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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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변팀 0대1로 성도셀틱팀에 분패
    —연변팀 0대1로 성도셀틱팀에 분패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이 15일 오후 3시 30분 성도 쌍류기지 스포츠쎈터에서 열린 2012 중국축구 갑급리그 제25륜 경기에서 전반전 39분경 성도셀틱팀 왕개선수에게 결승꼴을 내주며 0대1 분패를 당했다. 이날 승리로 성도셀틱팀은 승점 34점으로 8위권에 진입, 강급권에서 완전히 해탈됐다. 반면 연변팀은 강급권 수렁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였다. 경기초반부터 량팀은 경기의 중요성을 감안해서였던지 득점사냥에 열을 올렸다. 25분경 이반 보직선수의 강슛이 성도팀 꼴문 기둥을 살짝 비켜가 아쉬움이 컸다.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지며 “중원”싸움이 매우 치렬했다. 39분경 빼여난 움직임을 보여주던 성도셀틱팀의 외적용병 요한슨(20번)이 연변팀 좌측변선을 허물며 문전에 공을 올렸다. 문전에 대기해있던 왕개선수(6번)가 득점으로 련결, 이날 결승꼴을 터뜨렸다. 전반전은 성도셀틱팀이 1대0으로 앞선채 마감됐다. 후반 시작과 함께 연변팀은 필승 의지를 드러냈다. 상대를 몰아붙이며 경기를 펼쳤다. 59분경 최영철선수가 강홍권선수 대신 투입되며 공격력량이 강화됐다. 64분경 상대 키퍼와 1대1 슛기회가 주어졌지만 득점이 무산돼 땅을 쳐야 했다. 76분경 김광주감독대행은 이반 보직선수를 빼고 쿠리바리선수를 출전시켰다. 85분경 쿠리바리선수에게 절호의 득점기회가 있었지만 상대 꼴키퍼의 선방에 막혔다. 이후 4분간의 경기보충시간까지 파상공세를 펼친 연변팀이였지만 굳게 잠긴 성도셀틱팀의 꼴문을 열지는 못했다. 경기결속뒤 김광주감독대행은 “경기 흐름상, 내용상 비교적 만족할만한 경기였지만 결과가 패전으로 이어져 매우 아쉽다”고 말하면서 “남은 5껨의 경기를 한껨한껨 잘 치러나가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오는 22일 오후 3시, 연변팀은 북경리공팀을 룡정시해란강경기장에 불러들여 일전을 펼치게 된다. 연변일보 리영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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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17
  • 독도(다께시마)지위와 관련하여 혼돈하는 한국과 일본
    2012년 여름에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오랜 력사를 가진 령토분쟁으로 급격히 악화되였다. 분쟁대상은 동해에 있는 바위섬이다. 유럽인들은 포경선《레 리앙쿠르》의 이름을 따서 이 섬을 리앙쿠르섬이라고 불렀다. 이 포경선 선원들이 1840년에 이 섬을 발견하고 지도에 기록했다. 그러나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은 유럽인들보다 훨씬 오래전에 이 섬에 대하여 알았다고 주장한다. 현재 이 섬은 한국 경상북도 울릉도구에 속해있으며 한국식으로 독도로 불리우고 있다. 일본인들은 다께시마라고 부르면서 시마네현 오끼구에 속한다고 간주하고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섬을 관리하는것은 한국인들이며 여기에는 경찰과 행정당국, 등대지기들이 있다. 일본은 다께시마가 시간적으로 대부분 일본에 소속되여 있었다는 근거를 들면서 이 섬을 반환할것을 요구한다. 한편 한국은 일본과의 사이에는 독도와 관련한 그 어떤 령토분쟁도 없으며 있을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독도는 지금도 한국에 속해있으며 항상 한국에 속해있었기때문이라는것이다. 쌍방은 서로 령유권을 주장하면서 력사기록들, 지도, 조약들을 론거로 제시하고있다. 그러나 무소속 전문가들인 죤 반 다이크, 전갑영, 김영구는 이 문건들을 가지고서는 독도의 소속문제를 정확히 해명할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요구는 부분적으로 력사기록들과 우산도가 있는 지도에 기초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우산도가 바로 독도, 혹은 리앙쿠르섬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일본은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에 더 가까이 있는 죽도이며 다께시마(독도)는 력사적으로 마쯔시마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으며 일본에 속해있었다고 주장한다. 일본측은 섬의 명칭이 애매한것을 리용하여 12세기부터 벌써 독도에 대하여 알고있었다는 한국학자들의 주장을 의심한다. 문건, 지도, 사변들에 관해서도 두 나라 학자들의 견해가 어긋나는 것이다. 실례로 1905년에 일본은 리앙쿠르섬, 즉 다께시마를 그 주변에서 물고기잡이를 하던 일본인들의 요청에 따라 시마네현에 소속시켰다. 이 사변에 대하여 일본과 여러 나라 언론들이 즉시 전했다. 일본은 국제공동체가 침묵을 지키자 그것을 이 령토에 대한 일본의 령유권을 인정하는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때로부터 얼마후 한국은 일본에 완전히 병합되였으며 따라서 독도지위와 관련한 문제는 사라졌다. 자주권을 잃은 한국은 섬의 반환을 요구할 권리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으로 독립을 쟁취한후에야 한국이 그렇게 요구했다. 1951년 9월 미국주재 한국대사 유장연은 미국무장관 딘 에치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준비되고 있는 일본과의 강화조약에서 일본이 한국의 령토, 그리고 합병전에 한국의 령토였던 섬들, 즉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 파랑도에 대한 령유권을 포기할데 대해 박아넣을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얼마후에 미국인들로부터 받은 회답에는 《미국정부는 일본이 포츠담선언에 지적된 령토들에 대한 주권을 공식 최종적으로 포기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포츠담선언조항을 접수했다는 사실을 쌘 프랜씨스꼬강화조약에 박아넣어야 한다고 간주하지 않는다. 다께시마, 혹은 리앙쿠르바위로도 알려진 독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바위섬들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이 섬들은 한국의 부분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1905년부터 일본시마네현오끼행정구의 관할하에 있었다. 지금까지 한국은 이 섬들에 대한 령유권을 제기한적이 없다.》라고 씌여져있었다. 사실 쌘 프랜씨스꼬강화조약에는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의 령토에 대한 려유권을 포기한다고 지적되여 있다. 그러나 문건에는 독도가 지적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인들이 이 령토를 일본의 소속으로 남겨둔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몇년동안 미군은 다께시마를 시험장으로 리용했다. 그러다가 1954년에 미국인들이 독도를 떠난후 한국군이 이 섬을 차지했다./외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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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16
  • 이해하면서 삽시다
    참 간사한게 사람마음인가 본다. 한국에 있을때는 불법체류자라고 쩍하면 단속이다 뭐다 우리를 들볶으면서 괴롭힌다고 한국정부에 그리도 불만이 많았던 나였다. 하지만 귀국해서 날이 갈수록 그게 아니다.고작 우리연변땅의 두배밖에 안되는 작은 땅덩이! 거기에 자국민 오천만도 인구밀도가 중국의 세배도 더 되는터에 탈북자들과, 교포들을 망라한 외국인 백만까지… 실로 골치아프지 않을수가 없으리라. 더구나 외국인 백만은 거의다가 노동력이니까 아무리 그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해서 돈을 번다지만 취업율에도 막대한 손실을 주고 있는게 사실이다.한데도 한국정부는 그냥 공제의 목적으로 단속이다 그렇게 형식으로 소리만 높일 뿐, 진짜로 못살게 굴었던 적은 참말로 없었던것 같다. 체류법대로 엄격히한다면 이잡듯이 뒤지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을수도 있다. 여하튼 딱 잡자고만 맘먹으면 우리가 무슨 수로 숨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적은 참말로 없었다. 내가 아는 사람중에 잡혀서 귀국한 몇몇은 다가 술마시고 누구와 싸움질해서 말썽을 일으키거나, 여자들은 또 못나게도 지들끼리 헐뜯고 싸우다가 누구에겐가 고발을 당해서 한꺼번에 쌍으로 잡힌이도 있으며, 돈있는 한국 남자를 꼬셔서 바람을 피다가 그 부인한테 잡혀서 개망신하고 귀국한이도 있고 또 누구는 같은 교포끼리 어느 하나가 한국인들한테 알랑방구로 달라붙어서 교포들을 왕따나 시키고 괴롭히다가 미움을 사서 제사람들한테 고발을 당한이도 있다.…..그러루한 일이없이 그냥 부지런히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착하게 열심히 일하고 본분을 지키는 사람들은 십여 년씩 스스로 맥이 진해서 못할때까지 얼마든지 숨어 지내면서 돈들을 벌고 있는 것이다.민약에 중국땅의 1%도 안되는 그 작은 땅덩이에 우리교포들의 자유왕래까지 허용한다면 한국땅은 폭발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여러 가지로 저애한다고 해도 사실은 약삭빠르고 갈만한 이들은 거의다 한국에 갔으니까. 지금 한국내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 중국교포들만해도 수십만이 되는데 나처럼 한국가서 있다가 귀국한 이들 역시 적은 수가 아니리라고 본다.그러니까 사람은 냉정해야 한다고 했으리라. 생각할수록 한국정부의 시책이 난 그래서 이해가 된다. 이제는 덮어놓고 그들이 인정머리 없다고 그냥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게 잘못이라고만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다.그냥 간단한 생각으로 우리집이 비좁은데 갑자기 손님이 많이 쓸어온다면 어떻겠는가 말이다. 그게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도, 제일로 가까운 친척, 그래 시집간 친딸이 손군들을 앞세우고 놀러 왔다고치자. 적어도 정상적인 생활리듬이 깨져서 오래되면 지겨울 때가 왜 없을까? 집이 널찍하고 인심이 나는 쌀독도 넉넉하고 그렇다고 해도 손님이 너무 많이 자주 다니는건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그러니까 그런 도리 아니겠는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고 이번엔 그 손님이 주인집의 경제래원에까지 영향을 준다면 손님 때문에 진짜로 못살 때를 만나는 게 아닐까 싶다.만약에 그렇게 못살때를 만나는 상황이 나한테 닥친다면 체면이고 뭐고 어디 있겠는가 몽둥이를 들고서라도 미운 손님을 얼른 쫓아내야지. 그런데도 대한민국정부는 우리한테 그런적은 없지 않는가? 그냥 문명하게 점잖게, 단속이라는 허울로 조금 자유행동을 구속하는정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사실은 아니였다. 내가 알기로 해마다 돌아오는 연말연시 단속때면 그냥 외출을 조금 삼가면 그만이다. 찾아다니면서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게 어때서?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것도 재미였지 싶다. 우리가 어머니고국에 찾아갔으니 외가에 간 셈인데 외손녀 외손자들이 너무 설칠 때면 꽥 고함을 질러서라도 조금 기죽이는 일은 얼마든지 이상한게 아니잖은가. 그렇다고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가 외손군들을 미워서 그랬을까, 또 그랬다고 우리한테 외가집이 원쑤로 될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마냥 그리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 외삼촌과 이모들!!감사하면서 살면 행복하다고 했던가? 그래서 난 우리교포들께 권고하고 싶다. 지겹도록 많이 몰려간 우리들한테 한국정부는 그만하면 참말로 인도적으로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리저리 숨어 지내면서도 그래서 한국간 우리동포들 어느 누구라도 돈은 벌지 않았는가. 그리고 솔직히 나도 불법체류자 되어보아서 알지만, 불법체류자들이 돈은 오히려 더 많이 모은다. 일체 연장수속이다 세금이다 교육이다 그게 없는데다 집에 올수 없으니까 적어도 몇 번의 비행기 왕복 티켓값에 남들이 집다니는 시간에 쉬지 않고 번 돈이라도 더 남지 않았는가 말이다.그런데 어쩌라고? 돈도 많이 모으고 그냥 합법적인 신분도 달라. 세상엔 그렇게 좋은일만 있는게 절대로 아니다 한쪽이 좋으면 어느 한부분은 조금 모자람을 참아야 하는법. 맛있는걸 배불리 먹고 운동도 안 하고 편히 지우면 뚱보가 되여서 미운 몸매로 살아야고 배고픔을 참고 이악물고 다이어트에 운동을 하느라 고생하면 또 예쁜 몸매로 살 수 있는것과 같이 고통과 향수는 언제나 반반이다.몰려간 인간이 하도 많으니까 밉게 노는 인간들도 사실은 적지 않다. 도둑질하는놈 강도질 하는놈에 심지어는 중국에서는 끔쩍도 못하던 성폭행에 살인까지….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잇발이 갈리고 등골이 써늘한터에 그래도 한국정부는 우리교포들한테 그렇다고 다 싸잡아서 못살게 굴지는 않았다. 일부 악의를 품은 한국인들이 듣기 구차한 욕을 해서 우리한테 상처는 주지만도 우리식구들이 잘못을 했으니까 욕만큼은 또 감내해야 한다고 본다.성문에 불이 붙으면 뒤뜰의 연못에도 화가 미치거늘 도리없이 한패거리라고 몰아서 족친다면 억울해도 하는수 없이 맞아 줘야 하는터에 그냥 욕만 먹으니까 그래도 맞기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맘속에 상처도 어쨌든 상처는 상처지만 몸에 생채기 나는것보단 구차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어쩌겠는가 그게 우리 중국 교포인것을….. 내가 잘못하지는 않았지만 우리함께 간 일행 중 누군가가 그런 못된 짓을 했으니 욕할때는 그냥 아무개가 아니고 중국교포 네글짜가 앞에 딱 붙으니까 전체가 팔리고 욕을 함께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손님이 손님을 더 싫어한다고 했으리라. 하지만 손님 가운데 미운 손님이 더러 섞이는것도 어쩔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나쁜 사람은 인구비례로 어디나 다 존재하는 것이니까 체로 치거나 찍어서 맛을 보고 일일이 다 솎아내는 수는 없다.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다 이해하면서 살아야 한다. 세상은 이럴수도 저럴수도 있는법이라고. 그러면 우리도 속편하고 기분이 많이 가벼워질 것이다.동포들이여! 넉넉한 마음씨와 이해는 우리 자신한테 행복과 편함을 주는 것이지 절대로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훈이
    • 독자기고
    2012-09-16
  •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성명
    2012년 9월 10일, 일본정부는 중국측의 거듭되는 엄정교섭에도 불구하고 조어도와 그에 부속된 남소도와 북소도를 "구입"하여 이른바 "국유화"를 실시한다고 선포했다. 이는 중국령토주권에 대한 엄중한 침범이며 13억 중국인민의 감정에 대한 엄중한 손상이며 력사사실과 국제법리에 대한 엄중한 유린이다. 중국 정부와 인민은 이에 단호한 반대와 강력한 항의를 표한다.조어도와 그 부속섬은 자고로 중국의 신성한 령토로서 력사근거와 법적의거가 있다. 조어도 등 섬들은 중국인이 가장 일찍 발견하고 명명하고 리용했으며 중국어민들은 예로부터 이 섬과 그린근 해역에서 생산활동에 종사해왔다. 일찍 명나라때 조어도 등 섬들은 이미 중국해안방어관할범위에 들었으며 중국 대만의 부속섬이였다. 조어도는 종래로 그 무슨 "주인이 없는 땅"이 아니며 중국은 조어도 등 섬의 쟁론할 여지가 없는 주인이다.1895년 일본은 갑오전쟁말기에 청정부의 패전이 결정된 틈을 타서 조어도와 그 부속섬을 비법적으로 절취했다. 뒤이어 일본정부는 청정부를 강박하여 불평등 "마관 조약"을 체결하여 "대만 전반 섬과 모든 부속 여러 섬"들을 떼갔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까히라선언"과 "보츠담선언"에 따라 중국은 일본이 침점한 대만, 팽호렬도 등 령토를 회수했으며 조어도와 그 부속섬들은 국제법상 이미 중국에 귀속되였다. 력사는 뒤엎지 못한다. 조어도문제에서 일본의 립장은 세계반파쑈전쟁승리성과에 대한 공공연한 부정이며 전후 국제질서에 대한 엄중한 도전이다.1951년, 일본은 미국 등 나라들과 편면적인 "샌프랜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류뀨군도(지금의 오끼나와)를 미국에 넘겨 관리했다. 1953년, 미국 류뀨민정부는 제멋대로 관할범위를 확대하고 중국령토 조어도와 그 부속섬을 그 속에 넣었다. 1971년, 일미량국은 "오끼나와 귀환협정"에서 또 제멋대로 조어도 등 섬들을 "귀환구역"에 넣었다. 중국정부는 일, 미의 이와 같은 사사로이 중국령토를 주고받는 수법에 대해 처음부터 단호히 반대하고 승인하지 않았다. 일본정부의 이른바 조어도는 일본의 고유령토이며 일중간에 해결이 필요한 령토분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완전히 력사 사실과 법리를 무시하는 것이고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이다.1972년 중일관계정상화와 1978년 평화우호조약체결과정에 량국 로세대 지도자들은 대국에 착안하여 "조어도 문제를 잠시 보류하고 후에 해결"할데 대해 중요한 량해와 공동인식을 달성했다. 중일관계정상화의 대문은 이로써 열리였고 중일관계가 비로소 40년의 크나큰 발전을 가져오게 되였으며 동아시아지역에 비로소 40년의 안정과 안녕이 있게 되였다. 만약 일본당국이량국의 당년의 공동인식을 부인하고 말소한다면 조어도정세가 어떻게 안정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중일관계가 금후 또 어떻게 순조롭게 발전할 수 있겠는가? 일본은 또 어떻게 이웃나라와 세인의 신뢰를 얻을수 있겠는가?최근년간 일본정부는 조어도문제에서 끊임없이 사단을 일으켰으며 특히는 올해 들어서 우익세력이 일으킨 "섬의 매입" 풍파를 내버려두고 방임하면서 저들이 나서서 "섬을 매입"하기 위해 포석했다. 사람들은 조어도문제에서 일본측의 수법은 절대로 우연한것이 아니라 그것이 반영한 정치적추향에 대해 큰 경각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인정할 리유가 있다. 우리는 자연히 일본이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것인가? 일본의 미래발전방향에 마음을 놓을수 있겠는가고 질문하게 된다.중국정부는 시종 중일관계의 발전을 중시해왔다. 중일 량국과 량국 인민은 우호적으로 지내야지 서로 맞서서는 안된다. 중일전략호혜관계는 량국과 량국 인민의 근본적인 리익에 관계되며 본 지역의 평화, 안정과 발전의 대국을 수호하는데 유리하다. 하지만 중일관계의 건전하고 안정적인 발전은 일본측이 중국측과 서로 접근하고 공동노력할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정부의 "섬 매입"행위는 중일관계대국을 수호하는 것과 서로 위배되는 것이다.중국정부는 다음과 같이 엄정하게 성명한다. 일본정부의 이른바 "섬 매입"은 완전히 비법적이고 무효한 것이며 일본이 중국령토를 침점한 력사사실을 조금도 개변시킬수 없으며 조어도와 그 부속섬에 대한 령토주권을 조금도 개변시킬수 없다. 중화민족을 제멋대로 릉욕하던 시대는 이미 영원히 과거사로 되였다. 중국정부는 령토주권이 침범당하는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측은 일본측에서 즉각 중국령토주권에 손해를 끼치는 모든 행위를 중단하고 쌍방이 달성한 공동인식과 량해에로 에누리없이 돌아오며 분쟁을 협상으로 해결하는 궤도에로 복귀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만약 일본측에서 자기고집만 부린다면 이로 빚어지는 모든 엄중한 후과는 일본측이 감당할 수밖에 없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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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16
  • 대다수 중국인, 대일본전쟁 찬성
    중국의 대다수 국민들 사이에서 현재 댜오이다오 열도(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을 종결지을수 있기 위해 보다 강력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음이 최근 인터넷 포털사이트 ‘Sina.com’가 실시한 설문조사결과에서 밝혀졌다. 댜오이다오 열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 해결 방안을 묻는 질문에 86% 응답자가 ‘전쟁’이라고 답변했고, 11.8%는 ‘타협’, 2.1%는 답변을 망설였다. 이 외에 84% 이상의 응답자가 열도분쟁으로 인해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고 답변했으며 87% 의 응답자는 일본상품 보이콧 관련 질문에 대해 동참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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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15
  •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녀성의 감동적인 사연
    영국 데일리메일을 비롯해 해외 주요외신들은 미국 텍사스에 거주 중인 리지 베라스케스(23세)라는 녀성의 사연을 보도했다. 리지의 외모는 영화 등에서 볼 수 있는 외계인을 련상하게 한다. 몸매는 뼈가 드러날만큼 앙상하고, 얼굴 또한 전혀 살이 없어 안구가 돌출되는 등, 기이한 모습이다. 이런 리지의 외모는 지방질을 생성할 수 없는 희귀병 때문이다. 이 병은 눈동자의 색깔까지 바꿔버린다. 전 세계에서 리지를 포함해 단 2명만이 앓고 있다. 이 때문에 23세의 성인녀성인 그녀의 몸무게는 27kg에 불과하다. 한쪽 눈동자 또한 백탁현상이 생겨서 곧 시력을 잃게 된다. 이런 외모로 인해 리지는 길을 걷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눈총을 받는다. 심지어 인터넷등을 통해서는 그녀에게 악플을 남기는 네티즌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아름다웠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리지는 자신의 외모로 인한 좌절과 이런 역경속에서 가졌던 희망, 그리고 미래의 꿈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 벌써 이번이 두 번째다. 리지는 HNL채널의 '닥터 드루 핀스키' 쇼에 출연해 자신이 인터넷을 통해 겪었던 고통을 털어 놓았다. 그녀는 "나도 사람이다. 당연히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못 생긴 녀성'이라는 별칭이 붙은 자신의 모습을 리지는 당당히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그녀는 "사람들이 얼굴을 공개할 수 있다는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진행자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냐는 질문을 하자 그녀는 "사람들을 만나 나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렇게 말하고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리지에요. 노려보지 마시고 (병에 대해) 리해해 주세요"라고…" 그녀의 꿈은 이런 특이한 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고통을 나누는 일이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약간 다를 뿐"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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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15
  • 바보觉醒기
    처음 한국와서 사 년 동안은 돈이 아까워서 과일 한알 맘대로 사먹지 못했고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별의별 궁상을 다 떨었던 나였다.오죽하면 리발비도 아까워서 사년간을 저절로 머리를 깎았으랴! 중도 제 머리 저절로 못 깎는다지만 난 그러고 보면 대단한 재주를 갖고 있었던건가? 아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어차피 일년 삼백육십오일을 일만 하니까 구태여 머리모양을 뽐내며 자랑하러 다닐 일도 없거니와 혹시 외출 할 일이 있더라도 모자만 꾹 눌러 쓰면 되니까. 게다가 그깟 제일 간단한 스포츠머리 리발비가 만원(그 때 환률로 인민페 칠팔십원정도)씩이나 하는터에 아깝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얼마나 힘들게 버는 돈인데?!매일 매시각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상상할 수도 없으리만치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주위 사람들한테 무시당하고 또 지친 제몸을 혹사해 가면서 힘들게 버는 실로 피같은 돈이 아닌가. 헌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정도의 머리 스타일은 나 스스로도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였다. 사실 나한테는 우리 집에서 치매로 앓으시다가 세상 뜨신 어머니의 머리를 삼년 동안이나 잘라 드린 경험이 있었다. 자기 머리도 그렇게 깎으면 되리라. 그래서 난 겁도 없이 자작 리발을 시작했었다.모텔 청소아줌마로 일하는 나이고 모텔에 널린게 일회용 면도칼이므로 리발기구도 따로 마련할 필요없었다.잘 드는 면도칼을 오른 손에 들고 왼손으로 머리 두께를 골고루 가늠하면서 화장실 거울을 마주하고 자기 머리카락을 이리 저리 두께가 비슷하도록 쓱—싹!쓱—싹! 추려내고 나중에 날선 가위로 손거울을 이용하여 큰 거울 속의 자신의 뒤덜미를 들여다 보면서 목덜미 부분의 머리를 가쯘하게 마무리 하고 샤워로 머리꺼끄러미까지 싹다 처리 하면 그깟 미용사의 솜씨나 내 솜씨나 거기서 거기였다. 아니 오히려 돈을 팔지 않았다는 자부심 때문이였던지 내 솜씨가 더 훌륭하다 여겨질 때도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 머리 깎는 사람을 난생 처음 봤다면서 주인언니께서도 손재주가 있다고 늘 칭찬하셨으니까 이건 절대로 스스로의 자찬만이 아닐 것이라고 자만감에 들뜨기까지 했었다.그외 먹고 자고 쓰는 모든 것은 일하는 곳에서 해결하고 집에서 가지고 온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실로 돈 쓸 일이라곤 전혀 없었다. 월급은 차곡차곡 모여 졌고 또 한 달에 두번씩의 휴식일도 쉬지 않고 일하면 십만 원(그때의 환율로 약 인민페 팔백원 좌우)더 모을 수가 있었다.그렇게 옹근 사년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쓰지도 않고 이악스레 모은 돈이 어느 정도 되였을 때 큰 아들이 집 사겠다고 꿔 달라고 기별이 왔다. 솔직히 아무리 목숨같은 제 자식이지만 선뜻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또 돈이 있는 줄을 뻔히 알고서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꿔 달라는 데 못 주겠다고 뻗댈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실로 부모된 죄가 그리도 클줄을 전에는 모르고 살았다. 자식으로 생겨서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였다면 될수록 부모한테 돈 달라는 소리를 하지 말고 제 살 도리는 저절로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가난한 부모가 자식을 어렵게 대학 공부까지 시켰으면 그걸로 된 것인데 내가 만약에 한국행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어쩔 것인가 말이다. 어이하다 한국와서 돈벌게 된건 다행이지만 그 돈 벌어서 자신의 로 후대책을 연구하고 어째 보기도 전에 빌려 달라고 하다니? 이래서 자식 둔 부모는 남의 자식을 흉보면 안 된다고 했던가?몇 년 전 큰 언니네 아들이 모 해변 도시에 아파트를 마련한다고 로부부가 많지 않은 월급으로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평생을 힘들게 모은 적금 전부를 협박에 가까운 언행으로 빼앗아 갔다는 말을 듣고서 격분한 나머지 우리 자매들은 한결 같이 입을 모아서 욕했었다.“망할 놈! 아예 제 부모 껍대기를 벗겨내고 말지! 에익 후레 자식 같으니….”아마도 남의 자식 흉본 벌을 받은 건가? 이건 집에서 편안히 월급을 모은 것도 아니고 이국 타향 남의 땅에서 힘들게 벌어서 이 악물고 모은 돈을…….몇 년 후 갚아 준다고는 하지만 허망한 그말이 믿어지겠는가. 차라리 호랑이한테 강아지 꿔주고 말지. 허지만 주고 싶지 않아도 주게 되는 게 자식이렷다. 함께 일하던 정씨 아줌마의 말이 인상 깊다.“자식이란게 말이요. 이름이 좋아 자식이지 실은 몽둥이를 들지 않은 강도라우!” 그녀도 몇 년을 이악스레 모은 돈을 자식한테 그것도 집 사는데가 아니라 남을 두들겨 패서 감옥에 가게 된 자식의 뒷처리에 몽땅 처 넣었다는 것이다.아! 슬플시고! 이런게 부모된 락인가? 그래도 난 아들이 남처럼 싸움으로가 아니고 집 마련하는 데 돈 넣어주니 영광으로 여겨야 하는 건가? 더구나 수도 북경의 다들 알아주는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예쁜 색시감까지 생겨서 알콩달콩 연애하고 있으니 성공한 자식의 뒷바라지라 실로 비교가 되는 영광이 아닐까? 결국 그렇게 내 사년간의 고혈은 아들한테로 고스란히 흘러 들어 갔다.비록 영광이라 여긴 투자지만 주머니의 허전함은 영광으로 쉽게 메워지는게 아니였다. 일 하는데 힘이 빠지고 그래서 생전에 쉬지 않던 나도 한 달에 한두번쯤은 쉬면서 일하게 되였고 얼마쯤 더 지나니 조금 더 적응이 되여서 그럭저럭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다시 삼 개월의 월급이 모여지자 또 아들이 결혼식을 하겠다고 커플반지 살 돈이 어쩌고 저쩌고 한다. 맘이 약해진 난 이번엔 그래도 큰맘 먹고 반반한 옷이나 사 입으려고 오십만 원(그때 환율로 인민페 약 사천원 좌우)을 남기고 아들한테 다 보내 주었다. 사 년간 옷 한 벌 사지 않고 살아 온 나의 몰골은 얼마나 흉했던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불법체류냄새가 풀풀 심하게 풍기고 있는것 같았다. 실로 바보같이 살았던 나의 한국생활 사 년이였다. 하긴 바보같은 그 사년때문에 난 인생에 대한 생각을 크게 바꾸게 되였으니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 잘못된 것만은 아닐 것이라 여겨지지만도……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고 말지 어쩌다 큰 맘먹고 자기 몸에 투자하려던 그 오십만 원마저……이천팔년 삼월 칠일—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그날 오전 열한시, 나한테 오촌 조카뻘이 되는 군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날 보러 오겠다고….한국온지 사 년 만에 처음으로 되는 일이다. 타향에선 고향의 까마귀도 반갑다는데 나한테는 어찌하여 고향의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 한국 나와서 일하는 친척들은 조금 있지만도 서로가 돈 버느라 바빠서 도저히 만나지지를 않으니까 말이다. 헌데 모처럼 날 보러 찾아 오는 이가 있다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어스름이 깃들 무렵 군이는 내가 일하는 가게로 용케 찾아 왔고 일 끝나기를 기다려 갖고 고깃집에 가서 맛있는 불고기를 사 주었다.그때까지도 난 그것이 잡아 먹을 강아지 머리 쓰다듬어 주기인 줄을 전혀 모르고 그저 고맙고 감격스레 여겨져서 써비스로 나오는 밥에 국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 맛있게 다 먹었다. 헌데 고기는 물론 밥도 시큰둥해서 잘 먹지 않고 애꿎은 담배만 태우면서 맛있게 먹는 나를 지켜보던 (실은 속셈이 따로 있어서 잔머리 굴리고 있은 건데 난 눈치없이 나더러 더 많이 먹으라고 그러는구나 고맙게 생각했었다.) 군이는 내가 수저를 내려 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 문을 연다.“고모한테 사정할 일이 생겨서 …..”“그게 무슨 말인지?”마냥 들뜬 기분에 감격해 있던 난 갑자기 커다란 몽둥이에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 어정쩡해서 되물었다.“사실은 급하게 돈 쓸 일이 좀 있어서 고모님께서 이삼백만 원 돌려 주신다면 이달 말에 꼭 갚아 드릴 겁니다.” 난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얼굴 근육이 다 뻣뻣해지는 느낌이다.이래서 남의 걸 먹으면 입이 짧아진다고 했으렷다! 그럴 줄 알았더면 먹지나 말았어야 하는건데 눈치도 없이。 이미 먹은 걸 어쩔 수는 없고 그냥 돌려 보내려니 민망하고 나한테 남은 돈이란 딸랑 오십만 원이 전부인데…….“빈이가 집 산다고 다 보내고 요새 옷이나 사 입으려고 남긴 돈이 좀….”그렇게 난 군이한테 오십만 원을 은행 기계에서 다 빼주면서 통장까지 보여 주었다.“보다싶이 내 전 재산이니까 말일에 약속대로 꼭 갚아야 한다!?”“네!” 군이는 그렇게 시원스레 대답을 하면서 돈 봉투를 받았으나 난 어쩐지 요강뚜껑으로 물 떠 먹은듯 찜찜하다. 제발 고기만두로 개 친(육포자타구유거무회肉包子打狗,有去无回)격으로만 되지 말았으면….내 예감은 그렇게 틀림이 없이 맞아 떨어졌다. 그 돈을 갖고 튄 군이는 돈을 갚겠다던 그 달 말이 지나고 새달초가 다 가도록 전화 한 통이 없다.공교롭게도 내가 일하는 가게의 장사마저 덜 되여서 월급도 밀리다보니 난실로 돈 한푼 없이 억지로 버티는 판이였다. 돈을 두고도 아까워서 쓰지 않는 것하고 돈을 꼭 써야 하는데 없어서 못쓰는 것하고의 차이가 그렇게 클 줄을 난 참말로 몰랐었다. 환절기에 옷 사려고 애타게 기다리던 나는 사월 중순까지 참다가 할 수 없이 군이한테 전화 했더니 돈이 마련되지 않아서 다시 그 달 말에 준단다. 은행계좌번호까지 전화로 찍어 달라면서. 물론 문자 메세지로 은행계좌번호는 즉석에서 찍어 보냈지만 군이는 그후부터 아예 전화련락이 두절이다.전화가 오지도 않거니와 내 전화를 받지도 않는다.애초에 사기치러 맘먹은 것이지 돈을 꾼다는 건 빨간 거짓말이였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한국 온 지 십년이나 되는 피끓는 청년이 가정도 없는터에 그새 번돈은 다 어쩌고(후에야 안일이지만 실은 놀음으로 돈 다 날렸었다)이제 겨우 사 년 된 나한테 그것도 자식의 집 마련에 돈 다 보내고 없는 줄을 번연히 알면서 양심도 없이 손 벌리겠는가? 그 생각을 못하고 돈부터 덥썩 안겨 준 내가 잘못이지. 아! 피 같은 내 돈이여……더더구나 분하고 원통한 것은 내가 입지도 먹지도 않고 머리모양마저 돈을 아껴서 부스스하게 털 뜯긴 부엉이 상을 하고 있으니까 아예 바보천치로 알고 쉽고 만만하게 여겨져서 맘먹고 달려 든 거라 생각되는 그 점이였다. 아!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돈보다 멍청하게 흘러 보낸 지난 세월이 아깝고 후회스러워서 더더구나 미칠 것만 같았다.누구를 탓할까? 내가 바보였던 것을!!!그 몇 달을 난 그렇게 자책속에서 지냈고 후회로 가슴을 치면서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웠었다. 나중에 문뜩 스스로도 위안 받을 수 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고서 난 그런대로 고통에서 쉽게 헤여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때 나한테 오십만 원의 돈이 전 재산이였던 그 사실이였다. 실로 불행중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아니라면 삼백만 원을 사기당할 뻔 했으니까 내 손실은 그런대로 많이 줄어든 셈이 아닌가 말이다.살다 보면 유실필유득有失必有得이라는 말이 참말로 일리가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한 것은 조금 잃는 과정을 통해서 더 큰 것을 얻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 오십만 원을 수업료로 난 실로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 돈을 벌어서 앞날을 대비해 모으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만 자신을 위해서 조금씩 쓰는 것도 앞날을 위한 대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고 랑비를 제창하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모으던 돈의 극히 적은 일부분이면 충족하다. 그렇게 하는 대비가 돈만 꼬박꼬박 모으기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전에는 잘 모르고 살아왔다.돈으로는 지난 세월을 살 수가 없고 후회를 미봉할 수도 없으며 또 돈으론 건강과 즐거운 마음을 살수가 없다. 허지만 그때 그때 조금씩 제 몸에 하는 투자가 건강을 지키고 후회를 막음으로써 앞날을 위해 한결 씩씩한 자신을 남길 수가 있으니 그게 그새 조금 써 버린 돈에 비하면 더 크게 남기는 장사가 아닐까? 만약에 내가 미리 이런 도리를 알고 자기 몸에 최저한도의 투자라도 하면서 살았더라면 오십만 원의 아프고 쓰린 여운이 그토록 오래고심하진 않았으리라! 멍청스레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하다가 사기당하니 그 돈이 더구나 아깝고 꾸미지 않은 거칠은 모습은 제가 만들어 사기꾼한테 빌미를 준 것이니 더더구나 미칠듯이 분하고 그래서 수 개월간 속 썩이고 후회하고 잠도 못자고 했으니 정신 건강에 몸 건강에 오십만 원이 아니라 오백만 원 아니 그보다 더 큰 손해를 본 셈이다.그렇게 난 사기꾼한테 한번 당하고서 지금은 많이 똑똑해졌다.휴식을 제때에 취하면서 다이어트로 몸 관리를 철저히 함과 동시에 옷도 철따라 예쁘게 사입고 화장품도 적당하니 알맞는 걸 사서 쓰고 머리모양도 부스스 털 뜯긴 부엉 이상을 버리고 탐스럽게 개변시켰다. 과일도 냉장고에 종류를 자주 바꿔서 넣어두고 먹고 있으며 우유와 칼슘제를 비롯한 건강보양품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렇게 지나가는 세월에 억울하지 않고 돌아오는 세월에 미안하지 않도록이 착실하게 살고 있는 나는 옛날의 바보가 절대로 아니다.그래서 지금은 이를 갈며 저주했던 사기꾼--날 도둑 같은 군이 한테도 욕만이 아닌 고마운 생각까지 들리만치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그런 나 자신이 미욱하게 살았던 예전의 나 보다 훨씬 더 현명한 것 같아서 기분이다!/훈이
    • 독자기고
    2012-09-15
  • 고독은 저를 행복한 여자로만 살게 합니다.
    정년 퇴직후 누구는 고독해서, 누구는 적막을 못이겨서 우울증이 온답니다.하지만 저는 고독이 뭔지 모릅니다. 적막은 더더구나 느껴보지 못했습니다.그만치 저는 혼자서도 잘 놉니다. 그게 아니고 고독을 하늘이 내려주는 혜택같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즐기는 편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사람이 어찌 친구들과만 같이 놉니까? 살아가려면 고독하게 지내야 하는 날이 꽤나 많습니다. 그러니까 고독을 즐겨야 더 행복한 겁니다.혼자면 일단 조용한 것이 좋습니다. 조용하게 고즈넉한 상태에서 저는 환상에 잠깁니다. 환상속에서 저는 신비하기 이를데 없는 다음 세상에도 가 본적이 있습니다. 이생에는 유감스러운 일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런 유감들이 하나도 없어서 진짜로 참신한 새 인생을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게 조금도 힘든게 아닙니다. 제 맘먹은 대로 다 되는 것입니다. 꼭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조용한 상태에서 제 맘 먹기에 달린 겁니다. 그렇게 원없이 한번 제가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아 본 후에 다시 현실로 돌아 옵니다.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나는 것입니다.추억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무정하다고 했던가요? 그 말을 환상은 이상적이지만 현실은 이성적이여야 한다고 바꿔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 괜찮습니다. 뭣이든 조용하고 고즈넉한 상태에선 맘 먹은 대로 다 되는 일이니깐요.깼으니까 먼저 샤워부터 해서 몸이나 맘속에 내려 앉았던 다른 세상의 먼지때를 깨끗이 씻어 냅니다. 밥솥에선 구수한 밥 냄새가 납니다. 제가 좋아하는 김치도 있고 된장 찌게도 보골보골 맛있게 끓고 있습니다. 그렇게 전 또 이생을 착실하게 향수 합니다.식사가 끝이나면 혼자서 여행을 떠납니다. 교통카드를 챙기고 간편한 옷차림에 물 한병만 멜가방에 넣으면 다 됩니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 입구에 나가서 제일 처음으로 달려오는 버스를 잡아 탑니다. 저를 싣고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혼자니까 잘못 갔다고 나무라는 이도 없습니다. 저만 좋으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아 시원하다! 감탄하면서 빈자리에 앉아서 바깥을 내다봅니다. 아 여기엔 병원이 있었네. 아 여기엔 또 공원이 있고... 은행에, 시장에, 마트에...... 그렇게 언젠가는 자기한테 필요할 곳들을 하나씩 체크 합니다. 차암 여유로운 여행입니다. 기본 요금이면 됩니다. 종점역까지 그렇게 흔들흔들 가다가 피곤하면 살짝 졸아도 괜찮습니다. 버스 운전사 아저씨가 다 알아서 교통규칙을 지켜주니까 저는 졸았어도 안전하게 역에 대입니다.작은 시가지인 저의 고향의 버스 종점역은 한결같이 파아란 산이나 들입니다. 꽃도 풀도 나무도 시냇물도 논도 밭도 다 있습니다. 그래서 경치 좋고 물좋은 거기서 혹은 나물을 캘 수도 있고 또 혹은 아이처럼 들꽃을 꺽으면서 놀 수도 있고 그늘 좋은 냇가에서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휴대용 녹음기로 노래를 들을수도 있습니다. 벌레소리 새소리가 반주 합니다. 그렇게 풀냄새, 흙냄새를 실컷 맡으면서 한참을 놀고나서 다시 돌아오는 버스를 탑니다. 저의 여행은 그렇게 세 시간도 안 걸려서 끝이 납니다.집에 돌아오면 또 책을 봅니다. 책을 볼 때면 저는 꼭 책속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래서 책속의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희한하게 잘 지냅니다. 그래도 저를 멍청하다거나 미쳤다고 비웃는 사람이 절대로 없습니다.그렇게 하루가 끝이 나면 저는 또 저의 단짝 친구인 일기책을 마주합니다. 그한테 하고 싶은 말을 실컷, 맥이 진할 때까지 다 털어 놓습니다. 어떤 말을 해도 괜찮습니다. 창피한 일도 잘못한 일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런 것도 그는 다 받아주고 용서해 줍니다.그래도 아직 자기에는 일찍한 시간입니다. 텔레비를 봐야 합니다. 한데 텔레비를 마주하면 이상하게도 졸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해놓은 취침시간이 되기전에 자리를 마련해 누우면 또다시 말똥하니 잠이 깹니다. 그래서 뜨개감을 잡습니다. 예쁜 가디건이 요즘 마무리 단계에 왔는데 텔레비를 보면서 그걸 뜨면 졸리지도 않고 기분도 좋습니다. 내가 시간을 요리 알뜰하게 이용하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의 배나 더 잘 사는 셈이지 그렇게......드디어 드라마도 끝이 났습니다. 포근한 잠자리가 저를 살며시 감싸 줍니다. 두 살잡이 아기 크기의 예쁜 곰인형을 안고 저는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습니다. 하나,두-울, 세-에-에..... 그렇게 몇 개 세기도 전에 저는 꿈나라에 갑니다. 거기선 또 하늘나라에 가셨던 울님께서 돌아 오셔서 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전자나깨나 늘 행복합니다.아 고독은 하늘이 저한테 준 혜택입니다. 고독은 저를 행복한 여자로만 살게 합니다. 아 행복한 고독이여....
    • 독자기고
    2012-09-15
  • 나의 한국생활개요
    저는 20세기 40년대에 한반도(본적이 경상남도 밀양입니다.)에서 중국으로 피난간 부모를 둔 교포2세이며 저의 이름은 훈이입니다.저의 남편 이영대 역시(본적이 경상남도 거창입니다.)교포 2세이며 2002년 8월 12일, 초청비자로 입국하여 서울시 강동주유소에서 일하던 중 2004년 2월 18일 밤, 작업복을 입은 채 쓰러져서 세상을 떴습니다. 국립과학연구소의 부검결과에 의한다면 연 일년 반 동안을 야근만 했던 저의 남편은 지나친 과로로 심혈관 파열이 생겨 그렇게 된 것이랍니다. 대학에 다니는 두아들의 뒷바라지에 들 엄청난 돈 때문에 한푼이라도 더 벌어 보려고 그런 무리를 한 불쌍한 저의 남편입니다.아!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습니다. 저와 아이들한테는 대통령과 같은 존재였던 소중한 저의 남편입니다!! 그야말로 갑자기 하늘이 무너진 격이고 우리 가정의 대들보가 내려 앉은 격이었습니다.2004년 2월 27일, 사망비자를 발급 받아 입국을 했던 저는 남편의 장례를 마치고 귀국해야 마땅한 일이었지만 그때 북경 중앙민족대학 3학년생이었던(23세)큰아들과 북경과학기술대학 1학년생이었던(19세) 작은 아들한테는 당장 돈때문에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위급한 상황이 닥친 것입니다. 그리하여 슬픔은 잊어야 했고 애들 아빠 대신에 저는 가장의 책임부터 짊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 눌러 있게 되었고 직장을 찾아 일하게 된 것입니다.체류연기 문제로 저는 명동에 있는 중국영사관과 목동에 위치한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알아봤지만 사망비자는 원래부터 허용체류기한이 1개월뿐이라 연장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쩔수 없이 불법체류자로 되었고 불법으로라도 아이들의 등록금을 벌어야 하는 것이 당시의 부득이한 저의 사정이었습니다.저는 참말로 열심히 벌었고 그래서 두 아들은 무난히 학업을 마치고 지금은 중국의 수도 북경에서 다들 알아주는 좋은 직장에 취직까지 했습니다. 이제 가장으로서의 저의 의무는 성공적으로 끝난데다 8년간의 무리로 몸이 많이 지치고 망가져서 귀국하려 합니다. 불법체류자 신세라 8 년간 병원검사 한번 받아 볼 수 없었습니다.그 당시 딱했던 저의 사정이야 어찌됐든 외국인으로서 대한민국의 외국인 체류법을 어긴점 대단히 죄송하고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도적사유가 있었음을 감안하여 이해해 주시고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신다면 고맙고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은 대한민국은 우리 부모님의 고국이며 그래서 우리한테도 모국인데 우리 교포들에 대한 법률만은 조금 애매하여서 우리가 불법체류자 취급을 받는 것이 너무너무 속상합니다. 그렇더라도 절대로 불만은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하늘이 무너진듯하던 저희한테 살길을 주었고 덕분에 지금 애들한테는 멋진 새 인생이 열렸으며 갑자기 가장을 잃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족 역시 빈곤에서 완전 탈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그 뿐만이 아닙니다. 집에 있을 때에는 상상도 못했던 많은 소중한 것들을 일하면서도 배웠습니다.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의 실생활을 체험한 점 또한 대단한 행운으로 여깁니다. 저는 그래서 아주 만족합니다. 우리 조상의 나라가 이처럼 발달되어 있다는 게 너무나 고맙고 그래서 자랑스럽습니다. 집에 돌아가서도 그점 평생 감사하며 살 것입니다!!그래도 한가지 맘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저의 남편의 유해는 바다장례식장을 통해서 인천 앞바다 녹색17번 부표에 모셨습니다. 여기서는 버스로 지하철로 잠깐이면 다녀올 수 있지만 제가 귀국하고 만약에 불법체류자 경력 때문에 입국규제에 걸려 다시 올 수 없다면 남편의 영혼은 영원히 위로 받지 못하는-불쌍한 무주고혼으로 남게 될것입니다.1~2년 후에라도 재 입국이 가능할 수는 없을까요? 가능하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겠지만 아니라도 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다른 나라도 아닌 조상의 나라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게 여길 것입니다.잘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오늘 갑자기 한국에서 돌아 올 때의 물건 서류들을 다시 정리하다가 인천출입국사무소에 제출했던 이 서류를 발견해서 여기에 올립니다. 저는 이서류 때문이었던지 벌금 한푼도 하지 않고 오히려 사무소 일꾼들의 위로까지 받고서 귀국했습니다. 누군가 만약에 저같은 처지에서 귀국하는 이가 있으시다면 도움이 되실 것 같아서 올립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훈이
    • 독자기고
    2012-09-15
  • 장나라 중국 윈난서 영화 촬영
    한국의 가수 겸 연기자 장나라와 타이완의 훈남배우 린즈잉(林志颖)이 호흡을 맞춘 중국 로맨틱 코미디영화 '같이 날자(一起飞. flying with you)'가 연출한 가 윈난에서 촬영 중이다. 장나라의 중국 내 영화 도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장나라는 그간 중국 드라마 "댜오만공주(刁蛮公主)" 등 다양한 드라마에 출연하며 중국에서 인지도를 쌓아왔다. 장나라는 영화에서 솔직하고 밝은 85후 말괄량이 재벌2세 역을 맡아 대사를 전부 중국어로 소화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부러운 것 없이 자란 허챈챈(장나라 분)이 특전사 쉬이판(린즈잉 분)을 만나 달콤한 사랑에 빠진다. "허챈챈은 개성이 강한 여자애로서 아버지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담히 참사랑을 추구하는 캐릭터입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여성상은 아니죠."라고 자신이 맡은 역에 대해 설명하는 장나라. 본인의 실제 성격은 허챈챈과 전혀 반대라면서 집에서 조용히 책읽기를 즐긴다고 밝혔다. 30세가 되었지만 '동안미녀' 장나라의 얼굴에서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중한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제작하는 영화 '같이 날자' 출연은 장나라의 중한문화대사 신분에 꼭맞는 선택이다. 제15회 춘사대상 한류문화상, 제19회 중국금계백화영화제 외국인 인기 여배우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지닌 장나라는 중국에서 '애심기금'을 창설해 백혈병어린이 돕기, 빈곤엄마 돕기, 원촨지진 지원 등 수많은 공익행사에도 동참했으며 2010년 상하이엑스포 한국관의 홍보대사 직도 담당했었다. 사회적으로 자선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장나라를 중국 팬들은 '천사연예인'이라고 부른다. '남에게 장미를 선물하고나면 자기 손엔 그 향기가 남게 된다'는 중국 옛말에 대해 말하는 장나라는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도와주고나면 스스로 즐거워진다"고 말했다. 장나라는 유창한 중국어로 "마음이 즐거우면 젊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웃음)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허챈챈 역을 맡은 장나라 영화에서 허챈챈 역을 맡은 장나라 장나라와 린즈잉, 원시림에서 영화 촬영중이다. 촬영현장에서 장리 감독과 함께 있는 장나라. var para_count=1
    • 연예·방송
    2012-09-13
  • 영화명: 금릉13채 감독: 장이머우 주연: 크리스찬 베일 퉁다웨이 더우쟈오 니니 장르: 드라마 역사 국가/지역: 중국 줄거리: 1937년 일본제국주의 침략 아래 만신창이 된 난징. 국제 우호인사가 이끄는 교회당은 일제의 마수가 뻗치지 않은 많지 않은 성지이다. 성당은 이곳으로 숨어든 금릉의 여대생과 13명의 기생 그리고 수많은 시신들 속에서 기어나온 6명의 국민당 부상병을 수용했다. 이들이 함께 유사이래 최고로 처참하고 잔인한 대학살을 맞게 되는 이야기이다. 결국 제일 '하찮고 미천한' 13명 기생이 여럿을 지켜주는 영웅이 된다. 성당이라 하여 영원한 성지로 내버려둘 일본군이 아니다. 어느달 드디어 성당으로 쳐들어온 일본군에 맞서 그들 13명 기생은 제일 무섭고 비인간적인 대학살을 맞는다.
    • 연예·방송
    2012-09-13
  • 런다화, SBS 프로에 출연
    영화 '도둑들'의 주연으로 활약해 한국 관객들에게 잘 알려진 홍콩 배우 런다화가 한국 SBS 프로인 '공형진의 씨네타운'에 출연한다.런다화는 오는 13일 오전 11시에 방송되는 SBS 파워FM '공형진의 씨네 타운'에 출연, 팬들에게 진솔한 매력을 선사할 예정이다. 런다화는 이날 2박3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오는 12일 차기작 '나이트 폴' 한국 언론 시사회에도 참여해 한국 팬들과 함께 할 예정이다.런다화는 천만 이상의 관객 수를 기록한 흥행영화 '도둑들'에서 극중 첸 역으로 분해 김혜숙과의 중년 로맨스를 선보였다.
    • 연예·방송
    2012-09-13
  • 아 아프도록 아까운 나의 옛날이여!
    남에게 맡기고 한국가서 거의 십년세월을 지우고 오니 옛집이 얼마나 많이 망가져 버렸는지 맘놓고 발들여 놓을 자리도 없을 지경이 되였다. 남편과 둘이서 어렵던 세월에 오순도순 세아이들을 키우면서 꿈도 많았던 내 보금자리, 비록 초라하게 붉은 기와를 얹은 옛스런 단층 벽돌집이지만 늘 윤기가 돌던 내집! 쇠줄로 엮은 넓고 예쁜 초롱에 닭, 오리,게사니 키워서 고기먹고 알먹고 담장을 의지해서 벽돌로 아담한 개집을 지어 네눈박이 귀여운 “보초군” 살게하고 얼마 안되는 둘의 월급을 쪼개가면서 다들 부러워하게 총명했던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 하던 재미, 구석구석 먼지 티끌이 쌓일세라 쓸고 닦으면서 만석부자 부러워하지 않고 살았던 알뜰한 내 살림!복숭아,사과, 오얏나무가 사이좋게 둘러서 있던 앞뜰 우물터, 과일꽃 향기와 록음이 무지 은혜롭던 봄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주렁진 과일나무 밑으로 이웃집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줄레줄레 모여들어서 넉넉한 내 인심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들고 흐뭇해했던 기억들… 갖가지 풋남새들이 흐드러지게 자라서 이웃에 나누어 주면서 맛있게 먹던 뒤뜰 채소밭…..아! 그때가 너무도 그리워서 난 미칠것만 같고 하염없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그처럼 알뜰했던 내 보금자리 살림집을 게으름뱅이 어떤 부부가 들어와 살면서 십년세월 아예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과일나무는 다 죽어 버리고 숱한 닭오리 게 사니를 키웠던 예쁜 쇠줄 초롱마저 쇠붙이라고 다 팔아먹은건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성스런 우물터에다는 더러운 널판자를 깔고 닭을 치고 있어서 우물터가 아예 닭똥터가 되었고 집안 구석구석 때와 먼지에 찌들어서 내가 살았던 깔끔했고 윤기돌던 흔적이란 찾아볼수도 없으리만치 돼지우리도 그런 돼지우리가 없다. 아! 가슴이 찢어지고 억장이 무너진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도 더러울수가 있을까리해가 안된다.너무도 화가 나서 몇 날 며칠을 새벽 세시쯤 시작해서 해가 떴다지고 달이 뜨고 그래서 어두워 보이지 않을때까지 닦아내고 쓸어내고 정리하고 가담가담 잔소리도 해가면서 애쓴 보람에 원상 복구를 어느 정도 시켰다. 물론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집이고 이미 고향에 아파트를 따로 마련해서 살고 있으니 우리가 거기에 다시 살 가망은 거의 없지만 내 사랑 내 꿈이 깃들어 있었고 우리 다섯식구가 지지고 볶고 진한 정을 나누면서 긴 세월을 같이했던 알뜰한 옛 보금자리가 그렇게 망가져 가는걸 그냥 보고 있으려니까 아기자기 살갑던 우리가족의 정마저 엉성하니 변해가는게 아닌가 싶어서 너무나도 가슴아픈 일이였다.예로부터 메토끼 잡으러 가면 집토끼가 잃어진다 했던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한국가서 돈 번다고 살림을 팽개치고 설쳐대는 사이 나는 돈으로는 도저히 살수 없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은 것 같다. 지금은 동서남북 여기저기에 다 흩어져 버린 우리집 식구들, 십년 리별에 아예 습관이 되어 버려서 만나면 오히려 서로가 서먹해진 이상한 느낌! 다시 한데 모여 오순도순 화기애애하게 살던 그 옛날로 되돌아 갈수만 있다면 내가 무엇인들 아낄까? 되돌릴래야 되돌릴수 없이 된 지금에야 그 옛날의 소중함을 알게 되였으니 이보다 통분한 일이 다시 없는데 돈에 속아서 보이지 않는 건강까지 잃은점 또한 더더구나 통분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한국가기전에 그처럼 짱짱했던 내 몸이다, 기껏해서 어쩌다 걸리군 하던 경한 감기가 제일 무서운 병이였고 웬간히 무거운 물건은 겁없이 다루던 나, 지금은 껍질만 남았다. 열근쯤되는 물건도 아예 깔려 죽을듯이 무겁게 느껴지는 등신이 되었고 엄중한 풍습성관절염에 심한 골다공증과 빈혈에 저혈압에 영양부족에…그리고 나 스스로는 별로 못 느끼는건데 언니들의 말을 빈다면 난 또 심한 강박증 증세까지 보인다는가? 그새 그렇게 그냥 나는 사람이 아닌 돈버는 기계로만 산 것이였다.귀국후 일년 반 동안을 북경 청도 흑룡강의 여러지역과 여기 연변지구까지 많이 돌아다니면서 새삼스레 느낀건데 우리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신 나게 한가하게 놀면서도 잘먹고 잘 살고 있는것 같다. 어디를 가도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 넓은 공터나 이름모를 어느 광장이나 운동장같은 그런 곳엔 아침저녁으로 늘 숱한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고 신체 단련을 하고 그렇게 시름없이 신 나게 노는 사람들 천지다. 거기에 비해 크고 작은 공원에 아파트단지마다 있는 작은 휴식터에 간단한 체육시설이나 기구들이 널려있는 한국이지만 누구나 먹고살기 바쁜 한국인들이라 그런 곳에서 한가하게 춤이나 추고 그네타고 있는 모습들을 난 본적이 없다.그렇게 중국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한국인의 생활리듬에 물 젖은 탓이였던지 지금와서 생각하면 굳이 그렇게 악을 쓰고 일하지 않아도 되였을 것을 하루라도 놀게 되면 큰 죄라도 짓고 있는듯이 난 늘 불안했던것 같다. 그래서 거의 십년 세월 여관의 청소아줌마로 일했던 내가 휴식한 날짜는 손으로 꼽을 정도인데 영 아파서 도저히 일할수가 없는 그런 날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냥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고자고 또 자고 저녁부터 다시 새벽까지 자고자고 또 자고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서 그 다음날 머리를 들 수 있는정도 다리를 끌지 않고 걸을수 있는 그런 정도면 다시 일을하고….그렇게 보낸 세월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십년이나 되였으니 내 몸이 쇠덩인들 당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은행에 저금이 늘어나는 재미에 빠져서 몸이 썩어 가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지난해 삼월 중순의 어느 날, 내가 이러다가 앉은뱅이가 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다리가 갑자기 심하게 아파서 화장실도벽을 밞으면서 기어가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눈앞이 캄캄해났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금산은 산을 쌓아 놓은들 내가 걸음도 못걷는 병신이 되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서 몇 번이나 전전긍긍을 하면서 미루어 왔던 귀국을 갑자기 결심하게 된 나였다. 이제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집에가고 싶었다. 아프고 보니 그처럼 목숨 같던 돈이 원쑤같았다. 그립던 내 식구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그냥 한국에서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나의 귀국은 그렇게 갑자기 이루어졌고 귀국과 함께 열심히 벌어 모았다고 여겼던 “큰돈”도 실감이 나지 않게 여기저기 반년도 되기전에 다 날아나 버렸다. 결국 출국전이나 똑같이 난 또다시 빈털털이가 된 것이다. 돈이란 돌게 생긴 물건이라서 아무리 벌어도 손에 남아 있는 법은 없다고 했던가? 그것이 누구의 명언인지는 몰라도 진짜로 100%진리임을 실감했다. 이리 될줄 내가 미리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왜 그 긴 세월 제몸을 혹사하며 기를 써 왔을까? 실로 후회막급이다.그렇게 내딴엔 대단히 적시적이고 명지한 결심이고 행동이였다고 여겼던 나의 귀국,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심심히 느끼건대 지금 남아 있지도 않고 이미 다 없어져 버린 돈을 다 끌어모아 처넣어도, 아니 그보다 백배 더 되는 돈을 처넣는대도 목숨보다 더 소중했던 많은 것들은 이미 되돌릴수 없이 나한테서 영영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아, 그리운 옛날이여! 소중했던 내 건강이여!!!!돈에 미쳐서 그리 허망하게 잃어버리기엔 너무도 아깝고 아픈 내것들이였건만.../훈이
    • 독자기고
    2012-09-13
  • 중국에선 흙만 파먹다가 왔습니다.
    "중국에는 이런것이 있습니까"내가 한국에 가서 제일 많이 받아본 질문이다.몇 십년 동안 막혔던 국문이 열려서 사회주의 나라란 그냥 머리에 뿔난 빨갱이들만 사는줄로 알았던 한국인들의 눈에 뿔나지 않은 우리들이 신비하기도 했으리라. 물론 정치인들의 잘못된 오도로 그렇게 되었다고는 생각되지만, 한국인들은 유난히도 자아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인것 같다. 갑자기 그많은 교포들이 한국에 들이닥치니까 아마도 어려웠던 한국의 6~70년대를 상상했을까, 그냥 그렇게들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교포자신들이 알다싶이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지 않는가?그냥 인간이 하도 많은 나라여서 우리같은 중노년들이 일자릴 찾기가 한국보다 어려우니까 고생만 꺼리지 않는다면 아직은 일할 수 있는 나이에 한국에가면 돈벌기 하나만은 참 좋더라.그런 생각에 몰려올 뿐인데…….온양온천의 어떤 일식회집에서 일할 때다. 30대 초반의 홀써빙 김씨와 50대 초반의 주방장 채씨가 참이슬 소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여자가 저래도 되나 싶었었다. 그래서 손님상에서 얼마 마시지 않고 남아 나오는 소주는 얼마든지 있는터에 주방장 언니하고 김씨는 일할때를 제외하고 거의 머리 맑은 날이 없이 지냈다. 술이라면 원쑤보다 더 싫어하는 난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그들이 보기엔 그게 아닌듯, 어느 날 써빙 김씨가 나한테 묻는다."중국에 소주 있어요" 이런!? 천만 뜻밖의 질문이어서 난 조금 당황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요것이 날 얼마나 무시하는 질문 인지는 알것 같았다. 중국에서 소주 구경도 못했으니 소주가 좋은줄 모르지, 그렇게..... 한심해서 조금 뜸을 들였다가 내가 되물었다."김씨는 제갈량이 누군지 알고 있소? 조조, 류비, 관운장. 장비는?""삼국지 인물들이 아닌가요?""그래 맞소, 중국에는 말이요 그 사람들이 즐겨 마시던 “두강”이라구 하는 유명한 술이 있소, 그뿐이 아니구 모태주, 분주, 오량액, 북경얼궈터우, 북대창, 그렇게 다가 역사가 몇 천년에서 적어도 몇 백년되는 중국의 명주들을 다 세려면 아마두 며칠이 걸려도 모자랄껄! 술 좋아하는 김씨가 원래는 중국술을 마시면 더 짱일텐데." 아직 100년 역사도 되지 않는 참이슬을 세상 제일의 소주로 생각하는 김씨한테 역사가 깊은 명주들을 들이대니까 말문이 막히고 기분도 많이 나빴으리라. 그래서인가 김씨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다가 그만둔다. 믿든가 말든가 그냥 그렇게 그녀의 입은 막은 셈인데 그후부터 김씨는 나를 유난히도 미워했었다. 중국언니 아는척을 많이 한다. 있는척도 한다. 잘난척도 한다. 그렇게 자꾸 가게 식구들 앞에서 나를 까주기가 일쑤고.. 주방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 그것도 중국언니 사발깨는 소리라고 사장님께 일러바치기도 하고….그러니까 날 삼척으로 모는 판이었다. 한국사람들이 누구를 왕따 시킬때 필수로 하는 조건 즉 있는척, 아는척, 잘난척!뭐 나는 별로 잘난척한게 아니고 그냥 있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도 그들의 생각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어처구니였던지 하도 어려워서 한국나와 버는 주제에 삼척까지…. 그쯤으로 여기는지 그렇다고 그들의 덜미를 일일이 낚아채서 중국에 데려다가 눈깔이 뒤집히게 만들수도 없고….그럭저럭 힘든 그해 여름을 그 가게에서 보내고 난 다른 일자리를 찾아서 경북의 어떤 두메에 모텔 청소아줌마로 갔었다.사장님은 60대 초반의 지방 유지인데 전에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국가 유공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 세월에 어렵게 살아서 공부는 많이 못했었던 모양이었다.그 사장님이 또 날 우습게 보아서 세탁기는 쓸 줄을 아느냐? 전기 밥솥은? 그러루한 이상한 질문을 자주 들이 댔었다.어느 가을날이었다. 사장님께서 친구들과 함께 마을의 냇가에서 손가락 굵기의 작은 물고기를 두근정도 잡아 왔었다. 중국에서 하도 배불리 먹다가 간지라 나는 그게 눈에 들어 오지도 않는데 그는 그것도 별미라고 밖에 있는 하우스에 술상을 차려놓고 친구들과 둘러앉아서 한편으로는 큰돌 세 개 고여놓고 장작불 지피고 직경이 5-60센티되는 옛날 솥뚜껑을 그위에 엎어 놓고서 물고기를 굽는다. 물론 그 별찬에 하나밖에 없는 일꾼인 나도 불렀었는데 구운물고기새끼를 소금에 찍은 술안주에 밥이라 비린내 나서 먹기도 싫지만 그런대로 사모님과 함께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서 구워주는 고기를 받아서 먹었다. 가뜩이나 작은 물고기가 솥뚜껑에 더러는 살이 달라 붙어서 뼈뿐이고 먹을게 없지만 그런대로 인사치례는 해야 할것 같아서 맛있다고 했더니 사장님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은듯이“중국에서 이런걸 먹어 보았나?” 또 그런 한심한 질문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지금 나한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고 있는지 알고 있으라는 것도 되리라. 아 참으로 기분이 개떡 같았다. 사람을 알기는?!! 요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데서 저 버르장머리를 좀 고쳐는 놓아야 할텐데 싶어서 난 조금 궁리하다가 내 뱉았다.“언제요? 구경두 못했는디, 쌀밥두 한국와서야 먹어봤니더!”그말에 모두들 눈이 화등잔 같이 커지고 사장님은 원래 기다리던 답이라 의기양양해서 그것 봐라는 식으로 어깨까지 들썩이는데 내가 한마디 덧붙였다.“중국에 있을 때는 그냥 흙만 파먹구 살다가 왔씸더!”그 말에 모두들 제정신들이 들어서 박장대소가 터졌다.“아이구 나 죽는다. 이모는 차-암 공부 많이 한 사람같아! 어쩌면 그렇게 우스개두 신통할까?!”그말에 난 또 시침을 딱 떼고 한마디 더 했다. “공산국가두 사람사는 곳이구 우리두 똑같은 하늘 아래에서 왔는데 우리 사장님은 저런 무식한 질문을 자주 합니다요. 그래서 화날때가 많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의 얼굴과 목덜미는 물론 반 벗어진 대머리까지 댓바람에 시뻘건 돼지간 색깔이 되는 것이었다. 모두가 아시다싶이 총명한 사람을 보고 멍청이 바보라고 조롱하면 그 사람이 절대로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롱을 한 사람과의 친근 정도를 나타내서 기분 좋아하지만 진짜 바보를 바보라고 하면 큰일 난다. 그리고 바람둥이 아닌 사람을 바람둥이라고 하면 또 그냥 로맨틱하다 낭만적이다 뭐 그쯤으로 해석이 되어서 기분 나쁜줄을 모르지만 진짜 바람둥이를 바람둥이라고 하면, 원래 남한테 알리지 못할 구린 구석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터에 어떻겠는가? 그게 그러니까 그런 도리라 하겠다. 가방끈은 짧지만 사장님은 어찌하다 보니 베트남전에서 용케 목숨을 부지해서 돌아온고로 지방유지로 뽐내면서 유식한 냄새를 많이 풍기고 살지만, 사실은 무식쟁이라 무식하다는 말 자체를 제일로 꺼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를 그 많은 친구들 앞에서 귀한 물고기 새끼까지 구워 먹여 놨더니 은혜도 모르고 무식하다고 개망신을 시켰으니 어땠겠는가?하지만 그 사장님은 사람이 좋은 탓이였던지 아니면 나 스스로의 감각대로 내가 누구보다 일을 더 잘해서였던지 난 잘리울 각오까지 단단히 하고 그날밤 행장을 다 꾸려놓고 기다리고 있었건만 그일 때문에 날 자르지는 않았고 그 후부터는 또 그런 한심한 질문을 절대로 못하게 완전히 버릇이 고쳐졌었다.사실 우리 교포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국내에서 그렇게 못 사는 이들이 거의 없다. 한국에는 집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우리는 저마다 아파트 한채씩은 기본이요 좀 더 잘사는 이들은 아파트가 몇 개씩 되지 않는가? 게다가 먹는 것은 아마도 세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 먹고 있는게 우리다.지난해 귀국해서 나는 참말로 그걸 많이 느꼈었다. 아! 먹을것이 너무 흔해서 쓰레기 취급을 하는구나. 그렇게…..가을이 돌아오니 조선족지구에 배추들이 시장마다 들어와서 쌓이는데 한근에 40~60전, 데댓근 되는 배추 한 포기에 기껏해서 2~3원(한국돈으로 4~500원)정도다, 게다가 그 아까운 겉잎들을 하얀 속이 나올때까지 발가서는 배추겉잎이 산더미를 이룬다. 한국 같으면 누런 떡잎까지 다단으로 묶어서 한단에 5000원씩 파는데 중국에선 그것이 가을철이면 엄청난 골칫거리요 그래서 누군가 혹시 그 겉잎들 속에서 부드럽고 좋은것들을 골라 시래기감으로 챙기려고하면 장사꾼들이 커다란 주머니까지 갖다가 안겨준다. 하지만 그렇게 챙기는게 1%도 안된다. 그걸 보니까 난 또 귀국하기전해에 있었던 한국의 배추대란이 생각났다. 태풍에 배추농사가 쫄닥해서 배추 한 포기에 만여원! 중국돈으로 6~7십 원 심지어는 백여원씩! 나중에6000원짜리 중국 배추를 들여다가 한사람당 세포기씩만 파는데 어두운 새벽부터 마트에 긴 줄을 서서 그 배추 세 포기를 사겠다고 부스너털면서 기다리다가 그것마저 동이나서 난리들을 했고……하지만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중국상품은 인기가 없다. 중국에선 저질 상품을 그냥 가짜라고 말하지만, 한국에선 중국산이라고 한다. 그게 오히려 가짜나 짝퉁이라 하기보다 더 저질 상품이라는 뜻과 가깝게 통하니까. 물론 그만치 얌치까진 일부 중국의 장사치들이 저질상품생산으로 중국의 이미지를 흐려놓았으니 한국인들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그래서 모두가 중국산을 싫어하는데 그래도 100%가 일률로 다 나쁜건 아니건만 어떤 이들은 그냥 덮어놓고 중국산이라면 부정부터 한다.내가 불광 어느 모텔에서 일할땐데 밥하는 언니가 또 그런 사람이었다.“난 도 중국산을 엄청시레 싫어한다고마.”그렇게 늘 우리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그 언니는 배도 꼭 한국산으로만 먹는데 비싸니까 하나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조금씩 쪼개서는 며칠씩을 먹으면서도 늘 그 소리다.그래서 내가 과일같은 건 중국산이 싸고도 괜찮을건데 했더니 한국은 일년 사계절 기후가 뚜렷해서 한국산 과일이 엄쳉시레 더 맛있다는가?그 말에 내가 중국은 하루 동안에도 이곳 저곳에서 사계절 기후가 뚜렷이 다 나타나는 큰 나라이고 지금은 그런 곳들에서 산출되는 과일들이 바로바로 비행기로 운송되니까 사계절 내내 햇과일을 먹을수가 있다고 했더니 역시 나를 “삼척”을 하는 미운 존재로 보는가 그 표정이 몹시도 시큰둥했었다.배 한 개에 사오천원! 그게 어디 궁한 백성이 사먹을 과일 가격인가 말이다. 그 돈으로 내가 출국하기전의 시세로 한다면 중국에선 배 한 박스를 사고도 남을 것인데…..아 한국가서 8년 세월에 나는 그래서 과일 하나 맘놓고 못 사 먹었다. 돈은 번다지만 그것 역시 중국에서는 큰돈이나 한국에서 먹고 싶고 입고 싶고 놀고 싶은걸 다 해결한다면 기본생활비에 해당하니깐 말이다.그러다가 귀국해보니 아 중국은 참말로 먹을것이 너무너무 흔해서 사람들이 귀하게 취급을 안 한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했던가? 그러니까 뭐든 없어지고 모자라고 그래야 귀한 줄을 아는데 중국은 땅덩이가 너무커서 혹시 어느 지방에 흉년이 든 대도 풍년든 곳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먹을것이 귀해질 일은 절대로 없는 나라이다,나도 출국하기전엔 그래서 중국이 이리도 풍성하고 넉넉한 줄을 잘 모르고 살았었다. 세상은 원래부터 그런거려니 그랬었다. 하지만 한국가서 8년을 지내고 나니까 완전히 눈이 뒤집힌 것이다.먹을것이 흔하고 싸니까 그냥 식당놀이만 하지 않고 제집에서 밥지어 알뜰히 먹으면 우리 부부의 한 달 식비가 한국돈으로 십만 원, 중국돈으로 5,6백 원 정도면 엎어 씌울 수 있도록 족하다. 우리 부부의 월급의 10%도 안되는 적은 그 돈으로 소고기 돼지고기 물고기 계란과 여러 가지 채소들도 골고루 다 먹을수가 있다. 한국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던가?그래서 난 지금 아주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 악을 쓰고 벌지 않아도 이리 편하게 배불리 먹고 잘살수 있는터에 왜 손이 발이 되게 그리도 미련했던고! 그래서 돈은커녕 병만 가득 지니고 귀국한 나다. 얼마나 더 잘먹고 더 잘 살겠다고 그리 악을 썼던지 스스로도 미련하게 느껴지고 이해가 안된다.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래서 바다는 메울 수가 있어도 사람의 욕심은 다 채울수가 없다고 했으리라. 그렇게 먹지도 입지도 쉬지도 않고 악을 쓰고 벌었으나 돈은 또 번것만큼 쓸 일이 그냥 있는데다 바라보는 인간들도 많아서 영원히 손에 남는 것은 없다. 그래서 난 또다시 빈털털이로 되었지만 그냥 퇴직금을 타서 먹고 살기가 구차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먹을것이 싸고도 흔한 중국에서 산다는 것이 참말로 행복해서 눈물이 난다. 그리고 우리 중국에 먹을것이 이렇게 지천인줄 모르는 한국인들의 그 어처구니 없는 질문들이 생각날 때마다 오히려 그들이 불쌍한 생각이 든다. 이런 구경을 못해 봤으니까 자기들이 최고로 잘 사는줄 아는 것이지../훈이
    • 독자기고
    2012-09-12
  • 백청강 직장암 초기 진단
    MBC '위대한 탄생' 우승자인 가수 백청강(23)이 직장암 초기인 것으로 확인됐다.소속사 관계자는 "지난달 31일 직장 내 선종 제거 수술을 받은 백청강이 직장암 초기 진단을 받았다"며 "의료진은 적출한 선종의 일부에서 암세포를 발견했다고 전했다"고 밝혔다 .백청강은 몇개월 전부터 배에 이상 신호를 느껴 여러 곳의 병원에서 검사받은 결과 직장에 4㎝가량의 선종을 발견해 제거 수술을 받았다. 소속사 관계자는 "현재 백청강은 선종이 발견된 직장의 일부분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은 후 회복 중에 있다"며 "완치까지 회복하고 앞으로 건강에 유의하면 활동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조선족 출신인 백청강은 지난해 '위대한 탄생'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가수로 데뷔해 최근까지 미니음반 '올 나이트(All Night)'를 발표하는 등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했다
    • 연예·방송
    2012-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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