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4(토)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기획/연재

실시간뉴스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19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2-08-28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역사산책] 훙커우 공원 그리고 매헌 윤봉길 ②
    ●강순화 “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지상(至上)의 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의사(義士)라 한다.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위의 글은 서울 양재동소재 윤봉길의사기념관 뜰에 세운“숭모비”에 새긴 비문의 첫 구절이다. 매헌 윤봉길은 겨우 24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순국하기 8개월 전에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으킨 역사적 의거로 그는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만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오만한 일본, 천장절(天長節)행사에서 폭탄공격을 받다 상해사변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끝날 무렵에 정전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일본군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그들의 소위 천장절행사를 크게 열어 승전기념을 겸한 군사적 시위를 펼치고자 획책하였다. 천장절이란 일본왕의 생일로 군국주의 일본의 우두머리들이 일본인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강요하고 그들을 전쟁마당에 끌어낼 목적으로 왕을 신격화하고 왕의 생일을 일본의 최대의 명절이자 신성한 날로 지켰던 그들의 국경일이다. 일본은 마치 1871년 프로씨야군대가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이유궁전(凡爾賽宮)에서 윌헬름 1세 독일황제 대관식을 연 것을 흉내라도 내듯이 남의 나라에서《만세 일본》이라는 플래카드를 붙이고 오만한 행사를 펼친것이다. 당시 홍구공원안은 상해거주 일본인 1만여명, 상해 침략 일본군 1만여명, 그밖에 각국 사절과 각계 초청자 등 2만여명 인파가 회집하여 성황을 이루고있었다. 여기에 한국의 청년 윤봉길이 일본 국기를 들고 도시락과 물통을 메고 잠입한 것이다. 일본군은 오전 10시부터 분열식과 사열식을 마치고 기념식을 시작하였다. 높은 단위에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대장을 비롯한 고관들이 도열하고 그 오른쪽에 도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이 닭벼슬모자를 쓰고 사회를 봤다. 식이 시작되고 오전 11시 40분쯤 되여 윤봉길은 성난 사자처럼 뛰어나가 지니고 있던 도사락을 던졌다. 중국군 병공장(兵工廠)에 근무하던 김홍일(金弘壹-중국 귀주의 륙군강무학교를 졸업한 독립운동가)이 만든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을 내며 작렬하였다. 단상에서 기고만장하게 서있던 원흉들이 엎어지며 연단 아래로 쓰러졌다. 제국주의가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축하객으로 참석했던 한 쏘련 인이 촬영한 현장필림을 보니 일본뿐아니라 세계 제국주의가 무너지는 모습 같았다. 이때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대장과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定差) 등은 즉사하고 일본 제3함대 해군사령관 노무라 기찌사부로(野村吉三郞)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등 나머지 놈들도 눈과 다리를 잃었다. 당시 주중(駐中) 일본공사였던 시게마쯔(重光葵)는 왼다리를 잃은 채 13년 뒤인 1945년 9월 2일 패전 일본의 외무대신으로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윤봉길은 거사후 군 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쓰러졌다. 주먹질, 발길질, 몽둥이가 그의 몸으로 퍼부었다. 그가 입고 있은 회색정장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몸의 형태는 알아볼수 없게 되여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군경들은 경계선을 치고 그를 감시하다가 이윽고 차가 와서 머리와 다리를 집어 들어 짐짝처럼 차 뒷좌석에 처넣었다. 윤봉길의사의 최후를 기록한 일본 륙군성 극비문서 만밀대일지(滿密大日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여있다. 4월 29일 상해에서 시라가와 군사령관 등에게 폭탄을 던져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5월 25일 살인, 살인미수, 상해, 폭발물 단속벌칙위반으로 사형이 선고된 범인 윤봉길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金澤)시 교외 육군 공병작업장내의 서북쪽 골짜기에서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겸 육군 감옥장 네모토 소타로의 지휘하에 사형이 집행되였다. 사형집행이 끝나자 유해(遺骸)를 씻고 납관(納棺)한 다음에 가나자와시 공동묘지의 서쪽에 깊이 약 6척을 파서 매장하여 오전 10시 30분 모두 종료되었음. 처형 직전의 윤봉길의사:“사형은 미리 각오한 것이니 지금에 임하여 아무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굳세고 침착하였다. (일본 헌병사령관 보고서) 꼭 실현되고야말 대한독립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멀지 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 이는 1932년 12월 19일 윤의사의 희생직전 마지막 유언 이였다. 중국 연안에서 조선의용군으로 활략하던 김학철씨는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바로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충격을 받아서였다고 하였다. 홍구공원의 정의로운 죽음은 우리 계레의 갈 길을 밝혀주었을뿐아니라 당시 중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커다란 자극과 공명을 남겼다. 이 쾌거로 인하여 수괴를 잃은 일제는 기세가 크게 꺾기여 급진적침략행보를 늦추지 않을 수 없었으며 중국은 민족적 자각의 계기로 삼아 일제침략에 대처할 준비를 서두름과 동시에 한국을 동반자로 재인식하게 되였다. 또한 전 세계가 베르사이유(凡爾賽) 체제의 무력함을 인식하고 피압박민족의 해방 없이는 세계평화를 기대할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였다. 림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도 시작되었고 독립을 기다리다 지친 세계 모든 약소민족의 가슴에 확고한 신념과 희망을 심어주게 되었다. 일제가 윤봉길의사를 가두고 처형하여 땅에 매장해도 윤봉길의사의 기개는 싹이 트고 일제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만한 폭발적이고 값진 민족의 에너지로 작동 되였다. 윤의사의 의거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을 새롭게 한 통쾌한“독립전쟁”의 한 장면 이였으며 민족자존을 세계만방에 선양하는 계기가 되였음도 당연한 리치였다. 당시 세계 언론들은 이를 일제히 보도하였고 그 정의의 기록은 지금도 역사속에서 살아숨쉬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할빈 의거와 더불어 한국독립운동사상 2대 쾌거인 상해의거가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을“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이 의거로 말미암아 한인들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은 놀랄 만큼 호전되었다. 특히 이 의거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정부는 임시정부에 대한 물심 양면으로의 협력과 원조를 베풀기로 다짐했다. 둘째, 이 거사로 말미암아 미국, 하와이, 메히코, 쿠바 등에 사는 한인교포들의 애국열정은 전무후 무했으리만큼 높아졌고 그리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백범에 대한 후원이 격증했다. 초대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도 조국광복 이후 출판한“도왜실기”에서 상해의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우리가 조국을 되찾고 조국 땅을 밟게 된 것이 모두가 윤의사의 덕이요. 우리 임시정부와 윤의사를 비겨서 말하자면 갓 난 어린이가 깊은 연못에 빠져서 금방 가라앉는 위급한 찰나에 윤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속에 뛰어들어 이 어린이를 번쩍 건져 구해놓았소. 이 어린이가 자라서 오늘 삼천리강산을 달리고있는 것이요. 조국독립투쟁이 우로부터의 부과된 의무조항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솟아오르는 민중의식의 일환이기에 윤봉길의사의 쾌거는 결코 일회적 투쟁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항일투사의 출현과 열렬한 투쟁의 지속과 확산을 예고하는 것이였다. 윤의사의 의거이후 중국 국민당은 적극적인 지원책을 모색하여 김구와 장개석은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의 후신)에서 영수회담을 갖고 군사교육에 관한 지원을 협의했다. 어쨌든 한국독립군의 본격적 편성을 위해 독립군장교양성에 착수했다는 것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일이였다. 이 획기적 조치가 마련된 촉매제는 바로 홍구공원 의거이며 그 주인공은 윤봉길의사였던 것이다.” 김구-장개석 회담의 산물로 낙양군관학교에 한인반을 설치하여 광복군조직의 기간요원 확보책이 마련된 이후 중국대륙에서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가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이다. 상해의거로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로 하게 되였다. 한인애국단의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20년대 이후 침체상태에 있던 임시정부의 기능을 회복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후 중국정부의 지원이나 동포들의 지원도 모두 한인애국단의 김구를 통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되여 자연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도하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기반은 굳어졌고 체제가 강화되었다. 독립 운동가는 모두 살신성인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의열투쟁자(義士)처럼 죽음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윤봉길의사의 길은 그래도 죽음의 길이다. 그 죽음의 길에서 보여준 윤봉길의사의 용기와 여유, 그야말로 순결무구한 애국애족의 정신과 태도는 누구보다 먼저 독립운동자 모두가 따라 배웠다. 윤봉길의사는 무식하거나 천박한 청년이 아니므로 그의 상해의거는 충동적이거나 감상적 행동에 의한것이 아니였다. 그는 식민지하 청년의 역사의식이 투철하였고 배웠기에 자유 아니면 죽음을 택한다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윤의사의 활동은 일제가 지적하는 것처럼 단순한 테러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임시정부에 의한 의열투쟁의 일환이였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의 기반이 굳어짐에 따라 임시정부가 초기처럼 전체 독립운동계의 주심적위치를 회복한 점이다. 임시정부는 상해의거를 계기로 만주와 미주 동포사회의 독립운동을 포용 통일하게 되여 그 수립초기처럼 독립운동의 구심체 또는 통합기능을 회복하였고 특히 미주지방의 동포들은 초기처럼 다시 임시정부에 재정지원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한중연합 항일운동전선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였다. 완바오산 사건 등으로 한중민족감정이 소원하던 무렵이고 더우기 상해사변 등으로 중국인의 배일감정이 팽배한 시점에서 윤의사의 의거로 한중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상해의거 직후 각 신문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중국청년의 행동이라고 잘못 보도하였는데 김구의 성명서가 발표된 뒤에야 전 세계가 진상을 알게 되였다. 각 신문에서 중국청년이라고 오보할 만큼 상해전쟁 뒤 중국국민의 항일감정이 치솟아있었던 것이다. 동북의 땅(만주)을 빼앗기고 또 상해에서 굴욕을 당한 중국이였다. 그런데 상해의거 후 장개석정부와 중국국민은 일변하여 장개석이 김구를 초청하여 양자 단독회담이 이루어질 정도로 중국정부와 중국국민은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였고 그들의 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해주기까지 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으면서 그들의 지원이 없이 활동할 수 있는 일은 아니였다. 물론 그들도 일제의 침략을 받고있었으니 당연한 것으로 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통하여 장개석을 비롯한 그의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던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상해의거는 국제적으로 전례 없는 외교적 효과를 올렸다. 상해의거는 전 세계의 각광을 받은 것이 사실이고 그 충격적인 사건에 전 세계가 놀랐다. 임시정부 수립후 어느 외교활동보다도 한국인의 독립항쟁이 한낱 감상적구호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하게 입증하고 과시한 것이 상해의거였으니 그 외교적 성과는 가히 짐작될 것이다. 세계 모든 신문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다루었고 오랫동안 친일노선을 택하던 영국에서도“런던 타임스”를 비롯한 언론이 일본을 규탄하였다. 상해의거는 한국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의거이후의 항일독립투쟁은 비밀결사적인 투쟁이 지닌 의의를 계승함과 동시에 그것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후일의 한국광복군 성립으로 이어졌고 군관양성에 주력하여 한국독립운동은 다시 무력항쟁의 실마리를 풀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임시정부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내막을 기록한 소책자를 만들어 각국 역사관과 단체에 배포하였다. 이 소책자의 표지에는 김오연이라는 사람이 두동강난 일본도(日本刀)를 그려놓아 통쾌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더욱 통쾌하고 신선한 반응은 국민당정부의 장개석의 언급이였다.“중국의 백만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윤봉길의사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놓았다.” 중국인들의 감정과 감탄을 너무나 잘 집약해서 표현한 말이였다.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가 한 의혈남아의 의협적테러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한국인들의 의지를 단적으로 표상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1946년 6월 30일, 윤봉길의사에게 해방 후 첫 국민장이 엄수 되였고 서울 효창공원에 그의 유해가 안장 되였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였고 1988년“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윤의사를 크게 소개하였다. 맺 음 말 민족의 독립을 갈구하는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역사적 인물을 평가한다면 매헌 윤봉길이 걸어간 역사의 길은 항일독립투사의 길이였다고 감히 결론 짓고 싶다. 사람과 사회, 사람과 시대를 매개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시대정신일진대 윤봉길의사의 행위와 발자취는 역사의 발전방향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었다. 매헌 윤봉길은 일신의 안일과 가족의 평안을 돌보지 않고, 일생을 항일독립운동가로서 일관하였다. 매헌은 멸사봉공의 원칙을 벗어난 일이 없었고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였다는 점이다. 지적방황과 고뇌와 충절의 길을 걸어온 의사의 신념과 행동을 관통하는 기본적전제가 애국충절이였다. 매헌의 고결한 일생은 개인의 영광이라기보다는 조국광복의 정의를 위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더 나아가 자라나는 후손들을 위해 영원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매헌 윤봉길은 조국광복의 순교자이기에 앞서 농촌부흥운동의 선구자였다. 매헌은 선각적지식인이요, 동시대인을 뛰어넘는 식견과 신조를 지닌 인격자요, 양심가였다. 그는 농촌을 배우기 위하여 살고 농민을 살리기 위하여 배웠다. 매헌 윤봉길은 입으로만 독립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불의를 철저히 거부하는 비타협주의와 민족의 독립을 찾고야말겠다는 살신성인의 정신을 지녔다. 즉 매헌은 양심과 행동을 겸비한 항일독립운동가였으며 정녕“민족정기의 화신이며 행동적지성의 본보기이며 구국애족의 영원한 사표”였다. 윤봉길의사의 생애를 둘러싼 자기희생과 처형의 비장성(悲狀性)은 한민족의 숙명 또는 한반도의 상황이 지닌 독특한 비극성(悲劇性)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윤봉길의사의 정신은 언제나 구국의 길이자 통일의 길임을 굳게 믿기에 윤의사의 충의 혼을 기려 민족정기 함양의 산 교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윤봉길의사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 한 가닥의 부끄러움이 없는 길을 걸어 소신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단 한 번도 한 일이 없거니와 추호도 량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없었다. 그는 식민지 민중의 사표요, 한국독립운동사의 화신이며 조국광복의 초석인 것이다. 나라와 민족독립의 틀과 뼈를 세운 열사였다고 하겠다. 어두운 역사의 하늘에 한때 찬란하게 수놓은 광망(光芒)의 상해의거를 감행한 윤봉길의사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장거가 한민족독립운동의 기관차 역할을 하였고 그 우에 대한민국이 섰다. 이렇게 보면 의사는 결코 죽지 않았다. 의사는 이 땅의 역사,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늘 푸르게 살아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조국광복의 밑거름이였고 조국광복의 홰불을 들었던 의사가 오늘날에도 길이 추모되여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4
  • [역사산책] 훙커우 공원 그리고 매헌 윤봉길 ①
    ●강순화 “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지상(至上)의 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의사(義士)라 한다.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위의 글은 서울 양재동소재 윤봉길의사기념관 뜰에 세운“숭모비”에 새긴 비문의 첫 구절이다. 매헌 윤봉길은 겨우 24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순국하기 8개월 전에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으킨 역사적 의거로 그는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만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출신과 교육 20세기 초, 기울대로 기운 한말의 풍운은 마침내 나라마저 무너져내려앉으려는 피빛노을녘이였다. 한반도의 운명이 경각에 달해 이른바 을사5조약을 빌미로 설치한 일제의 통감부가 한반도 강점준비의 그물을 쳐나가기에 혈안이 되여 있던 숨 가쁜 위기의 나날, 어두컴컴해지는 한민족의 역사의 박명기에 한 줄기 빛이 이름없는 농가에서 쏟아져나왔다. 1908년 6월 21일 저녁 8시경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은 그 생애의 고고성을 우렁차게 울렸다. 산지수명(山地秀明)한 두메산골,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수려한 예향(禮鄕) 충청도 예산땅 한 촌락에서의 일이다. 일명《목발이》라고 하는 이 마을의 한미한 농가에서 듬직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계천 건너 섬속의 섬, 도중도(島中島)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오늘의 광현당(光顯堂)에서 갓 20세의 어머니 경주김씨(慶州金氏) 새댁이 첫 옥동자를 분만하자“대장감이로구나!”하며 할머니가 제일 먼저 반겼다. 덕산“목발이”마을에서는 이 가문이 5형제씩 두게 되여 마침 앞산인 수암산(修岩山)에《5형제바위》가 있으므로 수암산 5형제바위의 정기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곳 뒷산 가야산(伽倻山)줄기에 장군봉(將軍峯)도 있어서 장군감이 또 태어났다고 반겨마지않았다. 갓난아이때 부터 대장감이라 해서 집안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부모님들은 첫아들을 무척 대견스럽게 여겼고 앞날에 대한 기대 또한 남달랐다. 이렇게 열여덟된 아버지 윤황(尹璜)씨와 두살우인 어머니 김원상(金元祥)사이에서 태여난 윤봉길, 자(字)는 용기(鏞起)요, 본명은 우의(禹儀)이고 봉길(奉吉)은 별명이었다. 서당을 마칠즈음 스승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이 자기 아호에서 글자를 취하여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후일 망명지 중국 상해에서 대의거에 성공하고 투옥되였을적에 옥중의 가명으로 희의(熙儀)를 쓴적이 있다. 윤봉길이 태어난 집안은 몰락한 양반가문으로서 전형적인 농가였다. 평생 땅만 파는 할아버지는 마을에서“윤두더지”로 통했고 억척스런 성미와 철저한 근면 성실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마침내 벼 백여 석을 거둬들이는 풍수를 이루었다. 흙에서 태여나 생애를 마치기까지 오로지 흙의 주인으로서“목발이”마을“내 건너”에 농사왕국을 꾸민 할아버지는 그처럼 당찬 농민의 본보기였다. 그래서 가문의 택호가“내 건너”로 통하기도 했다. 윤봉길은 1913년 다섯 살 때부터 큰아버지 경(坰)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1918년에는 덕산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유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가운데 애국심을 키웠는데 열두 살 때인 1919년에 일어난 거족적 민족운동인 3·1운동의 자극을 받으면서 민족적 분노를 목격하였다. 그 충격으로 일제의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서의 식민지노예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 후 최병대(崔秉大)의 문하에서 동생 성의(聖儀)와 함께 한학을 배웠다. 1920년경"동아일보",“개벽” 등을 통하여 새 사상에 접하면서 겉보기에는 평범한 농가에서 자라면서도 남달리 비범한 기상을 보였다. 1921년부터는 고명한 유학자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공부했는데 총명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렸고 뛰어난 시재를 보여 약 300여 편의 자작한시를 수록한"명추(鳴推)","옥수(玉睡)》,《임추(任椎)" 등 시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산천초목도 서광어린 정기를 어린 심신에 불어넣어 어두움으로 치달리는 역사에 새 불씨를 심어 일으키도록 해주는 듯 싶었다. 어린시절부터 척박한 산골, 한미한 시골집을 배움터로 삼아 심신을 연마하는 한편 농촌계몽활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농민들의 가엾은 생활에 눈을 뜨게 되였다. 경제적으로 빈곤할 뿐만아니라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 문맹으로 생활하는 농촌사회의 참경은 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게 하였으며 스스로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슬기와 용기를 익혀 체질화해 나갈 수 있었다. 1926년 19세 되던 해 “학문이 학문으로 그 가치를 나타내는 일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그는 서숙생활을 마치고 고향 목바리마을 49가구 200여명을 상대로 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시도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했다.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한글, 역사, 산수, 과학, 농사지식 등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농민계몽, 농민부흥운동,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해에는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뒤받침하기 위하여 3편으로 된 “농민독본”을 저술하여 유인물책자도 펴냈다. 제1편은 현전하지 않고“계몽편”,“농민의 앞길” 2편이 남아있는데“계몽편”은 예절 등 개인의식으로부터 시작해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을 비유법으로 일깨워주었고“농민의 앞길”은 농민본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 즉 농민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는바 20세 청년으로서는 너무나도 초시대적인 선진적사회의식과 투철한 독립정신을 보여주었다. “농자 천하지대본이요, 농심은 천심이라 했거늘 잠들었던 가난한 농민들을 흔들어 깨워야 산다, 알아야 산다, 협동해야 산다”라고 생각한 그는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하였으며 그해 1월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2월 18일에는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우화극《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여우같이 교활한 일제를 풍자했기에 관중의 대환영을 받자 곧 일본 놈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으며 경찰에 불려가서 추궁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봉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지방농민들을 규합하여 자활적농촌진흥을 위하여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 되였다. 한편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로서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후 서울 시조사잡지 기자 이흑룡(李黑龍)이라는 독립운동공작원과 자주 접촉하게 되면서 그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항일의 성격을 지닌 농민운동으로 바뀌었다.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다짐한 순국의 정신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은 매헌 윤봉길로 하여금 민족혁명투쟁의 길에 들어서게 했다.“농민이 우매하기 때문에 우리가 못사는 줄 알고 농민운동을 펴왔는데 알고 보니 그 왜놈들때문에 못사니 이 불효자식 갈길이 무엇인가는 아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어머님전상서에 올리고 23세 때인 1930년 3월 6일에 만주로 망명하이었다. 그의 책상에는“사내대장부로 집을 나가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丈夫出家生不還)”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휘호 한폭을 남겼다. 1930년 10월 18일 망명지 청도에서의 서신에는 “사람은 왜 사느냐?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더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라고 썼다. 이 처연한 글귀들에는 당시 나라와 민족을 위한 불같은 신념으로 항일운동에 나선 한 젊은 독립투사의 단호함과 비장함이 서려있다. 중국으로의 망명 도중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이나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만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해 단신으로 대련(大連)을 거쳐 청도(靑島)에 도착한 윤봉길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고 이곳에서 세탁소 회계원, 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취직하면서 돈을 벌어 야학과 농민운동으로 빌린 돈을 갚으라고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활동무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겨야 보다 큰일을 수행할수 있을것이라 믿고 그곳으로 갔다. 우선 상해 프랑스조계 하비로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浦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생계를 위하여 동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미리공사(美利公司)에 직공으로 종사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수업하는 한편 로동조합을 조직하여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1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일대는 복잡한 정세에 빠지게 되였다. 더욱이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중일 양군의 총소리를“민족과 민족이 부딪치는 소리”로 들은 윤봉길은 자신의 길을 찾은 듯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해 겨울 마랑로(馬浪路. 지금의 馬當路) 보경리 4호에 있는 림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백범 김구를 만나“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고 1932년 4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한인애국단은 임시정부의 행동단체였다. 김구가 직접 지휘하여 이미 이봉창, 류상근, 최흥식을 일본과 만주로 파견하여 큼직큼직한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1931년 9.18사건을 일으켜 이른바 만주사변을 도발한데 대한 임시정부의 대책이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는 리봉창을 적의 심장부에 파견하여 일본왕 히로히또(裕仁)를 폭살하는 한편 류상근과 최흥식은 만주 방면의 고관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만주의 한, 중련합군의 중요한 지원작전이였다. 이에 일본은 만주의 확보를 위하여 중국의 후방을 교란하고 한국독립운동의 거점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워 반격해왔다. 그것이 이른바 상해사변이고 윤봉길은 그 흉계를 다시 뒤집어 응징한 것이다. “제가 큰뜻(大志)을 품고 상해에 천신만고로 왔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다녔던 것입니다. 그럭저럭 중일전쟁도 중국에 굴욕적인 정전협정으로 결착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을 자리를 구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동경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고 찾아왔습니다. 지도해주시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라고 하는 윤봉길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보니 평시에 보아온 학식있고 착실한 청년로동자뿐이 아니라 정녕 살신성인의 대의(大義), 대지(大志)를 품은 의기남아였다고 백범 김구는 말했다. “뜻이 있으면 일도 이룬다(有志者事竟成)고 안심하시오. 내가 근일에 연구하는바가 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번민하던참이였소. 전쟁 중에 연구 실행코자 경영하던 일이 있으나 준비부족으로 실패했는데 지금 신문을 보니 왜놈이 전승한 위세를 업고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천왕의 천장절 경축례식을 성대히 거행하며 요무양위(耀武揚威)를 할 모양이요. 그러니 군은 일생 대목적을 이날에 달함이 어떠하오?” 하는 물음에 윤군은“저는 이제부터는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준비해주십시오.”라고 쾌히 승낙했다. 그는 한인애국단 단장인 김구 앞에서 혈서로 다음과 같은“선서문”을 써 이 사명을 수행할 것을 맹세하였다.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 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여 중국을 침략하는 敵의 장교를 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大韓民國 14년 4월 26일 선서인 尹奉吉 한인애국단 앞" 역사적인 순간인 4월 29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윤봉길은 말쑥한 일본식양복으로 갈아입고 날마다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 것을 살펴보며 그날 자기가 거사할 위치를 점검했다. 한편으로 시라가와(白川)대장의 사진을 구하고 태양기(일본기)를 사는 등등의 일로 매일 홍구에 내왕하면서 듣고 본 것을 김구에게 회보하였다. "오늘 홍구에 가서 식장설비를 구경하는데 시리가와 이놈도 왔습니다. 제가 그 놈의 곁에 섰을 때에 어떻게 내일까지 기다리는고, 오늘 폭탄을 가졌더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 쳐 죽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포수가 꿩을 쏠 때는 날게 하고 쏘아 떨어뜨리는 것이나 숲속에 자고 있는 사슴을 쏘지 않고 달리게 한 후에 사격하는 것 모두가 쾌미(快味)를 위함인것이요. 군은 내일 성공의 자신감이 박(薄)하여 그러는 거요?"라고 물으니"아닙니다. 그 놈이 내곁에 선것을 보았을 때 문뜩 그런 생각이 나더란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번에 성공할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군이 일전에 내 말을 듣고서 한 얘기 중에 이제는 가슴의 번민이 그치고 편안해진다는 것이 성공의 철증으로 믿고 있습니다. 내가 치하포에서 쓰지다를 죽이려 했을 때 가슴이 몹시 울렁거렸지만 고능선선생으로부터 들은 득수반지무족기(得樹攀枝無足奇),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란 구를 생각하니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군이 결심하고 일을 행하려는 것과 똑같은 이치요." 윤봉길은 김구의 말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낯빛을 가지는 것이였다. 4월 29일 새벽,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김해산 집에 갔다. 최후로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 윤봉길의 모양은 담담하고 태연하였다. 시계가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김구에게 주면서 그의 시계와 바꾸기를 청했다.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내주었다. 윤봉길은 식장으로 떠날 때 자동차를 타면서 소지한 돈을 꺼내 김구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약간의 돈을 갖고있는것이 무슨 방해가 되는가?" "아닙니다. 자동차 삯을 주고도 5, 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자 곧 자동차가 움직인다. 김구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이 차창으로 김구를 향해 머리를 숙일 때 자동차는 큰 소리를 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향했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4
  • 홍색 연안 시절의 조선민족 여성들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옛성이여 가는 곳마다 항적의 노래 울려 퍼지고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옛성이여 끓는 피 네 가슴에서 용솟음친다. ... ... ...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성벽은 철같은 항적의 전선 이루었나니 너의 그 이름 세월과 더불어 역사에 찬란히 길이 빛나리.“ 이는 우리 민족의 천재적 성악가이며 작곡가인 정율성(1918.7--1976.12)이 스무살 때 창작한 "연안송(가)"의 한 구절이다. 1938년부터 항일근거지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연안송(가)"! 장개석통치구의 수많은 열혈청년들과 학생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국민당의 봉쇄선을 목숨 걸고 뚫고 넘어 만난을 무릅쓰며 혁명의 성지-연안으로 찾아왔다. 그중에는 우리 조선민족의 열혈청년들도 있었다. 연안성에서 동쪽으로 연하강을 따라 10여리 걷느라면 쵸얼거우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과 연하강을 사이 둔 건너편엔 리가평이란 마을이 있었다. 바로 이곳에 조선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교양하는 조선혁명군정학교와 조선독립동맹이 있었다. 그때 그곳에 있은 조선 사람은 약 200여 명 되었는데 그중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그 여성들 중에서 명망이 높았던 이로는 허정숙(许贞淑)이였다. 허정숙은 당시 연안군정학교의 조직교육을 책임진 부과장이었다. 조선의 유명한 애국자 허현선생의 큰딸로 태어난 허정숙은 서울에서 소학과 중학을 마치고 일본에 가 대학문과를 공부하고 “동아일보”기자로도 활약하였고 후엔 잡지“신여성”을 편집하며 사회활동에 투신하였다. 1925년엔“서울여자청년동맹”을 조직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1927년 5월엔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각 종교단체와 통일전선조직-“근우회(槿友会)”를 창립하고 서울의 여자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각 여자학교의 학생시위를 지도한 것으로 하여 일제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2년만에 석방된 그녀는 다시 항일활동을 하다가 재차 체포되어 1936년에야 석방되었다. 출옥 후 허정숙은 최창익, 한빈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들은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청년들을 조직하여 선후로“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조선청년전지(战地)복무단”을 건립하였으며 활발한 항일 활동을 진행하다가 1939년 6월 연안으로 들어갔다. 연안에서 그녀는 항일군정대학을 다녔고 졸업 후에는 팔로군 120사에서 정치지도원 등 사업을 하다가 1944년 태항산조선혁명청년학교가 연안에 옮겨와 군정학교를 성립할 때 허정숙은 조직교육과 부과장으로 임명 되였고 직접 정치과목 강의도 맡아하였다. 그의 이론수양이 높은 강의는 언제나 생동하고 실제적이여서 학원생들의 환영을 받았다. 8.15 후 허정숙은 연안에서 나와 심양을 거쳐 조선(북한)에 귀국했으며 그 후 수차 조선당정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갔고 조선대표로 국제여성회의에 출석하기도 했다. 허정숙과 때를 전후하여 연안에 들어선 다른 한 여성으로는 난영(김영숙)이였다. 조선 함경북도의 한 지주집 딸로 태여 난 그는 망명한 연인을 따라 중국에 들어와 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는 일본어에 능숙하여 중경에 있을 때엔 일본어방송 아나운서까지 담당하였다. 후에 연안에 들어간 그녀는 태항산 129사에 배치되어 사업하였다. 당시 팔로군 115사가 산동성 양산에서 평형관 전투의 승리로 일본군을 포로하였는데 그중에는 일본동경대학출신인 고급군의가 있었다. 팔로군전선총사령부에서는 그 고급군의를 태항산에 호송하여 난영에게 교육임무를 주었다. 난영의 도움 밑에 그 고급군의는 “일본인반전동맹”의 중요한 간부로 성장하였다. 1941년 1월 무정이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창설할 때 난영이는 129사의 조선인 대표로 회의에 출석하였고 그 후 조선혁명청년학교와 독립동맹의 도서관관리원 겸 무정의 비서로 있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활약적인 난영이는 예술에서도 장끼를 보여주었다. 학교에서 신입생환영식이나 기념일 공연에는 그가 당연히 주역이 되었으며 김창만 편극으로 된 대형화극“조국의 딸”의 여주인공 역도 그녀가 맡았고 의용군이 화북에서 처음 겪은 호가장전투를 반영한 극“태항산우에서”의 여병 역도 그녀가 맡았다. 1944년 음력설 직전 난영(김영숙)은 조선독립동맹 조직부 조직과장으로 승진 되었고 8.15 후 조선(북한)에 귀국하여 무정과 결혼하였다. 6.25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북경대학 유학생으로 파견되여 전문적으로 중국과 조선의 문화교류와 역사를 연구하였다. 조명숙(赵英)은 현처양모형의 여인으로서 비행사 출신인 윤공흠(尹公钦)의 부인이다. 항전 전에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는데 1941년 조선청년연합회 창립활동에 참가하였고 그 후 줄곧 태항산에 있다가 1944년초에 연안에 들어가 독립동맹의 간부로 되었다. 8.15후에는 조선(북한)으로 귀국하여 어느 도의 당책임 일군으로 있었다. 이 외에도 연안에 들어가 항일전쟁에 참가한 조선민족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미인으로 불리던 석영(石英, 조직교육과 주춘길과장의 부인), 그리고 1938년 10월10일 한구(汉口)에서 조선의용대의 유일한 여성으로 참가했던 김위나(金威娜)는 중국 영화계의 황제로 불리우는 김염의 누이동생이였다. 그리고 독립동맹의 간부였던 최의(崔毅,연안군정학교 부교장이며 조선의용군 부사령원 겸 정치위원인 박일우의 부인)도 있었는데 8.15 후 연변에 왔다가 남편과 함께 조선(북한)으로 나갔다. 이 외에도 “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의 한 지도자인 한빈 동지의 부인 문정원(文贞元), 민족주의자 김두봉선생의 딸 김귀숙(金贵淑, 여성대대 부대장)과 김해엽(金海烨)이 있었고 태항산“3.1병원”에서 간호부사업을 하다가 조직의 파견을 받고 의과대학 공부까지 한 이화림 등 20여 명의 조선민족 여성들이 있었다. 일제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 단연 혁명의 길에 나선 겨레의 여성들, 그 가열처절한 전쟁의 년대에 그들은 남성들과 어께곁고 국경을 넘나들며 이국땅에서 청춘을 바쳤다. 그녀들의 장거는 청사에 길이길이 빛날 것이며 우리민족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류동호)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3
  • 중국 영화 100년 사상 절세의 미남배우 ㅡ 왕심강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 세기 70년대, 중국대륙에서는 영화관람은 아주 즐거운 일종의 향락이 아닐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국산영화나 수입영화가 많지 않던 그 시절, 그래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국산영화는 <정찰병>이었다. 특히 영화 중에서 해방군 정찰연장이 새햐얀 장갑을 낀 손으로 국민당군의 포구를 만지고는 국민당군 퇀장한테 “당신들은 포를 어떻게 정비했는가” 라고 훈시할 때 그 연장의 동작과 자태 그리고 그 어투 등은 상대방을 기죽게 말들었다. 그리고 그 정찰연장의 모습은 너무나도 멋졌다. 하다면 그 정찰연장 역을 맡은 배우가 바로 이 글의 주인공 왕심강(王心刚)이었다. 영화가 많지 않던 그 시절, 많은 영화애호자들은 몇 번이고 이 영화를 보았다고 한다. 특히 어떤 처녀애들은 순 왕심강의 멋진 모습을 보기 위해 이 영화를 7-8번이나 보았다고 하는데… 우리는 미녀들에 한해서는 절세의 미녀라는 말을 잘 붙이지만 남자에 한해서는 <절세의 영웅>이란 말은 잘 붙여도 <절세의 미남>이란 말을 잘 안 붙인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 전례를 깨뜨리고 영화 <정찰병>의 주인공역을 맡은 배우 왕심강을 두고 <절세의 미남>이라고 부르기로 해본다. 사람은 아무리 잘 생긴 사람이라 해도 성격이 조폭스럽고 품행이 저질이며 허풍이나 친다면 남한테 잘 보일 리가 없다. 잘 생긴 얼굴에 똥칠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왕심강은 그런 유형에 속하는 남성이 아니었다. 왕심강은 실력파 배우였고 거기의 남성적 매력의 <최고 소유자>였지만 매우 겸손했고 정직했으며 또한 매우 내성적이기도 했다. 1932년 1월 1일, 요녕성 대련 출생인 왕심강은 1956년 스릴방첩영화 <고요한 삼림>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입문, 그 뒤로 <바다의 매(海鹰)>, <홍색낭자군(红色娘子军)>, <옛성에 휘몰아치는 불길(野火春风斗古城)>, <비밀설계도(秘密图纸)>, <남해장성(南海长城)>, <열화 속에서 영생하리라(烈火中永生)>, <정찰병(侦察兵)>, <지음(知音)> 등 수십 부에 달하는 영화에 육속 출연하면서 중견 남성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굳게 다졌으며 중국 영화계의 정상에 우뚝 서기도 했다. 특히 그가 출연한 영화 중 1961년에 촬영한 <홍색낭자군>, 1974년에 촬영한 <정찰병>과 1982년에 촬영한 <지음>은 출중한 인물매력과 성숙된 연기력으로 거의 모든 영화관객들을 매료시키면서 왕심강은 번번히 영화계의 <만인 탐닉 스타(万人迷)>로 되군 했다. ▲ 왕심강이 출연한 영화<정찰병>의 한 장면ⓒ스타자료집 다음 1959년에 촬영된 영화 <바다의 매>에는 왕심강이 무개로 된 찦차에 왕효당(王晓棠)을 앉히고 빗바람 속을 달리는 장면이 있었다. 아주 멋지고 왕심강의 용감성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당시로 말하면 꿈많은 중국의 많은 소녀들을 설레이게 했다고 한다. 그 뒤 왕심강과 왕효당은 <옛성에 휘몰아치는 불길>을 포함한 몇 부의 영화에서 각각 남녀 주인공을 맡게 되었고 모두 성공적이어서 당시 중국인들한테서는 <남자는 왕심강, 여자는 왕효당>이라는 말이 유행될 정도였었다. 왕심강이 많은 영화에서 성공적으로 인물부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의 각고한 노력도 많은 분량을 점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문화혁명> 후기, 중국에서는 영화 <남해장성(南海长城)>을 다시 촬영하게 되었고 왕심강은 영화의 주인공 구영재(区英才)의 역을 다시 맡게 되었다. 헌데 당시 왕심강은 40살을 훌쩍 넘긴 중년이었고 체중도 많이 나갔으나 그가 맡게 될 주인공은 30살도 안되는 건강하고 용감한 젊은이었다. 이러자 왕심강은 식사량을 엄격히 통제하면서 아령, 평행봉 등 운동을 열심히 하였으며 2개월 후 20대의 날쌘 젊은이처럼 영화촬영에 돌입할 수 있었다. 그 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왕심강은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영화배우는 일종 특수한 직업으로서 스크린(银幕)을 통해 그 형상은 수천만의 관중들에게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때문에 영화배우는 반드시 관중한테 책임져야 하고 영화사업에 지출한 나라의 투자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직위의 높고 낮음과 인격의 여하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왕심강 역시 사업에서의 아쉬움과 개인생활에서의 좌절과 고충들이 적지 않았다. 1961년 그가 출연한 영화 <홍색낭자군>에는 워낙 홍상청과 오청화 사이에는 혁명적인 우정으로부터 애정으로 승화되는 장면들이 있었다. 헌데 후에 이 영화를 최종 심의할 때 이런 애정표현 장면들은 모조리 삭제되었다. 영화제작에 있어서 최종 심의 때 장면의 삭제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더군다나 당시 지난 세기 60연대 초기, <계급투쟁>과 <자본주의 생활의 꼬리>를 자르던 시기엔 애정표현이 나타나는 장면이 삭제되는 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의 효과 면에서 그것이 아쉬웠다. 오청화와 애정 관계였던 홍상청이 나중에 적들에게 체포되어 화형을 당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면 그 결과가 안타까워 관중을 더 울리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런 장면 또한 개혁개방의 오늘에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는, 결코 문제로 될 것이 한 장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65년에 촬영한 <열화 속에서 영생하리라>에서 왕심강은 원래 허운봉, 강설금, 성강 이 3대 주역 중 성강(成岗)의 역을 맡게 되었다. 헌데 <3가지 돌출>을 내세우던 그 시기, 허운봉과 강설금을 돌출하게 내세우기 위해 씨나리오를 수개하면서 성강의 전부의 장면은 삭제되었으며 왕심강은 보조역인 유사양(刘思扬)의 역을 맡았었다. 헌데 최종 심의결과 허운봉역을 맡은 조단(赵丹)보다 유사양의 역을 맡은 왕심강한테 시선이 더 집중된다는데서 영화에는 유사양마저 사라졌다. 큰 유감이었다. 어찌보면 왕심강의 출중한 인물과 뛰어난 연기력이 이런 경우에는 더 <장애>가 되었다. ▲왕심강과 그의 아내 왕소채ⓒ스타자료집 한편 왕심강은 자신의 애정에 아주 충실한 사나이었다. 왕심강의 아내 왕소채(杨绍采)는 워낙 중국인민해방군 제38군 문공단의 단원으로 1961년 영화 <오강천험을 돌파(突破乌江)>에서 홍군 위생원역을 맡았던 배우기도 했다. 왕심강과 결혼한 후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녀는 왕심강의 뒤심으로 되어주기 위해 주동적으로 자신의 문예활동권에서 퇴출하여 가정의 현모양처로 되어주었다. 이에 왕심강이 아내한테 감동을 받은 것은 두말을 할 것도 없었다. 그러던 아내 왕소채가 문화혁명 중 홍위병들의 물리적 운동에서 강렬한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진단결과 정신분열증이었다. 그러자 왕심강이 받은 충격 역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심강은 아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더욱 극심히 보살폈고 외부로부터 오는 갖은 유혹들을 물리치면서 아내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묵묵히 가정의 중임을 떠메고 도처에 수소문하면서 용하다는 명의를 찾아 다니며 아내를 치료해 주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위에도 꽃이 핀다>고 이렇듯 왕심강이 보살펴 준 결과 왕소채는 점차 정신분열 상태에서 원래의 정신상태로 되돌아왔고 건강을 회복하였다. 이 글의 앞머리에서도 언급하다싶이 아주 영준하고도 <귀공자>티가 나는 왕심강이었지만 그는 아주 소박하고도 겸손한 영화예술일꾼이었다. 왕심강은 군대 내의 문관직 일꾼이었다. 그의 어깨에 달린 계급장은 소장급이었지만 실제로 그가 받는 대우는 부군장급 대우였다. 하지만 왕심강은 관료행세를 하는 것이 아주 <체질>과 성격에 맞지 않은 모양 새였다. <문화혁명> 후기에 왕심강은 상급의 지령에 의해 8.1영화촬영소의 업무 부소장으로 진급, 주택도 촬영소의 집단숙소에서 나와 북경 백광로 1번지(北京白广路一号)에 있는 고급군관 주택구로 옮기게 됐고 전문 개인용 차량도 있게 됐다. 하지만 그는 자기한테 차례진 차량에 앉아 다닐 때가 아주 드물었다. 회의에 참가할 때를 제외하고 그는 늘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였으며 촬영소의 일반 직원들과도 아주 잘 어울렸다. 그래서일까? 그의 오랜 이웃인 영화배우 리파(坡都)마저 “왕심강은 관료로 될 스찔이 아니다” 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혹시 기자들이 찾아와 왕심강의 성공담을 취재하면 늘 “기실 나는 영화라는 무대를 통해 그 <빛>을 빌었을 뿐이고 바로 그 <빛>으로 인해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다”라며 겸손하게 나오군 했었다. … 노년기에 들어서자 왕심강한테서는 당년의 <영준군인> 및 <백마왕자>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고 머리에 백발이 무성해진 왕심강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생활과 인생에 충실했다. 그는 몸이 허약한 아내 왕소채를 돌보는 한편 멀리 미국에서 생활하는 자식한테도 자주 다녀오기도 한다. 이렇게 중국과 미국 사이를 오가다가도 가끔씩 손자와 나란히 앉아 담소하는 것을 일종 향수로 여기고 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08
  • [특별기획] 장백산하 해란강반에 울려 퍼지는 '탈빈공략'의 새노래
    편집자의 말: 6월 3일, 중국 관영 매체인 신화통신은 탐방기 <장백산하의 새 노래 편 ㅡ 길림성 연변주 탈빈공략 관찰(长白山下唱新篇——吉林延边州脱贫攻坚观察)>를 큰 편폭으로 할애하여 실었다. 연변 조선족의 <탈빈공략> - 이는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프로젝트였지만 잘 안되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우선 환경적으로 그닥 부유하지 못한 북한이나 러시아와 인접되어 있다. 이런 나라들과의 무역에서는 상품가치 등가교환에서만 이익을 볼 뿐이지 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상 조선족에 한해서만은 큰 중시를 돌리지 않는다고 해도 큰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족이 <당의 말>을 너무나도 잘 들으니 말이다. 그제 날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시기에는 그 어느 민족에 비해도 공산당을 위해 목숨을 잘 바치는 민족이 조선족이었고 신 중국이 탄생한 후에도 <대약진>, <인민공사> 등 당의 총 노선을 가장 잘 관철한 민족이 조선족이었으며 <문화혁명> 시기에는 또 <계급투쟁>에 제일 앞장선 민족도 우리 조선족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나라에 공량을 바칠 때에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그 임무를 초과 완성했었고 나라에서 <계획생육정책>을 제정하자 어느 여성이 임신했다고 하면 쫓아다니면서까지 낙태시키군 하던 우리 조선족이었다. 그래서 아주 영예롭게도 연변주는 거의 해마다 전국의 <모범자치주>로 되기도 했다. 그럼 아주 잘 살았는가? 글쎄다. 굶어죽었다는 사람이 없었으니 <번영하는 우리 연변>, <살기 좋은 조국 변강>이란 어구들이 기사를 통해, 노래를 통해 많이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당의 말>을 너무나도 잘 들으니 나라에서 특별히 달래줄 필요도 없었을 것임은 불 보듯 번연했다. 연변에 대한 보도기사ㅡ 이전에 우린 그걸 잘 믿지를 아니했다. 수분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아무깨 기자가 뭘 좀 받아먹고 허풍을 떨었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간은 보도기사를 믿어서가 아니라 연변 농촌 사람들의 말에서 이전에 비해 확실히 좋아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농촌의 주택건설이며 도로건설이며가 확실히 잘 되어있고 국가에서 연변농촌에도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나마 기쁘고 좋은 일이며 앞으로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현재 연변 조선족들한테는 산재되어 있는 문제들이 많다.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문제, 이로 인한 학교들의 폐교되는 문제, 노총각들이 장가가지 못하는 문제와 조선족들이 개변해야 될 음주문화 문제 등으로 수두룩하다. 단꺼번에 다 해결할 사항들도 아니다. 그럼 오늘 신화통신의 탐방기를 실으면서 연변의 애로사항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더 좋은 앞날이 다가오기를 기대한다. ▲화룡시 <진달래> 민속촌 전경ⓒ신화통신 아래의 글은 신화통신의 탐방기 <장백산하 새 노래편 ㅡ 길림성 연변주 탈빈공략 관찰>이다. 봄 파종철이 지나자 장백산하 해란강반에는 나뭇잎들이 푸르고 꽃들이 만개하면서 생기로 차 넘친다. 50여년 전, 연변에서 태어난 노래 <붉은 해 변강을 비추네(红太阳照边疆)>는 전국인민들로 하여금 변강건설에 뛰어든 연변의 각민족 아들딸들의 앙양된 투지에서 감동을 받게 했다. 당의 18차 대표대회 이래 이곳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각민족 인민들은 지속적으로 분투하여 오늘날 모든 <빈곤현(贫困县)>들이 <빈곤모자>를 벗어던졌다. 전통 맛 여전하나 삶의 나날 날로 풍족해져 화룡시 동성진 동광촌은 포장이 된 마을길과 집집마다의 울안이 매우 깨끗했다. 조선족촌 박춘자 여성은 주방에서 작으마한 밥상을 들고 나왔다. 상위에는 배추김치, 된장과 소고기, 명태 등이 깨끗한 접시에 담겨져 있었다. "우리의 생활은 아직도 된장을 떠날 수 없어요. 하지만 삶의 나날은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죠. 모든 것이 날로 풍족해지고 있는거죠." 박춘자 여성의 기억에 따르면 연변 조선족의 노동과 생활은 많은 변천을 겪어 왔다. 그것은 현재 연변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에서도 보아낼 수 있다. 가대기에 소를 메워 밭갈이를 하고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모내기를 하고 또한 낫을 들고 벼 가을을 하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야말로 이 땅에 첫 보습 날을 박던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삶의 희노애락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진달래 민속촌에서 촌민들이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장면ⓒ신화통신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인구는 214만명, 이 중 조선족은 36.3%를 차지하며 길림성 2대 특별 빈곤지구 중 하나였다. 연변의 8개 현,시 중 4개가 국가 부축 빈곤현이었으며 2012년 말에는 빈곤 발생율이 29%에 달하였다. 연변의 변화는 빈곤부축사업의 항목의 겨냥조치로부터 추진되었다. 왕청현 조원 소목이산업원(桃源小木耳产业园)의 넓고 밝은 직장 내에 들어서면 로봇이 물건을 나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왕청현은 장백산 임구에 위치해 있어 역사적으로 <흑목이버섯 천담현(黑木耳千担县)>이란 명칭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날에는 주로 수 작업식 생산으로 이뤄졌기에 생산량이 적고 질 보장이 잘 되지 않았기에 훌륭한 자원으로 훌륭한 수입을 바꾸어 오지 못하였다. 최근년래 왕청현에서는 종식표준화 시범기지(种植标准化示范基地)를 하나하나씩 건립, 도합 45개의 기지로 점차 국내 흑목이버섯 고가시장으로 만들었으며 목이버섯을 상품화하여 북경, 상해와 광주에까지 판매, 촌민들의 연 평균 수입이 3000-4000위안씩 증가되게 하였다. 이 외 용정시 동성용진 용성촌에서는 당지 용두기업으로부터 빈곤부축항목의 혜택으로 촌민 유경의가 사육하는 연변황소 고기가 호텔에 납품, 황소고기 매 킬로그램 당 150위안에 달했고 안도현 합신향에서는 <삼림황금>으로 불리는 상황버섯이 온도가 맞춤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 상황버섯은 킬로그램당 600위안 내지 700위안으로 그 비닐하우스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용정시 삼합진 천불지산(天佛指山)은 해마다 송이 따는 계절만 되면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많은 상인들이 찾아와 값은 크게 따지지 않고 적극 주문하고 있단다… ▲화룡시 남평진 유동촌의 조선족 주택들ⓒ신화통신 다시 화룡시 동성진 동광촌의 박춘자 여성한테로 돌아온다. 충분한 해빛을 받아 이슬 머금고 자라는 농가원의 야채들, 박춘자 여성은 문턱에 앉아 마당 내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매 한포기의 야채를 바라보면서 손가락 꼽으며 뭔가를 계산하고 있는 듯 했다. 50여년 간 노래소리 울리고 호매한 발걸음은 계속돼 연변 시인 한윤호가 노랫말을 만들고 연변적 작곡가 김봉호가 선율을 만든 <붉은해 변강을 비추네>란 노래는 50여 년간 불리워 왔다. 그리고 이 노래속의 <강물을 끌어올려 산에 올리네>란 놀라운 일은 오늘날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에서 현실로 되고 있었다. 당년에 이곳의 촌민들은 <사이펀(倒虹吸)> 원리를 이용하여 두만강의 물을 60미터 높이에 있는 산위에 끌어올려 그 곳을 비옥한 논으로 되게 했다. 상천촌 당지부서기 박동섭에 따르면 지금 상천촌의 입쌀은 브랜드로 되어 높은 가격으로 내지에 팔리고 있다. 하지만 이 촌에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자상거래, 된장 가공과 향촌관광업의 발전을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문시 석현진 합흠 농민전업 합작사 농민들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작업하는 장면ⓒ신화통신 화룡시 남평진 유동촌에 가보면 85후의 청년 김호가 대졸 후 주동적으로 귀농, 촌민들을 이끌고 오미자 재배, 민속관광지 건설 등을 추진, 촌민들을 위해 농구장과 게이트볼 경기장(门球场)을 앉혔으며 집집마다 수세식 변기를 갖춘 화장실을 갖추게 했고 노인들로 하여금 매일 점심 때마다 노인들한테 영양식을 무료로 제공하군 했다. 그리고 왕청현 천교령진 천평촌에서는 뭔가를 해야겠다고 작심한 촌 당지부서기 윤학의는 자기의 아내를 촌으로 <초대>했다. 부부가 손잡고 탈빈 목표를 이룩하자는 심산이었다… 변강의 한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지만 연변의 빈곤탈퇴 사업은 고군작전이 아니었다. 2016년 10월, 절강성의 녕파와 연변은 동서부 빈곤부축 협력을 갖기로 하고 22개 기업이 육속 연변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논공유(共享稻田)>란 명목으로 빈곤부축 항목을 제정, 연속 2년간 화룡시 1.4만 뙈기의 논에서 생산된 입쌀을 도맡아 인수하는 것으로 2000여명 빈곤인구의 수입증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2019년 4월, 연변의 화룡시, 용정시와 도문시가 <빈곤모자>를 벗었고 올 4월에는 안도현과 왕청현이 <빈곤모자>를 벗으면서 연변의 모든 시현들이 빈곤탈퇴에 성공, 2016년 이래 전 주적으로 304개의 빈곤촌이 <빈곤행열>에서 나왔고 2.9만호, 4.9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빈곤에서 벗어나면서 연변의 각민족 인민들은 새로운 출발을 할 기점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남평진 유동촌 촌민이 집에서 벽에 장식품을 걸어놓는 장면ⓒ신화통신 피어난 꽃 특별히 붉고 <실크로드(丝路)> 천하로 통한다 빙설중에도 꽃은 피어나고 산비탈의 진달래는 더더욱 아름다워라. 이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조선족 인민들의 무한한 추구를 뜻한다. 용-포 고속도로(용정으로부터 돈화시 대포자하진에 이르는 고속도로)의 한 중간 대교 아래에는 백년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족 마을 ㅡ <진달래> 민속촌이 있다. 현재 이 마을은 <연변속의 민속촌>보다는 <중국속의 민속촌>으로 더욱 통한다. 이 마을에서는 떡볶이, 냉면과 장고춤, 가야금 등 조선족 특색 관광상품으로 지난해만 해도 국내외 관광객 40여만 명을 유치했다. 이 마을의 촌민 이월순 여성은 원래의 주택을 개조해 민박을 차렸는데 이로부터 나오는 수입은 그야말로 쏠쏠했다. “반평생 농사만 해오다가 오늘 와서 사장님(老板)으로 불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죠.”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 촌민이 밭에서 트랙터로 작업하고 있는 장면ⓒ신화통신 화룡시에는 일명 <진달래실크로드(金达莱丝路)>란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있으며 실체의 가게에는 상황버섯, 꿀, 목이버섯 등을 진열, 모두 조선족 특색의 <포장>을 하였다. 예하면 입쌀은 월병처럼 조선족 특색의 선물세트로 포장했고 쿠션(抱枕), 벼짚 수공업품 등에도 조선족 특색의 글발이 아주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 이는 북경에서 온 어느 한 작은 젊은 지원팀에서 모색해 낸 아이디어로 이들은 당지의 빈곤부축 특산으로 조선족 특색의 브랜드를 창출, 전자거래의 플랫폼을 통해 전국에 판매했다. 이렇게 하찮고 고생스럽게만 보이던 것이 빈곤부축의 아름다운 산업과 창업의 낙원으로 되었던 것이다. 연변에는 <진달래 실크로드>만 있은 것이 아니었다. 지난 5월 15일, 220개의 컨터이너에 옥수수를 실은 <바다실크로드 1호>가 청도항에 입항했다. 이는 <훈춘-자르비노(러시아)-청도> 항선의 첫 항행으로 <훈춘-자르비노-주산> 항선이 개통된 후에 있은 또 한 갈래의 국내 무역화물이 국경을 벗어나 운송하는 항선이었다. <항구를 빌어 바다로 나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일찍 개방발전의 <제한적 구역>에 있던 연변으로 놓고 볼 때 이는 대해로 향하는 새로운 발걸음임에 틀림없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05
  • 中 장장 1세기에 거친 ‘항공모함의 꿈’ 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1년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건조대에서 출해, 성공적으로항행 시험 진행했다. 2012년 9월 25일, <요녕 함(辽宁舰)>으로 명명된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정식으로 해군에 교부, 항공모함이 없는 중국해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2017년 12월 17일, 중앙군위의 비준을 거쳐 중국의 첫 국산항공모함이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산동함(山东舰)>으로 명명, 해남성 삼아(三亚)에 있는 모 군항에서 해군에 교부되었으며 자국산 항공모함이 없던 역사에 커다란 종지부를 찍었다. 중국에 있어서 항공모함의 꿈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1928년부터 항공모함의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으니 거의 1세기 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산둥함.ⓒ인터넷 중국은 1985년부터 퇴역한 항공모함에 대해 학습하고 연구하기 시작, 항공모함의 설계에 대해 어느 정도 계시를 받았다. 1987년 3월, 당시 해군 사령원으로 갓 부임된 유화청 상장은 군위 지도일꾼들한테 해군 장비규획을 회보할 때 두 가지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즉 항공모함과 핵잠수함으로 장원한 관점으로 볼 때 이는 국방건설에 있어서 유리하며 반드시 보유해야 할 장비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 지난 세기 90연대 초 소련이 해체되면서 국제 정세에는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이와 더불어 우크라이나에서 건조되면서 이미 70%가 완성되었던 <바랴그(Varyag)>호 항공모함 건조작업도 중단되었다. 그리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재산분할시 <바랴그>호 미 완공 항공모함은 인적 및 지리적 원인으로 우크라이나의 소유로 되었다. 헌데 당시 우크라이나의 경제사정으로 <바랴그>호를 계속 건조할 여력이 없었으며 1992년 1월 작업이 중단되면서 중도폐철로 될 가능성이 컸다. 1993년 당시의 러시아 총리 체르노멜킨과 러시아 해군 사령 그루모프가 우크라이나 총리 쿠치마의 안내 하에 흑해의 조선소를 찾아와 <바랴그>호의 건조를 마무리할 것에 대해, <바랴그>호를 다시 러시아에 넘길 가능성 등을 두고 연구와 협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양 측은 적절한 절충안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그냥 굳바이 하고 말았다. 그 뒤 1995년 이미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된 쿠치마는 <바랴그>호의 운명을 흑해 조선소에 넘겨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차 1995년 12월 쿠치마는 중국 북경을 방문하게 되었고 방문기간 양측은 우크라이나의 미 완성 항공모함 <바랴그>호를 중국조선소에 넘겨줄 의안을 두고 담판을 진행했다. 1997년 홍콩 주재 대륙 자본기구 창율그룹(创律集团) 총재 조리이며 홍콩 중문대학 졸업생인 요백량(姚柏良) 등이 우크라이나로 향발해 우크라이나 측과 <바랴그>호를 구입할 데 관해 협상하게 되었다. 1998년 4월, 마카오 창율 관광오락 회사(Agencia Turisticae Diversoes Chong LotLimitada-홍콩 창율그룹의 계열회사)가 입찰을 통해 2000만 달러(실제 도합 1억 달러 투입)의 대가로 <바랴그>호를 구입, 명목은 <바랴그>로 하여금 대형 해상종합 관광시설로 개조한다는 것이었으며 거기에는 디스코 청, 여관과 도박장 등 시설을 앉히기로 했다. 홍콩 창율그룹에서는 <바랴그>호 인수임무를 당시 홍콩의 유명상인이었던 서증평(徐增平1952년 생)한테 맡겼다. 서증평은 일종 도박에 가까운 큰 결심을 내렸다. 1998년 1월 27일, 서증평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도착한 후 다시 니콜라이 흑해 조선소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조선소에 도착한 서증평은 조선소 책임자의 안내 하에 <바랴그> 호에 올라 함선 전체를 고찰하였다. 당시의 <바랴그>호는 참신하고도 완전한 함체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주 정밀한 결구의 구조는 서증평으로 하여금 이 항공모함에 대한 인수의욕이 더욱 솟구치게 했다. 1999년 7월 홍콩 창율 회사에서는 견인선과 예인선(拖船)을 임대하여 <바랴그>를 밀어갖고 중국으로 가기로 하였다. 헌데 배가 니콜라이 조선소를 떠나자 국외의 일부 세력들이 저애하기 시작, <바랴그>호는 다시 흑해로 돌아왔고 한동안 조선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출항할 수 없었다… 2001년에 이르러 <바랴그>호는 중국 외교부의 각고한 노력으로 중국으로 올 수 있는 일루의 희망이 보이었다. 그 해 8월 25일, 터키 국가안전위원회는 마침내 <바랴그>호가 터키 해협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중국으로 오는 뱃길은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바랴그>호는 자체 동력이 아닌 다른 견인선과 예인선에 의해 움직이었기에 애로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항해 과정 <바랴그>호와 기타 견인선과 예인선을 이은 로프(缆绳)가 끊어지는 일이 자주 생겼고 해상 폭풍을 만나는 등 일련의 좌절을 겪으면서 항행을 계속했다. 2001년 12월 11일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에돌아 인도양에 들어섰고 2002년 2월 5일에는 말라카 해협을 통과했으며 2월 12일에는 드디어 남 중국해로 들어섰다… …… 2002년 3월 3일, 천신만고 끝에 <바랴그>호는 마침내 중국의 항구도시 – 대련에 도착했다. 아침 5시경, <바랴그>호는 6척의 견인선과 예인선에 의해 대련 외항을 떠나 서서히 내항으로 들어왔고 오전 9시경 내항에 도착했으며 12시경 안전하게 대련 내항의 서구 4호 산적화물 부두에 정박, 약 4개월(123일)에 거쳐 장장 1만 5200마일을 마라톤식 항행해온 셈이었다. 6 위에서 언급했지만 새 중국의 항공모함 건조에 대한 도전은 1985년부터 본격 개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도전은 맹목적인 것이 절대 아니었다. 적어도 1950연대의 <위성>을 쏴 올리고 5년에 영국을 능가하고 10년에 미국을 따라잡는다고 허풍을 치던 때와는 근본 달랐다. 간절했지만 조급해 하지 않았고 욕심도 컸지만 과학적이고도 현실적이었다. 중국은 퇴역했거나 퇴역을 앞둔 항공모함을 구매해서는 그것을 모체로 삼아 학습하고 연구했으며 그 기초 상 자체 개발에 모를 박았다. 한 발자국씩 국산 항공모함을 건조 생산하는 길을 더듬었던 것이다. 그 퇴역한 항공모함들로는 다음과 같다. <키예프(KievAircraftcarrier)>호 - <킹예프>호는 구소련의 항공모함으로 1970년에 건조, 이 항공모함은 비록 그 어떤 전역에도 참가해 보지 못했지만 복역기간 인도와 북한, 알제리 등 나라를 방문하였고 구소련의 <수정의 이상(水晶理想)>, <국가 명함장>으로 불렸으며 구소련 해군의 상징이기도 했다. 2008년 8월, 이 항공모함이 경매에 붙여지자 미국, 중국과 인도 등 9개의 매입신청 국가 중 중국이 입찰에 성공했다. 그 뒤 <키예프>호는 중국의 산해관 선박공업 유한회사로 인도되어 원상복구가 되었고 군사잔해로부터 평화 및 생태의 상징으로 되었으며 현재 천진 국제 여행낙원 항에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면서 많은 관광객들을 끌고 있다. <민스크(Minsk)>호- 이 항공모함은 구소련 니콜라예프 조선소에서 건조, <키예프>호와 동급의 중형 항공모함으로 배수량이 4만 2000톤에 달하며 항공모함 및 순양함 2가지 기능을 모두 갖고 있었다. 이 항공모함은 12월 28일부터 건조하기 시작해 1975년 9월 30일 진수했으며 1978년 9월 27일 완공되었다. 소속은 구소련 태평양 함대였다. 이 항공모함은 1999년 8월 중국에 매각, 광주 문충 조선소에 인양되어 대규모 봉폐식 수리와 개조를 거쳐 2000년 5월 심천 대붕만 주제공원에 정박되어 관광객들의 참관용으로 되었다. <멜버른(mélbərn)> 호 – 이 항공모함은 원래 영국에서 건조한 <준엄>급 항공모함으로 1949년 1월 오스트레일리아에 매각되었으나 1956년 3월 5일에야 비로서 영국의 포츠머스 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향발했으며 이 해 5월 14일 오스트레일리아 함대의 사령관이 승선한 기함(旗舰)으로 명명되었다. 이 항공모함은 1969년 6월 3일, 미국 해군 <프랭크 E. 에반스(DD-754)>호와 충돌했고 1982년 1월 30일 퇴역하였다. 1984년 <멜버른>호 항공모함은 전부의 설비가 몽땅 철거되어 말 그대로 <빈껍데기>만 남았으며 1985년 고물로 되어 중국의 한 <금속 폐물 상>한테 팔렸다. 중국에 매입된 후 이 항공모함은 남해의 한 군사기지에서 부분적으로 분해 개조되었다. 이 중 승강장, 증기 이젝터(蒸汽弹射器)와 주 비행 갑판은 그대로 보류되었으며 중국은 이를 이용하여 준항공모함 함재 항공병 시험을 하군 하였다. … 이상에서 언급하다 싶이 중국은 <키예프>호, <민스크>와 <멜버른>호 등 이미 퇴역하였거나 퇴역을 앞둔 항공모함들을 매입하면서 두 가지로 활용하였다. 하나는 그 기본구조와 내부 시설 등에 대해 학습하고 연구하였으며 또한 군사연습용으로도 활용하였다. 둘째는 이런 항공모함을 최종 민간에 개방하여 관광용으로 되게 하기도 했다. 중국의 이런 과정은 결국 중국도 작전에 투입될 수 있는 항공모함을 갖추기 위해서였고 더우기는 최종 자국산 항공모함을 건조하기 위해서였다. 그 첫 보조로 중국의 첫 항공모함의 플랫폼은 바로 우크라이나에서 매입한 <바랴그>호였다. 배수량이 6만 7000톤이고 총 길이가 306미터에 달하는 이 항공모함은 2005년부터 대련 조선소에서 개조를 개시, 2011년 8월 진수에 성공했으며 몇 차례의 시험항행 후 2012년 9월 25일에 <요녕함>으로 명명되어 해방군 해군에 교부되었다. 다음 중국의 첫 자국산 항공모함의 건조는 비교적 순탄대로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몇 척의 낡은 항공모함의 구조와 성능에 대해 많이 장악하고 또한 <바랴그>호를 성공적으로 개조한 경험이 누적되었으며 자국산 항공모함을 기어코 자체의 기술과 힘으로 건조한다는 수많은 과학자들과 근로자들의 신념이 그 건조를 앞당기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과 2013년에 착공한 첫 자국산 항공모함의 건조는 5년 미만 시일의 작업을 거쳐 2017년 4월 26일 진수에 성공했으며 2019년 12월 17일, 습근평 등 중앙 지도일꾼들이 참가한 가운데 <산동함(山东舰)>으로 명명되어 해군에 교부되었다. 장장 1세기의 파란만장한 풍운을 거쳐 중국 <항공모함의 꿈>은 실현되었고 중국 해군의 항공모함의 시대가 열렸다. 그것은 그 어떤 해상 강대국과도 힘겨루기를 할 수 있다는 뜻을 의미한다. 그 상대가 항공모함 11척을 보유한 미국과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항공모함 규모에서 미국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중국 해안에서의 항공모함 해전에서는 대등한 실력을 과시할 수가 있으며 또한 중국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 본토를 칠 실력도 안 되거니와 그럴 뜻도 없기 때문이다.
    • 뉴스홈
    2020-05-23
  • 中 장장 1세기에 거친 ‘항공모함의 꿈’ 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1년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건조대에서 출해, 성공적으로항행 시험 진행했다. 2012년 9월 25일, <요녕 함(辽宁舰)>으로 명명된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정식으로 해군에 교부, 항공모함이 없는 중국해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2017년 12월 17일, 중앙군위의 비준을 거쳐 중국의 첫 국산항공모함이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산동함(山东舰)>으로 명명, 해남성 삼아(三亚)에 있는 모 군항에서 해군에 교부되었으며 자국산 항공모함이 없던 역사에 커다란 종지부를 찍었다. 중국에 있어서 항공모함의 꿈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1928년부터 항공모함의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으니 거의 1세기 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요녕함.ⓒ인터넷 3 항일 전쟁이 승리하자 진소관은 웅심 가득히 항공모함의 건조에 투신할 준비를 하였다. 헌데 그 시각, 중국의 대지에는 국공내전의 어두운 구름이 두껍게 내리 드리워졌다. 그 시기 장개석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떻게 하면 공산당을 숙청하고 나라 전체를 자기의 손아귀에 넣는가 하는 것뿐이었으며 해군건설 같은 건 완전히 머릿속에서 포기한 상태였다. 1946년 6월, 장개석 군대가 모택동이 영도하고 있는 공산당의 해방구로 진공을 개시함에 따라 중국에서는 전면적인 국공내전이 발발했고 국민당 해군 역시 그 내전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전 초기 국민당은 이른바 전국의 각 전장에서 <승승장구>했다. 이러자 내전을 우려했던 진소관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속타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국민당이 승리하여 전국이 일원화의 계획 권에 들면 항공모함의 건조도 더욱 순리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대세는 장개석과 진소관이 바라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이 됐다. 공산당의 유백승과 등소평이 이끄는 유-등 대군이 대별산으로 진군함에 따라 장개석은 해방구에 대한 전면 진공을 중점진공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임표의 동북인민해방군이 요심 전역에서 대승하여 전반 동북을 적색화시키자 진소관은 이른바 장개석에 대한 환상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요심전역에 이은 회해 전역과 평진 전역에서도 국민당 군이 괴멸에 가깝도록 얻어터지자 진소관은 자기의 <항공모함의 꿈>을 기본상 포기하였다. 1949년 11월, 대륙에서 패한 국민당 군을 따라 대만으로 떠나는 진소관은 일종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환멸에 싸여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여태껏 충성을 다하며 장개석을 믿고 따랐던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고통이었다. 이것으로 진소관과 국민당의 <항공모함의 꿈>은 국민당 군의 전면 패전으로 한 단락 막을 내렸다. … 4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 공화국이 창립된 후 얼마 안 되어 모택동은 높이 서서 멀리 보는 안광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반드시 조선공업을 크게 벌여 대량의 선박을 건조해야 하며 ‘해상철길’도 구축하여 강대한 해상 전투역량을 건설해야 한다.” 모택동의 이 말에서 당시의 정무총리 주은래는 인차 항공모함을 머릿속에 떠올렸다고 한다. 1973년 10월 25일, 외국손님을 회견할 때 주은래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었다. “우리 중국의 남사군도와 서사군도가 남부 베트남이 점령하고 있다. 우리한테 항공모함이 없으니 우리의 해군들이 더 이상 총칼을 갖고 결사전을 벌일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한평생 군사와 정치를 해왔으나 오늘까지도 우리 중국의 항공모함을 보지 못했다. 중국산 항공모함을 볼 수 없다는 건 그야말로 평생의 유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 장시기 이래 중국해군 역대의 지도군인들은 자국산 항공모함의 발전을 두고 크나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초대 중국해군 사령원이었던 소경광(萧劲光) 대장은 일찍 자기 기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중국해군은 항공모함을 수요한다. 한 함대가 먼 바다에서 활동할 때 항공모함이 없으면 곧 제공권을 잃게 된다. 제공권이 없으면 곧 먼 바다 작전의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 또한 해군 사령원을 맡은 적이 있었던 전 중국 군사위원회 부주석 유화청 상장 역시 진작 항공모함에 대해 그 욕망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는 수차 “만약 해군에 항공모함이 있다면 작전 질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 전 방위적인 작전 능력이 크게 향상될 것으로 보며 군대의 위력과 국가의 위력에도 큰 변화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1970연대부터 중국인민 해방군은 항공모함에 대한 연구를 시작, 항공모함에 대한 의식이 대대적으로 높아졌다. 당시 중국은 이미 유엔에서의 합법적 지위를 회복했고 또한 유엔의 5개 이사국의 하나로 되었다. 헌데 유엔의 5개 이사국 중 유독 중국만이 항공모함이 없었다. 이는 대국으로서 또한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막강한 중국으로 볼 때 일종 커다란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중국 외 4개의 이사국들은 모두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중 <항공모함 대국>인 미국은 이미 11척의 항공모함을 갖고 있었다. 이는 세계 항공모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셈이었다. 이 외 구소련은 배수량이 6.75톤에 달하는 대형 항공모함을 보유, 영국은 2척의 <엘리자베스 여왕>호 급의 신 일대 항공모함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역시 배수량 4만 톤에 달하는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호 중형 핵 동력 항공모함을 갖고 있었다. 또한 중 소 국가 역시 분분히 구매 하거나 자체로 항공모함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 중 중국 주변의 인도는 견정 불이하게 <3척의 항공모함 전략>을 관철, 2척을 구매와 개량 외 자체로 국산인 <바이크란트(Vikrant)>호를 건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5-23
  • 中 장장 1세기에 거친 ‘항공모함의 꿈’ 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1년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건조대에서 출해, 성공적으로항행 시험 진행했다. 2012년 9월 25일, <요녕 함(辽宁舰)>으로 명명된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정식으로 해군에 교부, 항공모함이 없는 중국해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2017년 12월 17일, 중앙군위의 비준을 거쳐 중국의 첫 국산항공모함이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산동함(山东舰)>으로 명명, 해남성 삼아(三亚)에 있는 모 군항에서 해군에 교부되었으며 자국산 항공모함이 없던 역사에 커다란 종지부를 찍었다. 중국에 있어서 항공모함의 꿈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1928년부터 항공모함의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으니 거의 1세기 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일본 항공모함.ⓒ인터넷 1 중국인들이 항공모함의 꿈을 꾼 것은 그닥 늦은 편이 아니었다. 세계 패권을 장악하려면 바다로 진출해야 하고 바다로 진출하려면 강대한 해군과 함정이 있어야 하며 이러자면 반드시 항공모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시 중국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과 스페인이 세계 각 대륙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강대한 해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다면 중국이 다른 대륙으로 진출하기는커녕 자주 얻어터지는 것은 바로 강대한 해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민국정부는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찍 1928년 당시 국민당 해군 서장(署长)이었던 진소관(陈绍宽)은 자기의 군사저서에서 처음으로 항공모함을 건조할 계획을 서술하였다. 이는 영국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전통식(全通式) 비행갑판이 있는 <헤르메스(Hermes)>호가 건조된 지 근근히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뒤 진소관은 자기의 <항공모함 건조안>을 국민당 중앙에 건의, 1929년 8월 14일, 국민당 제2기 5중 전회에서 통과된 <군사정리안(整理军事案)>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오국(吾国-우리나라라는 뜻)은 해안선이 길고 판도 또한 크지만 현재 해군의 실력은 미약하고…. 향 후 국방계획 중 반드시 실사구시하면서 해군을 발전시켜야 하는바… 국방계획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2일 후 상해 강남 조선소에서 건조한 포함 <함녕(咸宁)>호 갑판에는 해군 병사들이 기립자세로 늘어선 가운데 장개석 위원장의 연설이 있었다. “국가의 권리를 되찾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강대한 해군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중화민국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일류로 가는 해군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여러 사병들한테 달려 있습니다. 예견하건대 우리는 15년 내에 배수량 60만 톤에 달하는 전함을 가진 해군력을 확보하여 세계 일류의 해군을 건설해야 할 것입니다.” … 1930년 중화민국 해군부에서는 항공모함, 장가순양함, 잠수정 등을 건조할데 관한 6년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 구체적 계획으로는 다음과 같다. 항공모함 1척, 장갑순양함 2척, 순양함 2척, 대중소형 구축함 28척, 대중소형 잠수정 24척 … 이 외 각종 포함, 소해정(扫雷艇), 잠수모함, 어뢰정, 운수함 등 도합 106척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내전이 끊임없이 발발하고 정부의 재정이 극히 어려운 사정 등으로 이 <신기루>같은 함정건조계획은 근본적으로 실행에 옮길 가능성이 없었다. 국민정부의 해군전략사상 구축 및 구체발전 책략은 자꾸만 미루면서 최종 방안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1932년 1월 진소관이 해군부 부장으로 된 후에야 중앙 해군은 비로서 비교적 안정적인 발전시기에 들어섰다. 2 전 국민당 육군 및 해군의 1급 상장이었던 진소관은 중국 전구를 4개의 대전구로 나뉘고 20척의 항공모함을 건조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변>의 발발로 중국이 전면 항전단계에 진입하자 진소관은 부득불 잠시 그 계획을 접고 현유의 함정으로 항일전에 투입할 준비를 포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 해군의 항일전은 주로 장강 중하류에 집중되었으며 가장 치열한 전투는 강음(江阴)에서 있었다. 1937년 8월 상순, 일본함대가 강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민정부는 적지 않은 선박을 강에 침몰시켜 강음에 봉쇄선을 구축하였다. 이러자 일본군은 이 봉쇄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항공모함 <호쇼(Hōshō)>호에 있던 비행기를 출격하여 대규모로 되는 폭격을 감행, 봉쇄선에서 방어하던 국민당 해군 제1함대는 거의 모두가 폭격으로 침몰되었다. 그 뒤 일본의 항공모함은 경상적으로 중국의 영해로 출몰하면서 육에서의 행동과 배합하군 했다. 강음해전 중 일본군의 공중우세는 진소관으로 하여금 항공모함의 작용을 더욱 중시하게 했다. 강음해전은 1937년 8월 16일, 강음대전의 개시와 더불어 12월 1일 강음에서의 철퇴(강음 포대 12월 3일 함락)에 이르기까지 도합 108일간 진행되었다. 강음해전은 항일전쟁 중에서의 보기 드문 육해공 3군 입체작전이었으며 항일전쟁기간의 유일한 해군전역이었다. 오랫동안 중국의 해안에서 위풍을 떨치던 함대는 일부는 산동의 연태에서 침몰되었고 주력의 전부는 강음에서 복멸되었다. 이는 중일 갑오전쟁이래의 가장 중대한 손실이었다. 강음 보위전에서 일본군은 도합 4척의 항공모함을 출격하여 당시 중국해군의 거의 모든 주력 전함을 격침시켰고 강음요새를 초토화시켰으며 당시의 중국해군부대로 하여금 거의 재기불능에 가깝게 만들었다. 1943년 11월, 진소관은 해군부를 대표하여 재차 해군건설 계획을 제출, 이 계획 중에서 그는 이미 몇 척의 항공모함에는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몇 개의 항공모함 군을 제조할 야망으로 차 있었다. 당시 그는 중국 연해를 4개의 해군 역할 구역으로 획분, 제 1 구역은 요녕의 안동(지금의 단동)으로부터 산동반도의 성산도(成山头)에 이르고 제 2 구역은 성산도로부터 장강 하구까지에 이르렀으며 제 3 구역으로부터 광동의 산두(汕头)까지, 제 4 구역은 산두로부터 중국 – 베트남 변경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다음 매 해군 구역마다 1개 지대의 해안방선 함대를 창립, 항공모함 5척씩 4개 해군 구역에 도합 20척의 항공모함을 두기로 하였으며 매 한척의 제조 원가는 18억 원에 달했다. 이 계획서를 보고 당시 장개석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으나 진소관은 “이 돈은 아낄 필요가 없다”고 역점을 찍어 강조하였다. 당시 전시상태에 처한 중국의 상황으로 놓고 볼 때 이 계획은 현실적 가능성이 거의 없는 <탁상공론>이나 다름이 없었다. 진소관 역시 이 점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장개석한테 주의력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도 매우 뜻깊다고 인정했다. 1945년 8월, 항일 전쟁이 곧 승리하게 될 무렵이 되자 진소관은 진짜로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의 군정 부장 진성(陈诚), 전서청(铨叙厅-주관 인사의 청) 청장 전탁륜(钱卓伦) 등을 설복하여 <해군 분담방위 계획(海军分防计划)>을 제정, 이 계획은 몇 년 전의 계획을 수정한 것으로 원래 20척으로 계획했던 항공모함을 12척으로 적게 계획한 것이었다. 이는 더욱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방안을 접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진소관의 해석에 따르면 이 12척의 항공모함 역시 1차적으로 건조하는 것이 아니고 그 기한을 30년으로 하였다. 첫 10년 계획으로 1만 톤짜리와 8000 톤 짜리 항공모함 각각 1척씩 건조, 매 1척의 건조원가는 각각 6280만 달러였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5-23
  • 무협소설 대가 김용이 짓궂게 추구했던 스타 여배우 하몽(夏梦)
    ▲스타 여배우 하몽 2018년 11월 16일, 중국 국내의 모 TV방송국의 아나운서가 자신의 워이버(微博)에 한 가지 메시지를 게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이 내 마음속의 샛별 같은 존재였던 하몽(夏梦), 하몽이 떠나가고 있다. 마치 하늘 높이 날아가는 제비마냥 손을 흔들면서 떠나가고 있다… 이는 하몽의 사망 소식을 알린 최초의 정보 출처로 추측된다. 그 뒤 많은 매스컴들도 앞다투어 하몽의 사망 소식을 보도, 사망 당시 하몽의 연령은 83세였다. 혹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하몽의 이름에 대해 좀 낯설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한 세대들한테 있어서, 더군다나 홍콩의 초기 영화에 대해 좀 알거나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하몽이 한 시기 홍콩영화의 대표 배우였으며 일찍 스크린의 <여신>이었고 <절세의 미인>이었으며 <동방의 오드리 ‧ 헴번>이란 칭호를 받은 여성 스타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흥미가 있는 것은 연예사업에서 그녀의 개인 업적과 비교할 때 사람들이 가장 화제에 올린 것은 당시 유명한 무협소설가 김용(金庸)이 하몽한테 반하여 그녀를 열애했고 하몽 또한 지혜롭게 김용의 애정공세를 거절한 이왕지사였다. 오늘 와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애석해하면서 하몽은 응당 김용과 함께 있어야 했다고 인정, <재능 있는 남자에 아름다운 여인의 배합>이라고 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은 하몽이 김용의 열애를 거절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생애에서 결정한 많은 일들 중 가장 지혜롭게 처사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하몽과 영화계 동료들 한 여름 밤의 꿈 하몽의 원명은 양몽(杨濛)이며 1933년 상해 태생이다. 조상이 살던 곳은 강소 소주로 하몽은 철두철미한 <강남 여자>였다. 당시 하몽의 양친 부모는 희곡을 즐겼으며 남들로부터 <예술가정>으로 불리게도 되었다. 양몽 또한 부모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연극표현에 대해 짙은 취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47 년에 어린 양몽은 가족을 따라 홍콩으로 이주하여 홍콩의 마리노(玛丽诺) 여자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양몽은 여가에 영화를 보지 않으면 노래하고 춤추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이는 그녀로 하여금 학교 내에서 매우 활약적인 문예골간으로 되게 했다. 1950 년 원앙안(袁仰安)라는 감독이 한부의 영화를 만들려고 딸한테 같은 반 친구들한테서 누가 연기에 적합한가를 물었다. 이러자 원앙안의 딸인 원모매(毛妹)는 같은 반급에 있는 양몽의 이쁜 외모와 연기력을 아버지에게 추천하였다. 원앙안은 양몽을 장성 영화회사에 초청, 쉑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에서 받은 영감을 얻은 양몽은 <하몽>이란 예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로부터 스크린에는 한 쌍의 봉의 눈에 오관이 우아함과 아울러 고전미녀의 기질이 농후한 하명이란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장성영화회사에 입사한 후 하몽은 자기의 출중한 외모와 독특한 연기력에 의해 대뜸 영화계의 톱스타로 등극하였다. 하몽이 처음으로 찍은 영화는 이평정(李萍倩)이 감독을 맡았고 남자 배우 한비가 주역을 맡은 <금혼기(禁婚记)>였다. 이 영화에서 하몽은 한 소녀의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하몽은 어딘가 나이에 맞지 않는 여인의 역을 맡았지만 그녀의 연기력은 너무나도 출중하여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금혼기>가 방영된 후 영화는 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따라서 하몽 역시 빠르게 유명해졌다. 이러자 장성영화회사는 <쇠는 단김에 뺀다>고 하몽을 적극 키웠으며 뒤이어 그녀는 <말썽 많은 어머니(娘惹)>, <도회지 교향곡(都会交响曲)>, <백일몽(白日梦)>, <얼해화(孽海花)>와 <자매곡> 등 영화에 육속 출연하기도 했다. 한편 하몽이 출연한 영화들은 기본상 성공하였으며 그녀와 석혜(石慧), 진사사(陈思思) 등 <장성회사의 3공주> 중 하몽은 당연히 <제 1번 대 공주>로서의 손색이 없었다. 지난 세기 50∼60연대는 홍콩영화가 발걸음을 뗀지 얼마 안 되었고 배우들의 명성 또한 지금처럼 열광적인 숭배 대상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몽만은 달랐다. 그녀의 명성은 이미 홍콩을 벗어나 대륙과 싱가폴 등 지역을 휩쓸었다. 많은 잡지와 신문 등 간행물들은 앞 다투어 그녀를 표지인물로 선정해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하몽은 18살에 첫 영화에 출연했고 35살에 영화계와 작별을 고하였다. 그 17년간의 배우 생애에서 하몽은 도합 38부의 영화에 출연, 당시 그 시대의 영화에는 경극이나 월극 등 희곡 유형의 작품을 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장르로 된 작품의 매우 다양한 형상 부각에서 하몽은 모두 아주 노련하게 소화해 냈다. 때로는 우아하고 단정한 대 가정의 규수로, 때로는 화려하고 요염한 궁정소녀로 그리고 활발하고 사랑스러운 처녀거나 타락한 정감 여인 혹은 불행한 애상소녀 등 모든 다각적 인물을 훌륭하게 부각하여 관중들에게 다각적인 형상을 안겨주었다. 당시 많은 팬들과 심지어 감독들조차 하몽의 놀라운 아름다움에 탄복해 마지않았지만 그녀는 개인적인 외모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며 모든 영화의 출연에 참여할 때 그녀는 맡은 배역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연기에 대한 자신의 일종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즉 배우는 단지 외모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인정했다. 마치도 동교(董桥)가 말한 것처럼 하몽은 배우였지 스타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자태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에서의 그 모습은 인간의 희로애락과 환상같은 것에 늘 빠져있는 것이었다. ▲ 하몽과 남편 임보성 아름답고도 지적인 인생 유명인, 특히 여성유명인에 대해 편견이 있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몽 역시 종종 얼굴로 <점수를 따는 사람>으로 간주될 때가 많았다. 연예 권 산업에서는 당시의 시대가 지금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성 스타의 사생활은 종종 대중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몽은 자신의 미모로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도고하지만 견식이 짧은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몽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총명하고도 지혜가 많은 여성이었다. 이는 아마도 그녀가 문화가정의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양호한 교육을 받았었기 때문이리라. 이렇듯 하몽은 유명해지기 전부터 아주 높은 자질을 갖고 있었으며 우아했으며 아주 친절하게 사람을 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특하고 용모가 출중했지만 거기에 남들이 감탄할 만한 지혜로 자아관리를 하기도 했다. 하몽은 18 ~ 19 세의 나이로 유명해졌으나 명예에 빠져 자아를 잃지 않았으며 겸손하고 배우는 자세를 유지하면서 부단히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21 세에 하몽은 가장 황금의 나이에 이미 스타가 되어 상인 임보성(林葆诚)과 결혼했다. 많은 사람들의 안광에는 하몽과 임보성의 결혼은 일종 경솔하게 <부호와의 결합 행위>로 여겨졌지만 실제로 그녀와 임보성의 결혼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즉 단순한 미모 그리고 명성 혹은 재부에 의한 결혼이 아닌 감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한편 임보성을 놓고 볼 때 멋지게 생긴 <외관형>의 인물은 아닌 것이 사실이었다. 지어는 <상인>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늘 재벌 티가 나고 조폭하며 수양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기가 쉽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하몽이 사랑한 이 남자는 위에서 언급한 재벌 티가 나는 것도 아니었고 조폭스러운 사람도 아니었으며 수양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몇 년 후 사람들은 하몽이 일찍 이 남자를 선택한 것이 정확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임보성은 상해 세인트 존슨 대학을 졸업한 뒤 인차 방직업에 종사했다. 하긴 임보성은 상업에 종사한 건 사실이었지만 한편으로 그는 예술에 농후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와 하몽의 만남은 매우 우연적이었다. 영화 촬영에 취미가 있는 그는 영화 <자매곡(姊妹曲)> 촬영현장에 가게 되었고 교묘하게도 당시 현장 연출은 교사의 역을 맡을 배우 한 명이 없어 수소문을 하던 끝에 임보성을 보자 대뜸 흥정을 걸어왔으며 그는 한마디로 동의, 그 때 임보성이 그토록 쉽게 대답한데는 그 때 촬영하던 영화의 여주인공이 하몽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임보성은 오래 전부터 하몽에 대해 추구하고 있던 터였다. 그 때의 그 짧은 촬영현장을 통해 임보성과 하몽은 서로 알게 되었고 얼마 안 되어 아주 사이가 좋은 관계로 되었다. 당시 임보성으로 하여금 특히 즐겁게 한 것은 바로 그 촬영현장에서 하몽을 보게 된 것었다. 임보성의 눈에는 하몽은 천사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는 그 어떤 스타 배우같은 틀거지가 없었으며 그 어떤 사람한테나 항상 예의가 있게 대하였다. 이는 임보성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임보성은 하몽한테 열렬한 애정공세를 들이댔으며 최종 둘은 서로 손잡고 혼인이란 이 성스러운 전당에 들어가기까지에 이르렀다. 당시 이들의 혼인을 두고 이런저런 루머가 많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 남녀를 두고 <썩 어울리지 않다> 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몽이 임보성을 선택한 것은 임보성의 재산이 탐나서였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든 간에 이러한 평가도 이지적인 사람들은 별로 가타부타 평가를 하지 않았다. 행복한가 행복하지 못한가 하는 것은 하몽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임보성이 하몽한테 먹고 입는 것에 아무런 걱정이 없는 물질적 조건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그녀한테 제공한 것으로는 생명에 대한 보호와 사업에 대한 거대한 도움이었다. 1967년 하몽은 정식으로 영화계에서 퇴출한다고 대외에 선포했다. 이는 많은 관중들로 놓고 말하면 아주 돌연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하몽과 같은 스타급의 여배우가 영화계에서 퇴출하는 것은 결코 <명지한 선택>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환경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몽은 일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며 그녀의 남편 역시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시 중국대륙은 <문화대혁명 운동>이 열화처럼 진행되고 있던 시대로 허다한 연예권 인사들이 큰 충격 속에서 숨을 죽이고 살던 시대였다. 시대가 시대였던만큼 당시 하몽은 시국에 대한 판단을 통하여 또한 신변의 동료들이 겪는 희로애락을 통하여 결단성 있게 영화계 퇴출을 선언했던 것이다. 임보성과 하몽은 세절적인 검토를 거친 후 다음의 일을 결정, 우선 임보성은 공항과의 관계를 통하여 짧은 시일 내에 하몽의 캐나다행 수속을 해주었다. 이렇게 그는 아내의 결정을 지지해주었고 아울러 그녀를 위해 가장 적합한 보장을 해 줌으로서 하몽의 영화계 퇴출이 순리롭고도 조용하게 마무리되게 하였다. 하몽은 캐나다에서 한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자신이 애호하는 사업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 사업인즉 한 방면으로는 계속 영화 영역에서 자기의 사업을 펼치는 것, 청조영화회사를 설립하여 선후로 <노해에 투신(投奔怒海)>, <유수와도 같은 세월(似水年华)>, <자고로 영웅은 소년에서 나온다(自古英雄出少年)> 등 3부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영화 제작인으로 된 하몽은 눈길을 사회에 돌리고 줄거리를 찾군 하였다. 당시 베트남이 한창 전쟁 중이라 수많은 전쟁난민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이러자 그녀는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하는 한부의 영화를 제작하려고 연출 허안화(许鞍华)를 찾았다. 몇 년이 지난 후 허안화는 하몽과의 합작당시를 회고하면서 <하몽 여사한테 감사를 드린다. 그녀는 나로 하여금 일생동안에서 가장 훌륭한 1부의 영화를 찍게 했다> 라고 했다. 다른 한 방면으로 하몽은 각종 문화와 관계되는 활동에 참가, 무릇 그것이 정치적 속성을 가진 문화교류이든, 아니면 순수한 예술성을 지닌 문화활동이든 간을 막론하고 아주 열정적으로 그 사업에 투신하였고 그녀 나이 81세가 될 때까지 멈추지를 아니했다. ▲ 하몽과 무협소설 대가 김용 김용의 애정공세 거절한 건 현명한 처사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지만 매번 하몽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아주 흥미진진하게 무협소설로 하나의 시대를 풍미했던 대가 김용이 당년에 그녀를 추구하다가 거절을 당했던 지나간 치정사에 대해 말하기 마련이다. 이 일을 말하자면 아마도 지난 세기 50연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시기 김용은 꽤나 이름 있는 소설가였다. 그 때 그는 하몽을 몹시 좋아했다. 그는 스크린에 나오는 하몽을 두고 일종 연민의 정을 느끼다 못해 한 시기 밥맛을 잃을 지경이었고 필을 잡았으나 글을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상사병이라면 아마도 <중증>으로 진단받아야 할 정도였다… 하몽과의 만날 기회를 만들기 위해 그는 이름을 임환(林欢)으로 고치고 하몽이 소속되어 있는 장성 영화회사(电影公司)에 입사, 전문 이 회사에 씨나리오를 제공하는 작가로 되었다. 목적은 분명 하몽과 매일 같이 근거리에서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하몽을 추구해도 일반적인 정도가 아니었다.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장성영화회사에 씨나리오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전문 하몽을 위한 씨나리오 <왕 호랑이의 부녀자 강탈기(王老虎抢亲)>를 만들기도 했다. 이 영화의 슈제트는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하몽의 마음을 열기 위한 김용의 노력은 이루다 형언할 수 없었다. 이 밖에 김용은 또 하몽과 식사를 약속했고 낭만에 넘치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으며 지어는 하몽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달하기 위해 자신의 필로 묘사해낸 <독수리 사냥 영웅전기(射雕英雄传)>에서 나오는 총명하고 영리한 여 협객 황용(黄蓉)과 <신조협려(神雕侠侣)>에서 나오는 쇼룽녀(小龙女)를 하몽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모든 정감을 쏟군 하였다. 그리고 하몽의 미모에 대한 김용의 한마디 <명언>이 있었는데 이 <명언>은 한동안 광범위하게 유행될 정도였다. 그 말인즉 “서시(西施)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직접 본적이 없다. 나의 생각엔 서시가 만약 하몽만큼의 미모였다면 그야말로 명불허전(名不虚传)인 것이다”란 <명언>이었다. 김용은 여느 소설가들과는 달리 애정 공략에 들어서는 아주 용감한 편이었다. 그는 자주 하몽의 앞에서 자기의 애심을 직설적으로 고백했으나 뜻밖으로 돌아온 건 하몽의 예의가 바른 거절이었다. 당시 이미 임보성의 여인으로 된 하몽은 아래와 같은 한 마디의 말로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제가 출가하지 않았을 때 우리 상봉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뿐이죠(恨不相逢未嫁时).” 이 간단한 한 구절은 김용의 재능에 대한 흠상과 그의 인품에 대한 인정과 더불어 자기의 혼인을 고수하려는 하몽의 원칙도 담겨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하몽은 이미 임보성과 결혼한 상황이었으며 남편에 대한 그녀의 애정 역시 진지했는가 하면 결혼생활 또한 비교적 원만한 편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하몽은 김용의 구애에 대해 오직 <거절>이란 두 글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당시 허다한 사람들은 김용의 구애에 대한 하몽의 거절에 아쉬워하였다. 특히 김용의 재능에 탄복해 마지 않던 독자들은 모두 하몽과 같은 미인이 김용이란 <재간둥이>와 결합하면 <천재와 미인의 만남>으로 가장 이상적이라 여겼다. 심지어 적지 않은 사람들은 김용의 낭만적인 정감과 의리적인 기질은 하몽한테 더욱 큰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적어도 일개 <상인>이 주는 행복보다는 격식 상, 차원 상 풍부하고도 고상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만약 현실적인 안광으로 하몽의 이런 결정을 가늠해 보면 그녀가 김용의 구애를 거절한 것은 아주 현명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었다. 우선 가장 기본적인 물질적 조건으로 놓고 볼 때 임보성의 재부는 김용의 실력에 비해 현저하게 더 많았다. 이는 결코 재부가 많을수록 더욱 행복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놓고 볼 때 하몽과 같은 직업에서는 충족한 재부가 있으면 그녀로 하여금 원하는 인생을 만들 수 있는 보장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여 배우한테 있어서 단지 연기로 일생을 보낼 수만은 없는 것, 더군다나 자기의 인생에 대해 생각이 있고 책임지는 여 배우라고 할 때 배우라는 이 직업은 영원한 <장구지책>으로 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몽은 35세의 나이에 일종 시국의 원인으로 영화계를 잠시 떠나 캐나다로 이민 갔다가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자기의 사업을 창립, 매 한발자국씩 내 디딜 때마다 일정한 재부의 받침이 있어야 했다. 이는 어찌 보면 김용도 제공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어쨌든 임보성의 경제력에는 미칠 수 없다는 것은 불보듯 뻔했다. 다음으로 하몽 개인의 사업으로 놓고 말하면 남편 임보성의 지지야말로 그녀로 하여금 더욱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하몽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사업, 즉 자기의 영화회사를 창립하고 제작인이 될 수 있었으며 자기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김용은 자기의 사업이 있었고 하몽과 함께 영화업에 투신할 수도 있었으며 또한 합작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회사를 만들자면 거기에 수요되는 자금과 자원 등은 일반적인 재력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록 김용 선생의 작품 및 그가 거둔 성과에 대해 매우 흠모하고 그가 독자들한테 선물한 무협지의 장면들에 대해 경탄해마지 않지만 개인감정의 처사에 있어서 그는 결코 완벽하지 못했다. 김용은 일생에서 도합 3명의 부인을 맞았었다. 일찍 하몽을 추구할 때 김용은 이미 결혼한 몸으로 첫 번째 부인 두야분(杜冶芬) 여사와 함께 가정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당시 김용과 부인은 홍콩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김용은 사업의 성공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바삐 보냈고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기에 부부 사이의 감정파열을 초래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이런저런 말이 많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제3자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이라면 바로 그 당시 김용이 한창 하몽을 추구하고 있었을 때였다. 모종 뜻에서 보면 그것은 그닥 떳떳하지 못하였다. 또한 그 뒤에 있은 정감생활에서 김용은 부부 관계 및 혼인 방면에서의 처사가 그닥 잘하지 못했었다. 김용이 두 번째 부인은 사업 형으로 그에 대한 적지 않은 도움을 준 여인이었다. 그런데 김용은 제 3의 여인과 사귀자 두 번째 부인한테 냉담하지기 시작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실제상 두 번째의 부인과 이혼하게 되자 그녀에 대한 김용의 태도는 아주 무자비했으며 이는 큰 아들의 자살까지 초래했다. 후에 김용은 큰 아들의 자살을 두고 심한 자책감을 느끼는 듯 했으나 그렇다고 실제적으로 큰 책임적 대가를 바친 건 아니었다. 본 글은 결코 김용 자신의 도덕을 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다. 서두 결말이 어떻게 되었든 간 모든 것은 그의 인간적 권리이다. 다만 한 예술대가인 김용이 감정 처사에 존재하는 부분적인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고 또한 그의 부분적 풍류적인 정감세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어찌보면 한 여성의 일생 행복을 놓고 볼 때 김용은 너무나도 급급히 자기의 <행복과 쾌감>만을 추구한 것 같았으며 반대로 하몽은 안정적인 인생을 추구하는 경향을 가진 여인이었다. 다른 한편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의 연애사를 담론하면 흔히 낭만적이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여 결혼에 올인하면 그만큼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현대적 개념으로 고민해 보아도 하몽이 김용의 구해를 거절한 것은 여전히 현명한 처사로 봐야 할 것 같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여전히 사람들이 하몽한테 김용에 대해 담론하면 그녀는 길게 말하지 않고 그저 간단하게 “나와 김용에 대해서 말하자면 기실 말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더욱 유리할 것 같다”라고 잘라 버리군 했다. 그녀는 자기한테 말 재주가 없기에 극력 말을 적게 한다고 했다. 기실 그 한마디 말의 배후에는 그녀 인생의 지혜ㅡ 그녀의 말을 빈다면 이야기를 엮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일이었고 그녀가 선택한 것은 열심히 일하고 착실하게 가정을 챙기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여성들은 진짜 애정을 대함에 있어서 허영에 들떠 있지만 그래도 더욱 많은 여성들은 행복하고도 안정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며 하몽은 그만큼 현명한 선택을 했기에 그녀의 혼인과 애정사에는 별로 큰 풍파가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5-12
  • 북경의 고궁 왜 변소가 없을까?
    ▲북경고궁ⓒ바이두 [동포투데이 김현나 기자] 중국의 북경을 놓고 말하면 역사가 긴 고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고도라고 하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또한 고궁이라 할 수 있다. 고궁은 자금성이라고도 하며 명 • 청(明清) 두 개의 조대를 경과하면서 그 역사를 견증했고 지금은 세계에서 저명한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자료에 따르면 고궁에는 도합 90여개의 뜨락이 있고 980개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는가 하면 8707개의 크고 작은 방이 있다. 고궁에 가본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고궁은 필경 황제가 머물던 곳으로 그 면적이 웬만한 작은 도시 같았고 거주하는 사람도 많아 거주인이 가장 많을 때는 수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만약 고궁에 변소를 짓는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변소는 얼마나 있어야 했을까? 고대의 황제 가족은 체면을 아주 중시했으며 아울러 풍수에 대해서도 아주 중시했다고 한다. 하다면 변소는 필경 배설을 목적으로 하는 장소였다. 고대인들의 눈에는 배설물은 모두 불결한 잡물로 여겼으며 변소가 있으면 구린내가 하늘을 뒤덮어 황궁의 풍경을 어지럽히고 풍수자리에도 액을 초래한다고 여겼다. 변소가 없는 고궁, 그래서 당시 고궁의 귀족들은 모두 변기를 사용(고대의 많은 도시들에서도 역시 그렇게 했음)했다고 한다. 중국 고대에는 일종 우아한 명칭이 있었는데 그것인즉 <야향(夜香)>이란 명칭이었고 바로 변기안의 배설물을 가르키는 것이었다. 예하면 밤에 어느 귀족이 변기내에 <야향>을 배설하면 다음 날 아침 전문 시중군이 그 <야향>을 가져다 처리하군 했다고 한다. 웬만한 귀족들이 괜찮은 변기를 사용했다면 황제가 사용하는 변기는 보는 이마다 탄복케 할 정도로 정교롭고도 다양하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변기 또한 장방형으로 된 것이 있는가 하면 타원형으로 된 것도 있었고 나무로 만든 것, 석(锡)이나 자기(瓷)로 만든 것도 있었으며 특히 황제가 사용하는 변기는 용변 후 깨끗하게 청리해야 하고 또한 변기 내에 화판 혹은 향료 등을 넣기도 했다고 한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5-1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