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8(화)
 


■ 김철균


순자는 처음에 용정에 있는 명훈녀자중학교에 다녔다.

순자네가 사는 동네에서 용정까지의 거리는 20리도 넘었다. 그러다보니 순자의 어머니 윤씨는 늘 꼭두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었고 순자는 말 그대로 별을 이고 나가서는 달을 이고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더군다나 여름철 큰비가 쏟아지거나 겨울에 큰눈이 내릴 때면 그 고생이 더욱 막심하였다.

캡처.PNG순자는 이를 악물고 공부에 열심했다. 수업시간에는 물론 학교로 가거나 집으로 돌아올 때면 늘 과문같은 것을 외우군 했다. 일반적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20여리 길이면 한개 과목을 거침없이 줄줄 외울 수 있도록 암송할 수도 있었다.

이토록 등교하거나 귀가하는 시간마저 공부에 푹 빠지다 보니 길을 오끼여 생뚱같은 길에 들어설 때도 있었다.

순자가 명훈중학교에 붙은 그 해의 겨울이었다. 어느날 오후 하학하자 순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늘 등교와 하학할 때마다 동행하던 이웃 학급의 한옥단을 찾았다.

옥단이는 순자와 몇년전부터 진작 절친한 사이었다.

일찍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늘 그와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10살 때의 어느 겨울날 옥단이가 입은 옷이 너무 얇아 순자가 자기의 옷을 벗어주면서 그와 옷을 바꿔입은 것이 인연이 되면서 그런 절친한 사이가 됐다. 그때로부터 옥단이는 순자라면 둘도 없는 친구로 여겼고 순자는 집에 맛나는 것이라도 있으면 늘 자기보다도 더 어렵게 자라는 옥단이한테 가져다주군 하였다. 그러면서 둘은 또 중학교까지 함께 다니며 거의 매일마다 길동무가 되었다.
그런데 그날만은 옥단이한테 다른 사연이 있었다.

“얘 순자야. 어쩌지? 오늘 용정에 있는 이모네 집에 행사가 있어 난 거기에 가서 묵어야겠구나.”

“그래, 그럼 별 수 없지 뭐.”
“아니, 그러지 말고 우리 함께 이모네 집에 가서 함께 자자꾸나. 네가 가면 우리 이모도 몹시 반길거야. 이전에 이모한테 네 말을 했더니 한번 널 데리고 오라고까지 했단다.”

옥단이의 성의가 고마웠지만 순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순자가 집으로 가지 못하면 그만큼 부모가 근심하며 찾아다니기 때문이었다.

“안돼, 난 집으로 가야 해. 그리고 그냥 다니던 길이기에 괜찮아.”
순자는 미안해하는 옥단이와 작별하고는 혼자서 귀로에 올랐다.

순자는 여전히 종전처럼 그날 배운 과목에서 암송해야 할 부분을 외우며 길을 다그쳤다. 길에서 이렇게 과목암송같은 것을 하면서 걷노라면 힘드는줄도 모르고 또한 어느결에 집에 도착했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헌데 그날 순자는 너무 과목암송에 집착하다 보니 그만 집쪽 동네로 향하는 길이 아닌 다른 동네쪽으로 통하는 길에 들어섰다.

토끼꼬리처럼 짧은 겨울해는 어느덧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혼자서 과목을 중얼거리며 걷던 순자는 갑자기 산쪽에서 들려오는 승냥이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사위를 둘러봤다.

순간, 어쩐지 자기가 걷는 길이 생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갑자기 뒤잔등이 섬뜩해났다. 용정을 떠날 때 두 남학생의 뒤만 따라 걷다보니 그만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분명했다.

(이를 어쩌나?…)

불현듯 멀지 않은 산등성이에 두줄기의 새파란 불빛이 번뜩하는 것 같았다. 승냥이와 호랑이까지 자주 출몰한다는 산골이라 더럭 겁부터 났다. 또한 자기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기다리다가 찾아떠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오빠 등이 크게 근심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순자는 종주먹을 쥐고 오던 길로 되돌아서며 종달음을 쳤다…

그가 갈림길목에 도착하여 다시 고향동네로 가는 길에 들어선지 얼마 안되어 아니나 다를가 아버지와 큰 오빠가 홰불을 켜들고 “희숙아, 희숙아!(해방후엔 순자의 이름이 “희숙”이로 불려졌음)”하고 부르며 길을 훓는 것이 보이었다.

그날 밤, 순자는 아버지가 학교를 당장 그만두라고 할가봐 가슴이 한줌만해졌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순자를 꾸중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호령 대신 긴 한숨을 내쉬더니 쌀을 팔아 세방을 구한 뒤 순자더러 용정에서 자취하면서 공부를 하게 하자고 어머니와 상론하는 것이었다.

순자는 용정 해란강가에 있는 한 자그마한 방을 세맡고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순자가 워낙 알뜰하고 상냥한데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사는 방주인도 매우 착한지라 방주인과 순자는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살 수 있었다.

세방을 맡고 자취생활을 한지 몇 개 월 후 순자는 명신여자중학교로 옮겨 다니게 됐고 남동생 구춘이도 용정의 어느 한 중학교에 입학하여 오누이가 세방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당시 해방직후라 생활이 간고함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해방된 이듬해라 모든 것이 몹시 부족한 상황이었다. 집에 얼마간 있던 쌀도 용정의 세방을 맡느라고 적지 않게 팔아버린 상황에서 부모님들은 순자와 구춘이한테 넉넉히 쌀을 보내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잘 알고도 남음이 있는 순자는 부모한테 무작정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순자는 공휴일마다 용정부근의 농촌으로 다니며 삯일을 하여 받는 쌀과 남새로 살림에 보태군 하였다. 헌데 그것으로 남동생 구춘이와 둘이서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판부족이었다.

당시 구춘이는 한창 자라는 나이어서인지 밥 한그릇을 게눈감추듯 비우고는 모자란듯 입을 쩝쩝 다시군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자기 그릇의 밥을 구춘의 그릇에 갈라주군 하다보니 자신은 늘쌍 배를 곯군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순자의 학급에는 영숙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애 역시 아주 째지게 가난한 집의 딸이었다. 그 애가 자기네보다도 더 가엽다고 느낀 순자는 자주 그 애를 데려다 밥을 먹이군 했는데 그런 날이면 곧바로 순자가 굶는 날이었다. 하지만 천성이 착한 순자는 남동생과 영숙이가 밥을 맛스레 먹는것만 봐도 배가 부른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셋째 오빠 구완이가 김용환이라는 동창생과 함께 순자네가 기거하는 자취방으로 찾아왔다. 부모님이 보내준 좁쌀과 버섯, 감자 등을 가져왔던 것이다.

오빠와 함께 온 용환이라는 청년은 옷은 비록 람루하게 입었지만 얼굴은 매우 준수하게 생겼으며 그닥 크지 않은 두눈은 수심에 잠겨있으면서도 가끔씩 예지로 번쩍이기도 했다.

가난한 집 애들이 거개가 그러하듯이 용환이라는 청년은 오빠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머리를 수그리고 말이 없었다.

순자는 방 한쪽구석에 쪼크리고 앉아 오빠와 용환이란 청년이 밥을 먹는 모습을 번갈아 지켜 보았다.

(저 청년은 왜 생기가 없을까? 혹시 한쪽 부모라도 없는 것이 아닐가? 하긴 요즘 세월에 양쪽 부모가 모두 계신다 해도 가난하면 어깨가 처질 수밖에…아니, 내가 웬 쓸개빠진 궁리를 하는거야. 저 청년이 나한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

순자는 자기의 생각대로 억측하고 또 그것을 부정하군 하다가 둘의 식사가 끝나자 부랴부랴 설겆이를 시작했다.

오빠와 그 청년이 돌아간 뒤에도 순자는 자꾸 용환이라는 청년의 얼굴모습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뒤숭숭해났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자고 했지만 그렇게 안되었다.
순자는 잡생각을 떨쳐버리려고 동생이 벗어놓은 옷을 대야에 담아들고 해란강가의 빨래터로 향했다.
……
그 뒤에도 그 청년은 오빠와 함께 몇번 순자가 기거하는 자취방에 나타났다. 헌데 두번째부터는 얼굴에 어쩐지 생기가 도는듯 했고 순자와 얼굴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매우 거동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건 순자도 마찬가지었다. 거기에 순자는 용환이와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몰래 가슴이 콩콩 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어디로 가는 길에 순자네 자취방에 들렸다면서 오빠는 용환이와 동행했다.

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형세에 대해여 논하면서 “조선에서 3.8선이 생긴이래 남북내왕이 몹시 불편해졌소”, “남조선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데 좌우익갈등이 매우 심하다오”, “우리 중국에서도 공산당의 모택동은 연합정부를 주장하지만 국민정부의 장개석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소” 하며 여러 가지를 화제에 올리군 하였다. 헌데 목에 피대를 살구어가며 열변을 내뿜는건 오빠 구완이었으며 용환이는 외딴 생각을 하는지 오빠가 “자네 안 그런가?”하고 툭 다쳤어야 “엉?! 그래, 그거야 그렇구 말구”하며 오빠가 내놓은 화제에는 영 취미가 없어하는 눈치었다.

“자네, 오늘 왜 이래? 웬 딴궁리를 하는가?”

“아니, 딴궁리는 무슨 딴궁리…”

“자네 혹시, 내 여동생한테 관심이 있는거 아닌가?”

“아니, 아니야!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고 나같은 신세에 언제 자네의 여동생을 다 넘보겠는가?!”

그러면서도 용환이는 삽시에 얼굴이 홍당무우처럼 빨개지었다.

“글쎄 자네같은 수재라면야 내가 뭐 마다할리 없겠소만은 우선은 우리 부모님이 허락해야 하고 또 관건은 저 애의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네…”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화제가 이렇게 돌아가자 순자는 더는 들을 수가 없어 살며시 밖으로 나와버렸다. 하지만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하여 출입문밖에서 엿들으려 했으나 가끔씩 오빠의 웃음소리가 들려올뿐 둘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도무지 더 이상 한마디도 엿들을 수가 없었다.

순자는 후에야 오빠를 통해 용환이가 착하고 총명하며 공부도 아주 잘하지만 의지가지가 없는 고아라는것과 일제시대에는 일본인가정의 배달같은 것을 하면서 겨우 공부를 했으며 지금도 생활환경이 영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용환이가 확실히 너한테 관심이 있으며 그의 생활환경이 그러하니 네가 알아서 결정하라”는 암시와도 같았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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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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