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 노농홍군이 강행한 2만5000리 장정에 참가한 이들 중에는 적지 않은 외국인들도 있었다. 거기에는 저명한 외국국적 공산당원이 있었는가 하면 이름도 남기지 않은 ‘무명영웅’도 있었다. 또한 장정도중 홍군을 위하여 많은 유익한 일을 한 외국인 전도사도 있었다.
그럼 오늘 이 글에서는 주로 4명의 외국인 공산당원을 소개, 이들로는 소련에서 온 이덕(李德), 조선에서 온 필사제(毕士悌)와 무정, 그리고 베트남에서 온 홍수(洪水) 등이다.

‘서양고문’ - 이덕(李德)
이덕(오토 브라운), 필명은 와플이며 소련에서 온 독일적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중국 노농홍군 장정의 전 과정을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장정의 중요한 결책자였으며 장정 초기의 주요한 지휘자였다. 지어는 전문가들이 중국 노농홍군의 장정을 연구함에 있어서 회피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1900년 9월, 이덕은 독일 뮌헨에서 출생, 제 1 차 세계대전 기간에 독일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18년에 바이에른 소비에트 창건에 참여했다.
이덕은 1926년 독일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감급되었다가 1928년에 월옥해 소련으로 갔으며 소련에서 푸룬제 군사학원에 들어가 학습하였다.
1932년 이덕은 공산국제의 파견으로 중국 상해의 극동국에서 사업하게 됐고 그 뒤 1933년 중공 임시중앙이 상해로부터 중앙소비에트 구역으로 전이됨에 따라 이덕 역시 중공중앙 군사고문의 신분으로 서금에 가게 되었다.
소비에트 구역에 온 후 이덕은 비록 중국혁명을 방조하려는 좋은 욕망을 갖고 있었지만 착오적인 군사지휘로 홍군은 중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최종 제 5 차 반 ‘토벌’전에서 엄중한 손실로 부득불 중앙 소비에트 구역에서 철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정 초기, 기획결책 ‘삼인단(三人团)’의 일원이었던 이덕은 여전히 착오적인 지휘를 고집, 첫 번째는 과분하게 기밀을 강조, 전략적 전이에서 있어야 할 정치동원 등을 하지 않았고 두 번째는 소극적인 전쟁 회피의 도망주의를 주장, 중앙홍군이 장정초기에 막대한 손실을 보게 했다.
1935년 1월에 소집된 준의회의에서는 ‘삼인단’을 철회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군사에서의 박고와 이덕의 지도직을 박탈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러 번 중앙 정치국 회의에서 그 모습을 보였다. 특히 1935년 6월, 양하구에서 있은 중앙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이덕은 중앙의 북상항일의 방침을 선명하게 지지, 장국도의 남하주장을 견결히 반대하였다.
1935년 10월, 이덕은 홍군과 함께 섬북에 도착했고 1939년 8월 연안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1974년 8월, 이덕 - 오토 브라운은 동부 독일에서 사망하였다.

‘군위 간부퇀 참모장’ - 필사제
필사제 - 원명은 김훈(金勋)이었고 또 양녕(杨宁), 양림(杨林)이란 별명도 있었으며 1898년 조선 평안북도에서 태어났다.
필사제는 1919년 조선에서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후에 비밀리에 중국으로 왔다. 1924년 그는 운남 육군 강무당(云南陆军讲武堂)을 졸업하고는 황포군관학교에 입학, 선후로 구대장, 교관 등 직을 맡았었고 1925년 여름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엽정(叶挺) 독립 퇀 영장으로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 후 1927년부터 1930년까지 필사제는 소련으로 가 선후로 모스크바 중산대학과 모스크바 보병학교에서 학습, 1932년 7월에는 조직의 배치에 의해 중앙소비에트 구역에 가 홍군 제 1 군 퇀 참모장, 노농홍군 학교 교관, 홍군 제23군 군장, 월강군구(粤赣军区) 사령원 등 직을 맡아했다.
상강전역 중 필사제는 군위 간부퇀을 따라 진경(陈赓) 퇀장과 송임궁(宋任穷) 정위의 지휘 하에 맡겨진 임무를 출중하게 완성, 1935년 2월 군위 간부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진경, 송임궁과 더불어 간부퇀을 이끌고 ‘개전전국(开展战局)의 관건시기’에 누산관(娄山关)을 점령했다. 또한 1935년 4월, 필사제는 간부 퇀을 지휘, 전 퇀 사병들을 국민당 부대로 변장시켜 140킬로미터를 강행군 하여 계획대로 교평도(皎平渡)를 점령한 뒤 이어 지형이 험준한 요새인 통안주(通安州)를 탈환하기도 했다.
홍군 제 1 방면군과 제 4 방면군이 회사(会师)한 뒤 홍군 간부퇀은 홍군대학의 특과퇀(特科团)으로 개편되었고 필사제는 간부퇀의 동지들과 함께 장국도(张国焘)의 분열책동을 견결히 반대하였고 1935년 10월 성공적으로 섬북 오기진(吴起镇)에 당도하였다.
조선인으로서 중국혁명에 혁혁한 공훈을 세운 필사제는 1936년 2월 22일, 홍군 제 15군단, 제 75사 참모장 신분으로 황하를 도하하는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치었다.

홍군 포병의 원조(元祖)’ - 무정
무정 - 원명은 김무정이었고 1905년 조선 함경북도에서 태어났으며 1923년 초 비밀리에 중국으로 건너왔다.
무정은 선후로 홍군 연장(连长), 영장과 퇀장 등 직을 역임, 아울러 중앙 소비에트 구역의 제 5 차 반 ‘토벌’전에 참가했고 중앙군위 제 1 종대 제 3 제대(梯队) 대장 겸 정위를 맡았으며 1934년 12월엔 홍군 제 3 군단 포병영 영장으로 되었다. 적의 4겹으로 된 봉쇄선 돌파 전쟁, 광서 용승 저격전(龙胜阻击战), 누산관 공략전 등 전투에서 무정은 포병영을 이끌고 맡겨진 작전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하였다.
1935년 6월, 홍군 제 1 방면군과 제 4 방면군이 사천 무공(懋功)에서 회사한 후 장국도는 당과 홍군의 최고 지도권을 망녕되게 시도, 그 해 8월 중순, 홍군 제 3 방면 군(원 홍군 제 3 군단) 군장 팽덕회는 장국도가 군위 참모부가 각 군 사이 및 각 군과 군위 그리고 모택동 통신연락의 비밀 번호 책을 전부 압수하고 각 군과 군위사이의 직접적인 연락을 중단한 것을 적 시적으로 발견하고는 무정한테 명령을 내려 임표(林彪)가 인솔하는 홍군 제 1 방면 군과 연락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무정은 팽덕회의 명령에 따라 무전기와 비밀 번호 책을 갖고는 지남침에 근거하여 감숙의 아계(俄界)에서 끝내 홍군 제 1 방면 군을 찾아냈다. 바로 무정이 비밀 번호 책을 홍군 제 1 방면 군에 바치던 날, 장국도가 바로 중앙과 중앙 홍군을 해치려고 했던 날이었다. 이러자 모든 것을 간파한 모택동은 즉시 과단하게 홍군 제 3 방면 군과 군위 종대를 아계로 보내 홍군 제 1 방면 군으로 하여금 계속 북상하게 하여 장국도의 음모가 좌절되게 했다.
장정이 결속된 후 무정은 홍군 총부의 작전 과장, 총부 포병퇀 퇀장 직에 종사, 장기적은 포병에 종사하고 또 포병을 조직 지휘한 자격으로 무정은 ‘홍군포병의 원조’란 칭호를 받아 안기도 했다.
항일 전쟁이 승리한 후 무정은 귀국, 조선인민군 중장 직함을 받았으며 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중앙위원, 노동당 제 2 서기, 조선인민군 제 2 군단 군단장, 인민군 동부전선 사령관, 수도 방위사령관 등 직을 역임했다.
무정은 1952년 10월, 오래전부터의 고질인 위병으로 사망하였다.

중국과 베트남 군의 이중 소장 - 홍수
홍수(洪水) - 원명은 무원박(武元博)으로 1906년 10월,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태어났다. 1925년 초, 홍수는 보로든의 비서로 근무하는 호지명의 요청으로 중국 광주로 왔으며 황포군관학교 학원으로 되었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홍수는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2년 1월, 홍수는 홍군 중앙 군사정치 학교 선전과 과장 겸 정치 문화 교원으로 있었고 1935년에는 ‘노농극사 장정(工农剧社章程)’을 집필한 것으로 하여 박고한테 호된 비판을 받았고 이어 ‘고급특무’로 분류되어 당적을 박탈당하였으며 ‘고급특무’, ‘국제간첩’이란 딱지를 붙인 채 장정을 계속했다. 그 뒤 주덕과 유백승 등은 선전사업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홍수로 하여금 홍군 간부퇀 직속 대에 편입되게 하여 그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준의의 기간 동안 홍수는 전사들을 이끌고 거리에 나가 연설하고 광장표현을 했으며 혁명표어를 써서 붙이고 홍군 신 가요를 열창하는 것으로 많은 농공과 진보 청년들이 참군신청을 하도록 동원하였다. 이러자 중앙 종대 당위에서는 홍수의 돌출한 표현에 근거하여 그에 대한 처분을 철회하고 당적도 회복시켰다.
홍군 제 1방면군과 제 4 방면군이 회사한 후 홍수는 주덕과 유백승을 따라 좌로 군에서 사업, 후에 소속 부대가 중대한 좌절을 당하고 해산되자 홍수는 당지의 백성으로 가장, 제 3 차로 설산을 넘고 초지를 지나 천신만고 끝에 1936년 초 연안에 도착했다.
1945년 8월, 홍수는 프랑스 침략군과 싸우는 베트남의 수요에 의해 베트남으로 갔으며 많은 중요한 직무를 담당, 1948년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1950년 10월, 홍수는 사업의 수요에 의해 재차 중국에 와서 사업하게 되었고 1955년 중국 인민해방군 소장직함을 획득,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최초로 소장직함을 받은 외국적 군인으로 되었다.
1956년 여름, 폐암으로 진단받은 홍수는 중앙군위에 귀국을 청구, 모택동 주석과 주은래 총리가 그를 접견했으며 엽검영 등이 북경역에서 배웅하였다.
1956년 10월 21일, 홍수는 베트남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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