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사신 장건(張騫)은 흔히 ‘실크로드를 연 인물’로 불린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건은 미지의 세계를 답사한 전달자라기보다 동아시아와 유라시아를 잇는 외교 질서를 구상한 전략가에 가까웠다.
장건은 스물다섯 살이 되도록 이름 없는 궁정 시종 ‘랑(郎)’에 불과했다. 훗날 실크로드를 연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평범한 관리였다.
초·한 전쟁의 혼란을 틈타 흉노의 묵돌선우는 세력을 급속히 확장했다. 중국의 동북과 서북을 장악하고, 서역을 정복해 각국에 무거운 공납을 부과하며 한나라를 끊임없이 압박했다. 서한 초, 한나라는 흉노 앞에서 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다.
전환점은 한무제 유철의 즉위였다. 그는 서역이 중원 안보와 국운에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표면적으로는 화친을 유지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흉노를 견제할 전략을 모색했다. 그 과정에서 흉노에 쫓겨 일리강 유역으로 밀려난 월지(月氏)의 존재가 주목받았다. 월지 왕은 살해당했고, 그 머리는 술잔으로 쓰였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흉노에 대한 월지의 원한은 깊었다.
한무제는 월지와의 동맹을 통해 흉노를 동서에서 협공하려는 대담한 구상을 세운다. 그러나 서역은 미지의 세계였다. 끝없는 사막과 초원, 그리고 흉노의 위협을 뚫고 갈 사절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황제는 전국에 사자를 모집했고, 이때 장건이 응모했다.
출세의 기회를 갈망하던 장건은 위험을 알면서도 지원했다. 그는 수백 명의 지원자 가운데서 뽑혀 100여 명 규모의 사절단을 이끌고 서역으로 향했다.
기원전 139년, 장건 일행은 장안에서 출발해 하서주랑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미 흉노의 지배 아래 있었다. 결국 일행은 흉노 기병에게 붙잡혀 군신선우의 왕정으로 끌려갔다. 선우는 “월지는 내 북쪽에 있는데, 한나라가 어찌 마음대로 갈 수 있느냐”라며 장건의 사명을 비웃었다.
장건은 살해되지는 않았지만, 흉노에 억류됐다. 관직과 부귀, 안락한 삶의 유혹도 뒤따랐다. 심지어 흉노 여인과의 혼인까지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한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한나라의 부절을 잃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탈출의 기회를 기다렸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아이까지 생긴 상황에서도 장건은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그는 수행원 당읍부와 함께 탈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장안으로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사절단은 사라졌고 동료도 없었지만, 그는 홀로 서역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서역의 정세는 크게 바뀌어 있었다. 월지는 다시 서쪽으로 이동해 대하(大夏)를 정복하고, 비옥한 땅에 정착해 더 이상 흉노와 싸울 의지가 없었다. 장건은 천산과 타클라마칸 사막, 파미르고원을 넘는 생사의 여정을 거쳐 대완(오늘날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분지)에 도착했다. 그 길은 사실상 목숨을 담보로 한 도보 횡단이었다.
대완과 강거를 거쳐 마침내 대월지에 이르렀지만, 동맹 제안은 거절당했다. 장건은 1년 넘게 설득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고, 결국 귀국을 결심한다.
귀로에서도 시련은 이어졌다. 다시 흉노에 붙잡혔고, 또다시 포로 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나 1년 뒤 선우의 사망으로 흉노 내부에 혼란이 일어나자, 장건은 가족과 함께 탈출해 13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명을 완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서역의 지리, 국가, 물산, 병력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한무제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는 한나라의 서역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한무제는 장건을 태중대부로 봉하고, 그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이후 장건은 다시 한 차례 서역으로 파견됐다. 이번 사절 역시 당초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 두 차례의 여정은 결과적으로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됐다.
포도, 호두, 석류, 서역의 준마가 중원으로 들어왔고, 한나라의 비단과 철기, 수리 기술은 서역으로 전파됐다. 전쟁을 위해 열렸던 길은 교역과 문화, 종교를 잇는 세계사의 대동맥이 됐다.
장건은 생전에 자신을 ‘실패한 사신’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두 번의 출사 모두 목표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류의 길을 열었다. 목표를 완수하지 못했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어간 한 인간의 발걸음이 세계를 바꿀 수 있음을 증명한 인물.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사신(외교가), 그러나 인류사의 방향을 바꾼 개척자—그가 바로 장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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