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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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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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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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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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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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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19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내 님과 함께 했던 날들 ( 3 )
     나는 나의 이번 결정이 어떠한 후과를 초래할런지 잘 알고 있다. 최악의 경우 내가 감수 해야 할 그 부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는 상상만 해도 끔직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선택한것은 그가 내 인생의 소중한것들을 전부 걸고서라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유교적륜리도덕이 두눈을 새파랗게 뜨고 살아 있는 현 시대에 내가 일명 사랑이라고 들먹이는 이 불륜이 사회적으로 비난과 조롱을 받기는 쉽상이다. 그 누군가가 <바람난 주제에 어쩜 저렇게 뻔뻔스러울까>라고 말을 한다해도 나는 단지 내 감정에 충실하고 싶을 뿐이다. 휴대폰이 울렸다. 그 사람이였다. <잘 생각했어~ 정말 너무 고마워! 사랑한다~>흥분하다 못해 떨리기까지 하는 그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는듯 싶었다. 소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틈만 나면 벼룩시장이며 인터넷을 뒤지면서 방을 구하기 시작했다. 사장님께 사람 구하시라고 말씀 드렸더니 요번달부터 월급을 올려주려고 했는데 그냥 하라고 사정사정하시는것이였다. 그것도 그럴것이 야간근무 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것이다. 언니한테도 방을 얻어 나가겠다고 말했더니 펄쩍 뛰는것이였다. 여자 혼자 몸으로 어쩌냐구… 부모님도 소식을 전해들으시고 극구 말렸다. 그러나 나의 고집을 누구도 꺾을수 없었다. 다른것은 제쳐놓고라도 무엇보다도 이미 그 사람한테 약속을 했고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 되돌이킬수 없었다. 며칠 뒤 그의 직장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모시에서 보증금 50만 월세 17만짜리 방 하나를 얻었다. 나는 식당일을 아무데서나 찾아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는 연장근무할 때가 많기때문에 그렇게 결정했다. 회사에서 연장근무를 하지 않으면 돈을 벌수 없었다. 3층짜리 단독주택이였는데 맨 윗층에서 주인량주가 살고 계셨고 1, 2층은 일부러 세를 놓기 위해 기숙사식으로 지은것 같았다. 1층에 있는 방이 좀 저렴하긴 했지만 나는 굳이 햇볕이 잘 드는 2층방을 고집했다. 총 10평방메터 되나마나한 다락이 달린 작은 방이 였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주방겸 샤워실이였는데 한켠에 일회용부탄가스가 놓여져 있었고 그 위로 널판으로 그릇같은것 올려놓을수 있도록 다락을 만들어놓은것이 보였다. 방은 비좁게 세사람까지는 누울 수 있을것 같았고 누우면 발끝이 닿을만한 너비였다.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 좀 불편할것 같았다. 방이 비록 작긴 했지만 주인할머니가 깨끗하게 도배를 해서 그런지 그냥 아담하다는 그 자체였다. 주인할머니는 물건 많지 않으면 부부가 살기에는 괜찮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 어느 중국부부도 이 방에서 돈 많이 벌고 나갔다고 말하는걸 잊지 않았다. 이사하는 날 언니가 몇가지 생활용품들을 트렁크에 챙겨서 넣어주고 지하철역까지 배웅을 나왔다. 쉬는 날이 아니라서 같이 와주지 못하는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면서 언니는 언제라도 괜찮으니까 혼자서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고 당부하는걸 잊지 않았다. 언니가 안쓰러워 하거나 말거나 나는 마냥 신나기만 하는걸 주체할수 없었다. 다행이도 원래 살던 부부가 버리고 간 물건이 있어서 쓸만한것들을 골라다가 깨끗이 닦아서 얹었더니 제법 그럴듯 하였다.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한국에 와서 살림을 차리고 살다가도 귀국할 때는 다 버리고 가야 하는게 현실이기때문에 나같은 사람들이 그 덕을 보는게 아닌가 싶다. 길 건너에 있는 슈퍼에서 쌀이랑 야채 소금 간장같은것을 사왔다. 이불은 언니네 집에서 갖고 왔고 이제 그 사람이 퇴근하면 시장에서 베개랑 슬리퍼랑 당장 필요한 물건만 사기로 했다. 고작 방안 정리라고 해봤자 머 별거 없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주어다가 놓은 덕분에 제법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듯 싶었다. 이렇게 나와 그 사람의 동거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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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6-17
  • [연재] 내 님과 함께 했던 날들 ( 2 )
    살다보면 사랑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수두룩하게 생겨날것인데 과연 우리 두 사람이 그런 난제들을 잘 풀어갈수 있을지도 고민이였다. 사랑도 사랑이겠지만 필경은 인생의 끝까지 갈수없는 사이인지라 살면서 나타나는 어려운 고비들을 재치있게 넘길수 있을까. 사랑은 랑만적이지만 현실은 랭정한 것이니깐. 첫번의 만남은 다음의 만남을 위한 시작이라고 하겠다. 어쨋든 그번의 만남이 있은 후로 그는 나한테 더욱더 살뜰하게 대해주었다. 핸드폰메세지는 전화통에 불이 달릴 지경으로 오갔다. 그는 자기의 일상을 시시콜콜 어느 한가지라도 빠뜨릴세라 나한테 문자로 보내주었다… 첫번의 만남은 다음의 만남을 위한 시작이라고 하겠다. 어쨋든 그번의 만남이 있은 후로 그는 나한테 더욱더 살뜰하게 대해주었다. 핸드폰메세지는 전화통에 불이 달릴 지경으로 오갔다. 그는 자기의 일상을 시시콜콜 어느 한가지라도 빠뜨릴세라 나한테 문자로 보내주었다… 오늘은 무엇때문에 부장님께 혼났다는지, 퇴근길에 사과 네알을 샀는데 2000원이나 하더라는지, 월급이 나왔는데 다음에 만날때 맛잇는거 사주겠다는지 하는등 문자메세지를 하다가 그래도 성차지 않으면 아예 전화를 걸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시름을 놓았다. 그는 일요일을 격주로 쉬고 있었는데 쉬는 날이면 왕복 세시간씩 지하철을 타면서 나를 만나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나… 너랑 같이 있고 싶다!>라고 말하는것이였다. 나는 뜬금없는 그의 말에 말끄러미 쳐다보면서 <우리 지금 같이 잇잼까?>라고 했다. 그는 자기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어이없다는듯이 피씩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이렇게 말고 너랑 같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뭐든지 너랑 함께 하고 싶단 말이다.> 나는 뜻밖의 그의 제안에 뭐라고 딱히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낑낑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함까? 누가 알게 되면 큰일 남다.> 그는 내 손을 꼬오옥 잡으면서 <어차피 너도 언니네 집에 쭈우욱 눌러있을수는 없는거 잖니? 갑작스럽겠지만 긍정적인 판단을 내려줬으면 좋겠어 … 부부의 연을 못 맺는다해도 한국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너한테 잘해주고 싶고 후회없이 살아보고 싶어…> 라고 말하는것이였다. 너무도 솔직하고 절실한 고백에 잠시나마 이 남자라면 내 인생에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솔찍히 언니네랑 같이 한집에 산다는게 불편한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다른건 다 제쳐놓고라도 형부가 현장 쉬는 날이면 야근을 하고 낮잠을 자는 나때문에 낮이면 늘 친구들하고 어울리면서 술만 마셨다. 이것때문에 언니랑 형부가 다툰적도 있었다. 그리고 야근이라는것이 대낮에는 아무리 잠을 잔다고 해도 밤처럼 깊은 잠을 잘수가 없어서 지칠대로 지친 내 다크써클은 아닌게 아니라 무릎까지 내려오게 생겼다. 그래서 언니네 집에서 몇개월간 얹혀 살면서 경제적으로 여유도 좀 생겼던지라 사실은 나도 방을 얻어서 나갈 생각은 있었지만 남자랑은 절대 아니였다. 남자랑의 동거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였다. 그맘때쯤 연길에서 가깝게 지내던 언니가 자기랑 같이 지냈으면 하고 전화가 왔길래 그럴까 아니면 고시원으로 갈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중이였다. 혼자서 세방을 얻기보다 누군가랑 같이 있으면 다소 불편하긴 하겠지만 서로 의지가 되고 지출은 많이 줄일수 있을것 같았다. 나의 이런 생각을 그한테 말했더니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한식경이나 아무 말도 없었다.한참이나 애꿎은 담배연기만 내뿜던 그가 꾹 닫았던 입을 열었다.<비록 우리가 가깝게 만난 시간은 몇개월 안되지만 내 마음속엔 이미 니가 꽉 들어앉아서 누가 비집고 들어올수 없게 되였다. 근데 넌 아닌가보구나… 섭섭하다. 하지만 어쩌겠니? 니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어쩔수 없는거지. 그동안 내가 너한테 그만한 믿음을 주지 못한걸…> 그의 서운함이 가득 담긴 말을 들으면서 <아! 내가 너무 했나?>하는 자책감만 들기만 할뿐 다른 생각은 할수가 없었다. <니가 그 언니랑 같이 살게 되면 앞으로 너를 만날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너랑 있으면 더없이 편하고 좋아. 나 진짜 너를 너무 사랑해...자는 시간 빼고 단 일초라도 니 생각 안해본적이 없어.다시 한번 잘 생각해주면 안되겠니?>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이 간절하다못해서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이 남자가 이렇듯 간절하게 날 원하는데 나는어떡해야하지?>를 수없이 되뇌이면서 도저히 갈피를 종잡을수 없어서 그냥 고개만 숙이고 손톱눈만 뜯고 앉아있었다. 나는 A형이라서 그런지 가끔은 이렇게 우유부단 할때가 있었다 그날 그는 나한테서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채 여름날 정오의 시든 화초마냥 추우욱 처져서 돌아갔다. 량쪽어깨가 축 처져서 지하철 플랫트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마음도 편치가 않았다. 련며칠 나는 잠을 설쳐가면서 고민을 하고 또 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좋아하고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는건 잠시적인것이다 라고 개인적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의 시작에는 사랑때문에 만났다하지만 살다보면 사랑보다 끈끈한건 정이다. 나중에는 그 정때문에 울고 불고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살다보면 사랑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수두룩하게 생겨날것인데 과연 우리 두 사람이 그런 난제들을 잘 풀어갈수 있을지도 고민이였다. 사랑도 사랑이겠지만 필경은 인생의 끝까지 갈수없는 사이인지라 살면서 나타나는 어려운 고비들을 재치있게 넘길수 있을까. 사랑은 랑만적이지만 현실은 랭정한것이니깐. 그때쯤 그도 한국에 온지 얼마되지 않았던지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였다. 짧은 경력이였지만 이혼사가 있었고 년로하신 어머님이 한국에서 간병인으로 일하고 계셨고 연길에 있는 막내 남동생네 애기 그 집안의 유일한 후손에게 다달이 우유도 보내줘야 했고(그때쯤 중국의 우유에서 멜라민논란이 일고 있었음) 한국에 온지 10년이 넘도록 도박에 빠져서 땡전한푼 없는데다가 기계사고로 손을 다쳐서 놀고 있는 작은 동생의 생활비와 집세도 부담해야 하는 그런 처지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들노릇 형님노릇하느라 등허리가 휘여질 지경이였다. 그의 이 모든 상황이 나의 측은 지심 또 모성애비슷한 그 무엇을 자극하여 그를 더욱더 사랑하게 했을 는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주린 배를 안고 출근하는 그를 위해서 따뜻한 밥이라도 먹여서 보내고 싶어지고 양말 한짝이라도 내 손으로 손수 빨아주고 싶었다. 며칠동안 참기름 쥐여짜듯 고민고민을 하다가 그한테 문자를 날렸다. <나 매일 해뜨는 아침을 자기랑 함께 맞이하고 싶어요.>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3-06-17
  • [연재] 님과 함께 했던 날들 ( 1 )
    그는 불륜의 상대이지만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삶의 의욕이 생긴다. 이유는 나에게 있어서 단 한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님과 함께 했던 날들 ( 1 ) 언제부터 쓰려고 했던 아니, 써보고 싶었던 나의 한국생활이였다. 몇번이나 망설이다가 인제서야 결정을 하게 된것은 다름 아닌 내가 쓰고저 했던 것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성공한 성공사가 아니라 뭇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을수 있는 불륜사였기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내가 여직껏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였고 힘들고 고되였던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이기때문에 나는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이 글을 쓴다. 처음에 그 사람을 알게 된것은 우연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만남은 필연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우리 두사람은 너무 우연하게 인터넷을 통하여 알게 되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사람도 나도 첫 방문취업제시험에 참가했고, 장춘으로 방취제시험 치러 갔을때 같은 호텔에 들었었고, 같은 날 같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었다. 내가 한국에 행장을 푼 곳은 언니네 부부가 살고 있었던 단칸 지하방이였다. 부모님도 한국에 계셨지만 아버지는 현장근처의 고시원에 계셨고 엄마는 가정집에서 일하고 계셨다. 그러니 내가 갈만한곳이 언니네 집밖에 없었다. 나는 언니네 부부와 같은 방을 써야 했기때문에 야간일을 찾았다. 마침 동네의 감자탕집에서 홀서빙을 구한다고 써붙인것을 보고 면접을 봤더니 이튿날부터 출근 하라고 했다. 야간일은 취직이 쉽게 되는것 같았다. 많은 동포분들이 한국에 금방 와서 겪었던것처럼 나도 고장의 낯설음에, 일터에서 받는 스트레스에 그리고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딸애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에 훌쩍거렸던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럴 때마다 그가 보내오는 핸드폰 문자메세지에서 용기를 얻고 눈물을 쓰윽 닦으면서 일을 하군 하였다. 어느날, 잠에서 깨여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 사람이였다. 웬만해선 전화를 하지 않는 사람인데 웬일일까 하는 의혹을 품은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나요, 나 취직했소. 자동차부품회사인데 조건이 좋소. 퇴직금도 있고 4대보험도 해준다오.> 흥분에 들뜬 그의 목소리가 그대로 전달되여 오는것 같았다.<어머나, 진짜 잘 댔슴다. 축하함다!><양, 고맙소. 면접통과됐다고 전화받자마자 제일먼저 제한테 전화하고 싶은걸 꾹 참았소. 야간하고 자고 있는 저를 깨울까바… 헤헤>그 남자의 솔직하고 소박한 고백을 듣는 순간 나의 가슴속엔 이름 못할 그 무엇이 뭉클해왔다. 나도 누구에겐가 그런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뿌듯하다 라고 해야 하는지 말로 표현할수 없는 그런 위안감이 들면서 우리가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인것처럼 느껴졌다.시간이 하루 이틀 지나면서 하루에도 수십통씩 왔다갔다 하는 문자메세지를 통해 우리 두 사람사이는 더없이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서로에 대해 하나둘씩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였다. 나도 내 처지에 걸맞지 않은 뒤늦은 사랑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편 내가 이러면 안돼… 안돼하면서도 사랑의 유혹을 물리치려 하면 할수록 쇠붙이가 자석에 끌려가듯 보이지 않는 끈끈한 그 힘을 도저히 당해낼수가 없었다. 어느날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둘다 한국은 낯설어서 장소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우리 언니네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 사람이 쉬는 날 언니네 집으로 왔다. 그렇듯 가까워진것 같았지만 정작 만나니 좀 어색했다. 내가 아래목에 깔고있던 담요를 들면서 추운데 따뜻하게 몸 좀 덥히라고 했다. 그는 쑥스러운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내가 시키는대로 나를 마주 향해 앉았다. 숨막히는듯한 작은 공간에서 단둘이 있으니 내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고 쿵쿵하는 그의 심장박동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가 살살 내 발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키스해도 돼?>라고 내 귀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난생처음으로 알게 된 달콤한 키스의 황홀함에 취해서 나는 그냥 그가 하는 대로 내 몸을 맡겨버렸다. 폭풍우만 같았던 한차례의 정사가 끝나고 그는 나의 곁에 벌렁 누워 내 머리밑으로 팔을 넣어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주르륵 하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의 섹스여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불륜을 저지른데 대한 후회의 눈물인지 나도 알수가 없었다. 사람은 때론 심정이 착잡할때도 눈물이 흐르는가보다. 뜨끈한 액체의 흐름을 느끼고 의아한듯 <왜??>하고 묻는다. <후회하니?> <아님다. 그런게 아님다.> 그는 더욱 나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면서 <사랑해~>하고 속삭였다. /김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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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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