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8(월)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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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신명이시여, 비록 우리 셋이 성은 다르나 이미 형제가 되었습니다. 위로는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평안케 할 것을 맹세합니다. 비록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나지 못했지만 한날한시에 함께 죽길 바라니 천지신명께서 굽어 살펴 주소서. 만일 우리 중에 은혜를 입고 의리를 저버린 사람이 있다면 하늘과 사람으로 하여금 죽이도록 하여 주소서!”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으며 한 굳은 맹세이다. 이것을 도원결의라고 한다.


그런데 이 도원결의는 역사에는 없었고 나관중이 그려낸 창작품이다. 바꿔 말하자면 도원결의는 역사사실이 아니라 문학이 지어낸 허구라는 것이다. 천재적인 글쟁이 나관중은 이 문학적인 허구로서의 도원결의를 소설 <삼국연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삼국연의>는 도원결의부터 막을 열었다는 뜻이다.


<삼국연의>에서는 이 세 사람이 유비의 고향인 탁군(涿郡)의 한 주막에서 만난 것으로 지어냈는데 진수의 <삼국지>를 비롯해 사서에서는 이들이 어떻게 만났다는 기록이 없다. <삼국지> 관우전에 의하면 “관우는 자가 운장(雲長)이고 본래 자는 장생(長生)이며 하동군 해현 사람이다. 망명하여 탁군으로 달아났다. 유비가 고향에서 병사들을 모을 때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호위했다. 평원의 상이 된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아 군대를 나누어 이끌도록 했다. 유비는 잠 잘 때도 두 사람과 함께 했으며 정이 형제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장비전에서는 “장비는 자 익덕(益德)이며 탁군 사람으로 젊어서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연장자이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했다.”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나관중은 관우전에 등장한 위 대목에 근거하여 뻥튀기로 도원결의라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지어냈다.


유비, 관우, 장비 이 세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가 하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고 왜 만났는가가 중요하다. 당시는 황건적 난이 한창일 때였고 각 군현(郡縣)에서 황건적을 토벌할 의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 세 사람도 의병에 나서려는 공통된 분모가 있어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려고 관에서 모집한 의병에는 유비, 관우, 장비의 명성이 아주 별로였다. 세상 사람들이 아직 이 세 사람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아주 미미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관중은 왜 <삼국연의>의 첫머리를 이 세 사람을 내세워 도원결의라는 아이디어로 스타트를 끊었을까?


도원결의의 핵심 포인트는 의리(義理)다. 의리는 유교에서 충과 효와 더불어 추구해야 할 핵심가치이다. 즉 충, 효, 의를 떠나서는 유교를 아예 논의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핵심가치이다. 서로 태어난 시간은 달라도 한날한시에 죽기를 맹세하고 세 사람은 잠 잘 때도 함께 했다는 것은 강호의 영웅들 가운데서도 정말 매력이 넘치는 의리의 호걸들이다. 따라서 관우와 장비는 죽을 때까지 유비를 주군으로 모시면서 단 한 번이라도 배신을 때린 적이 없을 만큼 충성을 다 바쳤다. 비록 한날한시에 죽지는 못했지만 도원결의 맹세를 굳건하게 지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그 난세에 조조의 업적이 이들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또 영웅호걸의 넘버완을 꼽으라면 조조가 당연히 앞자리를 차지해야 하는데도 이 세 사람을 첫 스타트에 내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인간은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계급적인 낙인이 찍히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또 “한 사건을 분석하려면 그 당시 조건과 환경을 우선 살펴야 한다.”고 했다.


<삼국연의>를 알려면 나관중이 처한 시대배경을 알아야 한다. 나관중은 명나라 초기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관중은 어떤 계급적인 낙인이 찍혀 있었고 또 그가 처한 조건과 한경은 무엇이었나? 이것을 모르면 도원결의를 모르고 나아가서 <삼국연의>를 모른다. 그냥 도깨비 기왓장 펼치듯 모르고 읽는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관중은 유교의 낙인이 깊이 찍혀 있은 사람이다. 이에 대한 이해는 우선 유교의 흐름부터 살펴보아야 마땅하다.


유교는 유학에서 진화되었다. 공자를 유교의 교주라고 말하는데 공자는 오히려 자신은 옛 선인들의 업적을 서술하여 말했을 뿐 새로 지어내지 않았다(述而不作)고 말했다. 즉 공자는 요순으로부터 주공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학문을 이어받아 세상에 알렸을 뿐 자신은 새로 지어낸 것이 없다는 뜻이다. 어찌되었든 공자시대, 즉 춘추시대에는 공자를 비롯한 학파를 유가라고 분류하고 그들의 학문을 유학이라 불렀다. 그러데 당시에는 유학이 별로 인기가 없었고 공자도 성인의 반열에 이를 만큼의 자격이 있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 감투가 없나 해서 14년 동안이나 천하를 떠돌았지만 결국 감투는 차려지지 못했다.


전국시대에 들어 유가는 법가나 병가에 밀려 더욱 맥을 추지 못했다. 진시황 때는 유생들이 생매장 당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그러다가 한나라 무제 때 동중서에 의해 유학이 나라를 통치하는 이데올로기로 부상함에 따라 유학이 유교로 진화하였고 선비가 관직을 독차지하는 사회로 되었던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를 보면 다수의 인물전에 “00는 효렴에 의해 낭(郎,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뜻)이 되었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관직에 오르려면 유교를 떠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현학이 부상하기는 했으나 나라통치 이념은 여전히 유교였고 그 이후에도 명유암법(明儒暗法)이란 말이 있듯이 겉으로는 유교, 내적으로는 법가로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긴 하나 전반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유교가 우세했다. 당나라에 이르러 유불도 삼교합일에 의해 유교가 조금 밀리기는 했지만 통치 이데올로기 자리는 내주지 않았다.


문제는 유교가 강력하지 못해 당나라가 망했다고 여기고 송나라에 이르러 유교가 강화된다. 유교가 강화 될수록 이때부터 유비를 내세우고 조조를 깎아내리는 경향이 심각해진다.


중국의 사서 가운데서 영향력이 꽤 큰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편찬 과정에서 조조에게 유리한 사료를 적지 않게 삭제해버리고 유비에게 불리한 부분을 대폭 수정했다. 소동파는 <지림(志林)>에서 당시 저잣거리에서 책을 읽다가 청중들이 “유현덕이 패했다는 부분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더니 조조가 패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다.”고 말했다. 이중텐 교수는 “이것이 북송의 분위기였다.”고 지적했다. 오랑캐에게 밀려 남송에 이르자 유교가 더욱 강화되어 신유학이 나올 정도였으며 조조를 ‘적(賊)’으로 공인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몽고족이 통치한 원나라를 걸치고 명나라에 이르자 유교의 고삐를 더욱 세게 조인다. 나관중은 바로 명나라 초기 사람으로서 이러한 사회분위기에 편승하여 <삼국연의>를 짓다보니 한나라 황실부흥을 삶의 최대가치로 간주했던 유비의 충(忠)의 사상을 최 정점에 놓고 따라서 의리의 아이콘인 관우와 장비를 거창하고 아름답게 포장함으로써 시대흐름에 순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제갈량을 선비들의 모델로 각색함으로써 유교를 최고 가치로 여기는 당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점수를 높게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낙관중의 붓에 의해 각색된 유비와 제갈량은 후세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가 되었고 조조는 아주 나쁜 놈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에 이르러 건륭제(乾隆帝)가 최종 평가를 내림으로써 조조는 ‘찬역자(簒逆者, 나라를 찬탈한 역신)’로 낙인 찍혀 더 이상 뒤집힐 수 없게 되었다. 조조를 나쁘게 만들면 만들수록 유비의 주가가 치솟아 오르게 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것이 우리가 삼국시대에 대한 이해로 자리매김 되어 왔던 것이다.


한편 유비, 관우, 장비의 의형제를 맺는 결의가 왜 하필이면 도원에서 거행되었을까? 도원은 우리말로 복숭아 과원이다. 복숭아는 고대 중국에서 문화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다산의 상징이고 다른 하나는 귀신을 쫓아내는 축귀의 기능이다.


인간이 수렵하기 전 상고시대에 주요 먹거리는 열매였다. 사과, 배, 복숭아, 감, 귤, 앵두, 살구, 자두 등 열매는 외형상 여성의 음부를 닮았다. 여성의 음부에서 아이가 생산된다. 초기 인류의 생식숭배 행위는 주로 여성의 음부숭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단지 여성의 음부를 숭배하는 것만으로는 다산의 효과를 이루는데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자연계에서 음부를 닮은 과일을 고르게 되었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사하게 생긴 것이 복숭아여서 복숭아가 으뜸의 숭배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에 여성의 음부와 비슷하게 생겼고 다산인 물고기를 숭배하였고 조금 더 진화해서 역시 다산의 상징인 개구리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역사에서 모계씨족사회 두령이 여와인데 여와의 와(蝸)는 개구리 와였고 후세에 내려오면서 여자 변이 붙은 0로 변했다.


계속해서 복숭아 얘기로 돌아가 말하자면 복숭아가 여성을 상징하고 따라서 다산의 상징이 됨에 따라 귀과(貴果)로 대접받는다. 중국에는 유명한 번도(嬏桃) 전설이 있다. 즉 서왕모가 수천 년 묵은 나무에 열린 번도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먹으면 장생불로해진다고 한다. 서왕모가 삼황오제와 여러 신의 우두머리들을 모여 놓고 번도 연회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곧 생식숭배로 인한 복숭아에 대한 숭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복숭아가 ‘여음’을 상징하는데서 남자의 여자 관계운을 ‘도화운(桃花運)’이라 하고, 남녀가 연애로 몸을 그르치는 일을 ‘도화’라 비유하고, 남녀가 치정 때문에 벌어진 사건을 ‘도화안(桃花案)’이란 말들이 생겨났다.


복숭아가 이렇게 여성의 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복숭아는 이렇게 신성시 되어 여자의 이름에 도(桃)자가 있으면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대표적인 것이 곧 도화(桃花)라는 이름이다. <삼국유사>에 진지왕과 도화녀의 ‘로맨스’ 이야기가 있는데 도화녀는 미색이 뛰어난 여인이라고 한다.


우리민족은 제사상에 복숭아를 올리지 않는 금기가 있다. <이조각문헌 풍속관계자료요지>에 의하면 “도(桃)와 리(鯉)를 제사에 사용치 않는 것은 <공자가어(孔子家語)>와 황씨설(黃氏說)에 의한 것이라 했다. 후세인이 이 이자(二者)를 쓰지 않는 것은 속기(俗忌)에 의한다. 즉 도는 귀를 쫓고 리는 화룡(化龍)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중국 일부 학자들은 공자님이 복숭아와 잉어는 ‘여음’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물건(東西)이므로 남자를 계보로 하는 조상제사에 올리는 것을 금기로 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도실(桃實)에 대한 숭배는 전체 도목에 대한 숭배로 확대되었으며 따라서 도목은 나무 중에서 으뜸으로 가는 신목(神木)으로 꼽혔다. 원시인류는 인간이 병드는 것은 사기(邪氣:귀신)가 침입한 결과라 보고 귀신을 쫓으면 병이 낫는다고 여겼다. 예를 들면 정신병환자는 동쪽으로 향한 도기(桃枝)로 머리를 때리면 낫는다는 전설이 있다. 중국에서는 ‘목주(木主)’를 도목으로 만들고, 도교와 불교 사찰에서 ‘인부(印符)’를 도목으로 했으며, 도궁(桃弓)은 진사(鎭邪)한다는 등등의 전설이 많다.


이렇게 도실은 신실(神實)이요, 도목은 신목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터전을 도원(桃園)으로 명명 했을 것이고 따라서 유비, 관우, 장비의 의형제 결의를 맺는 장소를 도원으로 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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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⑲ '삼국연의'는 왜 도원결의로 서막을 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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