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투데이] 1968년 12월 5일, 중국 중남해 회인당, 비서 1명이 부랴부랴 들어오더니 외빈을 접대하고 있는 주은래 총리에게 귓속말로 몇 마디 건네였다. 그러자 웬간해서는 놀라지 않던 주은래 총리는 갑자기 안색이 달라지면서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당시 비서가 주은래 총리한테 보고한 것은 북경 수도 공항에서 착륙하던 비행기가 한 대가 추락하면서 탑승해 있던 인원 13명이 조난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주은래 총리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조난자 중 1명인 과학가 곽영회 때문이었다. 주변 일꾼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후 주은래는 오열하며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1968년 12월 25일, 중공중앙은 과학가 곽영회에게 혁명열사 칭호를 수여했다.
그 후 12월 27일 곽영회가 사망한 지 22일 만에 그가 생명으로 지킨 중요한 자료에 의해 중국의 첫 번째 열핵미사일 시험 폭발이 성공하여 수소폭탄의 무기화가 실현되었다.
1999년 9월 18일, ‘양탄일성(两弹一星: 원자폭탄, 수소폭탄 그리고 인공위성)’ 프로젝트에서 탁월한 공헌을 한 중국 과학가 23명이 국가로부터 ‘양탄일성 공훈상’을 수여받았으며 곽영회 열사는 이 군체에서 유일하게 핵폭탄, 미사일과 인공위성을 성공시키는 데 모두 이바지한 과학가이자 유일한 혁명 열사였다.
그럼 지금까지 유일하게 ‘열사’로 ‘양탄일성’ 표창장이 수요된 과학가 곽영회에 대해 그 인생을 더듬어 보자.
놀라운 천부
곽영회는 1909년 중국 산동(山東)의 영성(榮成)등가(滕家)진 곽가(郭家)촌에서 곽씨 가문의 넷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세세대대로 농사를 지어왔으나 아버지 곽문길은 그래도 어느 정도 문맥을 익혔기 때문에 곽영회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그러나 곽영회는 아홉 살 되던 해에야 삼촌 곽문수(郭文秀)가 차린 학당에서 글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곽영회는 책 읽을 기회가 생기면 놀라운 재능을 보이군 했다.
1922년, 13살의 곽영회는 부지런하고 학업을 좋아한 덕에 석도진의 명덕소학교 고급학년에 보내져 공부하게 되었다. 그 뒤 1926년 곽영회는 17살 나이에 우수한 성적으로 청도대학 부속중학교에 우수한 합격하여 고향 최초로 국비 중학생이 되었다.
이어 1929년, 곽영회는 다시 남개 대학 예과 이공반에 합격되어 고향의 첫 대학생으로 되었다.
계속하여 1931년 곽영회는 본과로 편입되어 물리학 전공을 선택, 당시 중국 국내에서 유명 교수였던 고정미(古靜尾)의 제자가 되었다가 2년 뒤 고정미는 다시 곽영회에게 북경대학 물리학부 진학을 추천했다.
그러던 중 1938년 여름, 곽영회의 운명을 바꿀 시험이 다가왔다.
당시 ‘중영 경모관리 이사회(管理中英庚款董事会)’는 제7회 영국 유학생 모집을 실시해 20명을 뽑으려 했지만 지원자가 3000명이 넘었으며 곽영회가 지원한 항공공학 공기역학과는 1명만 모집함에도 50명이나 지원했다.
그 시험에서 곽영회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5개 과목의 총점수는 350점을 초과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곽영회와 똑같은 점수를 받아 공동 1위를 한 수험생이 2명이나 되었다.
학생 1명만 모집하는 시험에 세 사람이 동점이니 어떻게 처리하는가? 이사회는 충분한 논의를 거쳐 이들 3명을 모두 채용하기로 하였다. 이는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당시 곽영회와 동점이었던 두 학생, 한명은 전위장(錢偉長·나중에 저명한 과학자, 교육자가 됨)이었고 다른 한명은 임가추(林家翘 ․ 나중에 저명한 수학자, 천체물리학자로 됨)였다.
1941년 1월, 곽영회는 선발된 학생 수십 명과 함께 상해에 모여 해외유학을 준비할 때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이렇게 되자 이 학생들을 영 연방의 각 국가에 보내 공부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친인척들과의 작별 후 배에 승선한 곽영회는 자신의 여권이 일본 정부로부터 발급받은 것임을 알게 됐으며 여권에는 또 “여행 도중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3일간 머물며 뭍으로 놀러 가는 것도 허락된다”고 씌어져 있기도 했다. 이러자 학생들은 즉각 영국 대리 점원에게 항의하며 여권 변경을 요구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절대 안된다면서 “내키지 않으면 유학을 포기하라”고 했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앞에 두고 적지 않은 학생들은 침묵에 빠졌다.
그러자 평소 말이 없던 곽영회가 나섰다.
“출국하지 못하게 하면 출국하지 말자. 중국인은 기개가 있어야 한다.”
이어 몇몇 학생들이 닻을 올리는 배에서 짐을 들고 내렸으나 곽영회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중국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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