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 1927년 2월 중국 외교사는 하나의 상징적 장면을 기록했다. 영국이 장기간 유지해 온 한커우와 주장 조계지가 중국에 반환된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이어져 온 불평등 조약 체제 속에서 중국이 외세로부터 조계지를 되찾은 첫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당시 국민정부 외교부장 천유런(陈友仁)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그를 '철완 외교관'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의 출발점은 의외였다. 중국어도 능숙하지 못했던 해외 화교 출신 변호사가 어떻게 중국 근대 외교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을까.
해외 화교에서 혁명 외교가로
천유런은 중국 본토가 아닌 영국령 트리니다드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영국식 교육을 받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해 현지에서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신해혁명 소식을 접한 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중국으로 향했다. 당시 중국은 군벌 세력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열강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귀국 후 그는 언론 활동을 통해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 시도와 군벌 정권의 대외 정책을 비판했다.
이 과정에서 투옥되기도 했지만 영국 국적자의 특권에 기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중국인으로 규정하며 중국 법률의 적용을 받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행보는 훗날 쑨원(손문)의 눈에 띄게 되는 계기가 됐다.
쑨원을 만난 이후 천유런은 혁명 진영의 핵심 외교 참모로 성장했다. 국제법과 서구 정치 체계에 대한 이해는 그의 강점이었다. 그는 외교를 단순한 국가 간 협상이 아니라 중국의 주권을 회복하는 수단으로 인식했다.
영국 조계지를 되찾은 ‘철완 외교’
1926년 외교부장에 오른 천유런은 기존의 수세적 외교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
당시 중국은 조계지와 치외법권, 불평등조약이라는 구조적 제약에 묶여 있었다. 대부분의 외교관들은 현실을 인정한 채 협상에 임했지만 천유런은 정반대였다. 그는 중국이 더 이상 열강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결정적 장면은 1927년 우한에서 벌어졌다.
영국 수병이 중국인을 살해한 사건 이후 반영 시위가 격화되자 천유런은 강경 대응에 나섰다. 영국은 군함을 동원해 압박했지만 그는 민중운동과 국제 여론을 활용해 맞섰다. 협상 과정에서도 국제법 논리를 적극 활용하며 영국 측 주장을 반박했다.
결국 영국은 한커우와 주장 조계지 반환에 합의했다.
오늘날 중국 역사학계는 이 사건을 단순한 영토 반환 이상의 의미로 평가한다. 아편전쟁 이후 지속된 굴욕 외교에서 벗어나 주권 회복 외교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조계지 반환이 전적으로 천유런 개인의 힘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북벌의 진전, 민족주의 여론의 확산, 영국의 국제적 상황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를 외교적 성과로 연결한 인물 가운데 천유런이 핵심 역할을 했다는 평가에는 큰 이견이 없다.
정치적 몰락과 오늘의 평가
그러나 그의 정치적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27년 국민당 내부 갈등이 격화되면서 천유런은 장제스 세력과 대립했다. 그는 국공 협력 유지와 반제국주의 노선을 주장했지만 정치적 흐름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그는 해외로 떠나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1930년대에는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일본의 침략에도 맞섰다. 1941년 일본군에 체포된 뒤에는 친일 정권 참여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 이후 일본의 감시 속에서 생활하다 1944년 상하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천유런의 삶은 성공과 좌절이 교차한 여정이었다. 정치적으로는 패배한 순간이 많았고 시대의 주류에서 밀려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중국 외교사에서 그의 이름이 남은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서구 법률과 국제질서를 가장 잘 이해한 중국 외교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열강에 대한 순응이 아닌 주권 회복을 위해 사용하려 했다. 중국 학계가 그를 '혁명 외교의 상징'으로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어조차 능숙하지 못했던 해외 화교 출신 변호사가 근대 중국 외교사의 전환점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흥미로운 역사적 역설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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