맞으면서 전 시 중학생마라톤경기를 진행했다. 그 때 딸 영순이도 이 경기에 참가했다. 순자의 딸 영순이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렸다. 헌데 그들이 연길공원 남쪽의 우장거리까지 왔을 무렵, 영순의 친구 중 한명이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더니 입에 거품을 물며 쇼크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달리다 말고 쓰러진 그 애의 주위에 몰려들어 손톱으로 코밑 민감부위를 누르고 팔다리를 주무르고 하면서 구급했지만 그 애는 깨여날념을 안했다. 어디에서 보았는지 그 애의 어머니가 달려왔지만 어쩔바를 몰라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그 애의 어머니는 키가 작은지라 딸을 업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 순자가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순자는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그 애를 업을 잡도리를 하였다. “자, 어서 이 애를 당장 내등에 업히워주세요.” “아니?!…” 모두들 이아해하는 눈길로 순자를 바라보았다. “어서!” 그 애를 업은 순자는 다짜고짜로 연변병원을 향해 달렸다. 기실 그 애를 업기전 순자 역시 이렇게 덩치가 큰 애를 과연 업을 수 있을지 파악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업고 보니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달릴수록 더욱 속도가 빨라졌고 옆에서 바꾸어 업자고 해도 막무가내었다. 아니, 힘이 넘쳐나서가 아니라 이 학생의 생명이 경각을 다툰다는 생각에서 죽기 내기로 달렸다고 할 수 있었다. 공원의 우장거리에서 연변병원 근처에 있는 그 애의 집까지는 꽤나 거리가 멀었다. 그 때는 지금처럼 택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날 웬일인지 지나가는 트럭조차 한대도 보이지 않아 순자는 그 꽤나 먼거리를 그 애를 업고 줄곧 달렸다. 그 애의 집에 도착하여 쇼크한 구들에 눕힌 순자의 온몸은 땀벌창이 되었다. 순자는 구들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내가 정말…저애…를 업고 여기까지 …뛰어왔단…말이지?” 그야말로 자신으로도 자기의 힘에 대해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한동안의 구급을 거쳐 그 학생은 마침내 의식을 회복하더니 일어나 앉으며 사위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른 애들로부터 “영순의 어머니가 널 업고 여기까지 달려왔다”고 알려주자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였다. 그애는 감동을 눈물로 대체했던 것이다. …… 한편 남의 일이라면 자신의 안위를 전혀 돌보지 않으며 발벗고 나서는 순자를 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름을 날리거나 그 어떤 “출세욕”에서 나온 행위라고 의심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바보”라고 하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 순자는 그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혹시 신문사나 방송국 등 매스컴 기자들이 인터뷰같은 것을 할라치면 순자는 그저 “힘들고 어렵거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체 할 수도 있겠지만 누구인가는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모든 것을 함축하군 하였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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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25
  • 중국의 원 부총리 오의 여사의 미혼내막
    중국의 원 부총이 오의(吴仪)는 성격이 직설적이어서 그한테는 비밀이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뭇사람들한테 한가지 큰 의문을 남기었다. 감정이 그렇듯 풍부한 여인이 왜 줄곧 싱글로 생활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오의 여사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생활은 나한테 결혼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미 이렇게 시기를 놓쳤으니 억지로 결혼생활을 추구하고 싶지 않았다. 이 역시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젊은 시절의 오의는 낭만주의와 영웅주의 색채가 짙은 소련문학을 즐겨 읽었다. 언제인가 오의는 “모스크바와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이란 책을 읽은 뒤 결연히 석유전업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녀의 마음속에는 책의 주인공 토만노프(特曼诺夫)와 같은 “백마왕자”가 자리잡게 되었다. 후에 오의 여사는 “백마왕자”란 실제 생활에서는 있을 수 없다면서 그제날 자기가 너무 이상주의 생활을 추구했다고 회고했다. 이렇듯 젊은 시절의 과분한 이상주의애정관과 분망한 사업 등으로 오의는 줄곧 따뜻한 사랑의 항만을 찾을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오의는 늘 자신은 “쾌활한 싱글”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성격이 쾌활하고 취미가 다방면으로 북경에서 있은 몇차례의 낚시경기에서 그는 수차 우승하기도 했다. 당시 많은 남성동료들은 “이 물고기들이 오의가 이쁘니까 전문 그녀한테로 헤염쳐오는게 아닌가?”라고 우스개를 했다고 한다. 그가 지도일군 직무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수하의 남성들이 수긍하는가”고 물었다. 그러면 오의는 웃으면서 “난 줄곧 남성동료들과 잘 어울린다”고 대답하군 했다. 그는 감정을 중히 여겼고 하급을 잘 관심하여 남성지도일군한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그런 세심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일단 사업한다치면 과단성이 있어 여성대장부다운 풍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언젠가 한 성장은 “원칙을 견지하고 실제적이며 의리와 감정을 중히 여기는 훌륭한 누님”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일찍 젊은 시절 친구들은 오의 여사의 외관을 두고 “이쁘다”는 말을 아주 적게 썼다고 한다. 원적이 호북 북해인 오의는 1938년 가을 무한의 한 보통 지식분자가정에서 출생, 형제로는 8살 이상인 오빠뿐이었다. 오의는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떴기에 기본상 오빠의 손에서 자랐다. 어릴 때 오의는 오빠를 따라 사처로 다니며 생활, 한시기 중경에 있는 친척집에 의탁해 살기도 했고 후에 오빠를 따라 난주에 가서는 난주여자중학(지금의 난주시27중)에서 공부를 하였다. 난주여자중학교 노교장의 회억에 따르면 그 시기 여학생들은 대부분 머리를 길러 땋았으나 유독 오의만은 단발머리를 하여 남학생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의가 치마를 입은 것도 거의 본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오의는 “이쁘다”는 말을 별로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 세기 90연대에 들어 오의를 취재한 한 기자는 오의 여사의 생김새를 놓고 “오의는 이쁘다기보다는 멋지었다. 피부가 희고 오관이 단정하였으며 얼굴윤곽이 좀 클뿐이었다. 이는 오히려 오의로 하여금 더욱 호방하고도 대범하게 보이게 했다”라고 묘사하였다. 1988년 TV방송을 통해 북경시 부시장 후선인으로 선보였을 때 오의는 쟈켓을 입고 테가 굵은 안경을 걸었었다. 후에 오의 역시 자신이 다른 여사들과는 애호가 어느 정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 “나는 다른 여성들처럼 쇼핑을 즐기는 축이 못된다”고 고백하였었다. 하지만 “미”를 추구하는 천성은 다른 여성들과 조금도 구별이 없었다. 1991년 북경시 부시장으로 된 오의와 기타 도시의 99명 부시장들이 항주에 모여 중국 여시장친목회 설립했다. 설립식이 있은 그날 저녁 53세의 오의는 연회석상에 들어설 때 아름다운 치포를 입고 선보였다. 순간 연회청내는 대뜸 더욱 밝아지는듯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매체들에서 오의를 보도할 때는 자주 “오의는 그 어떤 공공장소에 나타나든 항상 우아한 옷차림을 했으며 새하얀 머리칼은 한오리도 흐트러짐이 없다”라고 묘사하군 하였다. 2003년 3월에 오의가 국무원 부총리로 당선된 뒤 얼마 안되어 중국에는 전국을 휩쓴 사스가 만연되었다. 그러자 국무원 부총리 겸 국가위생부 부장으로 사스를 박멸하는 제1선에 나가 지휘하군 하였다. 그 당시 오의 부총리는 낮엔 사처로 뛰어다니며 사스박멸현장을 지휘하고 저녁이 되면 홀로 임시거처에 돌아와 지친 몸을 침대위에 던지군 했다. 오의 여사의 회억에 따르면 젊었을 때는 고독이란 뭔가를 몰랐지만 나이 60세를 넘기고 보니 신변에 남편도 자식도 없는 것이 무척 고통스럽고 힘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오의는 인차 이지를 되찾고 자신을 달래면서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청년시절 온몸에 이상주의 색채가 농후했던 오의는 “문학청년”으로 될 꿈을 가져봤고 소련문학에 빠지면서부터는 석유공업발전에 자기의 한생을 바치리라는 포부를 지니기도 했으며 후에 소련영화 “서광이 비낀 모스크바”를 본 뒤에는 한명의 유명한 여공장장으로 돼보려는 꿈을 가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의 여사는 너무도 꿈과 이상만 추구하다보니 결국 장장 10여년에 달하는 결혼적령기를 놓쳐버렸고 후에는 아주 결혼꿈을 포기한채 싱글여성으로 중국의 정치무대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출처: 신화넷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9-21
  • 모택동이 입지 못했던 원수복
    1955년 중국군은 첫 군급제를 실행, 원수가 제1등 군급이었다. 그리고 그 원수급 또한 공화국 대원수와 공화국 원수 이렇게 두가지 계급으로 나뉘었다. 군급제로 말하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이 대원수에 대한 표준규정이 매우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신화통신 자료에 따르면 당시 모택동더러 대원수 군급을 접수하게 하기 위하여 전국인대상무위에서는 전문 회의를 열고 이를 토론, 이를 최고입법기구의 결의로 통과시켰다. 당시 회의를 사회한 전국인대 위원장 유소기는 모택동이 긍정코 대원수급 직함을 접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혼자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최고입법기구를 통해 결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종 최고입법기구의 결의도 결국 모택동을 설복시키지 못했다. 그 연고로 후에 군급제 실행식 때 모택동이 대원수급 직함을 거절하였기에 당시 대원수급 자리는 비어있었고 그 뒤 중국의 대원수 자리는 계속 공백으로 남아있게 되었으며 그 때 만든 대원수제복은 현재까지도 박물관에 소장되어있을 수밖에 없게 됐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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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9
  • 모택동가족중의 최고 미녀 이리리
    일단 모택동의 일가를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그 가족 중 가장 이쁜 여성이 이실(모원신)의 딸 이리리(李莉莉)란 것을 알 수 있다. 리리는 1977년생으로 당시 아버지 모원신이 갓 감옥에 갇히고 어머니 전수봉(全秀凤)마저 격리심사를 받을 때 태어났다. 리리는 태어나서 10개월이 되자 오랫동안 열이 나면서 앓았다. 당시 리리는 마이실린 닝게르를 너무 많이 맞은 탓에 두 귀가 청력을 잃기까지 했다. 1982년 리리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모원신이 수감되어 있는 감옥을 방문, 당시 5살에 불과한 리리는 아버지가 다가와 안으려 하자 어머니의 뒤에 몸을 숨기며 아무리 얼려도 낯선 아버지가 자기를 다치지 못하게 했다. 모원신이 출옥한 후 이들 세식구는 13평방미터가 되는 상해의 한 주택으로 입주, 리리는 늘 옆방에 있는 외삼촌네 집에 가서 거주했으며 모원신이 좀 가까이 하려 해도 외삼촌네 집으로 달려가군 했다. 거기에 언어교류까지 곤란해 부녀사이에 모든 소통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의 가슴에까지 못을 박았구나.” 모원신은 자책에 시달리며 오랫동안 잠을 못이루군 하였다. 그 뒤 모원신은 모든 정력을 딸애의 성장에 돌렸으며 부녀사이는 차츰 미묘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리리가 초중을 졸업하고 상해농아청년기술학교 미술반에 붙자 더욱 극성스레 딸애의 뒤받침을 해주었으며 졸업후 사회에 진출해 사업하게 되자 컴퓨터를 사주어 과외시간에 컴퓨터를 연마하게 했다. 리리는 2007년에 상해대학 미술학원 농아성인교육 전과반에 입학했고 2000년도에 졸업증서를 취득했다. 현재 모원신은 딸애의 영어공부를 도와주고 있다. 딸애더러 대학본과시험에 참가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딸애의 성장으로 지금 이들 부녀사이의 감정은 갈수록 깊어가고 잇다. 현재 리리는 주동적으로 부친 모원신을 돌봐드리는 착한 딸로 되고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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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8
  • 뒤늦게 밝혀진 가희 등려군의 비밀
    ▲ 등려군(邓丽君) 관위에 국만당 당기 덮여지고 장례식 소장급별로 치러져 등려군(邓丽君)은 대만의 유명한 여가수였다. 일찍 중화권의 스타 성룡(成龙)의 회억에 따르면 일찍 지난 세기 80년대 미국생활시기 성룡과 등려군은 함께 영화를 보고 식사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매우 유쾌한 나날을 보냈었다. 그러나 그런 유쾌한 나날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성룡과 등려군의 내왕이 빈번해지고 상호 신임과 요해가 깊어짐에 따라 성룡은 등려군한테 이외의 다른 비밀이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것인즉 당시 등려군은 대만 국민당의 첩자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 뒤 성룡은 모진 번민에 시달리던 끝에 드디어 고통을 참으며 등려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중국 대륙과 대만의 양안관계가 비상시기었던만큼 성룡은 비교적 명석한 두뇌를 갖고 그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코 누가 누구에 대한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연예인이 정치에 개입하면 필경 심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건 번연한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 80년대 후기에 들어 등려군이 대륙에 건너와 순회공연을 하게 된다는 설이 수차 나돌았으나 일이 진척되지 않아 최종 그녀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원인 역시 국민당첩자란 그녀의 특수신분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1995년 5월 8일, 등려군은 천식질환으로 사망(사인 아직도 불투명함), 그뒤 거의 20년이 돼서야 당시 그녀의 관위에는 국민당 당기가 덮여졌고 그녀의 장례식은 국민당군 소장급별로 치러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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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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