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투데이]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차로 세 시간을 달리자, 평야지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구불구불한 두만강 물길을 따라 들어선 작은 도시, 용정(龍井). 이곳은 한때 “해외 독립운동의 심장”이라 불렸던 곳이다. 10월의 아침 공기는 차가웠지만, 거리는 고요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대성중학교 옛터였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이곳에서 독립의 뜻을 품고 펜을 들었다. 교정 한켠에는 윤동주 시인의 흉상이 서 있었다. 그의 시 「서시」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관광객들이 조용히 발길을 멈췄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의 시구가 나뭇잎에 스쳐 흔들렸다.
현지 안내인 박명숙(57)씨는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 같은 분들이 이곳에서 공부하며 조국의 미래를 꿈꿨습니다. 당시 용정은 단순한 마을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정신이 숨쉬던 성지였지요”라고 말했다.
용정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자 ‘해란강(海蘭江)’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백두산에서 발원해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물길이다.
그 강가에는 지금도 ‘삼일운동기념탑’이 서 있다. 비문에는 “백두산의 눈이 녹아 흐르는 물처럼, 조선의 독립정신은 멈추지 않는다”고 새겨져 있었다.
탑 앞에서 만난 조선족 청년 김성호(26)씨는 “솔직히 어릴 땐 이런 역사가 멀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서울 유학을 다녀온 뒤, 우리 마을이 한민족의 근원이란 걸 새삼 깨달았죠”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은 관광객들이 독립유적을 많이 찾아와, 우리가 잊지 않도록 만들어줍니다”라고 덧붙였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이 보였다. 그곳은 과거 간민회 본부 터였다. 항일 시절, 독립자금이 모이고 비밀 회의가 열리던 곳이다. 지금은 작은 역사기념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낡은 태극기와 퇴색한 사진 속 인물들은, 잊힌 이름이 아니라 현재를 지탱하는 얼굴처럼 다가왔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 조국의 외곽이 아니라, 독립의 최전선이었습니다.” 기념관 해설사 리정화(64)씨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 지역은 백두산의 정기와 함께 항일정신이 흐르는 곳이에요. 그래서 조선족들에겐 백두산이 단순한 산이 아니라, 조상의 혼이 깃든 산이지요.”
해가 기울 무렵, 기자는 다시 해란강 다리 위에 섰다. 저 멀리 백두산의 능선이 희미하게 보였다. 천지의 푸른 물, 장백폭포의 굉음, 지하삼림의 고요 — 그리고 이곳 용정의 새벽까지. 그 모든 풍경이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이어지고 있었다.
백두산은 여전히 동북아의 하늘 아래 웅연히 서 있다. 그러나 그 산이 품은 진짜 이야기는, 바로 이 평야의 마을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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