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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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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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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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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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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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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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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희 등려군의 파란만장한 생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타이완 여가수 덩리쥔(등려군 邓丽君)은 1953년 1월 29일, 타이완 윈린현 바오충향 텐샹촌(台湾省云林县褒忠乡田洋村)에서 출생, 부친 덩쑤우(邓枢)는 일찍 광저우 황푸군관학교 제14기 졸업생이었고 어머니는 산둥 타이안(泰安)시 둥핑(东平)현 사람이다. 1949년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철퇴한 뒤 덩리쥔은 가정의 넷째(위로 3명의 오빠가 있었음)로 태어났다. 덩리쥔의 이름의 유래를 보면 부친 덩쑤우가 어느 한 전우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지은 것으로 원래의 이름은 아름다운 대나무란 뜻으로 덩리쥔(邓丽筠)이라 지어졌으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냥 덩리쥔(邓丽君)이라 불렀기에 그냥 그 것이 호적에까지 등록됙 되었다. 덩리쥔이 영문이름은 테레사 텅(Teresa Teng)으로 이는 그리스어로 수확의 뜻을 나타내며 저명한 수녀 테레사와 동명이었다. 위로 오빠만 셋이 있다가 덩리쥔이 여자애로 태어나자 부모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특히 덩리쥔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바 어머니는 그 어디를 가나 딸을 데리고 다니며 자랑했다. 또한 덩리쥔의 어머니는 당시 영화와 연극을 구경하기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항상 어머니와 함께 이런 문화를 접하다보니 덩리쥔은 어릴적부터 중국 전통음악에 대해 익숙하게 되었고 그것을 사랑하고 또한 그것을 전공할 수 있는 토대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1963년 리한샹(李翰祥) 감독이 만든 영화 “양산백과 축영태”가 타이완에서 상영되면서 한시기 타이완에서는 중국의 5대 희곡 중의 하나인 황메이시(黄梅戏) 음악창법이 널리 유행되었고 당시 중화방송국에서는 황메이시음악 콩쿠르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러자 덩리쥔은 은사의 제의에 따라 이 콩쿠르에 참가,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승보좌에 올랐다. 이 때로부터 덩리쥔은 타이완 가요계에 정식으로 입문, 이것을 계기로 덩리준한테는 이러한 기회가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1966년, 덩리쥔은 학업이냐 아니면 음악이냐 이 2가지 중 한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부친 역시 학교와 협의를 달성할 수 없었다. 최종 덩리쥔은 학교에서 중퇴하고 금마상 레코트 회사에서 펼친 가요콩쿠르에 나서서 우승을 따냈으며 그 때로부터 학교와 영영 고별을 선고, 14살 나잉 우주레코트회사에 취직하면서 프로가수의 인생에 들어섰다. 덩리쥔은 노래에서만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 1969년 덩리쥔은 어린 나이에 “고마워요 사장님”이란 영화에 출연, 영화에는 많은 노래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덩리쥔은 이 과정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내어 영화배우로서의 인생에 들어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덩리쥔은 영화배우에는 거의 관심이없었다. 1970년, 17세에 난 덩리쥔은 홍콩 공업전시회에서 주최한 “백화유 자선바자회 가요콩쿠르”에서 우승보좌에 올라 사상 가장 나어린 “백화유 자선여황후”로 되었다. 이어 그녀는 자신의 두번째 영화 “가요팬아가씨”에 출연해 대 성공을 거두었으며 동시 가요열창사업에서도 첫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면서 덩리쥔은 중국 홍콩과 마카오 등지를 발판으로 동남아의 화교시장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한편 오우양페이페이(欧阳菲菲)는 덩리쥔으로 하여금 일본에서 음악생애를 펼치도록 간접적으로 도와준 사람이었다. 1973년, 오우양페이페이와 홍콩가수 천메이링(陈美龄)이 일본에서 각각 레코트 대상을 획득하면서 일본 폴리도르 레코드(폴리도르 레코드) 회사에서는 동남아 지구의 가수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홍콩, 마카오와 타이완 지구에 사람을 파견해 고찰, 결과 홍콩의 정둥한(郑东汉)이란 사람으로부터 이상적인 여가수를 소개받았다. 그 출중한 여가수가 바로 덩리준으로 당시 그녀는 “오직 그대밖에 없어”란 노래로 일본 전문가들의 마음을 움직이었다. 1971년 3월 25일, 덩리쥔은 홍콩스타 쩡소우츄우(郑少秋)와 함께 타이완, 홍콩과 마카오 등지를 드나들면서 활약, 당시 쩡소우츄우는 이미 3차례나 결혼한 몸이었지만 홍콩연예계에서는 여전히 인기가 높았으며 거기에 덩리쥔까지 합세하자 이들의 몸값은 급상승했다. 당시 덩리쥔으로 말하면 나어린 가수에 불과했지만 이미 홍콩의 여풍레코드회사와 년 20만 홍콩달러로 계약을 맺은지라 연예인들 모두가 덩리쥔과 합작하기를 원했다. 거기에는 홍콩 일류의 사회자 썬덴샤(沈殿霞)도 있었다. 1978년 덩리쥔은 싱가폴,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국가들을 순회하면서 자신의 공연사업무대를 개척, 덩씨가문으로 말하면 일대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의 미감으로 말하면 덩리쥔은 그 무슨 대단한 미녀에는 속하지 못하겠지만 당시 그녀는 타이완의 “대중의 애인(大众情人)”인 쑤챵(萧蔷)한테 조금도 짝지지 않는 가요계의 제일 미녀였다. 1979년 덩리쥔이 한창 자신의 사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뜻밖에서 가짜여권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덩리쥔한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지어 당시 많은 매스컴들에서는 덩리쥔을 공격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당시 덩리쥔은 타이완을 비롯한 홍콩, 마카오와 기타 동남아 지구에서 활동하기 매우 불편했다. 그녀는 부득불 자기의 활동무대를 다른 지역으로 선택, 단연히 미국행 유학으로 일본어, 영어와 생물, 수학 등을 배웠다. 그러다가 1979년 4월 캐나다의 밴큐버에서 개인콘서트를 개최, 이는 그녀가 처음으로 아메리카 지역에서 개최한 개인콘서트였다. 1981년 덩리쥔은 5장 레코드상을 혼자서 받으면서 레코트 제작사상의 기록을 창조했다. 그녀가 바로 방송국에서 주최한 시상식에서 상을 받을 때 일종 희극성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당시 방송국에서는 청룽(成龙)으로 하여금 귀빈이 되어 덩리쥔에게 상을 발급하기로 하였다. 이 날 오후 갓 미국으로부터 홍콩에 도착한 덩리쥔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내속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당시 방송국의 한 일군이 레코드판을 든 청룽을 무대로 올리 밀었는데 무대로 올라온 청룽을 보자 덩리쥔은 너무도 뜻밖이라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1982년 1월 8일부터 11일까지 홍콩 이레사 체육관에서는 5차례에 달하는 개인콘서트를 마련, 매차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이어 보우리진 녹음출판사(宝丽金录制出版)가 주최한 그 개인콘서트가 열렸으며 타아완 TV방송은 “천언만어(千言万语)”특집으로 덩리쥔의 개인콘서트를 녹화하였다. 이해 5월 덩리쥔은 고전특집 녹화계획에 들어갔고, 10월에는 린자샹(林子祥) 및 탄융린(谭咏麟)과 합작하여 홍콩에서 TV특집을 촬영했으며, 12월에는 홍콩에서 자선야회를 가지기도 하면서 개인사업의 고봉기에 들어서기도 했다. 1983년 덩리쥔은 초청으로 미국 라스베가스의 시저스팰리스 궁전에서 개인콘서트를 개최, 이 궁전에서 공연한 첫 중국인으로 되었다. 그 때 “바람과 서리는 나와 동반(风霜伴我行)”이란 노래로 무대에 오른 덩리쥔은 이어 “잘 있으라 나의 사랑(再见我的爱人)”, “첨밀밀(甜蜜蜜)” 등 노래로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었으며 공연은 생각밖으로 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공연은 3차나 재차 막을 올렸고 원래 1100석을 차지하던 관중수는 1500석에 이르기도 했다. 이로부터 덩리쥔은 국제스타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이 해 덩리쥔은 홍콩 홍감체육관에서 6차례의 콘서트를 가지고 자신의 가수생애 15주년을 기념, 이 콘서트의 제목은 “10억인의 박수갈채”로 번마다 초만원이었으며 티켓값도 최고로 치달아올랐다. 지난 2010년 미국CNN(인터내셔넬)에서는 지난 50년간의 세계유명 음악인 20명을 평선, 이 중에는 짱궈룽(张国荣)과 덩리쥔이 화인 가수로 선정되었다 덩리쥔의 일생은 대체적으로 60% 이상이 공개된 정감세계에서 헤맨 인생으로 이 중 저명한 영화스타 청룽과의 한단락 정감유희가 많은 사람들의 흥미와 오락권의 대사로 남아있다. 청룽과 덩리쥔은 최종 각종 원인으로 가정을 이룰 수 없었으며 이로 하여 외계의 많은 사람들은 애석해 하기도 했다. 그리고 덩리쥔은 친샹린(秦祥林)과의 애정은 매우 진지했었다. 하지만 친샹린의 아내로 된 것 또한 덩리쥔이 아니라 린칭샤(林青霞)였다. 과거의 애정사에 대한 매스컴의 취재를 받들 때면 덩리쥔은 허다한 사랑은 각골명심할만한 사랑으로 감정투자가 많았다고 한다. 덩리쥔은 늘 “애정이 많은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사랑의 신이 자신한테서 물러갈 때마다 있게 되는 덩리쥔의 일가견이었다. 덩리쥔의 첫 사랑은 그녀 나이 18세 때 찾아왔다. 상대는 말레이시사 화교청년이며 기업가인 린쩐파(林振发)였고 나이는 덩리쥔보다 8살 이상이었다. 당시 두 남녀는 혼인과 가정에까지 담론이 오갔으며 많은 사람들은 이제 얼마 안있어 덩리쥔이 린씨네 며느리로 될 것으로 화제에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후 린쩐파는 돌연히 심장병이 발작했다. 소식을 들은 덩리쥔은 인차 당시 린쩐파가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싱가폴로 날아갔으나 싱가폴 공항에서 덩리쥔은 자기의 애인이 이미 숨을 거둔 것을 보아야 했다. 그 때 린쩐파의 나이는 30여세에 불과했다… 그 뒤 덩리쥔은 늘 스캔들이 뒤따라고 있는 주젠(朱坚)이란 상인과 사귀었다. 전하는데 따르면 주젠은 당시 오락권내에서 상당한 배경이 있었으며 싱가폴 어느 한 나이트클럽의 보스였다. 그는 일찍 덩리쥔한테 많은 도움을 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덩리쥔은 주젠한테도 진심을 보이면서 그한테 일생을 의탁하려고 했었다. 1972년 6월의 어느 날, 주젠은 홍콩에서 공연생활을 하고 있는 덩리쥔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를 만나러 홍콩으로 가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주젠이 탑승한 비행기가 베트남상공에서 실종되었고 홍콩 공항에서 주젠을 애타게 기다리던 덩리쥔은 사람도 보지 못하고 주젠과 사별해야 했다. 덩리쥔과 지난 세기 70연대 타이완의 영화스타 친샹린(秦祥林)과의 애정은 “오케이”와 “노오”사이를 배회하기를 거듭했다. 당시 덩리쥔이 친샹린과 함께 유럽여행을 간 후 아버지는 이들의 동행을 부인하면서 그냥 우연하게 둘 다 유럽행을 했을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덩리쥔을 관심하는 모든 사람들은 줄곧 추궁하던 끝에 덩리쥔과 친샹린이 로스앤젤레스에서 함찍 찍은 사진을 발견하고 공개했다. 이에 대해 덩리쥔은 후에도 승인하지는 않았다. 이는 아마도 친샹린과 린칭샤의 혼인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1979년 9월, 덩리쥔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프랜시스코로 날아가 청룽이 주연한 영화 “킬러호한(杀手壕)”을 보게 도었다. 당시 미국의 많은 신문들에서는 청룽이 덩리쥔을 끌어 안고 있는 사진을 게재, 둘은 매우 행복해보였다. 당시 청룽은 쿵후스타였고 가요계에서도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 여기에는 덩리쥔의 공로도 한몫 있는 것으로 당시 미국시절 덩리쥔이 청룽한테 노래실력을 키워주었다고 한다. 그 뒤 중국 CCTV의 “예술인생”중 청룽은 덩리쥔과의 한단락 애정사를 회억하면서 몹시 가책에 시달리는 얼굴을 보이었다. 청룽은 당시 애정의 소중함을 몰랐다면서 후회, “이제와 생각해보니 잘못되었다. 당초에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주어야 했다”고 밝혔다. 한편 궈쿵청(郭孔丞)과의 애정사는 덩리쥔한테 가장 가슴 아픈 상처로 남기도 했다. 우선 싱가폴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애정이 불타올랐고 그 뒤 궈쿵청이 자기의 샹글리라호텔에서 덩리쥔을 초청해 그녀한테 구혼했었으며 결혼에 대한 담론이 오가기도 했다. 덩리쥔의 동생 덩창시(邓长禧)에 따르면 궈쿵청이 덩리쥔을 데리고 집으로 가자 곽가 가정의 직원들이 둘러싸고 사인성세를 들이대기도 했다. 그 뒤 덩리쥔은 궈쿵청의 조부모를 만나서야 가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궈쿵청의 조부모는 덩리쥔한테 3가지 조건을 제출했다고 한다. 즉 하나는 과거의 역사를 말끔히 교대하고 궈씨 가문에 시집온 후에는 즉시 연예권에서 퇴출하며 오락권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덩리쥔은 이 3가지 조건에는 자기를 기시하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인정, 접수할 수가 없어 퇴혼을 제출했다고 한다. 그 뒤 얼마 안있어 궈씨 가문에서는 샹글리라 호텔에서 성대한 결혼연을 베풀었다. 단 당시의 결혼식의 주인공은 덩리쥔이 아니라 1명의 일본여인이었다. 80년대 후기에 들어 덩리쥔은 점차 무대와 고별하고 반은퇴의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덩리쥔은 프랑스 파리로 이민하여 정착, 당시에서 자기보다 10여살 아래인 폴로를 알게 되었다. 폴로는 촬영애호자였다. 당시 덩리쥔은 그와의 결혼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혼인은 애정의 정착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냥 애정의 과정을 체험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덩리쥔은 파리에 정착한지 얼마 안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당시 호흡도 질병으로 죽었다는 등 그녀의 사망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녀의 죽음을 두고 새로운 의문설이 제기되었다. 덩리쥔이 죽은 뒤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그녀의 목에 손자국이 역력히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타살로 추측된다는 견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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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0
  • 왕청현에서의 토비숙청- 마희산 비적집단의 괴멸
    ●이강춘 1945년 9월, 마희산은 왕충림, 대청해, 마희귀, 리금희 등과 함께 마을과 삼림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대고 왕청현 춘양향 우권구에서 치안대를 조직하고 10월까지 대오를 400여명으로 확대하였다. 이 때 마희산은 국간경과 단신민을 국민당 목단강시당부 훈련과의 과장인 강학용한테 파견하였다. 강학용은 치안대를 받아들이고 당장에서 마희산을 대장으로, 왕충림을 부대장으로, 국간경을 참모장으로 위임하는 위임장을 써주었다. 1945년 12월, 국민당 동북정진군 사령 정운봉은 또 마희산대오를 국민당 동북정진군으로 개편하였다. 마희산은 자칭 사령이 되고 국간경은 참모장이 되였으며 그 아래에 3개 퇀, 8개 처, 2개 독립영, 1개 특종련, 1개 박격포련, 1개 철도공병기관차대를 두었는데 병력 도합 1,000여명이 되였다. 이와 동시에 녕안, 왕청, 해림 일대의 크고 작은 토비무리들은 모두 마희산의 수하에 귀속 되였는데 5,000여명이나 되였다. 마희산 비적단은 구성된 그 날부터 제멋대로 날치면서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저질렀다. 마희산은 총과 탄알을 얻기 위해 장사인을 데리고 석두하자에 가서 송촌장을 쏴죽이고 권총 1자루와 보총 8자루를 탈취해갔다. 1946년 1월, 마희산 비적단은 기타 비적단과 결탁하여 아미달에서 우리 군 부상병 20명을 수색해냈다. 그중 군관 2명이 있다는 걸 안 마희산은 국간경과 공모한 끝에 사령부에 압송한다는 구실을 대고 도중에 2명 군관을 총살하게 하였다. 그 해 3월에 마희산 비적단은 라자구에서 신화촌에 도망쳐와서 깊이 잠든 조경묵이네 한집식구 세 사람을 쏴 죽였으며 그 이튿날 철퇴할 때 소와 말 84필과 짐마차 30여대를 약탈하고 50여명 군중을 붙잡아갔다. 마희산은 569명 군민을 죽였으며 현금 1억여원(당시 화폐), 입쌀 16만 3,500그람, 소와 말 312필, 닭 1,800여 마리, 이부자리와 옷 등속 1,380여벌을 약탈해갔다. 1946년 2월, 연변경비부대와 왕청보안퇀에서는 목단강군구 산하의 대부분 부대의 배합 하에 마희산 비적단에 대한 공격을 들이댔다. 2월 15일 밤, 아군 주력부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마희산의 사령부가 있는 록도를 포위했다. 여기에 1,000여명이나 되는 토비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동녘이 밝아질 때를 기다려 아군부대는 진공명령을 내렸다. 아군은 20분간의 격전을 벌린 끝에 비적들의 병영을 점령하였으며 전투 중에 정진군 총사령 정운봉을 사로잡았다. 이튿날 아군은 마희산 비적단의 군수창고가 있는 로묘를 포위하고 리금희, 대청해를 두목으로 한 비적 200여명을 생포하였다. 뒤를 이어 비적단이 차지하고 있던 춘양, 락타산, 천교령 등지도 점령하였다. 마희산은 묘령이 함락되자 패잔병 500여명을 이끌고 라자구 일대로 창황히 꽁무니를 빼다가 쌍마가, 서란, 천강 등지를 거쳐 길림에 도망쳐가서는 국민당에 의지해버렸다. 그 후 그 자는 아군에 의해 포로 되였다가 1951년 2월 20일에 녕안에서 총살당했다. 왕경운 비적단의 괴멸 1945년 9월, 왕청현 대흥구에서 위만 경찰 이였던 왕경운과 지주 왕극귀 등이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의로 낙후한 군중 40여명을 농락하여 보안대를 조직하고 왕경운이 대장을 맡았다. 대부는 대흥구에 두었다. 그 해 10월 15일, 일본 특무 요옥령, 왕귀, 상유신 등이 암암리에 국민당 지하건군 조직의 사촉을 받고 일제와 위만주국을 위해 복무하던 자들을 긁어모으고 청년들을 농락하여 보안대에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천교령에 제1퇀, 묘령에 제2퇀, 대흥구에 제3퇀을 두었다. 하마탕, 계관라즈, 묘령 등지의 토비대오가 600여명으로 확대되자 ‘동북 제2정진군 대흥구사령부’를 세우고 대흥구 하북툰(후에 하남으로 옮김)에 사령부를 두었다. 요옥령이 사령으로 되고 아래에 8개 처, 1개 퇀을 두었다. 참모처장에 왕귀, 군수처장에 우도일, 집사처장에 왕흥주, 부관처장에 관춘양이였고 퇀장에 왕경운, 부퇀장에 왕선주, 부관에 정계림이였다. 아래에 3개 영을 두고 영 아래에 11개 련을 두었다. 퇀부는 대흥구에 설치하고 제1영은 묘령에, 제2영은 계관라즈에, 제3영은 하마탕에 주둔시키고 련은 여러 촌에 널려있었다. 산포 1문, 박격포 3문, 평사포 4문, 경 중 기관총 9정, 적탄통 30여개, 보총 600여자루 등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1948년 8월, 토비 부련장 마규 등 10여명이 동양에 가서 백성들의 집을 약탈하다가 김태길 일가 4명을 죽였고 9월에 류록, 염청산이 서양툰에 가서 최창익을 보고 식량을 내라고 하였으나 내지 않으니 당장에서 죽여 버렸다. 10월에 토비영장 류록이 13명을 데리고 아미달에 가서 생아편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1946년 1월 13일, 보안대가 영벽, 묘령에서 토비들과 전투하였는데 46명이 전사하였고 2월에 토비들은 친척방문을 온 군중을 팔로군의 밀정이라고 총살하였으며 8월에 후하 상촌에서 툰장 김명창을 붙잡아다 일본 군도로 찔러 죽였다. 이에 왕청보안퇀에서는 대흥구를 공격하였다. 왕경운과 그의 비적단의 제1영, 제2영은 연변경비부대에 귀순하여 재편성되고 제3영은 마희상에게 붙었고 일부분은 길림으로 가 국민당에 붙었다. 요옥령은 우라가전투에서 아군에 포로 되여 처형당했다. 안진유 토비대의 괴멸 1945년 9월 안진유는 특무 장성기, 우헌주, 위만 촌장 류방무와 결탁하여 지방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라자구 일대에서600여명을 긁어모아 자위대를 조직한 후 대대장이 되고 장성기가 부대대장이 되였다. 대대 아래에 3개 중대를 두었다. 얼마 후 또 준아신을 우두머리로 한 장가점의 토비 100여명을 받아들였다. 1946년 10월, 목단강에 있는 국민당 건군조직에서 연락원 진만기, 주학무를 라자구에 파견하여 ‘자위대’를 받아들이고 ‘국민당 동북정진군 제6사 제16지대 제2려 제5퇀’으로 편성하였으며 안진유를 퇀장으로, 우헌주를 부퇀장으로, 류방무를 부퇀장 겸 구장으로 위임하였다. 이 대오는 700여명으로서 산포 1문, 박격포 3문, 평사포 4문, 경 중 기관총 29정, 적탄통 30여개, 보총 600여자루를 가지고 있었다. 중공왕청현위에서는 이 토비들을 소멸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1946년 3월 3일, 보안퇀을 라자구에 보내어 토비들이 미처 손 쓸 새 없이 족쳤다. 영장 김문우가 120여명을 데리고 화전현으로 도망친 외에 나머지는 전부 항복하였다. 안진유는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보고 황급히 류방무 등 비적을 데리고 로흑산으로 도망쳐 오삼호 토비대에 가담했다. 1946년 4월 7일 이른 새벽, 아군이 자는 틈을 타서 안진유는 오삼호의 500명 병력과 7문 대포의 배합 하에 라자구를 돌연 습격하였다. 우리 보안퇀 제1영은 미처 막을 사이 없이 흩어지고 말았으며 소영장은 전투 중에서 희생되고 대부분이 전사하였거나 포로 되였다. 토비들은 마을에 들어가 제멋대로 조선민족을 죽였고 조선민족 여성을 강간하였으며 조선민족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이날 오전에만 64명 조선민족을 죽였다. 그리고 조선민족 200여명을 붙잡아다가 죽이려 하였으나 친형제처럼 지내던 한족 백성들이 거듭 사정을 해서야 전부 내놓았다. 그 해 4월 14일, 보안퇀은 안진유 토비무리에 맹렬한 진공을 들이대여 라자구를 점령하였다. 기지를 잃어버린 안진유는 일부 토비들을 거느리고 다시 호흑산으로 도망쳤다. 4월 20일, 안진유는 또 오삼호와 결탁하여 라자구를 진공하였다. 아군은 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잠시 라자구에서 물러나왔다가 다시 우세한 병력으로 라자구의 적을 포위 공격했다. 안진유와 잔여토비들은 또 로흑산으로 도망치려 했다. 아군은 바싹 추격하여 5월 5일, 3호 비행장에서 오삼호를 쏴죽이고 로흑산에서 안진유를 부상(후에 병원에서 죽음)입혔다. 류방무는 토지개혁 때 붙잡혀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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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0
  • [기고] 북한영화와 배우들
    ▲영화 '꽃파는 처녀' 꽃분이역을 맡았던 북한스타 홍영희 중국에서 어릴 적에 북한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예를 들면 꽃파는 처녀, 꽃피는 마을 등의 영화가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 많은 이야기들은 다 잊혔지만, 배우들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영화 속 처녀들의 예쁘고, 용감하며, 터프한 인상이 깊었기 때문인가 싶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있으나 북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사람은 매우 적다. 북한은 매년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으며 평양영화성 역시 비교적 규모가 큰 영화타운이다. 북한에서는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할 때는 강력한 스타 캐스팅도, 첨단 장비도 없고 설비도 단순하다. 그러나 배우나 스태프나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다. 설비가 단순하고 특수효과도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좋은 영화를 출품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전에 많은 영화들을 특수효과도 없고 첨단 기술 설비도 없는 환경에서 촬영했다. 사람들은 북한 배우들은 모두 소박해서 주연배우라고 해도 스타다운 구석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또한 북한 연예계는 노이즈 마케팅도 비즈니스 포장도 숨은 룰도 없어 순수한 느낌을 준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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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5
  • [유래상식] 찰떡에 깃든 이야기
    ‘찰떡’이란 찹쌀로 만든 떡을 말하는데 일명 ‘인절미’라고도 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으로 불리는 ‘찰떡’의 유래에는 이런 이야기가 담겨있답니다. 옛날 공산성이라고 부르는 곳의 어느 한 시골에 임씨 성을 가진 마음씨 고운 한 농군이 아들 삼형제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연속 3년째 농사가 되지 않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였습니다. 그해 겨울 임씨는 셋째 며느리를 맞아들였는데 셋째 며느리는 인물도 절색이지만 음식을 만드는 솜씨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비록 산나물로 끼니를 에우더라도 그 맛이 때마다 다르고 구수했습니다. 하루는 가마 목에 앉은 셋째 며느리가 기장쌀로 밥을 짓게 되였는데 밥이 다 되였는데도 밥을 풀 념을 못했습니다. 죽밥이 되면서 한 덩어리가 되여 버린 것입니다. 셋째 며느리는 그런대로 식구들에게 그 떡이 된 밥을 골고루 나누어주었습니다. “덩어리가 된 죽밥이라도 식기 전에 어서 잡수세요.” “음, 어서 먹고 밭으로 나가자구나.” 시아버지 임씨가 이렇게 말하면서 수저를 먼저 들자 모두 따라들었습니다. 그날 아침 비록 모두 배부르게는 먹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산으로 일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다른 날에 비하여 늦게까지 일했는데도 모두 배고파하는 눈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웬 일일가? 셋째 며느리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찰밥덩어리를 먹은 것이 원인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 밥을 지을 때 의식적으로 기장밥을 뭉개서 떡을 만들어 식구들에게 대접했습니다. 그날도 역시 저녁 늦게까지 일했지만 누구 하나 배가 고프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비결을 알아차린 셋째 며느리는 혼자 빙그레 웃었습니다. 바로 그 떡이 된 찰밥덩어리를 먹은 것이 효과를 본 것이었습니다. 그해 임 씨네는 셋째 며느리의 제의 하에 기장쌀, 차수수, 찰옥수수 등을 많이 심었는데 생각 밖으로 대풍년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셋째 며느리는 기장쌀을 씻어 한가마를 찐 후 그것을 퍼내 절구에 넣고는 남편더러 찧게 했습니다. 잠시 후 저녁상이 갖추어졌습니다. 셋째 며느리는 잘 찧어진 기장쌀떡을 칼로 저미여 밥상에 올려놓고 또 어느새 만들었는지 콩가루를 사발에 담아 올려놓으면서 말했습니다. “떡이 목에 붙지 않게 이 구수한 콩고물을 묻혀 잡수세요.” “아니, 이것이 별맛이로구나.” 떡 한 덩이를 맛보던 임씨가 엄지를 내들었습니다. “찰 붙이로 만든 떡이라 이것을 찰떡이라고 하면 되겠다.” 이때로부터 ‘찰떡’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되였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시일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당시 조정에 반란이 일어나서 인조임금님이 공주의 공산성으로 피난을 오게 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씨는 아침 일찍 셋째 며느리더러 찰떡을 하라고 하고는 그것을 임금님께 바쳤습니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쫄깃쫄깃하면서도 구수한 음식의 맛에 놀란 임금님이 떡의 이름을 묻자 병졸은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만들어왔다고 아뢰었습니다. “허허… 임서방이 가져온 떡이 절세의 맛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떡의 이름을 임절미라 하면 되겠구나.” 인조임금님의 명명으로 그날부터 ‘찰떡’은 또 ‘임절미’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였답니다. 세월이 가면서 임이 어음 적으로 쉽게 불리는 인으로 변하여 ‘인절미’로 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찰떡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게 되였는데 후세사람들은 점차 지역별로 찰떡을 만드는 방법을 기발하게 바꾸어 방아에 찧고 절구에 찧고 들판에 놓고 나무로 떡메를 만들어 치고 또 전문 떡구유를 만들어 치게 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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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5
  • 외몽골 중국으로부터 독립되게 된 내막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약한 나라한테는 외교가 없다.” 이는 많은 외교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사실 이 말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중화민국 주석 장개석이 소련과의 담판에서 수세에 몰릴 때 내뱉은 말이었다. 실제상 외교적 분쟁에서 많은 약 소 국가들은 강대국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세울 수 없기 마련이었다. ▲사진 : 인터넷 1945 년 2 월,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곧 승리하게 될 무렵이었다. 당시 세계 강국들인 미국, 소련과 영국 등은 흑해 북부에 있는 크림 반도에 있는 얄타에서 일련의 해당 전쟁 후의 질서 및 동맹국의 이익 분배에 관련된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 중 <일본에 대한 미, 소, 영 3국의 협정(간칭 얄타 협정)>은 당시 동맹국인 중국의 동의도 없이 체결되어 중국의 권리를 크게 침해했다. 얄타 회의에서 극동지구 문제를 토의할 때 자국의 이익을 위해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제기하였다. 첫째, 외몽골의 현 상태를 유지한다. 둘째, 중동철도(중국 동북의 철도)를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관리한다. 셋째, 소련이 대련 및 그 부근 해역에 불 동항(不冻港)을 건설한다. 당시의 외몽골은 실제상 이미 소련군의 지배하에 있었다. 민국과 과거 청조의 관리들은 이미 축출되어 중국 본토로 돌아갔으므로 스탈린의 현 상태 유지란 기실 세계열강들로 하여금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자는 속심이었다. 동시에 스탈린은 기타 세계열강들에게 이 일을 중국의 장개석한테 알리지 말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로 하여 후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장개석이 파견한 중화민국의 외교대표 송자문을 만났을 때 “만약 출병하여 대일 작전을 한다면 미국은 오직 <얄타협정>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러자 송자문은 이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동맹군 열강들은 이른바 <얄타협정>의 이익 획 분은 세계인민의 자유를 위해 싸운 반파시스트 진영을 위한 것이라면서 중국의 이익은 염두에도 없었으며 송자문한테는 아무런 태도 표시도 않았다. 그 시기, <얄타협정>의 대부분 내용은 엄격한 비밀에 붙여졌으며 송자문 역시 귀국할 때까지 절반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귀국 후 송자문이 장개석한테 외몽골의 독립 문제를 언급하자 장개석은 크게 놀랐다. 중국은 세계 반파시스트 진영의 일원이었지만 중국의 이익은커녕 손해만 늘어나게 됐던 것이었다. 미국의 허위적인 얼굴에 대해 장개석은 깊이 알 수 있었다. “미국인은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스탈린과의 담판이 필요한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한 장개석은 송자문을 단장으로 한 중국정부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 외몽골 문제를 갖고 소련정부와 담판을 하게 했다. 하지만 이 담판은 근본 상 불평등의 원칙에서 진행된 담판이었다. 스탈린을 위수로 하는 소련대표단은 대일 작전을 하는 대가로 장개석으로 하여금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는 정치적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송자문과 장경국(蒋经国)을 비롯한 중화민국 대표단은 상대를 깔보는 소련의 그 오만한 태도와 중국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사진 : 인터넷 한편 장경국은 장개석의 친필 신을 갖고 <비 정식대표>의 신분으로 스탈린을 배알, 외몽골의 문제를 회피하면서 측면적으로 스탈린의 설복하려고 했다. 장경국이 찾아가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아주 친절했다. 그러자 장경국은 열정적으로 스탈린을 높이 쳐올리면서 반파시스트 전쟁에서의 소련의 승리는 스탈린 동지의 영명한 영도와 갈라놓을 수 없다고 나서 중국 또한 현재 반파시스트 세력과의 결전의 결심은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파시스트의 멸망은 이미 시간적 문제라고 확신하기도 했다. 이어 공식적인 협상에 들어가자 장경국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얄타협정>에서 외몽골을 독립시키려고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면 조국의 영토를 수호하려는 중국정부의 원칙에 위배되며 만약 민국정부가 승인한다면 중국 국민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외몽골문제가 언급되자 스탈린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스탈린은 대뜸 엄숙하게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한 말의 뜻을 잘 압니다. 하지만 당신도 이것만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당신들한테 도와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우리한테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즉 당신들을 도와 일본을 내쫓아 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당신들한테 힘이 있어 우리의 도움이 필요가 없다면 나 또한 이러한 요구를 제기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반드시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외에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친 스탈린은 장경국 등을 물러가라는 뜻으로 손을 내 저었다. 그 뒤 중국대표단 단장인 송자문은 소련대표단과의 담판 내용을 장개석한테 회보한 다음 장개석의 지시에 의해 외몽골 문제를 해결할 세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첫째, 소련과 계약을 체결해 결맹 기간 소련이 외몽골에 군대를 주둔할 수는 있게 한다. 둘째, 소련과 계약을 체결해 결맹 기간 외몽골에서 고도로 되는 자치를 실시할 수 있으며 소련이 외몽골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도 허락한다. 셋째, 소련과 계약을 체결해 소련이 외몽골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으며 정치와 외교에서 자주와 자치를 실시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삼민주의> 원칙에서만 가능하며 이는 소련인 영국의 정치성질과는 달라야 한다. 그러나 이런 양보는 근근히 중국 측의 입장일 뿐 소련의 도움이 필요했던 중국으로서는 소련을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나중에 스탈린은 참을성이 없어졌으며 장경국한테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강요했고 공공연히 소련이 외몽골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장개석은 이러한 담판 결과에 대해 진작 예견하고 있었다. 다만 장경국이 소련에서 유학했고 또한 소련 여자를 아내로 맞았기에 그 연분으로 스탈린이 장경국의 안면을 좀 봐줄 것이란 요행을 바랐을 뿐이었다. 결국 장개석은 마지막 카드까지 포기하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어쩔 수 없다. 일본을 내쫓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모든 것은 우리가 약하기에 조성된 악과이다. 약한 나라에는 외교가 없기 마련이다.” 1945년 7월 7일, 장개석은 눈물을 속으로 삼키면서 송자문한테 한통의 <굴욕>의 전보문을 날렸다. 외몽골의 문제에서 중소간의 쟁점은 무엇인가를 잘 찾아봐야 한다. 중소간의 공동이익과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일본을 격파한다는 선제 조건에서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기 바란다. 1945년 7월 9일, 제4차 중소담판에서 중국대표단은 소련대표단의 거듭되는 압력으로 부득불 소련 측이 주장하는 조건에 동의를 표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스탈린이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압력을 가하게 된 데는 다른 원인도 있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일찍 이렇게 밝힌 바가 있었다. “소련이 외몽골을 독립시키는 것은 단지 정치상에서의 수요와 군사상에서의 우려여서만이 아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외몽골은 시베리아 철도의 복지이다. 앞으로 중국이 강대해진 다음 외몽골로 출병하여 시베리아 철도를 차단해 버리면 소련은 전략적으로 매우 위험해지게 된다.” 당시 소련이 이렇게 우려한 것은 민국정부가 미국과의 관계가 밀접하였기에 향 후 강대해지면 외몽골을 통해 어떤 도발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였다. 다른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이 중국의 만주에 출병한 것은 기실 민국의 요청보다는 미국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장개석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약했기에 외교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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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6
  • 중국군 5년간 '라오산 전투'서 베트남군 얼마 소멸했나?
    편집자의 말: 최근 펑황망의 군사사이트는 <중국군 5년간 라오산 전투서 베트남군 얼마 소멸했나?>란 글을 발표했다. 글은 라오산전투 당시 중국군과 베트남군이 투입된 군부대와 장비 등을 서술하면서 중국군이 베트남군을 얼마 소멸하고 파괴한 베트남군의 장비와 진지 등을 수치로 나열하면서도 중국군이 본 손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라오산전투는 중국군이 승리한 전투라고 점 찍었다. 한편 베트남 매체에서도 라오산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중국군을 얼마 소멸했다고 하였지만 역시 저들의 손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 어느 쪽의 주장을 믿어야 하는가? 명지한 독자라면 객관적인 분석으로 읽고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베트남 국경전쟁 중국군 사진이다. 1984년부터 1989년 사이 5년간의 중국-베트남 국경전투 라오산과 저양산(老山、者阴山)동안 양측은 좁은 국부전장에 많은 수의 군과 다양한 무기들을 투입, 길고 치열한 경쟁은 전쟁 역사에서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중국군의 관점에서, 곤명군구, 남경군구, 제남군구, 난주군구, 북경군구 및 성도군구에는 6 개의 야전군/집단군(14군, 11군, 1군, 67군, 47군과 27군) 1개의 강력사(37사), 변방부대 (운남 성 군구 부대) 및 포병, 공병, 기술병, 정찰병 등 5개 병종의 군대와 공군 항공병, 대공 미사일 부대 그리고 변경민병, 민공으로 참가인수구 도합 35명에 달했고 각종 포 8200문, 탱크 30여대, 4만 여대의 차량, 비행기 출동차수 2900여대였다. 이렇게 작전규모는 신 중국 건립 후 1950년과 1979년에 이어 세 번째로 방대한 규모였다. 전투 중 중국군의 각 병종의 부대들은 협동작전을 진행, 240 만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하여 보병을 지원하면서 도합 3만 6000여명의 베트남군을 소멸하였다. 이중 죽은 베트남군의 수는 1만 5000여명, 부상당한 베트남군의 수는 2만 여명, 포로된 베트남군의 수는 202명었다. 그리고 베트남군의 포 1000여문, 200대 이상의 군용차량, 4대의 탱크 및 많은 장비와 요새, 화력망, 지휘소, 창고 등을 파괴하였다. ▲중국-베트남 국경전쟁 베트남군 사진이다. 한편 베트남 육군과 관련하여 보면 선후로 라오산 전투에 참가한 보병들로는, 보병 313사, 314사, 316사, 356사, 312사, 325사, 31사, 3사의 2연대, 322사의 567연대, 328사단의 2연대, 568연대가 포함된다. 그리고 포병 168대대, 36대대, 397대대, 특공 821 및 198연대, 하선성 독립 247연대, 산라성 독립 754연대 등 20만 명이 넘는 병력과 수많은 기술 장비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전쟁 후 베트남측은 저들의 손실 수치를 공개하지 않았다. 지금은 작은 의문이 있다. 즉 전투에서 적을 섬멸시켰다는 것이 얼마나 진실한가이다. 라오산 전투는 두 산 사이로 주로 양측의 대립 환경에서 이루어졌으며, 상대방을 제압하는 화력을 구축하고 목표를 파괴하는 종합적인 방식으로 전장을 통제하는 것이었으므로 통계결과에 특정적인 추정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통계를 만들 때 위치확인을 기초로 하고 기술정찰을 통해 적의 정보를 중요한 참고 자료로 삼으며 동시에 1선 군부대가 보고한 결과의 무게를 측정하게 된다. 또한 예하면 공격지점에 출격하면서 베트남군의 화력지점과 숨어있던 동굴이 무너졌을 때 그것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저 그것을 3명의 중기관총 화력과 2명이 경기관총 화력으로 계산되었으며 3-5명이란 추측에 따라 보고되었다. 그리고 작전 중 적 섬멸인수가 전장의 육안검사에 따라 보고되기도 했다. 전쟁 후 베트남의 한 정보에 따르면, 허장성(河江省) 북부 국경전쟁을 위해 수건된 능원에는 2500명 이상 사상자의 자료가 모아졌으며 이는 추적할 수 없는 많은 다른 실종자로 간주되지 않다. 또한 베트남 육군 옛 군인들의 회고록은 외상성 손실이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반영했다. 수만 명의 베트남 사상자 수치가 신뢰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5년 이상 지속된 이 아열대 산악과 정글에서의 전투는 매우 치열하고 잔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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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1
  • 대륙 제일의 미녀-천훙
    ●철 민 천훙(陈红)-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면 어떤 이들은 흔히 일부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천훙은 이미 젊었을 때의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답기는 하나 어떻게 평가해도 대륙 제1의 미녀와는 거리가 있다. 아울러 지금의 천훙은 한 남자의 부인이다. 비록 그들 부부 사이의 금슬이 매우 좋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대륙 제일의 미녀>란 호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게 아닌가?! 그럼에도 왜 그녀를 여전히 미녀라고 하는 걸까? 그것은 현재 그녀의 됨됨이와 스타일에서 그제 날 그 아름다움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1968년 천훙은 장시(江西)성의 상라오(上饶)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연기를 즐기었기에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상하이 희극학원(戏剧学院)에 입학할 수 있었고 졸업 후에는 그 길로 연예계에 데뷔할 수 있었다. 1986년 18세의 나이에 천훙은 TV 고대신화 드리마 <요재지이(聊斋志异)>에 출연, 아름답지만 성격이 괴벽한 여자의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어 많은 사람들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1990 년 천훙은 <어린 다이족 딸의 사랑>에서 아이커(艾可)의 역할을 담당, 스토리는 간단했지만 천훙의 순수하고도 깨끗한 얼굴, 밝고도 따뜻한 미소, 감화력이 있는 연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다이족 소녀와 총각이 나누는 사랑의 장면에 말려 들어가는 듯 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 이듬해 1991 년, 23세인 천훙은 삼국지에서 나오는 천하제일의 미녀 디아오찬(貂蝉)의 역을 성공적으로 부각, 핑크빛의 밝은 눈과 이에 대조되는 하얀 이빨, 삶을 염원하는 그녀의 연기는 디아오찬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보게 했다. 성공을 이루는 것은 극복하기 힘든 고전이지만, 그 시대의 모든 측면에서 불리한 조건이 있었음에도 천훙이 연기해낸 디아오찬의 예쁜 자태는 실로 타고난 천부적인 것이었으며 아무도 그것을 모방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93 년 천훙은 <물과 구름 사이(水云间)>에서 왕즈쇈 역을 담당하면서 일약 더욱 한동안 유명해지게 됐다. 드라마에서 그녀는 비록 여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주인공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았다. 당시 TV 드라마는 모든 사람들이 집과 거리와 차선에서 보고 있던 TV 드라마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드라마의 내용보다는 천훙의 얼굴을 보려고 더욱 이 드라마 시청에 집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기 한동안 천훙의 아름다움은 복제할 수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00 년 천홍은 30 대 초반의 나이로 가장 매력을 발산하던 시기였다. 이 해 드라마 <따밍궁스(大明宫词)>에서 태평공주 역을 맡은 천훙은 비록 짙은 화장에 어딘가 요염한 외모를 보이면서도 행동자세는 기품이 있고 우아하고도 활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매료되게 했다. 1996년 천훙은 영화감독 천카이커(陈凯歌)와 결혼, 천카이거를 놓고 볼 때 중국에서 많은 유명한 영화를 제작한 유능감독으로 그의 영화중 하나가 바로 제1회 중국영화 종려나무상을 받은 <패왕별희(霸王别姬)>이었다. 결혼 당시 천카이거는 천훙보다 15살이 더 많은 1952년생이었다. 결혼 뒤 천카이거는 거의 영화화면에 나타나지 않았고 무대 뒤에서 일하는 프로듀서가 되었으며 TV산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천훙과 천카이거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다. 이 중 둘째 아들 천베이위(陈飞宇)도 군오락권에서 활약하고 있다. 영준하고도 품위가 있어 어머니의 외모를 물려받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천훙한테 있어서 예전의 미모는 좀 많이 망가진 것 같으나 그녀는 여전히 현재의 생활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이상적인 남편에 두 아들 그리고 윤기가 돌 듯 여유가 있는 생활, 이는 그만큼 인생의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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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5
  • 장개석 신변의 홍색 여첩보원 ― 심안나
    ▲ 사진설명: 1948년 남경에서 찍은 심안나와 화명지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장개석의 국민당 군이 모택동의 공산당군에 패해 섬도 대만으로 쫓겨간 것은 이미 지나간 역사로 되었다. 하다면 월등한 미국 군장비로 무장하고 거기에 수많은 출중한 군 고급 지휘관들이 있는 장개석 군이 왜 <좁쌀에 보총>에 불과한 공산당군에 여지가 없이 완패해 그런 꼬락서니로 되었을까? 여기에는 국민당군이 공산당에 비해 민심을 얻지 못하고 많은 군장령들의 부패상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공산당의 첩보전이 국민당군의 비밀을 수많이 수집하여 공산당군에 넘기어 남경의 일거일동을 연안에서 손금보 듯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공산당의 지하공작 즉 첩보 사업은 그 인원수와 사업의 완성도 방면에서 국민당을 능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안나(沈安娜)―그녀는 출중한 홍색 여첩보원으로, 장시기 동안 국민당 중앙당부의 기록원(速记员)으로 국민당 통치구에 잠복해 있으면서 국민당 최고급별의 당, 정, 군 특별회의 정보들을 대량 수집하여 중공 측에 넘기면서도 단 한번의 실수가 없었고 그 신분도 폭로되지 않아 국내외 첩보계의 경탄을 자아냈다. 1915년 심안나는 절강성 한 선비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7살이 되던 해 그녀는 여차여차한 사연으로 당시 중공의 특공일군이었던 화명지(华明之)를 알게 되었다. 당시 심안나는 점잖으면서도 여러모로 박식한 화명지를 곧 잘 따랐고 알게 모르게 심안나와 화명지의 사이는 아주 좋았다. 결국 그녀는 화명지의 영향을 받아 첩보 사업이란 이 길을 선택했다. 1934년, 자신의 첩보업무의 전업을 선택할 때 심안나는 가정의 경제사정으로 상대적으로 학비가 적은 스피드 기록반을 골랐다. 이는 향후 그녀가 하는 사업을 위해 양호한 토대를 닦았다. 스피드 기록반을 졸업한 후 심안나는 조직의 지령에 의해 민국 절강성 정부에 들어가 기록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녹음펜이 없는 당시엔 모든 회의기록은 전적으로 종이와 필에 의거해야 했다. 각종 회의로 매일 매일이 이어지는 정부기관에서는 반응이 빠르고 각종 기교가 겸비된 기록원일수록 상급의 총애를 받기 마련이다. 심안나가 바로 그랬다. 그녀는 참답게 일하는 성실한 일군이었고 거기에 민첩하고 업무수준도 높았기에 빠른 시일 내에 절강성 주석 주가화(朱家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었으며 또한 화명지의 도움으로 대량의 중요한 정보들을 수집하는 요령도 장악하게 되었다. 자주 만나고 여러모로 교류하는 과정에 심안나와 화명지 사이의 <혁명적 동지의 관계>는 애정관계로 승화되어 사업과 생활에서 모두 편리하였다. 1935년 가을, 조직의 비준으로 심안나와 화명지는 상해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결혼 후 조직의 지령으로 잠시 첩보 사업에서 손을 떼고 남편의 뒤바라지에 정성을 쏟았다. 그러다가 1938년 원 국민당 절강성 주석이던 주가화가 당시 국민당 중앙당부 비서장으로 진급하자 심안나한테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바로 주가화한테 재차 접근하는 것이었다. 일찍 심안나의 총명과 업무능력을 인정했던 주가화는 심안나가 남경으로 찾아가자 그녀를 아주 반겨맞아 주었다. 주가화의 추천으로 심안나는 아주 쉽게 국민당 중앙당부의 기록원으로 될 수 있었다. 그 때로부터 심안나는 자신의 총명과 숙련된 기능을 보여주면서 선후로 각종의 많은 고위층 회의에 참가하였으며 아울러 많은 중요한 정보를 수집해서는 남편 화명지를 통해 당조직에 제공하군 하였다. ▲ 사진설명 : 국민당 고위층 회의에서 장개석이 연설할 때 뒷줄 오른쪽 기록하고 있는 심안나 한편 이 기간 동안 그녀는 국민당 중앙 급의 여러 계층 고위 관리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그들의 추천에 의해 하마터면 국민당 중앙의 <입법위원>으로 될뻔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듯 높은 <벼슬자리>도 결코 심안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가장 편리한 직업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국민당의 중요정보를 수집해 공산당에 제공하기 위하여 그녀는 “아직은 나이도 젊고 자격과 능력도 부족하다”고 겸손한 체 하면서 그 <벼슬자리>를 사절하였다. 이는 많은 국민당 고위급 관리들의 감동을 더욱 자아냈다. 심안나의 사진 자료들을 보노라면 한 장의 사진이 각별히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그 사진 한 장이 그만큼 여러 가지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진은 1948년 4월, 남경 정가교(丁家桥)의 국민당 당부 예당에서 장개석이 회의를 주최하는 것을 촬영한 것으로 일찍 국민정부의 <중앙일보>에 게재된 것이었다. 사진에는 장개석이 주석대 중앙에 서서 연설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주석대 뒷줄 오른쪽 즉 장개석과 약 5미터 거리를 두고 1남 1녀가 회의기록을 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그 중 머리를 숙이고 기록하고 있는 여성이 바로 적의 핵심부에 잠복해 있었던 심안나였다. 그러니 이 사진이야말로 심안나의 첩보사업 생애에서의 아주 진귀한 견증으로 되고 있다. 장장 14년에 달하는 국민당 통치구에서의 잠복사업 중 심안나와 그의 남편 화명지는 수많은 위험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부부는 서로 밀접히 배합하면서 번마다 안전하게 그런 위험고비를 넘기었다. 이는 중공의 비밀사업 전선에서 부부합작의 전형적인 본보기로 되고 있다. 1949년 4월 중국인민해방군 100만 대군이 장강을 뛰어넘어 남경을 함락하자 심안나와 화명지는 해방군 대오와 합류하는 것으로 장장 14년에 달하는 지하첩보원 생애을 완벽하게 마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후 심안나는 국가안전국에 배치되어 정년이직을 할 때까지 새 중국의 안전을 지키는 사업에 그 심혈을 몰부었다. 1989년 중국 국가안전부에서는 심안나에게 영예상장 및 영예증서를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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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1
  • 옛 상해의 '천애가녀' - 주선
    일찍 옛 상해의 <천애가녀(天涯歌女)>로 알려진 주선(周璇)은 1920년 8월 1일, 강소성 상주(常州)의 한 소씨 가문에서 태어났고 원명은 소박(苏璞)이었으며 8남매 중 재매로는 차녀였다. 주선의 동년 시기는 몹시 불행했다. 1923년 주선은 아편쟁이였던 외숙 고사가(顾仕佳)한테 유괴되어 금단현(金坛县)의 왕씨 가정에 팔려가 왕소홍(王小红)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이어 왕씨 부부의 이혼으로 다시 상해에 있는 주(周)씨 가정으로 팔려가 주소홍으로 되었다. 1928년 당시 주씨 가정은 몹시 가난하여 거의 매일을 주선의 수양모(养母)가 품팔이를 한 돈으로 근근득식으로 살았다. 거기에 아편에 인이 박힌 양부(养父)로 인해 가난은 설상가상이었다. 한번은 돈에 눈이 어두운 양부는 8살밖에 안 되는 주선을 기방(妓院)에 팔아넘기려 했고 마침 이 때 수양모가 나타났기에 그는 일대 수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 주선은 어릴 적부터 노래에 끼가 있었으며 학교에 입학하자 항상 그의 가창력은 첫 자리를 차지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1931년, 만 11살에 불과한 주선은 당시 자신이 부른 <민족의 빛>이란 노래로 주목받아 상해 명월가무단(明月歌舞团)에 입단, 이듬해인 1932년에는 첫 개인 레코트 <특별열차>를 발매하면서 주선의 불우했던 연대는 일단 한 단계 막을 내렸다. 그 뒤 1934년 주선은 가요 <5월의 꽃>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 같은 해 상해 <대 석간>에서 주최한 <방송가수 경연>에서 제2위에 올랐으며 1935년부터는 영화계에 진출하는 등으로 연계 권 생활의 전성기에 들어섰다. 그리고 1937년 주선이 주역을 맡은 영화 <거리의 천사(马路天使)>는 그의 표현예술생애의 대표작으로 되었으며 그가 영화 삽곡으로 부른 가요 <천애가녀(天涯歌女)>와 <사계절가>는 한시기 상해의 화인사회에서 가장 인기가요로 유행되기도 했다. 1938년 주선은 상해국화영업회사(上海国华影业公司)와 계약을 체결, 1941년에는 <상해일보>가 주최한 <영화 황후> 선발에서 <영화 황후>로 평선되었으나 그는 이 영예를 완곡히 거절했다. 당시 주선이 왜 이를 거절했는지는 그렇다 할 만한 해명기록이 없으며 지금까지도 비밀로 남아있다. ▲ 사진설명 : 민국시기 10대 여 스타들, 오른쪽으로부터 왕단봉(王丹凤), 백광(白光), 이려화(李丽华), 주선(周璇), 호접(胡蝶), 진운상(陈云裳), 진연연(陈娟娟), 손경로(孙景璐), 나란(罗兰), 공추하(龚秋霞) 1946년 주선은 홍콩으로 가게 되며 그 이듬해 애정 편 영화 <장상사(长相思)>의 여 주역을 맡았다. 그리고 홍콩에서 그가 부른 노래들 중 대표적인 것이라면 <밤 상해>로서 이는 그의 대표곡일 뿐만 아니라 당시 전반 중화권 가요계의 대표곡 중의 하나였다. 1950년 주선은 홍콩에서 다시 상해로 돌아왔고 그 이듬해 상해 대 광명영업 회사(大光明影业公司)의 요청으로 영화 <평화의 비둘기>를 찍던 중 정신분열증이 발작하면서 상해 홍교요양원에 입원, 20년에 가까운 가수 및 영화배우 생애를 마감한다. 주선은 자신의 연예인 생애에서 도합 43부의 영화에 출연했고 무대에서 200여수의 노래를 열창했다. 그만큼 당시의 그는 육체와 정신적으로 피곤했고 압력도 컸으며 그가 걸린 정신분열증도 육체와 정신적으로 피곤했던 것과도 관련된다는 설도 있다. 주신의 개인생활을 보면 비록 생모는 아니었지만 수양모 엽봉주(叶凤珠)와의 사이가 각별했다. 그는 스타가 된 뒤 장기간 이 수양모와 함께 생활했으며 1949년 상해가 해방된 뒤에도 여전히 화산로(华山路)에 있는 침류 저택(枕流公寓)에서 수양모와 함께 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1952년 주선이 당시 동거남인 당태(唐棣)한테 사기당한 사건이 발생하자 수양모 엽봉주가 나서서 정안구 인민법원(静安区人民法院)에 기소하여 당태의 불법행위를 적발했다. 한편 주선의 생부 소조부(苏调夫)는 남경 금릉대학을 졸업하고 선후로 목사와 교사 생활에 몸을 담그었으며 생모 고미진(顾美珍)은 남경 금릉여자대학을 나온 뒤 장기간 간호사로 있다가 새 중국의 창립 전야에 혁명에 참가, 해방 후에는 중국 국무원 위생처의 담당 간호장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일찍 주선이 실종된 뒤 사처로 찾아다니며 수소문했으나 딸을 찾기에 실패했다가 1957년 여름에야 신문을 통해 정신병으로 입원한 상해의 여 스타 주선이 자기의 딸임을 확인, 앞당겨 이직수속을 하고 상해로 향발했으나 그 때는 주선의 병세가 위독한 때라 고미진은 딸한테 지나온 경과를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 사진설명: 첫 번째 남편 엄화와의 결혼사진 다른 한편 주선의 혼인 사 역시 불행했다. 1936년 주선은 작곡가 엄화(严华)와 정혼, 1938년 7월 10일 북평의 춘원호텔(春园饭店) 혼례를 치렀으나 둘의 혼인생활은 3년 만에 깨어졌다. 서로가 상대방이 외도한다고 의심하면서 아웅다웅하다가 주선이 가출했고 결과 1941년 주선과 엄화는 이혼서류에 서명하고 말았다. 주선의 두 번째의 남자는 주회덕(朱怀德)이란 이름을 가진 상인으로 주선과의 동거기간 그는 첨언밀어(甜言蜜语)로 주선의 부분적인 재산도 가로챘다고 한다. 1950년, 임신한 몸으로 상해에 돌아온 주선은 신문을 통해 주회덕과의 결렬을 성명, 그 해 말에 큰 아들 주민(周民)을 출산했다. 주선의 세 번째 남자는 미술에 종사하는 화가인 당태(唐棣)였다. 헌데 1952년 5월, 주선이 이 화가와의 결혼을 준비하고 있을 때 당태가 상해시 정안구 인민법원으로부터 사기 및 유인간통 죄로 유기형 3년에 언도되면서 이 혼인 역시 깨어지고 말았으며 같은 해 둘째 아들 주위(周伟)가 태어났다. 일찍 3살 나던 해 외숙의 유괴에 의해 친부모를 떠나 남한테 팔려 다니며 생활했던 주선의 불우했던 동년, 그 뒤 1930년대부터 천성적인 목소리와 미모 그리고 필사적인 노력으로 20년간 옛 상해의 무대와 스크린에서 활약했던 <천애가녀> 주선- 하지만 그녀는 너무도 단순했다. 착하게 살려고 하였지만 세상은 무서웠다. 착한 주선은 늘 타인한테 속임을 당하였다. 특히 애정에서 늘 남자들한테 정감과 재산마저 사기당하군 했다. <미녀박명(美女薄命)>이란 사자성구가 있다. 주선의 운명도 마찬가지었다. 1957년 9월 22일, 주선은 뇌막염으로 상해에서 사망, 그 때 그의 나이는 37살밖에 안되었다. 주선이 사망한지 거의 40년이 지난 1995년 중국 영화계의 인사들은 주선한테 <중국영화 세기상 여배우상(1995年获得中国电影世纪奖女演员奖)>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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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31
  • 송미령마저 기가 꺾인 “극동의 진주” - 황혜란
    [동포투데이] 2015년 5월 7일부터 8월 16일까지 미국 뉴욕에서 열린 뉴욕대도회(大都会) 예술박물관의 패션 전람에는 <중국의 경화수월(镜花水月)>로 명명된 치포 한 벌이 전시되어 있었다. 공예가 정교롭고 극히 아름답고도 고급스럽게 제작된 이 치포는 1932년에 만들어진 것이며 1976년 일찍 중화민국 첫 외교장관이었던 고유균의 세 번째 부인 황혜란(黄蕙兰) 여사가 뉴욕대도회 박물관에 증송한 것이었다. 화제는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지난 세기 20년대로 올라간다. 당시 송경령과 손중산은 광주로부터 북평으로 오게 된다. 그 때 줄곧 자신이 입은 의상이 시대와 너무 뒤떨어졌다고 느끼던 송경령은 외교관 고유균의 저택에 머무는 동안 고부인의 옷장을 자주 훔쳐보군 했었다. 옷장에는 당시 가장 유행되는 옷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옷장의 의상 중 가장 눈에 띠는 것이 치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황혜란은 늘 치포를 입기 즐겼으며 사람들은 모두 황혜란의 패션 영감(灵感)이 그녀로 하여금 고유균의 마님으로 되게 했다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바로 황혜란은 치포의 매력으로 국제사교계에서 활약, 그 화려함과 도고함은 늘 송미령을 압도했고 어느 한 사교 장소에서는 <극동의 진주>란 명성을 갖게 되었으며 후에는 지난 세기 2년대부터 40년대까지 <최가착장(最佳着装)>의 중국여성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전하는데 따르면 황혜란의 부친 황중함(黄仲涵)은 자바자바(爪哇爪哇-지금의 인도네시아)의 <사탕왕>이었다. 당시 황중함은 공개된 부인만 해도 18명이었고 자녀는 도합 42명이었으며 그 중 가장 아끼고 총애했던 규수가 바로 황혜란이었다. 이렇듯 명문가정의 규수로 태어난 황혜란은 일찍 3살 나던 때 어머니로부터 80그람짜리 보석이 박힌 금목거리를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소녀시절은 유럽에서 주로 보냈기에 유럽의 황실문화와 명류사회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황혜란의 생애 중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이라면 바로 복장에 대한 집착과 민감성이었다. 당시 이른바 품위가 있다는 중국의 미녀들은 자국의 비단견직물에는 별로 호감이 없이 거의 천편일률로 프랑스 패션에만 눈길을 주어왔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황혜란은 처음부터 옛식자수(老式绣花)와 비단견직물을 선호했으며 늘 수놓은 적삼에 긴 골든 벨루어(金丝软缎长裤)를 받쳐 입군 했다. 이는 당시 외국영화에서 신비하게 등장하는 이른바 <중국사조(中国风)>였으며 그 앞장에는 항상 황혜란이 있었다. 한편 장학량의 회억에 따르면 기실 황혜란 그 본인은 그닥 이쁜 여인이 아니었다. 거기에 자기의 나이를 속이는가 하면 성격도 괴벽한 등 폐단도 적지 않았다. 한번은 고유균의 내연녀한테 질추한 황혜란은 마작을 노는 고유균의 머리에 차물을 쏟는 행위도 거침없이 저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황혜란이 사교계의 인기 여성으로, <극동의 진주>로 될 수 있은데는 의상꾸밈에 집착하고 또 그런 의상들이 사회, 특히 사교계 신사숙녀들의 눈길을 끌었다는 점에 있었다. 지난 세기 20-30년대 홍콩의 일부 여인들은 이미 골동품이나 마찬가지인 자수 스커트를 곧 잘 피아노 위에 덮어 놓군 했다. 그것은 구식 스커트라 그냥 버릴 수 없어 그냥 먼지를 막기 위해 피아노 위에 덮었을 뿐이었지만 황혜란은 이런 구식 스커트들을 값싸게 사들여서는 밤마다 입고 사교장소에 들어 서군 했다. 이는 한시기 프랑스 파리의 화류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그 뒤 이런 스커트의 값은 몇 배 뛰었다. 황혜란은 무턱대고 자신의 의상을 추구하는 여성들을 경멸했다는 설도 있다. 어느 한 겨울날, 황혜란은 피부병으로 양말을 신을 수 없어 맨발 바람으로 상해의 거리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자 이튿날 상해의 여성 거의 전부가 맨발 바람으로 거리를 행보, 이에 황혜란은 “맹목적인 모작품들”이라고 크게 냉소했다고 전해진다. 황혜란의 애정사를 보면 고유균이 결코 첫 사랑이 아니었다. ▲ 민국의 외교장관 고유균과 그의 세번째 부인 황혜란 일찍 황혜란은 승마를 배우면서 자기와 비슷한 승마애호자인 한 은행가의 아들한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함께 경마장으로 드나들면서 나중에는 열애속에 빠져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인정탐을 통해 그 은행가의 아들이 부인과 자녀가 있는 유부남임을 알게 된 황중함은 단연히 딸더러 그와의 관계를 끊도록 했고 이어 모친을 따라 영국으로 가게 하였다. 영국에서 황혜란은 상류사회와 접촉하게 되면서 그 한 단락의 짧은 애정사를 잊게 되었고 파리에 거주하는 언니 황종란(黄琮兰)의 소개로 당시 민국의 첫 외교관이었던 고유균을 알게 되었다. 당시 32세인 고유균은 그의 두 번째 부인을 금방 잃은 터인지라 황종란 가정의 피아노 위에 놓여있는 황혜란의 사진을 보자 대뜸 반했다고 한다. 첫 대면에서 고유균에 대한 황혜란의 인상은 아주 평범했다. 고유균은 이전에 자기를 집착하던 신사들과는 달리 의상은 아주 보수적이었고 머리칼도 아주 짧게 남기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총적으로 외교관으로서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예절상 거절할 수 없어 고유균과 며칠 만나는 동안 황혜란의 마음은 크게 움직이었다. 무릇 공원이나 극장 같은 공공장소에 가면 고유균은 항상 깎듯한 환대를 받았고 따라서 황혜란도 외교관 부인으로 마찬가지었다. 그는 처음으로 아주 수수한 용모를 가진 고유균한테는 부친 황중함의 재부로도 불가능한 권리와 명예가 있음을 느꼈으며 고유균의 특수한 신분은 황혜란한테 또 다른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펼쳐주기도 했다. 이렇게 되어 황혜란은 그녀 나이 19살에 고유균과 결혼해 그의 세 번째 부인으로 되었으며 이는 고유균으로 말하면 명예와 이익을 이중으로 얻은 셈이었다. 하지만 고유균과 결혼한 첫 날 황혜란은 외교관 생활의 다른 한 측면도 알게 되었다. 바로 동방화촉(洞房花烛)의 저녁, 그들 부부는 제네바로 가는 기차에서 밤을 보내야만 했다. 이 날 저녁, 황혜란은 그래도 결혼 첫 날의 분위기를 돋구려고 알심 들여 선택한 예복을 입고 나타났으나 고유균은 그녀가 입은 예복에는 별반 관심도 없었다. 고유균한테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황혜란은 이 날 밤 실면하고 말았다. 소녀시절 유럽에서 생활한 황혜란은 6개 국의 언어에 능통했고 상류사회의 예의도 많이 장악했으며 이는 고유균의 외교관 사업에 커다란 도움을 주기도 했다. 헌데 고유균은 황혜란에 대해 마치 가정 내의 <장식품>처럼 대할 때가 많았다. 마치 톨스토이의 어느 한 소설에서 나오는 남주인공이 부인을 가정의 <안락의자>에 비유한 것처럼 말이다. 이는 황혜란이 가장 염오하고 격분케 하는 생활이었다. 이렇듯 고유균한테는 항상 무시당했지만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30여년 생애를 통해 황혜란은 중국에 대한 많은 외국인들의 시각을 개변시켰다. 항상 도고한 자세를 잃지 않는 고귀함 또한 돈을 물 뿌리듯이 소비에 인색하지 않는 황혜란의 대범함 등은 당시 <동아병부(东亚病夫)>란 오명을 가진 약하고 낙후한 중국의 사정상 어느 정도 외교관 남편과 중국의 기상을 돋보이게 했다고 할 수도 있었다. 지나치게 총명하고 수준 높은 남녀의 혼인은 흔히 실패하기 마련이다. 1956년 55세에 이른 황혜란은 68세 되는 남편 고유균한테 이혼을 제출, 그러면서 그 이유에 대해 “고유균을 보면 대단히 존경스럽다. 하지만 그이는 중국이 수요하는 인물이었지 내가 수요하는 남편은 아니었다” 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약 2년간 황혜란은 미국 각지를 돌면서 <중국여성문제>를 화두로 강연에 나섰으며 매 1차의 강연마다 1500달러씩 받았다고 한다. 만년에 황혜란은 일찍 부친이 자기한테 남겨준 50만 달러의 이자로 생활하면서 미국 뉴욕의 맨하탄에 거주, 1993년 12월 자신의 100세 생일 날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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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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