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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외교인물 열전 ⑭] 진원쓰(金问泗), 전범 처벌의 원칙을 국제무대에 세운 외교관

  • 김준하 기자
  • 입력 2026.08.07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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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 외교관 진원쓰(金问泗)가 외교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을 재현한 AI 이미지. 그는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 제2차 세계대전 전범 처벌 논의 등 중국 근대 외교사의 주요 현장에서 활동했다. [AI 복구 이미지]

[인터내셔널포커스] 20세기 전반 중국 외교는 국력의 한계 속에서 국가의 권익을 국제사회에 인정받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었다.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 워싱턴회의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 전범 처벌 논의에 이르기까지 그 현장을 오랫동안 지킨 외교관 가운데 한 사람이 진원쓰(金问泗·1892~1968)다.


1892년 저장성 자싱에서 태어난 진원쓰는 푸단공학과 톈진 베이양대학에서 공부한 뒤 외교관의 길에 들어섰다. 1917년 미국 주재 중국공사관에서 근무하면서 컬럼비아대학에서 국제법과 외교학을 공부했다. 당시 중국 외교관으로서는 비교적 일찍 국제법과 근대 외교제도를 체계적으로 접한 인물이었다.


그의 외교 경력은 20세기 중국이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과정과 상당 부분 겹친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중국대표단 부비서로 참가했고, 이후 국제연맹 중국대표부와 1921년 워싱턴회의에서도 활동했다. 귀국 후 외교부 요직을 거쳐 1933년 주네덜란드 공사에 임명됐으며 1943년 대사로 승격됐다. 벨기에·체코슬로바키아·노르웨이 등 유럽 국가의 외교 업무도 맡았다.


진원쓰의 이름이 특히 주목받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국제적인 처벌 대상으로 다루도록 하는 과정에서다.


1942년 런던에서는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연합국의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유럽 각국이 나치 독일의 범죄를 국제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중국 역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행위도 같은 원칙에 따라 다뤄야 한다는 입장을 제기했다. 진원쓰는 중국 측 외교관으로 이 과정에 참여하며 일본의 침략과 전쟁범죄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


특히 중요한 쟁점은 일본의 중국 침략과 전쟁범죄를 어느 시점부터 추적할 것인가였다. 일부에서는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를 본격적인 중일전쟁의 시작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됐다. 그러나 중국 측은 일본의 침략이 1937년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1931년 9·18사변과 만주 점령에서 이미 본격화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진원쓰 역시 전쟁범죄의 책임 범위를 1937년 이후로 한정해서는 일본의 장기간에 걸친 침략 과정과 그에 따른 피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입장을 폈다. 중국 측은 9·18사변 이후의 군사행동과 점령정책을 이후 전쟁과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인 침략 과정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전쟁이 언제 시작됐는가’를 둘러싼 역사적 논쟁만은 아니었다. 기준 시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조사해야 할 행위와 책임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원쓰가 국제사회에서 1931년 이후의 침략 과정을 강조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후 연합국의 전범 조사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일본의 침략정책과 전쟁책임을 보다 장기간의 연속선에서 다뤘다. 도쿄재판의 기소 대상 기간은 결국 1928년부터 시작됐다. 이는 일본의 대외팽창과 침략정책을 1937년 이후에만 국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진원쓰의 외교 활동은 전범 문제에만 머물지 않았다. 중국과 네덜란드 사이의 새로운 조약 체결 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이를 통해 중국에서 네덜란드가 누리던 치외법권을 비롯한 불평등한 권리를 정리하는 데 참여했다. 근대 이후 중국 외교의 오랜 과제였던 불평등조약 체제를 청산하는 과정에서도 역할을 맡은 셈이다.


전후에는 국제경제 질서를 만드는 현장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중국 대표단을 이끌고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 형성과 관련된 국제회의에 참여했다. 그의 외교 경력이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에서 시작해 전범 처벌 논의와 전후 국제무역질서 구축으로 이어졌다는 점은 당시 중국 외교의 변화 자체를 보여준다.


진원쓰는 기록을 남긴 외교관이기도 했다. 《중국과 파리강화회의》, 《중국과 국제연맹》, 《파리강화회의에서 국제연맹까지》, 《외교업무의 회고》 등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여러 저술을 남겼다. 일기와 회고록 역시 20세기 전반 중국 외교가 국제질서와 국제법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1950년대 외교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이후 미국에서 생활하다 1968년 4월 21일 워싱턴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였다.


진원쓰의 외교 인생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전후 국제질서 구축까지 약 30년에 걸친 격동기를 관통했다. 그의 활동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강대국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국제법과 다자외교라는 제도를 활용해 중국의 주장을 국제사회의 의제로 만들려 했다는 점이다.


특히 일본의 침략과 전쟁범죄를 1937년 이후의 사건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그 이전부터 이어진 연속적인 과정으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은 피해의 역사와 책임의 범위를 국제법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외교가 결국 국가의 주장을 국제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와 규범으로 바꾸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진원쓰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외교관은 아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의 협상장에서 국제연맹을 거쳐 전범 처벌과 전후 무역질서 구축의 현장까지, 중국이 국제사회의 규칙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규칙 안에서 자신의 권익을 주장하는 과정에 꾸준히 참여했다.


그가 중국 외교사에 남긴 가장 뚜렷한 흔적은 강한 말 한마디가 아니라, 약한 국력의 한계를 국제법과 외교의 논리로 넘어보려 했다는 데 있다. 진원쓰의 생애는 근대 중국 외교가 ‘호소하는 외교’에서 국제규범을 활용해 권리와 책임을 주장하는 ‘제도 외교’로 이동해 가던 한 시대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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