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년을 회억하여 ( 3 ) 할아버지편
저자: 리락용(1946~현재) 전주리씨43세, 의안대군파 21대손
2. ‘땅과 농사는 天下之大本’이다.
농사는 天下之大本이다. 할아버지는 밭이 일체를 결정하며 밭이 없으면 설 자리도 말할 자리도 없으며 밭이 있으면 근본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였고 또 한 평생 그 밭을 위하여 분투하시였다. 할아버지는 후세에 다시는 밭이 없는 치욕을 물려 주려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아름드리 나무를 베여 내고 그 자리에 그 재료로 집을 짓고 그 주위에 밭을 개간했는데 지금 보면 그 밭 면적은 한상(垧)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아래 마을 강변을 개간하여 수전을 만들었는데 그 면적도 반상(垧)은 되는 것 같다. 이로서 그때에도 의식주 문제는 기본상 해결된 것 같다. 그 후에도 할아버지는 계속하여 유동촌 밭에 백여메터 되는 수로를 파서 장풍동 하천과 봉암동 하천을 끌어들여 수전을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않고 봉암동 하천 량쪽 황무지를 계속 개간하였으며 땅 한 뙈기라도 사들여야 마음을 놓았다. 우리 집이 전부의 주요 재산은 밭과 농기구 였다. 할아버지는 돈을 모아 밭만 사들였다. 특히 일본이 망한 후 연변 조선 사람들중 돈과 땅이 있고 공산 혁명의 형세를 아는 사람들은 헐 값으로 밭을 팔고 조선에 갔다. 이리하여 밭 값이 눅어 지자 할아버지는 형세를 모르고 땅이 눅다고 많이 샀다.
그후에 광복을 맞아 외지에서 일하던 둘째 셋째 아들들이 집이 돌아와 장풍동 집에 식구가 많아지자 번동에 밭을 사고 집을 지었다. 그리고는 둘째 숙부에게 장풍동 집과 주위의 밭을 주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할아버지 토지 구매욕은 형세를 모르고 48년 토지개혁 이후에도 계속 되였다. 하여 가을이 되면 앞마당에 낟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졌다. 할아버지는 밭을 부치기 위해 자식들이 집을 떠나 직장을 찾는 것도 반가워 하지 않았다. 45년 8.15광복후 도문철로 기관차 부사수로 일하다 일본 놈이 감방에1년2개월 갇혀 있으면서 전념병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기적같 이 살아온 둘째 숙부와 도문철도 기무단에서 일하다 광복을 맞으며 잠시 돌아온 셋째 숙부에게 정부에서 복귀 통지서를 보냈지만 할아버지는 그들을 꽁꽁 묶어두고 보내지 않았다. 만약 그때 숙부들이 복귀했다면 오늘 같은 신세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셋째 숙부가 조선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토지개혁 이후까지 밭을 사들여 아버지가 안 계시는 우리 집에 밭이 너무 많아 할아버지 혼자서 부치기에는 아주 힘들었을 것이나 할아버지가 밭에 못 나가게 하여 할아버지가 일하던 기억은 없다. 다만 넓은 앞마당에 집채 보다 더 높은 벼 낟가리 조 낟가리 콩 낟가리가 줄지어 있었던 기억만 생생하다. 남들이 낟가리는 이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우리 집 앞마당은 아주 넓었는데 봄에는 오이 고추 가지 마늘등 채소를 심어 먹고 가을이면 탈곡장으로 사용했다.
인상 깊은 것은 벼 조 콩등의 탈곡이였다. 벼 탈곡은 어른둘이 발판을 밟아 고리가 달린 원통을 돌리면서 벼를 탈곡했는데 힘들어 할 때에 한사람이 두 사이에 끼여 들어 밟아주군 했다. 호기심이 많고 작난꾸러기인 나는 어른들이 말도 듣지 않고 어른들 사이에 끼여들어 발판을 밟기도 했는데 도움은 커녕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조 탈곡은 할아버지가 얇은 철판으로 만든 가리개를 사용하였으며 어머니와 삼촌들은 자작나무를 곱게 가공하여 만든 가리개를 사용 했다. 혹시나 어떤 때에 할머니도 참여했는데 앉아서 무딘 칼로 조 이삭을 자르곤 했다. 이렇게 잘라낸 조 이삭은 마당에 펴놓고 소가 군재를 돌리며 끌고 다녔다. 어른들이 마당 복판에서 소를 몰았는데 나도 끼여 들어 소를 몰기도 했다. 군재가 끝나면 도리깨로 낟알을 철저히 털어냈다.
이미 60이 넘으셨고 중병에 계신 할아버지는 이 모든 일을 주관하셨으며 손수 다 하였다. 사랑채에는 큰 뒤주가 세 개 있었는데 널판으로 만든 뒤주에는 벼와 조, 조짚으로 만든 뒤주에는 콩을 보관했다. 벼 뒤주는 너무 높아 나는 무서워 올라 가지도 못했다. 당시4-50년대에 장풍동 골안에서 입쌀밥을 먹는다는 것은 정말 희한한 대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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