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8(월)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번 계속) 1968년의 10월 초부터 곽영회는 핵 실험장에서 중국의 첫 열핵탄두 발사 준비작업에 참여하면서 12월 초까지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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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그는 북경으로 가는 항공편을 알아보고는 곧 비행기를 탈 목적으로 비행장으로 향했다.


당시 야간항공편을 타지 말고 다음날 아침에 출발하라는 동료의 만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곽영회는 역시 “야간항공편을 이용하면 이튿날 근무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이 곽영회는 과제 연구조 성원의 회보를 받은 후 인차 비행기에 올랐다.

 

5일 새벽, 곽영회가 탑승한 비행기는 북경 수도공항에 서서히 착륙하다가 지상 400미터 되는 지점에서 갑자기 균형을 잃었으며 한동안 허우적거리다가 공항에서 불과 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옥수수 밭에 추락했다.


당시 탑승한 승객과 승무원 도합 14명 중 중상자는 단 1명에 불과했다. 그 생존자는 당시 추락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곽영회가 생명의 마지막 시각에 “아, 나의 서류!”라고 소리쳤다고 회고했다.


사고 직후 구조대원들이 추락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나머지 13구의 희생자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타고 너부러져 있었지만 유독 2구의 시신은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구조대원들은 시커멓게 탄 시신 2구를 떼어내려고 애를 쓰던 중 그 2구의 시체의 가슴사이에서 뭔가를 발견하였다. 거의 멀쩡한 서류 가방이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서류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곽영회가 상급에 보고하려고 했던 그 열핵미사일 시험 데이터 자료가 있었다.


그 시신 2구의 시신은 곧 바로 곽영회와 경호원으로 확인됐다.


열사의 정신은 영생한다


곽영회가 당한 조난은 삽시에 세상을 진동하였다. 주은래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비행기는 내비게이션시스템(导航系统)에 고장이 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곽영회의 비보를 듣고 울음을 터뜨리던 전학삼은 “그냥 10초였다. 생명이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우수한 역학 연구 대가가 세상을 떠났다. 삶과 죽음, 10초였다!”며 몇 번이고 되뇌이었다.


한편 조난 소식을 접한 곽영회의 아내 이패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혼자 베란다로 나와 먼 곳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07년 이패 여사는 평생 모은 돈 60만 위안을 두 차례에 걸쳐 중국과학기술대학과 중국 과학원 역학연구소에서 설립한 ‘곽영회 장학금’에 기부했다.


들려오는 풍문에 따르면 당시 누군가 이패 여사에게 “왜 기부의식을 차리지 않느냐”고 묻자 이패 여사는 그냥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의식은 무슨 의식? 그냥 원해서 기부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1968년 12월 25일 중공중앙에서는 곽영회에게 열사 칭호를 수여했다. 그리고 12월 27일 즉 곽영회가 사망한지 22일 후, 그가 생명으로 지켜낸 중요한 자료에 따라 중국은 첫 열핵미사일 실험이 성공하여 수소폭탄의 무기화가 실현되었다.


또한 1970년 4월, 곽영회가 직접 설계한 ‘동방홍 1호(东方红一号)’ 인공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1999년 9월 18일, ‘양탄일성(两弹一星)’프로젝트에 탁월한 공헌을 한 중국 과학자 23명이 국가로부터 ‘양탄일성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23명 중 곽영회는 유일하게 핵폭탄, 미사일과 인공위성 연구개발에 모두 참여하고 이바지한 과학자이자 유일한 열사였다.


2018년 7월, 국제 소행성센터는 국제사회에 정식으로 공지를 발표하여 일련번호 212796과 212797의 소행성은 ‘곽영회성’과 ‘이패성’으로 영구 명명했다.


매번 우리가 고개를 들고 먼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항상 우리의 진로를 안내하는 것은 언제나 빛나는 그 별이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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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전, 생명으로 지킨 中극비문서...22일 후 세계를 진감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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