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9-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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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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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8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2-08-20
  • 장개석의 차남 장위국의 생모는 누구일까
    [동포투데이] 중화민국의 대통령 장개석은 장경국과 장위국 이 두 아들을 둔 가운데, 본처가 낳은 장남 장경국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차남 장위국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네명의 부인과도 닮은 곳이 전혀 없었다. 당시 장위국의 신상에 대해 여러 가지 풍설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장개석은 송미령조차 호기심에 그한테 추궁할 정도로 대외적으로 극력 말을 아꼈다. 당시 장개석의 대답은 부인 송미령으로 하여금 분노로 인해 가출까지 강행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장위국의 생모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장개석의 대답은 왜 송미령을 이렇게 화가 나도록 했을까? 사실 장위국도 줄곧 자신의 신상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했다. 1941년 계모 송미령과 친하게 지내던 장위국은 계모의 허락을 받아 송미령의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장위국은 우연하게 송미령의 서재에서 ‘아시아의 내막’이라는 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인차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 작가 존 겐실이 쓴 이 책은 한 페이지가 한 귀퉁이로 접혀져 있었으며 장위국은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가 그 내용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는 장위국이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장위국은 놀란 나머지 이전에 들었던 소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버지와 별로 닮지 않은 생김새로 태어난 그의 신상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위국은 1916년 10월에 태어났다. 당시 장개석에게는 아들 둘뿐이었지만 작은 아들인 장위국은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 네 살이 되자 장위국은 아버지 장개석에 의해 고향인 봉화(奉化)로 보내지기 전까지 상하이 구(邱)씨와 주(朱)씨 두 집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양육됐다. 그가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 봉화에 온 뒤 장개석의 본처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成)이 번갈아가며 돌보던 중 요야성은 자식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장위국을 돌봐왔다. 장위국은 모복매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요야성을 ‘모친’이라고 불렀다. 당시 장개석의 생모인 왕부인이 생존해 있었고, 봉화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장위국을 좋아하며 극진히 잘 대해줬다. 수 십 년 후 장위국은 그 옛일을 다시 들먹이면서 계구(溪口)에 살았던 그 시간을 매우 행복하고도 즐겁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위국은 여덟 살 때 장개석에 의해 광주(廣州)로 가 황포군관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이미 진결여(陈洁如)와 결혼했기 때문에 장위국을 돌보는 사람은 진결여로 바뀌었다. 그 뒤 장위국이 11살이 되자 장개석은 송미령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모씨, 요씨와 진씨 이 세 여인 모두와 관계를 끊었다. 장개석은 진결여를 미국으로 보냈으며 장위국을 그의 신임이 두터운 오충신(吳忠信)의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오충신의 부인이 장위국의 이모로 되었다. 장위국과 송미령이 처음 만난 것은 1940년이었다. 그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위국은 스물네 살이었고, 장개석은 둘째 아들과 송미령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어색해질까 봐 어느 정도 걱정하였다. 하지만 장위국은 송미령을 만나자마자 아주 자연스럽고도 친절하게 영어로 ‘어머니’라고 불렀고, 서양식 예의에 따라 송미령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송미령은 젊은 시절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에 장위국에 대한 첫인상도 좋았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독교를 믿었고, 이후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도 그 해의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되자 장위국의 생모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송미령은 장개석한테 자꾸만 따지고 캐물었다. 그런데 줄곧 송미령에게 순종하고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대답하군 하던 장개석이었지만 이번에는 매우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송미령의 핍박에 아주 짜증스럽게 “묻지 마, 난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마디로 일축하며 내뱉었다. 그러자 이에 몹시 화가 난 송미령은 크리스마스 날 밤 집을 나와서는 홀몸으로 홍콩행을 강행했다. 그녀는 장위국과 사이가 좋았기에 당연히 그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송미령이 화가 난 것은 장개석이 자기한테 속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장개석이 직접 시간을 내 홍콩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고, 두 사람은 곧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아마 장개석도 이때 장위국의 신상을 송미령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컸다. 이후 송미령은 이 문제에 대해 더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장위국을 예전처럼 잘 대해주었다. 장위국은 송미령의 방에서 그 ‘아시아의 내막’을 보고는 계모가 자기한테 뭔가를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 후부터 장위국은 생모를 찾을 타산을 했다. 장개석은 그 몇 년 동안 손중산(孫中山)을 따르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보아 장위국은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장위국은 장개석의 권고에 의해 미국으로 연수를 보내진 틈을 타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다 준자부로라는 사람을 찾아냈다. 이 사람은 손중산이 일본에 있을 때 손중산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리고 장개석이 그 몇 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할 때, 두 사람은 왕래가 밀접했다. 장위국은 이 사람이 긍정코 자기의 출생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과연 장위국의 예상대로 야마다는 그의 생모의 이름을 말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내막’에 나오는 설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그랬다. 장위국은 확실히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야마도에 따르면 장위국의 생부의 이름은 대계도(戴季陶)로 국군의 원로 중 한 명이자 중량급 인물이었다. 당시 대계도는 장개석과 함께 손중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고, 장개석과는 동향이자 동창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나중에 대계도는 장개석 휘하의 장군으로 되기도 했다. 1913년, 일본에 있던 대계도는 급병에 걸려 현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는 시게마츠 가네코라는 간호사를 알게 되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뜨거워졌고, 대계도가 퇴원한 후 두 남녀는 동거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일찍 결혼한 몸이었고 그의 아내 뉴유항(钮有恒)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갓집 규수였기에 대계도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두려워했으며 한 번도 그녀를 화나게 한 적이 없었다. 본인은 한때 국군 고위층의 ‘3대 공처가’ 중 일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찍 대계도는 조카와 사사로운 정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란 나머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다행이도 당시 그의 부하가 재빨리 그를 구해 주었으니 말이지 큰 일이 날 뻔 했다. 한편 1916년 대계도가 손중산을 따라 귀국할 때 시게마쓰 가네코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감히 그녀를 데리고 귀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시게마쓰 가네코를 일본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시게마츠 가네코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야마다 준자부로에게 자기가 낳은 아이를 중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아이가 바로 장위국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 몇 년 간 점점 더 아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대계도는 아내에게 이 아이의 내력을 도무지 설명해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계도의 절친한 친구로서, 장개석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이 아이를 입양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계도는 즉석에서 동의했으며 이렇게 되어 생부가 아이의 의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약속 때문에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송미령이 따져 물었지만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 장위국은 이때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으로는 장개석에 대해 몹시 감탄했다. 다른 한편 생모인 시게마츠 가네코는 장위국이 다섯 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장위국은 야마다의 말을 반신반의로 믿다가 장개석의 일기를 읽어본 결과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확실히 장개석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장제스는 그를 자식처럼 여겼으며 ‘경문위무(经文纬武)’라는 좋은 뜻으로 장경국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장차 형 장경국(蒋经国)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큰 돈을 투입하여 장위국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를 외국에 유학 보내 훌륭한 군인으로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장위국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개석과 장경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이 회의나 순시하러 나갈 때면 데리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장경국이었고 정계에서 중점적으로 양성한 사람도 장경국이었으며, ‘호구병변(湖口兵变)’을 틈타서는 장위국의 수중에 있던 병권을 빼앗기도 했다. 장위국은 이때부터 의기소침해졌고, 장경국이 죽은 후에야 사람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장위국은 자신의 신상을 알고도 장개석처럼 대외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1996년에야 자기가 서술한 책에서 자신이 대계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장위국은 ‘물방울 같은 은혜도 샘솟듯한 물량으로 갚는다’는 이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장개석이 혈연관계가 없는 아버지였지만 이미 그 친아버지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장위국에게 주었다는 알고 있었다. 장위국은 언제 누가 물어도 장개석의 아들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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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3
  • 무인도에 갇인 1남 7녀, 그들의 운명은…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 이야기는 지난 세기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 사이에 있은 한 조선인 남자가 일본인 여성 7명과 동시에 결혼해 도합 27명의 자녀를 낳은 진실한 이야기다. 사람은 사회에서 생활함에 있어서 당연히 많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이성과 생기는 감정적 욕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아는 영장 동물이다. 더군다나 특정된 장소에서는 남녀 사이에 이런 감정이 싹트기 쉽다. 대천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형형색색의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반려자로부터 선택되고 또한 반려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경우에 따라 인간은 반려자를 선택할 수 없거나 감정적인 욕구가 없는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이성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군사적 큰 착오로 벌어진 태평양 전쟁 말기 남성 1명과 여성 7명이 태평양 가운데의 트루크 군도에 남겨지면서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기까지 이 해괴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이야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면 모든 전쟁의 근원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여러모로 미국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행을 바라고 저울질하면서 미국의 태평양 해군기지를 공격했으며 전쟁 초기에는 연전연승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미군이 일본군 약점을 연속 꿰뚫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군은 차츰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하나둘씩 빼앗겼던 섬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운데 끼인 일본군 점령 섬들은 고립되어 보급은 전혀 없었으며 어떤 경우엔 단 한 명의 병력 손실도 없이 미군은 이 섬들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당시 트루크 제도에는 일본군 병사와 조선인 부역자 및 일본군 위안부가 주둔해 있던 고립된 섬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공급 사슬을 끊자 섬에 갇혀 있던 이들은 고립되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흐르자 구원투수들에게 삶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서 구조자를 섬에 보냈을 때 갇힌 사람들은 한동안 삶의 희망을 본 듯 들뜨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짧디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일본 본토에서 보낸 구조선은 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구조선박은 섬 기슭에 사람이 보이지 아니 하자 무인도로 여기고는 재빨리 선수를 돌려 트루크 섬을 빠져나가면서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 후 조선인 부역자 김유길과 일본인 위안부 7명이 “사람을 살려요”라고 외치며 해안으로 달려 내려갔을 때는 배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희망이 깨지자 일곱 여인은 서로 얼싸안고 펑펑 울면서 땅을 쳤고 김유길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인들처럼 울고불고 할 수는 없었다. 몹시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남자로서 좀 강해야만 했다. 그는 엉겁결에 일본 여인들이 흐느끼는 것을 보고는 그녀들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어구가 없었다. 말문이 막히자 그는 다가가 그녀들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만 했다. 울음을 터뜨릴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고 사위가 잠잠해진 뒤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이들 일남 칠녀는 섬에서 두 달 넘게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구조를 기다리지도 못한 채 섬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와 과일은 거의 다 뒤졌다. 그러다가 다행히 그들이 앞날이 막막할 때 뜻밖으로 담수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삶의 빛 한 가닥 생긴 것이다. 한편 섬에서의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물고기라도 잡아서 모두가 굶어죽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평일에는 고기잡이 말고도 비교적 건장한 여자 몇 명을 데리고 사냥을 했으며 그리고 그 때면 나머지 몇몇 여자들은 나무를 찾아 불을 피우고 빨래 같은 일을 하면서 제각각 자기의 맡은 바의 일에 충실했다. 처음에 김유길과 그녀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교류는 손짓 혹은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김유길은 그녀들한테서 일본어를 배웠고 그 또한 그녀들에게 조선말을 배워주었으며 이렇게 되어 그들은 얼마 안돼 서로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섬에 갇힌 지 1년이 되는 해 봄의 어느 날, 김유길은 섬에서 일본인들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벼 종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김유길의 머릿속에서는 기발한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바로 벼농사를 한번 해보자는 결심으로 마음속으로부터 논을 풀었다. 그 해 그는 여인들을 거느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논을 풀었다. 논둑을 만들고 논에 물을 가두고…그리고 벼 모종을 논에 심자 과연 벼가 우썩우썩 벼가 잘 자랐다. 그 뒤 가을이 되자 김유길은 또 여인들과 함께 벼를 베어 거두어 들이고 타작을 했다. 타작이 끝나자 이들은 마침내 첫 햇밥을 먹어볼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유길은 점차 모든 여자들의 숭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자 김유길은 자연스럽게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연상하게 되었다. 바로 빗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집을 짓는 것. 원래 집짓기 같은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김유길은 그 실행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을 거느리고 연 며칠 나무를 찍어 와서는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씩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았으며…마침내 지붕까지 얹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집 모양새를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집은 비록 허름하고 그닥 크지도 않았지만 이 외딴 섬에 그들도 비바람을 피할 곳이 드디어 생긴 셈이었다. 여성 그 자체가 워낙 감성적인 동물이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남성을 사랑하기가 쉬운 것이다. 섬에 버려진 뒤 여자들은 몹시 절망했지만 당시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그녀들을 책임지고 그녀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환경까지 해결해줬기에 그럴만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김유길이라는 유일한 남자에게 마음을 기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갖가지 애로와 언어의 장벽까지 뚫고 나온 김유길은 일본 여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중에는 거의 감출 것도 없이 속심을 털어 놓을 때도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속된 농담도 거침없이 할 정도였다. 이렇게 한동안 어울리던 중 김유길은 자신이 그 중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몰래 그 여인한테 자기의 마음을 고백했다. 헌데 이 여자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이를 다른 여자들한테까지 자랑할 줄이야?! 이러자 이들 여자 모두가 한결같이 김유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어 김유길은 황제처럼 되어 일곱 명의 여자를 동시에 품에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정을 꾸린 뒤 이들은 아예 귀국할 생각을 접고 살림을 차리고 김유길의 아내로서의 각자의 의무를 다 하였다. 그리고 아내들은 선후하여 스물일곱 명의 자녀를 김유길한테 낳아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의 작은 가정으로부터 하나의 대가족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러간 뒤 이 35명의 대 가정은 바다에 나타난 미군 순찰함에 의해 발견되었고 오랫동안 귀국생각을 접었던 이들에게 마침내 각자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김유길은 고향으로 즉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고 그 외의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일본으로 송환됐다. 김유길은 귀국한 지 몇 년 만에 그 아내들이 그리워났다. 거기에 자녀들이 보고 싶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처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두루 수소문한 결과 그의 다섯 명의 아내는 이미 재가하여 다시 살림을 차렸고 나머지 2명만이 그래도 김유길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이미 일부일처제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특별한 예외의 경우였다. 정부도 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이렇게 죽을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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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2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지난번 계속)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성은 먼로, 그는 정신 질환으로 앓고 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였으며 늘 자신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인 델라에게도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매우 격렬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글래디스는 MGM 콜롬비아의 한 영화제판공장에서 스크랩 작업을 했으며 어머니 역시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로 평생 수용소 출입이 아주 잦았다고 한다. 1942년 6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제임스 아이젤 돌티와 결혼했으나 1946년 9월 13일 첫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는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2월 2일 일본 도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이 혼인신고를 한 지 274일 만에 마릴린 먼로가 이혼을 제출했고 1954년 10월 31일, 법원은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뒤이어 마릴린 먼로는 1956년 6월 29일 극작가 아서 밀러와 극비리에 결혼했고 그해 8월 메릴린 먼로는 임신했지만 곧 유산했다. 마릴린 먼로는 1957년 8월 1일 자궁외 임신으로 다시 유산했다. 1961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정식 이혼하고 말았다. 18세 때 마릴린 먼로는 기독교인이 됐다. 하지만 1956년 아서 밀러와 결혼하면서 먼로는 유대교로 전향했다.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생전에 애완견을 많이 키웠으며 그 중 마지막 한 마리는 시나트라가 선물한 몰타 개로 이름을 지어 ‘마피아(Mafia)’라고 불렀다. 1960년 8월 28일, 마릴린 먼로는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그 뒤 1961년 2월 7일 재차 뉴욕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5일에 퇴원했다. 1962년 1월, 마릴린 먼로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으며 7월 20일 자궁내막염으로 또 입원치료를 받았다. 1962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심리치료사와 6시간을 보냈다. 이는 그녀의 생에 있어서 마지막 하루가 됐다. 그 이튿날 즉 8월 5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마릴린 먼로가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무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8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식의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으로 하나 또 하나의 성감적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감동적인 연기 스타일과 죽음은 영화 팬들의 영원한 성감 적인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많은 팬들은 살아가면서 그녀의 사진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니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하얀 치마를 입고 뉴욕 거리에 있는 모습과 땅속 열기에 그녀가 걸친 치마가 나팔을 벌린 듯한 모습의 흑백사진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눈을 살짝 감은 듯 입술을 감빠는 모습, 소파 위에 하얀 다리를 드러낸 모습 등을 보노라면 사진만이 아닌 특별한 감정의 전달과 순수하고 성감적인 정국이 될 때가 많다. 공개된 사진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청순하기도 하고 털털하기도 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좀 길게 땋은 머리 태, 청바지, 리넨 스커트 등은 다양한 스타일링으로 생활 속 먼로의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먼로는 1962년 8월 5일, 자기의 거처이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 무브먼트의 거실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떠올리면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케네디 가문과 정치권의 암막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가 죽은지 수 십 년이 넘도록 그녀에 대한 공식 조사서류는 대부분 고급기밀로 분류돼 있었다. 2006년까지 FBI(미 연방수사국)는 미국 자유정보법에 따라 500쪽 분량의 먼로 관련 문건의 비밀을 해제했다. 그러자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그가 적어놓은 비밀일기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역사 전문가들은 뒤늦게 밝혀냈다. 먼로의 일기에는 먼로와 케네디 형제의 ‘베갯머리 대화’가 다수 기록돼 있었다. 1962년 8월 초, 케네디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먼로와의 모든 왕래를 끊었다. 갑작스런 격변에 직면하여 마릴린 먼로 역시 자신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8월 4일 오후 9시 반, 그녀는 절친인 시드니 길라로프에게 전화로 케네디 형제와 있었던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LA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릴린 먼로는 공교롭게도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비밀 일기’도 신비롭게 사라졌으며 LA지검 사무실 또한 마릴린 먼로가 일기를 썼다는 것과 먼로의 죽음이 모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부인했다. 2012년 5월 16일,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제 홍보 포스터가 나붙었고 현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마릴린 먼로 주연의 각종 다른 영화의 스틸 사진이 끊임없이 상영되면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유명 조각가 수어드 존슨이 만든 마릴린 먼로 조각상 ‘영원한 먼로’가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그녀는 줄곧 어떤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녀도 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먼로는 평생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여인으로서 먼로는 전심전력으로 절대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이런 100%의 사랑을 남편들은 주지 못했고 애인들은 더욱 주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36세의 마릴린 먼로는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용모를 주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지 않았다. ‘세상의 좋은 물건은 견고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구름은 쉽게 흩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마릴린 먼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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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1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외몽골 중국으로부터 독립되게 된 내막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약한 나라한테는 외교가 없다.” 이는 많은 외교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사실 이 말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중화민국 주석 장개석이 소련과의 담판에서 수세에 몰릴 때 내뱉은 말이었다. 실제상 외교적 분쟁에서 많은 약 소 국가들은 강대국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세울 수 없기 마련이었다. ▲사진 : 인터넷 1945 년 2 월,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곧 승리하게 될 무렵이었다. 당시 세계 강국들인 미국, 소련과 영국 등은 흑해 북부에 있는 크림 반도에 있는 얄타에서 일련의 해당 전쟁 후의 질서 및 동맹국의 이익 분배에 관련된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 중 <일본에 대한 미, 소, 영 3국의 협정(간칭 얄타 협정)>은 당시 동맹국인 중국의 동의도 없이 체결되어 중국의 권리를 크게 침해했다. 얄타 회의에서 극동지구 문제를 토의할 때 자국의 이익을 위해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제기하였다. 첫째, 외몽골의 현 상태를 유지한다. 둘째, 중동철도(중국 동북의 철도)를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관리한다. 셋째, 소련이 대련 및 그 부근 해역에 불 동항(不冻港)을 건설한다. 당시의 외몽골은 실제상 이미 소련군의 지배하에 있었다. 민국과 과거 청조의 관리들은 이미 축출되어 중국 본토로 돌아갔으므로 스탈린의 현 상태 유지란 기실 세계열강들로 하여금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자는 속심이었다. 동시에 스탈린은 기타 세계열강들에게 이 일을 중국의 장개석한테 알리지 말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로 하여 후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장개석이 파견한 중화민국의 외교대표 송자문을 만났을 때 “만약 출병하여 대일 작전을 한다면 미국은 오직 <얄타협정>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러자 송자문은 이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동맹군 열강들은 이른바 <얄타협정>의 이익 획 분은 세계인민의 자유를 위해 싸운 반파시스트 진영을 위한 것이라면서 중국의 이익은 염두에도 없었으며 송자문한테는 아무런 태도 표시도 않았다. 그 시기, <얄타협정>의 대부분 내용은 엄격한 비밀에 붙여졌으며 송자문 역시 귀국할 때까지 절반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귀국 후 송자문이 장개석한테 외몽골의 독립 문제를 언급하자 장개석은 크게 놀랐다. 중국은 세계 반파시스트 진영의 일원이었지만 중국의 이익은커녕 손해만 늘어나게 됐던 것이었다. 미국의 허위적인 얼굴에 대해 장개석은 깊이 알 수 있었다. “미국인은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스탈린과의 담판이 필요한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한 장개석은 송자문을 단장으로 한 중국정부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 외몽골 문제를 갖고 소련정부와 담판을 하게 했다. 하지만 이 담판은 근본 상 불평등의 원칙에서 진행된 담판이었다. 스탈린을 위수로 하는 소련대표단은 대일 작전을 하는 대가로 장개석으로 하여금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는 정치적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송자문과 장경국(蒋经国)을 비롯한 중화민국 대표단은 상대를 깔보는 소련의 그 오만한 태도와 중국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사진 : 인터넷 한편 장경국은 장개석의 친필 신을 갖고 <비 정식대표>의 신분으로 스탈린을 배알, 외몽골의 문제를 회피하면서 측면적으로 스탈린의 설복하려고 했다. 장경국이 찾아가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아주 친절했다. 그러자 장경국은 열정적으로 스탈린을 높이 쳐올리면서 반파시스트 전쟁에서의 소련의 승리는 스탈린 동지의 영명한 영도와 갈라놓을 수 없다고 나서 중국 또한 현재 반파시스트 세력과의 결전의 결심은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파시스트의 멸망은 이미 시간적 문제라고 확신하기도 했다. 이어 공식적인 협상에 들어가자 장경국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얄타협정>에서 외몽골을 독립시키려고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면 조국의 영토를 수호하려는 중국정부의 원칙에 위배되며 만약 민국정부가 승인한다면 중국 국민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외몽골문제가 언급되자 스탈린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스탈린은 대뜸 엄숙하게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한 말의 뜻을 잘 압니다. 하지만 당신도 이것만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당신들한테 도와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우리한테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즉 당신들을 도와 일본을 내쫓아 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당신들한테 힘이 있어 우리의 도움이 필요가 없다면 나 또한 이러한 요구를 제기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반드시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외에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친 스탈린은 장경국 등을 물러가라는 뜻으로 손을 내 저었다. 그 뒤 중국대표단 단장인 송자문은 소련대표단과의 담판 내용을 장개석한테 회보한 다음 장개석의 지시에 의해 외몽골 문제를 해결할 세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첫째, 소련과 계약을 체결해 결맹 기간 소련이 외몽골에 군대를 주둔할 수는 있게 한다. 둘째, 소련과 계약을 체결해 결맹 기간 외몽골에서 고도로 되는 자치를 실시할 수 있으며 소련이 외몽골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도 허락한다. 셋째, 소련과 계약을 체결해 소련이 외몽골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으며 정치와 외교에서 자주와 자치를 실시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삼민주의> 원칙에서만 가능하며 이는 소련인 영국의 정치성질과는 달라야 한다. 그러나 이런 양보는 근근히 중국 측의 입장일 뿐 소련의 도움이 필요했던 중국으로서는 소련을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나중에 스탈린은 참을성이 없어졌으며 장경국한테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강요했고 공공연히 소련이 외몽골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장개석은 이러한 담판 결과에 대해 진작 예견하고 있었다. 다만 장경국이 소련에서 유학했고 또한 소련 여자를 아내로 맞았기에 그 연분으로 스탈린이 장경국의 안면을 좀 봐줄 것이란 요행을 바랐을 뿐이었다. 결국 장개석은 마지막 카드까지 포기하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어쩔 수 없다. 일본을 내쫓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모든 것은 우리가 약하기에 조성된 악과이다. 약한 나라에는 외교가 없기 마련이다.” 1945년 7월 7일, 장개석은 눈물을 속으로 삼키면서 송자문한테 한통의 <굴욕>의 전보문을 날렸다. 외몽골의 문제에서 중소간의 쟁점은 무엇인가를 잘 찾아봐야 한다. 중소간의 공동이익과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일본을 격파한다는 선제 조건에서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기 바란다. 1945년 7월 9일, 제4차 중소담판에서 중국대표단은 소련대표단의 거듭되는 압력으로 부득불 소련 측이 주장하는 조건에 동의를 표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스탈린이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압력을 가하게 된 데는 다른 원인도 있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일찍 이렇게 밝힌 바가 있었다. “소련이 외몽골을 독립시키는 것은 단지 정치상에서의 수요와 군사상에서의 우려여서만이 아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외몽골은 시베리아 철도의 복지이다. 앞으로 중국이 강대해진 다음 외몽골로 출병하여 시베리아 철도를 차단해 버리면 소련은 전략적으로 매우 위험해지게 된다.” 당시 소련이 이렇게 우려한 것은 민국정부가 미국과의 관계가 밀접하였기에 향 후 강대해지면 외몽골을 통해 어떤 도발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였다. 다른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이 중국의 만주에 출병한 것은 기실 민국의 요청보다는 미국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장개석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약했기에 외교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1-26
  • 중국군 5년간 '라오산 전투'서 베트남군 얼마 소멸했나?
    편집자의 말: 최근 펑황망의 군사사이트는 <중국군 5년간 라오산 전투서 베트남군 얼마 소멸했나?>란 글을 발표했다. 글은 라오산전투 당시 중국군과 베트남군이 투입된 군부대와 장비 등을 서술하면서 중국군이 베트남군을 얼마 소멸하고 파괴한 베트남군의 장비와 진지 등을 수치로 나열하면서도 중국군이 본 손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라오산전투는 중국군이 승리한 전투라고 점 찍었다. 한편 베트남 매체에서도 라오산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중국군을 얼마 소멸했다고 하였지만 역시 저들의 손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 어느 쪽의 주장을 믿어야 하는가? 명지한 독자라면 객관적인 분석으로 읽고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베트남 국경전쟁 중국군 사진이다. 1984년부터 1989년 사이 5년간의 중국-베트남 국경전투 라오산과 저양산(老山、者阴山)동안 양측은 좁은 국부전장에 많은 수의 군과 다양한 무기들을 투입, 길고 치열한 경쟁은 전쟁 역사에서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중국군의 관점에서, 곤명군구, 남경군구, 제남군구, 난주군구, 북경군구 및 성도군구에는 6 개의 야전군/집단군(14군, 11군, 1군, 67군, 47군과 27군) 1개의 강력사(37사), 변방부대 (운남 성 군구 부대) 및 포병, 공병, 기술병, 정찰병 등 5개 병종의 군대와 공군 항공병, 대공 미사일 부대 그리고 변경민병, 민공으로 참가인수구 도합 35명에 달했고 각종 포 8200문, 탱크 30여대, 4만 여대의 차량, 비행기 출동차수 2900여대였다. 이렇게 작전규모는 신 중국 건립 후 1950년과 1979년에 이어 세 번째로 방대한 규모였다. 전투 중 중국군의 각 병종의 부대들은 협동작전을 진행, 240 만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하여 보병을 지원하면서 도합 3만 6000여명의 베트남군을 소멸하였다. 이중 죽은 베트남군의 수는 1만 5000여명, 부상당한 베트남군의 수는 2만 여명, 포로된 베트남군의 수는 202명었다. 그리고 베트남군의 포 1000여문, 200대 이상의 군용차량, 4대의 탱크 및 많은 장비와 요새, 화력망, 지휘소, 창고 등을 파괴하였다. ▲중국-베트남 국경전쟁 베트남군 사진이다. 한편 베트남 육군과 관련하여 보면 선후로 라오산 전투에 참가한 보병들로는, 보병 313사, 314사, 316사, 356사, 312사, 325사, 31사, 3사의 2연대, 322사의 567연대, 328사단의 2연대, 568연대가 포함된다. 그리고 포병 168대대, 36대대, 397대대, 특공 821 및 198연대, 하선성 독립 247연대, 산라성 독립 754연대 등 20만 명이 넘는 병력과 수많은 기술 장비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전쟁 후 베트남측은 저들의 손실 수치를 공개하지 않았다. 지금은 작은 의문이 있다. 즉 전투에서 적을 섬멸시켰다는 것이 얼마나 진실한가이다. 라오산 전투는 두 산 사이로 주로 양측의 대립 환경에서 이루어졌으며, 상대방을 제압하는 화력을 구축하고 목표를 파괴하는 종합적인 방식으로 전장을 통제하는 것이었으므로 통계결과에 특정적인 추정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통계를 만들 때 위치확인을 기초로 하고 기술정찰을 통해 적의 정보를 중요한 참고 자료로 삼으며 동시에 1선 군부대가 보고한 결과의 무게를 측정하게 된다. 또한 예하면 공격지점에 출격하면서 베트남군의 화력지점과 숨어있던 동굴이 무너졌을 때 그것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저 그것을 3명의 중기관총 화력과 2명이 경기관총 화력으로 계산되었으며 3-5명이란 추측에 따라 보고되었다. 그리고 작전 중 적 섬멸인수가 전장의 육안검사에 따라 보고되기도 했다. 전쟁 후 베트남의 한 정보에 따르면, 허장성(河江省) 북부 국경전쟁을 위해 수건된 능원에는 2500명 이상 사상자의 자료가 모아졌으며 이는 추적할 수 없는 많은 다른 실종자로 간주되지 않다. 또한 베트남 육군 옛 군인들의 회고록은 외상성 손실이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반영했다. 수만 명의 베트남 사상자 수치가 신뢰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5년 이상 지속된 이 아열대 산악과 정글에서의 전투는 매우 치열하고 잔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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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1
  • 대륙 제일의 미녀-천훙
    ●철 민 천훙(陈红)-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면 어떤 이들은 흔히 일부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천훙은 이미 젊었을 때의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답기는 하나 어떻게 평가해도 대륙 제1의 미녀와는 거리가 있다. 아울러 지금의 천훙은 한 남자의 부인이다. 비록 그들 부부 사이의 금슬이 매우 좋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대륙 제일의 미녀>란 호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게 아닌가?! 그럼에도 왜 그녀를 여전히 미녀라고 하는 걸까? 그것은 현재 그녀의 됨됨이와 스타일에서 그제 날 그 아름다움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1968년 천훙은 장시(江西)성의 상라오(上饶)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연기를 즐기었기에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상하이 희극학원(戏剧学院)에 입학할 수 있었고 졸업 후에는 그 길로 연예계에 데뷔할 수 있었다. 1986년 18세의 나이에 천훙은 TV 고대신화 드리마 <요재지이(聊斋志异)>에 출연, 아름답지만 성격이 괴벽한 여자의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어 많은 사람들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1990 년 천훙은 <어린 다이족 딸의 사랑>에서 아이커(艾可)의 역할을 담당, 스토리는 간단했지만 천훙의 순수하고도 깨끗한 얼굴, 밝고도 따뜻한 미소, 감화력이 있는 연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다이족 소녀와 총각이 나누는 사랑의 장면에 말려 들어가는 듯 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 이듬해 1991 년, 23세인 천훙은 삼국지에서 나오는 천하제일의 미녀 디아오찬(貂蝉)의 역을 성공적으로 부각, 핑크빛의 밝은 눈과 이에 대조되는 하얀 이빨, 삶을 염원하는 그녀의 연기는 디아오찬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보게 했다. 성공을 이루는 것은 극복하기 힘든 고전이지만, 그 시대의 모든 측면에서 불리한 조건이 있었음에도 천훙이 연기해낸 디아오찬의 예쁜 자태는 실로 타고난 천부적인 것이었으며 아무도 그것을 모방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93 년 천훙은 <물과 구름 사이(水云间)>에서 왕즈쇈 역을 담당하면서 일약 더욱 한동안 유명해지게 됐다. 드라마에서 그녀는 비록 여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주인공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았다. 당시 TV 드라마는 모든 사람들이 집과 거리와 차선에서 보고 있던 TV 드라마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드라마의 내용보다는 천훙의 얼굴을 보려고 더욱 이 드라마 시청에 집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기 한동안 천훙의 아름다움은 복제할 수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00 년 천홍은 30 대 초반의 나이로 가장 매력을 발산하던 시기였다. 이 해 드라마 <따밍궁스(大明宫词)>에서 태평공주 역을 맡은 천훙은 비록 짙은 화장에 어딘가 요염한 외모를 보이면서도 행동자세는 기품이 있고 우아하고도 활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매료되게 했다. 1996년 천훙은 영화감독 천카이커(陈凯歌)와 결혼, 천카이거를 놓고 볼 때 중국에서 많은 유명한 영화를 제작한 유능감독으로 그의 영화중 하나가 바로 제1회 중국영화 종려나무상을 받은 <패왕별희(霸王别姬)>이었다. 결혼 당시 천카이거는 천훙보다 15살이 더 많은 1952년생이었다. 결혼 뒤 천카이거는 거의 영화화면에 나타나지 않았고 무대 뒤에서 일하는 프로듀서가 되었으며 TV산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천훙과 천카이거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다. 이 중 둘째 아들 천베이위(陈飞宇)도 군오락권에서 활약하고 있다. 영준하고도 품위가 있어 어머니의 외모를 물려받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천훙한테 있어서 예전의 미모는 좀 많이 망가진 것 같으나 그녀는 여전히 현재의 생활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이상적인 남편에 두 아들 그리고 윤기가 돌 듯 여유가 있는 생활, 이는 그만큼 인생의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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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5
  • 장개석 신변의 홍색 여첩보원 ― 심안나
    ▲ 사진설명: 1948년 남경에서 찍은 심안나와 화명지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장개석의 국민당 군이 모택동의 공산당군에 패해 섬도 대만으로 쫓겨간 것은 이미 지나간 역사로 되었다. 하다면 월등한 미국 군장비로 무장하고 거기에 수많은 출중한 군 고급 지휘관들이 있는 장개석 군이 왜 <좁쌀에 보총>에 불과한 공산당군에 여지가 없이 완패해 그런 꼬락서니로 되었을까? 여기에는 국민당군이 공산당에 비해 민심을 얻지 못하고 많은 군장령들의 부패상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공산당의 첩보전이 국민당군의 비밀을 수많이 수집하여 공산당군에 넘기어 남경의 일거일동을 연안에서 손금보 듯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공산당의 지하공작 즉 첩보 사업은 그 인원수와 사업의 완성도 방면에서 국민당을 능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안나(沈安娜)―그녀는 출중한 홍색 여첩보원으로, 장시기 동안 국민당 중앙당부의 기록원(速记员)으로 국민당 통치구에 잠복해 있으면서 국민당 최고급별의 당, 정, 군 특별회의 정보들을 대량 수집하여 중공 측에 넘기면서도 단 한번의 실수가 없었고 그 신분도 폭로되지 않아 국내외 첩보계의 경탄을 자아냈다. 1915년 심안나는 절강성 한 선비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7살이 되던 해 그녀는 여차여차한 사연으로 당시 중공의 특공일군이었던 화명지(华明之)를 알게 되었다. 당시 심안나는 점잖으면서도 여러모로 박식한 화명지를 곧 잘 따랐고 알게 모르게 심안나와 화명지의 사이는 아주 좋았다. 결국 그녀는 화명지의 영향을 받아 첩보 사업이란 이 길을 선택했다. 1934년, 자신의 첩보업무의 전업을 선택할 때 심안나는 가정의 경제사정으로 상대적으로 학비가 적은 스피드 기록반을 골랐다. 이는 향후 그녀가 하는 사업을 위해 양호한 토대를 닦았다. 스피드 기록반을 졸업한 후 심안나는 조직의 지령에 의해 민국 절강성 정부에 들어가 기록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녹음펜이 없는 당시엔 모든 회의기록은 전적으로 종이와 필에 의거해야 했다. 각종 회의로 매일 매일이 이어지는 정부기관에서는 반응이 빠르고 각종 기교가 겸비된 기록원일수록 상급의 총애를 받기 마련이다. 심안나가 바로 그랬다. 그녀는 참답게 일하는 성실한 일군이었고 거기에 민첩하고 업무수준도 높았기에 빠른 시일 내에 절강성 주석 주가화(朱家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었으며 또한 화명지의 도움으로 대량의 중요한 정보들을 수집하는 요령도 장악하게 되었다. 자주 만나고 여러모로 교류하는 과정에 심안나와 화명지 사이의 <혁명적 동지의 관계>는 애정관계로 승화되어 사업과 생활에서 모두 편리하였다. 1935년 가을, 조직의 비준으로 심안나와 화명지는 상해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결혼 후 조직의 지령으로 잠시 첩보 사업에서 손을 떼고 남편의 뒤바라지에 정성을 쏟았다. 그러다가 1938년 원 국민당 절강성 주석이던 주가화가 당시 국민당 중앙당부 비서장으로 진급하자 심안나한테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바로 주가화한테 재차 접근하는 것이었다. 일찍 심안나의 총명과 업무능력을 인정했던 주가화는 심안나가 남경으로 찾아가자 그녀를 아주 반겨맞아 주었다. 주가화의 추천으로 심안나는 아주 쉽게 국민당 중앙당부의 기록원으로 될 수 있었다. 그 때로부터 심안나는 자신의 총명과 숙련된 기능을 보여주면서 선후로 각종의 많은 고위층 회의에 참가하였으며 아울러 많은 중요한 정보를 수집해서는 남편 화명지를 통해 당조직에 제공하군 하였다. ▲ 사진설명 : 국민당 고위층 회의에서 장개석이 연설할 때 뒷줄 오른쪽 기록하고 있는 심안나 한편 이 기간 동안 그녀는 국민당 중앙 급의 여러 계층 고위 관리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그들의 추천에 의해 하마터면 국민당 중앙의 <입법위원>으로 될뻔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듯 높은 <벼슬자리>도 결코 심안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가장 편리한 직업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국민당의 중요정보를 수집해 공산당에 제공하기 위하여 그녀는 “아직은 나이도 젊고 자격과 능력도 부족하다”고 겸손한 체 하면서 그 <벼슬자리>를 사절하였다. 이는 많은 국민당 고위급 관리들의 감동을 더욱 자아냈다. 심안나의 사진 자료들을 보노라면 한 장의 사진이 각별히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그 사진 한 장이 그만큼 여러 가지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진은 1948년 4월, 남경 정가교(丁家桥)의 국민당 당부 예당에서 장개석이 회의를 주최하는 것을 촬영한 것으로 일찍 국민정부의 <중앙일보>에 게재된 것이었다. 사진에는 장개석이 주석대 중앙에 서서 연설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주석대 뒷줄 오른쪽 즉 장개석과 약 5미터 거리를 두고 1남 1녀가 회의기록을 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그 중 머리를 숙이고 기록하고 있는 여성이 바로 적의 핵심부에 잠복해 있었던 심안나였다. 그러니 이 사진이야말로 심안나의 첩보사업 생애에서의 아주 진귀한 견증으로 되고 있다. 장장 14년에 달하는 국민당 통치구에서의 잠복사업 중 심안나와 그의 남편 화명지는 수많은 위험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부부는 서로 밀접히 배합하면서 번마다 안전하게 그런 위험고비를 넘기었다. 이는 중공의 비밀사업 전선에서 부부합작의 전형적인 본보기로 되고 있다. 1949년 4월 중국인민해방군 100만 대군이 장강을 뛰어넘어 남경을 함락하자 심안나와 화명지는 해방군 대오와 합류하는 것으로 장장 14년에 달하는 지하첩보원 생애을 완벽하게 마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후 심안나는 국가안전국에 배치되어 정년이직을 할 때까지 새 중국의 안전을 지키는 사업에 그 심혈을 몰부었다. 1989년 중국 국가안전부에서는 심안나에게 영예상장 및 영예증서를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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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1
  • 옛 상해의 '천애가녀' - 주선
    일찍 옛 상해의 <천애가녀(天涯歌女)>로 알려진 주선(周璇)은 1920년 8월 1일, 강소성 상주(常州)의 한 소씨 가문에서 태어났고 원명은 소박(苏璞)이었으며 8남매 중 재매로는 차녀였다. 주선의 동년 시기는 몹시 불행했다. 1923년 주선은 아편쟁이였던 외숙 고사가(顾仕佳)한테 유괴되어 금단현(金坛县)의 왕씨 가정에 팔려가 왕소홍(王小红)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이어 왕씨 부부의 이혼으로 다시 상해에 있는 주(周)씨 가정으로 팔려가 주소홍으로 되었다. 1928년 당시 주씨 가정은 몹시 가난하여 거의 매일을 주선의 수양모(养母)가 품팔이를 한 돈으로 근근득식으로 살았다. 거기에 아편에 인이 박힌 양부(养父)로 인해 가난은 설상가상이었다. 한번은 돈에 눈이 어두운 양부는 8살밖에 안 되는 주선을 기방(妓院)에 팔아넘기려 했고 마침 이 때 수양모가 나타났기에 그는 일대 수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 주선은 어릴 적부터 노래에 끼가 있었으며 학교에 입학하자 항상 그의 가창력은 첫 자리를 차지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1931년, 만 11살에 불과한 주선은 당시 자신이 부른 <민족의 빛>이란 노래로 주목받아 상해 명월가무단(明月歌舞团)에 입단, 이듬해인 1932년에는 첫 개인 레코트 <특별열차>를 발매하면서 주선의 불우했던 연대는 일단 한 단계 막을 내렸다. 그 뒤 1934년 주선은 가요 <5월의 꽃>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 같은 해 상해 <대 석간>에서 주최한 <방송가수 경연>에서 제2위에 올랐으며 1935년부터는 영화계에 진출하는 등으로 연계 권 생활의 전성기에 들어섰다. 그리고 1937년 주선이 주역을 맡은 영화 <거리의 천사(马路天使)>는 그의 표현예술생애의 대표작으로 되었으며 그가 영화 삽곡으로 부른 가요 <천애가녀(天涯歌女)>와 <사계절가>는 한시기 상해의 화인사회에서 가장 인기가요로 유행되기도 했다. 1938년 주선은 상해국화영업회사(上海国华影业公司)와 계약을 체결, 1941년에는 <상해일보>가 주최한 <영화 황후> 선발에서 <영화 황후>로 평선되었으나 그는 이 영예를 완곡히 거절했다. 당시 주선이 왜 이를 거절했는지는 그렇다 할 만한 해명기록이 없으며 지금까지도 비밀로 남아있다. ▲ 사진설명 : 민국시기 10대 여 스타들, 오른쪽으로부터 왕단봉(王丹凤), 백광(白光), 이려화(李丽华), 주선(周璇), 호접(胡蝶), 진운상(陈云裳), 진연연(陈娟娟), 손경로(孙景璐), 나란(罗兰), 공추하(龚秋霞) 1946년 주선은 홍콩으로 가게 되며 그 이듬해 애정 편 영화 <장상사(长相思)>의 여 주역을 맡았다. 그리고 홍콩에서 그가 부른 노래들 중 대표적인 것이라면 <밤 상해>로서 이는 그의 대표곡일 뿐만 아니라 당시 전반 중화권 가요계의 대표곡 중의 하나였다. 1950년 주선은 홍콩에서 다시 상해로 돌아왔고 그 이듬해 상해 대 광명영업 회사(大光明影业公司)의 요청으로 영화 <평화의 비둘기>를 찍던 중 정신분열증이 발작하면서 상해 홍교요양원에 입원, 20년에 가까운 가수 및 영화배우 생애를 마감한다. 주선은 자신의 연예인 생애에서 도합 43부의 영화에 출연했고 무대에서 200여수의 노래를 열창했다. 그만큼 당시의 그는 육체와 정신적으로 피곤했고 압력도 컸으며 그가 걸린 정신분열증도 육체와 정신적으로 피곤했던 것과도 관련된다는 설도 있다. 주신의 개인생활을 보면 비록 생모는 아니었지만 수양모 엽봉주(叶凤珠)와의 사이가 각별했다. 그는 스타가 된 뒤 장기간 이 수양모와 함께 생활했으며 1949년 상해가 해방된 뒤에도 여전히 화산로(华山路)에 있는 침류 저택(枕流公寓)에서 수양모와 함께 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1952년 주선이 당시 동거남인 당태(唐棣)한테 사기당한 사건이 발생하자 수양모 엽봉주가 나서서 정안구 인민법원(静安区人民法院)에 기소하여 당태의 불법행위를 적발했다. 한편 주선의 생부 소조부(苏调夫)는 남경 금릉대학을 졸업하고 선후로 목사와 교사 생활에 몸을 담그었으며 생모 고미진(顾美珍)은 남경 금릉여자대학을 나온 뒤 장기간 간호사로 있다가 새 중국의 창립 전야에 혁명에 참가, 해방 후에는 중국 국무원 위생처의 담당 간호장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일찍 주선이 실종된 뒤 사처로 찾아다니며 수소문했으나 딸을 찾기에 실패했다가 1957년 여름에야 신문을 통해 정신병으로 입원한 상해의 여 스타 주선이 자기의 딸임을 확인, 앞당겨 이직수속을 하고 상해로 향발했으나 그 때는 주선의 병세가 위독한 때라 고미진은 딸한테 지나온 경과를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 사진설명: 첫 번째 남편 엄화와의 결혼사진 다른 한편 주선의 혼인 사 역시 불행했다. 1936년 주선은 작곡가 엄화(严华)와 정혼, 1938년 7월 10일 북평의 춘원호텔(春园饭店) 혼례를 치렀으나 둘의 혼인생활은 3년 만에 깨어졌다. 서로가 상대방이 외도한다고 의심하면서 아웅다웅하다가 주선이 가출했고 결과 1941년 주선과 엄화는 이혼서류에 서명하고 말았다. 주선의 두 번째의 남자는 주회덕(朱怀德)이란 이름을 가진 상인으로 주선과의 동거기간 그는 첨언밀어(甜言蜜语)로 주선의 부분적인 재산도 가로챘다고 한다. 1950년, 임신한 몸으로 상해에 돌아온 주선은 신문을 통해 주회덕과의 결렬을 성명, 그 해 말에 큰 아들 주민(周民)을 출산했다. 주선의 세 번째 남자는 미술에 종사하는 화가인 당태(唐棣)였다. 헌데 1952년 5월, 주선이 이 화가와의 결혼을 준비하고 있을 때 당태가 상해시 정안구 인민법원으로부터 사기 및 유인간통 죄로 유기형 3년에 언도되면서 이 혼인 역시 깨어지고 말았으며 같은 해 둘째 아들 주위(周伟)가 태어났다. 일찍 3살 나던 해 외숙의 유괴에 의해 친부모를 떠나 남한테 팔려 다니며 생활했던 주선의 불우했던 동년, 그 뒤 1930년대부터 천성적인 목소리와 미모 그리고 필사적인 노력으로 20년간 옛 상해의 무대와 스크린에서 활약했던 <천애가녀> 주선- 하지만 그녀는 너무도 단순했다. 착하게 살려고 하였지만 세상은 무서웠다. 착한 주선은 늘 타인한테 속임을 당하였다. 특히 애정에서 늘 남자들한테 정감과 재산마저 사기당하군 했다. <미녀박명(美女薄命)>이란 사자성구가 있다. 주선의 운명도 마찬가지었다. 1957년 9월 22일, 주선은 뇌막염으로 상해에서 사망, 그 때 그의 나이는 37살밖에 안되었다. 주선이 사망한지 거의 40년이 지난 1995년 중국 영화계의 인사들은 주선한테 <중국영화 세기상 여배우상(1995年获得中国电影世纪奖女演员奖)>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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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31
  • 송미령마저 기가 꺾인 “극동의 진주” - 황혜란
    [동포투데이] 2015년 5월 7일부터 8월 16일까지 미국 뉴욕에서 열린 뉴욕대도회(大都会) 예술박물관의 패션 전람에는 <중국의 경화수월(镜花水月)>로 명명된 치포 한 벌이 전시되어 있었다. 공예가 정교롭고 극히 아름답고도 고급스럽게 제작된 이 치포는 1932년에 만들어진 것이며 1976년 일찍 중화민국 첫 외교장관이었던 고유균의 세 번째 부인 황혜란(黄蕙兰) 여사가 뉴욕대도회 박물관에 증송한 것이었다. 화제는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지난 세기 20년대로 올라간다. 당시 송경령과 손중산은 광주로부터 북평으로 오게 된다. 그 때 줄곧 자신이 입은 의상이 시대와 너무 뒤떨어졌다고 느끼던 송경령은 외교관 고유균의 저택에 머무는 동안 고부인의 옷장을 자주 훔쳐보군 했었다. 옷장에는 당시 가장 유행되는 옷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옷장의 의상 중 가장 눈에 띠는 것이 치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황혜란은 늘 치포를 입기 즐겼으며 사람들은 모두 황혜란의 패션 영감(灵感)이 그녀로 하여금 고유균의 마님으로 되게 했다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바로 황혜란은 치포의 매력으로 국제사교계에서 활약, 그 화려함과 도고함은 늘 송미령을 압도했고 어느 한 사교 장소에서는 <극동의 진주>란 명성을 갖게 되었으며 후에는 지난 세기 2년대부터 40년대까지 <최가착장(最佳着装)>의 중국여성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전하는데 따르면 황혜란의 부친 황중함(黄仲涵)은 자바자바(爪哇爪哇-지금의 인도네시아)의 <사탕왕>이었다. 당시 황중함은 공개된 부인만 해도 18명이었고 자녀는 도합 42명이었으며 그 중 가장 아끼고 총애했던 규수가 바로 황혜란이었다. 이렇듯 명문가정의 규수로 태어난 황혜란은 일찍 3살 나던 때 어머니로부터 80그람짜리 보석이 박힌 금목거리를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소녀시절은 유럽에서 주로 보냈기에 유럽의 황실문화와 명류사회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황혜란의 생애 중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이라면 바로 복장에 대한 집착과 민감성이었다. 당시 이른바 품위가 있다는 중국의 미녀들은 자국의 비단견직물에는 별로 호감이 없이 거의 천편일률로 프랑스 패션에만 눈길을 주어왔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황혜란은 처음부터 옛식자수(老式绣花)와 비단견직물을 선호했으며 늘 수놓은 적삼에 긴 골든 벨루어(金丝软缎长裤)를 받쳐 입군 했다. 이는 당시 외국영화에서 신비하게 등장하는 이른바 <중국사조(中国风)>였으며 그 앞장에는 항상 황혜란이 있었다. 한편 장학량의 회억에 따르면 기실 황혜란 그 본인은 그닥 이쁜 여인이 아니었다. 거기에 자기의 나이를 속이는가 하면 성격도 괴벽한 등 폐단도 적지 않았다. 한번은 고유균의 내연녀한테 질추한 황혜란은 마작을 노는 고유균의 머리에 차물을 쏟는 행위도 거침없이 저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황혜란이 사교계의 인기 여성으로, <극동의 진주>로 될 수 있은데는 의상꾸밈에 집착하고 또 그런 의상들이 사회, 특히 사교계 신사숙녀들의 눈길을 끌었다는 점에 있었다. 지난 세기 20-30년대 홍콩의 일부 여인들은 이미 골동품이나 마찬가지인 자수 스커트를 곧 잘 피아노 위에 덮어 놓군 했다. 그것은 구식 스커트라 그냥 버릴 수 없어 그냥 먼지를 막기 위해 피아노 위에 덮었을 뿐이었지만 황혜란은 이런 구식 스커트들을 값싸게 사들여서는 밤마다 입고 사교장소에 들어 서군 했다. 이는 한시기 프랑스 파리의 화류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그 뒤 이런 스커트의 값은 몇 배 뛰었다. 황혜란은 무턱대고 자신의 의상을 추구하는 여성들을 경멸했다는 설도 있다. 어느 한 겨울날, 황혜란은 피부병으로 양말을 신을 수 없어 맨발 바람으로 상해의 거리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자 이튿날 상해의 여성 거의 전부가 맨발 바람으로 거리를 행보, 이에 황혜란은 “맹목적인 모작품들”이라고 크게 냉소했다고 전해진다. 황혜란의 애정사를 보면 고유균이 결코 첫 사랑이 아니었다. ▲ 민국의 외교장관 고유균과 그의 세번째 부인 황혜란 일찍 황혜란은 승마를 배우면서 자기와 비슷한 승마애호자인 한 은행가의 아들한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함께 경마장으로 드나들면서 나중에는 열애속에 빠져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인정탐을 통해 그 은행가의 아들이 부인과 자녀가 있는 유부남임을 알게 된 황중함은 단연히 딸더러 그와의 관계를 끊도록 했고 이어 모친을 따라 영국으로 가게 하였다. 영국에서 황혜란은 상류사회와 접촉하게 되면서 그 한 단락의 짧은 애정사를 잊게 되었고 파리에 거주하는 언니 황종란(黄琮兰)의 소개로 당시 민국의 첫 외교관이었던 고유균을 알게 되었다. 당시 32세인 고유균은 그의 두 번째 부인을 금방 잃은 터인지라 황종란 가정의 피아노 위에 놓여있는 황혜란의 사진을 보자 대뜸 반했다고 한다. 첫 대면에서 고유균에 대한 황혜란의 인상은 아주 평범했다. 고유균은 이전에 자기를 집착하던 신사들과는 달리 의상은 아주 보수적이었고 머리칼도 아주 짧게 남기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총적으로 외교관으로서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예절상 거절할 수 없어 고유균과 며칠 만나는 동안 황혜란의 마음은 크게 움직이었다. 무릇 공원이나 극장 같은 공공장소에 가면 고유균은 항상 깎듯한 환대를 받았고 따라서 황혜란도 외교관 부인으로 마찬가지었다. 그는 처음으로 아주 수수한 용모를 가진 고유균한테는 부친 황중함의 재부로도 불가능한 권리와 명예가 있음을 느꼈으며 고유균의 특수한 신분은 황혜란한테 또 다른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펼쳐주기도 했다. 이렇게 되어 황혜란은 그녀 나이 19살에 고유균과 결혼해 그의 세 번째 부인으로 되었으며 이는 고유균으로 말하면 명예와 이익을 이중으로 얻은 셈이었다. 하지만 고유균과 결혼한 첫 날 황혜란은 외교관 생활의 다른 한 측면도 알게 되었다. 바로 동방화촉(洞房花烛)의 저녁, 그들 부부는 제네바로 가는 기차에서 밤을 보내야만 했다. 이 날 저녁, 황혜란은 그래도 결혼 첫 날의 분위기를 돋구려고 알심 들여 선택한 예복을 입고 나타났으나 고유균은 그녀가 입은 예복에는 별반 관심도 없었다. 고유균한테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황혜란은 이 날 밤 실면하고 말았다. 소녀시절 유럽에서 생활한 황혜란은 6개 국의 언어에 능통했고 상류사회의 예의도 많이 장악했으며 이는 고유균의 외교관 사업에 커다란 도움을 주기도 했다. 헌데 고유균은 황혜란에 대해 마치 가정 내의 <장식품>처럼 대할 때가 많았다. 마치 톨스토이의 어느 한 소설에서 나오는 남주인공이 부인을 가정의 <안락의자>에 비유한 것처럼 말이다. 이는 황혜란이 가장 염오하고 격분케 하는 생활이었다. 이렇듯 고유균한테는 항상 무시당했지만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30여년 생애를 통해 황혜란은 중국에 대한 많은 외국인들의 시각을 개변시켰다. 항상 도고한 자세를 잃지 않는 고귀함 또한 돈을 물 뿌리듯이 소비에 인색하지 않는 황혜란의 대범함 등은 당시 <동아병부(东亚病夫)>란 오명을 가진 약하고 낙후한 중국의 사정상 어느 정도 외교관 남편과 중국의 기상을 돋보이게 했다고 할 수도 있었다. 지나치게 총명하고 수준 높은 남녀의 혼인은 흔히 실패하기 마련이다. 1956년 55세에 이른 황혜란은 68세 되는 남편 고유균한테 이혼을 제출, 그러면서 그 이유에 대해 “고유균을 보면 대단히 존경스럽다. 하지만 그이는 중국이 수요하는 인물이었지 내가 수요하는 남편은 아니었다” 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약 2년간 황혜란은 미국 각지를 돌면서 <중국여성문제>를 화두로 강연에 나섰으며 매 1차의 강연마다 1500달러씩 받았다고 한다. 만년에 황혜란은 일찍 부친이 자기한테 남겨준 50만 달러의 이자로 생활하면서 미국 뉴욕의 맨하탄에 거주, 1993년 12월 자신의 100세 생일 날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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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20
  • 옛 북경의 홍등가 - ‘8대 골목’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요즘, 옛 북경의 홍등가로 불렸던 <8대 골목>이 매체를 통해 밝혀지면서 사람들의 <식후 일담>으로 되고 있다. 옛 북경의 <8대 골목(八大胡同)>은 청국 청함풍(清咸丰)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광서(光绪) 시기에 와서 완성되었다. 광서시기에 와서 옛 북경의 기방(妓院)규모는 기본상 완정하게 형성되었으며 정부의 허가로 기방들은 4가지 유형에 따라 각각 문패를 내걸었다. 상류 급 기방은 <당(堂)> 혹은 <큰 지방(大地方)>으로 불렀으며 <청음소방(清音小班)>이란 명칭도 있었다. 이 중 <당>과 <큰 지방>이란 명칭은 명나라 시기부터 내려오던 것이었고 <청음소방>은 남방 상류기방의 이름을 따내온 것이었다. 다음 2류에 속하는 기방은 <당>, <큰 지방> 또는 <청음소방>보다 한 차원 낮은 2등 기방으로 <중간 지방>으로 불렸다가 후에는 <찻집>으로 개명되었으며 3류의 3등 기방은 <하처(下处)>로 불렸고 4류의 4등 기방은 <작은 지방>으로 명명되군 했다. 당시 옛 북경의 명기였던 색금화(赛金花)의 설법에 따르면 1류 기방의 기녀들은 반드시 <누회(楼会)>, <사범(思凡)>, <장정(长亭)> 혹은 <화접(化蝶)> 등 유형의 옛 곡조 한 곡씩 뽑아 부를 줄 알아야 했으며 2류 기방의 기녀들은 한 차원 낮아 곡조를 뽑을 필요는 없지만 차 문화만은 잘 장악해야 했다. 그리고 3류 기방과 4류의 기방은 <화연관(花烟馆)> 혹은 <야계처(野鸡处)>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보면 기녀와 기방들을 급별로 나누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또 정부측의 입장으로 보면 관리 및 세금표준을 정함에 있어서도 유리한 등 면이 있고 표객(嫖客)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돈지갑 사정과 신분에 따라 기녀를 선택할 수도 있으며 그 외 기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몸값을 나타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물론 1등 기원은 강조되는 것이 많았다. 기방 대문은 일반적으로 정교한 벽돌공예로 장식되어야 하고 이름도 편액으로 되어야 했으며 문 위에는 기녀들의 <화명(花名)>이 적힌 게시판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전등이 없었을 시기에는 문 앞을 석유등 혹은 램프등 같은 것으로 밝혀야 했지만 광서 32년(1906년) 전등이 생겨서부터는 일률로 화려한 등불로 밝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음 1등기방은 매 기녀마다 독방이 있었고 그 독방의 시설도 매우 기녀의 신분에 맞게 꾸며졌으며 최초에는 붉은 나무 침대였다가 후에는 시몬스 침대가 주류를 이루었는가 하면 금동으로 된 침대와 조각으로 된 침대가 있는 기방도 있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이런 기녀들의 방은 부잣집 규슈들이나 향수할 수 있는 침실을 방불케 하는바 방안의 분위기 또한 낭만적이어서 들어서자 인차 바지부터 벗는 하류 급 기방과는 근본적인 대조를 이룬다는 것이 특점이었다. 일류 기방의 기녀들은 모두 <엄마>가 있다. 이 <엄마>는 전문 그녀들한테 밥을 제공하는 여인으로서 보모와 비슷하며 나이는 30-40대에 이르는 중년 여성들로서 이전엔 기녀로 있다가 연령이 많아지자 <2선>으로 물러난 여인들이며 기원의 규칙을 잘 알기에 눈치가 빠르고 손님과 기녀들의 비위를 잘 맞춘다고 한다. 이들 중 부분적 <엄마>들은 여전히 그제 날의 자태를 유지, 글짓기와 한 곡조 뽑기 및 서예와 비파연주 등에 능하여 하류 등급 기원의 기녀들과는 비길 바도 못된다. 그리고 2등 기방으로 불리는 <찻집(茶室)> 역시 어떤 기방은 근근히 작은 4합원(小四合院)으로 형성되었지만 어떤 기방은 서양풍미가 농후한 현대식 건물을 차지하기도 했으며 단순한 급별로는 결코 무시할 바가 못 되는 곳이었다. 광서연간의 통계에 따르면 북경 <8대 골목>에는 도합 373개의 기방이 있었으며 이 중 일등기방과 이등기방이 178개 점으로 근 절반의 비율을 차지, 적지 않은 수자로 알려지고 있다. 북경 <8대 골목>의 기녀수자가 늘어남에 따라 무언중 이곳은 인기골목으로 거듭났으며 이 곳의 번영도 가속화되기 마련이었다. 한편 북경 <8대 골목>에서 처음으로 자리를 마련한 남방의 기녀의 화명은 색금화(赛金花)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남방에서 온 기녀 소란(素兰)은 북경에서 유명기녀로 수많은 관신자제(官宦子弟)들이 그녀한테로 가서 즐겼지만 기실 소란보다 몇 년 먼저 북경에서 <남방 팀>을 선보인 것은 색금화였다고 소란 역시 인정한 바가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데 따르면 당시 색금화가 북경에서 첫 선을 보일 당시 그녀를 수용한 기방에서는 동으로 만든 간판에 <남 팀 • 금화원(南班·金花院)>이란 글을 새겨갖고 내걸었으며, 그 날로부터 이 기방은 색금화를 찾는 표객들로 발길이 끊어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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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17
  • 20세기 초 중국 문화계의 여걸- 육소만
    [동포투데이] 육소만(陆小曼)은 중국 역사상 세기를 빛낸 여성으로 그 미모와 더불어 미술창작, 산문창작 및 연극창작과 번역창작 등 다 방면으로 재능을 과시한 중국문예계의 여걸이다. 육소만은 1903년 11월 7일, 상해에서 태어났고 1909년 모친과 함께 북경에 거주하고 있는 부친한테로 가게 된다. 그 이듬해 육소만은 북경 여자사범대학 부속 소학에 입학, 1918년 북경성심학당(入北京圣心学堂)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었으며 그 해 부친 육정(陆定)은 어린 딸을 위해 전문 영국 여교사를 초빙해 영어를 가르치게 했다. 부친과 영국 여교사의 각별한 정성과 관심 그리고 자신의 총명과 노력으로 어린 육소만의 영어수준은 눈에 띄이게 향상되어 사회 각계의 주목을 끌게 되었으며 1920년에는 북양정부 외교장관 고유균(顾维钧)의 초빙으로 외교번역을 담당, 그 때로부터 육소만이란 이름은 북경 사교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 19살 천진난만한 소녀인 육소만은 부모의 뜻에 의해 성심학당을 그만 두고 왕갱(王庚)이란 남성과 결혼, 밀월을 마친 뒤 육소만은 비로서 자신이 행복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다. 결혼 3년이 되던 해, 왕갱은 하얼빈(哈尔滨)시 경찰국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육소만은 왕갱을 따라 하얼빈으로 이주했다. 하얼빈으로 간 뒤 육소만은 한동안 당지 생활에 적응되지 않았고 왕갱 또한 사업과 전도에만 집착하면서 둘 사이의 사랑에는 무형의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이 때 육소만의 앞에는 서지만(徐志摩)이라는 젊은이가 나타났고 육소만은 그를 통해 진정한 애정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육소만과 왕갱 사이에는 커다란 언쟁이 벌어졌고 이 날 왕갱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육소만을 욕해대면서 큰 창피를 주었다. 그 뒤 부친 육정은 왕갱한테 크게 실망하면서 딸의 장래를 두고 걱정을 표하군 했으며 19육소만이 이혼을 결심하자 뜻밖으로 이를 지지했다. 이렇듯 혼인풍파를 겪으면서도 1924년 육소만은 이탈리아 희곡작품 <신기루(海市蜃楼)>의 번역을 완성하는 재능을 나타냈다. 한편 1925년 왕갱과 이혼한 육소만은 인차 서지마와 열애에 들어갔으며 그 이듬해 10월 서지마와의 재혼에 성공했다. 그러는 사이 육소만은 유해속(刘海粟) 화백을 스승으로 미술을 배우기 시작, 이혼풍파 및 재혼생활 등 모든 것은 결코 그녀의 <학구열망>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이어 육소만과 서지마는 북경을 떠나 상해로 갔고 거기에서 둘의 합작으로 된 희곡집 <변곤강(卞昆冈)>을 출판발행하게 되었으며 또한 상해에서 유명인사들인 옹서오(翁瑞午), 엽공작(叶恭绰) 등과 사귀기도 하였다. 이렇게 재혼 후 5년간 육소만과 서지마 간의 생활은 행복하고도 뜻 깊은 나날이었다. 둘은 지향하는 분야가 같았고 또한 부부 사이의 애정도 극진했으며 또한 착한 성품도 비슷하였다. 헌데 세상의 풍운을 예측할 수 없듯이 1931년 11월 19일, 서지마가 한차례의 비행기사고로 저 세상 사람으로 될 줄이야. 이는 28살 젊은 부인인 육소만한테 있어서 청천벽력이나 다름 없었다. 남편이 사망한 뒤 육소만은 더 이상 사교계에 나가지 않았고 자신에 대한 외계의 질책과 루머에 묵묵히 참고 견디면서 서지마의 유작 정리에 착수, 1931년 12월엔 남편의 유작 <운유(云游)>를 정리해 발표했고 1933년에는 <미현쇄어(眉轩琐语)>를 <시대화보> 제 3권 제6기에 발표했으며 이 중 <미현쇄어>는 후에 육소만이 편찬한 <지마일기(志摩日记)>에 수록되었다. 또한 그 때로부터 육소만은 아예 거의 두문불출하고 저택에 묵박혀 있으면서 창작, 번역과 그림그리기에 전념, 1934년에는 <논어(论语)> 제38기에 <애미소찰(爱眉小扎)>을 발표했고 2년 뒤인 1936년에는 양우부흥도서회사(良友复兴图书公司)를 통해 <애미소찰>을 단행본으로 출판했으며 그 해에 중국여자서화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1941년 육소만은 상해 대신회사(大新公司)를 통해 개인 회화전(画展)을 개최, 성숙된 여류 화백임을 과시했고 1943년에는 양우부흥도서회사를 통해 단행본 <애미소찰>을 재판했으며 1947년까지는 글 쓰고 그림을 그리는 한편 지속적으로 남편 고 서지마의 유작정리에 혼신을 쏟았다. 그것들로는 서지마가 1918년에 쓴 <서호기(西湖记)>, 1926년부터 1927년 사이에 쓴 <미현쇄어>와 <색깔이 없는 한권의 책(一本没有颜色的书)> 등이 있었다. 육소만으로 말하면 사생활이 비교적 복잡한 여인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처음의 왕갱과의 혼인은 봉건전통의 반강제적인 혼인이었다면 두 번째 서지마의 혼인은 서로가 사랑하였고 또한 봉건적 세속을 벗어난 자유적인 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지마와의 결혼 후에도 육소만은 옹서오(翁瑞午), 아부용(阿芙蓉) 등과 남다른 사이었으며 서지마가 사망한 후에는 더욱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달랠 길 없어 자주 이들과 <일야 애정(一夜班房)> 관계를 갖군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38년부터는 옹서오와 정식으로 동거생활을 시작, 그 때 육소만의 나이는 35살에 불과했다. 육소만의 두고 그 무슨 질책이나 비난에 앞서 그가 생활했던 시대의 배경을 보면 어느 정도 동정이나 이해가 가는 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우선 육소만이 젊은 시절은 중국의 봉건세습에서 갓 현대문명을 접하는 시대였던만큼 그런 사생활의 출현은 정상적이란 분석이며 거기에 당시 육소만은 절색의 미모인데다 여러 가지 재능을 갖고 있었기에 쉽게 남의 말밥에 오르기도 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시기, 육소만은 마음씨가 착한데다 신체가 허약했기에 남자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도, 또한 남자들의 보호가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의문스러운 것은 1938년 옹서오와의 동거를 시작한 뒤 20여 년간 여러 가지 애로와 풍파가 있었지만 육소만은 옹서오의 곁을 지켜주면서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55년 옹서오가 착오를 범해 모든 공직에서 해임돼 <백수>가 되었을 때에도 그랬고, 폐병으로 피를 토하며 고액의 의료비용이 들어갈 때에도 마찬가지었다. 당시 호적을 비롯한 육소만과 가까웠던 많은 인사들이 그녀더러 옹서오한테서 떨어질 것을 권고했으며, 그 중 호적은 이제 옹서오와 헤어지기만 하면 육소만의 모든 생활비용까지 자기가 부담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육소만은 생활형편이 극히 궁핍함에도 옹서오의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남편도 아닌 이 <동거남>을 돌봐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다면 옹서오의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왜 그와 정식 혼인은 하지 않았는지? 또한 혼인관계가 아니면서 왜 옹서오의 곁을 시종 지켜주었는지? 이러한 것들은 오늘까지도 일종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1956년 4월 육소만은 당시 상해시 진의 시장의 관심으로 상해시 문사관 직원으로 배치되었고 그 해에 중국 농공민주당에 가입, 1958년에는 상해 중국화원(中国画院)의 전직화가로 됨과 아울러 상해미술가협회에 가입하게 되었으며 1959년에는 상해시 인민정부 참사실 참사(参事室参事)로 추대받았고 역시 그 해에 전국 미술가협회의 <3.8홍기수(三八红旗手)>로 평선되었다. 행운과 비운이 엇갈림 속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살아왔던 중국현대사의 여걸- 육소만은 1965년 4월 3일 상해 화동병원에서 52세의 아까운 나이로 자기의 인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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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8-03-15
  • 루쉰이 사랑했던 '북평대학 황후' - 마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마각(马珏)은 중국을 포함한 동방미인의 기질을 타고난 여성으로 지난 세기 20년대 그 시기국립 북평대학의 <황후(皇后)>로 공인받은 여학생이었으며 오랫동안 중국 좌익작가의 1임자였던 루쉰(鲁迅)의 총애를 받아왔던 여인이기도 했다. 마각은 절강 인현(浙江鄞县)적으로 1910년 일본 도쿄에서 부친 마유조(马裕藻)와 어머니 진덕형(陈德馨)의 장녀로 태어났다. 마각이 태어날 당시 그녀의 부모는 모두 일본에서 유학, 부친 마유조는 선후로 일본 제국대학과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했고 모친 진덕형은 메지로 여자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기간 마각의 부친 마유조는 루쉰 등 인사들과 함께 유명한 언어학자 장태염(章太炎)으로부터 문자음운(文字音韵学)에 대한 강의를 자주 방청하면서 깊은 우정을 쌓았다고 한다. 1911년 즉 마각이 태어난 이듬해, 마유조는 부인과 딸을 거느리고 귀국, 절강성 교육사(司) 시학(视学-학무를 감독하는 관리)으로 부임됐다가 1913년부터 1915년 기간에는 북경대학 교수로 문자음운학을 가르치었다. 이어 1921년 마유조는 북경대학 국문학부 주임으로 있으면서 루쉰을 북경대학 교수로 초빙하기도 했다. 마각이 루쉰을 처음 만난 것은 1925년경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시기 마각은 15세의 어린 소녀였다. 당시 루쉰 선생은 늘 귀객으로 마유조의 가정을 자주 찾아왔고 그 때마다 마유조와 반나절씩 한담했다. 이는 어린 마각한테 큰 인상을 남기었다. 당시 마각 또한 문학소녀였기에 루쉰 선생과의 만남은 문학수양을 쌓아감에 있어서 더 없이 좋은 기회였으며 그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1926년 16살 소녀였던 마각은 재학 중이던 공덕학교(孔德学校)의 간물 <순간(旬刊)>에 <루쉰 선생과의 첫 만남(初次见鲁迅先生)>이란 글을 발표, 얼마 후 이 학교를 찾은 루쉰 선생은 마각의 이 글을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실사구시적으로 참 잘 썼다”며 칭찬했으며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써내라며 많은 문학 서적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 때로부터 마유조는 팔도만(八道湾)에 있는 노신의 집으로 갈 때마다 딸 마각을 데리고 갔으며 그 것 또한 마각한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담찬 문학소녀였던 마각은 루쉰 선생과 자주 편지거래를 하기 시작, 편지마다 루쉰 선생에 대한 경모의 정과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찼으며 이에 대해 루쉰 선생 또한 그 어떤 싫증도 내지 않고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마각과 루쉰 선생과의 편지거래는 1926년 1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지속, 마각이 루쉰한테 쓴 편지는 28건에 달하고 루쉰이 마각한테 쓴 회답편지는 13건에 달했으며 루쉰은 또 마각한테 자주 책들을 보내주기도 했다. 1928년 마각은 북평대학 예과 반에 입학했다가 1930년에 정치학부의 본과 반으로 넘어갔다. 그녀가 정치학부로 넘어간 것은 완전히 부친 마유조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마각의 여동생 마염(马琰)은 북평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하도록 유도, 이는 두 딸로 하여금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중국의 현실에서 여권을 쟁취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마각한테는 “앞으로 네가 공사관(公使馆)이 되면 남편을 데리고 출국하는 외교관으로 될 수도 있다”고 했고 여동생 마염한테는 “네가 법률을 잘 배우면 앞으로 혹시 이혼하더라도 법률로 자신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두 딸한테 봉건적 예속에서 벗어난 현대여성으로 될 것을 요구했다. 대학시절의 마각은 체형이 미끈하고도 이쁘장했으며 또한 그런 연고로 당시 북평에서는 “북평대학에 대한 마유조의 가장 큰 기여는 이쁜 딸을 이 대학에 입학시킨 것”이란 유행어가 나돌 정도였고 북평대학의 한 교수는 마각을 놓고 <대리석으로 조각해낸 인물과도 같은 미녀(像大理石雕出的那么美)>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시절 마각은 거의 매일 10여 통에 달하는 구애편지를 받았는데 어떤 편지는 책으로 묶은 것도 있었다. 한편 루쉰한테 있어서 마각은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친구 마유조의 딸이어서만이 아니었다. 평소 루쉰은 마각과 함께 있으면서 담소하기를 즐기었고 매번 마유조의 집으로 갈 때마다 여러 권의 책을 갖고 가 마각한테 선물(당시 루쉰한테서 책을 선물 받은 사람은 몇 명 안 되었음)하였으며 장시기 동안 친구의 딸인 마각과의 편지거래가 있었는가 하면 자신의 일기 중에 마각을 언급한 구절이 50여 곳이나 있었다. 미를 사랑하고 특히 유식하고도 젊은 미녀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남성들의 본능이라 할 수 있다. 루쉰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다르다면 루쉰은 이지를 지키는 남성이었고 또한 그가 마각이란 이 친구의 딸과의 사이를 두고 방황하고 있을 때 역시 학생이었던 허광평(许广平)이란 젊은 여성이 루쉰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 수도 있었다. 허광평으로 놓고 말하면 대담하고도 주동적이었으며 또한 집요하고도 열렬한 타입이었다. 허광평이 루쉰의 앞에 나타날 당시 루쉰한테는 주안(朱安)이라고 부르는 원 부인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광평은 그들 부부사이에는 그 어떻다고 할 만한 애정이 없다는 것과 그 혼인은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허광평의 집요한 애정공세로 노신과 허광평은 동거 끝에 허광평의 임신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루쉰은 이 때에 와서야 모든 사실을 모친한테 고백하는 것으로 원 부인과의 혼인관계를 결속짓게 되었다고 한다. 반대로 마각한테 허광평과 같은 용기와 집요하고도 열렬함이 있었더라면 루쉰의 애정사는 다르게 씌어질 수도 있었다는 분석이다. 마각에 대한 루쉰의 입장은 이렇게 마음속으로는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관심해주는 등에 그치었다. 1933년 3월 루쉰은 상해에서 마각이 천진세관의 직원인 양관보(杨观保)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북양화보(北洋画报)>는 마각의 결혼소식을 실으면서 그들의 결혼사진도 함께 배합했다. 그 때 타인을통해 마각의 결혼소식을 접한 루쉰은 얼굴에 크게 놀라는 기색이 역연했으며 한참 뒤에야 가까스로 “이젠 마각한테 더 이상 책을 보내지 말아주오. 결혼한 여성한테 타남인 내가 책을 계속 보내준다는 것은 오해를 살 가능성이 크다오” 라고 했다고 한다. 결혼시 마각은 이 소식을 루쉰한테 알리지 않았었다. 이를 두고 이러 가지 추측이 나돌았지만 루쉰이 허광평과 결혼한 사실에 반발한 마각이 일부러 결혼을 서둘렀고 또 루쉰한테 알리지도 않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왜냐하면 당시 마각은 북경대학을 졸업하지 않은채 결혼을 앞당겼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8-03-10
  • 중국 현대의 가장 진보적인 여류작가 정령
    [동포투데이] 정령의 원명은 장위(蒋伟)이고 자는 빙지(冰之)이며 필명으로는 <빈지(彬芷)>, <종훤(从喧)> 등이 있다. 정령(丁玲)은 중국 현대문학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류작가이며 여성혁명가이다. 그는 반제 반봉건의 격류 속에서 붓대를 들고 일본침략자 및 국민당 정부와 투쟁하였을 뿐만 아니라 혁명진영 내에서 남성주체의 양성 간(两性间) 계급모순에 대해서도 명철하게 통찰하면서 이른바 혁명이란 울타리 속에 숨겨져 있는 여성기시 경향과도 투쟁하여 왔으며 여성의 입장에서 혁명군체내에 깊이 뿌리가 내린 부권제 성별 차별과 끝없는 도전을 벌여오기도 했다. 1904년 10월 12일, 호남성 임례현 여시진 고풍촌(湖南省临澧县佘市镇高丰村)에서 태어난 정령은 민국 7년(1918년), 도원 제2여자 사범학교(桃源第二女子师范学校) 예과반에 입학, 이듬해엔 장사 주남 여자중학(周南女子中学)을 거쳐 다시 장사의 악운중학(岳云中学)에서 공부하면서 <5.4운동>의 영향을 깊이 체험한다. 1922년, 정령은 진독수, 이달(李达) 등 공산주의자들이 창립한 상해의 평민여자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공산주의와 접촉했으며 이어 구추백(瞿秋白)의 소개로 공산당이 세운 상해대학 중국문학부에 입학, 다시 그 이듬해 북경으로 가 북경대학 문학과정을 방청하는 것으로 문학수양을 쌓기에 정진한다. 그 시기 정령은 처녀작 <몽가(梦珂)>를 <소설월간>에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때로부터 정령은 문학창작에서 두각을 내보이며 많은 문학청년들과 사귀었으며 많은 활약상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창작황금기에 들어갔고 대표작의 하나이며 문단에 강열한 반향을 일으킨 <싸싸 여사의 일기(莎菲女士的日记)>를 발표했으며 첫 단편소설집<암흑속에서(在黑暗中)>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 시기 즉 1930연대 초기는 정령이 소자산계급 민주주의 문학소녀로부터 프로레타리아 혁명 문학인으로 전환되던 단계였다. 1930년, 정령은 중국 좌익작가동맹에 가입, 첫 장편소설 <위호(韦护)>를 완수하면서 비로서 무산계급 혁명가의 시각으로 세상을 통찰하는 발걸음을 뗐다. 그 뒤 1931년 정령은 좌익작가동맹의 기관간물 <북두(北斗)>의 주필 및 공청단 서기직을 맡으면서 노신(鲁迅)의 문학기발을 추켜든 영향력이 있는 좌익작가로 성장했으며 그 이듬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1933년 5월 정령의 인생사상 특대 사변이 발생, 국민당의 반공책동과 부저항주의 노선을 비판하고 까밝히는 정령을 눈에 든 가시처럼 보아오던 국민당 군통국 특무들은 정령을 납치해 남경으로 끌고 갔다. 그러자 5월 17일, 상해의 <대미석간(大美晚报)>은 <정령 여사 실종(丁玲女士失踪)>이란 제목으로 이 특대뉴스를 터뜨렸고 이어 상해, 천진과 북평 등 대도시의 신문들에서도 앞다투어 게재했으며 이는 한동안 사회의 열점으로 되기도 했다. 5월 23일, 채원배(蔡元培), 양행불(杨杏佛), 호유지(胡愈之) 등 38명의 인사들은 연명으로 국민정부 행정 원장과 사법부장한테 전보를 보내 납치된 정령, 번자년(潘梓年) 등 문화계 인사들을 석방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6월 10일, 상해 문화계에서는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해 <정령, 번자년의 석방을 위한 문화계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노신은 양우회사에 정령의 작품집 <어머니>를 다그쳐 출판할 것을 촉구, 출판과 동시에 각 큰 신문들에 광고를 대폭 실어 선전할 것을 요구했고 중국 민권보장동맹의 송경령 주석 또한 국민당 행정원장인 왕정위(汪精卫-후에 친일파로 전락)한테 전보를 보내 정령과 번자년을 석방할 것을 재삼 촉구했으며 이에 바비다(巴比塞), 로맹 롤랑(罗曼·罗兰) 등 국제우호인사들도 적극 동조하고 호응해주었다. 1936년 9월, 정령은 공산당 조직과 민주인사 및 국제우호인사들의 노력으로 성공적으로 남경에서 탈출해 연안으로 갔으며 이는 섬북에 도착한 첫 좌익작가동맹의 유명작가로서 모택동과 주은래 등의 열정적인 환영을 받게 되었다. 1940년, 10월 19일, 연안에서는 노신서거 4주년 기념모임이 있었고 당일 정령, 서군(舒群), 숙군(萧军) 등의 발족하에 연안문예월회(延安文艺月会)가 설립되었으며 그 이듬해 이 월회의 간물 <문예월보>가 창간되면서 정령, 서군과 숙군이 윤번으로 주필을 맡았다. 그 뒤 정령은 중국문예협회 주임, 중앙 경비퇀 정치부 부주임, 서북전선 봉사단 주임, <해방일보> 문예부간 주필, 섬감녕변구 문예협회 부주석 등 직에 역임, 변구건설과 문예사업을 위해 탁월한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가 하촌에 있던 시절(我在霞村的时候)>, <병원에서(在医院中)> 등 사상성이 강한 작품을 창작했으며 1948년에는 유명한 장편소설 <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太阳照在桑干河上)>를 완수하기도 했다. 전국이 해방된 후 정령은 연안시절의 전우들과 함께 기세 드높은 국가건설에 투신, 자신의 원고료 전부라 할 수 있는 구 화폐 1600여 만위안을 국가건설에 헌납하였다. 그리고 1952년 <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로 소련에서 스탈린 문예상을 획득, 상금으로 받은 5만루블을 전부 중화 전국민주여성연합회 아동 복리부에 기부했다.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중국에서 불어친 반우파운동 중 정령은 <반당 소그룹> 성원, 우파분자 등 누명을 쓰고 극좌 노선의 박해를 받았으며 선후로 흑룡강의 탕원 농장과 보천령 농장(宝泉岭农场)에 쫓겨가 무려 12년간이나 노동개조에 시달렸으며 이 기간 5년은 옥중생활을 겪기도 했다. 정령의 억울한 누명은 1976년 중국의 <4인방>이 분쇄된 뒤에야 벗겨지기 시작했다. 당시 산서의 농촌에 있던 정령은 자기와 남편의 밀린 노임이 발급되자 1만원을 내놓아 당지의 농촌건설에 쓰이도록 했다. 1984년 중공중앙 조직부에서는 <정령동지의 명예를 전면 회복시켜 줄데 관한 통지>를 발부, 다년간 그한테 가해진 억울한 죄명을 깨끗이 청산해주었으며 <정령 동지는 당과 혁명에 충실한 공산당원>이라고 긍정했다. 만년에 들어 정령은 <괴물세계(魍魉世界)>, <풍설인간(风雪人间)> 등 100만자에 달하는 작품을 창작, 또한 문학잡지 <중국>을 창간하고 주필로 있으면서 많은 청년작가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1986년 3월 4일, 정령은 북경 다복골목에 있는 저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82세였다. 부록: 정령의 가족 상황 남편 진명(陈明): 정령이 연안시절에 사귀고 결혼했던 남편으로 정령이 서거한 후 줄곧 정령의 유고(遗稿)를 정리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들 장조림(蒋祖林): 고급공정사, 저서로는 <나의 모친 정령> 등이 있음 딸 장조혜(蒋祖慧): 중국의 제1대 발레무극의 연출, 대표작으로는 <홍색낭자군(红色娘子军)>, <축복(祝福)> 등이 있음 손녀 호연니(胡延妮): 현재 미국 모토로라(摩托罗拉) 전자유한회사 주 중국대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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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8-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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