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투데이] 세계기록은 경기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른 분야에도 여전히 각양각색의 세계기록이 존재한다.
첫째, 임용한 재상이 가장 많았다.
당왕조에는 재상이라고 칭하는 관직이 아주 많았다. 좌복야, 우복야 및 문하성, 상서성, 중서성 3성의 장관을 모두 재상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재상수량은 전체적으로 다른 왕조를 넘어섰다. 예를 들어 당태종은 재위 23년간 재상을 25명 임명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무측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무측천은 인재를 아끼기로 유명했다. 과거를 크게 일으켜세우는외에 지방의 각급관리들에게 우수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장려했다. 그렇기는 해도 그녀는 인재를 놓칠가봐 두려워했고 나중에는 심지어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스스로를 추천하도록까지 격려했다. 인재가 많아지니 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놀려두면 그 것은 낭비였다. 결국 그녀의 통치하의 국가관료기구는 커지게 되었다. 재상의 직만 앞뒤로 73명에 달하게 되었다. "수당사(隋唐史)"에서는 이렇게 해석했다. “무후는 일처리가 마음내키는대로였고 좋고 나쁜 것이 항상 바뀌었다. 그래서 그녀가 즉위한 동안에 재상은 모두 73명에 이르렀다.”
적인걸(狄仁杰)도 무측천시기의 재상이다. 적인걸(630~700년)은 자가 회영(怀英)이고 태원사람이다. 적인걸은 천수 2년(691년) 9월에 봉각란대평장사를 담임하여 재상으로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여 래준신의 무함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억울한 누명을 벗은 후 팽택현령으로 강등되었다가 거란족의 난이 일어났을 때 다시 기용되었다. 신공 원년(697년)에 적인걸은 다시 재상으로 되었다. 적인걸은 바른 말을 잘 하기에 무측천에게 려릉왕 리현을 태자로 책봉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여 당조의 사직이 지속되게 하였다.
여기에서 무측천이 재상을 임용한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대주왕조를 건립하기전에 부유예(傅游艺)라는 9품관리가 기회를 잘 노렸다. 그는 무측천이 황제를 칭할 야심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 사람을 끌어모아 상소를 올렸다. 무측천에게 국호를 “주”로 고치라고 요구했다. 무측천은 기뻐하며 1년동안 9품관리인 부유예를 3품관직으로까지 승진시켰다. 그리하여 재상의 위치에 이르렀다. 당나라때 1품, 2품관리는 아주 적었다. 재상은 대부분 3품관이었다. 무측천은 지독하기 그지없는 악녀였지만 다행히 부지런히 정무를 보았고 나라를 잘 다스렸다. 빈번하게 재상을 바꾸었지만 국가의 혼란은 오지 않았다. 역사상 무측천에 다음가는 황제는 숭정황제이다. 이 명나라 마지막 황제는 일생동안 사람을 쓰면서도 의심을 계속 하였고 재위 7년동안 재상을 50명이나 썼다. 명왕조는 병이 깊었는데 그가 이렇게 뒤흔들면서 더욱 회복할 방법이 없어지게 되었다.
둘째, 즉위년령이 가장 많았다.
무측천의 이전에 즉위시 년령이 가장 많았던 황제는 유비였다. 이 유현덕은 전반생을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유격전을 벌렸지만 다행히 늙으막에 복이 있어 당시로서 가장 큰 2개의 주(형주, 익주)를 차지하고 최종적으로 60세에 영광스럽게 황제에 등극하고 촉한정권을 세웠다. 무측천은 그보다 더욱 힘들었다. 당태종의 재인에서 당고종의 소의(昭仪)를 거쳐 황후, 천후에 이르고 다시 태후에 이르렀다. 67세가 되여서야 비로소 황제의 보좌에 올랐다. 이 해가 기원 690년이다. 무측천은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자칭 “성신황제(圣神皇帝)”라고 칭했다. 14살때부터 그녀는 이미 53년을 분투한것이다. 그외에 오대십국때 마은(马殷)이라는 사람이 당나라말시기에 호남에 할거했다. 927년에 이르러 후당은 그를 초국왕에 봉했다. 그는 75세의 나이에 대기만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왕”일 뿐이고 죽을 때의 묘호도 초무목왕이었다. 뿐만아니라 이 왕은 중앙의 할거세력이 봉한 것이므로 황제의 반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셋째, 릉묘의 규모가 가장 컸다.
무측천이 처한 시대는 당나라의 번영시기였다. 풍부한 국력은 그녀의 릉묘건설에 견실한 재력기초를 제공했다. 그녀의 릉묘인 건릉(乾陵)은 684년에 공사를 시작하고 23년의 공사를 거쳐 1기가 완성되었다. 건릉은 수도 장안성을 모방해서 비슷하게 만들었다. 외곽성, 황성, 궁성의 3중성곽이 있고 내성에는 동쪽에 청룡문, 남쪽에 주작문, 서쪽에 백호문, 북쪽에 현무문이 있다. 남북의 주축선은 길이가 4.9킬로메터에 달했다. 남북의 담은 길이가 1450메터이고 동쪽의 담은 1582메터, 서쪽의 담은 1438메터이다. 총면적이 230만평방킬로메터에 달했다. 이러한 규모는 당태종의 소릉도 견줄수가 없어 력대제황제릉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외에 성내에는 헌전, 편방, 회랑, 궐루와 적인걸 등 60여명의 중신들의 사당이 있다. 이는 또 하나의 장안성이라 할만하다. 아쉬운 것은 “안사의 란”에 건릉의 휘황하고 장관인 지면건축물이 상당히 크게 파괴되였다는 것이다. 정원 14년(798년)에 이르러 다시 수리되었다. 이렇게 큰 릉묘이니 안에 들어있는 부장품도 만만찮았다. 현대학자의 예상에 따르면 부장된 진귀한 보물의 총량은 최소한 500톤가량일 것으로 본다. 만일 무측천의 건릉이 열린다면 아마도 진시황릉과 같이 중요한 고고학적 대사가 될 것이다.
넷째, 사용한 년호가 가장 많았다.
년호는 한무제가 발명했다. 제왕기년법의 연속이다. 무측천의 이전에 이 세계기록을 보유한 사람은 한무제였다. 그는 55년간 재위하면서 년호를 모두 11개 사용했다. 평균 5년에 1개를 사용한 셈이다. 이 년호는 각각 건원(기원전140~기원전135), 원광(기원전134~기원전129), 원삭(기원전128~기원전123), 원수(기원전122~기원전117), 원정(기원전116~기원전111), 원봉(기원전110~기원전105), 태초(기원전104~기원전101), 천한(기원전100~기원전97), 태시(기원96~기원전93), 정화(기원전92~기원전89), 후원(기원전88~기원전87)이다.
무측천에 이르러서는 그녀가 황제에 등극해서부터 마지막에 정변으로 자리를 낼때까지의 21년동안에 모두 17개의 년호를 사용했다. 생활력이 강한 녀강자로서의 무측천은 개성있는 년호를 사용했다. 이 년호는 각각 광택, 수공, 영창, 재초, 천수, 여의, 장수, 연재, 증성, 천책만세, 만세등봉, 만세통천, 신공, 성력, 구시, 대족, 장안이다. 그중 비교적 재미있는 것은 천수 3년이다 그해에 무측천은 두번이나 년호를 바꾸었다. 즉 천수 3년, 여의 원년과 장수 원년은 모두 같은 해에 바꾼 것이다. 이 해는 바로 692년이었다.
ⓒ 인터내셔널포커스 & www.dspdaily.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BEST 뉴스
-
에프스타인 파일 공개… 300만 페이지로 가린 서구 체제의 불투명성
2026년 1월 30일, 미 법무부 차관 토드 블랜치는 에프스타인 사건과 관련된 300만 페이지 이상의 문서와 2000여 개의 동영상, 18만 장에 달하는 사진을 대중에 공개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공개는 2025년 11월 ‘에프스타인 파일 투명성 법안’ 발효 이후 이뤄진 최대 규모의 기록물 공개로 알려졌다. 그러... -
7쌍 중 5쌍은 한족과 결혼… 조선족 사회에 무슨 일이
글|김다윗 중국 내 조선족과 한족 간 통혼이 빠르게 늘고 있다.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조선족의 타민족 혼인 비율은 70% 안팎으로, 전국 소수민족 평균(약 25%)을 크게 웃돈다.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이례적인 수치다. 전문가들은 이를 개인의 선택을 넘어, 인구 구조·도시화·문화 적합성이 맞물린 ... -
[기획 연재 ⑤] 법 바깥의 세계, 강호…범죄와 결합한 성
황제의 제도, 사대부의 언어, 향신의 관행, 군벌의 무력은 모두 ‘공식 권력’의 스펙트럼에 속했다. 그러나 중국 사회에는 언제나 이 질서의 바깥에 존재한 세계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강호(江湖)’라 불렀다. 강호는 단일한 집단이 아니었다. 비밀 결사, 범죄 조직, 유랑 집단, 무장 폭력배, 밀수꾼과 ... -
[기획 연재 ⑥] 가장 많은 규제, 가장 적은 선택―평민의 성 문화
중국 전통 사회에서 평민은 가장 넓은 계층이었지만, 성과 관련해서는 가장 좁은 선택지를 가진 집단이었다. 황제는 제도 속에서 방종을 누렸고, 사대부는 언어와 문화의 외피로 이를 합리화했으며, 향신은 지방 권력으로 도덕을 집행했고, 군벌과 강호는 폭력으로 성을 유린했다. 이 모든 구조의 비용은 결국 ... -
“여성을 수입품으로 부른 공직자, 그 말이 정책인가”
인구가 아니라, 사람을 모욕했다 정책 실패를 감추기 위해 사람을 모욕하는 순간, 그 정치는 이미 자격을 상실한다. 전남 진도군수 김희수의 발언은 그 선을 명확히 넘었다. “스리랑카나 베트남 쪽 젊은 처녀를 수입해 농촌 총각 장가를 보내자”는 말은 정책이 아니라 인권에 대한 폭언이다. 인구 소멸을 걱정한... -
야당이 된 보수의 기이한 충성심
윤석열 전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다음 날, 국민의힘 대표 장동혁이 국민 앞에 섰다. 국민이 기대한 것은 사과였고, 최소한의 거리두기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사법부에 대한 공격과 “계엄은 곧 내란이 아니다”라는 궤변이었다. 보수 정당 대표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