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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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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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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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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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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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2-08-28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지난 세기 20-30년대 중국영화계의 황후 호접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올해 1월 20일은 지난 세기 20-30년대 중국 상해에서 “영화황후(电影皇后)”로 불리었던 호접(胡蝶)이 태어 난지 110주년이 되는 날이 된다. 이 날을 기념하면서 최근 상해시 촬영예술센터에서는 “접몽백년(蝶梦百年)”으로 명명된 호접의 영상역사 전시회(1월 20일-3월 18일)가 막이 올랐다. 전람에는 수십 년간 호접의 영화배우생애와 사생활 및 해외여행 중의 순간순간을 기록한 진귀한 사진 근 200점이 진열되었다. 그만큼 지난 세기 20-30연대 호접은 상해영화계의 유명스타였다. 당시 조선인 영화배우 김염(金焰)이 상해에서 “영화황제(电影皇帝)”로 떠올랐다면 호접은 “영화황후”로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상해에서 일반 노동자의 월급이 20원 정도였다면 호접의 월급은 2000여원으로 일반 노동자 월급의 100배에 달했는바 이는 그녀의 몸값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영화황후 호접의 영상역사 전시회의 포스터 1908년 스페인 예술인 엘 레마스가 상해에서 중국의 첫 영화관을 세웠다. 영화관은 홍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얼마 후 호서화(胡瑞华)란 이름을 가진 소녀가 찾아왔다. 영화관 보스는 대뜸 이 소녀를 보고 “바로 저 애이다”라고 탄성을 지를만큼 기뻐했다. 그것으로 이 소녀는 자신의 일생을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녀가 바로 상해영화계에서 이름을 날린 호접이었다. 호접은 중국 영화사상 가장 명성이 높고도 전기적 색채가 농후한 여스타였다. 호접이란 이름은 중국영화계에서 일찍 알려졌고 장시기 동안 전해져온 이름으로서 중국영화계 스타중의 스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0여 년 간 영화배우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호접은 90여부의 영화에서 주역을 담당, 자주 “영화황후”로 등극하였으며 많은 영화팬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싶이 하였다. 그리고 당시 영화팬들한테 있어서 호접은 단지 스타였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이었으며 지어 당시 그녀를 숭배하는 것은 일종 문화이기도 했다. 호접의 고고성은 중화민족의 거대한 변화 및 영화업과 더불어 울리었다. 1908년 상해에서 출생, 그 해 광서황제와 자희태후가 선후로 죽었다. 그렇다면 호접의 일생은 중국의 봉건제왕제로부터 중화민국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까지 탄생하는 격변기를 지켜본 일생이었으며 그녀가 생을 마감하는 1989년은 중국 대륙과 대만 사이의 냉전시기이기도 했다. 호접이 태어날 때 부모는 철도부문에서 근무했다. 그러한 연고로 호접은 부모를 따라 상해, 북경, 천진, 중경과 광주 등 대도시를 거쳐 나중엔 광주에서 오래 동안 머물었다고 한다. 이렇게 거의 중국대지의 절반을 돌면서 그녀는 북경말은 물론 광동말과 상해말까지 유창하게 구사했고 견식면이 넓은데다 양호한 가정교양으로 자랐다. 이는 소녀시절의 호접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연예사업을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 소녀시절의 호접(왼쪽 두 번째) 16살 때 부모를 따라 다시 상해로 돌아온 호접은 당시 중국영화학교의 제1기생으로 입학, 아울러 그녀의 예명 호접(胡蝶)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화학교에서 학습하는 기간 호접은 다방면 재능을 익히기 위해 노력, 심지어 자동차운전기술과 기마기술까지 숙련되게 익히었으며 또한 당시 생활방식과 배우가 수요하는 기예를 장악하기 위해 촬영에 대한 연구에도 집념했다. 그녀는 자주 자신을 촬영하는 일꾼과 함께 촬영각도와 광선의 조절 등에 파고 들면서 촬영효과를 높이는데 많은 품을 들이기도 했다. 1926년 18살에 호접은 상해의 유명한 화보 “양우(良友)” 창간호 표지인물로 실리었다. 그해에 호접은 영화 “추선원(秋扇怨)”에 출연하면서 스크린생활의 진정한 첫 발자국을 떼었고 유명해시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중국 영화의 탐색기술, 연기기술 및 시장 개척의 초보시기었고 또한 무성영화 시대었기에 배우의 표정예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때였으며 배우 거개가 표정예술에 노력을 경주하던 시기었다. 당시 호접의 풍격은 이미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는바 동작성이 크지 않으면서도 진실한 것이 곧바로 관중을 끄는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당시 상해의 “붉은 장미 화보(红玫瑰画报)”는 호접의 연기를 두고 “성정이 고요하여 그 속에 여자규수의 풍격이 있으며 왁작지껄이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지금 와서 호접이 출연한 영화들을 보면 거의 호접한테서 “크나큰 욕망”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녀는 최대한 그 무슨 “욕망”같은 것을 억제하면서 자신의 인성을 연기, 그 표현기교는 형언할 수 없는 경지에 달하게 한다. 평소에 영화관람을 별로 즐겨하지 않던 한 관중은 호접이 출연한 영화를 본 뒤 “호접이 출연한 배역이 아무리 조용하면 할수록 그 속에서 더욱 장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라고 소감을 밝히었다. 또한 1940년 중국 경극예술의 아버지인 매란방(梅兰芳) 역시 호접이 출연한 영화 “절대가인(绝代佳人)”을 보고 “호접의 연기는 어느 유파를 대표하는 것으로 그녀는 조용한 것을 장기로 삼아 관람자들한테 자신의 수양깊이를 보여준다”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1949년 호접은 영화 “금수천당(锦绣天堂)”에 출연하여 여주인공역을 담당, 이 영화는 중국의 첫 칼라영화였다. 1928년 호접은 다부작 영화 “불타는 홍련사(火烧红莲寺)”에 출연, 도합 18집으로 된 이 영화는 무협영화로서 당시 무협영화의 조류를 일으켰으며 티켓판매수입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 뒤 호접은 계속해 영화 “부자의 생활(富人的生活), “도화호(桃花湖”, “자유의 꽃(自由之花), “가수 홍모란(歌女红牡丹)” 등에 출연하면서 보다 실생활과 접근하는 인물로 많은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1933년 3월 5일, 호접이 주역을 맡은 영화 “광류(狂流)”가 상해에서 첫 방영이 되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1931년에 있는 특대 수재를 배경으로 사회의 최하층 사람과 상류사회 사람들간의 계급투쟁을 반영한 영화로서 특대 수재를 통해 민족위기를 경종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계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야말로 중국영화의 새로운 노선을 개척했다고 대서특필했다고 한다. 호접의 행운은 동업계 영화인 중에서 그 생애가 가장 길고 출연차수가 많아서만이 아니다. 그녀는 수차례에 거쳐 영화계의 선구자로 되기도 했다. 1931년 호접은 중국영화계에서 선참으로 프랑스 백대영화회사와 합작하여 스크린에 출연했고 또한 중국의 첫 유성영화 “가수 홍모란”에 출연한 배우기도 했다. ▲ 영화배우 시절의 호접(촬영시기 미상) 호접의 배우생활은 1930연대에 들어 클라이막스로 치솟았다. 1935년 그녀가 주역을 맡은 영화 “자매의 꽃(姊妹花)” 등 몇부의 영화가 소련에서 있은 국제영화제에 선보이었고 선후로 독일, 프랑스,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 나라에서 방영되기도 했으며 그때마다 호접은 그런 나라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는 그녀의 생애에서 일대 화려한 대악장이기도 했다. 1935년 호접의 혼례는 당시의 중대한 문화적 대사였다. 친우들의 축복 외 영화계의 많은 인사들은 그녀가 앞으로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계속 나라와 영화계에서 기여하며 활약하는 “여대장부”가 되기를 기대했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전신인 “의용군행진곡”의 작사자인 전한(田汉)은 한수의 시로서 호접으로 하여금 주방과 작별하고 영화에 매진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후 호접은 이러한 안목의 제약에서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영화배우로는 전성기의 나이었지만 그녀는 점차 가정에 많은 정력을 쏟는 삶에 충실하기 시작했다. 즉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으로 제2의 인생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조류였던 소위 진보여성 및 현대여성과는 다른 선택이었으며 그렇다고 남권사회에 얽매인 봉건여성의 선택인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당시 소위 가정을 버리고 “진보”만을 외쳐대는 극단적인 여성조류에 대한 일종의 반항었다. 일대 절색으로 20-30연대 중국의 영화계를 휩쓸었던 호접은 1989년 호접은 캐나다 밴큐버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20여 년이 지난 2016년 초 호접의 생전유품이던 진귀한 사진 50여점이 캐나다 밴큐버의 미술관(아시아부)에 전시되면서 사람들은 재차 민국시기의 이 영화황후를 머릿속에 떠올리었으며 이는 중국정부의 커다란 중시를 받기도 했다. 전시회가 끝난 후 밴큐버 미술과 아시아부의 총감인 정승천(郑胜天)은 중국영화사 연구원 이진(李镇)을 초청하여 그와 함께 수천부에 달하는 자료를 찾아 호접에 대한 자료를 수집, 도합 호접의 영화인생과 관련된 205점의 자료사진을 모아서는 그해 11월에 중국으로 돌아왔으며 1년여만의 준비과정을 거쳐 드디어 호접의 영상역사전시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게 되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8-01-27
  • 모택동 왜 ‘유소기 제거’ 결심했을까? ④
    1965년 1월 3일,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유소기가 재차 국가주석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 날 모택동은 어느 한 작은 회의에서 이름은 밝히지 않고 유소기를 비판하였다. 그는 <4청> 공작대는 많은 인력으로 40일간이나 학습하면서 농촌으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질책했다. 이에 유소기가 공작대가 집중적으로 학습하는 것은 우경주의를 반대하고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하자 모택동은 “뭐 우경주의를 반대하고 방지하는거라구?! 학습할 수록 멍청해지는 일군들이라구. 다른 사람의 우경은 반대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결과적으로 우경으로 나아가고 있다구”라고 하며 정면으로 유소기를 공격했다. “대중한테 의거하지 않고 여기저기 쏘다니기만 하니 결과는 뻔하지 않수?! 그리고 당신들이 제정한 두번째의 <10조>는 너무 길고 복작해.” 그러면서 모택동은 <4청>운동에 있어서 첫째 문건을 너무 많이 읽지 말고둘째 사람이 너무 많아서도 안되며 셋째 여기저기 쏘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중에 의거하고 소수의 나쁜 분자를 청산해야 한다. 문제가 있으면 청리하고 문제가 없으면 청리하지 말아야 하며 근거가 없으면 기어코 근거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1월 14일 모택동은 또 각 지구급 당위서기들이 모인 장소에서 다음과 같이쐐기를 박았다. “1963년 5월 항주회의에서 출범된 제1개 10조가 있는데 3개월이 지나 또 9월에 북경에서 뚱딴지같은 10조가 나왔다. 근근히 3개월 사이에 그렇게 많은 경험들이 누적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러면서 모택동은 북경에 있는 2개의 <독립왕국>을 엄숙하게 비판했다. 모택동이 가르키는 2개의 <독립왕국>이란 바로 중앙서기처와 국가계획위원회였다. 그러자 그 누구도 모택동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중앙에서는 부랴부랴모택동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문건들을 대폭 수정, 내용상 17조를 23조로 변경하였으며 제목을 <목전 농촌사회주의 교육운동 중에서 제출된 일련의 문제>라고 달았다. 이 23조는 1월 14일 회의에서 토론 통과되고 모택동의 심열을 거친 뒤 즉시 각 기층으로 발부되었다. 당시 모택동은 23조를 수정하면서 <4청 및 4불청간의 모순>과 <당내외 모순의 교차>란 제지법에 대해 신날하게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제기법은 사회상의 4청, 4불청간의 모순을 설명한 것도 아니고 당내외 모순의 교차에 대해 설명한 것도 아니다. 소위 4청 및 4불청은 지난날 역사상 그 어떤 사회에서도 사용했었고 소위 당내외 모순의 교차 역시 그 어떤 당파에서도 사용하던 것으로서 모두 오늘날 모순의 성질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논법으로 될 수 없다. 이 글에서 모택동은 비록 유소기를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모택동과 유소기의 쟁논은 이미 공개화되었으며 당과 나라의 대사를 관심하는 중상층 간부들은 모두 이를 두고 걱정했다. 그것은 모택동과 유소기 사이의 분규는 모택동과 팽덕회 사이의 분규와는 성질상 근본 다르기에 당의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자 회의 기간 주덕과 하룡 등 지도자들은 유소기를 찾아 전반 국면을 돌보아 심중할 것과 모택동을 존중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회의 후 중앙조직부 부장 안자문은 정치국과 서기처 동지들의 부탁을 받고유소기를 만나 “두분 주석사이에 모순이 생기면 전반이 혼란해집니다. 그리니 그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모주석과 충돌하면 안됩니다”라고 간청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유소기는 많은 동지들의 의견을 수렴하였다. 그는 주동적으로 모택동을 찾아가 담화하면서 자아비판을 하였으며 후에 재차 자기 집에서 연속 부분적 중앙 지도일군들이 참가한 생횔회의를 열고 자신이 모택동을 존중하지 못한 착오에 대해 검토하였고 여러 지도 일군들의 비판을 접수하였다. 하지만 모택동과 유소기 이 2명 주석간 사이에 생긴 분규의 흔적은 봉합되기가 힘들었다. 그 뒤에 있은 약 1년간 표면상으로는 유소기가 계속 중앙의 1선 사업을 주관한다고 하였지만 모택동은 더 이상 유소기와 중앙서기처와는 그 어떤 사업토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모택동은 유소기를 제거할 결심을 하였으며 모택동과 유소기 사이의 분규는 결국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동기로 되기도 했다. 1966년 8월 5일 모택동은 <사령부를 포격하자>란 대자보에서 1964년 중앙 1선 지도자들의 형식적으로는 좌적이지만 실제로는 우적이었던 경향을 제기하다 싶이 모택동이 유소기 제거를 염두에 둔 것은 1964년부터였다는 분석도 있다. 그리고 1970년 모택동이 미국 작가이며 기자였던 스노를 회견했을 때 “주석님은 언제 유소기를 제거할 결심을 했는가?” 라고 묻자 “아주 일찍했다”고 하면서 1965년 1월 <23조>를 제정할 때 중간의 제1조에서 언급한 <4청>의 목표가 바로 당내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족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1964년 말부터 1965년초 사이에 모택동은 수차례에 거쳐 자기 신변에 “중국의 흐루쵸프”가 있다고 언급, 그 “중국의 흐루쵸프”는 바로 유소기를 말한 것이었다. (끝) 편역: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7-07-21
  • 모택동 왜 '유소기 제거' 결심했을까? ③
    1964년 12월 26일은 모택동의 71주년 탄생일이었다. 이 날 왕동흥과 강청은 생일축하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장소는 중남해 모택동의 거처였다. 도합 3개의 연회상이 마련되었고 유소기, 주은래, 등소평과 이부춘 부부, 그리고 호요방과 도주 부부, 이정천, 이설봉, 유윤도, 송임궁 등이 참가했고 전학삼, 진영귀, 동가경과 형연자 등 각 계의 모범인물들이 초대되었으며 모택동의 자녀들은 한명도 부르지 않았다. 당시 모택동의 작은 딸 이나(李讷)는 하향 중이었고 큰 딸 이민(李敏)이 아버지의 탄생일을 축하하려고 했으나 모택동 자신이 그더러 참가하지 못하게 하였다. 손님들이 다 모이자 모택동이 나타났다. 그는 사위를 둘러보더니 인사말을 했다. “모두들 앉구려. 오늘은 나의 생일인데 나도 이젠 71살이 되었구려. 늙었수다. 혹시 오래잖아 곧 마르크스를 보러 갈 수도 있겠기에 오늘 여러분들은 청해 밥이라도 한끼 대접하려고 했수다…” 모택동이 좀 상심어린 어조로 입을 열자 모두들 말없이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이어 모택동은 어조를 바꾸었다. ”오늘 나의 딸 이민이 북경으로 돌아왔더군. 내가 왜 왔느냐고 물었더니 아빠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왔다고 하더군. 이에 난 그 애한테 넌 나의 생일을 축하할 자격이 없다고 했수다. 왜냐하면 하향 생활보다 나의 생일을 더 중시했기에 그랬수다. 인민대중과 기층생활을 이탈하면 관료주의와 교오사상이 생기고, 농촌으로 가기가 싫어지고 도시생활만 추구하면 수정주의가 생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요.“ 모택동의 목소리는 자못 격정적이었다. 이에 모두들 모택동의 말은 단지 리민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때 이부춘과 채창 부부가 뒤늦게 도착했다. 이들 두 가정은 모택동 가족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며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이부춘을 돌아보며 큰소리로 책망했다. ”이부춘 동지, 당신들은 모든 것을 나한테 숨기고 있수다. 나한테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에 난 허수아비에 불과하우다. 어떤 사람들은 독립왕국을 만들면서 꼬리를 크게 쳐들고 있는데 참 말이 아니구려.“ 처음에 이부춘은 아무런 준비도 없었기에 몹시 놀라는 모습이었으나 노련한 그는 인차 얼굴에 웃음을 담았다. 그는 모택동이 자기를 견주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차리었다. 그리고 모택동이 그냥 자기한테 화풀이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모택동의 화풀이에 유소기와 등소평은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담배만 피우며 침묵을 지키었다. 바로 이 때 강청이 나타나 좌석을 배치했다. 모택동의 왼쪽에는 전학삼, 진영귀, 동가경, 형연자 등이 앉았고 모택동의 오른쪽에는 도주 부부와 나서경이 앉았다. 그리고 두 다른 좌석에는 유소기, 주은래, 등소평과 호요방 등 당의 주요 지도자들과 강청 등이 나눠 앉았다. 이런 좌석배치는 모택동이 강청한테 미리 분부한 것이었다. 이날 고위급 지도일군들 중 모택동의 좌석에는 유독 도주 부부만이 앉았는데 이는 모택동이 이들 부부를 몹시 중시하고 신임한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모택동은 술을 적게 마시었고 말이 많았다. 특히 “말속에 말이 있는 구절”이 많았다. 모택동은 큰소리로 전학삼을 높이 평가했다. “전학삼 동지는 원고료를 요구하지 않았고 개인일 때문에 공가의 자동차를 사용한 적이 한번도 없었수다. 대단히 대공무사한 일군이외다.” 전학삼은 얼마전 중국이 원자폭탄 폭발에 성공함에 있어서 큰 기여를 한 일군이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전학삼의 기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그가 원고료를 요구하지 않은 일, 공가의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은 일 등에 대해서만 강조했다. 당시 모택동의 뇌리에는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방지하는 것만 있었지 원자탄 성공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다. 한편 모택동은 사회주의 교육운동 중에 나타난 “공작대에만 의거하고 신비주의를 부리면서 타격면을 넓히는 등 문제”에 대해 큰 소리로 신날하게 비판했다. “한 개 현, 한 개의 공사(公社)와 대대에서 공작대의 상황을 가장 잘 요해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인민대중이우다.” 여기까지 말한 모택동은 손을 홱 저우며 금을 긋더니 “난 견결히 인민대중의 켠에 설거우다”라고 하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날 모택동이 손으로 선을 긋은 것은 당시 당정군 지도자들과 군중들 사이를 선으로 긋은 것이며 역시 모택동 자신과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사이를 선으로 긋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날 모택동의 모든 언행은 연회에 참가한 모든 지도일군들로 하여금 속으로 저으기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 1967년 7월의 어느 무더운 날, 유소기와 아내 王光美는 홍위병 앞에 끌려 나왔다. 유소기는 그 자리에서 두 손을 뒤로 똑 바로 뻗고 허리를 굽히며 머리를 숙이는 고문을 어린 홍위병들로부터 2시간 남짓 받았다. 후 일 이날의 연회에 참가했던 증지의 회억에 따르면 이 날의 연회는 전혀 연회다운 분위기가 아니었으며 모든 사람들은 긴장으로 하여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으며 모택동 혼자서 그냥 웃고 떠들고 빗대고 사람을 공격하군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사람들은 모택동이 설마 유소기 제거를 념두에 두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실상은 그 때 모택동은 만단의 준비를 가지고 유소기를 벼르면서 공격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이틀 뒤 중공중앙 정치국 회의가 열리었고 모택동은 책 두권을 가지고 회의 석상에 나타났다. 한권은 당장(党章)이었고 다른 한권은 헌법이었다. 모택동은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성질을 놓고 발언하였다. “1962년의 <생산량을 가가호호에 낙실하는 것(包产到户)>과 <호도거리> 생산책임제는 완전히 자본주의 생산경영제이고 생산책임제였다. 나는 전 당의 동지들에게 계급투쟁 관념을 투철하게 가질 것을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생산량 책임제> 따위의 자본주의 노선을 실시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바이다.” 모택동의 어조는 매우 강경하였다. 특히 그는 자신이 유명무실한데 대해 아주 <보복적>으로 나왔다. “나는 당원이고 공민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나더러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는 당장에 위배되는 것이다. 당신들은 또 내가 발언하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 이는 헌법에 위반되는 것이다. 당신들은 회의가 끝나 집으로 돌아간 뒤 당장과 헌법을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자신들이 제정하고 통과시킨 당장과 헌법을 자신들이 준수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더러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발언도 하지 못하게 하는데는 나의 입을 틀어막자는 음모가 있다. 이는 바로 계급투쟁이다. 내가 보건대 현재 우리 당내에는 두개 파가 있다. 하나는 사회주의파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파이다. 나는 여기에 첨예한 모순과 투쟁이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모택동의 이 말에 회의참가자들은 모두 어리둥절하며 오림중에 빠졌다. 도대체 누구를 지적하는 것일까? 유소기와 등소평 등은 한마디도 참견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고 장내의 분위기는 마치 응고된듯 조용하였다. <17조>를 철수하고 <23조> 제정 당시 정치국회의에서 있은 분규에 대해 외부적으로는 아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하지만 각 성시의 부분적 지도일군들은 국내의 정치형세에 대해 민감하게 감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갓 발급했던 <17조>에 대해 갑자기 회수했기 때문이었다. <17조>란 유소기의 주관하에 집필된 사회주의 교육운동에 관한 문건으로서내용이 비교적 간단했으며 도합 16조로 되어 있었는데 후에 반복적으로 수정하면서 17조로 되었던 것이다. 이 문건은 정치국회의가 진행되고 있던 기간인 12월 24일과 27일에 2차례에 거쳐 모택동의 심열을 거쳐 비준되었고 중공중앙 제 811호 문건으로 발급되었던 것이었다. <17조>는 12월 20일 모택동이 한 강화를 넣어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성질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모순 및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탐오분자와 투기모리분자 포함)를 다스린다는 제기법을 강조하였다. 문건이 발급된 후 12월 30일 모택동은 진백달을 불러 <17조>중의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라는 단락에 다음과 같이 수정하게 하였다. “현재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는 막앞에 있는가 하면 막후에도 있다. 막후의 집권파를 보면 아래에 있는가 하면 위에도 있으며 아래에 있는자들을 보면 이미 청리된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와 기타 나쁜 분자들이 있고 간혹 그물에서 빠져나간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와 기타 나쁜 분자들도 있다.” 12월 31일, 모택동은 수정된 문건 뒤에 다음과 같은 비준지시를 썼다. 수정된 제2페지 밑으로부터 3개 줄을 다시 인쇄하여 유소기 동지가 심열한 후 기요실에 넘기를 바란다. 이는 진백달 동지가 건의한 것으로 내가 동의한 것이며 만약 소기동지도 동의한다면 즉시 이 수정문건을 발급할 것과 이미 발급되었던 중앙811호 문건의 집행을 중단함과 아울러 이 문건을 폐지하기 바란다. 모택동 당시 모택동한테는 3대 정치비서가 있었는데 호교목은 병으로 인해 휴가를가고 없었고 전가영은 이미 <정치문제>로 낙마된 상황이었으며 진백달만이 남아 있었다. 진백달은 중국의 수차례 정치풍파속에서 기회와 챤스로 자주 입장을 바꾸군하면서 어느 누가 유리하면 그한테 손을 들어주군 하였다. 1964년 진백달은 유소기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면서 유소기가 내세운 <도원경험(桃园经验)> 널리 보급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유소기를 통수로 농촌의 <4청>과 도시의 <5반> 운동을 진행해야 한다고 제기한 사람도 진백달이었다. 헌데 얼마 뒤 모택동이 유소기에 대해 불만을 보이자 진백달은 즉시 입장을 바꾸어 모택동한테 달라붙었다. 12월 27일에 있은 정치국회의에서 진백달은 모택동의 구미를 맞추면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중국은 역대적으로 각종 많은 모순들이 존재하였다. 국민당도 당내외 모순이 첨예하였었다. 때문에 인민내부의 모순과 적아모순의 복잡성에 대한 주석의 관점이 정확한 것이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곧 운동의 방향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유소기를 빗대고 비판하는 것이었고 모택동의 동감을 자아냈다. 후에 모택동은 문건을 수정할 때 진백달의 의견을 자주 참고를 듣군 했다. <17조>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도 기실은 진백달의 제기한 것이었다. <17조>의 폐지로 중공중앙 정치국 회의는 계속되었다. 편역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7-07-10
  • 모택동 왜 '유소기 제거' 결심했을까? ②
    [동포투데이] 당시 모택동과 유소기 사이에 생긴 주요힌 분규는 사회주의 교육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운동의 작법상 모택동은 역량을 집중하여 <대병퇀 작전>,운동을 공작대에 의거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고 대중을 발동하는 것도 찬성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소기가 작성한 문건에 <동의>란 두 글자도 마지 못해 쓸 때가 많았다. 1964년 12월 북경에서는 제3기 전국인대 제1차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 각지 대표들은 <4청운동> 중에서 나타난 좌적인 작법에 대해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이는 모택동이 극도로 찬양한 대채의 지부서기 진영귀마저도 충격을 받게 했다. 이 역시 유소기에 대한 모택동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당시 모택동은 유소기가 실제적인 우파이고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 모순과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성질을 혼돈시키고 있다고 인정, 문제의 성질에 대해 극도로 엄중하게 보고 있었다. ▲ 모택동과 유소기 1964년 12월 12일, 모택동은 박일파가 회보한 진정인이 낙양트랙터제조공장에 점을 잡은 보고서를 심열한 후 다음과 같이 비준지시를 내렸다. 나도 이런 의견에 동의한다. 현재 관료주의 계급과 노동자 계급 및 빈하중농은 첨예하게 대립되는 두개의 계급이다. 이런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영도자는 이미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자산계급으로 변질되었다. 이런 계급은 투쟁의 대상이고 혁명의 대상이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절대 이런 사람들한테 의거해서는 안된다. 같은 날, 모택동은 다른 한 보고서를 비준하면서도 역시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간부와 대중 사이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정확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국내의 첨예한 계급투쟁에 대해 무감각하며 많은 관료자산계급의 간부에 대해서도 좋은 간부로 보고 있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관료주의 계급> 및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그리고 <관료자산계급의 나쁜 간부>란 제기법을 통해 당시 모택동은 당내 간부대오 중의 <계급투쟁>에 대해 매우 엄중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택동은 이런 사람들을 소수의 <분자>로 본 것이 아니라 이미 <계급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혁명과 투쟁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당시 이 비준지시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2건의 비준지시를 본 사람들은 모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64년 12월 15일, 중공중앙 정치국은 북경에서 사업회의를 소집, 원래의 계획은 제3기 전국인대회의 기간을 빌어 각지 대표들을 청해 사회주의 교육운동에서 나타난 문제들을 토론하는 것이었다. 회의는 유소기가 사회하였다. 당시 등소평은 일반적인 사업회보회의기에 모택동한테 회의내용을 알려주면서 ”사업이 분망하니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했다. 이것은 모택동으로 하여금 자신이 따돌림을 당한다는 감을 가지게 했다. 그리고 어느 한차례의 회의에서 유소기가 보고할 때 모택동이 발언권을 신청했다. 이러자 유소기는 모택동이 많은 걸 얘기하련다는 것을 모르고 모택동이 몇 마디도 하지 않았을 때 유소기는 모택동의 발언을 중단시켰다. 이상의 두 사건은 모택동의 큰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다. 회의는 며칠이 되지 않아 모택동의 불참 속에서 결속되었다. 이러자 모택동의 분노는 드디어 폭발하고야 말았다. 회의 후 모택동은 강청을 시켜 도주ㅡ증지 부부를 초청해 인민대회당 소예당에서 경극 <홍등기(红灯记)>를 관람하게 하였다. 휴식시간이 되자 모택동은 도주한테 물었다. ”당신들의 회의가 결속됐다면서? 내가 참가하지도 않았는데 끝마치다니…지금 부분적 사람들이 나의 머리 위에 올라 똥을 싸려고 하고 있어. 내가 아무리 제 2선에 물러나 있지만 그래도 회의에 참가해 발언을 할 권리는 있는거우다.“ 이에 도주와 증지 부부는 그 자리에서 ”누가 감히 주석님의 머리위에 올라 똥을 싸겠어요?!“라고 했으나 속으로는 누군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모택동이 말하는 그 ”부분적 사람들“이란 곧 바로 유소기와 등소평 등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회의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거요?“ 모택동이 재차 물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떠나갔습니다.“ 도주가 대답하기 바쁘게 모택동이 명령조로 호통쳤다. ”그들더러 당장 돌아오라고 하시오!“ 이렇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다시 북경에 모이었고 회의는 재차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모택동과 유소기의 분규가 공개화되었다. 분규의 초점은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중점과 방향에 관한 것이었다. 모택동은 사회의주의 교육운동의 중점은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때려 엎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주와 부농은 뒤에 숨어있고 앞에는 4불청 간부(四不清干部)가 나서있으며 4불청 간부는 모두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이다. 계급투쟁에 있어서 지주, 부농과 빈하중농만 획분하면 안 된다. 지금 시급한 것은 간부이다. 지주와 부농은 이미 1차적으로 청산이 되고 처리되었지만 아직 집권파는 청산되고 처리된 것이 없다.“ 반면에 유소기는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모순이 있으면 그 모순을 해결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현재 3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각각 그물에서 빠져나간 지주부농과 새로 나타난 자산계급, 그리고 부화타락한 간부 등이다. 이 중 어떤 간부는 출신이 좋지만 착오를 범해 지주부농과 나쁜 분자들에게 이용되고 이들의 조종을 받고 있다.” 하지만 모택동은 그 무슨 계급이나 계층을 운운할 것이 아니라 지금은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부터 때려야 한다고 고집했다. “대중을 발동하여 우리 당을 정돈하게 해야 한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중심은 바로 정당이며 정당을 하지 않으면 우리 당은 희망이 없다.” 이어 모택동은 정당을 함에 있어서 먼저 <승냥이>를 족치고 나중에 <여우>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승냥이>란 곧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에 유소기는 현재 당내외 모순, 적아 모순과 4청, 4불청간의 모순 등으로여러 모순이 교차되지만 절대적인 모순은 없다고 주장했고 모택동은 정당의 중점은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붙잡아 내는 거이라고 하면서 석탄부의 장림지(张霖之) 부장이 바로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라고 지적했다. 장림지가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로 거론되자 이 날 회의에 참가한사람들의 얼굴에는 모두 긴장과 침묵이 흘렀다. 편역: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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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18
  • 모택동 왜 '유소기 제거' 결심했을까? 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선>“ 및 <2선>의 문제 1966년 10월 25일, 모택동은 <1선> 및 <2선> 체제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나라의 안전을 생각하면 소련에서 스탈린이 죽자 말렌코프가 모든 것을 감당하지 못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면서 수정주의가 출현했고 아울러 <1선> 및 <2선> 체제가 생기었다. 현재 중국을 볼 때 형세가 그닥 낙관적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내가 <2선>이 되는 경우와 더불어 기타 동지들이 <1선>으로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큰 분산과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으며 우선 북경시부터가 집중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1선> 및 <2선>이 생기면서 매우 많은 <독립왕국>들이 줄지어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제적으로는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키고 국내적으로는 도시에서의 5반운동, 농촌에서의 4청운동 및 문화계를 대상으로 하는 비판운동 등 일련의 투쟁운동을 벌이면서 팽팽한 분위기가 고조로 치달았다. 이는 도시와 농촌의 기층 간부들은 물론 문화계의 모든 사람들까지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다. 아울러 또한 당 자체와 중앙내부의 갈등관계로 하여 모든 사업이 극도로 정상적 궤도를 벗어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결국 이는 당시 중앙의 제1선 사업을 주관하고 있던 유소기의 불만을 자주 자아내기도 했다. 연속적은 정치운동의 “사태”는 지난 세기 50년대 말기 모택동이 국가주석 자리를 유소기한테 내주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었다. 지난 세기 50연대 말 당시 국가주석 자리를 내놓는 모택동의 주장은 견결했다. 이유인즉 국가의 “자질구레”한 “잡일”에서 손을 떼며 정신을 집중하여 일련의 중요한 문제를 연구하겠다는 것과 전쟁연대와는 달리 정신과 체력적으로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국내 건설 중에서 연구하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은만큼 유소기가 주은래, 진운, 등소평 및 팽진 등과 협력하여 처리하게 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 뒤 1961년 9월 모택동은 당과 국가의 주석 자리를 몽땅 유소기한테 맡기려 한다는 희향을 털어놓기도 했다. 과연 모택동의 성격다운 과단한 판단이었다. 이렇게 되어 모택동이 후에 제기하면서 비난한 “제1선”에 유소기, 주은대, 진운, 등소평, 팽진 등이 배열되고 모택동은 “제2선” 자리로 물러서게 되었다. 헌데 이런 “1선”과 “2선”의 체제는 자주 “1선”과 2선“ 사이의 관계 및 권력행사 등 문제를 야기시키었다. 처음에 모택동은 ”2선“에 있는 자신한테 모든 것을 보고할 필요가 없고 ”1선“에 있는 일꾼들이 알아서 처리하면 된다고 하였다. 헌데 모택동이 ”1선“ 자리를 유소기한테 내준 뒤 얼마 안되어 노산회의(庐山会议)가 열리었고 회의에서 3년 재해를 두고 여러 가지 비난들이 쏟아지면서 모택동은 자신의 위신에 많은 손상이 가고 있다는 것을 감안했다. 모택동은 자신이 점점 허수아비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그 때로부터 모택동은 ”1선“을 지휘하고 있는 유소기에 대해 의심과 더불어 불만을 가지게 되었으며 1962년에 있은 북대하 회의와 8기 10중 전회에서 유소기를 포함한 ”1선“ 일군들한테 여러 가지 트집을 잡으면서 첫 경고를 하였다. 1964년 모택동은 재차 각급 지도간부들이 하향하여 점을 잡을 것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많은 간부들이 이를 마이동풍으로 여기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자 모택동의 지시를 낙실하기 위해 유소기가 중앙 조직부장한테 포치하면서 ”내려가지 않은 중앙위원은 그 자격이 없고 내려가지 않은 성위서기와 지위서기 및 현위서기 심지어 공사서기도 그 자격이 없다“라고 강조하였다. 이러자 유소기의 이 지시에 북경과 중앙 및 국무원 기관에서 사(司) 국장급 간부 1000여명이나 인차 움직여 기층으로 내려갔다. 유소기의 호소력에 모택동은 크게 놀랐고 촉동을 받았다. 뒤이어 소련에서 말리노프스키에 의해 흐루쵸브가 소공중앙 서기직에서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했고 모택동은 재차 충격을 받았다. 모택동은 유소기를 시탐하기 시작했다. 1964년 11월에 있은 한차례의 회의에서 모택동은 유소기를 다음과 같이 시탐했다. ”소기동지, 당신이 통수로 되어 4청(四清), 5반(五反) 및 경제 사업 등 모든 사업을 계속 주관하구려. 현재 내가 당주석이고 당신이 당부주석이지만 앞날의 풍운을 예측할 수 없기에 이제 내가 죽으면 당신이 당주석으로 되지 못할 수도 있수다. 그러니 지금 당장 당신이 당주석으로 돼주구려. 제길할! 나는 현재 아무 쓸모도 없수다. 그리고 당신이 대단하우다. 당신이 통수로 되어 소평동지와 총리를 지도하구려.“ 이에 유소기는 모택동의 마음속을 간파하지 못한채 공식적으로 ”난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없습니다. 내가 4청운동을 책임지고 부치와 팽진 동지가 5반운동을 책임지며 경제사업은 소평동지와 총리가 책임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에 모택동은 한 술 더 뜨면서 ”아니 그래도 당신이 통수로 되고 소평동지가 비서장이 되어야 하우. 당신이 통수로 되지 않으면 모든 사업을 통일시킬 수가 없소. 당신의 말이 아주 호소력이 강하지 않았수?!“ 그제야 유소기는 모택동의 말에 숨은 날카로움이 있음을 알아 차리였다. (다음에 계속) 출처: 중국 해외넷 편역: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7-06-09
  • 중국군 10대 원수와 그 자손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955년 중국인민해방군은 제1차로 군직함제를 실행했다. 당시 중남해 회인당에서는 모택동이 주덕 등 10대 장군들한테 원수 직함을 수여, 그것으로 중국군내에서는 10명의 원수가 확정되었다. 그 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나갔다. 오늘 그 10대 원수들 중 생존해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하지만 그 10대 원수의 자녀들은 대다수가 생존해 있다. 그럼 그들의 자녀들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을까? ▲ 주덕과 그의 가족들. 주덕(朱德- [1886-1976]) 은 중국군 10대 원수중 서열 1번이다. 주덕 원수의 딸 주민(朱敏)일찍 북경사범대학 러시아어학부에서 사업, 교수연구실 주임 등 주임을 맡았으며 1986년 이직, 그 뒤 주덕 원수의 딸 주민은 북경군지양용인재양성원(军地两用人才培训学院)을 설립, 원장을 맡았으며 이 학원은 현재 북경군지전업연수학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민은 일찍 구 소련 유학시절 당시 모스크바에서 함께 유학생활을 하던 유쟁(刘铮)을 만나 열애에 빠졌다가 결혼, 이들 사이에는 유건(刘建), 유강(刘康). 유민(刘敏)과 유무(刘武) 등 네 자녀가 있다. ▲ 팽덕회의 질녀(조카딸) 팽강(彭钢) 팽덕회(彭德怀[1898-1974])는 중국군 10대 원수중 서열 2번이다. 팽덕회의 질녀(조카딸) 팽강(彭钢)은 1949년 후 몇명 안되는 여장군 중의 일원이다. 팽강은 일찍 중공중앙 규율검사위원회 상무위원으로 몸담고 있으면서 <군대 내의 여포공(军中女包公)>으로 불리웠으며 소장직함을 갖고 있다. ▲ 임표의 딸 임립형(林立衡)(가운데) 임표(林彪[[1906-1971]])는 중국군 10대 원수중 서열 3번이지만 그의 전쟁승리 전과와 지휘능력은 첫번째로 꼽히고 있다. 임표의 딸 임립형(林立衡)은 일찍 <중국공군보>의 부주필을 맡고 있다가 1971년 9월 13일 아버지 임표가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도망가다가 몽골의 언더르한에 떨어져 자멸한 뒤 격리심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4년 7월 31일, 모택동의 특별 비준에 의해 격리심사에서 해방받았고 그 뒤 장청림(张清林)과 결혼하였으며 이어 정주의 한 자동차제조공장에 배치받아 사업하게 되었다. 중공 11기 3중 전회 후 임립형은 북경에서의 사업 및 호적 문제가 해결되어 중국사회과학원에 배치되어 사업하게 되었으며 남편 또한 북경시 위생부문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2002년 5월 임립형은 고향의 모 회사의 요청으로 북경 황학대호텔의 이사장 겸 총경리를 맡게 되었다. ▲ 유백승(刘伯承)의 장자 유태항(刘太行) 유백승(刘伯承[1892-1986]) 유백승은 신해혁명시기부터 종군하여 북벌전쟁, 8.1 남창봉기 및 토지혁명전쟁 등에 참가한 원수이다. 유백승(刘伯承)의 장자 유태항(刘太行)은 일찍 중국공군 모 연구소 부소장, 장갑병 작전부 부부장을 역임, 차자 유몽(刘蒙)일찍 중국군 총참모부 참모로 근무, 문학에 출중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 <유백승전기>의 편찬사업에 참여하고 씨나리오 <청년유백승>을 창작하기도 했다. 셋째 아들 유태지(刘太迟)는 중국군 소장으로 공군사령부 장비부 부부장으로 근무하였었다. 유백승의 큰 딸 유화북(刘华北)은 일찍 1945년 6월 연안보육원 시절 적에 의해 암살당하였고 둘째 딸 유미군(刘弥群)은 중국군 소장으로 공군 지휘학원 부원장을 맡아했으며 셋째 딸 유해선(刘解先)은 중국군 북경군구 총후근병원 제1진찰부 의사로 지냈었고 넷째 딸 유응령(刘雁翎)은 중국군 총병원 핵의학과 연구원으로 북경의학회 핵의학전문위원회 위원으로 지냈었다. ▲ 하룡의 아들 하붕비(贺鹏飞) 하룡(贺龙[1896-196])은 8.1 남창봉기의 총지휘와 홍 제2방면군 총지휘를 맡은 원수이다. 하룡의 아들 하붕비(贺鹏飞)는 중국군 중장으로 해군 부사령원을 맡았었고 딸 하첩생(贺捷生)은 중국군 소장으로 군사과학원 군사백과연구부 부부장으로 있었으며 선후로 군사과학원, 총정치부, 무장경찰부대 등 부문에 자리를 옮기면서 연구 및 선전사업을 하는 한편 하룡원수를 추모하는 많은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 진의 원수의 장자 진오소(陈昊苏) 진의(.陈毅[1901-1972])는 남방유격대, 신사군, 제3야전군 등을 지휘한 원수로서 종군문인이기도 하다. 진의 원수의 장자 진오소(陈昊苏)는 일찍 북경시 부시장에 부임했었고 중국인민 대외우호협회 회장 겸 중러우호협회 회장도 맡았었다. 진의 원수의 차자 진주회(陈丹淮)는 중국군 소장으로 해방군 총장비부 과학기술위원을 맡았으며 진의 원수의 셋째 아들 진효로(陈晓鲁)는 중국 국제인재개발센터 인사대리단위표준국제투자관리 유한회사의 이사장이었으며 진의 원수의 딸은 진산산(陈珊珊)이었고 사위 왕광아(王光亚)는 중국외교부 부부장이었었다. ▲ 나영환 원수의 아들 나동진(罗东进) 나영환(.罗荣桓[1902-1963])은 정치사업을 대표하는 원수로서 중국군 중에서도 중국특색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나영환 원수는 중국군 원수들 중 학력이 제일 높은 인물로 유일한 대졸생이었으며 1927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나영환 원수의 아들 나동진(罗东进)은 1939년 2월 12일 생으로 1959년에 중국군에 입대, 일찍 중국군 제2포병부대의 부정위를 맡았었으며 후에는 중국 노혁명근거지 건설추진회 고문으로 있었다. 나영환 원수의 셋째 딸 나북첩(罗北捷)은 1949년 10월생으로 1972년 제1군의대학을 졸업하고 북경군구 304병원에 배치받아 의사로 근무하였었고 넷째 딸 나녕(罗宁)은 1951년생으로 현재 북경 개성실업유한회사(北京凯星实业有限公司)의 이사장으로 있다. ▲ 서향전 원수의 아들 서소암(徐小岩) 서향전(徐向前[1901-1990])은 홍군 제4방면군의 총지휘 신분인 원수이다. 서향전 원수의 아들 서소암(徐小岩)은 중국군 중장으로 해방군 총참모부 통신부 부장을 지녔으며 서향전 원수의 내질녀 황원지(黄远志)는 원 호북성 당위 부서기 겸 규율검사서기직을 맡았었다. ▲ 섭영진 원수의 딸 섭력(聂力) 섭영진(聂荣臻[1899-1992])은 화북야전군 사령원으로서 일찍 황포군관학교 교관출신의 원수이다. 섭영진 원수의 딸 섭력(聂力)은 중국군 중장으로 일찍 중국 국방과학기술 공업위원회 부주임으로 지냈었고 현재 중국 발명협회 상무 부이사장으로 있으며 전국인대 상무위원이다. 섭영진 원수의 사위 정형고(丁衡高)는 중국군 상장으로 중국 공정원 원사이며 중국 국방과학공정위원회 연구원 부주임, 주임 직에 종사하였고 현재는 중국관성기술학회 이사장으로 있다. ▲ 엽검영 원수의 장자 엽선평(叶选平) 엽검영(叶剑英[1897-1986])은 특수한 자이지위와 이력을 소유한 원수이다. 북벌전쟁으로부터 중공의 재건 중 그는 줄곧 중국군 정계의 대표로 특수한 지위에서 활동했다. 엽검영 원수의 장자 엽선평(叶选平)은 중국정협 부주석이었었고 며느리 오소란은 오옥장(吴玉章)의 손녀로서 심천시 인대 부주임이었으며 엽검영 원수의 손자 엽신복(叶新福)은 홍콩 만신회사의 총재이다. 엽검영 원수의 둘째 아들 엽선녕(叶选宁)은 중국군 중장으로 일찍 해방군 총정치부 연락부장을 맡았었으며 전국인대 상무위원으로도 있었다. 엽검영 원수의 셋째 아들 엽선렴(叶选廉)은 중국정협 위원으로 일찍 중국 개리회사(凯利公司) 이사장 겸 총재로 있다. 엽검영 원수의 장녀 엽초해(叶楚梅)는 중국 기계공업부 기계국 원 부국장있었고 큰 사위 소가화(邹家华)는 국무원 부총리직에 있었다. 엽검영 원수의 둘째 딸 엽향진(叶向) 홍콩에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셋째 딸 엽문산(叶文珊)은 현재 해남화교투자유한회사의 부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그녀의 남편은 원 국무원 부총리었던 여추리(余秋里)의 아들 여방방(余方方)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7-05-11
  • 간첩의 제왕 메이어 다간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세계 첩보사에서 “어둠의 제왕”, “초인간”으로 알려진 메이어 다간(梅尔•达甘)은 출생부터 남달랐다.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1월에 소련에서 뽈스까 폴란드로 향하던 열차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나치스독일의 유태인 핍박을 피해 소련으로 도피했다가 귀국하던 참이었다. 조부를 비롯해 가족대부분이 대학살에 죽었다. 다행히 살아남은 그의 부모는 어린 다간을 데리고 신생국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수도 텔아비브 남쪽 아랍인 거주지에서 성장한 다간은 자연스럽게 아랍어와 그들의 습성을 익혔다. 18살에 군에 입대한 그는 타고난 싸움기술 특히 능수능란한 칼던지기 솜씨를 갖고 최정예 특수부대 “샤이렛 매트칼”에 지원했지만 미세한 차이로 떨어져 대신 낙하산 부대에 들어갔다.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복귀한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1967년에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이 터지면서 다간은 장교로 임명되어 군대에 다시 들어갔다. 치밀함과 과감함을 동시에 갖춘 그는 군부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팔레스티나 무장조직을 상대로 임시 편성된 비밀 특수부대 “샤이렛 리몬”의 활약이 워낙 뛰어나 이를 지휘한 다간은 신체적 결함에도 최고의 특수전 전문가로 명성을 쌓는 한편 출세의 길로 달렸다. 다간은 진급과 함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한가지 “보물”을 간직하고 다녔다. 바로 곤봉과 권총을 쥔 독일군 앞에 무릎 꿇고 죽음을 기다리는 조부의 사진이었다. 다간은 “이 사진을 보면서 우리가 늘 강해져야 하고 스스로 지킬 힘을 기르지 않으면 유태인 대학살의 비극이 재현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군 했다. 기갑여단장과 총참모부 국장을 거쳐 1995년에 소장으로 전역한 다간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摩萨德)로 이끈 사람은 바로 당시의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阿里埃勒•沙龙)이었다. 샤론 총리는 군에서 나가서 총리의 대테로 담당 보좌관을 잠시 지낸 다간에게 신임 특명과 함께 모사드의 수장자리를 권했다. 그해는 2002년 8월이었다. 다간이 취임할 당시 정보기관 모사드는 엉망이었다. 요르단, 스위스, 끼쁘로스, 뉴질랜드에서 팔레스티나 과격단체 하마스의 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제거작업이 잇달아 실패하면서 모사드의 명성은 송두리째 떨어졌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인물로 등장한 다간은 조직문화에서부터 작업활동까지 통째로 모사드 대개혁에 나섰다. 정보수집과 분석 및 비밀외교를 강조하던 것에서 벗어나 과감하면서도 치밀한 비밀공작을 중시하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또 미국 중앙정보국, 영국 육군정보 6국 등 우방 정보기관과의 긴밀한 협력관계 확대에도 발벗고 나섰다. 이에 일부 간부들이 불만을 표시하면서 퇴직했지만 다간은 자신의 정책을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치밀하면서도 과감한 비밀공작은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대담하면서도 증거를 남기지 않은 치밀한 모사드의 비밀공작은 숙적인 아랍권 심장부에서 잇달아 이루어졌다.2004년 9월 26일에 수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한 복판에서 하마스 간부인 칼릴이 승용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터진 폭발물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2008년 2월 12일에도 다마스쿠스에서 대형 차량폭탄 사고가 일어났다. 사망자는 레바논 진주당 최고 지도자 중의 한명인 무그니예였다. 무그니는 1983년에 레바논주재 미국 대사관과 미국 해병대 막사 폭탄테로와 외국인 납치를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미국정부가 5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건 인물이었다. 두 사건의 배후는 다간이 지휘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였지만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2008년 8월 1일에 수리아 서부 지중해 연안 도시 타르투스 부근 자하비예 휴양지에서 알아사드 대통령의 군사보좌관 겸 알키바르 핵시설 보안책임자인 술레이만 장군이 별장 앞바다를 지나가던 요트에서 발사된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이 술레이만 암살도 다간이 이스라엘 해군 특수부대 제13전단과 합작한 것이었다. 또 2010년 1월 19일에 두바이에서는 이스라엘 병사 납치와 살해 및 무기밀수 혐의로 수배를 받아온 하마스 요원 알마브후가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용의자로 지목된 33명의 모사드 요원들이 모두 영국,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오스트랄리아의 위조여권 소지자로 드러나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이란은 “지도에서 이스라엘을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계획으로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다간의 가장 큰 성공은 이란의 이 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관련 공작이었다. 2014년 10월 5일 저녁 11시에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일어난 대형 폭발사고의 위력은 발생지인 파르친 군사지역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가옥이 심하게 요동칠 정도였다. 인공위성 사진으로 본 결과 이 폭발로 이란의 군사지역내 대형 시설물 두채가 완전히 파괴됐으며 일부는 다음날까지 불길에 휩싸였다. 폭발 현장에서 300미터 떨어진 곳의 건물도 피해를 보았다. 이 폭발 지역은 국제원자력기구와 이스라엘 모사드가 이란의 핵무기개발 관련 극비시설들이 들어선 곳이라고 나란히 지목한 표적이다. 이 폭발도 다간이 지휘한 모사드의 “작품”이었다. 지난 2010년 후에 이란에서 가스관과 군시설물에서 원인을 알수 없는 일련의 폭발 사고와 적어도 4명의 이란 핵 과학자들이 잇달아 피살되었다. 그리고 2011년 11월 12일에도 이란 수도 테헤란 인근의 비밀 미사일 기지에서도 대형 폭발사고가 일어나 기지일대가 한순간에 페허로 변했다. 이 사고로 이란의 중거리미사일 개발 책임자인 모가담장군 등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장거리미사일용 고체연료 발동기 수십기도 고철로 변했다. 이 것들도 모두 다간의 “공로”였다. 2011년 7월 23일에 이란 수도 테헤란 남부 하셈거리에서 발생된 핵물리학자 네자드가 피살된 사건도 모사드가 고용한 현지 공작원에 의한 것이었다. 네자드 피살사건 전해인 2010년 11월 29일에도 핵개발 계획의 최고책임자급인 샤리아리 박사와 다바니 박사 두 사람 역시 차량폭탄에 의해사망되였다. 또 같은 해인 1월 12일에는 물리학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자 핵개발 계획의 고문이던 모하마디 교수가 출근하려고 자동차문을 여는 순간 차량부근에 세워진 오토바이에 설치된 폭발물이 터져 목숨을 잃었다. 모사드는 이란이 이 지하핵시설에 3000대의 원심분리기를 설치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란 내의 모사드 정보원들은 이란 핵개발 계획의 중심인물인 테헤란대학 물리학과의 파크리자 데교수에 대한 상세정보를 제공했다. 정보를 확보한 다간은 국제공조를 통해 미국과 유럽연합 입국금지와 은행 구좌 동결 조치와 함께 제거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곧이어 개발작업 관계자들의 활동을 저지시키는 공작이 이어졌다. 2010년 여름에 이란의 핵개발 계획을 통제하는 컴퓨터 수천대가 컴퓨터 비루스에 감염됐다. 이듬해까지 이 바이러스는 이란 핵 시설 내 원심분리기 절반가량의 작동을 중단시켰다. 이란 핵개발 저지 작전과 관련해 모사드의 “해결사”, “암살자”로 불리우는 비밀공작원의 무용담도 화제로 되였다. 죽음의 공포도 아랑곳하지 않고 투철한 애국심과 직업적 헌신성으로 무장한 비밀공작원들이 숨은 주인공으로 묘사됐지만 역시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모사드의 집요한 저지공작이 없었다면 이란은 이미 핵무기로 무장해 중동정세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이 서방 정보기관들의 지배적 시각이다. 특히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모사드의 이란 핵개발 저지공작에 나선 다간 국장의 예리한 정세 판단과 과감한 실행력에 대해선 과거 이스라엘과 4차례나 중동전쟁을 한 애급의 극우 신문도 “지난 7년간 다간은 이란의 핵개발 계획에 극심한 타격을 입혀 진전을 막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7-02-18
  • 쓰딸린은 대숙청에서 사람을 얼마나 죽였는가? ①
    [동포투데이] 조기 쏘련공산당의 민주분위기는 비교적 농후했다. 레닌이 살았을 때 당내논쟁은 대역무도한 일이 아니었다. 트로쯔끼(托洛茨基), 스베르들로브(斯维尔德诺夫), 카메네프(加米涅夫), 부하린(布哈林), 류꼬브(李可夫) 등은 늘 레닌의 노선을 반대했다. 레닌이 그들을 비판할 때에도 이런저런 비무산계급세계관의 “감투”를 씌워 여지없이 반격했다. 그러나 논쟁이 끝난 후 레닌과 그들의 혁명 우정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나의 이상한 현상은 레닌이 종래로 쓰딸린을 세계관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지 않은 것이다. 레닌은 만년에 그루지야사건, 대외무역롱단권, 로농검찰원제안 등등으로 쓰딸린과 몇차례 충돌이 있었지만 한번도 문제를 세계관의 높이까지 끌어올려 비판하지 않았다. 왜서 레닌은 쓰딸린의 세계관에 존재하는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는가? 만약 그가 지적했더라면 쓰딸린이 그의 후계자로 되지 못하여 세계상 첫 사회주의국가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 2014년 3월 크림 반도의 러시아 강제 병합을 환영하는 주민이 거리에서 옛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쓰딸린의 얼굴이 들어간 달력을 들고 있다. 쓰딸린은 20년 집정기간에 평균 2년에 한번씩 큰 억울한 사건을 만들어냈다. 절대적인 통계에 의하면 쓰딸린이 살해한 노일대 혁명자의 수는 옹근 싸황(沙皇)정권시기에 노일대를 살해한 숫자보다도 더 많다. 싸황러시아는 1721년에 뾰뜨르(彼得)대제가 세운 군주제국가인 러시아제국을 말하는데 1917년 니꼴라이(尼古拉) 2세 때에 와서 러시아혁명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쏘련의 저명한 역사학가이며 다른 정치견해를 가지고 있는 메드베데프(麦德维杰夫)는 “우리 당과 우리 혁명을 반대하는 어떠한 적들도 우리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쟁취하는 사업에 쓰딸린보다 더 큰 손해를 끼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쏘련공산당 역대 중앙위원, 후보중앙위원은 모두 284명인데 대숙청(1936~1939년)전에 자연 사망한 45명을 제외하고 남은 239명 중에서 총살당했거나 감옥에서 죽은 사람이 188명, 자살한 사람이 8명, 중앙위원에서 제명당한 사람이 22명이었다. 다만 21명밖에 무사하게 “중년”을 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무사하게 “중년”을 보냈다고 해서 무사하게 만년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쓰딸린이 1952년에 또 새로운 숙청을 긴박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주곡인 “크레물리궁 사사건”이 이미 연주되기 시작했다. 베리야(贝利亚), 클리멘트 보로실로프(克利缅特•伏罗希洛夫), 몰로토프(莫洛托夫), 아나스타스 미꼬얀(阿纳斯塔斯•米高扬), 카가노비치(卡冈诺维奇)는 모두 이미 쓰딸린이 이름을 불러 비판했기에 그들은 극도의 공포 중에 있었다. 당시 후르쑈브만은 당황해하지 않았다. 제19차 대표대회에서 비판한 명단 중에 그의 이름은 지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쓰딸린이 1953년에 갑자기 사망되지 않았더라면 소련에 또 어떤 피바람이 불어칠지 알 수 없었다. 쓰딸린은 숙청기구에 명령해 우크라이나의 몇백명 민간연예인을 처형했다. 이 민간연예인들은 민족문화의 살아있는 화석이었다. 음악가 쇼스타코비치(肖斯塔科维奇)는 “그들이 민간연예인을 총살할 때마다 몇백 수의 위대한 음악작품이 그들과 함께 소실되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민간가수들은 모두 맹인이여서 그들의 가곡은 문자기록이 없었다. 이런 음악작품은 제자들을 통해 세세 대대로 전해졌다. 매 하나의 맹인가수들은 모두 자신의 독특한 가곡이 있었다. 쓰딸린은 무슨 병태적인 의심으로 이런 맹인예술인들을 소멸했는가? 맹인예술인들이 쓰딸린에게 무슨 위협이 되었는가? 당시 농촌에서 한창 집체화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부농은 한 계급으로 이미 소멸되었다. 쓰딸린은 이런 맹인가수들이 사처로 돌아다니면서 부르는 노래가 매우 슬픈 곡조인데 그들이 부농을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할지 누가 아는가? 맹인에 대해 무슨 심사제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고쳐서 비준한 가사를 맹인들에게 주어 부르게 할 수도 없고 서면 지시를 하달할 수 없었다. 맹인들은 무엇이나 모두 입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맹인들을 통제할 수 없을 바엔 차라리 그들을 총살하는 것이 간단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쓰딸린은 맹인연예인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쓰딸린은 명령을 내려 1만 5,000명의 뽈스까군관을 총살한 적이 있다. 독일군이 뽈스까를 침략했을 때 뽈스까군은 서부전선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적가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쏘련군이 동쪽에서 뽈스까영토를 공격했다. 독일군의 공격도 막아내기 힘든 판에 쏘련군이 뒤에서 공격해오니 뽈스까군은 투항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죽어도 독일군에 투항할 수 없었던 뽈스까군은 결국 쏘련군에 투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쏘련 내무부는 쓰딸린의 명령에 따라 뽈스까군의 포로를 “정치감별”한 후 병사들을 하나하나 석방하고 군관 1,500명만 남겨놓았다. 뽈스까인들의 심목중에이 1,500명의 군관들은 모두 민족영웅이었다. 그러나 쓰딸린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뽈스까군의 군관들은 입대 전에 모두 전업 지식분자(이는 뽈스까군의 매우 특별한 점)였다. 1만 5,000명의 군관은 공정사, 교사, 기술원, 농예사, 의사, 회계사, 작가 등으로 구성되었다. 쓰딸린은 이 사람들을 석방한다면 앞으로 꼭 뽈스까 자산계급 정권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여겼다.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운 뽈스까 자산계급정부가 그들에 의거해 또 군대를 조직한다면 이는 쓰딸린이 앞으로 세우게 될 쏘련 괴뢰정부인 뽈스까인민정부에 얼마나 큰 우환이 되겠는가? 모두 총살해 버리는 것이 우환거리를 제거하는 속 시원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쓰딸린은 내무부에 “뽈스까의 1만 5,000명 군관을 모두 카틴삼림(卡廷森林)에 끌고 가서 비밀리에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사람마다 모두 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리고 큰 구덩이를 파서 그들을 매장했다. 이것이 바로 카틴삼림 학살사건이다. 반세기가 지난 후에 고르바쵸브와 에리친은 쏘련정부를 대표하여 과거 쏘련이 카틴삼림 학살사건을 저지른데 대해 뽈스까인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깊은 참회를 표시했다. 1990년 1월 30일에 구쏘련의 국가안전부 부주석은 “현존하는 서류자료의 통계의 의하면 1930년부터 1953년까지 쏘련 전국에 377만 8,234명이 정치 핍박을 받았고 78만 6,098명이 극형(총살)을 당했다”고 말했다. 쓰딸린은 집정 20여 년 동안 78만여 명을 사형에 처했는데 이 숫자는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다. 쏘련 내무부에 남은 서류는 전부의 사망자 수를 반영하지 못한다. 서류가 소각된 정황도 있기 때문이다. 1934년에 쏘련공산당 대표 1966명 중에서 1108명이 반혁명죄로 체포되어 대부분이 집중영과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이 당대표들은 직접 사형판결을 받아 죽은 것이 아니기때문에 그들은 78만 6098명의 수치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정황은 매우 많다. 기록보관소의 모든 서류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쏘련국방부 군사연구소 소장은 “1937과 1938년의 그 비참했던 2년 동안에 약 350만~450만명이 진압당했고 그중 60만~80만명이 사형판결을 받고 죽었다. 그외 또 매우 많은 사람들이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지 않았지만 후에 노동개조영과 감옥에서 애매하게 죽었다”고 말했다. 숫자에는 소리가 없다. 450만 명이든 350만 명이든 누가 “옷을 잡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우는” 통곡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생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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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06
  • 무측천이 창조한 4대 세계기록
    [동포투데이] 세계기록은 경기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른 분야에도 여전히 각양각색의 세계기록이 존재한다. 중국통치자 중의 하나의 특수한 사례로서 무측천(武则天)은 많은 기록을 창조했다. 그녀는 이름이 무조(武曌)이고 별명이 무측천, 무미(武媚)이다. 그래서 무미랑(武媚娘)이라고도 한다. 무측천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정통 여황제, 수명이 가장 긴 황제 중의 하나(82세)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기록이 아니다. 그녀는 혼자서 황제중의 4대 세계기록을 창조했다. 중국에서 그 어느 황제도 이 세계기록을 깨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세계적인 범위로 보더라도 여전히 최고기록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 4대 세계기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임용한 재상이 가장 많았다. 당왕조에는 재상이라고 칭하는 관직이 아주 많았다. 좌복야, 우복야 및 문하성, 상서성, 중서성 3성의 장관을 모두 재상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재상수량은 전체적으로 다른 왕조를 넘어섰다. 예를 들어 당태종은 재위 23년간 재상을 25명 임명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무측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무측천은 인재를 아끼기로 유명했다. 과거를 크게 일으켜세우는외에 지방의 각급관리들에게 우수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장려했다. 그렇기는 해도 그녀는 인재를 놓칠가봐 두려워했고 나중에는 심지어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스스로를 추천하도록까지 격려했다. 인재가 많아지니 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놀려두면 그 것은 낭비였다. 결국 그녀의 통치하의 국가관료기구는 커지게 되었다. 재상의 직만 앞뒤로 73명에 달하게 되었다. "수당사(隋唐史)"에서는 이렇게 해석했다. “무후는 일처리가 마음내키는대로였고 좋고 나쁜 것이 항상 바뀌었다. 그래서 그녀가 즉위한 동안에 재상은 모두 73명에 이르렀다.” 적인걸(狄仁杰)도 무측천시기의 재상이다. 적인걸(630~700년)은 자가 회영(怀英)이고 태원사람이다. 적인걸은 천수 2년(691년) 9월에 봉각란대평장사를 담임하여 재상으로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여 래준신의 무함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억울한 누명을 벗은 후 팽택현령으로 강등되었다가 거란족의 난이 일어났을 때 다시 기용되었다. 신공 원년(697년)에 적인걸은 다시 재상으로 되었다. 적인걸은 바른 말을 잘 하기에 무측천에게 려릉왕 리현을 태자로 책봉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여 당조의 사직이 지속되게 하였다. 여기에서 무측천이 재상을 임용한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대주왕조를 건립하기전에 부유예(傅游艺)라는 9품관리가 기회를 잘 노렸다. 그는 무측천이 황제를 칭할 야심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 사람을 끌어모아 상소를 올렸다. 무측천에게 국호를 “주”로 고치라고 요구했다. 무측천은 기뻐하며 1년동안 9품관리인 부유예를 3품관직으로까지 승진시켰다. 그리하여 재상의 위치에 이르렀다. 당나라때 1품, 2품관리는 아주 적었다. 재상은 대부분 3품관이었다. 무측천은 지독하기 그지없는 악녀였지만 다행히 부지런히 정무를 보았고 나라를 잘 다스렸다. 빈번하게 재상을 바꾸었지만 국가의 혼란은 오지 않았다. 역사상 무측천에 다음가는 황제는 숭정황제이다. 이 명나라 마지막 황제는 일생동안 사람을 쓰면서도 의심을 계속 하였고 재위 7년동안 재상을 50명이나 썼다. 명왕조는 병이 깊었는데 그가 이렇게 뒤흔들면서 더욱 회복할 방법이 없어지게 되었다. 둘째, 즉위년령이 가장 많았다. 무측천의 이전에 즉위시 년령이 가장 많았던 황제는 유비였다. 이 유현덕은 전반생을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유격전을 벌렸지만 다행히 늙으막에 복이 있어 당시로서 가장 큰 2개의 주(형주, 익주)를 차지하고 최종적으로 60세에 영광스럽게 황제에 등극하고 촉한정권을 세웠다. 무측천은 그보다 더욱 힘들었다. 당태종의 재인에서 당고종의 소의(昭仪)를 거쳐 황후, 천후에 이르고 다시 태후에 이르렀다. 67세가 되여서야 비로소 황제의 보좌에 올랐다. 이 해가 기원 690년이다. 무측천은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자칭 “성신황제(圣神皇帝)”라고 칭했다. 14살때부터 그녀는 이미 53년을 분투한것이다. 그외에 오대십국때 마은(马殷)이라는 사람이 당나라말시기에 호남에 할거했다. 927년에 이르러 후당은 그를 초국왕에 봉했다. 그는 75세의 나이에 대기만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왕”일 뿐이고 죽을 때의 묘호도 초무목왕이었다. 뿐만아니라 이 왕은 중앙의 할거세력이 봉한 것이므로 황제의 반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셋째, 릉묘의 규모가 가장 컸다. 무측천이 처한 시대는 당나라의 번영시기였다. 풍부한 국력은 그녀의 릉묘건설에 견실한 재력기초를 제공했다. 그녀의 릉묘인 건릉(乾陵)은 684년에 공사를 시작하고 23년의 공사를 거쳐 1기가 완성되었다. 건릉은 수도 장안성을 모방해서 비슷하게 만들었다. 외곽성, 황성, 궁성의 3중성곽이 있고 내성에는 동쪽에 청룡문, 남쪽에 주작문, 서쪽에 백호문, 북쪽에 현무문이 있다. 남북의 주축선은 길이가 4.9킬로메터에 달했다. 남북의 담은 길이가 1450메터이고 동쪽의 담은 1582메터, 서쪽의 담은 1438메터이다. 총면적이 230만평방킬로메터에 달했다. 이러한 규모는 당태종의 소릉도 견줄수가 없어 력대제황제릉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외에 성내에는 헌전, 편방, 회랑, 궐루와 적인걸 등 60여명의 중신들의 사당이 있다. 이는 또 하나의 장안성이라 할만하다. 아쉬운 것은 “안사의 란”에 건릉의 휘황하고 장관인 지면건축물이 상당히 크게 파괴되였다는 것이다. 정원 14년(798년)에 이르러 다시 수리되었다. 이렇게 큰 릉묘이니 안에 들어있는 부장품도 만만찮았다. 현대학자의 예상에 따르면 부장된 진귀한 보물의 총량은 최소한 500톤가량일 것으로 본다. 만일 무측천의 건릉이 열린다면 아마도 진시황릉과 같이 중요한 고고학적 대사가 될 것이다. 넷째, 사용한 년호가 가장 많았다. 년호는 한무제가 발명했다. 제왕기년법의 연속이다. 무측천의 이전에 이 세계기록을 보유한 사람은 한무제였다. 그는 55년간 재위하면서 년호를 모두 11개 사용했다. 평균 5년에 1개를 사용한 셈이다. 이 년호는 각각 건원(기원전140~기원전135), 원광(기원전134~기원전129), 원삭(기원전128~기원전123), 원수(기원전122~기원전117), 원정(기원전116~기원전111), 원봉(기원전110~기원전105), 태초(기원전104~기원전101), 천한(기원전100~기원전97), 태시(기원96~기원전93), 정화(기원전92~기원전89), 후원(기원전88~기원전87)이다. 무측천에 이르러서는 그녀가 황제에 등극해서부터 마지막에 정변으로 자리를 낼때까지의 21년동안에 모두 17개의 년호를 사용했다. 생활력이 강한 녀강자로서의 무측천은 개성있는 년호를 사용했다. 이 년호는 각각 광택, 수공, 영창, 재초, 천수, 여의, 장수, 연재, 증성, 천책만세, 만세등봉, 만세통천, 신공, 성력, 구시, 대족, 장안이다. 그중 비교적 재미있는 것은 천수 3년이다 그해에 무측천은 두번이나 년호를 바꾸었다. 즉 천수 3년, 여의 원년과 장수 원년은 모두 같은 해에 바꾼 것이다. 이 해는 바로 69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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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3
  • [단독] 한성호(韩晟昊), 그는 누구인가?
    [동포투데이] 한성호(韩晟昊)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회장은 "한국적 조선족이며 신화보(월간) 사장인 조명권(曹明权)이 나의 과거를 들먹이며 나의 인격을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시키는 문장을 만들어 나의 얼굴에 먹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의 애국적인 인격을 짓밟고 나의 생명안전을 위협하였다. 이에 참을래야 참을 수 없다'며 기고문을 작성하여 본지에 보내왔다. 다음은 한성호 회장이 보내온 기고문 전문이다. 1945년, 나 한성호는 19세 때 일본이 투항하고 중국 국민정부가 승리하자 동북이 해방되었음. 당시 나 한성호는 동북 길림사범대학 2학년 학생이었는데 학교의 수업이 중단되자 고향인 길림성 장백현으로 돌아갔다. 1946년 나 한성호가 20살이 되던 시기 동북에서는 대혁명으로 대지주와 부농을 타도하는 유혈적인 투쟁이 개시되었으며 나의 가정은 선참으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택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부친과 형제 몇명도 사처로 도망갔으며 모친은 대들보에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나 한성호 역시 그 폭풍을 피해가지 못하고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죄명이란 첫째, 대지주의 아들이고 둘째, 위만주국 시대의 대학생이란 것이었으며 셋째, 51 폭동의 주모자(주: 제3조의 죄명은 순전히 날조된 것이었으며 1984년에 이르러 해명되었음)라는 것이었다. 후에 나 한성호는 친척 및 친구와 중공간부의 비밀도움으로 탈옥(越狱)하여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도망하기에 성공하였고 1948년에는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건너갔으며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로 되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1949년 당시 23살인 나 한성호는 한국 서울에서 신문을 발간,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성호는 한국에서 철거하는 화교들을 실은 선박 “영송호(永淞号)에 승선하여 대만으로 피난, 6개월 뒤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이어 국민당에 가입하였고 그 때로부터 국민당에서 사무를 보면서 생활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비록 한국전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한국을 떠나지는 않았고 지금까지 70여 년간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1년 25살인 나 한성호는 재한 중국 국민당 직속지부의 조직훈련과 과장으로 사업, 겸임으로 재한 대만 대도통신사(大道通讯社) 특파원 및 재한 화교청년 반공항러구국총회(反共抗俄救国总会) 총회장(주: 재한 국민당 직속지부의 조직일군들로는 다음과 같다. 주한대사 왕동이 이 지부의 당무지도원으로 최고의 권력자였고 비서로는 여규생, 과장으로는 나 한성호였고 간사는 우천덕이었다. 당시 3명씩으로 하나의 소지부가 되어 당무 및 교포사업을 하였는데 국민당의 해외지부는 근근히 간판효과만 있었을 뿐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으로 사업하기도 했다. 1952년 나 한성호는 당시 왕동 주한 중화민국 대사 및 국민당 지부 지도원의 추천으로 대만에 가서 중국 국민당 혁명실천연구원 제 20기 당무훈련반에 참가, 당시 원장은 장개석(蒋介石)이었고 학원생은 300명이었으며 1개월을 한기(주: 대북 양명산에서, 부록 1: 동창록 등 문건, 참고)로 되어 있었다. 졸업시 장개석 원장이 학원생들을 고무하고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매 학원생들과 기념사진 한 장(주: 부록에서의 사진이 증명, 왼쪽 사람이 한성호이고 오른쪽 사람이 재한 화교 국민대회 대표 왕흥서임. 이 사진은 나 한성호가 한국전쟁에서 공로를 세워 장개석의 회견을 받고 찍은 것이 절대 아님임)씩 남기었다. 헌데 이 사진을 갖고 한국적 조선족이며 신화보(월간) 사장인 조명권(曹明权)이 나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문장을 만들어 떠들줄이야. 그는 나의 인격을 모독하는 요언을 조작, “한성호가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중공혁명선열들을 살해했으며 한성호의 두손에는 공산당인들의 선혈이 낭자하게 묻혀 있는 바 이것으로 ‘부친을 살해한 그 원수’를 갚은 ‘공로자’로 되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런 망나니가 이 공로로 장개석의 접견을 받게 되었다” 라고 하며 나한테 죄를 뒤집어 씌우고 나의 얼굴에 먹칠을 하였을뿐만 아니라 나의 애국적 인격을 짓밟고 나의 생명안전까지 위협하였다. 이에 참을래야 참을 수 없게 된 나 한성호는 부득불 자신의 프로필을 간단히 작성하여 공개해 설명하는 바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결속된 뒤 나는 여전히 재한 중국 국민당 직속지부에서 사업하였으며 1955년 29살이 되던 해에 일체 당무사업에서 손을 떼고 한국 전라남도 군산시에서 군산 화교학교 교장으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동시에 한국 동양한의대학(东洋汉医大学)에 입학(4년제), 후에 다시 한국 경의대학교 한의대학에 전학(6년제)하였으며 5학년 때 대한민국 제34기 한의사(汉医师) 국가시험에 통과되어 한의사 허가증을 획득하면서 지금까지 줄곧 의료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1992년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이등휘가 중화민국 대통령 및 중국 국민당 주석으로 당선되던 날, 나 한성호는 실망스럽고 분노한 나머지 단연히 중국 국민당에서 사퇴한 동시에 ‘한화천지(韩华天地)’ 및 ‘중국천지’ 잡지를 발간, 그 때로부터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통일을 추진하고 교포들을 발동하여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조국을 지지하는 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주한대사관과 중국화교연합회의 지지하에 2002년에 한국 서울에서 재한 중국교민협회 및 재한 중국평화통일추진연합총회를 창립,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20여 년래 나 한성호는 돈과 힘을 바치고 모든 노고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조국을 지지하고 대만독립을 반대하는 애국사업에 투신하였으며 분열세력들에 대해서는 일보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또독립세력과 가까운 분자들과는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나 한성호의 인격이고 품격이었다. 비록 찬반의견이 교차되는 염량세태(世态炎凉) 속에서도 나 한성호는 그 어떤 후회도 없었으며 지금까지 자신의 그 주장을 펼쳐가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중화민국으로 하여금 참전하지 못하게 했기에 중화민국의 당정 및 군부 측은 한국전쟁에 참가해 공산당을 살해할 자격과 권리가 없었다. 나 한성호 역시 재한 화교청년으로서 독서와 사업에만 몰두했을 뿐 사사로이 한국전에 참가해 공산당을 살해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또한 마음대로 중국공산당을 살해할 수 있는 그런 고장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편 나의 연령과 경력을 보면 곧 나 이 한성호가 한국전쟁에 참가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중공선열과 조명권의 부친을 살해해 조명권한테 있어서 ‘부친을 살해한 원수’가 되었다고 하는데 20대의 한 재한 화교청년이 무슨 권리로 공산당을 살해하고 대공을 세울 수 있으며 어떻게 현저한 공로로 장씨 부자와 함께 사진을 찍고 또한 상여금가지 받을 수 있었단 말인가?! 조명권이 불순한 동기로 고의적으로 나 한성호한테 살인죄를 씌우기에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바 민사, 형사로 고발해 끝까지 진상을 밝히고야 말 것이다. 모두들 미친개한테는 몽둥이 이상이 없고 정신병자한테는 철창병원이 최고라 한다.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또 모두들 사람을 일시적으로 기만할 수는 있지만 일생 동안 기만할 수는 없다고들 말한다. 정의도 마찬가지이다. 나 한성호의 90년 일생을 돌이켜 볼 때 젊은 시절에는 국공 양당의 유혈투쟁에서 피해자였으며 결코 가해자는 아니었으며 나 자신은 추격대상이 되었지 결코 살인자는 아니었다. 나 한성호는 한국에서 의료사업에 종사한 사람이었지 한국전에 참가해 전문 공산당을 죽인 살인자는 아니었다. 엄숙히 말하면 그제날 극좌의 공산당인들이야말로 ‘두 손에 나 한씨 가정의 선혈을 가득 묻힌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나 한성호는 당연히 한국전에서 두 손에 공산당인의 선혈을 가득 묻힌 살인자로 될 자격이나 권리가 없었다. 이 사실이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절대 억지로 변명하는 것이 아니다. 헌데 이런 요언에 대해 믿는 사람이 있고 이런 무함에 대해 역시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 소위 요언은 두뇌가 명석한 사람들한테서 사라져야 할테지만 아쉽게도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 많지 못하고 정의가 적은 것이 큰 비애이며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나 이 한성호는 일생중에서 단 한번도 남을 고발해 본적이 없다. 특히 해외에서 내가 제일 반대해 온 것이 바로 중국인이 중국인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이는 나의 신념이었고 원칙이었다. 하지만 현재 나는 부득불 나의 이 원칙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다. 나 한성호의 90세 인생의 명예를 위해 한국법원에 조명권을 고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유는 첫째, 명예훼손죄, 둘째, 인격모독죄, 셋째, 이유없이 요언을 날조하여 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이념 원한을 도발하고 나 이 한성호의 생명안전을 위협한 죄(주: 이외 조명권은 나 이 한성호가 한화로 공금 1.000만원을 사사로이 챙겼다고 비방중상했기에 함께 고발할 것임), (주: 나 한성호가 일찍 한국에서 중국국민당 재한 직속지부의 당무, 교무, 청년운동, 부녀운동 및 선전사업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명령에 따라 일하는 기층 당사업일군이었지 불호령을 내리는 상급 결책지위에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나는 일개의 화교로서 한국전에 참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공 혁명선열을 살해하고 조명권한테 부친을 살해한 원수로 될 이유는 더욱 없었다. 조명권은 오래 자신의 나이가 46세라고 했는데 한국전이 발발한지 65년이 지난 것을 보면 그는 한국전이 발발한지 20년이 지난 뒤에 태어난 사람이다. 한국전 당시 조명권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이 한성오가 한국전에 참가했고 또한 ‛두 손에 공산당인의 선혈이 낭자’한 것을 알 수 있었는가?! 조명권은 나 이 한성호가 한국전에 참가했고 ‛두 손에 공산당인의 선혈이 낭자’했다는 증거를 내놓기를 바란다. 그리고 모든 것을 명백히 밝혀 나 이 한성호의 청백한 명예를 철저히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나한테 인증, 물증이 모두 구비되어 있으니 한국법정에서 만나 시비곡직과 선악진가를 판별하기를 바란다. 당신(조명권) 같은 의리를 배신하는 것으로 밥 먹는 사람한테는 오직 냉정한 법원의 판결만 수요될 뿐 윤리도덕을 담논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조명권이 인터넷 매체를 이용하여 나 한성호에 대해 악성선전을 한 것은 이미 교민사회와 중국 내지 및 중국의 해당 교민관리 기관에까지 파급되어 극히 불량한 영향을 가져오고 있다. 그 사례로 중국 중앙정부 모 부문의 한 고위 지도자는 북경에서 열린 한국 화교 및 평화통일 회의(5명 부총 회장이 참가)에서 나 한성호를 ‛두 손에 공산당의 선혈이 가득 묻은 사람으로서 대단할 인물이 아니며 존경할 가치’조차 없다는 등의 말을 쏟아냈다고 한다. 그의 어구와 어조는 완전히 조명권의 어구 및 어조와 똑 같았다. 나에 대한 조명권의 고의 요언조성과 악성파괴는 영향 면이 극히 넓고도 깊은바 도무지 용인할 수가 없다. 나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려면 법정해결 외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사회계층의 여러분들이 나 이 한성호 노년의 불행과 핍박에 못이겨 양산에 오르는 심정에 대하여 양해해주기 바란다. (주: 이상 5명 부총회장의 성명에 대해서는 잠시 지적하지 않고 앞으로 법정에서 증거로 내놓을 것임) ▲ 부록 1 - 1952년 제20기 혁명실천연구원 동창록 ▲ 혁명실천연구원 원장인 장개석의 초상 ▲ 부록 3 - 동창록, 한성호 학원생(20295번)의 사진 ▲ 부록 4 -동창록, 한성호의 신상기록 ▲ 부록 5 - 한성호와 원장 장개석의 합영 이 사진은 나 한성호가 한국전에 참가하여 두손에 공산당의 선혈을 가득 묻힌 현저한 공로로 인해 장개석을 만나 한께 찍은 것이 아니라 중국 국민당 혁명실천연구원 졸업시 장개석 원장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이다. 그 시기 나 한성호는 26세였다. 중간 사람이 장개석이고 오른쪽 사람이 재한화교 국민대회 대표 왕흥서(王兴西)이고 왼쪽 사람이 나 이 한성호이다. 년도는 중화민국 41년이고 서기 1952년 9월이며 지점은 대북 양명산이다. 당시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한성호는 재한화교로서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단 한명의 공산당원도 살해한 적이 없다.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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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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