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사람이 이 세상에 태여나서 제일 먼저 불러 본 이름은 어머니일 것이다. 하지만 일곱살에 아버지를 여읜 나로서는 아리숭한 기억으로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남들이 <어버이날>이나 명절이면 귀중한 선물 보따리 들고 부모님 보러 갈때면 이 좋은 세상에 살면서 인간의 락도 누리지 못하고 뇌중풍으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발자국을 한번 뒤돌아 보는 글을 써보고 싶다. 한번도 속 시원히 불러보았으면 원이 없을 그 이름 <아버지>하고 웨치면 저멀리 고향에 울려가서 화답이나 할까?


어머니 한테서 들은바에 의하면 6남매중 막내 아들이였는데 일곱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11살에 자궁출혈로앓으시다가 사망한후 형님집에 있을 형편이 안 되여 훈춘 맞은 켠에 있는 온성에 가 소몰이를 하였다.그때 그 곳의 아이들은 머리를 깎고 다니였다. 아버지는 머리태를 드리우고 있다고 애들이 뒤를 쫓아 다니며<개꼬리>를 달았다고 놀려대는 것이였다. 이에 그이는 당날로 벽돌장을 놓고 다른 벽돌로 머리를 찟찧어 잘라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자라서 엄마와 결혼할 때에도 처가살이를 하고 큰 아들을 낳은후 용정시 교외에 있던 ㅅ촌 과수원막에서 있는 세째 형님네 집에 가 잔치상을 받아 큰오빠는 부모잔치 떡을 먹은 아이라고 친척들이 외우는걸 들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일제시기에 목단강에 집단 이민을 가셔서 벼농사를 하여 출하(소작료)를 바치고 나면 남는 것이 얼마 안 되였다.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다보니 일본사람들이 장부책을 들고 수판을 튕기며 이리저리 떼우고 하면 <왜 이리 많으냐?>하고 한 마디 하면 <바가야로>하면서 귀쌈을 맞아대군 했다. 아버지는 아들둘을 둔 아빠지만 1942년에(그때 33세였음) 글을 알아 장부도 보고 문맹을 벗어나려고 용정에 있는 대성 중학(윤동주 중등학교)에 밤에 배워주는 광명학원에 다닐려고 나오셨다. 낮에는 온돌 수리도 하고 미장공일도 하면서 밤에는 공부에 열중했다. 학원에 가 우리 말도 배우고 간단한 수자부터 시작하여 장부도 볼 수 있게 되였으며 일년을 게으름없이 배우시여 문맹을 벗어 나셨다.아버지는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용정에 이사오셨다.


아버지는 농사일도 미립이 있었고 항상 깔끔하고 중국말도 잘하셨고 한족분들과도 잘 어울리셨다. 어린 제 기억에 의하면 한 번은 차가집 조카벌 되는 분이 아버지를 모시고 식당에 가 술을 많이 대접했는데 그날에 머리가 너무 아프시고 시신경이 잘못되여 몸져 누워 있으시다가 뇌중풍이 와서 치료 효과를 보지 못하고 49세로 이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안타까운 말 한마디가 생각난다. <이렇게 빨리 갈 줄 누가 알았겠니? 사람이 사니깐 오랜 것 같지,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죽는 게 사람이다.>이젠 누구의 말도 들을수 없는 나다.


이세상 부모님들이 여생을 행복하기를 바라며 오늘은 아버지 그 이름을 떠올리며 그 분의 짧은 생애를 떠올리며 이 세상세상에 태여나 마음껏 살게 하심에 감사를 드리며 잊지 못할 아름다운 그 이름 아버지,아버지 나의 아버지여,,,,,,
/현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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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리운 그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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