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둥을 넘길 수 없었다…열강의 압박 속에서도 국가 주권의 마지막 선을 지켜낸 중국 외교관의 선택
[인터내셔널포커스]1919년 6월 28일 오후, 프랑스 베르사유궁. 제1차 세계대전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하는 베르사유 조약 서명식이 열렸지만 승전국 중국 대표단의 자리는 끝내 비어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조약에 서명하지 않은 국가는 중국뿐이었다.
그 빈 의자는 단순한 불참이 아니었다. 국제정치의 압력 앞에서도 국가 주권의 마지막 선만큼은 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의 배경에는 고유균(顧維鈞)과 함께 중국 외교관 시조기(施肇基)의 역할이 있었다.
승전국 중국의 좌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중국은 승전국 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다. 중국은 독일이 산둥성에서 보유하던 철도와 항만, 광산 권익을 돌려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일본은 이미 칭다오와 교주만 일대를 점령한 상태였고, 이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전을 펼쳤다. 영국과 프랑스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협력이 필요했고, 미국 역시 이상보다 현실을 택했다. 결국 열강은 독일의 산둥 권익을 일본에 넘기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중국 대표단에는 충격적인 결정이었다. 전쟁 기간 약 14만 명의 중국인 노동자가 연합군을 지원했지만, 그 대가는 돌아오지 않았다. 파리강화회의는 국제정치에서 힘의 논리가 얼마나 냉혹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시조기의 선택
1877년 강소성 오강에서 태어난 시조기는 미국 코넬대에서 수학한 뒤 주영공사와 주미공사를 지낸 중국 외교계 원로였다. 그는 1909년 하얼빈에서 발생한 이토 히로부미 피살 사건을 수습하며 국제 분쟁에서 정보와 명분의 중요성을 체득했다.
파리강화회의에서도 그는 단순한 항의만으로는 결과를 바꿀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고유균이 공개 무대에서 중국의 입장을 대변했다면 시조기는 영국 정계와 외교 채널을 통해 물밑 설득에 나섰다. 무엇보다 산둥 문제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당시 중국 국내에서는 5·4운동이 확산되며 반일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반면 북양정부는 국제사회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명확한 지침을 내리지 못했다. 대표단은 국가적 명분과 외교적 현실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았다.
결국 중국 대표단은 서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는 감정적 항의가 아니라 전략적 판단이었다. 조약에 서명하는 순간 일본의 산둥 권익 승계는 국제법적 정당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었다.
빈 의자가 남긴 유산
중국의 거부는 당장의 승리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1921~1922년 워싱턴회의에서 산둥 문제가 다시 논의됐고, 일본은 결국 산둥 주권을 중국에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역사학계도 파리강화회의의 서명 거부가 이후 협상의 중요한 명분이 됐다고 평가한다.
파리강화회의는 흔히 중국 외교의 실패로 기록된다.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힘에서는 밀렸지만 명분만큼은 지켜냈다는 평가다. 실제로 산둥 문제를 둘러싼 분노는 5·4운동 확산의 계기가 됐고 중국 사회의 정치적 각성을 촉진했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국제정치는 여전히 힘과 국익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시조기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지켜야 할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9년 베르사유궁에 남겨진 빈 의자는 패배의 흔적이 아니라 원칙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시조기는 그 기록을 남긴 외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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