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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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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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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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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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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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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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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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견문 시리즈(10)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그날은 7월 9일, 대만 고웅항을 떠난 본선은 그제야 진짜로 부산으로 향하는 배길에 들어섰다. 이제 오라지 않아 부산에 입항한다고 하자 모두들 기뻐서 야단법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선 선원들의 대부분은 부산출신이었는데 이제 아무 날 몇시에 부산항에 입항한다고 회사에 팩스를 날리기만 하면 숱한 아내, 어머니와 미혼처들이 부두까지 마중나와 있겠으니 말이었다. 이렇게 모두들 잔뜩 희열에 잠겨있을 때 불현듯 선내 스피카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방송되었다. “선내 알려드리겠습니다. 선내 알려드리겠습니다. 선내 각 부서들에서 각별히 유의하기 바랍니다. 방금 받은 해상일기예보에 따르면 올해 ××호 태풍이 지금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밀려오고 있습니다. 선내 각 부서들에서는 태풍에 대처할 모든 준비를 잘하여 선박운행에 이상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환희로 들끓던 선내는 삽시에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하늘이 맑고 바람 한점 없는데 태풍이라니. 선박생활경험이 없는 우리 중국 조선족선원들은 그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헌데 선내분위기가 벌써 달라졌다. 갑판장은 갑판원들을 이끌고 선내를 돌면서 통로문과 선창문을 몽땅 꽁꽁 닫게 했고 갑판의 물건 예하면 공구들은 몽땅 거두어들이고 도람통같은 것은 배전난간에 묶어 고정시켜 놓았다. 한편 기관실에서는 모든 설비들을 재점검하는 동시에 알준한 당직근무조를 내왔으며 우리 주방에서는 통신장의 지휘하에 주방의 일체 그릇들을 큰 대야같은데 채곡채곡 넣어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켜놓고는 비상으로 선원들한테 빵, 과자나 과일 등을 나누어주었다. 뒤이어 매개 선원마다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근무하라는 지시가 방송되었다. 얼마 후 과연 본선이 먹장 같은 구름떼들이 하늘로 몰켜오더니 뒤미처 불어치는 태풍과 함께 파도가 일기 시작하면서 선체가 이리저리 기우뚱거리군 했다. 그러자 선장은 기관당직자외의 모든 선원들을 조타실에 대기시켰다. 일단 사고가 발생하면 그 손실을 극력 줄이기 위해서였다. 항행지휘는 선장이 직접 했고 1탁수가 키를 잡았으며 기관실에서는 기관장의 지휘하에 1기사, 2기사가 엔징운행을 담당했는데 선내 전체가 1급비상태에 들어간듯 싶었다. 그 외 통신장은 레시바를 귀에 끼고 태풍전야의 현상태를 부지런히 보고하는 한편 본부의 지시를 선장한테 수시로 전달하군 했다. 사위는 대낮에도 불구하고 인츰 칠흑처럼 되더니 큰 파도가 배전을 세차게 때리기 시작했다. 갈매기들은 죽는다고 아우성치며 조타실 뒤에 있는 바람막이 같은 구석에 하나 둘씩 몰켜들었는데 어디로부터 그 숱한 갈매기들이 날아놨는지 쌓이고 쌓여 사람의 키를 초과할 지경이었다. 남대서양 포클랜드의 파도가 무섭다고 했는데 태평양에 불어치는 태풍에 비하면 파도라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태평양이 태평스럽지 못하다는 말을 실증하듯 앞으로부터 밀려오는 파도가 어찌나 높은지 선박을 당장 삼켜버릴 기세였고 그 파도가 선수를 들이박을 때는 길이 160미터나 되는 육중한 선박 전체까지도 부르르 떨기가 일쑤였다. 또한 그 파도가 선수에서 120미터 뒤에 있는 조타실꼭대기까지 올라오는건 물론 선박 전체가 파도속에 푹 잠겼다가 다시 물우로 솟구칠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천둥이 울부짖고 굵직한 비줄기가 흩날리는 자욱한 안개속에서 본선은 항행을 계속했다. 선장과 1항사는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앞만을 주시했다. 그러다가 큰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어슴프레 보이면 급기야 “엔징가속”을 불렀다. 그러면 그 옆에서 복창하는 1항사, 엔징속도를 빨리면 그만큼 파도와 부딪치는 충격이 크기에 더 위험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배가 전진하는 속도가 빨라야만이 파도와의 충격에서 뚫고 나갈 수 있지 그렇지 않고 속도가 느리거나 혹시 엔징이 꺼지기라도 하면 선박 자체의 힘이 적거나 없기에 배가 뒤집혀질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옆으로부터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보이면 선장은 인차 배머리를 파도가 밀려오는 쪽으로 돌리게 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치는 파도보다 옆으로 치는 파도가 더 무섭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옆의 파도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혹은 미처 배머리를 돌리지 못했을 때는 선체가 파도에 맞아 거의 한쪽으로 넘어갈 것만 같았는데 벽에 머리를 박는 이, 바닥에 쓰러지는이들로 조타실은 수라장이 되기가 일쑤였다. 밤이 되었다. 칠칠야밤, 비바람은 더욱 세찼고 파도는 더욱 흉악스럽게 선박 전체를 삼켜버릴양으로 덮쳐들었다. 지척도 분간하기 힘든 한바다에서 아무리 유명한 선장이라 해도 육감에 의해 항행지휘를 했지 정확한 판단과 지휘는 거의 불가능햇다. 배는 파도에 의해 수시로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했다. 바로 이 때 억수로 크고도 거센 파도가 선수를 호되게 갈기는듯 하더니 엔징이 툭하고 꺼졌다. 순간 선내 전체는 까막나라로 되었고 선장의 지휘도 1타수가 잡은 키도 기능을 잃었다. 8000톤급 되는 본선은 완전히 부평초처럼 파도가 치는대로 이리 밀려가고 저리 밀려가고 했다. 드디어 어둠속에서 누군가 울음을 터뜨리었다. “아이고, 내가 왜 부산서 승선하지 못하고 방콕까지 가서 앞당겨 승선했노?” 뒤이어 “엄마야 나 어떻게 죽어, 난 아직 장가도 못들었는데.” 심지어 기독교신자로 출항할 때마다 기도를 드리군 하던 냉동사까지도 “하나님은 무슨 말라비틀어진 하나님이라더냐,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이럴 때 우릴 구하지 않고 언제 구한다더냐?!”라고 희스테리적으로 부르짖었다. 이에 선장은 차마 들을 수 없었던지 “이 미친 놈들아, 조용하지 못해? 죽긴 왜 죽는다고 지랄염병들을 하고 있는거야?!”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하나님도 개아들보다 못한판에 선장의 말이라고 먹혀들어갈리 만무했다. 이렇게 약 20분 가량 지났을 때 불현듯 엔징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나더니 조타실내 신호등들이 일제히 켜졌다. 조타실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파도의 충격에 1호발전기가 스톱하는 통에 바다에 처박힐번 했던 본선은 다시 2호발전기를 가동해서는 항행을 계속했다. 허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파도의 충격은 점점 더 커갔고 선체도 점점 더 기우뚱거렸다. 하지만 한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어서인지 선원들은 더는 아우성을 치지 않았다. 사내란 것들이 고까짓 위험에 아우성쳤다는 창피감도 있었겠지만 인젠 생사의 여하를 운명의 배치에 맡긴 모양이었다. 이렇듯 긴장한 분위기속에서도 선박과 선원들의 안전을 책임진 선장이 어딘가 남들 과는 달랐다. 그는 인차 심리평형을 잡고는 수시로 앞과 좌우를 관찰하면서 될 수 있는한 정확한 지휘를 하느라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엔징으로 인한 위험이 제거되자 이번에는 또 새로운 위험이 들이닥쳤다. 파도가 이미 선박 우현쪽을 때려서 기우뚱했던 선체가 바로서기도 전에 또 다른 파도가 재차 우현쪽을 강타한데서 배가 점점 좌현쪽으로 기울러지고있었는데 거의 45도각을 이루었다. 선장은 그런 찰나에도 지휘를 계속했다. “좌현 20도! 좌현 20도! 빨리 키를 돌렸!” 이에 1타수가 그걸 복창하며 키를 좌현 20도로 돌리자 그제야 선체는 천천히 평형을 잡는 것이었다. 가령 그때 키를 좌현쪽으로 돌리지 않았거나 혹은 미처 돌리기도 전에 파도가 재차 우현쪽을 때렸더라면 그 후과는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20여년 전부터 해병대 상등병으로 베트남전에도 참가했었다는 A급 선장인 정유식, 그는 그야말로 훌륭한 선박의 마스터임에 틀림없었다. 가령 그때 그가 정확진 지휘를 하지 못했거나 또한 그마저 죽음의 공포에 떨며 재능을 과시하지 못했다면 선박과 선내 24명 선원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였을는지?… 장장 18시간이나 지속되는 태풍은 이튿날 오전 10시에야 비로서 물러가기 시작하더니 찬란한 해빛은 인차 우리의 머리위를 비추었다. 검푸르던 바다는 다시 푸름을 자랑하며 찰랑대였고 고기무리들도 이에 따라 물우로 솟구치며 자유로히 놀았다. 한편 태풍이 한창인 하늘가에는 아름다운 바다무지개가 걸리었다. 한차례 폭풍취우의 세례를 겪고난 선원들은 지친 나머지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쓰러져있었고 선장 역시 눈에 피줄기가 서고 열병에 앓고난 사람처럼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 사이에 배란간에 묶어놓았던 빈도람통들은 파도에 맞아 납작하게 되었고 조타실 뒤에 몰켜있던 갈매기들은 자기들의 무게에 깔리고 숨막혀 죽은 것이 태반이나 되었다. 살아만은 갈매기들은 죽은 갈매기들의 죽음이 애닮아서인지 슬피 울면서 조타실주위를 맴돌며 떠날념을 하지 않았다. 죽은 갈매기들을 바다에 “수장”하는 동안 조타실에서는 자주 고동을 길게 뽑아 그것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때 우리가 태풍속에서 18시간이나 역사했지만 항행거리는 고작 5마일도 되나마나 했다. 마도로스들의 지치고 짜증난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는걸가. 원양운반선 “코리안스타”호는 24노트의 최고속도로 한국의 제일 항구인 부산을 바라고 힘찬 항행을 다그쳤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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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1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5) 대소사
    대소사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티베트 라싸시 중심 함의: 라싸에서 가장 오래된 사당임 “대소”란 장족어로 석가모니란 뜻으로 대소사란 석가모니상이 모셔져 있는 절이다. 대소사는 기원 647년에 건립되었는데 당시 토번의 수령 쑹싼간브한테 시집간 네팔의 츠준공주와 당조의 문성공주가 공동히 지은 것이다. 이 절은 후에 수차의 수건을 거쳐 오늘의 규모로 방대한 건축군을 갖게 되었다. 대소사의 건축면적은 2만 5100평방미터이고 도합 20여개의 전당을 갖고 있다. 대소사는 티베트에서 현존하는 가장 휘황한 토번시기의 건축물일뿐만 아니라 티베트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목조건물이기도 하다. 화려한 경당대전 대소사의 주요 건물은 경당대전(经堂大殿)이다. 경당대전은 도합 4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문성공주가 토번으로 갖고온 석가모니의 금상이 있고 2층에는 쑹산간브가 문성공주 및 츠준공주와 함께 있는 조각상이 있으며 3층에는 대전당의 옥정(屋顶)과 천창(天窗)이 있고 4층의 중앙에는 4개의 금정(金顶)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대경당중앙에는 아주 정교하게 조각된 관세음동상이 있고 양측에는 장식이 화려한 불상이 있으며, 전당 정면입구에는 대소사를 건설할 때의 이야기를 그린 벽화가 있다. 석가모니 불상당과 팔랑가 석가모니 불당은 대소사의 핵심으로 이곳은 수많은 신도들이 향해지던 성지이다. 이 절당에 모셔져 있는 석가모니 불상은 일찍 문성공주가 가져온 것으로 온화하고도 자상한 표정은 사람들한테 평온감을 가져다 준다. 라싸의 주요한 불경활동은 모두 이 절당의 석가모니 불상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왔다. 대소사가 수많은 신도들을 흡인함에 따라 점차 이곳에는 대소사로 들어가는 팔랑거리(八廊街)가 서게 되었다. 팔랑거리는 라싸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로서 “라싸의 흔적”으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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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1
  • [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5) 인생선택
    제3회 인생선택 ■김철균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경, 미국의 B29형 비행기 편대가 일본 히로시마 상공의 만미터 고공에서 몇바퀴 배회하더니 인류 사상의 첫 원자폭탄 1매를 투하했다. 당시 32만 8000여명의 인구를 가진 이 도시는 삽시에 폐허로 되었고 도합 11만 80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3일 뒤 미국의 B29형 폭격기 두대가 재차 일본의 군수공업기지인 나가사키에 출격, 두 번째의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역시 도시를 재더미로 되게 한 동시에 수많은 희생자가 나타나게 했다. 이어서 8월 9일, 즉 대 일본선전포고를 한 이튿날 소련홍군은 5550여대이 탱크, 3440여대의 비행기와 2만 6100여문의 대포 그리고 도합 157만 7700여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운집, 세 갈래로 나뉘어 만주와 조선 지역으로 진출하며 파죽지세로 일본군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들이댔다. 소련홍군의 공세는 그해 4월 독일본토의 베를린을 진격할 때의 속도를 초과하였다. 한시기 천하무적이라던 일본황군의 방선은 미국과 소련 이 두 동맹국이 합세하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미국의 원폭투하와 소련홍군의 밀물공세에 더는 버텨낼 수 없게 된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점심 마침내 동맹군의 투항조건을 접수하고 천황 히로히토의 공개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공개방송 내용 (소화 20년 8월 15일)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신민들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지나(중국), 소련 등 4개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제국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黄祖黄宗)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 미국과 영국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원래 짐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교전한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战),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励精), 짐의 일억 중서(衆庶)의 봉공(奉公),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战局)이 호전된 것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惨害)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우기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적자를 보호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비명(非命)에 쓰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战伤)과 재화(灾祸)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에 이르러서는 짐이 우려하는 바가 크다. 생각하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곤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万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国体)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고 신민의 적성(赤诚)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 일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举国一家)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义)를 두텁게 하고 지조(志操)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华)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进运)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신민은 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잘 지키도록 하라. 천황의 공개방송은 반성하는 어투가 아니었다. 어딘가 괴변을 부리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천황의 항복방송은 필경 포츠담 회담의 선언을 받아들이며 항복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일본천황의 항복방송에 용정에 있는 일본인 주택구역은 울음바다로 되었다. 땅에 엎드려 천황의 방송내용을 전달받은 일본인들은 “대일본 제국이 투항하다니 믿을 수 없다”, “아니다. 뭔가 방송이 잘못됐다. 한창 잘못됐다”며 땅을 쳤으며 지어는 할복자살한 군인도 몇명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수의 친일주구 외 모든 조선인들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순자네가 사는 동네에서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8월 15일 오후였다. 용정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마을로 돌아온 한 중학생으로부터 이 소식을 얻어들었던 것이다. 일본이 망하면서 일본인교장이 운영하던 용정의 중학교들도 무기한 방학을 해버렸으며 소련홍군이 이미 연길과 용정에까지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그날 산에서 약재를 캐던 순자는 어쩐지 마을 쪽에서 이상하게 떠들썩하기에 웬일이 일어났다 싶어 부랴부랴 산에서 내려왔다. 마을에 내려오니 사람들 얼굴마다 활기가 넘쳤고 몇몇 조무래기들마저도 “만세!”를 부르며 마을길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아버지가 농궤속에 깊숙히 감추어두었던 태극기를 꺼내놓고 있었다. 아버지는 태극기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였다. 아버지의 입에서는 낮았지만 웅글진 “태극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 광복이 됐다. 저주받을 왜놈들은 쫓겨갔고 세상이 바뀌었다. 그리고 온 동네가 열광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일제의 핍박에 못이겨 쪽지게에 짐을 싣고 두만강을 건너왔던 간도조선인한테 있어서 광복의 함의는 너무나도 컸다. (광복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어린 순자는 어른들과는 달리 광복이란 그 뜻에 대해 다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젠 더는 일본놈들의 성화를 받지 않고 또한 조선말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데서 그 역시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얼마 후부터 많은 조선인가정들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바람이 일었다. 어떤 동네는 절반 이상의 조선인들이 마을을 떠나 동네 전체가 텅비다 싶이 되기도 했다. 이어서 한동안 문을 닫았던 학교들도 하나 둘 수업을 회복하였다. 물론 조선인이 교장을 맡았고 한동안 폐지되었던 조선말교육도 회복되고 말이다. 하지만 순자는 인차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학교에 다니기 싫어서가 아니라 서발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집안사정을 손금보듯 잘 아는 그로서는 차마 학교에 가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기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으로 돌아갈 때 순자의 아버지도 그들과 함께 따라갈 타산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순자의 아버지 김명기는 인차 단념했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전염병에 걸린 순자와 둘째아들의 병을 치료하느라고 집안에서 팔 수 있는 물건은 다 팔아버리고 많은 빚까지 지다보니 조선에 돌아가 정착할 재산은 고사하고 두만강을 건너갈 노비마저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소학교의 최우등생이던 순자는 어디까지나 다시 공부를 할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체로 학비를 마련할 목적으로 거의 매일이다싶이 산으로 다니며 개암이나 버섯을 따고 약재도 캐군 하였다. 어느날 순자가 산비탈에서 땀을 흘리면서 괭이로 약재를 캐고 있는데 용정으로 통하는 신작로 쪽에서 여학생들의 명랑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자유의 강산에서 우리 자라고/ 평화의 낙원에서 꽃피려 하는// 새 나라 어린 동무 노래부르자/ 세상에 부려울 것 그 무엇이냐 …… 아, 얼마만에 들어보는 우리 조선사람의 노래인가? 순자는 격동된 심정을 억제하지 못한채 괭이를 집어던지고 무작정 여학생들이 오는 쪽을 향해 달려 내려갔다. “얘들아, 아까 너희들이 부르던 그 노래는 누구한테서 배운거니?” “음, 우리 학교에 새로온 선생님이 배워주었는데 이젠 학교에서는 일절 일본말을 하지 않고 조선말만 한단다.” “그래, 너 기숙이는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데 너도 우리와 함께 학교에 다니면 얼마나 좋겠니?” “…?!” 순자는 자기의 심정을 그다지도 잘 알아주는 애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워났다. 그는 잇빨자리가 나도록 입술을 옥물었다. “알았어, 나도 너희들처럼 꼭 학교에 다시 다닐 날이 있어거야.” 그날 저녁, 순자는 소학교 때 갖고다니던 책보자기속에 깊숙히 감추었던 작은 보자기를 꺼내서는 아버지앞에서 그것을 헤쳐놓았다. 그 동안 약재를 캐고 버섯을 따서 번 돈이었다. “아버지, 그 동안 제가 모은 돈이예요. 전 옷을 해입는 것도 싫고 맛있는 걸 사먹는 것도 싫으니 제발 절 학교에 가게 해줄래요?! 아버지 이 딸이 이렇게 빕니다.” …… 한동안 말없이 엽초만 태우며 버들광주리를 틀던 아버지는 드디여 용단을 내렸다. “네 소원이 정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려므나. 이 애빈들 왜 널 공부시키고픈 마음이 없겠느냐?” “네?! 그러세요? 아버지 감사합니다. 꼭 공부를 잘해 출세하여 앞으로 부모님께 효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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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1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0)
    ■ 김철균 유엔군 인천상륙 및 인민군의 후퇴 아버지가 고상철에 의해 구원되어 부대로 돌아온 뒤 얼마 안있어 평양의 최고사령부로부터 뜻하지 않던 명령이 하달됐다. 전반 전선에 변수가 생겨 주력부대의 전략적 퇴각이 시작되기에 아버지네 부대는 이튿날 아침 즉 9월 17일까지 진지를 고수하다가 후퇴하라는 것이였다. 그렇찮아도 당시 낙동강전선의 인민군부대들은 마지막 한방울의 전력까지 쏟아가며 전투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부산쪽으로는 유엔군이 계속 증가되고 있는 한편 인민군은 후방공급이 끊어진데다 인원보충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억지로 견지하고 있었으며 더는 진공할 수도, 그렇다고 후퇴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후퇴명령은 바로 이러한 때에 떨어졌다. 뒤이어 유엔군의 대규모적인 공습과 포격이 개시됐다. 그 잡도리를 보아 인민군의 진공을 견제하려는 반격과 기습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인민군을 밀어 붙이려는 전면적인 공세였다. 아버지네 부대는 옹근 하루낮과 하루밤을 이어가며 한국군과 싸웠다. 병력이 모자라자 예비연대는 물론 아버지를 포함한 정찰병 그리고 부상병조차 총을 쏠 수 있는 인원은 몽땅 진지에 배치되었다. 한밤중까지 싸우다가 일단 한국군이 물러가자 인민군은 새벽녘의 어둠을 이용하여 고지에서 물러났다. 고지에서 내려온 아버지네 부대는 주력부대를 따라잡기 위해 죽기내기로 뛰었다고 한다. 이렇게 단숨에 20여리나 뛰고 보니 기진맥진한 나머지 그 때는 호랑이가 달려든대도 까딱 할 것 같지 못했다는 것이 아버지의 회고였다. 한국군 추격부대를 얼마간 떨구어 놓았다고 판단한 뒤에야 숲속에서 휴식명령을 내렸다. 인민군 사병들은 솔잎과 압축과자를 섞어가며 요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서로 마주보는 순간 모두가 웃음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며칠간 세수 한번 못한채 초연에 그을리다보니 원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리 만무했다. 낮이 되자 하늘에는 미군비행기들이 나타났고 모두가 한결같이 기수를 북으로 돌렸으며 남쪽으로부터 들려오는 포소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부대는 길을 다그쳐 얼마 후 주력부대를 따라잡았다. 주력부대를 따라잡자 새로운 동원이 있었다. 내용인즉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인천으로부터 상륙하여 중부지대를 차단하고 있으니 대부분의 인민군부대가 유엔군의 포위속에 들었다는 것, 유생역량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뒤꽁무니의 유엔군을 뜯어놓고 하루 속히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사태는 자못 심각했다. 듣는 바에 따르면 대전을 지키고 있던 인민군대가 전라도 방면으로부터 퇴각하는 인민군주력을 엄호하기 위해 필사적인 저항을 했으나 쌍방의 현저한 전력대비에 힘이 딸려 대전을 내주어 전라도 부대들이 산속으로 들어갔는가 하면 서울을 고수하고 있던 인민군부대 역시 연희고지를 육탄으로 막으며 저항하고 있으나 미군부대의 막강한 화력을 막을 수 없어 서울함락 역시 일보직전이라 했다. 서울이 함락되기 전에 시간을 다투어 38선쪽으로 퇴각해야 그만큼 손실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퇴각하는 길도 쉬운 것이 아니였다. 아니 지난 2 개 월 전 남진할 때보다 더 힘겨운 노릇이었다고 한다. 낮에는 공습이 피해 산에 숨어야 했고 또한 꼬리를 물로 달려드는 한국군과 싸우면서 퇴각해야 함과 아울러 후방보급은 물론 최사령부와의 모든 연락을 할 수 없었기에 곱절 간고했다. 이렇게 자체로 모든걸 분석하고 장악하면서 겨우내 원주부근까지 다 닿았지만 그 때의 원주 역시 한국군의 수중에 넘어간 뒤었다. 가뜩이나 얼마 되지 않았던 인민군 원주수비부대가 서울쪽으로부터 밀려드는 유엔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했던 것이다. 원주의 유엔군들이 바로 인민군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야말로 인민군은 앞 뒤로 협공을 받는 극히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그 때 인민군의 원 계획은 될수록 원주의 유엔군을 피해 에돌아 북으로 가기로 돼있었지만 식량과 약품이 거덜난 상황에서 그대로 행동하다가는 당장 굶어죽을 사병이 반수 이상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한편 정찰결과 원주에 유엔군이 들어오긴 했으나 시간이 길지 않아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그 수자도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인민군 역시 38선을 넘기 전야의 마지막 전투를 치러볼 욕심도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인민군은 일부 부대를 배치하여 남쪽으로부터 오는 유엔군을 견제하는 한편 병력을 집중하여 불의습격으로 원주에 돌입했다. 아니나 다를가 원주의 유엔군들 역시 인민군이 그렇게도 빨리 원주 부근에 나타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한 모양, 미처 진지에 들어가 보기도 전에 인민군에 의해 섬멸되고 말았다. 그 전투에서 인민군 부대는 얼마간의 탄약과 식량 등을 로획하여 자신을 무장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전투에서 아버지는 불행하게 부상당하여 평양에 후송됐다가 다시 신의주를 거쳐 당시 교하에 있은 조선인민군 제 2 야전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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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0
  • 오묘한 세계대백과(14)지구 “몸체”속의 비밀
    장엄하고 아름다우며 또한 자태가 다양한 산과 물, 오색영롱한 식물 그리고 활발하고 사랑스러운 동물들로 아름다운 지구의 표면을 장식하고 있다면 그대는 지구에 “몸체”속에는 무엇들이 들어있는지 아는가? 지구의 구조는 우리가 늘 먹는 닭알과도 같아 지각, 지만과 지핵이 있다. 지구의 외면에는 하나의 각(壳)이 있는데 이를 “지각”이라 부르며 이는 지구의 표면을 말하는바 대륙의 지각과 해양의 지각이 포함된다. 그 중 대륙의 지각은 비교적 두터운바 평균 두께가 35킬로미터가 되고 해양의 지각이 비교적 얇아 일반적으로 5-10킬로미터에 달한다. 지만은 지각과 지핵 사이에 있는 부분을 말하는데 닭알속의 흰자위와 비슷하다. 지만은 상지만과 하지만으로 나뉜다. 상지만의 윗 부분에는 한갈래이 “연류층”이 있으며 뜨거운 용암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산생한다. 지구의 중심부분에는 지핵이 있다. 지핵은 액체상태의 외핵과 고착상태이 내핵 등 두가지 부분으로 나뉘며 주요한 성분은 철과 니켈(镍)로 구성되어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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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18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4)예루살렘
    예루살렘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이스라엘, 지점:지중해 동안의 유대아산(犹地亚山) 의의: 유대교,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세가지 종교가 공존하는 성지 예루살렘은 지중해 동쪽해안에 위치, 세계에서 저명한 종교성지이다. 수천년래 예루살렘은 선후로 37차 정복된적이 있고 일찍 8차에 거쳐 전화에 훼손되었었다. 하지만 매번의 재난속에서도 이 성지는 기적적으로 폐허속에서 재생하군 하였다. 역사가 유구한 석조건물은 예루살렘의 수천년 역사의 상처를 견증하고 있으며 수없이 많은 흔적과 성지 등은 예루살렘이 유대교도와 기도교도 및 이슬람교도들한테 중요한 의의가 있음을 말해준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와 이슬람교 교도들의 마음속에는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신성한 지위를 갖고 있다. 유대교는 하느님인 여호와가 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을 유대인조상들한테 주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성경”의 전설 중에는 예루살렘은 예수가 생활하고 전도하고 재해를 피할 수 있는 지방으로 씌여져 있어 예루살렘의 신성한 지위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무슬린교도들의 마음속에는 예루살렘이 모함모드를 먼저 알고 천국으로부터 신비한 야간행으로 이 목적지에 이르게 했다고도 한다. “통곡의 벽”과 암석원주의 청진사 예루살렘의 옛성에는 유대구내에 저명한 “통곡의 벽”이 있다. 이 벽은 유대인들한테 놓고 말하면 신앙과 단결의 상징으로 되고 있다. 매번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되면 많은 유대인들이 이 “통곡의 벽”앞에 집결하여 묵묵히 경문을 읽고 기도하기도 한다. 암석과 원주기둥으로 된 청진사는 이슬람교의 성지로서 “통곡의 벽”과 이어져 있는데 거대한 도금한 둥그런 지붕아래에는 거대한 암석으로 바닥을 깔았으며 거기에는 아름다운 도안과 “고란경” 경문이 새겨져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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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18
  • [연재]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9)
    ■ 김철균 1950년 8-9월은 낙동강 유역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을 일방으로 하고, 인민군을 일방으로 하는 쌍방간의 격전이 가장 치열하던 시기였다. 쌍방은 고지 하나를 두고도 몇 번씩 빼앗기고 빼앗는 공방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투상황을 보면 낮이면 주로 한국군 혹은 유엔군이 고지를 점령하였다. 미공군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밤에는 주로 인민군이 침투공격을 하면서 고지가 자주 인민군의 수중에 장악되군 했다. 인민군이 야간기습에 유능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전투부대가 아닌 정찰소조에 자주 편입되어 낙동강 유역의 지형정찰에 나가군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하루 아버지는 한국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한국군의 추격을 받던 중 함께 나간 동료가 한국군의 총에 뒤잔등을 맞아 부상당하는 통에 둘 다 포로가 되었다. 부상당한 동료가 자기의 머리에 한방을 쏜 후 혼자서 도망치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부상당한 동료를 두고 혼자 도망칠 수 없었으며 더더욱 그한테 총알을 먹일 수는 없었다. 성격이 좀 거칠었지만 독하지는 못한 아버지었다. 아버지가 부상당한 동료를 붙안고 어쩔 바를 몰라하는 사이에 한국군들의 총부리는 점점 다가왔다. 아버지의 정찰병 동료는 한국군한테 포로되자 10분도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포로가 되어 살아남은건 아버지뿐이었다. 순간, 아버지의 뇌리에는 이젠 끝장이구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엄습해왔다고 한다. 고국땅이라 하지만 처자가 없는 고국땅 – 그 때에 와서야 아버지는 고향 중국 훈춘에 둔 마누라와 자식 생각이 나면서 그들한테 미안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한국군은 아버지를 즉석에는 죽이지 않았다. 뭔가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빨갱이 녀석을 연대본부로 수송한다. 누가 가겠는가?” “옛, 이병 고상철, 제가 이 자를 압송하겠습니다.” 순간, 고상철이란 이름이 아버지의 뇌리에 충격적으로 안겨왔다. 무의식간 아버지가 고개를 들고 보니 비록 철갑모를 썼지만 어딘가 낯익은 얼굴임에 틀림없었다. 그야말로 거짓말 같고 영화의 한 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만대행으로 한국인 장교는 고상철이 아버지를 압송하는 것을 허락했다. “두 손을 어깨위로 올리고 걸엇!” 고상철의 말투는 단호한듯이 들렸다. 하지만 개활지대를 지나 숲속에 들어서자 고상철은 인차 다가와 아버지를 끌어 안았다. “이 자식, 너 나를 알만해? 내가 바로 고상철이야…” 극적인 만남이었다. 고상철이란 바로 그제날 아버지가 일본군 공사장에서 부역할 때의 동료였는데 후에 광복과 함께 한국(당시는 남조선이라 불렀음)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던 친구를 전쟁터에서 적아 상대방 신분으로 만나다니 극적이래도 너무 극적이었다. 둘은 풀밭에 주저앉아 한동안 그동안 살아온 인생사를 얘기하다가 고상철이 시계를 보더니 후닥닥 놀라며 “우리 지금 이리고 있는게 아니야”하며 무릎을 치는 것이었다. 고상철로는 차마 아버지를 연대까지 압송해갈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놓아주기도 어려운 입장이었다. 미구하여 고상철은 허리의 뒤춤에서 비수를 꺼내더니 아버지한테 넘겨주며 자기의 다리쪽을 두어번 찌르고 도망가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안돼,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 그것만은 안돼…” 아버지가 머뭇거리자 고상철은 아버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아서는 지체없이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향해 두번이나 힘있게 찔렀다. “이 자식아 아직도 모르겠느냐?! 빨리 도망가라. 이제 내가 생각을 바꾸면 너를 찌를 수도 있다. 그리고 나한테 총도 있다. 내가 생각을 바꾸기 전에 빨리 도망가라. 어서!” 고상철의 말은 단호했다. “야 이놈아, 이제 북으로 가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라. 여긴 사람 살 곳이 못된다. 중국에 가서 농사를 짓고 마누라와 함께 농사나 지으며 살아라. 그게 맘 편한거다!” 아버지는 더는 대꾸할 엄두도 못내고 돌아서서는 마구 냅다 뛰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정신없이 뛰면서 개활지대를 넘어서자 고상철이 있던 쪽에서 총소리가 한방이 울렸다. 그것은 자기의 부상을 한국군한테 알리려고 고상철이가 공중총을 쏜 것이 분명했다. 고상철의 자아희생 정신으로 아버지는 생명을 건졌을뿐만 아니라 한국군점령지대를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한다. 그 뒤 아버지는 고상철이란 한국군 이등병을 만나지 못했거니와 만날 수도 없었다. 썩 후에 아버지는 자주 고상철이란 이름을 떠올리며 그를 잊지 못해했다. 그리고 고향인 한국 울산에 가보고 싶어했던 것도 아마 고상철을 행여나 만날 수 있을까 해서라 짐작된다. 필자 역시 고상철이란 그 분한테 감사를 드리고 싶다. 당시 그 분이 아버지를 살려주지 않았더라면 필자같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현재 고상철이란 그 분은 살아계실리 만무하지만, 여하튼 그 분이 자녀 혹은 손군들이라도 살아 있을게 아닌가? 그 분들이라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다. 고상철- 그 분의 명함은 분명 고상철이었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14
  • 해외견문 시리즈(10)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포클랜드에서 곧추 부산으로 가는가 했더니 거치는 곳도 많았다. 라스팔마스, 마린, 비고, 사우디, 방콕 이렇게 거쳐오다가 이번에는 또 중국 대만의 고웅항에 입항하여 2박 3일을 머무르게 됐다. 대만에서의 일정은 포클랜드에서 싣고온 냉동오징어 800톤을 하역하는 것이었다. 대만 - 나의 머리속에서는 그때까지도 이전에 우리가 불렀던 “중국인민은 대만을 꼭 해방할 것이다”란 구호와 대만어선들에서 본 “삼민주의로 중국을 통일하자!”란 글발이 새겨진 기발들이 맴돌고 있었다. 하기에 대만 고웅항에 입항하자 우리 중국조선족선원 4명한테는 위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당과 공산당은 지난 세개 20연대부터 40연대말까지 줄곧 20여년간이나 싸우다가 결국 국민당이 대만섬까지 쫓겨가지 않았던가. 그 후에도 국민당은 계속 “반공대륙”이요, “대륙광복”이요 하면서 대륙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실행해 왔은즉 그들이 공산당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천하에서 온 우리를 반겨줄리가 없겠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위구심은 지나친 것이었다. 당국의 요인들은 어떤 정책을 강요했든지 우리가 본 대만사람들은 그렇게도 인자하고 민족을 중히 여기는 이들이었다. 우선 입항수속을 수속을 할 때 본선에 4명의 대륙선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세관일군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수속을 끝내자바람으로 우리를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이었다. 나를 찾아 주방까지 찾아온 세관원 한명은 오래도록 나의 손을 잡고있으면서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고 기쁘다고 곱씹어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대륙에서 사는 것은 어떠한가?”, “밥은 배불리 먹는가”하며 이 것 저 것 관심조로 묻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대륙상황이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 뒤 그는 갖고온 선물이 없어 미안하다면서 어디서 구했는지 대만산 “장수표”권연 한보루를 기어코 나한테 밀어맡기었다. 그날저녁, 우리는 국민당의 천하라는 위구심보다 대만 한구석의 이모저모에 대한 궁금증으로 하여 외출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렴 대만 역시 사람이 사는 동네이겠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교롭게도 그날 밤 우리가 찾아간 술집인즉 “몽강술집”이란 간판이 걸려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아니 그렇다면 몽강이란 지금 우리 길림성 정우현의 전신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술집주인하고 여쭤봤더니 아니나 다를가 술집주인 부친의 고향이 곧바로 옛날의 몽강현이라는 것이었다. 즉 주인의 부친한테는 노모와 3남 2녀의 형제, 그리고 그 본인보다 네살이나 이상인 안해까지 있었는데 1940년대 말기에 국민당군의 패망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1년전부터 대륙의 고향과 편지래왕이 있는데 노모와 형님 한분은 진작 저 세상의 고인으로 되었고 안해는 다른 곳으로 개가했으며 나머지 형제들은 제각기 흩어져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또한 노인은 이미 당국에 고향방문 신청까지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술집주인은 알려주었다. 그날 밤 우리는 오래도록 술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특히 술집주인은 술이 거나하게 되지 몹시 흥분하면서 언제라고 딱히 말할 수는 없으나 자기도 한번은 꼭 대륙에 다녀올 것이며 고향사람들한테도 기념으로 될만한 좋은 일을 해놓겠노라고 했다. 참, 고향이라 하지만 생소한 고장, 그럼에도 마음이 가는 곳, 사람의 정이란 과연 이상하기도 했다. 그 이튿날저녁, 뜻밖에도 그 “몽강술집” 주인의 부친이 글쎄 아들을 앞세우고 선박에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노인은 배에 오르자마자 우리 네사람과 선장, 기관장과 통신장을 기어코 청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절끝에 그들 부자가 갖고온 봉고차에 나누어앉아 노인의 거처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저택은 고웅시 중심에서 퍼그나 떨어진 해변가의 녹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새 건물은 아니었으나 담장에 둘러쌓인 것이 퍼그나 고풍스럽고도 아늑한, 전통적인 중국식 별장이었다. 호텔, 술집과 나이트클럽 등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는 노인이었으나 여전히 헝겊신에 다부산즈차림을 한 것이 더욱 풍채가 돋구어져 존중이 갔다. 헌데 그런 틀거지와는 달리 노인은 자주 주전자의 술을 부어 굽내면서 말이 많아졌으며 한담 중에도 가끔 경극노래 한곡조씩 머리를 흔들며 뽑군 하였다. 노인을 보면 어쨌든 옛날 국민당군의 한자리쯤은 한 것 같았는데 정치와 시국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없고 가금씩 우리의 손을 잡으니 눈물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같은 민족 사이에 서로 맞대고 총포를 쏘며 싸우던 그제날이 무척 후회하는 모양이었다. 자리를 파할 때 노인은 정유식 선장한테 영어로 “이 애들을 잘 돌봐주시오”하고 몇번씩이나 부탁하면서 손수 대문밖까지 따라나오시는 것이었다. 그날 우리 선박에서는 냉동오징어 열박스를 노인네 집에 드렸고 우리는 또 노인으로부터 만리장성을 그린 유화 한폭과 중국선원 4명한테 특별히 선물하는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받았다. 대만에 체류하는 사이에 우리는 2박 3일이라는 그 짧은 시일에도 불구하고 사상과 이념의 계선을 벗어나 다 같은 중화민족이란 공동관심사를 갖고 세관일군과 몽강술집의 부자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그토록 진지하게 마음과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하다면 우리 동족이 살고 있는 반도는 과연 어떠한가? 아직도 동족상잔의 “6.25”때의 상처를 끄집어내며 남과 북이 서로 상대방을 괴뢰라고 욕하는 한편 전쟁준비에 광분하는 사람들, 그래 아직도 피의 대가가 적단 말인가?! 지금도 반도의 남북은 화해를 위한 대책마련에 뇌즙을 짜는 것이 아니라 서로 헐뜯지못해 광분하는 양상이다. 우선 말부터가 상대방의 비위를 상하게 한다. 이른바 “북한”이 뭐고 “남조선” 또한 뭐란 말인가? 통일이란 외쳐대서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통일이란 상호 존중하는 전제하에서 그것을 이룩할만한 토대를 하나하나, 작은 것부터라도 쌓아가야 함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럼 반도의 남과 북은 대륙인들인 중국사람들한테서 무엇부터 배워야 하겠는가! 속이 검고 “만만디”라고 비웃지 말고 대국인들의 “커이커이 왠량바(可以可以,原谅吧!)” 하는 것부터 배워야 할 것이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동포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알륵을 풀어야 할 것이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14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4)
    ■ 김철균 전반 태평양상공에 전운이 감돌고 간도의 가는 곳곳마다 전쟁소동이 광분하는 가운데 순자는 어느덧 14살을 먹었고 그해 즉 1944년 12월에 소학교졸업을 맞게 되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오후수업까지 마치자 담임교원이 순자를 부르더니 일본인 교장이 찾는다면서 어서 가보라는 것이었다. (웬일인가?) 순자는 웬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겼다고 수군덕거리는 애들의 눈길을 피하며 머리를 수그리고 교장실로 찾아갔다. 교장은 노크하고 들어와 곱게 인사를 올리는 순자를 유심히 뜯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나다노, 나마에와 기슈구데쓰까?(네이름이 기숙이 맞느냐?)” “하이, 소우데스(예, 그렇습니다.)” 순자는 깍듯이 머리를 쪼아리면서 일본말로 대답했다. “너의 집에 돈이 얼마나 있느냐?” 도수 높은 안경너머로 교장은 순자의 얼굴을 넌지시 쓸어보다가 다시 물었다. “돈, 돈 말입니까?” 순자는 가슴을 파르르 떨면서 쥐구멍으로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다시 반문했다. “귀가 멀었느냐? 돈이 얼마 있는가말이다.” 교장은 권연을 꼬나물고 신경질적으로 성냥을 홱 그어댔다. “지금은 한푼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방학이 되어 제가 벌어 월사금만은 꼭 내겠습니다.” 순자는 나직히 힘주어 대답했다. 돈없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기시하는 교장이 아직 채 물지 못한 월사금을 내라고 압력을 들이대지 않는가 하는 위구와 의심이 갔기 때문이다. “그런게 아니다. 현재 우리 대일본제국은 천황의 대령을 받고 아시아 민족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마련해주려고 위대한 성전에 뛰어들었다. 현재 이 성전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돈과 재물, 인력을 지원하고 있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 학교 많은 학생들도 이미 돈을 헌납했단다. 돈없는 사람들은 인력을 지원하며 근로봉사에 가고…그래 너는 돈을 헌납하겠느냐 아니면 근로봉사로 육체를 헌납하겠느냐?”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던 교장은 눈총을 쏘며 순자한테 질문했다. “근로봉사에 가겠습니다.” 순자는 별로 긴 생각을 하지 않은채 대답했다. “부모의 허락도 없이 네 마음대로 결정할만하냐?” “할만합니다.” 가난한 가정형편을 잘 아는 순자는 진작 마음의 준비가 돼있었던 것이다. “소까. 너, 참으로 훌륭한 황국신민답구나. 넌 아직 잘모르겠지만 우리 일본의 황군은 천하무적으로서 도처에서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고 있단다. 이제 오래잖아 우리 일본황군이 최후의 승리를 이룩하면 아시아에 새로운 평화가 깃들 것이다. 그때면 너희들처럼 대일본제국에 충성한 황국신민들은 반드시 천황페하의 특수혜택을 받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잘 알겠습니다.” 당시 순자는 일본이 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독립선언에 서명했던 춘원 이광수같은 인물도 일본이 천하무적이라고 인정하며 친일파가 되는 세월에 순자같은 애숭이가 당시의 전황을 판단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좋다. 아주 좋아. 기슈구양, 그럼 여기에 손도장을 찍거라.” 순자는 깊은 생각도 하지 않고 선뜻이 손가락을 내밀어 일본인 교장이 가리키는 자리에 지장을 꾹 찍었다. 천진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어린 순자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던 일본인 교장은 순자가 나가자 저로서도 한심한듯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자기한테도 순자만한 자식이 있었던지, 아니면 일본인이었지만 아직 꼬물만한 양심은 있었던지 제법 긴 한숨까지 지으며 “참, 망할 놈이 세상! 조센징 불쌍한 민족이군”하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날 저녁 순자는 대문동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부모님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러자 집에서는 또 한바탕 난리가 났음은 구태어 더 말할 것도 없다. 조선에서는 수많은 애어린 처녀들에게 직업을 얻어준다며 사탕 발린 말로 구슬려서는 생뚱같은 곳으로 끌고 간다는데 인간의 탈을 쓴 일본놈들이 또 어떤 수작을 부릴지 누가 안담? 어머니는 윤씨는 나 죽는다고 아우성을 쳤고 아버지는 화가 난 나머지 “죄꼬만 계집애가 담도 크게 그게 어디라고 지장을 찍느냐”며 순자의 귀쌈을 치기도 했다. 이는 순자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한테서 맞아보는 매였다… 이튿날 순자의 아버지는 어린 순자를 이끌고 그 일본인 교장을 찾아가 사정하였다. “교장선생님, 어린것이 철없이 지장을 찍었으니 한번만 봐주십시요. 어린 것이 뭘 알겠습니까? 돈은 제가 2-3일내로 어떤 방법을 대든지 마련해 올테니 근로봉사대 명단에서 우리 기슈구의 이름만은 빼주십시요.” “기규구 부친의 심정을 잘 알겠다만 이미 명단이 위로 올라갔으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구만요. 그리고 근로봉사대에 가서 대 일본제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도 일종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걸 모르는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요. 이 어린 것이 어떻게 일을 한다고 그럽니까?” “근심마십시오. 여덟시간 근무에 아주 편하며 먹는 것도 아마 집에서보다는 훨씬 영양가가 있고 맛있는 걸로 공급된다고 합니다.” … 순자의 아버지가 아무리 애걸복걸하며 사정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당시 학교마다에 근로봉사로 보낼 학생들의 모집명액이 확정되었은즉 그 명액을 다 차게 하지 못해 안절부절하던 일본인 교장이 순자의 아버지라고 그 사정을 봐줄리 만무했다. 순자의 아버지 명기 어른은 그저 한심한 세상과 나라를 빼앗긴 약소민족의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6 그때로부터 며칠 뒤, 당시 간도의 서울로 불리는 용정의 역광장. 순자가 또래들과 함께 떠나던 날이 됐다. 그날도 그 일본군가 “마모루모 세무루모 구로가네노”가 주악되는 가운데 그닥 크지 않은 용정역은 울음바다로 되었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붙안고 아우성을 쳤고 일본헌병들은 그러는 부모와 자식을 총칼로 위협하며 뜯어 놓았다. 순자와 그 또래들은 총창을 꼬나든 일본군헌병들의 감시속에 줄을 서서 열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미구하여 뿡 ㅡ하는 기적소리가 길게 울렸고 열차의 둔중한 바퀴는 천천히 움직이었다. “아버지, 엄마ㅡ 제가 꼭 돈을 많이 벌어갖고 효도할게요ㅡ” 순자는 차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두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채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멀리서 어머니 윤씨가 뭐라고 넉두리를 하다말고 땅에 풀썩 주저앉는 것이 보이더니 인차 순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순자는 어머니가 왜 저렇게 쓰러지는가를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전 엎질러진 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보는 기차였지만 신기하다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열차는 해란강 철교를 넘어서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이튿날 아침, 열차는 만주에서 가장 크고 인구도 가장 많은 봉천(지금의 심양)에 도착했다. 봉천은 제법 큰 도시였다. 봉천역 광장에 나오니 용정이나 연길과는 달리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붐비었으며 기차처럼 레루우에서 달리는 전차가 신기하기도 했다. 또한 그 곳에서도 일본군의 태평양전쟁을 가송하는 군악이 울리고 고약딱지같은 일장기를 든 일본군 대오가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으며 거리에서 백성들한테 구두발로 차고 욕질을 해대는 일본헌병들의 행패는 여전했다. 봉천에 도착한 날로 순자네가 끌려간 곳은 “도요다이야 고죠”라고 부르는 어느 한 방직공장이었다. 공장에는 순자처럼 끌려온 아동공이 아주 많았다. 조선인 외에도 만주인, 몽골인과 지나인(중국인)으로 수백명에 달했다. 순자네는 여러 작업반으로 나뉜 뒤 인차 근무에 들어갔다. 소년공들이 근무하는 시간은 아침 7시부터 이튿날 아침 7시까지었다. 말하자면 24시간 작업하고 24시간 휴식하였으며 휴식하는 낮에는 밥도 공급되지 않았다. 여덟시간 근무제이고 먹는 것도 영양가치가 높고 맛있는 것으로 공급된다던 일본인 교장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출퇴근을 할 때는 물론 심지어 식당으로 밥먹으러 갈 때도 군대식으로 줄을 서서 “일본군가”를 부르며 행진해야 했으며 모든 생활이 엄한 규율이 강요되었다. 작업은 지루하고도 몹시 힘들었다. 24시간씩 근무하노라면 자주 졸음이 왔고 졸음이 와서 간혹 끊어진 실오리가 생겨나면 일본인 십장한테서 귀쌈을 맞으면서 욕보고 야단맞기가 일쑤였다. “칙쇼! 황국신민이 되어 2등 국민의 대우를 받으면서 이 따위로 근무해?! 이래서 조센징은 안된다는거야!” “너희들이 왜 나라를 빼앗겼는지 알만해? 바로 이런 정신상태를 가졌기 때문이야. 이런 정신상태를 갖고 나라를 운영할 수 있겠어?” … 이렇게 억울하게 욕볼 때마다 순자는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있었을 때가 좋았고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집이 사무치게 그리워났다. 또한 돈벌어 빚도 갚고 부모님한테 효도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봉사단에 참가한 자신이 괘씸하도록 얄밉기도 했다. (아, 지금쯤 동네애들은 앞내가 얼음강판에서 썰매를 타고 팽이를 치면서 신나게 놀겠지? 헌데 난 이게 무슨 꼴이람.) 그리고 때는 한창 한겨울이라 추운날 밤 살얼음이 낀 물에 두손을 넣고 태실을 씻을 때면 손이 시리다 못해 숨이 넘어가는듯 했으며 어떤 여자애들은 진짜 견디기가 힘들어 엉엉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면 또 일본인 십장이 달려와 그런 애들의 귀쌈을 사정없이 후려치군 했다. “바가, 너희들의 요만한 곤난도 이겨내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천황페하의 황국신민이라고 할 수 있소까?!” 감옥같은 생활, 맘놓고 울 수도 없는 것이 당시 나어린 소년공인 순자네가 직면한 운명이었다. 한편 공장에서는 끌려온 아동공들한테 집에 편지를 쓰도록 했다. “근로봉사대에 와서 배불리 잘 먹고 있으며 일도 힘들지 않다”, “하루 근무시간은 여덟시간이고 매주 하루씩 휴식하며 휴식하는 날에는 단체로 도시구경도 한다”는 등으로 좋은 말만 골라서 쓰도록 했다. 그러고는 십장 혹은 감독한테 검열을 거친 뒤에야 편지를 발송하도록 허락했다. 순자도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한테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아버지 어머니 전상서 제가 부모님 슬하를 떠나 봉천에 온지도 거의 한달이 돼가는군요. 그동안 저희들은 공장측에서 배치해준 따뜻한 숙사에 들어있으면서 하루 세끼 이밥에 돼지고기 혹은 물고기국을 먹으면서 아주 유쾌히 잘 보내고 있답니다. 이 곳의 작업은 힘들지 않고 그 작업량도 많지 않답니다. 하루 8시간 근무에 매주 하루씩 휴식하는데 휴식하는 날이면 단체로 활동사진구경(영화관람)을 가기도 하고 공장측에서 주는 상여금으로 맛있는 것을 사먹기도 해요. 그리고 시간이 날적마다 축음기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그것을 배우기도 하고 그것이 갑갑하면 밖에 나가 친구들과 함께 제기도 차고 숨박꼭질도 놀면서 아주 재미있어요. 그렇게 유쾌하게 지내서인지 지금 저의 얼굴엔 살이 포동포동 올랐어요. 이제 제가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들도 몰라보실거예요. 아버지, 어머니, 그러니 저한테 대한 근심을 일절 하지 마시고 부모님의 건강만 챙겨주세요. 그리고 임금은 공장측에서 단체로 저축했다가 1년 만기 후 저희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한푼도 곯지 않게 내준다고 했으니 그때에 제가 많은 돈을 벌어가지고 가서 부모님께 효도 한번 잘할게요. 아버지 어머니, 건강하세요. 딸 기슈구(기숙) 올림 1945년 1월 ×일 봉천에서 순자는 일본십장이 시키는대로 편지를 썼다. 순자는 일본십장이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쓸 타산이었다. 자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가슴이 아파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편지를 쓰면서 순자는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이 편지종이에 떨어지면서 여러곳이 얼룩졌다. 순자네가 근로봉사대에 끌려온지 약 한달이 지나자 공장내에는 “상한병(伤寒兵)”이라고 하는 전염병이 나돌기 시작했다. 병은 숙소에서 단체로 먹고 자고하는 애들한테 급속도로 확산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나가는 애들도 하나둘 생겨났다. 전염병은 순자가 가엽다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어느날 순자는 갑자기 몸에 열이 오르면서 으슬으슬 추워나기 시작하더니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으면서 저녁밥 한술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날밤 순자는 옷을 입은채로 누워 이불을 머리꼭대기까지 뒤집어썼으나 온몸이 그냥 와들와들 떨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밤중에 일본인 의사가 주는 알약 한알을 먹은 순자는 새벽녁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이튿날 말째인 몸을 갖고 직장에 나간 순자는 근무도중에 열이 불덩이처럼 오르고 눈앞이 노랗게 되면서 사위가 빙글빙글 돌아갔고 도무지 몸을 가늘 수가 없었다. 그 한몸을 갖고 휘청거리며 작업대앞에 나서서 일하던 순자는 끝내 현훈증을 일으키며 쓰러지고 말았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순자가 눈을 떠보니 자기가 중국식 온들로 된 숙소에 홀로 누워있었는데 입에서는 겨불내가 나는 것이 목구멍이 타들어가는듯 했다. “게 누구 없어요? 물…물 좀 주세요.” 입을 열었으나 목이 꽉 막히면서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아니, 소리를 친다고 해도 텅빈 방안에는 도와줄 이도 없었다. (내가 이러다 부모님도 뵙지 못하고 죽는 건 아닐가?)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지면서 눈물이 양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구멍이 난 창호지로 밖을 내다보니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꽤나 많이 내려 발목만큼의 두께가 되는듯 싶었다. 순자는 밖에 나가서 눈이라도 먹으면 나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순간 재차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목안은 계속 침 한방울 넘길 수 없을 정도로 타들어갔다. 일어날 수 없는 순자는 기여서 바닥에 내려가려다가 쿵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중국식 온들이 꽤나 높은지라 엉덩이쪽으로부터 떨어졌건만 그 부위가 한동안 얼얼해났다. 그는 안간힘을 써가며 출입문쪽을 향해 기고 또 기였다. 그가 가까스로 출입문을 열자 찬기운이 쓸어들어오면서 정신이 좀 개운한듯 했다. 순자는 다시 기운을 내어 밖으로 기여나간 후 두손으로 눈을 움켜쥐고 입안에 밀어넣었다… 한편 순자가 일하러 나가지 못하게 되자 공장측에서는 간도에 있는 용정영사관을 통해 순자가 전염병에 걸렸으니 그를 데려가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도록 순자네 집에 통지하게 하였다. 이에 집에서는 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한탄하며 땅을 쳤고 어머니는 아예 기혼해 넘어지고 말았다. 순자의 처지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순자의 편지를 받고 어느 정도 안심(편지종이에 얼룩진 눈물자국을 보고는 순자가 그냥 부모가 그리워 운 것으로 오산)하였는데 이런 기막힌 일이 발생하다니… 집에서는 셋째오빠 구완이를 대신 보내고 순자를 데려왔다. 그때는 순자의 목숨이 한창 경각을 다툴 때였다. 집으로 돌아온 순자는 일주일동안 혼미상태에 있다가 어머니 윤씨의 병구완끝에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했다. 한편 얼마 안있어 순자 대신 봉천에 간 오빠마저 그 몹쓸 상한병에 걸려 결국 드러눕게 되었다는 기별이 또 일본영사관을 통해 전해왔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집에 있는 돈푼이 갈만한 물건을 몽땅 팔아 겨우 노비와 벌금돈을 마련해 갖고 봉천으로부터 오빠를 데려오게 됐다. 인사불성인건 오빠 구완이도 마찬가지었다. 어머니 윤씨가 하도 의악스럽게 아들과 딸의 병구완을 한덕에 그들 오누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정에 액운이 거듭되던 그 세월, 참으로 갑갑하고 암울한 연대었다. 그 때가 바로 1945년 4월, 일제의 패망을 몇개월 앞두고 있던 나날이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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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14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 (13) 런던타워
    런던타워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 영국, 지점: 런던 템즈강 북안 함의 : 영국황실의 중요한 상징 런던타워는 영국 런던의 동남각의 탑산에 위치, 이미 9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런던타워는 비록 “탑”으로 명명되었지만 기실 이는 성곽식으로 된 건축물이다. 영국역사상에 있어서 런던타워는 일찍 방어가 엄밀한 요새였으며 국왕가족의 거처지었지만 어찌보면 감옥과도 같은 곳이기도 했다. 현재 런던타워는 하나의 저명한 박물관으로 되었는데 박물관내에는 역대 국왕들의 왕관, 왕포(王袍), 금은진주와 생활용기들이 진열돼 있다. 런던타워의 웅위로운 건축풍격과 유구한 역사는 이를 영국의 중요한 문화재의 하나로 되게 하고 있다. “보루”와 런던타워 런던타워는 두개의 방어담장을 갖고 있다. 즉 외부성벽 남쪽의 방어호로서 성벽밖을 둘러싸고 있는데 사병들이 그것을 지키노라면 방어로를 쉽게 통제할 수가 있었다. 다음 내부성벽은 비교적 높고 성벽을 따라 13개의 보루가 있으며 제 2 의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보루는 凸형으로 밖으로 돌출되었으며 사병들은 높은 곳에서 성곽밖의 모든 구석들을 살필 수가 있다. 또한 각 곳으로부터 오는 진공을 제지시킬 수가 있다. 이 보루들은 전쟁시에는 방어로 쓰이고 평소에는 거주장소로 이용되었다. “감옥”과 런던타워 런던타워는 일찍 적지 않은 명인들을 수감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 명인들 중에는 공상식 사회주의의 조상 토마스 몰과 국왕 헨리 8세의 두 왕후, 에드워드(爱德华) 4세의 두 유공자 등이 수감되던 곳이었다. 당시 대영제국은 국내치안에 타당한 방법이 있었고 대외로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대패시킨 엘리자베스 1세를 이 곳에 수감하기도 했다. 현재 런던타워는 그 어떤 사람도 가두어놓지 않지만 성곽내부에는 아직도 고대형법의 지하감방, 보검, 도끼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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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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