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과 더불어 새롭게 인식되는 역사
■ 김철균
정전직후의 아버지의 생활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UN측 대표 월리엄 해리슨 중장과 북측 인민군 대장 남일 장군이 정전협정에 조인함과 아울러 한반도이 전 전선에 거쳐 총포성이 멎었다.
3년 1개월간 동족끼리 서로 밀고 밀리면서 마주 쏘고 찌르고 죽이고 하면서 혈투를 벌이던 전쟁은 드디어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결과를 맞이했다.
헌데 어머니가 손꼽아 기다리던 아버지는 돌아와주지 않았다. 넷째 할아버지의 둘째아들이며 나의 5촌 숙부인 김노돈씨가 눈에 총상을 입은채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8월 한국군의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집중영에 갇혀있었다던 다른 한 5촌숙부도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종무소식이었다.
후에야 내가 알게 된 일이었지만 당시 집으로 돌아온 5촌 숙부 김노돈씨는 넷째 할아버지한테 여차여차하고 아버지의 사정을 일러바쳤고 그 뒤 넷째 할아버지와 다섯째 할아버지가 조선으로 나가 웬 여인과 살림까지 차려놓고 생활하고 있는 아버지를 억지다짐을 붙잡아왔다는 것이다.
다음의 것은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들려준 얘기이다.
“그 당시 조선은 말그대로 ‘쑥대밭’이었다. 도시는 시멘트 덩어리와 벽돌들이 널려있는 폐허로 됐고 거리마다 의지가지가 없는 고아들이 득실거렸으며 농촌마을은 노인네와 아낙네 그리고 아이들뿐 사지가 멀쩡한 남정은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도시고 농촌이고 일터로 나가는건 말짱 여성들뿐이었다.
당시 중국군인들이 없었더라면 조선이란 나라는 그렇게 빨리 춰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네들이 있었기에 도시에서는 집을 지을 수 있었고 농촌에서는 밭을 다룰수 있었으며 철길과 도로같은 것을 보수할 수도 있었다. 남조선에 있는 미군과 북조선에 있는 중국군의 다른 점이란 바로 미군은 그냥 주둔만 하고 있었고 중국군은 조선을 도와 직접 복구건설에 투신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중국군까지 전후복구건설에 발벗고 나서는 마당에 조선인으로서 차마 조선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럴듯한 이유였다. 당시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의 참혹한 현실을 두고 모두들 차마 돌아설 수 없었다고들 했다. 하지만 이것이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전부의 이유였을까?…
후에 들은바에 따르면 정전후 군복을 벗은 아버지는 원산의 한 수산작업소의 세포위원장으로 비교적 잘 나갔다고 한다. 수산작업소 책임자였으니 매일 물고기를 먹을 수 있은건 물론 출근할 때도 자전거를 타고 다녔으며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이 물고기나 얻어가질까 하고 많이 치근덕거리기도 했다는 것이 후에 아버지가 동네사람들과 한 옛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넷째 할아버지와 다섯째 할아버지가 아버지앞에 갑자기 나타나 그의 억지다짐으로 중국으로 끌고 왔으니 아버지의 마음이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특히 당시 아버지와 동거하는 여인이 임신중이었다고 하니 더욱 그랬다.
그렇게 돌아온 중국이었으니 당시 아버지는 현성의 기관같은 사업터에 배치받을 수가 없었다. 조직적인 수속을 밟아서 귀국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중국공산당원 당적도 2년 뒤에야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이었을까? 아버지는 오랫동안 5촌 숙부인 김노돈씨를 소 닭보듯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난 세기 60연대 초기 3살이던 내가 급성폐렴에 걸려 생사를 다투게 될 때 5촌 숙부 김노돈씨가 송아지를 팔아 페니실린 몇대를 사온 덕에 내가 구사일생으로 소생하자 그제야 아버지는 5촌 숙부의 손을 잡고 백배 사죄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다음기 계속)
BEST 뉴스
-
건보 땐 ‘먹튀’, 연금 땐 ‘꼼수’…또 조선족 때리기인가
국내에서 불과 한 달가량 국민연금에 가입한 뒤 추후납부 제도를 이용해 가입기간 10년을 채우고 노령연금을 받는 중국인 사례가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보도는 최근 외국인의 추납 신청과 연금 수급 사례가 늘고 있다며 “특히 한국계 중국인을 중심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 -
하영에게 증조부의 죄까지 물을 것인가
배우 하영이 증조부 안상호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 의혹과 관련해 결국 고개를 숙였다. 하영은 12일 자필 사과문을 통해 “과오를 무겁게 받아들이며 후손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밝혔다. 가족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증조부의 삶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논란 이후 관련 자료를 직접 ... -
[중국 영화계의 조선족 감독·배우들 ②] 장률, 국경을 넘어 세계영화의 ‘지음’을 찾다
중국 조선족 영화감독 장률(张律) [인터내셔널포커스] 중국 영화계의 조선족 감독을 이야기할 때 장률(张律)은 빼놓기 어려운 이름이다. 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던 그는 마흔을 전후해 뒤늦게 카메라를 잡았지만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독자적인 영화세계를 구축해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
장동혁의 ‘중국 편이냐’ 질문…안보는 편 가르기가 아니다
▲ 외국 세력의 간첩 활동과 정보 유출, 대공수사를 둘러싼 논란을 형상화한 이미지. [AI 생성 이미지·인터내셔널포커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이재명 정부를 향해 “중국 편인지 대한민국 국민 편인지 확실하게 밝혀라”고 말했다. 중국의 선거 개입과 간첩 활동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대... -
야스쿠니 향해 고개 숙인 일본 총리…패전 81년, 무엇을 말하나
▲ 일본 총리가 패전 81주년인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방향을 향해 요배하고 자민당 총재 명의로 다마구시료를 봉납하면서 일본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사진은 야스쿠니 신사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이미지. [AI 생성 이미지·인터내셔널포커스] 일본이 패전을 맞은 지... -
[중국 영화계의 조선족 감독·배우들 ⑤] ‘영화황제’ 김염…식민지 조선에서 상하이 은막의 전설로
[인터내셔널포커스] 1930년대 중국 상하이 영화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조선 출신 배우가 있다. 중국식 이름 진옌(金焰), 한국 이름 김염. 본명은 김덕린(金德麟)이다. 그는 중국 영화에 출연한 외국 출신 배우 정도가 아니었다. 중국 영화의 첫 황금기로 불리는 1930년대, 당대 최고의 남자 스타 자리에 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