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8(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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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남아프리카공화국 항구도시 더반에서 출항해 희망봉기슭을 에돌아 북쪽으로 계속 항행하노라면 대서양 바다의 진주로 불리우는 카나리아군도의 라스팔마스를 거치게 된다.  

라스팔마스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유럽땅이지만 위도가 아프리카주와 가까이에 있고 또한 대서양난류의 영향으로 사시장철 꽃이 필수 있는가 하면 눈내리는 날을 거의 볼 수 없는 것이 이 곳이 특징이다.   

한편 라스팔마스는 대서양에서 조업하는 수많은 작업선과 이 곳을 지나는 원양화물선들이 반드시 거치게 되는 관문으로서 한국선원들은 이를 두고 “제2의 부산”이라고 친절히 불러주기도 한다. 

라스팔마스 –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바다에서 해가 뜨고 바다에서 해가 지는 곳, 아열대기후의 영향으로 사시절 따스한 날씨가 계속되고 야자수가 우거진 거리를 벗어나면 곧 해안선과 해수욕장이 펼쳐지며 무역선이 드나드는 항구에 들어서면 낭만과 로맨스가 엮어지는 청춘의 도시이다. 

1990연대초 내가 승선했던 선박 “코리안스타”호의 스켓쥴이 라스팔마스와 아프리카 및 유럽 쪽이 비교적 많은 까닭에 우리는 그 곳에 자주 입항했고 인상 또한 꽤나 깊었다. 

본선이 라스팔마스항에 처음 입항한 것은 1991년 6월초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배가 부두에 대이기 전 그닥 멀지 않는 해상에서 보는 라스팔마스는 한폭의 화려한 수채화를 방불케 했다. 노란색, 분홍색, 새하얀 색의 건물들은 산기슭과 산꼭대기까지 올리뻗으며 지은데서 일종 입체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저 멀리 해수욕장에는 수많은 남녀들이 한데 어울려 노니는 것이 보이었다. 

그 때 본선은 라스팔마스항 빤따랑부두에 정박하였다. 그날 저녁 우리 일행이 아무런 상육수속도 없이 항구입구를 벗어나자 곧바로 시내가 펼쳐졌는데 이럴 변이라구야. “대서양상회”, “민족촌식당”, “무궁화 백화점” 등 수많은 우리 글 간판들이 유표하게 한눈에 안겨와 진짜 한국의 어느 한 항구도시에 오지 않았나 하는 착각을 줄 지경이었다. 

일명 “코리아타운”이라고도 하는 이 거리에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가 숱한 한국선원들이 활개치며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어느 상가의 스피카에서는 한국가수 설운도의 “떠나가는 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등대불이 깜빡깜빡 배길따라 춤을 추는 밤/ 쌍고동을 울리며 가는 배 현해탄을 떠나가는 배// 자갈집아줌마가 손흔드는 밤/ 내 친구 다시 돌아 손 흔드는 밤// 정이 들었어 정이 들었어 눈물지으며 떠나가는 배/ 또 만나요 또 만납시다 손흔드며 떠나는 형제…  
뒤이어 우리가 들어선 곳은 대서양상회였다. 
“아이구, ‘코리안스타’호의 아저씨들이군요. 어서 오세요.” 
주인아줌마는 본선의 한국선원들을 잘 아는 듯 했다. 
이어 우리가 차탁에 둘러앉자 그녀는 우리한테 커피와 맥주 중 요구대로 공급했는데 돈 한푼 받지 않았다. 
 
대서양상회에서 우리 일행은 많은 선박에서의 생필품과 도서 등을 사고는 그 아줌마와 굳바이를 했다. 거기서 나오자 날은 이미 어두워져 거리는 황홀한 등불들로 오색영롱했다. 우리는 그 길로 택시에 앉아 싼타까따리나 공원광장으로 향발, 그 곳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시계초침이 8시 3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그 때의 공원광장은 이미 숱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로천에 식탁을 둘러놓고 술을 마시며 여가수의 팝송을 듣는 손님들과 맨봉당에 돛자리를 펴고 앉아서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 신자들, 또한 현지처와 함께 배회하는 선원들로 밤분위기는 짙어만 갔다. 

그날 밤 우리는 싼따까리나 공원광장에서 자정까지 술을 마시며 팝송과 쏘프라노 가수의 노래를 흠상하다가 귀선했다. 

2 

그 이튿날 오후 1항사가 식당안에 있는 공고란에 뭔가 써내려 갔다. 그 것을 읽어본즉.  

금일 저녁 갑판 및 기관 부서당직자와 전체 선원들은 단체행동을 할 것이오니 식사 후 선원마다 샤와들 마치고는 외출복 차림으로 대기하여 주십시오. 
1항사  
6월 ×일 

나는 그 집단행동이란 것에 대해 몹시 궁금했다. 

1항사한테 물어봤으나 그가 가보면 알 것 아니냐면서 알려주지 않았다. 혹시 교회같은 곳에 가려는 것은 아닌지? 그러다가 뒤 따라온 통신장한테 물어봤더니 오늘밤은 좀 자극적인 곳을 찾을 것이니 가보면 끝내줄 것이라 했다. 

저녁식사 후 내가 주방장 함께 부랴부랴 설걷이를 마친 뒤 샤와하고 외출복차림으로 나가보니 진작 버스 한대가 대기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둘이 오르자 마자 버스는 “부르릉”하고 시동을 걸었다. 버스가 당도한 곳은 싼타까따리나쪽에 있는 호텔강촌의 한식관, 거기서 우리는 또 띠를 풀어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모두들 저녁식사 뒤라 입맛이 별반 당기지 않으련만 그곳의 불고기와 참치사시미 그리고 깍두기 등은 어찌도 맛있게 만들었던지 주방장조수인 나는 진짜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음식을 파한 뒤 우리는 또 버스에 앉아 진정한 목적지인 무에그랑데쪽의 소극장으로 갔다. 거기에 도착하자 번쩍번쩍하는 네온싸인속에 여자나체광고가 유난히도 안겨왔다. 티켓은 인당 2000페스타(20불), 좌석에 앉자 요구에 따라 콜라나 맥주 한깡통씩 차례졌다. 듣는 바에 따르면 그 외 더 요구하면 한 깡통에 또 1000페스타씩 받는다기에 우리는 될수록 깡통맥주 하나를 갖고 조금씩 입에 대는 시늉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대는 여느 극장의 무대와는 달리 원탁형으로 꾸며졌는데 출연자들의 탈의실, 휴식실외 3면에 관중들이 앉기로 되어 있었으며 그 곳에서의 촬영은 일절 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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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시작됐다. 첫 종목은 10여쌍의 남녀가 나와서 추는 스페인 민속춤이었고 그 다음의 것은 스프라노가수의 독창이었다. 특히 그 쏘프라노가수의 두번째의 노래는 어딘가 듣던 곡이었다. 자세히 생각을 더듬은즉 그 것이 유명한 “선구자”가 아닌가.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이는 일종 한국선원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종목임에 틀림없었다. 비록 스페인어로 번역했지만 가사중 “일송정”, “해랑강”, “선구자” 이 세 단어만은 음역한 것으로서 그 것이 같은 곡에 다른 가사를 붙인 것이 아니란 것을 인차 알 수 있었다. 
참, 그 옛날 간도의 용정에서 불려졌다는 그 “선구자”의 노래, 그 것을 오늘 대양 건너 그 스페인땅에서 듣노라니 자못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한국선원들의 자극적인 것이란게 고작 이 것인가? 양대가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격이 아닌가? 하지만 그 것은 착각이었다. 몇 종목의 춤노래가 끝난 뒤 무대가 차츰 어두워지더니 드디어 알몸으로 실 한오리 걸치지 않은 아가씨가 무대에 나타났다. 금발머리에 곡선미가 뚜렷한 체형, 뭘 발랐는지 그 흰 피부는 왜 그리도 윤기나는지?… 

뒤이어 검은 협객복장을 한 사나이 한명이 숱한 칼을 철사끈에 꿰매들고 나타나서는 그 알몸아가씨를 널판자가 대인 벽에 세우는 것이었다. 또 시중군 한명이 나와 사나이의 눈에 검은 천을 두르는 것이었다. 아니 저 아가씨를 과녁으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천사같은 아가씨를 향해 칼을 뿌리다니. 소름이 꽉 끼쳤다. 그러건 말건 그 사나이는 아가씨를 향해 칼 재주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첫 칼은 머리위에 꽂히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칼은 목 양측에 박히고 그 다음의 칼들은 양측 겨드랑이밑과 허리양쪽켠 그리고 양쪽다리 사이로 면바로 실수없이 가 박히었다. 그 아슬아슬한 종목이 막을 닫자 그 다음은 웬 한국아가씨가 역시 알몸으로 서커스표현을 했고 뒤이어 아까 그 칼앞에 섰던 아가씨가 또 나와 갖가지 해괴망칙한 기교를 피워냈다. 그 것은 주로 그녀의 성기를 이용하여 표현하는 기교였다. 그 걸로 맥주병 뚜껑을 따는가 하면 거기에 전등알을 밀어넣어 불이 반짝하고 켜지게도 했으며 또 거기에 노끈 한오리가 달려 있었는데 글쎄 그 것을 당기니 그 노끈을 따라 숱한 대못, 가위, 면도날 등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 그녀는 어떤 둥근 탁자같은데 눕는 것이었다. 그러자 누군가 나와 그녀의 성기속에 닭알 하나를 밀어 넣었는데 이윽해서 그녀가 소리를 지를 적마다 닭알 하나씩 빠져 나오더니 나중에 한바구니가 꼴똑 차는 것이었다… 

공연의 마지막 종목은 두 남녀의 사랑을 제재로 한 무지컬이었다. 그 슈제트는 다음과 같았다. 남편있는 한 여인이 몰래 군사내와 사랑을 속삭인다. 하루는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그녀는 그 사내를 집으로 끌어 들이기고는 벌고 벗고 섹스파티를 벌인다. 그런데 그 시각 남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니 사내는 옷장 뒤에 숨는다. 남편이 들어오자 바람으로 옷을 벗으며 안해한테 덮쳐 들었고 이에 그녀는 거의 순종적으로 몸을 맡긴다. 다음 순간 옷장 뒤에 서서 둘의 섹스장면을 보는 사내는 불타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뛰쳐나와 도전을 건다. 둘은 칼 한자루씩 나누어 갖고 격투를 벌인다. 치열한 맞칼질 중 군사내가 점점 수세에 처하여 지게 될 무렵, 여인은 도리어 어떤 물건으로 남편의 머리를 까부신다. 쓰러져 죽는 남편과 깜짝 놀라 서있는 군사내, 마침내 엄연한 현실앞에서 그 남녀는 한차례의 격열하게 포옹을 한 뒤 함께 그 곳에서 탈출한다. 
   ……  
옛날의 강제혼인같은 것에 반항하여 참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을 담은 무지컬 같았는데 섹스장면같은 것은 직접 남녀가 어울려하는 것으로서 관중을 많이 끌기 마련이었다. 
이로보아 전반 라스팔마스의 문화산업이란 것도 고상한 것과 방탕한 것이 “동거”하는 혼합체라고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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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라스팔마스에 대한 깊은 인상이라면 1992년 4월에 있은 등대탑해수욕장 견문이었다. 

라스팔마스는 워낙 따스한 곳이었지만 본선선원들이 1박 2일을 목적으로 남쪽 등대탑쪽으로 갈수록 날씨는 점점 무더워났다. 듣는 말에 따르면 라스팔마스 도심과 등대탑쪽과의 기온차이는 10도 좌우라 했다. 그 것은 일명 라체해수욕장이라는 그 곳이 폭이 수백미터, 길이 20여리나 되는 백사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해수욕장으로 되었고 숱한 관광객들이 모여들기 마련이었는데 그 거개가 서부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이었다. 

우리는 에이젠트가 알선해 준 호텔에서 행장을 푼 뒤 인차 수영복을 갈아입고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가 그 때는 이미 숱한 벌거벗은 남녀들로 해수욕장은 그 매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태양산밑의 둥근탁자에 앉아 커피나 음료를 마시는 나체의 남녀들, 자기의 성기를 활짝 드러낸 채 모래밭에 반듯이 누워 있는 아가씨들, 또한 나체의 몸으로 남녀가 뒤섞여 배구, 탁구, 배드민톤 등을 치는 이들도 있고 숱한 사람들이 둘러보는 가운데 백일하에 섹스쇼를 벌이는 곳도 있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서양인들은 타인의 성기에 대하여 그저 사람한테 달린 입, 코, 눈이나 귀처럼 생각하면서 음욕과 대상으로는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었으나 우리가 여인들의 나체를 갑자기 보니 왜 사타구니에 있는 그 것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던지? 또한 섹스쇼같은 것을 벌이는 곳이 보이면 우리는 서로 더욱 잘 보려고 우르르 몰켜들기가 일쑤였고 서로 밀치면서 목을 빼들고 발굽치를 쳐들군 했다. 순간 나는 우리 연변에도 이런 나체해수욕장이나 나체쇼를 벌이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번 굴려 보았다. 보나마나 수습못할 치안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소위 성해방에 대해서도 그랬다. 서양에서는 부부가 서로 성해방을 해도 별문제였지만 중국사회에서는 벌써 관념상 자신은 성해방하려 하나 자기의 안해나 남편이 성해방하는 것은 용서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서양사회의 성해방은 흔히 부부사이의 만족되지 못한 부분을 타인을 통하여 향수하는 의식형태였지만 우리의 성해방은 부부일방에 대한 직접적인 배반으로 표현되며 그 뒤에는 치고 박고하는 싸움과 가정파산, 죄없는 고아의 출현 등 사회의 골치거리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나체해수욕장을 거닐노라니 우습고도 재미나는 일도 가끔씩 생기군 했다. 글쎄 한번은 웬 서양인부부 비슷한 남녀가 다가오더니 그중 여인이 우리 일행중 한 선원의 남근을 가르키며 웃으면서 뭐라고 씨벌이는것이었다. 그것은 요렇게 작은 물건이 남자구실을 어떻게 할 수 있으며 여자한테 만족줄 수 있느냐 하는 모양, 헌데 그 뒤를 이어 그의 그 것이 급기야 발딱하며 버섯모양의 대가리를 쳐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이에 재미있다고 더욱 깔깔대며 웃어대는 여인과 한쪽 켠에 물러서서 흥미있게 구경하는 그 사내, 하긴 그 사내의 물건과 우리의 것을 비교해 볼라니 그 싸이즈가 확실히 먹음직한 가지와 고추의 차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외 성기도 성기라겠지만 우리의 몸과는 달리 그들은 팔다리와 배꼽아래뿐 아니라 가슴팍까지 온통 털로 뒤덮여 있는 것이 우리보다는 퍽 사나이다와 보이기도 했다. 내가 만약 여인이라 해도 그런 품에 한번 안겨봤으면 하는 충동을 느낄만 했다. 

그날 저녁, 선장은 우리한테 그 누구건 오늘밤 아가씨를 꼬셔 오기만 하면 섹스화대는 자기가 부담하겠노라고 했다. 그러자 선원들은 좋아서 득의양양해했다. 그도 그럴것이 낮에 나체해수욕장에서 본 여인들중 이쁘고 섹시한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대낮이었으니 그렇지 밤이라면 몇번이고 아가씨를 골라잡고 덮쳐들었을 선원들이었다. 

헌데 이 곳에서만은 선원들이 착각해도 크게 착각했다. 우리가 나이트클럽으로 간 뒤 선원들이 혼자있거나 순 아가씨들로 군체를 이룬 좌석에 찾아가서 꼬셨으나 극상해서 함께 촬영하거나 물마시는 것까지는 응했으나 섹스요청에는 한결같이 거부해 나섰다. 특히 2항사의 말은 좀 속되었던지 독일에서 왔다는 한 아가씨는 마시던 맥주를 그대로 2항사의 얼굴에 확 치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여기로 모여든 여인들 중 섹스를 목적으로 한 여인은 기본상 없는듯 싶었다.    
이 것으로 우리의 선원들은 처음으로 이렇듯 훌륭한 곳에서 가장 고독한 밤을 보내게 되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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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 네덜란드의 로톨담에서 본선 “코리안스타”호가 러시아인들한테 팔린 뒤 중국 조선족선원 4명은 또 다시 항공편으로 라스팔마스에 날아와 대기하면서 재 승선을 기다리게 되었으며 그 수십일간의 체류로 라스팔마스에 대해 더욱 고찰할 수가 있었다. 

우선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수천명의 한국인들에 대한 삶의 실태였다. 

라스팔마스에 도착하자 그 곳의 이탈만대리점에서는 우리의 식사를 호텔강촌의 한식관에 배치하였다. 하여 오래간만에 팔자가 늘어져 하루 세끼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시내구경이나 하며 놀아 대는데 하루는 호텔강촌의 이횡권 사장님이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뜻인즉 일당 3000페스타(30불)씩 줄테니 한식관 주방장 조수로 일할 수 없느냐는것, 이에 선박의 주방장출신인 내가 마다할 것이 아니었다. 헌데 육지에서의 그 일이 해상선박에서의 주방일보다 곱절 힘들고도 피곤할 줄이야. 그때 우리는 오전 9시가 좀 넘어 출근해서는 주방과 식당청소를 한 뒤 10시부터 정식 근무를 시작했는데 내가 맡은 분야는 마늘껍질을 발라내고 야채를 다듬고 고기를 썰어놓는 등 진짜 주방장이 요리를 하는데 있어서의 시중군이었다. 그러다가 일단 손님들이 들이닥치면 주방장의 요구에 따라 일하는 외에도 요리를 나르고 그릇을 씻기도 했으며 또한 그런 일도 없으면 하다 못해 유리를 닦거나 냉장고안의 얼음까기 등 일손을 놓을 사이가 없었다. 이렇게 자정까지 맴돌아치다 보면 온몸이 해나른해 나기가 일쑤였으며 노동시간도 보통 15시간 좌우씩 되었다. 이는 일이 없으면 트럼프나 화토치기를 하는 연변의 음식점실태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는바 그 돈이 진짜 뼈돈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그 곳의 주방장은 자기의 요리기술을 남한테 배워주기를 극력 꺼렸다. 이는 일종 경쟁사회에서의 자아생존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요리를 하노라면 알게 모르게 주방조리수한테만은 그 솜씨를 보여주기 마련인바 주방장은 나를 부려먹기 위해서도 칼질하는 법을 배워주고 고기, 야채와 양념은 각각 얼마씩이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으며 나 또한 그 것을 머리속에 기억하고는 후에 수첩에 적어두군 했다. 하여 나는 안속을 챙겨 각종 찌개, 불고기, 무침, 김치, 젓갈, 짠지 등을 만드는 법을 익혔으며 웬간한 한식에서의 한식요리 수십가지는 만들 수 있는 자신감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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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한국인 거개가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그것이 아마 그들이 그 생소한 땅에 깊이 뿌리를 박을 수 있는 비결인듯 싶어졌다.
다음으로 라스팔마스 현지인들에 대한 인상이다. 

19세기의 한시기 영국이 세계 각 지역에 식민지를 두고 있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워졌다면 스페인 역시 그의 버금으로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을 강점한 적이 있었기에 그 곳들에서 수탈한 재물로 본토를 살지게 했으며 그 밑천으로 스페인 사람들은 20세기 말엽에 들어서까지도 여유있는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 중 나라의 복리사업이 아주 잘돼가고 있다는 인상을 크게 주었다. 그 실례들로는 일하기 싫어 빈둥거리는 사람한테도 매달 실업수당을 발급했고 범죄자에 대한 사형제도가 진작 취소됐는가 하면 범죄자한테도 매주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휴가를 주어 집식구들과 모이게 했으며 일한만큼의 봉급까지 지불하는 상황이었다. 라스팔마스에서 우리는 한국으로부터 그 곳에 와서 식당일을 하는 박영애라고 부르는 아줌마를 알게 됐는데 그녀의 남편은 살인죄로 당지 교화소에 수용되여 있는터였다. 그 때 그녀는 남편이 맡아준 세집에 들어 일하러 다니면서 1주일에 한번씩 남편을 집에서 맞군 했는데 그것이 감동돼서인지 “스페인사람들은 한국사람보다 억수로 너그러요” 라고 자랑하군 했다. 

사회가 이렇게 되자면 우선 국민들의 문명정도가 따라가야 하는 법이란 것이 가장 큰 인상이었다. 

우리가 볼 때 그 곳 사람들은 진짜 문명스러웠는바 예하면 택시기사는 거리에서 근본 경적을 울리는 법이 없었고 일단 우리가 거리를 건너려 하면 택시를 세워놓고 먼저 건너가라는 손시늉부터 했으며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 역시 우리가 뭘 좀 물으면 열심히 가르쳐 줬는가 하면 그래도 안되면 꼭 한국인이나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붙여 주고야 지나가는 것이었다. 당지의 한국인들의 소개에 의하면 그들은 옛날부터 잘 살았기에 돈에 대한 집념이 옛날 못살던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처럼 강하지 않았으며, 인간이란 금전과 함께 인간자질 및 지식수준까지 함께 같은 차원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관념이라 했다. 그렇기에 이전에도 본선이 입항할 적마다 숱한 교회의 집사들 (한국인 집사 포함)이 찾아와 우리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도 돈은 물론 음료수 한모금 마시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외 현지인과는 달리 그 땅에 사는 외국인들 사이에는 경쟁이 심했다. 20여년 전에는 한국인들이 내노라 하고 우쭐거렸지만 그 때는 라스팔마스에 무리로 쓸어드는 인도인들한테 큰 도전을 받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머리가 좋고 부지런한 반면 노인과 아이들만은 장사에 내몰지 않았지만 당시의 인도인들은 이 두 부류까지 동원되는가 하면 여인들은 드러내놓고 매음을 했으며 또한 라스팔마스로 들어오는 한국물건은 모두 비싼 것들이어서 가격상 벌써 값싼 인도물건한테 우세를 빼앗기고 있었다. 

이렇듯 경쟁과 도전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축복할만한 것은 라스팔마스란 이 낯선거리에도 “차이나 연변술집”이란 레스토랑이 선 그 것이었다. 이름그대로 이 식당의 마담은 연변 화룡의 여성이었는데 길림성대외경제합자회사 특파원의 신분으로 그 곳에서 일을 보는 한편 장사도 하고 있는 터였다. 이 술집의 출현으로 우리는 기쁘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했다. 기쁘다는 것은 이 식당을 발판으로 더 많은 연변의 조선족들이 그 곳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근심스럽다는 것은 그 치열한 경쟁속에서의 이 식당의 운명때문에서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부질없는 근심으로, 그 식당이 인젠 식당만이 아닌 종합서비스센터로 부상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5


라스팔마스에 체류하고 있으면서 나는 늘 그 생소한 땅에서 우리의 고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꿈마다 그리워 가닿게 되는 고향, 허나 고향은 그 곳 라스팔마스에 비해 확실히 뒤떨어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럼 경제적으로 따라잡기는 아직도 기나긴 시간이 수요되는 것, 하다면 목하 할 수 있는 것이란 사상해방과 관념갱신부터일 것이라 느껴졌다.  
 
외국인과 우리와의 사상 및 관념차이, 하지만 그 것도 일조일석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난제인 것이다. 그 때 연변에서 갓 출국한 선원들한테서 들을라니 연변도 인젠 개방돼서 양고기산적집이나 다른 식당들에서도 아가씨동반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아가씨동반이라니 그 뜻을 알만하기도 했다. 참, 양고기산적 몇개나 요리를 몇접시 놓고 아가씨를 붙혀 주다니, 그것이 아가씨장사이지 어떻게 음식업이라 하겠는가. 따라서 어떤 곳에서는 아가씨맛을 먼저 본 뒤에야 음식맛을 본다고 하니 정직하고 점잖은 사람은 시름놓고 들어 갈만한 음식점이 없어지고 공연히 남의 오해를 받기가 일쑤인 것이다. 왜냐하면 라스팔마스의 싼따까따리나, 무에그랑데 등 거리는 정부에서 정해놓은 사창가로서 아가씨들이 공개적으로 남자들한테 감겨드는가 하면 정기적으로 종합검진을 하고 건강증이 있어야 손님을 접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 연변은 도대체 어디가 “매음굴”이고 누가 창녀인가를 도무지 가릴 수가 없겠으니 말이다. 한편 매음녀들한테서 생계유지같은 것은 아득한 옛말로 되어 매음치부로 되고 있어 점차 금전관념이 정조관념을 대체하는 바람이 일 수밖에 없으며 그 뒤에는 살인, 협잡 등 범죄가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다음으로 수입과 지출이 정비례되지 못하는 연변의 사회실정이다.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현지인들을 볼 때 그들은 확실히 돈이 많은 반면 한심한 깍쟁이들이었다. 우리가 한국사람을 서울깍쟁이라고들 했지만 외국인들에 비하면 한국사람은 그래도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근성이 조금은 남아있는 듯 했다. 술집같은 곳에 가면 한국인들은 그래도 불고기에 소주라도 마시지만 라스팔마스의 현지인들은 흔히 맥주 두 깡통에 땅콩 한접시면 2~3시간씩 앉아 면담하군 했는데 처음에 우리는 그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차츰 날이 감에 따라 우리는 그들의 작법에 대해 인정하게 되었는바 배불리 먹고 술주정하는 것보다 조용히 앉아 일처리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일어서는 것이 퍼그나 신사스러웠다. 하다면 그들한테 돈이 없어서일가? 그 것이 절대 아니었다. 이는 라스팔마스뿐 아니라 유럽인들 거개가 그런 것 같았다. 

네덜란드의 로톨담 항구에서 있은 일이다. 그 때 본선은 꾸바에서 싣고 온 밀감을 하역하게 됐는데 게으른 흑인인부들이 말썽만 일으키면서 일을 하지 않아 작업이 계획보다 얼마동안 더 늦어질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러자 안달아난 선장은 인부들을 바꿔줄 것을 강력히 항구측에 요구했다. 허나 항구측에서는 인건비가 싼 흑인인부들을 바꾸기 아쉬워 본선 선장과 1항사를 식당에 청하는 것으로 아퀴를 지으려 했다. 그런데 만포식하고 돌아올 줄 알았던 두 분은 맥주 두깡통씩만 마셨다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주인측에서 맥주 한컵을 갖고 두 시간씩 끌어 대는 통에 아무리 손님측이라고 해도 그렇지 도무지 마구 마실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하다면 이런 일처리가 중국에서는 통할 수가 있을까? 

당시 금방 출국한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동북아 금삼각지인 훈춘개방바람에 사람마다 통이 커져 이전에는 순두부집이나 양고기산적이면 고작이던 것이 인젠 중식이요, 양식이요 하면서 하루에 수백원 혹은 수천원씩 탕진한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나 손님한테 아가씨를 붙여줘야 제일 성의있는 것으로 인정받는다니?! 헌데 그러자면 매일같이 그만한 돈이 있어야 할텐데 그렇게 돈이 많을 수 있을까? 그럴리 만무하다. 그러면 남을 협잡하기 마련, 사업을 위해 협잡하면 몰라도 술먹고 즐기기 위해 인격을 팔면서 협잡이고 그 협잡도 못하면 또 외상으로 된단다. 그러면 그 외상 때문에 피해 다니고 얻어 터지며 싸울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라스팔마스의 현지인들한테는 술 때문에 외상이란 있을 수 없거니와 술 때문에, 외상때문에 싸우는 일은 더욱 있을 수 없었다. 

라스팔마스에서 술먹고 주정하고 싸우는 건 거의 모두가 우리 동양인들이었는데 현지인들은 그들을 온역 피하 듯 피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현지인 택시기사를 칼로 찍어 죽인 한 연변선원이 법정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 피해자의 아내가 하는 말이 “저 동양야만인들한테서 무슨 보상금을 받겠는가. 다만 저 놈들더러 이 섬에 상육하지 못하게 하라”고 절규했다 한다. 그러니 동양인의 이미지가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라스팔마스를 떠날 때만 해도 그 곳에는 배에서 도망친 연변의 젊은이들이 10여명씩 줄쳐 다니며 거리를 휩쓰는 걸 볼 수 있었다. 일자리도 돈도 없는 그들이 매일 매일을 어떻게 보낼까? 그 뒤에는 분명 절도와 강탈같은 범죄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우리 연변인들은 어디가나 표가 난다”고 자랑같이 말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랑거리인가? 조선, 한국이나 러시아에 가서도 꼭 말썽과 골치거리를 만드는 연변사람들의 이미지, 뒤떨어진 사회에서의 저질교육과 낮은 인간자질 등 이 모든 것이 대양건너 대륙 지나 저 유럽땅에까지 루가 미치고 있으니 연변의 젊은이들여, 정신차릴 때가 왔는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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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견문 시리즈(1) 대서양의 진주 - 라스팔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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