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투데이] 백두산 자락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서면 용정시 명동촌이 나온다. 소박한 기와집과 푸른 담장이 맞아주는 이 마을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고향이다. 그러나 이곳은 한 시인의 생가를 넘어선다. 근대 조선 민족운동의 요람이자, 교육·종교·문화가 교차한 북간도의 심장부였다.
1906년 서전서숙이 문을 닫자, 김약연은 뜻을 이어 1908년 명동학교를 세웠다. 일본의 압박 속에 국권을 잃은 젊은이들에게 이 학교는 유일한 길이었다. 국어와 역사를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심으며, 독립운동 사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명동학교는 기독교 선교와 결합해 민족교육의 거점이 됐고, 수많은 인재들이 이곳에서 길러졌다.
윤동주 역시 명동학교에서 기초를 닦았다. 그의 절제된 언어와 깊은 성찰은 단순한 문학적 감각이 아니라, 어린 시절 민족교육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윤동주의 생가는 한때 사라질 위기에 놓였으나 1990년대 복원됐고, 2011년에는 명동학교도 재현됐다. 지금은 중국 정부가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중점 문물보호단위로 관리한다. 전람관과 시비가 세워지면서 매년 수만 명이 찾는 역사 현장이 됐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복원된 뒤 한국에서 오는 손님이 끊이지 않습니다. 시인을 기리는 동시에 우리 조선족의 뿌리와 역사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지요.”
명동촌 주민 정춘화(72) 씨의 말이다.
생가 마당에는 「서시」 구절이 새겨진 시비가 서 있다. 하지만 방문객들이 더 자주 떠올리는 것은 「별 헤는 밤」이다.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윤동주가 노래한 별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다. 유년과 고향, 민족과 미래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북간도의 차가운 밤하늘을 비추던 별빛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 길을 찾으려는 청년의 호소였다.
명동학교 교사 출신 후손 김현수(가명·48) 씨는 “윤동주 시는 조국을 향한 갈망과 인간으로서의 성찰이 함께 담겨 있다. 우리 2세, 3세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교과서”라고 말했다.
명동학교와 윤동주 생가는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다. 국권을 잃고 떠밀려온 조선인들이 학교를 세우고 시를 쓰며 신앙을 지켰던 ‘기억의 현장’이다.
윤동주의 짧은 생애는 북간도의 역사와 겹친다. 그의 시는 개인의 고뇌이자 민족의 비망록이었다. 지금 이곳을 찾는 수많은 발걸음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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