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8-01(일)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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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통사> 저자 판원란(范文瀾)은 기원 190~280년까지 사이를 삼국시대라고 정의하였다. 삼국시대는 중국역사상 비교적 혼란한 시기였고 이 난세에 영웅이 속출하여 중국 고전소설 중 나관중의 <삼국연의>가 지금까지 가장 인기가 높다. 이 시대 영웅들 중 누가 가장 걸출한 정치가였을까? 사람들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제갈량이나 유비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제갈량이나 유비는 당시 가장 걸출한 정치가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제갈량이나 유비를 걸출한 정치가로 떠올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소설 <삼국연의>에 속아왔기 때문이다. <삼국강의(品三國)>로 유명해진 이중텐 교수는 “역사인물은 역사적인 이미지, 문학적인 이미지, 민간적인 이미지 등 세 가지 이미지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갈량과 유비에 대한 인식은 모두 문학적인 이미지일 뿐 역사적인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가장 걸출한 정치가는 누구였을까? 조조였다. 물론 조조에 대한 평가는 삼국시대 직후 진(晉)나라 때부터 현재까지 복잡하고 다양하며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가 더 우세했다. 조조에 대한 나쁜 평가는 두 가지에서 기인된 결과인데 하나는 유교적인 영향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학이 그려낸 이미지가 영향을 끼친 탓이다.


현대에 들어 조조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은 노신이다. 그는 <위진시대의 품격∙문장과 약∙술의 관계>라는 글에서 “조조는 대단한 사람이며 적어도 영웅이다. 내가 비록 조조와 한패는 아니지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말했다. 가장 최근에 와서 조조를 전면적으로 명예회복을 시킨 것은 이중텐 교수이다. CCTV 백가강단 프로에서 <삼국강의(品三國)>를 진행하여 중국 사람들이 조조에 대해 새롭게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관점을 바꿔놓았다.


필자는 이중텐 교수의 조조에 대한 명예회복이 바로 조조의 역사적이면서도 진실에 부합하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조조의 역사적인 이미지의 진실은 어떠했는지?

    

조조의 출생비밀과 개구쟁이 청소년 시절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조조를 서한(西漢)의 상국(相國) 조참(曹參)의 후예라고 기록했는데 이중텐 교수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말한다. 조조의 성조차도 본래 조씨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조라는 성은 그의 부친인 조숭(曹嵩)이 조등(曹騰)의 양자가 되면서 얻었기 때문이다. 양자관계라면 전혀 혈연관계가 없다. 가령 조등이 조참의 후예라는 것을 고증해내더라도 조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조조의 아버지는 조숭이 분명하지만 조숭은 누구의 아들일까? 아무도 모르는 수수께끼였다. 역사학자 진수도 이에 대해 더 자세하게 밝힐 길이 없어 애매모호한 말을 남겼다.


“그의 출생의 전말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한국드라마에 단골소재로 등장하는 출생비밀이 2천 년 전 조조도 안고 있던 문제였다.


조조는 자기 자신의 가문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었을까? 그는 <가전(家傳, 족보에 해당함)>을 지을 때 “조숙진탁(曹叔振鐸)의 후예라고 칭했다. 조숙진탁은 주나라 무왕이 자신의 동생인 희진탁(姬振鐸)을 조읍(曹邑)에 봉해 조백(曹伯)으로 삼았는데 조숙진탁은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조조가 자신의 선대를 주 문왕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데 이것도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역사학자들은 주장한다. 왜 조조는 굳이 이렇게 거창하게 ‘족보’를 지어내려고 했을까? 있어보이기 위해서였다. 왜 있어보여야 했을까? 동한 말년에 사회관계에서나 출신 가문을 매우 중시하였으므로 조조가 비록 이런 풍조를 못마땅하게 여겼더라도 정치상의 필요에 의해 신분을 높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조의 아버지는 분명하기 때문에 조조는 환관가문에서 출생한 것이 명확하다. 조조의 아버지를 양자로 받아들인 조등은 당시 환관으로 비정후(費亭侯)에 봉해지고 대장추(大長秋)에 임명되었다. 대장추는 환관 중의 고관으로서 2천 석의 녹봉을 받았는데 오늘 날의 급별로 말하자면 성부급(省部級, 한국의 장관급에 해당함)이었으니 대단한 관원이었다. 조등은 사람 됨됨이도 괜찮아서 환관 중에서 사인들과도 잘 어울렸고 좋은 일과 큰일도 많이 해서 <후한서>에 전기가 실려 있다.


조등이 살던 시대는 후한 말로서 환관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때였다. 조등과 같은 환관은 관직도 높고 재산도 많지만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였던 것이다. 한편 관직도 높고 재산도 많았지만 환관이란 신분은 천대 받는 신분이었고 그들 가문에서 태어난 자식도 출생신분이 출세하는데 있어서 떳떳하지 못해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재산이 많아 생활이 매우 여유로웠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태위라는 관직을 1억 전(錢)을 주고 샀으니 조조도 어릴 적 부잣집 도련님으로 매우 호강하게 자랐을 것이다.


돈이 많은 가문에서 자란 조조는 가정교육이 별로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조조 자신이 이런 시를 읊었다.


“삼사(三徙)의 가르침도 없었고 과정(過庭)의 훈육도 받지 못했노라.”


여기서 ‘삼사’는 맹자의 엄마가 아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주려고 세 번 이사한 것을 뜻한다. ‘과정’은 공자의 아들이 마당을 지나갈 때 공자가 그를 불러 세워 두 차례 가르침을 준 일로, 한 번은 시(詩)를 다른 한 번은 예(禮)를 배우라고 말했다.


조조가 읊었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부모는 자녀교육에 별로 관심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돈은 많고 받은 교육이 허술하다면 그 아이는 어떤 아이었을까? 틀림없이 문제아다. 조조가 바로 문제아였다. 사서에 이르기를, “조조가 어렸을 때 매를 날리거나 개를 풀어놓고 사냥하기를 좋아해서 내키는 대로 마음껏 놀았다.” 숙부의 눈에는 조조가 아무래도 사람 질 할 것 같지 않아 걱정이 많았다. 그는 여러 차례 조조 아버지에게 좀 교육시키라고 일러바쳤다. 조조가 이 일을 알고 나서 숙부에게 보복하기로 맘먹었다. 어느 하루 조조는 길에서 마주 오는 숙부를 보자 입을 일그러뜨려 주둥이가 돌아간 것처럼 했다. 숙부는 곧 조조 아버지에게 조카가 풍을 맞았다고 알렸다. 놀란 조조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보니 입이 멀쩡해 있었다. 어찌된 사연인지? 물었더니 조조는 숙부를 혼내기 위해 연출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부터 조조의 아버지는 조조의 숙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릴 적 조조는 동네에서 말썽을 피우는 장난꾸러기, 개구쟁이 소년이었다. 어느 하루 조조와 원소가 동네 결혼식 구경 갔다가 갑자기 큰일을 저지른다. 어린 녀석들이 신부를 훔칠 끔찍한 맘먹고 기회를 노리다가 갑자기 ‘도둑이야!’고 외쳤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집에서 뛰쳐나오자 조조가 방에 들어가 신부를 둘러메고 달아났다. 너무 급한 나머지 도망갈 길이 막히자 원소는 덤불숲(일설에 의하면 깊은 구덩이에 빠졌다고 함)에 뛰어 들어 갔다가 가시에 걸려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조조가 갑자기 기묘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도둑이 여기 있어요.”라고 크게 외쳤다.


막다른 골목에 빠져 있던 원소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초인적으로 뛰쳐나왔다.


<삼국지>에서는 어릴 적 조조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젊어서부터 기지가 뛰어나고 상황 대처 능력이 매우 좋았다. 권모술수에 능했고 자신의 힘으로 남을 잘 도왔으며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지만 품행과 학업에는 정진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천박하다고 경멸했으며 후에 어떤 선비(남양의 명사 종세림, 宗世林)는 조조와 결연히 단교하기까지 했다.


부패한 세태에 실망한 청년 조조


소설 <삼국연의>에 다음과 같은 스토리가 등장한다.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려고 사도 왕윤에게서 칠보도를 선사 받는다. 조조는 동탁이 잠을 자는 침대에 접근하여 손을 쓰려는 찰나에 동탁이 잠에서 깨어난다. 당황한 조조는 칠보도를 동탁에게 바치러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칠보도는 천하제일 칼이므로 동탁도 눈이 번쩍 띄어 흐뭇해한다. 그 때 밖에 나갔던 여포가 동탁의 침실에 가까워지자 조조는 급히 인사를 올리고 방에서 빠져나온다. 여포는 조조가 동탁에게 칠보도를 바치러 온 것이 아니라 암살하러 왔다는 것을 밝히자 동탁은 조조를 잡아들이려고 현상금이 걸린 체포령을 내린다. 다급해진 조조는 목숨을 구하고자 낙양을 급히 빠져나간다. 조조의 동탁 암살 사건이 비록 실패했지만 당시 동탁이란 이름만 거들어도 모두 오금이 저려날 지경으로 무서워하는 ‘거인’을 죽이려한 조조의 용기에 감탄하여 조조는 일약 사회적으로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한 스타가 된다.


이 스토리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아니 듣기 좋은 말로 그냥 소설이 지어낸 허구이다.


그렇다면 조조는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었을까?


조조는 불량배 청소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조를 하찮게 보았다. 그런데 유일하게 태위 교현(橋玄)이란 사람이 조조를 높게 평가했다.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이니 당대의 걸출한 인재가 아니면 구제할 수 없을 것이오. 천하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대일 것이오.”라고 말하면서 처자식을 부탁하기에 이른다.


조조를 좋게 본 교현은 조조를 친구 허소(許劭)에게 소개한다. 허소는 당시 가장 유명한 감상가이자 평론가였다. 그는 매월 초하루에 당시의 인물들에 대한 품평을 발표하여 월단평(月旦評)이라 불렸다. 누구를 막론하고 한 번 논평을 거치면 그 해당인의 몸값은 백배로 뛰어오른다. 그렇게 되면 상류사회 진출이 훨씬 쉬워진다. 사회진출을 바라는 조조가 평을 부탁했다. 그러나 허소는 좀체로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졸라 할 수 없이 허소가 조조를 품평한다. 그 때 허소가 한 말이 현재까지도 시빗거리가 되어왔다.


“당신은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웃었다.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웃음의 의미에 대해서도 장삼이사의 견해가 매우 다르며 대체적으로 조조를 깎아내리는 쪽에 무게를 두어왔다.


<후한서> 허소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조조가 아직 벼슬을 하지 않았을 때 늘 공손한 말과 많은 예물로서 자신을 평가해주기를 원하였다. 허소는 그를 하찮게 여겨서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조조가 빈틈을 노려 허소를 협박하자 허소는 어쩔 수 없어서 ‘그대는 태평한 시대에는 간적, 혼란한 시대에는 영웅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조조는 매우 즐거워하며 떠났다.”


조조는 관료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자신을 세상에 홍보하려고 허소를 졸랐을 수도 있고 또 자신이 방탕했던 과거도 있고 해서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허소한테 달라붙어 평을 부탁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조조는 왕성한 혈기를 지닌 청년의 들끓는 열기로 관직생활에 뛰어들었고 뭔가 큰일을 해내고야 말 것이라는 웅대한 포부를 지녔다.


조조가 처음 맡은 관직은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였다. 부현급이고 주로 치안담당인 경찰서장 역할이었다. 이 관직은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이 자리는 높은 자리도 아니었고 권한이 크지도 않았으며 책임만 무겁고 성가신 일도 적지 않았다. 천자가 사는 곳의 주변이라 권세가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이 권세가들은 국법도 안중에 없었고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렇다고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었다.


낙양북부위는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자리일 수 있지만 조조에게는 적합한 자리였고 열과 성을 다 해 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관서의 아문(衙門)을 새롭게 바꾸고 오색의 큰 몽둥이를 만들어 대문마다 10개씩 걸어놓고는 “금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권세가 있는 자라도 가리지 말고 모두 몽둥이로 때려죽이라.”고 명했다. 몇 달 뒤에 과연 사람을 때려죽인 사건이 터졌다.


영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환관 건석의 숙부를 때려죽였던 것이다. 건석은 지금의 청와대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관직을 맡고 있었으니 그의 숙부는 조조 같은 말단관료를 안하무인으로 대했다. 어느 하루 야간 통행의 금령을 공공연하게 어겼다. 조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를 오색 봉으로 때려죽였다. 실로 일벌백계였다. 이 일이 있고나서 수도에 밤에 나다니는 발걸음이 끊겼고 감히 금령을 어기는 자가 없어져서 치안이 크게 좋아졌고 조조는 이 때문에 조야(朝野)에 이름을 떨친 스타가 되었다.


그런데 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십상시 중에서도 세력이 만만치 않는 건석의 숙부를 때려죽였으니 당연히 후폭풍이 일기 마련이었다. 법으로 세상을 다스려 천하를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로 구축하려는 조조의 꿈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 되어 뒷공론이 자자했다. 그러나 누구도 대놓고 조조를 어떻게 하지는 않았지만 조조 스스로 세태에 염세증을 느끼고 관직을 떠난다.


왜냐하면 당시는 매관매직 풍조가 심각했고 관료사회는 부패하기 말이 아니었다. 그러한 열악한 환경에서 법제를 강화하려고 만약 계속 권세가들의 가족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세상이 조조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중텐 교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조조의 시대는 승냥이와 이리가 길을 막아섰고 여우와 살쾡이가 창궐했다. 조조는 지방관이 되었을 때 재빠르게 질서를 바로잡고 법률을 엄정하게 적용하며 맹렬하고 신속하게 움직이겠다는 중대 결심을 했다. 그가 탐관오리를 파면시키고 불법을 엄단하자 사악한 세력들은 조조라는 말만 꺼내도 무서워서 벌벌 떨었고 심지어 줄행랑을 놓는 사람마저 있었다. 그 결과 ‘정치와 교화가 크게 행해져서 군(郡) 전체가 태평’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그가 못살게 굴고 있다는 꼬투리를 잡은 밀고장이 끊임없이 어전에 전달되었고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임직을 변경하는 전근 명령을 낸다. 그의 부친 조숭이 음으로 양으로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그에게 좋은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결과’의 중국어 뉘앙스는 죽음을 의미하거나 적어도 인생을 망친다는 뜻이 있다. “이번에는 조조가 조정과 관리사회를 꿰뚫어 보았다. 그는 동한 왕조는 이미 치료할 약이 없으며 천하의 대란은 이미 역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설사 혼란해지지 않더라도 썩어 문드러진 조정과 관리사회는 더 이상 ‘치세의 능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라를 위할 길이 없음을 깊이 느낀 조조는 더 이상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거나 계책을 올리지 않았다. 아울러 또 한 번 조정의 임명을 사절하고(이번 임명은 봉록 2천 석의 동군태수였음) 고향으로 돌아와 성 밖에 집을 짓고 문을 걸어 잠그고 책을 읽었으며 한가할 때에는 사냥을 하면서 지냈다.”


얼마간 지난 후 조조는 다시 조정에 입조하여 전군교위(殿軍校尉)를 맡는다. 이 직책은 팔교위 중 서열 네 번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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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⑱ 삼국시대 가장 걸출한 정치가 조조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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