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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곽부라 완용(郭布罗·婉容)은 자가 <모홍(慕鸿)>이고 호는 <식련(植莲)>으로 중국의 말대 황후이다. 완용은 별명으로 영월화(荣月华), 이리싸 백(伊丽莎白) 등이 있으며 중국의 만청시대 및 민국시대를 겪으면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한명이었고 또한 시대의 희생품으로 된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다.

곽부라 완용은 1906년 11월 13일, 청정부 내무부 대신인 영원(荣源)의 규수로 태어났다. 생모 아이신기오로(爱新觉罗氏)는 완용을 낳은 뒤 산욕열(产褥热) 로 사망, 완용은 계모 김중형(金仲馨)의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완용의 계모 김중형은 당시 조정에서 일정한 권세가 있는 왕박후(王溥煦)의 손녀로서 완용을 총애하면서 아주 자상하게 완용을 돌봐주었으며 이들 모녀간은 더없이 화목했다고 한다.
 
한편 완용의 부친 곽부라 영원은 일명 개명인사로서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인사였으며 여자애들도 남자애들처럼 학당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친이 있었기에 어릴 때의 완용은 독서하고 글자를 익히는 외 악기를 다루고 그림 그리는 것도 배울 수 있었으며 또한 미국인 이사벨(Miss Isabel) 여사를 가정교사로 초빙해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당시 완용은 아우르족(达斡尔族) 가정의 공주로 부유한 생활환경과 현저한 가족지위가 있었으며 특히 민족문화와 전통문화의 교육은 그한테 아주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1922년, 이미 16살이 된 완용은 용모가 단정하고도 아름다운 숙녀로 탈바꿈했다. 아울러 양금을 다루고 붓글씨도 제법 잘 쓰는 등으로 그 이름이 원근에 자자했다. 그 해 완용은 고궁(자금성)에 입궁, 그 해 11월 30일에 <청조사상의 마지막 황후>로 되었다.
 
당시 완용이 황후로 된 것은 단지 그가 아름답고 다재다능해서만이 아니었다. 즉 근황귀비(瑾皇贵妃)의 지지가 있었기에 마침내 황제였던 부의가 완용한테 방점을 찍었던 것이다.
 
1911년 중국은 2000여 년간 지속되던 봉건군주제를 결속시키고 공화제의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화민국 정부는 대청제국 황제의 퇴위 후에도 여전히 황제‧황후의 존호(尊号)를 폐지하지 않았으며 부의와 완용에 대해 군주에 해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때문에 부의와 완용의 혼례는 완전히 황제의 혼례로 예의를 갖추고 거행되게 하였으며 민국정부의 특별 승낙으로 황후가 탄 가마가 동화 문으로부터 자금성의 후반부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귀족출신인 완용은 지식이 있고 예의가 밝았으며 제법 시를 쓰고 읊을 줄도 알았다. 또한 부의와 서신 거래를 할 때면 늘 영문으로 쓰면서 마지막엔 꼭 <이리싸 백>이라고 서명하군 했다.
 
거기에 완용은 용모가 단정하고도 아름다웠고 행동자세가 우아했으며 거기에 내강외유(内刚外柔)의 스타일로 동서방 문화를 겸비한 전형적인 귀족부인이었다. 하지만 부의 자신의 신체원인으로 결혼 후 완용은 줄곧 자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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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만주국시기 말대황제 부의(溥儀)와 완용

1924년 풍옥상(冯玉祥)이 <북경쿠테타(北京政变)>을 일으키면서 11월 5일, 부의는 자금성에서 쫓겨났고 완용 역시 부의를 따라 자금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 뒤 완용은 부의를 따라 천진에 거주, 그 때로부터 그녀는 마약에 인이 박혔다. 그리고 궁중에서 입던 복장을 활활 벗어버리고는 치포를 입었고 하이힐(高跟皮鞋)을 신었으며 파마를 하는 것으로 당시 조계지에서의 <모덴여성(摩登女性)>으로 탈바꿈했다. 그 시기 완용의 최대 즐거움이란 각 백화점들을 돌면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으로 돈은 여하튼 부의가 지불하기에 그녀는 절제 없이 돈을 휘뿌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또한 1922년 함께 입궁한 다른 한 황비 문수(文绣)와의 암투로 되기도 했다.

 

천진에서 생활하는 동안,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의는 성격상의 약점이 점차 드러났다. 그의 생리상 약점은 마침내 문수가 이혼을 제기하기까지에 이르게 했고 부의는 이러한 결과를 두고 몽땅 완용의 잘못으로 밀어붙였다.

 

한편, 완용은 사회를 위해 돈과 금은 장신구 등을 기부하여 각 계로부터 찬양을 받은 적도 몇 번 있었다. 1923년 12월엔 북경에 있는 <임시 와와두회(临时窝窝头会)>로 명명된 자선기구에 은화 600원을 기부하여 이재민을 돕게 하였고, 1931년 중국의 16개 성이 엄중한 수재를 입었을 때에도 은화와 함께 진주보석들을 기부(당시 부의는 층집 한 개 동을 내놓았음)해 이재민을 돕게 하여 당시의 <대공보> 등 신문들에서는 이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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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서 옥사한 중국의 말대황후- 완용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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