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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동의 밤, ‘해당화’ 식당에서 피어난 이념의 그림자

  • 화영 기자
  • 입력 2025.05.2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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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중국 단동. 북녘 땅과 압록강 하나를 사이에 둔 이 국경 도시는 어둠이 내릴수록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자정 무렵, 강 위를 스치는 안개가 강둑을 넘고, ‘평양해당화’ 식당으로 스며든다.


이곳에서 일하는 김선미(가명, 23)는 김일성 배지를 조심스럽게 떼어내 소매로 여러 번 닦는다. 지난 3년간 그가 소지해온 유일한 개인 물품이다. 밖에서 울린 배의 경적에 놀란 김씨는 배지를 급히 앞치마 주머니에 숨긴다. 북에서의 출발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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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평양국제예절대학을 졸업하고 300명 중 선발된 여성 중 한 명이다. 출국 전, “너희는 국가를 대표하는 이동식 명함”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독일 출신 전문가에게서 포크와 나이프는 87도의 각도로 놓아야 하며, 미소는 정확히 8개의 치아가 보여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한 번은 서빙 트레이의 각도를 0.5도 기울였다가 '주체사상요강'을 30회 필사하는 벌을 받기도 했다.


특훈 센터의 첨단 장비와 정전이 잦은 대학 실험실 사이의 격차는 김씨에게 ‘국가 우선’의 논리를 더욱 강하게 체감하게 했다.


2층 VIP룸인 ‘자주홀’에서는 만수대 벽화를 배경 삼아 황금빛 샹들리에가 내려다보고 있다. 김씨가 구운 고기를 든 채 들어서자, 한 하이난 출신 사업가가 스마트폰을 들어 촬영을 시작했다. 김씨는 재빨리 자세를 고쳐 배경에 금일성 초상이 정확히 들어가도록 했다. 이는 서비스 매뉴얼 1조다.


레스토랑은 메뉴 사이사이에도 이념 교육을 배치해놓았다. 광고지에는 '오늘의 조선'이 끼워져 있고, 젓가락 케이스에는 ‘평화 우정’이 새겨져 있다. 화장실에서는 '우리는 가장 행복합니다'라는 다큐멘터리가 반복 재생된다.


김씨는 어느 날 상하이 조사단을 상대하던 중 '주체사상 돌솥 비빔밥'을 영어로 설명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쌀은 노동당을, 반찬은 각 계층의 단결을 상징한다”는 그의 답변은 그날 밤 모범 사례로 기록됐다.


탈의실 안쪽 철제 보관함에는 여성들만의 비밀이 숨어 있다. 누군가는 담배 종이 대신 '경제학원론' 책장을 찢어 쓰고, 어떤 이는 눈썹 펜으로 휴지에 중국어 노래 가사를 적는다. 김씨의 경우, 북한식 ‘3호 장미빛’ 립스틱 아래, 손님이 건넨 디올 999 립스틱을 숨겨놓았다.


감시는 해마다 강화된다. 지난해 도입된 ‘적성’ 손목밴드는 심박수 변화를 감지한다. 어느 날 직원들이 함께 한국 드라마를 보다 경보가 울렸고, 다음날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린 이가 설거지 담당으로 전환됐다. 표면적 이유는 ‘눈 감염’이었다.


‘3인 상호 감시제’도 일상화돼 있다. 보안 부서 요원은 각 근무조에 잠복해 있고, 김씨는 과거 동료가 ‘해리포터’ 소지를 이유로 신고당하던 날을 기억한다. 창밖에 내리던 눈과 실내에서 흐르던 피는 묘하게 비슷한 색이었다고 한다.


추석 밤에는 특별 공연이 열린다. 평소 긴 옷을 입던 여성들이 갑자기 짧은 개량치마를 입고 춤을 춘다. 김씨는 대퇴부의 멍을 만져본다. 리허설 중 지도자가 자로 때리며 교정한 흔적이다. '진달래 피었네'가 울려 퍼지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무대 아래에서 한 상공회의소 회장이 술에 취한 채 돈을 던졌고, 지폐는 무대에 떨어지며 평양의 봄꽃처럼 흩날렸다.


주방장 박씨는 "조선 밖의 맛"을 선보이라며 고추장에 꿀을 섞는 법을 귀띔해줬다. 이는 미묘한 저항이자 감각의 해방이었다. 심천에서 온 한 손님이 “자유의 맛이 느껴진다”고 말했을 때, 김씨는 처음으로 ‘미각’이 깨어남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계약 종료일, 김씨는 숙소에서 짐을 쌌다. 남은 과자 세 봉지, 손님들이 준 머리핀 스물일곱 개, 구겨진 '독자' 잡지 한 권. 이것이 그의 3년을 증명해주는 전부다. 귀국 통지서를 들고 온 안내자는 “디올 립스틱은 단동에 남기라”고 일러줬다.


신의주 플랫폼에 도착한 김씨는 주머니에 숨겨 둔 배지를 다시 손에 쥐어본다. 건너편 단동의 네온이 강 안개를 뚫고 물웅덩이 위에 금빛으로 흩어진다. 그는 비 내리던 어느 밤, 중국 손님이 건넨 손수건을 제복 안쪽에 꿰매두었던 것을 떠올린다. 그 위에는 쌍둥이 연꽃 자수가 수놓아져 있다.


영업을 마친 ‘평양해당화’에서는 새로 들어온 여성들이 '아리랑'을 연습 중이다. 그들의 가슴에 달린 진달래 배지는 여전히 북쪽을 향하고 있지만, 그림자는 조용히 강을 따라 남쪽으로 흐른다.


그 어둠과 빛 사이, 이들의 침묵은 단지 두 체제의 간극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와 생존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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